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9-2012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

아빠와 함께 2013. 2. 12. 17:17

201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제 9강

 

이번 강의 처음시간에 ‘말씀의 자리에 있을 때 보기에 심히 좋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입장입니다. 우리 인간입장이 아니고 하나님입장입니다. 인간 입장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따로 그 입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알고 세상을 안다고 할 때 양쪽 다를 알고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입장과 성경 모른 채, 성경을 덮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어떤 낙으로, 어떤 힘으로, 무엇을 목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가, 그 점도 우리는 아울러 알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복음을 모르고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 사람들은 일생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좋은 하나님의 계시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촌에서 열 몇 살에 시집와서 병든 시부모 모시는데 그 시가 쪽의 불교 혹은 유교의 제사 같은 것에 충실하면서, 훌륭한 며느리 소리 들어가면서 살다가 나중에 자기도 늙어서 뒷산의 안락한 볕드는 곳으로 죽는 것, 그것이 인생사는 것이지요.

 

별 큰 욕심 없이 자식 낳아서 뒷바라지해서 서울 가서 취업해서 그럭저럭 살게 만들어주고 자기는 어느덧 늙어서 조상들이 갈던 그 밭 갈면서 힘 빠지면 방에 누워 지내다가 서울의 자식들한테 전화해서 ‘힘들다’ 이런 소리 하고 죽고 난 뒤에는 ‘아이고, 아이고’ 하는 그것 말고 별다른 인생이 있습니까? 그게 소박한 인생이잖아요. 경찰서도 유치장도 가본 적이 없이 그냥 자기 동네서 그렇게 살다가 죽은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덜 골치 아프고 자연의 이치 따라 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럽고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 아니냐는 말이지요.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성경을 펼치지 않을 경우에는 다들 그렇게 살고 그렇게 산다고 해서 누가 미워할 사람 없고 욕할 사람도 없고 그것이 인간의 동질성이고 같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그것 외에 무슨 특별한 것을 더 바라리요? 저 푸른 위에 집 짓고 밥 먹고 등따숩게 자고 살다가 그냥 힘 빠지면 죽는 것, 거기서 무슨 욕심을 더 내서 신을 찾고 바르게 사는 등의 오버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만 펼치면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만 펼치면 “넓은 길로 가지 말라. 그것은 멸망의 길이다. 좁은 길로 가거라. 그것이 생명의 길이다.” 성경만 펼치면 문제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수 십 년 믿다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성경말씀이 자기 몸에 붙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나이 들면 이 본드가 견인력이 떨어져서 오래되면 다 떨어져요. 그동안 아는 말씀도 이제는 무거워요.

 

하나씩 다 떨어지고 내 무덤이나 하나 해주면 죽고 나서 자식들이 때마다 제사나 잘 지내주면 그것으로 되었지, 하고 말씀을 그렇게 보았어도 이제는 말씀조차 귀찮고 들추기도 싫어요. 내추럴하게 알로에처럼 그냥 그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편하게 살다가 편하게 죽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어설프게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것은 다 떨어져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멋지게 해놓아도 해 바뀌면 그것도 구닥다리처럼 꼴 보기 싫어서 창고에 집어넣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어떤 견장이나 훈장처럼 말씀을 걸치고 살아가는 이것이 일종의 과욕일 수 있고 주제넘게 신의 흉내나 내는 경우가 될 수가 있고 내 몸에 안 맞는 다른 옷을 걸치는 것이 되고 다른 문화를 걸치는 것이 되고, 좀 공부한 사람이 보면 이것은 동양적이 아닌 수입된 서양문화일수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하면서 ‘역시 내 몸 하나 편한 것이 최고다. 말씀이고 예수고 복음이고 다 귀찮다.’라는 그것이 우리 본성이 맞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 해서 하나님이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따로 존재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지요. 잘 박힌 못처럼 된 것이 아니고 그냥 대충 침 발라서 붙여놓은 식이에요. 그냥 풀칠해서 말씀을 발라놓았어요. 약간만 움직여도 다 떨어져 버려요.

