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원천사죄 1906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6. 26. 10:17
2019-06-20 17:33:46조회 : 66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7 - 원천사죄이름 : 구득영 (IP:125.133.171.146)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7 - 원천사죄

19,06,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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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리'란 사실은 예수님이 차지해야할 '인자의 자리', 곧 진정한 대자연의 주인공의 자리로서, 예수님 자신을 위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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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人間)과 인자(人子) !!

여기에 '인자의 자리'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인자와 인간, 즉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그렇게 사람들의 아들이니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의 자리와 인자의 자리가 그 차이점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나 사람의 아들이나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가 다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인자라고, 오늘 교재에서는 '인자의 자리' 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 인자는 사람 속에 섞여있으면서도 근원적으로 사람이 아닌 분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람이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 근원적인 뿌리, 출처, 그러한 내용을 품고 있는 특수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게 인자라는 말이죠. 

보통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사람이면 아들도 사람이고, 그러면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추가할 내용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것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자라고 하는 것은, 그냥 보면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런데 그분의 기존 인간의 계통으로 내려오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 인자란, 언약에 의해서 출현된 특수한 인간 !!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인자'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자가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즉 인간의 계통이 아니라고 하면, 인자는 도대체 어느 계통에서 왔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언약에서 왔다고 하는데, 혹은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사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속이 말뿐인 것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사람으로서 그 약속의 내용이 현실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육적인 인간에게서는 인간이 나오는데, 즉 같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육이 아닌 언약에 의해서 출현된 인간, 그것을 인자라고 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인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인간의 일만 하는데, 그런데 인자는 언약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인자라는 분은 등장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구체화', 혹은 '약속의 현실화'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 약속의 현실화 !! 

제가 이렇게 약속의 현실화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은 인간들의 일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현실' 이라고 우긴다는 말이죠. 즉 "사람에 의해서, 사람이 만든 것이 현실의 전부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 외에 달리 다른 현실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약속이 투입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우기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은 반드시 약속된 인자가 하시는 그 일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게 중한 것이 아니라, 인자가 하시는 일, 그게 제대로 된 현실이란 겁니다. 

육의 세계에서의 인간은, 그 육에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러면 기존 선배가 되는 육은 어떻게 됩니까? 죽게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죽음의 대물림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그가 낳은 자식도 죽고, 또한 다음 자식도 역시 죽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줄줄이 죽음의 사슬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육의 인간인데,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다는 말이죠. 아담과 그 자식들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달리 어떻게 다른 게 없는데, 그게 육의 인간들이 처한 세계라는 겁니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저주와 축복 !!

여기에 비해서 인자는 무엇인고 하니, 인자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냥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축복, 그렇게 두 개의 양상을 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것인데, 하지만 인자에게서의 죽음은 저주를 품고 있다는 말이죠. 즉 "주저스럽다, 심판스럽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주와 축복이라는 두 개의 내용을 품고 있는 인자가 인간들과 같이 섞여있다고 하면, 인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존재라고 하는, 그러한 인식을 인간들은 부여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어 슬프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죽어 마땅한데, 인자를 배제하고 모든 것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 마땅하고, 늙어서 죽어 마땅하고, 또한 감기에 걸려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인자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인간은 마땅히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자가 인간 세계에 들어온 이상, 그 마땅함이 둘로 그만 나누어진다는 말이죠. 어떻게 나누어지는고 하니까, 한 쪽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고, 또 다른 쪽은 복을 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천국 가기에 마땅하다 !!

"천국 가기에 마땅하다" 라는 표현이 상당히 오묘한데, 이렇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을 요구한다는 겁니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요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마땅하니까 말이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너희들이 이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낸다" 라는 것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자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게 좀 어려운데,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인자로 오셔서 심판을 하실 때는, 오른편에는 양이고 왼편은 염소라는 말이죠. 즉 양은 천국에 가기에 마땅한 자들이고, 염소는 지옥에 가기에 마땅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러니 "너희들의 행동이 나빠서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약속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하다는 겁니다. 물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상당히 억울한데, 그러니 착하게 살았는데 도착해보니 지옥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육에 속한 인간들은 당연히 반발을 하는데, 하지만 인간 속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인간, 육, 즉 인간의 자리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약속이 없다는 겁니다. 약속은 유일하게 오직 인자 안에만 있는데, 왜냐하면 인자는 약속에 의해서 출현했기에 말이죠. 

* 이삭, 비웃는 자 !!

약속에 의해서 출현된 자, 그 최초의 모습이 누구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인데, 이삭은 원래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인데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 3명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뭐라고 합니까?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태어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름은 그 이전에 하나님이 지어주셨는데, '이삭' 이라고 말이죠. 그 의미가 '웃음' 이란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인간을 배경으로 해볼 때, 인간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서 이 땅에 출생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비웃는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도저히 그런 자식이 태어날 줄은 몰랐다는 것이죠. 

