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예능인 1910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0. 23. 18:44
2019-10-14 18:53:23조회 : 63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2 - 예능인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2 - 예능인

19,10,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4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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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들이 아무리 인생을 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잡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y=x' 라는 겁니다. 'y=x' 라는 것에서 어떤 변곡점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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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수학공식 !!

여기에 'y=x' 라는 수학공식이 나오는데, 이런 수학공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y=x' 라는 수학공식은 분명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함축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하니까 사람들은 짜증을 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y=x' 라는 공식을 풀면 되는데, 하지만 풀면 엄청나게 길게 될 수밖에는 없고, 그래서 나중에는 이 공식이 편리하고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간단하게 풀어보면, "'x' 라는 자리에 아무 것이라도 넣으면 'y'가 나온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x'는 원인이고 'y'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어떤 원인을 집어넣으면 필연적으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y=x'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수학공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데 막상 이 'y=x' 라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인생과도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겁니다.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서 'y'가 나온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하면 천국에 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우리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다 표현해주고 있는데, 만약에 'x'에 아무 것도 집어넣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x'는 '0'이 되는데, 그러면 '0=0'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맞다는 말이죠. 그리고 'x'에 '1'을 넣게 되면, 그러면 '1=1'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x'에 '행함'을 넣게 되면, 'y'에서는 그 만큼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그래프로 그리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1을 넣으면 1, 또 2를 넣으면 2, 그리고 3을 넣으면 3,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y=x' 라는 그래프라는 말이죠. 지금 분위기가 마치 노인네들의 수학학원처럼 여겨지는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보면 "수학이라는 것 자체가 곧 인생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즉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 라고, 그게 곧 인생이라는 겁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운동을 하게 되면 오히려 온 몸이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프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9장 1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여기에 보면,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y=x' 라는 공식이 그만 깨지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아는 인생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행함대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인데, 즉 'y=x' 라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을 그만 깨트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공식을 깨트리는 것인데, 그러니 먼저 인간이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저지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주님의 발자국 !!

제가 어릴 때 가족이 13명의 대식구였는데, 그러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정신이 없었다는 겁니다. 칼국수를 하나 만들려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밀가루 반죽을 해서 홍두깨로 밀려고 하면 대청마루도 그만큼 넓어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밀어놓으면 키우던 강아지가 한 마리 와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거기에 발자국을 남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머니에게 쫓겨난다는 말이죠.

바로 그렇게 홍두깨로 밀어놓은 것이 인간세계이고, 그리고 그 발자국은 주님의 발자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강아지가 할머니에게 쫓겨나듯이 주님이 이 세상에서 쫓겨났다는 말이죠. 즉 'y=x' 라는 일을 하는데, 왜 훼방을 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하는 일을 방해를 놓는 것은, 주님이 그냥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전도서 9장 1절 말씀에 입각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한다" 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는 인간의 지평 위에 주님은 발자국을 남긴다는 겁니다. 즉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하얀 밀가루 반죽 위에 주님의 발자국이 찍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렇게 찍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서 천국에 가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 난입해서, 그것을 그만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즉 "네가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와서는 "아니야.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우리의 인생에서 있어서 '그런 식' 이라는 것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 먼저 '그런 식'이 있어주어야 !!

인간이 태어나서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인데, 자기 이익이고 자기 행복인데, 즉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구원받고 내가 천국에 간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먼저 '나'를 위해서 사는 일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도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말로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것조차도 어디까지나 자기 일이라는 말이죠. 바르게 살기, 착하게 살기, 말씀에 순종하기 등등, 그런 것도 다 자기에게 손해가 아닌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님께서 오셔서 전도서 9장 1절의 말씀으로 찍어버리는데, 즉 "네가 하는 일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이죠. 그러면 이게 구약이니 율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게 신약에 오면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말씀의 완성을 추상적으로 보지 말고, 그 말씀의 완성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육신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 이루심'의 노선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고정이 된다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십자가의 증인 !!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의 'y=x' 라는 공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y=x' 라는 공식을 계속 유지하려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게 되면, 그 사람은 바로 십자가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죠.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증인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를 우상시하는, 그런 우상놀음이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거기에 발자국을 남겨버린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노선이 있는 반면에, 여기 'y=x' 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노선인데, "내가 행한 대로 거둔다" 라는, 즉 "내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겠다는 것을 좌절시켜버리는데, 그러면 자기가 예수를 믿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이익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니란 겁니다. "열심히 해봐라. 내가 그것을 보고 천국에 넣어주겠다" 라고 하시는 분이 아닌데, 그렇게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신약에 오면 그렇게 방치하지 않다는 것을 "성령이 임했다" 라고 하는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거기서 경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과 성령이 하는 일이 서로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킨다는 말이죠.

