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과거재편 1901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25. 09:43
2019-01-19 19:00:16조회 : 38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0 - 과거재편이름 : 구득영 (IP:222.100.102.44)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0 - 과거재편

                                                             19,01,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심판과 구원 !!

오늘은 교재 11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제목이 '7강. 심판과 구원' 이라고 되어있는데, 인간들은 개인적인 구원과 개인적인 심판에 대해서 관심이 매우 많은데, 아니 그것이 관심의 전부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개인은 다수를 의미하고, 하나는 단 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여러 명이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해갔다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 탈취해갔다고 보시는데, 그것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아담이라는 겁니다. 아담 한 사람이 어겼다고 보신다는 말이죠. 여러 명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이란 말이죠. 하나님은 그 빼앗긴 자기 영광에 관심이 있는데, 즉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훼손시켰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작살내는 장면에 에스겔서에 나오는데, 그러니까 에스겔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심판은, 그 이유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성전에 있는 내 이름을 너희들이 훼손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징벌함으로서 내 속이 다 시원하다"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인자(人子) !!

그 하나님을 대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딱 한 사람이 등장했는데, 에스겔 시대에 말이죠. 그게 바로 에스겔 선지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두고 '인자(人子)' 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 인자는 인간과는 다른 의미인데, 보통 인간은 아담에게서 내려오지만, 반면에 인자는 언약이 실렸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실려있는 사람,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이는 사람, 그것이 바로 인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호칭할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하셨는데, 즉 자기를 인자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인자는 곧 왕으로서의 인자인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최초의 인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자는 택한 이스라엘, 탁한 자들의 대표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인자인데, 그것을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 인데, 여기에는 굳이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는데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삼성그룹의 회장이 하는 말이 "나는 이번 겨울에 연탄배달 봉사를 했다" 라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그 회장이 연탄 배달부라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했다는 말이죠. 자기 위치와 신분에 맞지 않는, 오히려 그것과는 극단적으로 대조가 되는 일을 했다는 겁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그러니 예수님을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구태여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는데, 그런데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데, 즉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본질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즉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니 구원은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데, 그러나 구원은 그게 아니라, 그분의 낮아지심이라는 말이죠. 즉 "나의 구원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그분 안에 인자가 들어있는데, 즉 사람의 아들이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사람을 떼어내면 아들인데, 그러니 그 아들 안에 사람과 하나님이 종합되어 들어있다는 겁니다.

* 아래로의 종합 !!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아래로의 종합' 이라고 했는데, 위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달리 말하면, "개인적인 구원은 없다" 라는 것인데, 주님의 구원, 즉 주님의 내려온 그 엘리베이터에 우리가 합류를 하게 되면, 거기서 우리는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내려왔던 것이 아니면 어떻게 올라가겠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성경이 어렵고 설교가 어렵고 성경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런 불평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구원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겁니다. 포기하면 전혀 어렵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 구원이 어디서 시작하는고 하니, 그것은 '나'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선과 악에 의해서 '나' 라는 것이 생기고, 즉 선악에 의해서 구원을 얻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도 전혀 안 되는 소리인데, 사실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선악에 의한 예정론, 선악에 의한 구원론,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엉터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선악에 의한 천국도 엉터리인데, 즉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 라는 것도 완전히 엉터리라는 겁니다. 

이러한 선악논리는 구멍이 나야하는데, 즉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인간은 이런 선악논리가 없는 조건 하에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선악을 몰라야 낙원에서 살 수 있는데,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만 인간이 선악을 알아버렸으니, 누가 말인가요? "내가 알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여기서 '나' 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한 그 인간, 그 '나' 라는 것이 아니고, 선악에 의해서 조성된 '나' 라는 말이죠. 그러니 선악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나'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극구 저항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착하고 싶다. - 왜? - 착해야 산다" 라고 나오는데, 이런 사고방식이 구원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죠. 누구의 구원을 방해합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의인이지만 죄인이 되셨는데, 이게 복음이라는 말이죠. 선악의 논리에 의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죄인, 하나님이 그 죄인이 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50년을 다녀도, 여전히 자기 구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면, 이런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데, 그러니 달려져도 많이, 아니 마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새로운 것을 하나 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죠. '나' 자신이 새로운 것을 집어넣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겁니다.

'몰라'도 되는 구원 !!

어차피 치매에 걸리면 다 놓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미리 치매에 걸린 연습을 한번 해보자는 말이죠. "어머니, 이것을 압니까? - 몰라. - 아버지의 이름은 압니까? - 몰라. -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 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몰라도 되는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데,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몰라도 되는 구원, 그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 쪽에서 애를 써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려오셔서, 어디까지 내려오셨다는 겁니까? 우리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말이죠. 그런 원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세례요한의 물세례인데, 예수님의 십자가가도 이 세례의 연장선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불세례라고 하는데(?), 여기서 불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그 불세례를 심판세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십자가는 심판에 참여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겁니다.

* 예수님은, 심판에서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

오늘 교재의 제목이 '심판과 구원'이었는데, 그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란 겁니다. 그리고 구원도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심판이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심판에서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심판을 경유해서, 그것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 구원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데, 그래서 자기 구원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고 하니, 주님의 심판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 구원은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아하,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 물세례의 특징은?