(창 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그러니 인간 쪽에서 인자를 믿을 수 있는 역량은 없는데, 그냥 비웃기만 할 뿐이란 겁니다. 가짜 예수는 사람들이 믿지만 진짜 예수는 믿을 수 없는데, 그냥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죠. "어떻게 그게 예수야? 그것은 예수가 아니야. 그가 메시야라는 것은 말도 안 돼" 라고 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배척을 당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늙어 죽으니, 그 늙음 자체가 바로 죽음의 현상이란 말이죠. 그러한 죽음에서 탈출을 하려고 만든 것이 종교인데, 즉 신에게 잘 보여서 죽음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탈출을 위해서 투여되는 것이 바로 자기 역량이라는 말이죠.

자기 가능성, 자기 선행, 자기 양심, 그러한 것을 마구 투입해서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약속이 아닌 행함인데,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이삭을 거론하면서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행함인가? 믿음인가? 

행함과 믿음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왜 이삭 이야기가 적절한고 하니, 사라가 너무 늙어서 전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식이 태어날 가능성은 제로인데, 즉 "내 몸에서 나온 자식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놓고, '있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게 자기 행함의 결과가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가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인데, 약속에 의해서 그저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천국은 선물인데, 즉 "내가 아무리 교회에 가서 기도해도 천국에 갈 수 없구나" 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런데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선물이라는 말이죠. 즉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고,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사도바울이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은, "선물을 받았느냐?" 라고 묻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즉 천국의 선물, 영생의 선물을 받았느냐는 겁니다. 그 선물을 받은 자만 천국에 가는데, 그렇지 않으면 천국은 없다는 말이죠. 

종교인들은 안 되는데, 종교활동으로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매일 그것만 신경을 쓰고, 그것을 모아서 천국에 가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죠. 물론 그때는 왜 그게 안 되는지 알 수 없는데, 나중에 인자의 활동을 통해서 보니, 그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선물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야붕 마음인데, 주지 않았다고 아무리 데모를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이번에 홍콩에서 200만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전체 국민이 700만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엄청나게 모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주님이 주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인데, 인간들이 나서 "제발 주세요" 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은 간단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혹시 장로님은 바다를 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닷가가 아니고 바닷물 위를 말이죠. 그러면 빠지는데, 그렇지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물 위는 걷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즉 우리는 천국에 가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는데, 그러면 베드로는 자기 행함을 믿을까요? 주님을 믿을까요? 주님인데, 왜냐하면 자기 행함으로는 도저히 물 위를 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행함을 받아주는 주님이 아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주님,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그 주님을 만났을 때 제대로 주님과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 굉장히 쉬운 이야기 !!

따지고 보면 굉장히 쉬운 이야기인데, 그렇지요? 한 쪽은 교회를 50년 다녔고 다른 쪽은 이틀을 다녔는데, 그런데 천국에 가보니 50년은 없고 이틀이 와있더라는 말이죠. 이틀은 선물로 받았을 뿐이고, 50년은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선물인데, 그 누구라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에 자격이 있는데 받지를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선물을 받고 나서 알게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예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셨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 1등급 사도바울 !!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철저한 유대인이었음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데, 이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그래서 1등급만 유지하던 자들인데, 즉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보통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은 그것을 똥오줌으로 여겼는데, 즉 "정말 더럽다. 빨리 치워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졸지에 믿음이 들어오니, 자기가 지켰다고 하는 그 행함이 배설물이 되어서 빠져나갔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을 자기가 치운 것이 아닌데, 우리 인간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지 모르는데, 굳이 위 편한 내과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지금 속 시원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속 터지게 살고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자주 나와서 곤란합니까? (ㅋㅋ) 

그러니 '마땅함' 인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알게 되었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고 하니,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수를 부리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주님의 마땅함이 천국에 가려는 우리의 모든 욕구를 다 꺾어 이겼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우리의 의도를 이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촐랑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이 더러운 저주받은 인생 속에 누가 치고 들어왔다는 겁니까? 인자가 차고 들어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뎅꼬지를 사먹으면, 길다란 오뎅에 꼬쟁이를 쑤셔서 꼽아놓았는데, 그렇게 인자가 가지고 있던 약속에 우리 육체에 꽂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용서하심, 그것만 자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다는 말이죠.

* 주님의 쑤시고 쳐들어오심 !!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그 쳐들어오심, 그것만 자랑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쑤시고 치고 들어오면, 기존의 있던 오뎅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선악체제'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선해야하고 악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나' 라는 말이죠. 

