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환등기 인생 1909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27. 07:15
2019-09-23 10:29:15조회 : 62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1 - 환등기 인생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1 - 환등기 인생

19,09,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우리의 몸과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오늘은 교재 14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사람은 이렇게 몸이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도 역시 몸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사람의 몸과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알기 힘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모르니까 일단은 믿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결합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무조건 믿자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믿더라도 그 내용이 있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 수 있는 것인데, 즉 우리의 몸과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여러분, 자기 몸과 가까운 사람이 어떻게 한 몸이 될 수가 있습니까? 안 되는데, 결코 같은 몸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꿈을 꾸어도 다른 꿈이고, 인생을 살아도 다른 인생이라는 말이죠. 똑같은 장소에 놀러가도 그 기억이 다 다른데, 그것을 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성도 자체를 한 몸으로 보고,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한 몸이 아니라 따로 논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그냥 믿자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먼저 전도서 12장 3절에서 7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전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전 12: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전 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어떤 마을에 사람들이 사는데, 집을 지키는 사람들, 맷돌질을 하는 사람들, 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체가 가지고 있는 귀, 코, 눈, 이, 그리고 척추 등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밑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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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가 참으로 이상하지요? 사회 공동체 구조를 개인의 신체구조로 변화시켜서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해 아래에서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든 인간에 다같이 차별이 없이 주어지는, 허물어지는 마지막 과정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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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공동체의 구조, 개인의 신체 구조 !!

여기에 사회 공동체의 구조를 개인의 신체구조로 변화시켜서 표현하는데, 이것을 개인의 신체구조를 사회구조의 변화로 설명한다고 해도 되는데, 그것이 다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개인의 신체구조 문제를, 즉 눈이 좋지 않고 허리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그것을 왜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듯이 하느냐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전도서에서 몸 하나에 여러 명이 사는 것처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몸이 무너진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환경도 같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무너지게 되면, 자기가 속해있던 마을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누구를 안다. 누구와 친하다. 50년 친구다" 라고 하는 것도, 자기가 죽는 마당에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없어지는 순간, 그들도 다같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몸은 하나이지만, 인간, 즉 '나' 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얽히고 엮어진 관계로 인해서, 그래서 '자아' 라는 것이 형성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몸은 하나지만 여러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들과의 사귐, 그러한 것들이 '나다움'을 형성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 사라지게 되면, 자기 몸은 멀쩡하지만 '나' 라는 것이 흔들리기 때문에, 몸도 같이 흔들려서 아파서 드러누울 수가 있다는 말이죠.

특히 자식이 죽으면 그러한데, 살아도 살아갈 맛이 전혀 나지를 않는데, 그야말로 밥맛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동안 몸은 하나였지만, 자기의 자기다움은 여러 사람과의 여러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통해서 구축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 전도서에서 '나' 라는 것은 무너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개인의 육체가 무너지게 되면, '나' 라고 설정되어있던 관계망도 같이 무너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무너지게 만듭니까? 도대체 인간을 누가 무너뜨리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전도서에서는 '허무' 라고 하는데, 허무가 무너지게 한다는 말이죠. 전도서에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일을 하시는가?" 라는, 그것이 강렬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단독적으로 세워서, "하나님은 이렇게 생겼고, 저렇게 생겼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허무로 일하시는 하나님 !!

그것이 전도서인데, 우리가 계속해서 전도서를 공부하고 있으니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무엇을 가지고 일하십니까? 방금 해답이 나왔는데, "하나님은 허무로 일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간단한데,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허무가 허무가 되기 위해서는, 즉 이 세상이 허무답게 되게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면, '나' 라는 것이 그 허무 속에 포함이 되어야합니까? 빠져야 합니까? 당연히 포함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이가 아프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허리가 아픈 것을 너무 슬퍼하거나 서러워하면 안 되는데, 그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는데, 허무를 가지고 살아계신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허무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는데, 그 허무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그 허무함에 같이 함몰되는 것, 그렇게 사라져주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충족시켜주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거기서 빠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 사람의 '허무한 꾀' !!

몸이 무너지는 동시에 자아도 같이 무너진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이 보시기에, 왜 하나님은 허무로 일해야 합니까?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 교재 143페이지에 보면, 9강 제목이 '허무한 꾀'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이 전도서 7장 29절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전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여기에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잘못이 사람에게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겁니까? 인간 쪽에 잘못이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정직한데, 즉 하나님은 정직을 내세웠고, 반면에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꾀를 내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정직에 속하지 못하고 반대되는 식으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허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런 허무가 왔을 때, 거기에 대해서 순종하겠습니까? 반항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반항을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반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은 악마와 결탁되어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악마는 무조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데, 그렇게 반대를 하다가보니, 하나님이 허무케 한 것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기분이 매우 더럽다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는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런데 갑자기 허무해지면, 즉 허물어져버리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자식 네 명이나 낳으면서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는데, 그런데 그만 췌장암에 걸리고 만다고 하면, 그것을 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남은 자식이 문제라는 겁니다. 부모도 없는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눈에 밟히는데,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꾀이고 반발이라는 것인데,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허무에 대해서 반항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143페이지에 전도서 9장 12절 말씀이 나오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전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 자기의 시기 !!

