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8 - 공간
19,07,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선악구조와 생명구조 !!
오늘은 교재 13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선미 씨가 참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흡족하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미흡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그 전체를, 즉 "이것은 잘 했고, 저것은 잘못했다" 라고 하는 선과 악의 구분자체를 생명구조로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드신 것은 선과 악에 대해서는 몰라도 되는 존재로,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닌, 선과 악을 아는 인간으로 변질을 시켜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인간은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라고 하면서 평생을 거기에 시달리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인생을 살아도, 죽을 때까지 그 시간 시간들이,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라고 하면서, 90평생을 다 보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원래 만든 인간은 선과 악을 고려하지 않는 인간인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오늘밤 천국에 간다 !!
예를 들어서, 자기가 살인강도가 되어서 그만 사람들을 여러 명을 죽이고 그만 체포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사형을 당한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 인생으로 보면 완전히 종친 인생이 되는데,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밤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악적으로 "내가 누구보다도 더 못한가? 아닌가?" 라는 것을 따질 것이 아니라,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바로 그것을 예수님 앞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강도는 천국에 가고 잘난 척을 하는 인간들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면 우리가 예상한 인간은 무엇입니까? 이왕 사는 것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고 칭찬을 받으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 자체가 자기 인생을 전혀 모르는 잘못된 발상이란 말이죠.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생각하면 과연 어떻습니까? 제대로 안다고 여길지 몰라도,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내 인생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교재 134페이지에 전도서 11장 말씀이 나오는데, 5절과 6절입니다.
(전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전 11: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 알지 못한다 !!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알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그 모든 것이 알지 못하는 것에 포위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알려고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스스로가 고민거리를 가지고 온다는 말이죠.
전도서에서는 '이 세상'을 두고 뭐라고 합니까? '해 아래의 삶'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해 아래서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마치 우리의 손과 발목을 묶어놓고는, 이 대자연이 오직 예수님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은, 이 대자연에 숨어있는 창조주를 '희생자의 모습'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교재 134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 다른 것은 생략하고 그 밑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전도서는 이러한 무지함을 책망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알지 못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알았다고 여길 때 다시 생각하라는 것인데, 즉 '알았다' 라는 것이 '알지 못함'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 알지 못한다 > 알았다 !!
그러니 우리가 '알았다' 라는 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는고 하니, 그 전체가 '알지 못함'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알았다' 라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함'을 정복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좀 더 알고, 많이 알면, 그러면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완벽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자부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전도서 11장에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아는가?" 라고 하는데,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안다고 여기면, 알지 못하는 그 범주가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겁니다. 안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더 자기가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함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면 애가 탄다는 말이죠. 그래서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했는데, 자기가 뭔가 알아야 살아가는데 유리하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여기서 전도서 11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찾지 못한다고 여길 때 도로 찾게 되고,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때는 예측하지 못할 재앙이 들이닥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노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찾을 수 없다고 장담하게 되면 도로 찾게 되고,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때는 예측하지 못한 재앙이 들이닥칠 수가 있다는 겁니다.
* 잘난 척을 하지 말라 !!
그러니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정반대인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 위함인데, 이 세상은 우리 인간 위주로 전혀 편성이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우리는 잘난 척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눅이 드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 '알았다' 라는 것이 '알지 못함'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알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수정해야 합니까? 당연히 알지 못함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알았다는 것이 어제 알았던 것이 이어지기 때문에, 오늘 알았다는 것이 알지 못함이 되면, 그러면 방향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 알았다는 것도 역시 알지 못함이 되는데, 물론 그 이전에 알았던 것도 알지 못함이고 말이죠.
그렇다면 왜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알지 못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중심이 있는데, 여기서 '중심' 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하는 코드가 된다는 것인데, 이 세상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코드가 이 세상에 따로 박혀있다는 겁니다.
* 죽음인가? 사라짐인가?
그것이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인데, 자기가 죽는 날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전혀 모르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사라진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가 박사학위를 3개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자기가 죽는다고 하면 박사학위 3개를 품기 위해서 알았던 그 모든 지식도 모두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를 알고, 친척은 어떠하고, 자식은 얼마나 낳고,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가 죽은 순간에는 다 놓고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사람들과는 졸지에 이별을 하게 되는데, 물론 자기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돈과도 작별이란 겁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근원적으로 몽땅 다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방금 중요한 것을 말했는데, 즉 죽는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인데, 그러면 죽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죽는 것을 자기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말이죠.
* 요한복음 11장 !!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ㅋㅋ),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나오는데, 그가 나사로라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평소에 알고 있던 예수님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자기 오빠가 죽어가고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지금 자기 오빠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는다고 했는데,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그래서 연락을 하면 예수님이 곧 바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마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비로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자" 라고 하니, 제자들이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음을 '사라짐'으로 보는데,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도마가 "그러면 깨우면 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과연 그러한지 요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도마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도마는 "같이 죽으러 갑시다" 라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로가 아니라 회당장의 딸을 깨우러 가지고 했을 때, 도마가 깨우러 가지고 했다는 겁니다(ㅋㅋ).