그게 자로 자아인데, 쉽게 '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선악체계가 나를 만들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그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항상 결부되어있는 것이 있는데,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 자시에 따르고자 하는 '나' 라는 것 만들어진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을 양심이라는 계시를 통해서 받았을 때, 자기는 그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그런데 자기 안에서 무엇이 그만 튀어나오는고 하니, 자기 본색, 즉 "탐내자" 라는 것이 불쑥 튀오나온다는 겁니다. 선만 있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이 함께 있으니, 자기는 선하고 싶어도 누가 세다는 겁니까? 악이 자기에는 우세하다는 것이죠.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기도와 화장 !!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 로마서 7장이 어렵기 때문에 저도 어렵게 설명을 할 수밖에 없어서 죄송한데 말이죠. 쉽게 하기 위해서 어제 한 설교를 다시 언급하겠는데, 어떤 여자 분이 화장을 하고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자기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화장을 했다는 것이 녹아져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기도가 끝나고 나서 화장이 지워지고 엉망이 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남아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다른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더라도, 즉 외국에 나가있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도, 거기에는 자기는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 잠재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 몸이 아프다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기도했는데 왜 몸이 아픕니까?" 라고 하는 반발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당연히 건강해야한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기도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 저를 아프게 하면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심보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자기가 기도하면서는 미처 몰랐는데, 그런데 기도하고 나서 몸이 아프든지 하면 "이렇게 기도하는 기도의 종을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불평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나 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건강해야한다" 라고 하고, 자기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바로 욕심이라는 겁니다. 기도하는 순간에도 챙길 것은 챙기겠다고, 그렇게 티가 난다는 것이죠. 

그러니 순수한 기도는 없는데, 율법을 다 지킨 상태에서 하는 기도하는 없다는 겁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이 왼손이 모르게 말이죠. 그러한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는데, 오늘 강의대로 하면 그분이 바로 인자인데, 그 인자는 약속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자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담에 속한 우리의 욕구와 욕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이 아닌 욕망 덩어리라는 겁니다. 

인자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 인간끼리 기도하라고 하면, 그러면 누가 더 거룩하고, 누가 더 고상하고, 그런 것을 가지고 등수를 매길 수가 있는데, 하지만 인자가 유일하게 약속을 가지고 침투한 이상은 우리끼리의 경쟁비교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 내 뜻대로 마옵시고 !!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시범을 보이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것인데,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시고"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 되는데,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노리개감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선악체제에 의해서 자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아가 선악체제를 보고 "귀신아, 물러가라" 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선악체제의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번 수련회에서 이것을 이야기하겠는데 말이죠. 

* 선악체제와 생명나무 !!

계속해서 강의를 진행해보면, 그러면 약속이 인자와 결부가 되어서, 인자의 활동이 인간세계 속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게 현실인데, 마치 오뎅 속으로 꼬챙이가 들어오듯이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세계는 아담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무슨 원리로 운용이 되는고 하니, 그게 선악체제라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생명나무인데, 그러면 인자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선악체제와 생명나무체제가 섞여버렸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선악체제 속에서 생명나무가 어떤 자태, 어떤 모양, 어떤 실존을 보여줄 것인지, 제가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선악체제인데,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자아에 대해서 선과 악으로 설명을 했다는 겁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니, 자기 속에서 강렬하게 탐심이 발동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아가 선악체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선하고 싶어도 악을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고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했음으로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 인간은, 선악체제에 놀아날 뿐 !!

자기가 무엇을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닌데, 단지 선악체제에 놀아날 뿐이란 말이죠. 악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선악체제 자체가 악인데,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거기서 나오는 열매가 바로 '자기 의'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의롭다. 나는 잘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 자랑이 바로 악의 열매라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왜 돌아가셨습니까? 데모하다가 돌아가신 것이 아닌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인간들의 '자기 의' 때문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잘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면 자기 의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선악체제 자체가 자기 의를 낳기 때문에, 선악체제 자체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데, 선악체제 자체가 만든 것이 '나' 라는 말이죠. 그런 자아를 가지고는 예수님을 밀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바닷물 위로 가면 빠지는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또한 인간이 자기 잘난 맛으로 산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잘난 체를 하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나' 라는 것을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닌데, 어떻게 부인이 되느냐는 말이죠. 

* 양과 염소의 세계로 !!

그러면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인고 하니, 이 현실세계에 예수님께서는 약속을 가지고 들어오시는데, 그 약속 안에는 저주도 있고 축복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현실세계가 두 쪽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지옥에 가야 마땅한 사람과 천국에 가야 마땅한 사람으로, 즉 염소와 양으로서 나누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누는 기준을 약속이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약속이 약속답게 되려고 하면, 선악체제의 현실이 배경으로서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아담 앞에 두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즉 인자의 주되심을 위해서 말이죠. 선악과가 그냥 폼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평소에 바다 위를 건너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 머리를 뜯으면서 "이 바보야, 바다 위도 건지지 못해?" 라고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데, 바다 위를 건너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이 부자연스러울까요?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라고 느끼는 것, 그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선과 악이 있는데, 여기서 자기는 선에 속한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자기 의라는 말이죠.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 길가는 행인에게 깡패가 돈을 뜯는다고 하면 !!

