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4 - 요령과 희생
19,11,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전도서 7장 29절에 보면,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가르쳐준 게 있는데, 이게 일종의 결론인데 말이죠. 바로 그게 무엇인고 하니,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라는 겁니다.
(전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보통 성경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 전도서에서는, "꾀를 내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전도서에서도 죄를 지었다고는 표현도 나오지만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이 허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죄를 지어서 그러한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인간이 죄를 지은 현상이 어디서 드러납니까? 그것은 바로 꾀를 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꾀' 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는 언제나 그 반대개념을 살펴보면 되는데, 꾀의 반대말이 '희생' 이란 말이죠. 그러니 꾀는 자기 희생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것인데, 오로지 자기만 챙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희생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챙기지 않는 것이 희생이라는 것이죠.
여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라고 하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자기만 챙기는 것이 없었으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뒤에는 어떻다는 겁니까?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자기만 챙기려고 한다는 것인데, 남들은 어떻게 되던 간에 말이죠.
* 주님의 희생과 인간의 꾀 !!
주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희생이었는데, 왜냐하면 모두들 꾀를 내어서 자기만 챙기니, 주님은 그것과 대비가 되도록 희생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인간의 방향은 어떤 식으로 꾀를 내던지 간에 자기 것만을 챙기겠다는 것이고, 반면에 주님은 그것을 의식해서 그만 희생으로 나가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것만을 수립하고 챙기려는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꾀를 쓰지 않기, 자기 것을 챙기지 않기,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희생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이렇게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면, 예수님은 희생을 하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꾀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그 예수님의 희생마저도 꾀를 내어서 자기 것을 확립하고 챙기는데 이용하려고 잡아당긴다는 겁니다. 그게 꾀를 내는 인간의 행태라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도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꾀를 내는 것을 포기한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기만 챙기겠다고 하는, 즉 자기를 수립하고 확립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죠.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극심한 피곤함 !!
그런데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하는 짓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수립하고 확립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극심한 피곤함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서 "그런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나는 이 땅에 희생을 하려고 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인간은 꾀가 있어서 자기를 챙기는데, 즉 "나는 절대로 희생하지 않겠다" 라고 마음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가짐이 곧 꾀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 성도에게는, 꾀와 더불어 희생이 !!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즉 주님이 작용을 하시게 되면, 그러면 우리의 숨겨놓은 꾀가 자꾸만 표면으로 올라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어떠한고 하니까, 그 꾀와 더불어서 주님의 희생도 같이 올라온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도 동반해서 올라온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특혜인데, 성도에게만 희생이 같이 올라오는 것이지,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꾀만 올라온다는 겁니다. 성도에게 꾀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 꾀와 같이 주님의 희생하심의 이유도 동반해서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게 곧 성도인데, 희생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희생을 동반해서 꾀가 올라오고, 꾀를 동반해서 희생이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니요, 오직 예수님만 옳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말이죠. 완전한 자아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예수를 믿지 않고 아는 사람의 특징 !!
그러면 인간의 이 교묘한 꾀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여기서 제목을 하나 걸어보겠는데, 그것이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아는 사람의 특징"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 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 1절에 '신령한 것'이 나오고, 그리고 3절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과, 반면에 예수님을 그냥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이 같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냥 "아하, 예수님이 주님이구나" 라고 아는 것과,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님이구나" 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영원히 그 운명이 갈라서는 것인데, 한 쪽은 지옥이고, 다른 쪽은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다" 라고 하면, 그때부터 무슨 생각이 날아가는고 하니까, '나 정립하기', '나 챙기기', 그런 것이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면 말이죠.
* 형님, 미안합니다 !!
예를 들어서, 여기에 두 사람이 있는데, 서로 올케와 시누이 사이인데, 그런데 2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다투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명절에 만나더라도 말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런 경우가 많은데, 남자들끼리는 술 한 잔으로 해결이 되기도 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시댁에 삐치면 발걸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날 서로 화해를 했다고 하면, "형님, 미안합니다. - 아니야, 나도 잘못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인간들끼리 서로 용서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지, 자기가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꾀가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그 꾀는 무엇을 목적으로 합니까? 자기 정립인데, 즉 '내 것 챙기기' 라는 겁니다. 그것을 '나의 나다움'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반면에 성경은 '주님의 주님다움'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주님의 주님다움'을 이야기하는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를 정립하려는 자기 꾀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 요령의 극치, 희생의 극치 !!