이번 시간에 이것을 설명할 텐데, 무엇을 설명하는고 하니, '자기의 시기' 라는 겁니다. '나' 라고 하는 것, 즉 자아인데, 즉 자기 시기라는 말이죠. 이 시기, 즉 때는 3가지가 있는데,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시간의 3가지 구분인데, 이것은 누구를 위한 구분인고 하니, 자아가 재앙을 대비해서 시간을 이렇게 구분을 짓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전도서 7장 29절은 이것을 두고 '꾀를 부리는 것'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인데, 그것은 인간답지가 못하다는 말이죠. 지난 번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모든 철학과 과학이 다 그러한데,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멀쩡한 내가 멀쩡하게 성경을 본다" 라고 우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전혀 멀쩡하지가 않는데, 그러면서도 남의 꿈을 해몽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부부간에 충돌이 왜 일어납니까? 둘 다 주장하는 것이, 둘 다 멀쩡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부부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멀쩡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렇게 정직하지 않은 것은 곧 꾀라는 겁니다. 그 꾀가 나타나는 모습은 허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즉 허무를 깨트려서 허무한 세상에서 자기만큼은 허무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시도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기, 즉 때를 계산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는 말이죠.

* 꾀, 곧 살고자 하는 의지 !!

그러니 그 자체가 얼마나 헛된 인생인지 모르는데, 우리의 본래 모습이 전도서에 다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이라도 꾀가 없는 순간이 없는데, 그것을 전도서에는 꾀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평소에 '살고자 하는 의지' 라고 했다는 말이죠. 죽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든 살아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이 허무하든 말든 그것은 모르겠고, 이 세상이 망하든 말든 나는 내가 사는 순간까지는 버텨보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아직도 버틸 것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버틸 것이 없어야 하는데, 버틸 것이 있으면 꾀를 내는 것이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에게 반항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여, 이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 있는 척을 하면서도 악마의 반발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데, 자기가 지킬 것이 있으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모에게 지킬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는 죽어도 괜찮은데, 누구만큼은 손대지 말아달라고 합니까? 바로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식에게 손을 대었다는 겁니다. 그만 죽여버린다는 것이죠.

* 자기 의 !!

그러니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데, 인간이 뭔가 버틸 때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죽어도 이것만은 지켜달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신약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자기 의로움, 즉 '자기 의'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고 하니, 어떻게 우리의 몸과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살펴보니 어떻습니까?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인간이 자기 몸을 포기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포기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미 꾀를 내었고, 재앙에 대비책을 세웠고,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고자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살 듯이 죽어서도 그렇게 살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허무가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우기는데, 이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안 된다는 말이죠. 인간 자체가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는데,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성경을 보아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하나 버티기 위해서, 자기에게 속한 것, 즉 자기 정당성은 손대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벌벌 떨면서 성경을 해석해왔는데, 멀쩡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그러니 멀쩡하지도 않은 인간에게서 나온 성경해석이 멀쩡할 리가 없는데, 전부가 다 악마가 준 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 무너지는 몸, 환경, 또 다른 몸 !!

여기까지 알았다고 치고, 그래야 진도가 나가는데(ㅋㅋ), 다시 제가 묻겠는데, 하나님께서 전도서에서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허무로 일하시는데, 그러면 다 같이 무너지는데, 왜냐하면 허무는 허무를 지향하기 때문에 말이죠. 이렇게 무너지게 되면, 인간은 하나의 몸이, 즉 육체가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몸이 무너지게 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겠는데 말이죠.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자기 몸이 있고, 그러면 그 주변에는 환경들이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자연환경, 혹은 사회환경이 자기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뿐인 자기 몸이 중요하고, 다른 것은 환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내부가 무너지게 되면, 바깥에는 환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몸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몸인데, 그러니 몸과 몸이 만나려고 하면, 그동안 몸과 환경이라고 여겼던 그 세계관이 같이 무너져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몸 바깥에는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아니라, 정작 주님의 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18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오직 주님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왜 남자와 여자인가?

사람은 알다시피 두 종류로 되어있는데, 남자와 여자, 혹은 여자와 남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은 성(性)이 왜 하나가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두 개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인데, 즉 모든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왜 성(性)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냐는 것은 여기서 풀린다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는 예수님의 속성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두 개로 갈려지는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는 남자의 후손인데,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또한 이삭이 야곱을 낳는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도, 그것은 남자에게 소속된 여자이기 때문에, 비록 여자가 자식을 낳아도 여자의 자식이 아니라 남자의 자식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철의 훈민가에도 보면, "아버님이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이 나를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셨다면 이 몸이 살 수 있을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시경(詩經), 父兮生我(부혜생아), 母鞠吾身(모혜국아))

그래서 여자의 자식은 단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죠.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4장 1절에도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사 54: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 세상에 뿌리가 없는 여자의 후손 !!

그렇다면 성경에서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전부가 남자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자의 후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남자가 있고, 즉 아담이 있고 그 아담에게서 태어난 자식인데, 그러니 전부가 다 아담의 자식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이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뿌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잉태치 못한 자의 자손인데, 즉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에 말이죠. 이 세상은 남자의 세상인데,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이스라엘 !!