예를 들어서, 길가는 행인에게 깡패가 돈을 뜯는다고 하면, 그러면 누가 악하고 누가 선합니까? 당연히 깡패가 악하고 돈을 뜯긴 사람이 선한데, 그런데 그 행인은 나중에 알고 보니 살인강도였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 연쇄고리를 다 알고 계시는데, 이런 경우가 많다는 말이죠.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도둑의 집에 도둑놈이 들어서 신고를 했다는 말이죠. 도둑질을 해서 새벽 2시에 집에 두었는데, 새벽 4시에 그만 도둑을 맞았다는 겁니다(ㅋㅋ). 돈만 밝히는 검사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그러한 경우인데, 즉 큰 도둑놈의 집에 작은 도둑놈이 들었다는 말이죠. 

다시 길가는 행인과 깡패로 돌아와서, 깡패가 돈을 뜯는데, 그런데 그 뒤에 커다란 댐이 있어서 지금 막 터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둘 다 그만 물에 휩쓸리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착하다고 해서 봐주고 말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체제에 있는 이상은 생명나무체제에 의해서 전부가 다 저주를 받아야만 하고 멸망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악마가 집어넣은 속성이란 말이죠. 주님 앞에 선악체제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 인자가 가는 코스 !!

그러니 오뎅과 같은 현실, 여기에 약속을 가지고 인자가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자는 것이죠. 요한복음에서는 인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인자라고 하면서 가시는 코스가 어떤 코스입니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빠지는데, 그러니 인자가 길이 없는데 길을 내었다고 하면, 그러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인자가 아닌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과 인자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죽으면서도 정작 죽은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이고, 반면에 인자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죠.

인자는 인간세계의 선악체제가 아니면 죽을 이유가 없는데, 선악체제에 생명나무가 오니까 그만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생명의 길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십자가로서 말이죠. 

* 하나님의 의, 복음 !!

그 십자가로 만든 여기에 무엇이 형성되는고 하니,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서 마련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네 글자로는 '기쁜 소식' 이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일, 즉 인자의 일인데, 그러면 복음이 아닌 것을 무엇일까요? 전혀 어렵지 않은 질문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일이 아닌 것, 즉 인간의 일은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들이 하는 기도, 헌금, 봉사, 이런 것은 종교이지 복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을 바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복음이 나타났다 !!

성경은 "복음이 나타났다" 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겁니다. 복음은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다는 말이죠. 만약에 여기에 누군가가 나타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끌고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왔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홀연히 나타났다는 말이죠.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스스로 !!

그렇게 홀연히 나타난 것을 두고 구약에서는 '스스로' 라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는 서론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여기서 성경을 한 군데 찾아보겠는데, 출애굽기 3장 14절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가 선악체제로 들어와서 뚫고 지나갔다는 겁니다. '스스로' 라는 것은, 그 시작을 인간으로부터 했다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모든 시작을 어디부터 하는고 하니, '나' 라는 것으로부터 한다는 것이죠. 

이 '스스로' 라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해보겠는데, 여기에 깊은 호수가 있고, 그리고 어떤 키다리 아저씨가 있는데 다리가 너무나 길어서 바닥에 닿아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수면 위에 둥둥 떠있고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키다리 아저씨를 인자라고 할 수 있고, 이 호수의 물을 선악체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선악체제의 호수 위에 그냥 붕붕 떠있을 뿐인데, 정복한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인자이신 주님은 완전히 바닥까지 발이 닿아있는데, 그래서 선악체제를 통과하시는데, 스스로 통과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통과하게 되면, 이쪽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즉 깡패에게 돈을 빼앗기고 하는 사소한, 눈앞에 있는, 표면에 보이는 것, 그런 것밖에는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자는 그 뿌리가 처음부터 바닥에 닿아있었는데, 그것은 선악체제가 없던 그때부터 이미 원천과, 즉 바닥과 연결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즉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 주님과 함께 관통해서 바닥에 연결이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즉 성도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스스로 하심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스스로 하심으로 인해서 성도가 구성된다는 겁니다.

* 원천사죄 !! 

저는 그것을 '원천사죄' 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용서를 하되 원천적으로 용서를 하게 되면, 이게 이전이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운전을 하다가 그만 차를 박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박힌 분이 원천사죄의 인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보험사를 통해서 보상을 해주고 해어졌는데, 그런데 그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고를 낸 사람이 미안한 마음으로 "그때 제가 그만 졸다가 심하게 박았는데, 몸은 좀 괜찮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무슨 말씀을 하세요? 제가 박혀드렸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니 제가 잘못을 해서 그만 박았는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요? 가해자는 당연히 자기가 잘못해서 박았다고 하고, 그런데 피해자는 그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박혀주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스스로 박혀주었다고 하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에게 "제가 주님에게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니, 주님은 "언제 그랬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제가 그때 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니, 주님은 "그것은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하게 했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그럼 내 잘못은? 네 잘못은 원천의 입장에서 보면 성립이 안돼

* 모든 것은 원천을 경유해서 재해석을 !!

