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3 - 뼈다귀
19,10,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이 세상을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지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혜를 알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반면에 지혜를 모르면 피해를 준다는 말이죠.
* What?
인간은 이미 있는데, 하나님은 전도서를 통해서 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전도서인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그 지혜가 없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지?", 즉 "What?" 이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그것을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What?" 이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서도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한다는 것은, 그러면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것도 역시 모른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라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 3무(無)의 인간 !!
그렇다면 '세상'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인간은 이 3가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그게 어떤 경우라고 했습니까? 지혜가 끊어졌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지혜가 끊어지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구약에서 이렇게 전도서가 주어졌다고 한다는 것은, 결국은 이 세상에 대해서도 알고, 자기에 대해서도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이 세상에 대해서 분해를 해보겠는데, 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 이웃인데, 그리고 거기에 대자연을 더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이웃+대자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대자연이 가까이 있어도 늘 의식되는 것은 이웃인데, 그런데 이 이웃은 남, 즉 타인이라는 말이죠.
이야기를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끊어지게 되면,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고 대자연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요즘은 이 대자연은 과학의 대상인데, 그런데 정작 과학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왜 하는지, 즉 생물, 물리, 화학, 그런 것을 왜 하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현대인들이 과학을 하고 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떤 고상한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돈 때문에 한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대를 왜 갑니까? 국가의 발전과 세계평화가 아니라, 취직이 잘 되기 때문에 간다는 말이죠. 물론 요즘은 의대가 대세이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 돈 때문이야 !!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사람이 사는데는 동기부여가 있어야한다" 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서, "돈이 부여되어야 한다" 라고 말이죠(ㅋㅋ). 동기를 부여하는데는 역시 돈 만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돈이 인간이 사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죠. 밤새도록 공장을 돌리고 식당을 하는 하는 이유가 다 돈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도 돈이 되는 남자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대자연을 다루는 방식인데, 그러면 이게 옳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지혜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인간이 산다는 것이 다들 그러한데,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전도서는, 하나님의 지혜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무지한 것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살면서도 왜 그렇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살아가는데 돈이 왜 동기부여가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즉 이웃을 모르고, 타인을 모르고, 대자연을 모르고,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을 모르고, 또한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기를 모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자기는 돈도 있고 다 갖추었는데, 그런데 우울하다는 말이죠. 즉 자기 욕망을 다 채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수 천억의 재산을 가졌는데도 전혀 행복하지가 않다는 것이죠.
목사가 되어서 5,000명의 교인을 모았는데도 전혀 행복하지 않고, 또한 자식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데, 그래서 남들이 다 자식을 잘 키웠다고 해도, 그러나 정작 자기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이제는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그러한데 말이죠.
그리고 교회를 다녀도 십계명을 지키는 재미로 살아간다고 한다면, 아무리 지켜도 이상하게 기쁨이 없다는 겁니다. 더 철저해야할 것 같고, 더 바쳐야할 것 같다는 말이죠. 기도도 더 해야할 것 같은데, 하지만 막상 그렇게 더 해도, 즉 헌금을 더 하고, 기도를 더 하고, 봉사를 더 해도, 그게 성에 차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저 하나님이 원하는 것, 남들이 원하는 것, 그런 것을 해대기만 하면 그게 신자다운 태도인 줄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그래서 "참된 신앙인이네. 믿음이 좋네" 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나중에는 별로 감흥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서도 모르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그냥 '모른다' 라고 하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르면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웃 배후에 하나님이 대자연과 그 이웃을 쥐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인간이지만, 그 사람을 건드리면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공격하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니, 근원적으로 무엇을 모릅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그렇게 그렇게 근본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욕망에 쫓겨다니게 된다는 겁니다. 남들로부터 아무리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게 자기에게 큰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잘못 맺어져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종교 !!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나' 라고 하는 인간이 이 세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다시 구상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하는데, 즉 하나님을 상상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두 글자로 '종교'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설득하기 위해서, 즉 체계를 잡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즉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이렇게 되어서, 그래서 이 세상의 질서는 이렇게 된다" 라고, 그렇게 구상하기 위해서 종교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정한 개념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알라고, 부처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 모든 민족은 다 종교가 있는데, 고대에서는 이 신이라는 것이 이름을 달리해서 조상들의 집합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즉 조상들이 가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게 곧 신이라는 말이죠.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에 보면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게 조상이면서도 자기 종족을 지키는 신이라는 겁니다.
* 그리고 제사 !!
