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8-2012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

아빠와 함께 2013. 2. 12. 17:15

201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제 8강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6절-3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것이 신약성경에 들어가는 포인트입니다. 단절, 또는 절단.

 

대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 누구도 데려가서는 안 되고 홀로 들어가야 돼요. 홀로 들어가는 것, 자기를 빼놓고는 그 누구도 허락되지 않는 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사전에 인간들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뭐가 기적이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장소가 따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기적이에요. ‘아, 애초부터 우리는 안 되는구나. 애초부터 우리는 못 들어가야 되는 신세구나.’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추방되어야 하는 존재지 추방되고 난 뒤에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신약성경은 마지막 때에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오지 말라. 너는 못 온다. 여기는 나 홀로 가야 될 곳이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면 예수님과 전체 인간, 그 전체 인간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하면 노아, 엘리야, 모세, 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모든 인간 대 예수님……, 여기서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있지요. 주제파악도 못하고 다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는 못 온다.” 하고 도저히 예측 불가한 다른 길을 준비하시고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죽 가다가, “예수님 따라서 천국가자.”하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이쪽으로 빠져버린다는 말입니다.

 

죽 가다가 빠지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할 때 “아서라. 말아라. 너는 어떤 경우라도 올 수 없는 곳으로 나 홀로 간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아, 죽으러 가는 구나. 그렇다면 나도 한 목숨 올인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네가 죽어도 못 오는 곳이다. 네가 죽어도 못 오는 곳에 내가 간다.” 이 말은 예수님의 생명과 베드로의 생명이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천번 만번 바쳐도 올 수 없는 그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한테 알아들은 천국입니다.

 

‘내 이 목숨 천번 만번 죽어도 허락될 수 없는 곳.’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지요. 이 목숨 바치면 구원받겠다, 하는 그런 속성의 목숨은 주님 보시기에 목숨이라고 할 수 없고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애초부터 자기가 살고자 했던 모든 것은 전부 다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고 지키고 애썼던 거예요. 안 지켜도 되는데, 바보같이 안 지켜도 되는 것을 지킨 거예요. ‘어떻게 하면 살지? 우짜면 사노?’ 그동안 죽기를 무서워해서 마귀한테 종노릇 했어요. “네 목숨 있지?” “있다.” “그거 죽으면 안 돼.” “알고 있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네 새끼 죽으면 돼?” “안 돼. 내 새끼 죽으면 안 돼.”

 

그렇게 애를 쓰는 것, 그것은 생명 아니거든요!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목숨을 담보로 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 담보물로 받지를 않습니다. 전당포에 가도 안 받아요. 값어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베드로 같은 경우에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 “내가 다시 올게.”라고 했거든요. “내가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문제는 이겁니다. 안 오면 어떻게 하는가. 자기 일가친척 다 버리고 목숨까지 내 놓으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예수님께서 이제는 십자가 죽음 쪽으로 갔습니다. 가시면서 남긴 말이 “내가 죽고 나면 다시 너희에게 올게.” 라고 하셨는데 확실하게 다시 온다는 보증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말은 쉽지요. 온다고 해놓고 안 오면 그만이잖아요. “가려고 했는데 기분 나빠서 안 갈란다.” 이럴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온다.’ 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제 가신 분이 다시 올지 안 올지는 그 분 결정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온다고 해서 기다릴 수 있는 입장도 못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냥 고기 잡으러 가는 거지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한때 좋았다.’ 하는 추억으로 남기고 그냥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그 뒤의 이야기는 뭐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도리는 이미 다 했어요.

 

이미 죽은 사람 붙들고 살아봐야 입을 열지도 않을 것이고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도망치기 바빴지 무덤에 가서 예수님 시체 챙기고 하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 밖에 없었어요. 남자들은 도망치고 다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제가 이 말을 왜 강조하느냐, 성령의 오심과 마주침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 그것이 말짱 소용없더라.’를 다지고 다져주게 하신 그 확신, 그것이 성령의 오심의 전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체 없다.’

