[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5 - 기능자
19,11,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53페이지인데, 먼저 전도서 1장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여기에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라고 되어있는데, 바람은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죠. 조금 전에 장로님께서 회개에 대해서 질문을 하셨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장로님에게 질문을 하겠는데, "바람은 회개를 하는가?" 라는 겁니다.
* 존재인가? 기능인가?
장로님, 어떻습니까? 바람이 회개를 합니까? 바람은 회개라는 것이 없는데, 그런데 꽃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야, 네가 똑바로 자라지 않으면 내가 뽑아버릴 거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바람은 '기능' 이라고 할 수 있고, 꽃은 '존재' 라고, 혹은 사물, 물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전도서 1장 6절과 7절에 보면, 먼저 바람이 나오고 그 다음에 강물이 나오는데, 그러면 바람과 강물을 하나로 묶고, 그리고 꽃과 돌을 하나로 묶는다고 하면, 그러면 서로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바람과 강물은 멈춤이 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왜냐하면 기체이고 액체이니 말이죠. 반면에 꽃과 돌을 사물이니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은 여기서 어디에 속할까요? 참 사람이 아니고 성도의 경우에 어디에 속하느냐는 말이죠. 성도가 꽃처럼 존재에 속한다고 하면 회개를 촉구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성도가 기능에 속한다고 하면, 그러면 회개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여기에 꽃이 있고 돌이 있는데, 그러면 사람이 꽃을 보고 "올해는 보기에 별로야. 앞으로 예쁘지 피지 않으면 내가 뽑아버리겠어" 라고 협박질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죠. 말이 좀 이상한가요? 일단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도 꽃이나 돌처럼 하나의 존재라고 하면, 그런 인간을 보고 "야, 똑바로 살아.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있어"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 사람이 과연 회개할 수 있는가?
장로님의 질문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사람이 과연 회개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는데, 이게 그냥 던진 질문이 아니고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사람은 회개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늘에서 무엇이 내려옵니까? 불과 같이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죠.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회개란,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뀌는 것 !!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을 '회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바뀐다는 것이죠. 우리는 나쁜 사람에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즉 못생긴 꽃에서 예쁜 꽃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지저분한 돌에서 깨끗한 돌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이게 존재의 한계인데, 즉 인간이 존재로서, 사물로서, 물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여기까지라는 겁니다. 즉 나쁜 돌에서 좋은 돌로, 나쁜 해바라기에서 좋은 해바라기로, 나쁜 장미에서 좋은 장미로, 나쁜 코끼리에서 좋은 코끼리로, 나쁜 사자에서 좋은 사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어느 누구도 자기가 바람이고 강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악마가 있는데, 이 악마가 화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화살을 코끼리에게 쏘면 코끼리는 어떻게 됩니까? 코끼리는 아픈데, 그러면서 고통 가운데서 죽는다는 겁니다. 악마가 화살을 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만약에 악마가 바람을 보고 화살을 쏜다면 바람이 과연 아플까요? 아픈 것은 고사하고, 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누가 너희를 쏘더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강물을 보고 화살을 쏘면 강물이 "아야, 아프다" 라고 합니까?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성도는, 존재가 아닌 기능자 !!
그러니 기능인데, 존재인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기능인, 즉 기능자가 된다는 말이죠. 즉 기능으로만, 활동으로만 성도임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존재가 아니고 기능인데, 즉 '기능자'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도는 자기의 성도됨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인데, 즉 "나는 이제부터 성도다. 내일도 성도고, 모레도 성도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성령의 함께 하심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성령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도 예수님 주변에 둘러써서 천국을 만든다는 것이죠. 그러니 천국에서 예수님을 빼고 인간들끼리는 노는 경우는 없는데,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회개한 자들이 모인다고 해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천국은, 예수님이 유일한 존재로 !!
아무리 회개를 한 자들이라도 우리 인간들끼리 모여서 천국이 되는 법이 없는데, 그렇게 인간들끼리 모이는데 그 환경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해서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나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환경도 아니고, 예수님이 유일한 존재로 계시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만이 존재로 계시면, 그 예수님에게서 향기가 나오고, 새 하늘과 새 땅도 나오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도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의 핵심은 예수님인데, 그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 1장이라는 말이죠.
기존 교회에서 신천지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이 똑같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신천지는 '나' 라는 존재가 천국에 가는 것, 그것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주장이란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천독하고 만독한 결과가 그것인데, 즉 자기가 잘 되는 것이란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 1장 13절에서 16절을 보겠습니다.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서 새로운 능력들이 예수님에게서 계속해서 발산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누구를 돕겠습니까? 예수님을 돕겠습니까? 인간을 돕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돕는데, 천사는 이 세상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사들은 악마를 공격하는데, 그런데 그 악마는 인간들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겁니다.