특히 어제 낮 설교시간에 이스라엘은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뿌리가 없는데, 이스라엘은 밤에, 그것도 죽음에서 태어난 나라라는 말이죠. 즉 어린양의 죽음의 복제물로서 나온 나라라는 겁니다. 바깥의 문설주에는 피를 바르고 그 안에서는 양고기를 먹는데,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몸 속에 양고기가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양고기의 생명, 즉 피는 생명이란 겁니다. 성경에서 피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육체와 분리가 되었을 때, 육체의 대표적인 본질을 설명할 때 피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참 어려운 내용인데 말이죠. 본질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보이는 것은 몸이고, 그 본질은 피가 흘러야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게 레위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몸이 사는 것이 아니라, 피가 제대로 흘러주어야 바깥에 나타나는 몸이라는 표현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몸 속에서 피가 흐르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피가 몸 바깥으로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라는 것은, 거기에 어린양의 살점이나 기름이 발린 것이 아닌데, 그런데 어린양의 피가 바깥에 발렸다는 것은, 이미 죽은 어린양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 죽은 어린양에 해당하는 죽은 몸통, 그 고기를 누가 먹습니까? 이스라엘이 먹게 된다는 겁니다.

*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존재하는 민족을 이기는, 이스라엘 !!

그러면 이스라엘은 남성의 세계, 즉 인간의 세계에서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존재하는 민족을 이긴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라는 겁니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은 존재하는데, 자기 아버지가 이삭이란 말이죠. 그런데 야곱이 살려고 하면, 아버지인 이삭과의 관계가 끊어져야 하는데, 그리고는 야곱이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장차 올 예수님인데, 그러면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살아있으면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존재를 위한 이름이 아니고 기능을 위한 이름인데, 즉 "인간과 하나님과 싸운다" 라는 의미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싸우는 그 대상이 누구인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은 남자의 후손들과 싸우겠다는 겁니다.

이미 남자의 후손들은 악마에게 속했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의 족속들은 악마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미 패배를 당한 남자의 후손의 입장에서는 악마를 이길 수가 없는데, 그러면 어디서 투입이 되어야합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즉 뿌리가 없는 여자의 후손으로부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서, 그것을 가지고 악마가 대표로 되어있는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기면 된다는 겁니다.

*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 !!

여기 교재 142페이지에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까? 그 첫 열매가 사과나 바나나가 아니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첫 열매가 맺히려고 하면 잠자는 자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 쪽에 있는데, 지금 살아있다고 우기는 쪽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 부활이전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십자가가 있음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잠자는 자로 규정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살아있어도 잠자는 자로 자기 자신을 규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 자기가 아무리 설쳐도, 그것은 허무 안에 있다는 겁니다. 즉 허물어짐 안에, 잠자는 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거기서 나온 첫 열매, 즉 첫 번째 부활이 예수님인데, 그러면 두 번째 부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첫 열매인 부활과 재림 사이의 성도들이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잠자던 자들이 나팔소리와 함께 모두가 다 일어날 것인데, 그것이 마지막 부활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라고 하면 어떤 자세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느냐는 말이죠. "예수님은 부활했으니 참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는 것인데, 자기를 잠자는 자, 즉 죽은 자로 본다는 겁니다. 이게 성령은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안목인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안 된다는 말이죠.

죽은 자인데, 그 색깔이 분홍색이나 빨간색이 아닌데 그야말로 무채색이라는 겁니다. "밤에는 모두가 다 검은 소다" 라는 말이 있는데, 낮에는 아무리 얼룩무늬가 있고 해도 밤이 되면 전부다 다 시커멓다는 말이죠. 자기가 아무리 잘나고 재산이 많고 해도, 하지만 그게 전부다 죽은 자라는 겁니다. 목사, 장로, 집사,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 우리 몸이 허무를 통해서 죽은 자의 몸이 되면서, 주님과 합체 !!

그런데 주님이 그런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된다면, 성도는 죽은 자를 보면서 살겠습니까? 첫 열매를 보면서 살겠습니까? 첫 열매를 보면서 사는데, 그러면 두 몸이 이제 합쳐졌습니까? 합쳐지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합쳐졌다는 말이죠. 우리의 몸이 허무를 통해서 죽은 자의 몸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들어보면 별로 어렵지 않은데, 그런데 실습은 좀 어렵다는 말이죠(ㅋㅋ). 예수님이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어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 분명히 맞는데, 그런데 우리의 평소의 생활태도는 그것을 유지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방해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아'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자아는 꾀에서 생겼는데, 이 꾀는 허무가 오면 저항을 하면서 거기에 대처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살고자 하는 의지라는 말이죠. 복음을 알고 나서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런데 모기가 한 마리 날아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모기야, 나를 마음껏 물어뜯어라" 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놈의 모기가 어디서 까불어?" 라고 하면서 파리채를 들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는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데, 우리는 살고 싶고 또한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모기에게도 물리지 않으면서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아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예수님을 원치 않는 '자아' !!

강의를 다시 하겠는데, '자아' 라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데, 그러면 무엇이 보입니까? 자연환경, 즉 삶의 환경만 보인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빌라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갈까?" 라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 라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환경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환경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러면 환경만 바라보는 우리의 몸이 어떻게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됩니까? 그러니 이미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죄인의 모습, 혹은 죽은 자의 모습으로 결합이 된다는 말이죠.

좀 더 실감이 나게 강의를 해보면, 자아가 있다면 이 자아라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이 환경에는 자연환경도 있지만, 남들도 있는데, 그 남들을 두고 '타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면 제일 먼저 무엇을 구분합니까? 자기가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확인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이미 자아와 연계가 된 사람인데, 그러면 그 사람은 자아의 확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딸이라고 하면 얼른 문을 열어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르는 사람, 즉 타인이라고 하면 경계를 하는데, 왜 경계를 합니까? 그것은 자아와 타인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타인으로서의 예수님 !!

