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제 7강
다니엘 12장 13절을 읽어보면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인류의 역사에 마지막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마지막은 반드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한 번 살펴봅시다. 다니엘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지막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막 하고 같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다니엘 당시에 마지막을 기다리라, 고 했을 때의 그 마지막은 자기 인생의 그 시간성 안에서 다 담아낼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아마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을 보게 될 걸?’ 이 말은 인간자체가 끄집어 낼 수 있는 마지막이지요. ‘인류의 역사는 과거 몇 년부터 시작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현재이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현재가 용납할 수 있는, 현재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막이니 내가 살아생전에 그 마지막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그 마지막이지요.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세 시간 뒤에 봅시다.” 또는 “조만간에 봅시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당신은 나를 못 만나.”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라고 내가 일단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내가 살아 있기에 내 시간이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 그 전제 위에서 주어지는 그 마지막,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마지막, 내가 살아 있으면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마지막을 마지막으로 봤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다니엘 당시에, 그렇잖아요.
그런데 다니엘 당시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그 마지막이 마지막의 전부였습니까? 아니었지요. 그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종말에 대해서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고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인자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마지막이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가 ‘아아, 이것은 마지막이구나.’라고 단정할 수 있는 마지막입니까?‘라고 질문들을 해댔어요.
그런 질문들을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마지막을 주님께서 이야기했다고 했을 때는 우리가 그 마지막을 대비하면서 나름대로의 마지막에 구원받을 준비체제를 갖추기 위한 뭔가를 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내일이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이고 오늘밤은 마지막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지막 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사과나무를 심겠습니다.”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했던 이야기처럼.
또 어떤 사람은 “실컷 통닭을 먹어 봤으면 더 원이 없겠다.” 이런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일 아침에 온천에 가려 했던 사람들은 미리 당겨서 “내일은 못 갈 테니 오늘 마지막으로 해볼까?” 라는 식으로 이해해서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을 이 짧고 짧은, 좁고 얇은 우리의 시간성 안에서 수납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해석들을 해 댈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북한에 있는 정권에서 “서울은 피바다 불바다가 된다.” 하는 것이 벌써 몇 년 째입니까? 그 소리가 몇 번이나 계속되어 왔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라면사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양치기소년의 경우처럼 뭐라고 해도 믿지도 않아요.
그 놈의 불바다, 불바다, 마지막, 마지막 한두 번 써먹어야지, 이제는 믿지도 않습니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마지막, 그 당시에 성도들은 자기 때에 마지막이 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시의 제자들도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아, 이제 마지막이 오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지요. 그 마지막은 어떤 양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느냐, 질문을 던지면 정답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애매한 것은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마지막은 우리 한 사람의 시간두께 가지고는 감당이 안돼요.
그래서 마지막 계시가 떨어지면서 이 마지막 계시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이때부터 주어지는 모든 인류의 역사를 한 몸으로 응축을 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숫자가 늘어나고 인구가 많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시간성이 아니고 인류역사전체를 하나의 시간성으로 재조립해서 그 한 몸이 받아내는 마지막, 전체가 하나의 마지막을 받아내는 판대기처럼 사용하는 새로운 인간이해가 시작되는 거지요. 뭐냐, 마지막이라는 계시가 떨어지면 그 계시에 맞추어서 인간들의 모든 역사조차 거기에 맞춤역사가 전개가 됩니다. ‘맞춤역사’
인간역사가 따라가는데 주께서 마지막에 온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마지막 때를 마지막으로 장식하기 위해서 새로운 활주로를 길게, 길게 끌고 가는 거예요. 끌고 가서 기어이 마지막 때에 남긴 계시를 기어이 담아내고 진짜 마지막으로 끝내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역사는 나란히 병행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마지막이 안 된 것은 아직도 마지막에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역사를 질질질 끌고 있는 거예요.
역사를 질질 끈다는 말은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마지막이 안 올 가능성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그러면 내 아들 대에서나 혹은 손자 대에서 마지막이 오겠느냐.’라고 마지막을 생각하는데 그것도 잘못이에요. 왜냐, 전체 인류의 역사를 한 몸으로 잡아버리면 인간의 몸에는 뭐가 흐른다고 했습니까? 시간성이 흐른다고 했지요. 인간의 시간성이 흐르고 있는데 이 인간의 시간성은 어디에 보조를 맞추느냐하면, 한 몸을 위해서 주어진 그 마지막이라는 계시에 맞추어서 시간성이 주어지는 겁니다.