* 인간세계는, 악마의 포로 수용소 !!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인간세계를 뭐라고 표현했는고 하니, '악마의 포로 수용소' 라고 했는데, 그러니 천사들이 와서 인간들이 유지하고 싶어하는 환경들을 모두 다 공격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인데, 요한계시록은 인간들이 인간이고 싶어하고 유지하려는 그 모든 환경을 일일이 깨어버리는 과정이란 말이죠.
그래서 첫째 천사가 나타나고, 둘째 천사가 나타나서 모두 다 하나 하나씩 깨부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도 성도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는데, 인간들이 손으로 만든 영광은 부셔져도 괜찮다는 것이죠. 아니 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 성령이 함께 한 스데반 집사님 !!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서 죽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스데반 집사님이 어떻게 후회를 했습니까? "내가 괜히 예수를 믿었다" 라고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그러면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그가 믿음이 좋다든지 회개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이 자기 일을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존재가 되기 때문인데, 그렇게 존재가 되면, 착한 존재, 바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뀌게 되면, 그것은 결코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닌데, 즉 "내가 성도를 가져야지"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성도' 라는 기능을 위해서 '나' 라는 존재는 날마다 삭제를 당하고 무시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 존재가 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계획이 나오고, 의도가 나오고, 또한 장래에 대한 걱정도 나온다는 겁니다.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계획과 의도가 나오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나쁜 쪽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김장을 한다고 하면, 그것을 맛이 없는 김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결과는 김치가 맛이 없을 수는 있지만, 그 의도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항상 자기 좋아라고 계획을 세우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악마에 이번에 김장을 잘 해야한다. 그러니 손대지 마라" 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계획으로 인해서 말이죠.
*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끝' !!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은 '나' 라는 존재를 '예수님' 이라는 존재로 바꾸기 때문에, 즉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나' 라는 존재의 자리를 다 차지하게 되면, 그런 '나'에게서는 예수님에게서 발산되는, 그것이 곧 성령인데, 즉 성령께서는 예수님만 바라보도록 유도하신다는 말이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인데, 즉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모두 끝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온 천지에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우리 인간은, 존재는 잊자. 이 세상이 더 좋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된 이상 이 세상은 파괴되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의 인사가 '마라나타', 즉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냥 오시는 게 아니라, 심판주로서 오신다는 겁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러니 주님이 오셔서 폭력을 행사하던, 불심판을 가하던 상관이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이미 존재에서 기능으로 나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로 인해서 더 이상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존재로서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즉 기능자로 예수님의 몸에 딱 붙어있다는 겁니다.
기능자, 달리 말하면 바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에 가수 김범룡이 이 기능자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르는데, 발음도 잘 되지를 않으면서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이라고 했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우리의 이름은 바람이고 강물이라는 겁니다.
* 액체 인생 !!
성격이 좋은 사람은 북한이든 알래스카든 그 어디를 가도 잘 사는데, 물론 미국에 가서도 잘 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영어를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영어를 못해도 붙임성이 좋아서 모든 일에 잘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곡률' 이라고 하는데, 즉 분위기에 꼭 들어붙어서 어디를 가도 잘 어울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 ※ 곡률(Curvature, 曲率) - 곡선 또는 곡면의 휨 정도를 나타내는 변화율이다. 곡선 위의 점 P가 곡선을 따라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일 때, 그 진행 방향은 이동한 거리(곡선의 호의 길이) s에 따라 변화하는데, 이때의 변화율을 곡선의 곡률이라고 한다. - 두산백과 -------------------------------------------
그런데 존재성, 즉 자아성이 강한 사람은 그것이 잘 되지 않는데, 어디를 가도 잘 어울리지를 못하고 말도 잘 하지 않는데, 교회에 와서도 역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아성이 강한 사람은 고체이고, 기능성이 강한 사람은 액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물의 경우에는 어떻게 생긴 그릇이든 간에 잘 담기는데, 왜 그렇습니까? 물은 액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만 얼어서 얼음이 되면, 즉 고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릇의 입구가 좁다든지 하면 잘 담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어울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했는데, 거기에 하나를 더 붙으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액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강도의 위협, 바다의 위협, 그 어떤 것도 자기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액체를 지나서 기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로마로 가는 길에 배 안에서 엄청난 폭풍이 불었는데,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시니 두려움이 없었다는 말이죠. 곡률이라는 것은 표면에서 굽어진 비율을 의미하는데, 그러면 표면이 어떻게 되든지 관계가 없이, 그 어디에도 작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자유하는 영'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액체나 기체에 가깝습니까? 고체에 가깝습니까? 고체에 가깝다는 말이죠. 아이들은 놀이터에 가서 평행봉이나 철봉을 잘 하는데,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가면 그냥 몸에서 우두둑 한다는 겁니다. 무슨 로봇도 아니면서, 그런 소리가 난다는 말이죠(ㅋㅋ).