그러면 복음을 무엇인고 하니, 환경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자기의 타인으로 변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타인이 몸만 있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은 예수님 나름대로의 환경을 몰고 오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환경이라면 그것은 자아의 확장인, 즉 자기 영역, 자기 범주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췌장암 말기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전혀 원치 않던 환경인데, 그런 원치 않는 환경을 몰고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환경이 날아가게 되면 자기 몸과 주님의 몸이 접촉되는데, 달리 말하면 자아와 타인과의 접촉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양상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바로 '실재세계(實在世界)' 라는 말이죠. 실제세계가 아닌, 실재세계라는 겁니다.

* 야곱의 경우에 !!

말이 좀 어려운데, 다시 설명에 들어가면,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형이 아니라 먼저 타인을 만났는데,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반겨서 맞은 것이 아니라 싸웠는데, 왜냐하면 타인이니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 싸움을 통해서 없는 민족인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전 세계의 모든 민족과 싸우게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말이죠.

그러니 야곱은 주님을 타인으로 만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자기에게 속한 범주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고 하니, 외삼촌으로부터 퇴직금을 챙겼는데, 즉 많은 재물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외삼촌 집에 있으면서 여자 둘을 취해서 낳은 11명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자아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죠.

* 한 평생을 쓰레기더미 속에서 !!

사람이 몸만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특히 여자 노인네가 치매에 걸리면 쓰레기를 집에 가지고 오는데,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도 그러했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삼촌에게 전화가 왔는데, 일년에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죠. 삼촌이 천주교 교인인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미사라고 하지만, 그래서 그런 것은 모른다고 했다는 말이죠.

아무튼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 자꾸만 집에 쓰레기를 가지고 와서 제가 몰래 버리곤 했는데, 왜 그런 것을 가지고 들어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범주의 확장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의 수입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치매에 걸려서 무심코 한 행동이, 사실은 그것은 치매에 걸리기 이전이라도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 80에 치매에 걸렸다고 한다면, 그 이전에 태어나서부터 80까지 평생동안 하는 행동이 무엇인고 하니, 외부에 있는 것을 주워 모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게 치매에 걸리면서 조절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바깥에 있는 환경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 만든 '내 것 지키기'에 나선다는 겁니다.

* 신작로 속의 외로운 소나무 !!

그러니 몸이 있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워 모은 것에 둘러 쌓여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만 신작로 속에 남은 외로운 한 그루의 소나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신작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데, 적어도 나이가 60은 넘어야 안다는 말이죠. 신작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도로만 있고 그 주위에 건물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어릴 때 신작로에 나가보면 외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서도 그 신작로 너머에는 뭔가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기다린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죠.

이게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닦은 도로이름인데, 그런 도로와 같은 기간시설이 있어주어야 공장이 돌아가고 수출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닦았는데, 그게 국가간접시설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주위에 집은 없고 도로만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신작로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고 생각해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나이 92세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모습인데, 나이가 그렇게 들었으니 신작로가 무엇인지 안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 기억 속에 있는데, 그리고 그것은 외롭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자기 신세가 바로 그러하다는 겁니다.

* 그것은 나의 자존심 !!

그 할머니는 비록 늙었지만 육체가 있는데, 하지만 그 육체를 보좌해주고 그 육체를 육체답게 해줄 수 있는 내용물들이 하나 둘 빠지고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할머니는 자꾸만 쓰레기를 가지고 오는데, 왜냐하면 자기 주위가 신작로와 같으니, 그것을 채운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그것은 전혀 쓰레기가 아닌데, 자기 과거 기억에는 그 물건들은 쓸만한 물건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들은 새벽에 그 물건을 몰래 치우는데, 그러면 부모는 얼마나 섭섭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라는 말이죠. 참고로 우리 어머니가 가지고 온 것은 주로 스티로폼인데, 그것도 큰 것들을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집안에 가지고 와서는 자꾸만 쌓는데, 그러면 저는 그것을 몰래 내다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은 비단 치매에 걸린 노인네의 문제만이 아닌데, 평소에 멀쩡하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인데, 그런데 그것이 치매라는 것을 통해서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일단은 긁어모으고 그 다음에는 지키겠다는 것인데, 그것도 목숨을 걸고, 자기 자존심을 걸고 지킨다는 말이죠.

인간의 자존심은 그런 것에 동원이 되는데, 즉 "당신이 뭔데 내 것을 왜 가지고 가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명예이고 자기 위신이고 자기 체면인데, 그러니 그 누구라도 자기 것에 손대면 안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극구 반항을 한다는 것이죠.

