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이웃의 역할 1812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24. 07:58
2018-12-23 18:30:59조회 : 12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9 - 이웃의 역할이름 : 구득영 (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9 - 이웃의 역할

18,12,2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1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이후에 제사를 드리는데, 그렇게 제사를 드림으로서 다윗이 모세율법의 대변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왕이 백성의 대표자로 등장합니다. 이 왕이 죄인이 되었는데, 한 사람이 범죄를 함으로 온 나라가 죄인이 되는데, 다윗의 인구조사로 인해서 7만 명이나 죽습니다. 

(삼하 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성경말씀은 우리 인간이 잘 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인간이라는 패를 버리시고 성도를 취득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즉 폐기처분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성도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인데,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런 자기 자신이 창조주 앞에서 소용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 그렇게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도 동시에, 주님께서는 다른 존재를 원하신다는 것도 안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아들 만들기' !!

성경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아들의 원형은 예수님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지 싶은데 말이죠. 그런 예수님 중심의 나라를 무슨 나라라고 하는고 하니,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아들의 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아들이 되는 자들만 그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이죠.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 근거는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과거에는 율법의 종이었다가,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말이죠.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런데 이렇게 아들이 등장했으니, 그 아들과 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누가 등장해야 하는고 하니,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되는 것은 누구의 몫인고 하니, 아버지가 꾸준하게 하시는 일이 바로 '아들 만들기' 라는 것이죠. 그러면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 !!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게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인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니고데모가 자기 의사를 표시하는데,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게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죠.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즘 말로 하자면, "어떻게 행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예 커트를 시켜버리는데, 즉 "무엇을 행한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의 행함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오시는데, 그 성령은 아들의 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그러니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거듭나게 되고,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일관된 공식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밀쳐냄이 있어야 !!

그런데 여기에서 배제시켜야 하는, 즉 밀쳐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밀쳐냅니까? 니고데모가 이야기한 것을 그만 밀쳐내 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니고데모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을 계속해서 밀어내어 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이제 사람장사를 그만 두어야 하는데,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목회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감히 인간들이 어떻게 거들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음식을 대접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우미들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상을 당한 식구들은 손님을 맞이하면서 때로는 울기도 하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검은 상복을 입고 말이죠. 그러니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은 도우미들이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해야하는 일이, 즉 성도의 특징에 대해서 말을 하기가 곤란한데, 왜냐하면 모두가 성도가 되려고 환장을 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냉정하게 밀쳐 내야하기 때문에,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 라는 것을 매몰차게 밀어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면, 만약에 성도라고 하면 환영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낸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성도가 되려고 합니까? 왜 천국에 가려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가 천국에 갈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기면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밀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어서 꺼져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위의 사람들을 모아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이게 해서, "그러니 너희 방식대로 안 되잖아" 라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 그것이 바로 다윗의 인구조사라는 말이죠. 갑자기 그만 비약이 되어서 죄송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과연 몸만 받았는가? '이웃'도 함께 !!

우리는 상식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금의 이 몸을, 즉 육신을 받았다는 것은 아는데, 다들 알지죠? 그렇다면 저는 묻고 싶은데, "과연 몸만 받았습니까? 다른 것은 받은 것이 없습니까?" 라고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몸만, 즉 육신만 받은 것이 아닌데, 사실 이 육신은 우리 쪽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 때문에,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에게 소용이 없는 것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육적인 요소를 배격하고 아들의 영, 즉 예수님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들의 영은 누구의 영인고 하니 예수님의 영인데, 그러면 예수님은 육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과 우리의 육신을 비교해서, 우리의 육신을 밀치고 예수님의 육신을 극대화해서 영원토록 보존하는,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육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즉 두 번째 아담을 닮은 새로운 부활의 영으로, 즉 하늘의 영광으로 몸으로 변화를 시키겠다는 것이 일관된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차피 우리의 몸은 폐기처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보겠는데, 우리가 몸만 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함께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이웃'도 받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 자기 몸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니고, 자기와 닮은,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아담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같은 아담에 속한 자들을 여럿이 이렇게 주셨다는 겁니다. 

가인에게 아벨 !!