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러니 회개란 고체가 착한 고체가 되는 것이 아닌데, 해바라기가 좋은 해바라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전도서를 공부하고 했는데, '허무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지금 전도서 1장에서 바람을 끄집어내었고 강물을 끄집어내었는데, 강물이 바다를 채웁니까? 결코 채우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 다시 요약하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잠시 요약해보면,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은 빌립보서 4장 말씀처럼,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 임의로 거부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하니 돌이 날아왔는데, 그래서 "주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면 도망을 갔습니까? 그게 아니고, 그냥 돌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러니 그게 기능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길을 걸어가는데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사울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때 사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고 말이죠. 예수님은 이미 이 땅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왜 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느냐?"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존재이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기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능을 건드리는 것이 곧 예수님을 건드리라는 것이란 말이죠.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울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곧 성령을 받은 것인데, 그 이전에는 악마의 기능자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기능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바람이 되었고 강물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서에서 말하는 바람과 강물은 무엇인고 하니, 바람과 강물이 그냥 정처 없이 마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정해진 방향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미처 몰라도 바람도 분명히 부는 방향이 있고, 또한 강물은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에서 "누가 바람과 강물을 움직이게 했는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그렇게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인간은 이것을 모르는데,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겁니다. 사는 목적도 이유도 모르니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WITH, 함께, 더불어 !!
그러면 신약에 와서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것을 영어로 'WITH'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함께', '더불어' 라는 겁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 라는 것 자체가 'WITH' 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고 자기가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해버리면, 그것을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시죠? 그러니 내 손을 잡아주세요. 그런데 어젯밤에는 잡아주지 않은 것 같은데요?" 라고 하면서, 또 다시 걱정과 근심에 쌓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능에서 졸지에 존재가 되고 마는데, 아니 바람이 더 이상 불지 않고 멈추고, 또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기체가 고체가 되고 액체가 고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고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기능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나는 주님과 함께 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만약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걱정을 하면서 성경을 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얼마나 착해야 주님이 나와 손을 잡고 가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조건을 누구 쪽에서 내거는 것입니까? 존재 하나는 끝내주게 붙잡고 있는 악마가 또 제안을 하는데, "네가 이렇게 해야지 주님의 손을 잡고 갈 수 있다" 라고 말이죠. 악마는 그게 주특기라는 것이죠.
* 주님여, 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
오늘날 기존교회 목사들의 설교 주 내용이 바로 그것인데, "여러분, 이렇게 하셔야 주님이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떠나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을 잘 아시죠? 여러분이 회개를 하려면 이렇게 하셔야 하고, 천국에 가려면 이렇게 해야합니다" 라고, 그렇게 행함에 항상 강조점을 둔다는 겁니다.
그렇게 목사가 행위에 강조를 두고 설교를 하면, 또한 성령을 받지 않은 교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순종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신천지가 그렇게 커졌다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쪼그라들고, 신천지는 부흥하고 말이죠.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을 굳건히 하고 있는데, 악마가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악마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히 익숙하고 수용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악마의 포로들이니 말이죠.
* 역시 내가 중요해 !!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포기하면 안 돼. 예수님도 나의 시다바리야" 라는 것인데,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나를 천국에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삐칠 거야" 라고 하는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선교지에 보내도 자기가 골라잡아서 가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강도의 위협이나 도적의 위협에는 관심도 없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데, 자기가 알아서 선택하겠다는 말이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지, 그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선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임을 한 순간에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이야기해도, 별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참 좋겠네. 이렇게 영광스럽고 찬란해서 말이야. 그러면 나는?"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한계시록1장에서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라고 하면, 당연히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은 영광스러워서 참 좋겠네. 나는 이게 뭐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천국에 가려면 무엇을 하면 될까?" 라고 나오는데, 아니 왜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그것을 누가 가르쳤습니까? 악마가 그렇게 가르쳤다는 말이죠. 즉 "네 존재를 네가 포기하면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악마의 계략이라는 겁니다.
