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코스프레 1907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22. 22:15
2019-07-21 20:04:12조회 : 2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9 - 코스프레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9 - 코스프레

19,07,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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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얀 가운을 입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왼손에는 차트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볼펜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즉 자신들이 실험실의 흰 쥐라는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을 같은 동료로 오해를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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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가운과 흰 쥐 !!

여기가 8강으로서, 그 제목이 '실험실의 흰 쥐' 인데, 실험실에는 실험의 대상이 있을 것이고 실험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하얀 가운을 입은 실험을 하시는 분이고, 반면에 제자들은 실험을 당하는 대상으로서의 흰 쥐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데, 사람들도 그 목적이 있는데, 예수님이 없을 리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일관되게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할 일이 바빠서 말이죠. 우리는 세상일에 바빠서 정작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놓치고 있는데, 그러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것이죠. 

그러면 먼저 인간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는데, 인간들의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 "살아서 부자가 되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겠다" 라는 겁니다. 즉 복을 받겠다는 것인데, 이 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건강+재물" 라는 말이죠. 이것이 잠언서에도 나오는데,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을 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나는 건전하다 !!

약속의 땅도 그렇게 표현하는데,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죠. 즉 "살아서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 라는 것인데, 그게 우리 인간의 의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의도가 가지는 '정당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 정당성이 곧 "나는 건전하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괜찮은 존재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복을 받을 만하고, 천국에 갈 만하다" 라는 것이죠. "나는 건전하다. 나는 잘났다. 나는 우수하다. 나는 소중하다" 라고, 이게 다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의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잘났다는 것인데, 그래서 살아서는 복을 받아야하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야한다는 말이죠. 

* 과연 그러한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연 그러한가?" 라고 해서, 이것을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의도를 가지고 행위에 나서는데, 즉 "나는 괜찮다" 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자기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살아서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 "내가 잘났다" 라는 것은 기준이 있을 것인데,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분명히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 기준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무대뽀' 라고 한다는 말이죠.

* 화장실에 누가 똥을 쌌어?

어제 제가 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자 화장실에 누가 똥을 누고는 그대로 두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본 분이 있는데, 우리교회 교인이 아니고 세종시에서 오신 분이 먼저 보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깨끗하게 치웠는데, 그러니 우리교회 교인들은 여자 화장실에 가도 거기에 똥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치워졌으니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늘 내뱉고 있는 '못났다' 라는 것을, 마치 여자 화장실의 똥을 치우듯이 치워주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그분 앞에서 "나는 건전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럴 수 없는데, 성경을 바로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말이죠. 

* 누구 덕분인가? 

다시 말해서, "네가 누구 덕분에 오늘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과연 누구 덕분에 지금도 저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고, 또한 비가 오느냐는 겁니다. 과연 자기 자신이 건전하고 잘났기 때문에 햇빛을 쬐고 숨을 쉬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이고 사랑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건전하기 때문에 햇빛과 공기를 통해서 생존하는 것이 전혀 아니란 것인데, 즉 우리가 해를 만들고 공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나는 죄인이다 !!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나는 건전하다" 라고 하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못났다. 그런데 누구의 혜택을 입고 살아간다" 라는 관점에서 보면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간단한데, 이것은 구약의 경우이고, 신약에서는 총괄적으로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보지 않는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마태복음 6장에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본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라는 생각만 한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엇을 즐길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골프나 등산이 여기에 속하는데 말이죠. 이미 자기는 그런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인데, 그 정도로 자기는 잘났다는 겁니다. 

* 요이 땅 !!

그러니 출발부터가 이미 반칙인데, 예를 들어서,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를 25미터 앞에 놓고서, "요이 땅!" 이라고 해서 달리기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엄마인데, 바로 그런 미친 짓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시작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합니까? 주님이 아니라 잘난 자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보시에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런데 이게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죠. 아담은 자손이라고 하면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이죠. 

창세기 6장에 노아홍수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다는 겁니다. 스타트를 그런 식으로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홍수가 나서 다 죽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발점을 잘못 설정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의 자기 됨으로, 그렇게 출발점을 잘못 잡았다는 겁니다. 