그 최초가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아벨에게는 형 가인이 있고, 그리고 가인에게는 누가 있는고 하니, 아벨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아벨 몸만 달랑 주고, 또한 가인 몸만 달란 준 것이 아니고, 가인이 원하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아벨을 주셨고, 또한 아벨에게도 원하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가인을 주셨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무엇이 발생하는고 하니, 죄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죄가 발생했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발생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주님이 들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죄와 의만 발생시키게 되면, 주님은 뽑아낼 것은 다 뽑아내는 것이란 말이죠. 

너희는 따먹지 말아야 하는 존재다 !!

그것이 피조물의 역할인데,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담을 주신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는 금지령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아담을 주셨다는 말이죠. 선악과나무를 심어놓고, 아담을 보고 "아담아, 따먹어라" 라고 한 것이 아니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즉 "너희는 따먹지 말아야 하는 존재로서,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약올리기 작전인데, 선악과나무를 심어놓고, 그것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먹지 말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개를 키우면서, 자기는 맛있는 소갈비를 먹으면서, 개를 보고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너보다 소갈비가 더 중요하다 !!

왜 그렇습니까? "너보다 소갈비가 더 중요하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개에게는 그 소갈비가 꼴보기가 싫은 것이 아니라, 얼마나 먹음직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소갈비의 냄새 때문에 코가 그냥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죠. 개를 키우시는 분들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싶은데(ㅋㅋ),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과 하나님의 한계를 분명히, 그 경계를 짓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이다" 라고 하는 경계선,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나만 살면 된다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인간에게 몸만 준 것이 아니고 무엇도 주었다는 겁니까? 이웃도 같이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심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최종적인 생각은 "나만 살면 된다" 라는 것인데, 이웃이 있든 말든 말이죠. 

점잖은 분들에게는 이게 상당히 모욕적인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하비만 최후의 인간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이웃을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고 아내를 생각하고 남편을 생각해도, 마지막 남는 우리의 본성은 무엇인고 하니, "몰라, 나만 살면 되지 뭐" 라는 것인데, 그것만 앙금처럼 남는다는 겁니다. 

점잖고 예의바른, 그런 것은 다 때려치우고, 이것은 우리 인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 면에서 가인이 고마운데, 가인이라는 살인자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가인이나 우리나 같은 한통속이라는 겁니다. 즉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 내부에는 악이 넘쳐 !!

그러므로 우리의 깊숙한 곳에 누가 들어있는고 하니, 아벨이 아닌 가인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인이 동생을 죽일 때, 그것은 자기의 이성적인 결정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은 것을 뭐라고 합니까? 악이 넘쳐서 그렇다는 겁니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면 가인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악이 넘치면 그것을 저지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이미 죄에게 왕 노릇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악이 오면 그것을 저지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죠. 그냥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시키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나만 최종적으로 남는 것, 그것이 가장 나답다" 라는 겁니다. 

동안거(冬安居) !!

머리를 밀고 절에 가서 도를 닦는 사람들의 심보가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는 것인데, 이 세상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말이죠. 그래서 이런 추운 날에도 독하게 도를 닦는다는 겁니다. 물론 땡땡이는 말고,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는 중들은 겨울에는 '동안거(冬安居)' 라고, 1월부터 3월까지 겨울에 혼자서 조용하게 도를 닦는다는 말이죠.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면 굉장히 고귀하게 보이는데, 그런 불교영화도 있다는 겁니다. 문은 아예 잠궈버리고 조그만 구멍으로 죽과 같은 것만 들어오는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죠. 대소변도 그 안에서 다 해결을 한다는 겁니다. 부모가 죽고 아내가 죽어도 나오지 않는데, 참 아내는 없는데 말이죠. 여자친구는 있지만 아내는 없다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문을 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를 않는데, 그 모습을 보고 "참 독하다. 대단하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만 가족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그렇게 인생자체가 모두 망가졌다고 했을 때, 그것도 일종의 대안이 아니겠느냐는 말이죠. 

모든 것들이 다 망가지면 자살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그런데 그때 자살이 아니라 도를 닦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진리를 깨우치게 되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늘 행복이 보장된다고 하면, 그게 더 좋지 않으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진리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동원합니까? 행함을 동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까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하니, 자기는 것을 행함으로 터득하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주님이 반대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을 주었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그런 이웃은 필요가 없어. 나는 나 혼자 도를 닦겠어"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비단 이것은 불교의 도를 닦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 속에 다 담겨있다는 말이죠.

