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도울이 말하는 예수

아빠와 함께 2020. 1. 1. 20:14
2020-01-01 14:36:25조회 : 48         
도올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도올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2019,12,25 '다스 뵈이다 93회'에서

*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화, 왜?

오늘이 성탄절인데, 성탄절은 예수가 태어난 생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는 예루살렘 근처의 베들레헴이라는 곳의 마굿간에서 태어났는데, 그런데 예수는 원래 부모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이죠. 아버지가 나사렛에서 목수를 했는데, 그러면 왜 하필이면 베들레헴에서 낳았느냐는 겁니다. 그것도 마굿간에서 말이죠.

그렇게 급하게 낳았다고 하면 만삭에 되어서 거기까지 걸어갔다는 것인데,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여기 서울에서 익산 정도가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제가 그 길을 가보았는데, 물론 그렇게 걸어간 것은 아니고 말이죠. 길이 참 좋지 않은데, 광야이고 돌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그렇게 갈 이유가 없는데, 제가 보기에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죠. 그게 4복음서 가운데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는 겁니다. 오리지널 복음서라고 할 수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곧 바로 예수의 공생애로 출발하는데, 그러니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구태여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화를 첨가했을까요? 만삭이 되어서 그 먼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예수는 구원자, 즉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희랍어로 옮기면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것을 풀이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것인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유대민족들의 경우에 기원이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의 12형제 중에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게 되고, 나중에서는 그 형제들이 다 애굽에서 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강탈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바알신을 섬기던 원주민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농사를 짓던 농경문화의 사람들인데, 반면에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애굽까지 돌아다니던 유목민들이라는 말이죠.

* 위험천만한 유일신 신앙 !!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외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나 외에도 다른 신이 있는데, 그들은 형편이 없는 놈들이니 그들은 믿지 말고, 나만 섬겨라"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이 유일신을 섬기는 유일신앙이 가장 위험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이 믿는 신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다 배척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신약에서 예수가 한 이야기와 동일하게 보는 목사들이 많은데, 그것이 참 어리석은 해석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것은, "오직 너희 동포들만을 사랑하라" 라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민족들은 다 죽여도 된다는 것인데, 다른 신을 믿는 놈들은 말이죠. 그러니 구약의 역사는 끊임없는 살육과 배타와 증오의 역사라는 겁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사사시대 !!

유대민족은 광야의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통일 집권적인 국가라는 개념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에서 보면 로컬 히어로들, 즉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군대적이고 정치적인 리더이기도 하고, 종교적인 리더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들은 주로 팔레스타인과 싸우는 자들인데,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삼손이라는 말이죠.

그런 사사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그 권력이 아주 미약한데, 그래서 사사가 죽으면 또 흩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통일정부가 없으니, 그래서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 라고 하는 요구가 300년이 지나면서 생겨난다는 말이죠. 그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도 통일중앙정부가 필요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사사의 정치이고 예언의 정치였는데, 그런데 사사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의 시대에 와서 국민들이 그에게 왕을 달라고 간청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서 만든, 즉 하나님의 권능으로 "너는 왕이다" 라고 해서 만든 첫 왕이 바로 사울이라는 겁니다.

이 사울은 고집이 세고 판단에 에러가 많은 인물이었는데, 그런데 당시 팔레스타인 세력은 그 세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있던 어느 목동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름을 붓고 사울에게 데리고 가서 잘 봐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 다윗의 등장 !!

그런데 그때 팔레스타인이 쳐들어오는데, 성경에서는 블레셋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거인 골리앗을 앞세워서 온다는 말이죠. 그러자 사울은 무서워서 뒤로 꽁무니를 내빼면서 어린 다윗에게 싸워보라고 하는데,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우고 자기 칼까지 준다는 겁니다.

