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셩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아빠와 함께 2013. 5. 3. 21:59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①







저 자 : 이 근 호 목사

 

 

 

 

 

 

 

26: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5)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6)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
구약과 신약의 중심이 있다.

언약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구약에서는

유월절 정신이 사라질 때

우상이라고 하며,

신약에서는

십자가 정신이 사라질 때

우상이라고 한다.

주의 약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계시인 성경은 문화적인 형태를 빌린 것이지만,

자기가 나타내려는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유일한 계시인 아들로 다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주의 언약이 거룩을 근거로 해서 비거룩을 정죄합니다.


정죄와 심판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거룩한 자들만 부릅니다.


그렇게 부른 성도들만 건져서 자기 처소로 삼겠다는 내용의 책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살기 위하여 애쓰는 동안


그들만은 빨리 죽기 위해 애쓰는 자들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일한 것입니다. 믿음있는 자는 믿음으로 삽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에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차 례

머리말……… 1

1. 창세기……… 2

2. 출애굽기………40

3. 레위기………46

4. 민수기………51

5. 신명기………59

6. 창세기(보충편)……… 2

7. 출애굽기(보충편)………40

8. 레위기(보충편)………46

9. 민수기(보충편)………51

10. 신명기(보충편)………59

11. 여호수아……… 2

12. 사사기………40

13. 룻기………46

14. 사무엘서………51

15. 다윗언약의 형성 과정………59

16. 다윗시대와 시편……… 2

17. 열왕기서………40

18. 솔로몬과 지혜서………46

19. 전도서………51

20. 욥기의 중거리………59

21. 아가서……… 2

22. 이스라엘의 분열………40

23. 선지자가 하는 일………46

24. 다윗가문의 정통성 확립 경위………51

25. 선지자의 신학………59

25-1. BC9C의 선지자 신학………59

25-2. BC8C의 선지자 신학………59

25-3. BC7C의 선지자 신학………59

26. 포로기 신학……… 2

27. 구약을 끝내면서………40

 

 

1. 신약, 그 새로운 언약(서론)……… 1

2. 복음서(옛 언약의 소멸 과정)……… 4

3. 마태복음……… 6

4. 마가복음………10

5. 누가복음………13

6. 요한복음………17

7. 사도행전………21

8. 바울의 신학………28

9. 로마서………37

10. 고린도전서………41

11. 고린도후서………44

12. 갈라디아서………46

13. 에베소서………48

14. 빌립보서………49

15. 골로새서………51

16. 데살로니가 전서………52

17. 데살로니가 후서………54

18. 디모데 전서………56

19. 디모데 후서………58

20. 디도서………59

21. 빌레몬서………59

22. 히브리서………60

23. 야고보서………63

24. 베드로 전서………66

25. 베드로 후서………67

26. 요한 1서………69

27. 요한 2서………70

28. 요한 3서………71

29. 유다서………71

30. 요한 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묵시 문학적 접근………75

31. 신약을 정리하면서………80

32. 성경 전체의 내용………82

33. 결론을 대신하여 쓰는 글………84

 

※ 이 책은 보급판으로 발행한 것임.

 

 

< 저자 이근호 목사>

1953년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공과 대학(B.S),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Div.)

경북 와촌면 박사리 박사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

저서로는 「도서출판 대장간」에서 발행한 「복음의 회복,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뒤에서 본 한국 교회, 죽은 세상 산 성도, 믿음으로냐 행위로냐(공저)」와 복음의 맥(말씀사역) 등 다수가 있음. 연락처는 053-852-0172

머 리 말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서 이 세상을 지배해 나가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우리들의 선입감 속에 들어있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기존의 약속관을 공략하고 정죄 하는 내용의 약속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당황해하며 몸을 움츠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음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거부할 수 있는 자격이나 여유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거부는 우리의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분인가를 알아야 하며 동시에 얼마나 거룩한 분인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곳에서 그분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가 감추고 있는 대목을 그분은 벌써 공개하고 계셨습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는 이사야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온 그 자리를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이사야 6:5)

본서는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 창 세 기

 

창조사역을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루신다는 성경의 내용은 말씀 그 자체가 갖는 중요함을 언급한 것입니다.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이고 온천지가 말씀의 기초 위에 자리잡고 있다면 하나님과 피조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에 좋았다.” 고 하는 言命은 피조물이 말씀대로 위치해 있을 경우에 한합니다. 이처럼 성경 처음부터 말씀에 대한 부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립”은 말씀 이외에 결코 다른 것이 대치될 수 없음을 선언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케하는 그 모든 행사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意中에서 나온 것이기에(1:26) 하나님의 형상대로된 피조물인 인간이 좋았더라 는 평가를 받으려면 본래 하나님의 의중에 일치된 상태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대로 되니라 - 1:30)

복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피조물이 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여있을 때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만약에 현세상이 혼란과 무질서가 개입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필시 최초의 창조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 원인은 인간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말씀을 위배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세상은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한 행복이 극치에 이르는 세상이었고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부부사이도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씀에 대한 위배로 말미암아 저주와 심판과 분열과 갈등과 불안과 죽음이 초래된 것입니다. 여기서 또다시 하나님말씀이 잦는 의의를 부정적 측면에서 재확인됩니다. 말씀에 대한 거절은 反創造로 내려가는데, 반창조란 소멸이나 無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1:2/2:7/3:19) 창조사역에서 말씀의 역할은 세계를 무질서에서 질서로 전환시키고(1일,2일,3일의 사역) 비워있는 질서를 채우시고(4일,5일,6일의 사역) 그 채워진 존재에 축복하사 팽창하고 확산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체제가 와해되고 다시 무질서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을 극복하고 등장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3:15)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말씀에 도전하는 세력을 와해시키고 다시는 하나님의 창조정신과 충돌되는 것이 없게 하시겠답니다. 그후로 세계역사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한다는 약속이 어떻게 이어지며 어떻게 성취되는 가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런 쪽으로 유도해 가십니다. 또한 약속에 기대를 거는 자들도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관에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인류가 활동하고 쉬는 터전인 땅은 그 모든 변화가 약속을 위한 역사적 배경과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주어집니다. 인간들이 만나고 투쟁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몸부림치고 애쓰고 죽고 죽이는 사건 하나 하나는 결코 약속의 내용과 무관 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나타난 가인이 아우를 죽이게 되는 살인사건의 경우를 봐도 그러합니다. 가인의 살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았고 자기의 제사는 거절한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별에 대한 가인의 불만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땅은 이러한 가인의 행위를 수용할 수가 없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그 땅에서 추방하고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낳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 주어지는 방식입니다. 즉 하나님이 생각한 여자의 후손만이 대신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은 아벨의 죽음에 하나님께서 의의를 갖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역으로 가인의 보호는 아벨의 죽음이 어떠한 사고방식을 지닌 자로부터 당한 피해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여기에 약속의 실체가 보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약속의 후손은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 한하고 그 분은 거기에 반기를 드는 자로부터 희생이 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셋의 가문이 무사히 이어지는 것을 보며 비로소 사람들은 약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다. (4:26) 약속의 계보는 또한 인간들이 고생스럽게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는 어려움도 해결해 주게 되는데(5:29) 노아의 등장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땅의 질서의 회복은 인간들의 범죄로부터 땅을 지키는데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언약을 세우는데(6:18)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땅에 회생시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8:21-22에 나와 있는 것처럼 노아의 義를 담보로 하여 (6:9) 그가 드리는 제사를 흠향하시는 방식을 두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 때문에 이 언약이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도 언약 안에서 만 구원이 가능한 이유는 그와 그의 가족도 비완전하기 때문입니다. (9;20-27) 이처럼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노아가 아님) 땅의 중보자로 삼아 땅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노아의 선택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된 것입니다.(6:8) 노아가 드린 번제란 정결한 것을 골라 드림으로서 (8:20) 부정결한 짐승(7:2) 의 구원도 가능케 되었다는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이로서 땅은 언약에 의한 언약의 땅이 되었고 그 이후의 땅위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고 복을 받으면서 (9;1) 살게 된 모든 피조물들은 노아 언약의 은혜를 바탕으로 하는 땅에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만약 그 은혜에 배치되는 생각을 갖게 되면 땅의 이 원리 때문에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에서 셈은 노아의 하체를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원리를 바로 이해한 자로 인정받습니다. 노아는 셈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9:26) 뿐만 아니라 야벳을 창대케 하여 셈의 장막에 들게 하고 함으로 하여금 셈으로부터 지배를 받게 하여 땅의 질서를 유지케 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에 대한 셈족속의 정복에 대한 정당성은 이로서 부여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힘의 집결에 의하여 땅위에서의 팽창과 복의 창출을 시도해 보지만 은혜의 땅에서 그 땅의 속성과 배치되는 일이기에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뜻을 거부하고(11:1-9) 오직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은혜의 땅에 합당한 의인으로 만들어 나가시기 위해 세운 아브라함 족속만이 창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내용은 “내가 지시하는 땅에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너의 가문은 팽창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는 기근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복의 근원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아내를 바로 왕에게 상납하고 자신을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아브라함이 발견한 사실은 자신에게 약속한 여호와라는 신은 애굽의 바로왕 조차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이 약속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홀로 자기(아브라함)를 사용하여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 에덴동산 같은 땅까지도 양보하면서 자신의 신앙 노선을 따라 갑니다. (13:8-10)

그 뒤 가나안 땅에서 도시 왕국끼리 전쟁이 있었는데 조카 롯이 사로잡혔기에 아브라함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私兵을 이용하여 승리하고 돌아 올 때에 소돔성의 왕과 살렘성의 왕 멜기세덱을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인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기를 이번 전쟁을 아브라함에게 붙여서 승리케 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여기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번 전쟁의 승리에는 배후에 자기에게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여한 것으로 여기고 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 그의 神에게 예속됨을 고백합니다. 동시에 소돔왕으로부터는 어떠한 전리품도 거절하는데 이는 이번 전쟁은 자신이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승리한 여호와 전쟁임을 선언하는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가족을 해치는 자를 치는 것은 결국 자기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는 방패요 상급이 되는 것은 전쟁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 것입니다.(15:1) 이런 여호와에게 무조건 신뢰하게되니 이는 노아의 순종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로부터 義人이라는 칭호를 듣게 됩니다.(15:6/6:9)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노아의 경우처럼 언약의 본질로 세우려고 합니다. 즉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언약입니다.(15:8) 그 내용은 가나안땅의 정복과 차지입니다. 즉 죄에 대한 義의 승리를 낳게 하는 언약입니다.(15;16)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의 실체입니다. 즉 복이란 인간에게 죄로부터의 해방이요 극복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오는 자손이 이 일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손은 결코 인간의 자연적인 생식능력에서 기인된 자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방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 자손의 출생을 두고 인간들이 사이에 功過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6:4)

그 누구나 자신의 공로라고 내 세울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에 적합한 인물이 됩니다. 구별되었다, 또는 거룩하다는 증표(할례)가 아브라함 언약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17:13-14) 그 할례정신을 영원히 구현할 수 있는 자식이 태어나야 합니다. 거룩 또는 의인의 존속이 왜 그리 중요한가 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불심판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의인이 하나 없는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 시점에서 롯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서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습니다.(19:29) 악에서의 건짐이라는 그 행위의 배후에는 대리 의인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날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데 자칭 의인인 아비멜렉 가문에(20:4) 갑자기 태가 닫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남의 아내를 (사라) 그 왕이 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는데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는 죽게 되고 만약 기도하게 되면 태가 열리게(복이 회복된다)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을 미루어 봐서 죽은 태의 열림이 바로 복이 회복을 말하는 동시에 그 복은 자신에게 이유가 있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드디어 사라의 태가 열리면서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삭이 태어남으로 약속의 사역의 중심이 이삭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복의 전수에 있어 어떤 특정한 形을 구성하게 됩니다. 소위 장자권(또는 복의 상속권)이 약속성취를 추진하는데 있어 어떤 位相을 점하는가에 대한 定形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수립됩니다. 복의 근원으로서의 아브라함과 그 복을 전수 받게 될 이삭 사이에서 서로가 무엇을 알게 되며 무슨 변화가 수반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하여 제사를 드리기를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요구에 순응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즉 장자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화 되도록 번제의 제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창세기 4:4-5의 가인과 아벨의 제상에서 볼 수 있듯이 또 8:21의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장자의 희생을 통해서 복은 인간 세상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게 아니라 여호와의 이러한 지시를 경외하는 것으로 복은 주어지고(22:12) 번제의 제물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으로 말입니다!(여호와 이레) 이 제물 이외에 어떠한 제물로도 복의 근원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물이라도 안됨) (22:14)

아브라함의 시선은 이제 [여호와 이레]를 지향하는 여호와의 사역에 모아집니다. 복의 근원은 바로 거기서부터 나옵니다. 이삭의 존재는 바로 [여호와 이레]를 가르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 속성과 역할이 복에 끼치는 영향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만 [여호와 이레]를 바라보는 믿는 자의 표본으로서 서 있습니다. 자기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믿는 자의 선조로서만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아브라함의) 이름과 존재를 동원하여 아브라함언약 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치 노아를 이용하여 노아언약을 세운 것과 같이) 이렇듯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이에서 복의 전수는 장자에게만 주어지고 그 장자란 바로 여호와에게서 자신의 언약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선택된 자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복을 제공하는 아브라함언약은 내용상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은 이제 아브라함의 순종을 근거로 하여 아들 이삭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이루게 합니다.(22:16-18) 이삭에서 나타난 언약의 모습을 아브라함은 죽었다가도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일 때문에 도로 살아난 내용으로 보았습니다. 즉 그는 자손의 번창과 대적의 문을 여는 것을 부활의 시각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보게 된 것입니다.(22:17-18) 즉 수많은 자손이란 바로 이삭처럼 다시 살아난 자의 많음이요, 대적이란 바로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초래케 한 세력을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라가 죽고 난 뒤에 그는 자신과 사라의 부활을 기약하면서 그 땅을 앞당겨 자기 소유로 삼고자 나섭니다. 정식으로 값을 주고 사게 됨으로 후일에 이 땅을 차지했을 때 법적으로 소유권시비에 하자가 없게 합니다.(23:18) 이제는 이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나 이방인이 아니라(23:4)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언젠가는 언약족속의 땅이 될 것을 아브라함은 이미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언약은 이삭을 통해 내용이 보다 풍부해지고 구체화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제 이삭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이삭의 앞으로의 운명은 번제의 제물로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자의 모습을 띠면서 진행됩니다. 그의 후손은 번제의 제물 되었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번제가 열납되면서 인간세상에 언약의복이 지속된 이 시점에서 그 이삭의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이 존속하는 한 죽음의 세력은 이 쪽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장자란 이처럼 세상을 위한 화해제물로서 인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 등장되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을 존속시키는 것뿐입니다. 24:60에 보면 이삭에서 나온 자손이 원수의 성문을 열 수 있다고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리브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성입니다.(25:21) 그렇다면 원수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자는 여자의 자연적인 출산력의 개입 없이 태어난 자식일 것입니다. 이것 또한 언약의 요소로 들어갑니다. 이삭이 가진 아기는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원수의 성문을 열 장자는 그렇지 못하는 자의 조상과 함께 태어나게 되며 또한 그 쪽을 섬김으로 오히려 장자로서 입증되는 운명을 갖게 됩니다.(25:23) 하지만 정작 그 두 아들뿐 아니라(에서와 야곱) 두 아들의 부모들까지도 각자의 기호에 따라 살아갑니다. 야곱이나 리브가나 이삭은 언약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에서 장자권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팥죽으로 뺏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이삭은 먼저 난 자를 자연적으로 장자로 보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창세기 12:3 에 근거하여 자신이 복의 근원인 줄 알고 자기의 기쁜 뜻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 가지고 오는 자를 복 주고자 합니다.(27:4) 에서는 아예 장자권의 의미도 모르고 있으며 리브가는 속임을 통해서라도 주어질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삭이 받은 언약은 이와 같이 인간의 無知 안에서 싹트면서 언약이 그들의 무지와 인간적인 생각을 고발할 수 있는 증거와 여지를 확보해 놓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시는 방식과 인간이 생각한 언약의 성취 방법과 내용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이 점이 바로 언약이 고발의 요소를 갖게 되는 핵심적인 것입니다. 언약은 빼앗고 속임 당하는 그런 혼란 속에서 진정한 희생자와 섬긴 자가 누군가를 알게 하고 차후에 이 세상에 등장될 민족도 섬기는 자를 잇는 민족과 섬김을 받기 원했던 자를 추종한 후손들의 민족으로 양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 속에서 인간적인 선입감으로 언약을 이해한 이삭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삭의 시도를 좌절시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언약 안에서의 장자는 자연적인 출산시기와 무관함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언약의 의의를 표현할 수 있는 자가 장자가 됩니다.

이삭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삭에게 많은 재산증식이 일어나고 땅은 가나안 땅에서 확장이 되는데 이는 모두 언약이 갖는 영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26:1-33)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자 에서는 야곱을 제거할 의사를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환난은 시작되는데 그 동안에 자기가 자라온 배경을 이루었던 세계에서의 복의 개념을 그대로 야곱이 지니고 있었던 것에도 환난의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촌의 집에서 살아온 세월 가운데서도 그의 인생의 목표는 번창과 부유한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30:43) 이는 그가 아버지 집에서 떠나온 후 벧엘에서 가졌던 경험 안에서도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27:28에서 아버지 이삭이 자기에게 축복하기를 풍부한 곡식과 포도주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벧엘에서 하나님은 사다리를 보여주시고 천사를 분주히 그 위에 왕래시킴으로 하늘의 복이 마구 야곱에게 떨어지는 광경을 자기는 봤고 네 자손이 온 땅에 편만할 것이라는 소리도 실제로 들었기 때문입니다.(28:14) 그러나 27:29에 나타난 축복은 야곱의 축복이 아니라 야곱언약에게 준 축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많은 형제들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야곱 자신도 그 언약 안에 있음으로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요셉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이삭 때처럼 야곱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떠나지 않고(28:15) 아브라함 언약 정신으로 변화시켜 나가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진정한 장자로 삼게 하십니다. 야곱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실 때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다는 말은 천사를 그에게 보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32:1) 많은 무리의 천사가 야곱을 지키게 되며 야곱이 어디를 가던지 동행하게 됩니다. 언약의 성취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이루어 나가시는데 다만 야곱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그의 손해보기 싫어하고 지기 싫어하는 평소의 사고방식대로 열심히 살해자를 대항하여 밤새도록 버텨냅니다. 살해자는 쉽게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몸의 일부를 파손시킵니다. 여기에 그만 그가 평범한 인간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살려 달라고 그에게 애걸 복걸 합니다. 인간을 이기려다가 그만 하나님 마저 이겨 보려고 덤벼든 셈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하기를 인간도 이기고 하나님 마저 이겼다는 이름으로 그의 생존을 지켜줍니다. 이겼기에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단순히 야곱만의 이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이름, 또는 하나님을 뵙는다 할지라도 생존될 수 있는 무리의 이름으로 세워집니다. 야곱은 죽음과 생존의 사이에는 축복이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축복은 인간 쪽에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싸워서 지게 된 그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축복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전폭적인 낮아지심이며 야곱을 이용하여 사다리를 통해 왕래한 천사의 낮아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죽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살았다는 명확한 증거는 브니엘이라는 지명과 즉 “하나님과 대면했는데도 살았다.”)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도뼈의 힘줄을 먹지 않음으로 증명됩니다.

그 이후 야곱은 진실로 섬긴 자는 바로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모습의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자기가 언약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 언약을 바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적으로 여기던 형 에서를 마치 자기의 주인처럼 섬기게 됩니다. (33:5 - 11)

이런 사실에 눈이 어두운 야곱의 아들들은 무력으로 여동생의 수치를 복수하려다 야곱의 입지를 곤란하게 해서 그곳(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게 되어 값을 주고 사게 된 땅)을 떠나게 됩니다. (33:18-20 34:30)아직 아들들에게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미지가 힘의 정복으로만 비쳐지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야곱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아들로 전환시킬 계기가 다가옵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야말로 27:29에 나오는 축복을 성취시킬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이 아들이 지니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며 드디어는 그들의 손에 의해 애굽나라 종으로 팔려 가게 합니다. 이삭의 축복에 의하면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하지만 그는 지금 종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종으로 만듦으로 인하여 형제들이 어디서 아브라함 언약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밝혀 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의 요셉 추방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자의 추방이 됨으로 결국 하나님 자체의 추방인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단순히 꿈 가진 자로서만이 아니라 급기야는 꿈의 해석자로서 등장시켜 요셉의 배후에는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는 분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로서 요셉뿐 아니라 그 형제들에게 야곱의 하나님의 실상을 알게 하시는데 45:5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그러면 그 생명 보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요? 45:8에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내는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바로가 자기의 주가 아니라는 말이다.)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 죽음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이삭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수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야곱의 집안의 경우에는 형제들에 의해서 배척 당한 형제 하나가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을 구출 시켰습니다. 여기서 주의 개념에 새로운 변화가 주어집니다. 즉 주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땅에서 비언약적 사고를 가진 자로부터 배척 당한 그 당사자를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그를 배척케 한 그자들은 그 주로부터 지배받는다는 역사법칙과 원리가 정해져 버렸습니다. (참조: 빌립보서 2;5-11)이것은 이미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일환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야곱의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태어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 사정은 그 운명의 배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장자의 원리가 작용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손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12아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언약의 기준에 따라 저주와 축복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각자 운명을 통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게 하는(부정적이든지 긍정적이든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요셉에게 찾아온 죽음까지도 극복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50:24-26)

 

2. 출 애 굽 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함으로서 시작되는 출애굽기는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어떤 평가와 처벌을 받는가를 보여주며, 이스라엘 민족의 건짐이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의로움의 대가가 아니라 선조에게 하신 언약의 실현과정의 일부임을 나타내어 줍니다. 하나님의 건짐 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들이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들의 현 관점에서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출애굽기 전체에서 큰 주제거리로 부각됩니다. 언약에 대한 몰이해는 애굽사람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레위 지파인 모세와 아론까지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12아들들에게 행한 예언은 의미심장한데 좋은 운명을 예고 받았든 나쁜 운명을 부여받았든 간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온당치 못한 존재들이며 다만 거기와 대조적으로 언약의 하나님만이 한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예언인 것입니다.

이제 이점을 실제로 역사 안에서 검증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언약이 과연 무엇인가를 역사 안에 있는 나라들에게 알려 주게 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으로 인해 종노릇하게 된 히브리 민족은 종이라는 신분이 언약 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언약의 민족이 꼭 종된 자들의 집합으로 규정될 타당성이 무엇인가? 민족의 정체성을 꼭 그것으로 고정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삶의 정황에서의 해방과 구원이란 역산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게 되는가? 라는 점들이 파악되어야 합니다. 언약의 민족이란 단순히 그들이 언약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언약이 그들을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약이 역사 안에서 표현하고 싶은 바를 그들의 실존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라는 신분은, 또는 종처럼 대우받는다는 것은 이미 앞선 언약의 내용 가운데 그런 悲運의 처지에서 비로소 언약이 구현된 사실이 있음을 말해주며, 그것이 이제는 개인단위가 아니라 민족단위로 이루어진다는데 차이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요셉을 제대로 알던 바로왕은 종의 위치에 있는 요셉의 지지자의 위치까지 상승시켰습니다마는 요셉의 가치를 모르는 왕이라면 당연히 그 전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풀리는데 노예와 죄인의 위치에서 통치자와 主의 위치로 옮겨질 때 옮길 수 있는 언약적 근거와 정당성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구원의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점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것만큼 중요하면서도 무시당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요셉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요셉을 내세운 하나님이 그를 主의 자리에 앉혔다면 왜 그를 主가 되게 했는지는 이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체험 속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5:13-21 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애굽의 430년 간의 체류는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의 기간인 동시에 그들을 징벌할 적절한 구실이 있는 민족의 팽창도 아울러 고려한 기간입니다. 죄를 징벌할 만큼 의로운 민족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권이지만 하나님은 죄라는 규정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도전과 공략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에(창세기 3:4, 14)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고 내세운 언약의 민족에 대한 학대와 무시가 곧 저주를 내릴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요셉은 야곱의 12지파가 꼭 하나님의 언약의 민족임을 자기 시체의 이동을 걸고 확신했습니다(창세기 50:25 여호수아 24:32).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오해하여 나선 자가 있으니 바로 레위지파의 모세입니다. 그의 구원관은 억압받는 자가 억압하는 자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항거의식의 발로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해방의식은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사건의 재판으로서, 언약 자체가 무력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해방은(창세기 32장의 얍복강 사건) 이 입장과 충돌됩니다. 폭력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구출이 구원이라는 언약의 성격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설사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손치더라도 야곱의 공동체이지 이스라엘은 아닌 것입니다. 동시에 여호와와 상관없는 단체가 되고 복의 근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과 분리시켜 놓습니다. 본인도 언약과 상관없는 생활을 40년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4:25) 이제 버려진 자를 여호와는 찾아옵니다.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음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이스라엘 자체의 근거가 있지 않음을 보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은 그에게 반발할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4:1)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상케 합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는 내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는 속성을 지닌 神이라는 것입니다.(3:14-15) 즉 너의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내가 이미 던진 언약에 대한 자기 충실의 차원에서 구원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이스라엘 내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원의 요소가 되는데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언약 순종의 차원에서 순종해야 될 필요성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가졌다는 그 자체 만으로가 아니라 언약에 대한 동참이 공동체 의식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의 실체를 옛날 에덴 동산에서의 뱀과 같음을 보여주며 인간에게 있어 문둥병 같은 저주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심판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심판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그 자체로서 이미 가능합니다. 모세 가족이 애굽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가는 길에 그들은 여호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아들을 (장자를) 죽이려 하자 사태의 다급함을 안 모세의 아내가 황급히 장자에게 할례를 행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들의 심판을 면할 수 가 있었습니다. 언약 계통에서는 이미 인간의 장자는 장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할례 언약에서만 장자로 간주됩니다.(창세기 17:13-14) 지금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행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이 언약으로 오는 심판을 나타나는데 있습니다. 즉 진정한 장자란 애굽의 장자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만이 장자라는 것을 말입니다.(4:23) 애굽 왕 바로와 모세의 대결은 이미 요셉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애굽이 은혜를 입은 바가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에 대하여 애굽이 배반한 것에 대한 고발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증거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 때는 도리어 애굽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됩니다.(3:21/12:35-36) 그 사이에 일어나는 애굽 땅에서의 10가지 재앙은 바로왕이 여호와를 모른다는 대가입니다.(5:2) 그들에게 이해되는 여호와는 바로 자기들과 싸우시는 神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의 군대로 인정됩니다.(7:4) 이처럼 애굽 왕 바로의 강팍함은 언약의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가를 정하는 定形으로 삼고자함인데 10가지 재앙에서 피해 보는 것은 모두 애굽의 우상들이며(12:12) 그 우상의 기반이 되는 우상은 바로 인간 자체임을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드러납니다. 결국 여호와의 원수는 인간이라는 神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 될 수 없지만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3:12) 자들만이 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술객들이 여호와의 능력을 흉내내어 보지만 자기들 술객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남을 보고 바로 왕은 이 일이 단순히 여호와라는 神을 숭상하는 또 다른 무당의 능력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재앙은 애굽인이 거하는 곳과 이스라엘이 거하는 장소에 확연히 구별되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밤은 그야말로 죽음과 저주와 통곡의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년된 어린양입니다. 이 어린양이 그 집을 덮어주었습니다. 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동안에 집안에 있는 식구들은 양고기를 먹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어린양의 표상에는 無罪思想이 담겨있습니다.(12:5 의 흠없는 어린 양으로 되어있다.) 무죄한 것의 죽음을 유죄한 자의 죽음으로 대신 수납하시고 넘어 간 것이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탈출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와 심판으로부터의 탈출이며 단순히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심판 아래 있던 옛 시절로부터의 벗어남이기에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새 날이 되는 것입니다.(12:2) 그러나 결코 어린양의 영향권 밖으로의 벗어남은 아닌 것인데 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 유월절을 기념하여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새 날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되어 있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지 어린양과 결별을 선언하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애굽에서 함께 죽은 그 상태를 계속 지속시켜야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모든 맏배는 대표로 거룩하게 따라 성별 되어야 하고 나머지 모든 것도 그것을 맏배로 여기고 종속되어야 합니다.(13:1-2)

여호와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소속된 여호와 군대입니다.(12:17,41/14:13-14) 적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공격하겠지만 사실은 여호와에 대한 도전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14:25 시편 121:1-8) 언제까지냐 하면은 全세상을 여호와께서 친히 싸워 승리하시고 이 땅에 거룩한 성소로 자기 백성을 삼을 때까지입니다.(15:13, 16-18) 홍해를 건너오고 난 뒤부터 이스라엘에게는 한없이 배워야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홍해를 가르게된 그 능력과 그 능력을 야기시킨 하나님의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입니다. (14:13-14) 애굽 군사가 접근했을 때 갑자기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했습니다. (14:24) 이런 일들을 통해 도대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무수한 원망과 원망을 연속적으로 들으시면서 또 거기에 대한 적절한 징계를 내리시면서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철수하시지 않고 만나를 중지하지 아니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은 체득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하나로 요약하면 언약 밖에서는 너희들도 (이스라엘) 바로 애굽인과 동일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혈통적 선민으로 이해하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언약적 이스라엘로 전환될 수 있는가요? 15:22 에서부터 시작하여 1차 가나안 땅 정탐까지 (민수기 14:22) 10번의 원망 속에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이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애굽인이 하나님의 이적을 10번이나 시험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러하니 또 하나의 애굽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15:26 에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변신을 “하나님의 치료” 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유가 어떤 정신에 의해 주어지고 있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출애굽의 주제라고 보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치유하는데는 홍해를 가른 여호와 이름의 능력과 같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출의 차원에서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바로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능력입니다. 죽음이란 단순한 소멸이나 무존재가 아니라 심판과 저주를 두고 말합니다. 따라서 역으로 생명이란 단순한 생존이나 구사일생이 아니라 생명 세계를 두고 말합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오면서 잃었던 생명을 도로 가진 게 아니라 옛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의 영향력을 받는 범주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이 생명을 가진 게 아니라 그들이 생명의 손길 안에 잡혀 들어온 것입니다. 그 생명은 곧 여호와 자신입니다. 이제 자신의 소멸과 죽음과 생존 같은 것들은 생명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생존되지 않더라도 생명은 그들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존을 요구했고 생존문제로 생명에 대항했습니다. 예를 들면 물이 쓰다느니, 먹을 것이 없다느니, 먹을 물이 없는 이곳으로 우리를 왜 데리고 왔냐느니 하는 원망들이었습니다. 그럴 적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쓴 물을 달게 했고 만나를 내렸고 또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말렉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여호와 전쟁에서 얻어진 부산물로 이스라엘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용사로서 친히 싸우신 전투는 비거룩에 대한 거룩의 승리입니다. (15:3,13,17) 따라서 출애굽기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관된 사상은 여호와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들도 거룩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거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사상이 전 공통체 내에 확산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영향을 받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같은 이방정치를 모방 도입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제도행정 계열보다 전 백성이 공히 계열에 따라서 다 거룩하고 제사장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19:4-6, 22, 24) 여기서 말하는 거룩이란 언약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19:5) 그 언약이라는 것이 십계명과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 강령들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들의 삶의 원리는 前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20: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활을 통해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즉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종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종으로서, 사람들끼리는 다 같이 종된 형제로서 삶의 양식을 갖추기를 십계명은 요구합니다. 우리 모두 꼭 같은 처지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 위치에 오기까지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예로 약자 보호법이 있습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 여호와의 관심은 자비로 나타나는데 (22:27) 그 이유는 너희도 전에 같은 처지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22:21/23:8-9) 오직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만이 공동체 지탱의 원리로 개입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정신이 상실하여 도적질하거나 탐내거나 이방 풍습을 흉내내는 자는 가차없이 언약에서 제거됩니다. 모세는 소를 제물로 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난 뒤에 그 피를 양푼이에 담아 언약을 적어 놓은 책과 백성들을 향해 양쪽으로 분리하여 뿌리면서 이 모든 말씀으로 인해 언약이 이스라엘과 세워졌다고 합니다. (24:5-8) 이는 무엇이 거룩한 나라며 제사장 나라며 또한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인지를 보이는 약속의 언약입니다. 누구든지 이 언약 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혈통과 상관없이 언약의 민족이 됩니다. 십계명과 약자 보호법은 구원의 은혜를 묘사하는 표현방식입니다. 이 언약 안에 있는 자가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과 안식은 유지됩니다. 언약의 피란 헌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양쪽을 화목케 한 소의 피를 두고 말한다면 그 소피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은 돌판을 만들어 주겠다고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릅니다.(24:12) 거기서 40일 동안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을 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십니다.(25:8) 이는 산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 가운데 기거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주어지게 될 증거판을 담을 속죄소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 장막을 만들게 됩니다. 장막은 그 속죄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거기에다가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에 대한 복장이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식일을 강조함으로 이 성막이 안식과 연관 있음을 보이고 모세에게 증거판을 제공합니다. 즉 다른 것은 다 산 밑에서 인간에 의해 제조되지만 증거판만큼은 산 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만들므로 말미암아 산 위의 거룩과 산밑의 비거룩과의 화합을 시도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증거판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깨뜨려집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 거룩한 돌판과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최선책이었습니다. 거룩을 깨뜨려서 비거룩을 보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자신의 언약 속에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거룩이 그들 속에 들어갈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언약이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 밖의 존재가 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 점을 염려한 모세가 자신의 백성의 죄를 대신 하겠다고 나섭니다.(32:30) 하나님은 너희들끼리 가고 나 여호와는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단독으로 장막 안에서 여호와 와의 은총을 근거로 하여 베풀 것을 요구합니다.(33:12-14) 하나님은 모세에 대한 은총과 자비를 확산시켜 모세처럼 은혜 베풀자와 자비를 베풀자를 위하여 모세로 통해 돌판을 친히 제조토록 해서 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거기서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기록해 주셨습니다.(34:28)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언약의 위반이 곧 죽음인 것을 말해주고(35:2) 성막 만드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는데(40:35) 이는 모세에 대한 은총과 자비가 현실화된 것입니다. 즉 은총과 자비의 하나님이 모세에 대한 자비와 은혜를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만이 본 영광을 다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8:18) 현 상태의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실패 후에는 모세의 실패를 딛고 나타나는 새로운 모세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은 규정됩니다(신명기 5;1-6).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자신을 중간에 내세웠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3. 레 위 기

 

레위기에서 중점을 두어야 될 문제는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받았던 계시와 장막에서 받았던 이 레위기에 나타난 사실에 (1:1/출애굽기 40:24)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했다면 구태여 성막이 필요 없을 것이고 홍해 건넘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시내산의 계명과 성막 안에서의 계명 사이에는 성막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성막의 목적이 밝혀져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막은 법궤를 핵심으로 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동거의 목표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의 준수와 성취에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는 가나안 땅에 있는 죄악의 무리들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법궤의 이동은 바로 이스라엘의 원수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법궤가 시내산에 떠날 때 모세가 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수기 10:35)

이렇듯 법궤가 정복용이라면 법궤의 그 존재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제사제도가 병행되어 있는 것입니까?(실제로 흡니와 비느하스는 그렇게 여겼습니다. 사무엘 상 4:3-10) 여기에 레위기 계명의 본질이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되려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법궤의 존속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포 중에 경험했듯이 인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룩한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 분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죽음이요 심판입니다. 속된 것은 근처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레위 언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속에 자기의 거하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조치임이 드러납니다. 거룩이 이스라엘 사회 속에 침투했을 때 이스라엘 사회가 어떤 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를 여호와로부터 사전에 지시 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1) 만약에 사전에 준비가 없다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거의 비거룩성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없게 됩니다. 거룩과 비거룩의 관계의 절단을 해소하는 방안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목입니다. 화목 되지 않는 상태에서 동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긴장을 해결하는 것이 제사제도입니다. 시내산 계명 자체가 갖는 엄위성과 정결함은 스스로 그 속성을 취소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속에서 한껏 만족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 점이 달성된다면 거룩이라는 입장에서 비언약 계통의 민족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제사제도는 이 취지에 맞추어 실시됩니다. 즉 비거룩한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으로 만들어 버리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은 출애굽기 24:4-8 에서 실시한 약속 위에 시행되어 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속건제, 속죄제가 빠져있음. 그 이유는 여기서는 아직 죄 문제가 거론될 시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를 양푼이에 담아가지고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을 뿌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언약대로 되지 아니하면 생명을 상실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죽음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 대한 온전한 헌신만이(번제) 나중에 여호와와 화목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화목제) 그래서 레위기의 제사제도는 번제로부터 시작해서 화목제로 끝이 납니다.(1장-3장) 이것이 이스라엘과 여호와간의 언약입니다.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다시 정리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입장은 他意에 의해 일방적으로 언약 안으로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왜 우리만 제사 드려야 하느냐 라는 질문이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출애굽 24장에서는 제사가 번제와 화목제 둘로 나왔지만 만약에 여호와께서 금하는 명령을 어겼을 경우에는(4:1-3) 속죄제를 우선적으로 추가해야 하는 것입니다.(속죄제로 시작되는 경우가 또 있는데 이는 제사장 위임과 관련될 때입니다. 출애굽기 29장/레위기 8장.) 제사장을 세우고 그에게 기름을 붓는 제도는 일년에 한차례 온 백성의 죄를 위한 제사를 위한 것인데(9:1-7/16장) 위임이란 백성의 죄를 위탁받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밖의 백성들은 제사장이 하는 제사행위에 함께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명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衣, 食, 住, 생업, 이 모든 방면에 걸쳐 다 적용됩니다. 옛날 노아 때 노아가 방주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을 함께 실어 구원이 어디서부터의 구원인지를 깨닫게 해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는 비거룩으로부터 구원되어 정결하고 거룩하고 구별된 남은 자라는 의식을 갖기 위해서 음식 하나에서부터 모든 접촉되는 것에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11장-15장, 17장, 20장) 뿐만 아니라 십계명이 조직 내에서 어떻게 확대 적용되는 지를 보여 주는데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전부가 이스라엘이 결코 이방인들과는 같아서는 안된다는 측면에서 준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18:3) 그런데 그 10계명이 명확히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희년사상 하나로 집결됩니다. 희년, 그 해는 안식일의 완성의 모습을 가지면서 가난한 자와 종들과 기업이 없는 제사장에게 기업이 돌아가는 해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은혜와 은혜로만 통용되는 법칙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가나안 땅은 땅만이 가지는 고유한 축복 즉 번식과 풍요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26:14-33) 하지만 이 언약을 지킨다면 여호와께서 약속한 복이 제공될 것이라고 합니다.(26:1-13)

이와 같이 레위기에 담긴 율법의 의미는 생명과 죽음이란 단순한 목숨 유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연 여호와의 것에 참여되는 관계인가 아닌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면의 실체입니다.

 

4. 민 수 기

 

자신들을 자기가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부터 인도함을 받으므로 언약 공동체의 주체성이 살아난다는 것이 민수기에 실린 내용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20세이상 남자의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데 이는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의 시작입니다.(1:3) 적들로부터 이미 벗어난 마당에서 새롭게 또 싸워야 하는 존재로 바뀐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왜 적들은 그들을 방해하며 왜 이스라엘은 그들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그 적이란 누구를 뜻하는 것입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민수기의 내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적합하지 못해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의 주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원수란 바로 그런 자들과 꼭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자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외부의 적과 대면하기 이전에 내부의 적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레위인은 計數에서 제외되는데 그 이유는 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법궤를 잘못 취급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습니다.(1:53) 그래서 이스라엘 스스로 자기를 치기 위한 군사가 아니라 외부의 적을 치기 위한 군사입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군대 조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목적하는 바에 의해 그 인간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싸우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자신의 언약 공동체에 담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싸움하시는 여호와” 像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의 표상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뱀의 후손과 더불어 투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거룩한 분으로서의 싸움이기 때문에 정결과 거룩의 유지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5:1-8:26) 이스라엘의 거룩의 중심은 성막인데 그 안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일하기 때문에 (8:10) 거룩을 유지해줌으로 성막 가까이 할 때 재앙이 없도록 방지해줍니다.(8:19) 이러한 정결이 유월절 정신과 이어질 때 부정으로부터 벗어남의 유월절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을 극복하는, 다른 말로 말해서 타인을 구원하는 유월절 정신을 유지하게 됩니다.(9:1-14) 하지만 행군 도중 그들은 원망과 불평이 이어집니다.(11:1-3) 그 때 여호와의 불이 진 끝에 떨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점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행군 속에 여호와도 함께 행군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일인지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공포와 정결만으로도 지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비로소 꺼졌습니다. 중보자의 기도 아니고서야 어찌 그들이 살수 있었으리요! 만나 이외의 다른 음식에 대해 탐을 내니 여호와는 1개월간이나 고기를 줍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말씀하시기를 모세만이 이스라엘 전부를 맡기지 아니했다는 증거로 70인 장로에게도 여호와의 신이 내립니다.(11:25) 이와 같은 사실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이 그들을 인도함을 모세가 알게되어 모 백성들이 전부 신에 임하기를 원합니다.(11:29)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추구하는 바가 어떤 인간됨을 드러내는가와 관계 있습니다. 그것은 중보자적 기능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11:27)/12:8)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 접경에 도착하여 정탐꾼을 내 보내었지만 돌아와서 보고하는 내용은 여호와의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정탐꾼들의 반발은 그 땅을 지키고 서 있는 민족이 강하고 城은 견고해서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보고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여호와께서 그 땅을 탐지하라고 하셨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13:2)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누가 자기와 함께 있는지를 잊고 있고 다만 갈렙만이 그것을 염두에 둡니다.(14;9)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함께 있어도 여호와와 격리된 채로 행군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납니다. 가나안 땅 정탐의 의미는 여호와와 약속한 땅이 얼마나 좋은 곳이냐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왜 그 땅을 꼭 여호와께서 미리 약속을 전제로 하고 들어가는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이지만 여호와의 약속은 그 한계를 뛰어넘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 위함입니다. 즉 약속, 특유의 실현성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얼마나 신뢰를 가지고 있느냐를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는 단순한 神이 아니라 약속을 던져 놓고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神인 것을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 약속한 바에 참여될 수가 있습니다.(14:24) 전쟁은 여호와가 하십니다. 법궤가 움직이지도 아니했는데 그들이 쳐들어 가다가(14:44) 가나안인에게 패하고 맙니다. 여기서 그들은 정결과 제사의 본질을 새롭게 음미해야 합니다.(15:1-41) 여호와는 땅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자신이 거주할 수 있는 무리에 최종 관심이 있습니다. 거룩이란 단순히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하는 게 다가 아니라 자신을 여호와의 것으로 제공하는 것이 진정 거룩을 아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약속이 자신에 침투하여 자신을 사로잡아서 자신이 여호와의 거할 처소가 되어지는 것이 곧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달리 약속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그 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이란 약속을 확인해 주는 증거로만 작용합니다. 그 후 여호와께서는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를 헤매면서 그들을 언약의 공동체로 만듭니다.(14:34) 그 언약의 완성은 이스라엘의 죄상을 스스로 책임지는 그 바탕 위에서 성사되기에 그러합니다. 그 책임이 다 되면 재 언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신명기5;1-6) 그럴 때 언약이 갖는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질 것입니다. 심판 당한 경험을 함유하고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 언약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참된 정결이며 거룩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여호와께서는 선택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언약의 속성 때문에 중보자적 직능을 수행케 하기 위함이었지 인간적인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16:4,45-48/17:5/신명기5;5) 언약이 존속, 유지되려면 바로 여호와께 선택받아 심판과 용서의 두 내용을 늘 전달해 줄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줄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 모세도 완전치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을 때 아직도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여호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이란 그들의 이미 알고 있는 방법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 방법만이 아니라 반석을 명하는 그런 것은 모세와 아론이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아론과 여호와 사이에 일치성이 깨어지게 됩니다. 이는 중보자직 수행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인도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모세는 아랏의 왕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이시면 이스라엘이 승리할거라고 기도합니다.(21:1-3)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들게 합니다. 여호와께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승리가 항상 여호와께 있음을 또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승리치 않고- 놋뱀을 (이미 승리했음의 표시) 쳐다보는 사람은 살 수가 있었습니다.(21:8-9) 그후 이스라엘에게는 계속적인 승리가 이어집니다.(21:32, 22:2, 25:17, 31:1-12)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이러한 승리를 두려워하여 선지자 발람 보고 저주하라 하지만 여호와의 약속은 그 누구도 변개할 수 없습니다. (23:20/24:5-9,17-24) 발람의 예언은 모든 이방신도 여호와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가 바알브올에게 미혹되니,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이스라엘에서 제거해 버립니다.(25:1-9) 그리고 난 뒤 새로운 세대를 계수를 하니 이는 여호와의 전쟁이 무엇인가를 아는 백성들입니다.(26:65) 이 계수에 따라 기업이 분배됨으로 레위인은 그 계수에 포함되지를 않는 것입니다.(33:54) 기업을 주는 이상 이 기업에 관한 규칙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基業이란 각 지파마다 야곱의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상속의 정신 하에 주신 것으로서 이 증여의 의미가 제거되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他지파에게 줄 수 없고 본 지파에 전수해야 합니다.(27:1-11) 여호와가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되고 난 뒤 (27:12-23) 다시 한번 제자와 절기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드디어 땅 분배에 들어갑니다. 이미 약속을 믿는 그들에게는 정복 이전에 자신의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5. 신 명 기

 

이스라엘의 존재는 여호와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 신명기에서 압축됩니다. 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1:8) 이스라엘로 하여금 꼭 그 땅을 얻게 하시려고 하는 것은 언약의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세가 처한 입장은 그 많은 백성들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었습니다.(1:9) 홀로 질 수 없는 지파의 두령들을 세우고 천부장을 뽑은 것입니다.(1:12-15) 모세와 더불어 그들이 해야 될 일은 모세에게 준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고, 그 율법을 준수할 때 비로소 언약의 공동체로 존속되는 것입니다.(1:18) 그러나 여호와의 능력을 멸시한 쪽으로 돌아섰고 유월절의 정신의 상실이 나타났습니다.(1:31-32) 그러나 여호와께서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자체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여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러 약속된 땅을 마주보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입니다.(3:25)

여기까지 와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 유지되려면 여호와가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그대로 행하는데 있습니다.(4:4-8) 왜냐하면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4:23) 약속 밖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열조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자비의 약속임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4;24-31) 그 자비가 권능을 베풀어 애굽에서 나오게 했으며 함께 있어도 이스라엘이 생존할 수 있었으니 모든 율법과 규례는 이 여호와의 자비를 제대로 이해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4:32-40)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건져낸 자들을 여호와의 언약을 준수하기 위한 자들이었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그런 자들을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6:20-25) 그 규례와 법도에 담긴 뜻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고 또 각양 기적을 받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다른 민족 보다 수효가 가장 적은데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인들까지 정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7:1-7) 그것은 여호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은 이런 사랑의 베푸심 위에서 사랑을 배워나가야 되는 것입니다.(7:8,12-15)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확실한 반응은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민족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진멸하는 것으로 나타나져야 합니다.(7;16) 그들을 두려워한다든지 그들의 數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면 애굽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이적과 사랑을 거부하는 셈이 됩니다.(7:14-26)

이와 같은 여호와의 이스라엘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보는 세상관과 같은 세상관을 가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지난 40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훈령을 받았습니다. 만나를 끊임없이 내려준 것도 모든 승리는 결코 이스라엘이 잘해서 승리 한 것이 아닌 것을 보이게 함입니다.(8:16-18) 모두가 여호와의 의로움 때문입니다.(9: 4-6)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낮아진 마음으로 여호와의 계명에 순종해야 되는데 특히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전에 애굽에 있을 때도 같은 신세임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셈이 됩니다.(10:18-19) 이와 같은 명령은 모든 규례에 모두 적용이 되는데(24:14-22), 그것은 모든 절기나 제사법이나 가정생활, 정치제도에 있어 앞으로 들어가서 살 땅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제도와 풍습과 불일치를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민족으로서 유월절 정신이 살아 있기에 여호와의 사랑에 근거한 이웃사랑으로 충만한 사회가 되어야합니다.(14:28-29/16:14/24:17-22/26:12-13) 결국 이와 같은 철저한 율법에 대한 순종요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基業으로 삼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32:9) 여호와는 그들 편에 서서 복수하시고(32:35) 그들을 여호와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33:27) 이제 12지파 모두가 복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복은 이스라엘이 잘한 것이기보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셔서 그런 것입니다.(33:3) 이제 이스라엘이 미래의 역사는 이 기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29:15)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28:1-14) 만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되고 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아니합니다.(28:15-62) 하지만 다시 마음을 돌이키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저주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다시 모아서 약속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답니다.(30:1-4) 그래서 여호와가 사랑하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 영원히 존속됩니다.

 

 

 

<모세오경 보충편>

 

6. 창 세 기

 

창세기 1장

성서의 중심사상을 하나로 잡는다는 것은 어렵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경험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경험들이 하나의 공통적인 확신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 때문에 중심개념에 대한 기대 또한 버릴 수가 없다.

그들이 본 것과 느낀 것과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같이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신앙이라는 점에서 어떤 동질성을 형성해 보고자 하는 시도 곧 성서해석 작업의 한가지 목적이 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이 우주에 무엇을 남겨 두었나 하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절대자의 창조사역은 단순히 창조작업 그 자체만을 위한 기록일 수는 없고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근본적인 기초의 구실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성서에서 보면 어떤 질서를 갖추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 질서는 또한 본래 창조의 목적을 지향한 질서이다. 따라서 이 창조질서가 만약 붕괴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구속사역의 동기가 될 것이다.

창조가 말씀대로 그대로 시행됨으로 창조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만족스러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씀이 우주질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기에 만약에 창조질서가 붕괴되었다고 했을 때 그 회복은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차원에서 시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질서는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최종 만족상태 즉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사역을 쉬게 될 때까지 지속되는데 그 최종만족 상태는 마지막에 창조된 피조물과 관련 있다.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이고 그 인간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데는 한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소극적으로 다른 피조물과 차이나는 점이라는데서 파악될 수 있고 적극적으로는 그들에게만 특별히 부여된 사명과 상관 있다. 어쨌던 하나님의 형상은 존재론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다루어야만 된다. 만약 존재의 유비로 생각하면 인간은 지상의 작은 신이 되어버리며 ‘우리의 형상’이라는 복수의 개념이 단일체 안에 집결되는 식이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얼굴형이 진짜 표준형 미남(?)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천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을 인간을 통해 시행하겠다는 의지로 보여진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 못했을 때는 단순한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에 대한 합당한 응분의 책임을 묻게 된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그 결과 초래된 죽음도 이에 해당되는 실례가 될 것이다.

어쨌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는 원래 창조의 모습은 전혀 하자 없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선언의 8배후에는 만약 이후의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정신세계와 교회가 혼란에 처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본래의 인간이란 하나님에게 책임지는 인간을 말하는 8것이지 신이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신과 같은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한탄하고 말세를 부르짖는 자는 많아도 누구도 이것을 책임지고자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다.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일한 치유책인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등에 짊어지고 저주받은 세상에 등장하는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신다. 바른 인간이란 중보자적 사명을 인식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 그 자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형상이 세상과 중보적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여호와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호칭은 여호와란 신명(神名)이 가지는 독특한 기능을 소개하는 구실이 되는데 그 기능이란 구원사역이다.

그런데 이 구원사역은 단순히 창조, 타락 그 이후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신명의 등장 자체가 구원사역의 시발점이 된다. 그분에 의한 성령에로의 창조 또한 구원사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이란 창세기 2장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구원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은혜이다! 그리고 그것이 목표이다. 타락과 죄로부터의 헤쳐 나옴만이 구원으로 이해해서는 아니되고 은혜가 충만한 세계에로의 도착까지도 내다보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을 인간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으로 풀이하게 되면 구원이 단순히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임시조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안에서 창조와 통합될 수 있다. 어쨌든 은혜로부터 출발하는 구원사역은 항상 무엇과 대립되는가 하면 선악체계와 충돌한다.

애초부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선악체계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상관해서는 안되는 바깥세상이었다. 선악은 인간의 고유요소가 아니다. 만약 개입한다면 그것은 이질요소가 되며 그 체계에 따른 응분의 책임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죽음이란 불의의 사고든 아니면 건강상의 이유이든 간에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금지조항을 위반했기에 벌이라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구원과 상관없는 해석이 된다. 구원사역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창세기 2장의 끝을 장식한다.

여호와께서 생명과실 이외에 인간에 또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게 있는데 그것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그녀를 자기가 만들 수 없었다. 그 시간 그는 잠자고 있었다. 주어진 자기의 배필을 보고 아담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당신은 완벽한 또 하나의 나요」 그는 그녀를 타인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또 미완성된 나의 반쪽도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은혜의 결과로 생긴 새로운 인간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몸」이라는 개념이다. 육은 멸하여도 몸은 영원하다. 몸은 여호와의 고유권한에 속한 문제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은혜사상이 놓여있다. 두 사람이면서 한 몸이 되는 이치를 우리는 무어라 속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다. 사도바울도 에베소서에 그랬다(에베소서 5:32)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해야 하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한 몸도 가능할 것이다. 무어라 설명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줄로 우리는 믿을 뿐이다.

오랫동안 신학계는 창조와 구원사이에서 어느 쪽에 우선권을 둘 것이냐에 대하여 고민하여 왔다. 창조 회복을 위한 구원이냐, 구원을 위한 바탕으로 창조역사냐 하는 것이다. 만약 창조에 비중이 주어진다면, 복음 전파는 신학적 언어에서 정치적 언어로 바뀌게 되고 聖․俗의 구분은 무의미할 것이다. 반면 구원에 강조를 두게 되면, 우주라는 피조세계 자체가 악이 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우리 성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야 한다.

선과 악은 그 존재 자체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모든 악도 선으로 바뀌게 하며 반면, 선하다고 여기는 것도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되면 둘도 없이 속된 것으로 봐야 된다. 내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내가 긍정적으로 쓰여지느냐가 중요하다. 교회의 가치는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사역으로 결정됨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창세기 3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뜻밖에 뛰어든 피조물 하나가 있었다. 그 지혜를 가진 뱀은 인간을 치명적인 상태로 이끌고 말았다. 인간은 뱀과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의 지시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을 모색한 그들은 그 방법이 하나님이 금지한 그 무엇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말씀에 매여 있는 존재인 줄 알지 못했다.

벌거벗음이 수치가 되는 경우는 한 경우밖에 없다. 그것을 낯선 것으로 간주하는 자신의 비정상적 상태에 있을 때다. 이것은 비 본래적이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숨을 곳을 찾으려고 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그의 거처가 새롭게 마련되어야 했다.

인간이 추방당한 곳은 그전 같지 못하다. 가시와 엉겅퀴는 새로 돋아났다. 이것은 저주받은 땅의 본질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책무는 취소되지도 않는다. 경작할 때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자식을 생산할 때 고통이 따라와도 인간의 고유한 삶의 터전만은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아담은 실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해 영생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는 여기에 희망을 걸고 아내를 생명(하와)라고 불렀다.

땅은 땅이로되 약속이 성취되어질 배경으로서 땅이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땅이다. 또한 이 땅에서는 약속이 말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 부딪기는 생존의 전쟁에서 약속은 피어난다.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그분의 얼굴은 우리 중의 누구보다도 더 상하였고 더 형편없으니 과연 우리들은 예상 밖의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구나!(이사야 52:14-15)

이처럼 약속이란 인간사회에서의 극도의 비극 안에서 발견되는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 비극을 기쁨으로 극복시킬 때 분명히 2나타난다. 고통을 모르는 자는 은혜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행운과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모든 고통과 죽음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여기지 않고 남 탓으로 돌리는 자에게는 약속은 헛수고의 결과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약속은 그 누구편도 아니다. 약속은 무상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유산이다. 세상살이에 여유가 있고 구태여 하나님께 기대지 않아도 살만큼 산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약속은 노리개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날마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자들에게는 오직 은혜의 약속이외에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하나님은 쫓겨가는 인간에게 짐승을 잡아 옷을 만들어 입혀줌으로서 그들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인간이 영원토록 비본래적 존재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안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는데 그 지킴은 인간이 약속을 이해할 때까지이다. 약속,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역사를 해석한다. 오직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모든 창조물은 존재하고 동원된다. 온 천하보다 더 값진 것은 약속 안에 있는 생명이다. 여기에 교회는 모든 대가를 지불하자! 마치 예수님처럼.

 

창세기 4장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투쟁의 두 주체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땅이라는 공통된 배경 하에서도 각기 다른 원리를 준수하며 살아간다. 온 피조물들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로마서 8:19) 그러나 그들의 나타남은 이 땅에서 거의 예외없이 순교적 운명을 짊어지고 살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출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선택이란 순교를 위한 선택이란 말인가?

두 가지의 아담形이 등장한다. 이것은 두 가지의 표준적 인간형이다. 이 나뉨은 인간 쪽에서 결정 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본인과 제물을 동시에 받고 안 받고의 여부로 밝혀진다. 제사를 어떤 식으로 드리느냐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거부하기에 그 인간이 행한 모든 것도 거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가인이 어디가 잘못되어서 하나님께 거절당했는가에 대해 모른다. 또 거기에 대하여 관심 둘 필요도 없다. 다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에게는 죄를 항거할 만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악은 그를 점령했고 애초부터 선을 향한 바램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善이란 하나님의 의사결정에 대한 옹호를 말한다. 즉 선택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것은 선이 될 수 없다.

동생에 대한 사랑은 먼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호응이 선행되어야 한다. 동생을 살해한 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최고의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을 無로 돌리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이웃사랑에 대한 무관심은 이웃이 거기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결정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자기 스스로 이웃을 선정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이 나에게 주어졌을 뿐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가인이 보여주는 인간형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독립을 허락하되 땅에서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추방하려고 한다. 여기서 가인은 독립과 보호라는 상충되는 원리 안에 자리잡으면서 실존적으로 모순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복수자로부터 보호하지만 그에 대한 보호는 그의 인격의 가치성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보복할 수 있는 만큼 자격이 되는 자가 없음을 보이려는 기능적 효과를 노린 보호였다. 진정한 보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그것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씨, 즉 셋의 가문을 낳게 하므로 죽은 아벨의 피를 갚을 준비를 갖춘다.

선택자에 대한 비선택자의 공격은 용납되지 않고 보복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내린 약속이 시행되는 순서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약속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인 여호와의 일관성에 대하여 그 이름을 찬양하면서 신뢰함을 고백한다.

찬란한 문명, 한 걸음 진보된 문화 개척자인 가인의 후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땅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며 땅으로부터의 주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

땅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 것을 내놓고 세상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해서는 안된다. 권력이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서도 안된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을 따라서 선한 싸움하다 순교에 이르는 것, 이것뿐이다. 세상은 잠잠해도 돌들이 증인이 되어 들고일어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창세기 5장

죽은 아벨의 피에 대한 복수전이 전개되는 것은 5장부터이다. 그 복수는 아벨 대신 하나님이 주신 자식인 셋 가문을 통해 수행된다. 이 복수는 무엇과 연관되는가 하면 땅의 휴식과 관계된다. 땅 위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무질서와 부도덕은 자연질서와 결코 무관한 게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의 호소는 반드시 하늘까지 도달된다. 하나님은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감찰자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위해 억울하게 순교한 자의 피를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9필히 갚아주신다. 아담에게 내린 약속은 가인 노선이 아니라 셋 노선을 따라 진행되는데 그 약속은 아담이 범죄 후 지니게 된 하나님의 심판의 징표도 함께 지닌 체 대대로 이어진다. 그 징표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약속의 전달이라 셋의 후손에서는 단순히 말로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종말로 말해준다. 1000년 가까이 수명이 접근하지만 그러나 죽음이란 한계는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에게 종말이 개인적으로 각자 주어졌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약속의 외부 개입의 그 절실함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그 증거가 아담의 7대손 에녹이다. 에녹의 실존은 죽음의 실존과 대비를 이루면서 약속의 목표를 바라보도록 해 준다. 그 약속의 목표는 억울한 자에 대한 피의 복수이다.

에녹의 행적은 모든 다른 선조들이 살아 생전에 확인할 수 있는 연대에 들어가 있으며 노아를 제외한 모든 후손들도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것에 대하여 알 수 있던 연대에 속한다. 이러한 사실은 셋의 모든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의 한계 속에서 그 한계를 깨뜨리고 죽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다가옴을 이해하게 만든다.

약속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다. 죽음이 무서워서 해야할 일을 못한다는 것은 약속을 믿는 자의 태도로서는 적합치 못하다. 만약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면 실제적으로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다.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그 약속 안에 있다는 실존 때문에 당연히 적이 있다. 그 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자가 된다. 약속을 가운데 두고 두 진영은 서로 대치되어 있고 서로는 서로를 잘 알아본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의 모든 선함과 착한 의지를 집대성하여 창안한 종교가 아님이 파악된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인간 세상에 균열과 파장이 생기게 하는 종교이다. 통합이나 일치란 무조건적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제한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도 ‘약속 안에서’이고 하나님의 거룩도 오직 ‘약속 안에서’이다. 기독교는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지만 결코 인본주의는 될 수 없다. 또 인간들끼리 대규모 집회를 열어 신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이것으로 인해 영생에로의 참여가 가능하다.

에녹의 다음 자손인 므두셀라는 정확히 그의 이름대로 ‘그 심판의 나라’까지만 도달되도록 이 땅에서 산다. 선지자 에녹 이후 모든 정황은 그 심판의 나라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오직 에녹의 일생을 모르는 노아만이 심판에서 죽음과 부활을 새로운 약속 차원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에녹과 손자 라멕의 수명은 갑작스럽게 수명이 900대에서 700대로 떨어진다. 즉 노아만이 경험해야 될 것에서 그를 제외시키기 위함이다.

셋의 가문은 등장된 인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하여 생존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꿈을 성취하기 위해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보여주며 살아야 된다. 우리들이야말로 에녹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자들이기 때문이요 그럴 때만이 이 악한 세상도 희망을 갖게 된다.

 

창세기 6장

심판의 당위성은 확실하게 인간의 범죄에 있다. 이러한 성서의 주장은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결코 묵과하거나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의 시발점을 하늘과 땅의 요소의 혼합에 있었다고 말하신다. 온전히 대치되어야 하는 것끼리 서로 섞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신적인 것에 가미된 기형(畸形)적인 사상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고대시대에 명성을 날리는 용사요 거인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요소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못된다. 오히려 자체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창조취지를 재 천명할 필요를 느끼셨다. 결코 죄악을 행사하는 인간은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분명 생령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육체가 되어 있다. 그들의 생존은 길어봐야 12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단명은 그들 세계에 하나님이 어떤 의도에서 급작스럽게 개입했음을 시사한다. 그들의 죽음은 단지 자연사가 아니라,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또 다른 관심은 노아라는 개인에게 특별나게 발휘되고 있었다. 하나님은 죄악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그 취지를 노아의 운명에다 담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영원히 인간세상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되게 하셨다. 이제 새로운 질서는 노아가 보여주는 일생 속에 담겨 시작이 된다.

노아 안에 새로운 질서가 배태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중심의 세계이다(또는 계약) 아담에게 말하신 그 약속이 이제 언약이란 구체적 형식으로 인류역사 안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언약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노아가 당대의 완전한 자요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노아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그 의인과 다른 이의 죄악을 대비시킨다. 노아는 사실 하나님의 작품이었고 그 작품을 가지고 언약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듯 언약은 심판을 전제로한 언약이요 하나님의 ‘쓸어버림’ 가운데서도 살아남기 위한 언약이다. 저주와 멸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언약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하나님의 진노를 전제로 하지 않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종말과 끝날을 앞둔 언약이기에 언약 안에 있는 자는 항상 종말 안에 있는 자가 된다. 그들의 등장 자체가 곧 종말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했는데 방주제조는 심판에 동원되는 수단을 암시해주는 동시에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새롭게 시작될 세계에 살림마련을 위한 조치도 된다. 하나님은 어디서부터 빠져 나오는 경험을 토대로 새 세계를 건설하고 난 뒤에도 구원의 요소를 제거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이란 새 창조의 영원한 본질로 남는다. 구원을 위한 언약이 그 재료가 된다. 즉 노아는 새롭게 정비될 땅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는 것이다.

이후의 모든 육축과 새들은 노아의 혜택을 입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며 다시 홍수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말할 것도 없이 노아의 혜택을 결과이다.

이렇게 생명이란 노아의 은혜가 함유되지 않는 생명은 없다. 많은 이방인들은 그 모든 은총을 자기 조상이나 해와 달과 별과 기타 크고 힘센 짐승이나 신기한 자연물에 돌렸다. 이것은 당연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아 언약의 혜택 속에 있으면서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외부로부터 한시라도 도움을 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도 남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 할 책임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좋은 것은 자기 탓이요 나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은 결국 하나님까지 거추장스러운 분으로 간주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편리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또한 교회라는 조직체를 위한 분도 아니라 다만 그분의 은혜에 모든 것으로 응답하는 그들이 바로 진정한 교회이다.

 

창세기 7장 - 8장

홍수가 시작되기 일주일전에 미리 노아 가족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므로 노아로 하여금 미지에 대한 견고한 신뢰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방주 안에는 노아 식구 이외에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동승해 있다. 많은 짐승들과 새들을 생각할 때 유독 주목을 끄는 점은 하나님의 이러한 구별조치이다. 거룩과 비거룩이 방주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방주가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 안에서도 지탱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 있는가?

나중에 방주 안에 있는 생물들이 토하듯이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의 생존은 어디에 근거하여 유지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이 함께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이유는 방주가 지니는 구원의 의미를 새겨주기 위한 조치였다. 즉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와서 행한 제사에서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아 제사 드렸다는 것은 정결한 것의 희생과 헌신으로 부정결한 것까지 구원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향긋한 제물의 냄새를 하나님이 맡으시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신다. 인간이란 날 때부터 악하니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노아가 바친 제물의 정결성으로 인하여 다시는 이 세상을 그 전처럼 저주하지 않겠다. 다시 자연의 질서는 회복되리라!

노아 언약이란 인간의 비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 땅은 함께 고통 당했는데 땅의 중보자라고 할 수 있는 노아의 등장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하지만 그 언약실행에 있어 정결한 짐승의 죽임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언약의 모든 의의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희생이 없는 사랑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희생된 자는 같은 비거룩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비거룩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이다. 거룩하기에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장래 나타나는 모든 언약의 정형(定形)이 된다.

언약이란 단순히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여기지 말자 언약이란 하나님이 우리 죄악된 세상 속에 자기자리를 마련하는 조치다.

비거룩으로 인해 저주받은 그 자리를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또 찾아오신다. 꼭 그렇게 해야 되시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곁에 두고서도 그것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완악하며 자기 힘으로 비거룩을 극복하여 이 땅에서 위대한 존재로 군림하려고 한다. 이 모든 시도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타락된 아담의 형상을 날 때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사상은 그것과 철저히 대립되고 상충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손을 내밀며 부르짖는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은 극대화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다.

인간들은 죄악된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하나님과 함께 동참되어야 한다. 그 고통은 인간의 죄악으로 일그러진 세상과 왜곡된 진리관으로 배척되어 나타난 현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정신 때문에 예수님과 상응하는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러한 고난의 모습으로 교회가 존립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중보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교회의 본연의 자세를 회피하는 식의 목회가 눈에 띄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권력으로 이 고난을 자기 쪽에서 해소 시켜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고난 없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가르친다. 고난이 오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하려고 하고 반대로 고난이 없이 만사형통한 것을 하늘이 가져다 준 축복이라고 의식화시킨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에게 밟힌다는 엄연한 사실이 현실화되는 때가 바로 교회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때이다. 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또 다시 못박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창세기 9장

방주 밖의 홍수에서의 구원이란 사실은 이미 방주 안에서의 구원의 결과일 뿐이었다. 초자연적인 것을 눈에 드러날 때 와서 비로소 깨닫는 것은 이미 구원을 위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저주하는 초자연적인 것이 되고 만 후의 일이다. 노아는 구원의 의의를 이미 방주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고대했다. 비둘기가 입에 물고 온 감람나뭇잎은 결코 옛날의 감람나뭇잎이 아니다. 옛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노아 언약에 의한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방주 안에서의 삶은 무지개 안의 삶의 형태로 바뀌었다. 새 세상은 무지개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그 무지개의 원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새로운 세상은 비록 전까지만 해도 저주의 피를 머금은 땅이었지만 이제는 물로서 씻음 받은 은혜의 세계라는 것이다. 만물은 다시 활기를 찾아 번성하고 생육하지만 그 모두는 물로 씻겨진 세상(무지개는 하나님의 영광)안의 생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생명에 대하여 조심해야 될 권고를 받는다.

모든 것이 노아에게 더욱더 밀착되어 종속되며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이 그만큼 노아에게 은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음식물로도 바쳐져야 한다. 어쨌던 이제부터 번성하고 충만한 피조물은 처음 창조 때의 산물은 아니다.

철저한 노아 종속 시대의 출범은 그 속에 하나님의 자기 약속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한 조치이며 이후에 인간과 자연이 누릴 모든 혜택은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 체결된 영원한 언약에 그 근거를 두고 주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가족 가운데 이러한 땅의 속성에 위배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아버지 노아에 대한 수치를 공개함으로써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성을 모독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함을 자신들의 옷으로 덮어줌으로써 노아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성을 행위로 고백했다. 노아는 잠에서 깨어나 이 되어진 사실을 알고 그가 알고 있는 땅의 원리에 입각하여 가나안과 함에게 저주를 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란 언약성취에 부정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번성과 확산이다. 즉 이렇게 해서는 벌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민족이 된다 반면 셈의 하나님께 찬송한다. 셈에게 그런 바른 것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셈과 야벳에게 축복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축복이란 이런 행위를 하는 자는 이 땅위에서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후손의 번성을 두고 말한다.

하나님이 애초에 선언한 약속은 노아 후손에 와서는 함과 셈의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장차 함의 후손인 가나안 민족과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사이의 가나안 땅에서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는 노아가 예언한대로다.

노아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또 다시 홍수심판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마음놓고 죄악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것을 가르쳤는가?

초자연적인 것은 이미 자연적인 현상 속에 낮아진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를 알고 그 진리의 확산과 전체적인 통치의 날을 고대하는 입장과 노아의 은혜를 배제한 채 모든 것을 자기 힘의 소산으로 간주하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내리신 자연의 선물을 당연시하는 무리 사이의 역사가 다 될 때까지 투쟁은 쉬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노아의 안목으로 자연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노아 언약에서 야기된 필연으로 여겨질 때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들은 결코 외로움을 모를 것이다. 땅위에 사는 자들은 먼저 땅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있을 때 그들을 통해 구세주를 파견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만이 이 원리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삼라만상, 낮과 밤과 해와 달과 별들도 그들만이 통하는 언어로 이 사실을 역사 속에서 전달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은 왜 모른단 말인가?

 

창세기 10장 - 11장

수많은 종족이 새로운 땅에 솟아 나왔다. 그들은 셈과 함과 야벳을 각기 조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땅은 활기를 찾았고 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한 것은 어김이 없었다. 창대하고 번창한 그들 가운데 주목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함의 후손 중 구스의 아들로 태어난 니므롯은 그 중의 하나다. 그는 영웅대접을 받는다. 그것도 그럴만한 것이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땅에서는 누가 앞서서 땅을 지배하느냐로 칭송을 받는다.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을 장악함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한다. 나라의 생성이 이런 연유로 비롯된다. 종족과 종족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경계가 확정되고 서로가 고유의 역사와 활동범주를 인정해 줌으로 땅의 인간나라는 다양한 문화를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함은 원초적으로 언어의 다양함에서 야기된 결과였다. 원래는 모두 다 동일한 말과 문자를 지니고 있었다. 흩어져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 한곳에 집결해 있었으며 그곳을 자신들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간주했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인간들이 한곳에 모여 살면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뭔가를 보시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아진 힘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이상(理想)했던 일을 위하여 투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것에 힘은 최종적으로 소비되기 마련이다. 그 일은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도달되기 위한 시도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가 어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자적인 땅의 시대를 열어보려고 했다. 뜻은 하나로 모아졌다. 다른 의견은 제시되지 않았고 별문제도 없었다.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그런데 작업도중에 혼란이 생겨 공사는 중지되었다. 갑자기 언어가 불통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뜻은 이미 일치되었다. 그러나 그 뜻의 전달과정이 원활할 수가 없었다. 우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다. 혼란이 그 속에 있었고 결국 우리들은 함께 떼지어 살수 있는 자들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다. 혼란이 생겼을 때는 그 혼란을 최소로 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의 자리를 찾아 흩어져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하신다. 이 혼란의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땅이어야 한다. 땅은 하늘에 종속되어야 하며 하늘로부터 위탁받은 사명 때문에 반드시 책임을 지는 일이었어야 한다.

올바른 땅의 정복과 다스림,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최선을 감당해야 하늘과 땅은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과연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자가 그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흩어진 민족들 가운데서 노아가 자기 자식에게 축복한 것에 의거하며 그 중의 한 종족을 선택하여 진정한 복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신다. 이는 흩어진 모든 민족의 운명을 그 선택된 민족에게 그들의 태도에 따라 결정지으려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그 복의 원천이 되는 민족도 저주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는 특수한 사명을 부여받게 된다. 그 종족의 선조가 아브라함이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일단 혼란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인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혼란의 근원을 이루는 사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신에 대한 반란이다. 신으로부터 오는 모든 간섭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이 세상은 혼란에 잠겨 있다. 이로 인하여 복의 원천인 교회는 무시당하고 저 구석에서 혼자서 훌쩍이며 울어야 한다. 물론 세상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어용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을 보고 울어야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고 울듯이!

 

창세기 12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시면서 다음의 사실을 약속하셨다. 첫째 네가 큰 민족을 이루고 둘째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셋째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9그러나 이 세 약속을 하나로 집약하면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제하겠다」 라는 약속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겠지만 만약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저주하겠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탑을 높이 세워 자기들의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시도에 부응하여 하늘에서는 아브람이라는 특정인간을 앞장세워 그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창대케 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창대는 인간이 스스로 내세우는 자기 이름에 대한 고발조치이기도 하다. 이것도 또한 언약이 가지는 중대한 역할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을 위하여 여러 가지 징표가 등장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땅의 개념과 자식의 개념, 또 義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 개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또한 알아야 하는 일이다. 만약 이러한 징표에 대하여 무지하면 잘못된 복의 원천과 복의 증거를 붙들고 구원받았다고 오해할 소지가 참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무지가 신학의 무지로 이어지고 이러한 신학의 무지가 교회의 황폐함을 불러온다

구원은 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외우고 있을 때마다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용어들이 주술적으로 잘못 이용된 예가 성서에서도 발견되고 현 교회사에서는 쉴새없이 발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한 땅은 평범한 흙 지반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식도 단순한 자손을 두고 말하지 아니며 義라는 것도 그 시대 사람들 사이에 이해되는 윤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라는 개인을 통해 새롭게 창출하여 지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그런 개념들이다. 이러한 의미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흔히 통념상 여기는 개념들을 죄라는 이름으로 고발하는 개념들이며 그로 말미암아 부정당하고 깨어져 버린 그 개념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개념이 된다. 아브람은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고 선택된 시범조교인 셈이다. 그렇지만 성서에서는 고상하게도 아브람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달아주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는 물론 「믿음의 대상」은 아님을 인식시킨다. 「믿음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그를 처음부터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고쳐 부르지 않았음에 우리가 주목을 하자. 약속의 의미가 함유되어야 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인 인간이 그 약속의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의 주변에 새로운 구원사건을 발생시킬 때 주어지게 된다. 즉 언약 상대자로 하여금 눈에 비쳐오는 현실세상에서 또 다른 현실 -약속의 세상이라는 현실로 데려가게 하는 그 사건을 말한다.

언약 상대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단순히 남을 위해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몸소 당하는 모든 고난이 후대의 신앙인들을 위한 계시구실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그의 실수는 지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수며 우리는 그를 욕해서는 아니된다. 다만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그의 그러한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 약속’이라는 구원의 소식을 기어이 밝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은 단순한 관심이나 친절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난관도 이기는 능력으로 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지녀야 될 힘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의 힘이다. 이 사랑의 힘은 환경을 바꾸어주는 성질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을 발휘하는 권능이다. 사도바울이 이 힘을 믿었기에 그는 그 어떤 난관도 장애가 아니라 은혜로 보게 되었다.

 

창세기 13장 - 14장

아브람의 가나안 땅 도착은 곧 이방인의 모습으로 그 지역에 들어온 셈이다. 그는 아무데도 도움을 바랄 수가 없었다.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모든 결정은 그 스스로 내려야 했다. 그러나 언약의 내용은 이런 처지에서 비로소 조성되어 간다. 나에게 약속을 내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그분께서는 어떻게 사태를 처리하게 되는가? 여기에서 나온 사실들로 인해 복의 세계는 지상에 그 흔적을 남긴다.

그 땅에 기근이 있을 때 아브람은 그 장소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애굽 땅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그는 믿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복의 근원이기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생존해야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 아내를 희생시켜 이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융성한 대접과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브람 자신의 처신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이 애굽 왕에게 주어진 일 때문이었다. 마치 개인적인 출애굽 사건 같다. 아브람은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곳에 이르게 되니 아브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다. 즉 나에게 나타나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 더 세다는 것과 또 하나님이 나를 기어이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 힘이 바로 그 주어진 약속을 성취시키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그 땅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객인 아브람은 이 땅이 자신의 소유 땅이 되고 여기서 주어지는 자식들의 번성은 이 모두가 자기를 애굽에서 끌어올리시는 약속에 대한 능력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선택권까지 맡긴다. 거기에 비해 조카 롯은 그 당시 주의에서 가장 기름지고 비옥한 땅에서 살기로 결심을 하고 삼촌의 곁을 떠난다. 그러나 그 장소는 장차 멸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다. 그 땅은 마치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유혹의 자리가 된 것이다. 그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아름답지 못한 탐욕의 전쟁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롯은 외형만 보고 스스로 탐욕의 전쟁터에 자진해서 내려간 셈이 된다.

조카 롯의 재산을 약탈당하고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람은 私兵 318명을 데리고 가서 도시 왕들을 쳐부수고 롯을 무사히 구출시킨다. 이러한 아브람의 용감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리는 그 답변을 살렘왕 멜기세덱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찾게 된다. 세속왕 소돔왕과 함께 만난 아브람은 이번 전쟁의 승리를 자기 힘으로 돌리지 아니했다. 그것이 이 땅을 지배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덕분으로 돌린다. 그리고 소돔왕으로부터 오는 전리품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브람은 이번 전쟁을 인간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어 치른 거룩한 여호와 전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전쟁은 아브람에게 내린 약속과 관련되어 있기에 자기는 그냥 동원된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 교회의 역할은 거룩한 신적인 전쟁에 동원됨이다. 이 전쟁의 승리의 요소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되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 하면 자신을 희생물로 제공될 때까지 신뢰해야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만약 교회가 세속의 영화와 번영에 눈이 팔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탄의 종으로 자처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선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교회도 가지려고 해서도 아니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탐욕의 함정이 설치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차지하면서 불의를 행사하고 그것을 유지한다고 불의를 행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천국을 위하여 과감히 미련을 철수해야 될 필요가 있는 단체이다. 왜냐하면 그들 만큼은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그 증표를 보여야 한다. 아브람이 세속왕 소돔왕의 거래를 거절한 것처럼 불순한 동기를 이용하려 들어서는 아니된다.