(요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예수님이 어떤 조치를 하시는가?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대목인데,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아픈데, 그렇게 계속해서 아프면 나중에는 결국 죽는다는 말이죠. 즉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는 죽은 적이 있더라도, 그 결과는 살아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또한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삶과 죽음의 핵심코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어떤 조치를 하시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몸이 죽는 것이 핵심이 전혀 아니란 것이죠. 자기가 아파서 죽던지, 사고가 나서 죽던지,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죠.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고 다뉴브 강에서 사고가 나서 죽고, 그런 것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아주 사소한 문제라는 겁니다.
(요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요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요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나는 매일같이 살려지고 있다 !!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내가 산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매일같이 살려지고 있다" 라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살려줍니까? 예수님이 살려주시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자기는 죽은 자가 되어야하고, 그러면서 이 중간에 예수님이 중심코드로 끼어들게 되면, "나는 늘 죽은 자인데, 살려지고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려지고 있다" 라는 것은, 그 전제가 "누가 살려주지를 않으면 늘 죽어있다" 라는 것인데, 죽어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고, 예수님이 개입하면 자기는 살려지고 있는 상태가 된다는 말이죠. 즉 "내가 산다" 라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산다" 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관심사가 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살려주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 그게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모든 것이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겁니다.
* 죽음 코드 !!
그러면 우리는, 여기 교재에도 나오듯이, 우리는 죽음조차도 모르니까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해도 되는데, 아니 굳이 알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결코 자기 솜씨가 아니기 때문이란 겁니다.
그게 자기 인생이라고 하면 자기가 알아야하고 또한 살려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전혀 자기 인생이 아니고 자기 몸이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에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배제하는고 하니, 주님이 중심이라고 하는 그 코드를 무시하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그 자리에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1장의 내용인데,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쳐다보게 된다면, 자기 오빠가 죽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울 문제가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기가 짝이 없는 일상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죽음은 자기 일상인 동시에 주님의 일상인데, 주님이 하신 일이 그것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죽음 코드로 바뀌어야 성경이 해석된다는 것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과학적 사고방식 !!
하지만 이 세상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자기가 보는 것으로 재구성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현실을 구성한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은 이렇게 있으면 그 바깥으로 대자연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냥 자연이라고 해도 되는데, 근대에 와서 대자연이라고 했고, 옛날에는 그냥 자연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이 있고 자연이 있다고 하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산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누가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그 아는 것이 자기를 살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인간은 모른다는 것인데, 더욱이 알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게 아니라, 알아야 그게 자기가 살아가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옛날 사람들은 자연을 혼돈, 즉 카오스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혼돈으로 보았고, 그런 혼돈에서 질서를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그 질서를 두고 코스모스라고 하는데, 이게 그리스에서의 최초의 과학정신이고, 이 그리스에서 현대의 과학정신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혼돈에서 질서를 끄집어내어서, 그 질서에 우리 인간이 맞추어 들어가면, 그 지식으로 인해서 살아가는데 유리하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게 옛날 그리스 사람들인데,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현대인들의 과학적인 인식이라는 말이죠. 그 중심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인데, 자기가 살면 그것으로 오케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진리라는 말이죠.
* 혼돈에서 질서를 끄집어내는 인간들 !!
그렇게 사람들은 '공간' 개념을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혼돈에서 질서가 나왔고, 그 질서를 신의 계획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고, 신을 믿더라도, 그 신을 인간이 상상해내었기 때문에, 그 신의 질서를 잘 이용하게 되면, 그 신을 믿는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게 종교의 시작이고, 그것이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라는 겁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인 이사야서 교재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알타미라 동굴이 B.C 6,000년경이라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거기에 그려져 있는 주술적인 벽화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고대인들부터 신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고대인들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우리나라에도 알다시피 옥저, 동예, 부여 등지에 제천의식이 있었는데, 서울 용산에 가면 고대 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가보면 그런 것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신에게 왜 제사를 드립니까? 이 세상은 신의 질서로 되어있고, 그 질서에 맞추면 자기 살기에 편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가 잘 되는 것, 그것이 목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런 목적을 가져도 결국은 죽는데, 그러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90편을 보겠는데, 7절에서 10절입니다.
(시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여기 9절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분노의 터널을 KTX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죠. 또한 10절에 보면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하는데, 날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 하나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화가 되어있어서 늘어진다는 겁니다.
* 나의 행복을 위해서 신이 존재한다 !!