여러분의 친척 가운데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러면 그들이 종교가 없습니까? 있다는 말이죠. 재수가 좋아라고 그들이 하는 행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제사라는 겁니다. 모든 민족에는 다 제사가 있는데, 이 제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말이죠.
개인적으로 자기 집안의 족보를 만드는 조상이 있고, 그리고 국가적으로 섬기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을 '시조(始祖)'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시조는 전부가 신화적인데, 즉 전설이라는 말이죠. 왜 그런 전설을 만듭니까? 그것은 바로 국가의 역사와 그 정당성을 얻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학교의 교장실에 가면 전임 교장들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또한 요즘 문제가 되고 검찰의 총장실에도 가면 전임 총장들의 사진이 걸려있다는 말이죠. 물론 저는 아직 검찰청에는 가보지 않았는데(ㅋㅋ), 그리고 교회의 당회실에도 가면 전임 당회장들의 사진이 걸려있다는 겁니다. 물론 다 있다는 것은 아니고, 주로 큰 교회에 가면 있다는 말이죠.
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조작해서 그러한데, 즉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에 올 때는 바로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지혜가 단절된 상태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조작해낸다는 겁니다.
* 자기 정당성 !!
그러면 왜 그렇게 만들어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개인의 역사와 국가의 역사의 정당성 때문인데, 즉 "나는 여기에 살아갈 만한 존재다" 라고 하는 자기 정당성이란 말이죠. 모든 국가와 단체와 교회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갓 시집을 온 며느리를 보고 시어미니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 집안은 이러 이러한 집안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돈끼리 미리 만나는 것을 '상견례' 라고 하는데, 그 만남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집안은 이 정도입니다" 라는 것을 서로 자랑질을 하는 자리인데, 그래서 저렴한 식당이 아니라 비싼 한정식 집에서 만나서 폼을 잡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 아들은 이 정도고, 우리 딸은 이 정도입니다. 우리 집안은 이 정도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정말 복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인데, 물론 노골적으로 말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은연중에 그런 것이 다 담겨있다는 겁니다.
*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
그게 바로 진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데,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 사건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는데, 인간들의 이런 상상력 때문에 말이죠.
하나님이 죽을 때 혼자 골짜기에서 자살을 했습니까? 누구에게 둘러 쌓여서, 그들이 린치를 가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창으로 찌르고, 그렇게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동조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죽였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교회당 지붕에는 분명히 십자가가 달려있는데, 그런데 그 안은 어떻습니까? 전혀 십자가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 교회는 부흥이 되어야하고, 망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 교회가 잘 되어야, 이 땅에서 악마의 세력이 망하고 하늘나라가 확장된다" 라고, 그렇게 우기는 집단, 그게 바로 가짜 교회라는 말이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를 우대해주어서, 그러한 종교인들을 모아서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행태, 이게 바로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들의 타고난 종교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하루아침에 십자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닌데, 왜냐하면 교인들이 맹탕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조금 전에 상견례 이야기도 했는데, 교인들이 나오면 옆에는 이미 다른 교인들이 나와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점심을 먹으면서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나는 신앙경력이 이 정도야" 라고 하는데, 상견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죠. 그것을 어려운 말로 '자기 정당성'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 나는 죄인일 수가 없다 !!
자기 존재의 정당성,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죄인일 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러니 그것이 무슨 죄냐는 말이죠. 즉 "나는 의미이다"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나는 잘났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죠.
진짜 하나님은 자기 죽음으로 나타나는데, 즉 십자가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와 같이 죽을 자는 나와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정작 교인들은 "내가 이만큼 잘나서 나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그렇게 묻는 식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죠.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목사 자체가 불신자 !!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하면, "주여,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과연 그런 어디 목사가 있습니까? 없는데, 그러니 목사가 신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목사 자체가 불신자인데, "설마 내가 복음적으로 설교를 하는데, 이게 죄이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죠.
목사가 아무리 죄가 되지 않으려고 완벽하게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죄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모습이 오늘날 의인이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147페이지를 보겠는데, 거기에 보면 로마서 5장 20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누가 그 말씀을 한 번 읽어보세요. 로마서 5장 20절입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율법이 가입한 것은 !!
여기에 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곧 바로 뭐라고 합니까?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은, 즉 말씀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를 더욱 더 키우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말이죠.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는 인간은 없는데, 하지만 이것이 가짜 하나님을 태동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즉 "내가 정당하니 내가 선택한 하나님도 정당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 정당함으로 출발해서, 즉 "내가 다니는 교회이니 그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라고,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정당성의 확장이라는 겁니다.