 

점점 더 말씀이 멀어져가지요. 그렇다면 성경 펼치면 바로 그것이 저주요 그것이 지옥 가는 것이요, 이것은 협박인지 공갈인지 하나님께서 괘씸죄를 적용하는 것인지 조폭보다 더 심하게 압박을 가하니 그렇게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말씀을 걸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경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말씀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면 말씀 없는 교회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 말이지요. 말씀 없는 교회는 뭐냐, 친교와 교제, 그리고 우애, 관심, 사랑, 위로, 특히 연세 많은 분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지요. 외로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 다지고 다져진 교회를 구상하게 되면 이 교회는 ‘화기애애’ 쪽으로 가버리면 목사가 설교할 때는 듣지도 않으면 점심시간이 더 기다려지는 식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 하나의 시장이 되어서 각종 정보들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누가 잘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님인지, 싸면서도 잘 고치는 치과의사는 누구인지, 유치원 잘하는데 어디며 그 유치원은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지, 교회 장로가 회사를 차렸는데 예수 믿는 교인들 뽑는다는데 내 조카를 거기에 집어넣을 수 있겠는지, 정수기는 누구한테 사며 보험은 누구한테 들면 되는지, 이런 온갖 정보가 교환되는 하나의 친교의 장터가 되는 교회가 되지요.

 

말씀은 이미 다 떨어진 거예요. 말씀을 펼친다는 이것은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열지 말아야 책을 여는 거예요. 함부로 이 비밀을 책을 여는 겁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입니다. 함부로 열수 없는 책을 열어버렸어요. 그러니 확 눌러야 돼요. ‘안 돼, 나는 성경 안 볼 거야. 친교 쪽으로 갈 거야.’ 특히 청년들 교회 가는 이유는 처자들 때문에 가고 처자는 교회 오빠 만나러 가는 거예요. 술 담배 실컷 하면서 또 교회오빠는 찾아요. 술 담배나 끊고 교회 오빠 찾으면 내 말을 안 해요. 할 것 다 하면서 교회 오빠 좋더라, 하는데 또 요새 믿을만한 교회 오빠 어디 있습니까?

 

연애나 하러 교회 오고. 청년들이 봉사하는 이유는 뭔가 동기유발 요소가 있어서 그래요. 보고 싶은 사람, 짝사랑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다 팽개치고 거기에 올인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 거기 왜 가겠어요? 있으면 거기 매달리지요. 교회 오빠가 다른 교회 간다든지 하면 울고불고 하는데 그것이 사랑의 눈물인지 소유의 눈물인지. 아무래도 소유의 눈물 같아요. ‘왜 내 것인데 다른 데로 가’ 그런 의미의 눈물 같아요. 성경을 펼쳐보면 전도서 7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수련회 오래도록 하다 보니, 그리고 연세가 좀 되다 보니 혹시 성경말씀 찾는다고 하다가 옆에 있는 것까지 다 떨어질까 겁이 나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제가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생략되어 있지만 ‘인간은’ 혹은 ‘너는’이 있겠지요. 우리 입장에서 읽어보면 ‘나는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나한테 유익이다. 왜 인간의 모든 마지막은 죽음이기 때문에.” 자 이 본문의 구조를 한 번 봅시다.

 

‘나는 초상집에 가서 거기서 죽은 사람을 보면서 죽은 사람과 나와의 동질성을 가지는 그것이 지혜요 이것이 진리다.’ 전도서에서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내가 그 진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들어가 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는 관속에 죽은 자로 있는 겁니다. 이것을 줄여보면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살았다. 나는 살았는데 그 산 나는 말씀대로 살아야 되기에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데 그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살았다.’ 이게 뭡니까?

 