 

내가 길거리에서 옷 벗고 돌아다니면서 3년 동안 전도를 해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할 수 없어서 안 되고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안 해도 안 되고, 되고 안 되고는 주도권이 이미 우리 손에서 넘어가 버렸어요.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안 되는 차원에서 성경을 창세기부터 다시 보게 되면 결국 아브라함이라든지 특히 세례 요한 같은 경우에는, 삼손도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구원받고 싶다든지 하나님께 봉사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도 보세요. 전부 다 일방적으로 누구 쪽에서 덮어씌운 사명입니까?

 

전부 다 하나님 쪽에서 안하겠다는 것을 강제로 그냥 덮어씌운 거지요. 그것이 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 하기 전에 여러분들은 마음껏 ‘나는 죽으면 죽었지 예수 안 믿을 거야.’라고 폼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안 믿을 거야. 교회 가서 내 존재를 폼 내기는 하지만 예수는 안 믿을 거야. 나는 안 믿겠어.’ 하고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시기 바랍니다. 왜, 어차피 절단되어 있는 몸이니까. 못 먹는 떡 찔러나 본다고, 아니지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어차피 몸부림 쳐도 안 되는데요, 뭐. 그러면 내 쪽에서 삐져버리지요.

 

‘그럼 나도 안 해! 누가 하겠냐고!’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럴 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그 때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택하여 세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소급해서 들어오게 해야 돼요. 그 다음부터는 말씀이 들어오면서 모든 말씀이 전부 다 이해가 돼요. 그 이해의 방법이 뭐냐, 항상 구원의 시작은 내 쪽이 아니라 어느 쪽이다? 예수님 쪽에서 구원을 시작해서 마감도 주께서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확실하게 들어오면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가 전부 다 풀리는 겁니다.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가 끝나버립니다.

 

그것은 나의 실존, 나의 죽음조차 하늘나라의 구원에 전혀 쓸데없다는 것이 확정되는 바탕위에서 깔끔하게 우리에게 비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문제,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다 떨치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실 때 주님께서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가, 그 경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특히 마태 마가 누가에 보면 처음에 예수님의 출생부터 나오지요. 출생부터 그 다음에 요단강 이야기 나오고 그 다음에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갈릴리라는 동네에서 사시다가 그 다음에 예루살렘 동네로 내려옵니다.

 

갈릴리를 북한이라고 보면 예루살렘은 남한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리적으로 그렇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원래 동네는 함경남도의 어디쯤이 되겠지요. 갈릴리 호숫가에서 남쪽으로 여행 중에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왔는데 모텔도 없어서 짐승 키우는 우리로 갔는데 거기서 근처에 있는 목자에게서 인사 받고 그 다음에 동방박사에게서 인사 받고 그 다음에 빨리 떠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아서 이집트로 내려가지요.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이제 헤롯 죽었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다시 북쪽으로 가서 성장하시고 요단강 세례 받고 활동하시다가 때가 이르매 ‘내가 드디어 성전 조지러 가야 되겠다.’ 채찍 하나 들고 성전을 건드리니까 이것은 폭탄을 건드린 셈이 되었기에 ‘너 죽어라.’ 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이 과정을 이사야 9장에서는 어떤 과정으로 보느냐, 빛으로부터 어둠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고 어둠부터 해서 빛으로 오기에 어둠속에서 하나의 등불, 빛으로 오셔서 상대적으로 이것을 어둠으로 만들어버려요. 빛을 어두움으로 어두움을 빛으로 만들어서 거기서 돌아가신 겁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전체를 유일하게 빛으로 보고 예수님이 활동이 없는 곳을 어둠으로 보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방금 지리적으로 했지만 지리적, 공간적, 시간적인 이것이 다 없어지고 여기에 무슨 개념이 등장하느냐, 사건개념이 등장하지요. 사건개념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사건개념인데 성경에서 이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이에요. 사건이 일어났는데 해석은 안돼요. 그것이 표적이라는 말이지요. 해석은 예수님의 해석을 담아야 해석이 되는데 그 해석을 담아줘도 그 해석자체도 사람들은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그렇다면 이런 방식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갈릴리와 예루살렘이 있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의 거리는 약 13킬로 미터정도,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185킬로미터쯤 정도에요. 경주에서 대전까지는 너무 멀고 대전 아래 어느 도시쯤 되겠지요. 그런데 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평면적인 지리적 위치를 수평으로 늘여서 그려보겠습니다. 수평으로 죽 늘여놓으면 여기에 툭, 툭 사건이 떨어집니다. 사건의 빗방울이 떨어지면 여기에 사건의 흔적이 남겠지요. 그 사건의 흔적을 가지고 표적이라 합니다. 흔히 아는 우리의 용어로 기적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해석하면 이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비밀, 왜 비밀이냐, 은닉, 숨기는 것, 계속 자기를 드러내는 식으로 자기를 숨기는 거예요.