* 인간의 자기 정당성을 깨부수는 하나님 !!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그 정당성을 전제로 해서, 그것을 깨부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죄로 노출을 시키는데, 그렇게 죄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탄로가 나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즐겁지 않습니까? 저는 굉장히 즐거운데 말이죠.
만약에 "자기의 죄가 궁금한 사람은 교회에 오세요" 라고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오겠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는데, 그러면 "죽으면 천국에 보내줍니다" 라고 하면, 다들 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죠.
여러분,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라는 것과, "누구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라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당연히 앞의 것이 맞는데, 왜냐하면 만약에 누구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창세기 3장 24절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는 것이죠.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렇게 차단이 된 상태에서, 인간들이 땅에서 종교를 만들던 교회를 만들던 삼위일체를 만들던, 아무리 자기들이 그렇게 만들고 해도 하나님은 일체 그것으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놔두신다는 말이죠.
* 말씀으로 여행사를 만든 인간들 !!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받은 땅에 말씀, 즉 율법을 주셨는데, 그렇게 율법을 주니 인간들은 이 율법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교회를 만들었는데, 즉 천국에 넣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천국으로 보내는 여행사가 되고 말았는데, 그런 짓거리를 했다는 말이죠.
"여러분, 내 말을 들으면 복을 받습니다. 천국에 갑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좋은 하나님을 믿읍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게 전부 다 가짜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모독한 것이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죽으셨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런 이 땅에서 천국에 가겠다고 설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 자체가 죄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죠. 참으로 시건방지기가 짝이 없다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언감생심 어딜 감히 천국을 넘보느냐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인데, 우리 인간은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를 죄인이 아니라, 괜찮은 존재로 알고 있다는 말이죠. '긍정적 마인드', '적극적 사고방식', '하면 된다', 그런 것들은 깡패가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시는데, "자기를 미워하라" 라고, 처나 자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늘나라가 있는 것과 자기 자식이 아픈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시급한 문제입니까?" 라고 했는데, 우리는 주님보다도 자기 자식인데,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은 혈육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자기 가족을 더 사랑하면 야단을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따로 빼내서 자기 긍정의 용도로 사용하면 곤란한데, 이 세상은 불심판을 받게 되어있고, 이미 그 심판은 시작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설악산에 가서 단풍이 벌겋게 물들었으면, 그게 심판의 징조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ㅋㅋ).
* 두려움이 없는 사랑 !!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할 때 그게 불의 모습이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들은 이 세상이 성령으로 미리 앞당겨서 불심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신바람이 났다는 말이죠. "불로서 모두 태워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도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무서운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무서움이 없다는 것을 다른 말로 '자유' 라고 할 수 있고, 또 달리 말하면 '사랑' 이란 말이죠. 그 사랑이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왜 두려움이 없는고 하면, "불로서 모두 싸질러 버려라" 라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속담에 "먹지 못하는 감, 찔러나 보자" 라는 말이 있는데, 완전히 그런 심보라는 겁니다. 그것과는 좀 다른가요?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면 망하는 그 속에는 누구도 포함이 되어있습니까? 자기만 빠지면 반칙인데, "저도 죽여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사도들이 갔던 길인데, 사도바울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저를 죽여주옵소서" 라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겁니다. 두 번씩이나 그런 기도를 했는데, 죽여달라고 했다는 말이죠. 주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리라" 라고 하는데, 즉 모든 말이나 행위의 바탕에는 무엇이 깔려야 하는고 하니,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남을 욕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먼저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이가 많은 어르신을 보고 "오래 사세요" 라고 하면, 그것은 욕이란 것이죠.
(눅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 다시,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로마서 5장 20절을 다시 하겠는데, 율법이 가입한 것은, 즉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범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미처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죄가 추가된다는 말이죠.
마치 식당에서 "이모, 공기밥 하나 추가요" 라고 하듯이 그렇게 죄가 추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정말 신자라고 하면, 교회에 와서 "목사님, 저의 죄를 더욱 더 추가시켜주옵소서"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그런데 여기 20절 뒤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 은혜가 나오는데, 이 은혜의 특징은 자기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이 주신 용서의 선물을 더 많이 알게 함이라" 라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나온 원리원칙인데, 즉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둘 키운다고 하면, 그렇다면 이 원칙을 적용시켜보자는 말이죠. 자기가 부모로서 자식을 키우는 무엇입니까? 방금 배웠는데, 즉 죄를 더하기 위해서 키운다는 말이죠.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교육을 시키는 매 순간마다 자기도 미처 몰랐던, 자기에게 잠복이 되어있던 죄가 바깥으로 노출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부모가 되어서 고생을 해가면서 자식을 키울 때, 그러면 자동적으로 자기 정당성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놈아,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는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정당성이라는 말이죠.