저는 이것을 '요령의 극치' 라고 부르고 싶은데, 물론 그 반대말은 '희생의 극치' 라는 겁니다. 인간은 희생이 아니라 요령을 부리는데 있어서 그 극치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어떻게 합니까? 인간들끼리 서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런 연장선에서 성경도 보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니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하니, 그래서 그 심판에 대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도 모든 생각이 어디로 모인다는 겁니까? '나의 나다움'을 정립하는데 필요한 재료로서 모인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 "당신은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전혀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령이지 희생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꾀를 내는 것인데, 교회에 와서도 꾀를 낸다는 말이죠. 이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아는 사람의 특징인데,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의 주되심'이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해진다는 겁니다.
* 고생고생 생고생을 !!
자기 정립, 물론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것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으로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이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이라고 했는데,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까? 그것은 평생동안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고생고생 생고생을 한다는 겁니다.
절에 다니다가 교회로 바꾸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디로 모아집니까? "나, 이렇게 괜찮게 살았다" 라는 것으로 다 모아지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를 정립하는 요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워진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무거운 짐이라는 말이죠.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분명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구태여 성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아서 정립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니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도 그 성령도 받겠다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요령이 된다는 겁니다.
* 성령의 오심, 그 한 방으로 !!
그런데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자기를 좋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성령을 받고 나면, 그동안 정립하고 축적한 모든 것들이, 괜찮은 '나'로 만들어놓은 것이, 성령의 오심, 그 한 방으로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가 지금까지 요령 것 살아온 것들이 다 싫어지는데, 이제는 요령을 피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봉무동과 불로동을 거쳐서 왔지 싶은데, 그렇게 오다가 보면 어떤 플랜카드가 걸려있는고 하니, "쾌거, 소송 없이 보상!" 이라고 적어놓았다는 말이죠. 여기가 대구공항 근처인데, 이제는 소송을 하지 않아도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국가가 보상해주기로 국회에서 통과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전에는 어떠했습니까? 그런 법이 없을 때는 소송을 제기한 사람에게만 보상을 해주었는데, 그러자 또 변호사가 돈을 떼먹고 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공항근처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보상금이 주어진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쾌거!' 라는 말이죠.
* 이게 바로 쾌거 !!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정립하지 않아도, 그렇게 꾀를 내지 않아도, 즉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다" 라고 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는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진짜 쾌거인데, 자기 꾀가 아니라 주님의 희생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자기가 성령을 챙기고 주님을 챙기지 않아도, 또한 남을 용서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서 자기를 천국에 보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도, 이제는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성령께서 알아서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가 되시니까, 자기처럼 꾀만 내는 요령 덩어리는 이제 잊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 첫째, 예수는 여기 없다 !!
그렇다고 하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를 안다고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 특징이 첫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는 여기 없다" 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이라는 말이죠. 2,000년 전의 인물이라는 겁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12장의 '신령한 것', 그리고 "성령이 오셔야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언급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이 듣지 않았다고 여기고,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평소에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없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안다고 여기는 사람의 특징인데,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동시대의 살아있는 사람들과만 만나는데, 이미 죽은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은, 그런 분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미 과거의 인물로서 지금 여기에는 없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역시 만날 필요가 없는데, 사람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만 붙들고 이야기하면 됩니까? 눈이 보이는 사람들만 붙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손자를 붙들고 "그만 놀고 공부를 좀 해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동시대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만 붙들고 닦달을 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 둘째, 예수가 나에게 해준 것은 없다 !!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가 나에게 해준 것은 없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생을 자기가 고생고생을 다해서 지금의 이만큼이라도 되었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첫 번째는 예수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이고, 자기 눈에 보이는 동시대의 사람들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가 예수님 쪽에서 자기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것인데, 착한 일을 해도 어디까지나 자기가 했고, 또한 교회에 헌금을 해도 자기가 했다는 겁니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 !!
어제 주일학교 시간에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사도행전 5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땅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는데, 그런데 막상 팔아보니 그 액수가 제법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 형편에 너무 과하다 싶어서 반을 남기고 반만 교회에 헌금을 했다는 것이죠.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인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지금 요령을 부리고 꾀를 내는데, 그러면 그 땅을 바치기 전에도 너의 것이었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 것이라고 하면 반만 바쳐도 되는데, 그것의 주인이 과연 누구냐는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너의 목숨도 너의 것인지, 그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목숨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입장에서는 우리 목숨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우리는 목숨이 없고,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목숨' 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 자세로 헌금을 하니,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정신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만 이 부부를 즉사를 시키고 만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그 당시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던지는 메시지인데, 즉 "돈만이 아니라 목숨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너희의 목숨도 너희의 것이 아니다. 아직도 내가 죽이지 않은 자들아,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봐라. 교회가 어떤 곳인지 봐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요령을 피우지 말라. 꾀를 부리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지금 주님은 어떠하다는 겁니다. "주님은 살아계신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너희가 없다고 여기는 주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주님, 그러나 그 주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다" 라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의 주제이기도 한다는 말이죠.