 

아, 어렵네요. 자기를 드러내면 낼수록 더욱 이해 못할 존재로 등장하는 거예요. 누가요? 예수님이.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성경 보면서 여러 가지 이해 안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뭐냐, 예수님께서 오른쪽의 양, 왼쪽의 염소를 마지막 심판 할 때 “천국 갈 양들아, 너희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느니라.” 할 때 그 다음에 여러분 보고 소설을 써서 이어보라면 뭐라고 쓰겠습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 때 주께서 한 일을 주님이 어떻게 아셨지요? 정말 도사 같군요. 나는 어떻게 하다가 한 것인데 알아주니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와야 그 소설이 맞는데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언제요? 어디서요? 제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제가 언제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는데요?” 도대체 구원받은 사람의 입에서 솔직하게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말은 구원받을 수 있는 행동을 따로 설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설정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지요. ‘내가 이것을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이야.’라고 설정해 버리면 이것은 모르는 상태가 아니고 내가 한 행동을, 그러니까 주께서 한 행동을 내가 아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천국 가는 양들아,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내가 주님 배고플 때 먹을 것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 주고……, 다 했잖아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너 뭔데! 왜 오버하고 난리인데! 나도 좀 말 좀 하자.”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지요. 그것이 바로 끝까지 은닉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행함으로 자기가 의인이 되었다고 여기는 것, 구원받은 사람으로는 그런 생각을 일체 안 가졌다는 말입니다. 나 같은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없고 주님의 피 때문에 거저 구원받았습니다, 하면서 애한테 물주고 밥 줬으면 어린애한테 그런 행위를 했다는 그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어린애한테 그렇게 할 때 그 마음가짐이 ‘이런 행동이 내 구원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 구원받은 본인이 그런 생각을 안 한 거예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리가 없어. 이게 뭐가 착하다고? 내가 지은 죄에 비하면 이런 행동은 아무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그것이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팔팔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뭡니까?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소자에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덕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그 뒤에 나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마 2542,43)다고 할 때 그쪽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언제 주님 배고플 때 안 줬습니까? 기억을 하실 법한데 그 기억을 못하시면 제가 참 섭섭합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이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작 이야기를 하지! 아, 참! 그 애한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언질만 줬더라도 우리가 ‘얘야, 이리와라. 우리가 사탕 사주마.’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게임이 공평합니까, 공평하지 않습니까?

 

시험 친 적도 없는데 한쪽은 빵점을 맞고 한쪽은 백점을 맞으면 백점을 맞은 사람은 좋아서 가만있지요. 그저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렇게 되는데 어느 쪽이 교과부에 고소하겠습니까? 떨어진 사람이 고소한다는 말이지요. 시험도 안쳤는데 이렇게 탈락시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시험관이 “내 맘 대로다. 왜!” 구원받은 사람은 ‘내 맘 대로다.’를 이해하고 그것이 흠뻑 젖은 사람이고 구원 못 받는 사람은 뭘 생각 못하느냐, 하나님 맘대로 탈락시킬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생각 못한 거예요.

 

한쪽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 맘대로 구원시켜주는 것 만 생각하지 하나님 맘대로 탈락도 시킨다는 것을 미처 생각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주님한테는 은닉되어 있는 거예요. ‘누가 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었더라.’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은닉(隱匿)이라는 말이지요. 제자들이 “우리에게 표적을 주시니 우리가 모릅니다. 어떤 해설을 붙여주면 우리가 알 텐데” 할 때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해설해 줬지요.

 

해주니까 알아먹던가요? 소용없어요. 해석이 더 어려워요.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어요.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래서 이 표적, 이런 것들의 의도가 점차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서 드러납니다. 어떻게 드러나느냐, 유명한 무화과나무 사건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파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가 싶어 보니까 열매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배고플 때 열매도 못 내니 너는 저주받아라.” 하니 무화가 나무가 말라 비틀어져버렸어요.