그러자 다윗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다 벗어버리는데, 그러면서 "제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홀가분한 목동의 차림으로 나간다는 말이죠. 그때 돌을 5개인가 주워서 돌팔매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골리앗이 보기에는 이게 우습지도 않다는 말이죠. 하지만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노라" 라고 하면서 돌팔매를 날리는데, 그러자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확하게 때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골리앗이 쓰러지니 다윗이 달려가서 골리앗을 칼을 빼서 그의 목을 잘랐다는 겁니다.

(삼상 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 17: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 17: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삼상 17: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그렇게 되니 전쟁의 승부는 여기서 결정이 나고 말았는데, 다윗이 이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에 의해서 최초로 확고한 통일왕조가 성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그 이전에는 이름도 없었는데, 다윗에 의해서 중앙정부가 만들어지면서 그 수도가 예루살렘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성전을 짓게 되는데, 모든 준비는 다윗이 다 하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짓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 죽자 유대민족은 다시 분열이 되는데, 북쪽 이스라엘 왕조와 남쪽인 유대 왕조로 말이죠. 그렇게 가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그 다음으로 페르시아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예수시대까지 오게 된다는 겁니다.

* 메시야 대망 !!

그러니 예수시대는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그래서 민중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대망론이 아주 깊어진다는 말이죠. 즉 "메시야는 반드시 다윗의 후손이어야만 하고, 그리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라는, 그런 깊은 믿음이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이미 깔려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야말로 다윗의 정통후손이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는 분명 다윗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상하기는 이상한데, 마리아가 동정녀이니 핏줄이 이어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죠.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여기에 대해서 "그 당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 전역에 호구조사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래서 요셉과 그 가족은 원적지로 가야만 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살펴본 바로는, 한 번도 로마제국에서는 전 지역에 그런 전체 호구조사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지방총독이 호구조사를 실시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현 주소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성탄절을 지키고 한다는 말이죠.

중동지역의 성인들은 대부분이 동지를 전후해서 태어나는데, 그러니 생일이 모두들 그때라는 겁니다. 이런 것은 다 양식적인 기술인데 말이죠. 이러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 예수는 과연 유대인인가?

예수는 자신의 입으로 "나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것도 여러 번을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유대인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옛날 가야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당신이 한국사람이 맞아?" 라고 묻는 것과도 비슷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공자를 보고 "당신은 중국사람인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중국이 없었다는 것이죠.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라는 제후국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그러니 공자는 중국이 아니라 노나라의 아이덴테만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의 경우에도 이스라엘이란 개념이 없는데, 또한 국민이라는 개념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는 어디 사람인고 하니, 갈릴리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를 보면 3단위로 나눌 수가 있는데, 제일 위가 갈릴리이고, 중간이 사마리아이고, 제일 아래가 유대광야라는 말이죠.

그러니 유대민족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중심주의가 있어야 하는데, 즉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혈통적으로 보면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4째가 유다인데, 그 후손들이 그 지역이 많이 살았고,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이죠.

* 예루살렘과 갈릴리 !!

그러니까 위쪽인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의 아이덴티티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갈리리는 시리아로 해서 인도문명권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갈릴리 지역에는 진보적이고 개방된 도시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테베리아스, 세포리스 등이 말이죠.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예루살렘은 깡촌인데, 왜냐하면 그 주변이 대부분 사막이었기 때문에 소출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갈릴리는 바다라고 불릴 정도의 호수가 있고 하기 때문에 풍요롭다는 말이죠. 그 주변에는 엄청난 농경문화가 가능했다는 겁니다.

* 예루살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예수 !!

오히려 예루살렘의 놈들은 성전의 권위를 가지고 갈릴리 사람들을 착취했는데, 그래서 예수는 그런 예루살렘의 권위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의 삶이란 것이 예루살렘에 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어버리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예수는 "너희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나는 다윗의 주인이지 후손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여러분이 감을 잡기가 좀 힘들지 싶은데,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이라는 겁니다. 즉 갈릴리 민중과 더불어 산 사람이라는 말이죠.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도 지역이 풍요로운데, 그러니 거기서 판소리도 나오고 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남도가락이란 것이 경기가락과는 달리 계면조의 슬픈 맛이 있는데, 왜냐하면 풍요로운 만큼 착취를 당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춘향전이 경상도에는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갈릴리는 착취를 당하고 농민들이 땅을 가지지도 못했는데, 당시 로마의 권력과 결탁한 자들이 민중들에게 그렇게 압박을 가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민중을 향해서 외친 자가 있었는데, 그가 갈릴리 출신의 예수라는 청년이었다는 말이죠.