물론 교회당이라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즉 성령이 계시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안다고 하는 자들의 특징이, 첫째는 "예수는 여기 없다"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둘째는 "예수가 나에게 해준 것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셋째, 예수를 반듯한 사람으로 여긴다 !!
그러면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를 반듯한 사람으로 여긴다" 라는 말이죠. 이런 사람의 특징은 교회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가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반듯한 사람인데,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역시 반듯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의 꼬라지는 도대체 그게 뭐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소위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 자들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반듯한 것처럼 자기도 역시 반듯한 사람으로 정립이 되어있다고,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종교이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존경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예수님처럼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는 반듯한 사람이라는 말이죠. 자기도 반듯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희생이 아닌데, 꾀를 낸다는 말이죠. 괜찮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데, 왜 희생을 합니까? 희생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를 아는 자들은 자꾸만 남들을 의식하는데, 즉 "너희는 나를 지켜주고 보호를 해주어야한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말이죠. 주위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서 호응을 해줄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호응이 별로 없는데(ㅋㅋ), 요즘 기독교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불론 욕을 들을 짓을 골라서 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고 안다고 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 나를 건드리지 말라 !!
그들은 희생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 오히려 예수님의 반듯함에 근거해서 자기도 반듯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를 존경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나는 그런 가치가 있다" 라는 것인데,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나를 사랑해달라" 라는 겁니다.
만약에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언급하지를 않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여러분은 "목사님, 그러면 기독교 신자는 없네요" 라고 하지 싶은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 꾀를 내면서 살아가고, 희생은 손톱만큼도 할 마음은 없고, 그리고 비판하는 것은 끝내준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가 희생으로 살면 됩니까?"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는 것입니까? 아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나' 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도 예수님을 본 받아서 희생을 하면서 살아야지" 라고,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물론 여러분은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 같은데(ㅋㅋ), 설령 "주를 위해서 죽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령이고 꾀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망가지든 깨지든,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 중구난방, 엉망진창 !!
'중구난방(衆口難防)' 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도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자주 들었는데, 정확한 의미는 몰랐어도 "아하, 엉망이구나" 라고 하는 정도로는 알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여러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렵다" 라는 의미인데, 여러 명이 마구 지껄인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너무나 어설프니 여기서 이야기하고 저기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비난하는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인생은 중구난방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도 전혀 괜찮다는 겁니다. 오히려 남들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을 꾀를 내는 것이고, 그것은 주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괜찮은 자기를 수립하는데 혼신의 힘을 모두 다 기울인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악마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으려고, 중구난방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령을 받았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얼마나 더 속아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기 단도리를 하려고 하는데, 서울 사람들은 단도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던데 말이죠. 이것은 일본말이 아니고, 그것은 다른 의미이고, 우리나라의 사투리라는 겁니다. 자기 단속이라고 할까요? 이제는 자기 단속을 좀 하지 말자는 것이죠. 이것을 제가 언젠가 "제발 정신을 차라고 살지 맙시다" 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가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그러니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냥 "아하, 내가 이 정도로 망가졌구나" 라고 하면서, 이제는 양반노릇을 그만 하자는 말이죠. 재미도 없다는 겁니다. 중구난방, 엉망진창, 그렇게 살면 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치매가 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왔다는 겁니다. 소송을 하지 않아도 보상을 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쾌거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반대로 생각했는데, 거룩하게 살고 경건하게 살면,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제대로 챙기면 천국에 넣어줄 줄로만 알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면 성령이 올 이유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를 보겠는데, 교재 149페이지입니다.
------------------------------------------ * 여기에 죄인이 나오는데, 앞에서 전도서에는 죄인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 7장 26절에 나오는 죄인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상대적인 죄를 말합니다. 절대적인 죄란, 절대적인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끌고 올 때, 그때까지 끝까지 남는 죄를 의미합니다. ------------------------------------------
(전 7: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여기에 "절대적인 죄란, 절대적인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끌고 올 때, 그때까지 끝까지 남는 죄를 의미합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장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설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어려우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죠.
*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다 !!
여기서 무슨 공식이 나오는고 하니,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일단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그 다음에 이 의로움을 갉아먹는 요소를 두고 인간들은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죄는 절대적 죄가 아니고 상대적인 죄인데, 그러니 자기가 노력하면 피할 수 있는 죄라는 말이죠. 그리고 지었다고 해도 반성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는데, 그게 어떤 이성이고 하니, 반성하는 이성이란 말이죠. 그것을 칸트가 말했는데, 즉 "인간은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날이 갈수록 어떤 선의 목적에 접근해갈 수 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칸트의 주장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성화론이나 다 같다는 말이죠. "인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뭔가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반성을 하니, 그렇게 반성한 만큼은 조금씩 거룩의 성스러움에 접근이 가능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절대적인 죄, 상대적인 죄 !!