결국 모든 성경은 나와 나 사이를 반복, 왕복하는 것입니다. 국가대표가 무슨 동계 훈련하는 겁니까? 모든 성경말씀이 항상 나와 나 사이에, ‘나는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을 알았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는 나는 이제는 안 죽어도 되는 존재다. 그런데 안 죽어도 되는 존재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 또 다시 나는 결혼식 같은 잔치 집에 안가고 초상집에 간다. 그런데 가서 떡만 먹고 온다. 역시 나는 죽어야 될 존재야. 그런데 내가 죽어야 될 존재라는 것을 알만큼 우수한 존재고 살아야 될 만하다.’ 이것은 모든 성경말씀을 보면서 나와 나 사이의 왕복운동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거예요? 실컷 성경수련회를 참석하고 난 뒤에 그냥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지켰나 안 지켰나? 지켰으니까 훌륭하다. 훌륭하다는 이유 때문에 또 지켜야 돼. 지켜보니까 이미 죽었네. 그 죽은 것을 알기에 나는 살았어. 산 사람은 죽어야 되니까 또 죽었어.’ 뭡니까, 이렇게 자꾸 왔다 갔다 하면서.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 걸지 마세요. 목사는 속일 수 있고 장로나 다른 교인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여기에 속아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이렇게 미워하는 것, 이런 것은 나름대로 성질나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뭐가 붙어 있느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것에 대해서 이 방법을 또 써보겠습니다. 성경 말씀이니까요. 일단 성경 펼쳤으니.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 말씀을 지켜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자기 목숨을 미워하게 되면 나는 여기 있고 내가 미워해야 될 목숨이 여기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두 개가 되지요. 내가 나를 미워하는데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지요. 그것을 미워할 수는 없지요. 머리 안돌아 갑니까? 그렇지요? 뭔가 관찰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미워하는지, 안 미워하는지 제 3의 시선, 관찰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미워해야 될 나가 있고 미움당해야 될 나가 있는데 미워해야 될 내가 나를 미워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워한 그 공로로 말미암아 나의 미움은 말씀대로 되었고 그래서 나는 말씀대로 산 것에 대해서 표창장을 받을 만한 미워할 수 없는 존대로서 탈바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교회에서는 나와 나 사이의 왕복운동에 동기유발을 하기 위해서 여기에다 보너스를 지급해요. 어떻게 하느냐, “말씀대로 사시면 당신은 모든 가정이 화목하고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이렇게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말씀대로라면 넘치는 복을 받은 나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가복음 14장 26절에 의하면 그 복 받은 나를 어떻게 해야 돼요? 미워해야 돼요. “미워, 미워, 미워! 저리 가! 너를 만나서 되는 일이 없어. 저리 가란 말이야.” 누구 보고 가라고 하는 겁니까? 복 받은 나를 내가 쫓아내는 거예요. “저리 가란 말이야. 너를 만나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낙엽을 왜 던지나 몰라. TV나 이런 것 던지지. 이게 뭐하는 겁니까? 성경 말씀 가지고. 실컷 50년 60년 목사 장로 되어서 말씀 지킨다고 해놓고는 결국은 자기 챙기기죠.

 

‘나는 신과 동격이며’ 이것은 군대에서 고참들이 하는 소리네요, ‘나는 신과 동격이며 신의 레벨에 속했다’고 우길 수 있는 증거물을 모으는데 청춘과 교회 다니는 것에 투자를 한 거예요. 나 하나 우뚝 세우기 위해서. 그게 미움입니까? 미움 좋다! 그게 미워하는 거예요? 너무 빨리 지나갔기에 못 들으신 분 있을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복을 받고 싶은 생각에 말씀을 펼쳐보니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으니까 나를 일단 미워한 뒤에 그 미워한 결과물을 도로 내 자리로 가져 옴으로서 ‘나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미워했습니다.’라는 그것을 하늘나라에 내용증명으로 보내서 ‘이 정도로 나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천국에 받아주옵소서. 나는 그렇게 30년 40년 교회 생활 했습니다. 보너스 정도는 생각해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라는 심보가 결국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왜, 그것은 바로 제 3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몇 시간 전에 이야기했지요? 법이 온 것은 우리하고 상대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숨기고 있는 죄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당기는 거예요. 우리가 “저 착한데요.” 하고 나서면 “너 말고, 너는 쫄따구니 저리가! 너를, 너의 심리를 주관하고 있는 그 존재 나오라고 해!”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제 3의 안목을 갖고 있습니다. 나 있고 내 속의 나가 있는데 이 두 개의 나가 아무리 해도 죄를 짓는 나, 이 죄는 내 속에 있기에 바로 그게 나인데, 나라는 이 죄가 나를 갈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도록 할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모든 것이 탈진상태, 절망적인 입장이라고 해 놓고 뭐라고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 사망의 몸은 누구 몸입니까? 자기 몸이잖아요. 그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면 사망의 몸 따로 있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꼴로 자기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관찰하는, 내 안에 내가 있는데 그 것을 못 벗어난다고 그것을 관찰하면서 “아, 곤고한 나여!” 하고 외치고 있는 나가 또 따로 있지요. 몸은 몸이라고 치면 나가 두 개가 되지요. 몸 안에, 육신에 갇혀서 어쩔 수 없는 나와 그것을 관찰하고 조사하고 탐색하고 있는 나, 이 둘 합해서 나, 이 나 사이에서 “오호라, 절망이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합니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제 3의 시선이 뭐냐, 이러한 지경에 이르도록, 이것을 밝히 볼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제 3의 처소, 공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감사하리로다, 했으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안목에 같이 동참하고 있는 거예요. 보통 복잡한 논리가 아니지요. 이 복잡한 것을 한꺼번에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있고요! 몸이 있고 몸 안에 나가 들어 있고 그 몸을 관찰하고 있는 ‘나’가 있는데 그 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로 그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곤고한 몸을 유지하면서 항상 우리 육신이 있는 한 항상 왕복운동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 저렇게 내 모습이 왔다 갔다, 잘났느니 못났느니, 절망했다가 신앙 좋다가, 혼자서 나는 신앙 끝내줘 하다가 나는 신앙도 아니야 지옥 갈 거야.’ 혼자 왕복운동의 그 고민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이미 십자가 안에서 구원받은 안목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라 죄에서 벗어보려고 죄와 사투하고 있고 투쟁하고 있는 허접스러운 나가 현재 육식을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감사함 가운데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돈 좋아하는데 아닌 체 하고 사람이 자기만 알아주기를 원하면서도 마치 남에게 희생한다고 착각하는데 착각도 아니지요. 자기 스스로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는 판국인데 남은 속여도 자기는 못 속이잖아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줄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선교사들이 선교를 가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라는 것을 남들 앞에 눈 뜨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라캉의 욕망론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의 것은 없고 전부 다 타인의 것이 수집된 것이지요.