그러니 성경이 옛날의 고대인들과는 다른데, 고대인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참으로 좋구나.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겠네" 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어떻다는 겁니까? 여기서 '신' 이라는 개념 자체를, "나의 행복을 위해서 신이 존재한다" 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작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행복해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도 있어야 하고 예수님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천국에 보내달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런데 빌면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시를 자기가 만드는데, 그것을 소위 '간증집회' 라고 하는데 말이죠. 엄연히 성경이 이렇게 있는데, 자기가 계시를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체험담이 곧 신의 계시가 되는데,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죠.
이런 비슷한 제목의 영화가 있었지 싶은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라고, 그것이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지 싶은데, 국제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해석을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삶이 그러하다고 여기니 말이죠.
이렇게 질서를 제사로 드리던 시절에, 여기서 천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제 신에게 제사를 그만 드리고, 그 신이 아는 것을 우리도 알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해서, 이것을 '로고스' 시대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성의 시대인데, 즉 "신이 아는 비밀을 우리가 알아서 거기에 맞추어 주게 되면, 그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라는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
그러한 천재들 중에 누가 있는고 하니, '데모크리토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원자론'으로 유명한데, B.C 4세기경의 사람인데 말이죠. 소크라테스와 거의 동시대인데, 이 사람 뒤에 이제 본격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데, 이때가 바로 '로고스 시대' 라는 겁니다.
이 '로고스'가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는데, 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할 때, 그 말씀을 로고스라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의 지식으로 만들면, 나는 땡 잡았다" 라는 겁니다. 즉 "신, 당신만 알지 말고 같이 알자" 라는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신은 이제 좀 빠져주세요 !!
그런데 이 데모크리토스가 자연을 신 중심이 아니라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신은 전체를 만들어놓았으니 이제 그만 빠지시고, 그것을 이제 우리 인간들이 알아낼 테니 좀 기다려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신의 계획을, 질서를 끄집어내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때부터 이 공간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빈 공간'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진공' 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를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주위가 비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 주위가 비어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운동하기 때문에 비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비어있는 공간에 자기가 설치면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고 보았는데, 그게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이란 말이죠.
--------------------------------------------- ※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 기원전 460년경 그리스 북동부 트라케 연안의 압데라(Abdera)에서 태어났다. 압데라는 이오니아 지방의 고대 철학과 근동의 사상이 모여든 곳으로 이러한 환경은 데모크리토스의 성장과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원자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본인의 스승인 레우키포스의 원자론을 좀 더 체계화시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에서 관찰할 수 있는 변화란, 사물이 실제로 변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선배 철학자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만물은 각각 영원불변하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가정하였고 데모크리토스는 이 입자를 원자라고 불렀다. 이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란 것을 뜻하며, 데모크그리토스는 만물을 이루고 있는 이 입자는 한층 더 작은 부분들로 무한히 쪼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데모크리토스는 자연 가운데 다양한 원자가 무수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예를 들어 나무나 동물과 같은 물체가 죽어서 분해가 된다면, 그 물체를 이루고 있는 원자는 흩어져 새로운 물체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의 진행과정에 개입하는 힘이나 정신을 고려하지 않고 원자들과 빈공간만이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이 때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자라고도 불린다. - 나무위키백과 ---------------------------------------------
* 나는 운동한다 !!
이게 그의 주장한 원자론인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반박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전혀 틀리지 않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전세방을 하나 얻어서 들어갔는데, 그런데 방이 비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TV와 냉장고와 세탁기를 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TV와 냉장고와 세탁기를 넣은 것은 누가 들어와서 생긴 결과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이 방을 전세로 얻어서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이 데모크리토스의 생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똑같다는 겁니다.
* 목사님,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살아있다. 그래서 반드시 운동한다" 라는 것인데, 이 운동을 두고 행함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행하면 그 행함이 자기에게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 뭔가 저에게 행할 것을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행하겠다는 것인데, 즉 비어 있는 공간을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도록 자기가 행함으로서 채워드리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도 좋고 자기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성경말씀과 일치합니까?
* 수고와 슬픔뿐 !!
시편 90편과 전혀 다르다는 말이죠. 시편 90편과 비교해보면, 시편 90편은 빈 공간이 아니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 채워져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도서 11장에서는 무엇을 채워져 있다고 했습니까? 이제 겨우 30분이 지났는데 벌써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알지 못함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것이 전도서 11장이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인해서 그 결과로 우리는 심판을 받아서 죽는다는 것이 시편 90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폼을 잡고 오래 산다고 해도 90을 넘기지 못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아무리 자랑해도 결국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는 것이죠.
* 그것이 곧 철학적 사고방식 !!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에 의하면, 수고와 슬픔도 없고 알지 못함도 없고, 그냥 텅텅 비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자기 잘남과 자기 지혜로 자기만의 공간으로 자기가 채워나가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철학적인 사고방식인데, 헤쳐나가는데 힘이 부족하니, 그 힘을 좀 채워달라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에 가서 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니고 그야말로 무당집이죠.
