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없다. 서로 주고받을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없다. 국도와 고속도로 위의 차들이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지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며 가며를 할 수 없듯이...그리고 결국 미리 와 있는 종착지가 다르다. 물세례의 과정이 아닌 성령세례의 완료지점에 있기에...
소소한 사건들이, 소리 없는 사건들이 말을 한다. 다양한 듯, 다른 듯 보이는 사건들이 일제히 똑같은 말을 전한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말씀이 계속해서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가를 추궁한다. 본능적으로 ‘다시 살았다’에 집중하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을지를 궁금해 하는 마음을 들키면서 예수님의 죽음 발생 현장으로 끌려간다. 스스로 감당되지 않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하시고, 분노하게 하시고 살해 의지를 발산시키신다. 우리네 상식은 복음이 전달되는 것을 선교 또는 전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교나 전도는 없고 도리어 그 선교라는 전도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그 사건 현장에서 창세기 3장의 저주받은 이 세상의 실체가 드러나고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상에 잠겨 있음을 발각 당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이 세상 심판의 기준이 되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복음이 돌출되는 순간이다. “당신의 말씀 전파(전도, 선교) 덕분에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오는지를 되묻는다. 그 말을 듣고 전달자가 “제가 아니라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대답이 나오는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행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고 자기 존재를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상호작용이고 몸부림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듣던 자가 “이 모든 것이 주께서 하신 것이다”라고 고백한다면, 그리고 말씀을 전하던 자가 그 말을 듣고 ‘그래도 내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전했기에 네가 들은 건데 어디 기본도 모르는 것이 주님을 운운해.’라고 생각하며 은근 시기심이 발동하며 화가 나고 있다면 그곳에서 비로소 주님 홀로 일하시는 복음이 전파되는 사건과 현상이 벌어지는 공간이 발생 된다. 한끝 차이라서 비슷한 듯 그 끝이 달라서 이단이다. 차이가 너무 미세하고 교묘해서, 표면적으로 똑같은 말씀처럼 보여서 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관망하는 사람은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차이. 사건과 한 덩어리로 정신없이 휘말리고 있는 성도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차이. 그럴싸한 그 말씀 안에 사랑이 빠졌다는 것을...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빠졌다는 것을 그 사건에 휘말려 철저히 이용당하는 성도만 알아차릴 수 있다.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 그 사랑에 사로잡히는 순간 “아니, 어떻게 개같은 제가, 언약 밖에 있던 제가, 이방인인 제가 주님의 것이 됩니까? 죽이든 살리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는 무익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고, 전하는 자들에게 또한 자신이 선악적 지식과 율법으로 둘러싸인 저주의 존재임을, 이방인이 유대인을 가르치고 못난 자가 잘난 자를 가르치는 사건 속에서 고상한 줄 알았던 자신 안에서 분노와 살해 의지를 발산하면서 예수님을 찌르고 죽이는 죄 유발의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아이고, 제가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 의만 챙기는 육의 덩어리, 흙의 덩어리일 뿐이고 주의 일에 훼방만 될 뿐입니다” 라는 너무 쉬운데 알아들을 수 없는 고백들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성도의 말은 방언이다. 성도끼리만 소통한다. 제각각 다른 표현이지만 공통된 말을 한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홀로 일하신다는 고백.
그러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자기의 모든 행위의 무가치함을 알고도 이미 자기는 없다는 것을, 빈 그릇, 빈 무덤일 뿐임을 알고도 왜 자꾸 고생을 자초하느냐 묻는다면 그렇게 묻는 것이 가당치 않다. 그 당사자도 모르니까. 그저 변명처럼 ‘그냥 하고 싶어서...그렇게 하고 싶어서..고생이고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 그렇게 하고 싶어서...그 하고 싶은 마음이 내 것이겠는가.’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 안에서 작용하고 활동하시는 분이, 이 세상에 사시면서 당하신 고통과 핍박의 삶 그대로 늘 현재의 삶을 살고 계시고, 자기의 일을 하신다. 머리가 주님이신데 지체가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어디 있고, 스스로 알고 있고, 생각하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머리되신 분이 하는 일을 그 당시에는 몰라도 소급해서 알게 해 주심에 감사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강의를 듣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으로 커피를 타고 있는데 어떤 분이 말씀하신다. “글을 잘 쓰시던데...” 타인의 시선을 느끼며 내가 살아난다. “아니요, 글 잘 쓴다는 말을 크면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네요. 여기에서만 그런 말을 가끔 듣는 것 같아요.” 내가 하지 않았다는 말이 마치 나 자신이 성도인 줄 착각하는 것 같아 방어적으로 한 대답일까 아니면 진짜 팩트를 말한 걸까 생각하며 혼자 속이 분주한데, 그분의 다음 대답에 나름의 속생각이 부서지고 감사가 나온다. “세마포 귀신이죠.” 칭찬으로 나름 으쓱하며 슬쩍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려는 어쩔 수 없는 존재감이 그분이 내뱉는 방언 덕분에 무너지고 창피함과 감사함으로 후딱 그 자리를 퇴장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올리고 싶어진다. 이번 사도행전 강의를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티내고 싶은 이유가 뭔지, 말씀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고 늘 육의 자체 해석을 유발하는 것을 보이고 싶은 이유가 뭔지, 뭐하러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성도와의 만남이 너무 고맙고 감사한 이유는 스스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자신의 실체를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듯 보이도록 내 앞에 서서 거침없이 방언을 난사해 주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제법 오래 갈 착각이, 그 존재감이 그 자리에서 즉시 박살이 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 수련회는 다사한 참으로 고마운 사건의 실습의 현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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