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겸손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누군가 물었다. 대답을 못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겠으니까.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을 때, 그 받은 선물이 기쁜지 아니면 누가 그 선물을 주셨는지가 중요하고 기쁜지 묻는다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향하겠는가. 선물이 어떠한 양상으로 오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누가 주셨는지만 항상 알게 해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감사한 마음, 주님의 겸손을 배우게 해주시는 말씀이 귀하고 고맙다.
한 마을에 두 효자가 살았다. 한 효자는 부모에게 늘 맛있는 것을 해드리고 값비싼 비단옷을 입혀드리며 힘든 일은 전혀 손도 못 대게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모님의 얼굴빛이 생각만큼 밝지가 않으시다. 어느 날 옆 마을에 칭찬이 자자한 진짜 효자가 산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효를 행하는지 보려고 가서 몰래 살펴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진짜 효자 아들의 모습이 전혀 효자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일하고 들어오면 늙은 어미가 다 큰 아들의 발을 씻겨주고 밥을 준비해 오면 어머님은 드시지도 않는데 먼저 숟가락을 들고 맛있게 쩝쩝거리며 먹는 것이다. 잠자리를 준비해 드릴 때도 어머니께 이불을 펴 드리고 냉큼 먼저 그 이불 속에 들어가 눕는 모습까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저런 사람이 무슨 진짜 효자라고 소문까지 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씩씩거리며 돌아간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문자 그대로 자신이 경험하고 배우고 익혀온 프레임 안에서 의미를 규정한다. 상대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기 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상대가 원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규정짓는다. 설사 원하는 것을 물어본다 한들 자기 쪽으로 가져온 말과 문자는 자기 틀 안에서 자체 해석된다.
사람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진짜 알 수 없다. 진짜 효자라는 자가 어머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자신의 냄새 나는 발을 맡기고, 아들 입에 밥 들어가는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이고, 차가운 이불 속을 따뜻하게 데워드리려고 먼저 이불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 그것을 배워 자신의 부모에게 했을 때 그 부모에게 똑같은 기쁨이 되겠냐는 것이다.
진짜 효자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니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았다. 남들의 시선과 판단에 따르면 천하에 욕을 얻어먹을 불효자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그것이 신경이나 쓰였겠는가. 어머니가 기뻐하신다는데.
우리는 딴에는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 마음은 굴뚝 같다. 그런데 왜 그러고 싶은데? 라는 질문에 자기도 몰랐던 심중에 더러움이 건들어지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더러운 오물들이 터져 나올 사건이 선물로 보내지기라도 하면 그 선물이 마냥 기쁘고 감사할지 시한폭탄 상자로 여겨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무슨 수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알겠는가. 그러니 무엇을 한다고 한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자꾸 죽음 죽음 하시는데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마음도 있다고 고백한들 ‘사탄아 꺼져라’라는 말만 들을 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죽음은 따로 있고 그 기쁨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죽음 유발자로 쓰여질 뿐이고 그렇게 쓰여지고 버려짐에 군말 없기, 그리고 군말 없는 네가 뭐라도 되는냥 슬쩍 의로운 자리로 다리 걸치기 없기를 강조하신다. 너는 철저히 무가치한 존재이고, 없는 존재이고, 죽은 시체임이 확실할 때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죽었던 분의 살아있는 활동이 뚜렷해지고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마음이 아릴 만큼 너무 고마울 때가 이때이다. 생명이 활개 치듯 말씀이 전해지는데 정작 증거 하시는 분의 믿음 없음이 드러날 때, 그분의 상처가 드러날 때, 그래서 주님만 홀로 빛날 때, 그때가 잠시지만 유일하게 주님의 겸손을 배우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 땅에 오셔서 진짜 유일한 죄인이 되신 예수님, 죄인인 척 연기하고 가신 주님이 아니라 진짜 죄인 되신 주님의 겸손을 배운다.
이 땅에 육을 입은 어느 한 객체도 진짜 죄인이 될 수 없다. 의인은 고사하고 죄인 될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일치될 수 없다. 하물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육을 입고 이 수상한 세상에 오신 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없음을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셨던 주님, 그래서 철저히 아버지의 영의 이끌림대로 사신 주님, 자신의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심을 아셨던 주님을 증거 하는 발현체를 통해 잠시 주님의 겸손을 배운다. 죽여 달라는 말도 교만임을 드러내며 죽으라고 안 죽이시고 결국 죽은 자로 규정해 주시는 주님만 향하게 해주심이 고마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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