그런 교회는 무슨 자랑을 합니까? 기도 자랑, 헌금 자랑, 선교 자랑, 봉사 자랑, 충성 자랑, 성경지식 자랑,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세상으로 이어져서, 돈 자랑, 자식 자랑, 건강 자랑, 평수 자랑,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교회는 여기서 건강 자랑은 빠지는데,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해외여행 자랑도 여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죠(ㅋㅋ).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사람은 그러한 자랑거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불안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의 예를 들면, 자기가 동창회를 가는데 그런데 어떤 동창은 벤츠를 타고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을 타고 가야하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옷도 챙겨야 하는데, 그게 바로 자기 존재의 의미라는 겁니다.
* 성도는 매일같이 죽고 살아나 !!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성경말씀과 괴리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코드는 무엇인고 하니, "나는 살아있고 운동한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성경의 코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고 살아나심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성도에게 앞서나 뒤서나 집어넣게 되면, 성도는 매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역시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배역을 다 맡아서 살았다는 말이죠.
마르다와 마리아가 모르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즉 죽으면 끝이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왜 죽으면 끝입니까? 그것은 모든 중심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인데, 즉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자기 존재의 이유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무엇입니까? 죽어도 괜찮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로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교회에 가서 수 없이 속아왔는데, 하지만 그것을 목사에게 속았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속아왔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여왔는데, 즉 엉터리 '나'가 주님이 주신 진짜 '나'를 계속해서 속여왔다는 말이죠.
* 나와 너 !!
그렇게 데모크리토스는 '나' 하나를 빈 공간의 중심에 놓았는데, 그런데 그 뒤에 등장하는 플라톤의 경우에는 '나'만 놓는 것이 아니라 '너'도 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와 '너'가 되는데, 그것을 두고 '사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했는데, 사회적 동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회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도 있는데, 그러면 '나'의 의미와 행복을 위해서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합니까? '나' 앞에 등장한 '너'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가 있기 이전에 '너'부터 먼저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가 있기 이전에 부모가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영원한 '나'의 '너'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부모라는 '너'로부터 양육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괴물과 같은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자기에게 돈을 주고 키워주는 부모의 말을 잘 들어보려고 효도하는 척을 한다는 말이죠. 사랑하는 척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게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부모의 자리를 교회에 나오게 되면 누구로 채우는고 하니,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채운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을 함으로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데, 우리 인간은 그런 수작을 부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개판이라는 말이죠. 죽어도 괜찮다고 하는데,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죠.
* 공간, 그 의미는 사라지고 장소의 개념으로 !!
그러면 이 공간은 무엇인고 하니, 더 이상 의미의 개념은 사라지고 장소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면 장소는 테두리를 가지게 되고, 그것을 경계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이 공간의 의미이고, 그리고 거기에는 경계, 혹은 경계선이 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있는 장소와 그 바깥의 장소를 경계를 지으면서 싸움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삶의 투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투쟁을 하는데, 그래서 '나' 안에서는 누가 절대자로 남습니까? 자가 자신인데, 그래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죠.
* 인간은 이미 믿음이 있어 !!
그러니까 인간은 교회에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믿는 자, 즉 신자인데,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겁니다. 이미 신자가 되어서 교회에 나오는데, 그러니 이미 믿음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가나 절에 가나 그 믿음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종교는 결코 바뀌지 않는데,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진짜 종교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자기교' 라는 종교의 교주로 섬기는 것인데, 그리고 그 종교의 유일한 신자는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손흥민이 지금은 영국의 토트넘에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거에는 독일의 프로팀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손흥민을 좋아한다고 하면, 과거에는 독일팀을 응원하다가 이제는 영국팀을 원한다는 것이죠. 류현진의 경우에도, 지금은 LA 다저스 소속이지만, 과거에는 한화 이글스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두 팀이 시합을 하면 어느 팀을 응원하겠습니까?
* 바뀌는 경계선 !!
그러니 경계가 자꾸만 바뀝니까? 바뀌지 않습니까? 자기가 결혼하기 이전에는 '나' 라는 경계선 안에 부모가 있었는데, 그러나 이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는 그 경계선 바깥에 있게 되는데, 그러면 부모는 '나' 외의 공간이라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공간개념에 있어서 절대자는 자기 자신인데,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제외하면 다 바깥에 있는데, 그렇게 경계를 이룬다는 말이죠. 경계라는 것은 싸우기 위한, 즉 자기 허락이 없이는 더 이상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부가 되어서 같이 살고 있는데 부모가 자주 찾아오면 좋습니까? 싫겠습니까? 이미 경계선 바깥에 있는 분이니까 좋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산다고 하면서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둘이 그만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둘 사이에도 그만 경계가 생기고, 그 경계는 필히 투쟁을 낳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투쟁입니까? "왜 나의 의미에 당신이 끼어 드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교회에 다니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새벽기도회에 다니고 해도 그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는데, 신에게 아부하는 척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신의 영역 !!