* 성령이 임하면, 충돌이 !!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하겠는데,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서 밀가루 반죽을 넓게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이 있어주어야 개가 발자국을 남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칼국수를 만들지도 않고, 그래서 넓게 펼쳐놓은 반죽도 없다고 하면, 그러면 개가 아무리 대청마루를 뛰어다녀도 발자국은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홍두깨로 밀어놓은 하얀 밀가루 반죽이 넓게 펼쳐져 있어주어야 하는데, 달리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이 되지 않는 재료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주의 일만 하고 나의 일은 하지 않아야지" 라는 것은 없는데, 즉 "주의 일만 차곡차곡 모으고 연결을 시켜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지" 라는 것은, 그것은 'y=x' 라는 것에 해당된다는 것이죠. 성령의 일이 아니고 말이죠.

"교회에 다니지 말라.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닌데, 칼국수는 먹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밀가루를 반죽해서 홍두깨로 넓고 편평하게 밀어보자는 말이죠. 그것을 종합적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셨는데,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제가 이런 강의를 하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분노가 폭발하는지 모르는데, 어떤 분은 댓글을 "이근호 목사는 모든 성도를 다 내쫓는다" 라고 달아놓았다는 말이죠(ㅋㅋ). 사실은 내쫓기는 정도가 아닌데, 왜냐하면 주님의 발자국은 없고 자기 발자국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발자국을 이야기하니 화가 나서 뛰쳐나간다는 말이죠. 최근이 아니라 10년 전에 이미 달렸다는 겁니다.

* 기도란?

여기서 로마서 8장 26절을 보면, 기도에 관한 구절인데 말이죠. 기도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이 대목이 들어가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 앞에서 우리는 연약하다는 말이죠. 아무리 'x'에 자기 행함으로 넣어서 'y'로 결과를 내려고 해도, 연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받아주지 않는데, 연약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되는데, 여기서 '빌 바'를 제거하고 나면 '알지 못한다' 라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지한데, 엉터리이고 모두가 가짜라는 말이죠. 우리가 제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한 용어를 동원해서 기도해도, 모든 것이 다 무지하다는 겁니다.

* 인간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것만 알아 !!

인간자체가 무지한데,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어쩌고 저쩌고 해도 여전히 무지하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1초 뒤에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압니까? 여러분은 안다고 여길지 몰라도, 모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다리를 뻗었는데, 그런데 그만 여기에 바치고 말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죠.

인간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것만 아는데, 그래서 자기가 집에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왔다고 하면, 모르는데 주께서 알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저게 아들이구나" 라고 말이죠(ㅋㅋ). "네가 아들이 맞지? - 예, 맞습니다. 요즘 아버지가 치매에서 많이 나아지셨네요" 라고, 대화가 그렇게 진행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동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막상 따지고 보면 바깥에 아들이 오더라도 드라마에 푹 빠져있으면 아들이 온 것도 모른다는 겁니다. 어떤 현상, 즉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 왔을 때 그것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주님이 보이도록 조치를 하셨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부터 정신까지, 세밀하게 모든 것을 다 관리하신다는 겁니다.

* 어, 저 자전거가 왜 나에게 다가오지?

나이가 들어서 운전을 하면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고 하니, 자기가 운전을 한다는 것 자체를 그만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집에 그냥 앉아있는 것과 운전을 하는 것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는고 하니, "이상하다. 저 자전거가 왜 나에게 다가오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자전거에게도 간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죠.

그러던 와중에 자기가 지금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그것은 누가 깨닫게 하신 겁니까?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인데, 그 어떤 순간이라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성도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 !!

지금 제가 하는 말에 약간의 어폐가 있는데, 이것을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 땅에 사는 행운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께서 더 살게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죽고 싶은 혜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우리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서 이 지옥과 같은 인생을 더 겪어야 합니다" 라고 이해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죽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사명이 남아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운전하는 것도 사명의 일종인데, 어떤 사명인고 하니까, "운전도 주님이 도와주어야 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운전을 하면서, 그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이죠.

* 오늘 저녁은 칼국수다 !!

그래서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깨닫게 하시는 순간, 우리는 모든 고마움을 주님 몫으로 돌리게 되는데, 그러니 칼국수를 먹고 싶어서 밀가루 반죽을 해서 먼저 깔아놓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칼국수다" 라고, 그렇게 먼저 자기 의도와 의사가, 즉 'y=x' 라는 방정식이 먼저 깔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전도서 9장 1절의 말씀을 가지고 "그게 아니야" 라고 하시면서 발자국을 남기는데, 즉 "너는 네가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몰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 야곱과 에서 !!

야곱이 바로 이러한 점을 알았는데, 야곱에 형 에서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그런데 로마서 9장 13절에 보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사실을 에서와 야곱 중에서 누가 알았습니까?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에서의 경우에, "야곱은 천국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간다" 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어디까지나 'y=x' 라는 겁니다. 에서는 자기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천국에도 갈 수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도록, 그렇게 창조되었단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다.

물론 야곱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얍복강가에서 누가 나타났습니까? 천사가 나타났는데, 그런데 그 천사는 야곱의 과거행적을, 즉 그의 윤리와 도덕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말이죠. "야곱아, 너의 평소 성질이 왜 그렇게 더러워?"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천사가 야곱에서 밤중에 나타난 것은, 근원적으로 야곱이 야곱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착각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데, 야곱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천사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말이 천사이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야곱이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살았다" 라고 고백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장소 이름을 '브니엘'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야곱은 결코 이스라엘로 넘어설 수가 없어 !!