* 당신은 성도입니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당신은 성도입니까?" 라고 물으면 '나'로부터 출발을 하는데, 즉 "내가 성경공부를 하고, 내가 예배를 드립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도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하는데, 그런데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그게 아니라 "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출발점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지 마시고 죄인으로부터 출발합시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어떻게 죄인이냐는 겁니다. 자기는 잘나고 훌륭하고 괜찮고 건전하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물론 그냥 곱게 나오는 게 아니라 화를 낸다는 겁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과의 대화가 바로 이런 것인데, 출발점이 어디인지, 그것부터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인간에게는 의도가 있는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행위의 의도에 담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 라는 것을 미리 설정해놓고, "건전하다, 잘났다, 훌륭하다" 라고 하면서, 좋은 것은 다 자기에게 가져다 붙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이 있다면 나에게 복을 줄 것이고, 천국에 넣어줄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왜 하얀 가운을? 

그런데 여기 교재 138페이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하얀 가운을 입고 계신다는 말이죠.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 즉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 기준이 옳은지,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변화를 통해서 측정해보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이 세상의 변화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말이죠. 그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자기들이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풍랑이 일어나서, 그야말로 혼 줄이 나는 장면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나는 무엇이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는 무엇이 된다" 라는 것에 관심이 있으니까, 당연히 성경을 보더라도 그런 식으로 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그 기준이 잘못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 인간의 자기 관심사, 그것을 무엇과 대조를 하시는고 하니,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주님이여, 저는 어느 정도입니까?" 라고 묻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하시는데, 그러니 이미 접근 자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 관심을 돌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구에게 돌려야 합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제자들의 질문이 갑자기 변하게 되는데,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라고, 즉 "저분은 누구인가?" 라는 겁니다.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서 예수님 한 분에게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 예수님이 누구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들이 어떠합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이 없다는 말이죠. 아침 8시에 출근을 하게 되면, 하루종일 의자에 한 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런 와중에, 즉 오전 10시에 갑자기 "예수님이 누구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을 보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그 확률이 50프로는 되지 싶은데, 평소에 잘 알던 사람이 나오라고 하면 나온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 번이라면 말이죠. 그리고 교회가 어떤 곳인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가 될 확률은 제로라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여전히 '나' 라는 것을 붙드는 것인데, 즉 "내가 나가주겠다" 라는 것이죠. 계속해서 '나' 라는 것이 유지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가 된다는 것은, 그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지?" 라는 것에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는 것은 자기를 그만 잃어버리는 것인데,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릴 확률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제로라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긴장하면서 자기를 지키는 쪽으로 평생을 살아가는데,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으려고 말이죠. 

그래서 "인생이 뭐야? 남에게 욕을 듣지 않고 살면 되지" 라고, 그게 '신유' 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에 나온다는 겁니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수인데,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라는 말이죠. 그런데 일을 한 참 하다가 10시 26분 42초에 "예수님이 누구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 인간이 천국에 갈 확률은 전무해 !!

이러한 변화는 길을 가다가 새끼손가락에 번개를 맞을 확률보다 더 낮지 싶은데,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같이 성령이 왔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즉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에 갈 확률은 전무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이상, 남들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평생을 남들에게 포위가 되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는 굉장히 민감하다는 겁니다. 직장생활에서 남들과는 관계가 틀어지면 쫓겨나게 되고, 그러면 굶어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그 연쇄고리가 어떠한고 하니, 남들이 없으면 자기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남들로 인해서 자기가 산다는 겁니다. 마치 부모가 없이는 자식이 살 수 없는 것과도 같은데, 그 부모 대신에 세상이 자기를 살리기 때문에, 그러니 세상이 말하는 것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는 세상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이 그 세상을 흔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절망하고 자살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즉 "그동안 세상이 나를 살렸는데, 그런데 이제 세상이 나를 내치는구나" 라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자기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난감해진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심판기준 !!

이게 주님의 흔들기인데, 그러니 아까 이야기한 그 '요이 땅' 이라는 것을 자기 자리에서 하지 말고, 주님이 지시하신 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기준' 이라는 것인데, 지금부터 이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죠.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인데,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겁을 먹게 되는데, 믿던지 믿지 않던지 간에 겁이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지막에 심판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이 세상에서 말하는 심판기준을 나열해보겠는데, 이것과 하나님의 심판기준과 과연 맞는 게 있는지 보자는 말이죠. 첫째는 '교회 다니기', 둘째는 '십일조 하기', 셋째는 '성만찬', 그리고 목사 섬기기나 돌아가면서 밥하기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넷째는 '바르게살기' 인데, 이것을 확대시켜보면, "바르게 살면 내가 달라진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변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변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술을 끊고 담배를 끊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 새 언약, 그것은 우리에게 없는 믿음 !!