그런데 신학에서는 데모크리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확장시켜서, 이 인간의 공간을 무한공간으로 만들어서, 이것을 '신의 영역'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한데, 즉 신의 영역은 이 세상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신부나 목사가 "지금 여러분이 여기에 있지만, 죽어서는 하늘나라에 갑니다" 라고 한다고 하면, 그게 바로 연속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연속성이 아니고,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알지 못함'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 믿음과 믿음 !!
그렇다고 하면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내 경계선 바깥에 있는 그분이 나를 구원합니까?" 라는 것인데, 어느 것입니까? 두 번째인데, 자기 믿음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그 믿음을 믿음이 아니라고 무산을 시키는 믿음, 그것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믿는데, 그 믿음 속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이 되겠지요?" 라고 하는 것도 자기 믿음에 속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절대자이니 말이죠.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의 수작을 부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외부에 계셔서, 자기는 투쟁을 하고 싶지만 주님은 그 투쟁을 짓밟고 쳐들어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그 주님 앞에서 어떻게 노출이 됩니까? 자기 하나 행복하고 자기 하나 천국에 가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그 모습이 누구에게 노출이 되는고 하니, 주님에게 모두 다 들키고 만다는 겁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는 말이죠.
* 어서 문을 열어 !!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아이를 아침에 밥을 해서 먹여놓았더니만 아이가 문을 받고 게임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문을 열라고 하니, 아이가 안 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엄마가 화를 내면서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도 해서 먹이고 빨래도 해서 옷을 입혀주었잖아? 그러니 고맙지? 어서 문을 열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엄마의 할 일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어요" 라고 하면서 버틴다는 말이죠. 그래서 엄마가 해머를 가지고 그 문을 때려부수고 들어갔는데, 그러면 그것은 강제침입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란 말이죠. 즉 허락도 없이 자기 영역에 들어온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박살이 나게 되는데,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준 은혜도 모르고 까불다가 말이죠. 이런 충격적인 난입이 있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교주가 되어서 자기를 섬기고 하다가, 바깥에서 쳐들어오니 그 전체가 그만 파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심판이고, 그것을 두고 세상에서는 '망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다시 정리하면, 공간개념에 있어서 텅 비어있는데 자기가 거기에 들어옴으로서 자기 행함으로 공간을 다 채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나는 내 세계만 고수하면 그만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강제로 쳐들어오면 경계선이고 뭐고 다 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망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이게 교재에 나오는데, 13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러한 하나님의 준비된 일괄적인 심판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이 정보를 흘리지요. 왜 정보를 흘리는고 하면, 주의 원수를 주의 이름에 입각해서 노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원수가 인간 배후에 숨어있지 못하게 하시겠답니다. ------------------------------------------
* 일괄적인 심판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준비된 일괄적인 심판' 이라고 하는데, 그냥 심판이 아니라 '일괄적인' 심판이라는 겁니다. 즉 잘나면 구원해주고 못나면 지옥에 보내고,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2학년 2반이라고 하면,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간에 2학년 2반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 심판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착하든 악하든 간에 모두가 아담의 자손인데, 우리가 아담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먼저 하나님이 정보를 흘리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주의 원수를 주의 이름에 입각해서 노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원수가 인간 배후에 숨어있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이죠.
* 뱀띠들은 여기 여기 다 모여라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우리 자신을 하나의 긴 뱀으로 보면, 악마가 곧 뱀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악마를 닮은 긴 뱀이라는 겁니다. 제가 뱀띠이기도 하고 말이죠(ㅋㅋ). 이 긴 뱀을 '자기 동질성' 이라고 하는데, 즉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가 동일하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잘난 척을 하는 이유가 자기 기억 때문인데,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이유도 바로 이 기억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 기억을 우리가 전혀 끊을 수가 없는데,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여기에 대해서 하십니까?
이 마디를 그만 다 끊어버린다는 겁니다. 여기 마디마디를 다 끊어서 여기에 주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주님이 개입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동질성이 아니라 단락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죠. 즉 각각의 하루 하루치가 단락이 된다는 겁니다.
* 단락된 삶 !!
옛날에는 떡을 다라이에 통 채로 담아서 주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일일이 랩으로 포장을 다 해서 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동질성이 비동질성으로 단절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어제에서 오늘까지 주님이 개입하셔서 자기를 살리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뱀은 계속해서 뱀으로 남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 이 뱀은 예를 들었다기보다는 실제 상황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뱀, 즉 악마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계속해서 동일하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원수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뱁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고, 다시 그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로서 모세가 활동하는 현장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같이 동반 출몰하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만 나타나는 게 아닌데, 하나님의 원수도 같이 나타나는 현장이 제대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 졸지에 우리는 모세처럼 지팡이를 들고 있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
* 지팡이를 들고 !!