 

남들이 갖고 있는 욕망을 내가 탐을 내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은 나에게 욕망을 가르쳐 줄 타인이 없으면 외로워하는 법입니다. 부자촌에 살면서 “철이 엄마! 이번에 신세계 백화점에 프랑스명품 뭐 들어왔는데?” 묻는 이유가 뭡니까? 기존의 것은 이미 욕망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하니까. 음식도 비싼 것만 먹다가 질려서 보리밥! 하면 그게 유행하고 수제비! 하면 또 그게 유행되곤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새로운 것, 새로운 것, 이것이 욕망에 목마른 거예요.

 

무슨 욕망, 남들의 욕망, 그 사회에 적응 못하고 탈락할 까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 남의 시선에서 벗어날 까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의 환경이 가져다주는 거기서 자기 자신의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삐아제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의 정체성은 일곱 살부터 시작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안 맞아요. 오늘날에는 네 살 때부터 자기 정체성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교육심리에 나옵니다. 자의식이 되면서 서서히 타인과 나를 구별하고 두 번째 단계는 그 타인으로부터 무엇이 악하며 무엇이 선한지를 교육받게 되고 그것이 뭐냐, 윤리라는 거예요.

 

여러분, 윤리와 도덕이 다릅니다. 사회 속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그것은 윤리고 내 맘의 착함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을 도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도덕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윤리가 필요한 거예요. 군대는 군대윤리가 있는 겁니다. 군대윤리는 좀 거칠지요. 군대 갔던 아들이 보낸 편지 가운데 제일 짧은 내용이 뭐냐 “엄마, 좀 빼내줘.” 하는 내용이에요. 어떻게 그 심정을 그토록 짧게 다 표현할 수 있었는지. “엄마, 제발 좀 살려줘.” 기존의 윤리를 가지고는 죽겠다는 말이지요.

 

새벽 두 시에 자서 아침 열 한 시에 일어나는 식으로 생활했는데 빵빠라 빵! 군대는 술 먹고 퍼 잘 시간에 기상나팔을 불고 있잖아요. 맨 날 휴대폰 가지고 문자질 하다가 다 빼앗기고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고 지옥이지요. 그러니 군대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철없고 아무것도 모를 때 빨리 해야 돼요. 결혼의 자의식이 없을 때 결혼도 해야 되고 군대고 그냥 까라면 까는 줄 아는 그때에 갔다 와야 돼요. 현빈 쯤 되면 그게 군대인지 뭔지도 분간이 안 되지만 그 쯤 안 되면 그저 빨리 가서 철없이 기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제대하면 ‘내가 미쳤지. 왜 시키는 대로만 했을까?’ 하지만 이미 지났으니 괜찮은 거예요.