구약의 십계명을 보면, 처음에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라" 라고 했고,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10개 중에서 4개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란 말이죠.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오는 계명들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대단히 특별한 계명이냐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인데, 그런데 그게 유대인의 핵심적인 율법이 되었다는 말이죠.

오늘날 한국교회가 얼마나 야비한고 하니, 신약이 아니고 구약의 종교라는 겁니다. 구약은 말 그래도 오래된 계약인데, 즉 십계명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신약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예수는 "구약을 바꾸자" 라고, 즉 "나의 구약의 그런 질투와 증오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하나님이고, 이방인을 다 포함하는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 근원적인 휴머니스트, 예수 !!

그러니 이것은 근원적인 휴머니스트의 외침인데, 예수가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계약서를 새롭게 쓰게 되는데, 새롭게 쓰면서 구약을 그대로 두고 믿어야 합니까?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당연히 파기되어야 하는데, 즉 구약을 없애야 신약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신약만큼 구약을 보는데, 그것은 학문적인 가치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전공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참고서적인데, 하지만 그 구약을 빙자해서 "십일조를 내라" 라는 식으로 나오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도둑놈들인데, 신약에서의 예수는 오히려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보고 "당신은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가?" 라고 하니까, 예수는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즉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막 2: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막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달리 말하면, "교회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의 헌법이 여러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헌법을 위해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구약의 옛 계약서에 십계명이 있었다고 하면, 신약의 새로운 계약에 의한, 그 새로운 율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집약된 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예수는 8가지 복을 선언하시는데,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 때문에 성경말씀을 달달 외웠는데, 이런 말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도대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느냐는 말이죠. 심령을 희랍어로 '프뉴마' 라고 하는데, 생명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도 프뉴마라고 하는데, 성령은 풍요해야한다는 것이죠.

구약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은 섬기지 말라" 라는 것인데,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심령은 존재의 전부인데, 그 인격전체를 프뉴마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가난하다고 하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평생을 고민하다가 최근에 풀었는데, 그동안 이것을 해석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이죠. 결국 이 도울만 혼자만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ㅋㅋ), 여러분은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서는 앞 부분의 심령이 없는데,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하기가 쉽다는 말이죠.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그래서 니체의 이러한 것을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가난의 연속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노예도덕의 아편주사를 놓은 것이 기독교라고 하면서 배척을 했는데, 그래서 "신은 죽었다" 라고 외쳤다는 겁니다. 사실상 이게 20세기의 정신사적인 출발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요즘 보면, 이런 니체가 너무나 유치하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정말 존경을 했는데, 물론 그의 통찰력은 대단하지만 그 사고가 너무 편협하다는 것이죠. 니체만이 그런 게 아니라, 서양철학이 그런 면이 있는데, 그들의 정치이론도 그러하고 말이죠. 동양철학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 아하, 그렇구나 !!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실은 그게 바로 오늘 풀렸다는 것이죠. 저는 아침에 밥을 먹을 때는 항상 계란을 같이 먹는데, 그것도 집에서 키운 닭으로 말이죠. 그것을 저는 고조선 달걀이라고 하는데, 그게 소화도 잘 되고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먹고 나니까 그만 속이 답답했다는 겁니다. 오늘 '다스 뵈이다' 녹화도 있고 해서 몸이 좋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걱정을 했는데, 그런데 화장실에서 거의 20센티가 넘는 것이 시원하게 나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장을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장의 입장에서 어떨까요? 가득 차 있는 것이 부자인데, 그런데 변을 시원하게 보았다는 것은 장의 입장에서 보면 다 비워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프토콘' 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진짜로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면 심령이 그렇게 장이 비듯이 텅텅 비어져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정말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배가 아파서 고생한 사람을 생각해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저도 나름대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을 이 대가리에서 쫙 빼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즉 비워져야 한다는 말이죠.