황당한 다윗의 인구조사 !!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그게 다윗의 인구조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다윗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주어야 합니까? 어떻게 해서든 잘 해주고 싶다는 말이죠. 행복을 보장해주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역대상 21장에는,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아니라, 그게 사단이 그렇게 했다고 한다는 말이죠.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러면 이것을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시비를 걸지 말고, 이 둘을 합쳐서 "하나님께서 사단을 보내서 다윗을 격동시켰는데, 그러자 다윗이 그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자기 나라의 인구를 조사했다" 라고, 그렇게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사단, 즉 악마라는 것은 말 그대로 악한 존재인데, 그래서 우리는 우리 곁에는 이러한 악마가 얼씬도 하면 안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악마의 졸개들이 바로 귀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런 악마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로 하여금 지시를 내렸는데, 다윗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해서 인구조사를 하도록 말이죠. 그러면 악마는 악마다운 모습으로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가도록 누가 허락을 했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허락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악마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윗이 발휘한 악마의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나가서 칼을 들고 설친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인구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이것은 목사가 교인숫자를 세는 것과 똑같은데, 전도사가 주로 담당해서 예배시간에 헤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회사가 실적을 그래프로 그리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왜 악마의 마음인가?

그러면 이게 왜 악마의 마음입니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만 준 것이 아니라 이웃도 주셨는데, 그러면 그 이웃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면 그게 악마의 마음이 되는고 하니, "저것은 내 소유다" 라는 마음을 가질 때, 바로 그것이 악마가 아담의 국가를 다스리는 심보라는 말이죠. 

그들은 자기 소유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살기 위한 희생물이고 밥이라고 하는 의식으로 그들을 본다는 겁니다. 이것을 갑질을 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소위 을에 해당하는 자들도 뭐라고 합니까? 특히 요즘은 대통령을 보고 자기들을 살려내라고 하는데, 만만한 것이 대통령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악마의 심보라는 겁니다. 이웃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말이죠. 

그러니 다윗의 인구조사의 경우에, 우리가 성경의 이런 내용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임금이 되어서 그럴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런데 그것을 사단까지 거론하면서 죄가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는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한다면 아예 이웃을 주지 말든지, 하지만 이웃을 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 자신도 모르는 자기의 본성이 얼마나 사단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허약한 구조로 되어있는지, 그것을 노출시키는 대표자로서 다윗을 등장시켰다는 말이죠. 

이것을 너무 논리적으로 다루면 어려운데, 그래서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성도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성도는 무엇과 다르다고 했습니까? 인간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폐기처분이 되어야만 하고, 그래서 그 가운데서 성도를 취하신다는 말이죠.

이미 심겨져 있는 악마의 마음 !!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담 앞에다가 선악과나무를 심는데, 그러면 악마의 마음을 가진 아담은 무엇인고 하니, 저 선악과는 누구 좋아라고 심은 선악과나무라는 겁니까? 자기 좋아라고 심어놓았다는 것, 그것은 이미 악마의 마음이 침투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녹취자 - 목사님,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이미 아담에게는 악마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 탐나고 아름답고 먹음직하다고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만 잘살면 된다고 하는,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죠. 괜히 점잖은 척을 하면서 "더불어 살자" 라고 하는데, 그러나 막상 분석하고 따지고 들어가면, 둘도 싫다는 겁니다. 물론 손자가 오면 좋은데, 갈 때는 더 좋다는 말이죠(ㅋㅋ). 

지금 우리 손녀가 17개월이 되었는데, 엄마 등에 붙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엄마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줄로 안다는 겁니다. 말은 하지 못하고, 손으로 가리킨다는 말이죠. 잠이 오면 투정을 부리고, 잠에서 깨어나서 옆에 없다고 불고, 그야말로 엄마는 아이의 쫄다구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인데, 다들 그렇게 살았는데,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죠. 그게 어른이 되면 지하벙커로 들어가는데, 그러다가 노인네가 되면 다시 나온다는 말이죠. 더욱이 치매가 걸리면 그야말로 만개를 하는데, 그러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폐기처분을 하시는데, 왜 눈에 뜨이는 것마다 전부 자기 위주로 보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폐기하기 전에 주님이 붙잡는 자들이 있는데, 성령으로 말이죠. 그 성령은 우리의 영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인데, 그리고 예수님은 아들의 모델이고 모형이라는 겁니다. 즉 아들답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너는 내 꺼야 !!