그게 여기 교재 153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 강물이 바다를 채웁니까?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강물은 바다가 없으면 강물일 수가 없어요. 바다로 가는 과정 자체를 자기 자신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
* 바다가 없으면 강물일 수가 없다 !!
여기에 "강물은 바다가 없으면 강물일 수가 없다" 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다는 것이죠. 강물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간다고 하는, 바로 그 과정자체가 강물이 보여줄 수 있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는 여기에 있다" 라는 게 아니라, "나는 어디로 끌려가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으로서의 의미, 그게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데, 모든 것이 주께로 나와서 주로부터 말미암아서 주께로 돌아가는, 그렇게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자기가 하나의 강물처럼 보인다고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 즉 "누가 너로 하여금 천국에 가게 하더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답변은 어떻게 될까요?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내가 노력해서 간다. 2번, 주께서 하신다" 라고 하면, 여기서 몇 번입니까? "2번, 주께서 하신다" 라고 하는 복음전파가 탁 튀어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기본자세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증거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하게 하셨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다" 라는 겁니다. 그게 기능자의 역할인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나는 기능자일 뿐 !!
사도바울이 자기는 어려움에 쌓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나를 보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기능자일 뿐인데, 그것도 자기 기능이 아니고 주님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권사님이 오늘 아침에도 밥을 했을 텐데, 성령을 받기 전에는 남편을 위해서 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곧 복음전파란 겁니다. 자기 가정이 있으면, 그 전체가 기능자인데, 존재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결코 나쁜 가정에서 좋은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닌데, 움직임 자체가 "좋다, 나쁘다" 라는 평가자체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 강물이 바다를 채웁니까?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강물은 바다가 없으면 강물일 수가 없어요. 바다로 가는 과정 자체를 자기 자신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꾀를 내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어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악마의 제안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
* 선악과를 따먹은 존재, 그것이 곧 인간 !!
왜 악마가 아담과 하와를 보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을 했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인간의 시작은 어디였는고 하니, "따먹지 말라" 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선악과 앞에 섰는데, 왜냐하면 그게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 인간의 출발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악마가 그만 그 출발점을 없애버렸다는 말이죠. 그것을 없애고 새로 시작하도록 만들었는데, 즉 "선악과를 따먹은 존재, 그것이 곧 인간이다" 라고, 그렇게 여기고 시작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가 교묘하게 시작점을 그만 옮기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그것을 '지식' 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즉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 엄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게 !!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언제부터 섭섭하게 되는고 하니, 5살이 되면 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엄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게"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에는 그 시작점이 엄마였는데, 그런데 이제는 자의식이 발달하면서, 혹은 존재성이 발달하면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엄마로부터의 시작점을 가위로 끊어버리고, 사춘기가 시작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 발판과 그라운드는 내가 마련해서, 거기서부터 나를 새로 시작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왜 그런 자신감이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가 인터넷을 찾아봐서 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안다는 지식인데, 그 다음부터 그 아이는 지식과 지식이 불꽃을 튀기게 되는 대결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사회인데, 그래서 사회는 "네가 어느 정도 아는가?" 라는 것을 묻는데,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겁니다. 많이 알면 부모도 흐뭇한데, "저놈은 이제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겠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많이 알지 못하면, "저놈이 다시 자기 부모의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 우리는 세상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
그러니 이 세상의 출발점은 악마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러니 악마의 의도가 우리에게 낯설지가 않는데, 오히려 마음에 와서 닿는다는 말이죠. 즉 악마가 "언제부터 하나님에게 빌붙어서 살래? 독립해라. 너도 많이 알잖아? 그렇게 아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게 곧 인생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데, 우리 깊숙이 들어있는 본심을 꼭 집어서 그대로 터트린다는 말이죠. 가난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부자들이 자기들에게 좀 나누어주면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도 살아갈 수 있다" 라고 여기는데,
물론 여기서 나누어준다는 것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대기업에 취직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대기업이 벌려온 사업체에 빌붙어서, 물론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하청업체에라도 취직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하청업체 사장은 매일같이 뭐라고 합니까?
"삼성이 아니면 우리는 굶어죽는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결코 틀린 말이 아닌데, 대기업에서 하청을 주지 않으면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설비를 놀리게 되고, 그러면 은행에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장이 날아오고, 그러면 회사는 곧 망하고 만다는 겁니다.