여기 마지막에 "졸지에 우리는 모세처럼 지팡이를 들고 있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오늘날 성도가 바로 모세라는 말이죠. 모세처럼 지팡이를 들고, 즉 주님의 이름을 품고, 주님의 이름이 시키는 대로, 주님의 이름에 종속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러니 이것은 "내가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이 세상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발췌해내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 비어있다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여러분이 다 안다고 여기고 진도를 나가겠는데, 공간 이야기를 다시 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 공간에 자기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리고 그 바깥은 비어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비어있다' 라는 개념이 상당히 중요한 개념인데, 즉 자기가 행한 것이 없으면 자기 주위는 늘 텅텅 비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같이 살다가 떠나버리면, 그렇게 떠남으로서 비어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갑자기 무엇을 느낍니까? 과거에 함께 있었다는 기억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겁니다. 과거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 없으면 무엇을 느끼지 않습니까? 외로움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집에서 키우던 개도 어디로 보내지 못하는데, 보내고 나서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노래가사를 하나 소개해드리겠는데,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외로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 등 불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 추억" 이라고 하는데, 이게 노래방에서 많이 부르는 한혜진의 '갈색추억' 이라는 노래라는 겁니다.
* 갈색추억 ♬
무슨 뜻입니까? 과거의 추억이 그리워서 그때 그 자리를 또 다시 찾아간다는 말이죠.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가 뱀인데, 뱀은 무엇이 되지 않습니까? 과거와 단절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자꾸만 그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억 속에는 자기도 있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도 같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공간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공간이 자기를 위한 공간인데, 하지만 주님은 이것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히 정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이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 제가 앞으로 용돈을 드리겠습니다 !!
예를 들어서, 부모가 딸을 열심히 키워서 교사로 만들었는데, 그러자 딸이 자기 부모에게 하는 말이, "그동안 저를 키운다고 고생하셨는데, 제가 앞으로 용돈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참 흐뭇한데, 용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그야말로 기특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사가 되면서 바로 결혼을 했고, 그러면서 집을 구입하는데 2억을 대출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남자와 맞벌이를 해도 대출이자를 갚고 하면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딸이 한다는 말이 "제가 대출을 받아서 여유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실제 은행이자는 60만원정도이지만 원금도 같이 갚아야하고,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대출 때문에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아니고, 결혼을 하기 전에 무슨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겁니다. 결혼을 하기 이전에 왜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겠다는 했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영역 안에 그 동안 부모가 자기를 키운다고 고생을 했다는 것이 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효도한 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된다는 겁니까? 자기 가치와 자기 존재의 우수성을 증명해줄 좋은 기회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2억 대출이 그만 개입을 하게 되니, 당장에 대출을 갚는 것이 급한데,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는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어떻게 남의 일이냐는 말이죠.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 예수 안과 예수 밖 !!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공간에 자기가 있는데, 그런데 그 뒤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덩치가 큰 주님이 함께 계시면, 이 공간이 자기를 위한 공간이 되겠습니까? 주님을 위한 공간이 되겠습니까? 주님의 위한 공간인데, 이것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밖' 이라는 것도 형성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 경계선은 누가 정합니까? 과거에는 "내가 행복한가?" 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결정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인간과 합당하지 않은 인간으로 그 경계선이 정해진다는 말이죠.
주님이 그 기준을 우리에게 집어넣는데, 그렇게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공간개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수용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주님이 넣은 것을 수용하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주님께 이렇게 헌금을 드렸으니,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나온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충성을 할 테니 자기 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데, 그렇게 계속해서 자기 것을 주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에게 교주가 되고 유일한 신자가 되는 관계, 그것을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나'와 '나' 사이의 전쟁 !!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공격을 하시는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마련하신 '나'와 과거의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나', 그렇게 '나'와 '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육과 영의 전쟁인데, 즉 자기에게 길들여진 '나'와 주님이 준비한 '나'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잘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것은 일체 묻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이게 주님이 공격하시는 공격무기이고, 반면에 우리의 방어무기는 무엇인고 하니, "그래도 인간이라면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우리가 믿는 척을 하면서 내놓은 어설픈 우리의 무기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 제가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겠습니다" 라고 하고, 반면에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그런 너의 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이 세상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단락을 짓는 주님의 지팡이 !!
모세 옆에 지팡이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옛날에는 누구의 지팡이였습니까? 모세의 지팡이였는데,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게 주님의 지팡이가 된다는 말이죠. 과거에는 그 지팡이가 모세에게 종속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지팡이에 종속된 모세가 된다는 겁니다. 즉 주님에게 종속된 모세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에게 종속된 모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을 단락을 짓는다는 겁니다. 즉 과거의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고, 또한 내일 일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죠. 지금 이대로가, 즉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가장 적절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떠 일도 결코 후회나 염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8장을 보겠는데, 23절에서 27절입니다.