말로 설명하면 잘 이해가 안 되니까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예를 가지고 설명을 해 드릴게요. 여러분이 잘 이해했는지를 먼저 보겠습니다. 그냥 죽죽 나갈 텐데 ‘아, 저건 기억난다.’ 할 때는 그냥 수납하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다. 이 언약의 해석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양상을 드러낸다. 하나는 영적으로 예수님,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두 번째로 이스라엘 혈육 중심으로 이스라엘 자체를 위해서 이 언약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엉터리인가, 밑의 것이 엉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텐데 이스라엘 자체를 지키기 위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되 혈통적으로는 아니라는 식으로 이쪽에 있는 영적세계를 부각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이사야같은 경우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다윗이 왕이니까 왕의 가문이잖아요.
왕의 가문이니까 왕의 혈통, 혈육이 있는 한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 오해,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지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은 기존의 왕이 아니고 무슨 왕이냐, 크게 쓰겠습니다, 남은 자를 끌고 올 수 있는 왕은 따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아하스왕이 아니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아들의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열심히 그렇게 이룰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 본문이 등장합니다. 애들한테는 동방박사 이야기밖에 모르지만 이런 본문들이 성탄절 즈음해서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것은 뭐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들이 왕이 된다, 그러면 기존의 혈육적인 왕은 탈락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이렇게 두께를 가지다가 역사가 진행될수록 점선의 형태로 되었다가 멸망하고 말지요. 멸망하는데 여기서부터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하게 되면 포로잡혀 가게 되니까 그와 함께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과 더불어서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흩어진 곳곳에 이른바 시나고게(συναγωγή synagogē) 회당이라고 하는데 그 흩어진 하나하나 마다 언약이 뒤따라가요. 추적 장치가 달려 있어요.
BC 722년에 북쪽나라 이스라엘이 망하고 BC 586년에는 남쪽나라 유다가 망하는데 그들을 망하게 한 나라에 복속이 되고 예속이 되어 포로 잡혀 갑니다. 그때에 그 이스라엘을 나라를 정복했던 그 나라 이름이 뭐냐, 바벨론이거든요. 바벨론에 왕의 이름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이 현빈, 원빈, 이런 식으로 간단치가 않아요. 느부갓네살, 아하수에로, 이름이 왜 이렇게 길고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이스라엘이 느부갓네살에게 포로 잡혀 가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뭔가를 삼켰는데 그 삼킴을 받은 것에 의해서 도로 삼켜지는 현상이 주어집니다.
느부갓네살이 혈육이니까 혈육이 같은 혈육이라고 삼켰지만 사실은 영적 이스라엘을 삼킨 겁니다. 영적이스라엘을 느부갓네살의 힘을 통해 폭파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언약이 전 세계를 통해서 영적이스라엘을 구원해내는데 그것은 그 동안의 혈육적 이스라엘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남은 자,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한국, 필리핀, 알래스카, 수단, 탕가니카, 나이제리아, 어떤 나라도 괜찮아요. 그 모든 나라에서 남은 자를 건집니다. 건질 때 누가 건지느냐, 왕이 건져요. 왕이 뭐냐, 왕은 반드시 그 흔적이 있는데 처녀가 아기를 낳아요, 처녀가.
처녀가 아기를 낳을 그 때 ‘말씀이 응해서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를 구원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인데 그때의 이스라엘이란 이미 이스라엘의 개념자체가 달라졌어요. 영적 이스라엘, 언약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도 열 셋도 아니고 열 넷도 아니고 열 두 제자입니다. 하필 뽑기를 열 두 제자를 뽑아서 옛날 이스라엘과의 정체적 연속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안 죽었다,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 안 죽었다. 왜 안 죽었는가? 이스라엘 왕이 왔기 때문에 왕이 있는 이상 그 밑에 있는 이스라엘은 두 번 다시 멸망하는 법이 없다. 왜냐, 옛날 이스라엘은 왕들이 망쳐 놓았으니까요. 왕들이 완전히 이스라엘을 버려 놓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굳건하게 서게 된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따라오는 것이 뭐냐 하면 출애굽이 돼요. 애굽에서 탈출하는 형식으로 그들은 이스라엘 돼야 됩니다.