그러니 성도에게는 자기 잘못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즉 원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말이죠. 여기 물 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다 바닥의 원천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원천을 경유해서 다시 재해석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인간들은 일이 벌어져도 해석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원천을 모르고 수면 위에 붕붕 떠있기 때문이란 겁니다. 제대로 해석을 하려면 원천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수면에서 하니 "나는 착하다. 나는 경건하다" 라고, 혹은 "나는 죄를 지었다. 짓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 끝 !!

그런데 원천을 경유하고 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나는 그래야만 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 그것으로 끝!"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데,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데, 그러니 죄는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인자의 오심으로 해서 그런 통로가 열렸다는 겁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요한계시록 20장을 보겠는데, 12절에서 15절입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 생명책과 행위책 !!

여기 20절에 보면 생명책과 생명책이 아닌 여러 책들이 나오는데, 물론 종류는 두 종류인데 말이죠. 즉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하는데, 이것은 '행위책' 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선악체제가 계속해서 가동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대상자들인데, 그런 자들에게 가해지는 심판이 행위심판이라는 말이죠. 

이러한 행위책이 나오고, 또한 생명책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행위책은 행함에 대해서 계속해서 쥐고 있는 반면에, 이 생명책은 예수님의 원천사죄를 경유했기 때문에, 여기 생명책에 기록되어있는 자들에게는 물을 수 있는 행함이 전혀 남아있지를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행하셨기에 말이죠. 그러니 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불못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는, 주님의 축복이 마땅함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의 차를 들이박고 구원을 받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사기를 치고 천당에 가고, 참으로 희한하다는 겁니다. 세리고, 창기고, 강도인데, 그런데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천국에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체제에 살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가 찾아와서 그들을 건질 때, 즉 원천적으로 사죄를 해버리니,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이 사죄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조차도 건방진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근거로 해서 사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하신다는 겁니다. 

* 이강인과 최준 !!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자꾸만 억지 예를 들게 되는데, 우리나라가 이번에 이번에 세네갈과 축구경기를 하는데, FIFA 20세 이하 축구대회를 말하는데 말이죠. 그게 8강 게임인데, 이렇게 세네갈 수비수들이 골대 앞에 포진해있고,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이강인이 있고, 그리고 최준은 골대가 아니라 중간정도에 있었다는 말이죠. 

이제 이강인이 프리킥을 하는데, 그러면 보통은 골대로 센터링을 해주면 우리나라 선수들이 헤딩을 하든지 해서 넣는데, 그런데 이강인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냥 땅볼로 여기 수비수들이 없는 곳으로 공을 넣어준다는 겁니다. 물론 공격수도 없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최준이 불쑥 나타나서 골을 넣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차고 예수님이 골을 넣는데, 그러면 여기 수비들이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들 쪽으로 공이 날아온 것이 아닌데, 그러나 수비들이 공을 놓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기가 막힌 작품이라는 말이죠. 억지로 예를 들다가보니 그러한데, 양해를 하시고 들어달라는 겁니다(ㅋㅋ).

이것을 수비수들이 어떻게 잘한다고 해서 막을 수가 있는 골이 아닌데, 즉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전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인데, 그것을 약속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땅에 없는 분과 하늘에 계신 분과의 약속, 그게 언약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그야말로 세네갈의 수비수들처럼 들러리인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공이 와야 막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도 우리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들러리라는 겁니다. 자기가 잘하면 천국에 가고 못하면 지옥에 가고,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 복음은 자기 일이 아니기에 !!

다시 정리를 해보면, 복음은 자기 일이 아닌데, 그렇게 자기 일이 아닌 것이 자기에게 들이닥친 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왜 자기가 신경을 써야합니까? 자기 일도 아닌데 말이죠.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자기 일이 아니고, 또한 죄를 짓는 것도 자기 일이 아닌데, 그러니 "내가 죄를 지었구나. 지옥에 가겠네"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우리가 굳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물론 우리 쪽에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인자가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인자에 포함된 자들은 비로소 그게 해석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마땅함 !!

조금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일은 일어나도 인간은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선과 악인데, 왜냐하면 놀던 물이 그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즉 선악체제에 갇혀있기 때문에 해석도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생명나무이신 분이 오셔서 건드리게 되면, 즉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자기를 사용했다고 하면, 거기에 자기는 끼들 수 없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이강인과 최준이 서로 약속해서 골을 넣는데, 그것은 수비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수비들이 없는 곳으로 패스를 했기에 말이죠. 