그게 하나님의 계획인데, 그러면 폐기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웃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는데, 즉 "너는 내 꺼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늘의 별이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그게 시편 19편에 나오는데, 즉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신다" 라고 하는 겁니다. 

(시 19: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 19: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런데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하늘의 별도 자기를 위하여, 그래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화성이고 목성이고 간에 그냥 두면 되는데, 심지어 소행성에도 접근을 해서 사진을 찍고 난리를 피운다는 겁니다. 일본이 그런 짓을 했는데, 그리고 미국은 이미 달에 갔었고 말이죠. 물론 논란도 있지만, 또한 화성에도 도착을 했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태양을 향해서 로켓을 쏘아 올렸는데, 태양에 접근해서 촬영을 하겠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의 능력은 대단하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신은 없더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신이기 때문에, 인간은 둘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만 있는데, 그래서 신은 없다는 겁니다. 자기만 살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악마를 보낸 것은, 물론 다윗이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조사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악마를 집어넣어서, 다윗이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인구조사를 하게 함으로서, 그것을 다윗을 폐기하는 명분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이웃은 폐기대상의 명분 !!

다시 정리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웃은 무엇의 명분인고 하니, 자기만 살려고 하는 인간을 폐기처분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웃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몸만 달랑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도 함께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에게는 가인이 있고, 가인에게는 아벨이 있다는 겁니다. 가인이 결코 동생을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닌데, 제가 장담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악이 격동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인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동생을 죽였는데, 그럴 때 가인은 그동안 자기가 몰랐던, 즉 자기가 죄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에 노출된 가인이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즉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말이죠. 안 되는데, 그러니 인간은 자기 혼자 있으면 천국에 갈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옆에 붙어있으면 천국은 고사하고 지옥행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방 하나에 혼자 잘 때는 점잖은 것처럼 보여도, 둘이서 자게 되면 난리도 아닌데, 이번 겨울수련회가 기대가 되는데 말이죠(ㅋㅋ). 일곱 명이 한 방에 자면 그야말로 볼만하다는 겁니다. 코를 고는 사람, 이를 가는 사람, 잠꼬대를 하는 사람, 또한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떠드는 사람, 그야말로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물론 한 방에 같이 잠을 잘 수도 있는데, 그것은 평소에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인 경우라는 말이죠. 그러면 부담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보다 더 센 사람과는 같은 방을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요즘은 혼밥에 혼술에, 식당도 한 사람을 위해서 칸막이까지 해준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게 인간의 본성에 맞으니 서비스를 해주고 그 대가를 받는다는 말이죠. 

성도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리가 되었다고 치고 이제를 진도를 나가겠는데, 즉 "성도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성도란 달라진 사람인데, 그런데 성도를 구성하는 육체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받는 것인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바로 그 몸이 성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성도가 된 사람에게는 '성도 되기' 라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말이죠. 성도 되기는 악마의 마음인데, 피 뿌림으로 성도가 되었는데, 거기에 무슨 성도 되기가 또 필요하냐는 겁니다. 행함이 필요치 않는데,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만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심보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죠. 

성도가 된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이웃인데, 그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이웃사랑을 완료해버리신다는 겁니다. 이웃사랑이란, "저 사람도 내 몸 같이 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인데, 그게 완성이고 완료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은 어떤 몸인가요? 부활의 몸이고 영생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 영생의 속성을 놀랍게도 죄인에게 그대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쪽은 정작 자기는 죄만 지었는데 예수님처럼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졸지에 의인이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외부에서 넣어주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혼자서 어떻게 노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외부에서 집어서 넣어주는 것을 구약에서는 '제물' 이라고 하는데, 즉 신에게 바친 제물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8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문둥병자는, 저주받은 자의 표상 !!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시니 문둥병자가 등장하는데, 그 당시 문둥병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의 표상이라는 말이죠.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은 이렇게 무섭다" 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런 일종의 표본이라는 겁니다. 그게 레위기에 나오는데,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하는데,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 의뢰를 한다는 말이죠. 즉 "나의 구원은 내가 전문가가 아니고 따로 계십니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겠는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즉 하나님께서 이웃을 주셨다는 말이죠.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웃을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는 이웃이 있어야 발생이 된다는 것인데, 물론 죄도 역시 이웃이 있어야 발생을 한다는 말이죠. 아까 죄에 대해서는 설명을 했는데, 즉 이웃을 자기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만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만 살려고 하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그러면 의는 무엇입니까? "나처럼 너도 같이 살자" 라고 하는 것, 그게 의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남을 대접하는 것인데, 그것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문둥병자의 접촉 !!