이 애굽 역할은 어디서 해야 되는가, 바벨론에서 그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가서 멸망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은 광산으로 말하자면 막장입니다. 인류의 역사자체가 막장이기에 바벨론을 제치고 더 나가는 역사는 이제는 없어요. 대한민국의 역사나 미국의 역사나 다 바벨론 역사가운데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12장 13절의 “너희는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하는 것은 누구를 보고 하는 이야기냐, 바벨론제국 안에 들어 있는 다니엘을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종결되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호텔 측에서 애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방을 옮겨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어요. 5층에 묵고 있다가 어떤 사람은 8층으로 간 사람이 있는데 만약에 방에 5명이 들어와야 되는데 한 10명이 들어왔다고 한다면 이 방을 늘여버려요. 이 방을 늘리면 이 사람들은 방안에 있는 채로서 방은 죽죽 늘어나는 거예요. 만약에 200명이 들어오면 방은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한 500명이 들어오면 방은 더 커지지요. 바벨론 이 나라는 마치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는 것처럼 이미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한 그 다니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점점 더 바벨론의 범위가 확대되고 또 확대, 확대돼야 되는 거예요.
왜, 아무리 크기가 달라도 본질은 유지되어야 되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바벨론을 애굽이라고 해요. 애굽과 바벨론을 병행해서 같이 씁니다. 애굽, 바벨론, 바벨론, 애굽 이렇게 써요. 그것은 바로 출애굽을 바람불어서 확대하는 거지요. 이 바벨론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처녀가 잉태한 아기 임마누엘을 왕으로 모시는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이름으로 이 바벨론 안에 지금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고 이것이 신약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들어왔다는 말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 해놓고 세례요한을 보내서 그로 하여금 외치게 합니다.
“마지막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하지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지난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이라는 것은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어떤 인물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어요. 느부갓네살이 왕이잖아요. 예수님도 왕이지요. 왕과 왕이 맞짱 한 번 뜨는 거예요. 최후의 왕과 왕의 맞짱. 인간들은 치우고 “옛 뱀, 악마, 용, 너 나와.” 죄를 일으켰던 그 악마, 그리고 이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그렇게 해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종속되어 있는 거지요. 승리자 쪽의 전리품이 되는 겁니다. 승자가 우리를 데려가면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받으면서 ‘우리의 왕은 저쪽 왕을 이겼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데 그 왕은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에요. “우리의 그리스도가 세상을, 악마를, 죽음을, 그리고 귀신을 율법을 그리고 저주를 이겼습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우리의 몸이 율법과 저주와 사망이 쏘는 표적이 되돼 짚으로 만든 표적입니다.
우리가 벗어놓은 헌 옷가지에다가 마구잡이 쏘아대는 거예요. 쏘고 또 쏘는데 ‘이 옷 벗어놓은 원래 주인이 어디 갔어? 쏴도 안 죽네?’ 우리의 벗어놓은 옷을 보고 계속 쏘는 거예요. ‘십계명 지켰어, 안 지켰어? 안식일 지켰어, 안 지켰어? 주일날 왜 그렇게 늦게 오는 거야? 왜 범사에 감사를 안 하는 거야?’ 자꾸 우리가 벗어놓은 옷에다가 쏘아대는 거예요. ‘줄어라! 너는 죽어야 마땅해.’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의식하게 되면 마귀가 꼭 달라붙어요. ‘네 행동이 그게 똑바로 되어 있는 행동이야? 네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알아? 네가 성도라면 성도답게 바른 삶을 살아야지. 성령 받았으면 성령 받은 사람답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지 그게 무슨 성령의 열매냐?’ 이렇게 계속해서 마귀가 쏘아대는 거예요.
왜, 이미 전쟁이 끝났음에 대해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겁니다. 전쟁은 이미 끝이 났는데. 여러분, 한 번 만져 보세요. 짚으로 만들었어요. 아프지도 않아요. 아프면 문제 있어요. 아프다면. ‘너무 아프다. 사랑이 너무 아파.’ 이런 식으로 아프면 문제 있습니다. 안 아파야 돼요. 아프면 자기 자아라는 것이 따로 응결되어 있어서 그 귀한 자아가 훼방될 때 ‘누가 내 뜻을 이렇게 거스르는 거야.’ 하고 아플 때 그것은 아프라고 하는 거예요. 더 맞으라고 하는 거예요.
더 맞아서 ‘아, 내 것이라고는 없구나. 다 주의 것이구나.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이제는 내게 생명의 면류관이 있으니…….’ 이렇게 되어야지요. ‘나는 약한데서 강함이라.’ 이렇게 돼야 될 텐데 ‘하나님, 내 몸이 아픕니다. 내 몸에 사탄의 가시가 있습니다. 빼주세요.’ 응답 없어요. 한 번 더, ‘빼주세요.’ 응답 없어요. 세 번째, ‘빼주세요.’ 응답 없어요.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응답이 있었지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사탄의 가시 빼려고 하지 말거라. 네게 족하다.’ 물론 정 빼내고자 하면 성형외과에 가서……, 그 가시 빼면 됩니다. 견적 다 나오는데 가시 하나 못 빼겠습니까??