 

창세기 15장 - 16장

약속의 성취가 전쟁을 통해 달성된다는 사실을 아브람이 접하고 난 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전쟁에 있어 너의 방패가 되며 그 결과로 주어진 전리품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너에게 전쟁 승리의 결과로 줄 수 있는 것은 많은 자손과 그리고 이 땅이다」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이 사실을 믿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義가 되는 것이다. 義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 완전히 포기할 때, 그 때 내리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두고 말한다.

이처럼 약속이 전쟁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이미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으로 설정된 바 있다. 그것이 아브람에게 있어 적절한 형태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거룩한 전쟁의 군사로서 부름받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그때 그때마다 적들을 「붙이시는」 방식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심으시는 것이다(창세기 14:20)

아브람이 믿는 자손과 땅의 성질은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 그 승리의 요소가 함유된 자손들이요 땅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세속적인 자손이나 땅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이요 땅이 되는 것이고 그들도 아브람처럼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또 복의 민족으로 탄생된다.

하나님은 그 복의 탄생을 현 가나안 땅 거민의 죄악의 관영함과 결부시켜 일을 감행하실 생각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죄악의 관영함을 징벌하실 때 아브람의 후손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죄악의 심판 한 가운데서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의롭고 거룩한 민족의 출현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과 그 후손에 대한 이러한 구체적 언약의 확실한 보장을 위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로 마련된 제물들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를 쪼개어 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를 불꽃 모양으로 지나가셨다. 이러한 의식이 보여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담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계약은 이 계약을 위해 희생된 자가 없으면 성취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 희생을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는 하나님의 결단을 나타내는 것도 바로 계약 의식이다. 그 희생에 하나님이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계약의 아브람의 계약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도 준수해야 될 계약이다. 이러한 계약정신이 요청되는 것은 여자의 후손의 모습을 이 속에서 출발시켜 뱀의 후손과 대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약정신은 앞으로 주어질 모든 구원의 개념들 속에 보편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에 비추어서 죄가 무엇인가 규정될 것이다. 이러한 계약정신 밖에 있는 것은 죄악이요, 이 안에 있는 것은 義가 될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남편에게 요청하기를 여종을 통해서라도 약속의 후손을 갖자고 했다. 아브람도 그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그 일로 인하여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 아브람의 종 하갈이 고통스러워하자 하나님은 하갈에게 다시 원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복종하기를 명령한다. 이는 종의 자손과 주인의 자손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 자식 이스마엘은 남아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란 그 이름 속에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피해 받고 우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관심하지 않는 그 정신으로 구원은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이스마엘 등을 양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는 조심해야 한다. 일종의 영적 사생아라고 할 수 있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계약정신에 위배될 때마다 잉태되는 산물이다. 쉽게 고난없이 이어지는 구원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창세기 17장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의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은 계약관계를 성립하고자 하신다. 이는 사적 가계에 국한한 계약에서 탈피하고 그 계약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받는 언약적 국가의 출현을 위한 첫 시도이다.

열국의 아비요 열국의 어미란 물량적인 차원에서 자손 번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대한 그 약속의 자손들로 구성된 국가의 계속되는 땅의 점유를 말한다. 땅의 속성과 부합되는 제대로된 나라의 건설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서 행세할 때 발휘되는 정신이 그 기조를 이룬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신은 하나님의 의사(意思)가 인간 안에서 자리잡게 될 때 나타난다. 그 정신은 할례정신이었다.

언약 안에 속한 모든 남자는 반드시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유지, 전승할 책임을 지고 있는데 그 증거를 갖기 위해 하나님은 그 남성들에게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도록 정했다. 만약 이일을 소홀히 할 경우 단호한 심판이 주어지는데 그 징벌의 이유는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기 4:20-26에 나오는 십보라 아들로 인한 모세의 위태로움이 이것을 말해준다.

할례가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분리」정신이다. 타민족과의 차이점을 하나님은 두고자 했던 것이다. 민족단위가 나라로 형성되었던 시기에서(창세기 10:5) 그 나라의 성격은 그 구성원이 되는 민족의 주체성이 말해준다. 어떤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그 전통 속에 스며 있는 민족혼은 어떤 기원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초월적 권위로 자리잡았는가를 알므로 그 민족 전부를 규정할 수 있다. 난지 8일만에 할례 행하는 나라는 이 나라뿐이다. 이것은 청결을 위해 하는 성인식의 한 과정이 아니다.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신학적 의미는 이스마엘과의 갈등 속에서 보다 구체화되는데 할례 받은 집안의 식구는 그 할례의 정신을 안겨 줄 어떤 곧 태어날 어떤 인물을 고대한다. 그 인물이 할례가 지향하는 구체적 실체가 될 것이다. 할례란 생식기 부분의 표피를 잘라냄으로 인간의 생식 노선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생산된다면 이는 이미 할례 이후의 자식으로서 자연적인 인간의 생식기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약속의 자손은 이렇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그 자식에다 이름을 이렇게 붙여 놓았다. 「웃음」이라고! 인간의 불신과 비웃음을 바탕으로 태어난 자식이라면 어느 인간도 이 자식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철저하게 인간과 「분리된」 자식, 소위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한다. 거룩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인간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 신학적인 근거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거룩하지 않는 장소에서 거룩은 발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가능을 하나님은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들어섰다. 이것이 구원이다. 비거룩에서 거룩을 생산하는 일이다.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 일가에게 무엇을 약속했던가? 그 약속의 열매로 주어진 것은 거룩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자식의 탄생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언급하시기를 인간의 아이디어로 제조한 이스마엘과 영원한 언약을 맺지 않고 오직 그 약속의 자식으로 영원한 계약에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심지어 12방백을 낳겠다고 하셨는데 그 12방백이 출생하는 과정도 이삭의 출생과 동일한 정신 하에 이루어질 것이 뻔하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은 그런 과정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 지속될 존재의 등장이다. 이 분이 모든 인간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오늘날 교회의 일을 논하기 전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행하는 교회 일은 거룩을 모방하고 흉내내는 것은 될지 모르지만 결코 「거룩」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교회가 거룩한 일을 하려면 먼저 거룩의 기준을 제대로 잡아 놓고 있어야 한다. 큰 교회가 거룩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생이 거룩한 생의 기준됨을 명심하고 살아가자.

 

창세기 18장 - 21장

약속의 자식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 자식이 함유하고 있는 구원의 정보가 무엇인지는 규명할 필요성이 있다. 아브라함 가정에 그 자손을 주시기 전 먼저 천사 세 명을 파견하셨는데 이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을 위해 파견된 자들이다. 그 천사를 아브라함 가정이 따뜻하게 대우해 준 행동과 소돔성 주민들이 그들에게 행한 무례하고도 음란한 행위를 성경은 대비시켜 놓고 있다. 아브라함 가정이 그들을 대접한 것은 천사라는 신분을 알아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나그네라는 점에서 그렇게 하였다. 이웃 환대법의 기원은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을 멸한 가인의 저주에 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며,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까지 예시되어 있다. 이웃을 지키는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을 등장시키고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무엇이 죄악이 되며, 소돔과 고모라 성에 무엇이 결핍되어 그 죄악이 하늘까지 상달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실제로 천사가 그 동리를 방문하고서 보다 분명해진 사실이었다. 거기에 비해 정성껏 천사들을 하나님이 보낸 특사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롯의 행위는 분명 그 지방 사람들과는 다를 뿐 아니라 아브라함 가정이 이해한 것처럼 단순한 사람의 차원으로 그들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다. 롯에 대한 이러한 특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취한 특별 조치였음이 드러난다.(19:29) 이러한 언약의 상대자로서 아브라함이 지닌 의의 중개 기능은 아브라함 가정이 그랄이라는 지방에 내려갔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한 것은 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지시는 아브라함 고유의 구원적 기능을 보여주며 특히 약속의 자손이 어떤 기능을 위한 출생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리라! 그랄왕 아비멜렉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인해 자신의 가계가 번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연찮게 그(왕)는 아브라함 아내와 동침할 뻔한 순간을 맞이하는데 이일 때문에 그 집안에 좋지 않는 징조가 발생되고 그 친척들 가운데 여인들이 태가 닫히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의 존재 의의(意義)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만약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의 집안은 멸종한다고.. 아브라함이 그를 위하여 복을 빌자 드디어 태가 열리면서 그 집안에 생기를 얻는다. 그리고 난 뒤 이번에 사라의 태가 열리면서 이삭을 탄생시킨다. 아비멜렉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사라 태의 열림은 곧 복의 강림을 의미하며 복의 강림은 하나님의 우호적인 은총의 내림을 뜻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처참한 멸망을 구경한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번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이 자손은 바로 그 멸망 한 가운데 복의 원천의 자격으로 개입하여 약속의 민족을 구성할 복의 인간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 집안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 그들이 따로 나가서 나라가 건설되면 이제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결이 아니라 나라대 나라의 갈등으로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의의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그 지역에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기 시작한다. 이는 장래를 대비한 경영으로서 그의 후손이 장차 지역의 통치자로 등장될 것을 내다봤기 때문에 미리 계약을 체결하여 법적인 확실한 권리를 확보해 놓고 있다. 즉 이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민족만이 거할 수 있는 땅으로 계약해 놓은 것이다.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그 지역 주민과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복의 원천으로서 그의 신분과 연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도 동반해서 보여진다. 이점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추구해야 될 일이 바로 이점이다. 교회는 세상을 의지해서도 아니되고 또 세상을 두려워해서도 아니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 약속, 그 자체로 남을 때 교회는 자신의 할 일을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창세기 4장에서 발견되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정상화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제사에 의해 표현된다. 관계의 정상화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가 복으로 주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요구할 때에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는 입장에서 기꺼이 순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제사를 염두에 두고서 이번 제사를 아브라함의 신앙을 테스트하는데 사용하셨다. 신앙에 대한 테스트란 그것으로 신앙의 본질을 확정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시험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참된 신앙과 유사신앙을 구분하는 절대기준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 둘의 비중을 달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대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못하랴!

신앙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응답의 표시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떤 심정으로 이해했을까? 그것은 자식을 자기와 격리시키되 영원히 격리시킬 수 도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잡으라는 무섭고 비정한 일을 시켰을까?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그 속에서 전달하려는 의도였음을 분명히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아픔 속에 같이 참여시키려는 시도로 받아드렸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 하나뿐이기에 그것 잡으면 代가 끊기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이 시도는 계속해서 밑바닥으로 무겁게 주저앉는 절망을 야기한다. 이 극단적인 절망은 하늘과 세상과의 절대적인 단절의 지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 지역을 신앙인은 통과해야 한다. 그 어느 한 가닥도 이어짐이 없는 지역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그곳을 지나가도록 한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영원한 단절이었다.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은 갈수록 멀어짐을 경험하듯이 자신은 하나님 계신 곳에서 가장 먼 위치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리아 산은 사랑하는 아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 안으로 던져 넣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들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며 만약 그런 내용을 담아 놓고 있지 않다면 그 신앙은 여지없이 가짜 신앙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대신하여 수양 한 마리를 근처 숲속에 감추어 놓으셨다. 여호와 이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을 사용할 때 먼저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약속에 묻어두고 깊은 수렁과 버려짐 속에서 하나님의 다음 행동을 대기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로서 여호와를 믿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는 제사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분의 제물로 온전한 효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수양을 대신하여 살아난 이삭의 앞으로의 운명 안에는 죽은 자도 살리는 약속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약속의 자손이란 단순히 혈통의 자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까지도 함유된 자손을 두고 말하게 되었다. 어찌하든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기 위해 부지런히 십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던 바울의 순교적 일생을 생각해보면 신앙이 무엇인가 분명 등장할 것이다(빌립보서 3:9-14)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배웠지만 예수님은 또한 진정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완성자로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염두에 둔 일생일 것이다.

교회는 가짜 신앙을 남발해서는 아니된다. 그 가짜 신앙이 교회에 차고 넘침으로 참된 신앙이 교회 내에서 설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과 종교세계에 대한 취미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과한 집착력과 열심이 참된 신앙을 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목숨을 묻히느냐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때만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표출된다.

 

창세기 23장 - 25장

죽음의 한계는 하나님의 약속만이 능가할 수 있다. 죽음의 땅도 약속의 땅이 된다면 그곳만큼은 죽음의 절망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곳에서 죽는다. 이것을 기회로 하여 아브라함은 그곳을 영원한 약속의 터전으로 삼고자 시도한다. 더이상 이 지역에서 나그네로 머물 수 없다. 사라의 죽은 시체를 본토 아비 집에 묻을 생각을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곳, 여기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그 분이 나타나 약속의 자녀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안겨줄 때까지 아내의 매장지를 구하는 일에 대하여 그곳 주민들이 우호적이다. 이미 아브라함 자신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에 대하여 그들 가운데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냥 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하고 기어이 값을 물어 돈을 주고 그 매장지를 사게된다. 이는 비언약적 자손이 무상으로 약속형성에 개입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당한 값을 치뤄 이루어진 그 이후의 소유권 주장은 합법적인 것이며 법을 앞세우는 그들에게도 할말이 있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유입은 그 어떤 것이라도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는 약속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 것이 약속이 지닌 특색이기도 하다.

대속의 원리는 약속의 핵심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브라함은 그 지역 사람을 취하여 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본토 아비 집에 있는 자신의 혈족 중에서 이곳으로 불러 모아 약속의 자손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은 약속의 민족은 아브라함 자신이 겪은 인생의 과정을 반복하고 답습시킴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에 포함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내었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이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그들을 불러 약속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친족들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시도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줄 것으로 여겼다. 며느리를 구하러 가는 종에게 당부하면서 하는 말이 반드시 하나님의 사자가 네 앞서서 일을 진행시킬 것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앞으로의 세계 역사는 자신에게 내린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 법칙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자나 자기가 보낸 자를 선대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복 주려고 예약된 사람으로 간주해도 좋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종은 며느리감을 구하면서 이 원리를 우물가에서 써먹고 있다. 이 처녀 가운데서 내가 물을 구하였을 때, 물을 제공할 수 있는 처녀가 바로 그 며느리가 됨으로 정해 버렸다. 그래서 얻은 며느리가 리브가였다. 이 처녀의 앞으로의 운명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준해서 수행될 것이다. 사라에게 일어났던 일은 이제 이 처녀에게도 적절한 형태로 주어진다. 오빠 라반은 시집가는 누이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했다.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 것이다.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열 것이다」 여기서 원수란 말은 이러한 축복을 방해하는 세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너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 큰 민족을 이루는 어미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축복이 수행되기 위해 리브가는 사라가 일생을 살고 간 그 장막에 다시 들어간다.

태의 열림과 많은 자손은 곧 하늘의 복의 결과로 태가 열리지 않고 멸절당하는 가문은 하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던 그 시대에 있어 복의 근원이라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들어간 리브가에게 이런 요구를 한 라반의 소원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사라와 마찬가지로 누가 진정 약속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녀야 한다. 약속이란 이처럼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약속의 집단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지만 처음 선택받을 때부터 완전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시작된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완전이란 실수가 제로인 상태의 유지를 말하지 않고 신뢰의 완벽을 두고 말한다.

 

창세기 25장 -27장

사라와 마찬가지로 리브가도 아기를 못 낳는 여성상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사라처럼 늙어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성이 아니다. 사라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사라가 표상하고 있는 천만인의 어미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가장 「사라」됨을 보여준다. 약속의 자식은 인간의 손을 들어 사용해서는 안된다. 천만의 자식이든 백만의 자식이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필요한 인간들을 사용하여 일하신 결과로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주어진 자식이 바로 다툼의 형제지간인 에서와 야곱이다.

에서와 야곱은 싸우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비쳐준다. 약속의 자손이 싸움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에서와 야곱과의 싸움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위한 싸움과는 상관없이 세속적이었다. 날 때부터 싸움하는 동작 그대로 세상을 본 이들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걸맞게 서열 결정에 혼란을 일으키는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이들 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도 이들간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2없이 감정과 기분에 의해 어느 한쪽을 선호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들먹이지만 그들의 싸움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누가 상속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다. 어린 야곱은 형의 입에서 재산권 포기에 대한 언급이 있기를 기다렸다. 오히려 기다렸다기보다는 그런 분위기로 조성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형이 사냥 갔다가 허겁지겁 허기져 들어오니 팥죽으로 유혹하여 반강제적으로 형으로부터 재산권 위임을 약속 받는다. 그러나 형의 입장에서는 장자인 것이 어차피 아버지는 자기를 아끼고 또 누가 뭐래도 자기가 먼저 출생했기에 장자권 확보는 운명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여겼다.

드디어 아버지 이삭이 정식으로 상속권을 넘겨줄 때가 왔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자기에게 잘해주는 자에게 복을 주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별미를 준비할 것을 부탁한다. 그것을 가져오게 되면 아브라함의 복을 지닌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의 복을 전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에서가 나간 사이 야곱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기를 들고 아버지께 나아간다. 이삭은 정식으로 별미를 가져온 자에게 아브라함의 권리를 위임한다. 이삭은 약속하기를 별미를 만들어 온 자가 장자가 된다고 했지 이미 장자가 결정된 후에 별미를 가져오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삭이 먼저 고기를 가져온 야곱을 에서라고 여기든지 아닌지 상관없이 약속은 이삭의 확신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머지 한 형제는 장자가 아닌 셈이 되고 장자의 축복권에 종속되어 살아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삭의 예상과는 어긋나게 장자권이 주어지자 여기서 이삭은 새로운 각도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취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매이지 않음을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이삭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전달에 동원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바램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에서와 그리고 리브가와 야곱은 아직도 이삭이 아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분위기는 파탄된 체 장자를 홀로 살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갈등과 투쟁의 골은 더욱더 깊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운데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들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들이 소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여길 경우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소유물로 여길 경우 그 사람은 심하게 왜곡된 인생을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인간들의 야심과 야심사이에서 얼마나 모독을 당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탐욕을 정당화 해주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자!

 

창세기 28장 - 31장

아브라함 언약의 유효성은 이삭 시기에도 그대로 전달되어 이삭은 부자가 되고 그곳 주민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이삭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러한 축복의 영향력은 대단히 매혹적이어서 이 축복을 전수 받는 쪽은 대단한 이득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이러한 행운은 어떤 애씀이 없더라도 자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으로 알려질 수 있다.

야곱이 혼인이라는 구실로 아버지 집으로부터 쫓겨난 뒤 룻스라는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야곱자손의 편만을 분명히 약속하셨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님을 알게된다.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통해 계시함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는 야곱의 하나님으로 하나님 사역의 중심점이 바뀐다. 이삭식으로 역사하시던 하나님은 야곱식으로 역사하신다. 야곱이 지니고 있는 표상, 즉 인간의 투쟁성이 하나님의 약속성취에 어떤 연관을 맺고 역할을 하게 되는지 보이기 위해 이제는 야곱이 등장한 것이다. 야곱이 투쟁하는 상대와 하나님이 약속성취의 장애로 등장하여 투쟁해야 하는 상대가 일치되지 않을 때 우리는 야곱이 어디에서 오해하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다. 하나님이 야곱보고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은 결코 야곱이 생각한대로의 함께 하심은 아니었다. 야곱이 생각한 자손의 번식에 하나님은 약속성취라는 차원에서 하나 하나씩 관여하고 있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생산한 자식들은 거의 다 야곱의 두 아내사이의 투쟁과 시기와 질투의 산물로 주어지기에 그 자식들의 이름에 그 투쟁의 흔적이 담겨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되 복의 차원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이 인간의 세속적 탐욕을 질책하는 증거로 주시고 계시다. 한 남자 야곱을 사이에 두고 두 아내는 경쟁적으로 자기에게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을 다한다. 여기에는 여종들이 가담하게 되는데 이 모두가 두 여자의 개인적인 사랑싸움의 도구로 동원된다. 하나님의 복된 자식을 꼭 이런 추한 모습 속에서 배태해야 하며 하나님의 복의 산물로 여겨지는 많은 재산을 꼭 삼촌의 살진 양을 빼돌리는 야곱의 속임수의 대가로 주어져야 하는가?

여기는 분명 왜곡된 축복관이 개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야곱의 인생사로 표현하고자 하셨다. 선조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진정한 뜻이 야곱 같은 투쟁의 인간에게는 인간의 추잡한 속임과 탐욕으로 얼룩진 야욕에 상처 입은 모습으로 등장된다. 복의 산실이라고도 여겨졌던 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복의 근원 야곱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쫓기다시피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라헬은 아버지의 귀중품까지 마저 갖고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야곱을 중심으로 하여 만나는 모든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의 지난 20년간의 생활은 야곱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을 자기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탐욕적인 사람들의 부대낌 안에서 진솔한 그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기간이었다. 어떻게 하나님은 이런 탐욕스러운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20년간 모은 모든 것들이 전정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라고 할 수 있던가? 아버지 이삭에게 엄청나게 재산을 불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재산이 나에게 왜 이런 추한 꼴로 주어져야 하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을 두고 온갖 추한 꼴을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경배한 교회가 된다. 하나님 그분 보다 그 분이 손에 들고 가져온 선물 보따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직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다르다.

 

창세기 32장

야곱의 투쟁은 그가 원했던 많은 자식과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과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말은 지난 20년간 그가 땀흘린 인생의 대가는 하나님이 원한 축복과 무관함을 드러낸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나오다가 길에서 천사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아직 야곱에게 행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야곱은 이제 자기가 가진 축복을 잘 관리할 책임을 느낀다. 형은 항상 자기에게 신변의 위협을 가하는 존재이며 또한 그 동안 획득한 축복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형과의 관계 정상화는 하나님에게 복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낸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나를 형의 손에서 건져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형이 400명을 이끌고 동생을 만나러 오는 것은 동생집안을 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생을 만나고 싶고 다시 우애를 다지기 위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형의 노를 풀기 위해서 많은 재물을 풀었다. 형의 심사를 헤아리기 위해 선봉대를 앞서 파견해 놓고 그는 얍복강에서 최후의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한 밤중이었다. 야곱은 갑자기 어떤 인격체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야곱은 필사의 방어를 다했다. 야곱은 그 사람에게 질 수가 없었던 것이 그것은 자신의 축복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곧 축복의 사람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알았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빼앗길 수는 없는 것이다. 밤새도록 야곱과 투쟁한 그분은 야곱의 강력한 처지에 수월하게 방문한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사람은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켜 놓았다. 그 사람이 온 목적은 힘으로 야곱을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야곱은 그 사람과의 투쟁을 원만하게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거기에 비해 그 사람은 그냥 야곱 곁을 떠나고자 했다. 그 사람은 밤에만 야곱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사람의 이런 행동은 옛날 벧엘의 밤에 나타난 하나님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분은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가? 이 때부터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싸움의 상대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적은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이는 축복의 방식에 대해 이제까지 자기가 잘못 시도하고 있기에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는 갈등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싸움과 강탈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야곱은 여기서 그분과 원만한 관계가 이어지도록 간청한다. 축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이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 이름과 연관하여 하나님도 이겼고 사람도 이겼다는 이름, 이스라엘을 부여한다. 즉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적으로 상대하여 싸운 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마저 싸울 정도가 된 것은 그 야곱적인 사고방식이 이 조상의 하나님의 언약성취 방법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오히려 그런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이 이기고자 한 에서의 자리에서 야곱과 맞상대 해준 그 하나님의 겸손과 낮아지심이야말로 야곱의 언약을 이루는 원인이 된다.

야곱이라는 이름 위에 던져진 이스라엘의 이름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상관없음을 보여준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겠다는 것은 야곱적인 사고방식으로 언약을 이루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서 그의 탐욕으로 하나님이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는 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축복한 그 복은 하나님이 이러한 낮아지심이 뒷받침되어서 주어지는 것이다. 야곱적인 사상은 이러한 하나님에게 오히려 엄청난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하면 되게 되어 있다’ 라든지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 는 사상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생각들이다. 그런 탐욕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런 것이 모두 야곱 때의 생각이라면 우리는 야곱의 저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창세기 33장 - 35장

복의 근원이란 자신이 얻은 많은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소 경험한 뒤 알게 된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데 있음을 야곱이 복의 사람이 되고 난 뒤에 얻게 된 놀라운 소득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결코 자기 힘으로 복을 생산하고자 했던 야곱시절의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이었고 이제는 이스라엘로서의 생각이었다.

장자로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취한 마음가짐과 동일해야 한다. 그것은 「섬김을 위한 존재」의 출현이다. 많은 소유물과 이제는 무관했다. 문제는 타인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있다. 창세기 25:23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출생할 때 하나님이 남기신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은 두 형제가 각기 독립된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두 나라 조성에는 필연적으로 그 전에 치열한 투쟁이 있음을 말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이기에 두 나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결과는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에 지배를 받게 됨으로 종식된다. 보다 강한 나라가 있겠고 다른 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것이다. 누구쪽이 강한 나라를 이루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반 통념을 넘어 장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님은 왜 그들은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로 만드시고 또 그들 가운데 싸우는 관계로 이끄시는가? 그것은 그들을 통해 장자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즉 장자란 어린 자를 섬기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장자만이 아브라함의 약속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에돔은 이스라엘 족속에 복속되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음으로 큰 자(에서)는 어린 자(야곱)를 주인으로 섬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 뒤에는 야곱에게 남긴 장자의 참 실체가 단순한 혈통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 쪽이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물리적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그럴 때도 그는 장자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어린자를 섬기는 것이 큰 자」가 되는 법칙을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이해하게 된다. 날 때부터 에서를 목표로 싸운 야곱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싸운 것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싸우는 형제상」에서 비친 그대로 자신이 바로 에서의 자리에서 에서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임이 드러났다.

형 에서를 오래간만에 만난 야곱은 형을 더이상 원수로 여기지 않고 자기가 섬겨야 할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일곱번 절하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에 야곱은 이미 장자의 자리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언약정신을 알지 못한 체 오직 힘에는 힘으로 처리한다는 야곱식의 발상으로 누이동생의 강간사건을 처리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과격한 행위를 꾸짖고 세겜땅을 떠난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했던 벧엘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의 진정한 뜻을 재확인 받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약속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함으로써 그때 얍복강가에 나타난 그분이 곧 벧엘의 하나님인 것이 확연해 진다.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는 그 의지는 야곱 같은 인간을 이스라엘 같은 인간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진정한 복의 민족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다시 벧엘에 돌아온 야곱은 자기가 전에 그곳에서 하던 식대로 돌기둥을 세워놓고 기름을 부어 자기가 진정한 아브라함 언약의 후계자임을 인정한다.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말이다.

이 정신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이어지고 오늘날 교회까지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정신 안에서만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36장 - 37장

하나님과의 싸움을 극복하고 이 땅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스라엘의 12아들은 지금부터 이 정신을 구현할 책무를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만약 이 점에 소홀히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관한 족속이 될 것이다. 인간의 어떤 점 때문에 하나님은 싸움의 상대로서 인간을 생각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전개하시려고 그 일을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진행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세상과의 단절과 갈등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과 타민족과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민족은 복을 받게 되되 만약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나라는 언약대로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워야 하는 조건이 부가된다. 가장 이스라엘다운 자가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지도자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진 모든 힘과 특권은 바로 이 정신을 구현하는데 집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땅의 세계가 계속적인 갈등이 있듯이 이스라엘도 계속적인 투쟁을 진행해 나가는데 그 전쟁은 언약정신을 이해하는 자와 이해 못하는 자의 싸움이기에 이스라엘은 총력을 다해 이 언약을 고수해야 한다.

창세기 36장에서 에돔의 족보가 나오고 있다. 이는 창세기 37장의 야곱, 즉 이스라엘의 내력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째서 이스라엘은 에돔의 족속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 위한 기록이다. 그런데 야곱의 내력을 언급하면서 그 대부분의 내용은 요셉의 일대기로 채워진다. 이는 창세기 27:29에 야곱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은 내용이 어떤 식으로 야곱에게 성취되는가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 축복의 내용 중에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라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분명 야곱 자신에 관한 사항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야곱은 형제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야곱에게 내려준 복의 성취를 위하여 야곱의 자리에서 일하는 다른 자를 두고 말한다. 그 아들 이름은 요셉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대로 일하지만 자신의 일의 범주는 아버지께 계시 내린 하나님의 약속의 범주를 이탈하지 아니하기에 요셉의 등장은 야곱언약의 성취를 위함이다. 따라서 요셉이 일할 동안에 야곱이 처해있던 절망과 연결시켜 언약완성을 이해해야 한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내려진다. 이것이 야곱으로 봐서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계시가 내렸다는 것은 그 자식이 다른 자식과 구별되며 구별된 그와 다른 형제간의 사이에서 언약정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배타적인 대우를 받고 있느냐를 보이는 일을 해야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요셉이 내뱉는 꿈 이야기는 한 형제가 다른 형제로부터 주인이 되며 자기가 그 자리에 앉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말이 다른 형제들에게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지만 아버지 야곱은 자신의 편애가 하나님의 편애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여 그 꿈의 결실을 갈망하게 된다.

한편 형제들은 꿈 이야기로 인해 일어난 가정의 갈등을 제거하기 위해 요셉을 아버지 모르는 곳에서 처리하기에 이른다. 꿈이 없던 시절로 다시 되돌리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아들의 상실로 받아드리고 있다. 이는 살 희망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곱은 그 아들을 따라 자기도 죽고 싶다고 말한다. 사랑했던 아들은 죽음 저편에 있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과도 절단되어 있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 야곱의 미래는 요셉 한 개인에게 집약되어 있다. 이 세상의 무엇으로 그 나라와 바꿀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교회의 유일한 희망과 행복이어야 한다.

 

창세기 28장 - 41장

요셉이야기 가운데 유다 가정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은 다소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야곱언약과 연관되어 있다. 야곱언약은 요셉 홀로 만의 작품은 아니다. 야곱을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며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제 야곱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아들들을 다루신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과 혼인하게 된다. 유다는 그 당시 아내나 며느리를 그 지방사람 아닌 곳에서 구태여 찾아야 된다는 필요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큰아들 엘이 죽고 둘째 아들도 죽는다. 이 때 유다는 그 원인을 며느리 쪽에 있지 아니한가 하여 시집에서 추방하여 셋째 아들을 주기를 보류한다. 그러나 다말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어찌하든지 시집과의 관계는 이어져야 한다. 시아버지가 자기 지방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말은 시아버지의 잘못된 생각을 추궁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고자 자기가 창녀로 변해 시아버지와 관계한다. 나중에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유다는 자기집안의 수치로 여기고 대노한다. 그러나 그 수치스러운 일을 만들고 그 원인이 된 작자가 바로 유다 자신인 것을 깨닫자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며느리의 처신에 대하여 옳은 일이라고 판정한다. 아들의 죽음의 이유는 며느리에게 돌려 셋째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유다의 잘못 때문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야 했다. 유다는 다말 속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보았다. 그것은 다말의 고통으로 주어졌다. 자기 가문을 정상적으로 돌려 정상적인 가계를 잇기 위한 헌신적인 결정을 내린 다말이야말로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도 그의 가정에 역사하신다는 증거로 삼을 만하다. 자신의 과오로 수치스러운 일을 감행한 다말을 유다 자기 앞에 남기신 것은 야곱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거기서 유다는 조상의 하나님의 진정한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관계하여 낳은 자식을 자신의 가문의 대를 잇게 한 것은 달리 말해서 그 하나님의 희생정신의 계승이라고 봐야 한다. 유다 자신이 당할 수치를 대신 당한 다말의 기점으로 하여 진정한 유다가문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요셉의 한 많은 일대기는 진행된다. 즉 요셉은 다말 같은 성격으로 야곱언약의 성취자로 동원된 것이다. 형제들로 인해서 던져진 어려운 운명은 남들에게 복을 안겨주는 운명이 된다. 가는 곳마다 남들은 형통했지만 그의 앞길은 갈수록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건져주지 아니하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모두 다 외면했으며 그들은 요셉의 회복에 무능한 자들이었다. 도움을 받은 자도 요셉의 구출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요셉의 꿈의 해석자로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꿈에 대한 해석이란 곧 역사에 대한 해석을 뜻한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며 그 역사 구원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정신에 있음을 알게 된다. 서열상 요셉은 제2의 위치에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역사를 해석하는 자가 진정한 통치권자가 된다. 요셉은 세계역사가 감옥에 갇혀 있는 자기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진행됨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아버지에게 약속한 언약에 근거됨을 알게된다. 아버지로 하여금 이 진정한 성취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형제들도 그 희생의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 근처 모든 지역에 기근이 일어나게 하신 이유는 야곱의 하나님의 우월성을 나타내 보이고 거기에 복종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희생이 파멸이 아니라 승리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언약의 초월성을 모르고서는 납득이 될 수 없다. 교회라는 것이 마지막 때에 지상에 등장한 초월적 기관이 됨을 교회 스스로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세상의 방식으로 살지 않기에 쫓겨다녀야 하고 번거러운 존재로 눈총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만사형통인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요셉의 위치에 설 때뿐이다.

 

창세기 42장 - 45장

세상에 있는 모든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 요셉은 이번 가뭄기간을 통해 야곱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다 이스라엘 가문을 위한 조치라는 것을 야곱과 형제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형제들과 야곱은 단순히 생존의 차원에서 양식 얻으려 애굽에 내려가고자 한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요셉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같이 알고자 한다면 자기가 당한 버림의 수난을 그들도 체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을 옥에 3일 동안 가두어 둔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계속 옥에 남아 있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여기 오지 않은 말째 동생을 데려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르우벤은 사태가 이렇게 난처하게 된 것은 요셉을 죽인 피값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가져온 양식값을 도로 집어넣었다. 요셉은 이번 형제간의 일은 양식을 파는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형들이 알기를 원했다. 즉 양식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을 건지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결정 내려야 하는 문제로 형제들을 유도하기 함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 요셉을 잃고 난 뒤 이제는 시므온까지 보이지 않아 두 아들을 잃은 것이 큰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베냐민까지 잃어버려야 될 지경에 빠진 것이다. 르우벤은 자기의 두 아들을 담보로 내어놓으면서 시므온을 찾아오자고 제안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의 죽음을 요셉과 같이 여기기에 완강히 그 제안을 거절한다.

기근은 계속되고 가져온 양식도 없어지자 유다는 새로운 결단을 갖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베냐민 만큼은 유다가 책임지고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두 번째로 애굽으로 내려간다.

두 번째로 형제들을 대한 요셉은 계속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형들이 자기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처리하는 가를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베냐민에 대한 태도가 곧 라헬 자식에 쏟는 아버지 사랑에 대한 형들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준 형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은 진정한 형제라고 대할 수가 없다.

야곱이 요셉에게 편애를 한 것처럼 요셉도 그들 보는 앞에서 그에게 5배의 음식을 특별히 부여한다. 그리고 그들이 양식을 가지고 떠나는 길에 베냐민 자루에만 요셉의 은잔을 일부러 넣어 도둑으로 몰아서 그를 다시 인질로 잡아두면서 다시 형들의 태도를 면밀히 살핀다. 여기서 유다는 베냐민과 아버지의 목숨이 직결되어 있기에 이번 일로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에게 미칠 해를 자신이 요셉의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발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요구한다.

형들이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파악한 요셉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기의 요셉 됨을 털어놓으면서 그 동안의 내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되어진 이 모든 것은 다 아버지와 형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밝힌다. 그러니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긴 일에 형들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위로하고 있다.

기근. 그것은 흩어진 이스라엘 가족을 다시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들이 다시 만날 때 결코 그 동안의 세월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요셉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탄식과 한숨으로 지새운 아버지가 다시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언약의 가족을 이끄시는 원리를 배우게 된 것이다. 그들이 미워하고 죽이도록 싫어한 그를 통해서 오히려 미워한 그들을 살려내는 이 섭리는 바로 조상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준 일이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나타나실 때는 꼭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가 사정없이 배척하고 싶은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오히려 그들 속에서 함께 기거하시는 주님을 함께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창세기 46장 -50장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뒤로하고 요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야곱의 마음에 걱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서 염려 말고 가라고 명령한다. 거기에서 비로소 국가형태를 갖출만한 큰 민족을 조성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 다음에 다시 거기서 나온다면 씨족 형태가 아니라 국가형태가 될 것이며 만약 그 와중에서 충돌이 발생되면 국가 대 국가의 충돌이 된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아브라함에 언급된 바 대로다(창세기 15:13)

야곱에게 허락하신 언약을 이루시되 요셉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은 요셉의 고난을 새로운 언약의 나라의 원리로 삼기 위해서이다. 팔려간 자를 하나님이 주로 삼았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이 그 고난을 마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가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을 산채로 다시 만나게 되자 야곱은 한동안 계속 울기만 한다. 음부에서나 만날 줄 알았던 것이다. 요셉이 아버지를 바로 왕에게 소개한다. 야곱은 그에게 축복한다. 그만한 위치에 있음을 야곱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근이 계속 극심해지자 다투어서 주위의 나라가 땅을 팔고 애굽나라에 귀속된다. 이제 애굽나라는 은혜의 나라라는 인식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것은 그 중심에 요셉이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죽을 때가 가까이 오자 요셉을 부른다. 그리고 이때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이 그대로 요셉가문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두 손자에게 축복한다. 그들은 험난하게 걸어온 야곱의 언약성취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취의 증거였다. 야곱은 언약의 특징을 그들 위에 분명히 남기고 싶었다. 흔히 장자라고 여겨지는 먼저 태어난 아이를 동생으로 돌리고 나중에 태어난 동생을 장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삭이 몰랐던 부분을 이제 야곱은 알고 있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장자 된다는 원리를 모르고 야곱은 그 동안 얼마나 험난한 세상 길을 살아왔던가!

신약 히브리서 11:21에서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하는 장소를 침상이라 하지 않고 야곱의 지팡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얼마나 신앙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었는가! 실패의 일생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였던 것이다. 자기의 탐욕을 제거하고 그것을 조절하고,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자식마저 잃은 것으로 사태를 몰아넣는 하나님은 이제 야곱이 죽을 지경에 와서 어긋맞게 축복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세워놓으셨다. 이제 인생을 알고 하나님도 제대로 안다는 뜻이다. 야곱이 한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어긋나게 축복할 줄 아는 안목을 뜻한다. 이제 그러한 희생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약속한 땅으로 거대한 나라가 되어 올라가게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미리 약속의 땅이라고 사놓은 매장지에 드디어 같이 묻힐 때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진정 하나님이 선택한 복의 근원으로서의 민족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야곱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은 12아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들의 행실과 삶의 태도를 근거로 하여 장래 되어질 일을 일러준다.

장래의 인류역사는 야곱이 예언한대로 될 것이다. 그 인류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어 움직여 나아가고 그 속에서 12지파가 각기 어떠한 역할을 하는 지를 유언으로 남기고 있다. 인류가 죽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존의 인간 세력권에 언약의 나라라는 새로운 민족을 앞장세워 일하시고 또한 침투하셨다. 여기에는 치열한 투쟁이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의 약속은 치밀하게 성취되어 간다.

야곱의 탐욕을 극복하여 등장된 그 공동체는 그 극복시킨 힘으로 이제는 세상을 극복할 것이다. 그 힘은 다름이 아닌 사람의 힘이다. 그리고 용서의 위력이다.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자는 이 건짐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지 않는 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을 우리가 모른다는 말은 神의 존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神(절대자)의 존재성 문제는 성경과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즉, 그분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지상에 남겨지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는 유일한 민족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창조관도 남다르다. 그냥 神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다.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그 구원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 이방나라에서 섬겨지는 神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행위 자체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연관시킨다. 그 원인은 마지막 안식을 내다보는 구원이며 그 안식이야말로 거룩하고 이 세속과 구별된 개념으로서 이상향이다. 그 안식에로의 참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 가야하고 그 돌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신뢰하는데 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언약이라고 하는 구체적 표현과 형태로 주어지는데 그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그 마음이 담겨 있고 그 마음에 대하여 일치된 마음을 또한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어야 이스라엘은 복의 원천이 된다. 그렇다면 그 언약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이 마음은 철저하게 타락된 아담의 마음과는 배타적인 마음이라서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여 조절시키지 않는 한 지닐 수 없는 마음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 가족들도 모두 이 마음에 미흡하여 실패할 뻔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의 부족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제3의 존재를 대기 시키셨는데 여기서 언약의 가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요구되었다. 믿음이란 믿는 자의 열심에 가치를 두고 있는게 아니라 믿을 내용이 되는 분이 과연 어떠한 분인가가 핵심을 좌우한다. 그분은 늘 인간들의 과오로 인해 고통받는 분의 모습을 지닌다. 인간들의 욕심과 교만과 야욕 속에서 애매하게 버림받고 조롱 받는 존재. 이유없이, 죄없이, 죽어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의지하는 길만이 진정 우리의 살길이라고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창세기는 바로 이러한 원리에 따라 많은 등장인물이 잠깐 역사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우리들은 그러한 역사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믿는다는 행위는 결코 윤리나 도덕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만으로 처리된다. 믿음이란 나의 탐욕과 이기주의로 인해 죽은 자를 찾아 나서서 그와 삶을 함께 하는 결단을 말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미리 그분의 활동을 맛보나 그것은 모두 여호와라는 神에 의해 조정됨을 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은 모두 인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전환시켜 놓고 있다는 것도 파악하자. 언약의 선조들처럼 말이다.

신약을 해석하면서 구약의 정신을 빼놓고 해석하면 거짓말이 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는 더욱더 중요한 원리로 작용한다. 구약을 모르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바도 구약의 정신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갔다고 신약에 기록해 놓고 있지만 거기서 언급하는 죄악이 도대체 어떤 죄질인지를 구약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왜 신앙이 윤리나 도덕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가는 구약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죄악이란 여호와를 모르고 자기 세계에 그냥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죄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데 목회의 초점이 모아지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원한다면 하나님도 모르는 체 우상의 하나님과 우상의 예수를 모시는 사이비의 한 단체가 될 것이다. 세상의 평가보다 성경에 맞춰 살아가자!

 

7. 출 애 굽 기

 

출애굽기 1장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게 된 것은 그들의 소원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 아니다. 따라서 왜 그들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고생하는가 라고 원망할 문제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민족 단위로 약속의 의미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들은 거기서 대기하고 있게 되었다.

갇힘-고통-투쟁(전쟁)-승리-약속된 복을 상속받음. 이와 같은 약속의 틀을 조성시킬 목적이 주어진 대단위의 민족이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약속의 완성점을 복의 제공에 있다면 그 주어진 복이 공격을 받고 와해될 위기에서 새로운 차원의 약속이 주입되어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과의 관련성이 여기에 비추어진다.

각 씨족별로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는 기간이 애굽에 기거할 때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의 결과이다. 그런데 그 복이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 복의 민족에 도전하는 집단은 자기들 나름대로 힘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가 있다. 이 둘의 힘의 쟁투에서 약속의 본질이 그 정체를 드러나게 된다.

한쪽은 자기들의 힘의 논리에서 이 쪽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그 결과, 이들 이방민족(이스라엘민족)은 자기들 힘 안에서 아무런 후원자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는 민족으로 보였다.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네들 국가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나 제공할 수 있는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러한 바로 왕의 편견을 성경은 간단히「요셉을 모르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하나님 덕분에 애굽나라가 강대국이 되었다는 과거사를 무시하고 하나님도 빼버릴 때 남는 것이라고는 그들을 이용하면 나라가 부강하게 되겠다는 그들의 정치 원리로 해석한 잘못된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출애굽 기록에서 독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워 찾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왜 빠져 나와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동안 아무 탈없이 400년간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쫓겨나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요셉을 모르는 왕」의 등장이라면 결국 출애굽이란 요셉을 모르는 세계와는 영원한 투쟁관계 내지는 결별선언 같은 의의가 담겨 있을 것이다.

고대에서 전쟁에서의 승리는 진 편의 것을 아울러 가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출애굽사건의 경우에는 애굽의 것을 가진다는 의미는 극히 미미하고(애굽에서 가져온 단장품이 성막 건립에 사용된 예 같은 것) 오히려 꼴 보기 싫은 양 그 곳에 미련없이 떠나 딴 곳에 가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영구정착지로 잡은 땅이 애굽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가나안 땅이 애굽과 마찬가지로 함의 자손의 땅이라는 사실 빼놓고) 바로 왕이 그곳까지 통치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왕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언약까지 거슬러 확인해야될 필요성을 여기서 갖는다. 이스라엘 고통을 들으신 분도 아브람의 하나님이요 찾아 오셔서 건져내어 주신 분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오셔서 딴 일은 못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언약하신 그 범주 안에서만 구원사역을 하신다. 4대만에 다시 아브라함 자손을 불러내겠다는 그 약속을 이제 지킬 때가 된 것이다(창 5:13, 16)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해야될 일이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악한 바로 왕이 붙잡아 방해할 것은 못되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가두어 두려고 했다는데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들 나름대로의 힘의 논리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도저히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언약의 힘의 강대함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이 한번 약속한 일은 어떠한 장애와 힘에 의해서 중도에 소멸되는 일이 없음을 보여준다. 출애굽, 그것은 새로운 힘의 우위를 국가적인 위치에서 시행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단순히 정복의 의미가 아니라 거룩한 심판을 행사하는 대행자의 출현을 알리는 전쟁의 시작이다.

 

출애굽기 2장-4장

복에 대한 공격은 복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도 동시에 보여 주는 계기가 된다. 고된 노동과 육체적인 피곤도 자녀생산에 차질을 가져다주지 않자 태아선별을 통해 노골적으로 남아(男兒) 살해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이는 종족 자체를 지상에서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신한다. 즉 하나님께로부터「불쌍히 여김을 받는 상대로서의 이스라엘」이다. 이 일에 레위지파가 동원된다. 레위지파 중의 한 남자 아기가 애굽의 공주로부터「불쌍히 여김」을 받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로부터 회생된다. 이스라엘 운명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이 한 남자아기의 운명 안에 집약된다. 물에서 건져내었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아기의 운명은 만약 그 아기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경우가 생긴다면 분명 그가 경험한 것에 이스라엘 전체가 모아질 가능성이 있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면서 꿈꾸어 왔던 이상은 그의 충동적인 행위 때문에 실패로 돌아선다. 동족의식은 있었으나 동족에 대한 애정이 자신의 잘못 사용한 폭력 때문에 빛을 잃어 버렸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에서 또 하나의 애굽기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자는 히브리인의 지도자나 재판관에 부적합하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민족의 해방과 아무런 상관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양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목동 앞에 우뚝 서서 그의 일을 민족의 해방에 동원시키시는 분이 계셨다. 하나님이시다!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이었다. 차단된 거룩한 세계가 자진해서 이 땅을 방문한 것이다.(창 3:24) 더럽던 그 장소가 졸지에 거룩한 자리가 되었다. 모세는 신발을 벗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종으로서 복종만 해야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해방문제는 모세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였다. 그들은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모세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도망쳐 온 이 자리를 하나님이 건져내어 새로운 국가를 형성시키시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작정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모세로서는 자신으로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여겨져서 이번 일에서 빠져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의사를 받아주지 않으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불신할 것이 분명하므로 자기를 애굽에 보내시는 신(神)의 이름을 알기를 원했다. 그 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제공함으로 선조들에게 영원한 약속을 한 바로 그 하나님임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모세를 보낸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울러 말씀하였다.

모세로서는 대단히 입장이 난처해졌다. 모세는 그들이 자기의 이러한 사명을 믿지 않을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을 잡는 시늉과 문둥이 환자를 고치는 시늉과 그리고 강물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처참한 심판의 전쟁을 나타내는 시늉을 하게 하셨다. 이와 같은 기적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로 하여금 심판(뱀 잡음)을 통한 이스라엘 구출(문둥이 환자의 회복)을 암시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비천한 목동의 지팡이. 그리고 형과 몇몇의 가족들을 데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구출의 대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그러나 길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죽을 뻔했다. 아마 문제는 모세보다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사명이 아브라함의 언약인 할례언약과 연관되었음을 소홀히 보고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인가? 십보라 사건을 통해서 보면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애굽에서 살아 나온 자들, 곧 이스라엘 민족이 진정한 하나님의 장자인 것이다. 옛것을 고수하는 한 하나님의 아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출애굽기 5장 - 10장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들은 그들의 神의 이름으로 섰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 신과 바로와 바로 맞부딪치게 하고 자신을 관망자로 사태를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또한 神에게 있어 인간의 필요는 오직 그 神에게 예배를 드리는 일밖에 없음을 나타내는데 바로는 인간의 효용성을 노동생산성에 두고 있어 모세가 요구한 것과 매우 대조가 된다. 바로는 여호와 신에 대한 모멸을 생산성의 극대화로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것은 적은 재료의 투자로서도 전과 같은 양을 생산할 것을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 노골적인 학대는 고대 여호와 신에 대한 학대를 선언한 셈이 된다. 모세 일행은 그들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는데 바로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그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배반을 당해 스스로 낙심에 이르기를 바랬다. 그 낙심의 배후에는 바로 왕은 흔들릴 수 없는 권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해서 나온 결과로 돌려지기를 그 누구보다도 기대하면서 말이다. 또 여호와라는 신보다도 위대한 바로 왕의 이미지를 조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세 일행은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께 항변한다. 여호와 때문에 우리 백성이 더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그럴 때 하나님은 애굽과의 전쟁을 선포하신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애굽의 군대와 싸움을 전개하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의 현재 입장이 너무나 애굽의 힘에 예속된 상태이기 때문에 설득해도 소용없다고 걱정을 늘어놓는다. 이는 이번 전쟁에 있어 인간의 힘은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모세가 스스로 자인하고 들어간다. 하나님은 내가 큰 권능과 재앙을 내려 그들 손아귀에서 내 군대를 빼내겠다는 것이다. 다만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이 전쟁은 자기 백성을 원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을 주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싸움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지만 직접 참전할 성질의 군대가 아니라 어느 편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는가를 보여주는 노획된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만약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에게 돌아간다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여호와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전쟁형식은 앞으로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여호와 신이 개입된 전쟁에서 비쳐지는 전형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세상에 매여있어 세상의 종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들 중에 누가 진정 여호와 군대라 불리어 질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의해 얻어진 노획물로 신분이 바뀐 그들이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동시에 무엇이 여호와라는 신에게 징벌의 대상이 되는가도 아울러 이번 전쟁에서 밝혀진다. 그것은 바로 강팍이었다. 목이 곧은 상태이다. 그 강팍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바로「여호와가 누구관대?」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 망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의미는「여호와 이름」이 안고 있는 비밀에 있다. 여호와 이름은 여호와께서 이 지상에 하는 일과 관련 있다. 하나님은 일개의 목동의 지팡이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다. 양에게나 위협이 되는 지팡이를 가지고서도 전 애굽을 떨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이 그 비천한 목동의 지팡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10가지 재앙 중에서 애굽의 술객들도 흉내낼 수 있는 기적까지는 모세가 직접 나서지 않고 그 일을 아론에게 맡긴다. 그러다가 바로 왕으로 하여금 자기네 술객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사임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모세가 바로의 神입장에서(출 7:11-12) 직접 징계자의 모습으로 나서고 또한 이스라엘이 사는 지역과 애굽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구별되어 징벌이 내려진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이번 사역은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지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11장 - 12장

애굽에게 내리고 있는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한 전쟁이라는 방편을 통해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한 면을 보여준다. 이것이 심판의 형식이다.

모세라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라도 이 정도라면 아마 직접 현현(顯現) 하실 때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을 때릴 때가 되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구출시킬 순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구출하러 오신 여호와라는 神의 특성과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 분이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적으로 간주하여 싸웠는지는 이스라엘의 장래 운명과 직결되는 일이 된다.

마지막 밤. 여호와께서는 애굽 전역에 장자를 죽게 하는 재앙을 내리면서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히 표적을 내린다. 그 표적은 집에서 1년 동안 같이 지낸 어린양의 피,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의 맏이를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 그 흠없는 어린 양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모두 담겨있다.

도대체 여호와의 구원이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만약 단순히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죽음의 천사가 아예 오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천사로 하여금 이 집에는 들리지 않도록 하는 번거러움이 요구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어린양의 희생 없이는 성사되지 않을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 같이 강팍하지도 않았고 애굽의 술객들 모양 하나님의 이적을 모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도 피가 요구된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단지 애굽이라는 특정 공간에서만의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구원이 적용된 민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죽음의 경험 안에서 그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었던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 하는 이동을 뜻한다. 여기에는 자국인이든 타국인이든 구별이 없다. 유월절 희생의 예와 고난의 떡을 먹기로 작정한 자들은 이제 모두가 여호와의 약속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 그들 사이에는 모두 한 공통점으로 묶여져 있는데 그것은 죽음 속에서의 회생경험이다. 그 사건에 개입된 것이 어린양의 희생의 흔적을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아야 한다. 만약 잊을 경우에는 이스라엘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밤은 여호와께서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개입했던 밤이다. 그 밤중에서 새로 탄생된 것은 유월절을 새로운 기반으로 한 새 민족이었다. 아무도 무사할 수 없었던 밤을 경험한 그들에게 어린양이 가지는 구원의 표징은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 없이는 현재의 우리가 없게 되어있다는 의식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형성케 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그 어떠한 인간의 힘이나 노력이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인간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가!

 

출애굽기 13장 - 15장

이스라엘에서의 제사 제도는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지시에 행했던 행동을 다시 해보는데 있다. 그 사건을 항상 현재화시킴으로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지속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전쟁을 하셔서 획득한 노획물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지상에서 제거된 장자와 대조적으로 산 장자로 새로 태어난 것도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이나 가축의 맏이를 따로 거룩한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여호와의 취지에 호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유월절 행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결코 인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대대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요셉의 해골을 이스라엘이 이동시키면서 이점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다(출 13:19)

이스라엘이 애굽의 땅을 나올 때 하나님이 앞장서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있다는 표시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필시 바다 쪽으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애굽나라와 대면한 이스라엘은 그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민족임이 실감나지 않았다. 유월절의 어린양에 기초를 둔 민족이지만 그것이 어떤 자연의 능력마저 초월하는 神의 본질과 연관된 것인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 바로 뒤에는 그들을 죽이려고 바로가 막강한 군대를 몰고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홍해바다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신적인 능력의 주입으로 된 것이다. 왜 그들만이 그런 혜택을 받아야 하나? 그것은 그들이 어린양에서 출발한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홍해에서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별하여 취급하고 있다.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건너온 홍해바닷가에서 다음과 같은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 안에 그들의 신앙고백에 다 들어있다.

「여호와는 용사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현재 우리 세대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능력이 계속 우리를 보호하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민족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여호와를 그곳에서 직접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점이 설정되었고 그 도달점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이루게 될 것이라는 신앙을 찬양에 담아 싣는다.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것이 곧 자신들의 원수인지를 알게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언약실현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들이 곧 여호와의 원수인 것을 그들은 광야생활에 들어가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광야생활로 들어서기 전부터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여러 번 원망하고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타고난 본성은 결코 애굽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 앞에 서서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어디로 몰아넣고 있는 지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여호와를 알고 있는 지는 그들이 광야에 발길을 옮겨놓자마자 들통나 버린다.

하나님은 그들을 쓴 물로 인도했다. 그들은 대뜸 불평한다. 물이 쓰다고 그러자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막대기 하나를 모세보고 물 속에 넣으라고 명령하고 모세가 실행에 옮기자 물은 곧 달게 되었다. 물은 정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광야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원망은 새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과연 나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쓴 물로 인도하여서 시험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홍해바닷가에서 몰살할 뻔했으나 기적으로 도와준 그 하나님의 능력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가짐이 우선 자리잡아야 된다. 오늘날 교회가 먼저 해야할 것은 환경개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처음사랑을 유지하는 일이다.

 

출애굽기 16장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원망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 여호와께서 새로 제시하는 세계는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그들은 지금 광야에서 계속 위기를 느끼고 있다. 여유 있는 양식이 마련되지도 않고 평소에 즐기던 고기를 구하여 미각을 돋운다는 것도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희망과 기대를 6제공할 환경이 전혀 못된다. 그런데서 자기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도한 모세에게 원망의 소리를 높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이다.

원망할 만해서 원망하는 것이 광야로 인도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데 핵심이 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시험했다고 되어있다.(16:4) 시험하시는 이유는 이 백성들이 과연 이 여호와에 대하여 얼마나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지를 타진하기 위해서이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원망할 권리나 불평할 위치에 있지 않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건져내었다는 사실이 단지 장소를 달리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신들에게 개입되었는가가 파악되어야 이해될 문제이다. 그들은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쳤다. 그들은 애굽과 현재를 같은 위치에 두고 비교하고 있다. 어느 곳이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곳이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자기들의 힘에 의존하여 살려고 한다. 자기의 생존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은 홍해가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다. 엄청났다. 그러나 그 일과 자기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계속 자기 주변의 상황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기존상식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애굽사람 못지 않게 그들도 불신앙적이다. 그들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그들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그 마음을 담아보려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목표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게된 그 심정을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으로 확산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음식 대신에 만나를 준다. 이 만나는 그들이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증거가 되는 음식으로서의 만나이다. 만나는 그들이 애굽에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만나는 현 이스라엘을 양식을 가지고 고발한 것이요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그들의 현세적인 불신앙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것은 항상 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사실로 인해 만나가 내리는 법칙을 만들게 되는데 안식일에는 주우려고 해도 찾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미완성을 철없이 요구하던 그들에게 완전하고 완성적인 것으로 대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은혜를 내려주고서도 원망한다면 결코 나의 장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이 만나는 약속의 땅에서는 도저히 구경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즉 원망거리를 고발할 필요가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나를 줌으로써 양식,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 내려보내신다. 이렇게 해도 이 하나님을 무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함에서 오는 영생이다. 생존문제는 자기네들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생존마저 은혜로 극복해 주신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교회가 죽음을 염려할 때, 이미 스스로 교회되기를 마다한 것과 다름없다. 성도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가 아니라 맡기는 자들이다.

 

출애굽기 17장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노정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점을 고려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답게 변신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이동하게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은 평소에 쉽게 생각하고 있던 식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물이 떨어져 우리들이 목말라 죽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이 있고 없고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계심과 계시지 않음을 멋대로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백성들의 불평에 대하여 하나님의 비천성을 다시 재현해 주신다. 목동 출신의 모세는 아직도 지팡이를 들고 있다. 양들이나 후리는 평범한 지팡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이는데는 더없이 적절하다. 마찬가지로 물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오직 돌만 산재해 있는 광야에서 비천한 것들을 통하여 더욱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여호와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 바위에 지팡이를 치게 한다. 바위를 내려치는 지팡이. 여기에 동원된 도구들은 둘 다 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바위를 내려치는 그 모세의 행위는 물과는 상관없지만 애굽의 강물을 내리친 행위와는 상관 있다.(7:5)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있었어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이스라엘 앞에서 행하게 하므로 전에 애굽의 강팍함을 징벌하기 위하여 애굽의 강물을 치던 그 심정으로 이 광야에서는 돌을 쳐서 물을 내게 했다. 따라서 그냥 물로서가 아니라 그 물이 반석을 침으로 말미암아 터져 나온 물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을 애굽과 같은 차원에 놓고 고발 내지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그 뒤의 사건에서 드러나는데 갑자기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덤비게 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맞이하여 싸우라고 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그 지팡이를 들고 산 위로 올라간다. 모든 백성들이 다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갑자기 아말렉이 등장했는가? 아말렉은 이 지구상에서 철저히 최후의 하나라도 살아남아서는 아니될 민족으로 성경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매우 특이한 민족이다. 그런데 그러한 멸종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만약 그들을 멸종시키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비이스라엘다운 것이 된다. 이들과의 첫 번째 만남은 이스라엘에게 전쟁이란 단순히 전쟁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보이는데 여호와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들은 결코 이 지상에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실례로써 여호수아가 아무리 山 밑에서 열심히 전투를 수행해도 모세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가 내려가면 그만이다. 전쟁의 승패는 산밑에서 인간의 손에 달려있는게 아니라 산꼭대기의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점이 이스라엘을 앞장세워 전쟁을 벌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특성이 된다.

지팡이라는 비천한 물건이지만 중요한 것이 그 물건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다. 그것을 사용하셨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고린도전서 1:25에 나와 있다. 사람들이란 약해 보이는 것이면 언제든지 무시하는 버릇이 있다. 이 무시로 인해 인간들의 마음은 한껏 강팍해지기 십상이다. 애굽에 내린 재앙의 특징중의 하나는 결국 바로 왕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그 神 여호와를 얕잡아 봤다는데 있다. 애굽군대의 홍해에서의 멸망사건을 하나님은 아말렉을 동원시켜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즉 지금 너희들이 누구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을 다시 주지시키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동행이란 결코 애굽적인 발생과 일치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사고방식과 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우선적으로 신경쓸 일이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기 위해 똑같이 세상적인 것을 내어놓고 경쟁해서는 아니된다. 이런 불신앙적 현상은 그리스도가 더할나위없이 무능해 보일 때 반드시 일어난다. 말보다 행위의 열매가 그 증거가 된다.

 

출애굽기 18장 - 19장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와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을 보다 체계 있는 정치형태로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러한 정치형태는 이미 이방나라에서 시도해 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이스라엘은 국가가 되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대하는 국가는 그런 형식으로 정해지지 아니한다. 언약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의(定義)이다. 창세기 12:1-3에서 언급된 그 복의 근원이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조건은 단 하나이다. 「언약 안」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복의 근원으로 선택한 자기 백성과 계약체제에 들어간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언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있는데 왜 또 계약상태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국가를 세울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국가 설립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한 그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아직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가진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체결의 의도이다.(창세기 117:20) 이러한 국가가 생기는 과정에서 바로라는 부정적 역할을 맡은 한 이방왕이 등장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언약국가는 철저하게 비애굽적인 바탕을 하고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출애굽의 탈출에서 보여준 어린양의 희생과 대속정신이 또한 이스라엘의 건국취지이어야 한다.

거룩이라는 양보 안되는 절대법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에서 새롭게 도입된 거룩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생존되는 국가로 남는다. 그 새로운 거룩이란 이스라엘과 마주서는 거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백성 안에서 함께 동행하는 거룩의 모습을 두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 모세 언약이다. 출애굽에서 보여진 어린양의 희생을 국가의 건국이념으로 삼고 그 정신으로 거룩한 분의 동행을 가능케한 언약이 바로 모세언약이다. 따라서 모세언약은 다음의 두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하나는 거룩한 죽음의 말씀의 기초인 10계명이요 둘째는 그 무서운 말씀의 진노를 덮어주는 희생의 피를 생산하는 제사제도이다. 출애굽기 19장의 위치에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고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러한 취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거룩 그 자체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을 희생의 거룩으로 승화시키는 그 자체를 거룩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 언약이다. 따라서 무슨 계명을 준수할 때도 애굽에서 종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로 지키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거룩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점을 알기까지는 광야에서 약 40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된다. 왜 10계명을 다시 언급해야 되는지는 그들의 실패한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어쨌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 분은 더할 나위 없이 무섭고 두려운 분이다.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분이다. 만약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왜 여호와께서 그들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데서 불러낸 것인가를 알려줄 차례가 온 것이다. 전에 떨기나무로 말씀하실 때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불러낸다고 되어 있다.(출 3:2) 그 섬기는 방식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 양쪽에다 모두 희생의 피 안에서 화목 시키는 것이다(24:5-8) 우리가 무엇에서 비거룩이며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에 제물은 희생되어야 하는가 라는 점을 그들이 깊이 알고 제사를 드려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한 조치이다. 즉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애굽같은 비거룩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일은 언약을 준수함으로만 가능하다.

 

출애굽기 20장 - 23장

제사의 요체는 법궤에서 벌어지는 일에 있다. 그것은 성막에서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지성소 안에 모셔져 있다. 법궤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과 법궤의 뚜껑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의 상관관계에서 모세 언약의 핵심은 보여지는 것이다. 20장에서 시작되는 시내산계명의 나열은 새로운 질서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그 나라는 희생의 의미를 구현하는 나라이다. 즉 애굽에서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그 심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급선무이다.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낼 수 밖에 없는 그 이유와 동기는 모세가 전하는 10계명에 낱낱이 다 들어있다.

1계명 : 애굽의 神들을 쳤던 여호와이기에(12:12) 그 기능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최종공로가 누구에게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논의에 대해 쐐기를 박는 언명이다.

2계명 : 여호와의 형상은 피조물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로도 유출되지 아니하며 유사점이 없다. 여호와는 철저히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피조물 그 어디에도 거룩의 의미를 줄 수 없다.

3계명 :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종교처럼 주술적인 도구로 이름이 남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여호와는 인간의 소원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계명 : 여호와의 뜻은 창조의 완성에 있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다. 오직 이스라엘은 이 목표점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애굽에서의 탈출을 안식을 향한 도약이라고 봐야한다.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여호와의 의지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5계명 : 그 교육의 역할을 가정에서 부모가 담당하게 될 때 자녀에게 돌아갈 복은 그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경우뿐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6계명 :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파괴는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오직 여호와의 배려로 된 것임을 애굽에서부터 나와 인도 받으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7계명 : 부부의 사이는 여호와에 의해 마련되었다. 여호와가 제공한 신성한 관계에 그 누구도 함부로 뛰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8계명 : 재물의 공급도 그들이 애굽에서 빈털터리였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한 측면으로 보여진다. 도적질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치게 한다.

9계명 : 이스라엘은 다같이 종 되었던 데서 구출 당한 민족이기에 운명을 같이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고유성을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거짓은 이웃 속에 또 하나의 적을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10계명: 이웃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기여의 대상이다. 탐욕이 이웃에게 다가서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서신 정신으로 이웃과 교제해야 한다.

이상의 10계명은 제단에서의 제사정신을 규정하게 하고 이스라엘 전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그 어느 한 구석에서도 모두 다 전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했다는 겸비함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 종교심의 발로로 피조물 안에 있는 것에 굴복하여 예배하는 행위나 과거의 자기신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법을 어기고 언약을 어겨 죄로 간주된다.

여기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사회법이 얼마나 우수한지로 차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근본사고의 차이 때문이다. 즉 여호와의 은혜가 등장되지 않는 윤리, 여호와의 돌보심 덕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없이 행하는 도덕은 윤리도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그 어떤 사회질서 차원에서 도덕이나 윤리관도 보이지 않는다. 소위 종교의 정치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보자. 무엇이 차이가 나는가? 아무런 신학적인 근거나 배경없이 인간의 양심과 사회질서 차원에서 행정해도 여호와와 관계 있는 구원의 기관이라 자청하겠는가?

 

출애굽기 24장 - 31장

모세 언약에 있어 복의 강림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있다(20:22-21)

모세가 이해하기에는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 그 자체만으로 복의 강림이 성사되지 못하고 그 이전에 말씀에 대한 준행만이 결정적 요인이다.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은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헌신의 표라고 봐야한다.(24:7) 만약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사실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된다. 즉 비록 우리가 계명대로 못살더라도 우리가 드리는 이 번제와 화목제를 받으시고 그냥 넘어가게 하소서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바로 신상(神像)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복을 획득하던 이방종교의 의식과는 달리 그 신상의 자리에 계명과 율례를 갖다 놓는 것이 특색이다.(20:23) 복을 따내는데는 어떤 테크닉이 쓸데없다. 다만 자비로운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22:27) 약자를 보호하고 이웃을 환대하는 법을 준행할 뿐이다. 만약 이러한 율례를 지키지 않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 그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 되어서 복과는 상관이 없이 오직 죽음만이 찾아들 뿐이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모세 언약이다.

모세는 그 희생의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 전에 모세는 모든 말씀을 지상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말씀이 실효를 거두는 세상의 건설, 이것이 모세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면 흔히 신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모세 언약은 조건언약이 되고 만다. 많은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언약과 다윗언약은 무조건언약인 것에 반해 모세언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신학자들의 이러한 결론의 도달 이유는 언약을 구약의 중심사상으로 인정치 않고 다만 그 중심사상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 때문이다. 즉 어떤 일관성 전개에 있어 원활치 못하다는 것이다.

모세 언약도 은혜언약이며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24:12 한절에 그 실마리가 보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는 구절이다. 이 본문에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일까? 단순히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다면 이것이 이미 그전에(24:4)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미 기록된 것이 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다시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받을 부분이 무엇인가? 또 왜 꼭 돌판에 친히 기록해야지만 가르침이 성립되는가? 이점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세가 두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율례와 계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막을 만들기 위한 구조를 지시받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할 일을 위하여 특수한 사명을 띤 사람의 복장이라든지 하는 일을 지시받는다(25:1-31:17) 그래놓고 정작 산에 올라간 원래의 목적인 돌판은 내려오기 직전에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돌판에 기록된 말씀은 성막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10계명뿐이다(신명기 4:13) 왜 이미 알고 있는 10계명을 친히 돌판에 적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첫째로 시내산에서 친히 모세가 들고 온 원판이 어디서 깨어지는가를 보면 되고 둘째로 그 깨어진 돌판을 대신하여 만들어지는 두번째 돌판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며 세번째 모세가 산에서 말씀을 적어 가지고 온 그 둘째 돌판이 나중에 어디에 보관되는가를 아는데 있다. 즉 돌판 보관과 성막에서의 하는 일과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면 밝혀진다.

교회가 목회를 할 때 가장 주의해야 될 일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주술적인 시각에서 거론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육신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른다.

 

출애굽기 32장 - 40장

앞에서 이야기한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해보면 모세는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산밑의 백성들이 다른 형상의 여호와를 섬기자 황급히 들고 있던 돌판을 깨어버린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놓일 자리에 피조물의 형상인 송아지의 형상을 놓고서는 모세언약식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복을 기대했었다. 모세는 돌판이 바로 성막 가장 깊숙한 곳,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임재 하는 장소에 놓여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기거하시는 형태이다. 그런데 막상 산을 내려와보니 그 자리를 송아지 神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모세 언약에 의한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언약의 깨어짐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이다. 모세는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편에 설 사람을 추려 다시한번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고대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제시한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규정짓고 모세와의 대화만 추진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은혜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겠다고 나서신다. 하나님의 자의로운 뜻에 의해서만 무조전적으로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이미 범죄에 가담한 언약파기자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깨어진 돌판과 똑같이 지상에서 만들라고 하신다. 이는 인간쪽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모세 언약은 새로운 장을 연다. 성막이(법궤)없는 모세언약에서 성막이 있는 모세언약이 된다. 거기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살 수 있는 원인은 송아지의 형상이 놓인 그 자리에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돌판은 그냥 방치되지 않고 법궤라는 고운 상자안에 놓여지게 된다. 그리고 일년에 한차례 대 속죄일에는 백성을 대표하여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 위에 뿌림으로 모세언약은 계속 유효하게 되는데 그 피가 뿌려지는 뚜껑을 가지고 속죄소(죄가 용서되는 장소)라고도 하고 또는 시은좌(은혜가 내려않는 좌석)라고도 한다.

성막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행위는 바로 죄용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죄 용서함을 받은 그 정신상태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사회정신으로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계명과 율례와 법도의 정신은 시은좌, 또는 속죄소에서 나와야 한다. 결코 형식적 제사만이 능사가 아니다. 과연 여호와는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구나」를 그들 만큼은 실감해야 한다.(34:6)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모르고 함부로 법궤 뚜껑을 열어본다는 것은 거룩한 분을 직접 대하는 것이 되어 사정없는 진노가 쏟아져 죽게된다. 법궤 안에는 인간들의 범죄의 증거들이 들어있게 된다. 또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이 정도까지 원망했다는 증거물이 들어있게 된다(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와 증거판)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범죄를 극복했기에 구원이 성사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서움 깊이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가 같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이스라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승리하는 복을 받는다. 여호수아가 법궤를 앞장세우고, 요단강 도하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법도와 계명의 정신을 법궤를 신앙하는 신앙으로 보았던 것이다.(여호수아 1:7-8) 자, 아브라함 언약대로라면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점령하도록 되어있다. 무엇으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인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할 때 여호와께서 승리케 하신다. 자비의 세계, 용서와 불쌍히 여김이 삶의 법칙이 되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약속의 세계이다.

목회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보다 많이 아는데 있다(에베소서 3:18-19) 이러한 사랑을 이해하는데는 그만큼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는지를!

 

8. 레위기의 제사법과 성결법 (모세언약을 배경으로)

 

서론

 

언약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이란 차원으로 상대할 때 다루시는 원리원칙이다. 언약 안에서만 일하고 언약 밖의 일은 안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그런 원칙을 친히 세우셨기 때문이다. 레위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무슨 언약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도 같은 취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언약을 하나님 활동의 중심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약속이란 이미 그 자체로서도 쌍방간의 활동을 제한시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게도 자유롭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약속의 제정자라고 해서 약속하고 무관한 제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이탈을 주장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약속이란 이렇듯 하나님의 모습을 구속시킨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그러한 언약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특별한 후속조치를 남기고 있는가를 보여주게 된다.

 

본론

 

⑴ 모세 언약의 의의(意義)

모세 언약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건지는데 동원된 하나님의 원리원칙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취지가 담겨있어야 될 특이한 국가이다. 그 뜻과 취지는 족장들에게 이미 알려준바 있다.(창세기 12:2, 15:4, 출애굽기 3:15) 즉 복의 원천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이렇듯 하나님의 복 없는데서 복 있는데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이런 아브라함언약을 국가단위로 성취하도록 하는데 작용할 것이다.

그러면 복은 국가라는 차원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주어지게 될까? 족장들에게 있어 복이란 곧 생명이었고 죽음의 극복이었다.(창 22:13, 32:30) 이러한 생명은 그 죽음을 대신해 줄 존재가 있을 때만 비로소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죽음을 대신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라는 의(義)를 지닌 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죽음 당하는 경험을 갖게된다.(창4:8-11) 하나님은 이 자를 공격한 측에 비로소 저주의 개념을 가지고 상대하신다.(창 4:11) 하나님은 억울하게 순교 당한 자의 義를 복의 중심내용으로 삼고자 하신다. 그리고 그 의를 지상에 확산시켜 보려고 하신다. 최초로 죽은 인물, 그 속으로 아버지 아담을 위시하여 모든 복의 대상을 흡입시킨다. 따라서 복의 원리는 이미 확정적이다. 즉 의인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간주하여 그 죽음을 복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언약이란 이 죽음 속으로 대상을 데려오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모든 언약은 반드시 참여해야 될 인물이 중심이 되어 주어진다. 모세 언약은 바로 모세에게 일어난 그 경험을 언약백성 전부에게 발생시켜 줌으로써 모세안에서 하늘의 복을 맛보게 하려는 언약이다. 그 복은 義요 거룩이다. 생명이란 의로운 존재가 될 때 주어진다.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의 한평생을 통해 하나님은 체험되었다. 그분의 활동은 전부 자비와 긍휼이란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출 2:6, 34:6) 물에서 건짐 받은 것도 배후에는 하나님의 자비의 섭리가 있었고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 것도 자비와 긍휼이었고 땅에 내려와서 장막에서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보호막 덕분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세로 하여금 의인의 대신 죽음이 땅에서 파생된 결과임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세 자신도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겨 하나님의 노를 유발시키자 자기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 책에서 제거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32:31-32)

모세와 하나님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와 긍휼의 중심을 찾아 그 사건 안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 사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월절사건이다. 흠없는 1년된 어린양이 그날밤에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 양의 피를 이스라엘 집안의 출구를 점하고 있다. 그 밤은 하나님이 세상을 방문하는 밤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의 거룩 앞에 설 수 없다. 다만 모세에게 주어진 구원의 사건만이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려준 것이 무엇이었던가?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던가! 그 자비와 긍휼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족장의 하나님 그 자체에서부터 나오는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났을 때, 족장의 하나님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족장의 하나님이 이제 모세 앞에서는 죄없는 양의 모습으로 그 속성을 비치신다. 자비와 긍휼은 곧 죄없는 존재의 대신 희생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알고 있다. 이 여호와의 위력이 애굽의 술객이나 바로 왕 힘보다 더 세다는 것을 이전의 9가지 재앙으로 실감한 바 있다. 사실상 그 위력은 바로 희생과 대신 죽음의 위력이었다. 그것이 이제 자비와 긍휼의 속성으로 전환되어 이스라엘에게 퍼부어진 것이다.

유월절 그날밤의 약속은 이스라엘 전체를 포용할 만한 여지를 미리 마련해 가지고 있었다. 그 약속의 중심은 어린양의 희생의 피이다. 그 피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즉 장자를 배태하는 것이다. 약속의 민족이다. 마치, 사라가 이삭을 배태하듯이 말이다. 이 둘 사건 사이에 공통적으로 개재 되어있는 할례언약의 사상의 일치성을 증빙해준다.(창 17:13-14, 출 4:23-26) 출애굽은 결코 애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유월절 희생양으로부터 이스라엘은 출발했다. 바로 밤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밤의 민족이다. 진노의 밤, 죽음의 밤을 이긴 민족은 이 민족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일진대 이러한 이스라엘 국가가 하나님과 약속을 맺는다면 무슨 내용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은 뻔한 이치다. 즉 유월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신에로의 참여이다! 이러한 언약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때 그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준다.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희생양의 취지로 돌아서기를 권고하고 있다. 거룩을 향해 버텨냈던 경우가 이 경우밖에 없었기에 국가단위로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도 이 수 밖에 없다.(출 19:5-6)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해서 그 유월절의 양은 지속적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유월절 양은 출애굽 당시에만 필요한 방식에 국한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알고 있는 수준처럼 어린양이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이후에 이스라엘 집단에는 다른방식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유월절은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 드려지기 때문이다.(출 13:5, 민수기 9:5에서 처음 유월절은 시내산 밑에서 드려졌다) 유목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정착한 농경풍토와 국가라는 거대 조직사회에 맞는 방식속에서 사상의 토착화도 함께 고려해 보는 것이다. 그 국가는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전쟁발생 요인을 지니게 되는 중심에 건설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비와 긍휼과 그리고 거룩이라는 것도 새로운 변화에서 고유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색채를 띠고 등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거룩의 인격화 조짐이다. 모세 언약은 레위기에서 이 관점에 맞추어 본질의 깊이2를 더해간다.

 

⑵ 레위기에 있어 모세 언약의 구체화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받았던 계시와 장막에서 받았던 계시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레위기 연구의 접근 취지이며(레 1:1, 출 40:24) 레위기의 모든 내용은 모세 언약에 종속되어 모세언약의 본질이 더욱 확연히 우리 눈에 띄게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표이다.