하나님이 야곱에게 묻는데, 즉 "야곱아, 너는 네가 야곱으로 보이는가?" 라고 말이죠. 그러자 야곱은 "예, 제가 야곱입니다" 라고 하니, 하나님은 "아니야. 너는 이스라엘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같은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죠.

야곱은 결코 이스라엘로 넘어설 수가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야곱의 힘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이 개입하시게 되는데, 그래서 '브니엘', 즉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라는 겁니다. 야곱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야곱은 칼국수의 펴진 밀가루 반죽이고, 이스라엘은 그 발자국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올 때는 도와주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너는 따로 있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알려줌의 기준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무지한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무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y=x'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내가 행한 대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무지한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이 아니라 '나' 라는 것이 주체이고 주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러니 우리는 모른다고 해야하는데, 그렇게 모른다고 하면 아는 사람인데, 그런데 자기는 안다고 여기니 그만 모르는 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소경이 자기를 소경이라고 하면 소경이 아닌데, 그런데 소경이 아닌 자가 자기는 소경이 아니라고 하니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바로 소경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인생은 가발이다 !!

다시 말해서, 평생을 살아온 '나' 라는 것이 가짜라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인생은 가발이다" 라고 했는데, 인간은 짝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짝퉁이기에 말이죠. 육신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나' 라고 보는 순간 가짜가 된다는 겁니다.

진짜 '나' 라는 것은 주님이 창세 전에 만들어놓았는데,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거기에 어떤 속성이 가미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을 받기로 된 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그냥 야곱이 아니라, 이미 야곱이 있기도 이전에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 걸맞게 맞춤존재가 된 것이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미움이 먼저 있고, 그 미움에 맞추어서 태어나게 되는 존재가 에서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면 좋겠지만, 우리 자체가 가짜이고 무지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다만 자기가 가짜인 경우에만 이것을 안다는 말이죠.

이것을 소위 '예정론' 이라고 하는데, 즉 "우리는 창세 전에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고, 어떤 사람들은 미움을 받아서 지옥에 가게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도가 아닌 자가 이해를 하면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나는 창세 전에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는 나이기 때문에, 나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 라고 말이죠.

* '나', '나', '나' !!

바로 이것이 성도가 아닌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여기에 '나' 라는 것이 도대체 몇 번이나 들어갑니까? 즉 "'나'는 창세 전에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는 '나' 인데, 그래서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 라는 것이 3번 들어갔는데, "그래서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을 때의 그 '나' 라는 것이 자기를 모르는 상태, 즉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상태의 '나' 라는 것인데, 즉 가짜라는 말이죠. 그래서 중간에 있는 '나'도 가짜고, 제일 앞에 있는 '나'도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 야곱과 싸우시는 하나님 !!

야곱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야곱은 자기가 이스라엘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야곱에게 "너는 왜 행동이 그 모양이야?" 라고, 하나님은 그것을 닦달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야곱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야곱은 자기를 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이스라엘로 갈 때, 그것을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알게 하시는고 하니, 하나님이 얍복강가에서 야곱과 싸웠다는 말이죠. 야곱이 형과 싸운 것이 아닌데,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더불어서 싸웠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도 역시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싸웁니까?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결과도 좋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우긴다고 하나님과 싸운다는 겁니다. 즉 'y=x' 라는 것을 진리라고 우기면서 싸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무기는 무엇인고 하니, 전도서 9장 1절을 가지고 싸우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너는 몰라. 너는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몰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야곱은 바라기를, "주님이 저를 예정하시면 구원을 하시겠지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무엇을 바꾸어야 합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 그러면 그때는 안다는 말이죠.

* 아하, 나는 이미지이고 껍데기구나 !!

다시 말해서, 주님이 자기 안에 들어올 때, 즉 이스라엘은 야곱 안에 주님이 들어온 것인데, 그것을 "언약이 들어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언약의 하나님이 동행하게 되면, 자기의 운명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고, 자기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는 하나의 이미지이고,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분의 증거물, 즉 증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인데, 우리는 그동안 단독적으로 자기 것, 즉 자기 인생을 살려고 했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는데, 그러니 잘해볼게요" 라고 하는 식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과 일대 일로 붙을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 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자기를 단독자로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단독자끼리 서로 잘해봅시다"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잘해보자고 하는 겁니까? 주님의 뜻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 사위일체(四位一體) !!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저쪽에 있는 하나가 자기 속에 들어와서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성도가 같이 하나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란 겁니다. 그러니 굳이 이야기를 하면 삼위일체가 아니고 사위일체인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말이죠.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담배를 좀 그만 피우소 !!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싸운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나님과 싸우는 것인데, 이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윗집에 가서는 "아이들을 좀 관리해서 조용히 하소" 라고 하고, 옆집에 가서는 "담배를 좀 그만 피우소" 라고 하는데, 그것이 이웃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싸움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과 싸우는 것을 더 깊이 이야기를 하면, "나는 날마다 나 자신과 싸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협박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죠. 남이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거덜난다" 라고, 자기가 자기에게 협박을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그것을 겁박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 나쁘다고 하는 것이 나쁘다 !!