신약시대 이야기를 함부로 못하는 이유는 밀려오는 구약의 물결을 모르는 채 신약을 봐버리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잡스러운 말씀들을 도배를 하는 것밖에 안돼요. 자기 온 몸에 자기가 필요한 말씀들을 도배하는 식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모양으로 성경말씀 달달 외우고, 신천지사람들도 잘 외우던데 그런 식으로 외워봤자 그것으로 자기 방패막이는 되지 못합니다. 전쟁은 우리하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전쟁은 끝이 났어요. 전쟁은 끝이 났는데 마귀가 쓸데없이 분풀이 한다고 남아 있는 우리 껍데기 보고 이렇게 시비 걸고 저렇게도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고 너는 나중에 저주받겠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시비와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괜히 찝찝한 거지요. 괜히 찝찝해요. 만약 어떤 사람이 큰 곤란에 처해 있다 합시다. 죽음 직전에 있다 칩시다. 그럴 때에 우리가 도와준답시고 “선생님, 이때는 회개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이때는 그동안 한 것을 반성해야 됩니다.” 이렇게 나올 때 만약에 그분이 스데반집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 당신은 날 생각해서 위로한다고 보는데 나에게 위로가 전혀 안 통합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지요? 누구였습니까? 욥이었잖아요. 세 친구가 뭐나 좀 안다고 해서 위로 차 왔다가 욥한테 당해서 뿔따구 나서 씩씩거리면서 싸웠잖아요. 욥의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도대체 내 몸은 내가 관리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원리 그 중심이 그대로 신약성경에서 완성이 됩니다.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해야 되거든요, 출애굽.
애굽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출애굽 할 때 동원된 매개물이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었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여기서 나온 노래가 무슨 노래냐, 그 유명한 노래, 모세의 노래가 나와요. 이미 바벨론이 확장되어 있고 이 안에 예수님의 남은 자가 있다면 이 사람들만 빠져나올 때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데 구약에서는 그냥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신약에서는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출애굽 하는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 다음 문제가, 그러면 어떻게 빠져나오는가? 빠져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우리가 확정하고 증거로 삼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제일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뭡니까?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했지요. 벌써 마지막이 되었어요. 마지막이 되었기 때문에 내 어떤 행함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미 결정적으로 유일하게 구원받은 증거가 됩니다. 내 어떤 행함도 그것이 주님 구원에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왜, 갇혀 있는 몸이고 갇혀 있는 꼴이기 때문에. 이것이 누구 몸입니까? 나의 몸이거든요. 나의 몸이 갇혀 있는 식이기에 나의 몸에서 행하는 어떤 행함도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할 때 다른 몸이 필요하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몸이 우리를 건집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한 질문에 만족한 답변이 되지를 못했어요. 왜냐, ‘그 점은 내가 성경에서 아는데 그것을 내가 어떻게, 실제로 내가 어떻게 그것을 확인해서 그래, 나는 구원 받았어, 라고 확정지을 수 있느냐?’라는 그 질문을 내가 던져놓고 답변을 하고자 하는 거잖아요.
그 답변은 뭐냐, 내 몸이라는 것이 따로 없고 전체가 한 몸 속에 포함된 내 몸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14만 4천이라고 할 때 이 명칭이 각자 각자의 한 사람 개인에게 부여하는 14만 4천이 아니고 이 전체를 한 덩어리 삼았을 경우에만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개인적으로 “나 14만 4천이니까 명찰 주세요.” 하면 안줍니다. 전체를 두고 14만 4천이에요. 14만 4천이란 12×12×1000이라고 해서 이 12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 또는 야곱의 열두 지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전 세계는 하나의 바벨론으로 굳혀졌습니다. 그러면 이 과정을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처음에 바벨론이라고 할 때 여기에 왕이 있었어요. 그 왕의 신상이 있었는데 그게 느부갓네살입니다. 제가 썼던 논문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에 보면 이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에 금신상이 있습니다. 이 자체가 팍 넘어져요. 이 신상이 이런 궤적을 그리면서 그대로 넘어지겠지요. 신상이 넘어진 상태의 이 거리(서 있던 발끝에서 옆으로 드러누운 머리끝까지)가 서 있을 때의 높이와 같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의 전부입니다.