우선 제사가 모세 언약에서 점하는 위치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 차례씩 여호와를 뵙기 위해 정(定)한 장소에 나타나야 한다. 이들이 하나님의 계신 곳으로 간주하는 곳은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족장의 하나님께서 애굽의 神과 대결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전쟁에 참전할 때 사용하신 그 이름이다. 그러니까 그 이름은 세속전쟁을 경험한 흔적을 지닌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또 기념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상에서 이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신의 겸비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세속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전 우주는 그 전쟁의 신 앞에 굴복 당해야 마땅하며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와 진노가 뒤따르는 것이다.(민수기 23:20-23, 여호수아 2:9)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 신과의 전쟁 과정을 담아 모세 언약으로 규정해 놓아 버렸다. 그렇게 된 이상 하나님의 이름은 곧 모세언약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누구든지 모세언약에 위배되는 사람은 승리의 신인 여호와에게 정복당한 애굽 꼴이 될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리면서 제사하느냐 또는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그 구원의 사건을 지속적으로 담아 대대로 전달할 수 있는 제사가 되느냐가 중요하다. 출애굽의 사건을 단지 한 과거 수난으로 종결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실제로 때때로 그 후에 반복되어 재현되려면 그만한 효과를 지닌 장치가 필수적이다. 그 장치가 바로 언약이다. 그런데 미리 언급한 것처럼 유월절 어린양을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하는 정결한 희생 양으로 승화시키고 그것은 약속의 핵심으로 정한 이상 모든 언약의 활동도 이 정신에 의해 규제된다. 거룩이라는 것도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하는 신의 속성을 두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도 모세 언약 안에서는 희생의 모습으로 재해석되어 보여진다. 그 희생제물 위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은 기념되고 그럴 때 출애굽의 복은 항상 이스라엘 전체에 부어진다. 제사의 사건이 지상에서의 거룩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0:24의 제단법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3차례 하나님을 뵙고자 나오는 것은 사실상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장막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리는 행위를 말하는데 그들의 행위는 모두 모세언약에 따라야 한다. 그 모세언약은 새로운 거룩을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총체적으로 구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무엇을 통해서? 오직 제사법과 성결법을 통해서이다. 제사법이란 희생의 세밀화이며 성결법은 그 희생정신의 적용을 두고 말한다. 레위기 계시가 성막에서, 즉 법궤 앞에 서 주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영속성을 뒷바침해 주는 말이다(레 1:1)

희생이란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통로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곧 희생의 세계를 향한 부르심이다. 이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의 승리의 혜택을 누리게된다. 거룩이 비거룩에 대하여 승리한 그 승리를 두고 말한다. 그 희생의 제사에 대하여 출애굽기 28장에서는 제사장제도가 도입된다. 제사장이 되는 인물은 그전의 장로제도나(출 24:1) 천부장 백부장 제도에서(출 18:25-26)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결정된 제도이다. 인간이 정한 제도권에 규제 받는 인물은 결코 하나님의 희생을 대변할 인물이 못되는 것이다. 제사장 중심의 제도권으로 전환시키려는 하나님의 시도는 모세 언약의 대폭적인 확대조짐으로 2 아드려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정치제도의 무가치성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룩성이 배제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스라엘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 등장되려면 기존의 제도권에 있는자들도 뭔가 굴복해야 하는 거룩의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고유한 권위가 서려 있어야 한다. 이 권위는 희생의 참여한 자의 권위이다.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어쨌던 하나님께서 아론도 함께 불러주셨다. 아론은 철저하게 모세에게 예속된 인물이며 모세가 해야할 일이라면 아론도 그 곁을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이 모세언약을 통해 모세가 경험한 사건을 그 언약속에 담고자 했을 때 아론도 이 언약의 세분화작업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모세와 백성사이에서 모세는 자기가 가져온 계명과 율례는 거룩한 말씀편에 섰다면 백성들은 그 반대편에 서게된다.(출애굽기 24:1-8의 모세언약 체결 현장에서) 언약의 피는(희생제물의 피) 그 가운데 놓이게 될 때 그 중보적 직책을 감당할 자가 결코 백성들 속에서 선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세언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편인 모세편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자는 곧 아론이다. 아론은 모세의 확장이다. 아론의 임무가 모세언약의 실제적인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그는 모세와 백성사이에 서있다. 아론이 백성들 중에서 그들의 의사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대표로서 모세와 마주설 수 있는 것은 시내산에 오를 때 아론은 철저하게 모세로부터 소외되어 백성들 중에 거했다는 사실이고 하나님이 그를 제사직이란 새시대의 제도를 시작하면서 그를 새로 거룩한 인물로 그 백성들 중에서 뽑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히브리서 5:1) 모세가 두번째, 세번째 시내산을 오를 때도 아론은 백성들 편이 되어 있다.(출애굽기 32:3)

이제 남은 문제는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자기들과 함께 기거하는 그 제사장이라는 거룩에 동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리하는 제사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레위기 1:5) 하나님은 백성들의 제사에서 그들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제사에서 그들을 만난다. 모든 제사는 반드시 제사장의 손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제사장을 대할 때는 마치 백성전체를 대하는 양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특별한 모든 거룩을 요구하신다. 제사장의 모든 모습과 행동은 개인의 자격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제사라는 행위 속에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만남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체의 만남이다. 백성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제사장 제사로서 제사장이 대신 제사를 드려야 한다. 단 백성들은 그 제사장 제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함으로 곧 제사장의 거룩에 동참될 수가 있다. 아론계열이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거룩의 속성을 백성들보다 한발 앞서서 선험적(先驗的)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제사뿐 아니라 모든 성결법도 제사장 계열이 더 고차원적이고 더 철저하고 더 포괄적이다. 제사에 있어 제물의 등급도 일반백성과 차이가 난다. 그리고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이 더욱 세밀하고 정결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 제사법을 생각하기 앞서 먼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임직 할 때의 제사법을 다루어야 한다.

 

⑶ 제사장의 임직에 관한 제사법과 그 확대

제사장직 임직은 사실은 백성2들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위임하는 직(職)이라고 볼 수 있다. 제사장의 복장이 이를 말해주는데 가슴팍과 어깨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이 붙어 있다.(출 28:12,211) 위임제도 그 자체가 백성을 대신하는 희생제도와 연관이 있다.(출 28:1) 그 위임식 절차는 이를 말해준다. 이 위임절차의 제일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29:46」 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출애굽의 정신이 중도에 소멸되지 않고 제사장 임직을 통해 면면히 이스라엘 내부에 재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희생의 정신은 제사장 임직식에 어떤 식으로 담기게 되는가?

우선 모세가 이 경우 사제로서 등장한다. 이는 이 임직식에 결코 모세로부터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 언약의 확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아론은 모세가 하는 일을 대행하여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모세언약의 혜택을 입은 자가 바로 아론인 것이다. 그는 거룩하며 거룩의 이름으로 태어난 첫번째 인물이다. 왜냐하면 모세에 의해 첫번째로 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처음 출애굽 할 당시에는 누구든지 혈육에 의한 자연적인 첫 출산자는 선택과 관계없이 모두 거룩한 자들이었다.(출 13:1) 그러나 시내산 계명 이후 모세의 제사장직에 최초로 가담한 자가 백성을 대표하는 거룩한 자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첫출산자가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까지 오는 과정이 보다 세분화된 것이다. 나중에 민수기에 가면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선택된 레위지파가 온지파를 대변하는 대표지파가 된다.(민 3:12) 어쨌든 7일동안 치러지는 임직식의 주된 내용은 최초의 번제와 최초의 속죄제와 최초의 소제와 최초의 화목제를 이 임직식에 가득 담아 놓는 일이다. 물론 모세가 아론에게 전달할 이 사항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제사준칙이 된다. 그러면 아론에게 전달된 그 각종 제사의 의미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이점을 알기 위해서 제사장제도가 왜 도입되었는가를 봐야한다. 출애굽기 24:5에서 처음 모세 언약을 체결할 때는 번제와 화목제만 있지 속죄제는 없다. 그렇다면 속죄제가 이 가운데 끼여든 것은 순전히 원래 제사인 번제와 화목제를 성사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소제는 번제의 일종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피우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다만 동물제물이 아니라 음식제물로 한다는 차이 뿐이다.(레위기 2장) 그래야 원래의 언약형태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계명에 대한 헌신과 계명 안에서의 화목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거룩해진다.(출 24:1-8) 그런데 그것이 죄로 막혀있다면 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누군가가 보상되어야 한다. 제사장의 등장은 백성들의 죄를 자기가 위임하는데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장 희생제사에 그들로 참여토록 한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대제사는(레위기 9:11-24) 제사장이 주도하여 임직식이 7일만에 끝나는 그 이튿날 행해지게 되는데 제일 먼저 드려지는 제사는 번제나 화목제가 아니라 속죄제이다. 이는 곧 제사장의 존재 의의를 말해준다. 따라서 번제나 화목제는 반드시 속죄제가 먼저 드려지고 병행하여 드려져야 한다.(레위기 14:13, 역대하 29:21-24참조) 또한 화목제는 번제가 먼저 드려지고 그 번제물 위에(레위기 3:5) 제물을 얹어 드려져야 되는데 이 순서는 최초의 대희생제사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속죄제 레 9:15- 번제 레 9:16- 화목제 레 9:18) 이렇듯 모세로부터 위임받은 아론의 4권한은 자기가 받은 권한을 이스라엘 전체의 권한으로 재위임하고 있다. 즉 죄사함의 권한을 이스라엘 전체의 권한으로 재위임하고 있다. 즉 죄사함의 권한을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죄란 바로 원래의 모세언약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하고 곧 희생정신으로부터 이탈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번제란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헌신을 의미하고 화목제란 그렇게 주어진 복을 다같이 누리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정신이 번제와 화목제에 담겨있다. 번제는 레위기에 제사법에 제일 먼저 등장하게 되고 그 다음이 화목제이고 그 다음이 속죄제인데 이 번제 제물의 경과는 완전 태워짐으로 귀착된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지는 것이다.(레 1:13) 이러한 제물이 희생하는 태도는 출애굽 때의 어린양의 희생과 유사한데 그것은 같은 번제의 일종인 소제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즉 희생의 제물은 누룩이 들어있지 않는 고난의 떡으로서(신 16:3) 또는 가루로서 바쳐짐으로 희생의 뜻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말씀에 대한 헌신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 애매히 희생을 한 어린양의 운명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파악했다는 말이 된다. 먹고 마시고 생존하기 위한 음식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제공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한 음식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헌신이자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러한 헌신 뒤에는 진정한 화목이 하나님과 성립된다. 화목은 하나님이 기쁨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번제의 제사에서 그것이 가능한데 번제는 하나님한테 「향기로운 냄새」가 되기 때문이다. 그 향기로운 제물 위에서 겹쳐서 화목제로 드려질 때 일부 바쳐진 제물 이외에 다른 고기들은 정한 장소에서 제물 제공자와 제사장과 남녀노소 할것없이 온 식구가 한데 둘러앉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된다.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의 낮아지심과 대속의 정신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이런 진정한 번제와 화목제를 가로막는 요소는 제거하여 다시 화목을 되찾기 위한 제사이다. 속죄제의 특징은 제물의 전 부분이 최종적으로 진 밖에서 태워진다는 것이다 (제단에서 태워진 기름도 결국은 재를 진 밖으로 옮겨서 다른 고기부분과 함께 다시 태워져서 버려진다 레 44:12) 이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서 비본래적 언약요소는(속죄제) 결국에는 제외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동일하게 드려지되 다만 20%의 보상을 제사장과 실 피해자에게 갚아야 비로소 제사가 끝나는 제사이다. 제사의 종결이 원상복귀 정도가 아니라 손해 입힌 자의 성의와 정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가능케 하는 요소로서 제구실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속죄제와 속건제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반드시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자기 잘못을 충분히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고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제사제도는 결코 주술적이나 마법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사장이 대신 희생한다는 차원이기에 그 희생에 동참이 되어야지 희생의 구경꾼이나 그 희생을 이용하려 들다가는 저주가 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에 있어 제사법은 아론이 모세에게 위임받은 희생의 터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함께 참여시키는 장치이다.

 

⑷ 제사장직 임직에 관한 성결법과 그 확대

성결법이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법칙을 두고 말한다. 이것을 좀더 세분화시키면 「하나님이 거룩하니 하나님이 선택하여 기름 부은 자도 거룩해야 하고 그 제사장을 본받아 너희도 거룩하라」는 내용으로 나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백성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했을 때는 단순히 제사일을 하면서 기능적 면에서 기술을 발휘해보라고 선발한 것이 아니다. 성막제조 기술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차원이 아닌 것이다.(출 31:11-6)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친히 그의 몸에 맞는 옷을 따로 만드시는 것은 거룩을 인격화시켜 백성들 가운데 세워놓으시려는 시도이시다. 거룩이 한 산 존재의 형태로 이스라엘과 더불어 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먹을 음식이 그들 속에 있으며 그와 결혼할 대상도 그들 가운데 있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는 거룩의 빛을 주위에 비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그 자체로서 거룩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과의 끊임없는 선이 연결되어져야 한다. 제사장과 항상 연결이 닿는 분은 애굽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신 그 여호와라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성결법은 「거룩으로 애굽을 치신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낸 너희들을 철저히 애굽방식에서 격리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드려져야 한다.(레 11:45, 18:3-4, 19:36) 문화적인 차이는 곧 애굽과 결별하라는 선언에 동원되어진 문화이어야 한다. 음식물에 관한 정결법으로 예를 들면 분리를 나타내는 「굽이 갈라진 가축들」이 정결한 것이다. 또는 두 번 생산을 의미하는 되새김하는 가축도 먹을 수 있는 거룩한 것이다.(이런 조건들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이다) 또 생명에로의 귀환을 뜻하기 위해 죽음과 주검(시체)에 관련된 것은 철저히 부정한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하늘을 사는 새들 가운데서도 땅 짐승에 준하는 식으로 사는 새들은 부정하고 철저히 땅에 붙어 기어다니는 곤충과 동물들은 단호히 거부된다. 반면 땅을 차고 하늘로 도약하는 시늉으로 살아가는 메뚜기 종류는 거룩하다. 물 속에서도 땅의 사는 형태와 유사하게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것은 먹을 수 없다. 이처럼 땅 그 자체에 대하여 뭔가 부정과 부패와 저주의 조짐이 있음을 암시해준다. 인간인고로 땅에 거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하지만 그 땅의 저주와 부패에 매여 살아가서는 거룩의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이다. 땅의 부정과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땅위를 지배해야될 사명이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이것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특징이다(출 19:6) 특별히 이 분리작업(거룩한 작업)에서 돋보이는 것은 새생명에 대한 집념이다. 새생명은 기존의 자연출산부터 통제시키고 성결시키는 작업을 선행케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생명은 결코 세속적인 곳에서는 주어지지 않고 모세언약 속에서 주어짐을 나타낸다. 죽음과 될 수 있는 데로 멀어져야 하고 죽음의 흔적인 병과 나약함과 손댈 수도 없는 난치병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지워져야 한다. 특히 제사장 가문에서는 보다 철저해야 한다. 아예 혼인부터 정결한 처녀와 결합되어야 하고 신체적인 불균형이나 흠집을 보이는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이기 때문이다.(레 21장) 바로 이렇듯 생명의 생기 발랄함을 보여주는 제사장들만이 저주의병 이라고 할 수 있는 문둥병이나 혈류병자를 상대하여 거룩에로의 진행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결문화는 이스라엘의 거룩에의 접근을 표상하는 방편으로 등장한다.

 

⑸ 제사법과 성결법의 결합

레위기 10장을 보면 제사장의 과실과 거기에 치러진 응분의 대가가 나온다. 냉혹한 이 대가는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거룩화 작업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지 않는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태우다가 갑작스러운 화염에 의해 즉사하고 만다. 제사장의 역할을 무엇인가? 하나님의 긍휼을 백성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있다. 그런데 제사장 자신이 긍휼을 전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긍휼이 제사장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다가서도록 되어야 한다. 제사장이 긍휼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 안에 제사장이 놓여져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제조하려고 했었다. 제단의 불로서 태워져야 하는 향은 향 그 자체의 향기로서 하나님에게 상달되는 것이 아니다. 제물의 고난과 순교의 위에서 피어나야 한다.(요한계시록 8:11-5, 레위기 2:2, 16:12, 민수기 16:46)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대속한 자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그것을 새로운 지배원칙의 내용으로 결정했기에 제공되는 것이다. 따라서 긍휼과 자비 안에는 반드시 누군가 희생자가 들어있음이 전제된다. 물론 거룩한 자의 죽음이다. 제사장의 과실은 제사장 개인의 죽음으로 책임추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이 온 회중에 퍼진다.(레 10:6) 모세가 보기에 이번 노여움은 제사장 집안의 문제점 때문에 발생했기에 여기에 대하여 응분의 긴급조치를 취한다. 그 응분의 조치란 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 주어진 규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첫째 장례절차를 나머지 제사장들이 관여하지 못한다. 이는 레위기 21:10-11에 의하면 제사장은 어떤 장례식에도 참석해서는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해야하며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백성들 입장에서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아론의 생각은 모세와 달랐다. 자기 아들은 제사장으로서 죽었기 때문에 제사장 속죄제로 간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속죄염소는 아론이 먹지 않고 그냥 전부를 진 밖에서 태워버린 것이다(레 8:17 일반인들의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먹게 되어있다. 레 6:17-23) 여기에 대해 모세가 아론을 나무랐다. 그러나 아론은 모세에게 반박한다. 죽은 아들이나 여기 살아 있는 제사장이나 다같이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닐까 한다. 이 답변에 모세도 같이 동의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말해주고자 하는 뜻은 인간 제사장의 불완전성이다. 그러나 인간 제사장의 불완전성임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죄용서가 하나님의 고유권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리가 인간 제사장의 실수와 과오로 막힐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과오에 대해서는 전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될 것이다. 여기에 성결법과 제사법 결합의 진정한 의의가 담겨 있다. 성결법을 위배하고 자기의 과오를 인정하는 자에게 제사장 제사가 기다리고 있다. 결코 제사장이 그렇게 해 주어야만 죄용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제사장을 대동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자기희생을 또 다시 제공하면서까지! 긍휼을 원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하나님은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장을 죽여가면서까지! 새 생명을 주고자하는 하나님의 열의는 해산한 여인이나 문둥병환자나 유출병환자나 가릴것 없이 찾아가서 자기희생을 대가로(속죄제 혹은 속건제) 부정스러운 그들을 거룩에로 이끄셔서 향기로운 냄새로 여기신다.(번제, 레2위기 15:15, 30) 이러한 취지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1년에 7월 10일 대속죄일 아론 대제사장 자신이 온 민족의 희생자가 되어 자신을 위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바르고 난 뒤 속죄의 염소(아사셀 염소)를 두 마리 잡아 하나는 잡고 다른 한 마리는 멀리 광야로 해방시키는 그 의식을 행할 때다. 이때 희생의 위력과 모세 언약의 자비로움이 극대화된다. 백성들의 죄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레 16:33)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의 내용이다. 이 날의 행사 중심이 되어 파생되는 모든 성결을 위한 제사법은 대제사장의 희생을 근거하여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고유권한은 대제사장의 희생으로 그 책임 하에 대제사장의 권한으로 이양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와중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레 16:1-2) 아론의 두 아들에게 죽음을 야기시킨 그 무서운 속죄소도(지성소도) 아론의 희생의 피가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은혜의 폭은 더욱더 크게 적용되게 된 것이다. 단 백성들로 제사장을 본받아 정결한 제물로서 제의에 참여할 때 한한다(레22장)

이제 이스라엘은 진정 제사장 나라로서 제사장 중심체제로 들어설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모든 월력은 이제 유월절에서 시작하여 대속죄일을 지나 초막절에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그들과 함께 멸절당하지 않고 건져냄을 이루어낸 그 하나님의 희생이 1년 내내 이스라엘을 덮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항상 제단의 불은 꺼지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이 나라를 유지시켜야 한다(레 24:1-9) 무엇을 유지시키나? 오직 거룩을 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거룩한 정신은 이스라엘의 실생활 속에서 당연히 확산되어야 한다. 철저하게 애굽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십계명을 따라 그것을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고 전에 애굽에서 배웠던 더러운 각종 性풍습들은 단호히 버려야 한다. 가차없는 사형제도가 엄격히 시행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는 거룩을 표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항상 가난한 자는 주위에 있으며 그들은 바로 약자로서 출애굽정신을 실천에 옮길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자들이다. 누군가 하나님의 자비를 바로 이해하는 자들이 반드시 돌봐야 한다. 자투리 땅의 열매와 안식년의 결실은 그들의 소유요 그들의 권리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제 외국인을 상대로 제대로 자비를 베풀 차례가 되었다. 옛날 애굽나라가 그들에게 행한 대로 행하면 결코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이제는 반대로 해야한다. 그들도 과거 나그네였던 경험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희생이 개재되어 오늘날의 자유민이 되지 않았던가? 그 희생이 이제는 이방인에게 베풀 때가 온 것이다. 이방인을 향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답게 말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 들어온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의 해방을 맛보게 하자! 50년마다 돈 없이 몸바친 노예들을 제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리운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자. 결코 하나님이 주신 그들의 몫을 인간이 뺏어서는 안된다. 더 더구나 제단제사가 백성들의 무관심으로 운영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나 날 때부터 제단운영의 책임을 지게 해야한다(레 27:6)

자 이렇게 완전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 해방의 나라가 될 때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라 누구든지 이 나라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누구든지 이 나라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된다. 만약에 이스라엘 자체가 이 모세 언약을 위반하면 약속의 땅이 약속위반임을 내세워 이 나라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옛날 하나님의 자비가 없고 희생도 없던 저주의 시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출애굽기 19:5에 이미 맺어진 계약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결론

 

아브라함 언약을 가족단위에서 이제는 국가적 언약단위로 성숙시켜 이 세상에 등장하도록 하시는데 하나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모세 언약은 결코 아브라함의 언약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의를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에서 확연히 부각시키고 있다. 그 전쟁속에 개재된 것은 무엇의 희생이었다. 그 희생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모세언약은 인간의 악함과 완고함과 과오와 무능과 무지의 환란을 꺽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보여지는 것이 레위기이다. 부과된 성9막계시인 레위기는 인간의 연약함에도 물러서지 않고 한층 더 압박해 들어옴과 동시에 그것을 또한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가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점차 그 희생의 실체가 현실로 드러나는데 물론 신약 때가 아니라고 최종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레위기 수준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보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의 희생이라는 모세언약의 意義가 노출되었다

어린양이라는 표상이 점차 인격에로의 전이가 되는 과정을 모세 언약을 통해 비쳐지게 하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바로 그 희생자의 순교와 거룩이 전 민족의 거룩으로 확산시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바 거룩한 언약나라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오직 언약 안에서 달성되지 언약 이외의 방법으로 안되게 되어있다. 이 나라가 바로 아브라함이 고대한 복의 원천이 되는 나라이다.

모세 언약이 조건부 언약으로만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조건이란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약 특유의 장치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조건 때문에 가치를 더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희생은 인간의 허물을 능가하는 힘으로 제공되어 언약의 나라는 반드시 이 지상에서 사멸되지 않고 번성한다. 셀 수도 없이 많이! 이점을 우리는 레위기에서 또 한번 확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결코 인간 위주의 구속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위주의 구속사인데 그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형상을 지상에 새기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뽑아 버릴 것이다(마태복음 15:13)

여기에 동의한다면 거룩을 기어이 달성하는 그 하나님의 열의 밑에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깔려 있음도 발견하리라 여겨진다. 그 희생을 발견한 자가 바로 모세 언약을 바로 이해한 자이고 그 약속대로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다.

 

9. 모세 언약 배경하의 민수기 연구

 

I. 서론

 

특별한 역사를 일구어 가는 주체는 그 주체가 역사 속에서 발생하게된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이 그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실 때의 원리원칙은 그 주체를 처음 역사속에 발생시킬 때의 원리원칙에 준한다.

우리는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를 읽는다. 우리의 눈길도 그들의 행진을 따라 같이 행진한다. 우리뿐 아니라 그 당시에도 하나님도 그들을 주목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유의하셨다. 하나님은 무언가 그들에게 기대한 게 있었다. 우리는 민수기에서 그것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성급하게 가위를 가지고 구절구절 자르려고 들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결코 잘라진 토막인생을 광야에서 보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결단 하나 하기까지 소중한 과거가 밀어주고 있다. 희망찬 장래를 진정으로 사모하려면 현재 가진 것까지 아낌없이 내다버리는 용단이 있어야 했다. 약속이란 상식적으로 쉽게 믿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약속 때문에 당장 피해를 봐도 좋으냐? 라는 물음에 대하여 주저하는 기색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이 민수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배우자! 그리고 그 약속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약속인가를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통감하자. 회개와 반성의 눈물을 쏟더라도 무엇을 세우기 위한 회개인가를 확실히 하고 울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 약속과 우리의 목숨과 맞바꾼다는 것을 계속 잊지 말자!

 

II. 본론

 

A.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동기

앞서 레위기에서 철저하게 다져온 사상 하나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중심체제의 국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출 19:6) 이러면 금방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되느냐?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전면에 나서면 모세의 지도체제가 2분화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하여 명확히 해둘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결코 모세를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신다. 하나님편에서 귀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언약이다. 더 풀어서 소개하면 아브라함 언약의 구현체로서의 모세언약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또는 아론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모세언약만큼은 양보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모세언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모세 언약은 모세와 아론을 데리고 만들어졌다. 언약의 구성은

(1)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제시됨.

(2) 그 말씀의 상대자가 실패함.

(3) 그 실패의 대가를 대신해줄 희생물이 등장함.

(4) 언약 상대자는 기존의 자기 운명을 버리고(죽음) 이제부터는 그 희생물의 운명에 계속 참여하도록 되어 있음.

(5) 그렇게 해서 참여된 자들을 가지고 ‘언약공동체’라고 명명함.

(6) 이 언약공동체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언약’이라고 함.

자, 이렇게 볼 때 모세와 아론을 데리고 언약을 제조했다는 말은 그들이 첫 번째로 하나님의 희생사역에 참여했다는 말이 된다.

모세 언약이란 모세와 아론을 재료로 등장시켜 이스라엘의 실패가 그들의(혹은 그들의 지파인 레위지파)희생을 기사회생의 기반으로 하여 회복된 채 계속 언약정신인 대속희생의 사상을 역사속에 펼쳐나가겠다는 하나님의 구속의지를 말한다.

하나님은 첫 희생자를 장자라고 부르시는데(출 13:1-2, 민 8:16-8)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창조차원에서 보시기 때문이다. 첫 창조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 의사(意思)가 첫 번째로 담긴 것을 첫 형상이 담겼다고 복 맏이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광야의 여로에서 맏이 개념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독특한 책임이 부여되는데 그 역할은 아버지의 형상을 보존하는 것이다. 어떻게? 법궤를 보존함으로써

맏이인 자신들이 어디서 출생했기에 자연적인 출산순서와 달리 취급받는가는 그 원인을 보여주어야 한다.(이 장자개념이 정리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들로 인정하는 신약저자들의 깊은 안목에 못 미칠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은 단순한 존재론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구속 기능적 차원에서 봐야한다. (마태복음 3:17)

애굽에서 나올 당시만 해도 하나님은 자연적인 출산에 의한 장자를 원하셨다.(출 13:1) 그러나 민수기에 와서는 바뀌었다. 레위지파가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책임지고 가는 장자지파가 된다. 그 이유는 그들 지파에서 모세와 아론이 나왔고 또한 그들이 이스라엘의 실패(출 32장의 금송아지 사건) 을 보상하려고 나섰기 때문이다.(출 32:29에서 레위지파만이 헌신했다고 되어 있다) 한 지파전체의 선택은 자연적으로 그전까지 이스라엘전체의 장자노릇하던 르우벤지파(민 1:20)의 위치를 선택된 지파인 레위지파와 대조가 되는 위치에 놓이게 한다.(민 3:11-12) 이러한 대조는 다른 여타의 지파가 한 지파에 종속되는 형식을 취하기 위함이 이 조치 또한 앞으로의 전쟁에 원칙을 세우기 위한 포석이 된다. 지파 대 지파의 분류는 이스라엘을 다루는 새로운 시점에서 주어지게 된 것이다.(출 18장에서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선출은 지파 이야기가 없으며 같은 사실을 두고 신명기 1장에서는 각 지파별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으로 뽑았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민수기에 오기까지는 지파구분이 별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법궤를 어느 지파가 지키느냐가 결정됨으로 자연히 법궤를 지키는 지파와 그렇지 못하는 지파사이가 구분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법궤를 지키지 않는 지파에게는 땅이 기업으로 돌아가고 법궤를 지키는 레위지파에게는 기업이 없는데 이는 땅 공여자(供與者)와 공여받은 자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즉 땅을 받은 자는 자기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에 의해 분배받은 사실을 같이 약속에 땅에 들어오면서도 누가 땅이 없는가를 통해서 늘 확인하기 위함이다. 레위지파로 표상된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우리가 지금 이 기업을 공짜로 누린다는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법이다.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민수기에서는 레위기에 설정된 모세언약의 규례들을 다시 재확인하고 재 다짐한다.(5장 - 9장, 15장, 18장-19장, 28장-30장) 이러한 언급들은 꼭 그 가운데 이스라엘의 실패가 등장된다. 민수기는 마치 시내산을 통째로 들고 이동하는 것과 같다. 시내산은 이제는 이별한 산이 아니라 오히려 시내산 밑이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실패는 시내산 밑에서 세운 원리에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좌우된다. 이점이 옛날 시내산 이전의 아말렉과의 전투때와 다른 점이다. 그때는(시내산 도착 이전)모세가 든 것은 지팡이였다. 지팡이는 혈통적 애굽과 혈통적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구출한 지팡이였다. 그러나 시내산 이후의 전쟁은 그렇지 않다. 언제까지 하나님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다. 모세언약을 준수하겠느냐 아니면 믿지 않겠느냐 사이를 구분하신다. 그 구분의 중간에 놓여 있는 것이 시내산의 산물인 증거막(민 1:54)즉 법궤이다.

전에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결코 여호수아 장군의 대결로 적을 물리친 것이 아니다. 온 백성들은 그 원인을 여호수아에게서 찾지 않고 산 위에서 모세가 쳐들어 보인 지팡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내산계약 이후의 여호와 전투는 지팡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법궤에 달려있다.「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수기 10:35-36)

모세가 든 지팡이에는 출애굽 사건이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면 법궤에는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이 함축되어 있다. 즉 혈통적 이스라엘 국가의 승리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이 중심원리가 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의 승리를 원하고 계시다.

시내산 출발시점부터 그들은 전투대열에 들어서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를 하나님께서 하나의 군대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된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보복 내지는 복수를 꼭 해야만 되는 상대가 지상에 현존할 때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군대란 적인 없으면 생기지 않는 집단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누가 싸워야될 상대인가? 무엇이 하나님을 그토록 화나게 했는가? 도대체 이스라엘의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나라를 압박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요 저주를 받아야 한다. 즉 창세기 12:1-3에 근거한 이야기이다. 복의 전달매체로서의 이스라엘은 그 고유의 특성을 상실했을 경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한 예로 민수기 1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든지 거룩한 군대라고 명명할 때는 우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얽매여 있어야 한다. 즉 복의 근원다워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따라서 민수기 1장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로 선포한 정신은 그 자체로서 이미 군대가 되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살아야 군대가 될 수 있는 가를 기존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의도가 계신다. 그 증거로서 레위지파를 제외하고 다른 지파들은 미리 출발 전에 수를 세어두는데 그 이유는 그 숫자에 변동사항이 있음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된 기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리기 위함이다. 그 예로서 이스라엘의 혈통적 장자인(민 26:5) 르우벤지파의 수가 시내산에서 출발할 때는 46500명이었지만 그 후에 다시 세어보니 43730명이 되어 2770명이 감소되었다. 전체 이스라엘로서는 1720명이 감소되었다.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인 염병을 무사히 통과한 자들이다.(민 26:1) 이들에게만 기업이 돌아간다

민수기는 그 자체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공동체로서 행세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시는 것이다.

 

B. 모세 언약의 역사현장에로의 적용

언약의 신실함이 확실히 드러나는 때는 인간이 실패했을 경우이다. 언약에 대하여 실패했다는 말은 그 정신을 구현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민감한 반응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역사현장에서 어떤 곤궁한 일을 만나느냐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예들이 민수기에 깔려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순히 언약에로 복귀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언약에로의 복귀보다는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언약의 상황 안에서의 다양성이 인간들의 실패를 출구로 하여 활짝 세상에 선보이는 계기로 삼는다.

언약이란 세상에서의 형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고정되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변화하는 것보다 변화하지 않는 것에 영원성을 부여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의 제도나 질서체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순간의 문화를 가지고 영원불변의 의미로 승화시켜 그것만 붙드는 것이 무지한 인간의 습성이다.

언약이 가지는 본질의 비양보성은 형태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있다. 그러나 형식의 절대성은 언약의 절대성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치 십자가사건을 믿지 않고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은 언약으로부터 오히려 고발당한다. 물론 언약형식의 변천은 인간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천사들의 장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약형식의 변천과정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거역과 원망과 과오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의 배은망덕은 모두가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을 절대화시키려고 고집 부렸던 것에서 비쳐 나온다. 거룩이 거룩다운 것은 형상화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에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건이며, 만남이며, 교제이며, 심판이며 그리고 굴복을 통한 용서이다.

이제 민수기에서 우리는 거룩이 스쳐 지나간 흔적을 추적해 본다. 이 흔적들은 이스라엘 사회를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용납되는 행위와 될 수 없는 행위의 결정은 제사장이 내리는데 그때 제사장은 거룩의 이미지를 풍기도록 해야한다. 우리의 관심은 죄악 그 자체가 아니라 제사장이 어떤 식으로 죄악에서 회복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첫 번째 예 : 민수기 5장의 간통의 혐의를 쓴 여인에 대한 판결이다. 여기에서는 제사장이 여인에게 저주의 글을 빤 적이 있는 쓴 물을 마시게 한다. 만약 여인에게 잘못이 없으면 아무 일도 없으려니와 만약 여인에게 잘못이 있으면, 그 저주가 여인에게 임하게 된다. 이 저주의 글은 제사장이 책임지고 남편에게 의심받는 여인의 진상을 가려 그 의심에서 해방되게 한다. 즉 세사장의 확고한 직분관이 여인에게 미친 의심을 자기 책임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룩에로의 회복이며 진정한 뜻에서 성결된 사회조성이다.

두 번째 예 : 민수기 6장에서의 나실인 제도의 등장이다. 즉, 나실인 제도의 주안점은 그의 서원의 기간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이 화목제물의 일부로서 참여된다는 사실에 있다(6:18)

원래 제사의 제물은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의 신체일부라도 포함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실인의 경우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 제물에 섞어 넣는다는 것은 그 동안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타인과 특별히 구별된 생활한 그 자체를 하나님이 거룩으로 인정하여 기쁨으로 받아 드린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도 또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사이를 정상으로 회복하기 위한 한 통로가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기한을 정해 지킨 나실인의 거룩을 회복의 담보로 간주해 주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22:18에는 예수님의 피를 나실인의 피로 여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것을 마시지 않도록 되었다) 고 전해주고있다.

세 번째 예 : 민수기 7장에서 각 지파의 대표로 족장들이 그 지파를 대신하여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침으로 모세 언약의 유지와 회복을 기한다. 온 이스라엘 전부가 다 모세언약 밑에 복종해야 됨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네 번째 예 : 민수기 8장에서는 전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선택해서 장자로 인정해 줌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지를 다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막 일을 함으로서 이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다섯 번 째 예 : 민수기 9장에서는 타인이든 본국인이든 관계없이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고유성을 재다짐하고 있다.

여섯 번째 예 : 민수기 11장에서 고기 달라고 떼를 쓰는 이스라엘의 탐욕함에 대하여 모세는 자기 권한 밖이라고 하나님께 항변한다. 그때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 70명을 모아놓고 그 모두에게 성신을 내려 모세의 단독 책임만이 아님을 보여 주신다. 이스라엘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지는 존재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하셨다. 즉 이 말씀은 이스라엘 국가 자체가 다른 나라에 대하여 선지자 나라가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어야 하는 것9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여호와를 알리는 역할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골고루 짊어지고 있다. 이 역할분배는 바로 정상적인 관계의 한 단면이다.

일곱 번째 예 : 민수기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다고 비방한 후에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백성들은 행진을 멈추고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그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12:15) 미리암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는 온유한(12:3)자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인상(印象)을 대중들 속에 깊이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미리암이 시범자가 된 것이다.

다른 이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본 모세(12:8)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유성을 실천에 옮긴 행위였다. 그러나 아론과 미리암은 자신의 위치와 위신을 하나님의 마음보다 우선한 것이다. 미리암이 자신의 처벌의 정당성을 충분히 수긍하고 일정기간 수납한 후에 이스라엘의 행진은 정상을 찾을 수 있었다.

여덟 번째 예 :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의 각 족장들은 한사람씩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낸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는 대부분 하나님께 원망하는 소감을 발표한다. 이러한 반역에 대하여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사정을 한다. 제발 전염병으로 이 백성들을 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갈렙이 속한 지파만큼은 전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여 정탐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갈렙의 지파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출을 꿈꾸고 계신 것이다.(14:24) 그 갈렙이 속한 지파는 바로 유다지파이다. 이 또한 갈렙에 의한 이스라엘의 건재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다른 차원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아홉 번째 예 : 민수기 16장에서는 같은 레위지파 중에서 고라가 주동이 되어 모세와 아론 중심체제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건이 벌어진다. 고라자손들은 주로 성막에서 향로를 다루는 일에 종사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취급한 향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줌으로 모세와 아론의 위치를 재확인시켜 준다. 하나님은 각기 자기네들이 들고 있는 향로 불이 얼마나 무서운 불인가를 그들을 멸하므로 보이고자 하자 모세가 나서서 그 제안에 반대한다. 모세 생각에는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다른 일반백성 모두의 죽음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임을 보여주기 위해 희생의 불이 아닌 땅의 절개에 의한 집행을 요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안을 따라 고라자손을 죽이되 땅이 갈라지게 함으로 죽인다. 이로서 그들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진노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들이 들고 있던 향로의 형태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 향로들은 제단에 사용되는 편철로 바뀌는데 백성들은 이 편철을 볼 때마다 모세 언약이 지닌 일관성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던 자들은 염병이 돌아 죽게된다.

열 번째 예 : 민수기 17장에서는 아론의 지팡이에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통해서 레위지파의 우열됨을 다시 한번 확신시킨다. 레위인들이 있음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지파는 레위지파를 위하여 십일조를 바쳐 그들의 생활을 도와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된다(18:24-26).

열 한 번째 예 : 민수기 21장에서는 험난한 여행코스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불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놋뱀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다.

열 두 번째 예 : 민수기 22장 - 25장에 보면 모압왕 발락이 발람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코자 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발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했고 대신 오히려 축복의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에 무지했고 급기야 발람의 계략을 세워 추진한 음란의 자리에 이스라엘이 빠져 미디안 여인의 유혹에 빠져갔다.(민 31:116) 이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즈음 제사장 엘르아살 계열에서 용감하게 이 미디안여인과 간음한 남자를 창으로 죽이니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염병을 그쳤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즉 모세와 아론으로 대변되던 모세 언약의 시대가 물러가고 여호수아와 엘르아살로 대변되는 모세언약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숫자 점검을 하게 된다.(민수기 32:17에 보면 이 두사람에 의해 땅이 분배된다) 엘르아살 제사장의 질투심이 바로 하나님의 심사를 잘 헤아린 질투심이었다.(25:11) 이 희생적인 질투심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케 했다.

 

III. 결 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야 될 땅은 약속의 땅이며, 그 약속의 땅은 언약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땅이다(레 25:18, 26:34)

그 땅에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성읍을 마련하고 도피성을 준비하고자 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언약을 잊지 말라는 조치이다. 그 땅은 또한 언약을 위해 희생을 한 자들의 차지이다. 지파별로 희생한 대가만큼 그들 차지가 될 것이다.열조에게 한 약속의 땅이 민수기에서는 모세 언약의 구현으로 성취될 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10. 모세 언약 배경에서의 신명기 연구

 

Ⅰ. 서론

 

광야가 가져다주는 교훈이 특히 모세로 하여금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 자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가나안 땅을 그는 못 들어가는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했는가? 자기가 인도해야 될 백성들에게 그 땅이 어떤 땅이라고 소개했는가? 이런 점들이 신명기 연구에 있어 관심을 두고 찾아봐야 될 문제라고 여겨진다.

우선 모세의 설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점은 민수기 끝부분에 건네 받아야 될 부분이다. 신명기에 들어가기 이전에 민수기의 끝부분에서 이스라엘 구성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먼저 조사해본다

하나님께서 발람선지자를 통해 3번씩이나 이스라엘을 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압땅을 거쳐오면서 결국 이스라엘 지경에 염병이라는 저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구성에 있어서 일대 변혁의 조짐이 보인다.

새롭게 구성될 이스라엘은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축복한 그 내용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발람의 기도내용이 정복과 번성에 있기 때문이다. 즉 저주의 요소가 개입되어 염병으로 오히려 축소되는 일이 없는 새 차원의 국가 이스라엘의 건립이다. 이러한 국가 건립의 기본정신은 발람이 축복가운데 들어 있는데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이다.(민 23;21) 이 말을 간단히 줄이면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의 집단이 바로 이스라엘 국가가 된다. 만약 그들 중에 이러한 긍휼과 용서의 속성과 배치되는 사상을 지닌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저주를 받는데 이는 이스라엘 속성 자체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알브올사건이 이 약속국가의 속성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다.

발람 선지자의 축복에 의하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언약속성이 비언약속성의 국가를 가는 곳마다 점령하도록 되어 있고 결국에는 하늘의 별처럼 홀연히 나타난 왕에 의해 이스라엘은 세상의 최후 통치국가로 지상에 설 것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국가를 저주할 수 없고 만약 저주한다면 그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예언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가 되려면 이스라엘부터 먼저 정화가 되어야 한다. 즉 어떠한 이방 유혹으로부터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발람은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유혹해야 그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패망하는지를 알고 있었다.(민 31:16) 그 방법은 결코 폭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이방풍습으로 그 내부를 오염시키는 수법이다. 하지만 그 전멸직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노선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라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처음 유혹에 빠진 남녀를 창으로 살해함으로 염병이 이스라엘에 계속 퍼지는 것을 멈추게 했다.(민 25:7-8) 그는 언약대로라면 심판을 반드시 행사해야 됨을 확실히 납득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언약은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심판도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평화계약에 의해 구성되는데 그 구성원들은 제사장의 속죄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 즉 염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염병 후에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은 다시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백성의 수를 헤아리게 된다. 이 수에 따라 땅이 돌아가게 된다(민 26:52)

이렇게 헤아려보니 범죄로 인해 가장이 죽은 식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이름으로 기업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 현실에서(유월절 어린양은 맏이 되는 아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가장이 없는 가정은 언약의 혜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데 속죄의 상대자가 없기 때문에 언약공동체 구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기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자, 여자자식에게도 기업이 돌아가도록 특별히 배려한 것이다. 그 대신 여자의 언약의 가치를 독자적으로 제공받지 못하고 남자 보호자에 의해서 얼마든지 조정되도록 조치했다.(민수기 30장의 여성의 서원문제를 참조)

결국 한 가정이 대대로 기업을 잇지 못했다는 말은 어느 순간엔가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있는 가정이라는 말이 된다. 그 흔적은 늘 간직되어야 언약공동체로서의 특성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민족의 구심점에 제사장 엘르아살과 그리고 모세 대신 여호수아가 들어가는데(민 27:18) 이 두 사람 다 광야의 저주와 상관없는 자들이기에 이들의 수하에 있는 백성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광야의 심판으로부터는 이별한 상태에 놓여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법을 강화시키는데 이제부터는 전부터 해오던 상번제는 그대로 지속시키고 안식일 절기도 단순히 쉬는 날에서 구체적으로 제사하는 날로 바뀌며(레위기에는 쉬는 날로 되어 있음 레 23:2-3) 월삭절기가 새로 도입되어 제사 드려야 하고 일년에 세 차례 드리던 절기(출 23;14-17의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도 위기에서 아비후와 나답 제사장의 죽음을 기회로 새로 첨가된 절기인 속죄제 절기(초막절)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레위기에서 말한 오순절과 수장절(나팔절)절기 이야기는 따로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을 미루어 봐서도 절기보다는 제사에 대하여 보다 신경 쓰고 있다.

이 일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복수에 들어간다. 이 복수는 거의 살려두지 않는 진멸 하는 형식의 전쟁이다. 그리고 완전히 종족을 말살하는 정책이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감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전리품 중 1/500을 먼저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있다.(민 31:28) 그 다음의 1/50은 레위인들의 것이 된다.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전쟁은 이런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복수의 전쟁에 대해 자기 편리만 생각하는 지파가 등장했다. 갓지파와 르우벤지파이다. 그들은 많은 가축 떼를 염려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싸우기에 용의하지 않고 그냥 이편에서 지내기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일단 함께 요단 건너 약속의 땅에서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들이 원한 땅으로 되돌아가기를 명령했다. 즉 그들이 원한 땅도 거룩한 여호와 전쟁의 부산물로 주어져야 된다는 것이다(민 32;22-23)

하나님은 차지할 땅도 철저하게 모세 언약을 구현하는 땅으로 삼으시려고 그 땅 가운데에 도피성의 건립을 명령하고 또 거기에 레위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고 명하신다. 이상의 모든 것이 제사장 나라의 건립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새 시대를 여는데 있어 구시대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가 가지는 감회는 무엇인가? 그는 과거 광야 40년을 어떤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는가? 자기와 함께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 자기의 위상과 마지막 역할은?

 

Ⅱ. 본론

 

1. 언약공동체의 선택

1:5에서 모세는 율법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열조에게 약속한 것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가를 살피는 차원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있다(1:8)

모세는 호렙산에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 호렙산 이후의 노정에서는 순간 순간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눈초리로 따라다닌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지난날의 잘못을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한다.

우선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40년간 광야를 방황하게된 직접적인 원인부터 규명한다. 그것은 백성들이 자기네들 식으로 정탐꾼을 미리 파견해 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렸기 때문이다. 즉 정탐꾼 파견부터가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도 아니며(1:22) 매사를 그들 자신들이 결정하려고 했는데 비롯된다. 그리고 나서는 그 불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다. 이런 행위들에 대해 하나님은 화를 내셨고, 덩달아 모세 자신도 약속의 땅에 넣어주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선언하고 만다.(1:37) 이 정탐꾼 사건으로 이미 먼저 홍해를 건너온 세대에게는 가나안땅 입성의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단 갈렙 이외에는.(여호수아의 입성허용은 모세를 대신할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지 갈렙처럼 온전한 순종을 했다는 수준에서 고려된 것은 아니다 1:36,38)

그 뒤로 이스라엘은 광야로 정처없이 헤매는 기간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이 기간이 희망을 갖는 되찾는 기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미래를 포기하고 후세대가 성숙하여 희망의 미래가 그들에게도 솟아 나올 때까지 자기를 소모시키는 기간이었다. 그 기간이 38년간이었다.(2:14-16) 모세는 소모될 군사의 맨 끝에 서서 구세대 최후의 인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군사란 결코 구세대의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쟁방식을 이해 못했다. 그들 스스로 적들을 쳐부수려고 했었다.(1:42-45) 그러나 돌아온 것은 통곡뿐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이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열조에게 주신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에게 패배하도록 붙여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미 이것은 후배들 앞에서 구세대들이 실습한 바가 있다(2:24, 30) 이처럼 전쟁의 승패는 현 이스라엘의 자질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달려있다. 그러니 자연 현 이스라엘은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의 중요함과 일관성을 재음미해야한다.

모세는 4:1에서 자기가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반드시 지켜줄 것을 당부. 이 법도들은 상대방을 진멸 하는 효과가 있기에 만약 이스라엘부터 이 언약에 먼저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진멸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 예를 모세는 바알브올사건을 든다.(4:3) 하나님이 이처럼 무섭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경험한 바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결코 지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호렙산 경험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4:23-24). 「소멸하는 불」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참 형상이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스라엘로는 언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안전장치인가! 이것을 가지고 「자비」라고 한다.(4:31) 출애굽후 그 동안에 이스라엘을 위해 베푼 모든 이적과 기사는 언약적 차원에서 다룬 자비의 행위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앞으로의 기적적 움직임을 기대해서라도 언약에 충실해야 한다(4:40)

이렇게 언급하고 난 뒤 모세는 본격적으로 그 언약의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설명해 나간다. 돌판에 적힌 십계명(4:13)을 먼저 거론하는데 그 중심내용은 네가 전에 애굽에서 종되었던 그 시절과 지금의 사정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5:15, 6:12) 뿐만 아니라 앞으로 기업으로 얻을 땅에 들어가서도 그 어떤 종족과도 언약 맺을 수 없도록 장치되어 있는 것이 또한 호렙산 언약의 특성이다.(7:2) 그들을 진멸 하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기준에 맞추어 진멸 되어야 된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못하는 것은 비언약적 요소와 타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약이 달성되었을 때 땅은 축복을 맞이한다. 저주가 물러가고 기름진 본래의 속성은 돌아온다. 그 속에 이스라엘이 놓이게 된다. 저주아래 있는 땅이 회복하는 길은 오직 이 방법밖에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는 철저하게 비언약적인 요소를 척결해야 한다. 40년 동안을 방황하는 데서도 그래도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린 것은 단지 양식을 보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요구가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요 또 거기에 따라줄 것을 원해서이다.(8:1-3) 교만한 마음들이 계속해서 내려주는 만나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서 만약 이후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결코 우리들의 힘이나 능력이나 의로움 때문에 승리했다는 소리가 터져 나와서는 아니된다.(9:5-6)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다스려지는 세계를 하나님은 염두에 두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계명에 담긴 두돌판을 깨어지게 하는데 이르렀다.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멸망직전에서 모세는 최선책으로 자기가 들고 온 언약의 말씀을 깨뜨려 하나님의 언약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처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우상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없애 버렸다. 이 모두 모세의 기도 덕분이었다. 하나님은 부서진 돌판을 똑같은 돌판을 만들라고 명령하셨고 그것을 싯딤나무로 만든 궤짝 속에 넣어서 보관하도록 하여 이스라엘의 패역을 언제까지라도 기념되게 하셨다. 그런 정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에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10:12)

이처럼 복과 저주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달려있기에 이 약속은 앞으로 들어가게 될 땅에서 대 원칙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점을 선포하기 위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저주와 축복의 의식을 행하라고 명령한다(11:29)

지금까지의 모세 이야기는 언약이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광야기간을 통해서 그 언약의 본질을 우선 이스라엘 자체부터 충분히 납득해야 함을 강조시키는데 있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왜 꼭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냐 하는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선택과 땅의 선택과는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가?

 

2. 땅의 선택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되는 이유를 여호와 자기 이름을 두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12:5,11) 그것도 아무 곳이라도 되지 않고 오직 선택된 장소가 따로 존재한다. 거기에 이르러 제사 드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것이 된다

어째서 이런 주장이 타당한가? 이 일이 왜 그리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자기 이름」을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출애굽기 6:2-5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원인이 딴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애굽 땅에 잡혀 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즉 애굽인이 신봉하는 신과 한바탕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신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과 구별되는 이름을 등단시켰다. 즉 여호와란 자기가 세운 언약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침없이 전쟁을 치르는 신을 두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이름은 결코 조상들에게 나타난바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언약적으로 핍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세상 신과 상대적 개념으로만 나타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건립도 상대하는 국가가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세상 신을 정죄 하는 여호와는 신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구출 받은 국가, 이 국가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해서 구출된 국가인 이스라엘은 그들을 구하신 여호와의 법칙 안으로 흡수되는데 그 법칙이 바로 열조에게 주신 언약의 법칙이다(출 6:5)

열조에게 내린 약속의 핵심은 인간의 나라 대신에 아브라함 언약이 중심이 되는 복의 국가를 설립하고 그 국가를 팽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의 이면에는 인간들의 모여서 설립하고 국가를 팽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의 이면에는 인간들의 모여서 의논한 바벨탑 건립정신을 철저히 분쇄한다는 의도가 있다. 즉 「인간의 이름」을 창대케 하는 것이 아니라(창 1:4) 반대로 아브라함 선택을 통해 나타나신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이다.(창 12:2) 즉 「여호와의 이름」은 인간전반에 걸쳐 그들을 고발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정복하기 위한 이름이다.

창세기 1장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자격으로서의 인간이다. 결코 죄된 인간존재의 번성과 생육을 원하지 않으신다. 창세기 1장의 문화신학은 출애굽기에 와서는 구원신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이 모두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세상 침입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여호와의 이름」의 나라이다. 인간의 이름이 창궐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을 도전하는 세력이라면 주저없이 쳐부수는 신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의 할 일이요 이스라엘의 임무이다.

그러면 과거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인 출애굽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날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시켜 나가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언약 공동체가 되려고 한다면 「여호와의 이름」이 가지는 그 전쟁과 심판의 속성이 늘 재현되어야 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출애굽기 20:23-26에 그 방법이 나와있다. 일단 이방 신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토단을 쌓고 그 위에서 헌신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하는데 이것은 모세에게 내린 언약의 내용이 들어있다. 바로 이러한 방식이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이 되고 거기에 하나님과 함께 함에도 생존되는 복을 누린다. 단 주의할 사항은 토단을 쌓을 때 인간들의 도구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는 곳이기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애굽에게 내린 재앙과 저주는 단 위의 제물로 대신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한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출애굽의 사건을 언약화해서 지금의 사건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의 사건을 하나님은 애굽과의 전쟁으로 보고 있으며 그 거룩한 전쟁의 부산물이 바로 이스라엘이기에(출 15:1-18) 이스라엘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세상정복을 시도한다.

그러면 여기서 땅의 정복과 선택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지정된 지점에서 꼭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기념되는 그곳이 여호와 전쟁이 마무리되는 지점이어야 한다. 어떤 지침에 의해서?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가나안 10족이 정복당하는 시점과 지점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실현으로 보고 있다.(창 15:19-21) 그런데 하나님이 왜 그곳을 점령하도록 선택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선택한 민족이 그 나머지 지상의 종족과 연관성을 지닌 적이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들이 살게 될 땅도 이러한 선택의 원리에 준해야 된다. 즉 그들이 거주하는 땅에 여호와 전쟁이 전에는 존재한 일이 없어야 된다.

아브라함 후손에 의해 생겨지는 민족이 혈통과 상관없이 언약공동체로서 오직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으로 발생된 민족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땅은 지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의 전리품 형식으로 그들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 자는 하나님이 의도하는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자기들을 선택한 적이 있음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단순히 이스라엘 전쟁을 수행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선택의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받은 민족이 자신들의 수고로 애써 얻은 결실이라고 평가해 버릴 것이다. 즉 민족은 선택되어지지만 땅은 선택된 약속의 땅이 아닌 셈이다. 땅조차도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민족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민족을 선별해야 한다. 어떤 민족? 땅이 저주에서 벗어났음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민족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애굽 땅 자체를 약속의 땅으로 삼지 않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약속의 땅은 해방시켜야 되는 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된 민족을 받아드리는 땅이다. 그 땅이 있음으로 해서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공동체에 실려 그곳에서 빛나게 된다. 땅의 존재는 이스라엘이 발생하기도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어떤 민족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디에서 해방된 민족만이 그 땅의 복을 누릴 수 있는가 늘 지켜봤던 땅이다. 오직 선택된 민족만이 받아드리는 땅이며 승리의 개가를 높이 받아야 될 「여호와의 이름」이 도착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개발할 땅을 갖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기존의 「땅 개념」을 철저히 변경시키실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지상의 땅을 바라서도 아니되고 바랄 것도 없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멈추는 곳이 아니면, 그것은 기대할 땅이 못된다. 선택된 곳이란 어차피 사건 이후에나 지상에 남겨질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여호와의 이름 하에 정복되고 난 뒤 하나님에 의해 새로 선택된 장소는 그때에야 이스라엘의 눈앞에 등장된다.

모세에 의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장소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치러진 그 최종지점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가 될 것이며 출애굽기 20:24-26에 의거해서 거기에 복이 주어진다. 그래야지만 그 지역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된다. 사람이 손수 제단을 정으로 다듬는다든지 쪼갤 수 없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 제단 위에 이스라엘은 제사로 헌신할 뿐이다. 모세 언약에 따라 선택된 땅에서 선택된 민족으로 일관해야 한다. 절대로 이방풍습이 이어지게 해서는 아니된다. 땅이 용납을 안하기 때문이다. 이땅은 거룩한 전쟁의 승리가 기념비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승리를 부인하는 일을 벌려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땅 점령은 단순히 선택된 민족을 살게 해 주겠다는 의도를 넘어서 그 선택된 땅 앞에서 기존의 땅에 대한 기득권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새로운 법칙을 따라 땅주인이 결정되도록 되었다. 그 법칙이란 곧 모세 언약이다. 이미 그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지 않는 요소들은 모두 배제되어야 한다. 모세는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언약을 다시한번 재확인시킨다(12장-28장). 여기서 강조하면서 확인하는 내용은 철저히 애굽화, 이방화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다. 사실상 택한 땅의 성질을 그 누구도 건드려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 땅은 언약에 따라 움직여지는 땅이다. 생명과 복이냐 아니면 사망과 화냐 하는 것도 언약 준수 여부에 달렸다(30:15). 만약 언약을 준수하겠다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땅은 그들과 같은 속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세는 레위인의 존속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다. 그들의 특수성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12:19/31:9).

마지막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를 다 모아 놓고 그들의 패역된 과거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오를 딛고 그들을 기어이 살려낸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인 것이다. 그들의 원망과 패역을 자비와 용서로 극복한 증거물인 법궤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은 언약의 공동체로서 이제 택한 땅으로 진입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승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수행될 것을 그들이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 땅은 약속의 땅이 될 것이다. 자손 대대로 이 땅에서 살고자 한다면 자자손손 이 언약을 준수해야만 한다(32:45-47). 그런 자세로 모세는 최후의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내리면서 그는 이스라엘을 여호수아에게 인계한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로 인하여 모세 언약은 더 새롭게 이해된 것이다.

 

Ⅲ. 결론

 

「하나님의 이름」은 선택이라는 결정 방식으로 이 지상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신다. 민족의 선택 뿐만 아니라 땅의 선택은 지상에서 기존의 모든 국가에 대한 부정과 고발의 취지를 다분히 담고 있다. 이들만이 거룩한 민족이요 나라가 될 때 타민족은 저절로 가증된 민족임이 폭로된다.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이 언약 공동체 앞에서 복의 운명과 저주의 운명을 강요받는다.

저주받은 땅은 이들로 말미암아 희망을 얻게 되었지만 이들의 평화를 수납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전쟁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20:10-13)

「여호와의 이름」이 일단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상에 안착한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의 무능과 죄악에 의해서도 그 「이름」의 활동을 정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 전 지상이 언약에 의해 지배될 때까지 언약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물러가지 않고 부단한 전쟁을 지속시킨다.

11. 여호수아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가 모세에게 일임한 사역의 연장이라고 봐야 합니다.(5:13-15) 하지만 모세에서 여호수아에게 사명이 넘어오는 과정을 결코 순조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왜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백정을 인도하지 못하게 하시는 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모르게 되면 자칫하면 여호수아는 마치 모세와는 다른 노선에 있는 자로써 오히려 모세의 잘못을 간접적으로 공략하는 인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아라. 여호수아는 과연 모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니냐!" 하는 식이 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민수기 12:1-10 에서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우호적인 평가와 특별한 배려를 간과하는 것이 됩니다. 모세는 지면의 어떠한 사람 보다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가 본 것이 너무나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백성의 차원까지 낮추며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단지 모세를 대신하여 모세의 남은 일을 마저 하기 위해 들어간 사람에 불과합니다.(민27:17, 신명기2:28) 여호수아는 자기가 나서서 모세가 해야 하는 일에 특별히 더 보탤 필요가 요구되지 않는 자입니다. 원래 이 일은 모세에게 맡긴 것이지 여호수아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세에게 철저히 종속된 자입니다.(1:7-9, 11:15, 12:6, 22:5) 그러기에 여호수아는 모세가 알고 있는 表象에 자기가 뛰어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해한 약속의 땅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사역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자면 출애굽 때의 율법과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해한 율법관의 차이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모세가 자신의 실패와 그리고 이스라엘의 실패를 40년 동안 체험하고 난 뒤에 나온 것이 신명기 사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신명기 신학의 핵심은 지난 10년간이 광야에서의 고생을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행하신 시험이요(신 4:34)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교훈의 일환이였지(신 4:36) 결코 그 자체로서 버림이 아니었다는 주장입니다.(신 8:1-6)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먼저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신 66:4-5)

즉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실패하여 가나안 정복 이 40년간 후퇴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기 전의 언약을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자에게 다시 제공되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신 5:2-5) 지난 광야 길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안듯이 한 하나님의 사랑의 작품이었습니다.(신 1:31) 이런 차원을 깨닫는 시절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제대로 여호와께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다시금 가나안 땅을 마주 보게 된 것을 마치 옛날 애굽에서 이제 막 홍해를 건너 빠져 나온 순간과 동일하게 여깁니다.(신 1:30, 5:15, 4:12)

실패를 통해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홍해 역할을 할 것이다. 즉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죄로부터의 탈출이다. 이제 새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와서 모세는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민족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의 싸움에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적인 사고방식과 (즉 비언약)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제시한 사고방식과의 싸움에 개입하신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하나남의 사고방식이란 “사랑에 의한 선택사항" 입니다.(신 4:31,37-38, 7:6-11, 9:27, 10:15) 그 언약의 구체적 형태를 모세는 법궤로 보고 있습니다.(신 4:13) 왜냐하면 그 안에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했을 때의 물증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9:4) 돌판이 그러하고(신9:28-5) 만나가 그러하고(출16:32-33)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그러합니다.(민수기 17:10) 따라서 여호수아가 법궤를 앞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을 앞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언약궤는 무엇과 관련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와 만나는 장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출25:21) 거기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서 임재 하십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안식할 장소를 선택하시고 그리로 이스라엘을 몰고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신 12:5,l1/ 14:2y 16:2, 6,11) 그 이동은 법궤가 맡습니다. 법궤가 안착하는 그곳이 바로 여호와께서 목표로 잡은 도달지 점입니다.

여호수아에 있어 좌로나 우로나 율법에서 치우치지 않아야 될 방침은 먼저 여호와에 대한 사랑이 우선 이어야 하며 그 사랑은 법궤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표현됩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자기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땅에 들어서게 됩니다.(1-7)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들어가고자 했지만 여호수아는 지팡이 대신 모세의 실패의 경험이 담긴 법궤를 앞장세우며 들어갑니다. 그 언약궤는 모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한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가 서려 있습니다. 그 법궤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역사와 공간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 모습으로 펼쳐지겠습니까? 인간의 어떠한 공로와 능력이 동원됨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 이스라엘은 홍해바다를 갈라지게 한 유월절 어린양에 동참이 되어야 하며(4:22-235:10-11), 여호수아는 유월절을 그 시기에 맞추기 위해 3일을 기다려서 요단강을 건너갑니다.(3:2)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는 그의 종처럼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5:15)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그 기념물을 세워둠으로서 여호와의 언약의 실효성을 확실히 합니다.(4:24) 그리고 앞으로의 이 땅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이 언약과 관련된 것들만 일어날 것입니다. 전쟁 같은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언약은 그것만을 두고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야곱의 축복에 참여될 민족의 출현까지를 포함합니다. 그 공동체 사회의 특징은 이미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자주 반복되어 왔습니다.

희년사상의 실천은 그것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만으로 땅의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 사랑의 확산만이 진정한 안식입니다.(신15:1-17:20) 그 증거로서 6潘에 보면 여리고 성을 돌 때에 양각을 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나팔을 그냥 부는 것이 아니라 성을 7바퀴를 돌면서 불게 되어 있는데 이는 레위기 25:8에 나오는 희년 때 부는 나팔입니다.(민수기10:1-9에 나오는 나팔은 두개의 은나팔로서 그것의 기능은 전쟁을 치러 갈 때 사용되는 나팔이다. 따라서 양각나팔의 사용은 곧 희년의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즉 여리고 성 함락이 주는 의미는 이 여리고 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모든 이 약속 땅의 점령지를 이스라엘에게 거져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6:16-17)

마치 희년 때 집주인이 노예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그냥 풀어주고 채무는 면제하듯이 말입니다.(레25:33,40,54) 이 모든 은전의 근거는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라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약속 이행의 확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자신의 소유로 돌리지 않고 이번 전쟁에서 승리케 한 그 분에 게만 돌릴 줄 아는 신앙고백에서 드러나며(6:17,24 7:21-21),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비언약 민족과는 언약을 맺지 않고 희년을 선포하여 평화적으로 점령하되 거절할 경우에는 언약에 대한 거절이라 여기고 사정을 보아주어 서는 아니 됩니다.(신20:10-18) 혹이 속아서 맺었다면 그 맹약을 변치 않아야 됩니다.(9:19,22-23) 이와 같이 모세언약의 유효성은 이 가나안 땅에서 절대적인 법칙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아이성 재 함락과 관련하여 알게 된 여호수아는 신명기 27:1-26에 이미 모세가 지시한대로 에발산에다 돌로 단을 쌓는데 그 돌은 요단강 한가운데서 채취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축복산에다 쌓지 않고 저주산에다 쌓는 것은(8:30, 신27:4) 축복산의 오히려 맞은 편에 있는 에발산을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신11:29)

언약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바로 율법에 의한 저주에 참여함으로 되어집니다. 거기에 이스라엘도 동참해야 합니다. 축복과 저주로서 갈라놓은 것은 이방민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과 맹약관계에 있는 기드온에 대한이방민족의 적대행위는 곧 여호와의 분노를 자초한 것입니다. 가나안 연합군의 지도자 5왕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10:24) 심지어 태양까지 자기 질서를 수정하면서 하루에 처리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돕게 됩니다.(10:12) 이런 식으로 중부전선(여리고와 아이성), 남부전선(기브온과 벧흐론), 북부전선(메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낚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으로서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이긴 전쟁입니다. (10:8) 이제 남은 문제는 12지파 각자가 해결해야 합니다. 모세언약의 특징은 각자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원만한 유지를 위하여 각 지파나 개인은 조심과 자기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땅은 특정한 한 지도자의 개인 소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땅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땅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기업입니다.(신9:26, 창세기 12:1-3)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 약속에 따라 유의하여 땅 분배에 들어갑니다. 땅의 의미를 아는 지파가 되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안식에 들어갔을 때(23:1), 여호수아는 모세의 약속이 성취됨을 알리면서 이것이 모두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24:2) ,요셉의 시신이 이 약속의 땅에 안장될 때 까지의 그 내용이 비로소 모세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음을 확인시킵니다. 이는 바로 모세언약의 영원성과 그 언약이 선조들의 언약과 같은 맥락임을 천명해 주는 것입니다.(24:32) 따로 지도자가 필요치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으로만 통치되는 것이 여호와께서 바라는 안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모세언약의 일관성이 여호수아를 낳았습니다. 모세언약이란 모세의 실패를 딛고 나타난 언약입니다. 만약 모세보다 위대하다면 여호수아와 갖는 언약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그게 없다는 말은 실패한 모세가 승리한 여호수아 보다 하나님의 기본 된 방침에 부합됨을 나타냅니다. 모세언약을 좀더 분석해보면 모세의 실패를 극복하고 나온 “법궤의 이동성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 입니다. 모세와 그 일행은 실패해도 법궤는 그들 속에서 계속 동행했으며 만나는 내려졌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다른 근거에 의해 조치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맺은 언약이 아니라 법궤가 지속적으로 함께 해주시는 모세와 그 무리와의 맺은 언약입니다.

즉 그들은 언약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중요시되는 관심사는 그 이동하고 있는 법궤가 어디에 가서 정착하느냐에 있습니다. 모세는 그 장소조차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계시 받았습니다. 그 선택된 장소는 바로 모세언약이 추구한 목표가 달성됨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일단 여호수아에서는 세겜이다. 24:1,25) 인간은 실패하지만 언약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여호수아를 통해 보여 주십니다.

 

12. 사사기

 

세겜에서 거행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 다짐은 여호수아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는 정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인도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곧 인도자요 지도자임을 여호수아는 천명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4:12-13) 광야언약에 대하여 여호수아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확인을 가나안 땅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붙이시매 이기는 전쟁이었습니다.(여호수아24:8) 비로소 우리는 사사기의주제가 여기에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여러 번 백성들에게 다짐을 한 바는 약속의 땅이 갖는 특수한 속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특수한 속성은 기존의 가나안 민족들이 알고 있는 우상과는 어떠한 접촉점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20)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이 언약에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파 도저히 타협될 수 없는 神이시기에 여호와를 섬긴다는 말은 이방신을 이미 제거했음을 전재로 한 행동에서 나와야 합니다.(여호수아 24:23) 선조들에게 약속한 바를 기어이 지키신 약속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길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의 정신에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정복이란 곧 여호와의 정신에로의 귀속을 의미합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몰아 내는 행위는 비언약적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이 그 언약의 이름으로 친히 통치를 수행하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전히 그 언약적인 차원에서 정복하지 않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언약적 통치를 고수하겠다고 재확인합니다. 이는 불순종했을 때 저주 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두고 말합니다. 그 저주의 방식은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는 가시 노릇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일관성에 낙심하여 목놓아 울게 됩니다.(2:1-5) 이방나라의 미 철수는 군사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세대 이후,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이방민족의 존속을 신앙적 이유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상호 우호적인 문화 교류가 곧 자기들에게 평화를 제공하리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민족도 역시 여호와의 손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방 민족을 통한 괴로움이 이스라엘에 도달되었습니다.(2:15)

여기에 사사가 등장하는데 사사의 등장은 모세언약 어디에도 약속된 바가 없는 특별 조치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구원자로 등장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바른길로 가지 않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2:17) 사사의 임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신앙공동체가 정상으로 유지되는데 동원됩니다 그 수행에는 전쟁과 그 전쟁에서의 사사의 위치를 조상의 타락에 대하여 무지한 후대사람들에게 재현시킴으로서 완수됩니다.(3:1-2) 결국 사사란 인간의 타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존속되어 지는가를 통해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교육시켜 주는데 있습니다. 언약대로라면 이스라엘은 범죄 즉시 그 땅에서 추방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거기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마다 다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세언약이 지닌 또 다른 면을 발견케 해 줍니다. 도대체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제기한 그 언약이라는 것이 어떤 의식을 지닌 언약일까요?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사자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새로운 사명을 확인하는 경우에 등장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결코 자신의 일일수가 없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으로서 임무수행에 차질이 없기를 당부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입니다.(출3:1-5, 순5:13-15, 삿3:1-5, 13:3-20) 따라서 여호와의 사사가 방문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스라엘이 제대로 구원받을 수 없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서 해야될 여호와의 종의 노릇을 제대로 순행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즉 종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 된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사항은 구원이라는 것은 과연 인간의 도움이나 노력의 결실과 무관함을 보이는 것이며 구원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경우는 구원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완전히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고 전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릴 때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등장된 사사의 위상은 그 자체가 부르짖음 에 대한 표상의 차원에서만 설명됩니다. 즉 부르짖음이 갖는 언약적인 가치성을 통해 언약이 갖는 이미지를 파악할 수 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백성들이 사사를 볼 패마다 의지하는 생각을 표기해야 되고 또 사사는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전쟁의 특성, 즉 붙이시매 비로소 이기게 되는 전쟁을 치러 태어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전쟁이란, 여호와에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3:28/ 4:7,14/ 7:9,15/ 18:10/20:28, 참조: 출14:14, 신1:30, 수10:14, 삿20:35)

언약은 사사의 등장으로도 유효하게 이어져 내려갑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개인 하나 하나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이 다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신이 어떤 관점에서 언약 수행에 동참하고 있느냐를 보여 주는 것이 됩니다. 즉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은 결코 여호와의 신이 남다르게 일할 수밖에 없는 어떤 비범한 재질이나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사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모든 구원의 결실은 그 사사 개인의 공로로 돌릴 수 없었다는 데서 모세언약을 그 시대에 구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거룩한 분에 의한 열매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 열매를 인간의 공로로 돌리려는 시도가 일어나면 그 잘못된 시도 때문에 억울한 죽음이 그 주변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1:34-4)에 나타난 입다의 무남독녀의 억울한 죽음) 마찬가지 이론에 의하여 반대로 자신의 무절제와 방탕으로 사사의 일이 방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사를 오해한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 그가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그가 죽을 때 죽인 사람이 많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16:30) 사사 개인의 자질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사기에 흐르는 정신은 비단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의 반윤리성을 책벌하는 과정에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이 처음 두 번은 오히려 무지무지한 참패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연합군 생각에는 그들은 자동적으로 正義의 편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승리가 무조건 우리에게 보장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의 땅이 갖는 특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지 여호와 전쟁의 속성을 이해 못하면 멸절 당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그들이 세 번 째 올리는 기도 가운데서 전적으로 자신의 정의로움을 의지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난 뒤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비로소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20:28) 이는 진정코 이 땅의 왕은 사사나 또는 다른 연합군이 될 수 없고 여호와만이 왕임을 천명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대가 끊겨 멸절하는 상황을 또 염려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힘에 의한 정복만이 언약의 완성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자유 하게 한 그 정신의 구현만이 진정 여호와의 왕의 정신에 부합됨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사기 9장에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사사를 보내면서 까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그 여호와의 사랑만이 언약을 이를 수 있기 때문에 한 인간에 의해 다른 인간을 통치 지배하는 것은 희년사상에도 어긋날 뿐더러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실체에도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분명히 밝히기를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2) 기드온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소명 받을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와 가진 경험 때문입니다. 6:29-24 에서 그는 여호와의 사자와의 만남에도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통해(여호와 샬롬)여호와의 구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이 보존된 것과 동일하게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왕이 되심이 이방민족에게는 심판의 왕이지만 언약의 민족에게는 은혜의 왕이 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남은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왕이 가지는 은혜의 면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있습니다.

13. 룻 기

 

사사시대에 있어서 룻에 관한 이야기는 약속의 백성이 그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떠나는 이유는 흉년이 들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1) 어쨌든 엘리멜렉 가문은 일단 이스라엘하고는 인연을 끊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인연을 끊은 것으로 되어 있는 엘리멜렉 가문이 룻이라 하는 모압여인으로 말미암아 다시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4:10), 그 이어짐이 다윗의 출생과 연관이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출생에 대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사시대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 행위에 대하여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시대라고 볼 때, (“그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저로 행하였더라" 라는 형식문이 나열되고 있다. 사사기 17:6, 18:1, 19:1, 20:25) 엘리멜렉 가문의 이러한 결정 또한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긴 대로 행동에 옮긴 비긍정적인 태도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일어난 그 가문의 몰락은 나오미(기쁨) 라는 이름을 가진 시모가 마라(괴로움)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심한 충격 속에서 돌아오게 했습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배후에는 여호와께서 분명 개입됐다고 믿고 있습니다.(1:20-21) 그리고 나오미는 그 여호와를 전능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소원을 거절하고 여호와 자신의 의도를 위하여 우리 가문에 그런 사태를 발생시켰다는 점에서 전능자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그 가문의 입장에서는 부각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몰락의 와중 속에서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노렸는가요? 그것은 이방여인 룻의 개입입니다. 그녀는 어머니 나라가 자기 나라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곧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나섭니다.(1:16) 도대체 룻은 나오미의 일생을 통해 여호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녀는 분명히 시가에서 일어난 사태를 불행의 측면에서만 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 특성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과의 언약의 진실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가문은 도중에 종결되지 않게 섭리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2:20) 엘리멜렉의 집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단순히 가문에 관한 사항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맺은 언약의 구현에 관한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룻은 바로 이 사실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미미한 자기를 통해 언약은 어떻게 성취의 모습으로 등장되는가? 이 점이 그야말로 여호와께서 전능자라는 인식이 제대로 구체화 되는 열쇠가 접니다. 다윗의 등장은(4:22) 전능자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라"(엘리멜렉)는 이름을 지닌 가문은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1:11-l3/2:20/4:8-12,14) 보아스의 가문에 흡수되지만(4:9,21),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이야기들 합니다.(4:17) 인연이 끊어진 엘리멜렉 가문은 이방여인 룻이 다리가 되어 다시 언약 안에서 태동하는 가문으로 회생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 타락한 사사시대였지만 여호와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언약에 대한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역사 안에 맥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등원된 것이 이방여인 룻이었습니다. 다윗의 등장이 진정한 왕으로서의 여호와의 모습을 비치는데 있다면 그 출생의 배후에는 오래 전부터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의 손길이 이미 닿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하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왕 되심은 중지되지 않았음이 룻을 통해 증명된 것입니다. 이방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심, 그 자체가 이미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의 관심이 아닐까요?

 

14. 사무엘 상, 하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이란 바로 자손과 땅과 율법이 한 곳에서 실현되고 또 실효성을 발휘할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 언약은 무엇입니까? 다윗 언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가나안 땅과 자손, 그리고 율법이 다윗이라고 하는 한 인물 그것도 왕이라는 직책에서 모아지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나 또는 우리 준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 또는 민족(이것을 기름 부음 받은 자 라고 함)을 통해서 그들 속에서 함께 행동하신 하나님만이 비로소 등장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왕의 인격에 의해 유지 보존이 가능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자손, 땅, 율법 이 모두가 어느 것 하나라도 인간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내지는 하나님의 의주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주목이 되는 것은 과연 율법준수에 의하여 의가 성취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율법의 의가 아니라 율법에 의해 정죄를 당할 때 아브라함의 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의"라고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이 있기 전에 먼저 자기 의와 공적의 포기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과 하는 어떤 경로로 하여 아브라함 즉 특이 한 인격에 쏠리게 되었느냐를 설명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교만 과 율법의 고유의 정신간의 갈등의 소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 정신이란, 곧 법궤정신입니다. 즉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가? 에서 법궤는 완성을 보고 고정됩니다. 사무엘 상하에서는 세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됩니다.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이 이 분들입니다. 이들이 이 땅에 살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점은 이스라엘 속에 살아나는 하나님의 정신에 대하여 인간들이 얼마나 반발하고 있느냐 하는 점, 하나하고, 두 번째로 그 인간들의 반항을 하나님 자신은 그런 환경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비춰주시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반발그 반발 때문에 피해자의 위치에 서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두 국면으로 이해될 수 가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이 양측간의 상호 연관성을 알아야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 허무성과 영원성 이 두 가지 갈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된 갈등이라면 우리들 내부에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 갈등 사이에서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압도하고 있는가를 역사라는 언어로 보여주는 민족이라는 점에서 위의 세 사람의 활동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로부터 율법의 한계성이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룻기에서 보았듯이 레위계통, 다시 말해서 정통 율법 계통이 제대로 제구실을 다할 수 있고 이스라엘의 구원에 지대한 공헌과 도움이 되겠느냐 에 회의적인 반응을 가질 수 가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타락된 레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레위계통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도가 추락되면서부터 레위족속의 존재이유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도 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상하 주제를 한마디로 이야기해 본다면 어떻게 해서 레위지파를 재처놓고 유다 지파에서 왕이 되었느냐 하는점 입니다. 물론 어떻게 되는 그 중간 과정에서 베냐민 지파가 하나 들어갑니다. 사사시대를 지파공동체적인 형태라면, 이것이 어떻게 해서 왕정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느냐 로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된 그 원인은 다 율법이 지니고 있는 그 정신을 이스라엘이 제대로 이해 못했기 때문에 일어 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은 약속을 하셔 놓고도, 그것을 스스로 취소하시고 후회하시고 철회하시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그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그 약속을 흉내를 낸다든지 그 약속의 결과를 자기 쪽에서 창의한다든지 하여 원래 의가 흐려지니 하나님께서 본래의 취지대로 수정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율법과제사 중심의 사회가 이스라엘에서 실패로 돌아가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곧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기존의 레위지파를 붕괴시키고 다른 지파를 레위지파로 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방법은 단 하나 레위지파가 담당하지 못한 그 사명을 다 담당할 수 있는 지파의 등장으로 지파간의 균등성이 상실되고 한 지파로 통합시키는 통합체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 제도입니다. 여타의 지파가 왕으로 대변되는 지파안으로 복속되는 형태를 말합니다. 위와 같은 가설이 성립 되려면 다음 3가지 현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1. 기존 레위지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2. 레위지파가 저질러 놓은 죄책을 담당하는 자가 등장되어야 하고

3. 그 등장된 인물이 자기 세대 이후 영원까지 자기와 같은 통치 이념 속에 여타의 지파를 통치 할 수 있다는 권위를 보장받아야 합니다.(히브리서 7장 참조)

이상의 모든 과정의 집결되는 원리는 율법의 해방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어 어디 가느냐? 바로 인격으로 쏠립니다. 율법 예속에서 인격 예속 상황으로 이스라엘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1. 을 밝히기 위한 자가 사무엘이며

2. 를 밝히는 자가 사울이고

3. 인간들이 원하는 인물로는 안되고 그 인간적 사고 방식을 엎어 내리는 사고 방식 즉 요나단과 같은 의식이 있는 자가 등장했으니 바로 다윗이다. 그렇다면 사무엘이나 요나단이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에게 긍적적 평가를 받은 자의 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의 완성을 “하나님의 낮아지심" 과 진노하심에 대한 전능을 발견하고 난 뒤의 의식이다.