그런데 천국은 어떠한고 하니, "나쁘다고 하는 것이 나쁘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게 되면, 비로소 나쁜 것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나쁘다고 여기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자기에 대해서 질책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기가 나쁘다고 여기니,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를 협박하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즉 "나쁘니까 똑바로 해야 착하게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y=x' 라는 공식이 또 다시 동원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동안 자기가 갈고 닦아온 신앙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는 것들이 다 사기였는데,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괜찮은 행동을 하면 괜찮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라고 계속해서 우겼다는 말이죠. 인간자체가 가짜인데, 거기서 무슨 괜찮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면, 창세 전에 예정한 자가 누구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예정하셨다는 말이죠. 그게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데,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니 '창조주'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주를 이 땅에 드러내기를 원하셨는데, 창세 전부터 말이죠. 창조하기 이전에 창조주부터 먼저 염두에 두셨는데,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는데, 그 다음에 '나'를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그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고, 그리고 신부라는 이름으로 자기 지체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데,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천국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기 이전까지는 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의 핵심은 예수님인데, 가짜인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 진짜 천국일 리가 없다는 것이죠.

(마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그렇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건너오는데, 그런데 여기서 야곱은 산 것이 아니라 '죽었다' 라는 겁니다. 마치 개가 밀가루 반죽 위에서 발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 이 경로, 즉 야곱이 야곱으로 태어나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는, 그 모든 경로가 자기 경로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경로입니까?

* 예수님이 자신이 곧 이스라엘 !!

주님의 경로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야곱의 그 경로를 따라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까지 가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자신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겁니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야곱에 돌 베개를 베고 자는데 누가 왔다갔다했습니까? 천사가 그렇게 했는데, 그것을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야곱+언약', 즉 야곱에게 언약이 오게 되면, 그 주인공은 예수님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일찌감치 야곱이라는 인간을 만들어놓고, 그 야곱 안에 들어오셔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 바뀌는 작업에 예수님이 관여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게 예수님의 행적이고 경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경로가, 즉 장차 말씀이 무엇이 된다는 겁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이 말씀 안에는 야곱의 언약이 다 들어있는데, 즉 야곱에게 주신 현상을 예수님은 육신으로서 그대로 다 보여주신다는 것이죠.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꺼져라 !!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루심이 바로 하나님의 죽음이란 말이죠. 그것이 의미는 것은, "하나님의 죽음으로서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꺼져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런 허상의 역할은 마감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다음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다 거두어 가신다는 겁니다.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과 별, 거리의 코스모스, 짹짹거리는 참새와 달리는 노루와 사슴, 그 모든 것들을 말이죠. 노아홍수 때 땅의 짐승들이 다 죽었는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때는 물로 했지만, 이제는 불로 태워버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마감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은 다 철거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조국수호', '조국퇴진', 그런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과연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거기에서 헌금을 거두는 목사도 있다고 하는데, 200만이 모이든 300만이 모이든 다 가짜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자기처럼 남들도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는 복음이 현실화가 되는 것 같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면 다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밀가루고 반죽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칼국수로 계속 밀어붙이는데, 그래서 강아지가 오려고 하면 "이것은 내 인생이야. 들어오지마" 라고 한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잔소리 !!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잔소리' 인데, 졸지에 하나님의 복음이 그만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즉 "나는 진짜인데 왜 가짜라고 합니까? 제발 그러한 잔소리는 그만 하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y=x' 라는 공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즉 "내가 하는 방식대로 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말리지 마세요. 앞으로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만큼만 안다는 말이죠. 그것 외에는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깜박 깜박 잊어버린다" 라고 하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심지어는 컵에 물을 따르고도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찾는 경우는 허다하고 말이죠. 휴대폰을 손에 들고도 그것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 인간은, 예능 프로그램의 '예능인' !!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계획하고 벌린 예능 프로그램의 '예능인' 이란 말이죠. 인간은 갇혀있는데, 여기서 예능프로라는 것은, 거기에 출연한 사람들이 나와서 까불고 하는 것을 수많은 시청자들이 본다는 겁니다. 요즘은 살림남의 '광산 김씨'가 좀 뜨는데, 자기 가족의 일상을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과 천사가 보고 있는데, 인간이 얼마나 지옥에서 빠져나가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그야말로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다 쓸데없는 짓인데, 그런데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허전해서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을, 주님은 마치 예능 프로그램을 다루듯이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할 것이 많은데, 다시 전도서 9장 1절을 보겠습니다.

(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여기에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인간이 왜 그렇게 사는지 모두 알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것을 모두 알 수 있는 날이 온다는 말이죠.