* 나는 행복해야 한다 !!
그러면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그러니 너는 나에게 효도를 해야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철없이 자기 가족만 챙기지 말고, 부모가 아프거나 병이 들게 되면,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워주었듯이 자식도 부모의 뒷바라지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강력한 요구조건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너거들만 잘살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빈말이라는 것이죠. 속에 담아둔 것은 "나 혼자 있다고 내치면 안 된다" 라는 것인데, 마치 탁구공처럼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고, 그렇게 취급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을 키워도 누구의 목적은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겁니까? "나는 잘 되어야해. 나는 밥 먹고 살아야지" 라고 하는 의도를 품은 채로 자식을 키운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 안에는 자기 정당성이 여전히 들어있다는 겁니다.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 나는 행복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이죠.
모든 목적이 자기를 겨냥하고 있는데, 자기 행동 하나 말 하나,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물론이고, 결혼을 시키는 것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다 그러한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더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신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조치만이 정당해 !!
그러면 무엇이 정당한고 하니, 우리를 고생시키고, 몸이 아프게 하고, 그래서 결국 공동묘지에 보내고 하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만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라고 중얼거리면서 불평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정당성은 전혀 하자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장로님은 다리가 아프고 불편한데, 그럴 때마다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겠느냐는 겁니다. 자식을 키운다고 평생을 고생했는데, 그런데 다리 관절이 말썽이라는 것이죠. 그런 생각이 드는데,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남의 탓을 하게 되어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란 말이죠. 자기가 힘들게 사는데, 그것을 자기 탓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 이웃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렇게 남의 탓을 한다는 것은, 자기 주위에 누가 있다는 겁니까? 이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여기에 있고 이웃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그렇다면 이웃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어떤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평소에 그 사람과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또한 죄가 된다는 것이죠.
모든 것이 남의 탓인데, 물론 잘되면 자기 탓이고, 그리고 이웃은 가만히 있다가 욕을 얻어먹는다는 겁니다. 나라꼴이 엉망이 되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자기가 아니고 조국 때문이고 문재인 대통령 때문이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세우셨는데, 욕을 얻어먹으라고 세우셨다는 겁니다.
* 소각장 !!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는 폭발하는 자기 분노, 자기 원한, 그런 것들을 쏟아낼 쓰레기장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주일학교의 어린아이가 '소각장' 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깜짝 놀랐는데, 그렇게 인간에게 남들은 모두가 다 자기가 분풀이하는 소각장이라는 겁니다.
그런 소각장을 만나기 위해서 다들 교회에 모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김 집사, 너는 나의 소각장이야. 그러니 나의 분풀이나 들어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는 하나님이 소각장인데, 즉 "나는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의 잘못으로 이러한 인생을 산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에게 분풀이하는 것이 기도로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것이죠.
"교회부흥은 왜 해주지 않습니까? 몸은 왜 이렇게 아픕니까? 가정은 왜 이렇게 힘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을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 잘못이고, 자기 잘못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웃이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범죄를 노골화시키기 위해서 이웃이 있다는 말이죠.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 이웃에게 모든 탓을 다 돌린다는 겁니다. 자기 탓이 아니라, 남의 탓이라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것을 잠시 정리하겠는데, 제가 분명히 '세상', '나', '하나님' 이라고 했지만, 정작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세상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그러면 누구를 겨냥해서 주셨습니까? 우리 인간을 겨냥해서 주셨다는 것이죠. 범죄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죄를 지은 범죄한 자이고,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고생하는 하나님의 조치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하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즉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의 완성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십자가로 오신다는 것은, "너희는 죽어 마땅하고, 지옥에 가야 합당한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다" 라는 것인데,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가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 이 땅에는 천국에 갈 사람이 없어 !!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이 땅에는 천국에 갈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죠. 이 땅에는 천국에 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이 세상에 천국에 갈 인간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무슨 과정이 필요치 않습니까?
굳이 심판이 필요하지 않는데, 그러나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을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을 받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고, 심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천국에는 그냥 올 수 없다는 말이죠.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니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야 하는데, 그 다른 요소는 인간이 요청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인 불쌍히 여기심으로 된다는 겁니까? 일방적인 불쌍히 여기심인데, 구원받는 사람은 그것을 요청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심, 즉 은혜를 받을 권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운명입니까? 지옥에 가야 마땅한 운명인데, 그것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지옥에 가야만 합당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주제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란,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이란 말이죠. 아들이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는, 즉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것이 곧 십자가인데, 그렇게 예수님이 저주를 받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봐서, 자기도 마땅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전혀 모른다고 하면,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장난을 친 것인데,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상상을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혼자 착각을 했다는 말이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셨다는 겁니다. 교회가 그렇게 사기를 쳤다는 것이죠.