사무엘 : 황소 3마리를 잡아 번제 드림.(출생시) 삼상1:24(백성을 대속한다는 의미)

요나단 :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작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삼상14:6)

다 윗 : 여호와의 이름은 만군을 통치하는 능력이 있다.(삼상17:45)

 

15. 다윗언약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1. 서 론

 

역사란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場이다.

흥망성쇠로 이어지는 사이클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항이 들어있다 또 인간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그 민족을 선택하고 또 계속 이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선택하게 된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는 역사임을 짐작으로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하여 다원과 그리고 그 가문에 맺은 언약(소위 다윗언약)의 생성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할 때는 어떠한 취지에서 선택했느냐를 알아보는데 목표를 두고 작성된다. 계시가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했을 때 역사 그 자체가 계시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는 성경이라는 경전도 역사의 절대성 안에 종속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한낱 역사가나 고고학이나 문학 비평가에게, 그 때,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단편적인 여러 문헌 중의하나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학식이 풍부하고 천재적인 역사학자들의 보다 정확한 역사비평에 의거해서 경전이 재 출간되어야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또는 역사를 통해서 다윗언약의 본질을 살핀다는 이야기는 성경 안에서 표현된 역사만이 확실하다는 말도 아니요 또 그것만이 구속사를 구성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서 역사 부분을 또 따로 떼어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측면에서 우리는 성경 이외의 자료를 역사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계시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 또한 가설이라고 한다면, 본 글은,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일방적으로 선택한 것은 다른 민족이 아는 것과 별도로 특수한 계시의 전달목적이 있을 것이다.

2. 계시는 오직 성경이라는 경전 안에 국한된다는 두 가설에 의해 작성되어진다.

 

 

2. 본 론

 

1. 최초 언약의 본질

 

언약의 형성은 최초 언약의 생성의 틀을 이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전부가 다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창9:11-l3/ 민18:19/ 렘32:40/ 시89:34/사59:21) 영원한 목적을 지향하여 세우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러 형태의 양식과 모습을 지닌다 할지라도, 다 영원을 향하여 전진하는데 동반자적인 위치에 있지 배타적인 관계는 아닐 것이다.

이런 가설로 두고 보면 영원 속에서 비로소 언약에 대한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영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신약에서 다를 문제이다(히1:1-3). 어쨌든 구약에 있어 각 언약들은 가는 방향이 같다는 것이다. 이왕 가는 방향이 같다면 최초 언약에서 공식적인 구조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고 세월이 가고 시간이 역사 안에서 흐를수록 그 공식적인 내용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지고 구체화될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될 일은 맨 처음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대하여 너무 많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약 때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을 마치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것 같이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언약 상대자인 선택된 자가 감당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란 그 언약 상대자의 역사적 배경과 삶의 정황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 고생하고 몸부림치고 자기 인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자기 파멸의 궁지까지 나아가다가 결국에는 비로소 언약의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그 순간 그 인간은 언약의 실체를 만지게 되고 하나님 편에서도 그 몸부림친 그 인간자체를 언약의 정형으로 이 역사 안에 남겨두어 후세에게 보존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 언약이란 최초로 선택된 인간이 누구며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다루셨는가 에 관한 것이다. 언약이란 인간을 대상으로 삼기에 하나님의 계시도 ‘00의 하나님'이란 형식을 취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 간다.(창9:26/출3:6/왕18:36) 언약은 이들에게 나타난 계시와 무관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내용을 역사 안에서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어쨌든 최초 언약은 최초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한 그것이 후대 언약의 家形이 된다.

그렇다면 최초 인간이 아담에게 내리신 약속은 무엇을 담고 있나? 창세기 3장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아담을 찾아와서 남기신 것은 여자를 유혹한 존재에 대한 저주와 두 번째로 여자의 후손이 결국 그 존재를 이기게 된다는 것과 남자와 여자는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흙이라는 비형상적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실을 놓고 볼 때 남자나 여자,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곳도 기대 할 수 없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흙이 될 때까지 기어이 책임져야 될 것이다. 단지희망이 있다면 여자에게 약속한 후손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 낼 일 뿐이다. 아담과 하와에 관한 하나님의 이러한 평가는 그 이후의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된다(창5:1-3). 따라서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하는데 약속이란 반드시 심판과 저주 위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그러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자신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별개의 조치로 주어지는 것이다. 즉 약속이나 언약은 근거를 따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 최종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그냥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죽옷을 입혀서 동산에서 추방하는 것을 보아 그 여호와의 행위 자체가 어떤 일방 적이면서 지속적인 혜택과 관심을 나타내는 일인 동시에 인간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행위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형식을 갖는다.

이상의 최초의 약속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 일률적 방침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관심 두는 자에게는 그 인간이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뒤집어 버린다. 그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된 그 시점을 가능으로 바뀌게 한 은혜의 절정으로 전환시키는 증거와 자료로 삼는다. 그래서 은혜란 일종의 인간 행위에 대한 고발이요, 심판의 증표이다. 기존의 인간 쪽에서 제시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하나님의 극단적인 자기 표현이다.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은혜를 제공할 필요가 없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다.

다윗언약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사사기에 나타나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2. 사사시대에 있어 카리스마적 직능에 대하여

 

흔히 쉽게 여기기를 그들이(이스라엘) 곤란에 처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겨 카리스마적인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는 전문가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사기 2:14과 2:19-23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은 모세 율법의(언약의) 완성에 있다. 정복된 땅에 그들이 들어섰을 때는 이스라엘에게는 피 땅의 생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사역의 연속으로 모세에게 예속된 인물로 봐야한다. 여호수아11:15/ 12:6/ 22:5).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든지 약속의 땅에 걸 맞는 약속의 백성이 되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이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만이 요구되는 곳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대로 망하도록 되어 있다. (신28/삿2:24:4-8). 언약의 땅에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언약이다. 사사시대의 지파동맹체제에서도 제단은 존속되었다(삿19:18/ 20:18).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사 출현의 원천을 설명해 준다. 즉 약속의 땅을 평정하고 언약의 백성을 고수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열국을 다 추방하지 않고 이스라엘 주변에 배치한 것이다.(삿2:2B:23).

맨 처음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전쟁들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이긴 전쟁이었다(삿3:1-2,10,28).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의 전쟁의 典型은 기드온 전쟁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여호와와 바알과의 전쟁이었다(사6:28-32). 즉 현재 이스라엘이 바알의 세력의 손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닌 것으로 바알 세력을 친다. 많은 수가 필요 없었다(삿7:7-8). 적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지만 기드온 부대는 항아리를 깨고 횃불만 들고 고함 치면서 나팔만 불어 대었다.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 편에 서는 그것으로 여호와의 칼이 된 것이다(삿7:20), 이상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의 활동으로 미루어봐서 여호와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이 땅에서 유지하는데 있었다, 카리스마적인 인물인 사사들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언약을 위해 일했다. 그들은 결코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율법의 순종 여부를 가지고 시비 걸 수 없다. (예를 들면 삼손같은 경우). 율법과는 별 다른 체계 안에 그들은 놓여 있었다. 그 체계는 인간들로부터 지명 받아 지도자가 되는 체계를 벗어난 체계이다. 그들의 등장은 인간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이 언약이 이루어지며 다만 인간들이 이방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비로소 등단된 자들이 기에 그들의 등장은 이스라엘에 대한하나님의 긍휼(뜻을 돌이키심)과 관련된다.(삿2:18/ 3:9,15/ 4:3/ 6:7/ 10:10). 약속의 땅에서 율법 외에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 라기 보다는 율법을 비치고 있는 보편성에 기인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기 이전에 먼저 그들을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들을 건졌다는 것이 선행한다. 율법의 정신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을 구현하는데 목적이 있다(출20:2/ 신5:5,15/ 삿6:8,13) 그 때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기 때문이다.(출2:23/ 3:7)

여호와께서 여기서는 자기 백성이란 여호와를 향하여 부르짖는 백성이라는 표상을 가진다. 여호와는 부르짖는 자의 편에 서서 싸우시는 것이다(삼상1:10-ll/7:8). 이스라엘의 참전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자기를 부인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사사들의 일은 이스라엘에 위기가 있을 때 이스라엘 자체로서는 구원에 관해 전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반대로 쉽게 성공을 거두어 버리는 일을 한다. 그 승리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고 있는 진정한 왕이 존재했음에 있지 않을까? 바로 카리스마적인 인물들 은 그 배후의 왕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선택된 자들이었다. 즉 율법 보다 선택이 앞서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도 여기에 종속되는데 무조건 선택에 관한 사랑을 이 해해야 된다(출20:1-2). 이스라엘에게는 따로 왕이 필요치 않는 것은 그 땅의 왕들을 여호와께서 홀로 통합해서 다스리는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삿4:23-24 8:12).

왕이 없는 이스라엘이(삿17:6/21/25) 왕 가진 집단을 진멸한 것은 인간 왕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모세언약에 준하지 않는 왕과 백성 사이에는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되어있다. 즉 양측이 다 책임지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출24:6-8) 따라서 사사의 등장은 언약의 위배됨을 알리는 경고조치이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는 시점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왕을 달라는 요구를 했을 때마다(삼상8:4-9) 백성들이 왕을 구하는 것을 마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우상을 찾는 것과 동일』행위로 하나님은 간주하고 계시다.(삼상12:19) 그렇다면 여기에 그것을 고발하는 새로운 사사가 등장되어야 한다.

 

3. 사울과 다윗

 

사울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는 데서 사사와 영속성을 갖는다.(삼상9:1 5-16/10:6, 12-13/11:6)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뜻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사울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은 사사와 같은 계열에 서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왕 제도 자체는 백성을 왕 개인의 것으로 私有化하는 동시에 운명도 같이 되는 제도이므로(삼상8:9-18), 만약 왕 제도가 구성되고 난 뒤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언약의 땅의 법칙에 부합되게 살지 못하는 경우에는 왕 개인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성을 갖게 된다(신17:14-20심상13:13/삼상12:13-14).

여기서 사사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사사 임무 수행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백성의 운명이 이방의 왕 제도처럼 한 인간에 예속된다면 그 인간의 한계와 무능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책임져야 된다.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변변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온 것을 봐서 이스라엘의 보호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한 인간이 출중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신 것은 왕이라는 제도가 이방 나라와는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고자 함이다. 소위 기름부음 받은 자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언약 안에서의 왕이 되기 위한 기름부음을 입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을 위한 왕이어야 한다. 그러면 언약 안에 기름부음이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기름부음이란 성별과 관계되고(창28:18, 출29:2/ 30:23,26) 부름이란 선택과 관계된다(출28:41/ 30:23/ 레8:30).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자(또는 기름 발린 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일반인과는 달리 구별되도록 선택된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보편성만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특수성을 두어 그 특수성 안에 보편성을 흡수, 집약시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단 이 특수성의 등장이 보편성에 어떤 취약점이 있다든지 제도상 모순이 된다거나 문제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보편성을 유지해 나가는 기반이 특수성이 내포하는 본질과 관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름발린 자가 하는 특수하고 성별 된 작업에 무관심하면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선택도 무너진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간택할 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사무엘에게 내린 것은(삼상9:16, 10:1) 왕이라는 제도와 직능이 제사장과 같은(삼상2:18) 차원에 두어지는 것이며, 이는 구원이 그 동안 카리스마를 입은 사사 본인의 자질과 무관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왕이 모세 율법의 기준으로 봐서 백성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하고 회복시켜 주어야 될 형편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의 성패가 왕이라는 인격 하나에 예속된 이 시점에서 왕이 취할 태도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카리스마적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삼상12:13-16). 이 제 왕이 하는 일은 사사시대 때 백성들이 어떤 위기와 외부의 침입에 대해 자신들의 무기력에 절망하고 있을 때와 거의 동일한 역할을 한다. 자기의 왕을 구한 죄악도 포함된다(삼상12:19). 이스라엘은 왕을 얻어 놓고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는 왕 이 필요 없음을 안다.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한 왕이 었다(삼상12:5). 이제 사울 왕의 개인의 신앙적 위기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위기로 여겨야 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사울왕은 개인적 자질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법보다 백성의 동향에 더 신경을 썼다. 그는 백성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는 카리스마적인 임무를 망각했다. 백성을 고발하기 위해 세워진 왕이기에 왕 의 바른 자세는 늘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율법을 선택해야 한다. 사울은 이점에 실패한 것이다(삼상13:8.14:9.15.:24).

사울과는 달리 아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신앙고백을 한다(삼상 14:6). 이 왕의 기능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왕 자신도 이러한 왕 적 직능에 예속되어야 한다. 왕적 직능이란 제사나 수양의 기름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있다(삼상15:22-23). 이 순종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구현 하고자 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체제이다.

 

4. 사울의 실각

 

다윗 이전에 사울 체제로 도전한 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요나단이다. 사무엘상 14장에서 보면 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전쟁 개시를 그들이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맹세를 그는 무시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이유는 왕이란 왕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의 구원을 위한 왕이라는 것이다(삼상14:29). 조금 후에 백성들이 기다리기에 지쳐 율법을 어기고 송아지를 피 채 먹는 일이 발생한다(14:3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전쟁에 성공한 후였다. 여기서 무엇이 범죄인가 하는 문제가 관심거리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삼상14:38). 이 사실을 두고 사울은 하나님께 물어 본다. 결과는 백성들은 전혀 면제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만 최종 남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약 죄라면 그것은 사울 왕가의 책임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최후에 남은 자는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이다(42절).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고자 하나 백성들은 요나단을 통해서 승리를 하여 구원을 가져 왔는데 어떻게 구원자를 죽일 수 있느냐고 송사한다. 사울은 자신의 맹세에 입각하여 죄를 결정하지만 백성들은 구원의 성취능력을 가지고 죄를 결정하려고 했다(45절). 즉 꼭 왕이 아니더라도 구원자는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을 왕이 가진 카리스마의 일부가 붕괴됨을 나타낸다. 왕의 고유 권한이 상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꼭 사울 왕을 통해서 일하지 아니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가의 균열은 도전 받는 왕위의 조짐이다. 이것은 후에 또 다른 왕, 다윗의 등장의 정당성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갈등은 다윗 통치 이후 여러 번 나타나는 모반이 다만 왕가의 대를 잇는다는 구실이라면 그 부당함이 쉽게 밝히는데도 도움된다. 왜냐하면 요나단 조차도 다원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삼상20:16). 이토록 다윗 등장의 정당성은 사울 왕가인 요나단에게도 지지 받는 일이었다. 요나단에 있어 구원이란 “사람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라고 하는 신학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어린 다윗과 일치된 생각이었다(삼상14:6/17:47). 이스라엘에게 왕이라는 직능은 하나님이 왕 없이 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그 방식의 범주를 벗어 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 언약이 겨냥한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언약의 땅의 유지 책이다. 거기에 비해 사울 왕은 율법이 지닌 고발의 기능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아니했다.

이것은 직능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윗의 선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울의 어떤 점을 고발하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카리스마적인 사무엘의 선택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직접 선택에 나섬으로써 인간과의 어떠한 접촉점도 허락하지 아니한다(삼상 16:6-13). 제사와 율법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다(삼상 16:2-5). 제사와 율법마저도 다윗의 자의적 행위에서 재해석 되어져야한다. 사무엘의 등장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다윗의 등장은 사울 왕가와 거기에 고착되어 있는 백성들의 현 사고체제에 대한 고발이다. 인간의 선택행위가 얼마나 부실했으며, 율법해석에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가는 새로 등장한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선택과 활동으로 분명해진다. 이방나라들처럼 왕을 달라는 요청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바로 이해했다면 도저히 나을 수 없는 주장이다. 왕은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왕이란 직능은 율법이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은 단순히 백성의 대표자만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중보자적인 기능도 있다. 따라서 왕이란 제사장직까지 흡수하게 된다. 즉 왕을 세워 둠으로서 자신들의 부르짖는 행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왕직 자체가 율법의 속성으로서 백성들에게 죄를 들추어 저주하는 기능이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無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직능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새로운 선택 안에 흡수한다(삼상 16:13).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전개하는 것은 어린 사무엘의 의미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다윗이 보여주는 왕직사역이 어떠하며 여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양분된 정치상황과 태도를 검토하는 일이다. 동시에 두 왕이 존재하면서 나타나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생성되며 발전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서서히 해체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는 또 다른 실체를 지닌 이스라엘 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5. 다윗의 등장

다윗이 사울에게 배척받게 된 것은 백성들로부터 직접 주목을 받을 때부터이다(삼상18:7-9).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백성들을 향한 유일한 통치양식으로 지속시켜나가고 싶은데 다윗으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이 시점에서 다윗의 긍정적 활동으로 백성들의 눈에 자신의 버림당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울은 자신은 자기가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다윗을 자기 사위로 받아 드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다윗의 전쟁터에서의 죽음에 대한 책임회피의 구실도 됨을 염두에 두고 다윗을 위험한 전쟁터에 보낸다(삼상18:25-27). 그러나 그것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쳐지는 계기가 되는데, 원인은 한쪽은 하나님이 같이 하지만 다른 한쪽은 같이하지 아니한다는 차이 때문이며 원수관계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18:28-29). 이후부터 다윗의 편이 아닌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란 말로 등장한다.(시편에서) 따라서 다윗의 활동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가 새로운 양상으로 정리된다. 다윗이 쫓겨다니면서 사울 왕, 즉 기름부음을 입은 자에게 행하는 태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곧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에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로서 살면서 그는 무엇을 이스라엘에 남기며 보여 주고자 했던가? 그것은 모든 것을 無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도 다윗 에게는 해당이 된다(21:1-6). 거룩과 비거룩을 다원의 활동에서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삼상23:9/30:7).

거룩이란 원수로부터 배척받은 것을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다(삼상23:21/24:17). 그때부터 다윗은 없이 지내는 왕, 악인들에게 오히려 쫓겨다니는 왕, 비천하고 소외된 자로부터 오히려 환영받는 왕(삼상22:1-2), 그런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삼상30:7-20).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을(헤렘)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준다(삼상30:26), 이는 여호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여호수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유다지파에 알리는 셈이 된다(여호수아22: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카리스마적인 직능인 기름부음에만 기대를 건다(삼상24:5-6). 그는 왕 직능을 원초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긍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규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긍휼이다. 긍휼을 이해 못하는 자는 비 이스라엘적이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다윗이 왕으로서 보여준 긍휼에 무관심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친히 치시게 된다(삼상25:38). 뿐만 아니라 결국 사울 왕도 그 아들과 블레셋 전쟁에서 사망한다. 한 왕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경험하고(삼상28:18) 새로운 왕이 그 사실을 애도함으로서 앞으로 새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받아들임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를 거는 방식임을 알게된다(삼하1:16-27)

 

6. 다윗의 통치

 

사울이 죽고 난 뒤, 다윗의 과제는 자신이 단순히 다윗지파만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 됨을 어떻게 그들에게 납득시키냐에 있다(삼하2:4,10-11). 이런 점에서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왕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존속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울 자체보다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죽었다는데서 사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왕 체제 자체를 계속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양식으로 고정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해결 되어야할 문제가 남아 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삼하2:10).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무리한 시도였다. 애들 장난거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삼하2:14). 다윗은 모두를 용서받고 싶었다(삼하4:10-12). 그러나 요압은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삼하3:27-39). 어쨌던 자연스럽게 사울의 집은 약하여지고 다원의 집은 강해진다(삼하3:1). 사울 집의 약화는 백성들로 하여금 나머지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삼하5:1-3). 다윗은 카리스마적인 언약자로서 백성에 대한 자기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남은 이방인들을 치기 시작한다(삼하5:3,6,19,25).

여호와 전쟁에서의 중심은 법궤에 있다(수6:6). 그 법궤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3차례씩 여호와를 뵙기 위해 이 곳에 와야 한다(출23:17/34:23/신16:16). 여호와의 임재 장소를 일정하게 규정했다 할지라도 법궤의 이동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가나안 땅의 성소와 여호와가 임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출애굽기 20:24의 제단법에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토단을 쌓을 것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라고 약속했다. 나중에 이 토단에 성막이 들어서고서 안치된다. 그럼으로 해서 그 여호와의 이름에 어떤 의미가 부가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부서져버린 들판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새롭게 제공된 돌판이므로 말씀대로 하자면 당연히 멸망당해야 될 이스라엘 민족을 '노하기에 더디하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출33:19/34:6) 현재 동행하고는 물증으로서의 법궤(시은좌 또는 속죄소)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땅을 전부 점령했을 때, 바로 그 자리가 여호와의 승리를 영원히 빛날 장소이다(민10:35).

다윗은 신명기에 나오는 “여호와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된 장소”를 카리스마적인 사명이 완수된 최종적 장소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만 비로소 안식이 실제적으로 보장된 것을 천명을 할 수가 있는 그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신12:5,10-11,14,18,26, 14:23-15:20/16:2,6-7,11). 그 택하신 장소까지를 이끌어 가는 그 당사자가 바로 신명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는 자라는 견해를 다윗은 가지고 있다(신16:16/17:1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정한 것은 여부스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추방되어야 할 최종의 족속인데 그것마저 정복했다는 뜻이 있다(창15:21/수3:10/삼하5:7).

드디어 전쟁이 그치고 평정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법궤로 구현된 하나님의 理想도 이제는 이스라엘 앞에 보여질 때가 된 것이다. 법궤가 일정한 장소에 영구히 안치될 때 이스라엘의 영원성도 함께 보장받는다. 다윗이 법궤를 자기가 거처한 곳으로 가져(삼하6:10), 여기서 사울家에 속한 왕비 미갈은 왕의 체통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다윗은 왕의 임무가 바로 법궤의 유지 보존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 자체가 가운데서의(왕제도) 긍휼이기 때문이다(법궤). 심판과 긍휼이 왕제도에서 만 미갈의 不姓은 이러한 다윗언약에 이탈되는 생각이므로 다윗왕가의 후손을 왕후의 자격에서 벗어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도 다윗언약을 세 우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미흡하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야겠다 고 했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신다(7:5-17).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궁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 자체를 언급한다. 그러나 누가 다윗의 진정한 가문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혈통 서열로 결정되지 않음에 다윗 언약의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누가 진정 다원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원언약을 통해서 언급하셨듯이 다원의 후손이 곧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지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삼하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 대외적으로 어떤 눈부신 실적을 남겼느냐(삼하8장), 혹은 대내적으로 얼마나 정치제도를 안정되게 정비했느냐 보다는(삼하9장) 사무엘 저자가 많은 분량을 다원의 사생활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다윗언약이 가진 실체는 세속적인 政街에서만이 밝혀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아내어 후대함으로 자기의 관대함을 정가에 비치고 주위의 이방나라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선포함으로 내외적으로 말썽의 소지를 없앤 다윗은 다윗언약의 대상인 왕의 실체를 힘에 의한 통치라는 차원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즉 힘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왕이 되고 또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열왕기 저자는 다윗이 사방에 전쟁을 벌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했고 역대기 저자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상5:3/대상22:8/28:3).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코 다윗언약에 들어 있는 왕의 표상과 상관없음이 다윗 자신의 전쟁 중에 한 행위로 드러난다(삼하11:1). 이미 남편 있는 여인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여인과 관계를 가짐으로 율법과 마찰되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이 여기에서 무마되면 좋았을 터인데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임신케 한 장본인을 휴가 나온 남편으로 돌리기 위해 일을 꾸몄지만 거룩한 여호와전쟁 수행에만 관심 있는 우리아에게는 다윗의 술책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삼하11:11). 이러한 우리아의 일관성 있는 태도는 다윗의 다음 범죄를 유발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하나님은 우리아 부부를 통해 다윗이라는 인간의 범죄성을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밝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단이 다윗을 지적할 때 간음이나 살인의 차원에서 고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삼하12:1-6). 나단의 지적은 가난한 자와 부자라는 두 신분계층을 예를 들면서 신분적인 특권이 이스라엘에서 허용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권이란 개인이 지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각기 서로 다른 법에 의해 규제를 받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에서 보편적인 법을 제쳐두고 특정인이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이스라엘 왕인 다윗에게 나단은 묻고있다. 여기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명쾌하다.

소위 이스라엘의 왕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런 자의 존재는 용납피지 아니한다(삼하12:5). 율법의 적용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출24:5-8). 쌍방이 책임지는 관계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유지가 가능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는 자는 그 누구든 그 모세언약의 저촉을 받아 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나단은 이야기해 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여기서 나단은 왕의 임무에 대하여 중요한 사항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왕이 백성들 보기에 솔선수범해야 된다든지 모범적으로 먼저 율법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왜나 같이 부족한 자를 왕을 세웠는가 하는 하나님의 의중의 뜻과 관련되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에게 지적 받고 난 위에 한 기도가 적혀 있다. 여기서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것과 성신에 관한 언급과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심령을 원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 성이 어떻게 변모되어야 하는 희망사항까지 거론하고 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에 행하시고 그때야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율법 이전에 먼저 주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윗은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도를 하게된 다윗의 신학적 기반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죄악을 범죄한 자는 반드시 여호와께 벌을 받는다는 강렬한 율법수호 정신을 자기자신에게 적용시킬 때 어떤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면 자기가 그 범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소유했다는 것이 증명될 때만 가능하다. 다윗은 자기가 늘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고 표적으로 여겼던 그 죄 자체를 어디서 발견했는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바로 이 소리를 했을 때 다윗은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이 파악된 것이다. 그러면 나단이 자기를 찾아오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수많은 범죄를 행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내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으며 이스라엘의왕이라는 위치에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의 수많은 인자와 긍휼로 인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결국 왕이란 다윗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리임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이다. 다만 자리가 타인보다 왕의 위치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누구보다도 절감하여(시편51:4), 오직 긍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道를 전하고 가르치기 위함이다(시51:13). 진정한 제사와 번제는 통회하고 傷한 심정이다(시51:17/40:6).

다윗언약에 의한 진정한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다윗의 통회하는 심정을 영원히 담아 둘 수 있는 출생의 경험을 지닌 자에 한한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 해당되는데 그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원의 범죄로 잃어버린 자, 그 바탕 위에 다시 태어난 자에 한해서 비로소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이다(삼하12:15-25). 다윗은 말없이 죽어버린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하고있다.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삼하12:23), 여기서 다윗의 하나님의 용서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용서행위를 ‘주께서 꺾으신 뼈에 참여시켜 그것으로 기뻐하게 하는 행위'를 두고 말한다(시51:8). 다윗도 아이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간주하여 참여를 선언함으로 자기 말고 자기의 죽음, 그 현장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그 다음 의 행위에 기대를 건다. 그것이 여디디아, 즉 하나님의 사랑행위이다. 다윗언약은 다윗의 혈통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자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다윗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여기는 자 말이다. 따라서 이 이후에 나타나는 다윗왕가의 내분은 혈통적 다윗왕가가 얼마나 다윗언약하고는 상관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實例가 될 것이다.

사무엘하 13장에 넘어가면 다윗왕가에서 일어난 私的인 일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사무엘하 12:10-12에 나오는 다윗부분의 재난의 예고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 원인은 결코 힘의 불균형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다윗왕가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과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자질과 연관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바로 그러한 가치관의 혼란이 다원언약과 상관없는 세력들의 준동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다윗 및 다윗왕가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는 다윗언약이 수립된 후에도 그 기반에는 모세율법이 지향한 정신을 변동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잦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상황도 원래의 노선을 빨리 찾아가지 아니한데 책임이 있다. 그 원래의 노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다윗의 현 시점에서 다윗의 부도덕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다시 반복되는 가운데서 누가 실패자이며 그 실패자 때문에 누가 또 헷 사람 우리아같은 희생을 치르게 되느냐로 밝혀진다. 즉 의인의 죽음을 값으로 하여 언약의 根底를 이루고 있는 사상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복 오빠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범죄는 다윗의 분노는 샀지만 결코 다윗으로부터 왕자 지위가 박탈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왕자 압살롬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기회를 차후에게 한다(삼하13:21-22). 그러나 이는 다윗 왕의 생각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다윗언약은 보복으로 유지되어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에 대한 후속조치는 있어야 했다. 公義性을 생명으로 하는 왕으로서 피해 당사자로 하여 복수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욍이 지근한 범죄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 측으로부터 가해자를 싸고돈다는 의혹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될 경우에 복수하는 측에서는 결국 가해자뿐 아니라 그 가해를 보호했다고 여기는 배후까지 공격해 버리는 실수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왕의 혼란은 이래서 야기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에서 왕의 정책에 혼선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으니 요압이다.

요압의 눈에 다윗왕의 결정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다윗왕에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겁탈 사건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던 왕은 이번에 또 압살이 양털을 깎는 축제기간에 왕자들을 몰살했다는 급서를 듣고도 압살롬에 대한 어떤 분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났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하여 슬퍼할 뿐이다(삼하13:37-39). 당황한 쪽은 다윗의 명확한 정책기준을 몰랐던 요압이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요압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모호하기만 한 다윗의 의중에서 도대체 누구를 진정 차기 왕으로 등단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갖기 위해서다. 의도적으로 압살롬을 미리 천거해 보는 것이다(삼하14:1). 거기에 따른 다윗의 반응이 궁금했다. 연기에 능한 여인 하나를 내세워 여인 자기집안 일인 양 사건 하나를 의뢰케 했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는데 나마 남은 아들도 살인자로 해서 또 죽여야 하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한 요압의 이러한 비유는 전혀 압살롬과 다윗과의 사이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이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고 그 선택은 왕 알고 하나님의 심정에 참여된 자에 한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알고 있는 간택문 는 율법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율법에 의한 형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그것이 구현이라고 본 것 같다. 다원이 압살롬을 그리워한 것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었고 사랑의 차원이었다. 다윗은 자기 말한 것이 있어 아들 압살롬을 다시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얼굴 마주 대하기를 거절한다(삼하14:24). 왕의 이러한 태도는 요압으로 하여금 다시 압살롬을 거론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아 그와의 관계에 부담을 갖는다(삼하28-33). 이러한 추세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기존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거사에 대비케 한다(삼하15:1).

향후 4년간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 왕의 색다른 이미지를 대중 속에 심어나가는 일이었다. 감히 다윗 왕이 생각지도 못한 재판관 제도를 자기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 왕과 대중 사이의 대화와 삶의 유일한 창구를 틀어 막아버렸다(삼하15:2-6). 그리고 제사순례라는(예루살렘에서 헤브론, 다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 합법적인 이유로 절차에 의해 왕으로부터 허락을 획득한 후에 헤브론으로 빠져버린다. 이는 압살롬 자기가 헤브론에 거처하는 것이 왕의 합법적인 승인에 의한 것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 다음 시행될 일도 어떤 합법성에 기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백성들에게 유도해 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초청받은 유지들이 별 의심 없이 압살롬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다(삼하15:7-11). 다윗성을 떠나 피난길에 나선 다윗왕은 후궁 10명을 궁전에 남겨 둠으로서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압살롬의 반란을 일시적인 일로 여기고 법궤까지 이 동 시키려는 레위인들에게 제자리에 놓기를 당부한다(삼하15:24-29).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과 그 일행은 울음으로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삼하15:30)

도대체 누가 이 참담한 혼란으로 이스라엘을 몰고 가고 있는가? 그 때 누가 이런 소식을 전한다. 아히도벨이 적군 쪽에 붙어 있다고 그 때 다윗은 그 아히도벨의 책략을 무산시키는 것 자체가 사태를 원상복귀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고 그렇게 여호와께 기도한다(삼하15:31). 마침 후새가 자기 앞에 나타난다. 다원은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어 압살롬을 영접하게 한다. 그래서 압살롬으로 하여금 두 사람 의, 즉 자기와 같이 따라온 신하와 선왕을 배반하고 자기를 왕으로 환영하는 신하의 충성도 사이에서 번민케 하여 정책결정을 주저하고 있을 때, 다윗 일행은 안전 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삼하17:22). 다윗왕에 대한 변란은 평소에 다윗 왕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누구였는가? 그리고 우호적인 자들이 누군 인가가 명확히 구분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울 집안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요나단의 아들 인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있는 시바가 왕의 호의에 대한 자기 주인의 변절을 이야기해 주면서 많은 양의 물자를 제공한다. 왕은 그에게 자기 주인의 것이 이제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한다. 주인이 바뀐 셈이 된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 다원의 행렬을 보고 따라 오면서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심지어 돌과 티끌을 뿌린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 자신이 사울 지파를 피 흘리게 한 그 범죄의 대가가 이제야 스스로 아들을 통해 완벽하게 보응을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그의 모든 전주가 오히려 善으로 바낄 것이라고 여긴다(하16:12). 다윗의 이러한 생각은 신하인 아비새와도 다른 것이었다. 다윗은 하님이 자기에게 주신 굴욕 속에서 다윗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정비해 보려는 하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한다. 자신이 굴욕 속에 있는 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 하나님은 언약대로 움직여 나갈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후세와 아히도벨 정책 대결에서 후새가 승리하고 있었다. 승리의 비결은 간단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한 쪽이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후궁을 차지하도록 권하는 이는 후궁은 왕에게 봉사하기 위한 왕의 전용물과 같은 의미가 있어 압살롬은의 實勢를 과시한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즉각 지쳐있는 다윗의 세에 덤벼들어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그들의 군대를 우리편으로 삼을 수 있고 고립된 상태에서 다윗 왕을 제거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거기에 대해 후새는 다윗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한 후에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만의 하나 전투 초반에 우리편이 밀리는 경우 군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다윗군대를 공격하면 마치 이슬이 땅을 덮듯이 어느 누구하나 살아남을 수 없는 완전승리가 보장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후새의 의견은 아히도벨의 의견보다 더 극적이고 환상적이라 참모들에게 감명을 끼친다. 이러한 압살롬편의 현실을 무시한 허망한 꿈은 후새의 계략에 의해 더욱더 자만에 부풀어 있다.

다수의 지지가 후새에게 쏠리자(삼하17:14) 아히도벨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윗군대는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이 친히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압살롬 군대를 공격한다. 공격 이전에 다윗은 장군들에게 나를 봐서라도 압살롬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처리할 것을 부탁한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압살롬 군대는 오합지졸이 된다. 압살롬 자신도 짐승을 고 숲 속으로 도주 피신하려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외모의 장점인 긴 머리카락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 생포되고 만다. 이 사실이 요압에게 알려지자 고의적으로 왕의 명령을 위반하고 사정없이 찔러버린다. 그리고 난 뒤 요압은 그 다음 행동을 염려한다.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보류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구스인을 하나 보내어 일단 다윗왕의 태도를 엿보기로 한다. 예상대로 다윗은 전쟁에 승리한 병사들을 격려하기보다는 자기아들 압살롬의 죽음, 즉 다윗언약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의 성실에 따른 것이었다(삼하7:14/18:33).

다윗왕가의 고유성은 단순히 죄지었다고 처단하는 그런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표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다윗 왕 정책의 理想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자기 가문에 대한 집착은 일부 신하와 전왕의 복권에 미련이 있는 세력들에게 지파 對 지파 감정대립으로 백성들을 몰아 자신들의 힘 규합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셈이 된다. 특히 군대장관 요압은 그 와중 속에서 자기 판단에 의해 전쟁을 수행했는데 압살롬의 살해는 왕의 부재중에 벌어 졌다는데서 다윗이 없을 경우에 요압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의 意思와 反하는 승리는 다원언약 체제에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이방적 이다. 다윗언약에 의한 승리는 사사의 속성의 연장으로 힘과 多數에 의한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가장 못한 자를 통하여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방식이 여호와 전쟁 방식이다(삿8:2). 다윗은 군대장관을 새로 요압에서 귀순한 아마사에게 맡기기를 원했다(삼하19:13). 그러나 그 사람도 다윗의 부재중에 요압에게 살해되고 만다(삼하20:10-13). 여기서 요압과 다원이 전쟁을 보는 견해에 차이가 나는데 요압의 경우 승리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며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다윗의 분노를 가지게 한 행위가 한두번이 아니었다(삼하3:27-28/18:14-15/19:13/20:10). 요압은 다원으로부터 우리아를 제거하는데 가담한 자였다(삼하11:16-17). 요압이 생각하는 왕정체제란 왕의 절대적 권한하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이것은 오직 정면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복당한 자와 정복자에서 결정된다고 여긴다.

왕이란 항상 이겨야 그 자격을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했다(삼하12:26-28). 요압의 이러한 견해는 귀순해 온 자에 대한 다윗의 파격적인 우대에 대하여 회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조금 전까지의 원수를 전우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배신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이방인들과 전쟁과는 달리 국내 분쟁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달리 이해했는데 그것은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 살해공작 이후 시온성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온성은 어떤 분쟁에 휩싸인다 할 지라도 그 은혜성을 인정하는 자의 차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시51:18).

밧세바에 대한 다윗 자신의 범죄는 바로 다윗언약이 내포하고 있는 그 思惠性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으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준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헷 사람 우리아였다(삼하11:l1/신명기 23:10). 우리아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왕이 행한 형식적인 율법관과 달랐다(삼하11:112:6). 언약에 대한 자신의 포기 내지는 헌신이었다. 결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이 자신은 비록 왕의 위치에 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위한 충실한 종을 자신인 살해한 셈인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모아진다(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이스라엘에서 범죄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진정한 율법이란 우리아의 죽음에서 그 주체가 밝혀진다(시51:8 ‘주의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34:20).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속 왕으로서 존속되고 언약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우리아같은 의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로 하는 왕, 즉 죄인에 의해 죽었지 때문이고 그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여디디아) 새롭게 창조. 혹은 회복된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마태복음1:16). 이로서 다윗은 국내 분쟁의 와중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진정한 언약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모든 변란과 반란을 이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로 간주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를 의인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다시 찾아 나서시는 그 언약적 속성이 피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어나고 있음을 다윗은 증명해 보고 싶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사명은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연속, 피 흘림과 칼부림으로 인해 얻어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질서를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판이 있다면 이러한 다윗의 언약적 통치를 이해 못하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배반하는 자의 것이 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은혜성에 어두운 것이 언약과 무관한 자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압은 가장 비이스라엘적인 인물이며 그가 어떻게 제거되었느냐를 통해서도 언약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삼하22:25-26/왕상2:32-34). 압살롬의 난 평정 이후 왕이라는 제도가 다윗지파에게만 꼭 한정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불만을 갖는 무리가 등장한다(삼하l9:41/20:1-2). 이와 같은 불만이 마치 왕이 자기들의 기업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삼하20:19). 왕과 기업,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다 이스라엘에서 존속되어야 된다.

기업이란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라서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또한 그러나 왕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용서되지 못한다. 베냐민 사람 시바의 반란은 이로서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왕의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위치는 다윗의 인구조사에서 밝혀지듯, 이 모든 것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고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종으로서 그들이 범죄 했을 때(삼하24:1)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역할이 중심이다(삼하24:25).

그 후 다윗은 누구하고도 동참하기를 거부한다(삼상20:3/왕상1:4). 이미 후계자는 이스라엘 내부의 그 누구와도 결탁 이 되지 않는 인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 등극함으로 비 우리아적인 존재들은 하나 둘씩 그의 면전에서 사라진다.

 

 

3. 결 론

 

인간이 왕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왕 되심이 희석되거나 포기되고 말까? 그럴 수는 없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 임재가 취소되지 아니한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죄악을 사사시대의 카리스마적 직능과 결부시켜 그들을 긍휼과 자비의 통로로 전환시키셨다. 하지만 그 죄악이 긍휼로 극복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소유, 즉 의인 우리아를 제물로 내 놓음으로 가능한 일이다(시51:8).

다윗언약이란, 이름은 다윗이지만 실제로 우리아같은 신앙의 차원에서 맥을 이어간다. 하나님 자신의 것의 ‘버림'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언약을 조금도 이해 못할 사람이다. 구원이란 종교적인 용어 나열과 그것을 외운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이 안고 있는 내용과 의미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16. 다윗시대와 시편

 

다윗 왕권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알려면 시편을 봐야 합니다. 수많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 다윗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정리할 수 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하여 행하시고 또 그만한 능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과연 선조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밝혀진 하나님을 자기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윗은 어떤 경로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2. 다윗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3. 그 결과로 다윗의 통치 기간에 이스라엘 국가에서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1. 약속의 땅에서의 통치의 특수성문제

다윗은 이스라엘 통치 하는 것을 사울을 통해서 부정적인 안목으로 터득하게 된다. 사울에게 있어 최대의 관점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마음에 맞추어서 통치하느냐 이었고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삼상13:8/13:11/14:45/15:24) 백성의 관심은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이방왕들이 할 수 있는 한계성이었고 사울 같은 자를 추종하는 백성들의 믿음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만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마땅히 해야될 임무로 여겼습니다.

약속의 땅에 있어 승리란 거룩의 승리이어야 하고 불신앙과 비신앙에 대한 신앙의 정복이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가질 신앙은 무엇입니까? 왕으로서의 통치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율법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왕이 긍정적으로 해야 되는 것은 “거룩의 실현”입니다. 더구나 레위지파가 아닌 자기로서 제사 이외의 방법으로 거룩을 달성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곧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인격 속으로 제사를 흡수시키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하나님의 선택”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제사는 이 선택 과정 속으로 함몰해 버립니다. (삼상16:2-7) 이 부분에서 사무엘이 제사를 드린 다면서 수송아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암송아지를 데리고 가는 점을 우리는 중시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제사가 자신의 본체를 위해 양보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부터 다윗은 제사의 실체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21장)(삼상30:7) 그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아래의 행위가 됩니다.(삼상17:45) 제사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선택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자기이름이 거부됨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이 기름부음이 왕이라는 기능과 결합이 된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거룩이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란 직분은 기능적으로 그를 대표하고 있습니다.(삼상12:13-15) 모든 권리가 그에게 집결되고 왕을 세운 당사자들은 자기가 세운 왕의 지배를 받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삼상8:9-18) 다윗은 바로 여기에다가 기름부음 받음의 의미를 첨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여기에 놀라운 사실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선택받아 기름부음을 입은 자”가 남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왕이니깐) 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제도와 법의 제정권을 소유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니깐 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름부음의 정통성을 이스라엘 내부에 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삼상24:6/24:10/26:16/삼하1:16) 바로 약속의 땅은 “기름 부음을 입은 자” 의 통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윗이 발견한 여호와의 형상

시편에 있는 다윗의 작품의 대부분은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나온 것들입니다. 이런 곤경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익히는 것입니다. 시편의 구조는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다음에는 고난받는 자기 처지를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의 왕이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즉 고난받는 의인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시22:1)

그러면 이 고난이 어떤 식으로 처리되는가요? 바로 하나님이 의인의 원수에게 보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보복은 다윗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다윗의 이름이 아니라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다윗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다윗이 자기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신뢰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다윗은 왜 고난받으며 과연 다윗이 원수라고 한 그 원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어떤 구체적인 인격체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영일까요? 시편에서는 이것을 악인, 죄인, 또는 오만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시편1편).

바로 이 사상이 시편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한평생을 두고 싸웠던 상대는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모를 뿐더러 여호와의 능력도 믿지 않는 자들이며 그 자리에서 세상을 노래하는 자들이며 여호와의 이름 대신 자기이름으로 대체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는 성전의 의미를 모릅니다. 결국 다윗은 성전을 고수하기 위하여 싸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전완성이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에서 안식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피조물과 함께 이 땅에서 저주받는 존재로 지내야 되는데 있습니다. 이 땅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땅이 창조된 원래의 목적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이 창조될 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때에 안식하십니까? 그것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이 땅에 남겨 지고 나타났을 때에 비로소 기뻐하시되 심히 기뻐 하셨습니다.(창세기 1:31)

이러한 창조의 원리가 구속의 틀이 되어 주며 동시에 다윗이 이해한 신앙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다윗 때 와서 구속의 하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는 말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다윗이 왜 그런 식으로 밖에 이해할 수가 없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의인이 오히려 고난받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본래 하나님이 기쁘게 창조하신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이 명확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땅의 안식과 여호와의 이름을 관련시켜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분명 안식에로의 회복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노아 때의 땅의 회복이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달성되었다면(창5:29) 여호와의 이름도 분명 이 세상 특히 와전된 세상에 대한 심판의 기능이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부를 수 있는 여호와의 이름과 그리고 그 이름 있는 성전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의 경과는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고난 가운데 처한데 있습니다.(시 22:1)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이 이 곳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성전이 요구되고 영원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영원한 제사장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다윗 자신과 같이 영원히 이 타락된 세상에서 고난받는 분이 등장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 레위지파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 언약의 한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면은 아브라함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멜기세덱에게 예속시킴으로 해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자신의 언약적인 한계를 멜기세덱에게 예속시킵니다. (시편110편)

이것은 영원한 예속입니다. 다윗 개인뿐만 아니라 다윗 언약에 속해 있는 전부가 다 포함됩니다. 이로서 다윗은 그 완성의 때를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17. 열 왕 기 서

 

인간이 왕을 구한 이상 하나님은 그 왕을 중심으로 하여 통치하시는데 있어 변하지 않는 원칙과 원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언약의 영구성은 인간 왕들의 돌발적인 과오에 의해서도 결코 소멸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다윗언약의 지속성을 보장해 줄 정치적 장치는 무엇입니까? 다윗가문의 혈통적 보존만이 그 증거로 남게 됩니까? 열왕기 記述者는 다윗언약의 혈통 유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이행에 관한 사항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결과하고는 무관한 것이라고 합니다.(“다윗 성에 장사되고 ”라는 문구) 즉 장소가 언약 안에서 갖는 의의를 나타내는데 이는 솔로몬이 성전에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에 연장된 혜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성에 귀속되도록 조치된 이스라엘의 실체는 그 실체를 만들어내는 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유지케 하는 동안에 늘 이스라엘에 지속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동인을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왕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회피하게 된 이유와 진리를 외면한 왕에게 다시 원리원칙으로 돌아가기를 독촉하는 선지자들의 갈등을 수록한 것이 열왕기입니다.

하나의 현실을 두고 그 현실을 해석하는 견해에 차이가 났다고 한다면 서로가 다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배척과 수모 받는 자가 나타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러나 실제 현실의 동태는 하나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윗 이 후 인간 왕들의 활동에서 이스라엘의 원초적인 한계를 다윗언약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열왕기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한계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우리들은 선지자들의 활약상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 선지자들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왕들은 어떤 안목으로 정치를 해 나갔는가? 또 왕들의 그런 정치지론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성전을 완공하고 난 뒤 솔로몬과 하나님이 쌍방간에 약속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조사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8장의 기도 내용에 앞서 솔로몬의 위상에 대하여 검토되어야 됩니다. 열왕기상 2:45 과 3:3에 보면 솔로몬을 자신이 다윗언약에 종속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가 왕이지만 자기가 잘나서 왕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 다윗과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준하여 그 실시를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왕의 자리에 앉아 자리에 앉아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마치 여호수아가 땅을 정복했어도 사실은 모세 언약이 땅을 정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수아 참조) 사무엘하 22:1-23:7 에서 다윗은 평정된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을 바라보면서 읊은 노래가 실려 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다윗의 집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친히 반석이요 방패요 망대요 피난처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외세나 이방의 힘도 나 다윗을 위험한 공경에서 심지어 사망으로도 위협을 가 할 수 없는 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구출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몸소 체험한 바 있었습니다.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를 주시고 완전을 요구하는 자에게 완전함을 보이시며 무시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지체하지 않은 모세언약에 대한 충실성도 그는 체험해 왔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여호와께 호소 하기만 하면 천군천사까지 동원 되어 나와 내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보존해 주십니다. 심지어 여호와께서 직접 이 땅에 왕림할 때면 땅이 흔들리고 그 뿌리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바로 나 다윗이 여호와와 맺은 영원한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왕(강림하실 영원한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풀되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신이 임한(삼하23:2)자는 다 이와 같은 사상을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 이 후의 선지자들은 다윗을 기점으로 하여 다윗에서 부터 출발하는 선지자들이 됩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선지자의 성격까지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사상은 기실 주변에 널려있는 이방나라들의 정치관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낼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 받은 솔로몬으로서는 열왕기상 3장의 1000번째 드린 제사 이후의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다윗의 교훈이 자기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는 도다. 자기를 위하여 壽도 구하지 아니하고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3:11) 에서 솔로몬은 다윗언약에 담긴 정신은 이미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은 부분을 솔로몬이 이긴 것으로 삼음으로 언약이 계속 계승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3:11 참조) 그렇다면 솔로몬의 정치신조는 이미 확정적입니다. 문제는 그가 단지 다윗의 하는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느냐 아니면 더 보탤 것이 있다고 봤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그는 보탤 사항이 있다고 봤는데 그것은 성전건축 하는 일이었습니다.

열왕기상 5:3-5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된 취지가 나와 있는데 솔로몬은 마치 사무엘하 7:13에 나와 있는 집을 자기의 성전건축을 정당화 해주는 하나님의 다윗언약의 한 부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을 솔로몬에게는 허락했을 뿐이지 명령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사도행전 7:46-47) 허락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방식에 그러한 인간의 제시한 부분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이 왕과 함께 있다는 증표로 제공하신 것이 성전이었습니다.(역대상 22:16) 하나님이 왕과 함께 있다는 말은 왕과 맺은 언약관계가 계속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어도 하나님은 왕과 이스라엘을 지켜 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을 이 땅에 존속시키지 아니하시겠답니다.( 왕상 9:4-7) 이것은 그 전에 솔로몬 쪽에서 먼저 하나님께 요망했던 사항에 대한 답신이기도 한데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건의했습니다.

우선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면 들어서 제대로 처리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은 왕과 백성의 죄를 용서받는데 대한 것입니다.(왕상 8:30)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이름이며 왕은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역대하6:42) 여호와의 종이라는 자각을 갖고 있습니다.(왕상8:28-29) 결국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는 것도 언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선을 선으로 악을 악대로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을 두고 말하며 이는 언약의 연속되는 과정임이 드러납니다(왕상8:32). 그런데 어째서 솔로몬이 성전, 즉 여호와의 이름을 사죄함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까? 이는 성전의 법궤 안에 들어 있는 두 돌판이 언약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왕상 8:9,21 출24:4-8,12). 그 돌 판이야말로 백성의 언약의 불이행으로 이미 훼손되고 난 그 이 후에 등장된 돌판이기에 그 돌판의 존재 자체가 백성을 고발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신9:6,13-17 신 10:1-8) 결국 솔로몬이 이해하기에는 성전이란 하나님의 자비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 작용하는 처소로 보고 자신의 죄를 인지하는 자에게 있어 유일한 죄사함의 자리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언약이란 성전이 존재함을 통해서 증명되듯이 자비와 긍휼로 유지되는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곳에 계시는 것은 아니고 그 이름이 계시는 곳으로 여겨집니다(왕상 8:16-29). 여호와는 하늘에 계시는 것입니다(왕상8:27). 솔로몬이 하나님과 그 이름을 분리하는 것은 언약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과 땅의 만남은 오직 언약 안에서만 가능한데 그 언약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체결되기 때문입니다. 땅에 거할 수 없는 (또는 땅의 제한을 받을 수 없는)하나님께서 땅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을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 한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제안이 이미 있었기에 이것에 대한 실현으로 솔로몬은 보고 있습니다(출20:24). 그런데 그 복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죽지 않을 정도로 거룩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사함에 대한 사항입니다. 정복이라든지 통치란 어차피 거룩이 비거룩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서 이 복의 내용에다 함유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부터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 되는 것이 우선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출 19:5-6). 그래서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의 전부는 바로 죄 사유와 연결된 것들이어야 합니다. 죄 용서가 처음임과 동시에 끝까지 어떻게 그 거룩을 유지하느냐가 언약공동체로서 가질 태도이지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는 기도는 언약을 배반하는 처신밖에 안됩니다(왕상 8:35-39). 여기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공감하듯이 타인의 관계에서 이 정신을 확대 시켜나가는 것입니다(삼하 12 : 6 시편 51 : 17 신 10 : 18-19 이사야 1 : 15-17 예레미야 7 : 1-7 말라기 3 : 5-6 마태복음 6 : 14-15 에베소서 4 : 32).

솔로몬은 다윗언약의 전수와 완성을 이렇듯 성전과 여호와의 이름을 결부시켜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여호와께서는 그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시고 계십니다. 즉 나의 이름을 영원히 거기 두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언약 정신에서 이스라엘이 벗어 날 때에는 가차없이 이 땅에서 제거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이 성전도 없어 질 것이라고 합니다(왕상 9 : 3-9). 이 말씀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성전에 얽매이시는 분이 아니라 누구든 바로 언약대로 시행하시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즉 광야 때는 돌판이, 또는 여호수아 때는 법궤가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과 함께 있음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성전의 고정성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성전이 어떻게 파기되고 회복되는가를 통해 언약이 지닌 내용을 보다 확실히 인간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중심의 언약신학에 있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분명히 언급한 것처럼 다윗의 정신 안에서만 체제가 유지되는 형태를 취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이방인 첩들로 인해 나라에 외래종교가 수입되어 번지게 되자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받게 됩니다(왕상 11 : 4-13).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이 갖는 언약적 의의를 솔로몬의 과오로도 은폐될 수 없다고 보고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예루살렘과 유다지파의 선택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성을 부각시킵니다. 그 방법은 예루살렘과 유다지파를 이스라엘의 희망의 등불로 간주하시어 아히야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유다지파를 고발하는 인물로 등장시킵니다(왕상 11 : 29-32, 36).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시행하신 선택(유다지파와 예루살렘 선택)에 대하여 인간들이 거부하고 있음이 곧 인간들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본질임을 밝히십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것을 교환하거나 제시함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주신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발견코자 하십니다. 타락 이 후 그 것은 오직 언약 안에서만 제공되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윗언약 안에 무엇이 주어졌는지를 발견했어야 합니다. 그것은 “긍휼에 의한 죄 용서” 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솔로몬의 성전 기도를 통해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거기서 솔로몬은 왕의 직책이란 여호와의 종으로서 백성의 죄를 위해 비는 중보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임을 천명했습니다(왕상 8 : 27-30).

이 사상은 후대 왕들의 표준적인 태도로 백성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3 : 7 에서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겠나이다.” 라고 나이 많은 신하가 르호보암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왕이 먼저 백성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백성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주인처럼 섬기는 자의 모습이 곧 왕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그 섬기는 자의 선정도 백성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 꼭 하나님의 선택된 지파에 또는 가문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무지했고 이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分誼(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業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삼하 20 : 1 왕상 12 : 16 역대하 10 : 16)

이스라엘의 나라가 분단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왕이란 백성을 섬기는 자이다.

(2) 왕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선택된 계통을 따라야 하며 아무나 인간의 뜻에 의해 정해질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문제를 하나로 결합하여, 백성의 죄사함과 관련된 일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개인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필연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선택에 반기를 드는 행위가 왜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인가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선택이란 일종의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고발행위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자질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이 선택행위로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은 구원의 매체로서 특정 지파가 선임자 노릇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한 단위로 취급하여 그들 모두에게 모세 언약의 계약 상대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개인이나 한지파가 대리 언약준수자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하나 된 공동체 이 전에 신앙적인 공동체로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단결과 협조는 주로 외세로부터 안정을 보장받기 위한 정치성이 짙은 연합체 성격을 띠었습니다. 신앙차원에서 다루어야 될 문제를 그들은 정치문제로 이해했고 힘의 우세에 의한 안정을 추구했습니다. 즉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주위의 나라보다 더욱 더 힘이 세어지는 이방도 이외 다른 것은 없다고 여겼기에 그 힘을 모을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지닌 지도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선택이란 그들의 이러한 제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추인하는 형식을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꼭 다윗지파일 필요는 없는 것이 다윗지파를 고집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윗지파의 설정은 그러한 힘의 균형에 의한 약속의 땅 강점에 대하여 고발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자체적인 선벌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적 차원에서 힘의 차원을 고발하는 증표입니다.

광야에서 지파공동체를 이끈 것은 야곱과 맺은 약속에 근거하여 복의 민족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서 유지되었는데 그 거룩한 분의 비거룩 (이스라엘)속에서의 동행이란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여호수아에 와서는 법궤를 중심으로한 전쟁에서의 승리로 표현되었으며 사사시대에 와서는 사사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부족을 극복했습니다. 다윗지파의 등장은 이미 야곱에게 약속한 축복에 이미 계시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지파의 부각은 야곱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창세기 49 : 8). 솔로몬 이 후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든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신학에 왕과 백성들이 주목하는데 대한 것이었습니다(왕상 18 : 36) 갈멜산에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언약신학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에 나타난 이스라엘로(왕상 18 : 31) 정죄하는데 있었습니다.(엘리야가 쌓은 단에 내려진 불은 단순히 제물에 불로 응답하는 불이 아니라 주위의 땅까지 핥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약속의 땅에 거주하고 있는 현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심판의 불이다.) 곧 이것은 현 이스라엘에 대한 否定을 선언하는 것도 됩니다.

아무리 다윗언약이 왕과 체결된 언약이라고 할지라도 옛날 종족들의 언약정신에서 이탈될 경우에는 오히려 그 다윗언약에 의해 고발당함을 선언한 셈이 됩니다. 고발되었을 경우에는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저주가 그들에게 적용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리스마적인 존재(선지자)의 부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왕을 축복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 언약에 의해서 그 언약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는 것 뿐입니다(민수기 11 : 25,29/신명기 18 : 18). 따라서 여로보암에게 찾아가서 왕으로 삼은 아히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선지자였습니다(왕상 11 : 29 14 : 1-18). 여로보암의 집에 대한 심판의 선언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으니” 라는 형식문을 창출케 했으며 (왕상 14 : 16/ 15 : 30, 34, 16 : 2, 19, 26, 31 22 : 53 왕하 3 : 3 / 10 : 29, 31 / 13 : 2, 6, 11 / 14 : 24 / 15 : 9, 18, 24, 28 / 17 : 22 / 23 : 15 참조 왕상 13 : 34 / 16 : 7) 이는 무엇과 비교 되느냐 하면은 “다윗성에 장사 되니라”와 대조됩니다(왕상 11 : 36 / 14 : 31 / 15 : 4, 8, 24 / 22 : 50 왕하 8 : 19, 24 / 9 : 28 / 12 : 21 / 14 : 20/ 15 : 7, 38 / 16 : 20 / 19 : 34 / 20 : 5)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한 그 시점부터(왕하 17 : 23) 다윗성에 잔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을 보아서 우리는 이러한 대조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로보암은 다윗언약을 전적으로 무시했는가 하는 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정책의 특징은 여호와 종교를 위한 정치를 청산하고 이제는 그야말로 정치를 위한 정치로 전환한 것에 있습니다. 종교 정책은 다만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기 위한 유화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거기에 얽매일 수도 없고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여호와 종교를 창안했습니다.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 하나는 단에 설치해 놓고 여호와의 이름과 결부시키지 않는 입장에서 성소의 의미를 부여 하고 있습니다. 즉 언약의 발전성을 배제하고 과거의 성소 그대로 오늘의 성소 (복이 내리는 곳 ; 출애굽기 20 : 24 ) 로 간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칭 성소라고, 복 받는 곳이라고 여긴 그 장소가 오히려 여로보암을 심판하고 저주하는 장소로 변해 버립니다(왕상12:25-33).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고 8월 15일로 남쪽의 유월절을 대신하려고 했는데 ( 왕상 12 : 25 - 33 ) 이는 현 북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종교의 한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종교의 토착화도 아니며 다만 나라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단순 정치이론에 의해 종교를 정치의 한 부분으로만 생각해서 나온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여호와 종교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자기들이 거하는 땅이 평범한 땅이 아니라 모세와 맺은 , 또는 여호수아와 세겜에서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살고 있는 언약의 땅임을 잊고 있습니다. 여호와 종교는 단순한 백성 유화책으로 이용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원천입니다. 계약이 깨어지면 계약에 따라 그들은 저주받도록 되어져 있는 땅임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왕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선지자들은 이점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다윗정신을 계승할 선지자 무리들은 땅의 효용성 (언약적 유효성) 에 대하여 기적과 표적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은 역사적으로 一回性을 갖는 것으로 현 체제에 대한 고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적도 결국 말씀화된 고발에 흡수됩니다. ( 왕상 17 : 1, 21 / 18 : 11 - 14 / 22 : 18 - 23 )

이러한 말씀으로의 전환은 종말의 선지자들의 특징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두 선지자의 이적들은 (독을 제거, 죽은 아이를 살림, 샘이 쏟게 함, 문둥병 치료,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일 등등) 땅의 회생력과 팽창력과 하늘의 복과 유관함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왕정 체제가 갖는 횡포는 급기야 하나님이 기업으로 준 땅까지 침범하여 왕의 소유가 되는데 이르게 됩니다( 왕상 21 : 1 - 16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 ).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합은 멸망을 선언 받게 되는데 나중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와 같은 아합의 사고계통과 같이함에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유였기에 언약의 공동체를 유지하지 않는 한 언약대로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 : 27 - 33) 이처럼 열왕기 선지자는 인간편으로서는 어떤 왕으로도 다윗언약을 이룰 수 없음을 이스라엘 역사로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18. 솔로몬과 지혜서

 

잠언을 이해하는데는 먼저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잠언 1:1에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잠언을 기록하는 기록자의 신분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어떠한 자격으로 감히 잠언을 말하고 지혜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오직 언약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품이나 경험담을 분별없이 나열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초대교회에 있어 계시전달은 오직 그런 은사를 받은 자에 한하고 또 그런 은사는 교회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언약의 범주 안에서 인정하는 은사이어야 하듯이)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이 지혜서 안에 들어 갈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은 바로 다윗과 더불어 언약 맺은 하나님만 소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다윗의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하면 다윗언약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솔로몬은 지혜를 통한 새로운 질서의 전개를 표방합니다. 이미 다윗이 알고 있고 품어 있는 그 사실을 이제는 본격적으로 이 땅의 것으로 고정시키자는 데 이 기록의 목적이 있습니다. 왕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왜 왕통을 계승받았습니까? 언약의 실현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여호와답게 심어 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1 : 6)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훈계란 바로 여호와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왕의 목소리로 나타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땅이 여호와의 모습을 가지면 어떤 생활 태도를 지닐까? 하는 점을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땅이 기존 지니고 있는 모든 사상을 여호와의 모습으로 평정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갈망하신 창조의 회복이요 질서의 재입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이란 창조와 같은 틀을 가지고 일어나되 그 순서가 역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조 때는 질서-충만-형상 순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마는 구속은 형상-충만-질서의 순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곧 자연의 대폭개편은 하나님 자신이 책임지고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로 잠언은 다윗 언약에 준하여 이 땅에 어떤 질서를 남기겠느냐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질서란 인간의 통치 기능으로 인한 질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형상에 하나로 집결 시킴으로서 주어지는 질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솔로몬은 율법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지혜가 다른 점은 율법은 지혜를 이루는 수단이지 그 목적은 아닙니다. 율법은 지혜로 가는 과정입니다. 지혜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호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형상이란 인간을 상대로한 언약적 형태로 땅에 남기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도와서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란 하늘에 고정되어 있거나 저장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한 결과로 주어지는 실천의 모습으로 구체화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요 땅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또한 다윗사상이며 그 다윗의 신앙이 존속되는 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계속 살아 남아 있어 효력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다윗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다윗 정신이란 용서 받았기에 남을 용서하는 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이 바로 모든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지혜가 되며 이 지혜가 여호와의 모습이며 그러기에 영생이 그 안에서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잠언에 담겨 있는 여호와의 형상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악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지혜가 주입되기 전 이미 그 악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1 : 10 / 1 : 12 - 19 / 4 : 16 - 19 / 7 : 16 - 19 / 23 : 20 / 24 : 1 / 24 : 17 / 25 : 17 / 26 : 20 /)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 질서를 흐리게 한 실체입니다.

2.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지혜는 고통과 배척을 받고 외로움을 갖습니다. (1 : 20 - 21)

3.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자식만큼은 버리지 않는데 징계를 통해서라도 그에게 영생을 줄려고 합니다(3 : 1 / 1 : 3). 잠언에서 언약의 대상을 자식으로 국한시키는 이유는 다윗언약의 범주를 이탈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사무엘하 7 : 14 )

4. 그러면 과연 자식에게 남기고자 하는 지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지혜란 곧 이웃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우주의 원리입니다. (3 : 27) 이것은 인간이 영원토록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인 것으로 지음 받았음이 드러납니다. (3 : 27 - 30) 그런데 이러한 이웃사랑은 자기의 주체성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부터 도출됩니다. (5 : 13 / 6 : 1 - 5) 그것은 곧 자기의 맡은 일에 열심히 사는 것을 말하며 (6 : 9) 자기의 영혼을 음부에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6 : 32) 그 음부의 유혹은 바로 사치이며 쾌락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7 : 16 - 19) 이것은 지혜의 고난과 배치되는 사상입니다. (8 : 1 - 3) 창조자가 직접 자기가 창조하신 그들 속에까지 찾아 오셔서 그들을 부르고 계신다고 하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그 이웃 관계의 실체는 수고한 자에게 소득이 오고 (10 : 4 / 12 : 27) 반대로 속이는 자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11 : 7) 그리고 그 소득으로 이웃을 구제할 때 더욱 풍족해 집니다. (11 : 25) 또 이웃 관계에서 언어를 잘 사용해야 되는데 (14 : 3)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되며 (14 : 5) 또 마음으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14 : 31)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기도까지 연결됩니다. (15 : 8) 이로서 말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이웃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17 : 27) 이러한 말과 마음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와 친구들에게도 사귀지 말아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20 : 19) 그 다음 이웃은 지도자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만나게 됩니다. (22 : 2 / 22 : 7 / 22 : 11 / 22 : 22 / 23 : 1) 그런 경우에도 술을 즐겨 하는 자와 사귀어서는 아니됩니다. (23 : 20) 또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비와의 연결을 끊어 놓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23 : 22) 또 이웃 중에는 악인도 함께 살고 있으면 그들의 형통이나 번창을 부러워 하지 말고 또 그들의 실패도 좋아하지 말아야 됩니다. (24 : 1 / 24 : 17 /) 원수가 목말라 하거든 마시우고 배고파하거든 먹여야 됩니다. (26 : 21) 이제 이 지혜는 자연동물에게도 발견됩니다. (26 : 1 - 22) 좋은 것은 배워야 하지만 나쁜 것도 있습니다. (26 : 11 - 13 / 26 : 20) 결국 지혜란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생활입니다. (30 : 8)

 

19. 전 도 서

 

전도서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솔로몬이 엘로힘의 입장에서 인간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 세계는 자기 한계뿐 아니라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움에 대한 창조력이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이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세대는 새로움이 상실된 세대이며 허무한 세대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이었습니다(1 : 1 - 1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 (3 : 13) 결국은 허무한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 심각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입니까? 그것이 인간들이 경외라는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쪽으로 해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3 : 14 / 12 : 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5 : 19) 폐단화 시키게 (6 : 1) 된 것을 회복하는데는 역시 지혜밖에 없습니다. (7 : 4 - 12) 그런데 엘로힘 하나님의 세계에서 볼 때 지혜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8 : 17).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 밑에서는 자신의 한계와 허무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로힘을 바로 알고 있는 자 즉 지혜자의 특징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에 대한 발견이 바로 지혜입니다(12 : 13 - 14).

 

20. 욥기의 줄거리

 

욥기의 시발은 하나님의 선언에 반기를 드는 사탄적인 인물과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이 욥을 두고 내기를 거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욥의 존재는 마치 이 땅에서의 하나님을 대변하는 듯한 중요한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사탄적인 인물이 시비 거는 점은 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욥이 가진 재산과 다복한 식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1차 시험에서 이기자 사탄적인 인물은 다시 내기를 거는데 이번에는 욥의 신체에 직접적인 재난을 가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여해도 좋다는 허락을 합니다. 이때부터 욥은 심한 심적인 갈등을 갖게 됩니다.

그 갈등은 그를 위로하러 온 세 친구의 등장으로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욥의 고난을 징벌로 간주하러 듭니다. 원인을 알게 하므로 환자로 하여금 고통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 희망을 갖고자 도와주자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완강히 그 해결책을 거절하게 됩니다. 욥의 생각이 친구들과 다른 점은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은 원인이 있어 그 결과로 합당하게 주어지는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욥의 고집에 친구들은 하나님의 일반론적인 원칙을 들고나옵니다. 즉 우리가 알고 또 믿는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게 되면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 욥의 주장이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되는 지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경험에서 오는 하나님 관을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계속 그들은 큰소리를 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 시켜나가고 있습니다. 욥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보편적인 하나님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 자신의 고난이라는 경험에서 독특하게 자기만이 이해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욥은 무엇이라고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소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친구들은 자기와 동일한 고통 속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하나님께로 이 정도의 심한 벌을 당할 만큼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친구들은 여러 가지 경우를 꺼집어 내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학적 입장을 총동원합니다. 그 여러 가지 주장들을 열거하면서 욥은 분명코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무고한 자의 재산을 수탈한 적이 있다는 논리도 나오고 어떤 주장은 욥이나 우리나 다 완전하지 못한 죄인인데 어찌 혼자 완전한 자 인체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교만이 이러한 형벌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 말하기를 내가 꿈에 하나님께 나타나서 계시를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으면 벌도 없는데 벌을 받는 것을 보니 죄를 지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주장에 대하여 욥은 자기의 출생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욥은 창조 이전의 세계인 흑암의 세계를 동경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 대한 해소책으로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세계에 태어났기에 고통도 따라왔다는 것입니다. 창조자체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으며 그 창조자체에 아픔이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욥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체를 취소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어찌 되었든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요청하고 있으며 그 전에 원인을 규명하고 싶었고 친구들의 잘못된 진단에 면박을 주고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욥은 하나님이 나를 적으로 삼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요청하기를 죽어도 좋으니 음부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직접 만나 하나님께 정식으로 재판하여 원인을 규명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또한 하나님에게 나를 변호해 줄 변호자를 줄 것을 요구합니다. 나의 이 억울하게 당하는 수모를 변명해줄 분을 찾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욥은 친구의 말을 통해 관심이 이웃의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당한 고통의 원인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점차 자기의 변호라는 차원에서 가난한 이웃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고통과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욥의 고통은 단순한 개인이 당한 고통의 차원을 넘어서 이 사회에서 이유없이 고생하는 모든 불우한 이웃들이 겪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이 서서히 밝혀집니다. 그러나 어쨌던 욥의 입장에서는 그 고통 가운데 자기에게 이런 호된 경험을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할 재간이 없었으며 그러한 와중에서 하나님의 지정한 언어를 꺼집어 낼 길이 없어 그저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욥과 욥의 친구들의 차이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욥은 지금 고난 속에서 하나님보고 호소한다는 점입니다.

욥의 마지막 친구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초월됨을 가지고 욥의 친구들과 죄없다고 주장하는 욥의 건방짐에 대하여 꾸짖고 난 뒤 그것이 이음새가 되어 하나님이 직접 욥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번째 말씀은 욥이 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욥에게 연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형식입니다. 이런 대화의 형식을 욥을 꼼짝 못하게 위협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 세상에서 되어진 일은 모두 다 의미가 있고 뜻이 있는 필연적인 것이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와 한편인 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런 초월적인 것을 내용으로 하여 질문하시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원대한 뜻을 위하여 수행됨으로 욥이 당한 고통도 그 중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역사를 움직여 나가는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애와 사랑과 은혜에 근거를 둔 활동이므로 네가 당한 고통도 그 사랑의 일부임을 알아줍니다. 예를 들면 광야에 내리는 비는 결코 인간들 좋아라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요구와 의사와 이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로 내리는 조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하신 줄거리는 그 사랑은 단순히 불의를 못본체 넘어가는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정의를 구현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엄한 분노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짐승도 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의 일한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결국 이 두 내용의 말씀에서 욥이 알게 된 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미미하기 짝이 없으며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일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욥은 그 동안 자기가 머물렀던 재와 티끌 위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친구를 위해 기도하기를 바랬고 친구들은 자신의 주장이 욥처럼 정당하지 못함에 대하여 욥에게 재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욥은 그동안 자신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기의 존재를 뒤로하고 숨어 버렸습니다. 그 음부 쪽으로 향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직접 하나님을 만나 뵈어 단판을 짓기로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직접 욥을 만나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공의와 사랑을 위해 욥 네가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너로서는 어떤 불평할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이유없이 고통받는 불쌍한 이웃이 당하는 고통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고통당하는 욥을 자기 편으로 삼아 사탄과 내기를 한 것입니다.

이렇듯 욥이 당한 고난은 욥의 의와 별개의 것으로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이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욥기는 불의와 정의가 어떤식으로 함께 공존하며 그 둘 사이의 구별은 어떻게 짓는가에 대하여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추적해 보는 책입니다. 이 문제가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출애굽의 배경을 단순히 정치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의 실체는 어디에서 그 근원을 발견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 쪽에서 접근하는 방법과 인간 쪽에서 이스라엘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쪽에서 접근한다면 인간이 기존 정립해 있는 모든 지혜는 총동원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상관, 우주관, 인생관 그리고 운명관 같은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기에서 그럴듯 해 보이고 당연시되는 이론과 지혜들이 욥이 개인적으로 발생한 일 하나 제대로 정의 내릴 수 없음을 보임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즉 욥이 일종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 설 수 없는 걸림돌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입니다. 욥은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부정해 버립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출애굽을 야기시킨 여호와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본질에 접근은 결국 인간들의 지식으로나 능력으로 해명이 불가능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탄까지 등장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역사상의 출현은 모든 감추어진 비역사적 존재까지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고 있고 구속 역사로 모두 집결 응집되어 그 정체를 역사 배후로 내버려 두지 못하게 하시는 의도도 엿 볼 수 있습니다(1:9).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노출시키고 그 실상을 공개시키는 임무를 띄고 이 땅에 등장된 것입니다. 아무리 해석 해볼래야 해석되지 않는 이스라엘, 아무리 그 근원을 추적해 볼래야 알 수 없는 민족, 이스라엘! 욥기는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서 입니다.

욥과 그리고 그의 상대하는 욥의 친구들을 한 묶음으로 했을 때 욥기는 이 둘 사이에 도저히 일치될 수 없는 사고의 두 평행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사건을 자기들 나름대로 분석 연구하여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욥에 있어 복의 철회는 그의 죄상에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근거를 둔 이야기일 것입니다.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복을 받는 아담은 창세기 3장에서 아내와 더불어 범죄 했기에 그는 복이 상실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준칙을 아담의 후예 대대로 적용 시키시데 여기에 예외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친구들의 생각은 어떤 점을 해결 못하느냐 하면은 자기들이 욥처럼 고난받지 아니한 것을 자기들이 욥 처럼 죄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셈이 되고(30:1) 또 아담이 죄 짓기 이전에 복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욥은 복의 철회는 곧 죽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복이 없음이 곧 인간의 실존으로 본 것입니다. 내가 외로운 것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 하고는 비례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하고 영원히 죽지 아니한 것하고는 비례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입니다. 제게 주신 자식과 가축의 복이 사라지는 자기로서는 수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신으로 태어났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1 : 21 - 22).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죽음(지옥)으로 까지 인도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하신 것과 모순된다고 욥은 아마 느꼈을 것입니다.

의인이 어떻게 지옥 갈 수가 있습니까? 영영히 하나님과 멀어 질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가 아는 바로는 이 문제 해결은 내가 죽고 난 후 특별히 나의 구속자가 따로 있어 나의 이 억울함을 변호하여 다시 육체 밖에서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19 : 24 - 27) 그 뒤에 엘리후가 나타나서 의인의 고난에 담긴 뜻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치 아니하신다고 언급합니다. 이 말은 의인이 고난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고 이것이 결코 하나님의 일관된 사상과 모순되지 않음을 밝힙니다(34 : 12). 그러나 그의 답변도 욥과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라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38:1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세우시는 이론은 바로 선택개념 이었습니다(40:15). 하나님에게 있어 복이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자에게 주시는 증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복에 관심 두어서 이 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선을 행하자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관심은 왜 선택하셨나에 있어야 합니다. 선택 자체가 복입니다. 선택이 복이라는 말은 복 받기 전 인간의 어떤 행함이나 조건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점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본질을 이해해야지 인간의 의로운 행위에 이스라엘이 존속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결국 이 사실을 깨닫고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대신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다운 면모를 보이는 자입니다(42:8). 옛날 출애굽 이전에 있었던 욥 이야기를 이스라엘은 자신의 선택에 관한 교훈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언급한 전능자 개념은 단순한 창조에서 창조의 세계를 해명하기에 욥의 입장을 사실상 풀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입장에서 창조를 조명하면 창조 그 자체도 선택되어 창조된 것이 됩니다. 창조도 여호와 입장에서는 선택의 행위의 결과로 된 것입니다. 욥이 고난 받기 위해 선택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인간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창조를 전능자 입장에서 (엘로힘 입장에서) 보는 것과 여호와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이렇듯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여호와의 선택 행위의 결과로 되어진 민족입니다.

 

21. 아 가 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 것” 8 : 6 아마 이것이 아가의 핵심이 아닌가 합니다. 아가를 읽어보면 여기에는 묘한 긴장과 갈등이 깔려있습니다. 금방이라도 같이 만나 재미나게 살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일이 잘 성사가 되지 않고 간장을 태우는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여기서 솔로몬이 우리들에게 나타내고 싶었던 면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란 어떤 난관이 온다 할지라도 중도 포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디까지 사랑을 끌고 가느냐 하면은 죽음과 비교되는데 까지 몰고 갑니다. 즉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느냐 하는 대목에서 사랑의 본질이 비로소 공개됩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그 감정은 결국 예루살렘의 온 처녀들까지 개입시키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사랑놀이가 예루살렘의 화제꺼리가 되지만 그것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요? 그것은 솔로몬 왕의 이미지를 쇄신케 했을 것입니다. 왕, 그 사랑의 대명사! 열정적인 사랑의 소유자! 한번 사랑한 여인을 신분과 체면과 상관없이 끝까지 따라가서 기어이 자기 소유로 삼으시는 분으로서의 왕(8 : 6 / 6 : 3 / 2 : 16) 자신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운 것을 함께 할 용의가 되어 있는 왕! 여인을 사랑하되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왕! 스스로 찾아가고(5 : 2) 또 안보이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왕!(6 : 3) 이 모든 것이 다윗언약의 상대자요 계승자로서의 왕이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테마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영원한 왕은 이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땅에 서실 것입니다.