그리고 다섯 번째는, "심판의 기준은 주님이 주신 새 언약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중에서 주님의 심판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5번인데, 즉 언약대로, 새 언약대로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기준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대처할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것이 바로 제로, 즉 0퍼센트에 해당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 쪽에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하면 그 퍼센트 비율이 올라가는데, 단 1퍼센트라도 말이죠. 그러나 자기가 아무리 설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한 일방적인 기준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라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심판기준을 우리가 눈치를 채서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심판기준이 0퍼센트란 것이 자기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심판의 기준이 된 자로서 움직이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심판기준이 되는데, 그런 기준 노릇을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하얀 가운을 입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제자들이 하는 것이 곧 심판의 기준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13번째로 끼어든 자가 사도바울인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하는 것이 곧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죠.

* 성도가 곧 심판기준 !!

그게 무엇인고 하니, 성도를 공격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 나오는데, 즉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너희'가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 즉 성도라는 것이죠. 

(갈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그러니 심판은 벌써 시작된 분류인데, 성도 자체가 이미 이 땅에서 심판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성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많다, 적다" 라는 것이 아니고, 또한 "크다, 작다" 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고 하니, "죽었다, 살았다" 라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 라고 하는 것, 그게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많다, 적다", 혹은 "크다, 작다" 라는 것은 일단 무엇이 있을 때에 하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갑자기 "죽었다, 살았다" 라고 하게 된다면,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죽었다, 살았다" 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많다, 적다", 혹은 "크다, 작다" 라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때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열심히 하겠다" 라고 하는데, 열심히 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 진화된 인간, 새로운 피조물 !!

그렇게 나아지는 것을 '진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러한 진화된 인간은 무엇과 같지 않은고 하니까, 새 인간과 같지 않다는 말이죠. 새로운 피조물과 같지 않다는 겁니다. 진화는 같은 인간인데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고, 반면에 새로운 피조물은 그 인간을 탈피했다는 것이죠. 

그것을 '거듭났다' 라고 하는데, 원천에 의해서 말이죠. 그러나 진화는 있는 인간을 손질하는 것인데, 즉 개선이고 개량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것인데,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가 된다는 것,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면,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지금부터 그림으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이게 구약에 나오는데, 즉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 He, They, We, I !!

이것을 영어로 써보면, 'He', 'They', 'We', 'I'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동그라미를 쳐서 줄을 그어본다는 말이죠. 'He(그분)', 'They(그들)', 'We(우리)', 여기에서 '그분'이 중앙에 계시는데,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서, 갑자기 "그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 때 제자들이 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도대체 그분이 누구시기에 바다도 잠잠케 되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서 'I' 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인데, 성경에서 "내가 창조했다" 라고 할 때의 바로 그 '나' 라는 겁니다. 그 아버지께서 이 땅에 그분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분은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에 의해서 양쪽으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라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고, 예수님에게 차인 자들이 '그들' 이라는 말이죠. 즉 지옥에 가는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He', 'They', 'We', 'I' 라는 것 중에서 우리가 많이 쓰는 단어지만 하나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게 'You(너)' 라는 말이죠. 하나님에게는 '너'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세상'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재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빨간색으로 적어보겠는데(ㅋㅋ), 성도가 아닌 사람은 중앙에 '나' 라는 것이 있는데,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 라는 것이 있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그', 혹은 '그녀'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지는 않지만, 친하고 싶은 집단이 있으면 그것을 '그들' 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필요한 자를 불러내면 그것이 '너'가 되는데, 여기서 '그'나 '그녀'는 자기의 경쟁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즉 "저 사람은 그 정도인데, 나는 이 정도가 된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항상 중앙에 '나' 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닌데, 중앙에 '그분'이 있다는 말이죠. 

* 구조의 충돌 !!