 

그런데 그때가 무화가 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아침식사가 여덟시인데 새벽 3시 30분에 무궁화 홀에 가니까 아직 밥상이 차려져 있지 않았지요. 그 때 “저주 받아라.” 하니까 4시 30분에 불나 버렸어요. 이게 조폭이지 무슨 자비로운 하나님입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지요. 예수님 따라다니면 구원받을까 싶어서 따라다니던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열두 제자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 못할 분을 따라가고 있구나.’ 앞으로 따라가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결국 베드로가 본문 말씀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는 이것은 숨어 있던 베드로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이 안 되어서 저주를 못했지 얼마든지 상황만 된다면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저주할 수밖에 없는 그들, 무화과나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열두제자들이었어요. 그리고 거기에 우리들이 포함되어 있고. 계속해 봅시다. 그 때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말씀대로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렇게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처럼 마지막 때 이스라엘이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가 없어서 주님께 저주받는다면 우리 생각 같으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올 때 누가 빨리 눈치를 채야 됩니까?

 

무화과나무가 ‘어, 누가 가까이 오는 것 같은데? 예수님이 오는구나. 예수님이 성격상 배고프면 얼른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지금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그렇다! 호르몬을 총동원시켜서 아직 때는 안 되었어도 열매를 한 개만이라도 맺어보자.’ 해서 ‘여기 열매 있습니다.’ 이렇게 ‘와, 참 상사 비위맞추기 힘드네. 너무 애먹는다. 저런 상사 두 명만 있으면 내가 말라비틀어지겠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고받고 하는 거래관계를 통한 차원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이고 용서지 네가 착하게 산다든지 그렇게 살아줘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식의 해석을 가지고 두 가지의 해석에 적용시켜야 되는데 하는 달란트비유이고 또 하나는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를 거기에 집어넣어야 됩니다. 달란트비유 할 때 이상하게들 해석을 해요. 탤런트비유, 재능비유, 재능을 썩히면 상급을 못 받는다, 이런 온갖 아이디를 동원하지요. 탤런트를 아끼지 말라, 달란트는 탤런트다? 그러면 영화배우나 드라마 찍는 사람들만 교회 다니라는 말인지.

 

우선 다섯 처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 이 다섯 처자의 이야기는 두 개의 시간성이 공존하고 있는 거예요. 이 다섯 처녀가 갖고 있는 시간성 따로 있는데 주께서는 이것을 무시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시간성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같지를 않지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마지막 때를 감당할 수 있는 시간대가 없어요. 자기 배고프면 종말이고 뭐고 우선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자기 몸 위주의 시간대이기에 나의 몸 편하기 위한 시간이고 나의 행복을 위한 시간이지 내 몸 말고 다른 몸을 위해서 이 시간대가 성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성이고 인간의 한계에요. 성경에서 ‘기도를 하라.’ 했다 칩시다. 인간의 시간대는 뭔가를 하게 되면 현재에서 머물지 않고 뭔가를 기대하게 돼요. 기대를 해버리면 현재는 충실한 현재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의 시간대는 항상 충실한 현재이고 충실한 지금이에요.

 

인간은 자꾸 흘러가는 변화가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 중에 ‘주여, 주여’ 하다가도 심심하면 ‘이 기도 끝나고 뭐하지?’ 이렇게 기도 중에 엉뚱한 생각 한다니까요. ‘안 돼! 사람 불러야지 그러면 안 돼.’ 사람 자체가 기도 중에 다른 생각이 들어서 마구 깨우는 거예요. ‘내가 주기도문을 어디까지 외웠지? 다시 해야지. 주기도문을 틀리게 하면 주께서 돈 못 벌게 한다. 다시 해야지.’ 자기 혼자 저주받고 축복주고 다 해버려요. 이게 뭐냐, 인간의 몸의 한계성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간을 조정해 나가고 자기에게 만족스러운 시간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늘 유도리가 있어요. 과거의 추억을 생각하다가 또 미래를 생각하다가 온갖 것을 생각하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대체 어느 것이 현재인지를 분간도 못해요. 그러다 ‘에라, 빨리 끝내자. 예수 이름으로 아멘.’ 하고 끝내지요. 하여튼 인간의 자기 맘 대로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에 병든 분이 계신다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그 사람의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것이니까 이것이 주의 뜻이 맞겠지요?’ 그런데 곧 바로 ‘주의 뜻이 아니면 어떡하지? 해석이 다르면 어떡하지?’ 기도하다가 혼자서!

