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칼이 춤을 추며 자아를 다지고 저미기 시작한다. (1+x), (1-x), 십자가 사건, 기적 선지서와 문서 선지서, 인간의 어떤 노력도 죄이고 쓰레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처리하시고 혼자 다 하신다는 이런 핵심적 말씀만 던져주면 언제든 마음을 열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성과 논리를 가지고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조금도 여지를 두지 않고 열심히 이해해보려는 자아의 살을 사정없이 발라내기 시작한다.
네가 이해할 자격이 있는지 이해하려는 이유가 뭔지 이해하려는 그 의도가 뭔지를 추궁당하며 몇 줄이면 충분할 듯한 말씀을 몇 시간에 걸쳐 생중계하기 시작한다. 말씀이 저밀 때마다 마음속에서 의구심이 밀려오고 반발심이 올라오고 어두운 시커먼 속내에서 공포감이 밀려온다. 말씀과 마주칠 때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짜 모습, 괴물의 모습 악마의 모습이 발각당하기 때문일까. 존재를 의식하며 말씀을 이해하려는 그 자체가 죽어 마땅한 죄임을 책망하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근원이 속속들이 밝혀지게 난도질을 하시니 더러운 자아가 싹 다 발라지고 드디어 말씀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게 하신다. 누가 순순히 그리되기까지 자발적으로 아멘 아멘 하며 순종하고 순복하겠는가. 온갖 분노의 무기를 발포하며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결국에 제압당해 질질 끌려 나오는 비참한 자리에서 망하는 것이 마땅함을 저주받아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함을 알려주시는 분을 보게 하실 때 나오는 감사가 ‘나 스스로 감사도 할 수 있는 참으로 대견한 존재구나’라고 태연스레 나올 수 있는 감사이겠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니 각자 자기 소견대로 해석하는 말들이 난무하다. ‘내가 생각한 거 너도 생각하지?’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말을 뱉어내고 말을 듣고 확인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님의 열심만이 우리를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무리에 한통속으로 묶어 주신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수많은 말들이 오간다.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 어떤 이는 말을 뱉어내며 죄를 발산하고 다른 이는 말을 들으면서 죄를 발산한다. 끊임없이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자기에게 집중하며 필요한 언어를 소집하고 그것들을 사용해서 의미를 동결시키려고 발악을 한다. 자기 자신을 진리로 거룩하게 만들어 끝까지 살아남아 이 몸을 천국까지 골인시켜야 한다는 이런 우상숭배의 모습이 우리의 체질인 것을 이사야 선지서는 낱낱이 까발린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서가 이미 쓰인 대로 하나님의 활동하심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가 들어도 깨닫지 못할 말로 선포된다. 계속 반복되는 역사성과 동질성이 기묘한 요소로 산산이 부정되도록 깨지도록 주께서 일하심에 이제 각자의 원래 자리가 주님에 의해서 구분된다.
비참한 자리가 마땅함을 주님으로만 족함을 알게 하시는 자리와 자신의 거짓된 안정감을 끝까지 지키도록 하시는 자리. 인간의 개입은 조금도 허용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안정감을 침범받게 되면 발광하며 하나님이고 뭐고 찌르고 죽이고자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처녀를 통해 등장한 한 아기가 인간의 희망으로 점철된 동질성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인간들의 혈통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와장창 무너뜨린다. 악마에게 철저하게 조정 당하며 탐심으로 만들어진 눈에 보이는 가짜 시온, 성전, 믿음이 껍질 벗겨지듯 무너질 때 텅 빈 공백에서 한 아기의 의미로 가득 찬 시온이 등장하고 그 보이지 않는 장소가 생명을 출산한다. 한 아들로 인해 생산되고 모집되는 새로운 생명 들이 한결같이 한목소리로 한 분만을 찬양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향한 찬양.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신기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것은 죄된 육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이미 먼저 계셨던 주님이 죄로 갇힌 세상에 친히 오시도록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죄인도 악마도 자연도 모두 재료로 사용하셨다. ‘어디 해봐라. 해볼 만큼 다 해봐라’라고 하시며 완전하지 않은 실체들을 주의 길에 배치하셔서 언약의 완성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셨다.
한 아들이 담당하신 죽음,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는 십자가의 죽음 만이 더이상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기에 주께서는 주님과 똑같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으로 사건들을 생산하신다. 사건 다발의 공간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그저 그 사건의 유발로 찬송 받으실 주인공의 손길만 느껴질 뿐이다.
희망을 주는 기적에 눈 돌리지 말고 ‘너희들 끝났어. 아웃이야. 망할 준비해. 하나님의 거룩이 뭔지 제대로 보게 될 테니 다가오는 심판을 감사함으로 받아라’라는 책망의 말씀이 들리는 기적을 맛보게 하신다. 책망의 말이 어찌 이리 마땅함으로 들리는지 납득가지 않는다. ‘저리 꺼져! 가짜야’라는 말씀이 좋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이건 자신의 원래 성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본인은 안다. 어찌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구원도, 성령도, 천국도, 그리고 구원 안 받음도, 성령 안 받음도, 그 어떤 것도 우리 소관이 아니니 도대체 뭘 열심히 연구하고 준비하고 불안초초하며 깨어 기다릴 것인가.
수련회가 끝나자마자 말씀을 다시 볼 정신도 없이 계속 일을 하며 그나마 잘 알아듣지도 못한 말씀까지 하얗게 날아감을 실감한다. 말씀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자임을 알게 하심에 감사하면서도 말씀을 뱉어내신 분에 대한 인간적 예의가 발동해서인지 소감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쓸 말이 생각이 안 난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글을 남기냐.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글을 쓰냐’라는 마귀의 말도 이제는 자신이 원래 누구의 말도 잘 안 듣는다는 걸 인정하며 가볍게 재끼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말씀을 다시 듣다가 결국 못 쓰고 잠들어 버리고를 반복한다.
며칠 동안 밤에 집에 오면 게시판부터 확인한다. 누군가가 소감을 올려 주면 가볍게 마음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쓸 말이 없으면 안 쓰면 될 걸 끝까지 몇 자라도 적어서 말씀을 이해할 가치도 없는 자임을 들키게 하시기에는 밑천이 너무 딸린다.
이제 원하는 한 가지는 항상 주님이 보시는 죄를 우리도 인식하게 하시며 그 죄인의 자리에 있게 하심을 감사하도록 만들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주의 의를 이루심에 합당한 조치라면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