* 같이 여행을 갑시다 !!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우리는 천국 가기에 마땅하다" 라고, 즉 '마땅함'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제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그것은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는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전화를 하는데,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갑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음 중에서 어느 답변이 맞는지를 한 번 맞추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답변이 "나는 가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 답변이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적으로 보면 어느 것이 정답일까요? 우리 권사님이 한 번 맞추어보세요. 1번이 정답이라구요? 둘 중에 하나인데(ㅋㅋ), 두 번째의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은,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나'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원천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원천인 생명나무에서 연락이 오게 되면, 그러면 "내가 여행을 가는 것이 악이다. 혹은 아니다" 라고 하는, 선과 악의 문제에서 탈락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결정을 하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선악체제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 여보, 우리 아플까?

다시 기회를 드리겠는데, 어떤 부부가 몸이 아픈데,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여보, 우리 아플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아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는고 하니까, 첫 번째는 "나는 아플 거야"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답은 몇 번일까요? 이제는 우리 권사님이 잘 맞추시는데(ㅋㅋ), 2번이 정답이라는 말이죠. 여행을 가던, 몸이 아프던, 모든 것이 다 주의 일이고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복음 덩어리인데,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일과, 자기 뜻은 없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선악체제에 놓여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복음이 아니라, 선악체제의 일부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고 물에 붕붕 떠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자기 몸이 아픈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몸이 아픈 것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서 아프라고 연락이 와서 아프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러한 사람은 아프나 건강하나 주님의 것이란 말이죠. 그게 바닥에 닿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1번이 왜 정답이 아닌고 하니, 거기에는 '나'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문제인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은 선악체제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체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도저히 '나' 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2번을 집어넣는데, 그러면 마치 오뎅에 꼬챙이가 밀치고 들어오는 것처럼 '나'를 찢고 들어오는데, 그러면 "내가 아프고 말고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구나. 그러니 살고 죽는 것은 주님의 뜻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도 천국이고 죽어도 천국이라는 것이죠. 이제는 다 안다고 여기고 더 이상 문제는 내지 않겠는데 말이죠(ㅋㅋ).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러면 성도는 선악체제가 아닌 생명나무에 속하다보니, 즉 인자와 함께 있기 때문에 성도의 자리는 인자의 자리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자의 자리라는 것은, 생명체제가 선악체제에 오게 되니까, 생명체제가 미움을 받고 밉상을 받아서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는 말이죠. 선악체제가 생명체제를 깨버린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그분을 그만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무슨 그런 것이 다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점점 알아 가는 것이지, 이미 다 아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미워한다는 말이죠. 

* 주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가? 

그렇게 인자의 자리가 왔을 때,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 우리도 역시나 선악체제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주님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그것을 이제 이야기해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15장을 보겠는데, 2절과 3절입니다.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 감추어진 유리바다 !!

쉽게 하겠는데, 불이 활활 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성도가 여기를 걸어간다는 겁니다. 바깥에서는 불이 타고 있는데, 그런데 성도가 그 속을 걸어가니, 거기에는 유리바다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자기 어떻게 인도하시는고 하니, 막상 들어가 보니 거기에 감추어진 다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리인데 말이죠.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성도가 참으로 대단해 보이는데, 불이 활활 타고 있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니 엄청나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성도 자신은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자기는 그냥 다리가 있어서 건너갈 뿐이라는 말이죠. 다리가 있어서 건너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는고 하니, 이 세상은 무엇을 감추는고 하니, 그만 복음의 다리, 복음의 바다를 덮어버린다는 것이죠. 즉 유리바다가 보이지 않게 온갖 짓들을 다 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협박과 공갈을 일삼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데, 그 악마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바다, 즉 유리바다가 보이지 않게 겁을 낼만한 것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러한데, "그렇게 하면 죽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

그리고 여기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라고 하는데, 이것을 과거 홍해를 건널 때와 똑같은 원리가 지금도, 요한계시록의 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되고 있다는 말이죠. 유월절에 모든 장자들은 다 죽었는데, 그런데 살아난 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냥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죽음 안에서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의 죽음, 즉 어린양의 피가 있다고 하면 이 세상은 그 사람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길 수 없다는 말이죠. 그 사람이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세상을 이겼다고 하는 현장에 계속해서 보내신다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혼자 있다고 여기게 되면 누가 편을 들게 됩니까? 자기편을 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어린양의 피를 받은 사람은 자기편을 들 것이 없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나는 내 편을 들 것이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나는 내 편이 아니야 !!

그러면 왜 자기편을 들지 않습니까? 물론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 있다고 하면 당연히 자기편을 들게 되는데, 그런데 성도는 이미 자기는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속했다는 겁니다. 그분의 인도함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더 이상 자기편을 드는 것을 그만 두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가 무엇인고 하니,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선악체제가 아니라 생명나무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더 이상 자기가 자기편을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부부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는데, 그래도 만약에 부부싸움이 생긴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효능에 관한 싸움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믿지 않는 자들은 항상 누구 편을 드는고 하니까, 악마의 편이 아니라 자기편을 드는데, 그게 '자기 의' 라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자기편을 드는 것이 곧 악마의 편인데 말이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나는 못난이 !!