이 키 높이가 엎어지면 이것이 역사가 되지요. 다니엘의 계시에 의하면 그 신상은 금과 은과 놋과 철, 그리고 철과 진흙이 섞여 있다고 하지요. 앞으로 어떤 나라들, 메대 파사, 성경에는 바사(波斯)라고 나오는데 영어로는 페르시아라고 하고, 그 다음에 알렉산더대왕의 헬라 마케도니아, 그 다음에 로마,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이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끝나면 요한계시록도 끝나요. 요한계시록은 로마시대까지만 나와 있습니다. 왜, 열두 사도가 로마시대에 다 죽기 때문에.
열두 사도는 역사의 저편에서 끝나는 분들이 아니고 역사의 위에 가서 끝나는 분들이기 때문에 열두 사도로 인하여 이미 교회가 완성이 되어버리면 이제부터는 열두 사도의 터 위에 서 있는 교회의 가지가 점점 더 벌어지면서 그 하나 됨을 점점 더 많이 보여주는 거예요. 옆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고 그 뿌리가 계속 더 박히는 거예요. 날이 가면 갈수록 그 하나 됨의 뿌리가 더 깊이 박힌다는 말입니다.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고, 옆으로 퍼진다면 시간이 더 흘러야 되지만 그 가지가 제자리에서 계속 밑으로 빠져버리면 그때부터는 시간 계산 같은 것이 의미가 없고 천년이 흐르던 만년이 흐르던 맨 열두 사도가 했던 이 성경책 안의 세상역사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열두 사도가 있는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남은 역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병행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의 남은 자를 어떻게 건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남아 있는 계시의 영역, 계시의 필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몸인 거예요. 느부갓네살의 몸이 인류의 역사를 다 책임졌다면 장차 오실 이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이 느부갓네살의 몸처럼 역사를 다 책임지고 거기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그 한 몸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대가 2012년, 2013년 어떻게 더 흐르든지 간에 여기는 그리스도의 자기 몸의 지체를 건져내는 되풀이지 더 이상의 역사는 진척되지 않습니다. 지금이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이라 하는 것은 역사가 더 이상은 없다는 거예요. 종말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나무 마디가 자라는 것 봤어요? 안 자라요. 역사가 종말, 마디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의 주장이나 개벽 같은 책의 주장을 보면 또 새로운 역사의 부록을 만듭니다. 후천개벽(後天開闢思想)이라는 소리들을 하면서 또 다른 역사라는 주장들을 하면서 부록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돈을 더 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일할 것도 많은데 돈을 더 내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상한 소리를 해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딱 세 글자에요. ‘돈 내라.’ 설교 길게 말 돌려가면서 할 필요 없어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하늘나라를 확장해야 됩니다.” “쉰 소리 하지 말고 본론 말해 봐. 뭔데?” “돈 내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을 가지고. 돈으로 구원 안 됩니다. 교회에 돈 바쳐서 구원 된 사람이 없어요. 돈은 생명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돈으로 사람을 건질 수가 없다(시 49:6,7)고 했어요.
요한계시록에서 전체를 바벨론 삼아서 한 몸으로 하는 것은 이 역사라는 느부갓네살 이 몸이, 그 동안 구약에 남아 있던 모든 종말, 예수님 당시의 모든 종말에 대한 예언을 그들이 어떤 식으로 그 시대에 맞도록 변형해서 터지고 있는가를 똑똑히 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잘못되면 안돼요. 똑똑히 보고 그 다음에 믿음을 지키면 구원받는다? 아닙니다. 믿음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럴 때는 정말 목이 쉬어도 좋아요. 정말 환장하겠어요. 종말의 시나리오를 자기가 스케줄처럼 짜가지고 ‘이제 점점 종말이 가까이 온다.’ 이것은 자기개인적인 시간성으로 계시를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해서 그래요.
종말이 되면 사적인 시간성은 의미가 없습니다. 한 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지 세 살 때 아버지나 네 살 때 아버지가 따로 있는 그런 것은 없거든요. 아버지를 제가 책임진다든지 혹은 엄마를 책임진다든지 그런 소리들 하면 안돼요. 제가 식당에 있었는데 웬 문자가 하나 왔어요. ‘아빠, 힘내세요. 엄마가 힘들더라도 내가 아빠를 지켜드릴 테니까 아빠, 힘내세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잘 알았다.’ 하고 문자를 또 보냈어요. 그렇게 하고 났는데 뭐가 좀 이상해.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문자를 보여주면 “여보, 이게 뭐고? ‘아빠, 용기를 내세요. 2012년도에는 제가 아빠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이게 뭐지?”