로마서 8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할 때도 빌 바를 알지 못하는데, 그래서 성령께서 탄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것과 성령이 하는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인간은 칼국수를 만든다고 일을 저지르고, 성령을 그것을 보고 탄식을 하신다는 말이죠.

주님의 탄식이 없는 일은 없는데, 단 한 번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지한 상태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가 가짜이면서도 진짜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매일같이 야곱의 얍복강가가 되게 하시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탄식하시고 도와주시고 한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 두 개의 그림, 그 차이점은?

그렇다면 그런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고 하면, 하나의 예능 프로그램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하늘에서 하나님과 천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죠. 여기에서 제가 그림을 두 개 그리겠는데, 그 차이점을 한 번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A' 라는 그림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여기에 아스팔트에 서있고 주님의 십자가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B' 라는 그림은 역시 여기에 자기가 서있고, 주님의 십자가도 이렇게 보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군데군데 다른 곳으로 꺾어 들어가는 골목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두 그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십자가가 보이는데, 'A' 라는 그림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곳이 없고, 반면에 'B' 라는 그림은 그게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A' 라는 그림은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보면 실제로 빠져나갈 골목들이 많다는 것이죠.

* 골목길에 들어서면 !!

그렇게 골목길에 들어서면 무엇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게 꺾여졌기 때문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분산을 떠는데, 고민과 스트레스와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만 죽어버릴까?" 라고 하면서, 온갖 일들이 다 벌어지는데,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주는 시험인데, 그러니 이 세상의 유혹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 골목으로 벗어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온갖 고민을 다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골목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처음에 복음을 알았을 때는 십자가가 잘 보였는데, 깨끗하게 다 정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 원장님, 구청에 신고할까요?

찬송가 405장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인데, 그 찬송을 부를 때는 무엇만 보였습니까? 오직 십자가만 보였다는 말이죠. 그렇게 은혜를 받고 감격했는데, 그런데 기도원을 나오려고 하면 원장이 계산서를 내미는데, 식대가 한 끼에 6,000원, 숙박비가 일박에 만원, 그래서 84,000원을 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만 시험에 드는데, 반찬도 시금치에 계란 프라이 하나만 달랑 주고 그렇게 받으면, 또 온갖 생각이 다 드는데, "이 기도원이 무허가이지 싶은데, 구청에 신고할까?" 라고 말이죠(ㅋㅋ). 그게 바로 골목길에 빠져있는 모습인데, 그것이 곧 유혹이고 시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보일 때는 무엇이 보이지 않습니까? 자기 원칙, 즉 'y=x' 라는 공식이 그만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잘나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이 비춰주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그런데 골목길로 접어든 순간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나' 라는 것이 의식되지 않는데, 그런데 골목에 들어가니 강렬하게 누가 의식이 된다는 겁니까? 자기를 누가 지켜야 합니까? 즉 'y=x' 라는 공식을 동원하지 않으면 원장에게 바가지를 쓸 판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뭔가 큰소리를 쳐야 깎아주든지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복음을 생각할 때는 자기가 의식되지 않다가, 이 세상에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의식이 되는 순간, 예수님은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주님이 하신 일들은 모두 없어져버리고, 자기 변명과 핑계가 마구 판을 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 제가 복음을 알았는데도 이런 일이 닥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조치입니다. 저는 믿음이 좋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해당이 되는 것인데, 그러니 제발 좀 철회해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그런 일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 나는 사탕만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어 !!

예를 들어서, 5살짜리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아이가 당연히 좋아하는데, 우리가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는 겁니다. 엄마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탕을 가득 사서 오면, 아이는 더 이상 소원이 없다는 말이죠. 사탕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 그런데 상대방이 그만 헤어지자고 하면서 사탕을 가득 이별선물로 주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탕을 보고 기뻐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만약에 기뻐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겁니다. 물론 이별선물로 사탕을 준 사람도 이상하지만 말이죠.

그러면 왜 우리의 소원은 사탕에 머물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누가 한 번 설명을 해보세요. 왜 그렇습니까? 분명히 5살 때는 "사탕만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소원이 거기에 머물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왜 자꾸만 커지느냐는 말이죠.

*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 !!

그것은 칼국수의 밀가루 반죽이 커져서 그러한데,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반죽을 계속해서 확장을 시킨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에 만족하는데, 먹는 것으로 족하게 여긴다는 말이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마하슬루' 라는 심리학자가 조사를 한 것인데, 인간의 본능에는 5가지 단계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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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 -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이브라함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학계최초로 학문적 연구를 시도한 심리학자입니다. 가장 단계가 낮은 것은 '생물학적 욕구(Physiological)', 그 위로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그 다음은 '사회적 욕구(Social)', '자긍심에 대한 욕구(Esteem)', 그리고 마지막 가장 높은 단계가 '자기 실현에 대한 욕구(Self-Actualisation)'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실현을 위해서 교육을 받고 묵상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네이버의 '질문과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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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짐승과 같은 것인데,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해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사탕으로 좋아는 5살짜리이고, 7살이 되면 "엄마, 휴대폰을 사줘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무엇인고 하니, '자아의 확장'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확장이라는 것은 멈춘 것이 아니라 뭔가 늘어난다는 것인데, 그 늘어나는 방향이 어디인고 하니, 창세기 3장으로 간다는 말이죠.

