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세리와 창기

아빠와 함께 2019. 9. 28. 09:13
2019-09-25 14:24:13조회 : 170         
세리와 창기이름 : 송민선 (IP:121.154.249.203)

누가 원하기는 했을까? 그 상황을. 늘 예상하는 버릇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지만 그 예상이 빗나가게 해주시니 버릇이 나와도 단속하거나 수정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후회도 자책도 남 탓도 함께 날아가니 이런 선물을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

함께 모이는 자리에는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지만 꼭 만나고 싶고 빠지고 싶지 않은 꼭 함께하고 싶은 자리가 있게 해주심이 늘 감사하다. 다시 사건의 전조 증상처럼 모임의 기회가 생겼고 최종 목적지를 가기 위해 우리는 중간 지점인 광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했다기보다 조금 편하게 가기 위해 꾀를 부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내 몸 하나 편하고 자 하는 것이 타고난 본성이니 광주 가서 거기서부터 편하게 얻어타고 가면 된다는 기대감과 함께 새벽부터 차를 운전해서 중간 지점으로 갔다. 모두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만나서 즐거운 웃음꽃 피는 대화를 나누며 최종 목적지로 가게 될 거라는 상상이 와장창 깨진다.

연세가 무척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정정하신 장로님과 집사님 그리고 운전해주실 줄 기대했던 그나마 연세 덜 드신 한 분 그리고 그분들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이나 육체는 완전 삭은 한 인간이 중간 지점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한 인간은 그곳에 운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 장소에 도착해서 알았다. 그나마 젊으신 한 분이 몸살이 제대로 나서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고 연세 많으신 집사님이 자기가 운전하시겠다고 차키를 들고 일어나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여기서 편하게 가려고 했다가는 욕으로 배부르게 생겼다.

갑자기 한 말씀이 휙 지나간다. 겉옷으로 이불 삼아 하루하루 빌어먹으며 연명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가서 겉옷을 달라 하면 그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이 내가 맘먹고 지키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성경 말씀대로 그렇게 하리라 마음먹고 하는 줄 알았는데 주님이 친히 오셔서 겉옷 달라하고 속옷까지 빼앗아가는 분인 줄 생각도 못 했다. 발목도 아프고 팔목도 아프고 에너지가 거의 소진 된 상태에서 운전하다 죽으라는 상황으로 내몰릴 줄이야.

다 빼앗기고 어디 그 한 일을 생색낼 수 있는 모양새라도 갖추게 해주시면 말을 안 하지. 자꾸 이 상황이 짜증 나느냐고 뒷좌석에서 물으시는데 “저는 이런 걸로 짜증 안 납니다”라고 잘 수습하고 가려고 하는데 잔소리가 계속 들린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봐라...순간 욱 하고 나오는 반응은 “짜증 나니까 좀 가만히 있으라고요. 알아서 할테니까”라는 진심이 나온다. “거봐, 내가 짜증 날 거라고 했잖아...”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살전 5:26)...한번 출발하면 도중에 내릴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복음의 입맞춤이 시작된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말들이 오고 간다. 싸가지 없음은 애교이고 위아래 개념 상실은 기본이다. 자폐증, 사이코패스, 사기꾼, 미친 여자 남자를 세자로 줄인 말들이 오가는데 낯설지가 않다. 부인할 수 없으니까. 다 맞는 말이니까.

자기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하는 말들이 함께하는 공간을 채우니 싸우는지 웃는지 화내는지 맞는지 틀리는지가 상관이 없다.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냥 기쁘고 고맙다. 그 속에서 한결같이 누군가를 고대한다. 자신에게 소망이 끊어지게 하시고 이제 무의미 무가치한 자신에게 눈 돌리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그분. 주님 죽으신 십자가가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머무르매 늘 주님 죽이는 죄인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랄 수밖에 없도록 해주시는 그분. “그러니까 죽어야지. 그런데 너 혼자 말고 나랑 같이 죽자”라고 말해주시는 그분. ‘내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마땅한 죽음이나 저분은 죄도 없는데 왜 죽으시는 가’를 반추하게 하시며 그분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죽음 그 이상의 것도 감사밖에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그분. 우리의 주인님을 바라게 하신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주신다. 사건이 지나간 그 자리에서 아주 잠시.

이것이 어디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일까. 함께 가고 있는 분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 하나하나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나 없음을 발판으로 주님을 증거 하게 해주실 타인을, 증거되어야 하실 분이 보내심에 그 타인 속에 주님이 증거되고 우리는 깨지고 부딪친다.

창기가 되고 싶어서 안달 내면서 사람들 앞에서 훌러덩훌러덩 벗으면 자신을 어디 실컷 유린해 보라고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 주님에 의해 벌거벗김을 당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고상하고 우아하고 싶은 모든 것이 산산이 깨지고 남들에 의해 손가락질을 받고 수근거림을 당하고 모욕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죄의 극치를 보게 해주신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자유의 선물이 있을까.

이미 망가져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우리가 보는 죄와 주님이 보시는 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일치하지 않으매 잠시 잠시 말씀의 바람으로 속을 들춰 주시는 것만으로도 그 저주의 모습이 감당이 되지 않는데 십자가라는 열쇠를 가져오셔서 잠근 동산의 문을 열어버리셨다. 봉한 샘의 뚜껑을 제거해 버리시니 사방에서 불어오는 주님의 말씀의 바람이 걸치고 있는 모든 위선을 조작을 사기를 벌거벗겨 버리신다. 감출 수가 없다. 아니 감출 것이 없다. 원래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였는데 뭔가 있다고 아니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자아가 마귀의 방패 막이었다.

자아라는 문을 열어 재끼시니 내가 나라고 생각한 오직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내가 없고 가짜 주인 마귀만 그 속에 있었다. 괴물의 머리가 깨지니 이제 그 껍데기 안에 진짜 머리 되시는 주인님이 어떤 틈도 허락지 아니하시고 들어오시매 가득 차 있으나 무엇인지 알 수 없고 하고 있으나 무엇을 하는지 왜 그러는지 도리어 하나도 알 수가 없게 만드신다.


늘 계시는데 보고 싶고 맨날 얼굴을 맞대고 보고 싶고 그립고 또 보고 싶고 하는 마음을 늘 공급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라 하시매 기뻐서 오고 가라 하시매 기뻐서 가고 그렇게 조종해주시는 주님이 너무 그립다.

 이근호 (IP:119.♡.87.190)19-09-27 18:24 
성도의 표준모델은 교양의 완성도가 아니라 변화입니다.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탕자의 모습을 나타나야 우상화되지 않는 참된 성도입니다. 매일 탕자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상황이 연속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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