하여튼 ‘잘 알았다.’ 해서 좋은 소리를 해서 보내기는 했는데 아마 잘못 온 메시지인 것 같아요. “예수님, 제가 예수님 지켜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미친 거예요. 예수님은 다 끝났는데 자기가 뭘 지켜요. 자기가 예수님 보디가드입니까?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자 할 때는 출애굽이라는 의식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애굽이고 모든 사람은 행함을 통해서 자기를 건전하게 유지하려고 할 때 구원 받은 사람은 왕 되신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된다고 믿어지는 그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출애굽의 역사적 상황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반드시 그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이라고 되어 있어요.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 어린양의 피의 효과는……, 일곱의 별이 있어도 그 일곱 교회 다 망합니다. 교회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데 일곱 교회, 여덟 교회, 아홉 교회 해 봐야 그것은 다 소용 없는 거예요. 일곱 교회를 등장시킨 것은 어떤 교회도 사람 구원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그냥 책망의 대상이에요. “정신차려라. 너희가 교회를 운영해서 교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교회마저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신할 수 없고 교회 힘으로 이 마지막 때를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일곱 교회의 그 내용에 보면 사탄이 와서 활개치고 있지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촛대를 옮기리라.” 굉장히 사실상 간편한 방법이에요. 교회라 하는 것은 촛대가 있어야 되는데 주님께서 “어, 사탄이 설치네.” 그러면 별것 없어요. 그냥 촛대만 옮기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촛대만 옮기면 돼요. 데이비드 카파필드라는 마법사가 여신상도 사라지게 하고 큰 건물이나 탱크나 코끼리 같이 덩치 큰 것들을 순식간에 다 옮겨버리잖아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세상에, 저것은 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알아보면 간단해요. 카메라만 옮기면 돼요. 탱크는 그대로 놔두고 카메라만 옮기면 된다니까요.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쉽지요. 촛대를 쥐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당회장 목사입니까? 아니죠. 촛대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쥐고 있잖아요. 예수님 따라가면 촛대도 거기 있고 그러면 돼요. 어렵지 않아요!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교회를 믿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교회를 믿으니까 문제가 된다니까요. 왜 교회를 믿어요?
자기가 거기에 돈을 가져다 부은 것이 있어서. 십일조 매번 내는 것 복리로 사채 놓으면 이자가 얼마입니까? 십일조 안하면 장로 안시켜준다고 하니 20년 동안 십일조 적금 넣듯이 부었는데 돈은 목사가 퇴직할 때 퇴직금으로 다 가져가 버리지요. 애초부터 말씀에는 관심 없고 교회에 등록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줄 알았고 그렇게 사기를 치니까 거기에 넘어가서 그런 거지요. 촛대 있는 곳에 구원이 있으리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만 믿어요. 예수님이 나타날 때는 어떤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으로만 계시하는 거예요.
예수! 예수! 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반드시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에게 죽임 당했습니까? 바로 이 세상이 죽인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예수가 행복이 아니고 돈이 행복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웁니다.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인간답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예수라는 것이 중요치 않게 여겨지는 겁니다. 몇 시간 전에 한 중요한 이야기 다시 해볼게요. 시장이라는 것은 원래 산과 강이 있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세상의 4대 문명이 물이 있는 곳에서 다 나왔거든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유역의 메소포타미아, 황하, 나일 강의 이집트 문명 등이 다 물이 있는 곳들입니다. 물이 있다는 말은 경작이 잘 되기 마련이고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잘 살기 마련이지요. 자체적인 생산으로는 생산량이 제한되는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분업이 시작되면 생산량이 늘어나요. 그러면 자체적인 잉여의 생산물은 산 넘어 동네의 산물과 교환을 하게 됩니다. 남는 것은 팔고 모자라는 것은 사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는 하동, 여기는 구례, 그 사이가 화개장터가 되지요. 아랫동네 윗동네가 만나게 되면 교환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중요한 교환은 처자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환하면서 이 자체 내에 무슨 법이 생기느냐, 근친혼이 금지되는 조항이 생겼어요. 모든 법은 물물교환에서 생긴 것입니다. 경제활동 때문에 법이 생긴 거예요. 도둑질하지 말고 상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몇 배로 갚아준다는 이런 것이 함무라비 법전의 예처럼 기원전 2200 년 전쯤의 그 시절에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법과 동시에 경제관념에서 나온 숫자개념도 생기는 겁니다.