그러니 산상설교의 마태복음 7장 12절이 완성된 것이 바로 마태복음 8장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예수님이 그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3절에 보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즉시 문둥병이 나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와 접촉을 하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와 접촉하지 않으면 깨끗해지지 않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까, "나에게는 죄인인 너를 충분히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문둥병자를 통해서만, 즉 이웃을 통해서만 증거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둥병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쓰레기가 되어도 되는데, 왜냐하면 천국에 가기 위한 용도로서, 즉 주님의 능력으로 쓰레기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그런 쓰레기라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과 이웃으로 관계를 맺은 자들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너무 어렵게 하지 않겠는데, 성도란 무엇인고 하니, 성도는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만 살려고 자기만 챙기는 인간에서, 자기가 아닌 누구를 닮는 존재로 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달라짐이란 말이죠. 즉 "나만 살겠다" 라는 것에서, "누구를 증거하겠다" 라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이능우 집사님은 공감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확실하게 다가옵니까? 이능우 집사님은 어떻게 여기에 공감을 하십니까? 공감이 된다고 하니, 제가 이능우 집사님께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말이죠(ㅋㅋ) 집사님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그만 사기를 당해서 있는 재산을 다 날렸다고 하면, 그러면 그때 오는 느낌은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지?" 라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가 어디서 어디로 변해야 하는고 하니, 인간의 본성은 자기만 살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제는 '나만 살기'가 아니고, 그런 흙과 같은 존재가 아니고, 그런 죄인인 존재에서 무엇으로 변화를 하는고 하니, 누구를 담아내고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뀐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지금 집이고 뭐고 간에 왕창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이것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내가 가장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자식들이 나를 도와줄 입장도 안 되고 큰일이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겠습니까?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지?" 라는 것이 먼저인데, 그런데 그게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어떻게 살지?" 라고 하는데, 그러니 "나만 살아야 하겠다" 라고 하는 것은 똑같다는 말이죠. 그 더러운 악마의 심보, 이게 우리 인간의 바닥이라는 겁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심보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노출시키는 것이 바로 누구와 함께 있다는 증거인고 하니,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본색을 드러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착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믿음이 아니고 돈이 있으면 착하게 산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 본성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는데, 예수는 뒷전이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생활고가 시급한 문제이지, 예수는 그 다음이란 말이죠. 여유가 있을 때는 누구인들 착한 일을 하지 못하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래도 하지 않는 인간들도 있지만 말이죠. 

박항서 감독이 이번에 우승기념으로 10만불을 받아서 그대로 베트남의 축구발전을 위해서 기부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일종의 가진 자의 야유라는 겁니다. 만약에 박항서 감독이 빚쟁이에게 시달리고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그게 안 된다는 것이죠. 

나만 살겠다 !!

인간은 자기의 본성을 숨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보다도 악마의 힘이 더욱 세기 때문에 말이죠. '우리' 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구색을 맞추는 것에 불과하고, "나만 살겠다" 라고 하는 본색을 인간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 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조금 더 추가를 하면, 죄인을 불러서 의인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죄인을 불러서 의인이 되게 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자기 의를 우리 속에 담아버린다는 말이죠. 

성도의 변화는 어디로 어디로?