* 사탕으로 만족해하는 신은 없어 !!

창세기 3장에 보면, 악마가 인간에게 무엇을 가지고 유혹했습니까? 그 최종수준이 어디인고 하니까, "신처럼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사탕 5개로 만족해하는 신이 있습니까? 그런 신은 없다는 겁니다. 5살, 6살, 7살이 되면서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는 말이죠.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 신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 인생의 모든 파노라마는 내가 만든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 무엇입니까?" 라고, 만약에 그것을 저에게 묻는다고 하면, 저는 "내 인생의 드라마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그렇게 대답을 해주고 싶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예능 프로그램을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에 관한, 자기의 예능 프로를 자기가 만들겠다는 것인데, 거기에 남들을 강제로 초대해서 집어넣고는, 그것을 보면서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욕망이라는 말이죠.

* 할매, 보고 싶어요 !!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물론 여기 모이신 분들은 그렇지 않은 줄로 알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자식들에게 전화를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손자, 잘 있나? 어디 한 번 비춰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사탕을 가지고는 "자, 할매라고 불러봐라" 라고 꼬드기고 하는데, 그러면 5살짜리는 시키는 데로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손자 나이가 30살이 되었는데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이 "할매!" 라고 불러줄 수는 있겠지만, 사탕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손자는 이미 나름대로의 자아가 확정되어서, 이미 폐쇄된 자기 인생, 자기 드라마, 즉 자기 예능 프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누가 잔소리를 하면 싫어한다는 것이죠.

* 짝퉁인생 !!

그러니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각자 각자가 신이 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악마로부터 분양을 받은 것으로, 악마가 그렇게 인간에게 자기 본질을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인간은 각자가 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를 위한 드라마이고 소설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짜인데, 즉 야곱은 야곱 중심이고, 에서는 에서 중심이고, 또한 아브람은 아브람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전부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거기에 주님이 찾아오시니 어떻게 됩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말이죠.

* 로마서 4장에서 이야기하는 '믿음' !!

그렇게 되면, 자기 인생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가짜이니 말이죠. 즉 "내 인생에 대해서 나는 관여할 바가 없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간단하게 두 글자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을 아주 알기 쉽게 정의했는데, 믿음의 반대말을 행함으로 대비를 시키면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행함은 은혜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구분하는데, 간단하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믿음은 내 행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라가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으니, 즉 은혜로 말미암아 어떻게 됩니까? 죽은 사라의 몸에서 자식이 생겨나는데, 그게 믿음의 증거라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고 하니, 죽은 사라의 몸에서 자식이 나올 것이라는 창세 전의 계획이 은혜로 들어가서, 그 은혜의 능력이 아브라함 자신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에게서는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런 논리가 로마서 4장에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있어서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아내인 사라의 태가 죽은 줄 알면서도 아브라함이 믿었기에 무엇이 생겼다는 겁니까? 자기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이 생겼다는 것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이죠.

* 이 땅에는 구세주가 없는데, 그런데 !!

이것은 사도바울은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에 적용을 시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었는데, 가짜로 죽은 게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는 겁니다. 옆에 달린 강도들과 같이 정말로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구세주가 죽었는데, 그러면 이 땅에는 구세주가 없다는 겁니다.

왔던 구세주도 죽고 말았는데, 그러니 이 세상에는 아무도 인간을 구원할 자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팩트이고 정답인데, 교회에 와서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구세주가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죽었다가 살았다" 라고 하는 그 복음적인 내용이 은혜가 되어서, 그것을 성령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서 믿음을 발생시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는 구세주가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구세주가 된다는 겁니다. 구세주가 없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y=x' 라는 우리 인간의 공식, 그러한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물론 성령께서 알게 해주셔야만 알 수가 있는데, 물론 진짜로 아는지 제가 또 다시 물어보겠는데 말이죠.

여기서 교재 14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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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인간은 자체적으로 해결점이 없는데, 뺑빼이를 돌리는 겁니다. 그러니 실험대상이죠. 결국은 이것은 2차 대전 때 생체실험을 한 일본의 731부대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을 생체실험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실험을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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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타 !!

그 잔악한 732부대가 생체실험을 할 때, 그 대상이 주로 중국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을 '마루타'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장면을 케이블 방송에서 내보낸다고 하면, 물론 실제가 아니고 연기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보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사람은 아플까요? 아프지 않을까요? 마음은 아플지 몰라도, 신체는 아프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정말로 마루타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여기서 여러분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겠는데, 이게 실제입니까? 예능입니까? 자기가 마루타가 되어서 누워있는 것도 역시 예능이라는 겁니다. 정답은 예능인데, 즉 우리가 실제로 여겼던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든 예능 프로그램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마루타가 되면 어떤 점이 유리한고 하니까, "나는 신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신이 아니라, 마루타, 즉 실험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인은 따로 있는데, 그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한 분이 누구인고 하니, 창세 전부터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의 도구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그런 예능 프로그램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충분히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는 신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5살짜리 아이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그때는 사탕을 좋아하다가 30살이 되면 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고 하니, 그것은 자아확장의 방향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자기가 신이 되는 쪽으로 계속해서 간다는 겁니다.