 

22. 이스라엘의 분열

 

하나의 왕 밑에서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분명 여기에 문제점이 발생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왜 나라를 둘로 나뉘어서 이 문제점을 해결 하셔야만 하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둘로 나뉘지 않고서는 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내시고 하는 의도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면 애초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기대했던 점이 무엇입니까? 분명 솔로몬 때에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이 있었고 그 점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뉘어져야 했다면 분명 둘 중에서 한 나라는 하나님이 요구한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단적인 이스라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정통성 시비를 종식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그 당시 선지자들이 들고 나온 신학입니다. 그 신학의 핵심은 다윗언약을 향한 복귀입니다. 다윗언약 그 당시까지 주어진 모든 율법의 완성을 포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율법을 계속 존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왕의 온전한 율법 이행에 있습니다. 왕이란 단순한 왕이 아니라 다윗언약의 준수자 내지는 성취자의 책무를 지닌 자로서의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성패는 왕 한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두 왕이 생겼다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두 왕이 생기게 한 책임은 솔로몬에게 있습니다. (왕상 11 : 4) 하나님은 최후로 솔로몬에게 다른 신을 쫓지 말라고 당부한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왕상 11 : 10) 이는 다른 언약을 쫓아가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신을 따라간 솔로몬 왕, 여기서 과연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깨어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묘책이 있단 말인가? 언약을 깨뜨렸으면 깨뜨린 쪽에서 뭔가 책임을 져야하지 않는가? 깨뜨린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고 여길 때에 다윗언약은 다시 회복되는 것, 언약에 대한 심판과 회복 자체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법입니다. 왕이 저지른 일은 왕이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언약은 왕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는가 하면은 스스로 책임지는 왕국의 모습과 ( 즉 고난받는 왕국의 모습 ) 그 고난이 오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 자신의 잘못임을 보여줄 수 있는 왕국, 이 두 왕국의 등장이 요구되었습니다. 이것은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여호와 형상의 두 국면입니다. 곧 심판과 그 심판 가운데서의 은혜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나타내어 줍니다. 아무도 책임질 만큼 위대하지도 못하지만 다윗의 언약이 유대 나라를 이끌어 갑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두 왕국의 존립이라는 갈등 속에서 다윗언약의 양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형상을 왕국이라는 차원에서 전개한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그 심판 속에서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게 부각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오직 다윗언약을 위해 존속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나라, 남쪽 유대의 나라. 심판의 나라, 북쪽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이제 스스로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책임지는가? 여기에 선지자들의 활동이 기대되는데 그들은 한결 같이 다윗 언약의 회복을 위하여 책망하는 말을 하고 있다.

 

23. 선지자가 하는 일

 

다윗 이 후 왕은 제사장을 자기 수하에 두게 되었습니다. (왕상 12 : 31) 그러나 선지자는 왕의 수하에서 벗어나서 활동한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왕의 지배에서 자유롭다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의 지시와 지배를 받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 위하여 선지자 출현의 출처를 알아 봐야만 합니다. 선지자마저 왕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는 것은 뭔가 왕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왕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신마저 장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할 때 두 가지 통로가 마련되어 그 채널을 통해 상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그 한 채널의 발생 경로와 발생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파악하면 됩니다. 다윗이후의 하나님의 신의 역할이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기능이 있으므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104 :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셨나이다.”) 즉 지면을 새롭게 하는 기능은 인간이나 어떤 영웅의 주관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는 어떤 質(질)의 창조인가 하면은 이미 죽은 자에 대한 회복이라는 차원의 창조가 됩니다. (시편 104 : 29 ) 쉽게 말씀드린다면 기존 체결된 언약에서 이탈되어 무효가 되어버린 자들을 다시 유효한 언약 상대자로 돌이키는 기능을 하나님의 신이 담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에서 이탈된 상태를 다시 언약궤도 안으로 복귀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현실을 부정해야 하는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심판이며 그 심판만이 희망을 제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신의 역할이 과거 지향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사상이 나옵니다.

1.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 가운데 기존의 역사까지 부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과거로 돌아 간다기 보다는 과거의 체결된 언약을 계속 현재에서 인정하고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의가 하나 나올 수 있습니다.

2. 그 시기가 언제냐 하는 측면에서 볼 때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역사 흐름조차도 하나님의 활동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렇게 보면 역사를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단히 긍정하고 수긍하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종말론을 “역사적 종말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관점을 나중에 묵시론적인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지자들은 현실의 왕들과는 달리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들은 땅(약속의 땅)의 유효성에 매달렸습니다. 이 점은 기존의 왕들과 같이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왕상17 : 22 / 19 : 8 / 21 : 4). 이 땅은 젖과 꿀이 흘려야 정상이고 죽은 자도 살아나는 땅이며 외세 침입도 방지되는 땅입니다. 사실 왕들도 누구보다도 이점에 미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선지자들과 왕과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선지자들은 모세 율법에 의한 땅의 안식으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했지만 왕들은 땅의 그러한 속성을 무시하고 (사실 그러한 속성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왕상18:36) 단순한 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만이 갖는 혜택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만이 갖는 의의는 시편 104 : 30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새로운 인간 창조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나라가 아니라 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적들은 땅이 갖는 의의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 됩니다. 열왕기하 2장의 엘리야 승천사건이나 열왕기하 5장의 나아만 장군의 치료사건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의도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왕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언약의 실패는 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왕이 못하면 선지자를 통해서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경우에 기존의 왕은 심판의 대상으로 남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미루어 보건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언약의 범주를 이탈할 수가 없으며 그 언약 역시 하나님의 신의 의도를 이루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음으로 하나님의 신은 자기 사람을 적절한 시기 때마다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기존의 왕들은 인간의 조직력을 생각하지만 그 조직력이 곧 하나님의 신이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자기를 본래의 의도대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요구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왕을 심판하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언약 정신을 유지보존하므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 완성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게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언약은 하나님의 신의 주도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에 예속된 이스라엘, 신에 예속된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이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의 개념이 달라지고 (아직 하나님의 나라라든지 하늘나라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음) 언약의 백성의 개념도 바뀝니다. 여호와의 형상에 가장 근접하는 모습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땅의 의미도 확대되고 안식과 성전의 의미도 찾게 됩니다. (시편 11 : 4)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의 사역에 예속됩니다. (에스겔 36 : 26 -28 / 시편 139 : 7 시편 51 : 11) 결국 거짓 신과 참신과의 대결입니다(예례미야 17 : 15 / 열왕기상 22 : 21 - 23). 열왕기나 역대하에서 보여 주는 진리는 하나님의 신과 관련없이 행정과 정치를 할 때는 그 나라는 우상의 나라이고 나라 그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거기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만이 우상이 아닌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그 나라 자체가 나중에 다시 멸망당하고 포로 잡혀갔다는 사실은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우상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가 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그 나라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민수기 11 : 29)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해야 될 문제는 땅을 중심으로 세 부류의 나라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유대나라이고 또 한 나라는 북쪽 이스라엘이고 또 한 나라는 이방 나라입니다. 이 세 나라를 중심으로 하나님은 인간나라의 한계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나라는 이스라엘의 징계를 위하여 존재하며 이스라엘은 언약 즉 여호와의 형상(진노와 진노 가운데 내리시는 은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역사의 진행입니다. 나라 이름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쪽이 이스라엘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 파기자로서의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앗수르의 침범을 히스기야 왕의 기도와 믿음으로 이깁니다. 결코 언약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유대나라도 바벨론에게 망하지만 망하기 전 요시야 왕 시기의 대 신앙적 부흥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망하지만 신앙은 오히려 바벨론이 안전하게 보호하는 셈이 되도록 역사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즉 형상입니다. 창세기 3 : 15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 형상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배제하고 오직 사탄의 정복도 언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이름으로 격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들의 이름이 될 수가 없고 명함도 못 냅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진실한 약속만이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 줄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24. 다윗가문(유다지파)의 정통성 확립 경위

 

인간 왕들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다윗 가문이 유지되는 그 근거는 어디서 기인된 것인가요? 왜 유다지파에만 특별 혜택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증거로 등장됩니다. 즉 아브라함에 있어 주어진 복의 혜택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 하지만 그 언약 자체가 인간 쪽에서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다는 이 사실 자체가 복의 실상까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쪽에서는 복의 대립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언약을 파괴했으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저주받아야지 왜 유다지파만큼은 예외로 하느냐 하는 것은 이미 모세 오경에 하나님이 모세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 주신 자기 약속에 대한 자기 책임을 다 하신 결과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미 유다지파에게 특별히 복을 내리셨습니다. (신명기 33 : 7)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은 창세기 49 : 8에 야곱이 12아들에게 내리신 그 축복에 근거한 복입니다. 즉 복도 무조건이 아니라 언약의 근거를 가져야 하고 그 범주를 이탈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유다지파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 일방적 선택만이 파괴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그 길만이 땅과 인간의 저주가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언약의 그 일방적 선택성으로 표현되는 복이 과연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구원의 혜택이 돌아갔음을 보여 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기입니다. 이런 복의 속성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가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언약은 모세 5경을 다시 현시점에서 재해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진 이런 시점에서 유다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이 가지는 그 효과를 타진해 보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다윗 속에 아니 유대에게 내려진 축복에 가담하는 일 뿐입니다. (열왕기하 16 : 2) 이것은 바로 여로보암의 행실을 거절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여로보암 집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언약에 근거한 선택을 가지고 왕이라는 직분에 고유한 선택권이 있는 줄 오해한 것입니다. (왕상13 : 31)

하나님의 신에 의하여 선택받지 아니한 왕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왕하9 : 12) 그러나 이러한 기능적 선택도 다윗언약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구원적 선택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능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그 구원을 통해 구원적 기능을 이루십니다. 지금 다윗시대에서는 왕이라는 직책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틀은 되지만 그것이 구원까지 이어지려면 다윗언약이 요구하는 온전한 율법을 다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현세대를 심판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회개를 통한 미래에 희망을 가져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에 있어 구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울과의 전쟁을 통해 나타난 자와 같이 용서입니다. 이 용서하는 것은 바로 모세율법과 법궤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즉 덮어줌이 사랑입니다.「카파르(רפק)」 법궤뚜껑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덮어줌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자신을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동기에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 때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바로 용서를 알고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견뎌 낼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지어준 가죽옷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3 : 21) 다윗과 압살롬의 차이점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권력을 탐하기 앞서 먼저 약속의 땅이 가지는 속성을 이해했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울분을 용서로서 표현해야지 복수로서 표현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어쩌면 다윗은 압살롬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이런 점을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사무엘하 13 : 320 - 33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또 이 점은 사울과 요나단의 차이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작음에 달려 있지 아니하다는 요나단의 주장은 단순히 하나님에게 작은 수를 가지고 어떤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적 차원이 아닌 다른 사상을 요나단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 만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이 의미가 바로 할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 : 6)

이 사상은 곧 다윗 이후에도 계속 되는데 왕이란 사울 때는 섬기는 자리에 있어 백성 위에 군림했지만 다윗 이 후에는 오히려 백성을 섬기는 종의 위치로 물러가야 합니다. (왕상 12 : 7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의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이 낮아짐의 원리는 바로 왕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용서받음을 안 사람으로 선택될 때 한합니다. 바로 이런 왕이 등장할 때 왕이란 직책은 제대로 구원을 이루는 직책이 됩니다.

 

25. 선지자의 신학

 

다윗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그 당시 왕들에게는 어떻게 받아 드려졌는가 하면은 대단히 낙관적으로 여겨졌다. 인간의 왕은 부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라도 왕과 백성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선지자들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그들의 말은 우선 약속이 아니라 심판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좀 생각을 좀 해 봐야 하는데 왜 같은 언약을 두고 서로 다른 견해를 띄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징계를 해서라도 다윗 왕조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 다짜고짜 심판과 재난을 선언하는 것보다 다윗언약을 보다 정직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선지자들은 어디에 근거하여 자기 주장을 주창하는 것입니까?

선지자들이 관심 두는 것은 쌍무적 언약에서 (출애굽기 24 : 6) 무조건적 언약에로의 전환이 있기에는 (창세기 22장) 인간 편에서의 不實을 책임질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그것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언약의 특징은 바로 쌍무적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서 역사에 등장되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의 의미를 상실한 무조건 언약은 무조건 언약이 아니라 無언약, 즉 언약 상대자가 없는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요건에도 위배되는 일입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재난과 심판을 선언한다고 해서 다윗언약의 취소를 선언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바로 다윗언약을 이루어 나가는 중요한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언약파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언약은 성취되어 나아갑니다.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요구하는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소위 궁중 선지자들은 다윗언약이 그렇게 될 경우에는 쌍무적 언약이 되어 무조건적인 언약의 성격이 사라질 거라고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 3 : 11) 그들은 쌍무적 언약과 무조건 언약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언약인 다윗언약이 쌍무적 언약인 율법을 내용하고 있는 이유는 율법이 갖는 강한 심판성에서 비로소 무조건이 갖는 의의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언약의 대상을 어떤 범주로 묶었는데 그 범주는 원래 조건을 걸었던 하나님의 의도와 기대를 온전히 부응한 그에게 무조건의 세계를 열어주는 권리를 제공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神의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압니다.

따라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바와 같이 하나님과의 대면은 곧 죽음이며 심판인 것을 감안할 때 선지자들의 입장에서는 장차 올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됨은 확신한 것입니다.

결국 장래에 비추어 현실을 보는 역사관,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종말론이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언약이란 결국 인간의 차원을 거부함을 언약적 차원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인간들은 이 무조건 언약에 대하여 떨림으로 경외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 18 - 29)

 

 

1. B.C 9 세기 선지자들의 신학

 

(1) 오뱌다

오뱌다가 문서 선지자로서 맨 먼저 등장하는데는 시대적으로 제일 빠르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과연 오바댜가 시기적으로 제일 먼저냐를 결정하기에는 10절-14절에 나오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재난이 언제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 사건이 언제인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10절-14절에 나타나 있는 주요 내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3가지로 나뉘어 질 수 있는데 첫째는 에돔은 유다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공공연히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이 무방비로 있을 때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약탈해 갔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멸망당한 예루살렘 성읍으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을 막아서 감금시키거나 노예로 만들었으며 혹은 그들은 정복자에게 넘겨주거나 혹은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는 이 3가지 조건을 만족시켜 주는 실제의 사건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앞서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유다는 피해자요 에돔은 방관자요 또 밝혀지지 않는 민족은 가해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언제입니까?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기거한 후 당했던 재난이 7번나옵니다.

① 열왕기상 14:25/역대하 12:1

② 역대하 21:16-17

③ 역대하 25:17-24/열왕기하 14:8-14

④ 역대하 21:8-10

⑤ 열왕기하 24:10-17

⑥ 열왕기하 25:3-21/역대하 36:17-21

⑦ 역대하 28:16-17

이상입니다. 이 중에서 에돔의 직접적인 침입이 아니라 방관적인 입장에서 개입된 것은 언제이겠습니까? 그것은 두 번째 경우 즉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 때였고 또 하나는 네 번째 바벨론의 침입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 에돔의 저주에 관한 사실을 확대하여 인용한 것을 봐서 예레미야 때 보다 이른 연대는 바로 두 번째 경우밖에 없습니다.(예레미야 49:7-22) 어쨌던 이 오바댜에서 보여 주듯이 에돔에 대하여 큰 실망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엘 3:3-6에 보면 블레셋도 에돔이 저지른 죄와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젊은이를 노예 시장에 넘기다가 요엘에 의해 저주가 선포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떨어진 심판의 근거는 유다의 위신이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됨에 있습니다. 문서 선지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아직도 유다는 하나님에 의해 그 존립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하나님의 성전에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계속 존속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미련은 바로 하나님의 분노로 표현됩니다. 유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몽둥이로 삼아 치시지만 이미 그 자체로서 유다를 특별난 상대로 인식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오바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는 형제 국가인 에돔으로 부터 배반과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될 시점에서 에돔은 유다에 대하여 어떤 하나님의 법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상대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 1절-3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을 복의 근원으로서 보는 구속사적 의의를 거부하는 셈이 됩니다. 도움되는 민족, 필요한 민족으로서 유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민족, 언제든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민족으로 간주할 때 유다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 방향은 에돔을 구원의 범주에서 이탈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유다를 하나님이 다루시는데 있어 이방 나라에 대하여 구원의 원칙을 보여준 셈이 됩니다. 그들은 왜 여호와라는 신이 자기 백성이라는 유다를 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출애굽 때 장자를 내놓지 않으려는 애굽과 하나님의 자비로 애굽에서 탈출이 성공리에 이룰수 있었던 장자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징계는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방 민족의 오해는 유다의 징계가 곧 그들 자신들을 대신한 징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점입니다. 그들은 유다의 징계를 언약적 차원에서 즉 세상이 다 변해도 여호와 신의 언약만큼은 호리의 착오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그들도 유다의 징계에 동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에 대한 이방 민족의 공격은 곧 있게 될 여호와의 날에(15절) 시온의 구원 사건의 완성을 예고하는 것으로(21절) 그들을 향한 심판의 先取(선취)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유다와 가장 가까운 이 에서에게 심판의 예언이 선언되었다는 것은 옛날 에서와 야곱을 갈라놓게 하신 그 원칙이 변함없이 그대로 현시점에서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언약의 유효성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가장 마지막으로 족보가 갈려진 그 상대에게 심판이 선언됨으로 이것을 역순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전 족보 대대로(조금이라도 셋과 노아와 셈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관련된 모든 민족들) 심판은 확산의 조짐이 있습니다.

결국 선지자가 보는 종말론이란 유다의 심판으로부터 온 인류에게 자기의 죄과대로 심판이 주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 바로 이스라엘 즉 언약의 상대를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됩니다. 즉 유다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원의 복이 전 인류에게 차등 없이 전달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전 인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성립을 요망했습니다. 유다의 징벌이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자기 백성이지만 가차없이 치시는 그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의 심정도 아울러 이해하는데서 하나님의 낮아지심만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었음을 통감하게 됩니다.

 

(2) 요 엘

이스라엘의 구원은 실제적인 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사건은 비단 인간사회에 있는 갈등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의 생성이 바다에서 올라온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자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비상한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표증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뚜기 재앙이 출애굽기 10:3-20에서 애굽 땅에서 그것도 애굽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만 떨어졌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가운데서 이제는 애굽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내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이스라엘이 애굽과 같아졌다는 것밖에 달리 설명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든지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변개했다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기 본질을 바꾼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에 성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징계도 실질적인 자연 변화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자연적 재앙이 어떻게 해서 성령이라는 실체가 역사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또 뛰어 드셔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조정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자기 세계를 이 역사 속에서 구현해 내는데 바탕이 됨도 보여주게 됩니다. 역사의 시대에서 성령의 시대로 전환되는 그 꼬투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불합격점을 받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뽑힌 자들입니다.

민수기 11:29에 보면 모세가 하는 말이 모든 백성이 다 나와 같은 선지자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바로 성령을 지향할 때 비로소 그 목적에 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스라엘이 실패하니깐 이제 그들을 버리시더라도 기어이 성령으로 지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애초부터 성령의 시대를 향해 정향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 및 그 뒤의 지도자들의 비온전함이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 분의 서실 자리를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때문에 이제는 한 특정인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한 개인으로 간주하여 전부에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2:28-30) 그러나 그 이전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개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성령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또 다른 차원에서의 양보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양보인가 하면은 이스라엘의 죄를 전적으로 책임 질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비선택된 국가에 대한 심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 같은 구원 방식을 만족하지 않으시고 단회적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다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을 애굽화해서 이스라엘의 자체 변화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수법이 사용됩니다. 소위 남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와 동시에 이방 민족에 대한 새로운 차원에 입각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2:32에 나와 있는 대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 따라 시온산과 예루살렘으로 피신할 자가 있을 것이며 남은 자들 중에서는 여호와로부터 부름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을 물증으로 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선택 행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선택이 바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가운데 또 이방 민족을 심판하는 가운데서 벌어집니다.

이 새로운 이스라엘은 옛 이스라엘을 극복하는 단체가 될 것이며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옛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탈출이 시도됩니다. 이 점은 역사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움직임이 있음을 반영해 주고 있는 바입니다. 메뚜기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이제는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그러나 현실이야 어쨌던 간에 내용상에 있어서는 동일한데 모세의 지팡이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대신하여 자연조차도 굴복해야 하고 길을 터야 하는 것처럼 이제 성령님도 남은 자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이름에 기대를 걸게 하시는 것입니다.(2:31) 그렇다면 여기서 아름다운 땅을 메뚜기로 훼손할 수밖에 없게 한 그 장본인의 죄책을 누가 대신 보상하겠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누가 이 땅을 치유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의의 선지자에게 기대를 걸고있다. 2:23은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고” 라는 부분을 “義의 선생을 주시고” 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이 의의 교사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증거로 이 약속의 땅에서 이른 바와 늦은 비를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2:23)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창조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리는 것은 2:28-30에 보면 성령의 내림이며 이 내림으로 인하여 만물 즉 창조의 세계는 마지막을 고하게 됩니다.(2:31) 창조의 세계가 성령의 내림으로 마지막을 고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의 교사로 말미암아 창조가 부정당하며 전면적인 대개혁이 도래했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불신이 해소되며 창조에 대한 기대가 성령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차원을 향해 전개됩니다. 창조에 대한 부정은 곧바로 인간을 대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못한다면 이 창조 세계에 대하여 누가 책임진단 말입니까? 바로 성령님께 그 책임이 돌아가면 성령님이 떠맡게 되는 그 배후에는 바로 의의 교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깜깜하고 구름이 가득 낀 날로 표현되는 여호와의 날에 대비하여(2: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으로부터 또는 자연의 재앙으로부터의 구원보다 앞서서 자기의 죄로부터 해방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구원의 본래 의미입니다.(2:15-20) 따라서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방향도 이런 관점에서 유도하실 것입니다.(3:17) 이제 남은 문제는 이스라엘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자인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가 아끼시는 백성들에게까지 자연적 재앙을 내리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그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런 자만이 여호와 이름이 갖는 그 구원적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의 회복은(3:18) 왜 여호와의 날이 자체 심판과 동반해서 벌어지는 가를 아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달성됩니다.

 

(3) 요 나

요나의 시대적 배경은 열왕기하 14;25에 나와 있는데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대단히 강대국이 되어서 하맛 어구에서 평야 바다까지의 이스라엘 전 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을 때입니다. 따라서 니느웨 여행도 부담감 없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디글랏 빌레셀이 니느웨를 지배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를 보면서 요나라는 개인적 인물에 초점을 모아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다른 각도에서 요나를 읽어야 하는 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 자체에서 보면 하나님은 결국 누구하고 계속 상대를 하면서 종결 짓느냐 하면은 요나 개인하고 상대를 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요나가 오해하고 있는 것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 요나의 요지입니다. 일단 요나의 생각을 결과적으로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요나가 자기 생각을 돌이켰느냐에 대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의도하는 바와 현 요나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고정 관념에 대하여 도전하시는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선지자는 항상 자기 나라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가 사라집니다. 언약 상대자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에 선교를 하라 하니 선지자로서는 당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현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에 종사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2 “고국에 있을 때는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렇다면 선지자가 끝까지 오해한 점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이방 선교 안했다고 나무라는 것입니까? 이방 선교가 이스라엘의 본질에 속하는 임무인데 그것을 소홀히 했다고 선지자를 대신 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근본적인 문제로 다시 되돌아 갈 필요성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무슨 일을 소홀히 했다고 해서 나무라 놓고 이제 그들이 다시 회개하면 그 일을 시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근무 태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수정시키고자 하는 점도 바로 이 점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인식을 보다 명확하게 언약의 차원에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것은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심정을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근거에서 심판과 구원을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적은 공동의 적입니다. 누구든지 언약을 수용하지 않은 자는 모두다 하나님의 적입니다. 요나는 언약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언약에 제한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2에서 요나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니느웨성으로 자기를 보내는 것은 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그래서 요나는 자기 생각에 자기가 거기에 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하는데 자신을 보내어 참여시키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선지자가 어디서 멸망을 체험하느냐 하면은 고기 뱃속에서 멸망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바로 죄로 인한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2:1-3).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감 속에서 선지자가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성전언약의 의미를 새삼 감지하게 됩니다(2:4). 그것은 이스라엘마저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언약 주시는 사람 아니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평소에 알 수 없었던 여호와를 물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내 기도가 성전에 도달되었다는 이야기는(2:7) 성전이 갖는 사역 범위가 공간을 초월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도가 상달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런 기도는 일단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서 비로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닐까요?

이것은 바로 구원이란 물고기 속이냐 겉이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바로 알 때 즉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선지자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멸망 받도록 되어져야 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요나는 하나님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의의를 제기합니다(4:2). 선지자가 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죄지은 자들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무참하게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진실성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다만 이 광경을 보는 참관인 자격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 승리의 순간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언약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자라도 언약 속에는 구원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을 선지자에게 깨우쳐 줍니다.

선지자의 참관은 공의의 하나님의 통쾌한 마지막 승리 장면을 참관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면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전환되는 그 과정에서는 바로 요나 같은 선지자가 구제 불능한 그들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아픔과 고통을 동반한 그런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적용될 때 이스라엘에게도 누군가의 희생의 혜택을 입을 결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언약이 유지됨을 선지자는 또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전이 있어 기도한다고 자신의 기도라는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개방하기 위한 이스라엘 또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창조언약 그 자체를 아끼시는 하나님을 선지자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4:11). 그럴 때 비로소 선지자는 다윗언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나 많은 말씀을 전했지만 듣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완고함과 교만함과 풍요함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그럴 때 선지자들은 무어라 여기겠습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선지자 노릇을 계속해야 되는가? 그러나 니느웨 성은 이방 지역이요 죄가 너무 번창하여 곧 있으면 멸망 받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말씀 그것도 단 한 명의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여 굵은 베옷을 입고 심지어 짐승들까지 그 고통에 참여할 정도로 온 국가가 자기들의 삶을 바꾸었다고 한다면 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활동하는 선지자들은 더욱 더 자기 사명 수행에 회의나 좌절감에 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2. B.C 8 세기 선지자들의 신학

 

주전 8 세기 때까지 이스라엘은 장엄한 제사 제도 때문에 그들은 다윗 언약이 계속 유효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들을 보호하실 것이고 축복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확신 속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할 때면 그들은 여호와의 날에 한가닥 미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원수를 분쇄해 주시고 최고 희망 사항인 국토의 확장과 안정이 영원히 지속되는 시기가 도래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는 결코 종말론과 상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에도 그런 것처럼 미래에도 현행 질서를 유지하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평소의 일관된 구원 행위일 따름입니다.

그러던 것이 8 세기 후반. 드디어 사건이 터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등장은 서방아시아의 소국에게는 완전히 공포의 대상이 될 만큼 엄청난 무력을 지니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던 환상은 산산 조각나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BC 742년 디글랏 빌레셀이(역대하 28:20) 등극하여 주위에 있는 군소 나라들을 위협하더니만 드디어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조공을 바치든지 아니면 저항하다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 후 25년이 지난 후 그 나라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쪽 나라 유대는 굴복하고 조공을 바쳐서 생존하였지만 (역대하 28:21)그 후 100년간 다시는 자유로운 국가가 되지 못했습니다. 8세기 후반에 히스기야가 반란을 시도했을 때 앗수르의 고대의 전통인 공포의 피로 목욕하는 진압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기들의 성전에도 앗수르 신을 섬겨야 했으며 과도한 조공과 백성들 앞에서까지도 왕이 모욕을 당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만약 이 점을 어기는 날에는 가차없이 처단이 내려졌습니다. 몇 세대를 거쳐서도 이러한 공포의 시대는 끝나지 아니하니 다윗언약을 의존한 장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의 희망적인 확신은 이제 허무주의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러 오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하여금 저 엄청난 힘을 격파하게 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무력한 소국에 지나지 않고 지상에서는 한 평범한 힘없는 나라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그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신앙에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되어 가는 사태에 대하여 보다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디까지 몰아 넣으시는가? 어떤 차원에서 역사를 다루고 계신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때에 나타난 것이 최초의 문서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언급합니다. 대중들의 원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현 시점에서 재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처하고 있는 약속의 땅, 그리고 왕 또는 성전이 지니고 있는 의미 바로 이런 것들을 왜 무의미하게 되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그런 것들이 궁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한 바가 있었는데 그것에 이스라엘이 호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약이 파기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 자체에서 의미를 담고자 하면 그것은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 17:16-18/18:4-8 앞의 두 성경 구절을 비교해 볼 때 이들 왕들이 저지른 일은 출애굽기 20:4에 나오는 아무 형상이나 만들지 말라는 계명에 위배됩니다. 피조 세계 중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피조 세계 중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즉 우상이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을 말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보여주어야 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이것은 바로 물질이 아니라 인격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배경과 상황에서 얼마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었는가로 이스라엘의 존재 여부가 결정됩니다.)

율법이란 바로 이 피조 세계에서 우상을 몰아내기 위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체계입니다. 특히 성전이란 바로 율법의 정신을 집대성하는 것으로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이 고정되어 있음을 인식합니다. 그 이름이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마저도 무사히 통과케 하셨던 능력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과 더불어 계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 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낭만이었습니다. 막강한 적의 화력 앞에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근본적인 단절을 요구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희망이란 현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 저 너머에 있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현행 질서의 연속선상에 그 희망을 두었습니다마는 선지자들은 그 사상을 거부하고 먼 미래에 하나의 새롭고도 신적인 행위 즉 하나님과 새롭고도 깊은 백성들과의 재언약이 수립되는 그 때를 기약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신적인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승리의 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종말론이 시작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신적인 행위는 비록 그 전의 형태와 용어를 빌리지만 더 이상 과거의 반복이나 이미 있었던 것을 재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어떤 것, 과거를 능가하는, 그러므로 해서 과거의 진정한 뜻을 구현하고 과거의 약속이 지향하는 그 목표점을 노출시키는 그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최종 상태일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보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더 이상 종말은 없을 것입니다. 8세기에 나타난 예언자들에게 있어 종말론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안목을 잡습니다. 그것은 선택과 계약입니다. 선택이란 창조의 틀을 가지고 구속에 적용시킬 때 등장되고 계약이란 하나님의 자기 은혜의 전달 방법에 있어 틀이 됩니다.

 

(1) 아모스 신학

아모스는 역사적인 운명의 폭풍이 시작되기 전, 8세기 중엽에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때는 솔로몬 이후 유다와 이스라엘이 최고의 경제적인 부를 누렸던 전성기 때 였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의 군사력에 대한 자랑과 즉각적인 외세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치스런 풍요로운 사회에 대하여도 언급을 했습니다. 그 사회는 완전히 병들어 있는 사회 였습니다. 부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추세였고 오히려 그들을 속이고 이용하고 압박과 위협으로 상대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비좁은 근거지에 덫을 놓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는 율법 정신에 의거하여 그런 사태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맹렬하게 공격합니다. 저돌적입니다.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불의한 재판을 비난합니다.(암 2:6-8/ 3:9-11/ 5:7/ 5:10-12/ 8:4-6) 그는 또한 모든 향락과 사치를 즐기면서 가난한 자를 구조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만든 무관심과 상류 계층의 탐욕스러운 생활 방식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않습니다.(암 5:7/5:10-12) 그의 의분은 개인적 충동이나 인간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정통적인 깊은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비록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가 대적한 범죄들이 단순한 질서 문란이 아니라 율법 계약에 위반이라는 차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필연적으로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가 따라 나옵니다. 그러면 율법 위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총을 배반하는 것입니다.(암 2:9-17)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에는 그들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선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곳 약속의 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겼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부족한가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선지자는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정의란 성대한 제사 행위가 아닙니다.(암 5:21-24) 은총을 이웃에게 가난한 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정의인 것입니다. 이런 확신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지켜 주신다는, 또 우리편이라는 민중의 신앙을 전면 거부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선택 -남은 자를 선택하신다는-사상이 등장됩니다. 아모스는 구원받기 위하여 남겨질 자의 입장에서 선택을 이해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선택은 모두 다 구원받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받기 위한 남은 자가 있으며(4:2-3) 또 구원받기 위해 남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위의 두 남은 자의 선택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남은 자 입니다. 아모스가 더욱 강조한 것은 바로 심판 받기 위한 남은 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택은 바로 기능적인 선택관입니다. 기능적인 선택이 구원을 위한 선택으로 넘어가는 근거로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5:4/5:14) 이것은 5:15의 요셉의 남은 자라는 표현에서 더욱 확연해 지는데 제2의 출애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볼 때에 요셉의 남은 자란 다름 아닌 현 심판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애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 2의 선택이라는 사상의 정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민중들의 거짓된 사고방식은 바로 이 선택론에 있어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결코 안전 대책이 되지 못하니 가차없는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아모스 1장/2장)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그 대망의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요 깜깜한 날이요 두려운 날이 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아모스 5:18-20) 하나님은 이방 나라에게 전쟁을 거시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하여 전쟁을 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그들의 군대를 공포 가운데서 내리 치실 것입니다.(암 2:13-16) 10분의 1만 남기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계약상에 기재된 저주를 내리시며(암 4:6-12) 마지막에는 그들의 땅으로부터 추방하여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모스의 벼락같은 설교는 9:8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아모스는 가까운 장래에 어떤 희망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는 햇살 하나 없는 깜깜한 암흑만 바라보고 있습니다.(암 5:20)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계약대로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계약대로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업신여기고도 살아 남기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른 데서 나온 처사 인지요! 바로 이스라엘은 타락한 인간의 표상으로도 선택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곧 성전 파괴까지 나아갑니다.(암 9:1) 그 성전이 무너진 그 자리에 다시 다윗 언약은 세워지지만 이미 이스라엘 몫은 아닌 것입니다. 이방인 에돔의 남은 자의 몫입니다.(아모스 9:11-12) 물론 이스라엘은 돌아오지만 이 이스라엘은 옛 이스라엘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 섬김을 입은 자들이다.(암 9:13-15)

 

(2) 호세아 신학

호세아는 우상이라는 말과 간음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되면서 이 둘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둘이 아니라 제3의 의미, 즉 하나님의 사랑의 실상을 보여 주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결코 무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7에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이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긍휼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가 1:2에서 음란한 아내 고멜을 취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르엘을 낳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르엘은 바로 이스라엘의 범죄성을 잘 나타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한 잔인성을 보여준 곳입니다. 즉 아합의 아들 70인이 예후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몰살당한 장소입니다.(열왕기하 10:7) 하나님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바로 고멜로 드러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음탕한 성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고치려면 바로 고멜로부터 오는 성품을 끊어 버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음란과 간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께 나오게 하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딴 마음으로 여호와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즉 6:7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상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여호와 특유의 마음을 그들은 읽을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되는 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간음하여 가출한 자기 아내를 다시 찾아가는 그 사랑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3:1-5) 바로 이러한 사람이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사랑을 버린다는 그들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1:1) 그리고 그 사랑을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야곱은 하나님께 울면서 그에게 간구한 것입니다.(12:1-6) 하나님은 야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야곱에게 까지 져버리는 방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낮아지심을 이해 못했기에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는 죄가 성립되는 것을 알고 살려 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보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공의를 제쳐놓고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2:6/8:13/10:12/13:11/14:12-13) 공의 속에서 사랑을 발견케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마치 야곱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틀 간에는 찢어진 상태였으나 사흘째는 싸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6:1-2) 이스라엘의 음란 우상 숭배는 바로 이러한 사랑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못하거나 잃어버릴 때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우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과 하나님의 다른 점은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에 바탕을 깔고 있기 때문에 그 공의의 완성을 달성한 그 상태에 대한 참여에로의 사랑인 반면 우상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옹호하고 격려하고 그것을 찬양키 위한 사랑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마치 선지자 자신이 간음한 고멜을 다시 찾는데서 가지는 심적인 고통, 그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게 하십니다. 그것은 선지자가 아내의 잘못을 자신이 대신 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행동입니다. 불의를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격렬한 진노가 들어 있는 선지자는 자신의 진노를 다른 형식으로 배태되어 내 놔야 합니다. 즉 아내의 모든 잘못을 자기가 지겠다는 데서 비로소 정의는 사랑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차원으로 개시하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은 선지자 스스로가 거기서 오는 모든 거부감을 뛰어 넘어 자리 잡을 새 영역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헤세드에서 찾고 있습니다.

헤세드의 세계는 선지자의 고통 속에서 드디어 개화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시킵니다. 6:6에 나오는 안다는 말은 직접 혼인하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정을 통해서 아는 사이를 말합니다. 이것은 두 인격이 아니라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호세아는 이 음란한 여인과 결혼함으로 그녀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것으로 직접 이해하려 듭니다. 혼인한 사이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속으로 선지자는 직접 뛰어든 셈이 됩니다. 선지자는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낍니다. 그 때 선지자는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의 생을 통해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형상은 바로 죄인의 자리에서 직접 하나님의 저주를 체험하는 양상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반영합니다. 얍복 강가의 야곱 때처럼 말입니다. 음란한 아내와 운명을 같이하는 선지자의 마음은 단순히 측은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고통 당하는 내적 경험을 지니게 됩니다. 여기서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그 심정을 더불어 고통 당하시는 심정으로 헤아립니다. 우상에게는 이점이 없는 것입니다. 우상은 이기주의의 신이며 단순히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하여 결혼하는 식의 신입니다. 이스라엘의 파멸은 바로 이러한 신을 찾았지 함께, 더불어 고통 당하신 하나님의 모습에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붕괴를 자초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오는 다윗은 이점을 이해합니다.(3:5) 이 다윗, 즉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하는 다윗이 올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로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라 하니라” (14:3) 과 같은 이야기로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힘이나 무력으로 이스라엘은 희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으로만 가능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의 죄 속에 같이 뛰어드시는 아픔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가질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8:13 9:3-6 11:5)

 

 

(3) 미 가

미가 선지자는 직접 성전을 향해 공박을 합니다.(1:2/1:12) 이는 선지자가 안고 있는 모세 율법에 대한 충실성 때문에 그러합니다.(6:1-5)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에 의하면 피해 당한 당사자의 자격으로 피해를 준 이스라엘을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고방식에는 온전한 율법 이행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성전이 존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상 모순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전이 파괴되었다면 그 파괴 되도록 방치한 당사자는 거기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되는 것이 또한 모세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미가의 이러한 사상은 어디서 흘러 들어온 사상일까요? 다른 선지서 와는 달리 미가에는 소명기사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28:16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통치하던 그 시절에 미가는 활동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이미 미가는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종국으로 달리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서 성전이 성전으로 남아 있으려면 바로 히스기야 왕과 같은 그런 겸손함과 신앙적인 면에서 율법에 대한 애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역대하 29장-31장) 그렇지 않고서는 성전이란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앗수르의 무서운 위협도 성전을 성전답게 한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미가에게 현 이스라엘의 추세는 바로 성전 파괴라는 사태까지 몰고 가는 것은 시간 문제 였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다윗언약은 파괴되는가? 미가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 예루살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하고 유다 족속 가운데서도 지극히 작은 동리 베들레헴을 통해서 다윗언약의 맥을 이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5:2) 이곳은 바로 보아스의 고향인 것입니다. 또 이새의 본적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고향입니다.(사무엘상 16:1) 다윗언약이 왕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 대한 언약이므로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파탄이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3:11-12)

따라서 이 지도자의 잘못을 극복할 무슨 대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이 역시 예루살렘이 들어 설 때 그 모든 민족들이 거리로 몰리게 된다는 희망을 선지자는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전쟁이나 다툼이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그 분이 이방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건질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러한 주장은 그 동안의 다윗 언약을 무로 돌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물을 통해서 다윗 언약을 지속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일은 바로 이스라엘을 죄에서 건지시되 어떤 식이냐 하면은 마치 옛날 모세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팡이로 인도하던 그 방식에 맞추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2출애굽을 암시하는 말입니다.(7:11-18) 결국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7:18-20)

 

(4) 이 사 야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현 역사에 있어 두 극단을 체험한 자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남의 유다나 북의 이스라엘이나 가장 국력이 신장된 그 시절을 통과했으며 예언 활동을 하던 무렵부터는 양대 국가의 영웅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라(남:웃시야 왕이 죽었고 북:여로보암 2세가 죽었던 후였다.) 국내적으로 통치권에 공백 상태를 초래했고 대외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출현하여 바벨론과 시리아를 정복할 채비를 차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주변에 정치적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엿보였습니다. 이것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태평성대를 누리던 분위기하고는 전혀 다른 세상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가장 안일할 수 있었던 시기에서 갑자기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못하는 시기로 변한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서 누가 나서서 이런 상황을 해명해 주어야 하는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었습니다. 과연 왕이란 존재는 무엇이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선택하여 영영히 왕의 지파로 고정시키신 그 약속이 이러한 위기 정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명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자기가 보낼 선지자에게 자신의 본심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6:1-13) 그래서 현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하나님 언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정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왕과 다윗 언약을 새롭게 정리하는 길만이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극도의 사치를 안겨 주었던 소위 능력 있는(?)왕 웃시야 죽던 해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거룩이라는 말로 표현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거룩과 영광과 위엄은 이사야로 하여금 성전이 안고 있는 최후의 경지를 말해 주고 있고 도달점을 나타내어 준 것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성전의 모습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비추어서 자신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발견한 것은 자기의 부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추함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는 불같은 화요 영원한 망함뿐임을 실감나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경험은 불법과 불의로 충만한 세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이 어떤 차원에서 수행되는가 그 기준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이니 다윗언약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입장에서 재해석되어야 본래의 의도를 밝힐 수 있는데 그 취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그 뜻을 위해 언약을 남겼으며 그 언약의 본래의 의도를 이루기 위하여 인간에게 기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이 선택하신 그 자를 위한 언약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결국 언약이란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가 진리를 전할 때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은 이사야가 경험한 바와 같이 거룩하기 때문에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로서 정화될 자로서 남은 자들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현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미래에 되어질 일입니다. 여하튼 언약의 제공은 하나님의 선택이 결코 인간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조건을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그 언약의 복도 위와 상관없음을 인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이사야 7장에서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유다를 치고자 하는 일 가운데 밝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치고자 하는 것은 유다 왕 아하스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유다왕 아하스가 아니라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입니다.(7:3)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 올 것이라 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기존 왕들이 알고 있는 다윗언약관을 징벌하고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7:11에서 이사야가 아하스왕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 든지 높은데서 든지 구하라고 언급합니다. 그 때 아하스왕이 하는 말이 나는 구하지 않겠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과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하스왕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다르니깐 징조를 구해도 징조가 나타날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 유다 나라 왕 체계와 혈통은 아하스왕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다윗 가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기준 해서 그러합니까? 이사야가 웃시야 왕 죽던 해에 성전에서 본 그 거룩의 보좌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약속은 인간의 부족으로 취소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다윗 언약은 스알야숩으로 전수되어 보존 유효한 것입니다. 그래서 7:13-17에 보면 스알야숩에게 기대를 거는 이사야의 나의 하나님과 아하스로 대변되는 너의 하나님으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사야처럼 또 성전에서 거룩을 보여 준다는 말입니까? 거룩을 보여주기는 주되 다른 징조로 그 거룩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 이 사건이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징조가 하는 역할을 바로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으로 나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임마누엘 즉 너 나로 나뉘어 지기 이전 상태인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왕족이라는 거창한 가문을 따라서 언약, 다윗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비천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천대받는 아기를 통해서 다윗언약을 성취시킨답니다, 언제? 미래에. 미래에 있게 될 다윗 언약은 인간들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전적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달성됩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홍해의 갈라짐이 인간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듯이 정차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능력에만 신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래에 있게 될 다윗 언약은 인간들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전적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달성됩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홍해의 갈라짐이 인간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듯이 장차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능력에만 신뢰를 해야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앗수르 침범은 임마누엘의 성격을 보이게 하는 수단이 되며(10:24) 하나님 보시기에 선택된 남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 돌아오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10:20-22) 기존의 이스라엘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그 임마누엘 때문에 당황하게 되고 파멸되며(8:15) 오히려 말씀권 밖에 있기에 흑암과 고통의 이방 지역이 복음 지역으로 달라지고 빛이 비쳐 나옵니다.(9:1-4) 다윗 반열은 그들을 통해 이어집니다.(9:7) 그래서 현 이스라엘과 유다를 애굽으로 간주하고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이 새로이 이스라엘이 되어 다윗 나라를 구축하게 됩니다.(9:13-21/11:1/111:16)

따라서 임마누엘의 기능은 현 이스라엘로부터 참된 이스라엘을 분리해 내는 기능이며 현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정죄함으로 그 작업을 이행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백성 아닌 자를 백성 삼으심으로 말미암아(19:24) 이스라엘이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여호와께 대한 죄책으로 간주하는 누구에게나 다 해당이 되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언약이 임마누엘로 말미암아 다시 전 세계를 통치할 때가 오게 되면 세계는 여호와의 천지가 되는 것입니다.(11:9) 그 때에는 바로 창조도 동시에 일어나는데(65:17/45:7-13/45:18/48:12) 그 창조는 새로운 여호와의 종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새 창조에 대한 언약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먼저 있었던 언약가운데 창조가 두 번 일어난다는 대목이 어디 있던가요? 이사야는 대체 무엇 때문에 새 창조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까? 옛 질서를 하나님 스스로 파괴하시는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64:6-8에 나와 있는 대로 죄를 정화한다는 차원에서의 義의 創造에 따른 후속 조치입니다.(45:8)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사야의 계시의 흐름은 유다를 움직여 이방인들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의 정당성까지 확보하는데 이릅니다. 그 통치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심판으로 작용되는데 그 심판 행위 뒤에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 창조질서 건설에 따른 언약적 근거는 義의 창출, 즉 언약이 그 완성을 보게된데에 대한 마땅히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이 흐름을 좀더 분명히 살펴보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맨 먼저 유다의 실책에 대하여 나옵니다. 자기를 양육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1:3) 그리고 헛된 제사를 드리는 것,(1:13-14) 우상 숭배하는 것,(2:20)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5:23) 등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본래의 영광을 공개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웃시야가 죽고 난 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만 자신의 영광을 성전을 통해서 공개하는데 이는 영광을 본 자가 바로 유다에게 멸망을 선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의 기능에 관한 것으로 유다는 언약으로부터 제외되고 남은 자만 그 언약에 소속될 것입니다.(7:3) 그 남은 자를 가려내는 징조로서 임마누엘이 나타날 것입니다.(7:14) 또 임마누엘은 참된 남은 자를 버림받은 땅에서 찾게 됩니다.(9:1-7) 그들의 주가 되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과 또 그 뒤로 유다는 징벌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9:12) 비율법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앗수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10:5-7) 그리고 그 징벌에 가담한 앗수르도 같은 기준에 의해 징벌 당합니다.(10:12-15) 이 사실은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 책임을 져야 될 입장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 공의로 인한 징벌의 와중에서 비로소 남은 자만 드러나게 됩니다.(10:20-23) 그 남은 자가 기대하는 약속은 다윗언약의 회생에 관한 것입니다.(11:1-15) 진정한 왕의 군림은 바로 남은 자와 연관을 지으며 역사 속에 나타나시는데 이것이 제 2의 출애굽입니다.(11:16)

이사야에서의 다윗언약은 창조언약의 성취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이 언약이 이루어 줍니다.(12:1-6) 이러한 미래를 위하여 앞서 이루어질 행위는 언약적인 기준에 의한 단호한 심판입니다. 바벨론, 블레셋, 모압, 구스, 애굽, 에돔, 아라비아, 두로 이러한 나라들에 대한 창조가 가지고 있는 공의적 차원에서의 심판은 결국 다윗언약의 완성이 곧 창조언약의 완성과 같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묵시적인 모습으로 심판이 진행되는 것은(24:3,21,23/25:11/26:5,14/27:1) 역사 이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의중이 비로소 역산으로 노출됨을 나타냅니다. 그 가운데서의 구원도 시온을 중심으로 하여 다윗언약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28:16)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예루살렘은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29:1,5)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은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케 합니다.(29:22) 이러한 미래상을 알지 못하니 현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는 범죄를 저지릅니다.(30:3/31:1-3) 그들은 애굽 대신에 진정한 왕과 성신과 여호와의 나타남을 고대해야 합니다.(32:1/33:17/32:15/33:21-22) 바로 이러한 기다림에 마음을 둔 남은 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34:14) 천지가 사라져도 그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천지가 주어집니다.(35:1-10) 이러한 예언이 있은 후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합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있어 왕의 의미를 재확인합니다. 왕 즉 여호와의 종과 이스라엘의 구원과의 관계는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38:11) 여기서 제대로 중보 역할 할 수 있는 중보자적 왕을 고대하게 됩니다. 예언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어떤 절실성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왕이 회개할 때 적은 물러갔으나 그러나 히스기야가 자기의 가진 것들에 기대를 걸 때 유다를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전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새로운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약속은 바로 창조하신 하나님(여호와 아님)으로부터 나온 약속입니다.(40:12-26) 그러나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조성하고 선택하여 불러낸 여호와 하나님입니다.(40:28) 여호와는 새로운 출애굽에 앞서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41:9)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를 다루어왔던 그 선택적인 특별난 언약의 방식을 전 세계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창조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에 관여한 구속의 하나님 방식을 빌어서 탄생되는데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이용되고 바벨론의 고레스왕이 메시야 역할을 하게 됩니다.(45: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조성하시되 자신의 형상 대신 여호와의 형상을 담게 하십니다.(44:24) 이스라엘을 잡아 간 바벨론이 오히려 도망가게 생겼습니다.(43:14)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의로 다스려 나가려고 합니다.(45:8,13) 이 의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계속 이스라엘로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45:8) 그 의로 또한 구원을 이룹니다.(45:22) 이러한 의의 등장은 역사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46:3-7) 이러한 차원에서 바벨론의 구출은 이루어집니다.(47:1-7) 뿐만 아니라 현 이스라엘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48:6-7) 그 새로운 일이란 여호와의 종이 하실 일입니다.(49:5-7) 그 종이 새로운 언약으로 등장됩니다.(49:8-13) 그 종은 꼭 여호와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나시는데 마치 여인이 젖먹이는 자식을 대함같이(49:15) 대하지만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학대하게 된 것입니다.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뺨을 치며 침을 뱉으면서 말입니다.(50:6) 그러나 모든 율법이 그 분에게서 나오게 되며(51:4) 의도 나오게 됩니다. 그 의가 구원을 이룹니다.(51:5-6) 또 그분이 역사의 타락의 배후 조정자인 용을 멸하게 됩니다.(51:9-10) 이로서 그 분이 구원을 완성시킵니다.(51:11) 이것은 바로 좋은 소식이며 구원을 가져오는 소식이니 이스라엘은 여기에 눈을 떠야 합니다.(51:17/52:1,7)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분을 대할 때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는데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여호와의 종 존귀를 받을 것입니다.(52:13-53:3) 그 분의 그런 비참한 모습은 사실상 자기 양을 위하여 죄책을 대신 지신 속건제적인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53:4-10) 그 여호와의 종과 연관이 있는 자는 이제 그 분의 신부의 자격으로 창조됩니다.(54:4-10)

이 언약은 창조의 언약을 능가하는 확고한 것입니다.(54:9-10) 그 이유는 노아 언약적 내용을 빌었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또 다윗언약 같이 조건 없는 무조건 언약이라서 누구에게도 주어집니다.(55:1-5) 여호와가 제시한 명예를 건(55:13) 언약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와 구원입니다.(5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러한 언약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기는 무리가 있는데(57:3) 반면 통회하고 겸손한 자는 여호와로부터 거룩함을 입을 것입니다.(57:17) 그리고 참된 금식이란 외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여호와의 사랑에 감사해서 주린 자에게 기쁨으로 음식물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58:3-7) 참된 안식이라는 것도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의 개념을 새롭게 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죄이며(59:6)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막는 것이 죄악입니다. 이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구속자는 임하는 것입니다.(59:20)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은 빛나고 만국 중에 일어나게 됩니다.(60:1-3) 모든 민족의 재물이 이스라엘로 몰려옵니다.(60:5) 이들은 이제 해와 달의 빛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60:19) 또 그들에게만 땅이 영원히 돌아갑니다.(60:21) 그 때가 언제일까요? 바로 여호와의 신이 임한 그 분이 등장될 때입니다. 그 분은 가난한자. 마음 상한 자와 포로된 자에게 은혜를 선포합니다.(61:1-3)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창조를 능가하는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61:10) 드디어 열방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되며 공의를 보게 되며 땅과 더불어 혼인을 하게 됩니다.(62:5) 이제 그분은 또 심판에도 관여하는데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복수하십니다.(63:4) 이 사건은 마치 옛날 출애굽 때, 홍해를 갈라짐 때와 같을 것입니다.(63:11-13) 우리는 다 죄인들이고 스스로 주를 붙잡지도 않았지만 진흙을 빚듯이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구원이 가능했습니다.(64:6-9/65:1) 다 죄인들이지만 그 중에 택한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65:6) 다른 이들은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살육을 당합니다.(65:12) 이러한 심판 후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됩니다.(65:17)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홀로 이루신 것입니다.(66:2) 이스라엘에 시련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 분(남자)을 따르는 자국민이 생겨났습니다.(66:8) 그들은 그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와 함께 슬퍼했기 때문입니다.(66:10)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선택된 자도 제대로 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채워집니다.(66:21-22)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불로서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었습니다.(66:15,24)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보았던 그 거룩 말입니다.

 

 

3. B.C 7 세기 선지자들의 신학

 

8세기 선지자들이 종말론을 어디에 근거하여 제시하고 있는가 하면은 시내산 언약에 비추어 볼 때 현 이스라엘이 내세우고 있는 다윗 언약의 무조건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나온 이론이다.

다윗 언약의 무조건성이란 모세 언약에 기초를 둔 것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룰 때 비로소 그 완성되는 형태로서의 무조건성이 되는 것입니다.(열왕기 상 8:56)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 언약이 조건부 언약이 되지 아니한가? 라는 오해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전 8세기 선지자들은 모세 율법을 갖고 있는 저주의 기능, 심판의 기능을 가지고 이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열왕기 상 8:46-47) 예를 들면 이사야 36장-39장 히스기야 왕과 앗수르 장수 산혜립 사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앗수르는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의 차원에서(이사야 6:1-6) 심판하는 도구로 등장되는 이방 나라입니다. 자, 이럴 때 다윗 언약의 상대자인 왕으로서 취할 태도에 대하여 언약은 어떤 내용을 요구하십니까? 어떤 방식으로 왕은 난국을 타개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왕은 다윗 언약에 의하면 여호와의 종입니다.(왕상 11:13/왕상 8:28)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성전 여호와의 이름을 두는 성전이 완공하고 난 뒤에 체결된 다윗 언약에 따라 여호와의 종으로서 왕이 취할 태도는 바로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약속한 그 언약의 범주 안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왕은 바로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여호와의 이름을 향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앗수르의 침공에 맞서 다시 한번 다윗 언약의 회복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이사야 38:14) 즉 중보자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왕이 등장할 경우에만 이스라엘은 다윗 언약의 혜택 속에 놓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사야 38:14에서 자기가 중보자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보고 중보자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다윗 언약은 인간 왕의 율법의 철저한 이행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왕 즉 여호와의 종이 되셔서 그것이 속건제의 내용을 담아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 기능을 다할 때 이루어진다는 점을 히스기야는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윗 언약은 무조건 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왕의 무능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무조건성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윗 언약은 무조건 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언약 상대자가 달라진다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혈통을 따라가 아니라 그 중보자 되신 왕의 자의로운 선택에 의해 선택된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이사야 53장) 뿐만 아니라 미가 선지자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1) 스 바 냐

스바냐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철저히 심판의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3/1:6) 특히 사람들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전멸하고 멸절 시키겠다는 표현은 마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를 무효화시키겠다는 의도처럼 느껴지고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의 재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화가 났으면 이렇게 까지 자기 백성에게 이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표현이 안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1:15-18) 그러면 그런 심판을 내리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1:11)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무서운 화를 내시는 것은 가나안 땅에 기거하는 자들이 제대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의 본질을 무시하고 살았으므로 그 약속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여호와의 날이 도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철저하게 악이 발붙일 수 없도록 사전에 약속된 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면은 3:13에 “악을 행치 아니하면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나 누우나 남을 놀라게 하지 않는 자. 그런 자에게 한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은 자란(33:13) 결국 하나님이 앞서 제시한 언약의 영속성이 있음을 증거 삼기 위해 남겨져 있는 자라는 定意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런 남은 자가 계속 존속하게된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 언약 즉 약속의 땅을 계속 약속의 땅답게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약속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3:14) 가나안 땅에 파멸이 오게 된 것은 이 예루살렘을 제대로 이해 못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왕들 때문입니다.(3:1-4) 남은 자들이란 바로 이 예루살렘의 언약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하며 인간 지도자들의 그런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아침마다 나타내시고 계신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산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날과 다윗 언약과 창조와의 관계를 따져 봅시다. 출발이 창조된 것을 파괴하는 쪽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선지자는 땅의 가치를 몰라 봤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땅의 가치를 몰라 봤느냐 하면은 소위 예루살렘 언약의 상대자들이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와 성공을 어떤 기준에 놓고 한 이야기냐 하면은 바로 아침마다 비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그들이 외면했다는 것이 문제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창조의 파괴까지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가 보는 여호와 날의 기능은 의의 소극적 기능인 심판을 통한 의의 자기 성취를 알리는 날로 여호와의 날을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은 다윗언약이야말로 참으로 창조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들입니다. 언약이 파기되면 창조도 땅도 파기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공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날을 앞둔 이 마당에서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오직 전능자이신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끝까지 시온을 의지하는 자만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3:16-20) 스바냐 선지자는 다윗언약에 강한 희망을 거는 선지자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은 창조의 존립까지 이 언약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하 박 국

하박국은 유다에서 율법에 대한 태도가 해이해지고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아니한 것에 대해 부지런히 기도하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이 없음을 이상히 여깁니다.(1:2-4)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1:13) 그런 가능성 속에서 계속 기도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기대한 것이 당장에 결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유다의 정통성에 근거하여 확고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 하지만 당장에 있어 하나님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의 부족은 어떤 식으로 극복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악인이 의인을 에워 싼 그런 처지에서 믿음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젖과 꿀의 대명사였던 가나안 땅의 황폐화는 의인의 바라봐야 하는 대상을 더 깊고 심오한 차원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됩니다.(3:17-19)

여기서 하박국은 유다 내의 의인의 믿음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맹렬한 공격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배역자의 죄를 비교해 봅니다.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해야 하는 그 상대는 그들의 5가지 악행 즉 고리대금, 착취, 강제 노역, 방탕, 우상 숭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 할례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소치라고 여깁니다.(2:16)

하박국은 유다 신앙의 영속성을 할례 정신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할례란 그런 세속 정신과는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증표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이 공격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하박국은 유다 내의 악인들의 사고 방식이 공격하는 자들의 사고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육체의 할례를 행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는 율법 조항 보다 율법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침입으로 확연히 밝혀진 것입니다.

3장에 가서는 하박국은 대 우주의 질서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흔들리는 최후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창조의 질서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관련 있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는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바로 우주를 정화하는 능력이며 그 작업은 인간의 죄상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적절한 심판에 합당하고 공정한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보여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새로운 자연의 탄생이 감지됩니다.(3:2-4) 하박국은 이 묵시를 보고 미리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박국은 의인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의인이란 자기의 자체 내에서 힘으로 소지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그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나오게 될 능력에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험악하고 악한 세대 속에서도 높은 산을 넘나드는 사슴처럼 마음놓고 뛰어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3:19) 또 이 세대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 묵시를 보여주시고 그 묵시대로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계신 여호와만을 사모하겠다는 것이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3:17-18)

무엇 을 보고 그런 확답을 내릴 수 있는가 하면은 바로 할례 정신이 결여된 이 이스라엘을 향해 할례를 무시하는 이방인 바벨론으로 하여금 치시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 때문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라는 하박국의 구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묵시에 대한 무조건의 기대를 갖는 자를 말합니다. 하박국이 생각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기 신뢰도의 고정이 아니라 묵시가 역사를 심판한 격이 된 셈입니다.

 

(3) 나 훔

나훔 선지자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1:1-3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기준해서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누구냐 하면은 물론 이스라엘이고 주된 내용은 니느웨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가지고 선지자는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1:15). 게다가 또 화평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에게 이 니느웨의 멸망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이 되느냐 하면은 여호와께 의뢰하는 자에게는 이것이 아름답게 평화를 주는 소식이 됩니다(1:8).

그렇다면 분명히 지금 멸망당하는 그 나라가 여호와를 의뢰하는 나라를 괴롭게 하니깐 하나님이 가만 안 있어 그 나라를 친게 됩니다. 결국 나훔은 하나님의 복수(復讐)에 대하여 계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하나님에 대하여 대들었다는 것이 그들이 무슨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1:15)에 대한 공략이 곧 하나님 자신에게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출애굽의 재현입니다(1:4). 지금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포로 잡혀 있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왜 언약의 백성들이 왜 자기 신에게 심판 받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우상 숭배에 몰두하고 있으며(3:4) 음행하며(3:4) 약탈하며(2:2) 사치와 풍요 속에 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2:9).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에 잡혀와서 그들 품속에 있음이 곧 하나님의 언약의 보편성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언약에 예속되어 있지 결코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보여 주고자 하는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선택이 결코 이스라엘 국가에 한정되지 않았음이 이스라엘이 포로 잡히고부터 드디어 역사 속에 그 언약적 실체가 비로소 공개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나훔의 종말론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모델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멸망을 내용으로한 언약을 가지고 만유의 언약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2:1-3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면입니다.

 

(4) 예 레 미 야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 주변의 국제적인 강대국의 균형이 깨어지고 다시 형성되려는 과도기적인 위기 속에서 다윗 왕조와 일반 민중의 희망의 기초가 되었던 시온산과 다윗 선택 계약 사상이 도전 받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점에 대하여 적절한 해명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근거 없는 막연한 환상도 배격해야 하고 깊은 절망 때문에 강대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비신앙적 태도도 치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둘 사이에서 하나님의 강한 역설적 활동을 보게 되는데 선지자 자신도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에 자기가 먼저 수납되어야 하고 적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성취가 인간이 예상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정면으로 배치시키는가 하는 점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오한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한 형태를 선지자의 일생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선지자가 밝히는 것은 과거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빈틈 하나없이 철저하게 이행되어지고 있느냐로 자기 임무를 다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6:34-35/26:43)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기에는 이런 처지는 자기들이 생각지도 아니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벌써 역사를 자신의 말씀의 범주 안에서만 진행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다만 그것을 다시 현실 속에서 재조명하고 재확인하여 선포하는 기능만 하는 것입니다. 그 선포하는 과정이 하나님은 선지자의 계시 기능 속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부딪쳐 오는 시련을 통해서 현 이스라엘의 위치와 그 이스라엘과 투쟁으로 나아가는 선지자의 반응들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긴장하는 선지자의 실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입니다. 의인을 구박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드디어 미래는 종말이라는 단어로 대치됩니다. 또한 선지자의 버림받음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버림받음을 보여줍니다. 어쨌던 이스라엘의 현주소를 알기 위해서 선지자는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생활 속에서 표출해야 합니다. 선지자와 하나님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 그의 출생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소명은 시간과 한계를 넘어섭니다. 이것은 앞으로 그에게 일어날 여러가지 일 중에서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는 것 같이 여겨질 때에도 결코 버려진 것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자신이 마치 모세가 처음 소명 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1:5-6).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었다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이방으로 내몰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의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모세에 있어 소명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모세처럼 그의 개인적인 운명 속에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특히 그는 예루살렘 성문에 자주 나갔는데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활동은 성전을 치시는 하나님의 본 의도가 어디 있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암시하기 위함입니다.(1:15) 이로서 이스라엘의 전쟁은 이방 민족과의 전쟁이 아니라 예레미야와 이스라엘 전체의 싸움이 됩니다. 그러나 승리는 예레미야의 승리입니다.(1:17-19)

이와 같이 그의 소명 가운데 앞으로 전개될 모든 모습들이 다 들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하는지 밝히는데 주력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그의 소명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를 깨닫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 하나님의 구원의 장소에서 버림받게 되느냐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투쟁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있습니다.(2:2-3)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체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있습니다.(2:6-8) 여기서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2:9) 그런데 나중에는 이 다툼이 예레미야와의 다툼으로까지 번집니다.(18:19) 이 다툼은 성전의 존재 부정까지 이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 존재 기반을 취소해 버립니다. 그 과정이 7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입장을 변호하며 하나님에 대한 자기 임무를 다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평강을 외쳤고(6:14-15/8:11/14:13-14/23:17) 제사장들은 제물을 드렸습니다.(6:20) 물론 하나님이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그들도 거기에 상관없이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닌 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5:12) 더군다나 백성들도 이런 지도자를 선호합니다.(5:31) 그러니 예루살렘 거리에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5:1) 이러한 유다의 배반에 대하여 하나님은 북방에 있는 군대를 보내어 단호히 멸하려 하니 그 가운데 있는 예레미야는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4:10) 그것이 평안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틀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걸려 넘어질 꺼리를 그들 앞에 두겠다고 하십니다.(6:21)

이 걸림돌은 우리가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무엘과 모세를 능가하여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선지자 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15:1/15:19) 이러한 백성들의 오해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본질에 대한 오해로서 옛날 유월절날 애굽 국민들이 당하는 독자 잃은 슬픔을 갖게 하게 합니다.(6:26) 하나님은 선택만이 아니라 버리시는 하나님인 것을 그들이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6:30) 그 버림의 증거로서 성전의 중재기도의 기능도 없어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를 고집합니다.(7:4) 하지만 선지자는 너희의 제사를 원치 않고 있다고 하십니다.(7:22) 그 대신 내 목소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7:23) 그렇다면 그 목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는 것이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7:6)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기념하라고 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희생을 몸소 생활로서 실천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요 살아있는 예배인 것입니다. 의식이란 날마다 그 정신을 되새기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런 활동을 말합니다.(7:10)

여기서 드디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그들 앞에 내세우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거침돌이 되기 위해서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들 앞에서 외치고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을 눈 앞에 둔 이스라엘에게 보여줄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인 것입니다.(7:25) 그 거침돌이 바로 선지자의 삶의 결정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란 제사나 예배하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 어린 양처럼 남을 섬기기 위해 사는 민족이 되라고 선택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만이 구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홍해의 갈라짐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이란 생각할 수도 없으며 그것 자체가 비이스라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보여 주신 계시의 매체로서 그 기능은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로 추방합니다. 이것은 제 2의 출애굽을 대비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8:13-14/8:17)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선지자는 통곡합니다. 이러한 통곡과 울음이야말로 그 당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곡을 보여주는 것입니다.(8:18/9:1) 예레미야는 스스로 광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자신의 고난 속으로 수용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자신이 하겠다는 자세입니다.(9:19)

이처럼 이스라엘이 창조 회복의 기능을 담당할 능력이 없다면 그 어떤 의식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9:25) 육신의 일부를 잘라 내어 구별됨과 거룩함을 나타내던 할례제도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 회복이라는 웅대한 목적을 위한 방편이 됨으로 이제 눈 앞에 닥쳐온 종말 앞에서 할례 그 자체보다 그 할례가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의 지평선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창조 세계를 능가하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4:4/6:10/9:23-25)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선지자는 절망을 느낍니다. 그 절망은 곧 선지자의 고난으로 이어집니다.(10:24) 하나님의 아픔이 이제는 선지자의 아픔으로 번집니다. 예레미야와 이스라엘의 다툼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계획이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유다가 좇지 아니한데서 비롯됩니다.(11:3-5)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11:17) 즉 이스라엘은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로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언약의 상실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소용없고(15:1) 복도 빌지 말라고 합니다.(14:11) 예레미야는 모세처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와 이스라엘을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14:21)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편이 되지 말고 하나님 편이 되어 유다와 싸울 채비를 하라고 하십니다.(15:20) 그는 상가집에 가서도 울면 안되고 잔치집에 가서도 기뻐해서도 아니됩니다.(16:1-9) 이제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16: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진심을 알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보다 마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17:9) 그래서 진정 그는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이로서 그는 박해와 오해와 버림당함의 인생이 출발하는 것입니다.(18:18/20:2) 예레미야는 자기의 박해와 버림당함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얼마나 박해하고 무시하는 지를 체휼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버림은 하나님으로서는 마땅한 것임을 천명합니다.(18:7)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의 뜻을 돌이킬 권리와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18:8/18:10) 예레미야의 박해는 먼저 같은 예언자에게 당합니다.(18:18)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뿐 아니라 예레미야에게 도전해서 일어난 그 모든 결과에게도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됩니다.(18:21) 이번에는 제사장이 예레미야에게 도전합니다.(20:1) 이러한 박해는 욥과 같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과 맥락이 같습니다.(20:14-18/26:15) 태중에서 너를 구별하여 내었다는 하나님의 주장은 예레미야가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것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보여주어야 될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남을 위해 자기가 죽어야 될 성품입니다. 의인을 학대하고 말을 거부한 유다는 또다시 이방인의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두 번째 출애굽에 비견할 수 있는 출애굽입니다.(23:7-8) 이러한 유다의 수모는 바로 의를 위한 것입니다. 포로 잡혀간 자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22:10) 다음 세대에서 의의 왕이 나타나기를 고대해야 합니다.(23:5-6)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 내용이 종말에 어울리지 않는 평안을 외치고 있다고 지적하고(23:17)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너희를 버린다.” 는 것입니다.(23:33) 이로서 예레미야는 형제들에 의한 죽음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부당성을 언급하는 자도 있습니다.(26:19) 그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을 앞두고 이러한 유다 내부의 갈등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당장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도 계속 예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반박과 충돌 속에서(28:10) 구원의 개념의 실체가 서서히 열립니다. 즉 포로 잡혀가는 이 현실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29:7) 내가 사로잡혀 가는 그 성읍이 평안하기를 원하라는 것입니다. 선조에게 약속한 땅은 바벨론에서 70년이 지나야 돌아올 수 있는데(29:10/30:3) 그 사이에 이 약속의 땅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70년 그 기간 동안 또한 바벨론의 죄악이 무르익는 기간이기도 합니다.(25:12)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더럽혀진 땅이 그곳을 비우게 하므로 안식을 찾게 되고 유다는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어 비로소 땅과 안식의 의미를 알게 되니 이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자기 공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땅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죄상을 익히 알기에 그들의 율법은 돌판에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요 성전 법궤안에 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새겨질 사람입니다.(31:33) 이 사람들이 남은 자들입니다.(31:7)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에 자식 잃은 경험을 하지만(31:15) 그것이 옛날 출애굽 당시의 어린 양의 희생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울지 말라고 합니다.(31:16) 이러한 포로 귀환은 곧 새 창조에 해당될 만큼 놀라운 것이요(31:22)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기쁨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31:21-22) 따라서 자식 잃었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바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육적이 아니라 두번째 출애굽 때 등단할 어린 양 되시는 남자 아기로 선지자는 표징을 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지시에 따라 그 땅 한 부분을 자기 앞으로 등기하고 그것을 그 때가 되기까지 인봉해 둡니다. 그것은 땅의 영원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행위로서 땅을 확보한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과 약속을 확보해 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에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32:8/32:10)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은 바로 이 인봉된 기업과 상관없는 사람에게만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32:43-44)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로서 포로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땅을 차지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제 예례미야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 나타나면서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 책을 불태웁니다.(36:23) 여기서 예레미야는 마치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아오는 것처럼 불태워진 책과 꼭 같은 내용의 책을 만들고 거기에다 더 첨가합니다.(36:32) 드디어 예레미야는 투옥이 되고 방백들은 사기 진작을 이유 삼아 선지자를 죽이자고 합니다.(38:4) 그러나 죽기 전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략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하고자 할 때에 그들은 애굽 가서도 유다처럼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44:13)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한 증인 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44:28)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의 황폐의 책임을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동안 이스라엘이 가는 그 곳이 곧 약속된 민족의 자격으로 가기 때문에 당사국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우호적이냐 아니면 적대적이냐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2차 포로 귀한 이후에는 역사 그 자체조차 초월하는 심판으로 전개되는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은 이제 유다인이라는 일개 소수 민족에 국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 전파된 하나님의 종이요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애굽, 가나안 족속, 모압, 아몬, 게달, 하솔, 엘람, 바벨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들 민족의 심판까지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듯 하나님과의 언약 위반으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갔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자신의 기능은 끝가지 수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끝으로 예레미야 31:31-34에 나오는 새언약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지금 예레미야가 관심 두고 있는 점은 하나님은 도대체 이스라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레미야는 여러번 언급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절한다는 주제(Rejection motif)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화된 심판을 통해서 알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새언약은 어떤 각도에서 이해되느냐 하면은 바로 옛언약과 비교하는 가운데 알게 됩니다. 극단적인 심판이 어떤 새창조의 기반이 된다고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트릭을 쓴 것이 됩니다. 멋진 창조를 위하여 한번 겁준 게 됩니다. 옛언약의 한계는 선택의 의미를 기능적인 것에 매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주어진 율법 가지고 무엇을 해내기 위한 기능공으로 이스라엘이 선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가진 자가 자체 내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성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가 문제가 결함이 있었습니까? 선택에 결함이 있었습니까? 율법에 결합이 있었습니까? 흔히들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 마음속에 율법을 집어넣어 완벽한 인간 되게 한다고 여기는데 그렇다면 처음에 하나님의 요구한 것이 마음이 아니고 무어란 말입니까? 형식만 요구했더란 말입니까? 또 새언약 받고서는 흠도 티도 없는 완전 무결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까? 인간이 가만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왜 옛언약이 취소 폐기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심판 받는 것과 연관시켜 생각합니다. 하여튼 이스라엘은 부족하다. 언약 상대자의 부족으로 언약이 파기되었으니 선지자는 새로운 형식의 언약을 하나님이 마련했다고 한다 라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선택할 때 부족한 줄을 몰라서 선택했을까요? 처음 선택은 조건보고 선택했습니까? 잘할 것 같아서? 지금 이스라엘은 선택과 율법과 심판, 모두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한다는 말씀은 율법을 이제는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들여다 볼 때마다 선택에는 조건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조건 하에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이 율법의 준수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기 위하여 율법이 제공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버리겠다는 말씀은 (31:37) 율법 조항을 안 지켰다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선택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보여주시는가 하면은 선택의 진수를 새언약을 통해서 그 정답을 걸어 놓으시고 이처럼 선택된 자는 누구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게 되어 있는데(31:34) 몰랐다는 말은 심판 받아도 싼 민족이며 비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는 자들인 셈입니다.

새언약이란 결국 내용은 동일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만 천하에 공개해 줄 대상을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기능적 목적을 지닌 언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어떤 목적에 미흡했다고 내린 하나님의 조치인가 하면은 바로 새언약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의 마음 속까지 자리잡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31:29-30/31:33)

이 사실이 예레미야에게 어떤 영향과 감동을 주었을까요? 그것은 앞으로의 모든 역사와 자연의 질서까지 어떤 영원성을 함유한 채 이 가나안 땅에 밀려올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게 되었습니다.(32:40/31:35) 다시는 비선택자들이 여기를 차지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묵시쪽 보다는 오히려 역사의 영속성을 고수하는 선지자는 모세 언약의 완성을 역사 밖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이 자리잡음으로 성취된다는 나름대로 언약과 하나님에 대한 해석 때문입니다.(32:41) 묵시란 탈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완성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역사로서의 언약의 의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26. 포로기의 신학

 

포로기의 신학을 출애굽 당시의 신학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 통치하에 있어 이스라엘 민족의 위상과 이미 자유 되었던 이스라엘이 어떤 이유에 있어 다시 포로화 되었다는 것은 상호 반대되고 대립되기는 하지만 대칭으로 인하여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의 노예 상태는 자체 내의 잘못이 있다기보다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의 등장으로 야기된 일이었습니다. 요셉을 몰랐다는 말은 이스라엘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성을 간과한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이 범 인류사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그들 애굽인은 무시한 것입니다. 이 점은 곧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이 지상에 남길 자기 歷史가 방해를 받게 되자 바로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시고 그 가운데 자기의 언약 백성에 대한 진실함을 보이시는데 의의가 있던 출애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심판이나 책임을 묻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감금한 자들에 대한 심판만 있을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을 바벨론 포로기에 적용을 시켜 본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갖는 주체성(Identity)이 곧 언약주체성이라고 간주할 때에 언약의 무효 또는 언약의 상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은 공중 분해된 셈입니다. 결코 옛 출애굽 이전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닙니다. 옛날의 재생이라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등의 잘못이 없이 포로로 잡혀야 되는 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적용되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체결된 언약관계가 해당될 수 없습니다. 그 언약의 적용은 이스라엘에게는 책임이 있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경우에 한합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어떤 언약이 그들을 70년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법적 효력이 있는 언약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옛날 애굽 때와 대조를 해봐야 합니다. 애굽에서의 탈출은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서의 벗어남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바벨론에서의 벗어남은 사실 그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을 시킴으로 인해 그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했던 약속의 땅이 율법대로 안식을 얻기 위한 조치였습니다.(레위기 26:34-35) 이것은 안식이 비안식으로부터의 일종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에 애굽민족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야곱언약의 완성이라는 형태로서 탈출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처럼 안식을 감금한 비안식 세력에 대한 어떤 책임 추궁이 있어야 언약의 구현이 달성되는데 누가 책임지는가 하는 문제가 등단됩니다. 그 책임자는 바로 안식의 내용을 담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인데 그 이유는 안식의 상징인 성전을 겨냥해서 나온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자기 붕괴가 다시 바벨론 유수를 옛날 출애굽 형식에 맞추어 설명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언약의 구현체 이스라엘은 바로 바벨론 포로 기간 가운데 이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법궤가 놓여진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중점을 두고 외친 선지자들이 포로기 선지자들입니다. 다윗언약으로 구현되고 완성된 아브라함 언약이 그 상실에 직면하여 다윗언약 스스로가 책임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언약의 영원성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이스라엘은 다윗언약 성취에 실패했습니까? 그들의 죄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결합을 그들이 그르친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제사장직과 왕직의 결합에 실패한 것입니다. 모세 언약이 거대한 그 정신을 보다 영원히 이 약속의 땅에서 유지 보존되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시고 있는 법궤와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여호와의 이름이 갖는 은혜의 가치에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직과 왕직의 결합은 오직 회개만이 가능하고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자인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 언약을 생각지 아니한 아브라함 언약은 기반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중보자의 위상과 본질을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4:17-24/시편 110:4/시편 76:2) 땅에서의 언약이 그 영원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멜기세덱 언약과의 예속 내지는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 받아 계속해서 왕직과 제사장직의 결합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유다 말기에서 비로소 이루어집니다.(열왕기 22:1-23:27) 이와 같이 포로 직전에 유다 내의 부흥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책임질 수 있는 지파는 오직 다윗언약에 의해 유다지파밖에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포로기에서 돌아올 때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돌아옵니다. 여호와는 이제 유다의 하나님이 되고 만 것입니다.(에스라 4:1-2/에스더 4:4/느헤미야 11:4) 포로 이후의 성전 건축은 안식의 참여를 노린 유다지파의 자기책임성 통감에서 나온 행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 안에 들어 있는 두 면을 살펴볼 수 있는데 내용상으로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상징되는 자비와 정의이며 기능상으로는 단독 대표성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면 출애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구원의 형식을 언약의 자기완성을 내다보면서 언약 상대자와의 관계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 잡힘은 그 자체도 또한 언약의 출애굽이며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옴도 그 자체로서의 출애굽입니다.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이 이해한 것은 바로 대신 책임지는 대속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중보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임무였던 것입니다. 중보자의 위상을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해 가고 이 역사 속에 남기고 싶어하신 형상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왕과 제사장의 언약을 누가 담당한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신의 활동에 기대를 걸뿐입니다.

 

(1) 에 스 겔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 밖으로 추방됨으로 말미암아 옛언약의 체계는 화해되고 이스라엘마저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되었습니다. 땅의 안식과 그리고 그 땅의 거주자 간에는 거리가 생겼습니다. 땅의 안식이 땅의 거주자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결과로 일이 진행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 행위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또 어떤 창조적인 행위로서 구속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1:2에 나오는 방식을 취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는 형태입니다.