방금 이야기한 성도의 변화를 고상하게 조금 더 길게 이어보겠는데, 성도가 어디서 어디로 변하는지, 그것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하면, "나를 보여주는 이유로 사는 것", 즉 "나는 지금 잘 살고 있어. 복을 받아서 잘 살고 있어" 라고 하는, 그것에서 무엇으로 가는고 하니,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한 세대인가를 보여주는 용도로서 사는 것", 그렇게 바뀌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기초를 앞에서 했기 때문에 이 어려운 것도 소화를 해내지 싶은데, 성도가 어디서 어디로 변하는고 하니, "나를 보여주는 이유로 사는 것", 이게 바로 성도의 출발점이라는 말이죠. 아담에 속한 인간이 다 그러한데, 즉 "나 잘났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이 세대가 얼마나 더러운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그것을 먼저 말씀하신 분이 있는데, 그렇게 사신 분이 있다는 말이죠.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은 자기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셨던 분이라는 겁니다. 

(마 15: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 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 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선지자 !!

구약성경에서는 그러한 자를 두고서 '선지자' 라고 하고, 그리고 신약성경인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고 하는데, 역시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그 안에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왕 같은 기능, 제사장의 기능, 그리고 무슨 기능이 있는고 하니, 그게 선지자의 기능이라는 말이죠. 그 기능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내가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이 세대를 불 심판을 받아도 당연하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이유로 사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로서의 변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서 훌륭하다" 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데, "나는 너보다 낫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너나 나나 다급한 일이 생기면, 결국 '나는 어떻게 살지?' 라고 하는 것이 우선이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여유가 있어야 교회에 다니고 하는 것이지, 돈도 전혀 없는데 무슨 헌금을 하느냐는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교회에 앉아있으면 그야말로 가시방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배에서 계속해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거기서 무슨 찬양이 나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느냐는 겁니다. 

인간 최후의 솔직함 !!

그런데 그런 자기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간섭하지 않으면 나는 이런 나의 죄악된 본성을 놓칠 수 있다" 라고,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주는 것이 성도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다윗에게 무엇이 왔습니까? 사단이 왔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인데,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단도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게 왕이 되던 백성이 되던 간에,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인간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라는 말이죠. 다른 것은 다 어떻게 위선을 떨 수 있을지 몰라도, 이것만은 인간 최후의 솔직함이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 겨우 17개월 된 아이가 엄마 등에 업혀서 자기 손가락으로, 마치 마부가 말을 다루듯이 그렇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다시 사무엘하 24장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겠습니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진노를 했습니까? 다윗이 아니라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동원시켜서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본의 아니게 인구조사를 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11절에서 13절을 보겠습니다. 

(삼하 24: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 24: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여기 13절에 보면 3가지 보기가 나오는데, 즉 "1번, 왕의 땅에 7년 기근이 있을 것입니다. 2번,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3달을 도망할 것입니다. 3번, 왕의 땅에 3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입니다" 라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고르는 겁니까? "손바닥으로 맞을래? 회초리로 맞을래? 채찍으로 맞을래?" 라고 하는, 이게 무슨 선택이냐는 겁니다. 이래도 깨지고 저래도 깨진다는 말이죠. 

물론 차이점이 있기는 있는데, 1번은 7년이고, 2번은 3달이고, 3번은 3일라는 겁니다. 그러니 각각의 내용을 다 떼고 이것만 본다면 3번이 제일 좋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2번의 경우에는 다윗 자신이 쫓기는 것인데, 그래서 다윗은 자기 본색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다윗도 역시 자기 몸이 제일로 소중하다는 겁니다. 

강의가 어려워서 다시 반복을 하겠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도 주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점잖은 척을 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산다는 말이죠. 그런데 막상 벌칙을 주니까 자기는 그만 빠져버리고, 그래서 3번을 선택하게 된다는 겁니다.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2번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죠. 

7만명이 죽은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 그 결과 죽은 자가 무려 몇 명인고 하니, 7만명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신문의 톱기사인데, 여기서 성경해석이 진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이죠.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즉 "누구의 잘못으로 7만명이 죽었는가?" 라는 겁니다. 이렇게 죽었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면 그 책임자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죠.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다윗, 2번 이스라엘, 3번 하나님", 이중에서 몇 번입니까? 보기를 더 드리면, "4번 천사, 5번 악마", 이중에서 누구의 잘못이냐는 겁니다.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까, "아무도 잘못한 자가 없다" 라는 것인데, 물론 악마는 빼고 말이죠.

당연한데, 왜 화가 나는가? 

제가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는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만 주신 것이 아니고 이웃도 주셨는데, 그런데 그 이웃에 자기에게 와서 "당신,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당연히 화가 나는데, 그렇게 화가 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쓰레기라는 말이죠. 