중국집이 잘 되어서 밀가루 공장이 돌아가고, 또한 피자집이 잘 되어야 피자 박스를 만드는 공장이 잘 돌아가는데, 그래야 직원들 월급을 제때에 줄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돈까스 집도 운영이 된다는 겁니다. 그 공장이 망하게 되면 돈까스 집도 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한 통속이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악마의 포로 수용소라고 했는데, 전부가 얽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잘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사업수단이 뛰어난, 이 세상을 많이 아는, 즉 지식이 많아야 돈이 되는 것이지, 우리 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렇게 해도 돈이 될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그냥 땅을 파면 단돈 100원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인간의 집단, 즉 대기업으로부터 출발해야 밥이라도 먹고 산다고 하는 것인데, 그게 논리를 따질 이유도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당연지사, 그것을 누가 심어주었다는 겁니까? 악마가 그 칩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의 존재는 지식과 힘에 달렸다. 여기에 이의가 있나? 없지? 그러면 계속해서 그대로 가라" 라고, 그게 평생을 살아온 우리의 모양새이고, 그것은 악마에게 강요를 받았던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울고불고 했다는 겁니다.
* '창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라 !!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인간을 꾀를 내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어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악마의 제안은"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죠.
악마가 무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라고 합니까? '창조의 자리'를 박차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창조를 잊어라" 라는 겁니다. 그것이 악마의 주장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알아서 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창조가 아니고 개선이고 개발이고 진화라는 겁니다. 발달이고 발전인데, 기존의 이미 있는 것을 그렇게 해나가자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는 창조는 이미 된 것이니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인데, 반면에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창조할 때 창조의 원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즉 악마의 생각인데, 그것은 창조의 원리고 뭐고 간에 이미 있는 것을 알아서 하겠다는 말이죠. 그게 악마의 외침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속이 터지는데,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25절을 보겠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 이게 사단에게 하는 말인데, 사단은 사단의 일이 아니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 생명은 창조원리에 안에 !!
그러니 사단은 사람의 편에 서서 사람의 일을 하는데, 그게 사단이라는 말이죠. 사단은 인간의 최고 친구인데, 그게 악마라는 겁니다. 그 사단이 만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는 목적을 온 천하를 얻는 것에 있다고 보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온 천하를 얻겠다고 하는 것, 그 방향에는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그것은 생명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생명은 온 천하가 아니라 창조원리에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란 말이죠. 인간들이 애써 무시하려는 창조원리, 바로 그 창조원리 안에 인간이 잃어버렸던 생명나무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 발전, 또 발전 !!
그런데 악마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 "이와 만들어진 것이니, 발전시켜서 키우자. 그렇게 해서 나쁜 것은 좋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총동원시키자"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그냥 넘어가 준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저는 이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가 못해 찢어지는데, 왜냐하면 기존교회가 어떻다는 겁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면 정작 주님의 창조의 원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이 교회를 어떻게 키울까? 발달시킬까? 개선시킬까?" 라고 하는,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 교회는 없어져야 !!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는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데, 왜냐하면 교회가 그만 존재가 되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존재는 없어져야 기능이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가 기능이 됩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존재가 기능이 될 때는,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고, 여기서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뀌고, 그러면 그게 회개가 된다는 말이죠. 나쁜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닌데, 그런 "나쁜 내가 좋은 내가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은 악마의 술책과 같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지금은 없는데, 그게 당연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교회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라고 있다는 겁니다.
* 목사님, 교회가 없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또 "목사님, 교회가 없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교회가 없어도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중요한 것은, 주님의 활동성 !!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를 하십니까? 교회가 없어도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중요한 것은 주님의 활동성인데, 주님의 살아계심만 있다면 가뿐히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 주님의 활동성,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주님의 몸, 즉 교회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동안 악마가 만든 교회가 주님의 몸인 진짜 교회를 가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교회가 없이 구원이 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여기에서 꾀가 마구 나오는데, "목사님, 그러면 교회에 나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지요? 오후예배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지요? 같이 김장을 담그지 않아도 되지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어느 교회를 자기가 가고 말고, 그렇게 결정할 자격 자체가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가도록 해주신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감사할 것을 가지고, 자기 몸 하나 편한 쪽으로 가버리면, 그리고 기름값도 절약하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복음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꾀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구원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말라" 라고 하면서 꾀를 부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복음을 믿는다"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게 무엇이 잘못입니까? '나' 라는 존재가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만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절대로 교회에 가면 안 돼. 가서 김장을 담그면 안 돼" 라고 하시면, 그러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나쁜 '나'에게 좋은 '나'가 되려는 '나' 라는 존재가 하게 되면, 그것은 기능자가 아니라 존재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기능자 !!
여기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재산을 팔아서 절반을 헌금으로 바쳤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에 절반은 고사하고 헌금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살았는데,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만 죽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헌금을 다 하기로 해놓고 절반만 해서 그렇습니까? 여기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기능자인데, 그것이 무슨 기능인고 하니, 인간은 헌금을 하기 이전부터 이미 죽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주님이 하게 하셨다는 말이죠.