* 교회가 있어야 천국이 있습니까?
제가 어제 낮 시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는데, 즉 "교회가 있어야 천국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분명히 없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다음은 질문은 "내가 있어야 천국이 있습니까?" 라는 것인데, 자기는 없어도 천국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위주로 살면 안 되는데,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 굳이 자기가 천국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천국에 가고 싶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욕심에 해당이 되는데, 그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죠. 교인들은 교회에 구원을 받으려고 왔는데, 교회가 집단적으로 그들을 지옥에 보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겠다는 욕심을 장려했기 때문에 말이죠. 오히려 그렇게 키웠다는 겁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저는 묻고 싶은데, "당신은 무엇이 잘아서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니. 그래서 구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면,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또 출발점이 어디인고 하니, 역시 '나' 라는 겁니다. 자기가 믿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서 추방된 죄인인데, 그런 죄인이 믿는다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이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란 것이죠. 논리가 그러한데, 자기는 지금 추방된 입장이라는 겁니다.
* 맛있는 피자를 드세요 !!
예를 들어서,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맛있는 피자를 사주니 한다는 말이, "나 같은 나쁜 놈에게 이런 피자를 다 주다니" 라고 하면서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자기들은 바깥에 있다고 피자를 마음대로 다 먹고, 나는 이렇게 교도소에 갇혀있다고 피자를 이제 주나?" 라고 하면서 따지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경우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피자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주었던 피자도 빼앗아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주제를 전혀 모른다는 것인데, 공짜로 주어서 얻어먹는 주제에 건방지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가치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 먼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
왜 모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인데, 그러면 교만해져서 주님의 사랑을 완전히 무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고, 그렇게 잘난 인간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먼저 하시는 바탕작업이 있는데,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주께서 이제 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지 알겠지요? 진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가 값있게 드러난다는 말이죠.
*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향수를 부으니,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니 같이 놀 사람과 놀아야지, 저런 죄인과 왜 놉니까?"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왜 그렇습니까? 소위 잘났다고 하는 자들은 아무 것도 내놓지를 않았는데, 그 여자가 향수를 내놓았다고 해서 자기 자랑을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 여자가 향수를 부은 것은, "이 향수가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주님이 주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교회에서 봉사를 좀 하고 헌금을 좀 한다고 해서 자기 자랑을 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시켜주지 않아도 되는데 시켜주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은혜를 받음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고 하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가 죄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인데, 그게 전도서에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7장 16절에서 18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전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전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전 7: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 의인, 지혜자, 악인, 우매자 !!
누가 성경말씀을 쉽다고 합니까? 정말로 어렵다는 겁니다. 이제 설명에 들어가겠는데, 여기에 지나치게 '의인', 지나치게 지혜자', 지나치게 '악인', 지나치게 '우매자',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의인, 지혜자와 단어는 어디서 나온 개념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의 자리를 잡기 위해서, 즉 "이 정도가 되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맞을 거야" 라고 하면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 내뱉은 단어들이란 겁니다.
그러니 이런 단어에 대해서 자기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정도는 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부하면서 내놓은 단어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면서 이런 단어들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의인, 지혜자 등등이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단어인데, 즉 이 세상에서 통용이 되는 떠돌아다니는 단어들이라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말이죠. 그런데 인간세계는 무슨 세계입니까?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죄인의 세계인데, 그런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단어를 선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정당하다. 잘났다" 라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겁니다.
전체가 지옥과 같은 죄의 세계인데, 그 안에서 "그래도 나는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 라고 하면서 뿜어낸 단어가 그런 단어들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참 훌륭하다. 대단하다" 라고 하십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 자체도 역시나 지옥으로 갈 수밖에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나는 의인이 되고 지혜자가 되고, 절대로 악인이니 우매자는 되지 않겠다" 라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그게 그 사람을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죠.
*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그게 전도서 7장 16절에서 18절의 내용인데, 여기 17절에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라고 되어있는데, 즉 "예상 밖으로 죽는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뭔가 의도가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의인이 되고 지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죽는 것은 억울해서 안 되겠다" 라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가 언제 죽는지, 그것을 우리 인간이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는데, 인간은 자기가 언제 죽는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하는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가 알아서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알아서 죽이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가 죽는 기한, 즉 때라는 말이죠.