(마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 믿음이 없는 현장성 !!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었는데, 여러분도 가서 직접 봐야하는데, 5백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풍랑이 늘 일어납니까? 그 순간에 일어났습니까? 그 순간인데, 그게 '현장성' 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아무리 믿는 척을 하고 잘난 척을 해도, 막상 그 현장에 와서 보게 되면 자기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그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제 오늘 강의의 결론부분이 나오는데, 주님이 제시하시면, 즉 성령께서 작용하시면 우리는 매일같이 믿음이 없는 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는 불신앙인이다" 라는 것이 매일같이 고백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라는 겁니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이미 누구를 믿고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는 자기를 믿는 신앙인인데, 그런데 그 신앙은 주님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성도라는 말이죠. 자기는 신앙인이 아닌데, 왜냐하면 풍랑에 대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물을 퍼내는 정도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이 그렇게 물을 퍼내다가 그게 안 되니 누구를 찾습니까? 예수님을 찾아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바다를 꾸짖기 이전에 누구를 먼저 꾸짖습니까? 제자들을 보고 먼저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치신다는 말이죠. 즉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 나는 불신앙인이다 !!
우리는 자기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자기가 아는 것을 총동원하는데, 그러나 막상 부딪치는 현장 속에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불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기도했습니다. 금식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이 전부 다 불신앙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달리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불신앙만 내놓으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을 믿으려고 하지말고, 사랑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불신앙만 내놓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기적이라는 겁니다.
*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하는데, 제가 이것을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즉 "여러분, 이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지요? 그리고 떠나갈 때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지요? 그러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할 줄로 압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러면 사람들이 저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발 이제 그런 잔소리는 그만 하세요. 당신은 그렇게 삽니까?" 라고 나오지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앞에 "이게 디모데전서 6장 7절의 말씀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옳은 줄 알지만, 지키지는 못하겠습니다. 물론 애는 쓰겠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바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불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을 제가 지킬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 불신앙만 내놓으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은 죄인을 부르려 오셨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아이쿠, 당신 잘났다 !!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다들 자기 자랑을 하는데, 그게 자식 자랑, 남편 자랑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성경인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는데, 왜 당신은 그런 자랑을 합니까?" 라고 하면,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다?
"아이쿠, 당신 잘났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경상도 일부에서는 "니 똥 굵다" 라고 하는데(ㅋㅋ), 그런 모습을 노골적이지만 은밀하게 보이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불신앙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는 살려내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우리를 살려내심으로,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정리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세상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즉 "예수 안에 내가 놓여있구나" 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2장을 보겠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 '도로' 찾으리라 !!
주님께서 영혼을 어떻게 하십니까? 20절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자기 영혼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다시 찾을 수 있는 권한이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다시 찾겠다고 하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우리는 "내 영혼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아니라 뱀에 속해있기 때문에, "내 것이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토막을 내어버리면, "네 영혼은 네 것이 아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또 개입이 되면 "네 영혼은 네 것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로 찾으리라", 또한 "도로 찾으리라"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도로 찾으리라" 라는 것의 연속, 이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공간이라는 말이죠.
* 덮어주시는 '백 허그' !!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뒤에서 껴안으시는데, 이것을 '백 허그' 라고 합니까? 잘못 하다가는 잡혀가는 수가 있는데(ㅋㅋ), 주님이 그렇게 껴안으시면 우리의 본성이 사라집니까? 그것이 아니고 그대로 유지가 되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런 말썽꾸러기인데,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것을 품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품어주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못난 놈인가를 평생동안 깨달으면서 마음껏 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누구의 품 안이고 하니, 예수님의 품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성질대로 예수님의 품 안에서 살게 된다는 말이죠.
*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복습하는 의미에서 물어보겠는데, 그러면 우리의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는 많이 알아야 하고 실수는 줄이면서 착하게 살면, 그러면 자기에게 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죄악된 본성대로 사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아는 만큼 바르게 살면 자기에게 복이 온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이 세상은 자기 예상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뱀 하나를 주님이 품었다고 보면 되는데, 그런데 뱀은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말이죠.
* 과거를 긁어내시는 주님 !!
그러면 왜 과거를 잊지 않습니까? 자기의 자랑거리를 과거에서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지금은 이렇지만 과거에는 꽤 잘나갔어. 여고시절에는 옆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나를 보려고 찾아오고는 했어. 이제 알겠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주님이 개입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그 과거를 긁어내는데, 그렇게 긁어내려면 과거가 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자기 성질대로 살고, 긁어내는 일은 주님이 하시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저는 착하게 살고 싶어요" 라고 하면서,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에는, "걱정하지 마라 내 영혼아, 이제 창고가 가득하다" 라고 하는 짓거리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주어야 지적을 받을 것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알아서 착하고 살고, 알아서 기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본성대로 살아야 하는데,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간에 말이죠.