그러면 이 물세례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이 주일학교 학생들이라고 여기고 쉽게 가겠는데, 물세례라는 것은 물 속에 풍덩 빠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는 물 속이고 여기는 물 바깥이 되겠는데, 그러니 물 바깥에 있는 인간이 물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물세례라는 겁니다.

결코 어렵지 않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물인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죄로 보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대자연을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의 모습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 있다고, 그런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물 속이 아니라 죄 속이 되는데,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힘으로 자기 죄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모두 다 세례요한에게 와서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죠. 이게 세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착하게 살자" 라는 것이 아니라, 죄 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손을 댈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는 말이죠. 암에 걸려서 4기로 판정을 받으면 자포자기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마음이라는 겁니다. 암에 대해서 전혀 손을 대지 못하듯이, 자기 죄에 대해서 전혀 손을 댈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인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죄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죠.

* 인간이 아닌,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예수님도 세례요한도 성령을 받았는데, 그분들이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죄의 세상으로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돈이 있네. 음식이 있네. 하늘에서 눈이 오네. 저기에 산이 있네" 라고, 그렇게 인간들이 보는 것만 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해든 달이든 별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자연이든 과학이든 인공지능이든 간에, 이 세상은 죄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즉 "인간이 아닌 세대로 보자" 라고 말이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신다는 말이죠.

물론 제자들은 그런 관점을 처음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과 동일한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남자들은 아는데, 아무리 편하게 군대생활을 했어도 다시 군대에 가라고 하면, 꿈속에서라도 저항을 한다는 겁니다. 강력하게 저항을 하는데, 도저히 받아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제대를 했다는 것이 그야말로 꿈과 같은데, 거기서 벗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도들이 바로 그런 마음인데,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을 최고의 영광이고 기적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로또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그렇게 됩니까? 방금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을 죄로 보는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죄로 보라고 하면, 그들은 교도소 근처에서나 신문을 보면서 찾는데,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모은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가셨습니까? 세레요한에게 가서 요단강 물 속에 빠졌는데, 그 물은 하나님이 장만하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진짜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여기로 주목하라" 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을 바라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가 무슨 짓을 합니까? 인간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데, 그게 바로 '물세례' 라는 겁니다.

* 너는 나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허용하라 !!

그 물세례에 의해서 죄에 빠질 때,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죠. 그러자 세례요한이 당연히 말렸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은 씻을 죄가 없습니다. 당신은 죄 속에 빠져서 죽을 존재가 아닙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인데,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보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보지 않고, 특수한 이미지와 자국을 계속해서 남기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나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허용하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마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의 !!

오늘 강의처음에 무슨 구원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했는데, 그 다음에는 방금 이야기한 하나님의 의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에도 하나님이 그 앞에 붙고, 또한 의도 그 앞에 하나님이 붙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내려오시면서, 물 속으로, 죄 속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채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착하게 사는 것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에 그대로 머물러있는데, 그런데 이 죄 속에서 도저히 생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의가, 그런데 그 의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도 죄 속에서만 나온다는 겁니다.

* 선악체계를 폭발시키는 하나님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취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선악체계에 대한 파괴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선악체계로 봉쇄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꽉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봉쇄되어있던 선악체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폭발이 된다는 말이죠. 특수요원들이 적의 기지에 가서 폭발물을 설치하고 나오는데, 그래서 스위치를 눌리면 드디어 터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합니까? 우리의 몸은, 우리 개별자는 이미 아담에게서 처음에 물려받았을 때부터 이미 선악체계를 품고 태어난다는 말이죠. 그 선악체계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죄라는 것인데, 즉 옳고 그름을, 선과 악을 구별하겠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이것은 언감생심이라고, 우리 인간이 손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인데, 그런데 그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인해서 이미 그런 선과 악이 우리 몸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착한 일을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 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 종교는, 더욱 더 선악체계를 강화시켜 !!

모든 종교는 바로 이 선악에서 나왔는데,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인간은 지옥으로 보내는 봉쇄된 철망과도 같은 것인데,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마치 새장에 갇힌 새와도 같은데, 우리 인간은 날고 싶어도 선과 악이라는 철망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악체계가 폭파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나져나갈 수가 없는데, 하지만 우리 자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선악체계와 우리는 너무나도 친하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청하기를, "선하게 되게 해주세요. 바르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하지, "선과 악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평소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잘나서 살아간다" 라고 하는 의식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 났으니, 착하게 사니까 교도소에도 가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복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죄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노력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물세례가 없어야 하는데, 설령 물세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몸에 묻어있는 먼지와 같은 죄를 씻어주는, 그런 물세례로 이해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당신과 같이 죄가 없는 분은 오시면 안 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죠.

* 물세례는, 물 속이 이 세상의 본질임을 보여줘 !!