* 홍해의 기억을 잊어라 !!
이왕 기능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홍해가 이렇게 있고, 그러면 이쪽은 애굽이고 여기는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온 자들 중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빼놓고 말이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까요? 왜 40년 동안 광야에서 다 죽게 만들었냐는 겁니다. 그것은 홍해 사건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인데, 홍해의 기억을 말이죠. 홍해의 기억을 없앤다는 것은, "과거에 건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는 홍해사건의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지가 2,000년이 지났는데,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지금이라는 말이죠. 바로 지금 이 시간, 십자가 사건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온 자들은 다 죽고, 비록 홍해를 건너지는 않았지만 그 후대의 사람들에 주어지는 모든 취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 기적이 담긴 채로, 그들에게 만나가 주어진다는 것이죠.
* 계속해서 누적되는 홍수사건 !!
제가 미리 좀 어렵다고 했는데, 역시 어렵지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를 더 해보겠는데, 노아 때 모든 인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 속에 잠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온 세상이 물 속에 잠기는 일이 또 다시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는데, 그런데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있고 무지개가 떤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은 왜 주어지고, 무지개는 왜 떴습니까? 그리고 햇빛과 공기는 왜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홍수사건이 과거사건으로 없어져도, 그 홍수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계속해서 누적되면서 주어지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이 우리가 요청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계절과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우리가 착해서 주시는 게 아니라, 노아홍수 때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 그것을 '노아언약' 이라고 하는데, 즉 "너희들은 지금 노아언약에 준해서 심판을 받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물 속에 잠길 수밖에 없는 자아인 것을, 그런 존재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진작에 햇빛도 공기도 다 끊어지고 물 속에 잠길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 그렇게 우리는 죽어도 당연하다는 것을 인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그리고 사계절이 있습니까? 그것은 노아언약에 의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5장을 보겠는데, 45절입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여기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도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아니고 분명 악인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답을 내릴 수 있습니까? 악인이면 죽이면 되는데, 그런데 왜 햇빛과 공기를 주시며 살려두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은 인간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여기 교재 153페이지에 나오는 '창조의 자리' 라는 겁니다. 그 창조의 원리를 노아언약을 통해서 조금 보여주고, 모세언약을 통해서 조금 보여주고, 다윗언약을 통해서 조금 보여주고,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새언약,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주되심을 위해서, 그래서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악한 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속해서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미 노아언약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노아언약은 계속해서 그 원칙이 살아있다는 말이죠.
* 노아언약의 혜택으로 !!
다시 말해서, 주님의 존재에서 나온 기능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게 인간에서 성도가 된 자들과 결합되어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래서 성도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고, 또한 강물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자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햇빛과 공기를 받은 것, 그것은 자기 공로가 아닌 노아의 약속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서 지금도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만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겁니까? 물론 다른 인간도 받고 있는데, 악인도 혜택을 받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로마서 1장을 보겠는데, 21절에서 25절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내어버려두사 !!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하나님을 섬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데, 그래서 여기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라고 하는데, 즉 '내어버려두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헤는 은혜대로 주시는데, 즉 살리기는 살리시지만 더러움 가운데 방치를 해놓는다는 겁니다.
옛날 60년대에 대구에 아파트는 없고 대부분이 주택가였다는 말이죠. 그때 동인동이 좀 유명했는데, 새 집들을 지어서 반듯하게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이 노는데, 저녁이 되면 좀 산다는 사람들은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서 각자 자기 집으로 가는데, 그러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만 '내어버려두사'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 인간은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주실 은혜는 다 주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진작에 그 결과로 우리를 다 죽여도 당연한데,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자기 백성을 따로 뽑아 가신다는 겁니다. 그런 권한은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주님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이왕 태어났으니 밥이나 먹고 살자" 라는 것인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물 속에 들어가야 당연한 천하의 죄인들이라는 말이죠. 그런 인간들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님이 된다는 것은 심판주도 되지만 구원주도 된다는 것인데, 그 구원자가 자기의 흘린 피로 말미암아서, 그 피를 용서하는 피로 바꾼다는 말이죠. 죄인임에 분명한데, 그런데 죄가 없다는 것으로 바꾸기로, 그렇게 창세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약속을 하셨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죄인인데, 그런데 대신 아들 이삭을 바침으로서 아들의 그 피로 아버지를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아브라함 언약인데, 그 언약 안에는 "심판을 전제로 해서 구원될 자를 찾을 때, 원래 있었던 창조의 원리를 적용한다" 는 것인데, 그게 언약의 원칙이라는 겁니다.