그러니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에 필요한 사람을 '너' 라고 하게 되는데, 물론 이게 나중에는 원수로 바뀌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 바로 이러한 구조, 즉 중앙에 '나'가 있고 맞은 편에는 '너'가 있고, 그 주위에는 '그'와 '그녀'가 있고, 또한 '그들'이 있는 구조에서, 여기 이 성도의 구조로 들어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구조가 하나가 아니고 그만 두 개가 되고 마는데, 이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죠. 즉 "저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할까?" 라고 하면서,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운동회를 하면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그 출발점을 중간에서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즉 "내가 교회에 다니면 어떤 이익이 있고, 예수를 믿으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라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 그를 위하여 !!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냈다는 말이죠. 그것이 신약에 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하여,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는 겁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야말로 제로인데, 그러한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100퍼센트는 무엇일까요? 성령으로 인해서 '나' 라는 것이 지워진다고 하면, 그러면 그것은 100퍼센트 신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는 것인데, 자기 자신이 주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주가 되려고 하면, '나' 라는 것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하기 이전에, 만물의 시작이 하나님인지 자기인지, 그것부터 먼저 비교해서 자기를 접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먼저 항복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어디에 가는고 하니까, 'They(그들)'에 속한다는 겁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분류를 당해서 지옥에 가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원수가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구약을 살펴보면 전체가 다 그러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자들이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는데, 물론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 다시, 심판의 기준 !!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심판을 할 때는 반드시 그 기준이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심판주인데, 그러니 반드시 심판을 하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시험을 치면 그 범위가 어디인지 궁금하듯이 말이죠. 그게 자기 미래가 달린 문제이니, 우리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기준이 교회에 다닌 것이라든지 성찬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기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교회에 나가면 되고 세례를 받으면 되고 성만찬에 참석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지 않고,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심판기준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는 여력을, 자기 잠재력에서 뽑아낼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자기가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5번이 무엇인고 하니, 심판의 기준이 새 언약인데, 다른 말고 하면 하나님 자체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아예 우리 속에 심판의 기준을 집어넣게 되는데, 그것을 '선취' 라고 하는데, 즉 "달려가서 앞서서 본다" 라고,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선취' 라는 게, 미리 취한다는 의미도 되고 미리 본다는 의미도 되는데, 이것을 '하이데거' 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유행을 시켰는데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심판을 성령에 의해서 먼저 경험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상대성 원리를 몰랐던 제자들 !!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제자들이 먼저 묻는데,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제자들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몰랐는데, 물론 그 당시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ㅋㅋ), 제자들이 "언제 옵니까?" 라고, 즉 '언제' 라고 시간을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때까지 시간이란 변화가 없이 그냥 계속해서 이어진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시간은 제쳐두고 3차원의 공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점, 면적, 부피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1차원은 점과 그런 점이 모인 선이고, 2차원은 면적이 되고, 거기에 높이가 더해져서 3차원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시간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초월적으로 간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아인쉬타인은 시간을 집어서, 공간이 변하듯이 시간도 변한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간+공간" 이라고 해서, 그것을 두고 '시공간'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시공간에 의하면, 중력이 많은 곳에는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더 강력한 중력이 있는 곳에 가면 사람이 빨리 늙는다는 것이죠. 가만히 있어도 빨리 늙는데, 그런데 움직이면 젊어지는데, 이게 아인쉬타인이 말하는 시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언제' 라는 것은, 그게 우리가 보기에는 미래이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이미 과거라는 말이죠. 

아인쉬타인의 이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식빵을 우주에서 끊어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식빵의 단면들 하나 하나가 우주1, 우주2, 우주3,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각 우주마다 흐르는 시간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시점이라도, 여기는 미래가 되고 저기는 과거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시간은 가까운 주변의 시간이지, 멀리 떨어진 우주에서는 그 시간이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라도, 동생은 지구에 있고 형은 우주선을 타고 멀리 갔다가 왔다고 하면, 형보다도 동생이 훨씬 더 늙어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다르다는 겁니다. 같은 지구에 있어도, 산 위에 있는 시계와 산 아래에 있는 시계의 시간이 다른데, 산 아래가 중력이 세기에 빨리 가는데, 미세하지만 그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시간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데,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게 궁금하기 하다는 말이죠.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심판을 통과할 기준이 궁금합니다" 라는 것인데, 왜 궁금합니까? 그것은 심판의 기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추어 자기가 행동해서 그것을 통과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666과 같은 표를 받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요즘은 세계3차대전을 미리 대비해서 벙크를 만들고 한다는데, 이게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 미리 대비하자 !!