시커먼 연탄과 같은 것이 묻은 사람만 물 속에 들어가야 깨끗하게 되는 것이지, 때를 씻으려고 목욕탕에 가듯이 말이죠. 하지만 물세례를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세례라는 것은, 물 속이 바로 이 세상의 본질임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본질은 우리 인간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지만, 그런데 하나님이 가시는 그 발자국마다 이 세상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면서, 위인전기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자국을 남긴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발자국 하나 하나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 세상의 모습, 즉 선악체계에 갇혀있던 우리 인간의 본질, 그것이 예수님의 발자국에 의해서 그 흔적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는, 누구 하나 정신병에서 나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귀신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이죠.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런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데 교회가 선악체계를 동원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복음을 감추고 훼방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삽시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계속해서 선악체계에 갇혀있게 되는데, 전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않아도 갇혀있는데, 더욱 더 갇히게 한다는 겁니다. 

* 주님, 참 잘하십니다 ??

여러분도 지방교회에서 그런 것을 많이 배웠지 싶은데, 그렇지요?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를 알고, 그런 것을 알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그것이 곧 개인구원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 죄인이 되는데,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을 구경하면 그만 의인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주님을 구경하고 있습니까? 따라가고 있습니까? "주님, 참 잘하십니다" 라고 하면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같이 걸어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동행을 하면서 말이죠. 주님의 십자가 길을, 즉 인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개인구원을 포기해야 하는데, 자기 구원을 잊어야 하는데, 즉 자기를 잊어야 한다는 겁니다.

* 동화, '금도끼, 은도끼' !!

'금도끼, 은도끼' 라는 동화가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복음적으로 이해해야할 대목이 있는데 말이죠. 그 동화를 보면, 연못에 도끼를 빠트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자기는 쇠도끼 하나를 빠트렸는데 산신령으로부터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그렇게 3개를 전부 다 얻는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이렇게 끝까지 자기가 빠트린 도끼를 찾는다는 겁니다. 즉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것이 아닌 것까지 찾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동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나오는데, 엘리사의 기적 가운데 보면 말이죠. 일명 '떠오른 도끼' 라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가 떠오르는 방식", 바로 그것이란 겁니다.

(왕하 6: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왕하 6: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왕하 6: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왕하 6:6)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왕하 6:7)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죽고, 그렇다고 해서 죽고 난 다음에 그 죽은 '나'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나' 라는 것이 죽으면, 주님께서 그 '나' 안에서 떠오른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 자립인가? 두려움인가?

물론 제가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다 있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그만 습관이 되어서, 그것이 예수님이든 누구든 간에 자기 옆에 붙어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죠. 자기 문제를 자기 혼자서 해결을 하려고 하는데, 즉 자립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한 다음에 나오는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립인데, 즉 자수성가를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결국에는 나이가 들면서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되는데,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두려움'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합니까? 자기를 보호해줄 보호자는 찾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른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보호자가 아니라 변호사를 찾는다는 것이죠. 물론 두려운 일이 없다고 한다면, 보호자도 찾지를 않고 변호사도 찾지를 않겠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두려운 일은 무엇입니까? 번개가 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런데 그때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번개가 치지 않아도 집에 아무도 없으면 아이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는데, 특히 엄마가 없으면 말이죠. 엄마도 없는데 아이를 방에 두고 그냥 가버리면, 그 아이는 문을 긁어서 손톱이 남아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절대 자기를 혼자 두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그런데 어른이 되면 왜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직까지는 두려워할 만한 일이 제대로 벌어지지를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모든 어려운 일은 자기가 다 알아서 나름대로 해결하면서 지내왔다는 말이죠.

우리교회 설교가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는데, 그런데 우리교회 내부에서 생중계가 끊어지면 두려워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는데, 안절부절이라는 겁니다. 물론 다른 교인들은 자기가 직접 왔으니까 느긋한데, 마이크만 꺼지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누구지?) 

* 성도에게는, 계속해서 감당치 못할 일들이 !!

그것은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디로 몰고 가시는고 하니, 제자들이 감당하기 두려운 일을 계속 제공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성도가 생기는 곳에는 반드시 무엇이 생깁니까? 성도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운 일들의 연속인데, 성도로 하여금 그런 일들을 맞닥드리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에베소나 빌립보와 같은 곳에 보면 그런 일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자체가 그러한데, 사도들이 갈 때,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참으로 불쌍한데, 하지만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야 자기 목숨을 바칠 곳을 찾았다고 하는, 그런 희열과 감격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자기 한 몸을 바칠만한 절대진리를 알게 드디어 되었다는 것, 그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말이죠. 돈도 벌어도 그만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죄의 물 속을 그만 헤매도 되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해답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순간이라는 말이죠. (아멘 !!)

십자가 앞에서 자기는 죽어도 좋다고 하는 기쁨의 고백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인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하는데, 이게 슬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교재 11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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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전도서를 공부했으면, "전도서가 어떤 내용인가요?" 라고 물어보면, 답변할 것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서를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공부해도 소용없다", "과수원 농사를 지어도 소용없다",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어도 소용없다", "자식을 많이 낳아도 소용없다", "사회에 공헌해도 소용없다. 낙을 누려도 소용없고, 지위가 높아도 소용없고, 착실한 계획을 잡아도 소용없고, 착해도 소용없고, 장수해도 소용없고, 자녀를 백 명이나 둬도 소용없고, 여자를 많이 둬도 소용없고, 특히 여자한테 어떤 지혜가 있는가를 찾아봐도, 그것도 소용없다"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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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7장 28절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첩 이야기죠. 그리고 "빨리 경주하는 자도 소용없고, 유력한 권력자도 소용없고, 기능인이 되어서 재주를 부려도 소용없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종합적으로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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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2: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전 2: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전 2: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전 2: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전 2: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전 2: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전 2: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전 2:10)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전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 전도서의 주제 - '소용없다' !!