이론상으로는 그러한데,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고 하면서, 로마서 8장도 다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누군가가 욕을 하게 되면 막상 어떻게 나옵니까? 변명을 먼저 하게 되는데, 그러면 왜 변명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인간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마음속에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데,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물론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평소의 심보는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것인데, 즉 "내가 왜 잘못을 했습니까? 저 이웃이 잘못을 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무려 7만명이나 죽은 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잘못을 했으니 그런 것인데, 그런데 그 잘못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사무엘하 24장 1절에 보면 분명히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치려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짓을 해서 죽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놀라운 다윗의 변화 !!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다윗이 변화를 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누구의 잘못으로 돌리는고 하니까, 자기 잘못으로 돌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심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아담의 마음에서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심정으로 쏙 빠져들어 가는데, "주여, 내 잘못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실제로 죽여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라고 해서 죽으셨다는 말이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잘못은 우리가 했는데, 그런데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처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음인데, 이것을 놓치면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죠.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되는 것은 전혀 기독교가 아닌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 쓰레기라는 겁니다. 강도고 세리고 창기라는 말이죠.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는 겁니까? "나, 잘났다" 라는 것에서, "나, 못났다" 라는 것으로 변화를 해야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못나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우리를 못났다고 하게 하시는 그분이 이미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말이죠. 구원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나는 못났다. 나는 쓰레기다" 라고 해도, 우리의 신분은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교인들이 교회를 다니는 것과는 차이가 나야하는데, 교인들은 교회에 왜 나갑니까? 그것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다닌다는 겁니다. 즉 자기와 자기 가족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가는데, 하지만 성도는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이웃을 계속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도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이 되면 안 되고,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존재 이유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주님은 조용한 이웃 속에 같이 섞여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람은 화려한 기적을 원한다고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는 그대로 있고 추가적으로 더 달라고 하는데, 하지만 기적은 그게 아니고, 자기 자신이 달리지는 것, 그게 기적이라는 겁니다. 잘난 체를 하는 자기 자신이, 그게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아는 것, 그게 참된 기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다 내 탓이오!" 라는 것인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죠? 

심판을 품은 자는 아름다워 ♬

'안치환' 이라는 가수가 있는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 앞에 관객들과 주고 받는 멘트가 있는데, 그가 먼저 "꿈을 품는 자가" 라고 하면, 관객들은 "아름다운 사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치환이나 서로 멘트를 주고 받는 관객들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까, 이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꿈을 품은 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름답다는 겁니까? 심판을 품은 자가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게 전도서에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데, "아저씨, 배는 왜 만듭니까?" 라고 하면, "이제 곧 심판이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을 품은, 즉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는 자가 이 시대에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이 세대 자체가 불 심판의 속성을 뿜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개인이 아니라 이 세대를 증거하는 사람인데, 그런데 모든 인간은 자기만 잘되면 그만인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말이죠. 반대로 이야기하면, 자기 살림살이가 힘들어지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 여유가 있을 때만 이론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살림살이가 어렵게 되는 것도, 주님께서 우리 자신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즉 "니가 성도가 맞아? 아니야?" 라고,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겠는데, 성도라는 것은 죄인에서 성도가 되는데, 여기에 성령, 즉 예수님의 영이 오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이 성령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똑같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그 길을 갈 때, 그 길을 똑바로 갑니까? 휘어져서 갑니까? 돌아서 갑니까? 어떻게 가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길은 곧은 길도 있고 굽은 길도 있고, 우회하는 길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길은 그렇게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즉 천국으로 가는 것에는 길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생각이 변함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종교인데, 즉 엉터리라는 겁니다. 망상이라는 것이죠. 

어느 감리교 목사의 일기 !!

어느 감리교 목사가 자기의 어릴 때 일을 논문에 실어놓았는데,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말이죠. 자기가 눈을 뜨면 엄마 아빠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찾아서 교회로 가면 엄마 아빠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더라는 말이죠. 그러다가 7살 정도가 되어서 엄마 아빠에게 묻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요?" 라고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가 자식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어떻게 대답을 하는고 하니, "아들아, 아버지가 어릴 때 꿈을 꾸었는데, 그래서 이렇게 목사가 되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있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고마운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나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말이죠. 왜냐하면 열등의식을 느끼는데, 왜 자기에게는 그런 환상을 보여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아버지를 라이벌로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도 어릴 때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그러자 환상 중에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게 하얀색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논문에 직접 그런 내용을 적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하얀색인가요? 참으로 감리교다운데, 이단답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게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다시, '나만 살면 된다' !!