그렇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것은 다 상대적인 죄가 되고 마는데, 하지만 이 상대적인 죄는 무엇을 가리는고 하니, 절대적인 죄를 가리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속했습니까? 어둠에 속했는데, 그런데 그것은 개별자를 붙들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너는 태어날 때부터 어둠에 속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 어둠은 절대적인데, 반면에 절대적인 빛은 누구뿐입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빼놓고는 모두가 다 절대적인 어둠이고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절대적인 어둠인데, 그런 절대적인 어둠 속에 있으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티를 낸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의롭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나쁜 짓을 줄여나가면 그만큼 의롭고, 반면에 나쁜 짓이 늘어나면 그만큼 그만 악한 쪽으로 간다. 따라서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성화가 되면, 천국에 갈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절대적인 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죄가 죄를 가리는 형국이 된다는 말이죠.
* 우리 피와 살을 바꾸자 !!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시스템, 그게 용서의 시스템인데, 그것은 절대적인 죄를 묻겠습니까? 상대적인 죄를 묻겠습니까? 당연히 절대적인 죄를 겨냥해서 묻는데, 따라서 예수님은 잔소리를 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미처 모르는, 우리는 도저히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겨냥해서 "나의 살과 피와, 너의 살과 피를 바꾸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과 피' 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행함이 나오는 근거지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너의 몸이 문제가 있으니, 너의 몸과 나의 몸을 바꾸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내 살과 피를 먹어라" 라는 것인데, 바꿔서 말하면 "너의 살과 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다시 말해서, 꾀를 부려서 자기 자신을 고상하게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정신줄을 놓고 살면 된다는 것이죠. 지금 이 나이에 정신을 차려도 소용이 없지만, 그렇게 정신을 차려서 살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대적인 죄를 적게 짓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렇게 되면 잘난 자기가 계속해서 수립이 되고 정립이 된다는 겁니다.
* 남자라는 이유로 !!
'완전한 사랑' 이라는 저의 책에 보면, 남자 가수의 노래가 나오는데, 즉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자라고 해서 울지 않는 게 아니고, 남자도 울고 싶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자라는 체면 때문에 억누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이제는 그만 억누르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바바리 코트의 깃을 세우고 홀로 그 낙엽을 밟으면서 흐느끼고 싶다는 겁니다. 남자는 평생에 세 번을 울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낙엽이 지는 가을만 되면, 아니 매일같이 울고 싶다는 말이죠. 즉 이제는 정신줄을 놓고 살고 싶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를 믿으니까 그러한데, 소송도 없이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죠. 소송을 걸지 않았는데 보상금이 통장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즉 성령으로 영생이 온다는 것이죠. 너무나도 간단한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게 너무 깔끔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그동안 자기가 지켜왔던 자아성과 체면을 한꺼번에 짓밟아버리니까 믿지를 못하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동안의 모든 관심사는 자기 챙기기, 즉 '괜찮은 나'를 정립하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막상 날아오는 복음은 자기를 개무시를 하고 차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감격스러워야 하는데, 왜냐하면 평생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그만 빠져나가고 없다는 말이죠. '나 잘남' 이라고 하는 그 무거운 짐이, 그게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겁니다. 마치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터지듯이, 그렇게 사라졌다는 말이죠. 언제까지 그것을 들고 있을 겁니까? 죽기 전에 없애버리자는 겁니다. 언제까지 그런 체면과 위신을 세우면서 살아갈 것이냐는 말이죠,
* 절대적인 죄인 !!
그러니 절대적 죄인데, 우리가 바로 절대적인 죄인이라는 겁니다. 상대적인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꾀를 내어서 "이것은 죄가 아니겠지" 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옥에 갈 죄인인데,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시스템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깨진다는 겁니다. 모두들 성공을 하려고 난리인데, 우리가 성공을 해서 무엇을 할 겁니까? 우리는 평생 실패만 해도 과분하다는 말이죠.
어제 설교시간에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실패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뒤에 앉아있던 두 분이 "What?"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인데,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동안 조금씩 조금씩, 그런 자기 잘남을 위해서 교회에 다녔다는 겁니다. 복음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냥 자기 정립을 하기에 바빴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7장 26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전 7: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여기에 어떤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그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사망보다 더 지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교재 148페이지에 보면, 김기덕 감독의 '시간' 이라는 영화를 예를 들었다는 말이죠.
◈ 김기덕 감독의 '시간' !!