자기가 오래 살았다고 해서 더 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물론 젊었다고 해서 더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주님이 죽이시면 그냥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권한은 주님에게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악인이나 우매자가 되지 않고, 의인이 되고 지혜자가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의인이 되게 할 때는 의인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악인이 되게 할 때는 악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그러한 하나님의 조치를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하신다면 범죄자가 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믿고 바른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자기가 지옥에 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절대로 남에게 지적을 당하지 마세요 !!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절대로 남에게 지적을 당하지 마세요" 라는 겁니다.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다고 해서, 남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에게 나무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짓을 누가 하게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는데,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 인생의 죄는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게 아니고 아담의 죄인데, 그것을 우리가 물려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왜 자기가 지적을 받아야 합니까? 정작 죄는 아담이 지었는데 말이죠.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닌데, 그것은 아직도 여전히 "나는 정당하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노력하면 바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오히려 교만인데, 교회에 다녀서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전혀 거짓 믿음이란 말이죠. 교회에 왜 다닙니까? 그것은 자기가 어느 정도 엉터리인가를 알기 위해서 다닌다는 겁니다.
* 자기의 죄 값으로 !!
로마서 6장에 보면 사람이 죽는 이유에 대해서 나오는데, 자기의 죄 값으로 죽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짓지도 않는 죄 값의 무게를 짊어지고, 그렇게 이 땅에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잘못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물론 책임질 능력도 없고 말이죠.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를 몽땅 다 누구에게 부었습니까? 예수님에게 모두 다 부었다는 겁니다. 즉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나타나심과 그 하실 일을 위해서, 그래서 제가 이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인데,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매일 벌벌 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즉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지적질을 할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데, 교회에 와서도 "이 목사가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그리고 김 집사가 또 뭐라고 할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아니 자기가 뭐라고 남들에게 욕을 들으면 안 됩니까? 마치 수전증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떨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매사에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아 !!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봅니까?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누구 탓을 합니까? 남의 탓을 하는데, 그리고 하나님을 탓한다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즉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반발과 반항을 한다는 말이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남의 탓을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조금 덜하지만, 젊은 자식들을 보면 누구 탓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부모 탓을 하는데, 즉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되었다. 재벌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이렇지는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식들이 명절에 오면 부모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데, 자식들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뭔가 일만 생기면 "아버지는 내가 시집을 갈 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집을 살 때 얼마나 보태주었습니까? 그러니 아버지 칠순에 여행이라도 보내주는 것을 좋게 여기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또 부모는 지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를 키울 때 이렇게 이렇게 했다" 라고 하면서 시작하는데, 그러니 서로가 주장하는 것이 역시 무엇입니까? '자기 정당성' 인데, 그러다가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그야말로 한 바탕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
다시 전도서 7장을 보면, 18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은 '벗어남'이 좋지 싶은데, 어디서 벗어납니까? 자기 정당성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잘났다. 나는 멋있다" 라고 하는, 그런 것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전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전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전 7: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 이 모든 것이 조상 탓 !!
그러니 자기가 무슨 빗을 해도,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게 자기 탓이 아니고, 자기 잘못도 아니고,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즉 조상의 죄 때문에 지금 자기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른 들으면 이게 자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래서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게 아니고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누구 탓이라는 겁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15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분의 의가 어디에 퍼졌다는 겁니까? 우리는 아무런 한 것도 없는데, 그 은혜가, 그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말이죠.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그렇다면 자기 자랑을 해야합니까?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까? 주님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그때 자기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세라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 오셨다는 것이죠.
*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
강의를 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지혜가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자기에 대해서 모르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모른다고 해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자기와 하나님에 대해서 조작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조작하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정당성인데, 그렇게 조작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무엇으로 오셨습니까? 말씀의 완성이 곧 십자가인데, 즉 "네가 살아온 것도 과분하다. 그러니 지금 당장에 죽어도 마땅하다" 라는 것이죠. 즉 죽어 마땅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신약의 그림자가 구약인데, 즉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구약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고, 다만 그 십자가가 우리를 찾아온다는 겁니다. 마치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찾아오게 되면, 자기가 알던 자기 정당성은 다 날아가 버리고, 오직 주님의 조치에 의한 주님의 정당성만이 우리를 덮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랑거리는 무엇이 되는고 하니, "이렇게 못난 나를 어떻게 주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십니까?" 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런 생각만 남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다고 하면, 자기 인생이 망가져도 거기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노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망가졌다는 말이죠. "내 몸이 왜 이렇게 아프고, 또한 다리 관절이 좋지 않아서 잘 걷지도 못하고, 도대체 이게 뭐야?" 라고, 그렇게 주장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 지혜는, 말씀의 최종 도달점 !!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전도서가 지혜인데, 그러면 지혜는 시간이 흐릅니까? 흐르지 않습니까? 지혜는 시간이 없는데, 그러니 "앞으로 잘 할게요" 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지혜는 시간이 정지된 상태라는 겁니다. 사실은 이 지혜가 말씀의 최종 도달점이라는 것이죠.