0은 빠지고 1, 2, 3, 4, 5, 6, 7, 8, 9까지 되는데 0은 인도에서 생긴 것을 여기에 집어 넣은 거예요. 얼마 전에 했던 EBS에서 하는 동양고전 <대학> 강의에 잘 나와 있어요. 모든 것은 시장중심, 교환중심인데 남아 있는 것을 팔고 내게 필요한 것을 사고, 이렇게 사고팔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무엇도 포함되어 있다? 처자. 여기서 더 넓은 세계로, 씨족사회가 부족국가로 커지면서 거기에 걸 맞는 정치제도도 나오게 됩니다.
“요즘에 따님이 잘 있습니까?” “예, 살림을 참 잘합니다.” “그러면 귀댁의 아드님은 잘 있습니까?” “예, 아주 잘 있습니다. 활도 잘 쏘고 기개가 대단합니다.” “그러면 서로의 지경을 확대시킵시다.” 해서 확대되면서 여기서 파생상품이 나오지요. 부족과 부족이 합쳐지면서 규모가 확대되는 겁니다. 여기는 나오는 것이 화폐, 돈입니다. 돈이 생기는데 남아 있는 돈이 노동자에게 가지 않고 집약이 되면서 돈 놓고 돈 먹기의 세상으로 나갑니다. 돈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교환매체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다른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로 모아져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돈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자기자아의 확대의 매개물로 사용해서 한 번 돈 맛 봐버리면 자본주의의 이전 단계로 뒤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의 결정적인 약점이에요. 후기자본주의라는 말은 없어요. 왜, 한 번 무슨 맛을 보았기에?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이것이 가장 악마적인데 하나님보다 더 잘 재물 신을 섬기는 이유가 뭐냐, 돈 맛, 배추이파리 맛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금욕하고 절약하면서 자본의 확대에 나서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모든 상품을 다 사고 파는데 요새는 심지어 날씨까지도 하나의 상품이 돼요.
영혼은 물론이고 노예제도를 비롯해서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모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이미 신이, 하나님이 바뀐 거예요. 하나님이고 교회고 간에 밑바닥 뜯어보면 ‘그 교회 헌금 얼마 나오는데? 그 교회 부동산 가격이 얼마나 하는데? 그거 팔고 다른데 지으면 몇 배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인데?’ 이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가치는 ‘저 인간은 얼마짜리 인간인가?’라는 것으로 결정 납니다. ‘이번에 신랑감은 얼마짜리 신랑입니까?’ 혹은 ‘신부는 한 달 수입이 얼마지요?’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평균적일상성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일반적인 평균치로 삼아서 ‘당신은 어느 정도 돈 가치가 되는가?’를 따집니다. ‘당신의 수입이 들락 달락 하는 것을 아는데 일 년치를 평균하면 얼마냐?’ 나의 수입평균은 이렇습니다, 하든지 혹은 나의 성격은 평균적으로 이러합니다, 라는 조로 나가지요. 자신의 평균치를 가지고 자신을 시장에 내 놓습니다. “이번에 우리 애 좋은 대학 갔습니다.” 이만큼 가치 있는 애니까 함부로 다른 처자들은 넘보지 말라는 뜻이지요. 이만큼 가치 있으니까 전에 다방에 앉아서 철없이 사귀던 애들 다 정리하라는 말이지요.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는 장면 있잖아요. 부모가 조용히 만나서 ‘이 돈 가지고 유학이나 다녀오너라.’ 하는 식으로. 사랑 같은 것이 돈보다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안 굶어봐서 그런 거예요. 막상 몸 아픈데 입원료 없고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와줄 곳이 있는데 가진 것이 없어서 못 도와줄 때는 역시 특효가 뭡니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애굽, 바벨론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교회 나오는 것도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서 돈 벌기 위해서 나오고 교회 운영하는 것도 돈 때문에 하는 것이고 목사가 설교하는 것도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아담스미스가 말했던 대로 신을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신이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마지막 때는 생각을 복잡하게 하지 말고, 착함이니 뭐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돈의 세계에서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가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질질 끌면서 데려간다.’
우리는 돈이 좋고 그리워서 “난 안 가련다. 난 그 세계 안 간다.” 하는데 “가! 너는 생명책에 기록되었어.” 하고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끌면 찐드기처럼 돈 떨어지는 소리가 막 나지요. ‘주일날 문 열었으면 단골손님 올 텐데 교회 가니까 단골 다 놓치고 이게 뭐냐?’ 돈 떨어지는 소리 막 나면서 가슴이 찢어지지요. 끌다가 탁 놓아두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서 ‘아, 예수님 믿다가 큰일 날 뻔 했다. 식은땀이 다 난다. 그냥 대충 교회나 다니면 되지 예수 믿다가는 큰 일 나겠다.’ 하고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다시 성령이 찾아와서 또 질질 당겨가지요.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왜 아름다우냐 하면, 그런 상황이 되어야 절대로 구원받을 때 내 행함으로, 내 착함으로, 내가 봉사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두 번 다시 안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모든 것을 측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돈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는 것도 그것이 얼마짜리 미모냐 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 뜯어고쳐서 누가 누군지 분간도 안돼요.