선지자는 현 파국의 정화는 하나님이 어떤 구속적 의미를 지니고 등장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땅의 거주자와 약속의 백성들의 등장은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개입한 형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땅의 거주자 문제이므로 노아 언약을 감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지개 영광으로 나타난 기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주체는 하나님의 신입니다. 천사들의 분주한 활동은 그들이 누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1:12)

그러면 인간들은 무엇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에스겔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자화되어 있습니다. 인자란 바로 인간이 언약 파기 뒤에 나타난 결과로 비참성과 연약성 쇠약성 허약성 부족성 부패성 무능성 소멸성 허무성을 한꺼번에 표현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에스겔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이 일입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 실패를 가장 단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선지자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자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포로 잡혀 온 민족들에게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2:1) 즉 인자와 그것과 대조가 되는 천사 혹은 하나님의 신의 활동을 그들은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천사들의 민첩성과 지혜와 용맹성과 근면성들은 사실상 누가 그렇게 순종해야 하는가 하면은 인자되기 이전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어야 되는 속성이었습니다.(1:4-14) 이제 에스겔은 인자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한 준비를 갖춥니다.(2:6) 이것은 자칭 거룩이라고 주창한 이스라엘(선택적 관점에서)을 부끄럽게 할 조치로서 어린 양으로 시작된 첫 번째 출애굽과는 달리 바로 인자화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선택 그것도 단체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근거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18:20) 선지자의 비참한 모습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쁜 음식(4:9) 불편한 잠자리(4:4) 그리고 밀어 버린 머리 모양(5:1)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이 치명적인 죄를 선지자는 우상 숭배로 보고 있습니다.(6:2-7) 이방 제단이 이스라엘에게 남긴 영향은 바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7:10) 올바른 성전 관은 결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지를 않게 됩니다. 이방 제단이 왜 나쁘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복을 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정반대의 성품입니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진노는(8:1-18) 언약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기 형상 또는 이름과 관계하지 그 이외 것으로는 아니됨을 보여 주는 행위입니다. 우상이란 언약 밖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추구하는 언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를 성전화 또는 성소화 시 11:16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해서 우상 숭배한 그들을 거룩한 백성 되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출애굽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여행을 떠나는 모습으로 행장을 차립니다(12:3/ 12:7). 이 새로운 이주는 어떤 언약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신은 성전의 파괴가 유다가 이방신에게 경배한 것을 원인으로 보시고 그 우상 숭배의 현장 즉 성전의 동문을(9:16) 그룹들을 통해서 임재하도록 하십니다. 10:18-20 그래 놓고 그곳에 선지자의 인자 모습을 결합을 시킵니다(11:1). 세 번째로 하나님은 그 인자 즉 선지자를 바벨론으로 이주를 시켜 놓습니다(12:3). 위의 일련의 진행은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구속 사역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부정적 측면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들의 실패의 그 현장을 담보로 해서 영원히 추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창조 행위란 바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무질서에서의 질서로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행위의 구속 행위로의 전환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창조의 실패가 유일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실패가 결코 창조 행위의 실패는 아닙니다. 창조 행위가 그 고유적 목적을 향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에 참여하는 배경과 정신이 사랑과 낮아지심에 두고 있음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회 중에 하나가 바로 성전 파괴인데 장차 주어질 영원한 성전은 언약 상대자인 이스라엘의 실패 위에 건립되는 것입니다.

언약이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시냐?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를 보이면 그것의 임무는 달성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란 단순히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 세계에 대하여 희생과 겸비를 내용으로 한 사랑하는 자가 될 때 비로소 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이 피조 세계에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충분히 넘치도록 남길 경우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그 과정 중 한 과정이라도 인간의 도움을 받았다든지 협조가 요청되었다고 한다면 온전히 주가 되시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의 역할은 언약이 주어지는 목적 즉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이 역사 속에서 남기는데 결코 인간의 힘이 개입된 적이 없음을 보임으로 오로지 모든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돌려서 그 창조시에 이미 제시된 언약을 하자 없이 완성 구현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신의 역할은 인간이 못한 부분을 기초로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다시 언약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가에 주력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하게 될 하나님의 신의 활동은 전 이스라엘을 인자화 즉 비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나타날 성전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까? 인자를 극복한 인격자의 모습으로 등장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패한 인자의 모습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여기에 다윗 언약의 그 동안 이스라엘이 알 수 없었던 참된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참된 성전의 회복만이 다윗언약의 영원을 보장받는 증거라고 여겼습니다(14:23). 인간의 힘으로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이미 실패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신의 작품으로 완성될 성전을 선지자는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꾸짖습니다. 먼저 선지자의 죄를 지적하고 그 다음으로 장로들과 백성들의 죄를 지적합니다(13:10-19). 이들 선지자의 신학의 잘못된 관점은 인간의 가능성을 근거로 하여 축복과 평안을 논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형상과 배제되는 것으로 이방 우상에 해당되는 신학입니다.

이 점을 선지자는 열매 없는 포도의 비유, 간음하는 여인의 비유, 두 독수리 비유, 신 포도주 비유, 암사자 비유, 오흘라와 오흘리바의 간음 이야기 , 끓는 가마 비유, 에스겔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울지 않는 선지자의 모습과 그 뒤에 연이어 이어지는 이방 민족의 심판 예언에서 이방 민족의 우상 숭배가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언약관과 동일한 차원이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 민족의 대변자 자격으로 해서 심판 받으며 결국 심판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25장). 그러면 앞으로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회복되는 것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직접 그들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나섭니다(34:2-6/34:16/34:23-24). 그 목자는 양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 줌으로 하나님 그 자신이 목자됨을 알겠답니다(34:27-31). 이것은 그들을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함을 말하는데 다른 차원에서의 출애굽을 암시합니다(34:27).

그 출애굽은 하나님 자신의 신을 주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제는 바벨론이나 애굽이라는 역사적 차원이 아니라 우상 숭배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36:25-29). 즉 개인적인 언약 밖에서의 해방입니다. 그 때의 권능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가 있느냐 하면은 마치 해골이 다시 생기를 얻어 군대가 될 정도의 강력한 권능에 비견될 수 있다고 합니다(37장). 이들이 바로 영원한 성전입니다(037:27). 이들이 바로 거룩입니다. 모든 이방 민족은 이 거룩으로 인해 자신의 비거룩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고 창조의 하나님 앞에서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38:16). 하나님이 구상하신 성전의 이상적 모습이란 바로 이미 정해진 치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성전이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 위에 건립되어지고 있습니다(43:1-5).

타락된 이스라엘을 영광으로 다시 채우시어 성전으로 삼으시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영원히 거주 안식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만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거기에 합당한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43:9). 바로 그 성전에서 나는 생수가 온 우주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47장). 이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천지가 건설되고 성읍이 생기게 됩니다. 그 생명은 두 성전에서 나오는 생수로 유지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성읍을 다음같이 불렀습니다. “여호와 삼마라고”, 풀이하면 여호와께서 계실 만한 유일한 곳이라고!

 

(2) 다 니 엘

다니엘은 묵시문학이 어떤 신학적 배경과 경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나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즉 어떤 역사적 신앙적 토양이면 하나님은 묵시문학 형태로 계시를 전달할 수밖에 없느냐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은 먼 미래에 있을 일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신앙인의 위치에서 언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딜레마와 한계가 묵시문학이 아니면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의 해석에 있어 역사적으로 설명했을 때 주어지는 모순은 묵시 문학적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온 다니엘과 3친구를 중심으로 하여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역사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는 역사 스스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온 유다인들은 3방향의 신학적인 견해를 가졌습니다.

① 국가 이스라엘은 이제 영원히 망해 버렸다. - 이 견해는 다윗 언약의 상대자로서 이스라엘이 거부되었음을 통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쉽게 이방화되고 맙니다.

② 국가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언약의 상대자를 역사 속에서 실제로 다윗왕조를 따라 난 왕은 70년 포로기 이후 다시 약속의 땅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건축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머물러 기도에 응답하게 되리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 오직 이들만이 70년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신봉하며 철저히 다윗 언약을 유다지파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③ 국가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해야만 하고 또 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언약에 대한 위반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가장 선지자의 신학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윗 언약 속에서 바로 역사 속에서 심판 받는 이스라엘과 구원받는 남은 자로서의 이스라엘을 구분하고 나온 결과입니다. 언약적 근거로서 다윗언약에서 과거 모세 언약과의 관계와 또 하나 장래의 영원한 언약인 멜기세덱 언약의 두 사이에서 다윗언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남은 자라는 것은 국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의 소멸을 바탕으로 했을 때 그 다음에 등장할 수 있는 다윗언약의 영속성과 연관이 있는 남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이 남은 자들은 국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의 의미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의 영속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 이스라엘의 실패에 어떤 언약적 효용성을 걸고 있는가 하면은 이 자체를 갖고 여타의 이방 민족을 역사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조로 삼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남은 자에 대한 정의는 이 속에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니엘은 이스라엘을 정죄한 그 심판의 언약이 이제는 그 심판 받는 이스라엘이 또한 이방 나라에서 언약의 온전한 구현의 도구로 사용하여 자리잡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언약의 영속성은 달리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 성취되어지고 있습니다.

남은 자는 이런 상황에서의 언약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전 역사가 정죄 받는다면 남은 자는 어떻게 살아남게 되나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역사와는 무관한 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정죄 자체가 언약이 되어지는 경우란 한 가지 경우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조차도 극복한 언약 상대자에게만 그런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포로 잡힘은 바로 그 분의 영원한 언약을 이방 나라에게 선포하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점이 사실이라면 분명 다윗 언약은 그 진가를 현재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상태일까요?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다니엘의 흐름입니다.

바로 다니엘은 과거와는 단절이요 미래와는 개방된 상태에서 완성의 형식을 가지고 현재를 사는 언약 백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 역사와의 단절의 이유를 밝히는 것 하나와 두번째로 그 단절의 언약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합니다. 다니엘 1장에서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1:8). 그 뜻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포로 잡힘이 결코 하나님이 이방화되기를 원함이 아님을 보이는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방화가 아니라면 무엇때문에 이방 나라에 잡혀 왔는가 하는 물음이 연이어 나옵니다. 그 답변은 역사가 누구에게 종속되었는지 그 실상을 소개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꿈의 해석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요셉 시대의 재판을 보는 것 같은데 문제는 꿈의 해석자에게 역사를 해석할 권리와 주도권이 있음을 공시하는 셈도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해서 주되심이라고 표현해도 좋은 것입니다. 즉 다니엘 일행의 잡힘은 야곱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요셉이 종으로 팔리는 것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창세기 27:29). 여기서 역사의 주와 그리고 역사에 대하 선재하신 인자의 관계를 찾는 것이 대단히 중요할 것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2:4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가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이 아니라, 야곱이 이루어야 될 언약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직접 주가 되시는 언약적 근거라도 있습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들어간 풀무불 속에서 네번째 실존자가 나타나 있습니다(3:25). 이 사실은 선재하신 분의 주 되심을 역사 속에 선취하는 의미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심판 속에서 그 분은 동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초역사가 역사 속에 들어올 때는 심판 가운데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바로 초역사가 들어오는 자리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 되심이 심판 받는 그 현장에서부터 초역사적으로 선재하신 분이 자리잡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 아울러 주어집니다(4:25). 그 자리는 인간 왕으로 대변되는 느부갓네살 왕의 실패의 자리 심판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실패한 왕을 다니엘은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국에는 쫓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존재입니다(7-8장). 여기에 비해서 영원한 권세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7때를 지나서 나오는 위인입니다. 4:32 7때란 안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안식이 이제는 가나안 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70년간 안식을 갖는 것처럼 이제 언약의 구현체가 이방으로 진출함으로 말미암아 이방도 안식을 요구받게 되었습니다 70이레 라는 안식의 기간이 요구됩니다(9:24-27).

여기서 우리는 안식의 세가지 차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은 역사 안에서 안식의 의미는 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7+62+1=70 에서 7이란 질의 안식이 있으며 62라는 안식의 질이 있으며 남은 1이레 때 보여질 안식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 세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이방에서의 안식은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 차원의 안식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안식을 하실 때 언약적 근거가 된 그 고난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이 곧 이방이 안식의 근거로 주어지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황폐를 당하기 위한 성전 건립.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언약 즉 만유의 주가 되는 복이 어떤 과정이 요구되느냐를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대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성전 바탕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 됨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에 통치자인 이스라엘 왕의 실패의 자리에 가나안 땅을 안식케 하신(이스라엘을 추방함으로서) 그 분은 결코 이스라엘의 인간 왕이 아니라 다른 왕의 존재와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땅이 안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왕은 이스라엘의 왕의 죄책을 일임할 필요성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일임됩니까? 그것은 지금 포로 잡혀 온 다니엘의 운명을 통해서 미리 선취되어 나타납니다.

9장에서 이미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보았던 다니엘은 6장 다리오 왕 때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든지 절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왕이 신의 위치에 놓이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6:7-10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계속 전에 하던 대로 기도를 시행합니다. 이것은 이런 수난만이 인자의 나라가 도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인간이 차지한 왕의 자리에 앉게 됨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 인간이 신만이 차지하는 자리에 앉는 순간인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계시를 아는 이상 피할 리 없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상대자로서 언약 성취의 책임을 지고 있는 다니엘로서는 자신의 수난으로 인자의 나라가 현실화됨을 확증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다니엘의 세 친구의 수난과 약간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들어간 반면 다니엘의 사자굴 속에 들어가는 사실은 본인이 신의 아들의 모습을 가지면서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과연 사자들은 입이 봉해졌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은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6:22에 보면 나의 무죄함으로 사자 입이 봉해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장차 오실 인자의 나라는 바로 무죄한 자에 한해서만 영접할 수 있고 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현실에서 무죄한 자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장차올 인자를 내다보면서 지금 고난 속에 뛰어들어 인자의 지상의 자리를 내어 줄 줄 아는 자를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재림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십자가의 자리를 미리 마련한 것과 같습니다. 다니엘은 성전의 수난의 장래 모습을 내다보면서 그 수난에 미리 참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만 안식을 이루어 보고자 한 본래의 언약의 취지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부정함으로 가나안 땅에 안식을 이루신 그 방식 그대로 이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의 안식의 완성을 위한 새로운 인자의 언약이 상대자로서 새 장을 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문학의 핵심입니다. 역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역사 속에 그 부정의 이유를 초역사의 개입이 두었을 때에 이 두가지 과정을 상징적 역사 속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묵시문학입니다. 다니엘은 그 수난의 기간을 한 때 두 때 반 때로 잡고 있는데 (12:7) 이 기간은 3년 반으로서 남은 한 이레의 반 기간의 수난이 더욱 극심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3) 학 개

성전 건축이 선지자에 의하여 기초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 성전이 바로 종말론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첫 성전은 왕들에 의해 건립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지자들은 선왕들의 실수를 가지고 현 백성들에게 훈계하는 기능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깐 두 번 성전을 앞에 있는 성전 황폐를 고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면서 성전을 건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건립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그 과정을 통해서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포로 잡히고 성전은 파괴되었나를 통감해야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성전을 건축하지 않느냐는 여호와 하나님의 질책은(1:9) 결코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은 과거와 단절된 삶이 아니라 과거와 연루된 무언가를 해야될 필요성 때문에 귀환된 것입니다.

자, 그러하다면 그 무언가가 무엇입니까? 1:1에 보면 이 계시를 접수하는 지도자가 누구냐 하면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에게 선지자 학개가 나서서 그들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성전이란 모든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제사장과 관계 있습니다. 또 거리에 종사하는 자들을 왕이 선출했습니다. 따라서 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성전이란 이스라엘에게 있어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세가지 직능 중 왕직과 제사장직이 만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적이란 그 두 직을 결합시키는 임무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다윗언약의 영속성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살아남게 됩니다. 이것이 분리되어서 멸망이 왔습니다. 따라서 성전의 재건립은 분명 선왕들의 잘못으로 인해 와해된 성전을 포로 이후 이제는 그 잘못과 이유를 알고 있는 왕직과 제사장직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대신 회복하고 책임진다는 차원에서 성전을 건립하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정립됩니다. 단순히 과거와의 단절이나 연속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계속 존속되는 이스라엘의 의무는 과거 잘못을 회복을 위한 유예기간임을 성전을 지으면서 통감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은 왜 모든 것을 無로 돌리지 않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아까워서 일까요? 왜 재차 기회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앞으로 잘못해도 또 계속해서 기회는 주어질 수 있겠네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성전을 통한 언약의 유효성과 영원한 속성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전이 아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짓는 성전은 분명히 전에 지었던 성전보다 초라하게 짓습니다(2:3). 이것은 하나님께서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이전 성전에 나타났던 그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으로 나타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2:9). 영광의 순서로 따지자면 사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옛 성전이 훨씬 훌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러 초라하게 지으시라 해놓고 오히려 영광이 더 크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현재 있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성전에서 일어날 장래의 일로 결정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 장래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현재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종 스룹바벨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23).

그렇다면 여기서 여호와의 종이 할 일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전을 초라하게 지어 놓고 그 초라함의 의미를 알고 그 초라함 속에서 장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안목을 백성들에게 심어 줄 책임을 진자가 바로 현재 여호와의 종이 할 일입니다. 초라한 성전,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 있을 동안에 이방 사람과의 접촉에서 부정해졌음을 나타내는 증표로 등장된 것입니다(2:10-14). 겸손하게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고 그 부정됨 속에서 그 마지막 세상이 열방이 심판 받는 그날을 고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 재건립에 담겨 있는 구속사적 의미입니다(2:21-22).

스룹바벨과 솔로몬, 다같이 여호와의 종이지만 앞으로 새로운 성전에 나타날 왕은 솔로몬식이 아니라 스룹바벨식의 종의 형상이 띠게 됩니다. 그 분은 자신의 불결을 수긍하는 겸손한 종이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성전에 나타날 영광은 오히려 솔로몬의 1000번째 후의 영광보다 찬란하고 놀라운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4) 스 가 랴

스가랴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천사의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천사를 배후에서 조정하시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과 상대하시지를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대상으로서 인간에 대해 용납과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그들과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활동의 주도권이 천사에게로부터 시작될 때는 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에 대한 미흡성 때문에 고발적 성향이 강합니다. 묵시문학 형식으로 나타난 계시문학의 특징은 항상 역사에 대한 불만과 거기에 따른 초자연적인 조치에 의하여 창조 질서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만군의 하나님에 의한 역사에 대한 심판현상입니다. 역사 속에 담겨 있는 옛창조의 정신이 언약의 붕괴 때문에 자체적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징조입니다. 그 때 바로 천사는 분주하게 인간 역사 속으로 개입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잦은 왕림 자체가 기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 주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옛질서 붕괴 속에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빈번한 활동을 한 마디로 말해서 옛질서 안으로 새질서의 개입의 징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와서 이 지상에 남기고 하는 일이란 옛질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심어줄 인물선정 및 그와의 관계 유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묵시 문학에 있어 특이하게 천사의 활동이 강조되는 것은 역사에 대한 2중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두 차원의 안목이 있을 수 있으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축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둘 사이에는 세대적 긴장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마치 천사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 사이와 같이 묵시 문학에 나오는 상징언어는 역사의 근원에 가장 근접한 표현 방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즉 질서가 와해되고 다시 그것이 새로운 사상을 근거로 결합될 때까지 그 언어는 역사 언어이면서도 역사가 제공한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양식에서 사상들이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온전한 것이 나타날 때까지 그 스타일이 무엇 때문에 역사에서 이탈해야만 하고 오는 세계에 종속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그 배후의 기능에 관심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너의 열조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언명으로 시작되는 스가랴 예언은 (1:4) 역사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현재 이스라엘이 처하고 있는 위치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재정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인간대 인간만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원을 두고 창조사역에 깊숙이 개입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거부하는 쪽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향하여서는 무어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천사들을 파견하여 역사의 질적의 변개를 시도하고 앞으로의 역사전개에서 어떤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에 관여하신 하나님의 자기 권리가 제대로 표현되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에 천사를 개입시켜 사역하시는 방법입니다(1:16).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이방인들에 대한 복수는 이제 천사가 담당하게 됩니다(1:15/1:21).

이러한 천사의 개입은 성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주게 되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역사적 사건에서 의미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뜻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 뜻들은 이미 역사 한 복판에서 수난과 거부를 당한 경험들이 이제는 다른 질서 속에서 그 가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2:2). 역사 속에 들어와서 역사를 훼손시킨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은 사탄에게 돌리고 (3:2) 한 면은 바로 이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책임을 통감하고 그 책임을 완수한 언약의 상대자에게만 동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 철수 작업에 천사가 동원되는 것은 천사의 존재가 역사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초역사의 역사 개입을 그런 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자로서 두 사람을 꼽는데 두 메시야 즉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러한 틀은 다윗언약의 틀에 일치되고 영속성을 갖게 하는 형식입니다(3:6-7). 이 두 감람나무의 세움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실패한 자로 되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일입니다(4:6). 이처럼 스가랴에 나타난 계시는 역사를 인류 역사 이전의 존재자들을 동원시켜 (천사들)역사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그 방법은 그 역사를 책임지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활동과 사역을 통해서 역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통해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취하게 됩니다. 스룹바벨이 짓는 하나님의 성전은 결코 성전 존속을 위함이 아니라 역사 종결의 의미를 지니도록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역사종결형 성전이기 때문에 이 성전의 무너짐이 곧 역사의 무너짐이 되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눈이 그 만큼 부정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은총의 절정순간을 동시에 나타냅니다(4:9). 역사가 종점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역사가 형성되기 전 초기에 나타난 상징적 언어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보입니다. 이것은 결코 역사를 이대로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상징이란 역사와 비역사를 이어주는 이음새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비록 역사적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들은 장래의 비역사적 실체를 역사적 실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종료되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은 다 이루고 가야 합니다. 역사는 그 책임을 다 완수해야 합니다. 저주의 하나님의 말씀이 시날 땅 쪽으로 날아가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 그 약속이 깨어졌을 때에 그 책임을 언약을 깨뜨린 쪽에서 책임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역사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언약의 제일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다윗언약이며 곧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이 평화한 가운데 완성의 의미로서의 안식하신 그 산물 즉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6:13-15). 모든 것을 성전으로부터 새로 시작합니다. 역사의 종결도 성전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성전이 완공될 때 인간의 역사도 완성을 보기에 더 이상 진행될 필요가 없습니다. 첫 번 성전의 실패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약속(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7:6-14).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인간을 찾아오겠다고 하십니다(8:3-8). 금식의 날이 바뀌어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8:19). 이는 오직 하나님 쪽의 선사의 결과입니다(8:21). 그렇다면 그 은혜의 날이 있기 전에 먼저 정리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즉 은혜 아닌 것은 이 지상에서 치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를 자기 공로로 인정하는 주변 국가의 사고방식에 대한 심판의 선행입니다(9:15). 이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석같이 반짝입니다. 땅에서 (9:16) 그러나 여기에도 각가지 수난이 대기하고 있으니 진정한 목자가 등장할 때에 거짓 목자들과 (11:17) 그리고 유다의 두목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는데 그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찔림을 사람들이 친히 보았기 때문입니다(12:10). 그러나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샘이 열리고 아무리 환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3분의 1은 남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13:9). 마지막 환란의 때가 찾아오고 (14:1-2) 있지만 그 날에 여호와의 발이 예루살렘에 서므로 (14:4) 모든 것이 끝이 됩니다. 그날에는 빛도 없어지고 (14:6)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14:9) 열국들도 와서 여호와를 섬기며 (14:16) 그 외의 열국들은 재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14:18) 그날에는 모든 것들이 정화되어 거룩해지고 심지어 말방울까지 성결해 질 것입니다(14:20).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스가랴의 계시를 듣는 순간 우리가 도저히 성전 지을 자격이 못되는 인간들이지만 이렇게 짓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실과 정의로만 되어진 일임을 통감하고 (8:8) 결국 성전 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주시게 된 그 배후의 하나님의 일관된 정성에 기대를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왕 되심으로 인하여 다시는 실패나 멸망이 없는 그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스가랴의 외침의 목적이었습니다.

 

(5) 말 라 기

말라기에서 주목을 받는 점은 아브라함 언약에서부터 모세 언약, 다윗언약, 전부를 차례로 엮어 이스라엘(언약 상대자)에게 철저히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책임을 물음으로서 얻어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념책에 기록될 자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3:16-18). 결국 말라기에서 주제로 삼는 것은 이스라엘을 둘로 구분하기 위하여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1:2). 이삭언약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한 자신의 의도는 구원이란 인간 그 자체에 어떤 요건도 고려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시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시는 모습입니다.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길 수 있는 자란 (3:16)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는 바로 이방나라에 대한 심판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언약의 영속성에 (2:4) 이스라엘이 눈이 열리기를 고대해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날이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변함없는 언약뿐이며 그 언약이 소개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1:6/1:11/3:16). 그러면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혔단 말입니까? 그것은 모세언약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적 구원을 찬양하고 그 구원의 의미를 항상 확인하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하는 것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제사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보기에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평가하는 것에 엄청난 견해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차는 어디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일까요? 모세언약을 준 것은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함이지 그들의 제사 드리는 종교적 기능을 test 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2:5).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죄악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모세언약의 본래의 의도를 모르고 있다는 소치입니다(2:6). 이것은 곧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한 셈이 됩니다(2:11).

말라기에서까지 제사장직의 영속성을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축복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마치 부부가 혼인한 관계처럼 결속을 한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공의의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2:17). 다윗언약에 의해 세워진 성전은 결코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충만케 하기 위함이었기에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성전주로서 심판하는 것입니다(3:2).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하면은 원래 모세언약이 추구한 그것, 고아와 과부에 대한 자비를 베풂으로서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로 되었음을 생활을 통하여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3:5-6). 예를 들면 십일조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바로 이웃을 위한 십일조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음에 대한 소치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악인과 선인의 구분은 모세 언약의 형식적 시행이 아니라 여호와 이름의 정신을 이 땅에서 구현하는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4:4). 장차 올 무서운 여호와의 날은 이방이든 이스라엘이든 만군을 지배하는 만군의 여호와로서 심판하시는데 (4:1) 구원의 근거는 바로 모세언약에 대하여 회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4:4-6).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어떤 특정 민족에게 구원에 특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언약에 참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면 누구나 저주받을 수밖에 없음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성전이 멸망시킨 성전으로 전환된 것은 (3:2)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에 대한 고수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 있으며 (4:5) 온전한 자를 책에 기록하는 것도 사실은 이 언약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4:16). 하나님의 율법 고수 의지는 십일조 강조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3:10). 이 모든 것과 땅의 회복은 결국 언약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3:12/4:6).

따라서 언약 수행은 다시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의 은총입니다(1:3).

 

(6) 예 레 미 야 애 가

백성들의 심판과 파멸에 대한 심한 애도가 가득 차 있는 책입니다. 이름다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땅바닥까지 떨어졌으며 그것도 유다가 그렇게 신봉한 여호와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졌다는 사실이 선지자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2:1-2). 우리는 여기서 종말의 성격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종말에는 감히 성소에 함부로 들어 올 수 없는 이방인들이(비언약인들) 성소를 훼파하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당하며 (2:2)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말에 관한 묵시를 거절하게 되며 (2:9) 그들은 또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다(4:13).

이것이 종말 때의 실상인데 여기에 대하여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고 통곡하고 있습니다(1:18/2:1-3). 그리고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징벌을 선지자 자신에 대한 징벌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언약 백성과 자기와 동일시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말로 통해서 보았을 때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이로서 밝혀지는데 거짓 선지자의 특색은 죄와 언약과의 관련성이 희박하다는데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 모든 징벌이 다 유다 각자의 죄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며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악의 소산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4:6/3:39). 오히려 이방인들이 이 광경을 부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2:17). 하나님의 심판 때는 기도도 소용없고 긍휼과 자비도 없습니다(3:40-44).

그러면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4:22에서 선지자는 포로 잡혀가고 아름다운 성전이 훼파됨을 인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다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성전을 더럽히고 언약 백성의 징벌을 비웃은 이방민족이 심판을 받게 될 때 희망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성전 파괴를 통해서 성전 개념이 영원성이 지닌 의의가 더욱 부각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5:18-19). 비록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이방인들에 짓밟혔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날 참된 성전은 영원히 하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약이 깨어지고 그 순간 지상에서는 종말이 시작되어도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 곧 언약 백성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그들과 함께 울어 줄 수 있고 그들의 죄과를 자기 죄과로 인정해 주는 선지자의 존속이 바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을 끝까지 돌아보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1:18-22/3:1-18). 주님의 성실과 자비와 긍휼은 이와 같이 죄악된 백성 때문에 주어지게 된 깊은 슬픔과 통곡 속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3:22-28). 거기에서 선지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식과 긍휼을 제공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멍에를 대신 짊어질 때까지 우리는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되어 있습니다(3:26-28).

따라서 벌받는 자는 하나님께 전혀 원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3:39). 원수들은 이제 선지자까지 조롱하고 있습니다(3:52-66).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수해 주십니다. 이것도 또한 종말의 이어날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말의 현상을 한마디로 울음과 고난으로 정리할 수가 있고 그 통곡과 고난이 곧 언약 백성을 위한 의인의 고난일 때 언약백성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여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 잡혀가고 망해버린 유다를 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체험담이었습니다. 곧 그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다른 면이기도 합니다.

 

(7) 에 스 더

파사시대 때 아하수에로 왕 치하에 있었던 일로 통해서 부림절의 내력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부림절이 생기기까지 유대인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기로에 놓인 절박한 경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공격하는 쪽이 오히려 자기가 설치한 덫에 자기가 빠지게 된 경위가 어떤 경위였습니까? 언약의 백성은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작용되었음을 다시 한 번 역사와 만천하에 공개한 사건이기도 한 것이 부림절 사건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을 공략한 그 원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일단은 하만과 모르드개의 싸움처럼 보입니다마는 모르드개가 대표한 것이 언약의 민족이라면 그러면 하만을 대변한 것은 어떤 집단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하수에로왕이 하만과 같이 유대인의 적으로 포함될 수 없음을 봅니다. 일단 중립화된 하나님이 쓰시는 종에 불과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부림절의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 보다 우수하면 뛰어나며 월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애초에 그렇게 위대한 민족이 별거 아닌 민족에 잡혀가지 말게 하시든지 잡혀가더라도 기적적으로 금방 탈출시키시는 것이 하나님다운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포로 귀환 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렇다면 이들을 예루살렘에 귀환시키지 않고 남겨 두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출애굽을 주시는데 있습니다. 부림절은 포로 이후에 있어 유월절과 같은 맥락에 서 있습니다(7:3).

언약의 민족이 이방민족들과 함께 섞여 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된 것은 배후에 하나님의 어떤 일관성 있는 법칙이 작용되었는가를 찾아 볼 때에 하만의 잘못이 드러나고 유대인 즉 선택민족의 본질이 밝혀 질 것입니다. 하만의 잘못은 모든 사람은 다 한가지라는 사상을 지녔습니다. 3:2에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아니한 것을 빌미로 그 벌의 적용 그의 민족 전역에 확산시키는 이유는 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않고 너희들만은 특별나냐 하는 데에 대한 하만의 도전이었고 그 도전은 단지 아각 사람대 유대 사람의 대결이 아니라 하만이 왕의 권세까지 끌어 당겼기 때문에 결국 세상 나라로 지칭되는 바사 나라와 유대인의 대결의 양상이 되었습니다(3:12-15).

여기서 유대인은 새로운 스타일의 출애굽을 기대했는데 그것은 전세계를 한 민족화 한 종교화하여 나아가서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고자 하는 비언약 계통의 사상의 전수를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으로 저지하고 언약의 유일성과 그 가치성을 드러내기 위한 출애굽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단지 특정 지역 내에서나 특정민족만의 종교가 아님을 이미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에서 실습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선택된 이유도 바로 전세계를 향하여 오직 우리만이 복의 근원이 됨을 만 천하에 공개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이는 참된 선택된 민족이 아닌 것입니다(4:13).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될 때 민족과 종교는 고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2:20). 그것은 이스라엘 여자가 이방나라왕과 혼인하는 것이 율법상 옳지 않지만 유대인을 통해서 여호와만이 전 세상에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종교와 민족에 대한 발설은 유보되는 것입니다(2:20/4:14). 이것이 출애굽의 재판이 되는 것은 승리라는 것이 누구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언약 특유의 법칙 때문입니다(4:16). 마치 어린양의 희생이 출애굽의 근거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에스더라는 왕비의 희생이 바로 온갖 민족이 같이 덮여 살아가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선택의 기능은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기념일이 바로 부림절입니다. 곧 언약민족의 특유성의 상실로부터의 건짐이었습니다. 에스더가 두 번씩이나 잔치를 배설을 요구하고 난 뒤 하만의 처벌을 시도한 것은 왕의 사명과 하만의 목표가 일치되지 않음을 왕이 스스로 알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왕이란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징치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져서 (6:1-9) 비로소 에스더는 자신의 소신을 피력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만의 처벌과 파멸은 하만적 사고방식의 영원한 실패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결코 어떤 시대 어떤 상황 속에서 자기 언약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을 보였습니다.

시대의 모든 흐름과 시세는 전부 이스라엘의 하나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 있어 거룩이란 형식 차원을 넘어서 성속(聖俗)의 차이가 얼마나 언약에 기대를 거느냐에 달려 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8) 에 스 라

1:2의 하늘의 신 여호와라는 표현에서 에스라의 신학의 개성이 분명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기간동안 무엇을 새롭게 이해했느냐에 대하여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를 하늘의 신으로 언급하고 고레스를 다윗과 같은 큰 왕의 맥락에서 소개한다면 (5:11-13) 바로 에스라에서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의 새로운 표상을 다윗과 이방왕 고레스를 연결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를 마련한 사건으로 바벨론 포로사건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 성전언약을 분명히 고수하면서도 그 성전의 위치가 예루살렘에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1:3/ 4:24/ 5:2,16/ 6:3,12,18/ 7:15,17,27) 다리오왕과 왕자들에게도 기도하게 하는 대목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요(6:10)?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언약의 존속이 결코 국가 이스라엘만을 위한 언약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도 성전을 짓는 의미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본질이 단순히 과거에로의 회복만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3:12).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에스라가 이러한 성전 건축을 찬양하는 것은 다윗언약의 파괴에서 새로운 다윗언약의 회생을 출애굽 시절에 견주기 때문입니다(3:4). 여기에는 단순히 옛사상의 전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담겨 있는 다윗언약으로 변신되었기 때문입니다. 형태상으로는 다윗언약과 영속성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상대로서 유다와 베냐민 족속만 성전재건에 종사하게 됩니다(4:3).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므로 다윗의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합니다(5:11). 그러나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의 의미가 여기에 가미됨으로 말미암아 (에스라 2장은 마치 민수기를 다시 보는 것 같다) 옛언약 속에서의 탈출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러면 옛언약의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에스라에서는 어느 특정인을 왕으로 대우해 둔다든지 이상(理想)화한 점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점은 지난 열왕들의 파선된 신앙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등식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죽했으면 이방나라의 비호를 받도록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이 다시 강조됩니다(6:18). 진정한 다윗언약의 계승은 모세 율법에 대한 진실된 순종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짓고 난 뒤 에스라가 와서 율법을 교수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알게 된 것은 이방 왕이든 이스라엘 왕이든 결코 다윗언약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돌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 아니라 언약을 고수하기 위한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집결이 되며 성전을 위한 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라의 성전이 바사 나라의 비호 아래에서 건립됨이 이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에스라가 예레미야의 역사적 종말론의 신봉자와 계승자로 등장함에 따라 (1:1)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새언약을 모세 율법에 의거하여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7:6/7:11). 즉 율법을 통하여 다윗정신의 재건이라는 측면에서 종말론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이 정신만이 대적을 이긴다고 본 것입니다(8:31).

율법의 정신은 오직 레위지파를 정화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9:1-3). 과거 그들의 죄악이란 이방여인들과의 연합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정화는 바로 레위인들과 온 유다인들이 이방여인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것으로 초점이 모아집니다(10:10-11). 아마 이 사실을 솔로몬이 이방여인과 관계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느헤미야 13:26). 다윗언약이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언약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을 다시 포로에서 해방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독특한 사명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쨌던 간에 다윗언약의 완성은 율법의 실현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짐을 통해서 다른 곳에 전가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의 실체는 누군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역사적 종말론입니다(1:1/역대하 36:23). 그래서 에스라는 역대기 신학의 성취 부분이기도 합니다. 소위 역사적 종말론의 실체와 현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셈이 됩니다.

 

(9) 느 헤 미 야

에스라가 단체적인 귀환으로 성전신축의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개인의 기도와 신앙심에 의거하여 동기가 주어지게 됩니다(1장). 그 동기란 다름 아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던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 장소에 다시 모이게 하시겠다는 모세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1:7-9).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는 필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죄한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사고방식은 이미 성전이 들어선 경우에는 그 성전이 그 자리에 존속되는 유일한 방도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지 아니한 경우에 한한다는 원칙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왕에게 가서 성전을 중건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2:5).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왕이 성전언약에서 가지는 위치는 무엇입니까? 다윗언약에서의 왕의 자리에 누가 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방왕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공동체입니까? 그것은 에스라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언약에 출애굽 사상이 부가되면서 왕의 자리에는 이방왕이 점하고 있지만 언약 상대자는 귀환되는 이스라엘로 바뀌어서 옛 다윗언약에서 새로운 다윗언약의 출발을 선언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방 왕의 결재를 득 하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하시는가 하면은 제2의 출애굽에서 그 다윗자리에 오를만한 메시야가 올 때까지 이방 왕도 하나의 여호와의 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막강한 힘을 소유한 이방 왕을 배후에서 부추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고 성전을 짓게 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 율법준수에 실패한 그 실패를 우리들로 하여금 회복케 하여 못다 이룬 다윗언약을 우리들 손으로 성취하기 위한 특별섭리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이 그렇게 중요시된 것입니다.

성전이 존속하는 한 여호와의 이름이 임재하는한 옛날 여호와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에서 또는 홍해를 건널 때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든지 기대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희망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성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고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1:10). 성전을 떠난 여호와 이름의 임재는 생각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의 추진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재하고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이방인들의 조롱과 방해공작과 놀림 그리고 현지 백성들의 원망 (5:1) 에 유독 느헤미야는 몸소 헌신의 본을 보이면서 대처해 나가야 되었던 것입니다. (5:18) 드디어 52일만에 성전이 개축되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윗언약을 중도 포기하시지 않음이 드러난 것입니다(6:15-16). 그리고 학사 에스라를 통하여 율법대로 그래도 시행토록 하고 있습니다. 이방혼인을 금지시키고 안식을 준수하고 십일조를 부활시키고 제사장직을 정비 회복케 합니다(13장/12장).

이 모든 정책은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성전을 존속케 해 주신데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언약백성으로서의 주체성을 다지는 의미에서 그들은 언약서에 주거자의 수대로 인을 칩니다. 그래서 제2의 출애굽을 확실케 실감시킵니다(9장). 그들은 여기서 새로운 감동을 가집니다(12:45/13:2). 이것은 바로 창세기 2:1-3까지의 복의 근원이 그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13:3)

우리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모세 율법을 도외시하고 일어날 수 없고 오직 그 율법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초 역사라는 것도 역사를 도피해서 발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의 영원성도 역사에서 이루어져야 될 하나님의 뜻이 만족하고 달성한 그 기초 위에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0) 역 대 기

역대기는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주며 또 그 이후 다윗언약을 어떤 식으로 유지 계승해 나가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책입니다(역대상 3:1/6:15/9:1). 역사를 이해하는데는 우선 역사가 한 법칙 아래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그 궤도를 달린다는 전제를 하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역대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역대기는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귀환한 입장에서 볼 때에 이스라엘은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께 종속된 민족임이 무엇인가를 나타내줍니다. 그것은 창조언약이 아니라 다윗언약을 여호와와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접촉점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인간 쪽에서 알아서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은 완전 차단이 된 셈입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의 본질을 역사상으로 펼쳐서 보여 주자는 것이 역대기에 담긴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사실상 다윗언약에로 수렴됩니다(역대하 30:6). 그 언약도 다윗언약의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도 다윗언약을 해석하기 위한 여호와의 조치였습니다. 다윗언약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설명해 주는 언약도 없습니다. 이 다윗언약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은 바로 그 언약의 상대자인 다윗이라는 인물의 우위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분명 제2의 모세와 같은 존재로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모든 역사가 마치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경배가 어떻게 해서 다윗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역대기 사락자는 다윗의 영웅들, 그의 戰士들 (대상 11:27), 엘로힘의 법궤를 다윗이 기럇여아림에서 그가 여부스 족속에게서 뺏어 예루살렘성으로 옮겨간 건, 아론파와 레위파 아래의 제의 질서, 제의제도(대상 13:15/13:23-26/28:20) 다윗이 블레셋족속, 모압족속, 아람족속, 에돔족속, 암몬족속, 아말렉족속, 기타 족속과 전쟁을 수행한 것(대상 14:8/18:1/18:19) 그의 궁전 건축(대상 14:1) 그 자손들의 증가(대상 14:4) 그리고 군대 내지 정치적 조직(대상 18:14/27:1)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을 경건한 왕으로 여기고 있고, 그래서 그가 성전의 건축을 의도하고 준비를 했으며(대상 17:1/21:18-22/28:6-29) 그리고 찬송시와 찬송의 기도를 드린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대상 16:7/17:15/29:9-20). 그러나 다윗의 도덕적 과오, 다시 말해서 그의 왕조를 마침내 몰락으로 결정 짓게 하는 운명을 초래하고 또 그의 가족의 비극을 일으키게 한 그의 범죄는 엄폐됩니다.

다윗의 유일한 죄는 역대기에 있어서는 백성을 계수한 일인데(역대상 21장) 그것도 물론 힘껏 감소코자 시도한 흔적과 노력이 돋보이게 서술해 놓고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다윗이 믿음의 연단을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 나아가 사탄론으로 발전시켜(대상 21:1) 그 사탄을 다윗의 회개로 기도로 말미암아 극복했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서술들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세워주신 와 즉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야말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자로 인정받는 유일한 권위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왕을 통한 구원이 다윗 때에 와서 그 실현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앞으로의 모든 구원의 form은 다윗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택한 왕의 의한 구원입니다(대상 16:9). 이제부터 메시야란 항상 다윗 같은 인물상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왕이 있는 한 이스라엘은 존속하고 왕이 정통성을 유지하는 한 희망은 열려 있는 것입니다(대상 17:20). 그래서 후대 왕들은 모든 잘못은 이 다윗형에서 이탈되었지 때문에 생긴 결과였습니다(역대하 6:6).

성전 중심이었던 열왕기 신학과는 달리 역대기 신학은 다 같은 다윗언약이지만 성전 쪽 보다 다윗이 가졌던 그 왕이라는 지위 중심으로 언약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가진 왕이 일어나는 날이면 언제든지 이스라엘은 다시 희생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히스기야나 요시아 같은 왕이나 이방왕 중에서는 고레스 같은 왕을 두고 이야기함) (역대하 17:3/21:12/32:16) 모든 선지자들도 바로 자기대의 왕들을 다윗같이 되기를 위하여 간한 사람들입니다(대하 12:15/13:22/20:34/33:19). 이와 같은 왕 중심의 언약체계는 언약의 인격화로 전환되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또 비록 나라가 어떠한 수모를 당하고 있다할지라도 이방왕 고레스를 다윗같이 들어서시는 하나님의 일관성에 (역대하 21:7) 기대를 걸어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적당한 때에 나타나 이스라엘을 건져주기 때문입니다(역대하 6:42). 다윗에게 와서 모든 언약을 하나로 정리하신 하나님은 비로소 하늘이 땅의 기도를 들으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역대하 30:27). 다윗이 죽어도 다윗가문이 영속된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과 성전을 언제든지 보존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이점이 다윗언약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다윗이 아니라 다윗가문의 영속성이 중요합니다. 왕이란 다윗이 아니라 바로 다윗가문을 주도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윗 같은 왕으로 모신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지상에서의 활동내용은 다윗 같을 것입니다. 온전히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의 모습 말입니다.

 

 

27. 구약을 끝내면서

 

구약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두 가지 통로로 연결되는데 하나는 엘로힘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관계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이 두 가지 사실로 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 하나님은 형상을 주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엘로힘은 결코 죄악이나 무질서를 야기시키지 않았다. 창조한 것은 모두 다 보기에 질서 정연하며 아름다운 것이며 좋은 것이다. 하나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안식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지금의 현 우주는 어떠한가? 무질서하며 죄악으로 가득차 있으며 음울하며 혼돈스럽게 되어버렸다. 이 모든 되어진 일의 책임은 바로 다스림과 통제의 능력과 권한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이상이 창세기 1장-4장까지 기록의 목적입니다. 인간의 고향이요 풍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땅에서의 인간의 고생과 죽음, 시기와 쟁투는 낙원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풀어지고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과연 인간과 상관없이 존재했더란 말인가? 영생이란 과연 인간이 넘다 볼 수 없는 것인가? NO! 그것들은 모두인간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었고 실제로 살고 있었던 배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낙원이 아니라 저주받은 땅이란 말입니까? 이것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에 도전한 인간에서 기인된 결과입니다. 여호와는 인간과 생령의 관계를 지녔습니다(창세기 2:7). 그런데 그것이 죽음의 관계로 전환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생령이 아니라 흙이 된 것입니다(창세기 3:19). 아니, 그들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여호와께 대들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라 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6) 이스라엘에게서의 율법의 지닌 의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째서 죄인 된 자냐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율법밖에 없습니다. 엘로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질서를 형편없이 망가트린 자들의 무리가 곧 인간입니다. 고귀한 신분인 엘로힘의 형상을 저질화 있고 그 위신을 추락시킨 것도 인간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다스리고 보존유지 하고 팽창시켜 나가야 될 책임이 있는 인간이 오히려 그것을 죄악을 확산시키9는 기능으로 전략되고 말았습니다. 곧 엘로힘 형상은 죄를 짓는 도구가 된 셈인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제거되고 새로운 형상으로 대체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하기를 여자의 후손을 제시합니다(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은 인간의 배후세력을 척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고난을 수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드디어 이러한 약속의 등장은 인간세상을 둘로 나뉘어놓은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여자의 후손의 등장은 분명 그 근거가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에 대한 신실함 때문에 나타나게 되고 뱀의 후손의 등장은 뱀의 추종 세력으로 여자의 후손에 도전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한 계속 이 땅에 등장될 것입니다. 어느 단체가 뱀의 후손이며 어느 단체가 여자의 후손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에 종속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창세기 4:26) 여호와의 약속에 온통 기대를 모으는 자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들, 여자의 자녀들입니다. (창세기 4:25) 이로서 아담은 자신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아내 계통으로 생명의 정보가 전달되기에 그 약속을 신뢰하고 아내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는 흙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약속의 전달자로서 여호와의 구원 사역에 참여자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가죽옷으로 입히신 그 상태로 땅으로 추방시킴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에서 여자의 후손만이 가지는 특색을 지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가려주심입니다(카파르 사상). 그러면 그들의 자녀들 중에 누가 여자의 후손의 맥을 잇게 됩니까? 인간들 쪽에서 어떤 조건을 갖추면 여자의 후손의 반열에 들어 설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선택사상이 등장됩니다. 인간 쪽에서의 조건이나 행위에 영향을 받고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일방적 권리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벨과 카인 중에서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아무런 조건없이 아벨을 선택한 것입니다. 카인에 있어 잘못된 점은 여호와의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반발하고 나선 데 있습니다. 그는 안색이 바뀌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자비로운 일방적 선택을 이해 못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 죄의 세력 안에서의 자기 한계가 이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가 됩니다(창세기 4:7). 죄인 된 상태에서는 선악을 알게 되었으므로 (창세기 3:22) 무엇이든지 선악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불합리한 일은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무조건 선택입니다. 아무리 이해할래야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함 없이 노력 없이 사랑과 칭찬의 대상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죄의 근원이요, 원천입니다. 사탄도 이 점을 주장합니다(욥기 1:9/스가랴 3:2).

그러나 이 선택사상만이 이스라엘 민족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질을 이룹니다. 선택한 자만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언약 속으로 들여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모든 옛언약, 새언약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최고의 걸림돌로 작용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외인의 순교적 차원에서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한 자의 자격으로서의 십자가이기에 기존의 하나님 개념에 중대한 변혁을 강요케 합니다. 바로 언약 속에 놓여 있는 인물들은 언약 밖에서 볼 때에 이런 특성을 소유한 자로 보이게 됩니다. 언약 속에 있는 자들이 여자의 후손의 자격으로 고집하고 내세우는 것은 여호와의 심판(공의)과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자비로운 사랑의 건져주심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구성하게 하는 원줄기입니다. 따라서 그들만이 이해하는 여호와의 사역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형상입니다.

엘로힘 형상이 다스리고 정복하는 신적인 요소가 기능 면에서 보여진다면 여호와의 형상은 그 기능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기능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타락된 엘로힘 형상을 제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복이 등장됩니다. 타락된 엘로힘 형상으로 지배받고 다스림 받고 정복 받는 피조세계를 이 새롭게 등장한 복으로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축출하게 되고 배타적인 것이 되고 이 둘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생기고 긴장이 고조됩니다. 기존이 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복의 도입이 요청되었다는 것은 기종의 것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도 아울러 나타냅니다. 그들의 공간, 그들의 역사마저 여호와로 인하여 정죄 당하고 심판 받습니다.

종말은 새로움이 등장될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즉 여자의 후손이 역사상에 나타날 때 그것이 곧 종말입니다. 새로운 복이 등장으로 새로운 땅 새로운 안식 새로운 형상으로서의 인간존재, 새로운 낙원이 이미 예고됩니다. 여자의 후손의 명칭이 어떠냐 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 시대마다 인간의 한계와 죄악이 하나씩 폭로될 때마다 붙여집니다. 어떤 때는 만국의 아비로서 아브라함) 어떤 때는 아들로서(이삭 때) 어떤 때는 맏이로서(야곱 때) 어떤 때는 主로서(요셉 때) 어떤 때는 목자로서(모세 때) 어떤 때는 제사장으로서(아론 계통으로) 어떤 때는 신이 임한 자로서(사사 시대 때) 어떤 때는 선지자로서(사무엘 계통) 어떤 때는 왕으로서(다윗 때) 어떤 때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솔로몬 때) 어떤 때는 人子로서(다니엘 때)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호칭은 전부 언약상대자로서의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무능과 부족과 연약과 죄성을 노출시킬 때 그것을 커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낮추심이 표현되면서 등장되었고 인간의 죄성을 대속하기 위한 조치로서 나타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호칭과 명칭 자체로서 이미 여호와의 형상이 무엇이며 여호와께서 이 지상에 남기고 지나가는 것이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대신 죄책을 담당하는 희생이 수반되는 요소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누락한 언약은 언약이 아니라 통고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은 이러한 여호와의 형상에 참여되기 위함이지 통지나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사역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와 형상으로서 땅을 점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선택을 바로 이해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택이 자기를 위한 선택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여호와께서 이 땅에 자신의 언약을 내려놓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에베소서 1:4).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제일 오해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면서 이스라엘로 자부했던 것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이었으면 여자의 후손의 사상을 언약 안에서 충분히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실패는 사실상 우리 전 인류, 아담후손의 실패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 자리에 섰다 할지라도 성공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다윗도 스스로 그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여호와의 종은 과연 누가 될 수 있습니까? (이사야53장) 누가 아담의 죄를 딛고 그 자리에서 승리의 노래를 외칠 수 있습니까? 구약은 다시 올 다윗의 후손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구약, 그것은 하나님의 이 땅에 대한 간섭하심의 기록이었습니다. 방관 하지시도 아니하시고 외면하신 적도 없이 항상 이 땅이 정화되기를 소원하신 그 노력의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 홀로 다하셨고 하나님 편에서 늘 계획안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거기에 대하여 얼마나 브레이크를 걸었던가요!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늘 아파했고 고민하셨습니다(창세기 6:5-6).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무릎을 늘 세우시고 조금씩 무리없이 자기백성이 너무 다치지 않게 긴장하시면서 일을 추진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발견코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성의를 가지고 일하시게 된 기본방침과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 오직 하나를 위해서 일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그 하나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꾸 자기이름을 위하여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그 이름에 담긴 비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것을 피조된 형상과 극한 대조가 되는 오직 하나님만의 형상을 이 지상에 남기는 뿌리라 여기고 그 가설을 기초로 하여 구약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어떤 식으로 인간 세계를 정화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 방법은 정화 대상이 어떤 요소와 내용으로 되어 있느냐에 연관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사인 동시에 모세의 관심사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만난 인물은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출애굽기 3:2). 그분은 여호와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나중에 이 신의 이름이 홍해라는 죽음의 한계까지 뛰어넘게 만듦을 알게 됩니다. 모세에게 있어 이 여호와의 이름이 지닌 본질은 홍해바다의 갈라짐을 통해서 기존 신에 대한 정죄 및 고발의 기능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자 만이 해야하는 여호와 신에 대한 특별한 신앙고백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때 까지 자신들이 애굽에서 알고 있던 기존의 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신을 찬양해야 하며 오직 그 신에게만 경배의 대상이 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호와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기존의 신관과의 대비로서 이 작업을 수행합니다. 즉 여호와만이 가지는 구속의 특이성을 신이 보편적 창조성을 전제로한 언어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즉 구속과 창도는 동이란 차원에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홍해의 갈라짐에서 확인된 바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순서는 쉽게 밝혀집니다.

신들의 보편적 창조성안에 이미 구속의 내용이 담겨 있음을 소개하면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서의 엘로힘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그 창조의 내역은 곧 무질서한 세계에서의 질서의 세계로의 전환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구속에 관한 신앙이 창조에 연결되면 그런 고백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창세기 1:2) 홍해를 경험한 자만이 그 세계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신들의 (창세기 1:26의 우리) 창조는 결국 이스라엘의 구속까지 연결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데 그 창조의 최정점은 신들의 형상을 남길만한 피조물을 창조하는데 있었고 그래서 생긴 것이 사람이며 그럴 때 비로소 신들은 안식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목적이 애초부터 어디에 있었나를 밝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피조세계에 신들의 형상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형상은 바로 어떤 기능으로 나타나는데 정복하고 다스리는 은사를 말합니다(창세기 1:26-31). 거룩이라는 개념도 (창세기 2:3) 피조세계에 담긴 하늘의 질서체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만이 피조세계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이는 유일한 흔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구속이란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애굽신들을 고발한 것에 대해 창조적 차원에서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애굽인들을 여호와가 정죄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여호와라는 그 창구를 통해서 인류에게 명령하고 지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가 요구한 것은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은 그 여호와의 말씀에 거역했습니다. 그 여호와가 이제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과 애굽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고발의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 후 여호와께서 어떤 언약을 인간과 맺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바로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는 자기 언약의 준수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출애굽기 2:24). 결국 여호와께서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타락된 엘로힘 형상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내용은 그 정죄된 엘로힘 형상의 자리에서 새로운 여호와의 형상으로 대체 시키는데 있습니다(민수기 12:8). 그 언약 안에서만 여호와의 이미지(형상)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이미지는 기존의 어떤 형상도 용납하지 않음으로 해서 적용을 시킵니다(신명기 4:13-19). 다른 형상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안식을 기대합니다(신명기 12:5). 구속의 목표가 안식이라는 점에서 창조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구속이 창조의 목표를 이끌고 갑니다. 여호와께서 이 창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여호와의 이름이 다른 형상을 용납하지 않는 속성이 있는지를 살펴 봐야합니다.

민수기 12:8에서 여호와의 형상은 죄인들과 비거룩한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3:24).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말씀이었습니다(출애굽기 32:15). 그 앞에서는 어떤 우상도 용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출애굽기 32:31). 그런데 그 말씀도 그냥 노출된다면 이스라엘 전부를 불로 사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의 엄위함을 깨우치게 하신 후 (출애굽기 24:12) 법궤와 성막을 허락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바로 하나님의 엄위를 하나님의 자비로 덮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알고 있어야 될 구원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법궤에 바로 여호와가 임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백성은 자기 이름 때문에 여호와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 임재한 여호와의 자기 이름 때문에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이처럼 여호와 이름 속에 예속되어 있는 셈입니다(출애굽기 32:32-33).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규정할 때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 속에 있지 아니하면 이스라엘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4:6-7).

여호와는 자기 말씀을 (돌판)이스라엘 속에 넣어주시고 그 모세 언약을 따라서 자기 이름을 담고 또 그들은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의 위력을 엘로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것과 동일한 차원에 두고 있습니다(창세기 1:3). 그러면 애초에 여호와 이름으로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여자의 후손이 통치하는 세상의 건설입니다(창세기 3:15).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날 동안은 인간은 해산하는 수고와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하며 죽음으로 돌아 가야합니다.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습니다. 이 여자의 후손이 오기까지 여호와께서 그 여자의 후손에 합당하지 아니하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정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상화시키는데 그 작업은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한 인물과의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여자의 후손과 여호와와의 관련성 부분입니다. 여호와 자신과 여호와가 약속한 그 내용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담은 그 약속의 본질을 생명으로 이해했습니다(창세기 3:20). 그 여자의 후손만이 생명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 생명이란 바로 죽을 극복한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나무만이 가지는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창세기 3:22). 그것은 인간의 현상태를 영원토록 그 신분대로 고정시키는 기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모세에 있어 선악과의 등장은 인간의 선악에 기초한 사상체계로서는 신분변화가 불가능함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애초부터 선악에 근거한 사상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창세기 3:5). 그것은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음을 인간 실존의 한계를 두는 나무였던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인간의 생령의 차원에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신의 차원에서 평가받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심판이 된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이란 인간의 선악체계를 고발하고 그 사고가 인간이 신이 되려고 했었던 명백한 증거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 여자의 후손은 아담을 고발한 여호와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문제는 여호와의 이름이 어떻게 여자의 후손으로 인격화되는가 하는 점인데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남자의 후손을 선악체계로 정죄함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흐름이 될 것입니다.

남자의 자손의 허무성과 죄악성을 들추어 낼 때 여자의 후손의 출발점이 결코 남자의 후손에 걸쳐 있지 않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어디서 출생지를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남자의 후손의 죽음에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어진 약속이 한 인격자의 출현으로 완성을 보자면 여호와가 요구한 그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어야 됩니다. 즉 자체 내에서 저주와 생명의 요소를 지녀야 합니다. 선악과가 주어진 목적은 인간의 신분 결정용입니다. 그것이 가장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신이 되고자 하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이 무엇이어야 됩니까? 그것은 새로운 제2의 인간의 출현을 기대할 수밖에 없고 그 작업은 창조와 동일한 수준과 능력으로 탄생될 것입니다. 그 제2의 인간은 여자의 모든 실책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 실책이란 바로 사탄과 접촉했던 잘못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영생이 있는 인간을 꼭 필요로 하는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시편 8:4-9 까지를 보면 하나님은 천사를 제쳐두고 자기와 닮은(형상) 피조물을 창조의 완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31). 그리고 그와 한없이 교제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 교제의 책임을 진 분이 바로 여호와이시며 그 분의 형상이 지닌 인간이 등장할 때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실성이 있은 언약이 이 작업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자라는 신분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순종자가 불순종자의 죄책을 대신 담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자가 역사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것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 때문에 하와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의 후손은 선악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비순종을 극복할 수 있어야 여호와의 요구에 부응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의 틀은 잡혔습니다. 여호와가 제시한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자이고 또 그분은 선악의 차원에서 심판의 대상이 될 자에 한합니다. 구약은 바로 이 여자의 후손이 감당할 기능을 과연 누가 해 낼 수 있는가를 밝히는데 있습니다. 아담의 두 자녀가 각기 다른 신앙적 특색을 갖는 것은 여자의 후손의 본질을 보여 주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의 적의 정체가 드러나면 날수록 더욱 여자의 후손의 본질도 더욱 밝혀집니다. 여기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명과는 거리가 먼 위치에 있는지도 밝혀집니다. 이 사실은 가장 이스라엘 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외형상으로 판가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주장함에 얼마나 도전되어지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바로 선악의 법칙(율법)에 견주어 봐서 전혀 가망성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자가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선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에 있었음을 파악합니다. 여기에 도전하는 것은 모두가 사탄의 사상들입니다. 사탄화 된 사고체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도전입니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인간나라를 신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선악의 범주까지 침입하고자 했습니다. 심판은 여호와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은 처음부터 은혜의 신이었습니다(창세기 2:7). 그 은혜를 저버린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은혜에 대한 도전이 여자의 후손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입니다(창세기 3:15). 영생에 대한 염원은 누구나 있지만 인간의 무능성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오직 여자의 후손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1. 신약, 그 새로운 언약 (서론)

 

신약의 초점은 새 언약에 모아집니다. 새언약의 내역은 무엇이냐? 새언약이 함유하고 있는 것은? 또는 왜 새 언약이어야만 하는가? 왜 하나님은 옛 언약을 고수하지 않으신가? 라는 의문이 줄지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의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어떤 경우에 새로운 시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획기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다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는 자들은 조그만 변화가 일어나도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권리도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기준이 되어 옛시대와 새 시대가 첨예하게 구분될까요? 그것은 역사 속에서 그 역사를 향하여 뭔가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대한 것이 마침 제공되었으므로 더 이상 역사가 진행될 이유가 사라져 역사가 종결될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언약이란 역사에 구애받는 것이 아니라 역사란 오히려 그 언약의 실현을 위해 임시적으로 존재한 場(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언약에 규제를 받습니다. 언약을 표현하는 어떤 사건이 역사에 도입되면 그 사건이 종전의 언약을 변개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아무리 큰 사건이라 할지라도 아직 옛 시대에 속해져 있는 것이고 만일에 아무리 미미한 언약적 사건이라도 그것이 옛 언약을 마무리하는 것이라면 옛 시대는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한 언약 안에서의 사건이 언약을 마무리하는 것인지 변개하는 것이 아닌지는 무엇으로 결정되는 것입니까? 그 결정은 방금 발생한 사건이 현 언약으로부터 부정당하고 정죄 당하고 거부당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도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옛언약을 부정한다고 해서 다 새언약이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비언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비언약과 새언약 사이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부당한 쪽에서 거부당하고 난 뒤 오히려 옛언약이 기대한 그 목표를 달성하고 완성하여 어떤 영속성을 주게 되면 새 언약이지만 어떤 영속성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가짜 언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물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옛언약과 영속성이 유지된다면 구태여 새언약이란 명칭을 붙일 필요가 없지 아니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이미 옛언약에 의해서 일단 거절당했다는 점에서 옛언약 족에서 보면 불영속성이 됩니다. 그러나 새언약 입장에서 보면 영속성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건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까? 그리고 설사 어떤 사건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특수한 사건임을 누가 나서서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 신뢰도를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인이 다 수긍이 가고 만인이 다 인정할만한 그런 출애굽 같은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누가 감히 바로 이 사람이 그 분이라고 외칠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될 경우 새 언약이 옛언약으로부터 배척 당한다는 가설에 또 충돌됩니다. 만인이 인정하는 메시아라면 누가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겠습니까? 결국 다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자 과연 누구나 인정받을 만한 것을 꼭 제시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 사건의 역사적인 객관성을 주창하기에 주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심이 비역사적이라서가 아니라 실제의 일어난 일이지만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언약이 결국 역사에 매달린 꼴이 됩니다. 언약이 역사를 주도하고 그 법칙에 준하여 변화를 시도하게 되는데 역사의 주인이 누구냐를 역사를 통해서 밝히려는 시도는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의 가자들은 이것을 역사로 설명하지 않고 역사 배후의 존재물로 증명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사의 등장입니다. 천사는 창세기에도 존재 내력이 나타나 있지 아니합니다. 역사의 변화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보조 역할만 할뿐입니다. 천사는 역사 이전의 존재물입니다. 천사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새언약을 이루실 메시아는 역사적 종말론에 우선이 아니라 묵시적 종말에 우선하게 됩니다. 묵시적으로 일어났다고 해석되어진 사건으로 역사를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도함으로 역사를 묵시 안으로 흡수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사해석에 두 가지 견해가 등장됩니다. 곧 폐기될 역사로 바라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묵시적 견해) 역사를 긍정하고 역사에 종속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생각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즉 역사 자체를 찬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역사에 바치는 경우를 말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비기독교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항상 윤회하면서 한번 윤회할 때마다 새로운 자연과 생명을 제공하는 것을 보아서 그 역사의 영원성에 감탄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인간의 산물이라고 여길 때 그 역사주의 역시 인간 자체에 대한 숭배를 그런 식으로 빗대어 이야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적 역사관에도 세 부류가 있으니 윤회하는 시간의 circle에서 벗어남을 구원이라고 보는 헬라의 탈 역사적 묵시사상과 강력한 power지닌 super man이 등장해 역사를 갑자기 절단해 버리는 유대교의 정치적 묵시사상이 있고 거기에 반해 언약이 온전히 완성했으므로 더 이상 역사 존속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의 주인이 역사를 종결 짓는 기독교적 묵시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목적이 이들과 투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언약 속에 들어가는데 방해를 놓고 있는 비언약적 권세와의 투쟁에 있습니다(에베소서 6:12). 이들 보이지 않는 약한 영들이 옛언약을 어떻게 망쳐 놓았는지는 그 실상이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지게 됩니다. 역사의 의의가 언약실현에 있다면 그 동안의 실패는 역사 자체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됩니다. 역사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언약 수여자와 언약상대자 간의 교류의 진전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필시 제3의 세력이 배후에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배후 세력의 활동 상황을 역사 안에서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끌고 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언약 아래서는 인간의 실존을 다시 재현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었으며 그를 유혹한 실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종결되었나 하는 것까지 현 새시대에 보여 줄 필요성이 있습니다. 일종의 인류에 대한 현장검증을 실시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을 수행할 분은 이미 역사의 완성이라는 입장에 서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묵시에 의해 규정된 분에 한합니다(요한계시록 12:4-6). 왜냐하면 그 분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순간 순간 묵시적으로 이미 해석이 종결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야 옛언약의 역사를 제대로 심판 할 수 있는 이유가 성립 된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人子라고 소개한 뜻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인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 7:13에 나오는 칭호인데 그 칭호가 가지는 의미는 다니엘 7:9에 나왔듯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서의 인자입니다. 따라서 이 분은 초역사 또는 前역사적인 인물입니다(탈 역사는 아님). 그 동안 계속해서 역사를 지배하신 당사자입니다. 선재 하신 분이 과거역사를 재조명해 나갈 때 항상 부딪치는 문제는 약속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오해와 회의적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죄 아래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들이 사탄과 한편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인자로서의 고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조차 영접하지 아니하는 불상사가 생겼던 것입니다(요한복음 1:10-11). 불가피하게 충돌이 야기되면서 인간 역사는 예수님 무릎 앞에서 그 실상을 드러내어 놓기 시작합니다. 그 분의 출생부터가 그러합니다. 그 분의 출생으로 인해 세상이 둘로 나뉘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이사야 7장에 나오는 아하스왕과 이사야와의 투쟁 같습니다(마태복음 1:23). 즉 임마누엘로 왔지만 (우리) 이름은 예수(자기)입니다. 자기 백성을 뽑기 위하여 우리라는 영역을 먼저 설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성장과정인 12살 때에도 가정에 있어 예수님과 가족간에 불영속성이 있음이 나타납니다(누가복음 2:41-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연속성 가운데서도 언약의 정통성을 계승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난 이후의 천국이기 때문에 그 천국의 성격이 유대인들이 상상하는 그런 천국은 아닌 것입니다. 사탄의 실상을 경험하시고 사탄이 노리고 있는 점이 무엇이며 그들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이미 알고 난 상태에서 천국이란 바로 구약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지배받을 세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이 바로 사탄을 무찌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탄을 무찌르느냐에 따라 여자의 후손됨이 역사 속에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천국의 선포는 결코 세상을 부정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덧붙여 제시하는 긍정적 제안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이미 인간의 고통을 해결했다는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복음. 마가복음 1:1). 따라서 세상의 실상을 모르게 되면 이 복음이 기쁨의 소식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이 오셔야 만 하는가 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활동 안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5) 세례요한이 미리 와야 될 필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란 이 세상과는 달리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현존하는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마태복음 12:28/누가복음 17:21).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너희들이 지금 받을 준비를 갖추어야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축구 할 때에 공이 옆에 있다 받아라! 라는 말과 같습니다) 시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행동하십니다(action). 하나님의 최종 행위는 예수님의 최종 행위와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림입니다. 새언약이란 바로 옛언약을 회복하기 위한 예수님을 통한, 예수님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뜻합니다.

 

 

2. 복음서 (옛 언약이 소멸되는 과정)

 

창세기 6:5-6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쓸어버리심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인간을 끌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세기 6:18에 있는 말씀처럼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언약을 세우기 이전에 사람이 왜 지면에서 쓸어버림을 당해야 하는 존재인가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언약 세움의 이유도 모를 것입니다. 복음서는(특히 공관복음서는) 언약의 피에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그곳을 향하여 전개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마태복음 26:28/마가복음 14:24/누가복음 22:20/요한복음 19:30).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복음서의 관심은 어찌해서 새 언약은 피가 동원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가에 핵심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옛언약이 붕괴되고 새언약의 출현을 야기시켰는가에 대한 그 정당성을 제시해 줍니다. 비록 그 대상이 유대인일수도 있고 로마인일수도 있고 헬라인일수도 있자만 히브리인의 종교가 神쪽에서 어긴 적이 없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뭔가 실제로 증명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38). 문제는 神의 약속은 인간 쪽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주입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알고 있는 약속이란 약속입안은 하나님 일방적입니다. 바로 복음서에서 신경 쓰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알고 있는 종교적 약속의 특수성이 어떻게 현실화되어 달성되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또 생각해 주어야 되는 것은 옛언약의 단절이 옛언약의 구조상 모순점이 있다든지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밝힐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피로 세운 언약이 어째서 옛언약의 연속이 아니라 새 언약이라는 명칭을 예수님이 도입해야 하는 점도 언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내용상에서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내용상의 연속성 일치주장과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언급하지 아니한 새로운 내용이 함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는 인간을 선택한다는 것이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린다는 것이 언약 안에 들어있는 새로운 사실입니다. 복음서는 이 사실도 알려 줄 필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인류의 대변자이요 장자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나라요 유일한 언약상대자인 (출애굽기 19:5-6) 이스라엘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 즉 아담 계통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새언약 속에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모세 언약에 의한 언약 체결을 거부하는 행위도 됩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읽는 독자와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새언약이 지닌 이중성을 소개하므로서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일관된 자기약속에 집착을 선포하는 역할을 합니다. 언약의 있어 선택행위는 새언약에만 국한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옛언약 하에서도 남은 자를 위한 선택행위가 계속됩니다(창세기 7:23). 이들 남은 자들은 왜 하나님이 인간을 멸망시켜야 하며 자신들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남아 있는가를 증명하는 증인 역할 노릇을 하기 위한 남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는 멸망 속에서 특혜를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보고 남은 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고수하기 위하여 남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특성과 그 고귀성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새언약의 선택행위도 남은 자 사상의 연속성에서 생각되어야 하는데 옛언약의 남은 자 사상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옛언약에서의 선택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선택이지만 새언약에서는 선택된 자(기름 부음을 입은 자:여호와의 종)에 의한 선택이라는 점이 다릅니다(에베소서 1:4). 이러한 2단계의 선택이 요구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계약이 옛언약 파기로서 끝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자와의 계약은 성립되지 않습니다(시편 115:17/마가복음 12:27).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는 자기 백성에 대한 선택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대속의 활동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공생애 사건으로 보여 주게 됩니다.

 

3. 마 태 복 음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발전과정과 예수님만이 꼭 메시아 됨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족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언약의 변천이 누구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느냐를 동시에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은 그 최종 완성된 모습을 보이기까지 기존의 관념들을 수정하면서 진행된 것입니다. 그 수정된 결과로 세 부류의 언약의 발전이 보이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요 두 번째는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에 세 번째는 바벨론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이 세 가지로 나뉘어지는 시대로 볼 때에 각각의 시대에 있어 언약의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1:17) 첫째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 신앙전수 또는 언약 전수가 가능해졌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는 시형제 결혼법과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시대인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의 언약 전수는 현 이스라엘 왕 가문을 부정하는 독특한 다윗언약의 심판적 기능에 의해 언약이 전수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보아(다른 이방여자는 여자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다) 다윗의 신하 우리아의 신앙 수준과 맥을 같이 하지 못함으로 인해 솔로몬 이하 왕들은 언약이 이방나라 바벨론으로 이주해야 하는 창피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번째 시기에 있어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 사실은 언약은 가문이 언약 상대자로서 미흡할 때는 非가문 중심으로 전환되어 그리스도와 연결을 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는 앞에 있는 점들을 성취하고 극복한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가문계통의 정통성도 회복할 뿐더러 신앙적인 미흡함도 제거된 계통을 밟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다윗 때까지 적용된 시형제 혼인제도에 따라 명목상의 족보와 실질상의 족보가 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이중성을 노출하기 시작합니다. (1:28)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마리아는 그가 낳은 자식이 명목상은(이름으로는) 요셉가문의 자식이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성령으로 나신 분이라 하늘에 속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아담계통과 무관한 분입니다(마치 룻기 4:5에서 룻이 낳은 자식이 오벳이 죽은 자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잇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보아스의 아들인 것처럼 룻기 4:21). 여기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죽은 자의 족보, 땅의 족보를 하늘의 족보와 연결 시켜주시는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계통 중 언약안에 있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고 죽음에서 건지려고 오신 것입니다(1:21). 이 사실을 안 요셉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 동침을 하지 않았습니다(1:25). 그러면 누가 자기 백성이 되고 언약의 자녀들입니까? 그것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으로 구분짓기 위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1:23).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에 관해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며 어떠한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자기 백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위 옛언약의 상대자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하여 자기 백성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2장에 가면 동방박사가 등장합니다. 이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에 들어감으로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의 존재와 현 이스라엘과의 사이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호세아 11:1에 나타난 예언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보면 더욱 분명해 지는데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지적하면서 현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간주하고 예수님 있는 그 자리를 이스라엘로 顚倒(전도)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2:17-18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예언도 예수님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본 두 살 아래의 어린 아이를 참이스라엘로 보고 있습니다(라헬이 그 자식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가나안 땅에 오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마 2:23). 그곳은 이방지역이며 언약 밖의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4:15-16/이사야 9:1-2). 이상과 같은 모든 행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결국 추구하시는 바는 제2의 출애굽으로 모세언약 체계안에서 새로운 언약체계를 구축하시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타파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등장해서 그 일을 준비합니다(3:1-2). 특히 도끼가 나무 뿌리 위에 놓였다는 것과 타작 마당이라는 표현은 역사의 종결의 임박성을 말합니다. 이는 옛언약의 무너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의란 기존의 언약에 따른 적절한 심판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동시에 율법의 구원에 대한 적극성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성령의 사역 목적을 예수님을 통한 모든 의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 출발이 바로 4장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마귀의 시험입니다(4:1).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면 여자의 후손에 의한 뱀의 후손의 정복이 달성되는 그 순간이 바로 모든 의가 달성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옛언약의 출발지점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는 세례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이 심판에서 모면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례를 달리 이해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들이 심판에서 면제되는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한 뛰어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즉 언약의 상대자로서 이스라엘이 했어야 될 일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義로웠다는 판정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고소하는 사탄의 판정은 부당함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에 대한 정죄는 힘으로 정복하는 정죄선언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심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들이 예수님의 백성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사탄이 정죄 당할 충분한 이유가 됨을 밝혀줌으로서 사탄을 인간 세상에 축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면에서 사탄은 잘못 되었는가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사탄에게 시험을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정죄할 근거를 성령께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정복함으로 율법이 요구한 온전한 심판의 완성을 내다 보려고 합니다. 그 심판은 완전한 자(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비난이 부당함을 보임으로서 사탄을 정죄할 이유가 율법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입니다. 시험 결과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시하는 것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하나님과의 말씀의 관계에서 공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로서가 아니라 이미 된 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면서 결국 이 신분은 곧 자기 백성의 신분이기도 합니다. 천국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이루어졌고 남은 것은 자기 백성을 그 분이 선택하는 일입니다(4:18-22). 이것은 영원한 출애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모세의 역할은 예수님이 하십니다(5:1). 예수님이 말씀을 받아 전달해 주는 자가 아니라 직접 말씀을 내리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모세율법 같이 조문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의 오심을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가 바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만이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을 아는데 있습니다(5:17/7:17). 예수님의 자기 백성은 이와 같이 예수님 마음에 동참되기 위해 불리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만이 옛언약을 완성한 의미에서의 새언약에 속한 사람들입니다(8:11-12). 그 뒤로 계속 예수님 자기 아는 훈련을 시키고 또 능력도 주어서 그들로 예수님의 일에 참여케합니다(9장-12장). 바로 이런자가 예수님의 모친이며 형제며 누이들입니다. (12:49-50)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독특한 일 진행에 대하여 비유로 나타냅니다. 그 비유는 일단 비언약 계통에게 못알아 먹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3:15). 각종 비유들의 내용은 이미 천국은 왔고 천국의 활동은 조금도 인간의 도움이나 노력이 요구됨이 없이 순전히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나타나는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귀중성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오직 예수님이 알려주는 자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초월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세상 끝에는)이란 현재 이런 형식으로 나타난 천국에 대하여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가려내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13:47-50). 여기서 천국과 새언약과의 관계는 천국이 이 땅에 임할 여지를 새언약이라는 근거에 의해 마련한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옛언약을 공략하면서 임합니다. 천국은 어떤 방해나 장애를 극복하고 이 땅에 임할 수 있다는 점을 14장에서 15장까지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천국의 표적은 십자가 사건으로 집약되고 있습니다(16:4). 왜냐하면 그 십자가 사건이 바로 옛언약 체계에 대한 최종적 부정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됨이 나타납니다(16:16). 여기서 예수님은 교회의 나타남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 교회란 인자됨을 십자가 상에서 이해하는 자의 모임입니다. 만약 달리 이해한다면 (예를 들면 신기한 이적이나 말씀 같은 것) 그것은 바로 사탄입니다(16:23). 인자의 고난에 대한 베드로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자 그 자체가 정복자의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천하를 정복하러 오신 분이 정복당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요(16:23) 교회활동의 중심 내용입니다(16:19). 인자가 이 땅에서 영광받기 전에 하실 일은 고난받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자에게 반역을 시도한 세력에 대한 영원한 정복에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자로서의 영광이 공개되는 때입니다. 그 영광을 옛언약 아래있던 자들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17:3). 새언약의 사람들과 옛언약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변화산상입니다. 그 중심은 예수님이고 그 성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사명을 다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 아들의 사명이란 바로 구약 이스라엘민족이 이루지 못한 그 장자로서의 사명의 부실을 예수님이 자책으로 여겨 그 책임에 대한 온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옛언약 파기에 따른 책임추궁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마땅히 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옛언약의 완성으로서의 새언약이 실효성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 됩니다(17:12). 인자로서의 고난은 아들의(언약 상대자의) 권리를 회복시켜 언약이 없고 아들이 없는 역사를 아들로서의 묵시세계로 뒤덮어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결국 악에 포로가 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에서(17:14-21) 어떤 무상의 은전을 제공하여(17:26-27/ 18:23-27/ 19:14-15/ 18:1-4/ 20:1-16/ 21:28-32/ 22:1-10/ 22:34-40) 그것을 제공받은 자에 대한 법적 구금이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악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고 언약의 참된 아들을 (예수님)고난과 죽음으로 처리한 악에 세력에 대하여서는 그들의 잘못된 법적용과 잘못된 법해석으로 나온 응분의 대가를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는 (23:27-36) 증거가 확보되기 위한 고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역사를 긍정하러 오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24:1-3) 예수님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간에 어떤 화해점도 없음을 확인하셨습니다. 유일한 언약이라는 접촉점 마저 배후세력의 조종으로 인해 수행능력이 상실됨이 옛언약을 대표하는 예수님의 수난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깨어지고 질서는 파괴됩니다. 그 가운데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개개인의 결단과 선택을 요구시킵니다(24:14/24:23-26). 여기서 마태복음은 복음이란 수난과 함께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24:13).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인자가 최후의 영광된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복음의 영광이 수난 속에 감추어져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24:30-31). 꼭 그릴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의 묵시성이 눈에 보이는 역사 속의 것으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25:1-14의 지혜로운 처녀 비유나 25:14-30의 달라트 비유나 또는 25:31-46까지의 마지막 양과 염소 분류의 비유같은것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유월절에 맞추어 죽음을 준비하십니다(26:1-2). 이것은 분명 옛 모세언약과 대비시켜 새언약의 의미를 노출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이 모세언약의 기조사상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의 기조를 이루는 사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 즉 역사로부터의 배척을 발견하지 못하는 새언약 해석은 잘못된 해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이해 못하는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마지막 재판에서 자신의 묵시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함으로 예수님의 처형의 이유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26:64).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오직 엘리야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무리들에 대한 희망마저 소용 없음을 보여줍니다(27:47-49).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처리는 정치권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 정치화된 종교와 종교화된 정치가 어디에서 그 일치점이 발견되느냐 하면 역사 수호와 역사 긍정이라는 점에서 타협의 악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망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성도가 무덤에서 일어나고 지진이 발생한 것은 바로 옛언약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에게 찾아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이 천사와 관련지어 설명된다는 것도(28:2) 이미 묵시의 세계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충격과 흥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의심과 기쁨이 한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권세는 이제 내가 가졌다고! (28:18)

 

4. 마 가 복 음

 

마가복음은 복음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비해 비변증적이고 보다 선포적인 면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1:1). 특히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쁜 소식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예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로마성도들은 위로하기 위한 의도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그 자체가 주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재빠른 주님의 사역이동은 어떻게 하면 빨리 십자가의 순교의 자리까지 도달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려 있는 것으로 주님의 심정을 규정 짓는다면 현 로마치하에서 신앙인 곧 순교인으로 통하는 절박함에서 이것 이외에 그들에게 무슨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보다 낙관적으로도 예수님은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과 국력이라도 충분히 지배하고도 남음이 있는 분으로 등장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차이점을 생각합시다.