그래서 "전도서 수련회를 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러면 우리는 "예,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전도서의 주제인데, 인간은 끊임없이 헤매고 다닌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소용없다' 라는 것을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그 공간을 인테리어 시공을 해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공부해도 소용없다. 장수해도 소용없다. 사회에 기여해도 소용없다. 여자가 많아도 소용없다. 왕이 되고 권력자가 되어도 소용없다. 빠르게 승진해도 소용없다" 라고, 이런 '소용없다' 라는 것들을 줄줄이 타일로 만들어서 실내장식을 예쁘게 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소용없다' 라는 것이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이 구약인데, 즉 옛 언약이란 말이죠. 우리는 지금 옛 언약을 공부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나오는데, 그러면 해답은 어디서 제공이 되겠습니까? 신약인데, 그런데 인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무엇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짊어지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나서기 이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고 하니, 물 속에 빠지신 것인데, 여기서 물은 이 세상을 대변하는 죄라는 말이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선악적으로 잘았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버티는데, 즉 자기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이유는 자기가 훌륭해서 받았다는 겁니다.

이러한 논리로 가는데, 그런데 세례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회개하라. 물 속에 빠져라" 라고 하는데, 앞에서 말한 바로 그런 생각이 물 속에서, 즉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 속에 이미 그것이 장착되어있었다는 것인데, 즉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요소가 이미 자기 안에 가득히 들어있다는 말이죠.

* 돈으로 못 가요 ♬

주님께서 자기를 찾아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기가 주님에게 괜찮은 선물을 들고 찾아가서 바치기만 하면, 하늘에서 날름 받아서 자기를 구원시켜준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것이 헌금과 봉사와 같은 것들인데, 그것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입이 벌어지면서, "아이쿠, 기특하다. 내가 천국에 넣어줄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이 세상에서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천국도 그렇게 돈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갑자기 주일학교 찬송가가 생각나는데, "돈으로도 못 가요 ♬" 라고 말이죠. 간단하면서도 얼마나 깊은 진리가 여기에 담겨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 납작한 인생 !!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시면서 우리를 어떻게 만듭니까?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데, 오늘 강의제목을 '납작한 인생'으로 하고 싶은데,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위에서 강하게 눌러버리면, 왜 공장에 가면 프레스 기계가 있지 않습니까? 폐차장에서는 자동차도 그것으로 눌리면 납작하게 된다는 겁니다. 참 옛날에 거리에서 쥐포를 그렇게 눌려서 팔았는데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이 위에서 눌리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즉 자기의 키가 180이 넘는다고 해도, 그만 평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자아가 내세울 것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어린아이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두려움에 있는데, 그래서 마땅히 보호자가 있어야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 보호자가 필요해요 !!

이것은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는 보호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인데, 즉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이죠. 반면에 제자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을 제자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인데, 즉 "너희들도 나를 그렇게 필요로 하고 있는가?" 라는 겁니다.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변호사가 필요한데, 그런데 변호사는 돈이 많이 드니까 자기가 아는 친척이나 집안에 조카뻘이 되는, 그런 변호사를 찾는다는 것이죠. 돈도 별로 들지 않고, 자기 문제도 해결해줄 수 있는 말이죠. 

*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다 털리고 !!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인데, 그러니 아쉬워서 찾는다는 겁니다. 구약 사사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평소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적들이 왔을 때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적들의 무기가 비슷하면 용기백배해서 한번 붙어보는데, 거기서 밀리게 되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다 털리고 나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그런 분들이 거의 없는데(ㅋㅋ), 그렇게 낭패는 낭패대로 다 보고, 실컷 우사(부끄러움)를 당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신 그 배후에 누가 있는고 하니, 이방민족을 움직여서 이스라엘에게 프레스를 가한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인데,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가지고 있어도 쓸모가 없게, 즉 건강해도 그 건강이 의미가 없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것이죠. 만약에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얼마나 얍삽한지 모르는데, 아니 힘들게 중매를 했는데도 입을 닦아버린다는 겁니다. 서로가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남자와 여자 양쪽에서 다 중매비를 주지 않는데, 하지만 그것이 직업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 세례요한의 '물세례' !!

세례요한의 물세례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세례요한에게 물세례가 주어진 것은, 이 세상을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을 주님이 만들어내셨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준비해서 하늘나라를 대비하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 나라 만들기에 예수님이 개입할 줄은 세례요한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늘나라는 우리 인간이 대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인데, 반드시 주님과 함께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죄를 짓는 그 현장에 누가 참여했는고 하니, 주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참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죄는 우리가 짓고 죄 용서는 하나님이 하신다" 라고, 우리는 다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틀을 깨라는 것인데, 죄를 짓도록 유도하신 분도 역시 누구라는 겁니까? 주님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죄를 짓게 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거기서 새롭게 맞춤 의를 만들어내신다는 것이죠.

* 아하, 내 믿음은 소용이 없구나 !!