최후의 심판,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인데, 그 전쟁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감행될 때, 그것을 미리 대비하자고 하는 단체들이 등장하는데, 물론 결론을 돈을 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안상홍이 그 대표적인데, 물론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죠. 

아무튼 자기들은 미리 대비하면 심판의 기준을 알면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제자들이 그런 취지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안상홍이든 신천지든 간에, 기존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라고 하는 제자들의 질문, 그것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질문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말이죠. 

* 성령이 올 것이다 !!

강의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먼저 하나는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것인데, 왜냐하면 복을 맏을 만하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인데, 그러니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왜냐하면 나는 건전하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간단한데, "성령이 올 것이다" 라는 겁니다. 성령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데, 구약에 의하면 성령은 마지막 심판 때에 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제 이 세상은 끝났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마태복음 3장을 보겠는데, 11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게 세례요한이 한 이야기인데, 여기 끝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고 하는데, 불 심판이 마지막 심판인데, 요엘서에 보면 마지막에는 불로 다 싸질러버린다는 말이죠. 여기에 불 심판과 성령세례가 병행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은 성령세례와 불 심판이 동시에 온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마지막 심판주가 오시는데,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그분이 메시야라는 겁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성령과 불로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알곡이 되고, 심판을 받은 자는 쭉정이가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뒤에 나오는데, 즉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는 겁니다. 

(마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게 세례요한의 시간관인데, 세례요한은 무엇인고 하니까, 마지막 때 메시야가 와서 작살을 내는데, 그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전에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불러내서 회개를 시키는데, 그렇게 해서 회개한 자는 알곡이 되는 조치를 하도록,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을 맡겼다는 겁니다. 

* 코스프레(Cospre) !!

그러니 자기가 주의 종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이 세례요한이 얼마나 자기의 모델이 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요즘 젊은이들이 컴퓨터 게임이나 만화 속의 등장인물로 분장해서 즐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코스프레(Cospre)'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자칭 주의 사도라고 하는 자들이 코스프레를 하는데 있어서, 세례요한은 아무 멋진 모델이라는 말이죠. 즉 "광야에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모두 다 지옥에 간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안상홍, 이만희, 전부가 세례요한을 코스프레를 했는데, 김기동도 그렇고 말이죠.

오늘 뉴스에 보니, "김기동, 물러가라" 라고 하면서 일부 교인들이 데모를 했다고 하는데, 40억원 상당의 교회건물을 소유권 이전등기를 하지 않은 채 아들에게 증여를 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키운 교회를 자기가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는데, 그러니 거기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죠. 

제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모든 교회는 마지막에는 결국 '돈' 이라는 겁니다. 돈 때문에 교회를 한다는 말이죠. 생각을 해보세요. 자기 교회 교인이 두 세 명이라고 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을 위해서 목회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5만명이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일일이 하려면 자기 영혼이 그만 지쳐서 박살이 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목회를 하다가 암에 걸린 목회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그래서 유난히 일찍 죽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서울 이천동에 가면 연예인들이 많이 가는 온누리 교회가 있는데, 거기 하용조 목사가 65세의 나이로 간암에 걸려서 죽었다는 겁니다. 요즘 말이 많은 사랑의 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도 그러했고 말이죠. 

교인들은 주의 사자처럼 살아주기를 원하고, 정작 자기는 그런 믿음이 없고, 그러니 감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코스프레를 해도 한 두 번이지,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라고 하면, "당신은 잘 하는가 보자" 라고 하면서 주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목사의 사모는 그야말로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라는 말이죠.

* 진화가 아닌 새 사람 !!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목사가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이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진화된 인간이 과연 새 사람입니까? 새 사람이 아닙니까? 새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여자를 끊고, 그런 것을 새 사람이 아니고 진화라는 말이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해서, 그렇게 고쳐나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진화이지 새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새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받아서 이미 주님의 심판이 와서 닿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심판의 기준을 알아서 극복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즉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회마다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교회 목사님은 주의 종이라서 바르게 살 것이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면 또 모르겠는데, 그렇게 하면서 주시를 한다는 말이죠. 사모는 어떠하고, 아이들은 어떠한지를 말이죠. 그렇게 되면 눈이 그야말로 수천, 수백 개가 넘는데, 그러면 자기 행동에 자유로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목사가 복어 집에 가도 문제가 되는데, 마음을 낮추고 오직 십자가의 길로 가야하는데, 그 비싼 복어 집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물론 교인들도 예수님이 모델이 아니고, 정작 예수님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목사가 모델이 된다는 말이죠. 