이번에 화성의 연쇄살인범이 잡혔는데, 그가 왜 그렇게 계속해서 사람을 죽였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곧 신이라는 말이죠. "내가 죽이겠다고 하는데, 당신이 왜 잔소리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왜 죽이는가?" 라고 하는 질문조차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말이죠. 그 연쇄살인범은 하나의 예에 불과한데,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 인간은 방향이 있어 !!

예를 들어서,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3살 때는 전화를 하면 아이가 좋아하는데, 그런데 5살이 지나면서 뭐라고 합니까? "할아버지, 빨리 전화를 끊으세요. 미술학원에 가야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꿔 말하면, "나는 할아버지의 예능 프로그램에 더 이상 출연하기 싫어요"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면 할아버지는 그만 삐쳐서 아들놈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야야, 아이를 하나만 더 낳아라. 저놈은 벌써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심심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내가 알아서 키워줄 테니, 하나만 더 부탁한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인간은 방향이 있다는 것인데, 그 방향이 곧 "내가 신이 되겠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즉 자기 나름대로의 예능 프로그램을 가지고, 즉 "내가 하는 것의 결과를 보고 나는 영원히 즐거워하고 싶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그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은데, 그 안에서 자기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 가해자와 피해자 !!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그 둘 중에서 누가 신입니까? 가인 자신이 신인데, 그래서 형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였다는 겁니다. 왜 죽였습니까? 자기가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는 말이죠.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였는데, 그 이유를 가인은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은 그만 졸지에 형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모든 인간이 신이 되고 싶은데, 그런 신들의 집합체가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 이라고 하고, '실제세계' 라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가짜인데 말이죠.

* 신들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죽어야 !!

그런데 그 세계에 진짜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오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시니, 사람들이 그만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왜 죽였습니까? 잔소리를 해서 그만 꼴보기가 싫어서 죽였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죽어야 인간들의 신의 세계가 유지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면 주위 사람들이 왜 거부를 합니까? 자기들이 각자 신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겁니다. 신을 보고 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말이죠. "그래, 교회에 나가줄게" 라고 하는데, 마귀도 예수님을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안다고 해서, 즉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교회에 나와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신인데, 구원은 무슨 구원이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자기를 미워하라고 하셨지만, 그게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자아 자체가 욕망 덩어리이고, 그 욕망은 방향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절대자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죠.

* 부부싸움을 왜 하는가?

부부싸움을 왜 합니까? 신이 두 명이기 때문에 서로 잡아먹기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서로의 가발을 벗기라고 했는데, 물론 이미 가발을 벗은 사람은 해당사항이 없지만 말이죠. 즉 "당신이 뭐가 잘났노?" 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라고 부부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즉 자기 예능 프로그램에 남자가 없고 여자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뭔가 결핍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면 자기 예능 프로그램에 그만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인데,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은 신이라는 겁니다.

* 방향을 바꾸어서 바닥을 치게 되면 !!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그런데 "나는 신이 아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그 방향이 바뀐다는 겁니다. 자기가 절대적으로 높은 곳으로 가다가, 자기가 신이 아니라고 하면 그 방향을 바꾸어서 바닥을 치게 된다는 말이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내려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감사가 나오고 또 고마움이 나온다는 말이죠. 위로 올라가면 나오지 않고, 그 방향을 바꾸어서 바닥을 치게 되면, 거기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감사에 감사를 추가하고 기쁨에 기쁨을 추가해서 더욱 더 완전한 사람이 되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욕보이는 짓인데, 절대적인 존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감사와 기쁨을 추구하면, 그것은 악마가 옷을 바꿔서 입는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마루타인가? 예능 프로그램인가?

그러니 결국 우리는 마루타가 되어야 하는데, 이 마루타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죽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예능 프로그램에 사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어있다는 것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마루타와 예능 프로그램, 둘 중에서 하나를 하겠는데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너는 마루타이니 시키는 대로 살아라" 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아이쿠,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면서 하나님과 싸웠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몸과 주님의 성령이 부딪치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성도는, 육신의 몸과 성령이 부딪치는 현장 !!

이 '현장'을 이야기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는데,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진행하겠는데 말이죠. 그러면 이 현장은 이 세상의 영토 속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현장은 도발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건이 터지면 경찰이 와서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서 폴리스 라인을 치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현장이 보존되지 않으면 사건 차제가 사라지기 때문이란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영토를 소유하고 차지하는 겁니까? 아니면 현장을 소유하고 있는 겁니까? 성도는 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죠. 어떤 현장입니까? "나는 야곱인데, 그런데 죽어서 이스라엘이 되었다" 라고 하는, 즉 자기는 'y=x' 인데, 그렇게 살아갔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그게 아니라고 알려준, 그런 사람이 곧 성도라는 겁니다.