그래서 성도가 경험해야하는 가장 큰 두려움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내 믿음은 소용이 없다" 라고 하는,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믿는 예수, 자기가 믿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그동안 최고의 무기로 여기고 있던, 즉 "나는 이것만 있으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하면서 고이고이 간직해왔던 바로 그것, 그것이 바로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악마의 최후시험이고 테스트라는 것을, 그것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그렇게 되면, 그렇게 앞에 '나' 라는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구원을 자기가 포기하지 못하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뭐라고 합니까? "나는 신앙이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제 낮에 뭐라고 했습니까? 신앙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없으면 됩니까? 그것도 아닌데, 그냥 우리는 죽으면 되는데, 즉 납작하게 되면 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에게 닥친 두려움이고 위기인데, 즉 자기가 사랑했던, 기대했던 것, 희망을 걸었던 것, 그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 스카이 캐슬 !!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을 13살에 미국에 조기유학을 보냈는데, 그 아이가 그만 하버드 대학에 합격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기 가정에 영광이 되었는데, 그러면 그 가정은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이 되겠습니까? 그 아이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사기를 쳤는데, 그래서 하버드 대학에 6만불을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스카이 캐슬' 이라는 드라마의 내용인데(ㅋㅋ),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서 그런 짓을 하고 말았는데,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설령 그 아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어도, 그게 그 가문에 자랑거리가 될지는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고 있는, 마귀의 짓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큰 훼방꾼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자기 자신인데, 즉 자기가 살고자 하는 자기 가치, 삶의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탈출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라는 것이죠.

*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 !!

그런데 이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제자들에게, 그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위기에 봉착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그만 풍랑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눅 8: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눅 8: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눅 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그러자 제자들은 물을 퍼내고 난리가 났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리고 예수님에게서는 믿음이 없다는 소리까지 들었다는 것이죠. 저도 그 갈릴리에 가보았는데, 그 모습도 제가 친절하게 찍어서 동영상으로 올려놓았는데 말이죠.

지금은 옛날보다도 물이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풍랑도 더 많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 갈릴리 바다를 선택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바다에 이는 풍랑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본질을 설명하셨는데, 그런 상징적인 사건을 일으키셨다는 겁니다.

*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

물론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것보다 더 큰 위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인데, 그때는 도망을 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는 말이죠. 심지어 교회의 반석이 된다고 하는 그 베드로가 한 짓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마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 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그 저주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에게서 나왔는데, 이게 문제라는 말이죠. 그러면 저주는 어디서 나와야 합니까? 즉 심판은 누구의 심판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심판이고, 구원도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기를 고집하고 있다는 겁니다.

* 과연 누구의 몸인가?

그러니 우리의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주님의 저주와 주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몸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 몸에 자아가 달라붙어서, 자아는 우리 몸에 붙어있는 단추와도 같은 것인데, 주님은 우리 인생에 위기를 주셔서 이 단추를 '똑' 하고 떨어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은 주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우리의 이 몸은, 인자가 되신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에게 육신을 허락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으려고 자기 구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동을 해야하는데, 그러면 무슨 경험을 해야합니까? 자기에게서 단추가 떨어지는, 즉 '나' 라는 것과 '육신'이 떨어지는, 그러한 경험을 해야하는데, 물론 주님께서 하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인생이라고 우겼던, 그러한 '나'를 분리시키는 체험들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 과거 재편성 !!

아까 교재를 보면서, 전도서의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4글자로 '소용없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누구의 인생이라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까? 자기 인생이라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소용없는 자기 인생에서, 우리는 소용있는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두고 오후설교시간에 '과거재편' 이라고 했는데, 오늘 강의제목은 이것으로 하겠는데 말이죠.

우리 인간의 시간의식에는 과거라는 것이 있는데, 과거, 현재, 그리고 남아있는 미래, 이 미래는 점선으로 표현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과거재편' 이란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현재 일어난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그동안은 자기의 과거를 슬픈 과거로 보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지금 주어진 일로 인해서 슬픈 과거가 아닌, 복 받은 과거라고, 그렇게 재편성되는 사건이 우리에게 있어줘야 한다는 말이죠.
    
* 예수님과 물 속 동기생 !

예를 들어서,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만약에 회개하지 않으면 불 심판이 주어지고, 그러면 박살난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겁이 나서 강가로 와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다들 몰려와서 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즉 "내 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조치에 합류하겠습니다" 라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런 무리들 속에 예수님이 같이 오셨는데, 그렇다면 물 속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은 누구와 동기가 됩니까? 주님과 동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가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내가 물 속에서 나왔다" 라고 하게 되면 세례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죄 속에 있다는 것은, 즉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기 때문에, 그래서 들어갈 때는 '나'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나와야만 한다는 겁니다. 들어갈 때는 '나'의 과거도 같이 들어가는데, 그런데 나올 때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주님의 세례조치에 준한 새로운 '나'로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즉 물세례의 조치로 인한 주님의 동기생으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물세례의 조치로 인한 주님의 동기생이라는 표현이 너무 기니까, 이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 안에서 나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내 인생' !!