* 타인은, 자기와 꼭 닮은 육신으로 !!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인고 하니까, 바로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강가의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낮에 야곱을 찾아와서는 힘들어하는 야곱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밤에 와서는 야곱과 싸운다는 말이죠. 즉 한 밤중에 야곱에게 와서는 타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타인은 실제로 몸을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허황된 그 말씀의 환경이, 즉 "어디에 말씀이 있겠지?" 라고 하던 것이 함축이 되는데, 무엇으로 말입니까? 자기를 꼭 닮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면 그 육신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까? 그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몸의 입장에서 육신을 죽인 것, 그것이 예수님의 환경이 된다는 겁니다. 그 환경을 전도서에는 '허무' 라고 하는데, 즉 허무의 허무됨이 노출되었다는 말이죠.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우리는 지금 허무한 가운데 살고 있는데, 그 허무에는 성질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타인으로 간주해버리고, 자기 경계선 바깥으로 추방해버리고, 그 낯선 예수가 들어오지 않는 동그라미, 그것이 바로 그동안 자기가 애써서 행함으로 만든 모든 것들이 모인 창고와 같은 것인데, 그게 바로 '나의 세계'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우리 자신의 세계와 주님의 세계가 결합이 되겠습니까? 결합이 될 리가 만무한데,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도, 다 헛방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세계를 지키는 것인데, 즉 예수님을 추방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 악마인가? 메시야인가?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동안 악마가 메시야 역할을 했다는 말이죠. 우상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자기 것을 키워주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워주겠다고 하니, 그런 좋은 메시야를 왜 마다하느냐는 말이죠. 즉 "너는 의롭게 된다. 거룩하게 된다. 훌륭하게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런 메시야라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하는데, 물론 말씀을 통해서 말이죠. "어떻게 몸과 몸이 하나가 됩니까? - 믿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알면 알수록 자기가 무슨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까? 주님의 일에 꾀를 내어서 방해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멀쩡하지 않는데,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정상이 아닌 자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몸이 됨으로 인해서 주어진 환경, 그 모든 환경이, 그 이전에는 자기 몸을 위한 환경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합니까?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실재세계, 실제세계 !!

그것은 모두가 주님을 위한 환경인데, 그것을 저는 '실재세계' 라고 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러한 실재세계는, 이 실제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는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우리가 믿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실제세계에서 자기 자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실제세계를 도저히 놓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실제세계를 키우기 위한 메시야를 원하는데, 그래서 이 메시야에 누가 투입되는고 하니까, 악마가 자기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겁니다. "내가 키워줄게. 복 받게 해줄게. 천국에 가게 해줄게" 라고 하면서 말이죠.

* 허무하지 않게 해줄게 !!

그러니 실제세계에 들어오는 메시야는 그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까, "네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내가 다치지 않게 해줄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대로 하면 "허무하지 않게 해줄게" 라는 것인데, 혹은 "너의 꾀를 내가 정당화시켜 줄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류역사는 실재세계가 아니고 실제세계인데, 인류역사는 실제세계를 실재세계로,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동일하게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재세계는 보인다고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악마는 뭐라고 합니까? 보이는 실제세계를 키우면 보이지 않는 실재세계까지 이어진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종교화가 된 과학이고 철학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꾀를 내어서, 그 꾀가 곧 '시기조정' 인데, 즉 사라질 실제세계를 영원한 실재세계로 바꾸기 위해서 인간의 시간론이 여기에 어떻게 투입되는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말이죠.

*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

인간들의 시간론이 3가지라고 했는데, 그것이 여기 교재 143페이지에 나오는데, 먼저 '크로노스' 라는 겁니다. 그게 '일반적인 시간관'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라는 절대적인 동질성이 발생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동질적인 논리로 가득한 세계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하얀 도화지가 있는데, 거기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크로노스의 세계라는 말이죠. 즉 자기가 그리기 이전까지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가 그림을 그림으로서 그림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누구의 동질성이 증명됩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 즉 그림을 그리기 이전의 '나'나, 그림을 그리고 난 이후의 '나'나, 그게 똑같은 '나' 라는 것이 증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나' 라는 것, 즉 자아는 훼손이 되었습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전혀 훼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여기에 전도서 9장 12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전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물고기가 그물이 있는 줄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고 잡힌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즉 자기가 몰랐는데, 그런데 홀연히 재앙이 온다는 말이죠. 지금이 2시라고 하면, 2시 정각에 자기가 물고기가 되어서 헤엄을 치는데, 그런데 그만 2시 8분에 그물에 걸리고, 그리고 15분에는 횟감 신세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물에 걸리기 이전인 2시 5분의 '나'와, 그물에 걸리고 난 이후인 2시 10분의 '나'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세계로 생각했던 그 세계가, 진짜로 나타난 실재세계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무를 주시는 이유인데, 즉 "인간아, 네가 상상하는 세상과는 다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 양의 시간, 질의 시간 !!

그러면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크로노스는 양으로 따지는 시간인데, 60초는 1분, 60분은 1시간, 그런 식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양으로 따져서 동일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양이 있으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 안을 질로 채워서 넣어주어야 하는데, 그 질이 바로 아이온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온은 조금 전에 말한 그림 그리기, 그리고 산보하기, 사랑하기, 즉 '~하기' 라는 겁니다. 양으로 결정되어있는 크로노스에 아이온이라는 질로 채운다는 말이죠. 보통 사람들이 만나면 "당신은 오늘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크로노스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무엇을 하나 하지 않으나 '오늘' 이라는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간다는 것이죠.