* 철없는 어린아이 !!
그렇게 살다가 주님의 지적을 성령을 통해서 받게 되면, 우리는 굉장히 미안해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믿음이 아닌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해주셨으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는데, 그렇게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어디에 가지 못합니까?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철없는 어린아이로 간주해주신다는 겁니다.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게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되는 순간 우리는 '나'와 '나'의 투쟁에서, 옛날의 육적인 '나'로부터 여기서 무엇이 나와야 하는고 하니, 오늘 강의제목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즉 "내가 나로부터 버림을 받고 차여야 한다" 라는 겁니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서 환장한 '나' 자신으로부터 실제의 '나'가 쫓겨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잘남으로부터 쫓겨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데, 이 잘난 '나'를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울 앞에 서면 자기보다 잘난 인간이 없는데, 그러니 "나는 죄인이다" 라는 말을 하기 싫다는 말이죠.
* 그래도 버티고 싶어 !!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는 너무나 착하고 반듯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남들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그렇게 자랑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것을 일거에 포기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사람마다 다 자기 잘난 맛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버티고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게 자기 인생이라는 겁니다. 남들이 봐서 괜찮은 것도 있지만, 결국은 자기가 봐도 괜찮기 때문에, 그래서 아직 자살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살은 언제 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나고, 그리고 자기도 자기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게 될 때, 그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 이렇게 숨을 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자기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거기서 우리는 버림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버림을 받기가 힘든데, 아니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에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단단하다는 겁니다.
* 버림을 받은 주님 !!
그래서 우리를 백 허그를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우리와 너무나 닮아있는 모든 아담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죠. 주님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자살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이 버림을 받지 아니하면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당연히 쫓겨나야 하고,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버림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겁니다.
* 주체의 뒤바뀜 !!
그러면 이제 버림을 받을 때 어떻게 버림을 받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내부공간인데, 그러면 그 경계를 넘어서 바깥으로 가게 되면 외부공간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 내부공간에서는 자기 중심인데, 여기에서는 왜 살아갑니까? 자기에게서 자랑거리가 나오기 때문인데, 그런 자랑거리가 나오는 이상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랑스러운 자기를 어떻게 포기를 합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이죠. 포기를 못하는 이 내부의 것을 두고 '주체' 라고 하고, 외부공간에 있는 것을 '객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이 주체 때문에 살아가는데,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찾아오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자기가 주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엇으로 봅니까?
객체로 보게 되는데,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자 시도한다는 말이죠.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데 왜 마다하느냐는 것이죠. 자기의 장래가 풀린다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면서, 그것은 엉터리라는 것을 아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라고 하면 더 이상 예수님과 교제할 이유가 없는데,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밀어내는데, 즉 예수님이 자기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객체로 여기고 자기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객체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공간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다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장소에 말이죠. 물론 허락을 받고 오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러면서 거기서 백허그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체의 자리가 바뀌는데, 주님이 주체가 된다는 말이죠. 로마서 14장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객체는 철저하게 죄인행세를 해야 !!
그렇게 주님이 주체가 되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그 주님에게 안겨있는 자기 자신은 그만 객체가 되는데, 그 객체는 철저하게 죄인행세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죄고, 헌금을 해도 죄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체가 되시는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셨기 때문인데, 그 살과 피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물어보겠는데, 그러면 그 죄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그 죄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 자기를 훌륭하게 여기고 착하게 여기면서, "이 정도면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시하는 것,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죄는 죽을 때까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고칠 수가 없는데, 그러니 고치지 말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자기 자랑을 하면서 구원이 된다는 것이죠.
그게 누구의 객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객체가 되어서, 즉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 것을 안다고 하면, 주인행세를 하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강도처럼, 세리처럼, 창기처럼, 그렇게 주님의 안목에서 죄인이 된다고 하면, 그 관계가 곧 하나님의 의의 관계이고, 활짝 열린 천국의 세계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가 분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실상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7,8 오후 5시에 마침.
'갈색추억'을 유트브로 듣는데,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라고 댓글이 달려있네요. 복음이 아니라면 어찌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 있을까요?
---------------------------------------- 갈색추억 한혜진
1. 희미한 갈색 등불 아래 싸늘히 식어가는 커피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나만홀로 남은 찻집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그 사람 올리도 없는데 나도 몰래 또다시 찾아온 지난날 추억속의 그 찻집 우리는 나란히 거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불 빚 만남 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2.우리는 나란히 거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불 빚 만남 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불 빚 만남 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 ----------------------------------------
너를 사랑하고도 전유나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멍한 눈 들어 창 밖을 바라만 보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혀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은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너의 마음을 이제 난 알아 사랑했다는 그말 난 싫어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 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