제가 지금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이 이야기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하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서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자기 구원을 놓으면 되는데, 도저히 아까워서 놓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고 자기 과거인데, 즉 자기가 열심히 착실히 살았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그렇게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살았으니 이만큼이라도 되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영광과 자기 자존심을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죄이고 저주라는 말이죠. 하늘나라에 무슨 박사, 판사, 의사, 교사가 필요하고 구분이 있습니까? 하늘나라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 배부른 남자만 5,000명 !!

오병이어의 기적에 보면 먹고 배부른 남자만 5,000명이라고 하는데, 그런 남자들이 하는 짓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배부른 까닭으로 계속해서 예수님만 따라다닌다는 말이죠. 인간의 대표가 남자인데, 그런데 그 수준이 그런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직업이 어떠하고 어떻게 살았던지 간에, 그런 개별자의 자기 과거, 즉 장사를 하든 회사에 다니든 간에, 그 모든 이야기들은 물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죄된 인생이야" 라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일괄적으로 처리해버린다는 말이죠.

쓰레기 매립장에 가면 재활용이 되지 않는 것을 태우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들어가기 전에 그 상태가 어떠했든지 간에, 그리고 색깔이 빨갛든 파랗든 간에 들어가면 일괄적으로 동일하게 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지옥의 불심판이 그것보다도 약하겠습니까? 재가 아니고, 그야말로 흔적도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죠.

* 천국은, 유사성이 아닌 '차이성' !!

남자와 여자의 경우도, 제가 이번에 아가서를 가지고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물론 이 땅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하지만 천국에 가면 남자와 여자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과 천국은 유사성이 아니고, 차이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바로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나라가 아닌데, 그렇게 자기가 안다고 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주님이 내려오심으로 인해서 가는 나라가 곧 천국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의로워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주님의 의가 죄 속에서, 즉 주님이 손수 장만한 의에 실려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떨 채' 라고 했는데, 수족관에서 고기를 집어서 올릴 때 사용하는데 말이죠.

갑자기 회가 땡기는데(ㅋㅋ), 그렇게 주님께서 떤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떴다는 것인데, 광어인지, 농어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

그것이 바로 레위기인데, 레위기 1장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흠량하실 만한 양식에 과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을 '번제' 라고 하는데, 그것은 산 채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물의 몸체를 하나님의 제단불로 다 태워버려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그 연기를 마시고 기뻐하신다는 말이죠. 

과연 그러한지 찾아보겠는데, 창세기 8장 20절과 21절입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인간의 몸에서 향기가 !!

번제는 태우는 제사인데, 영어로 태우는 것을 '버닝' 이라고 하는데, 발음이 비슷한 것은 우연인데 말이죠. 그렇게 태우면 향기가 나오는데, 물론 우리는 그것을 고기냄새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아가서의 핵심이 바로 향기인데, 즉 인간의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겁니다. 아가서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라는 것이죠.

물론 저도 어떻게 몸에서 향기가 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지만 사랑하는 자의 몸에서는 향기가 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은 화장품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데(ㅋㅋ), 그 반대말은 악취라고 보시면 되고 말이죠. 냄새가 더러운 것은 다 지옥으로 보내는데, 이게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성경에는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하는 것이 없는데, 오직 하나님의 조치 안에 들어올 때만 성경말씀은 이해가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제물을 태워서, 그 향기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기존종교나 무당들이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소용이 없는 인간인데 무엇을 받습니까? 일절 받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태울 때, 그것도 죄라고 규정해놓고 태우는데, 그것이 곧 '과거재편' 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분리수거를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제단 위에 놓는데, 우리의 과거를 그렇게 올려놓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과거를 태우면, 하나님께서는 "으흠, 냄새가 참 좋구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죄를 태우는데 왜 냄새가 좋은가?

그러면 죄를 태우는데 왜 냄새가 좋습니까? 그것은 바로 거기에 누가 합류를 합니까? 인자가 합류를 하시는데, 즉 예수님이 개입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향기의 덩어리이신 주님과 더불어서, 주님이 우리를 껴안고 같이 죽었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피어나는 향기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레위기의 5대 제사를 종합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십자가의 향기, 예수님의 향기를 맡으시고, 그래서 예수님의 품에 있는 우리도 함께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새삼스럽게 천국을 이루신다는 말이죠. 즉 과거재편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과거를 볼 때는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선악체계로 보는데, 즉 "이런 점은 좋았어. 이런 점은 후회가 된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인간에게는 두 번이란 없는데, 곧 죽을 인간이 무슨 두 번이 있느냐는 겁니다.

어디 두 번을 하면 좋아집니까? 인간에게는 그런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 같으면 착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데, 하지만 우리에게 부딪치는 상황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 악하게 사는 것이 더 힘들어 !!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람이 착하게 살기는 쉬운데,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착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착하게 살면 마음이 편하다는 겁니다. 선악체계에 의해서 자기는 착하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악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사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할 문제는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오게 되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욱' 하는 성질로 인해서, 그래서 돌발적인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화나 분노와 같은 것들이 통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마구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들에게 피해를 입은 것은 조금이라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가 남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그만 무덤덤해진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피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면, 자기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평소에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그렇게 피해를 줄 리가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 강박관념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얼마면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자기에게는 약간의 뉘앙스만 달리 말해도, 끝까지 복수하려고 달려든다는 겁니다. 착한 자기에게 흠집을 내는 듯한 시늉을 했기 때문에 말이죠.