하지만 복음에 속한 사람은 누구의 편을 들지 않습니까? "그래, 나는 못난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경우에는 복음적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한 쪽은 "나는 잘났다" 라고 하고, 다른 쪽은 "나는 못났다" 라고 하는데, 그런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셉이 형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고, 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셉이 거기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항을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수용을 했는데, 왜냐하면 해석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꿈을 주신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보았다는 말이죠. 

반면에 불신자들은 극구 변명을 하는데,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기를 유혹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인데 말이죠. 그렇게 양쪽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 때, 그 사람은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성도임을 어떻게 압니까? 구태여 자기편을 들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 그러면 성도라는 것이죠. 

그것이 사무엘상 3장에 확실하게 나오는데, 2절에서 9절입니다.

(삼상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삼상 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삼상 3: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삼상 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삼상 3: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삼상 3: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조금 전에는 호수의 바닥에 발이 닿는 예를 들었는데, 여기서는 뿌리가 있는 나무와 뿌리가 없는 나무로 해보자는 겁니다. 1편 1편에도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라고 하는데, 뿌리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반면에 악은 뿌리가 없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 뿌리가 없는 나무 쪽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엘리 제사장이라는 말이죠. 반면에 뿌리가 있는 쪽은 사무엘인데, 그것도 어린 사무엘이라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 번씩이나 부르는데, 하지만 사무엘은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음성인 줄로 알았다는 말이죠.

* 분명하게 드러나는 두 개의 노선 !!

사무엘이 가서 "저를 불렀습니까?" 라고 하니까, 엘리 제사장이 "내가 언제 불렀어? 부르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두 개의 노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한 쪽은 뿌리가 없는 나무라는 말이죠. 드디어 세 번째는 엘리가 알았는데, 하나님이 자기와 노선을 연결시킨 게 아니라 어린 사무엘과 그 뿌리가 닿아있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비록 어리지만, 그 뿌리가 인자가 되시는 분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과의 연결체제, 그게 바로 사무엘이라는 겁니다. 이 어린 사무엘이 얼마나 순진한지 모르는데, 계속해서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저를 불렀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어린 사무엘은 원천과 연류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아까 '원천사죄' 라고 했는데, 이것을 '원천용서'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미 선악체제에 있는 자기 백성을 근원적으로 용서해주기로 작정한 것이 생명나무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나무의 체제를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체제에 빠져있는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강의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물어보겠는데, 어린 사무엘이 잠을 자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기를 원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게 바로 '스스로' 라는 말이죠. 사무엘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인데, 하나님이 스스로 사무엘을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 오직 하나님 '스스로' !!

하나님 스스로에 자기 스스로를 집어넣으면 안 되는데, 오직 하나님 스스로 시작해서 하나님 스스로 마치신다는 것이죠. 거기에 우리가 끼들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보고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하셨는데, 주님만이 스스로 계시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흉내내고 까불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한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하고 계신다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생산되고 나타나고 보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 다시, 같이 여행을 갑시다 !!

다시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하면, 남자가 여행을 가면서 여자친구에게 "같이 갑시다" 라고 하니, "갈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에게 연락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남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나는 스스로 계신 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겉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 그렇게 두 사람인데, 그런데 그들은 둘 다 제3의 인물을 의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성도라는 말이죠. 그게 성도의 관계인데, 남자와 여자가 같이 여행을 간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마시고(ㅋㅋ),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성도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나' 라는 것을 집어넣지 아니하고 빼버리는데, 그러면서 스스로 계신 분을 거기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선과 악에 대해서 성도는 상관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자리를 없애버린다는 말이죠. 

* 참 잘했어요 !!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를 집어넣게 되면 그 '나' 라는 것은 선악체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를 집어넣게 되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그때 내가 좀 잘했어야 하는데"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선악과 그대로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아직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은 것인데, 붕 떠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원천사죄에 도달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주님, 이번에 제가 죄를 지어서 주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회개합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성도가 아닌데, 왜냐하면 지금 누구 편을 들고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편을 들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회개를 했다고 하면, 그러면 선악체제의 자기 자아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다짐한 것은 참 잘했어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앞으로 두 달 동안 그런 짓을 하지 마세요. 그러면 악이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회개인가? 계몽인가? 