 

철들고는 못할 짓입니다. 안 그러면 아예 군대에 말뚝을 박든지. 그것도 경쟁률이 10대 1이 넘어요. 어릴 때 군대 가는 것이 좋아요. 언제 나이 많은 사람한테 대고 명령을 하겠습니까? 절호의 찬스라니까! 언제 나이 많은 사람에게서 충성, 하는 경례를 받겠어요? 할 것은 빨리빨리 해치워야 돼.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 귀찮아 죽겠어요. 복음이 중요하지 다른 것들은 다 귀찮아.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볼 때 의도적으로 율법을 보내신 것은 너는 법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왔다 갔다 해도, 아까 명품 이야기했지만 교회 욕망은 그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남보다 더 착해지기 욕망, 남보다 더 완벽하게, 산에 오르되 쉬운 코스 말고 어려운 코스로 오르는 것, 천국을 가더라도 고난을 많이 거치면서 순교의 길로 가는 것이 뭔가 하나님 앞에 남보다 신앙 좋다는 우월감을 줄 수 있는 거예요.

 

강도질해서 십자가 옆에 달렸다는 그 이유 때문에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은 너무 수월해요. 자기 즐길 것 다 즐기면서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천국은 천국대로 가고. 그래서 학자들은 말하기를 ‘강도는 상급이 없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어요. 상급은 네가 주나! 상급은 하나님의 의, 그 근거가 있어요. 표창할 때 표창 근거가 있듯이 하늘나라 상을 받는 것은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뭐냐, 자기 의를 포기한 근거입니다.

 

자기 의를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의와 공로로만 상급을 받기 때문에 상급에 차등이 없어요. 순교한 사람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순교 못한 사람, 강도나 세리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쳐다봅니까? 줌이 있어서 당겨보면 다 보입니다. 그런 것이 없어요. 지옥 가는 사람들은 행함으로 지옥 갑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행함에 무슨 차등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산 그 행함만을 가지고서 지옥가지만 천국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주님의 영생의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것을 같이 받아요. 왜냐, 예수님과 같은 시선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냥 ‘너 잘하고 있어.’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세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죄 아래서 겪는 모든 갈등 같은 것을 다 경험을 하신 거예요. 경험을 다 하셔서 265번지에서 네가 어떤 일을 했고 그 다음에 서울 동작구 동작동 365번지에서 살았지, 주님께서 이미 전부 다 일일이 돌아다니시면서 경험해서 ‘너는 죄가 없고 내 의로 의롭다.’고 판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갈등을 겪든지 간에 그것은 ‘너는 예수님의 피가 필요함’을 확인시키는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이 육신을 남겨 둔겁니다. 아무래도 결혼식에 가는 것이 재미있지요. 축가도 부르고 못 부르는 노래여도 잘한다고 박수도 쳐주고, 예쁘지도 않지만 떡칠하듯이 화장하고 웨딩드레스 입고 신데렐라나 백설 공주처럼 하고 있으면 “야, 예쁩니다. 실물이 훨씬 낫습니다.” 이러면서 또 축하를 해주면서 평균적인 일상성 속에서 특이한 기쁨을 주니까 순간적으로 좋잖아요.

 

그런데 초상집에 가보세요. 분위기가 시커멓고, 요새는 우는 사람도 없습니다만 제일 꼴 보기 싫은 장면은 재산 분할문제나 상속문제로 싸우지요. 아버지 모셨는데 그 모실 때의 조건이 유산을 다 상속시켜 준다는 조건이었는데 아버지 살았을 때 모시지도 않은 것이 죽고 나니까 딴 소리를 하면서 법적으로 가자고 나오니 그것도 심장 상하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자식위해서 유산 남기다가 쓸데없이 가족 싸움으로 쓸데없이 휘말리게 하지 말고 자식에게 줄 유산을 교회 교육관 짓는데 다 바칩시다.” 그래서 목사들이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그렇다.” 하고 깨닫는 거예요.