------------------------------------------ * 여자 주인공 세희와 남자 주인공 지우는 서로 사랑했는데,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우의 사랑이 변했음을 느낀 세희는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남자가 진정 나를 사랑했을까? 과거가 아닌 지금도 나를 사랑할까?" 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데, 즉 "저 남자가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나면 나를 차버리지 않을까?" 라고 하게 됩니다. ------------------------------------------ * 여자가 남자를 사랑해서 성형수술을 하는데, 성형수술을 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면 그만인데, 그런데 성형수술 이후에 그만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남자가 성형을 수술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혹시 수술을 하기 이후의 자신보다 수술을 이전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라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
이게 김기덕 감독의 '시간' 이란 영화내용인데, 요즘은 성추행 문제로 욕을 많이 듣고 있는데 말이죠. 봉준호 감독보다 상을 더 많이 받았지 싶은데, 그의 영화는 전부가 나름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해답이 없다는 것인데, 그게 인간들의 꾀의 결론이기도 하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에드거 엘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라는 단편소설이 나오는데, 교재 151페이지입니다.
------------------------------------------ * 에드거 엘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있는데, 여기에는 정작 편지의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비밀입니다. 단지 편지 자체가 누구의 손에서 누구의 손으로 흘러가는지를 주목하라는 겁니다. 왕비가 편지를 도둑맞게 되는데, 그 편지가 왕비의 손에서 장관의 손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장관의 손에 편지가 있으면, 편지내용과는 상관없이 편지를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자가 됩니다. ------------------------------------------ * 그러면 권력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찾고 있는 그 빈자리에 자기가 놓여있게 되면, 그 자체로 권력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기호, 즉 언어의 흐름입니다. 그러니 언어라는 것은 사물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A란 무엇인가?' 라고 하면, B와 C 주변의 배치에 따라서 빈자리에 따라서 A가 생기고, 그리고 주변에 있는 B와 C는 A의 의미를 만들어줍니다. 즉 B는 C, D, A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 * 예를 들어서 '미장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니, "미장원은 제과점 옆에 있고, 또한 제과점은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추가적인 의미가 없는데, 그것은 다만 주변에 배치된 상태에서 파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 ※ '도둑맞은 편지' 내용요약 - 소설은 왕비가 한 통의 편지를 배달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그 편지는 절대로 왕이 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때 마침 왕이 내실에 들어오고 왕비는 편지를 탁자 위에 펼쳐 놓는다. 업무보고를 위해서 왔던 D장관은 이런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의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음 왕비의 편지를 집어들고 나간다. 이후 왕비는 파리의 경시총감에게 비밀리에 편지행방을 찾도록 지시하는데, 그가 경찰을 동원해 8개월 동안 D장관의 관저를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발견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경시총감이 뒤팽에게 도움을 청하고, 뒤팽은 D장관으로부터 편지를 되찾아서 보상금도 받고, 동시에 빈에서의 악연에 대한 복수도 감행하게 된다. D장관은 벽난로 아래로 매달린 편지꽂이에 편지를 꽂아두었고, 이를 단번에 알아본 뒤팽은 장관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자신이 가지고 간 편지를 꽂아놓고, 문제의 편지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 cafe.naver.com/paideia21 ------------------------------------------
*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즉 "A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말이죠. 다만 자기는 B 옆에 있고 C 뒤에 있고 D 앞에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주위에 배치된 것들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너는 누구야?" 라고 하면, 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합니까?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사실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그것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
다만 자기 주변에 자기를 보고 착하다고 해주는 부모가 있다고 하면, 자기는 착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서 그만 총도 잘 쏘지 못하고 하면, 그만 형편없는 군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주위의 평가에 따라서 자기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500:1'의 엄청난 경쟁을 뚫고 삼성에 입사를 했다고 하면, 주위에서 축하를 해주고 난리라는 말이죠. 그런데 일단 출근을 하면 과장과 같은 사람은 바빠서 만나지 못하고, 자기 책상의 모니터에 보면, 자기가 그 날에 해야할 일이 120가지가 메일로 온다는 겁니다. 물론 들었던 이야기인데, 밤을 세워서라도 해내야 한다는 말이죠. 일도 하지 않는데 그냥 월급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입사원이 그것을 하려고 하면 그야말로 난리도 아닌데, 그래서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가르쳐 달라고 사정서정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잘 가르쳐주지 않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매일같이 "그만둬!" 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중소기업도 그러하겠지만, 대기업은 그런 스트레스가 엄청 더 심하다는 겁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
여기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다시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라고 하는데, 그러니 평소에 우리 곁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같은 인간들끼리 살았는데, 주님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옆에 인간이 자기를 좋게 평가해주면 자기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악한 놈이 된다는 겁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의하면 성령이 왔다는 겁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그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너는 내 백성이다"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천국백성이라는 말이죠. 이게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방금 에드거 엘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라캉이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냈다는 말이죠. 즉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찾는가? 그것을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하,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때로는 '나는 저런 사람이구나' 라고, 그렇게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라캉이 이 세상에 내놓은 해답인데, 지금도 교회에 다니지 않고 시간만 나면 여기저기로 놀러 다니는 사람들 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다만 살려고 요령과 꾀만 낼뿐이라는 것이죠.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인간은 주변에 배치된 상태에서만 자기를 파악하게 되는데,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면서 계속해서 찾게 됩니다. 그런 것은 어디서 찾는고 하니, 현재 자기에게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임시적으로나마 그렇게 여깁니다. ------------------------------------------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은, 자기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찾는 것인데, 그래서 이것도 해봤다가 저것도 해봤다가,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퇴직을 하고 나서는 빵집을 했다가, 편의점도 했다가, 카페도 했다가,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현재 자기에게 없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금도끼가 이미 연못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라고 하면, 나무도끼를 들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합니다. 문제는 금도끼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금도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일방적인 희망인데, 그것이 곧 삶의 목표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
우리 인간에게 평생동안 자기 만족이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금도끼가 어디에 있을 것만 같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을 확 꽃피워줄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다는 겁니다. 자기 때가 아니라면 자기 자식 때라도 말이죠. 자기 인생의 수고로움을 한 방에 날려줄 그 무엇이 있을 것만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해서 찾고 있는데, 끊임없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금도끼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인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 삶의 목표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해답이 없는 이 세상에 내놓은 해답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있지도 않은 희망에 그렇게 목이 꿰인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 야, 이놈이 인물일세 !!