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노자가 말한 '허(虛)' 라는 것인데, 즉 비워져야 다시 채워진다는 겁니다. 예수가 자라났던 갈릴리 민중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인데, 그들은 심령마저도 가난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보고 "심령이 가난한 너희들은 복이 있다. 그런 빈 마음은 천국을 담을 수 있다" 라고 하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천국을 '바실레이아' 라고 하는데, 그것은 나라가 아닌 이상적인 질서를 의미한다는 말이죠. 즉 새로운 하늘의 질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심령이 가난하다" 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하늘의 질서를 파악하려고 하면, 너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가난하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생각이냐?"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새로운 계약서를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는데, 그게 새로운 율법의 제1조라는 겁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복이 있는 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이 말이죠. 그들이 복을 받고, 또한 하나님을 본다는 겁니다. 참으로 위대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저는 지금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우리 국민들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해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라고 보는데, 그런 자들이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바로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죠.

* 빈 무덤을 찾은 3명의 여인 !!

저는 복음서 중에서도 마가복음을 참으로 위대하다고 여기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가 죽고 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탄원을 해서 그 시체를 무덤에 안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를 찾아가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이 아니라, 갈릴리의 힘없는 민중들의 상장이라고 할 수 있는 3명의 여자라는 겁니다.

여자는 그 당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핍박을 받는 갈릴리 민중들 중에서도 그 여인 3명은 향유를 가지고 끝까지 거기에 갔는데, 그렇게 가니까 흰옷을 입은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는 말이죠. 그 남자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찾는구나" 라고 하면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로 가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3명의 여자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마가복음의 끝 장면인데, 현대 드라마에서도 이렇게 파워풀하게 마치는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가 다시 부활할 곳은 모든 정치와 권력의 총화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갈릴리 민중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이미 갈릴리로 가셨다. 3명의 여인이 부르르 떨더라"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신약시대의 헌법인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것과 '빈 무덤'은 서로 통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어떤 환난이 닥쳐도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여유롭게 관망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트럼프도 김정은도 이런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막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막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막 16: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2020,1,1 정리함 - 녹취 구

성령을 받지 못한 21세기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군요.
 첨부파일 : 도올이밀하는예수그리스도(녹취구).hwp (40.8K), Down:1
 이미아 (IP:122.♡.170.138)20-01-01 15:55 
정리해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 만에 새해부터 웃습니다.
두루마리 휴지 풀듯이 정말 기가막히게 풀어제키네요.
말씀을 농담처럼 말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 때문에 성경말씀을 달달 외웠는데, 이런 말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솔직한 고백이 마음에 듭니다.
 이미아 (IP:122.♡.170.138)20-01-01 17:58 
도올 김용옥에게 어떤 용감한 형제가 복음교회 이명직 목사님이 쓴 책, ‘두려움이 없어라’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가방에 넣는 것까지 보았다고 들었는데, 모르겠습니다. 읽었는지,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책꽂이에 장식용으로 꽂아놓았는지, 아니면 뭔가 하고 궁금해서라도 훑어보았는지, 겉표지라도 넘겼는지.... 우연찮게 도올 김용옥의 글이 올라와 생각이 나서 쓰네요. happening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구득영 (IP:183.♡.224.80)20-01-01 18:32 
도올도 이근호 목사님처럼 어떤 형태로든 다 읽는 스타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90년 대에 하동 악양에 있을 때, 이근호 목사님이 도올에 대해서 강의한 것을 프린트해서 보내주었는데, 그곳에서 발행한 잡지를 하나 보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가 또 친절하게 이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ㅋㅋ     
복음을 알아가는데, 복음이 아닌 것도 좋은 참고서가 되겠지만,
그러나 예언이 없는 공허한 메아리,
그들에게 기디라는 것은 저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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