 

교회에도 바치지 마시고 그냥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갖고 계세요. 갖고 계셔야 여러분들이 얼마나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돈 없는 순간부터 자식에게 버림받는 순간 아닙니까? 끝까지 ‘나는 자식보다 돈이 더 좋아. 사랑보다 돈이 더 좋아.’ 그러한 입장에서 쥐고 있어야 나 같은 이 죄인이 바로 돈 속에서 나라는 주체성을 강렬하게 유지하려는, 그런 식으로 복 받은 티를 내려는 육적 요소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덜렁 교회에 줘버리면 교회가 책임져 줄줄 압니까? “나중에 어려울 때는 교회에 요청하세요. 교회에 이 만큼 기여를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연금식으로 드리겠습니다.” 목사 바뀌면 다 끝나는 거예요. 정권 바뀌면 다 끝난다니까. 믿지 마세요, 그런 것. 어떤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너무 성경도 안보고 교회 봉사했는데 이제 퇴직하면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치고 성경공부 하는데 따라다니면서 여생을 보내겠다.’ 그거 퇴직하고 난 뒤에 6개월 갑니다. 오래가는 사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한 6개월 정도, 그것도 하다 보면 귀찮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겁니다. 오직 몸이 추구하는 것은 이것밖에 없어요. ‘편함’입니다. 자기 기분, 컨디션, 그저 편안한 것이 제일 좋아요. 그래서 앞으로 성경공부 할 때는 이런 의자 말고 호텔에서 쓰는 편안한 의자, 뒤로 길게 누울 수 있는 의자 놓고 편안히 앉아서 하는 것이 어떨지.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이가 들면 죽음 수준에 이르기 전에 동물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동물수준은 본능에 의지해서 움직여요. 그래서 그것이 전도서에 보면 나옵니다.

 

곤고한 몸이라고 할 때 예수님의 안목에서 보니까 왔다 갔다 하는 이 부질없는 것들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죄가 지배하고 있는 이 몸 때문에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부패한 몸, 연약한 몸, 부패한 몸, 흙에 속한 몸,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 몸을 어떤 몸으로 바뀌는가하면, 예수님께서 이 몸 때문에 죽으시고 아버지한테 새로 받은 그 영광된 몸으로 다 바뀌어 집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있듯이 새로운 몸으로 다 바뀝니다.

 

몸이 있으면 거기서 새로운 자아가 발생돼요. 이것은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자아가 먼저 있고 몸이 오는 것이 아니고 몸이 있는데 후차적으로 명칭을 붙이니 그것을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아중심이 아니고 몸 중심이에요. 이것은 내 몸입니다, 내 몸입니다, 하고 강조해도 주께서는 내 몸의 그 나를 떼어버리고 그것은 그냥 몸이야, 흙이야, 아담의 몸이야, 하십니다. “저 몸 다르고 내 몸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몸은 한 몸이고 아담의 몸이야.” 이렇게 규정을 해버려요.

 

주님께서 그런 것을 다 훑어서 지나시고 부활의 안목에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나란히 그 안목으로 보게 되면 ‘아, 저것은 성경의 저 말씀이고 이렇게 행동을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어 놓으니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겠다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따먹어놓고 나오는 발작증세가 그런 것이구나.’ 더 착해지는 욕망,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욕망, 어떤 며느리가 밑반찬 열 가지를 했다고 한다면 자기는 백가지, 누가 백가지를 했다면 자기는 천 가지, 어떤 며느리가 시부모를 20년 봉양했다고 한다면 자기는 26년, 누가 또 28년 29년 했다고 한다면 30년!

 