그래서 손자를 보고는 "야, 이놈의 인물을 봐라. 커서 분명히 뭔가 일을 할 것만 같구나" 라고 하는데, 물론 되기는 되는데, 어른이 된다는 겁니다(ㅋㅋ). 3살 때는 천재가 아닌 아이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그렇게 성공한 손자의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 수립이고 자기 정립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했을 때, "이제 나는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누구냐?" 라는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
그러나 철학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계속해서 여기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는데,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도 얼마나 잘 아는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서양사회가 기독교 사회였으니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정작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 썩은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예수를 건전하고도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인데, 왜 예수를 인정해주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를 알아주는 자기도 역시 괜찮은 인간이라고 인정해달라는 것이란 말이죠. 인간은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있어도 그냥 사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다오. 나를 사랑해다오" 라는 것인데,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런 어린아이의 속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나를 보호해주세요. 나의 아쉬운 것을 다 채워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게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그대로 다 노출이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밖에 모르는데, 희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저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한 요령만 늘어난다는 말이죠.
여기서 다시 교재 14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상대적인 죄를 말합니다. 절대적인 죄란, 절대적인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끌고 올 때, 그때까지 끝까지 남는 죄를 의미합니다. 그 절대적인 죄는, 그 죄마저 용서해주는 어린양의 죽음이 완성될 때, 모든 사실이 다 드러납니다. 그 이전에 나타나는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해소하는 죄는 절대적인 죄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여호와의 언약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인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
그런데 절대적인 시스템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즉 절대적인 죄를 전제로 해서 그 죄를 용서해주는 시스템, 그러한 하나님의 의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자체적으로 죄를 해소하는 짓들은 모두가 다 부질없었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는 말이죠.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말의 뜻은, 가능하면 자기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죄마저도 희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죄를 만들어놓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자기 잘난 척을 하는 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죄가 아닙니다. ------------------------------------------
그러니 비록 자기에게 죄가 있더라도, 거기에 의를 더하게 되면 없앨 수 있는 죄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은 맞지만, 자기에게서 죄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죄를 만들어놓고 자기 마음대로 없애면서 자기 잘난 척을 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전도서 7장 27절에서 29절을 보겠습니다.
(전 7:27)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전 7:28)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전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 여자를 디스하는 솔로몬 !!
여기에 28절에 보면 갑자기 여자를 디스하는데, 즉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여자에게 열을 받아서 즉흥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연구를 해보니, 여자들 중에서 지혜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더라는 말이죠. 즉 시건이 든, 철이 든 여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왜 여기서 이렇게 여자에 대해서 혐오성 발언을 갑자기 하는 겁니까? 이제부터 그 내막을 살펴보겠는데, 그렇게 하려면 7장 26절을 다시 봐야하는데 말이죠. 그것이 교재 150페이지에 보면 설명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전 7: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특히 솔로몬의 경우에는 여자가 무려 천 명이었다는 말이죠. 물론 이런 구조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구조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죄가 이 세상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는지를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와서 죄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구조로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달리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 남자야, 너희가 여자의 심정을 알아?