* 코스프레 목회자들 !!

그래서 큰 교회의 장로들은 당회장 목사가 과연 자기보다도 더 윤리적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감시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교회에 목돈을 냈기 때문에 윤리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목돈을 낸 교회에 천사와 같은 주기철 목사가 오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이 주기철 목사 때문에 다른 목사들이 비교대상이 되어서 죽을 지경인데, 소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하는 손양원 목사도 그렇고 말이죠. 여기에 한 사람을 더 넣어주면 한경직 목사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신자가 아닌데, 그야말로 코스프레를 하면서 목회를 한, 즉 꾸민 자들이라는 말이죠.

신자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0퍼센트인데, 그러니 성도는 없는데, 있으면 기적이라는 겁니다. 고상함과 착함을 포기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나' 자리에 누가 들어왔고 하니, 성령이 들어왔는데, 그래서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 성령에 의해서 이 세상 전체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을 미리 체험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 나는 망했다. 만세 !!

그래서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경우에는 성전에 들어가서 주의 영광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데, 이것은 서로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도대체 누가 망하게 되었다는 겁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라는 것이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즉 자기는 망해야 마땅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왜 진작에 몰랐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개선하고 개량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우리'와 '그들' !!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도표를 다시 살펴보겠는데, 중앙에 있는 그 자리를 '나' 라는 것이 차지할 수 없는데, 중에는 '나'가 아닌 '그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자리는 어디인고 하니, '우리' 라는 것인데, 이것은 '나'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구의 지묘동에 있는 그 교회가 우리교회인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이 '우리' 라는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도가 된 것은, 그것은 바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분'께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는데, 그게 바로 '우리' 라는 것이고, 또한 이 '우리'에는 예수님도 역시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할 때의 그 '우리' 라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다면 여기서 제외된 자들이 바로 '그들', 혹은 '저들'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자들은 당연히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각자, 즉 개별자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면, 그게 바로 '우리' 라는 말이죠. 반면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끊어진 자들이란 것이죠. 그러면 누구만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자기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성령'과 '우리'의 관계 !!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성령'과, 현재 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말이죠.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닌데, 몇 날이 되지 못해서 성령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 성령은 바로 종말의 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2장에 넘어가면, 베드로가 구약의 요엘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마지막 때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0퍼센트가 이제 100퍼센트가 된다는 겁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우리'와 '그들' !!

그러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내가 쪼개지면 무엇이 들어있지?" 라고 말이죠.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쪼개지면 그 안에 자기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떠합니까? 물론 바깥의 몸은 자기인데, 남의 몸이 아니고 자기 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나'가 깨어지면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우리'와 '그들'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 즉 예수님 중심의 구조는 오직 무엇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겁니까? 성령의 오심으로서만 주어지는데, 그러니 인간 속에 있기는 하지만 이게 깨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은 그 깨어지지 않는 '나' 자신을 깨트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깨게 되면, 물론 그게 자기 안에 그런 것이 들어있는 줄을 자기도 전혀 몰랐는데, 그게 왜 들어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창세 전에 예정 된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이 세상에 데려다놓았다 !!