여고 졸업반 때는 다 분간이 되었었는데 나중에 회사 취업할 때쯤 되면 다 똑같아요. 같은 병원 출신인 모양이에요. 시술을 같은 의사가 해놓으니 다 똑같아요. 이제는 부모가 앞장서서 하는 거예요. “너 수능만 잘 치면 내가 해 줄게. 열 명 하면 한 명은 공짜로 해 준다. 해 줄게.” 이런 식으로 부모가 앞장서요. 왜, 딸의 가치, 돈 값을 올려야 되니까. 어차피 세상은 시장바닥이니까요. 이것은 안면몰수하고 시장에서 가치를 높여서 살아남아야 되니까요. 그 세계가 요한계시록 17장부터 19장까지 죽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음녀’라고 하고 ‘짐승’이라고 해요. 짐승은 옛 뱀의 하수인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본주의에 우리의 몸을 풀 빠트리게 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마세요. 돈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런 모습인데 얼마나 편합니까? 다 같이 돈 좋아하는데 혼자 돈 안 좋은 척 한다고 해서 돈벼락 떨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런 기대는 아예 하지 마세요. 그냥 사시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로 너의 죄는 이미 발각되었다. 같은 애굽의 같은 통속이고 같이 잘도 놀아나는구나. 춤도 같이 추면서.”
홉스가 말한 대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는 것이고 또 벤담이라는 사람은 다수의 유익이 오늘날 이 시대의 정의라고 했지요. 하버드대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도 썼지요. 다수가 유익한 것이 정의에요. 그것도 질적인 정의, 또는 평등인데 그냥 소득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를 누구에게나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평등을 주장하는 거예요. 롤즈라는 경제학자가 그렇게 주장했어요.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을 착함으로 거부하지 마세요.
‘주여,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제가 이렇게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가장 성령에 충만한 모습이에요. 어느 누가 그렇게 자기 본 모습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놓겠습니까? 그것을 또 교회 대표기도 할 때 내놓지는 마시고. “저는 돈 밖에 모릅니다.” 교인들이 아멘을 하고 싶어도……. 그러니 속으로나 그냥 하세요. “주여,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주의 은혜 받게 하시고…….” 끝에는 생략된 것이 하나 있지요. “……그것이 다 우리 교회에 돈으로 들어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마지막 멘트는 약간 생략이 되어 있지요. 돈이 있어야 교회가 운영되지요. 돈도 없이 무슨 교회가 운영이 되겠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그 쪽으로 말씀이 몰아갑니다. 강의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그게 무슨 자리라고 했습니까? 그게 말씀의 자리에요. 이 말씀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 이번 시간은 마치겠습니다. 말씀의 자리가 있고 이 밑에는 그림자처럼 있는 이것이 지옥입니다. 이 천국과 지옥에서 돋아난 사람들을 표시했지요. 지옥에서 돋아난 사람들은 빨간 것으로 볼록 볼록 표시를 했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볼록 볼록 돋아나는데 이 사람들이 누군지를 처음에는 몰라요.
모르는데 이것이 두 개로 나눠진 것을 믿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사람이고 이 위(천국)가 없고 이것만(지옥)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왜, 육적으로만 생각하고 영적으로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나는 돈 밖에 모르고 그래서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에요. 십자가를 아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를 아는 거예요. 모든 죄용서의 원천이 거기서 쏟아지는 겁니다. ‘내가 돈을 절약해서 내가 돈을 모아서 그것으로 구제를 해서 그 구제한 그것이 구원의 바탕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하는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왜냐, 그런 식이 뭐냐? 아직도 자기 시간성에다 말씀을 감당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몸 따로 없고 자본주의라는 같은 몸에 지나지 않아요. 같이 휩쓸리는 거예요. 마치 만원버스 가는데 차가 스톱하면 작용반작용 법칙에 의해서 다 쏠리는데 기도하고 있다고 해서 안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한한 인간이지요. 사기나 펀드나 망하기 시작하면 죽 다 같이 망하듯이 다 휩쓸려 갑니다. 그럴 때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십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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