남자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데, 남자가 보기에도 미안한데, 특히 아내에게는 말이죠. 그런데 솔로몬의 경우에는 천 명의 여자를 거느렸는데, 그런 것을 미안해하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꽂히는 죄보다는 덜 하다는 것이죠. 물론 요즘과 같은 인권시대에 이런 말을 했다가는 완전히 미친 놈 소리를 듣겠지만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남자야, 너희들은 여자를 몰라"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이 바보야, 이 아담아, 너는 하와를 몰라" 라는 겁니다. 하와가 어떤 마음으로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그 심정을 아담은 모른다는 것이죠. 아담은 하와가 아니기에, 즉 여자가 아니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이유를, 즉 여자가 남자에게 알리지를 않고 몰래 자기가 먼저 따먹은 이유에 대해서, 그것을 남자는 선악과를 두 번째로 따먹었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첫 번째로 따먹은 여자의 그 심정을 말이죠.
그러면 여자는 그 심정을 압니까? 여자의 심정은 아는 것이 아니고, 여자가 알든 말든 간에, 여자를 통해서 그것이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자가 한 남자에 꽂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것인데, 그렇게 해서 남자를 삼켜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꾀를 낸 것이란 말이죠.
*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여자 !!
지금 솔로몬이 여기 전도서 7장에서 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29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라고 하면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는 겁니다. 먼저 따먹은 자가 여자이고, 두 번째로 따먹은 자가 남자인데, 그래서 먼저 따먹은 여자에게서 남자보다 더 죄가 강렬하게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사랑하도록 하는데, 그러니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기 29절에 의하면 그것은 마치 수갑을 자기에게 채우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 라는 수갑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게 죽음보다도 더 독하다는 말이죠.
흔히 여자를 보고 욕을 할 때 뭐라고 합니까? "이 독한 여자야!" 라고 하는데,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어떤 심보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을 때 "기어기 저 선악과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남자 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여자 쪽에서 먼저 나오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자 안에는 계속해서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기능이 발산되는데, 주님이 여자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차원이 아니고 여자가 그런 일을 맡았다는 것이죠. 즉 역할이 그렇다는 말이죠.
* 남자 쟁탈전 !!
제가 고등학교를 남녀공학을 다녔는데, 여학생들이 보기에 남학생들은 참으로 철딱서니가 없다는 겁니다. 남자들은 어리버리하다는 말이죠. 그게 대학교를 가도 여전한데, 그래서 예쁘장한 남자가 자기 과에 신입생으로 들어오면 여자들이 그냥 놔두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선배 여자들이 그렇게 나오는데, 여자들끼리 서로 쟁탈전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자는 그것을 전혀 모르는데, 그냥 여자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가져서 좋아하는 줄로만 알고, "누나, 누나" 라고 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마구 만나면서 돌아다니는데, 그 여자들이 자기의 간과 쓸개를 다 빼먹는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는 호구고, 여자는 그야말로 완전히 구미호라는 말이죠.
이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천 명의 여자와 살아보니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여자 쪽이 아니라 남자 쪽에 있다는 겁니다. 여자들에게 욕을 들어도 할 수 없는데, 전도서 7장을 다시 보면, 27절에서 29절입니다.
(전 7:27)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전 7:28)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전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 이제야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이유를 알겠다 !!
솔로몬이 모든 것을 낱낱이 살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자기가 천 명의 여자와 같이 살아보니, 어떻다는 겁니까?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남자에게는 그래도 희망이 있는데,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한 명의 남자는 솔로몬 자신인데, 그런데 여자에게는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솔로몬은 그렇게 천 명의 여자와 같이 살아보고 나서, 이제야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이유를 알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을 대표해서 여자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 사랑은, 동질성 찾기 !!
여기 교재 150페이지에 보면 사랑에 대해서 나오는데, 사랑이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 사랑을 하게 되는데, 즉 어릴 때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 이미지에 닮은 사랑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동질성', 혹은 '동일성'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를 닮은 대상을 찾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죠. 자기와 통하는 대상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대상을 찾아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을 절대로 사랑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사랑을 다시 회수하고 소환하는 식으로 사랑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도, 비록 그 여자가 있어도 그것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사랑했던 그 시절의 사람을 그 여자를 통해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게 비록 동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즉 "내가 사랑한 것은, 지금의 네가 아니고 과거의 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에 자기가 그 여자에게 반했을 때는, 그것은 자기가 찾고 싶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되비춘다는 말이죠.
* 나르시시즘 !!
그것을 '나르시즘' 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나르시시즘' 인데,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것인데, 우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반했다는 겁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기애' 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이게 중요한고 하니, 이것이 어릴 때의 자기 모습, 사실 아이는 자기 모습이 없는데, 자기를 정성을 다해서 키워준 엄마의 모습이 곧 자기 모습이 된다는 말이죠.