제가 안양강의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을 이 세상에 데려다놓았다" 라고, 그렇게 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우리 장로님의 생일이 3월 3일이라고 한다면, 창세 전에 예정된 자가 3월 3일에 울음을 터트리면서 아기로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게 누구를 닮았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참 이상한 이런 이야기는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데, 즉 원천을 알아야지 이런 대화가 된다는 말이죠.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원천적인 야곱은 있었고, 원천적인 에서도 있었고, 3월 3일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이쪽 세계로 데리고 온 것인데, 그러면 이쪽 세계는 하나의 무대이고, 허물어지고 불에 타도 괜찮다는 겁니다.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더 이상 남음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 !!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에, 그게 성경에 몇 번 나오는데 말이죠. 창세기 19장에 불 심판을 당하는 내용으로 나오고, 그리고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너희들이 범죄해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망해도 당연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롯의 처가 그만 뒤를 돌아다봄으로서 돌기둥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면 왜 돌아다보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지금 제가 "롯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는데, 참 불쌍하게 되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던 곳인데, 왜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가?" 라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질문을 달리하면, "그러면 왜 롯은 돌아보지 않습니까?" 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의 입장에서는 그게 마지막인데, 사해바다에 모두 잠기고 더 이상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롯의 경우에, 롯은 없어질 동네에 살았으니 자기도 없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개선이나 개량이 아니라, 없는 것에서 새로 생겼다는 겁니다. 성령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태어난 이 땅은 불 심판으로 다 없어지는데, 그런 가운데 우리가 야곱이나 에서로 살았다는 말이죠. 물론 에서라고 하면 곤란한데, 아무튼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이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없어지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창세 전의 존재로 복귀를 시키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세상은 없어져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뒤돌아보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 자는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죠. 어차피 없어질 세상인데, 거기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으냐는 겁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왜 뒤돌아보면 안 되는가?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인간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인데, 도저히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반면에 하나님의 원수들, 즉 '그들'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까, "평생을 산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누가 고생을 했다는 겁니까? 자기가 고생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처음 강의를 하면서, 그 출발을 누구로부터 했다고 했습니까?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했다는 겁니다. 25미터 앞에서 출발했는데, 그것은 반칙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심판은 반칙한 자들을 골라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악마의 종자들을 다 걸러낸다는 것이죠. 

왜 악마의 종자입니까? 그들이 갈 곳은 악마의 세계라는 겁니다. 어제 낮에 불신자를 쓰레기라고 했는데, 왜 쓰레기입니까? 우리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전혀 애닮을 이유가 없는데, 결국은 죽고 난 뒤에 모두 호출을 당한다는 말이죠. 무덤이 열리면서 주님 앞에 소환을 당한다는 겁니다. 

* 파티인가? 바라봄인가?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들은 먼저 나온 자들인데, 그렇게 먼저 나와보니 이 세상이라는 무대가 전부가 아니더라는 말이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먼저 부자는 무엇이 전부인고 하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파티의 연속인데, 그렇게 파티를 벌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지는 바라봄인데, 무엇을 바라본다는 겁니까? 이 세상이 자기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고, 자기는 빨리 본래의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즉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 살다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아브라함의 품에 살던 자가 이곳을 다녀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경을 온 것인데, 즉 주님이 흙으로 육체를 만들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본향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가 부자를 부러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 시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성령 !!

아까 사도행전 1장에서 "몇 날이 되지 못해서 성령이 오신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성령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루살렘에는 많이 오고 안디옥에는 적게 오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성령을 주셔서, 그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이방인이든 누구든 간에, 그 사람은 새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부동산이 아닌, 특별함 !!

그러니 믿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가진 부동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0퍼센트의 믿음이지만, 100퍼센트의 믿음으로, 그렇게 성령으로 선물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의 내부구조는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나'의 자리는 없어지고, 그 중앙에는 '그분', 즉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렇게 되어서 '우리'가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단독적인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우리'의 맞은 편에는 제거가 되어야 하는 '그들'이 있다는 말이죠. 

이런 구조로서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런 일들을 겪게 되는 것은, 그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고 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을 잠깐 다녀가면서 연기자로 맡은 역할만 감당하면 된다는 말이죠. 

* 성도의 삶은 곧 억울한 삶 !!

예를 들어서, 자기가 식당을 한다고 하면, 빨리 음식을 주지 않는다고 재촉하는 별난 손님이 있다면, 그런 손님을 누가 보냈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가, 주님이 당했던 그 설움과 고난을 같이 당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은 억울한 삶인데, 자기의 가치를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 증거를 대보겠는데, 이사야서 53장 4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

여기에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뭐라고 해석을 합니까? 하나님께 징벌을 당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는 말이죠.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는 겁니다. 당연히 거짓된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봅니까? 까불다가 매를 맞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들은 건전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매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억울한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가 예수님과 똑같은 길을 가도록 이 세상의 무대를 마련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참 이상하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믿게 하셨는데, 왜 주위 사람들은 나를 보고 '너는 잘못 믿어서 고난을 당한다' 라고 하지?" 라고 하는 경험을, 지금 얼굴들을 보니까 그런 경험이 없으신 것 같은데(ㅋㅋ), 알아서 그런 현장에서 미리 피하신 겁니까? 