1. 세례요한의 출현장소가 유대광야가 아니라 막연한 광야로 나옵니다. - 1:3

2. 세례요한의 일상생활 보다 외형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 1:6

3. 청중들은 마태복음과는 달리 예수님께 동조적입니다. - 1:5

4. 예수님이 세례 받은 것 보다 세례준 자에게 더 관심을 둡니다. - 1:9

5. 성령의 출현시 하늘이 찢어졌다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 예수님의 수난을 함축함 - 1:10

6. 그 때 하늘에서 성령이 아니라 영이 내려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 겸손과 비천성을 말함 - 1:10

7. 그 소리가 예수님에게 직접 전달됩니다. -비거룩을 나타냄 - 1:11

8. 광야로 나가게 된 동기도 영이 함부로 예수님을 몰아내심의 결과입니다. - 1:12

9. 시험하는 자를 직접 사단이라고 과격하고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 1:13

10. 하늘나라 대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과의 관계를 나타냄 즉 하나님의 통치가 유대영역을 넘어섬 - 1:14

11. 광야 시험에서 짐승들도 함께 있습니다. - 비천성을 나타냄 - 1:13

12.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에서 일시성과 우연성을 말합니다. (마태는 「다니시다가」라고 해서 일상적이고 반복적임을 나타냄) - 1:16

13. 예수님의 소문을 유대지방에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방가지 확산시킵니다. -이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음을 각오하라는 것이 아닐까? - 1:28

14. 예수님을 일찍 활동에 나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새벽 미명에) - 1:35

15. 어떻게 된 것인 줄 모르겠다 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돌발성을 강조합니다. - 4:27

16. 예수님의 직업을 그대로 목수라 합니다.(다른 데서는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이다) - 6:3

17. 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태는 할 수가 없다로 표현됩니다. - 6:5

18. 손 씻는 풍습에 대하여 유대인의 관습이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 7:3

19. 표적 구하는 것, 조차도 거부합니다. - 8:12

20.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길가는 도중에 묻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움직이는 상태. 이것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길에는 잠시라도 지체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긴박성이 담아 있음) - 8:27

21. 베드로를 꾸짖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그냥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음) - 8:33

22. 베드로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주여 가 아님) - 이것은 베드로의 위치를 조정함 - 9:5

23. 엘리야를 예수님 자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례요한으로 봄) - 9:1*

24. 죽은지 삼일만에 살아난다는 사실을 숨겨 두라고 하십니다. - 9:31

25. 노중에서 누가 크냐고 시비가 일어납니다. - 9:33

26. 손이 한 범죄의 결과는 마태에 없는 것입니다. - 9:43

27. 선한 선생님 이야기는 길에 나아가실 새 라고 하는 현재 진행 중에 이루어집니다. (마태는 종료 후에 이루어집니다) - 10:17

28. 탐심 계명이 빠져 있습니다. - 10:19

29. 마태는 봉사, 누가는 부의 포기를 의미하는데, 마가는 반환하라고 하십니다. - 10:21

30. 예수님과 복음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 이름이고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되어 있는 반면, 여기에서 세 복음서 사이의 신학의 차이가 확연해 진다) - 10:29

31. 예수님이 제자들 보다 앞서 갑니다. - 10:32

32. 세베데의 아들이 자기에게만 특별 대우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10:35

33. 유독 여기만 거지의 이름이 밝혀집니다. (바디메오) - 10:46

34. 소경이 길에서 쫓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각적이다) - 10:52

35. 무화과 나무에 대한 특정 질의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 11:21

36. 그 이튿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갑니다. (마태는 막연한 날로 기록합니다) - 11:27

37. 비싼 향유를 허비함을 분개하는 이들이 막연히 어떤 이들로 되어 있습니다. - 14:4

38. 함께 그릇에 손 넣는 사람이 12제자 중의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14:20

39. 형량을 그 자리에서 선고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증거수집으로 그친다) - 14:64

40. 여인들의 무덤 방문의 결과가 파악되지 못하지만, 마태에서는 파악됩니다. - 16:8

이상의 내용을 대체로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마가는 어떤 의미전달 보다는 사실전달에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간략하게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예수님의 공생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모든 생애가 결국에는 십자가의 순교로 초점이 모아짐을 또한 보이고 있습니다. 이점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수난 속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 주자는 데 그 기록의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이 자체가 곧 기쁜 소식이며 이런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될 수 있습니다.

 

5. 누 가 복 음

 

누가의 신학을 한마디로 언급한다면 히브리인들이 받고 전수해온 신의 약속이 (1:6 모세 언약/ 1:16-17 역사적 종말론/ 1:32-33 다윗언약/ 1:35 묵시적 종말론/ 1:46-54 한나의 예언/ 1:55,72-73 아브라함 언약) 어떻게 해서 예수라는 인물과 (2:6-20) 오늘날(로마시대)에 (2:1-5)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그 실현된 것을 어떻게 온 인류의 것으로 (3:23-38) 제공되느냐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그 누가의 신학의 前篇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은 後篇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과는 달리 언약의 전달 과정보다 언약의 성취 면에 치중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히브리인이 받은 언약은 결코 히브리인만의 것이 될 수 없고 온 우주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약속임을 천명합니다. 마태복음이 옛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는 것에 무시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누가복음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이 봉사할 수 있고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년 사상입니다(4:16-19). 복음과 언약의 사회성을 통해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설명하는데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의 새 신자로 하여금 복음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려는 것입니다(1:1-4). 누가복음의 시작은 신기한 두 아기의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난 아기는 철저한 제사장 계열을 따라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는 부모에서 출생됩니다. 그런데 그 의의 집안의 출신 아기가 선지자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1:17). 거기에 비해 두 번째 아기의 경우 육신의 아버지가 중요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1:32/35). 이것은 어떤 묵시적 인물이 역사 속에 등단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묵시적 인물이 누구와 만나는가 하면 충실한 제사장 계열에 속한 사람을 선지자로 소개받는다고 하는 것은 모세 언약의 온전한 완성자로서의 묵시적 인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 시대의 심판자란 온전한 의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정복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51-55). 그렇다면 그 온전한 의인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그것은 모세언약의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겸손하고 비천하고 권세가 없는 모습이며 주리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교만하고 비천하지 않고 권세있고 부자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시는 것입니다(1:51-55). 그것이 또한 아브라함언약의 완성의 모습입니다. (1:74) 이처럼 누가복음에서는 죄를 개인적 윤리에서 찾지 않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구조 관계를 통해 파악합니다(1:77).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출생의 비천함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 분은 가축의 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그를 처음 반기는 자도 고위계층이 아닌 야간에 양치는 목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거기에 따른 땅의 질서의 회복은 언약의 완성(다윗언약)으로 얻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히 기쁜소식이 됩니다(2:1-20). 여기서 일단 천사의 기능이 끝이 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 안에서 묵시적인 인물이 그 묵시성을 얼마나 모호하지 않게 보여주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야만 역사에 대한 정죄가 타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선지자가 고대하는 바로 그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부터 이는 결코 혈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혈통과 관계 그를 기다린 자들이 있다는 것은 언약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정에서까지 말입니다(2:22-51). 따라서 비언약적인 요소에 대하여 선지자가 미리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래야만 역사 안에서의 구원이 마련되는 여지가 생깁니다(3:1-17). 세례요한의 공격은 비언약의 범주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모세율법의 적용이 얼마나 사회적인 열매로서 나타났느냐에 따라 죄를 규정합니다. 이제 선지자는 역사 배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분은 세례를 통해 세례요한의 바톤을 잇습니다. 선지자와 언약실체의 만남으로 언약이 주는 복이 본격적으로 팽창되는 시기에 접한 것입니다(3:18-22). 그 복은 전 아담의 후손에게 전달될 것입니다(3:23-38). 세례 이후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定形이 될 것입니다. 세례의 내용이 여기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12:50). 시험은 세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능이 이 땅에서 온전히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test입니다. 그 세가지면이란 말씀 순종과 주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하나님을 시험치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언약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4:1-13). 성령께서 요구하신 것도 이 점이었습니다. 완성된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새창조를 이루는 것입니다(4:14/18/11:13/12:11-13/사도행전 1:8). 그래서 사탄으로 하여금 더이상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과 역사안에서 다시는 사탄이 발붙일 여지를 없애는 방법도 됩니다. 4:18-19까지 보면 예수님이 역사에 나타난 그 활동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제공하는데 그 방법은 바로 주의 일방적 은혜의 해를 선포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희년사상을 이 시대에 있어 새 언약의 내용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에 열거한 그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의 찢긴 몸과 흘리게 된 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22:20) 예수님을 배척한 세력은 예수님이 이러한 희년 선포에 동참하지 않는 무리들일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선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선교의 기본 입장은 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1-4).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가난이며 무슨 상태가 포로된 상태이며 무엇이 눈먼 것이며 무슨 상황이 눌린 것입니까? 희년규정의 지침은 다음 네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땅을 안식케 하는 것

-빚을 면제하여 채무자와 채권자가 동등한 신분이 되는 것

-노예들을 해방시켜 어느 누구도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주인노릇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각 개인이 원래의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돌아가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레위기 25:8-24/40-54/민수기 36:4)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끄집어내신 그 사상을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재조명하고 구현시키고 반복하고 되새기기 위한 조치입니다. 여호와가 제공한 구원의 의미를 그들 가운데 실제적 사회생활을 통해서 실천될 때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신앙고백의 형태가 됩니다. 왜 일방적인 해방과 놓임의 은전을 상대방에게 베풀어야 합니까? 자기도 그런 혜택의 자리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4:25-27/40-41/ 5:4/8/24/32/ 6:20-24/9/24/35/38/ 7:5/13/22-23/37/41-49/ 8:43/ 9:38 10:30-37/ 11:8/46/ 12:13-21/ 32/ 13:8/10-12/ 16/ 14:5/10-11/12/14/21-14/ 15:3-32/ 16:9/13-14/19-31/ 17:4/13/ 18:5/9-14/22/ 19:1-10/ 20:22/45-47/ 21:1-4/34-35/ 22:24-30/35/51/ 23:26/29/42-43/50/ 24:26). 이상의 구절들을 살펴 주로 불쌍히 여김과 긍휼, 일방적인 도와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간청하고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에게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베풀어 주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희년이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마음자세가 갖추어지지 아니하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전에 대하여 이의를 걸거나 타당성 여부를 따지고 드는 것은 영락없이 배후에 사탄의 조종이 있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희년언약의 구속적인 취지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늘 돈 때문에 나쁜 병 때문에 또는 죄의식 때문에 또는 폭력에 시달리고 특히 종교조직에 종처럼 억눌려 사는 당시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희년사상으로 해방사역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 배후에는 율법에 대해 특히 희년사상에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4:18). 예수님의 이러한 활동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정당성을 얻어 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새언약의 형식인 피 흘림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물증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례요한에 이은 나실인으로 간주하고 흘리신 피입니다(22:18/ 1:15/ 민수기 6:3). 나실인이란 사람 자체가 제물인 사람을 말합니다(민수기 6:18). 나실인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자신이 거룩을 지킨 그 기한을 담보로 하여 이스라엘의 죄상을 대신 용서를 구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흘림이란 곧 나실인이 그 동안 애써 얻은 보상으로서의 피흘림입니다. 이러한 율법 순종으로 주어진 의를 이제는 타인의 것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용서에 두고 있습니다. 이 용서가 사회전반에 영향을 줄 때 그야말로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되고 이것이 전 인류에게 미칠 복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스라엘에게 내린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형식을 통한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지만 옛언약을 완성했다는 차원에서 예수님이 의인이 되셔서 다 이루었기에 이제 이 복은 이스라엘만의 복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것이 되도록 혈통적 이스라엘을 버리는 조치까지 취하시면서 용서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실천으로 신앙고백하는 진짜 이스라엘에게 줄 복이라는 것입니다(19:9/ 18:9 /20:16). 이 세상의 부요함이나 권세 지닌 것이 하등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그것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유일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10:20). 특히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이 육으로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여 교회의 역사 속에서의 기능이 육으로 의와 복음과 복을 전달하는데 관심 두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 육으로 하는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용서란 관념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풂은 교회로부터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사회운동입니다. 그 운동이 말씀 전파로서만 아니라 실천생활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옛언약과 새언약 사이의 지속성을 암시합니다(24:6/13/27/39/47/ 사도행전 3:44-45).

 

6. 요 한 복 음

 

요한복음은 인간의 실체와 현주소를 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 모습은 인간세상에서 파악될 수 없고 영 되시는 분이 오심으로 알게 됩니다. 인간이 육이라는 말은(3:5-6) 단순히 인간의 현모습만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도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 또한 영 되는 분이 오심으로 파악됩니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고유영역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외부와 차단되며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도 인지 못하고 있는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고 규범이 있지만(5:16) 인간은 그 규범조차 통제 못하고 오히려 규범의 노예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1:4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현재 부지하고 있는 목숨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목숨은 이미 언급했듯이 육입니다. 소멸되고 허무하고 연약하고 쇠잔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서론에서 생명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바로 인간이 부활(영생)하신 분을 전에 이 땅에 계실 때 그 분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느냐로 알게 된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영생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수용 못하고 죽음과 배척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그 분과 그 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존재임이 확연해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헬라식 용어를 빌려 묘사하기를 육과 그리고 육과 정반대편에 있는 세계를 영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이 수난과 부활로 분명해진 분위기를 교회 내에서 형성된 시기입니다. 문제는 그 예수님에게 발생된 사건이 어떻게 특정인이 아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복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사건들이 그 이후인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지금에 와서는 영생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만 상대하다 유대인들만 정죄하고 그 가운데 특정 유대인들만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면(17:18) 어떻게 유대인들만 상대한 일이 전 인류에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서론부터 “만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주 전부를 지었습니다(1:1-3). 그러나 유대인들은 창조를 순전히 하나님 단독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은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알고 있는 그들이 유독 예수님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지으심 그 자체로서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창조사역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말씀(율법)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1:4).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율법을 주었습니다(1:11). 그 율법들은 진정한 생명을 내다보고 그 분이 왔을 때 영접할 만한, 아 저 분이야말로 율법의 인격화되어 나타났구나! 라고 하는 안목을 가지기 위함이었습니다(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백성들은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또 세상이 그를 몰라 뵈었습니다. 따라서 원래부터 그들에게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었다는 것으로 또 헬라식으로 말해 빛이 없는 어두움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1:5). 그런데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보편화시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에 유대인들만 개입된 것이 아니라 이방 총독도 관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18:35-36/ 19:10-11/ 17:14). 여기에 또한 첨부될 사실은 세례요한도 영이 아니라 육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아무리 믿게 하려고 해도 못하고 세례요한의 세례 또한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세례와 성령님의 세례를 비교합니다(1:33). 따라서 세례요한은 도중 하차 하지만 (3:30/ 1:8) 그러나 성령님은 영원합니다(16:7/ 14:23/26/ 20:22). 이제 사도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유대인의 육됨이 실제로 어떤 사고방식과 표현과 행동양식을 역사 속에 남기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또 그 점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음으로까지 끌고 갔느냐를 설명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후 모든 세상사람 전부에게 이 유대인이 지니고 있는 육의 요소가 담겨 있음을 알려 주려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그들에게 심판 아니면 구원의 이유가 된 것 같이 이 사도가 쓴 요한복음 자체가 예수님생애 이후 사람들에게 심판 아니면 영생 둘 중에 하나가 주어지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육의 대명사인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율법에다 자신의 더러운 육된 종교성을 가미하여 구원의 길을 터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종교 바벨탑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격보다 조직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라는 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않음을 도외시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력과 지혜와 종교적 기술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질서와 안녕을 위하여 예수님을 그들 눈 앞에서 제거했습니다(11:50). 그들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몰랐습니다(21:15-16). 그들은 무엇보다도 법 체제와 조직이 무너지는 것을 제일 겁을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자기가 만든 것이고 거기에는 서로의 영광들이 가득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5:44). 결국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결정적인 것은 바로 종교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과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사이에서 영생과 사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육이 됨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4:23-24).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단순한 성전 청결로만 여겼다가 부활 이후에야 성전 청결이 아니라 아예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알게 됩니다(2:13-22).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을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 열심히 아버지의 집을(나를) 엄습한 것입니다(2:17). 이것이 바로 새언약의 태동이며 저 쪽 모세 언약이 허물어진 그 자체가 새 언약을 다 이룬 셈입니다(19:30). 이처럼 요한은 육을 허무는 것이 그 자체가 영으로 천명합니다(3:3/ 1:13/ 6:63). 요한복음의 주제인 왜 말씀이 꼭 육신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그 이유를 탐색한 기록입니다(1:14).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독생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말씀은 이미 자체로서 인격적입니다. 그 인격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독생자가 나타낼 영광과 상관 있습니다. 육신이 되지 못한다면 독생자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란 아들로서만의 유일한 영광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영광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아들로서 가장 육신다운 모습을 보일 때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그 영광은 또한 은혜와 진리가 가장 충만히 드러낼 때 마찬가지로 가장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왜 이런 글을 여기에 담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영광다움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 때의 영광과 아들때의 영광에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을 찾아오시는 데서 드러나는 영광입니다(1:18).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주의 자리 즉 하나님의 자리에 있음이 인정되었다면 그 분의 영광은 인간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고 가셨는 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견딜만하다는 사실은 예수님다운 다른 영광을 지니고 오셨음에 분명합니다. 그것이 은혜와 진리의 영광입니다. 이로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에게는 하나님다운 영광이 없다는 주장에 반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은혜의 영광은 비천한 영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사상입니까? 그것은 육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일을 했으니깐 그러합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란 은혜를 충분히 제공하는데 있습니다(1:16). 충분한 인간들의 종교성과 선과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 깨끗한 양심의 결실을 왜 하나님은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온전한 아들로서 아들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1:14). 그렇다면 태초부터 말씀이 육신되게 하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독생자의 영광이란 그 영광이 가장 돋보이는 상황에서 비로소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낮아지심이 가장 극대화 되는 것은 그 낮아지심 아니면 은혜를 보여 주시는데 실패할 경우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은 말씀의 은혜됨을 무엇으로 소개합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말합니다(1:29). 세례요한은 자기의 세례를 여기에 맞추어서 자신이 베푸는 세례가 어떻게 하면 그 분의 사역을 부각시키는가에 온 관심을 다 쏟습니다(1:20-27). 그래서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어내는 세례가 아니라 죄를 죄되게 공개하는 세례인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분의 가치와 고귀성과 결합되는 세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성은 또한 성령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게 되는 통로역할을 하게 되는데 요한복음에 있어 성령의 역할은 요한의 세례와는 달리 이 세상의 죄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죄로부터 이탈시키는 작용을 합니다(1:33/ 20:22-23). 따라서 12제자의 선택은 세례요한의 시절에서 벗어나서 율법 전달자가 아니라 성령의 전달자로 사용되기 위합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법칙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기초가 됩니다(21:15-16). 그들에게만 인자의 영광이 보여집니다(1:51). 그 인자로서의 영광이 표적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사실 그 표적들은 인간들을 오해와 무지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2:4) 반대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모는 구실을 제공한 셈이 됩니다. 표적이 그들의 오해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그들의 무지성을 폭로하는 계기가 됩니다. (단 제자들과 일부 사람은 믿습니다. 1:11) 그 예가 성전 청결 사건에서 발생되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현 건축구조물을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란 곧 자신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하십니다(2:22). 그렇다면 성전 청결에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편 69:9에 비추어 해석하면 새로운 성전을 사모하다가 결국 예수님이 훼방 즉 십자가 죽음으로 가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분을 절제 못함에서 나온 행위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기를 제시하시는데 꼭 같이 헐어서 사흘만에 다시 세워지는 것이 참된 성전이라면 어느 것이 성전이겠느냐고 합니다. 46년 동안 짓고 있는 저 성전은 애초부터 성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육이라고 하십니다(3:6). 앞으로 예수님에게 들이닥치는 모든 부정적 요소들은 다 육에서 나온 소산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의 의미를 모르는 것(4:15), 예루살렘이나 혹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겠다는 것(4:21),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식을 오해한 것(4:33) 왕의 신하가 죽기 전에 고쳐달라는 일(4:29), 안식일날 병자를 낫게 했다고 시비 거는 것(5:10), 예수님이 떡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일(6:15), 형제들이 예수님을 부추겨 세상에 드러내기를 요청하는 일(7:14), 안식일날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고 책잡는 일(9:16), 예수님이 옆에 안 계셔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한스러워 하는 일(11:32),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아 부었다고 비난하는 일(12:5), 주를 위하여 끝까지 목숨을 걸고 따라 나서겠다는 베드로의 열심(13:37), 모든 권세가 나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빌라도 총독(19:10),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20:25), 이상의 모든 기록들은 인간의 육된 요소가 예수님을 죽임에 넘겼으며 예수님이 제공하는 영생에는 제자들 뿐 아니라 인간의 어떤 도움도 개입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이라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人子되심과(3:13) 성령님의 오심에 기인된 것입니다(15:26). 이 육과 영의 갈등이 또한 요한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이란 바로 철저히 인간의 죄성이 육 됨을 고발하는 그 현장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영생의 열매를 심는 것과 동시에 거두기 위하여 오셨습니다(4:36). 또 자기가 원하는 자를(5:21)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기 위해 오셨습니다(5:24). 또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6:27). 또 믿는 자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처럼 성령이 터져 나오기 위해 오셨습니다(7:38-39). 또 믿는 자에게는 율법의 노예생활에게 자유함을 주려 오셨습니다. (8:32) 또 눈을 뜨고 빛을 보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9:5/39) 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 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오셨습니다(11:25). 또 예수님은 자기가 선택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여(13:1) 하나님의 처소로 삼아 영원히 함께 있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14:2/23). 또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드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15:5). 이 모두를 한마디로 말하면 영생입니다(17:3/20:31). 이 영생이야말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아들도 이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17:5). 이상의 여러 가지일 때문에 공생애 초기부터 아들의 영광됨과, 인간의 육의 절정이요 가장 육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종교적 바벨탑인 헤롯 성전에 대한 청결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7. 사 도 행 전

 

예수님이 자신의 땅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룬 새언약이(누가복음 22:20) 옛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여호와의 언약의 일관성에 모순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지향하는 바를 비로소 제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속하신 바가 인간의 무능과 부족과 죄악성 때문에 파기된 것이 분명한 이 시점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찾아 온 여호와에게 기만당했는가? 아니면 또 언약을 남기신 분이 스스로 언약 상대자의 부실 때문에 스스로 언약을 철수해 가 버렸는가? 그럼으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분도 상대의 부족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1:6). 새언약이 가지고 있는 본질과 내용은 그 언약의 설립 뿐만 아니라 그 전달과정에 까지 나아가야 충분히 그 값어치를 알게 됩니다. 역사의 계속적인 존속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역사란 언약의 본모습을 마음껏 발산하는 시간적 영역으로서 존재합니다. 그 이외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피조세계는 왜 여호와께 버림받아야 하며 그 가운데서의 구원이 왜 예수그리스도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가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언약은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없이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의 목적이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 언약을 위한 질서 있는 배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창세기 8:22/ 시편 19:1-6/ 로마서 10:18).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40일간 제자들과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1:3).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란 이스라엘이 고대한 언약의 목표지점인 여호와께서 친히 왕으로 다스리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옛 언약 입장에서 고려된 내용이지 결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세계를 고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언약의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란 누구에 의해서 전달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이스라엘만 입니다(1:4). 1:3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이미 성취된 부분은 사도들이 전달하는데 그냥은 전달될 수 없고 능력이 임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어떤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이미 예수님께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과 사건을 선포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으로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고 그럴 때 비로소 옛언약과 연관성을 갖게 됩니다(1:8에서 증인이 갖는 뜻이 중요합니다). 교회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 증인들이 선포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될 사항은 옛 이스라엘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비로소 이 시대에 일관성 있게 달성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도외시하고는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말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를 이해할 때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본질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3:23/ 15:16-19/ 18:10/ 에베소서 2:11-22).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간다고 해서 중심이 그렇게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쪽에서 이쪽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 안으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 비어 있던 한자리의 제자석(弟子席)은 제비뽑기로 채워 12를 맞추어 놓은 것과 각 나라와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한 그 날에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이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예루살렘의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선포하고 전달하여 그들 지방에서 제2의 제3의 예루살렘의 사건을 반복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조치였습니다. 성령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건을 말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이렇게 볼 때에 비로소 교회가 교회를 나타내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기관의 타당성을 가지게 됩니다(14:22-23). 결국 사도란 예루살렘에서 보내지 않는 자는 정식으로 사도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옛 이스라엘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9:26-30,갈1:18/2:1). 그리고 그 사도들이 인정해주지 아니하는 감독이나 장로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20:28/에베소서 2:20). 이상의 모든 처리는 참된 이스라엘 모습을 역사 안에 나타내 보임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역사에서도 그 초월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 초월성의 기반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묵시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할 때는 교회가 아닌 것이 무엇이냐를 따져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아니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人子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인자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비묵시적인 존재는 다 교회가 아닌 것입니까? 교회의 묵시성은 언약의 역사성과 상호 모순될 수가 있습니다. 즉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볼 때는 이는 역사적 단체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역사 속이 아니면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자로서의 주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점에서(다니엘 7: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 묵시성을 지닌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자와 교회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분명 현재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인자는 현재에 있어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또 주로서 온전하고 합당한 영광을 미래에 다 차지하실 것입니다(요한 1서 2:27/ 베드로 전서 2:9). 옛언약 상황 아래서는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여호와의 형상을 가져야 되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수난도 겸하여 받아야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그래야 역사 속에서의 예수님의 주 되심을 나타내고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라져 가는 역사 속에서 새언약이 지닌 의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되고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공생애의 길을 가도록 요구받은 신앙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이 하는 역할 때문에 예수님이 보상으로 마련한 그 상급과 기업에 참여되어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진 자들입니다(마가복음 3:31-35). 그러면 여기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축소하여 생각합시다. 교회와 주님의 관계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관계는 언약 관계입니다. 어떤 언약관계인가 하면 새언약 관계입니다. 새언약 관계는 옛언약이 목표한 모든 기대가 다 함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주님관계는 다윗언약으로 말해서 왕과 왕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백성의 관계입니다. 사도바울은 창조언약에 빗대어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또 모세언약에 빗대어 아버지와 장자의 관계로도 보고 있습니다. 어쨌던 교회는 역사속의 존재라는 점이 대단히 중요시됩니다. 세상은 주님을 교회에서 보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새언약을 포기하면 교회됨도 상실되고 동시에 세상은 주님으로부터 소외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자신의 주 되심의 완성을 위하여 다른 이를 교회로 선택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소멸이 아니라 교회의 이동이 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5). 주님은 영원 전부터 교회 즉 언약의 상대자를 예정하고 선택했지 어떤 한 인간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새언약을 보여주지 않고도 살아가는 인간은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하에 새언약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고 또 나타내는 그 자가 바로 영원전 부터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들입니다. 예정론을 자기 입장에서 확증하지 말고 언약 중심에 서서 발견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을 자기의 성전으로 집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형상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교회란 묵시를 위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역사를 고발하고 또 용납하여 봅시다. 교회는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어 설립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를 보내고 또 그 사도가 장로나 감독을 세워 교회를 감시케 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4:23-24/ 20:28). 양을 친다는 말은 비복음적이며 비그리스도적인 요소가 스며들지 않기 위해 진리의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해서는 큰 어려움이 없는데 누가 사도가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요구됩니다. 소위 사도와 사도 후 시기의 장로나 감독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해서 다 사도가 되는가 하는 점과 어떻게 해서 12제자 중 하나가 아닌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연구 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의 명확한 기준은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다 사도가 아닌 것입니다. 집사의 직분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12제자군에게 이방전도를 맡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특별히 이방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란 분명 증언과 관계있습니다(사도행전 1:8). 증인이란 부활의 목격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예수님의 공생애와 부활을 상호연관 시키고 그것을 통해 어떤 하늘의 비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이해력을 가진 자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제자삼아 가르쳐야 하기 때문 입니다(마태복음 28:19-20/ 로마서 16:25-26). 스데반 같은 경우에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사도라고 부르기 곤란할 것입니다. 그러면 12제자에게만 사도권이 제한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12제자 선택이 그들만이 사도로 포함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12제자의 선택은 무슨 의도로 선택한 것일까요? 또 그 중의 한사람은 왜 사도에서 탈락 당합니까? 이것은 분명 새로운 시대에 있어 어떤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에베소서 2:12-20). 옛 이스라엘을 부활의 차원에서 연속성을 유지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완성을 교회를 통해서 구현 되었음을 공포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12제자의 선택과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사건 등은 장차 교회됨의 model case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육신과 그들의 육으로 만남을 통한 선택이었지만 사도바울의 경우와 다른 일단의 사도군들은 부활하신 주의 입장에서 육신의 그들은 선택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자에게 다 공개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자에게만 부활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았다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가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선택의 의미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6:19).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옛언약의 완성체가 바로 죽음과 타락된 아담의 역사와 율법으로 부터의 주 예수의 인도함을 인한 탈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도에 기초함은 교회 자체가 또한 사도성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는 또한 언약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 언약성의 확산을 통한 새세계 창조를 시도합니다(사도행전 :15-2:4). 각가지 은사를 주지만 그 은사의 목적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기능들입니다(고린도 전서 12:1-4). 성령님의 이러한 적극성은 교회의 종말 선포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진리됨에 대항하는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 가운데서 언약공동체의 분명한 자기 모습을 찾아 가도록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요한복음 16:8-11/ 에베소서 2:21-22/ 4:15-16). 교회의 임무란 이처럼 새언약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어떤 식으로 새 언약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것은 고난입니다. 어떤 고난이며 어디를 model로 한 고난입니까? 여기를 풀면 여기에서 증인의 증인됨의 주체성이 밝혀집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조사해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와 바울 생애에 어떤 유사점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구조와 사건의 유사성을 보게 되면,

 

누가복음 사도행전

1:1-4 데오빌로에게 드리는 헌정사 1:1-2

3:22 성령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오심 2:1-13

4:16-30 첫 설교 2:14-40

5:17-26 중풍병자가 치료받다 3:1-10

7:1-10 백부장이 예수님(복음서)과 베드로(사도행전)를 10:-23

자기 집으로 초대하다.

7:11-17 과부의 아들의 소생 9:36-43

9:51-19:28 예수살렘에로의 수난여행 19:36-43

22:5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사도행전)이 체포되다 21:30

22:63-6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사도행전)이 매질을 당하다 23:2

22:66/23:1 예수님(복음서)과 바울(사도행전)에 대한 23-26

8,13 네 번의 재판

23:4,14,22 세 번이나 무죄 선언을 받은 예수님과 바울 23:28/25:25/26:31

 

이번에는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바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봅시다.

 

I. 베드로의 장 (1장-12장)

II. 바울의 장 (13장-28장)

베드로의 장 바울의 장

앉은뱅이 거지의 치료(3:1-10)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료(14:8-11)

베드로와 마술사(8:14-25) 바울과 마술사(13:4-12/19:13-19)

다비다 혹은 도르가를 살림(9:36-43) 유두고를 살림(20:7-12)

베드로의 수감(4:1-22/5:17-42) 바울의 수감(16:16-40)

베드로의 기적적인 출옥(12:7-11) 바울의 기적적인 출옥(16:26-34)

예루살렘에서 매맞은 베드로(6:40) 빌립보에서 매맞은 바울(16:22-23)

베드로를 경배하려는 시도(10:25) 바울을 경배하려는 시도(14:8-18)

스데반의 돌 맞음(7:54-60) 바울의 돌 맞음(14:19-20)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베드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바울

(15:7-11) (15:12)

성경을 연구하는 내시(8:26-40) 성경을 연구하는 베뢰아(17:10-12)

사도들이 계속에서 설교하도록 천사가 바울이 계속해서 설교하도록 환상이

격려함(5:17-21) 격려함(18:9-11)

베드로가 유대적 의식을 따름(3:1) 바울이 유대적 의식을 따름(18:18/

21:23-26)

산헤드린 앞의 베드로(4:5-22/5:22-42) 산헤드린 앞의 바울(22:30/23:10)

베드로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5:15/16) 바울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28:8-9)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눈 멀게 함

저주하여 죽게 함(5:1-10) (13:8-11)

 

위와 같이 예수님의 사건의 반복성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예수님의 초월됨이 역사성 안에서는 고난으로 계시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의 초월성이 같은 고난으로 증명되게 하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바로 새 언약의 초월성에 이스라엘이 예수님에 의해 참여된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아니라 승천사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역사의 質을 바꾸는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새 언약에 있어 승천은 예수님만 역사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님을 선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자의 보내신 자도 그 차원 안에 있음을 공포한 입니다. 또 그러한 묵시성은 역사 속에 어디에서 공통성을 갖는가 하면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빠뜨린 그 세력에 의하여 동일한 고난을 지닐 때입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으로 데려간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승천케 하므로 역사를 초월한 분임을 증명시킨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님은 언약의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과 생애를 반복하도록 하시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운명을 역사를 초월하는 운명으로 마지막 날에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한 조치를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님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사건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여기에 선교나 전도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전하는 그 목격된 사건을 위하여 고난도 함께 각오해야 합니다(14:22). 그럴 때 비로소 증인 노릇을 한 셈이고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란 포섭이라든지 인력의 동원이 아닙니다. 선언이며 심판의 공표입니다. 앞으로 남은 새 언약에 속한 마지막 사건인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마치 예수님의 생애를 지속 시켜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만유의 주가 되신 것처럼 이제 그 새 언약이 역사를 바라보면서 선언하는 바는 옛날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성취가 이스라엘을 낮아지게 함으로 그들도 만유의 왕의 자리에 앉게 됨으로 옛 언약의 성취로써 새 언약의 의의가 살아납니다(고린도전서 3:21-23/요한계시록 20:6).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서 새로운 종말을 경험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로마, 그 어디든지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종말의 현상이 발생되고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남은 자들이 등장됩니다. 공간과 시간, 이것은 새 언약을 나타내 보이는 영역으로 아직도 존속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새 언약에서 바라본 역사의 의미를 생각한 동시에 교회가 등장되었다고 한 그 자체가 예수님의 새 언약을 통한 사역은 지금도 중단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란 증인들이 고난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사건을 선포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편에서 예배와 선교와 교육과 교제를 잘 mix하여 세워 보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종교 단체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주어지는 것이지 땅에서 그 사건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8. 바 울 의 신 학

 

바울신학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에게 나타난 일을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여호와의 언약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또 연관이 있다고 단정해 버릴 수 있는 객관적 증거는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으로 풀어나가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제일 충격적인 사건은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은 그 인물을 하나님께서 그를 주가 되게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점은 바울이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감을 일시에 허물어 버린 사건을 경험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사도행전 9:1-9). 살기등등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가는 바울은 그 당시만 해도 나사렛 예수는 완전한 여호와에게 이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이 율법대로 하나님의 저주의 표정인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23). 저주받은 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등의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당사자를 여호와께서 주가 되게 하셨다면 바울 자신이 단순히 「구원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라 유대교가 안고 있는 신학 자체에 큰 변혁이 일어나야 됨을 느꼈습니다. 유대교 신학의 중심은 여호와와 이스라엘간에 언약으로 표현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언약 때문에 세상을 버리면 버렸지 이스라엘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결국 사흘만에 여호와께서 다시 죽음에서 일으켜 주가 되실 그 당사자를 이스라엘이 힘을 모아 그들 자기 세계 밖으로 죽음으로 몰아낸 것밖에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라면 이스라엘이 평소에 생각하고 자신있어 해 왔는 언약 해석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만천하에 노출된 셈이 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입니까? 문자적으로 빈틈없이 지혜를 짜 모으고 했을텐데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개 같은 이방민족에게 메시야를 죽이는 일을 수행하게 하시지 않고 고상하고 거룩된 생활 하기로 소문난 언약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 일을 저지르게 해서 그들에게 창피와 죄책을 한꺼번에 뒤집어 씌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명예에 손상이 갈텐데 말입니다.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여호와의 속 마음을 몰랐던 게 됩니다. 그러면 옛 언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像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버렸던 자의 건짐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여호와의 생각은 “버림”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46). 그런데 그 분의 버림은 단순히 나사렛 예수 개인만의 버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주는 세례에 함께 동참함으로 말미암아(마태복음 3:13-15) 온 우주에 대한 심판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온 심판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버림당함은 여호와 자기 백성의 버림입니다. 이로써 이 순간 모든 것이 無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회심 전의 바울과 유대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은 그는 여호와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죽음도 이스라엘의 운명과 하등 상관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은 유대교의 생각은 이스라엘 민족 자기네의 입장에서 언약을 이해라고 있는 반면 교회는 예수님 입장에서 그들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도 자신을 구원할 때만 비로써 전 세상에 구현된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유대교인들은 사도들과 같은 동시대 사람들이고 꼭 같이 예수님의 소문과 그 분을 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평소에 말씀하신 그 주장이나 사상에 대하여 귀담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제3자들 보다 예수님을 덜 연구했다기 보다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데 기인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특별 교육을 받았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예수님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의 경우와 같이 사람에 의해 버려짐을 당했던 분은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단순히 그 버림에 참여한 자를 정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의 수단으로 예수님의 사건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시의 방편이라는 점에서 가롯유다의 행위가 잘 했다거나 하나님도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도록 도우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언약이 우리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나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여지를 주기 위함이 아닌 것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행동이 이 시대에 침투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행위에 있습니다. 물론 은혜와 사랑과 자비가 우리 인간들의 무지와 죄성과 대조하고 비교함 속에서 부각되지만 초점은 역시 사랑에 의한 구원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실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이제는 율법적인 것보다는 이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거부하는 자에게 사정없이 심판으로 주어지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더 이상 모든 일에 있어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일한 언약 상대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언약 상대자는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언약 상대자(그리스도)가 해야 될 일은 훼손된 언약을 재건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창조사역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창조가 우선이 아니라 우주 창조가 우선입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관을 언약 가운데서 파악하고 그 다음 그 언약 수행자의 입장에 선 그리스도에게 우주론 근원을 맡기고 그 우주 가운데서 인간이 아닌 “형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바로 인간학에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폭 넓게 펴져 있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공개 되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나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한번도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언약하신 분과 언약 상대자가 분명히 밝혀진 상태에서 창조사역을 재조명하기 때문입니다. 언약 관계에서 나타낼 내용은 딴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조사역 같으면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 사역은 완성됩니다(창세기 2:1).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완성된 사랑과 공의가 드러나는 창조가 될 때 비로소 창조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창조에 어떤 결함도 없음을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탄식하는 것 가운데서 말입니다(로마서 8:23). 그러니깐 사도 바울은 이는 필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골로새서 1:15-17).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정향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만물의 통일의 속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0). 구원론은 이제 창조론의 기초가 되며 내용이 되어집니다. 창조의 완성체로서의 구속입니다. 창조에서 출발했던 구속의 역사는 창조의 숨겨진 지혜와 비밀을 밝혀지는데서 도착 지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9/골로새서 1:9).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위해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하나님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 천하를 덮어 버릴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형상이 구체적으로 인격화되어 역사 속에 나타난 증거로 나사렛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듭니다(골로새서 1:15/고린도 후서 4:4). 이것은 단순한 창조가 아니라 창조에 담긴 하나님 형상이 됨과 동시에 옛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건들은 신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해주는 증거 관계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적 입장에서 비로소 그 실질적 의미가 주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 되어지며 신약 성도들은 구약에서 얻어진 교훈과 훈계가 역사가 존속하는 한 늘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것을 적용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무조건 기대를 걸게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아담 즉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한 피조성만으로 규정 지을 것이 아니라 창조 사역을 담당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담을 생각합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피조성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해야 될 일을 그가 그르쳤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입니다. 창조론에 구약에서는 피조성에서 풀이 되지만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구속했다는데서 아담은 그리스도와 대비해 볼 때 어떤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을 통한 자신의 형상의 다른 면을 보이는데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해석의 초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의 역할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는 그 사망의 왕이 된 상황을 극복했는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로 나와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22-23에서는 창세기 1:22-24에 나오는 한 몸 되는 사상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이에 연관시킴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언약 하에서도 부부관계에서도 그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의 면을 보여 주는데 한 몸 되는 목적과 동기가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 사실은 타락이후 아담이 하와에게 보여준 원망의 말은 (창세기 3:12) 한 몸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미흡한 처사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노아와 하나님간의 언약도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봅니다. 창세기 6:3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상대한 것은 노아 보다는 노아라는 형상을 통해 언약을 이 지상에 세워두기 위함이었습니다(창세기 6:18). 따라서 노아를 통해 나타난 그와의 언약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8:2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창조질서를 신실해서 유지한다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구약의 의미로 볼 때는 말씀이 전 세계 널리 펴지게 되는 자연이 주는 배경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시편 19:1-3). 그 배경이란 하나님이 제시한 우주적 증거는 그 누구도 여호와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못 받아드린다는 핑계를 허용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홍수로 마땅히 벌써 멸망당해야 하는 인간세계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 여호와는 나에게 어떤 증거와 언질을 준 적도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노아언약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무시하고 나오는 말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도 아버지께서는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말미암아 노아언약의 은혜를 강조했지만 이제는 새언약이 완성된 입장에 서서는 바울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야 될 그 언약적 근거는 노아언약에 있음을 천명함으로 노아언약이 비로소 복음전파 하는 그 자체로 완성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노아언약이 악인과 선인 구분 없이 자연 질서가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 귀한 복음도 마치 햇빛이나 공기나 비가 무상으로 제공되듯이 전달되는 바로 그것이 노아언약이 지향한 완성의 모습이요 거기에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약에 있어 노아 역할을 하는 것은 창조 언약의 완성으로서 새로운 형상을 지닌 몸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4:6-9 에서 일한 것도 없이 義로 여기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자의 증거로 아브라함이 등장됩니다. 그러나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안한 것이 아니라 믿으니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15:6). 그러나 그가 믿은 약속의 내용은 그가 기대한 식으로는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방식은 바로 자신이 만국의 아비가 되기로 한 때로 부터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자식을 바랄 수 없는 가운데 고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므로 아브라함은 비로소 복의 근원에 예속된 자로서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믿음의 대상이 아님). 아브라함 시절 때 아브라함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이고 그 자식을 통해 나의 연약함 때문에 이루지 못한 언약의 완성을 내 자식을 이루어 주리라는 기대였습니다(창세기 22:17-18). 그러나 그 이삭조차 언약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다만 바울에 있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새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어떤 공로가 하나님의 복과 영생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있다면 그것은 이삭도 아니요 야곱도 아니요 오직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갈라디아서 3:16).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복이 주어질 권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며 아무리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언약상대자로 하여금 자신을 否忍하도록 하는 방편이었고 핵심은 자신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 재확인되는 약속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 마음가짐이 하나님이 원했던 형상입니다. 곧 죽임과 그리고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마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의란 바로 경건치 않는 자를 가리워줌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그 실상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한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생존의 방편으로 준 것입니다(신명기 28장). 이스라엘의 모든 움직임은 율법의 저촉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율법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일 때는 하나님의 축복권 밖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율법의 엄위성과 초월됨은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출애굽기 19장).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자기 민족의 구원과 연관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들 행위의 정당함과 자기들 선택의 우월성을 율법 가지고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공정성과 엄위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화되고 무시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그 율법이 지향한 바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율법의 義됨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개입된 것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는데 있었으며 이스라엘 전부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아래 두려함이었습니다(로마서 3:19-20/7:9/갈라디아서3:10,19,22/5:4). 저주 가운데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버림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뜻에서 모세 율법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만의 진리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한 몽학선생이라고 판정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24). 다윗언약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을 보게 됩니다. 옛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의 왕이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총체적으로 구원의 기능을 가진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왕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봉사를 다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보이고자 했던 형상은 인간의 구원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 언약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 같이 그 왕이라는 직책에 대하여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主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왕은 그들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호와의 종의 역할은 양을 목숨을 바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 왕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죄책감 때문에 그러합니다. 왕들이 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할 때 비로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주의 위치에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언약은 누가 주이며 누가 진정한 왕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현재 누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느냐를 보여 주고자 하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림으로서 온 우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확인을 시키고 또 그 죽음이 자기 백성의 죄책감을 담당한 죽음이라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또 그의 주 되심은 아브라함언약과 모세 율법의 완성자로서 주이기 때문에 그 분은 안에서 새로운 선택된 자의 사역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상대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데 초점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우주내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에도 언약관계가 원래부터 존재했음이 비로소 예수님이 주가 된 입장에 와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은 (로마서8:19) 이미 피조세계내에 선택된 자들이 주와의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이 비록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의 등장으로 이미 아브라함 언약으로 예고된 바는 있지만 그들은 (혈통적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의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정적으로 밖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데 달리 관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언약을 수행하였습니다. 온전한 형상을 드러낼 무리들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의 방법은 예레미야 31장 31절과 에스겔 36장26정-27절에 예고된 방식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6:3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언약은 육체와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상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있어 영이란 비실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란 어떤 특수한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에스겔 36:27이나 요엘 2:28-32에 볼 것 같으면 종말이 왔다는 증거로 하나님이 특정인들에게 내려지는 게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생각하면서 마지막 때의 현상으로서 성령이 왔다고 여깁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사도가 어떻게 해석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마는 성령의 보증이라는 표현을 봐서 종말의 현상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에베소서 1:14 로마서 8:23 고린도 후서 1:22). 그렇다면 성령과 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2에 보면 성령을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성령이 육체와 대조가 되는 형식이 됩니다. 종말 때 성령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육체로 율법을 이루려고 하는 그 인간의 행위를 정죄하고 그 자리에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됨을 세우려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진 관계가 성령의 주도함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라 할 구 있고 육이란 성령과 관계없이 인간의 육체로 하는 행위 위에 일하는 모든 모습들 그런 상태를 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이란 종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이며 육이란 영에 의하여 고발 당하고 정죄 당하는 옛 것 전부를 두고 말합니다. 육이 이런 대접을 밖에 없는 것은 사도바울이 보기에 옛 세계가 그리스도를 죽임에 넘긴 순간 부활로 말미암아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도래하는 세계와는 어떤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바울은 종말이 가져다 준 역사 속에서의 갈등을 영과 육이라는 두 세계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장차 주님이 다시 오셔서 부활할 것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성을 인간의 피조성에 근거한 몸이라는 표현보다 여호와의 관계성에 가까운 육체라는 표현이 (창세기 2:7/6:3)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되어 영광스럽게 되셨고 그 분에 창조 언약에 의해 새로운 의미에 있어 피조성을 지닌 성도의 몸도 나중에 부활된다면 성령께서도 육을 부정해도 몸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을 정리해 보면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관계가 이어진 몸을 가지고 영이라고 하는 것이고 육이란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하나를 이루지 못한 육신을 두고 말합니다. 그 관계는 누구에 의해서 성립되는가 하면은 바로 성령입니다. 여기서 과연 성령님의 낮아지심이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낮아지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으로 이룩된 주의 차원을 높아지심 답게 확장해 나아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할은 모든 무릎으로 주 앞에 굴복시키고 그리스도가 심판 주 되심을 만 천하에 알리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9-11). 바울은 예수님의 人子으로서의 묵시적 활동을 성령의 오심으로 확인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심이 바로 마지막 심판 때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종결 짓기 위한 오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성령님이 그 진리됨을 가지고 이 종말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활동 근거로 삼는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고 또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생을 살도록 충동질한 것이 성령님이라면 성령님은 예수님 통해 묵시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로 역사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시작이 바로 세례였습니다. 묵시적 인물이 역사적 인물에 뛰어들어 종말의 사건을 先取했다면 이제는, 그래서 이루어진 묵시적 나라의 form을 성령께서 이 마지막 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방식이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방식을 벗어난 활동은 하시지 못합니다. 왜냐하며 그 나라만이 역사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자기 백성을 찾아 갈 때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 사람에게 적용이 되되 예수님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역사 쪽에서 묵시 쪽으로 세례가 되도록 하십니다(로마서 6:1-5). 이것은 (로마서 6:1-5)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참여인 동시에 그 열매에로의 참여입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묵시적 존재로 신분이 전환된 것입니다(다니엘 7:22). 심판에서 구원에로서 연합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때와 꼭 같은 활동을 시키지만 예수님 경우와는 달리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라는 것이 한 순간만을 이야기할 수 없고 예수님이 역사에 뛰어들어 자기 백성과 합류하는 것이 언약의 완성이듯이 성령께서 그 완성된 언약에 기초로 하여 예수님이 뛰어들게 했던 언약의 대상이 누군가는 역사가 끝날 때까지 밝혀 질 것입니다(에베소서 1:4). 그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밝혀 질 때까지 예수님을 고난 속에서 밀어붙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도와 교회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연합 되었기에 역사 속에서 고난의 길을 아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로마서 8:17/갈라디아서 4:29). 이것이 또한 세례의 결과입니다. 이제 세례받은 자의 생활은 마치 예수님이 자기 백성과 연합한 결과로 가장 죄인된 모습(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으심)으로 내려가듯이 이들의 생활도 자기를 부인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24/4:19). 성령께서는 날마다 그 사람 속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일으켜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고린도 후서 4:10-12/빌립보서 3:12). 그러나 성화란 우리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신분됨을 재확인 하는 것이지 결코 한걸음 두걸음 계속 완전성에 이르는 내적 성숙의 과정으로 이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노력이 결국 온전한 참여에 있었지 결코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들 처럼 죄를 많이 지을 수 있을까에 힘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거룩이란 분리의 개념이지 아직 미완성을 향한 성장도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은 거룩이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피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옛 언약 안의 이스라엘은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위치 때문에 성도를 통해서 역사에 구현됩니다. 옛 제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만이 드러나도록 그들로 하여금 은사를 주어 산 제사를 드리도록 하여 자신의 옛 모습을 죽이고 몸으로 하고 신체를 가지고 하는 봉사를 하게 하므로 의식이 아니라 생활로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로마서 12:1-13). 바울에 있어 신체의 강조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신체성을 가지고 보여준 것과 같이 형상의 구현에 있어 일치성을 갖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사람을 최종적으로 이끌고 가느냐에 있습니다. 이 싸움이 성도에게 발생됩니다. 성도는 아담을 흙되게 한 세력과 우리를 그 세력에서 불러낸 분의 사랑의 부르심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갈등과 투쟁에서 벗어나고자 人子됨의 마지막 사건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인내와 소망이 요구됩니다(빌립보서 4:5). 성령께서 기어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처럼 (로마서 8:10-11)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성령께서 우리들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은사를 주시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로마서 8:27-39). 재림의 날이 올 때에는 이런 갈등과 투쟁의 시절도 사라지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 상급은 기업과 상속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언약 상대로서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은 상급을 우리와 더불어 누리도록 우리에게 증여하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어떤 자는 물주는 자로 참여하게 되고 어떤 자는 심는 자로 참여되지만 그러나 결국 거두기까지 역사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 전서 3:5-15). 바울의 신학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 바울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고난, 십자가에서의 죽음심 그리고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 마지막 재림이라는 이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바로 구약이 예언한대로 마지막 때에 묵시적인 사건을 간주해서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에게 한 약속을 달성 하였으며 그것이 역사 속에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느냐를 규명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란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관심 둘 것이 아니라 늘 예수님에게 일어난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심을 두도록 자기를 죽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시적인 인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결국 우리에게 증거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만물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로마서 11:36).

 

9. 로 마 서

 

로마서는 복음이 어떻게 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될 수 있느냐를 설명한 책입니다(1:16-17). 율법이나 양심대로 행함이 아니고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성령에 둡니다(1:4). 즉 복음이 생겨난 것이 하나님께 그의 아들에게 행사하신 일 그 자체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무엇이 복음이고 어떻게 해서 그 복음이 능력이 되느냐 하는 것은 그 복음이 생겨 날 때 발생된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그 일에 동일하게 작용된다는 것을 밝혀주면 문제는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복음이 탄생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1:3에 나와 있는바와 같이 다윗언약에 속하는 인물을 이 땅에 출현시키고 그 인물에게 다가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결의 영 되시는 분이 다윗언약에 속한 분을 능력으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 능력을 동일하게 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구원 얻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유효하기 위하여 언약상대자를 산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는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1:27/시편 6:5/시편 13:3/시편 15:10/시편 30:3). 바울은 성령님이 오셔서 한 역할을 하나로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언약 상대자를 역사 앞에 제시하는 일입니다. 모든 언약을 완수한자로서 (다윗언약의 완수자가 기존의 모든 언약도 함께 완수자로 본다) 또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후손들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이미 수행하고 앞으로 수행할 자로서 나의 왕(주)으로 인정할 때 하나님은 다윗언약대로 그 밑에 복속된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함께 주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합니다. 왕과 그 백성들 사이에는 성령님이 개재하여 상호연관을 지어 교제하데 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는 정결케 하는 신이 언약에 관여한다는 선지자의 약속에 따른 주장입니다(에스겔 36:25-27/로마서 1:3-4). 따라서 선지자들이 약속한 그 약속 즉 복음을 믿는자들에게는 구원이 능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 약속을 최종적이면서도 또 영원한 언약을 여기고 유지 보존하기 위해 언약상대자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 약속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행함에서 나오는 의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행함은 언약이 예언한 약속이 발생되지는 않고 부활의 영과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약속이란 언약의 완성된 형태를 가지고 다시 옛 언약을 바라볼 때 비치는 언약의 개념입니다) 바울은 왜 오직 믿음으로냐를 설명해 나가면서 창조언약부터 시작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1:18-20) 그런데 그 신성의 그 분이 만드신 것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우리가 만든 것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사도바울은 그 창조된 것을 가지고 우리의 창작물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합니다(1:22).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다는 증거는 우리가 만든 것에다 신성을 부여하는 행위로 들통이 나버린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것을 인간이 제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상이나 동물의 혼합된 모습으로 된 신상이나 또는 예배당을 화려하게 장식한다든지 부적이나 신비의 주술적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특수한 물건이나 제사기구, 반복하는 문장 나열과 행동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데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경건치 않음이 곧 불의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1:18,28). 모든 불의와 경건치 않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도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1:32에 보면 “사형에 해당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순종 여하에 따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삶과 죽음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주권적인 관계를 창조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아담의 죽음과 후대 인류의 죽음이 같은 이유에서 찾아왔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아담과 후대 인간이 동일합니까? 1:24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각자 정욕에 팔렸습니다. 마치 아담이 욕심이 팔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어 내버려 두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이고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죄와 정욕 속에 헤매이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은 사도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의 참 모습과 그의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주시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핑계치 못하기 위한 조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1:18-20). 결국 사도는 로마서 1장부터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 걸쳐 나타나는 죄의 보편성 문제를 창조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2:5-8). 하나님의 창조언약은 유대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2:14-15).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들로서 하나님께 책임추궁을 당해야합니다. 이 이론의 명백한 증거는 죽음이 이스라엘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왕노릇 하고 왔다는데 있습니다(5:14).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능력에 대한 도전의 일환으로 거기에 대체하여 인간 쪽에서 만드는 형상은 인간이 욕심과 죄의 지배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죽음으로 결말납니다. 이 죽음은 심판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며 (2:1-4)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외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특수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러한 창조언약의 죄책으로 부터 면제받기 위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창조언약에서 예외규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율법 자체가 말해 줍니다. “도적질 말라 분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2:21)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데 이 점에 있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혜의 대상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할례는 거룩을 위한 선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할례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증표입니다. 유대인 만큼은 다른 민족과 달라야 하는데 그 차이점이 단순히 할례의 유무에 국한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할례 즉 선택의 지향하는 바는 율법의 완벽한 준수에 있습니다(2:25). 이방인들의 무할례와는 달리 할례받은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율법이 요구하는 理想的 인격이 되어 주기를 요구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만큼은 하나님의 정신을 구현해 줄 민족으로 역사 속에 나타나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정신인즉 하나님은 참되시다(3:4). 하나님은 의로우시다(3:5)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그것이 바로 유대인이요 할례를 행하되 마음까지 거룩한 신령한 자들입니다(2:28-29). 결국 유대인의 나음이라는 그것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의인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보다 분명히 파악했다는데 있는데 그 사실은 곧 하나님은 불의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3:5). 여기에서 바울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는가에 대한 이유를 나타냅니다. 만약 율법으로 인간이 외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나타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21)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난 것을 보아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인간,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상관없이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3:9-19). 율법의 행위로는 외롭다 할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3:20) 이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는가 하면은 하나님께 선택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이 우선이 아니라 선택이 우선인 것입니다(아브라함 언약 따라).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브라함언약의 주제라고 볼 때에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된 유대인조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선택 받은 자는 어떤 구원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3:22) 믿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해서 차별이 없다는 말과 상치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여기서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특정 종족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결코 아브라함 언약이 철폐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 유대인은 즉 선택된 자들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구원을 행위에 둘 경우에 그 사람은 아브라함 언약의 의의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이 행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의 非行을 골자로 하여 행동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인간 행위의 결과로 주어진 그 피해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새로운 의가 될 때 인간들은 자기 행위에 대하여 어떤 정당함을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3:25)? 바울은 아브라함 언약을 거론하면서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합니다(4:4-9). 아브라함이 선택받을 때는 분명 무할례시입니다(4:10). 그가 나중에 할례를 받게 된 것은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난 후 부터입니다(4:11/창세기 15:5/창세기 17:10). 이로서 일단 할례 유무하고 의롭다 받는 것하고는 관계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있어 행함이 아닌 믿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축복을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죽은 몸을 지닌 자기들 몸에 축복(아기 가짐)이 지속될 줄을 이삭을 통해 확인했다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그 순간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의로움을 부여함의 의미를 안 것입니다(창세기 15:6). 이 의로움은 하나님의 공로이지 자기 공로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의 거부로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 이 이삭에 자리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차지하고 있습니다(4:25).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단순히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가 아님을 밝히는데 그것은 그 사건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 언약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인 것입니다(4:16). 어떻게 해서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되느냐 하는 것은 (1:16)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화목제물이 된다는 데서 (3:25) 해결을 본 셈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 사랑의 화목을 즐거워 하게 되는데 (5:11) 이제 남은 것은 영광입니다(5:2-5). 5장에서 부터 7장까지 바울은 믿음을 주님과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와 귀함과 능력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존재가 결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함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아래 철저히 팔렸나를 공개하는 기능이 있는데 그 거룩한 율법조차 우리는 죄를 짓는 통로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죄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5:20/6:17-18/7:8-10,22-24). 그러면 그 연합(세례)을 온전케 하여 마지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5:2,8:23-25) 성령님이 성도들에 대한 구체적 활동은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집니까? 우선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십니다(5:5). 그 사랑 안에서 우리들에 대한 “살림”이 달성됩니다(8:10).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불러 양자의 자격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케 하고 (8:15-16) 또한 그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에도 참여케 합니다(8:17).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으로 몰아 넣습니다. 물론 나중에 영광된 형상까지 참여됩니다(8:30). 누가 이런 성령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작업을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 하나님 그 당사자이신데 말입니다(8:32,38-39). 이게 바로 언약에 의한 선택의 진수라는 것입니다(9:8-14,20). 주 예수님은 참된 언약 백성을 가리기 위해 세상의 거침돌로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주장하려는 자들을 제거하고 구약에서 말한 참된 남은 자를 구체화 시키는 작업 때문에 보내진 분이십니다(9:24,33/10: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만이 남은 자요 언약의 백성입니다(11:36).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11:34)?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백성은 구약 때의 죽은 제사로가 아니라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제사로서 율법의 정신을 구현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12:1-21/13:8-10). 또 그것이 믿음의 실제적 열매이기도 합니다(14:23). 로마교회는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사도는 성도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16:1-24). 이상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 옛날에는 감추어진 것인데 주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 만인을 위한 기쁜소식(복음)으로 제공된 것입니다(16:25-27).

 

10. 고 린 도 전 서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뒤 역사에 남겨진 교회가 현실 속에서 어떤 갈등과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그것과 교회 본질사이의 상관관계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고린도 전․후서 입니다. “예수 안에서” 비로소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면 (1:2) 예수 안에서가 교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관권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 아담 계통인 “우리 안에서”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까? 왜 은혜가 계속해서 요구되며 왜 하나님의 평강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하는 것입니까? (1:3,7) 그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소위 거룩한 자들이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음 알 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고린도 후서 4:4-6).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영광이 아닌 세상을 초월한 주의 주 되심의 영광으로 덮어버리는 동원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도에게 남긴 것으로 추진됩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성도를 보고 교회를 잘 세워라든지 어디를 개척하라든지 그 방법은 이러하다든지 조직력을 강화하여 질서 안에서 교회가 자체적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라든지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단체로서의 교회가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늘의 것을 제대로 세상에 보이라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다움입니다. 그 교회다움은 오직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책망하고 훈계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이 은혜됨과 평강의 훼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은혜란 非소유를 의미하며 뭔가 이미 우리 쪽으로 확보한 것을 인정치 않고 몰수하고 들어갑니다. 그것이 고매한 품성을 지닌 사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1:12-16/3:4-6,21-22). 바로 이 은혜의 출발이 십자가이며 (1:17-2:2) 그 뒤의 진행되는 모든 성령의 사역도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며 능력이 있으며 구원과 영광까지 좌우하고 있음을 소개하는데 전력을 다합니다(2:3-3:1). 그러면 이 은혜됨이 무엇과 대조가 되어 교회 내에서 부각이 될까요? 그것은 성도의 육신됨 입니다(3:3).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선언 이후 (1:25) 그것이 왜 위대한가를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통해 보여 줍니다. 첫째는 파당의 싸움이었습니다(3:4-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 누구도 구원의 기초에 개입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3:7,11-15). 성령께서 그 성도를 성전으로 삼아 일하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3:16-2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만물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종사하기 때문입니다(3:21-23).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계속적인 신뢰(faithful)입니다(4:2). 자신의 것에 관심 두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에서 볼 때는 만물의 찌끼 같이 보이고 미련하게도 보이겠지만 그러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4:4,9-13). 사도의 이러한 세상관은 누구나 본받아야 합니다(4:16). 그러나 사도의 이러한 철저한 신앙이 그들 눈에 띄지 않으니깐 마구 방탕의 길로 간 것입니다(5:4-5). 그것을 사도는 교만이라고 합니다(4:1/9). 그 방탕 중의 하나가 음행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이런 자를 용납하는 것 자체를 사도는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 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됩니다(5:7).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판단해야 될 정도인데 세상한테 판단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씻음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6:11). 성도의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성전으로서 움직이는 것입니다(6:19-20). 이 몸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값으로 산 팔린 것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6:20/7:23). 인간이 자신의 욕정을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하는데 그러나 그 혼인 자체가 성도에게 궁극적인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세상 행적은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7:29-32). 두 번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상제물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교회내에 신앙 약한 자들이 볼 때 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듯한 인상을 받고 낙심해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8:12). 그래서 기존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을 생각해서 절제 있는 행동을 취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도 자신 같으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8:13). 그러면서 그런 양보가 바로 사도가 가지는 특권을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님은 자신이 아내나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자비량 하고 결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유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약한자들을 망하게 하는 분별 없는 자유로 사용 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마저 참된 자유입니다. 이 모든 절제가 생명으로 향하는 다른 목표가 있기에 생기는 것입니다(9:25). 이 모든 이야기가 신앙인이 넘어 또 넘어서야 될 시험들입니다. 하지만 감당할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시험을 당할 때면 다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케 하는 것입니다. 즉 원망할 권리조차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다시 확인시킵니다(10:13). 옛 습관으로 기독교를 이해한 자들에게 우상 제물 먹는 것이 하나의 큰 도전 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데 가치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10:31). 세번째 문제는 교회 내에서 남녀간의 구별 문제와 무절제한 은사로 화평과 조화가 깨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남녀의 문제를 창조 때의 원래 자기 자리에서 볼 것을 요구하면서 해결하고, 은사는 모든 것을 원래 제공하신 분 즉 같은 주님에게서 나왔다는데서, 소유개념 때문에 야기된 분쟁을 해결합니다.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주신 분이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드러내라고 주셨나 하면은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에 봉사하고 또 그 봉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를 위한 것입니다(12장-14장). 이상과 같이 사도가 전달하는 복은 진실된 것일수 밖에 없는 것이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도 인정한 그 분에게 일어난 사건 안에서 제공된 내용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15:8). 단순히 성도가 이 복음 받고 자기가 알아서 부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된 분이 제공한 복음이기에 부활이 오히려 성도의 운명을 이기는 것입니다(15:14,55-58). 이미 영광 중에 계신 분이 준 내용이기에 영광이 우리의 흙에 속한 몸도 영광스럽게 합니다(15:4,9). 복음자체가 이미 부활의 내용을 지녔기에 동시에 죽음의 내용도 지녔는데 그 죽음의 능력은 아담 안에 있는 자 누구든지 적용되고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게 적용이 됩니다(15:22-24).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만하여 연보도 하고 돕기도 해야 됩니다(16:1-2,14). 이런 사랑의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가 가지는 또 다른 면 즉 저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됨, 성도가 성도됨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가능합니다(16:24).

 

 

11. 고 린 도 후 서

 

고린도 후서는 교회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광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위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주 예수님을 인도하셨던 그 방식대로 주의 환난에 동참되어 있는 교회도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1:3-7). 이 일을 증거하고 알려 주기 위하여 사도가 있으며 또 그 사도의 고생도 그것을 겨냥한 일입니다(1:8,15-19).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시고 한 일이 어떻게 중도에 포기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여지간 하거든 용납하는 것이 옳은 것은 그리스도의 용서가 진가를 발휘하기 위함입니다(2:1-17).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主 목적이지 세상 일로 만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3:5-11). 그 예로 모세 때의 경우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고 온 모세를 그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주목하지 못했을 정도여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만 대화가 된 것을 볼 때에 그 영광은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고 사라질 정도라면 주의 영이 갖다 주는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습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찬란한 영광이 이제는 주의 영의 자유함 때문에 그러합니다(3:12-4:6). 따라서 그 영광의 모습이 이제 사도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은 그야말로 세상도 감당 못하는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4:8-9) 사도는 자신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날마다 죽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결국에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에다 관심을 쏟게 하고 (4:15) 보이는 영광보다 보이지 않는 영광에다 후패한 몸의 소망으로 삼게 합니다(4:16-5:7). 이러한 영광에로의 귀의는 우선 자기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만을 위하여 죽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을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여 성취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해방의 유일한 동기이기 때문입니다(5:14-17).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는데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있을 수 없다고 사도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화목의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은 그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않고 (5:19) 다른 데로 이동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그들과는 화평하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어야합니다(5:21). 이것을 가지고 사도는 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5:21). 즉 화목 당한 우리가 하나님의 義로운 사역의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화목의 의지가 사도의 생활과 일생 가운데 드러나는데 세상이 보는 안목과 실제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곧 죽은 것 같으면서도 살아나는 능력의 義의 병기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6:7). 따라서 화목의 결과로 나타난 義와 세상의 비화목된 상태에서의 불의가 어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삼았으니 빼앗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가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에 이를 때까지 있었던 근심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는 복된 근심인 것입니다(7:10).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면 그것이 실제의 생활에서 번져 나와야 할 것입니다. 헌금이나 연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기반을 두고 나타나야 합니다(8:7/9: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사도 됨을 통해서도 외모에 집착해 있는 교회에게 (10:7) 외견상 보잘것없는 것으로 진리의 파수꾼을 평가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11:15). 예를 들면 몸이 약하다든지 (10:10) 말하는 것이 신통치 않다든지 (11:6) 대가 없이 진리를 전하는 이것이 (11:7) 사실은 오히려 진리는 외모와 상관없다는 증거와 교회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자신이 받은 고생과 그리고 신비 이런 것이 자기의 사도 됨을 증명하는데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약한 그것이 나에게 능력입니다(12:10). 이 약함은 곧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심을 보여 주는데도 나타납니다(13:4-5). 그리스도가 약함으로 십자가에 달렸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분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런 자세와 믿음이 여기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도 하나님께 버리운 자입니다(13:5). 믿음의 세계에서의 온전이란 곧 우리가 약할 때입니다(13:9/12:9).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이 자신을 파견하신 것은 교회에 대한 위로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 과정 하나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로지 은혜와 진리의 본질을 알려 주자는 데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이는 이 역사 속에서의 교회는 주님이 역사 속을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여정에서 비로소 참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것이 곧 영광이 가지는 역사속에서의 진면목임을 알게 됩니다.

 

12. 갈 라 디 아 서

 

편지가 시작되는 문구로 봐서 갈라디아서는 두 이론의 대립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소개하는 형식이 되어 있습니다. 한가지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1:1).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어떤 기준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도 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1:8). 여기에 자연 일반 사람들의 반발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 대하여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는 어조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주장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도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1:12).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사도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자기가 다른 사도들을 찾아간 것은 자기가 받은 계시가 결코 다른 사도들에게 배운 것이 아님을 밝히고 오히려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면책까지 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를 또 사도로 삼으신 것은 베드로의 같은 경우에는 할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의해서라면 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사도가 되기 위해서랍니다. (2:8) 그러면 이 둘 사이의 복음의 내용이 다르냐 하는 문제가 생기겠지만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 질 수는 없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2:16). 그렇다면 만일 예수 믿고 난 뒤에 죄가 또 다시 나타난다면 예수 믿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죄를 정죄 하는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한 다른 면입니다. 죄로 인해 이미 사형 선고되어 집행이 된 자신을 어디서 고백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2:20). 이제 내가 살고자 하는 탈출구는 이미 경험한 율법의 세계가 아니라 앞으로 개방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2:19).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다른 면입니다(2:20). 죄라는 것은 율법과 관계없으면 나타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율법으로부터의 죽음으로 이해함으로 인간에게 정죄를 가할 근거를 제거하게 되니 의와 죄의 기준이 그만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무색케 하는 시도가 곧 사단의 시도로 보입니다(3:1). 성령님은 항상 십자가를 새 창조의 근거로 내세우기 때문에 십자가 의식을 무력케 하는 율법에 따른 육체의 시도는 성령의 거스르게 됩니다. 십자가에 동참하려는 의식이 믿음으로서 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복의 진단형식과 동일합니다(3:9). 만일 율법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이는 항상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3:10). 또 한가지 만약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이방인들은 의롭다함을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한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 그 율법으로 인해 주어질 저주를 예수님 자신이 받아 자기를 믿는자는 다시는 율법의 저주가 해당되지 않게 하였습니다(3:13-14). 그러면 율법의 저주 대신 믿는자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자손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성취로 채우듯이 땅의 약속 자리에 성령을 놓습니다. 성령이 곧 유일한 그 자손이 가져다 줄 복이었습니다. 이로서 사도는 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세계로 성도를 인도합니다. 율법으로는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약속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아브라함 자손에게도 같은 원리 즉 은혜가 작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3:18).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함으로서 동시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3:27-29). 이 사실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약속된 바를 전부 지녔다면 그 약속된 기업에 자손들이 참여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어 함께 아들 되게 하셨습니다(4:6). 이러므로 그들은 이제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야 될 운명이 되었습니다(4:19). 위에 진행된 사실은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어 약속으로 난 자녀 이삭과 하갈의 몸에서 난 지식 이스마엘의 관계와 같습니다. 율법이란 인간의 육체의 연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입니다. 하갈의 자식이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함을 들추어내기 위해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4:24). 어쨌던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에 저주와 정죄로부터 풀려났습니다(5:1). 그 자유는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 체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5:14)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됨으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한 투쟁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5:17,24). 그래서 성도의 자랑거리는 이제 하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6:14). 그 십자가는 바로 성도가 세상에게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13. 에 베 소 서

 

사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구약의 복에 대비하여 신령한 복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에베소서를 대하는 자들은 이 신령한 복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구약에서 이야기한 복과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우선 그 복은 하늘에 속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창세기 3:22의 생명나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에게만 준다고 되어있습니다(1:4). 그럴만한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왜 모든 자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오직 선택한 자만이라는 언약에 규제를 받기 때문입니다(1:5). 그러면 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신 일이 선택의 유일한 근거를 이루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조건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은혜입니다(1:7).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시고 얻으신 그 신령한 복 즉 죄용서의 복은 모든 구약의 복이 정향하고 지향한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1:7).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예수 안에서 뭉쳐지고 통합되어 있어 상속자인 우리들에게는 그저 그 영광을 찬미할 따름입니다(1:12,14,3,6). 모든 만물이 죽은 자나 산 자나 온 우주와 하늘의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몰려드는 그 위엄과 능력에 대하여 이제 성도는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1:17-22). 교회는 그 분의 활동과 사역의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몸인 것입니다(1:23). 이제 그 사역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갑니까? 우선 교회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서만 교회가 이루어집니다(2:1). 꼭 그렇게 해야 될 이유는 예수 안에서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이기도 그 본질을 확산시키는 몸의 구실을 톡톡히 할 수가 있습니다(2:7). 여기서 예수 안이란 말은 예수님에게 발생된 은혜의 사건 전부를 말합니다. 함께 살리고 (2:5) 함께 하늘에 앉히는 (2:6)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한 감정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모습으로 등장된 땅에 속하지 않는 사건들을 말합니다. 그 사건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됩니다. 여기서 교회의 모습이란 은혜가 가지는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 은혜의 능력으로 언약밖에 있던 자들까지 하나님의 동일한 식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2:11-22). 이것은 율법에 의한 기준을 철폐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새로운 기준으로 하여 새 사람됨의 자격을 부여한 결과입니다(2:15).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거주하실 곳도 여기가 됩니다(2:22). 성령은 그곳을 이루는 일을 하십니다. 사도의 이러한 성전 개념은 에스겔에서 성신의 역할이 성전 재건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의 완성을 역사 안에서 실현됨을 나타냅니다(에스겔 37:25-28/48:35). 이 성전이 되어 가는 구체적인 형태는 성령이 계속적인 사역으로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자에게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 일에 관여한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3:6-8). 사도 자신이 환난 받고 고난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다만 기도하고 고대하는 것은 부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풍성함을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3:14-19). 바로 그 사랑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입니다(4:2). 교회란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목적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교회가 이미 세상에 대하여 승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은사가 주어졌다는데 있습니다. 이 은사는 이미 승리한 자만이 제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8-11). 이 은사는 이미 주어진 구원의 능력을 지체들에게 제공하여 그 승리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자기이기 때문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포기하고 구별된 자로서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4:22-23)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4:32-5:2) 사랑은 우선 무엇을 포기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버릴 것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희롱, 방탕과 음행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야 될 것은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가정생활에 있어 아내는 남편을 대할 때 예수님을 의식하며 대하고 남편도 마찬가지 부모도 자식에게 마찬가지 자식도 마찬가지 또 종과 고용자 사이에도 동일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구별됨을 증표입니다. 결국 우리의 투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세력들인데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갑옷을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정신을 차려 자신의 동역자인 사도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6:18).

 

14. 빌 립 보 서

 

빌립보서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사도가 어떤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는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1:11). 그 기대는 사도가 생각하고 있는 기준에 기초하게 됩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은 이런 사도의 기분을 이해하고 편지를 대해야 합니다(1:1). 사도의 기도와 간구의 주된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알고 (2:5-11) 그 내용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변모해 가고 일정한 목표를 향해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3:11-14). 그런 의미에서 서신 중간 중간에 나오는 사도 자신의 이야기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의 옥에 갇힘과 사도의 자신의 인생목표 설정과 사도가 당한 오해 같은 것은 사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개인만의 문제라면 사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편지할 자격을 상실합니다. 사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주어진 상황은 그 가운데서 사도가 어떻게 처신하며 그 처신한 것이 복음의 의미와 얼마나 일치점을 갖고 있나를 보여 줄 수 있기에 헛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환경에 구애를 받고 자유를 상실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복음이 주는 기쁨이란 바로 그 가운데서 비로소 발생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복음이 갖는 본질입니다(1:18/2:17,29/3:1/4:4). 복음의 주체는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데 있습니다(2:5). 모든 일체의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4:13).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교회가 이루어야 될 일은 바로 이것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일입니다(1:6,10). 이미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사도의 입장에서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그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는 마음 그것뿐입니다(1:20). 사실 빨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지만 아직 지상에서 고난받는 것은 자신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모습이 어떤 고난을 수행하고 있느냐를 보여 줄 대목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3:17). 즉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그분으로 인하여 고난도 수용한다는 결단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 분쟁이 있다는 것은 복음의 진수를 모르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곧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몰이해 때문입니다(2:3). 예수님이 주이시다 는 것이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그 분의 역사 안에서 행하신 낮아지심이 없었던들 결코 주 자리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2:6-11). 바로 이 방식을 따라 교회는 구원의 진로를 삼아야하는 것입니다(2:12). 이 일로 인해 사도 바울도 디모데도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고생한다고 합니다(2:22,25). 그러면 그 고난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왜 사도와 그 일행들이 부지런히 교회에 대하여 걱정을 하며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짓 복음 때문입니다. 거짓 복음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비그리스도적인 사고 방식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첫째 율법주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 요소라고 내세우는 무리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복음보다 더 자랑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도 자신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3:8). 복음의 진수는 자신에게 관심 쏟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나는 죽고 그리스도에게 발생된 그 사건 속에 참여하려고 하는데서 나타납니다. 그 사건이란 십자가 순교와 부활입니다(3:10-11). 또 어떤 자들은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3:19). 그러나 우리는 이미 호적이 하늘에 있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3:20). 그러므로 이제 이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는 이상 항상 기뻐하고 어떤 경우를 당해도 정결하게 성도의 지조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고 또 자족하기를 요구합니다(4:4-13). 끝으로 사도는 자기에게 베풀어준 교회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4:20).