* 나는 오늘 축구를 했습니다 !!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나는 오늘 축구를 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축구' 라는 질을 넣게 되면, 자기를 위한 크로노스가 되는데, 그것이 아이온이라는 말이죠. 즉 "오늘이라는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 나는 축구를 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크로노스와 아이온은 시간이라고 보면 되는데, 하나는 양적인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인 시간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라는 것은 크로노스이고, '축구하기'는 이이온이란 말이죠.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그런데 이것이 누구를 위한 몸이라는 겁니까? 그게 다 '나'를 위한 몸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다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재앙, 허무,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모두 다 빠졌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크로노스에 아이온을 채우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구를 위한 시간입니까? 당연히 자기를 위한 시간인데, 그러니 골로새서 1장 16절, 즉 주님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아이온에 예수 믿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과 같은 것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자기의 크로노스는 멀쩡하다는 말이죠. "나는 오늘 하루종일 성경을 보았다" 라고, 그렇게 '성경보기' 라는 아이온을 집어넣어도 자기 동질성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을 보았는데 허무하더라" 라고 하면, 그러면 된다는 것이죠. 즉 자기 크로노스 속에 주님의 아이온이 오게 되면, 그러면 근원적으로 무엇을 문제로 삼게 되는고 하니, 자기를 위한 크로노스는 그만 허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 베니어판, 무대장치 !!

오늘 강의내용이 만만치 않은데, 그러니 한 번 들었다고 해서 그만 두지 말고 동영상을 보시라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이 '베니어판' 인데, 그러고 보니 제목도 어려운데, 연관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대세팅'으로 하겠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은 크로노스라는 베니어판으로 무대세팅을 해놓았다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해도 어디를 벗어나지 못합니까? 세팅이 된 자기 베니어판, 즉 '실제세계' 라는 무대장치를 아무리 달려가도 충돌하게 튕겨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나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 라고, 그렇게 50년을 해도 튕겨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을 다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즉 죽은 자가 되지 않는 조건 하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자기가 설정한 '크로노스' 라는 무대세팅 안에서 논다는 겁니다. 그게 종교인데, 즉 기독교고 불교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종교는 모두 무대세팅인데, 인간이 상상한 것이란 말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 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면 여기서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그것을 친절하게 알려드리겠다는 말이죠. 누가 사도행전 20장 18절을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자기 피로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라고 하는데, 그것이 조금 전에 이야기한 어린양의 피라는 겁니다. 그때 집안에서 사람들은 무슨 고기를 먹었습니까? 그 양고기를 먹었는데, 그런데 그 양고기의 피, 즉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바깥에서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양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은 양과 자기를 일체화를 시키는 것인데, 즉 예수님과 두 몸이 아니라 이제는 한 몸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우리가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교인들이 "우리교회 목사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목사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교인들이 목사 탓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누구를 믿고 있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고 있는데, 목사를 보고 자기를 천국에 넣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서 천국에 들어가면, 물론 들어갈 수도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간다면 자기는 파괴가 됩니까? 온전해집니까? 온전해진다는 말이죠. 진짜 목자는 목사가 아니고 예수님인데,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허무를 통해서 우리를 허무하게, 즉 이미 죽은 자로 만다는 겁니다.

* 대충 살다가 죽어라 !!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목사를 우리를 허무하지 않게 만들려고 하고, 반면에 주님은 우리를 허무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목사는 우리를 키워주려고 하고, 주님은 죽이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충 살다가 죽어라" 라는 것이 주님이고, 반면에 목사는 어떻게 합니까? 치매에 걸려서 쓰레기를 모으면서도 죽지 않으려고 하면, "권사님, 오래 사세요. 아직 92세인데, 청춘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목사는 교인 하나가 아까워서 그저 달래주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환경을 요청하고 있는지, 그게 전부 자기를 위한 것임을, 그것을 왜 제대로 알려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이나 목사나 지옥에 가려고 환장을 했다는 것이죠.

정확하게 알려주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목사 자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밥 먹고 살려고 교회당이라는 가게를 하나 오픈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교인들은 어떤 교회를 찾는고 하니, 자기를 살려주는 교회를 찾는다는 겁니다. 복을 받아서 살려주는 교회를 말이죠.

멀쩡한 자기를 천국에 보내주는 교회를 찾는데, 하지만 멀쩡한 자기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멀쩡하지 않다고 하면 죽여달라고 해야하는데, 그게 바로 꾀가 없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은 죽여달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가 아니냐는 겁니다. 성도라고 하면 그게 당연히 나와야할 고백이라는 말이죠.

* 자기 연민 !!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게 바로 '자기 연민' 이라는 겁니다. 자기 연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기를 스스로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가엽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쿠 인간아, 고생도 참으로 많이 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특히 옛날 여자 분들은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 시어머니의 그 매운 시집살이를 다 감당하고, 그리고 남편은 주특기가 바람 피우기라는 말이죠. 그리고 자식은 5명이나 낳아서, 그야말로 자기 혼자 자식들을 다 키운다고 고생고생을 다 한다는 겁니다.

낮에는 시장에 가서 손님들을 붙들고 하루 종을 입씨름을 하고, 그리고 밤에는 삯바늘질을 하고,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는 말이죠. 자식들은 이미 낳았고,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남편은 매일같이 노름판에서 산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계집질이나 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 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린다는 겁니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이라는 노래가 왜 나왔겠습니까? 그 설움을 눈물로서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말이죠. 남자는 한량기가 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남성의 세계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럴 때는 여자는 어디서 위로는 받는고 하니, 그것이 자기 연민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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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일생(이미자)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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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나이다, 비나이다 !!