그러니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해놓고, 거기에는 무엇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까? 선악구조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말이죠. 즉 선악구조에 갇혀있으면서 회개를 했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그것을 '계몽' 이라고 했는데, 즉 무지한 자를 깨우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종교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뜻이 아니라, 선악체제에서 선 쪽에 서고 싶어하는 자기 욕구인데, 그것을 종교의 힘으로 달성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계몽이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자기를 건전하게 챙기기인데, 더 간단하게 하면 '나 챙기기' 라는 겁니다. 

* 갱년기가 심한 내 아내 !!

우리교회에 갱년기가 매우 심한 여자 분이 있는데, 두 번을 나왔는데 말이죠. 올 때마다 남편이 데리고 나오는데, 그러면 그 남편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아내가 얼굴을 단정하게 해서 곱게 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는 겁니다. 갱년기가 심하면 얼굴도 그만 벌겋게 되고, 힘들다는 말이죠. 

그 아내가 남의 아내가 아니고 자기 아내이기 때문에, 자기 아내가 남들처럼 멀쩡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남편이 기도를 하면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북한의 핵 문제가 아니고, 자기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계속해서 '나' 라는 것이 들어가는데, '내 아내' 라는 겁니다. 즉 "내 아내로 인한 걱정근심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그리고 "내 아내가 건강해서 같이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데, 전부가 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자기 이야기라는 말이죠. 이것은 남들이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 전혀 이상하지 않는 현실과 인자의 등장 !!

그래서 그것을 제가 "나는 내 편을 든다" 라고 했는데, 그런 전혀 이상하지 않는 현실 속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인자가 들어오셨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말이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면서 들어오셨는데,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자기 것에 미련을 두면서, 자기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희망을, 그렇게 자기에게 모두 다 부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떻게 자기 것을 일부라도 빼낼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전적으로 자기 것에 몰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물 위를 걸을 수가 없는데, 걷는 것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는데, 그러니 베드로가 이상하다는 것이죠. 

* 기적이 아닌, 표적 !!

우리 인간은 그 어떤 해석을 해도 "나에게 무슨 이익이 옵니까?" 라고 하면서 하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분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기적이 일어나데, 그러면 인간의 기적이 기적일까요? 인자의 기적이 기적일까요? 

물론 인간들은 인자의 기적이 아닌 인간의 기적을 기다리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기적은 기적이 아니고 인자의 기적이 진짜 기적인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표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같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죠.

달리 말해서, 인자가 누구인지 알리기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인자의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즉 "이놈아, 죽어라!" 라는 것인데, 이게 인자의 기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멋있게 더 살고 싶다" 라는 것인데, 그게 인간이 노리고 있는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고 있습니까? 행하지 않고 있습니까? 부지런히 행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그 기적이 어디에 묻혔는고 하니, 인간들이 기대하는 기적 때문에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그야말로 천대를 받고 짓밟히고 있다는 말이죠. 

* 그냥 좋아요 !!

'쿨링(?)'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것이 추운 나라에서 하는 겨울 스포츠기도 한데, 꼬불꼬불하게 얼음으로 길을 만들어놓고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경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합에 누가 참석을 하는고 하니, 도미니카 공화국의 선수가 4명이 나온다는 말이죠. 얼음과는 상관이 없는 더운 열대나라의 선수들이 참가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들의 태도가 어떠한고 하니, 다른 나라 선수들은 우승을 하지 못해서 다들 안타까워하는데, 그런데 이 도미니카 선수들은 참석한 것만 해도 좋아서 난리라는 겁니다. 이들은 장비가 거의 없어서 제대로 연습도 하지 못했기에, 그 성적도 당연히 꼴찌라는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인자의 기적을 안다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 비싼 향수를 다 날리고 해도, 그리고 남들에게 욕을 들어도, 자기가 인자에 속했다고 하는 기적, 그것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말이죠.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데, 이 여인은 그야말로 원천용서를 받았다는 것이죠.

* 유리바다를 건너가는 자들 !!

그러니 회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무슨 소리를 해도,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나쁜 여자라고 아무리 욕을 해도, 그 기쁨은 전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리바다인데, 그 유리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무슨 말이고 하니, 주님께서 연막탄을 터트리게 되면, 그 안에서 성도는 유리바다를 건너가게 되는데, 그러면 이전에는 자기 아내가 아픈 것이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사소한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갱년기로 아파하면서 천국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그분이 성령을 받아서, "제 아내가 아파도 저는 주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먼저 교회에 다닌 자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이죠. "아하,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성도는 도미니카 선수들이 경기에 참석한 것만 해도 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하면서 난리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그게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물론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모습, 때로는 그게 우습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니 인자께서 자신을 길을 가면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를 구원시킨 이유, 그것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이 인자의 오심과 그분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닌 제3의 인물이 있었는데, 우리는 왜 그것을 자꾸만 잊어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되심으로 드러내기 위한 기적 덩어리인 것을, 기적의 연속인 것을 이제는 놓치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6,20 오후 5시에 마침.

결혼하고 지금까지 아내와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한 이유가 다 있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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