자기가 노력한다고 해서, 즉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러한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주인공은 야곱이 아니라, '야곱+예수 그리스도', 혹은 '야곱+언약' 이라는 겁니다.

야곱은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인데,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니,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그 속에 담으니, 그 언약이 지향하는 바에 야곱은 껍질 채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언약은 양반집 규수고, 우리는 그것을 들고 가는 가마꾼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의 마음 !!

이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고 그야말로 불가능한 것인데, 정말이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이러한 사실이 감사되려면 바닥을 쳐야한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어떤 마음이라고 합니까?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신,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다는 말이죠.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과연 인간의 마음으로 가능합니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절대적인 신이 되고 싶지, 그 방향을 반대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이죠. 그때 누가 도와줍니까?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주게 되면, 그렇게 해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높은 곳을 지향하다가 낮은 곳을 기쁨으로 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나타나는 반응이 감사와 고마움이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누가복음 6장 22절에서 25절을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여러분 중에서 누가 시원한 목소리로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눅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웃지도 말라 !!

그러니 웃는 것도 문제인데, 주님은 왜 웃느냐고 따진다는 겁니다. 재산이 많은 것도 따지고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에 다 시비를 걸고 나온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웃는다는 것은 자기 만족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런데 그 자기가 가짜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데, 즉 "나는 작은 신으로서, 내가 만든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나는 웃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인상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소원인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웃는 주인공이 되고 싶은데, 그런데 그 범위를 더 넓혀버린다는 것이죠.

인간은 웃고 싶은데, 즉 행복하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y=x' 라는 공식대로 되면 웃는데, 자기 예상대로 되었다는 말이죠. "역시 내 기도는 응답 하나는 확실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웃는데, 그러면 그 웃는 범위를 넓혀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웃는 것이 주님이 만든 예능 프로그램에 포함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번지수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웃은 것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웃는 것이 아니라, 감사이고 또한 고마움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누가복음 6장 23절에 보면 '기뻐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기뻐하라 !!

선지자들은 분명히 욕을 먹었는데, 그런데 그 결과가 기쁨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y=x' 라는 공식에 위반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하면, 그래서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더럽다는 말이죠. 그런데 'y=x' 라는 공식이 깨어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욕을 먹어도 기쁨이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바로 그 기쁨을 감사와 고마움으로 바꾼다는 말이죠. 즉 "주여, 보다 큰 범위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즉 "내가 만든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만든 인생을 잠시나마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열심히 칼국수를 반죽해서 미는데, 우리는 육신이 있는 이상 자기밖에 모르는데, 즉 자기 행복이 최고이고 자기가 웃는 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 방향 자체가 잘못이라고 알게 해주시고, 또한 방향을 틀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들이 보기에는 몰락인데, 그런데 거기서 예상 밖의 감사와 고마움이 터져 나오도록 성령께서 조치를 해준다는 겁니다.

* 다시, 두 개의 그림을 !!

아까 그린 두 개의 그림을 다시 해보겠는데, 여기 아스팔트에서 십자가가 보여야 하는데, 이 십자가는 빌립보서 2장 8절에 의하면 그야말로 바닥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니 그 바닥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유일한 천국이 되는데, 다른 곳에는 전혀 천국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은 외면하는 그 십자가가 자기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말이죠. 즉 "야, 저 피 때문에 내가 용서를 받았네.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되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군데군데 무엇이 있습니까? 골목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골목으로 꺾어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평소 자기 육신의 본능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절대 신으로 만들어줄게. 웃게 해줄게" 라고 하는, 그런 이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안목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하는데, 즉 골목길에 들어서게 되면,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마귀가 집어넣은 본성과의 만남이, 그렇게 반갑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친숙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골목길을 누비면서도 !!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 네가 이 세상을 좋아하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딴 소리는 하지마. 출세하고 싶잖아? 내가 해줄게. 건강하고 싶잖아? 내가 해줄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만 십자가는 빠지고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십자가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다시 십자가가 보이는 아스팔트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을 묻지 않습니까? "너는 왜 나빠?" 라는 것을 일체 묻지 않는다는 말이죠.

천사가 얍복강가에서 야곱에게 "야곱아, 네가 인생을 왜 그따위로 살았어?" 라고 일체 묻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야곱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님 사건의 현장성이지, 새삼스럽게 야곱이 잘났는지 못났는지,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네가 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어?"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이미 시작된 천국 !!

그러니 자기가 자기 자신을 협박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골목길에서나 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내가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던 버릇이고, 그 골목길을 벗어나서 십자가가 보이는 아스팔트로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감사하게도 우리의 잘잘못은 일체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따지지 않으니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쳐다보면 됩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이미 시작된 천국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매일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그리고 그 골목을 나오면 또 다른 골목을 찾아다니는 자들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며, 또한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 얼마나 우기고 있는지, 참으로 한심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골목과 골목을 이동하면서도 가끔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예능인 것을 깨달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0,14 오후 6시에 마침.

주님, 수학공식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을 때도 있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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