 

“병든 자가 있거든 기도하라. 의인의 기도하는 힘이 많다.” 글쎄 이것을 알기는 아는데 만일 기도를 했는데도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된다면 기도를 더 빡세게 더 해야 하는지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 포기를 해야 되는지, 내일부터 포기할까 아니면 모레부터 포기할 까, 온갖 것을 다 생각해야 된다니까요. 혼자 자기 시간대에서 놀다가 가는 거예요. 처녀보고 신랑오기 전에 뭘 준비하라고 했습니까? 기름을 준비하라고 했지요. 열 처녀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열 처녀 입장에서 어느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고 어느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것을 처녀 자기들끼리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요새 그렇게 많은 위원회, 협의회가 그렇게도 많은데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당회 열어가지고 “자, 여기서 신랑 맞이하고 싶은 처녀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지요. 이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시간대의 사람들에 가 공통적으로 준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오는 시점이 오후 2시든 3시든 거기에 대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있을 것 아닙니까?

 

한 2시쯤에 올걸, 아니야, 한 3시쯤이 될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 맘대로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생각하다가 아예 잊어버리겠지요. 아이큐 낮을 수도 있고 치매현상이 있을 수도 있고요.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뭘 기다리고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채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신랑이 올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모든 사람의 시간성이 개인에게 소속된 시간성이에요. 주님의 입장에서는 이 전체가 모든 것이 충실한 현재입니다.

 

그래서 지켜봐요. “1번은 이미 준비했고 2번은 SK 주유소에서 사 왔고 3번은 현대주유소에서 가져왔고, 가만 있자, 천사, 지금 몇 번까지 했지?” “예, 3번까지 했습니다.” “4번이 지금 화장실에 가서 아직 안 나왔지?” “나왔습니다. 나와서 갑자기 생각나서 기름 준비했습니다.” “4번은 되었고 그러면 마지막 하나만!” “아, 다섯 번째 처녀가 기름 사가지고 옵니다. 오다가 엎어졌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의 어떤 결정권이 아예 없어요.

 

“주님! 지금 여섯 번째 처녀가 기름을 가지러 갔습니다.” “빨리 떠나자. 여섯 번째가 오면 안 돼.” 여섯 번째 처녀가 기름을 사오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천국에 간이의자를 또 하나 마련해야 돼요. 안돼요. 예약이 안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야기한 것은 “너희들의 시간대로서 재림을 측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오는 날은 내가 알아서 올 테니 너희는 내 약속만 지켜라.”는 말이지요. ‘이쯤 해서 오실거야. 한 달 후에 내 딸 결혼식인데 그때까지는 아직 안 올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 편리한 시간대로 측정하지 말고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성냥개비로 눈꺼풀 받치든지.

 

항상 말씀을 가까이하고 약속을 가까이하라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는 ‘나는 너희들의 시간대의 측정에 따라서 재림하지는 않는다. 너희들의 시간대는 너희들의 몸밖에 모르기에 너희들의 정당화, 합리화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랑이 떠나고 난 뒤에 나머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해서 왔잖아요. 그때 주유소 난리 났어요. 줄서서 기름 사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기름 준비 해 와서 문 열어 달라고 두드릴 때 경찰 불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조건이 뭐였습니까? 기름 준비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좀 늦었어도 기름은 준비했잖아요. 기름을 준비했다는 예수님 신랑 말대로 기름 준비했으면 시간관계 없이 열어줘야 되지 않습니까? 결국 기름 준비하라는 말은 기름 준비하라는 그 말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올 테니까 그때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단칼에 자르듯이 갈라낸다는 말입니다. 한쪽은 방향 틀어버리고 또 다른 한쪽도 방향 틀어버리고. 그 이야기에요. ‘시간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런 뜻입니다.