* 창조의 원리는 예수님만 !!
우리 인간은 이 창조의 원리를 모르는데, 아시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창조의 원리를 적용시키게 되고,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받아놓고도 모르는데,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너희들은 이런 혜택을 받았다" 라고 우리 인간에게 통보를 해주게 되면, 인간은 "아하, 나에게 없는 창조의 원리가 내 속에 심어져 있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무엇이 원칙이 아니었지? 아하, 출발점을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으로 옮겨야 하는구나" 라고 하게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은 지점부터 인간이다. 그러면 스스로 설 수 있는 단독자가 된다" 라고, 그렇게 출발점을 옮김으로서, 그때부터 인간들은 그게 인간이라고 여기게 되었는데, 악마가 그렇게 세뇌를 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런 악마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세뇌를 받은 것이 악마로부터만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이 '내어버려둠'에 대해서 악마 쪽에서 따지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그럴 수 없습니다. 전혀 공평하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해놓고 왜 사랑을 주지 않습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내 딸은 왜 아닙니까?" 라고, 그렇게 마구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죠.
* 동일한 빗소리 !!
어제 밤에 여기에 비가 좀 왔는데, 그런데 그 빗소리와 사극에 나오는 빗소리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빗소리가 다를 리가 없는데, 이탈리아에 내리는 빗소리도 역시 같다는 겁니다. 조선시대의 개와 지금의 개가 다르지 않는데, 물론 요즘 개는 옷도 입히고 해서 달라 보일 수도 있지만, 같다는 말이죠.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인간은 고요한데,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에게 왜 자꾸만 일을 벌려지는고 하니, 그 고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벌리는데, 즉 "일이 벌어져도 고요하지? 그러니 똑같은 거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홍수로 인해서 물 속에 있는데, 그 속에서 개선이고 발달이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나쁜 나'가 '좋은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베드로가 구원을 받은 것이 회개를 해서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피인데, 그러니 성령에 의해서 기능인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은 바람과 같이 왔는데, 마태복음 3장에서는 불과 같이 왔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불과 같이 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요한일서에 보면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이라는 것이죠. 물과 피와 성령, 그 세 가지는 예수님에게서 같이 나온다는 겁니다. 기능으로서 말이죠.
* 다른 시작점 !!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원리가 담긴 행동인가? 그렇지 않은 행동인가?" 라는 것을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창조의 원리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다른 시작점'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시작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아까 'WITH' 라고 했는데, 그 뜻이 '함께', '더불어'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나는 주님과 함께 있다" 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내가 곧 위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위드가 되려고 하면 그 옆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그게 바로 'LORD' 라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교회의 성도가 무엇인고 하니, 로드 옆에 있는 같은 위드가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오직 주님만이 존재가 되고 자기 그 옆에 붙어있는 기능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성도를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음, 즉 위드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 위드끼리의 만남 !!
그게 성도와 성도의 만남인데, 그러니 자꾸 교회를 찾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가정인데,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대화 속에서, 그런데 거기서 존재가 나오면 안 되고, 왜냐하면 존재는 항상 자기가 최종적이기 때문에 타인과 생각이 같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결국에는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을 "존재가 나를 특화한다" 라고 하는데, 일종의 특권의식인데, 그러니 아무리 아내고 자식이라고 해도, 남은 결국 자기 존재를 증명해줄 기능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아이가 엄마를 보고 "엄마,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노?"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집을 간 딸은 친정에 올 때마다 "엄마는 내가 시집을 갈 때 해준 것이 없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외손주를 둘이나 키워주고 해도 큰 소리를 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너를 키울 때 비용이 5억이나 들었다" 라고 하면, 딸은 "그것은 엄마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야. 그게 아까울 것 같으면 낳기는 왜 낳았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원천을 이야기하고 유에서 무를 이야기해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중심은 항상 자기 존재위주라는 겁니다.
부부싸움의 원인은 결국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노?" 라는 것인데, 인간은 그렇게 존재는 자기를 특화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우뚝 솟게 되면 나머지는 자연히 자기보다 낮아지게 된다는 겁니다. 즉 "우뚝 솟은 나를 위해서 너는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너에게 강요한다" 라는 것이죠.
* 위드에게서는 감사만이 !!