* 적은 무리여 !!

어제 오후시간에 누가복음 12장 32절을 언급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목사 안수식을 할 때는, 선배 목사들이 축하를 해준답시고 "당신은 앞으로 큰 목회자가 될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에게 속한 무리가 적은 무리가 되도록 해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면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말이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 그만큼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억울함의 요소가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최고 선하시고 의로운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인데, 그분이 이 세상에 풍덩 빠지니, 이 세상은 그분에 대해서 혹독하게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주님과 함께 오해를 당하는 기쁨을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주님과 함께 그 '우리'에 속한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미움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많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5장에도 있고, 요한복음 15장,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에도 나온다는 것이죠.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특히 로마서 5장을 보면, 누가 3절과 4절을 읽어보세요.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환난이 없으면 인내도 연단도 소망도, 그리고 천국도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반드시 성도에게는 환난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환난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구원 가능성이 0퍼센트라는 점에서, '그들'에게서 오는 공격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환난은 주로 어디서 받겠습니까? 회사가 아니고 교회라는 겁니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난리라는 것이죠. 

*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곡해와 오해 !! 

얼마 전에 우리교회를 나가신 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교회는 어떻게 일을 목사 사모 혼자서 다 하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듣고 제가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다들 교회가 되려고 하면 무엇을 해야한다고 합니까? 각자 열심을 내야하는 것으로, 그것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곡해와 오해라는 말이죠. 

이야기를 하고 보니 좀 거시기한데(ㅋㅋ), 주님이 빠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를 개선시키겠다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교회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한 발상이라는 겁니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는, 과연 우리가 교회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은연중에 우리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혹해서 수정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면, 벌써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감사함'이 빠졌다는 말이죠. 농뗑이를 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감사함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똥을 치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식으로, 반드시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만하면 되었잖아"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정당성이고 잘남이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감사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봉사를 해도 감사함인데,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봉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감사함이 없는 자를 받아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은 노동을 하게 되면 '나'가 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가 노동을 해서 이마에 땀에 나고 하면 자기가 너무나도 대견스럽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중앙에 '그분'이 아니라 '나'가 있게 되는데, 그러면 또 '너'가 있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이렇게 수고하는데, 너는 무엇을 하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 감사함이 없는 게 문제 !!

이게 참으로 위험한데, 여기에 벌써 무엇이 떨어져 나갔습니까? 감사함이 그만 없다는 겁니다. 감사함은 어디서 옵니까? 유일한 '나'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데, 그런데 자기가 애를 쓰다가 보니까 자기가 그만 부각이 되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너는 무엇을 하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감사함도 날아가고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합니까? "우리도 힘을 합쳐서 개선하자" 라고 하는데, 그것을 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바른 교회를 만들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억울한 요소를 제거하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적은 무리여!" 라고 하시는데, 괜찮은 교회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시간도 초월하고 공간도 초월하고, 그리고 무엇도 초월하느냐하면, 숫자도 초월하신다는 말이죠.

처음 예루살렘 교회에 3,000명이 모였는데, 그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다 흩어졌다는 겁니다. 로마서의 로마교회의 교인이 몇 명입니까? 모르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교인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도 죽고, 다 죽었다는 것이죠.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했는데, 그러면 하늘나라를 전파하는데 실패를 했습니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 성도는 갈 곳이 있어 !!

왜 그런고 하니, 이 세상 자체는 어차피 떠날 곳인데, 그러니 그렇게 떠나는 곳에서 숫자가, 양이나, 크기는 의미가 없는데,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말이죠. 물론 누가 먼저 떠날지,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닌데, 다만 감사할 것은 우리는 이곳을 떠나도 갈 곳이 있다는 말이죠. 

창세 전에 예정된 우리의 자리가 있는데, 거기서 아브라함을 만나고, 모세를 만나고, 엘리야를 만나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수모는, 시편의 말씀처럼 우리가 꿈을 꾼 것인데, 꿈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죠. 꿈에 욘사마가 되면 무엇하고, 부자가 되면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무슨 감사할 일을 주시는지, 그것을 기대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죠. 

(시 126: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외부에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옴으로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사함이 없는 게 문제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7,21 오후 8시에 마침.

땀흘리는 삶이 죄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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