--------------------------------------- ※ 나르시시즘(Narcissism) - 자신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서, 자기애(自己愛)라고 번역한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자기와 같은 이름의 꽃인 나르키소스, 즉 수선화(水仙花)가 된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와 연관지어,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가 1899년에 만든 말이다. 자기 육체를 이성의 육체를 보듯 하고, 또는 스스로 애무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한 여성이 거울 앞에 오랫동안 서서 자신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황홀하여 바라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나르시시즘이다. 그러나 이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S.프로이트가 이를 정신분석 용어로 도입한 뒤부터이다. 그에 의하면 자기의 육체, 자아, 자기의 정신적 특징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가 쏠려 있는 상태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두산백과에서 ---------------------------------------
그러면 그 아이는 크면서도 누구를 찾는고 하니,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을 찾게 되는데, 그러니 자기를 그대로 빼다박은 사람은 찾게 되는데, 그것이 나르시즘이고, 그것을 흔히 사랑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인데, 그러니 결국 '자기 사랑' 이라는 말이죠. 자기에게 매료가 되었다는 것이죠.
* 악마의 심정으로 !!
그러면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는 악마의 심정으로 따먹은 것인데, 그러면 결국 악마의 심정은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 절대화'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에게 있는 악마의 모습인데,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겁니다. 즉 "저 지식이 있으면 나는 신처럼 된다" 라는 것이죠.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그것을 어디서 찾을까? 아하, 저것을 따먹으면 되겠구나" 라고 해서 따먹었다는 말이죠.
(녹취 구 - 그러니 악마가 유혹하기 이전부터 이미 선악과를 찾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후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인데, 이것이 바로 절대적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라는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아다닌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어떠한 대상을 찾게 되면, 하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만 사랑하는데, 그러니 그 사람은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 여보, 밥도?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이 아내를 보고 "여보, 밥도?" 라고 하면, "여기 있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것도 반찬이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줘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는 "내가 니 시다바리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는 "내가 너에게 이번에 백화점에 가서 300만원짜리 옷을 사주었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자는 "왜 사주었는데?" 라고 하면, 남자는 "밥을 잘해라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지독하게 "나만 나다워야 한다" 라는 그 고집스러움, 그 짓을 여자가 먼저 저질렀고, 그리고 남자도 여자가 따먹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남자도 똑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그렇게 꾀를 낸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희생은 없고, 오직 꾀만, 요령만 부리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물론 남자와 여자가 다같이 말이죠.
* 우리 인간은 희생할 수 있는 배경이 없어 !!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늘 강의제목은 '요령의 극치' 인데, '요령과 희생'으로 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희생을 좀 하고 싶어요"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희생할 수 있는 배경이 전혀 마련이 되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희생을 해도 그 희생조차도 누구 사랑으로 돌아옵니까? "내가 희생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교회가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워서, 그래서 "내가 교회를 위해서 희생해야지" 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 교회가 남의 교회입니까? 자기 교회입니까? 자기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헌금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교회는 자기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남들보다 자기가 투자를 많이 한, 그런 자기가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헌금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우리 인간은 희생할 수 있는 바탕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결론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인데, 그러니 누구를 잊으라는 겁니까? 자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제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주님은 자기 사랑밖에 모르는데, 하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과 같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들러리인데, 그래서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가짜인지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구약 아가서의 주제라는 말이죠. 아가서는 사랑이고, 전도서는 허무고, 잠언서는 이웃사랑이고, 그리고 시편은 메시야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래서 "나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해야지" 라고 해도, 그것은 결국 그 결과는 누구에게로 돌아옵니까? 결국은 자기 영광인데, 즉 희생이란 선한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는 괜찮은 존재가 되겠다는 것인데, 이제는 요령을 그만 부리고 희생 쪽으로 나가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꾀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꼼수라는 말이죠.
* 정신줄을 놓고, 가볍게 가볍게 !!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나' 라는 의식이 있는 이상, 그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자신을 없애버리는데,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이 되는데,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지 말라는 겁니다. 정신줄을 놓고 살라는 말이죠.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게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 물론 이게 도를 닦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얼마나 편안한 삶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 참으로 이상한 집단 !!
이제 진짜 마지막인데,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부터 시작이 되는데, 이스라엘은 기존의 집단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합세한, 그야말로 참으로 이상한 집단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인간들과 인간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이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죽음 어린양, 즉 희생이라는 말이죠. 그 희생을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 말미암아서, 물론 이 인간들은 죄 덩어리이고 요령꾼들인데, 여기에서 누구만 희생을 했습니까? 어린양이 되신 하나님이 희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요령꾼들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모여서 살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만 증거해야 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누구만 증거해야 합니까? 오직 주님의 희생만 증거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이고, 또한 참된 교회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도, 저희들에게는 그 내막을 알려주시기 감사합니다. 저희들 안에 희생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는 그분의 지체로서 오직 그분만을 증거하면서,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가볍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1,11 오후 3시에 마침.
무거운 여자, 가벼운 남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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