이와 비슷한 내용이 아가서에도 나오는데,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은 최종 도달점이라는 겁니다. 이미 도달할 것은 다 도달했다는 말이죠. 전도서에는 지혜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은 허무로 확정이 났다" 라는 겁니다. 전도서의 최종목표는 허무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허무로 확정이 되었다는 말이죠.
반면에 아가서에는 무엇으로 확정이 되었는고 하니,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생을 보면 사랑을 받은 것 같지 않은데, 그런데 사랑을 받았다는 말이죠. 따로 사랑을 갈구할 이유가 없는데, 그것 자체가 사랑이라는 겁니다. 전도서에 의하면 그 자체가 허무인데, 그리고 잠언서에 의하면 우리 자체가 지혜이고 생명나무, 혹은 생명이라는 말이죠.
잠언서 3장 16절에 보면,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잠언서를 찾아보면 '생명' 이라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는 생명이 없고, 지혜로운 자는 생명이 있다" 라고 말이죠.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잠 3: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잠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그리고 시편에도 보면 지혜가 나타나는데, 시편의 주제는 시온산인데, 즉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어찌하여 이 세상의 군왕들이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가?" 라고 하는데, 즉 이미 확정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시 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 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그렇게 확정된 이상은, 너무 자기 몸을 조절하고 어떻게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생명(잠언서), 하나님의 사랑(아가서), 하나님의 허무(전도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야(시편), 거기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마치 사골에서 국물이 우려나듯이 다 우려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성도는 뼈다귀다 !!
그러면 우리의 몸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마치 사골 뼉다구로, 아니 뼈다귀와도 같은 기능을 하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역할이라는 것이죠. 즉 "성도는 뼈다귀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강의제목을 '뼈다귀'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지금 마구 드는데 말이죠(ㅋㅋ).
우리 속에서 사랑을 끄집어내면 그게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되고, 우리에게서 생명을 끄집어내고는 주님은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시고, 또한 허무를 끄집어내면서 스스로 만족해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성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표현형이다" 라고 아주 어려운 말을 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하는데, 성령이 임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2장을 보겠는데, 15절과 16절입니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향기인가? 악취인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게 얼마나 위력이 좋은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악취로 느껴진다는 말이죠. "도저히 듣지 못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소음인가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합니까? 무엇과 충돌을 해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자기 정당성, 혹은 자기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선택과 나의 결단은 옳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다치는 것에 대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 가치를 모독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잘했다고 부추겨주는 신을 원하는데, 그게 바로 조작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오늘날 교회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소멸되어도 당연합니다" 라고 한다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기꺼이 수용할 정도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는 자기 자랑을 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주님을 자랑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얼마든지 자기 밟아도 괜찮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은, 여기 고린도후서 2장에 의하면, 복음이 악취가 아니라 향기라는 겁니다.
* 향수인가? 향기인가?
그러면 여기서 향기와 향수를 구분해보겠는데, 89년대 광고에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라는 멘트가 있었는데, 김선아가 그것으로 떴다는 말이죠. 그건 그렇고, 향수라는 것은 자기에게 뿌리는 것인데, 그런데 향기는 그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말이죠. 향수를 뿌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에게서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렇지요?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향기가 납니까? 악취가 납니까? 악취가 나는데, 특히 나이가 들면 매일 샤워를 좀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목욕탕에 자주 가서 괜찮다고 하는데, 그런데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얼마나 자주 가는지 물어보면, 돈이 아까워서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ㅋㅋ).