자, 30년 나왔습니다. 30년! 예, 35년 나왔습니다. 낙찰 되었습니다. 올해 최고의 성화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만 만나면, 철학에서 이것을 가치론이라고 하는데, 저 사람이 착할까 내가 착할까, 합니다. 왜, 착함이 힘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 자 끝으로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이런 것을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안다는 이것이 이미 예수 안에서 같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겪었던 모든 것을 우리가 같은 눈으로 보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 5절, 이것은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 설명하고 이번 수련회를 마치겠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몇 분이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상이란 자체적으로 폐쇄된 원리에 의하여 갇혀 있는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자체적으로 폐쇄된 원리에 의해서 못 벗어나도록 갇혀 있는 것을 우상이라고 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인생관을 가진다 할 때, 예를 들어 나는 간디가 좋다, 혹은 나는 에디슨이 좋아, 할 때 에디슨이나 간디를 간절히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그 사람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신봉자, 또는 에디슨에 갇혀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은 자체적인 원리만 통용되고 다른 원리가 수입되는 것을 다 추방시키고 배제시켜버리지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물론 사도바울의 말이 다 예수님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그 사도바울의 말이 우상숭배가 뭐라고 했지요? ‘탐심’이지요. “탐심이 우상숭배니라.”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그 자체적인 원리 안에서 벗어날 생각 못하고 그 자체 내에 머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우상의 실체가 뭐냐, 그것을 신약 때는 일괄 탐심이라고 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지체 이 몸이라 하는 것은 우상이 있는데 그 우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탐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욕심내는 자, 다시 말해서 악마라고 했지만 골로새서에서는 왜 악마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하면, 골로새서에서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개인의 실존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 악마적인 요소를 개인의 실존적인 용어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는 네 욕심에게 이기지를 못해. 욕심은 네가 키우면 키울수록 점점 더 자라나서 더 큰 욕심 안에 너를 가두어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3장 3절을 봅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너희가 죽었고”라고 할 때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법정스님처럼 자기를 때리고 치라는 말도 아니고,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안목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죽으셨잖아요.

 

그 죽음의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도 이 땅에서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 죽었을 때 이 땅에서 이미 죽은 자로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너도 예수님 입장에서 죽은 자로 너 자신을 그렇게 보라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었다 그 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거예요. 이것이 로마서 6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것이 세례라 하고 연합이라 하거든요. 세례를 설명하면 어떻게 됩ㄴ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어떻게 죽었다? 함께 죽었다. 살아날 때는 어떻게 살아났다? 함께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 하는 종이 된 거예요.

 

전에는 죄의 종이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탐심에, 이 세상 자체가 우상이니까, 이 세상 속에서 그 자체적이고 폐쇄적인 원리 속에 갇혀 있으니까 그 세상의 종이 된 거예요. 우리는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예수 안, 하나님의 영생과 그 안에서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땅의 법칙, 생리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말씀에 동의할 수가 있는 겁니다. 흙에 속한 몸을 갖고 있으니까 그 말씀에 동의한다고 해서 이 몸이 갑자기 풀풀 날라 다니고, 그런 것은 없어요.

 

밥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경제학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한 달에 50만원 주기로 약정을 했어요.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원숭이 못지 않게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조삼모사라는 것이 있지요. “아침에 세 개 먹고 저녁에 네 개 먹어라.” 하니까 삐지고 “아침에 네 개 먹고 저녁에 세 개 먹을래?” 하니까 “아, 좋다!” 하는 거예요. 그게 맨 한가지인데.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보세요.

 

50만원 받기로 약정하고 일하러 갔는데 가서 보니 다른 사람은 46만원 받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일터가 즐거운지 참 좋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46만원 받는 사람들이 뒷돈으로 이미 주인에게 20만원씩 받고 있었습니다. 왜냐, 46만원 받고 20만원 더 받고 있었던 이 사람들은 주인의 외사촌 누이라든지 조카던가, 다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합이 66만원씩 받은 거예요. 내 노동의 대가를 이만큼 주셨으니 고맙다고 교회에 감사헌금까지 내면서 기쁨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자기주변이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을 보니까 마치 합당치 않는 방식으로 돈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기분은 뭡니까? 예?

 

그 다음부터는 직장이 싫은 거예요. 왕따 당하는 기분이고 차별당하는 기분이고. 그래서 경제학 책에서 그랬어요. ‘인간은 그 만큼 어리석다.’는 거예요. 어리석다는 말은 ‘인간은 돈 가지고 자기 기분이 업 되고 다운되고 할 정도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한 거지요. 그것을 다른 말로 인간은 환경 따라서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아부하고 싹싹 빌면서 헤헤거리기도 하면서 자기를 둘러싼 큰 에너지의 흐름에 기어 붙으면 그것으로 자기생명에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싶어서 그렇게 늘 살피고 다니는 존재, 욕심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신학교 교수들이요? 자기 일자리만 신경 씁니다. 어느 학교에서 불러주지 않을까, 어디 강사자리 없는가? ‘일자리 없고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고 강도처럼 살아도 좋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도 좋아.’라는 마음으로 신학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유학가지도 않을뿐더러 아예 복음전하는 그것에만 신경 쓸 거예요. 자기욕심, 그 욕심에 휘돌리는 그 사람의 육신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정리해보면 인간은 자아가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인간의 몸이 우선이며 몸의 관리는 자아가 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둘러싼 하나님의 저주스런 환경이 내 몸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가만두지 않으니까 죽는 것이 무서워요.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면 누구의 똘마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악마의 똘마니이기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악마는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무서워합니다. 이것을 인터넷으로 딱 때려서 성경에서 찾아보니까 히브리서 2장 14절이 나와서 보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네가 마귀의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온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아브라함의 자손, 언약 자손을 종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왔다.” 하고 척척 나오잖아요.