 

‘너희들 시간대로 요령부리는 그것은 다 헛방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지금 내 시간대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시간대로 생각할 때 늘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 되지요. 그 다음에 달란트 비유 봅시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비유로 두 번 이야기한 거예요. 달란트 비유는 뭐냐, 주인이 직원 세 명과 같이 있었어요. 가내공업 수준입니다. 직원 세 명 있는 가내공업이니까 보너스 몇 푼 안 되지요. 함께 있었어요. 주인이 출장을 가게 되어서 약간의 돈을 각자에게 맡기고 “내가 여기 없을 때에도 마치 여기 그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일들 해라.”라고 하고 떠났습니다.

 

떠났을 때 이것은 시간적인 차이가 아니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적인 의미에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식으로 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떠났지만 실상은 안 떠났습니다. “주인이 출장 갔어.” “안 갔어.” “갔거든.” “안 갔단 말이야.” 출장 안 갔다고 우기는 사람이 직원가운데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시대에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과 함께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안다고요? 예수 믿는 사람이 발생되거든 주님이 발생시켰다고 믿고 그들 두 세 사람과 함께 주님이 있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출장을 갔으면 없는 거예요. 없으면 누구만 남습니까? 주인 없으면 우리 인간들만, 직원들만 남지요. 한 달란트 받은 직원과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직원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차이도 없지요. 같은 직원이니까. 그런데 달란트 비유는 뭡니까?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왜 차이가 있는가? 주님이 함께 있다고 믿고 있는 그 직원의 가치는 혼자 있는 사람의 가치와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는 공간이 분리되지만 이것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에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있을 때와 다름없이 똑같이 했다는 말이지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주인이 출장 갔기에 다시 올 때 주신 그대로 한 달란트 그대로 드리려고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현재 없는 것이 분명한데 다시 등장하시면 그때 다시 드리겠습니다.” 할 때 주인이 하는 말이 “내가 있다고 했다면 그 한 달란트 가지고 뭘 했을 것이냐?” 그랬다면 그 한 달란트 가지고 펀드 넣어놓고 이자 받아먹었어도 된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네가 지금 이야기하는 주제의 초점은 뭐냐, ‘어쨌든 지금 예수님은 없잖아. 다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만 있을 뿐인데 결국 다 똑같은 인간들인데 왜 내가 그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되는가?”라는 이야기를 어리석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떠난다고 할 때 사실은 떠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세상에 대한 재편성에 나서서 이미 성령께서 보혜사로 오실 사랑이 누구에게만 주어지느냐, 말씀에 규정된 대로 주님께서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통해서 달란트 같은 사람도 만들어내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를 구분시키는 상황도 자신의 성령 받은 사람을 통해서 현실로 만들어내겠다 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취지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중심의 해석을 해야 하는데 흔히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소위 정통적인 해석은 한 달란트 두 달란트 이런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여기에 예수님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집어 넣어버려요. 교회는 뭐가 됩니까? 가내수공업공장이 되어버리지요. 그러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과장급이지요. 두 달란트는 계장이고 한 달란트는 평신도가 되지요. 받은 것은 콩고물 하나라도 제대로 해서 교회를 세워야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다,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 같으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뭘 하면 됩니까? 일 하지 않고 은행에 넣어놓고 이자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회계담당인가요? 이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지요. 그것도 달란트를 재능이라고 해석해서 썩히지 말라는 식으로 나오고 이런 잘못된 해석이 다 칼빈주의의 소명의식에서 잘못 터진 거예요. 칼빈주의 자체가 이단입니다. 칼빈주의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라 하는 것은 거쳐 지나가는 간이역 같은 거예요. 후딱 지나가 버려요.

 

너무나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바빠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에 바빠서 예수님에 관한 것은 후딱 지나가버려요. 아까 그림을 그린 것처럼 칼빈주의의 잘못은 뭐냐 하면, 길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른 쪽으로 샜거든요. 새니까 ‘아, 주님께서 화장실에 가는 모양이다.’ 해서 자기들은 그냥 이 길로 계속 가는 거예요. 어차피 주님께서는 볼일 보고 다시 그 길로 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가는 이 길은 멸망의 길이고 여기는 절벽이니까 스톱을 해야 되지요. 이 샛길로 빠진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게 만들어 버려요. 그러니까 주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이 사람은 이미 안다는 거예요. 뭐냐,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이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우리는 정상적이고 잘 가고 있는데 단지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그것을 추가로 알려줬다는 겁니다. “잠간 기다려봐라. 매점에서 내가 빵 사올 게.” 해서 빵 먹고 힘내서 들어간다는 식이지요.