자기는 자기 몸이니 익숙해져서 냄새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버스를 타게 되면 젊은 사람들이 자리를 얼른 비켜주는데, 그것은 노인을 공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냄새가 나서 그렇다는 말이죠. 특히 팔공산에서 등산을 하고 내려오면 어떻게 됩니까? 노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뒤로는 사람들이 아예 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의 몸은 썩어 가는데, 그러면 당연히 냄새가 나는데, 악취가 난다는 말이죠. 이것은 주의 뜻인데,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젊어도 결국은 나이가 들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때는 보완책으로 과도하게 향수를 뿌릴 수밖에 없는데, 서문시장에서 파는 것은 좀 곤란하고, 면세점에 파는 것 정도는 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향기가 나도록 하기 위함인데, 우리의 몸은 썩어가기 때문에 악취밖에 나지 않는데,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몸에서 복음의 향기를 맡고자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복음에 대해서 자기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나오게 될 때,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데, 그러면서 "그 향기, 내가 주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당신에게서 향기가 납니다 !!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예수님보다 생일이 6개월 정도 빠른데, 아버지는 시가랴이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이라는 말이죠. 그 후손이 그 유명한 여자 영화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겁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비비안 리이고 말이죠(ㅋㅋ).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난 뒤에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와서 만나게 되는데, 그때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당신의 몸에서 향기가 납니다" 라고 하는데, 즉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자기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그것도 큰 소리로 외쳤다는 말이죠.
(눅 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 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 성도끼리는 대화가 된다 !!
이것은 마리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이상 징후를 본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의 목표가 바로 이것인데, 성도가 성도를 만날 때는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열심과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집어 넣어준 것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서 "성도끼리는 대화가 된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지금 이 장면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두 여자가 다 임산부인데, 그렇게 만나자 두 아이가 그것을 알고 기쁨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뛰논다는 겁니다. 즉 성령 안에서 서로 대화를 한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성령으로 말하게 될 때는, 기쁨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성도끼리의 대화인데, 그렇다고 해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서 얼마든지 복음이 나올 수 있고, 기쁨이 있다는 말이죠.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니 말하는 취지나 의도나 반응이 성령으로 인해서 하게 되면, 즉 강력하게 성령과 한 덩어리가 되어서 움직이는 향기, 바로 그것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악취인데, 그래서 "나에게 그런 소리는 그만해라. 서로 통하는 말을 해야지, 이제 듣기 싫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를 믿으세요. - 믿기 싫다. - 왜 믿기 싫습니까? - 내가 믿기 싫다" 라고, 그렇게 되는데, 누가 믿기 싫다는 겁니까? 자기가 믿기 싫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자신이 바로 악마의 앞잡이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우리도 역시 이런 자들이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 엄마나 믿어라 !!
우리도 과거에는 기독교를 욕하고 했는데, 물론 지금은 다른 차원에서 욕을 하지만 말이죠. 아무튼 '나' 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얼마나 의지가 없으면 예수를 믿느냐고 했다는 말이죠. 인간은 스스로 설 수 있는 존재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비난을 했다는 겁니다.
자식들이 뭐라고 합니까? "엄마나 예수를 믿어라. 나는 나 혼자 살란다" 라고 하는데, 그런 자식들이 아직도 있지요? 그리고 그게 과거 우리의 모습인데, 그런데 그런 '나'가 이제는 누구만 자랑합니까? 자기를 완전히 짓밟아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전도를 하는 것은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미 정해진 자를 말이죠.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알아듣더라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라는 것이죠.
스스로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만나는 것을 감사해야한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강의를 듣다가도 중간에 나간다는 겁니다. 도저히 들을 수가 없는데, 자기 정당성이 공격을 당하니 말이죠.
* 지팡이에 핀 살구꽃 !!
끝으로 이것만하고 마치겠는데,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자손이 모세에게 대항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겁니다. 모세가 대장노릇을 하니 거기에 질투심을 느껴서, "같은 레위인인데 어떻게 당신만 그렇게 하는가? 우리도 출애굽을 할 때는 똑같이 열심히 했다" 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겁니다.
(민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민 17:9)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취하여 내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취하였더라 (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민 17:11) 모세가 곧 그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십니까? 각 지파의 지팡이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12지파이니 12개인데, 그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장막 안에 두었는데,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7장 8절에 보면,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출애굽을 할 때는 모두가 같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막 먹어도 되는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 중에서도 모세와 아론을 특별히 사용하신다는 것을 레위지파의 다른 자손들은 몰랐는데, 이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말이죠. 교회에 다니면 다들 똑같다고 여겼는데,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살구꽃을 피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 어찌 제가 감히?
그것을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를 뼈다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주의 일에 사용될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찌 제가 감히?"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마리아 뱃속의 아이와 엘리사벳 뱃속의 아이가 서로 알아보고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지 아니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성령을 운반하는 가마꾼이고, 서랍장 속에 있는 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모이게 하신 것도 주님의 뜻이기에 저희들은 그냥 감사할 뿐입니다. 다음에 또 모인다는 보장에 없어도 항상 기뻐하면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저희들을 통해서 마음껏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성령의 운반체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0,28 오전 10시에 마침.
한 그릇의 뼈다귀 해장국을 보면서도 서로 기뻐하게 하옵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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