이런 것을 우리가 정치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래서 한 쪽은 태극기를 흔들고, 다른 쪽은 촛불을 흔들고,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왜 착한 자기에게 흠집을 내느냐는 말이죠. 왜 착한 우리 공주님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느냐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한번 정리를 하면,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 혹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그 육체에 '나' 라는 게 달라붙었는데, 그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그 안에 선악체계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체가 있으면, 그 육체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잘나고 훌륭한 존재인지, 그것을 증명해내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계속해서 쌓인 것이 바로 자기의 과거인데, 그것이 곧 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 속에, 즉 세례요한의 물세례 속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동참을 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내 육체는 내 것이다" 라고 하는 우리의 과거에 주님이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우리의 육체와 '나'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육체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합니까? 육체가 잘 되어야 자기가 잘 되니, 즉 몸이 건강해야 자기가 기쁘다는 말이죠.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몸이 아프면 어떻습니까? 은혜고 뭐고 간에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자기 잘남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 육체에 무엇을 가미합니까? "선하게 살자. 양심적으로 살자. 바르게 살자" 라고 하면서, 그것을 여기에 계속해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여기서 무슨 요소가 빠져있는고 하니, 이 세상 자체가, 즉 죄악된 환경인데, 그러한 환경에서 자기 육체만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구원에 너무 몰입하게 되는데, 즉 "나만 천국에 가면 그만이다. 우리 식구만 천국에 가면 그만이다" 라는 식이란 말이죠. 그렇게 이기주의가 강력하게 발휘가 되면,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교만이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말이죠.

*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일부러 사마리아라는 동네에 갔는데, 그곳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이방민족과 섞인 혼혈족인데, 그러니 유대인들이 보기에 인간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상종하지 않는데, 그것을 사마리아인들도 알고 있다는 말이죠.

제자들은 점심을 구하려고 다 가고 예수님 혼자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제자들이 돌아오니, 예수님은 "내가 추수를 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제자들이 "그런 양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양식이라는 말이죠. 

(요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하나님의 약속이 가미된 향기 !!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레위기와 창세기 8장에서, 주님은 무엇을 흠향하신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물의 몸체를 태운 냄새가 나는 연기인데, 즉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 가미가 되어서 만들어진 향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차이성, 즉 자기 유대인들만 구원이 된다고 하는 교만을 꺾어버리고, 그야먈로 버림을 받은 자, 즉 사마리아 여인을 건짐으로 말미암아서, 원래 이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에서 제외된 자인데, 즉 죄인인데, 그런데 그런 죄인을 구원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죄인을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생길 수 없는데, 반면에 우리 인간들의 의는 무엇인고 하니, 착하고 착하고, 완벽하고 완벽하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인간의 의'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악한 것은 제거하고 착한 것만 모으면,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티끌 의가 태산을 이룬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개혁주의의 성화론이나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의 경우에, 전부 그런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교인들이 그것을 듣기를 원합니까? 사실은 교인들이 원해서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친다는 말이죠.

* 교회는 돈 값을 하라 !!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우수함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그러니 그러한 욕구를 교회가 채워달라는 겁니다. 교회가 돈만 달랑 받아먹고 입을 닦으면 곤란한데, 그 값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을 부추겨주는 봉사를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 보자는 것인데, 뭔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교회가 그렇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전혀 그것이 아닌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인생도 아니면서 개선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미신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만약에 자기가 죄를 지으면, 그 육신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하시고 엄격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육체에 벌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몸이 아프고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그러면 손해는 누구만 손해라는 겁니까? 자기만 손해인데, 그런 논리적 계산을 전제로 해서 교회에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겁니다.

* 어른들의 '두려움'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어른들의 '두려움' 이라는 말이죠. 막판에 제목이 바뀌려고 하는데(ㅋㅋ), 즉 "나는 여기서 더 이상 망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이 정도의 명성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여기서 창피를 당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런 두려움과 공포는 선악체계를 쥐고 있는 악마가, 평생 인간을 데리고 그렇게 마구 농락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악마의 무기인데, 두려움이란 것이 말이죠.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서 인간을 두 가지의 대책이 있는데, 하나는 보호자이고, 또 하나는 변호사라는 겁니다. 

* 누가 대표자인가?

성경에 "우리에게 보혜사가 계시리라" 라고 하는데, 즉 변호사가 계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변호사는 우리보고 잘났다고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주는 변호사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죽이는 변호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체에서, 즉 우리 인생에서, 우리 과거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죠. 선악체계를 가지고 해석하지 말고 분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인데, 즉 "나를 나에게서 삭제를 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과거는 우리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주님의 과거라는 말이죠. 물론 주님이 그렇게 과거를 인도하신 것은 맞지만, 그 대표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자기가 대표자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겁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관여하셨다는 겁니다.

* 인간의 영원한 수치 !!