 

15. 골 로 새 서

 

이미 복음이 들어간 (1:5) 골로새 교회로부터 기쁜 소식이 사도에게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입니다(1:6). 이제 사도가 교회에게 당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 필요한 지혜와 총명이 계속 공급하여 지금보다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1:9-11). 그 뜻은 어떤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내신 분이 가지는 역사 속에서의 위치는 神性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형상이요 즉 하나님 그 자체요 창조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그 분을 통해서 또 그 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그 분으로 정향된 속성이 있으며 피조된 세상 속에서의 그 분은 전 우주보다 먼저 나셔서 우주를 선도해 나가시는 분이시고 구원에 관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 최초로 살아나시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1:15-17). 이와 같이 그 분의 개념 정립은 골로새 교회가 고통받고 있는 이단의 공략에서 어떤 확실한 해결점을 던져 줄려고 한 시도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보다 정확히 정리되기를 교회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이 역사 속에 오셔서 하신 그 일로 인해 교회는 그 분을 우두머리로 여길 뿐 아니라 만물에 있어서도 그 분이 구심점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서 만물과 화해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그 분 안에서 비로소 제 위치를 정립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으로 돌아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풍성한 지혜를 이제 교회는 전파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1:24-29). 그리스도가 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이제 성도에게는 다른 학문조차 판단할 능력을 소지케 합니다(2:6-8). 어떤 것이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비추어서 해명되어야 하고 그 분의 주 되심이 포함되지 않는 학문에 정신이 팔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할례 같은 것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할례를 받은 것이 됩니다(2:11). 비거룩한 존재로 살던 우리를 거룩한 분으로 말미암아 함께 죽고 다시 살게 되므로 거룩한 참된 할례인이 되는 것입니다(2:12-13). 이것 뿐 아니라 그 밖의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천사숭배하는 의식이나 환상이나 계시나 그런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릴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승리의 증거인 십자가와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우리를 죄인으로 몰 수 있는 근거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들을 철폐하기 위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2:16-19).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해 지려고 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스스로 겸손하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에 자기가 속박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2:23). 그렇다고 하면 이미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상에서 십자가에 이미 주님과 함께 죽으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실존이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후의 실존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면을 보여주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땅의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것을 염두에 두는 생활입니다(3:2).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있는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입니다(3:3).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외형으로 나타날 때는 탐심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을 부정하는 모습입니다. 그 사람이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3:10) 새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에 풍성해야 하며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서로가 교제해야 합니다(3:16).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3:18-2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내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남편됨은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을 서로의 관계에 확인되어야 합니다. 복종의 주체와 사랑의 주체는 예수님이 가지는 의의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종과 주인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4:1). 하늘이 가지는 image를 서로의 관계에서 고백의 형식으로 등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빗대어 대인관계를 진행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전도할 문을 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4:3).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관계한 성도들을 열거하면서 그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알립니다(4:11). 성도끼리의 안부는 바로 동일한 목적 아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6. 데 살 로 니 가 전 서

 

사도 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남긴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1:5). 또 이와 같은 결실은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복음이 전달된 전지역에 대하여 신앙에 모범이 될만한 것이었습니다(1:8). 여기서 사도는 잠시 과거를 회상합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천막 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2:9/사도행전 18:3). 여러 번 빌립보 교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빌립보서 4:16). 사실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오게 된 것도 빌립보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추방되어 이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2:2/사도행전 16:11-40). 어쨌든 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그 아들이 다시 하늘로부터 강림한다는 것입니다(1:9). 사도는 이 내용에 대하여 사람들과 타협하거나 아부할 생각은 없습니다(2:5).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두들 그 분의 나라와 영광에 합당한 생활이 되기를 염두에 두면서 열심히 그들을 사랑했습니다(2:12).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주님의 능력이 그들 속에 살아 役事하신 것입니다(2:13). 뿐만 아니라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고난받는 것 같은 고난을 그들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14). 여기서 왜 주님이 다시 오셔야 하는 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1:4) 핍박하는 무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2:16). 사도에게 주어진 유대인의 박해의 내력은 이러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후에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에서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아덴으로 갔습니다(사도행전 17:14/18:5). 거기서 그는 동료인 디모데를 만났습니다(3:1-2). 바울이 직접 데살로니가로 가려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단이 여러 번 막았다고 했습니다(2:18). 그래서 디모데를 그 곳에 보내었습니다. 디모데가 그 후 고린도로 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첫번째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로 추방된 바울은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받은 새 교우들의 신상을 염려했고 그 박해 운동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에게 몹시 분노했습니다(2:15-16). 복음을 전할 때 사도는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3:2).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사도의 선포기능 속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기들의 수고가 헛될까 하여 디모데를 보내었는데 (3:5) 알게 된 것은 믿음의 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을 행한 인내였습니다(1:3). 하나님은 사도 자신들의 입을 사용해 옛날 선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그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1:4) 그들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위력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1:6/3:8/5:19). 복음이란 아직 한가지 사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를 위하여 성도는 계속 정진해야 하는데 거룩한 생활, 구별된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음란을 버리고 자기 아내만 사랑하고 단정하게 행하고 자기가 손수 일해서 벌어 생활하여 궁핍함이 없게 하고 소망이 없는 자들 같이 장래에 대한 비관적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2 : 19 / 3 : 13 / 4 : 3, 11 / 5 : 6 - 9, 22 - 23). 구원이란 바로 그때에 가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생활은 이와 같이 주의 강림의 입장에서 봐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목표점을 향해 성도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 그 날을 바라보면서 활동적인 신앙, 헌신적인 사랑,지칠 줄 모르는 희망을 갖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대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기 위하여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입니다(5:16-22).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얼마나 깊은 현실성과 효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의 전도여행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셈이 됩니다. 재림을 대비 하면서 사는 생활이 성도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언제 오시더라도 기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17. 데 살 로 니 가 후 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두 번째 편지는 좀더 강경한 어조로 예수님의 강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환난이 예상보다 세차게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1:4-8). 그리고 강림하게 된 동기보다 분명하게 교회에 대하여 공격하는 세력에 대한 가차없는 징벌이 있음을 알립니다(1:9). 이와 같은 일로 인해 주님은 더욱더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1:10). 따라서 격한 시련 속에서도 성도는 그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선을 행사해야 하는데 (1:11) 여기서 보다 복음이 이 악한 시대에서 지닌 가치성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혼탁한 말세의 분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1:11). 그래서 사도는 그 마지막 때의 풍조를 자세히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위력도 부각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오셔서 악인들을 멸하시고 (1:9/2:10-12) 믿는자들을 구원하여 당신의 영광에 참여케 하십니다(2:14).

2.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성급히 해석한 나머지 일부 선지자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잘못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해석을 사도의 가르침으로 뒷받침하려고 했습니다(2:1-2). 그리고 그들은 현세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무질서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구걸하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쳤습니다(3:6,10-12).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인간의 본연의 의무를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상식에 벗어난 열광주의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말세의 징조와 전조를 설명합니다. 그의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말세가 이미 도래했다는 착각을 버리고 현실 생활에 충실히 해 나가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도가 밝히는 그 전조적(前照的) 사건과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탄은 이미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활동으로 성도는 박해를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고 죄악은 점점 강력해져 거짓과 불의가 널리 만연하게 됩니다. 특히 위험한 것은 거짓을 참으로 불의를 정의로 오인케하는 속임수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인간 사상계의 혼란입니다(2:9-12).

★ 다음으로 배교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불법의 사람’ 혹은 ‘무법자’라는 인물이 등장할 것입니다(2:3-12). 배교의 개념은 묵시 문학 뿐 아니라 (다니엘 11:32) 복음서에도 나타납니다(누가복음 18:8/마태복음 24:10-12). 바울은 배교를 무법자의 활동과 동일시 한 것 같습니다. 그 무법자의 유혹에 빠져 진리와 선을 멀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배교자들입니다. 적그리스도란 말은 요한 서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요한 일서 2:18,22/4:3/요한 이서 7). 모든 악의 화신인 이 자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고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2:10) 사람들을 속이고 오만으로 가득차 하나님으로 자처하며 성전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누가 혹은 무엇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2:6-7).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다음에야 주님이 발현하셔서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2:8).

주님의 날이 이미 왔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은 사도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것입니다(2:3). 그들의 안일한 생각과는 달리 말세는 혼란과 환난과 투쟁의 시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림하실 그리스도가 승리하시기 전에 그것도 직전에는 싸움이 한창 더 격렬해 질 것입니다. 이 환난을 이기려면 사랑과 믿음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즐기면서 보낼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3:2,5/2:16/1:3). 이런 사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들하고는 관계를 끊어야 타당합니다(3:6,14). 그러나 원수 같이 여기지는 말라고 합니다(3:15). 이런 걱정과 염려 속에서도 사도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분명히 건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2:13). 마음을 편안히 가지십시오! (3:16)

18. 디 모 데 전 서

 

목회에 대한 성경상의 관심은 사도가 직접 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과연 교회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느냐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 사도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디모데나 디도가 장로나 또는 감독의 입장이 아니라 바울이 없는 동안 바울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파견되어 관여하고 있음에 대해 사도가 마치 자기가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교회를 돌볼 수 있고 진리를 고수할 수 있도록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사도 제 2 세대라 호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목회자란 바른 진리 즉 사도 바울이 전한 그 진리만을 고수하기 위해 파수꾼 역할을 하는 사람이 요구된 사람입니다(사도행전 20:28/갈라디아서 1:8/디모데 전서 1:1,18/3:15/4:5/디모데 후서 3:14-17). 목회서신에서 사도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부탁하는 것이 바로 바른 진리에 대한 사수입니다. 이미 주가 되신 그리스도와 사도 후 시대를 살게 될 교인들 간에 연결점을 만들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짓 가르침의 교회 침투는 확실히 예상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29-30). 사도의 입장에서 자기의 친아들 같은 (1:2) 디모데에게 진리 이외에 무엇을 더 당부하겠습니까? 이단들은 같은 성경(율법)을 두고도 부질없는 족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1:4). 율법의 의미는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의 확산에 대한 경계와 경고용으로 잘만 사용하면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데 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1:9). 도대체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사실 사도 바울 자신은 옛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전에는 도리어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지만 (1:13) 그러나 그러한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신 주님의 그 은혜를 생각할 때 사도 자신이 죄인 중에서도 괴수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1:15). 그러한 주님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디모데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1:18).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란 결코 세상 정권과는 상관없는 것이고 (2:1-2) 주님의 주 되심은 어쨌든 그들 (권력자) 까지 사용하시면서 유지되고 있다는 이 진리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2:4,7). 그러므로 교회는 남자들은 기도하기를 힘쓰고 여성들은 이러한 남성들의 고상한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다 해야하는데 이것이 창조의 원리이고 이 창조의 원리에 따라 자녀 생산 같은 정상적인 도움이 곧 여자로서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2:15). 말씀을 전파할 책임이 있는 당사자나 교회나 모두가 신경 써서 행한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봐서도 욕 들어먹을 자 때문에 진리가 훼손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꾼을 뽑는 일에 특히 그러합니다(3:1-14). 왜냐하면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며 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따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3:15-16). 그러나 성령에 의한 계시에 의하면 교회가 늘 진리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후일에 비진리에 의해 변질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 있는 자연체계를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라고 여기고 거룩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다른 지식과 정신 세계로 도피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생각은 결국 현실의 자기 생활에 대한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처사로 번지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자체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기 죄로부터 건짐 받아 義을 향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자기 훈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4:8). 이 가르침과 모범으로 인해 진리에 대한 권위가 손상되지 않게 하라고 사도는 당부합니다(4:1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에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 조직을 의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과 교인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살아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마치 가정에서 가족 대하듯이 그들을 상대하라고 합니다. 목회자가 이러한 정신은 교회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전수되어져 어떤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데 나이가 60세가 넘고 홀로 있는 여자는 교회가 무턱대고 도와 줄 것이 아니라 직계친족에게 봉양의 기회를 부여하는 식으로 신자들의 일상 생활로 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특히 진리의 파수에 책임을 진 장로들에게는 존경하되 (주로 그들은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돈 때문에 경멸해서는 아니됩니다(5:18). 사도는 디모데의 건강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그 건강이 죄악을 저질은 자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마지막 심판주 되시는 주님에게 맡기고 자신을 돌보라고 염려합니다(5:20-25). 교회가 기타 여러 가지 말썽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밖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교회 내에서 형제라는 관계 사이에 불균형의 소지가 있다든지 아직 말씀이 의미하는 주님의 본 뜻에 미숙한 자들이 있음을 감안하고 나온 생각입니다. 그럴 때는 모두들 함께 여기기를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세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란 태어날 때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고 갈 권리가 없음을 발견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입는 것과 먹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6:1-8). 만약 이 본질에서 더 부요하러 한다든지 돈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악이 파 놓은 함정 가까이 접근하는 셈이 됩니다(6:9-10).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富가 아니고 영생입니다(6:12).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 앞에 증거 했고, 또 다시 이 일을 기준으로 한 심판을 위해 오실 것입니다(6:13-15). 그래서 가진 자들은 쓸데없는데 욕심 내지 말고 나누어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의 바른 인생의 목적이 그를 영생으로 데려 갈 것입니다(6:17-19). 이 내용 이외의 진리는 디모데도 거절해야 합니다(6:20).

 

19. 디 모 데 후 서

 

디모데 전서와 달리 디모데후서에서는 디모데에게 보다 더 친밀감을 퍼붓습니다. 이는 사도가 지금까지 달려온 생을 마무리해야 될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디모데 후서 4:6-8). 어떤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정성을 쏟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1:4 여기서 눈물이란 디모데와 마지막 헤어질 그 때, 그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앞서 보낸 편지에서 참아들로 표현한 것이 여기에서는 사랑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2). 마치 최후의 유언장같이 한 문장 한 단어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사도의 개인의 신상과 느낌과 자기와 관계된 자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룹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사도 자신의 일생이 곧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편으로 제공됨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훌륭한 귀감으로 부각시켰다고 하겠습니다. 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과 그 후에 태어난 또 다른 한 인간의 일생이 어디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변함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디모데도 이미 그런 환경에 놓여 온 사람입니다. 외조모로부터 어머니로 이어지는 믿음의 전통이 (1:3-5) 사도와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사도를 만나고부터 본격적으로 사도의 뒤를 이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준 복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1:9-14). 이 복음 전파는 바로 사도 자신이 당한 고난에 함께 동참함으로 가능한데 여기에 대한 비유를 사도는 세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군사의 비유이고 하나는 운동 선수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농부에 대한 비유입니다(2:3-6). 이 세 가지 모두를 디모데가 본 받아야될 사도의 일생에서 비롯된 진리입니다(2:9-13). 사도의 이러한 고난은 전부 진리사수와 연관된 고난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2:15/1:8). 진리에 도전하는 이단은 바로 모두 불의를 향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디모데는 마치 큰집의 그릇 같이 욕심 없는 젊은이들과 함께 그들을 단호하게 대적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2:18-26). 마지막 때의 특징은 모든 쾌락과 충동이 절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고 그로 인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가 오히려 핍박만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만이 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입니다(3:1-17).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의 바른 교훈보다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하는 자를 찾게 될 것인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디모데는 그런데 굴하지 말고 꿋꿋하게 바른 가르침으로 훈계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4:1-5) 바로 사도 자신이 살아온 길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마지막까지 진리를 위하여 최후의 제물이 될 것도 각오하고 있습니다(4:6-8,18). 사도 자신과 관계한 여러 이방인들 가운데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해를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어느 순간이라도 나는 진리의 전달자라는 사실을 있지 않았습니다(4:9-17). 나를 그렇게 온전케 하신 주님께서 이 편지를 받고 읽고 있을 너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그의 편지를 마무리합니다(4:22).

 

20. 디 도 서

 

그레데 섬에 파견되어 있는 사도의 제자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지역의 상태를 도덕적인 면에 있어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1:12,15). 따라서 그 교회에 세울 장로는 자연적으로 저들과 다른 면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1:5,6-9/2:11-10).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생활 속에서 믿지 않는 자와 어떤 차이점을 지녔는지 분명히 밝혀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1:15-16). 그리스도인의 선이라든지 윤리가 결코 자기의 행함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3:5). 만약 그것이 우리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런 거룩한 행실이 나왔겠느냐로 복음을 소개할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긍휼 하심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2:14/3:5). 따라서 유대인의 따분한 족보 이야기와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1:10/3:9-11). 오직 선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면서 행해지는 선행이야말로 복음의 도착점인 그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2:12-13/3:7). 이러한 열매만이 교회가 가지는 전도의 가치를 높일 것입니다(3:14/1:3).

 

 

21. 빌 레 몬 서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가운데 두고 사도가 기대하는 믿음과 사랑이 어떠한 모습을 구체화 되는지를 보여 주는 서신입니다(5). 믿음이란 교회라는 성도의 모임에서 사랑의 형태로 등장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주 예수가 될 때 주 예수 안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 대한 개방성도 동시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제를 통해 실제화 시킬 때 비로소 善이 생산되는 것입니다(6). 그리고 그 善이 예수님께 도달되도록 하는데도 교제가 더욱 요구됩니다. 주 예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순간 우리는 이기주의의 사멸을 선언한 셈이 되고 이는 사랑의 나눔을 가능케 합니다. 문제의 초점은 자기의 행동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으로 확인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교회 앞에 제기하는 것은(14) 선한 일을 가지고 내가 주안에 있다는 그 가치를 교회 내에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는 먼저 자기 쪽에서 성의를 보입니다(18). 즉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교회에게 기대하는 바가 바로 성도와 성도간의 사랑인 것입니다(9). 그것이 또한 사도의 기쁨입니다(16). 주 안에서의 선이란 일정한 rule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성과 화목성이 담겨져 있을 때 가능합니다(3). 결국 성도가 누릴 기쁨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는 한가지 경우에 국한됩니다(20,25). 교회가 해야할 일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들이 받은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나타내는데 주력해야 되지 어떤 사업의 성취나 실적만으로 평가되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22. 히 브 리 서

 

히브리서 이해의 역점은 저자가 구약을 염두에 두면서도 전혀 구약 저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역을 또 다른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구약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하되 단순한 보충이나 보완으로서의 성취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구약적 방식이 전혀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회고하면서 그리스도와의 비영속성을 강조합니다(7:18-19/8:7). 마지막 때에 오신 아들 때문에 그 전에 나타난 선지자들이 언급한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은 자연적으로 빛을 상실됩니다(1:1). 1:2의 마지막 때란 분명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아적인 완성의 때이긴 하지만 (이사야 2:2/에스겔 38:16/호세아 3:5/미가 4:1) “최후”의 의미보다 비로소 이제 뭔가 제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때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 첫 번째 진행상의 이유는 신분상의 격차 때문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자면 그 수행자가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 정도는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친히 붙드시고 죄를 효과적으로 정결케 할 수 있으시고 지금은 위엄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실 분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1:2-4) 그러나 자연 천사보다는 뛰어남이 당연합니다. 시편 2편, 89편, 97편, 104편, 45편, 102편, 110편의 인용은 단순한 다윗언약의 정신보다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합니다(1:5-14). 그 초월성을 천사를 부리는 영이라는 데서 더욱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구원의 성취성을 설명하면서 천사와 비교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1:4, 6, 7, 13, 14, /2:2, 5, 7, 9, 16) 구원이란 만물에 대한 초월이 되지 아니하면 성취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1:3) 그 동안 구약에서 역사의 초월성을 대변해 온 것이 바로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신 분이 이 땅에서 천사보다 열등한 신세로 지내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나 천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제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뛰어넘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2:9-12). 이것을 히브리서는 구원이라고 봅니다(2:3). 우리의 육체를 어떻게 사망에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느냐 까지 구원의 사역은 지속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사망을 초래한 그 권세자를 제거함으로 이루어집니다(2:14). 히브리서 기자는 초월이신 그리스도의 육체성과 그 육체의 죽음을 이런 뜻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월자의 육체적 경험은 비초월자의 경험을 대신 도맡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딱한 처지를 조언하고 권면하여 (3:13) 효과적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2:18). 이것을 옛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오늘날 모세의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3:2). 그러나 모세의 목표점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로 삼고 일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최후 도달지점은 예수님입니다(3:6/14). 그 예수님의 초월성까지 우리의 육체가 도달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안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과 그 다음 믿음에 관해 나누어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먼저 옛날 광야시절을 연상하면서 행여나 실패가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4:1). 안식에 참여 못한 자들은 결국 복음에 대하여 강팍한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4:3-11). 그러면 그 복음 즉 하나님의 운동력 있는 말씀은 어떻게 시작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대제사장 되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큰 주제 아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4:14). 이것이 복음을 축소시킨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초월성과 그리고 대제사장이란 육체로 하는 일이 하나에서 만나서, 승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효능성을 인정받은 이상 오직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실제적 중보자임이 비로소 복음화 되어 주어집니다. 따라서 그 분을 제사장적 기능을 소유한 분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까지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4:16). 이 후의 설명은 바로 이점에 대하여 일반적인 레위지파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한계와 비교하면서 그 분의 제사장직의 유일성과 특출함을 멜기세덱 계열을 동원시키며 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의 어떤 점 때문에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는데 동원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윗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일반 레위계통을 밝고 오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다고 예언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5:5-6/시편 2:7/시편110:4). 레위 계통에서 멜기세덱 계통으로 전환된 것은 단순히 다윗언약에 의한 노선 변경입니다. 만약에 레위지파 계통이 중보직으로서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윗 때 와서 그 한계가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레위계통은 안되는가 하는 것과 다윗언약이 왜 관여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14:18-20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약속을 보증 받을 수 있었는가 하면은 첫째는 자기가 맹세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해 주셨는데 그 사람이 멜기세덱이며 또 다른 한가지 사실은 그 상대가 자기보다 위대한 분이라는 점에서 능히 자기가 한 약속에 신뢰성을 걸어도 좋게 된 것입니다(6:13-18). 그런데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레위지파의 경우 그 레위 제사장이 자기보다 위대하게 초월해 있는 자들이 아니며 또 단번에 제사로 영원히 변치 않고 또 다시는 다른 제사가 필요 없는 그런 제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7:26-28).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자로서 다윗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이 레위 계통은 적당치 않고 아브라함의 입장이 되었다고 볼 때 멜기세덱 같은 분을 아니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에서 다윗은 자기의 왕이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은 자신의 (다윗의) 입장에 서서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했어야 하는 일은 이미 자기가 레위지파의 자격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유대지파 출신인 것을 감안하여 레위지파의 한계를 담당하고 극복했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존의 지파에서 변경이 왔을 때는 전의 지파의 부족까지 보충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7:11-19/5:7-10).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윗도 자기보다 능력있고 어떤 영원성을 지닌 (7:26) 변함없는 반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7:16). 그 반차는 연약하고 무익하고 온전하지 못한 율법에 매인 분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제 그 분의 초월성 때문에 그 분이 행한 것도 초월적인 영역에 속해 있게 되어 다윗에게 그 성전도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게 되었습니다(8:5/10:1).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나타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죄와 상관이 없는 자를 위하여 오신다고 합니다(9:28). 어떻게 해서 죄가 없어지게 되느냐 하면은 오직 피 때문입니다(9:22). 그런데 옛날 제사 제도에 의한 제물의 피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며 (그것은 단지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진짜 피는 하나님의 준비하신 한 몸의 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10:5). 다윗도 이점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시편 40:6-8). 그 몸이 바로 옛언약을 대신한 새언약입니다(8:13/9:15-22/10:9,16,29). 결국 앞으로의 이 새언약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이 언약을 무시하고 그것을 짓밟아 버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10:29-31,37-39/6:1-8). 믿음이란 바로 여기서 그 내용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영원한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10:55). 히브리서 기자는 새언약과 약속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새 언약이 본격적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마치 옛언약의 속한 자들이 보기에는 오늘날 우리가 약속인 것처럼 (11:39-40) 우리도 또한 약속을 향하여 나아가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한 바로 이와 같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를 거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현재 앞당겨 주어져 있는 그 무엇이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어떤 물증으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집어넣으신 무엇입니다. 따라서 그 약속이 실제로 미래에 존재한다는 것은 또 하늘에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면은 우리 마음 속에 자의에 의하지 않는 믿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11:1-3).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선택받은 자에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라는 것이 스스로 제조될 수 없고 오직 과거 이스라엘처럼 만민 중에 뽑혀 나온 자에게만 여호와가 계시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믿음이 있는 유일한 자로서의 선택된 자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생활이 좌우되지 않았고 다만 축복행위로 전달되는 미래와 하늘의 약속을 향하여 미래 지향적으로 또 하늘의 예비된 상과 기업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단히 이동했고 나그네였고 이 땅에 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심지어 부귀영화도 더 큰 보화를 위해 거절하는 안목과 식견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때때로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순교와 죽음이 초래되기도 했습니다. 톱에 켜이는 고통도 당하고 악형도 받고 불로 들어가는 수모도 당했습니다. 그것이 모두 믿음이 있기에 파생된 결과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고 고대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을 “믿음의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12:2). 그 분 또한 신앙인으로 우리는 그 분이 어떤 식으로 해서 하늘 보좌에 미리 가 계신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시기를 그 분의 기준으로 징계하여 양육하십니다. 만약 징계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식이 아님이 분명할 것입니다(12:7-13). 결국 이들을 천군 찬사가 있는 무섭고 두려운 하늘의 교회와 회중에 도달 시키고자 합니다(12:21-23). 따라서 성도의 생활은 평소에 항상 믿음 안에서 약속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이 세상 것에 미련 두지 않는 생활입니다(13:24). 갇힌 자를 생각하고 손 대접하기를 쉬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13:1-5)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의 수치에 동참하여 비거룩한 곳이라 일컫는 영문 밖에서 그분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때 세상이 가져다 주지 못하는 평강과 즐거움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13:18-21).

 

23. 야 고 보 서

 

야고보서에서 보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점은 그리스도의 종의 자격으로 야고보가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선 야고보는 교회라는 말 대신에 흩어진 12지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1). 이것은 그리스도가 결코 혈통적 이스라엘의 영속성을 끊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고유성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꽃 피울 수가 있다는 뜻도 됩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그 신앙적 열매들이 이제는 그리스도가 오히려 맺게 하고 계속 권장할 만한 것임이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이미 이전에 유대인들 사이에 권장된 덕성들인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 덕성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아는 자에게는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살펴봅시다. 1:1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 되게 합니다. 2:1에서도 “영광의 주 곧 우리 두 예수 그리스도”라고 지칭하기에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세에 곧 예수의 말씀으로 주어졌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5:3). 따라서 야고보의 논조는 이미 복음서에서 언급한바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비교한다면,

 

야고보서 주제 마태복음

1:2 시험 중에 기뻐하라 5:10-12

1:4 온전함을 이루라 5:48

1:5 좋은 은사를 구하라 7:7-12

1:6-8 믿음 부족 8:26

1:9-11 부의 허무성 6:19-21

1:12-18 시험으로부터 벗어남 4:1-11

1:19-21 분노에 대하여 5:22

1:22 말씀을 듣고 행하라 7:24-27

1:27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25:35-40

2:1-4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 18:1-4

2:10 율법은 완전히 지켜져야 한다. 5:19

2:13 긍휼의 복. 17:7

2:14-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17:14-21

3:1-10 가르치는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23:8-10

3:11-12 나무와 과실의 관계. 7:16-19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의 복 5:9

4:4 세상과 벗됨 6:24

4:7-8 마귀가 물러감 8:28-34

4:10 겸손의 복 5:5

4:11-12 남을 판단하지 말라 7:1-5

4:13-17 내일 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 24:45-51

5:2-3 재산을 좀 먹는 벌레와 녹 6:19

5:10 선지자와 모범 5:12

5:12 맹세에 대하여 5:33-37

5:13-20 기도로서 죄인을 구함 6:14-15

 

위의 귀절들에서 본 바와 같이 야고보는 주의 말씀이 옛날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수단이 되며 주의 교회만이 참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봤습니다(2:8-13). 그러면 야고보는 편지를 받는 유대인 교회에 무엇을 전해 주고 싶어 했습니까? 그것은 믿음이란 생활 가운데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장에 우선 그 주제들이 선을 보입니다. 시련 속에서 (1:2) 인내할 줄 알고 (1:3) 지혜도 지니게 되며 (1:5) 기도도 하게 되고 (1:5-8) 믿음도 증가하고 (1:6) 특히 富문제를 극복할 줄도 알게 되고 (1:9-11) 말하는 것에 조심스럽게 되고 (1:19)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자가 됩니다(1:22-25). 그 이후의 내용은 이 주제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셈입니다. 첫번째 2장에서 계명 자체보다 계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곧 믿음의 실행과 연결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능력이 곧 심판을 이기는 긍휼로서 율법과 계명이 추구하는 목표점에 도달됩니다. 그 목표점을 한마디로 말해서 義라고 나타낼 수 있습니다. 義라는 것도 행동으로 보임으로서 의에 이르는 믿음의 결단이 증명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경우인데 이 두가지의 경우는 모두 자신의 신앙이 있음을 무엇으로 증명했느냐 하면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한 것이고 자기 목을 걸어 놓고 한 행동들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자신을 걸은 셈입니다. 3장에서 야고보는 자신을 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신앙 있음을 보이는 증거가 됩니다. 자신을 자제함으로 시기와 다툼이 성경과 화평과 양순과 긍휼이라는 의의 열매를 낳습니다. 4장에서는 욕심이 바로 신앙을 망치는데 그 욕심이 또한 하나님보다 세상을 추구하는 동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에게 유혹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만을 가까이 함으로서 쓸데없는 자기 자랑이나 남을 지나치게 비방하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5장에서 이러한 지나친 욕심이 결국 말세에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품꾼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어야 될 재물을 자기 개인 소유로 둘 때에 그들의 하소연은 커지게 마련이고 그 원한이 곧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 도달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교회 장로들은 자신의 봉사를 쉬지 말고 희생을 해야 하는데 마치 엘리야가 기도로서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 것처럼 그들도 교회 내에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의를 알고 있는 의인들의 할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24. 베 드 로 전 서

 

하늘에 간직된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를 상속 받게 된 그리스도인들은(1:3-5) 이 땅에서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시련이었습니다(1:6-7). 하지만 시련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잘못 되어 가는 것이 아닌 것은 예수님도 고난과 시련 후에 영광을 받은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1:10-11).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온전한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마땅히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근신하고 오히려 기뻐해야 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 시련이 믿음을 연단하여 그 보다 더 귀한 것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1:7/13-14). 세상은 악하다 할지라도 세상을 추종하지 말고 성도는 거룩하고 구별된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1:15-22). 우리의 구원이란 그렇게 금방 쇠하여 없어질 근거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애처럼 새로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2:1-8) 이렇게 해서 성도는 옛날 이스라엘이 가졌던 기능을 지닌 새로운 백성입니다. 우리들이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새로 뽑혀 나온 것은 우리의 구원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선전하기 위함입니다(2:9-10/4-8). 그러기에 이러한 자신의 신분에 일치되게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본질과 모순되는 태도는 보여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2:11-12). 이방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됩니다. 우리의 선한 일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유도 해야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야기해서 국가 권력자에 대한 충성문제와 그리고 노예생활에서 오는 애매한 오해도 참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되는 것입니다(2:13-20). 바로 그 때 그 성도는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을 제대로 따라 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2:21). 왜냐하면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은 오직 심판은 공의로우신 분에게 맡기시고 의에 대하여 살지 못하고 죄 안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의에 대하여 살기 위한 생을 부여하기 위해 당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2:22-24). 이러한 의를 사모하는 정신자세는 가정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으니 성도로서 아내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마치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남편을 주님 모셨듯이 모신 것 같이 남편에게도 그런 희생과 봉사를 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러한 아내의 행위가 하나의 구원을 알리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3:1-6). 뿐만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게 같은 상속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아내를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믿는 자에 대한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 기도는 되지 않아야 합니다(3:7). 이러한 상속의 나라에는 자기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같이 들어갈 형제들도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들에 대한 사랑도 생각해야 합니다(3:8-12).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곧 자신이 구원받을 자라는 것을 오히려 확실히 해 주는 것도 되는데 여기에 대한 인내는 마치 노아 홍수 때 노아가 구원을 받은 이치와 같은 이치입니다(3:13-22) 되어 가는 모든 상황에 대하여 순복하는 것이 바로 심판 날이 가까움에 대한 성도의 마땅히 취할 태도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사랑에 힘쓰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성도를 성도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4:1-11). 그래서 시험을 이상한 일로 여겨서도 아니되는 것입니다(4:12-14). 특히 마지막 때 심판이 교회로부터 시작됨을 생각할 때 (4:17) 교회의 장로들은 이 일에 모범을 보여 주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5:1-5). 그것은 고난 가운데서 의연함을 보여 모든 권력이 영원토록 주님께 일임되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5:7-11). 이러한 일은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선택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예외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5:13-14).

 

25. 베 드 로 후 서

 

베드로의 두번째 편지는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성도의 인격에 있어 어떤 열매를 맺히게 하며 결국 그것이 비신자와의 차이를 만들어 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도에 있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통해서 받았는데 그 내용은 생명과 경건의 속한 모든 것들입니다(1:1-3). 생명과 경건이란 성도가 세속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생명 대신 심판이 경건 대신 무절제의 세력에 놓여있습니다. 생명과 경건이란 신의 성품에서 도출된 것인데 거기에서 나오는 열매는 바로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 그리고 이 모두를 말합니다(1:4-7). 이미 성도를 이러한 열매 없는 곳에서 건짐받아 이것이 있는 곳으로 참여된 사람들입니다(1:9).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가 관심 쏟으면서 노력해야 될 것은 바로 이러한 신의 성품에서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내가 어디서 나왔느냐에 분명치 못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1:10). 인간은 누구나 이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다가 (임시 거처인 장막이 언젠가는 철거된다.) 언젠가는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구성된 영광된 세계가 우리에게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확실한 증거를 댈 수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과 함께 했던 변화산에서의 영광나라에 대한 예표를 그는 실제로 체험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1:15-18). 이와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에게는 마치 샛별이 떠오르듯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예언이 재림사건을 겨냥하고 있습니다(1: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할 것인데 그들은 주장과 행위로 그들의 거짓됨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행위는 주님이 주신 열매와는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짓들입니다. 그들은 일단 주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 나섭니다(2:1). 또 호색하고 (2:2/8)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육 가운데 처신하고 (2:10) 연락과 연회를 일삼으며 (2:13)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죄짓기를 쉬지 않고 있으며 (2:14) 묵기적 권위를 무시합니다(2:10). 또 양들을 속이고 착취까지 합니다(2:3). 또 그들은 불의한 발람같이 불의한 삯을 바라고 삽니다(2:15-16). 그들은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곤 전혀 없는 자들이며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시류에 밀려 살아가는 자들입니다(2:17). 심판은 바로 이런 자들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노아 때 홍수가 그러했고 롯 때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로 인한 멸망이 그러합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이들을 직접 송사하지 않고 심판 주에게 맡깁니다(2:11). 이런 자들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행위를 하는 자에 속하며 돼지가 다시 더럽게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2:22). 바로 이런 자들이 분명히 설치기에 사도는 두번째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3:1). 결코 예언자의 예언이 헛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3:2). 마지막 때에 주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들이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주의 재림약속은 거짓이었다고 말입니다(3:4). 그러나 주가 사랑하는 자들은 천년이 되든 하루가 되든 그들과 맺은 약속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4:8). 구약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예언한 묵시적인 자연의 대 변동은 큰 소리와 함께 나타나게 되고 성도들은 그 때 새롭게 달라진 하늘과 땅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3:10-13). 그런데 그 안에 정의도 함께 거하게 됩니다. 바로 정의를 정의답게 하기 의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주님의 도래는 (3:10) 주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는 실감케 할 것입니다(3:9). 그래서 성도들은 그 날이 언제인가 와 상관없이 티없고 흠 없는 자로 그리스도 앞에 나설 수 있기를 고대하며 무식자들의 경박스러운 해석에 휘말려 멸망으로 내려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3:15-17). 끝으로 사도는 성도가 오직 주님의 은혜에 기초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3:18).

 

26. 요 한 1 서

 

마지막 때에 (2:·18) 교회를 향하여 또는 교회 내부에서 어떤 현상들이 야기 되는지를 예상시켜 주며 거기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 해야함을 목적으로 이 편지를 사도가 쓰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은 교회의 본질이 어떤 원리 위에 성립 되는가를 다시 확인시켜 줌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도록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악한 세상과 연합될 수 없으며 그들의 사고에 물들여서도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세계를 벗어난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1:9/ 2:13-14, 19-20, 27-28/ 3:1, 3, 6, 9, 14-19, 23-24/ 4:6, 11, 13, 16-17,20-21/ 5:1-2,4,12,13-14,18,21).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속하고 주님이 주신 영생이 있는 자를 어떻게 확인 되느냐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설명의 기준을 항상 그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이 있는데 어찌 우리가 세상을 좋아하는 죄를 짓고 형제를 미워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논조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말하는 세상이란 어떤 실체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결코 자연세계 그 자체를 두로 말하는 것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과 그 배후세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눈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유일한 생명임을 거부하는 사상을 말합니다(1:1-2/4:2). 하나님의 생명이란 막연한 관념이나 사상체계가 아니라 역사속에 실제로 한 사건으로 나타나신 그 분 자체가 곧 생명이었습니다. 그 분의 피흘리심이 곧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요 화목제물이었습니다(1:7/2:2/4:10).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도 이것에 증거하기 위한 분입니다(5:7/4:2/2:20,27). 따라서 자신의 성도됨은 내 안에 생명과 사랑과 빛이신 그리스도가 거하심을 (2:5,6,10,14,24,27/3:15,17,24/4:16) 자신의 모습과 사상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 확인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비해서는 빛된 생활로 형제를 미워하는 세력 안에서는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죄와 비진리로 일관하는 곳에서는 죄 씻음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거부감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육체로 한 사역을 강조하여 관념화된 기독교로 변질되지 않는 태도를 취함으로 말입니다. 사도는 이야기의 순서를 빛과 진리 문제부터 하고 있습니다(1:5-6). 우리가 빛과 진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하면은 죄없다 아니하고 (1:8) 그 분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입니다(2:3). 그 계명이 무엇인고 하니 사랑이라는 계명입니다(2:9-11).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2:14). 세상은 정육과 이 생의 자랑으로 일관할 때 진리만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2:18-27). 그 진리는 우리를 의를 나타내게 합니다(2:28).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됨을 말하고 있습니다(3:1). 그들은 장래를 기대하고 (3:2) 그 소망의 때를 위하여 자기를 정결케 하는 자들입니다(3:3). 죄를 짓는다는 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들인데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3:4-13). 성도는 서로 사랑함으로 이미 영생 안에 있음이 드러납니다(3:14-5:3). 끝으로 믿음의 확신은 예수님의 육체에 관한 것으로서 물과 성령과 피가 이를 증명합니다(5:7). 이렇게 되니 자연 기도도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5:14-17). 그 기도의 중심은 형제를 죄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지고 우상을 멀리합시다(5:18-20).

 

27. 요 한 2 서

 

장로가 관심두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1)를 위하여 장로가 제시하는 것은 진리와 사랑입니다(3). 그런데 현재 진리와 사랑이 공략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장로로 하여금 염려케 합니다.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은 무엇이 진리가 아닌 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7).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과 아니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사랑이란 말로만 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육체로 오시지 않고 어떤 정신으로만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면 우리의 사랑의 실천도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방탕을 장려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실제로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6). 그리스도에 대한 명확한 사실에 대해 반기를 드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관계를 끊어야 마땅합니다. 진리 문제이기 때문에 타협의 소지가 없습니다(10). 선택이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으로 보여져야 될 문제입니다(13).

 

28. 요 한 3 서

 

진리문제가 항상 장로에게 관심사입니다. 여기서도 진리에 대하여 여러번 강조하고 있습니다(3,4,8,12). 진리 안에 살아가는 그것 자체가 영혼을 잘 되게 하고 영혼을 강건하게 합니다(2). 그런데 교회에 이 진리에 대하여 문제가 생긴 것을 장로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디오드레베입니다. 그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교회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는 것입니다(9). 그 으뜸 되고자 하는 작업의 하나가 사도를 비방하고 자기 마음에 않는 자를 교회에서 추방시켰습니다(10).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선보다 악을 실행에 옮기기 때문입니다(11). 그 중에서도 데메드리오라는 분은 칭찬 받을 만한데 그 이유는 사도가 전한 진리를 바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합니다(14). 진리란 이처럼 형제를 섬기고 대접하는 것이지, 형제로부터 우대 받을 것을 제공하는 것 하고는 상관없습니다(10).

 

29. 유 다 서

 

유다서는 베드로 후서 2장에 나오는 그 부정적 열매들이 현재 교회에서 현실화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고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서와 베드로 후서 2장의 유사점을 살펴 볼 것 같으면

 

유다서 유사점들 베드로 후서2장

4 그리스도를 부인 1-3

6 악한 천사들 4

7 소돔과 고모라 6

8 더럽힘 권위 훼방 10

9 훼방하는 송사 11

10 짐승 12

11 발람 15

12-13 흠 물 없음 13-17

16 과장된 아첨 18

 

그 다음의 차이점을 들자면, 유다서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마치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자에게 비유합니다(5). 그러나 베드로후서에서는 이것을 광야 때 이스라엘과 연결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의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다것에 대하여(12) 베드로 후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또 유다서는 에녹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마는(14-16) 베드로 후서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또 유다서는 성령이 없는 자라고 못박고 있지만(19, 20) 베드로 후서에는 성령이야기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베드로가 예언한 그 현상들이 이미 유서 저자가 보기에는 교회 내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짓들이 교회분열하고 교회의 교회 되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각성이 요구되어서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12, 20). 내용의 전개는 이런 자들로부터 교회가 믿음의 싸움을 싸우기를 요청하면서 시작정기다(3). 비경건과 예수님의 푸 되심을 거절하는 모양을 지녔기에 쉽게 적의 정체가 밝혀 질 것입니다(4). 그들의 본질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짐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10). 멸망 직전에 놓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들에 비해 성령이 있습니다(19, 20). 이 성령으로 기도하고(20) 그들의 유혹에 빠진 자들을 건져내어야 하는 것입니다(22-23). 이 모든 일을 주의 권세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서 해야 합니다(23).

 

29. 요한 계시록

 

대부분 교회의 역사적 의미만 추구해 온 교회의 서신들과 달리 교회가 가지는 묵적 의미에 대해서는 요한 계시록이 밝히고 있습니다. 묵시라 할 때에는 먼저 역사가 묵시에 의해 어떤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은 교회가 역사 속에 갖는 위상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7교회에 관한 것이 우선적으로 등장합니다(2:1-3:22). 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교회다움을 지니는 것은 7교회 사자를 쥐고 계시는 人子의 의도에 일치될 때인데 (1:20) 그 인자는 역사에 의해 고난받는 자로 등단되고 있습니다. 그 분의 피가 그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1:5). 사도 요한도 그 분의 환난에 동참한 자로 등장됩니다. 바로 그 인자가 기준에 되어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갖추어야 될 주체성이 확립이 됩니다. 성령은 바로 그 인자와 교회를 연결을 하는 7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1:4,10/2:7,11,17,29/3:1,6,13,22). 교회 사자는 성령에 종속되어 있는데, 만약 성령의 지시 따라 인자의 모습 즉 고난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교회는 교회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성령과 사자(천사)에 의해 이 마지막 때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에 의한 역사 진행은, 구약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나 일어날 유일한 현상으로서 (요엘 2:1,28-32) 이미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보낼 만한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그 위치한 바로 역사에 대한 심판권을 이미 확보한 자리를 말합니다(1:13-18). ‘사망의 음부의 열쇠’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역사에 대한 정죄와 심판은 인자 되시는 분이 역사 속에 들어 왔을 때 그 분을 배척하고 죽음에 넘긴 그 역사의 절정에 대한 심판으로 진행되는데 (1:7) 오늘날에는 인자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역사 속에서 인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된 (인치심 받은 7:1-8) 자들을 향한 공격행위에 대하여 보복하는 형식도 병행하여 이루어집니다(1:7/ 5:9/ 6:10/ 11:7/ 12:10/ 16:6/ 18:20/ 19). 그들이 올리는 기도 (향) 또한 그들이 당한 환난 가운데 건짐 받음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5:8-14).

그런데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어린 양의 고난에 동참하기 선택받은 그 수가 차기까지 계속되는데 그것이 7인-7나팔-7대접의 7로 표현되는 제한된 기간들입니다. 이 제한된 7의 기간은 비로소 안심을 낳는 (14:13) 유일한 과정으로서 필수적인 기간입니다. 이 기간동안에 누가 진정한 남은 자이며 누가 그 남은자를 괴롭히고 역사를 파멸로 인도했는가 그 배후세력이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6:11/7:3). 그 동안 고난에 참여한 자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야 하는데 이긴다는 말은 곧 이미 승리자로 서 보좌에 앉으신 그 어린 양의 통치를 신뢰하고 그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을 말합니다(14:12/2:7,11 ,17,26/3:5,12,21/21:7/13:10). 즉 역사 속에서도 묵시를 세계를 보는 눈이 믿음이요 인내입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묵시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성령과 천사에 의해 유지되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요한의 입장에서 (1:10) 제일 답답한 것은 남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묵시적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묵시가 역사를 인봉한 셈입니다(5:1-4). 그 인봉된 남은 역사의 해체는 이미 역사를 묵시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분만이 가능하게 되는데 그 분이 바로 다윗언약의 성취자로서의 (5:5/에스겔 37:25-28/창세기 49:9/이사야 11:1/10) 이 역사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십니다(5:6/예레미야 11:18-19).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을 ‘어린 양’ 하나로 고집하는 이유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표상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었던 것처럼(출애굽기 12:1-14) 버림받은 역사에서 구출될 수 있는 유일한 표상도 언약의 틀에 맞추어 어린 양입니다(15:2-4/11:8). 인봉의 공개에는 반드시 옛 언약의 형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선지자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경고

2. 그 경고에 합당한 심판인데 그것은 이방인을 막대기로 동원시킨다.

3. 이방나라가 언약 백성에 대한 과도한 심판 것에 대하여 이방나라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고

4. 최후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남은 자가 회복된다.

 

이상의 4가지가 신약 때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되고 바로 이들이 역사 주변과 갖는 관계를 통해서 구약의 남은 예언은 다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지 않는 한 역사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는 언약이 허락하는 범주까지만 진행됩니다. 남은 역사가 개봉되어야 되고 또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후에 개봉되어야 될 이유는 언약의 발전에 따라 그 새 언약의 내용을 공개할 역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인자를 거부한 이 시점에서 과연 진정 누가 언약의 백성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린 양으로 더불어 같이 그들로부터 거절당한 무리일 것입니다(6:9-11). 천사에 의해 역사에 심판을 시작한 것이 첫째인을 뗄 때부터 입니다. (1:1) 자연질서의 무너짐은 노아언약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점차로 옛언약이 심판 받는 과정이 되며 옛언약의 의해 선택받은 무리와 인간들은 같이 하나님께 부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재림 때는 끝내 창조언약에 속하는 하늘과 땅마저 날아가 버리니 이는 곳 옛 언약에 의해 탄생된 인간 자체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6:12-17). 창조와 같은 순서로 옛창조는 자리를 떠납니다. 이는 역사의 세계가 끝나고 묵시의 세계가 그 자리를 차지한 셈입니다. 창조가 처음생기기 전 그 무질서의 모습으로 창조는 은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새로운 인간 무리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수가 144000으로서 야곱의 복이 최대로 증폭된 것입니다(12․12․1000)(7:1-9). 그런데 그들에게는 눈물이 있습니다. (7:17) 왜냐하면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7:14). 마치 아벨처럼 말입니다(창세기 4:10). 그럼 누가 이들로 하여금 환난을 당하게 했습니까? 마지막 7째 인 즉 미개봉된 것을 펼칠 때 드러났습니다(8:1). 다섯째 인을 뗄 때에는 순교자의 무리가 등장했지만 다섯째 나팔이 불 때는 그들을 환난케한 무리들이 보입니다. 나팔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최후의 공격 목표가 누군가인지를 알기에 그들을 향해 경고의 나팔을 분 것입니다(아모스 3:6)(계 9:1-3). 그러나 아직도 그들을 전갈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의 임금도 알려집니다. 그 이름은 아바돈입니다(9:11). 그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은 결국 주의 증인들입니다(11:4). 그러나 그들이 자기 할 일을 다 했을 때 짐승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데 (11:7) 그 장소가 주님이 십자가 달려 죽은 장소입니다(11:8). 세상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기뻐합니다(11:10). 드디어 이제는 그들에게 직접 심판과 저주를 퍼부을 차례입니다(11:15,18). 그 진노는 하나님의 옛 언약에 기준하여 그렇게 합당하게 살지 못함에 대한 심판입니다(11:19). 모든 인류가 다 그 기준에 의해 심판 받지만 새 언약에 의해 태어나는 여자의 후손만은(교회) 그 최후의 전쟁의 피해에서 제외됩니다(12:4-6,13-17).

사단은 드디어 그 여자와 후손과 싸우기 위해 땅에 나타남으로 자기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13장). 하지만 새 이스라엘은 시온산에서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14:1-5). 마지막 진노가 시작될 때 성도들은 모세가 가르쳐 준 새노래를 부르면서 하늘 나라로 가는 홍해를 건너고 있습니다(15:2-4). 드디어 진노는 시작되었지만 이를 악물고도 하나님께 도전하는데 (16:10-11) 그 이유는 땅의 화려함과 사치에 이미 마음이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17장-18장). 하늘에서는 혼인 잔치를 준비할 동안 (19:1-10) 땅에서는 마지막 전쟁에서 사탄이 체포되고 맙니다(19:19-21). 여기서 성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왜 주님이 두 번 오셔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2중의 구속사건은 새 언약에 의한 새로운 이스라엘 창출에 있었던 것입니다(20:5-6). 사망과 애통, 눈물 이 모든 것이 이제 사라져 버리고 (21:3-4) 오직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생명나무와 생명수가 흐르는 새 예루살렘성입니다(21:6,10/22:1). 이 모든 것은 옛 언약에서 멸망 받을 자기 백성을 자신의 피로 (7:14) 그곳에서 건져 주시고 생명수를 값없이 주시는 (22:17) 어린 양, 예수님 덕택입니다. 오소서! 어린 양이여!

30.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 묵시 문학적 접근

 

I. 서 론

 

성경해석에 있어 시대성을 감안한 역사적 해석방법은 필수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성경본문은 역사가 흐르는 방향에 비추어 내용상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본다. 그 내용의 변천은 일목요연하게 시간의 진행방향에 따라 순차적으로 흐름을 이어가리라는 선입감이 작용하는 이상 이러한 생각은 하등 이상할 것이 못된다. 나중에 기록된 사실은 먼저 기록된 사실보다 앞설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싶게 이해된다. 하지만 늘 그렇게 된다는 것은 자신있게 보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대적으로 뒤엣 것이 앞엣 것보다 앞선다 뒤선다라는 것을 어떤 기준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큰 장애물로 등장한다. 분명히 시대적 순서대로 기록한 것임이 드러난 것이 이외에 다른 것에는 그 문화양식에 맞는 해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아진다. 예를 들면 잠언에 나오는 사실이 시대적인 순서로 볼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묵시 문학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에 관해서도 특별한 안목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대적 순서로 나열되었다고 요한계시록을 보는데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시도가 의외로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누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겠노라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자시의 시대적 해석을 포기할 만큼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된다. 오히려 묵시적인 책을 묵시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시대적 해석이 너무나 엉터리이고 앞 뒤가 맞지 않으며 본문을 정직하게 일관성을 가지고 보지않고 있다고 불평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떤 한 해석법칙을 내세울 때 어지간한 본문들은 그 법칙과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이 어렵고 모험에 비유될 수 있지만 가설을 내세우면서 지속적인 작업을 또한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목회자에게는 당연히 해야될 일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묵시적 해석방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또 그 해석이 누구나 쉽게 납득이될 만큼 속시원한 해결방법인가?

 

II. 본 론

 

1. 문제해결을 위한 본문 선정에 관해서

요한계시록 전 구절을 주석적으로 해설해 놓았다 할지라도 그 해석의 전제 때문에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따라서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해석전제 싸움에서 첨예하게 대립이 되는 본문을 끄집어내어 거기에 대한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제시해보면 그 제시된 해석의 성향을 통해 계시록 전체에 대한 그 사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문이 어딘가? 여러가지 적당한 곳에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로 소위 천년왕국이 나오는 부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이견이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전 천년설이요 다른 하나는 무천년설이다. 전 천년설이란 어쨌던 이 시대말고 예수님의 최후심판 직전에 천년이라는 고정된 기간을 통해 성도가 직접 왕노릇하는 통치형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고 무천년설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 말고 따로 최후심판 이전에 천년통치라는 특정형식의 통치방식이 개입될 이유가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천년통치는 지금 이 시대 즉 예수님 승천 이후 재림 이전까지를 말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전 천년설 주창자들은 그 천년왕국이 들어 있다고 해서 기독교 진리가 파괴될 것도 아니면 그냥 성경에 적혀있는대로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학설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러한 안일한 주장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대한 일목요연한 해석을 포기하는 것이라서 차라리 천년왕국 부분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에 대하여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는 것이 훨씬 솔직한 표현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면 어디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19장이 막 끝나고 20장에 넘어오면서 그동안 잡히지 않고 만국을 미혹한 사단, 즉 뱀의 체포 사실이 나타난다. 이는 계시록에 나타난 다섯의 적대세력, 이것을 여기서 잠시 나열해 보면

1) 짐승에게 인 맞은 자에게 저주가 내려짐 - 멸망이 아님 - (16:2)

2) 음녀(큰 성 바벨론)의 멸망 (18:2)

3)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산채로 불못에 던져짐 (19:20)

4) 땅에 있는 짐승(거짓 선지자)도 산채로 불못에 던져짐(19:20)

이렇게 해서 다섯 원수 중 넷은 멸망 당했으니 이제 남은 원수인 용의 체포 - 멸망이 아님 - 가 연이어 나온 것을 봐서 앞엣 것과 시대적으로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20장이 19장과 확실히 연속성이 있는 사건나열이라면 20장 안에 들어 있는 천년왕국 이야기도 마지막 때 하나님이 특별히 설정한 기간으로 남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만약 위의 이론이 맞다고 한다면 - 맞지 않지만 - 요한계시록의 구성상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한다. 예를 들면 성 바벨론의 멸망이 분명 18:2에 나오지만 이미 그 전 14:8에 보면 큰성 바벨론이 망한 것으로 나와있다. 그렇게 볼 때 그 가운데 끼어 있는 15, 16, 17장의 내용은 어느 시대에 해당되는가? 또 16:2에 보면 짐승에게 표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지만 결코 그들이 멸망한 것이 아닌데 그것은 그 뒤 도리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16:11). 뿐만 아니라 12:7에 보면 용이 땅으로 내어 쫓기고 있다. 그 때 하늘에서 찬양하기를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나 못됨을 알고 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자기때가 얼마남지 못했다]는 기간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천년 이전에 적당할까 아니면 천년이 지나 다시 놓음을 받는 기간(20:7)에 적합한 사실일까? 만약 얼마남지 못한 기간이 천년전이라면 천년이라는 기간은 너무나도 길다. 반면 천년 후라면 다시 놓임받은 기간은 어쨌던 1000년 보다는 짧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해답은 즉시 나온다. 용이 하늘 전쟁에서 쫓겨난 기간은 (12:9-12) 1000년 후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12장과 20장 이외 기록은 시대적으로 어디에 놓여야 한가? 그 뿐만 아니라 용이 이 땅에 내려오기 이전에 12:9(시대적 순서로 해석한다면 말이다)11:7에 보면 이미 짐승이 무저갱에서 나오고 있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누가 무저갱에서 그 짐승을 보내었는가 하면은 무저갱에 이미 들어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나온다(9:11). 그런데 그 무저갱에 있는 것은 하늘에 떨어진 별이다(9:1). 자 이렇게 보면 20:1-4에 나오는 무저갱 이야기는 19장 이후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9:1의 사건을 보다 근원적으로 추적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어째서 이것이 시대적으로 연속적인 이야기인가? 물론 무저갱 열쇠를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봐서 계시록에 나타난 것을 순차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이 묵시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묵시 문학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2. 묵시문학에 있어 의미전달

묵시라는 말은 항상 역사 안에서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를 하지않고 역사 끝에 나타나서 역사를 종결지을 그 일에 기대를 거는 내용의 계시전달 형태이다. 묵시는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역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종결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가 부정 당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에 위배했을 때 주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묵시적으로 묵시적 언어를 해석할 때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는데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흐르는 어떠한 원리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원리인가를 밝혀내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즉 이 다음에 이런 사건이 있고 이 다음에 저런 사건이 일어나니깐 우리는 대비하자 라고 여기는 것은 묵시를 오해한 소치이다. 묵시란 대비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을 나열하지 않고 있다. 세상을 그런 식을 종결짓게 한 그 원인과 이유가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되었기에 묵시를 통해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 묵시문학 안에 있는 사건 하나하나가 그 이유와 원인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 이유와 원인에 알게 되면 그 다음에 거기서 고정된 세계관이 나온다. 필연적이며 아무리 인간들이 몸부림치고 철회를 요구해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의 세계관은 二元的인 구성을 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땅과 연관을 갖는다. 그리고 관여한다. 하늘의 판단에 의해 땅의 세상은 둘로 나뉘어지게 되고 한편은 하늘로부터 위로를 받는 반면 다른 한편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저주의 상대가 된다. 이러한 판단은 현재에 대한 미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앞당겨 현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를 파멸시킨다. 이미 이 일은 하늘의 계획 속에 들어었어 취소나 수정이 되지 않는다. 하늘과 현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점은 묵시적 징조들의 발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징조들은 다방면으로 또는 여러가지 자료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각종 징조들도 한 인격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다. 다니엘에서는 그 분이 바로 人子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그 인자가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악은 갖가지 방법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확대된 징조들이 다시 주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궁극적인 적이 지휘하는 세상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이때쯤 되면 왜 하나님은 역사를 종결지울 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심판은 그 정당성이 주어진다. 그리고 묵시의 세계는 역사의 세상의 모순을 극복한 형태가 될 것이다. 단순히 역사 안의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고 수리한 다음의 모습이라는 말이 아니다. 외형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묵시적 세계의 원리 안에서는 다시는 역사 속의 세상에서 일어난 그런 악의 원리들을 방지하고 남음이 있는 원리로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세상이 없는 한 묵시의 세상도 없는 것이다. 묵시의 세상은 역사의 세상을 토대로 하여 주어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미래의 세계가 묵시문학에서는 역사의 언어로 묘사되고 있으니 이점을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한 것입니다. 즉 묵시의 세계(미래의 세계)에서의 [이긴 자]는 현 역사의 세계안에서는 역설적으로 [죽임을 당한 자]가 된다. 따라서 현 역사 안에서의 승리자를 찾으려면 역사의 영원한 지속을 주창하며 번영을 외치는 자로부터 애매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가 누구냐를 찾으면 된다. 이처럼 묵시와 역사는 역사 안에서 미리부터 대립된 모습을 띠고 등장된다. 이러한 이유는 구약 예언서에 의하여 최후의 남은 자가 되는 그리스도가 묵시의 신분을 지니고 이 역사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로 결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라고 하는 순교자 모습으로 등장되는 것은 그 분 때문에 역사는 비로소 그 정체가 탄로되었기 때문이다. 그 분에 의해서 남은 역사는 봉인되었다가 이제는 개봉된다. 그 개봉된 내용은 역사와 묵시의 세계간의 갈등이었다. 이제 이러한 안목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어린 양이 뗀 그 묵시의 내용으로 인해 역사의 세계는 심층적으로 그 배후의 조종자가 등장할 때까지 그 정체의 두꺼운 껍질이 벗겨진다. 그 내용이 보다 구체화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을 이 역사 세계에 할 수 있게 하는 동기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는 순교자들의 발생사건이다. 역사 세계의 심판은 언약의 법칙에 의해 심판받을 만한 잘못이 있을 때만 주어진다. 그 언약의 법칙이란 구약 예언서에 나와 있는 다윗 언약의 절차를 따른다. 그 절차를 여기 기재해 보면,

1) 이스라엘 죄악에 대한 경고

2) 그 경고에 합당한 심판인데 이는 이방인을 막대기로 동원시킨다.

3) 이방나라가 그 심판과정 속에서 과도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이방나라에 대한 심판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남은자만 회복된다.

그런데 역사적 종말론에 있어서는 다윗언약에 의해서 옛 역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역사가 시작되지만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에 의하면 역사 자체가 사라지고 거기에 묵시의 세상이 전개된다. 이 점을 감안해서 앞의 순서를 다시 써 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 중심의 현 역사의 모습 (1장-3장)

2) 역사에 대한 묵시세계의 침투 (7인의 계시나열) (4장-7장)

3) 역사의 죄악에 대한 경고 (7 나팔의 계시나열) (8장-11장)

4) 남은자 (교회)의 등장과 그들의 순교-여기서 서서히 등장하는 본래 원수의 정체 (12장-14장)

5) 죄악된 역사에 대한 저주(7 대접 계시나열) (15장-19장)

6) 역사가 종결되다 - 언약대로 심판이 주어짐 (20장)

7) 묵시세계의 전개

이상의 7개의 계시 모음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중첩되는 것을 보여준다

 

III. 결 론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피 언약은 역사의 세계에서 묵시로 전환시키기 위한 언약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언약적 정당성은 그 분의 신분이 묵시적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13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끝으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수치와 귀절들이 구약 예언서의 이미 등장한 것을 보아 요한은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구약의 완성자로서 구약에는 그것이 역사적 언어였지만 신약에서는 역사적 언어로 표현된 묵시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점을 유의해서 해석해보면 그 귀절 귀절마다 언약적 내용을 담아두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결코 묵시적 내용을 역사적 내용으로 분해해서 유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0년, 144000, 용, 짐승 같은 것은 묵시적 세계가 바로 지금 역사속에서 언약적인 내용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등장된 말과 수치들이다.)

 

31. 신약을 정리하면서

 

신약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일을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로마서 12:36).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미 구약에서 드러났듯이 여지없이 쓸모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라고는 실패와 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조금도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망치기만 했습니다(마태복음 1:2-11). 인간은 일을 거스리기만 하는데 어떻게 천국은 무사히 이 땅에 서게 되었습니까? 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신약, 즉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위력입니다. 신약은 人子로 오신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 놓으신 위대한 합작의 결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일을 하시러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다시 부활하실 때까지 성령께서 개입되지 않은 사건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이러한 개입이 바로 새 언약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바로 성령이 이 땅을 지배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과거나 현재나 항상 언약에 범위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언약의 범주를 넘어서시는 일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 안식의 때가 성령이 오시는 시절이라면 그 전에 필히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언약적인 근거와 영역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적 근거를 누구를 통해 달성하셨는가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이 새로운 언약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성령도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범주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활동은 자신이 등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새 언약은 옛언약을 완성시킴으로서 옛 언약을 장악한 상태입니다. 옛 언약을 한마디로 말해서 창조된 세계에 의해 제한 받은 언약이었습니다. 따라서 피조세계는 항상 옛 언약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고 만약 그 책임을 다 못했을 때 언약에 따라 고발되고 결국 심판의 상대로 변하고 맙니다. 새 언약의 바로 옛 언약의 상대자들이 (인간) 창조자 자체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잘못된 판정을 고발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에는 항상 어떤 정신이 스려있는가 하면은 창조를 정죄하는 정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란 완성된 언약 입장에서 미완성에 책임이 있는 언약 상대자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와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원한 단절입니다. 그것은 한번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실패로 취소되거나 변개 되지 않습니다. 그 완성의 form은 창조세계가 허물어진 그 현장에서 새로운 창조와 안식을 건설해 나갑니다. 여기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있고 새로운 선택이 있으며 새로운 약속의 땅에다가 새로운 유업(상속)정신까지 등장됩니다. 아담 대신 제2의 아담이 있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도 새로운 복, 신령한 복으로 완성됩니다(에베소서 1:3). 성전 대신 새로운 성전이 생기고 하늘 대신 새 하늘이 있고 피조된 영광이 아니라 이제는 창조자의 영광으로 가득 덮히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흙에 속한 영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으로 새 사람들이 모이는 나라가 도래합니다(고린도 전서 15:49). 인간의 윤리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서 성도라 칭함을 받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십자가들 가운데 두고 전혀 접촉점이 있을 수 없는 대립되는 두 세계에서 한쪽이 (묵시적 세계가) 다른 한쪽을 (역사적 세계)부인함으로 성립되어집니다. 한쪽 세상에서 죽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에 설 수가 없으며 설사 죽었다 할지라도 다른 쪽에서 선택해 주지 않는 이상 그 저주의 운명을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란 바로 세례 받는 쪽이 세례 주는 쪽으로 이동하는데 동원되는 표징입니다. 그냥 이전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여 이동합니다(로마서 6:1-5). 성도에 있어 역사의 의미란 심판하기 위해 대상으로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미 인자 안에서 선택받은 존재이기에 묵시적 영역에 있는 자입니다(에베소서 2:5-6/빌립보서 4:20/골로새서 3:1-4). 묵시 세계의 증인으로서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의 차원이 이미 죽음과 저주의 영역 속에 침입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할이 바로 그리스도의 이루신 새 언약을 옛 언약 체계와 질서로 유지되는 세계 속에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며 심판주 되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리게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빌립보서 2:11). 그 영광스러움이 충분히 온 우주 속에 펴질 때까지 성령의 활동은 쉬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은 모두를 하나로 통일시킵니다. 한 언약 안에서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신분과 계층의 구별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중심사상은 새 언약 안에서의 만물의 통일입니다(에베소서 1:10). 교회의 할 일이란 그 하나됨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 세상에 지교회는 많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새 언약 하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구원에 이릅니다.

 

32. 성경 전체의 내용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러한 처지에서 어떻게 긍정적인 평가로 빠져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이 두가지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파악하는 것과 병행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현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면 자기 상황에 대한 否定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부정은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지는데 그러나 여기에도 두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 대해서는 이미 구원해 놓은 상태에서 그들에게 자기 부인을 요구하지만 그렇지 못한 비선택자에게 이러한 계시는 왜 네가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통고의 형식을 취합니다. 심판 때에 그들이 핑계치 못하기 위함입니다(예를 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불평과 원망 같은 것, 로마서 1:20). 이것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내용으로 자신의 모습(형상)을 보이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이지 결코 인간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보임으로서 일을 진행시킵니다(로마서 9:14-21).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지 않는 것이 피조물 속에 남아 있고 스며 있다면 이것은 태초에 창조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 영원하게 묵시적인 심판을 받아야 되는 비창조적 성향의 존재들입니다. 이 존재를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았다는 비창조성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 면전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5:13/요한복음 15:5). 이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저주받는 기준은 그 피조물 내에 여호와의 형상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구약 같으면 유월절 정신이 상실 되었으면 우상이 되고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 정신이 상실되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이러한 우상성은 신구약을 통해서 인간세상에서 갖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바벨탑이 그러했고 바로의 장자가 곧 우상이었고 (출애굽기 12:12) 이스마엘이 그러했고 에서의 팥죽이 그러했고 금송아지가 그러했고 모세와 아론의 권위가 백성들에게 그러했고 사무엘 시대 때는 법궤가 그러했고 다윗 이후에는 성전이 우상이었고 솔로몬 이 후 열왕들에게는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우상이었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가나안 땅이 우상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우상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성령이 우상이 되었습니다(사도행전8:17-19). 인간의 타락된 종교성과 조직성은 모든 것에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여 비유월절 정신으로 그것을 점령하여 자기 것으로 또는 자기의 행함과 노력과 열심으로 거룩을 창출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이었습니다. 모든 거룩을 미리 점령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과 비거룩을 분간 못하게 하고 형상과 비형상을 혼동케 함으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실천력으로 전도와 선교를 달성하여 주의 재림을 촉진시켜 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죄 아래 팔린 채로 이 세상에 등장한다는 것을 말해주며 공중권세 잡는 자 아래서 어떤 모양이든지 예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거룩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2:22)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서는 조직 자체가 우상이 되고 無조직 또한 우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십자가 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진리와 정의를 위한다는 고난 자체가 우상이 되고 순교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고린도 전서 13:1-3). 그럼 우리보고 뭘 어떻하란 말인가? 이래도 우상, 저래도 우상이라면 우리보고 어떻게 처신하란 말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증인 즉 목격자가 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아니 될래야 아니될 수가 없습니다. 전도하기 위한 증인이 아니라 증인의 근원을 보이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과의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量과 소위 흔히 이야기하는 부흥과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진리가 여기에 모이게 되어 있는데 (고린도 전서 2:2) 그 이유는 성령께서는 새 언약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2:11). 성령이 소개하는 새 언약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그 이외 것 어디에다 기록을 심어 놓은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조직 그 자체가 거룩하다고 여기는 풍토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성경은 새 언약이 거룩을 빌미로 하여 비거룩을 정죄하고 그 와중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거룩한 자들, 즉 성도들만 건져 자기 처소로 삼겠다는 내용의 책입니다. 오늘날도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볼 때 교인들은 목회자들과 손을 잡고 끊임없이 교회라는 조직을 팽창, 확장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사회생활 가운데서 비양심적인 행위나 혹은 완전치 못한 덕성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책임 추궁이 두려워서 내세와 현세에서 그 징벌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수십년간을 투자하면서 앞을 내다보면서 종교사업을 벌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정신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회의 일 때문에, 수고하고 고생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고난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과연 제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헌금했다면 자기가 남긴 것에 추호도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의 의가 우상이었고 십자가 보다 그것에 마음을 더 두고 있는 것입니다.(목회자도 마찬가지) 결국 우상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의 말씀처럼 목회자는 사람을 좋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증인되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21:19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더라”)

 

33. 결론을 대신하여 쓰는 글

 

결론을 대신하여 이 언약신학이 오늘날 같은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목회현장에 어떻게 적용되어야만 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본서를 쓰게 된 동기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축약해서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 쓰고 난 뒤에 드러난 결론이 무엇입니까? 목회자를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하나님, 제가 위대한 목회자가 될까요? NO! 그러면 하나님, 이 한국 땅을 저에게 주옵소서. 이 민족을 저에게 주옵소서. 제가 이 생명 이 목숨 받쳐 복음화 시키겠습니다. NO! 하나님, 그러면 한국교회가 이 20세기를 맞이해서 개혁이 되어야겠습니다. 저를 사용하여 이 한국교회를 정화하게 하옵소서! 공의가 하수같이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말입니다. NO! 그러면 하나님,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이 되었다, 성장했다, 신자수가 1000만 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어떤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큰 목회를 하기보다는 작은 교회라도 교회다운 정말 예수님의 제자답게 성도들을 양육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그런 목회를 할까요? NO! 그러면 하나님 뭔가 진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적용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현실에 적용되지도 않을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왈(曰), 그러니깐 너 같은 목회자가 필요가 없지! 세상을 변화시키느냐 아니시키느냐 하는 것은 내 소관이지 네 소관이 아니야! 네가 (목회자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수님에게 행하신 사건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나서다가 일찍 죽는 일 그것뿐이고 네 같은 인간이 죽은 그 현장 위에서 내가 또 알아서 네 같은 순교자를 증인으로 두고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 일을 세상 끝날까지 행한다. 언제까지냐 하면은 그 순교자의 숫자(T.O)가 찰 때 까지이다(요한 계시록 6:9-11). 쓸데없이 일이 잘되니 못 되니 간섭하고 낙심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세상의 主 되심을 모독하는 것이고 불신하는 마음이다. 자 이러니 너는 이 시대에 아벨이 될 의사가 없느냐? 이유 없이 형에게 맞아 죽은 아벨말이다! 기독교계의 Star가 되려고 하지 말고 기독교계의 순교자가 될 의사가 없느냐? 믿음이란 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목회자가 사람과 타협하면 교회라고 하는 큰 종교조직은 만들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단 한 사람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목회자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 뿐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여 심판을 하시든 구원을 하시든 그것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목회자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애쓰는 동안 그들만이 빨리 죽기 위해 애쓰는 자들입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예수님을 목회자로 초빙했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를 따라 같이 죽자! 라고 하는 이 방침 이외에 다른 방침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목회자를 선정할 때에는 자기들보고 “같이 죽자!” 라고 할 사람이, 누군가를 골라서 그 사람을 본 교회 목회자로 삼아야 됩니다. 위와 같이 사태는 교회 뿐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고 교회를 맡긴 분이 예수님이라면 만약에 행여나 교인들 가운데서 주님의 순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혹은 방침을 강행을 했을 경우에는 목회자는 사력을 다하여 그것을 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목회자는 직무유기가 됩니다. 따라서 교인들이 100% 전부 순교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할 때도 목회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거부해야 되는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 목회자는 쫓겨나기 일쑤인데 바로 그 과정이 그 목회자를 천국을 인도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처럼 교회나 목회자나 다 같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은 오직 그 분만이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타협을 한다든지 다수의 의견이라고 따라 간다든지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운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볼 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과연 어느 것이 진리냐 하는 것인데 어떤 사실을 두고 진리가 일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진리 됨을 판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행하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인도하느냐 아니면 자기 성취감에 빠질 것인가로 판정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부족과 죄인됨을 고백케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부각되겠는가 아니면 인간 노력의 효과와 그 대가가 부각 되었느냐 달려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인간의 행위의 중요성을 부추기기 때문이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아무리 큰 선교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겸손해졌는가를 찾고자 합니다. 즉 앞으로는 일을 겸손하게 해야지가 아니라 사람의 목적이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바로 날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그 쪽 나라에 관심을 두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일하는 자가 아니라 단순한 증인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전 생애를 통해 보여 주는 목격자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란 전 교인들을 주님께서 역사 배후에서 사라진 그 최후의 자리 즉 십자가로 안내하는 증인이며 그럴 때 교인들도 그 목회자의 인도를 따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보고 싶었던 예수님의 얼굴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자! 주님을 따라 우리도 이 세상으로부터 죽자! 이것이 목회 방침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공부가 목회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아니됩니다. 성경공부가 지향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소망하는 바를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조직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이 진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서 있어야 하기에 초대교회 저럼 유무상통에 지장을 주는 조직이 되면 그 조직은 소용없는 조직이고 조직을 위한 조직, 질서를 위한 질서, 법 자체를 위한 법이 됩니다. 이상적인 조직체계는 인간이면 누구나 유혹받는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인 바벨탑을 흠모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나라는 예수님 께서 재림 하실 때 예수님이 가져다주는 것이지 인간이 이 땅에서 건설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을 자유케 하는데 방해되는 조직은 비진리적인 조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직을 추구함으로 진리에 도달되는 것이 유일한 방책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에만 관심이 쏟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주되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될 때 섬김과 낮아짐으로 흥청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물론 죄인들이 모인 고로 그것이 자동적으로 영구화 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방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조차 환상입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목회자 입장에서는 성도들이 자만에 빠져 그리스도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도 홀로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가야 할 순교의 길입니다. 인간을 조직으로 악을 방지하고자 했을 때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국가가 우상이 되고 만 것처럼 교회라는 조직도 우상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투자한 돈이 모여 있는 곳이고 자기의 성의 정성과 철야 기도의 노력과 전도의 열매들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대신 자기의 현재까지의 실적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아까운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보다도 말입니다. 목회자 만큼은 그런 유혹들을 떨쳐 버려야 되는데 그것 자체가 거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도 세상의 어떤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이었으며 후에 많은 것을 소유한 것 같으나 처음보다 조금도 더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그 자체를 상속받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교회에 발생되는 모든 비복음적 생각들은 천국에 대한 가치가 그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천국이 그들의 유일한 행복과 기쁨과 소망과 사랑의 원천이 되지못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아니라는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조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의 방편이 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곧 이단입니다. 교회 조직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보여 주어야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치밀한 교회의 운영능력이 아니라 또 교회를 섬기는 자가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있는 교회냐 교회의 사활을 걸어야 될 줄 압니다. 교회는 어른이나 높은 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종도 없습니다. 모두 자유자입니다(고린도 전서 7:23). 조직 자체에 의미를 주면 그것이 곧 종교의 이름하에 세워지는 바벨탑의 일종이요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세상의 것에 거룩의 의미를 주입 시킴으로 이루어집니다. 거룩은 바로 새 언약 안이 거룩이 그 이외 것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 거룩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피와 땀의 결실이 거룩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리신 그리스도만이 거룩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韓민족이 만들어낸 기독교라는 종교 단체에서 그리스도만 빠져 있는 형식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몸부림 치면서 부르고 있지만 새 언약과 상관없는 인간의 행위가 결집되어 만들어낸 인간의 이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짜 예수요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리보다 작은 교회라도 예배당과 모여든 군중 그 자체가 탐이 나서 그것을 보고 모여든 각가지 경영가와 행정가와 사업가와 종교 기능가들 (일반인의 종교심리를 이용하여 사람 모이게 하는데 전문인 자들) 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언약은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들어 올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나 전도란 절에 다니는 사람을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소나 취미 변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교란 비언약에 속에 있는 자를 언약 안으로 데려 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어떤 인간도 이 작업에는 손을 댈 수가 없고 오직 성령님의 소관입니다(고린도 전서 2:4-5). 목회자는 오직 진리를 전하는 증인으로서 만족합시다(사도행전 1:8).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의 전투에서 진정한 적을 분간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적은 공산주의 그 이전에, 또 자유주의적 사상 이 전에, 또 비민족적이고 비인간화된 사회 이 전에, 또 비민주적이고 비인간화된 사회 이전에, 교회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 때는 어린 양의 정신의 쇠퇴가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듯이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없는 것이 교회를 스스로 교회 되기를 포기하게 합니다. 단순한 인간들이 기독교라는 이름 하에 모인 종교단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비십자가 정신이란 인간의 야망과 탐욕의 소산으로서 보다 크게, 보다 확산되게, 보다 뛰어나게, 보다 안정되게! 라는 구호 아래에 예수와 성경을 동원한 사업을 벌리고 있는 작태입니다. 헌금을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게 투자한 셈입니다. 보다 덜 희생적이고 보다 더 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들은 영락없이 마귀의 노예된 모습들입니다. 그렇게 한 노력을 고난이라고 자찬하지만 사실은 자립하고 또 돋보이기를 위한 고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된다고 선교사를 보내지만 복음 즉 십자가 정신의 증인이 아니라 보내는 쪽은 교세의 증인 노릇한 셈이 됩니다. 예수의 나라보다 교세 확장에 눈이 어두워 자기 PR 및 자기 과시 쪽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도하다 보니 자연질서의 명목하에 인간이 만든 법을 앞세우게 되었고 교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아 스스로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굴복케 함으로 구원을 제공하려 듭니다. 여기에 인간에 의해 철저히 길들여진 교인들은 마치 안일한 공무원처럼 사회에 대한 책임 회피와 무관심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가 딴게 아니라 이래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유대교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컬 합니까? 그 안에 예수가 있고 성경이 있고 예배가 있고 선교가 있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빠지면 그것이 곧 사탄이 지배하는 종교가 됩니다. 사탄은 거룩한 것을 앞서 점령하고 있습니다. 거룩을 빙자한 세속정신이 교회의 주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첫째 순교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 진리를 모르고 있고 두번째로 따라서 순교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느새도 모르게 시류에 따라 거룩을 이용하여 밥벌이하고 앉아있고 거룩을 빙자하여 속된 것들을 가리면서 교묘하게 목회하는 천하의 위선자로 변신되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속해 있는 교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우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본 책의 의도였습니다. 본 책을 성의를 다해서 읽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성경 자체가 성경을 대하여 우리를 고발하고 있음을 인식하시고 새로운 각오로 십자가의 길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목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를 마시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죽어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를 성경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본 책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적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