 

이렇게 나오는데 이미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지금 내 현실이 그렇구나, 하고 확인하고 수용하면 될 텐데 이게 성령이 안 오면 그 말씀을 가지고 되풀이해서 반복학습에 나서면서 히브리서 2장 14절, 히브리서 2장 16절……, 백날 해 보세요. 백날! 나이 들면 낙엽 떨어지듯 다 떨어지고 “하이고, 그저 편한 것이 좋아. 말씀도 소용없더라. 내 몸 편한 것이 최고야.” 하고 몸에서 작용하는 그것에서 그대로 자아가 되는 거예요. 그 자아라는 것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 몸 안의 자아는 없고, 예수님의 몸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 안의 지체로서의 자아는 없고 현재 있는 내 몸이 나의 자아를 규정하는 하나의 지평선으로 환경으로서만 굳어져 버려요.

 

내 몸 하나 편한 그것이 그저 좋은 거예요. 그리고는 “어느 놈이 죽어서 천당 가 봤나? 교회도 그런 소리들 하는데 나도 한때는 믿었다. 그런데 지금도 불확실해. 찬송가도 별로 안 좋고 나 훈아의 고향열차가 훨씬 더 땡긴다.” 이렇게 다 귀찮아해요. 그저 몸 편한 대로 사는 거예요. 이런 몸이 자아고 우리 몸이 있는 한 우리는 내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의 능력으로 살 수 있느냐, 주의 능력으로도 못 살아요. 그러면 이래도 저래도 못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주의 말씀은 왜 있느냐?

 

이 말씀은 지킬 필요가 없이 이미 예수님께서 다 지킨 혜택을 네가 누리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킨 그 혜택과 우리 사이에 그 기이한 사건, 표적 중의 표적이 무슨 사건입니까? 바로 요나의 표적, 이미 너는 죽은 자고 죽은 너를 내가 살렸잖아, 그것을 보여주는 십자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표적, 그것만을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십자가 목걸이 같은 것은 안 해도 괜찮아요, 그냥 바로 이 십자가가 그냥 나의 이 몸을 죽이고 없애는 축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뭐냐, 축복이란 내가 이 땅에서 사라져서 다른 곳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한 본향으로 이미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는 겁니다. 가열의 17번, 나열의 35번, 이미 그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 펼치기 전에는 몰랐는데 성경 펼치고 보니 예수 안에서 이미 다 받은 거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누가 너를 말씀가지고 고소하더냐, 너를 의롭게 한 것은 너의 죄를 씻긴 것은 바로 나다. 너를 용서한 것은 나인데 누가 너를 폄하하고 법적으로 너를 따지고 들더냐. 이미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 안에서는 심판도 없고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도 없어야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세계가, 네 자리, 내 자리 따질 것도 없이 전부 다 공유된 주님의 자리가 곧 우리들의 자리이고 그것이 14만 4천에 해당됩니다. 우리 십자가마을 모든 사람들, 모든 교회들이 그냥 본드로 붙인 말씀 말고 늘 말씀 속을 들추면서 앨범을 들추듯이 성경 속에서 다시 자신을 발견하는 제 3의 시선을 주님과 함께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몸이 육신의 몸이라 너무나 자주 말씀 없는 쪽으로 세상에 맞추고 적응하려고 우리의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우리가 버릴 수도 없고 그 욕망을 중지할 수도 없고 그것을 절제할 수도 없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과 즐거움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제 9강).hwp (60.5K), Down: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