어제 낮 설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꾸만 설교가 튀어나오는데 말이죠. 인간에게는 영원한 수치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사전에 그 어떤 의논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죠. 바로 그게 화가 난다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부모의 DNA에 문제가 있어서 키도 크지 않고 코도 낮고 했을 때, 그래서 그런 자기 인생에서 대해서 원망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는 다치지 않으면서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원망할 대상자가, 그게 누구 하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은 자기의 적이 되는데, 그게 바로 '궁극적인 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궁극적인 적이 있다는 겁니다. 즉 "제발 나에게 오지 말란 말이야. 제발 나에게 흠집을 내지 말란 말이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지금 이 정도의 인생을 이루는데도 힘이 들었는데, 그러니 여기에 초칠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밀어내는데, 왜 밀어냅니까? 그것은 바로 두려워서 그렇다는 말이죠. 즉 자기 소유라고 간직하고 있으니, 그렇게 간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두려움이 증강이 된다는 겁니다. 행여나 다칠까봐서, 행여나 자기 명예에 손상이 갈까봐서 말이죠. 평소에 자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만 거기서 미끌어지게 된다면, 그러면 자기 가치를 어디서 찾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마귀에게 농락을 당하는데, 마귀의 선악체계에 의해서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상대하시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주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와 마귀를 분리시키려고 하는데, 그것을 가로막는다 것이죠.

그런데 그야말로 철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가 나서서 누구를 변호합니까? 마귀를 변호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계속해서 자기에게 "착하면 구원을 받는다. 바르게 살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하니 말이죠. 그러니 서로가 그만 단짝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동안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게 감사하면서 좋아하기는커냥 도리어 배척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마귀의 변호사 역할을 했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그렇게 주님을 힘들게 했다는 겁니다. 

* 다시 한번 정리하면 !!

다시 한번 정리하면, 주님께서 굳이 우리를 만날 필요가 없는데, 우리가 알아서 바르게 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을 찾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어서, 거기에 우리는 출석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왔을 때는, "동작 그만, 너희는 전부 '너' 라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부터 물 속으로 입수한다. 실시!"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모두가 다 풍덩, 풍덩, 그렇게 물 속으로 뛰어들어서, 물에 빠져죽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물세례, 즉 세례라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를 '연합'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의 과거는 재편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지난 모든 과거는, 꼭 그래야만 했던 과거라는 겁니다. 어느 한 순간도 주님의 세밀한 계획에 의해서,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는 말이죠.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하지만 그래야만 했었어 !!

작년 겨울에 외손녀가 한국에 와서 독감에 걸려서 제 날짜에 출국도 하지 못하고 고생이 심했는데,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막 출국을 하려고 하는데, 부산에서 시어른들이 올라온다고 해서 딸이 마중을 가다가, 그만 계단에서 넘어져서 팔이 부려져서 두 달을 더 지체가 되었는데, 하지만 그래야만 했었다는 말이죠. 

독감에 걸리고 팔이 부러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고, "너희는 미리 예상하지마!" 라는 겁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인생에 있어서 극한 아픔에 된다고 하면, 그렇다면 미래에 대해서 미리 예상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예상과 목적과 목표가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손을 떼라는 것인데, 주님은 왜 그렇게 나오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 속에는 선과 악이 있어서, "나는 무조건 잘나야 한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일에 정면도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것을 무엇으로 봐야하는고 하니까, 지금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게 하신다는 말이죠.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최고의 기적이고 행운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제 살아있는 것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살아있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인생이 아닌 주님의 인생인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교제, 그러한 연합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달리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교재 11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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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하나의 뮤지컬로 만드는데, 그것이 전도서의 내용입니다. 즉 '소용없다' 라는 것이 '지혜' 라는 말이죠. 이 소용없음을 어디까지 몰아넣는고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0절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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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에 "어디 있느뇨?" 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으니 찾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몰 속의 세상, 즉 죄의 세상에서는, 거기서 빠져나올 아이디어를 제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아담 자체가 이미 망가졌는데, 그런 망가진 세상에서, 망가진 인간들의 지혜와 변사, 그런 학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외부에서 주어져서 우리와 합류하신 분, 그분의 지혜가 진짜 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지혜로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말이죠.

* 하나님을 믿지 말라 !!

그러니 하나님도 믿지 말고 예수님도 믿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도 역시 그 예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어도 소용이 없을 정도도 자기 육체에 대해서 자기가 손을 떼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육체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 육체는 주님에 의해서 죄 값으로 죽음에 이르니 말이죠. 여기서 죽음은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온갖 저주와 심판이 다 주어진 상황,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이 곧 죄를 유발시키는 인생이란 것을 자기 육신을 통해서 늘 체험하게 되는 것, 즉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고 하는, 그런 이기주의적인 자기 자신을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 속에 있는 사람이고,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에 말이죠.

* 헛되지 않는 지혜 !!

우리 자신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도 주님께서는 천국에 넣어주셨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해주셨다는 겁니다. 과거의 잘잘못을 모두 다 용서해주셨다는 말이죠.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고, "이 정도에서 너희가 손을 떼도 주님인 내가 친히 살리신다는 사실을, 그것을 너희도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라고, 그것을 주님이 물으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우리의 살아온 경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관점으로만 봐야하는데, 그래서 이 세상은 헛된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이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지혜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고 이 세상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알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십자가 속에서, 우리 죄 속에 합류하신 주님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사오니,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알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졌음을 깨닫는, 그런 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18 오후 7시에 마침.

                                                   수련회를 앞두고는 강의내용이 항상 맥시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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