그래서 달이 뜨면 정화수를 떠놓고 그 달을 바라보면서 온갖 정성을 다해서 빌고 또 비는데, 자기와 자기 새끼들을 지켜달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바로 마귀의 짓이었는데, 물론 우리 인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이제는 교회에 와서 그런 짓을 그대로 한다는 겁니다. 원통과 한 맺힘인데, 새벽기도나 금요철야 기도시간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크로노스라는 양에 아이온이라는 질을 더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자기 연민이 굉장히 멋있어 보이는데, 열녀상도 받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천국에 갈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단호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는데, 뿌리가 없는 나라에서 온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아니하면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저 해와 달에게 빌고, 성황당 나무에게 빌고,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이제 예수님에게 비는데, 그렇게 하면 만사형통이 된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과거에 했던 고생에 대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그게 이 세상에서 미처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서는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연민을 누군가가 호응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그렇게 긍정을 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로 여자들이 교회에 시간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몸을 바친다는 말이죠. 그게 교회부흥인데, 그게 한국교회의 현주소라는 겁니다.

* 크로노스와 아이온 !!

그러면 한국교회는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이 '카이로스'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그것을 번역하면 물론 모두가 다 한국말로는 '시간' 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인간의 삶에는 그렇게 시간이 3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크로노스는 시간의 양인데, 무대세팅, 베니어판, 즉 모든 시간이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이온에서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이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과 '너'의 행동이 다르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어제 하루종일 기도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의 아이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크로노스와 아이온은 둘 다 무엇입니까? 자기 연민의 소산이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자아의 소산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함인데, 그러니 전혀 이스라엘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적이 아니라 완전히 야곱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의 것을 건드리면, 자기의 이 정상적이고 건전한 것을 건드리게 되면, 그런 자들은 자기의 타인으로 간주해서 싸우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싸웠던 인물이 곧 야곱인데,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천사와 싸웠다는 말이죠. 즉 자기 긍정이라는 겁니다.

* 카이로스와 십자가 사건 !!

반면에 카이로스는 무엇인고 하니, 물론 말로는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때' 라고, 즉 타이밍인데, 그게 어떤 타이밍이고 하니, 결정적인 타이밍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를 두 동강, 세 동강을 내는, 즉 자기를 허무케 하는 타이밍이라는 겁니다. "죽은 놈이 그동안 살아있는 척을 했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의 허물과 위선을 작살을 내는 타이밍이라는 것이죠.

이 카이로스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결정적 시간인데, 그러니 예수님을 타인, 즉 남이라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그 생각이 바뀌어서 예수님이 보시기에 자기가 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버림을 받은 것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기가 남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크로노스적이고 아이온적이었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믿었던 하나님이란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때가 오면, 그게 바뀐다는 것이죠.

* 그 순간이 성령이 오시는 순간 !!

이제는 예수님이 타인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자기가 예수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타인으로 살았다고 하는, 바로 그 모습이 등장하는 순간, 그게 바로 오순절 성령이 오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이니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래서 "이제는 저를 가지고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펼치소서. 제가 죽을 먹든 밥을 먹든 간에, 그것조차도 주님이 하시는 밀이 되게 하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자아가 자기 자아를 없애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꾀를 내고 또 내었는지, 그것이 완전히 들통이 나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꾀를 낼 때마다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카이로스, 즉 주님의 때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크로노스나 아이온은 면적을 가지는데, 즉 자기 행동을 가지고 채운다는 겁니다. 반면에 카이로는 우리가 보기에 순간이라서 면적이 없는데, 하지만 서서히 새로운 세계가 자기를 통해서 펼쳐진다는 말이죠.

* 환등기 인생 !!

그러면 우리 자신은 무엇이 되는고 하니, 오늘강의제목을 '환등기'로 바꾸어야 하겠는데, 우리는 그야말로 환등기라는 겁니다. 그 환등기 안에 예수님께서 자기 필름을 집어넣게 되면, 이 세상에, 즉 실제세계에 진짜 세계인 주님의 세계가, 즉 실재세계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죠. '나' 라고 하는 환등기를 통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환등기에 필름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나올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카이로스가, 면적도 없어 보이는 그 얇은 막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펼쳐지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령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어서 출세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가 타인이라고 여겼던 그분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자기는 그분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성령이 오시게 되면, 자기가 자기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타인의 증인이 되는 그야말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타인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데, 자기는 그만 그분의 종이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말이죠.

* 더 이상 규칙이 없어 !!

그렇게 예수님이 주인이 되면 어떤 점이 좋은고 하니까,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소관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지킬 것이 없으면 어떤 점이 좋은고 하니까, 그동안 자기가 지키기 위해서 만든 규칙과 법칙이 있었는데, 더 이상 그것을 만들 필요도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나는 아침에 밥을 반 공기만 먹겠다" 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규칙입니까? 자기를 위한 규칙인데, 자아를 좋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제는 아침에 반 공기를 먹는 것은 누구를 위한 규칙이 됩니까? 주님을 위한 규칙이 되는데, 하지만 주님의 규칙은 자기가 지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집 아이가 취직을 해서 기분이 좋아서 아침에 한 공기를 다 먹었다고 하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반 공기를 먹어야 하는데, 그만 한 공기를 다 먹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규칙을 만들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반 공기를 먹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한 공기를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올 수도 있고, 삐치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자기가 넘지 말아야할 선을 그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어서도 안 되고 말이죠. 어떤 분은 "내가 여자답게 조심해야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남자밖에 없는데, 여자는 없다는 겁니다. 모든 있음은 남자가 그 모델이 된다는 말이죠.