 

인간들이 갖고 있던 우상숭배의 요소가 그대로 여기에 반영된 거예요. 루터도 십자가를 강조는 했지만 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길로 샜다는 것은 더 이상 여기서 단절이고 스톱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스톱된 이 길로 누구를 보냅니까? 성령을 보내게 되면 성령이 무엇을 가지고 오는가, 예수님의 출생부터 공생애, 세례, 그리고 죽음, 부활, 영광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와서 여기 있는 제자들에게 그냥 퍼부어 버립니다.

 

퍼부어버리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길이 고난이지만 즐거운 이유는 이미 다 구원이 이루어진 상황이기에,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런 시련의 길을 가기에 이것이 놀이동산이 되는 겁니다. 좋아가지고 ‘으아!’ 하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이혼하고 다시 재혼하고 좋다고 으아! 사업 말아 먹고 으아! 전부 다 돈과 관련되어서 웃고 우는, 그리고 자식 잘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이것 실컷 겪으면서 ‘아, 현기증 난다. 현기증 나.’

 

“야, 그만 놀아라.” 하면 이제 그만 놀고 편히 쉬려고 가는 거예요, 주님 나라에. 이것이 예수님이 갔던 모든 길에서 뒤집어 써 버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바리새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리새인입니까? 바로 우리자신이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하여튼 나쁜 역할, 구약에 나오는 아간부터 발람이랄지 이런 모든 나쁜 역할은 다 나에게 쏟아지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할 때 그것을 빼먹고 넘어갔습니다만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 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교회에서도 하지 않고 책에도 잘 안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이야기가 있거든요. 성경에서 뭘 보는지 그것을 왜 건너뛰는지 몰라요. 선지자는 믿음 좋다, 훌륭하다, 인간성 좋고 의지가 강하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강대의 구약학 교수도 그런 소리해요. 독일에서 공부하고 와서 최고 소리 듣는 그 사람의 책에 보면 나와요. 선지자들은 믿음도 출중하고 의지가 강해서 그 시대의 모범이 되었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의지를 마음껏 발휘하는데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이런 식으로 죽 나와요.

 

과연 그런 가, 해서 성경을 봤지요. 자살을 시도했어요. 모세도 자살, 엘리야도 자살, 요나도 자살, 에스겔도 자살, 이사야도 마찬가지, 나는 그만 죽을 랍니다, 했어요. 심지어 누구도,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죠.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잖아요. 그러면 다른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 말은 뭐냐, ‘이 일은 절대로 내 노력과 지혜로 주의 일을 감당 못합니다. 감당도 안 되는데 일을 시키면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하는 뜻이에요. 이것은 주님과 본인과의 사적인 대화지요.

 

‘이런 식일 것 같으면, 저한테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저는 죽겠습니다.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면 그때마다 주의 해결책은 뭡니까? “네가 그런 소리 해봐야 소용없어. 네가 선지자 노릇 하는 그것도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나 주는 직분이 아니야. 사도바울아! 네가 주님의 영광의 직분을 맡아서 이 일 하는 이 자체가 네 상이야. 이것 하면 상 준다는 말이 아니고 그일 하는 그 자체가 상이야. 아무나 주는 줄 알아?” 이런 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뭘 느끼느냐,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늘 혹독하게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든지 즐겨보려고 시도하는데 그러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그 일이 자기 즐거움을 위한 일이 되니까요. 항상 목회자 된 목사님들은 늘 생각하세요. “죽어야 되는데, 죽어야 되는데.” 그러면 사모님이 “애는? 너만 죽으면 다 돼? 애를 낳아놓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주여, 또 하나의 책임이 부과되는데 감당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대화했던 모든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철없음이 바로 우리 자신을 보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구원될 수 없었다는 주님의 그 공로, 약속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믿음을 갖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첨부파일 : 201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제 8강).hwp (61.0K), Down: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