주님이 계시면 위드가 되는데, 그렇게 위드가 되면 존재가 아닌 기능이 된다는 겁니다. 주님에게 위드가 되려면 주님에게 받은 것이 있는데, 여기서 또 노아언약을 설명할까요? 우리는 죽어도 당연한데, 하나님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면서 키워주셨다는 것이죠. 기능자로서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감사가 나오는데, 그리고 옆에 있는 위드에게서도 역시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위드끼리 그 감사를 가지고 서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서로가 받은 감사의 내용을 주고받고 하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게 성도의 교제가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보, 한국야구가 어떻게 되었노?" 라고 물으면, 거기에 주님에 대한 감사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성도라면 말이죠. 그래서 "일본에게 5대 3으로 졌다" 라고 하면, 거기에도 역시 감사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웃으면서 "참 잘 졌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온 노래가 있는데, 하춘화가 불렀던 '잘했군, 잘했어' 라고 말이죠. 물론 거기 후렴부분은 좀 문제가 있는데, "내 영감이지" 라고 해서 자기가 그만 특화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고 "주님의 영감이지" 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죠(ㅋㅋ).
----------------------------------------- [ 잘했군, 잘했어 ] 하춘화
영감 (왜불러) 뒷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
그런데 여기서 성령을 받지 않아서 주님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감사할 경우와 감사하지 않을 경우를 누가 정합니까? 자기는 자기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정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나' 라는 존재가 일방적으로 정하는데, 자기를 빛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면 기능이 되어야할 것이 갑자기 존재가 되고 말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특화가 되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남을 무시하고 깔보게 되는데, 즉 "나는 이 정도야" 라고 하면서 자기 변명조로 나간다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이 정도로 했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당연히 감사해야해" 라고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는 무엇이 빠지고 없습니까? 로드, 즉 '주'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에베소서 6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9절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엡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엡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항상 주(主) 안에서 !!
여기 1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라고 하는데, 자녀들에게 순종을 하되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주 안에서' 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부모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라고 하는데, 부모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고, 주 안에서 양육하라는 겁니다.
또한 5절에서 종들을 보고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라고 하고, 9절에서는 주인들을 보고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주 안에서' 라는 것이 공통적으로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 성도는 경계선 !!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즉 "우리는 주님을 중심으로 한 위드의 관계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함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함께' 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천국과 지옥으로 가름하는 경계선으로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주님에게서 성도라는 바람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주님 자체가 최초의 성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나온 바람으로서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성도를 존재라고 여기면 도저히 이 바람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도는 주님의 소유이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존재가 성도가 될 때는 그 중간에 십자가가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인인데 용서를 받아서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가 된 자는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는 지킨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지켜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해서 살게 하시는데, 그러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키지 못하는 존재로서, 그런 몸을 가지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것을 확인시켜주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살아계서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우리는 도저히 성도가 될 수 없는 자들인데, 주님께서 성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이죠. 존재에서 기능으로, 즉 주님의 위드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존재에서 위드가 되면 십자가가 등장하는데, 이 위드를 다른 말로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혹은 분리선인데, 면적을 가지는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線)'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가만히 있어도 전도가 되는데, 왜냐하면 경계선 자체로 나누어진다는 것이죠. 마치 휴전선으로 인해서 남과 북이 갈라지듯이 말이죠. 성령을 받은 자는, 그로 인해서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가 분리가 된다는 겁니다.
* 성도는, 이 세상이 낯설어야 !!
이상규 집사님과 같이 '캠프워크' 라는 곳에 가보았는데, 비록 대구에 있지만 그 시스템이 미국과 동일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거기에 있음으로서, 저와 말이 통하는 사람은 민간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미군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군복을 입고 있고, 저는 일반복장을 하고 있으니 자연적으로 구분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뷔페식으로 된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조금은 미안했는데, 왜냐하면 군인들을 위한 시설에 괜히 민간인이 끼어들어서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종종 가게 되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이 동네와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동네는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는 그냥 남겨두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남겨두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7장을 보겠는데, 16절과 17절입니다.
(요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양병원에 누워서도 !!
여기 16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데, 즉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요양병원에 누워서라도 떠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같이 요양병원에 누워있어도, 저쪽은 "내가 젊었을 때는 이렇게 않았는데" 라고 하면서 신세한탄을 하는데, 하지만 자기는 무엇입니까? 젊어서나 늙어서나 건강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동일한데, 즉 주님이 병이 들게 해서 병이 들었고, 눕게 해서 누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우리는 액체로서 표면의 곡률에 딱 들어붙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미국이든 북한이든, 병원이든 요양원이든 상관없이, 그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자로서,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기능인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창조의 원리가 항상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주시고, 또한 그 원리가 항상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1,28 오후 4시에 마침.
주님의 껍데기가 되게 하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