소위 '페미니즘(여성주의자)' 이라고, 그것은 남자가 가진 것을 여자가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성을 지향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이라는 말이죠. 여자는 없는데, 그 가지고 싶은 것을 남자들이 다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차지하려고 덤벼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트랙터를 몰고 한다는 것이죠. 인간은 모델이 있어야 도전을 하는데, 그 모델을 남자가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차지하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이렇게 시간을 3가지로 나누었는데, 그렇게 나누었다고 해서 다 알 것 같으면 제가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데 말이죠(ㅋㅋ).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은 꾀를 부리는데, 그 꾀의 목적은 재앙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재앙의 날을 미리 알 것 같으면 대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전도서 12장에 의하면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이죠.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한다는 것이죠.

(전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절대로 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대비하게 되면 자기 잘난 척밖에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여, 어려운 줄을 알고 미리 기록케 하셨군요"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재앙이라는 것은 인간이 대비하지 못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 허무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데, 그러면 왜 허무케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까불어서 멀쩡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너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꾀를 내어서 반발을 한다는 말이죠. 그 반발이 곧 크로노스와 아이온인데, 그리고 카이로스라는 겁니다.

* 주님의 카이로스는 하나밖에 없어 !!

여기에서 카이로스가 결정적인 때인데, 그것을 제가 조금 전에 십자가라고 한 것은, 그것은 예수님의 의미를 집어넣어서 그런 것이고, 그것을 그냥 자기 몸 위주로 하면 얼마든지 이런 카이로스는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죠.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거기에서 당신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라고 하면, 그게 카이로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한 카이로스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그게 십자가가 아니고, "내가 당신을 만난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것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의미를 붙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결국은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베니어판의 자기의 실제세계가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전혀 카이로스가 아닌데,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자기가 카이로스를 지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그때 당신은 만난 것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때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겠노?"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을 아내가 들으면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ㅋㅋ), 그러나 이것은 따지고 보면, "내 범주 안에 있는 당신이기에, 당신이 좋은 것이 내가 좋은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세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세계는 손대지 말라는 것인데, 허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는 겁니다.

* 구멍난 베니어판 !!

반면에 주님의 카이로스는 무엇인고 하니,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육신이 그만 죽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그게 바로 카이로스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카이로스는 인간의 크로노스, 그 베니어판에 그만 구멍을 내버린다는 것이죠.

인간의 그 어떤 종교로도 이 베니어판에 구멍을 낼 수가 없는데, 자기가 살아있다고 버티는 이상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가도, 멀쩡한 자기는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인데, 즉 마귀를 믿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순간이고, 자기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순간이고, 자기가 허무하지 않다고 여기는 순간인데, 그러니 자꾸만 그런 꾀를 내지 말라는 겁니다. 즉 "비록 내가 문제가 좀 있지만,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는 멀쩡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나오면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것이죠.

* 누군가와 합체하기 위한 몸 !!

자기 몸은 그냥 가면 되는 게 아니라, 누구와 합체하기 위해서 있는데, 그러면 그 중간에 어떤 과정을 밟게 된다는 겁니다. 즉 반드시 "내 몸은 허물어져야 한다" 라는 과정을 밟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과정을 생략하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면 아이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나는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해도, 역시 아이온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계속해서 지키기 위해서 꾀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꾀를 내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것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먼저 잠자는 자들이 !!

이제 끝으로, 여기 교재 142페이지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을 다시 설명하고 마치겠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려고 하면, 먼저 누가 있어야 합니까? 잠자는 자들이 먼저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잠자는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실제세계는 실재세계에 의해서 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 맞기는 맞는데, 눈에 코스모스가 보인다면 그것은 해바라기가 아니고 코스모스라는 겁니다. 집에 가는데 길에 돌이 놓여있다고 하면, 그것이 돌이 맞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자기 눈에 보이는 실제세계에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세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세계에서 실재세계로 가려고 하면, "저 돌을 누가 만들었지?" 라고 질문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 돌은 어떻게 됩니까? 유황불에 의해서 타버린다는 말이죠. 즉 실제세계는 실재세계에 의해서 다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거기에 집어넣자는 것인데, 우리가 치매에 걸려서 쓰레기를 모은다고 해도, 결국 모두가 다 죽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고 나면 자기가 그동안 실제세계라고 여겼던 것과 실재세계라고 여겼던 것도 같이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자에 불과한데, 그런데 그것을 그때 가서 알지 말고 미리 알자는 것인데, 허무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말이죠.

*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

그러면 왜 미리 알아야 합니까? 나중에 죽어서 알아서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려면 미리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 자기를 허무케 한, 자기를 허물었던 그분을 자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그분을 자랑하려고 하면,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자신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우리 자신이 천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함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우리를 허무하게 만드신 주님에게 감사하면서, 그런 허무를 통한 주님의 증거가 더욱 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9,23 오전 10시에 마침.

날로 날로 깊어지는 허무 속에서 더욱 더 주님을 찬양케 하옵소서 !!

 첨부파일 : 19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61-환등기인생.hwp (61.6K), Down:3

 구득영 (IP:183.♡.224.80)19-09-23 15:05 
하나님의 허무와 인간의 꾀(전7,29)를,
이렇게 연결해서 주의 한 몸됨을 설명할 수 있는 분은,
단언컨데 이 목사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주님이 목사님에게 주신 지혜가 부럽고,
또한 그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전하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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