우리가 공부한 것을 다시 복습해보면, 자기는 다치지 않는데, 즉 "나만 살면 된다" 라는 겁니다. 자기만 천국에 가면 되는데, 아버지는 일단 계시를 보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에게는 아버지가 본 환상이 없으니 화가 난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계시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우기는데, 그러니 자기도 천국에 가려면 아버지처럼 그런 환상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논리에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나는 다치면 안 된다" 라는 것이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는데, 즉 "나는 지옥에 갈 일은 없다" 라는 게 명백하다는 말이죠. 이게 사탄의 마음인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버린 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인간도 "저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러니 지옥에 보내주세요" 라는, 그런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러니 감리교가 큰 문제인데, 물론 장로교도 그러한데, 이게 종교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즉 천국에 가는 것인데, 그 중간에 길이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길을 똑바로 갈 것인가? 꼬불꼬불하게 갈 것인가? 그게 아니면 돌아서 갈 것인가?" 라고, 그런 것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라는 것인데, 무슨 노래제목 같기도 한데 말이죠(ㅋㅋ). 그래서 "주여, 지금 저는 60점입니까? 90점입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산이라고 하면, "주여, 지금 저는 몇 부 등선을 넘고 있습니까?" 라는 계산을 하면서 교회에 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감리교 목사의 어릴 때와 전혀 다르지 않는데, 물론 커서도 그러한데,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러분의 기억을 돕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을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예수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하셨는데, 즉 육으로는 결코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기독교에는 그런 천국은 아예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천국이 없다는 것은, 그 천국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길도 역시 없다는 겁니다. 

똑바른 길 !!

그렇게 길이 없다고 한다는 것은, "똑바로 갈 것인가? 꼬불꼬불하게 갈 것인가? 돌아서 갈 것인가?" 라는 것도 역시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똑바로 간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교회에 다니고 나서는 인생이 무탈하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항상 복을 주셔서 그냥 조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아이들도 전혀 문제가 없고 말이죠. 그런 사람은 그런 곧은 길이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꼬불꼬불한 길 !!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왜 그렇게 인생살이가 힘이 드는지, 그야말로 굴곡과 굴곡의 연속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다니고 나서 일은 더 꼬이고,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신세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인간극장' 이라는 다큐프로의 재방송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도 주님이 이끌어주시는 삶이니, 아무리 굴곡진 인생이라고 감사하면서 살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도 역시 진정한 감사가 아니고, 그 이면을 들추어보면, "나만 다치지 않으면 됩니다. 나는 그런 자격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엉터리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자격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에,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무엇인고 하니, 차이점은 길의 모양새라는 겁니다. 그리고 공통점은 무엇인고 하니까, "길은 있는데 어디쯤 가고 있을까?" 라는 겁니다. 그리고 굽은 가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이렇게 고생을 해도 천국에 가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니 감사하자" 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이란 말이죠.

우회하는 길 !!

그런데 여기서 더 심각한 것은 세 번째의 경우인데, 즉 "길은 있는데, 주님께서는 우회의 길을 통해서 천국에 가게 해주신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왜 고속도로에서 톨게이트와 'IC'도 있지만, 'JC' 라고 고속도로끼리 만나는 것이 있는데, 여기로 잘못 들어가면 그만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여전히 고속도를 간다고 여기지만, 그런데 그게 자기가 목적한 곳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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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C : Junction의 준말로 같은 유형으로서, 예를 들면, 고속도로와 고속도로, 국도와 국도처럼, 길이 갈라지고 합쳐지는 분기점을 의미함.
※ IC : Interchange의 준말로 다른 유형의 길로서, 예를 들면, 국도 고속도로, 일반도 고속도로, 일반도 국도처럼, 그렇게 갈라지고 합쳐지는 나들목을 의미함. - 네이버의 '지식i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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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다가 가정 때문에 잠시 보류하다가 다시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모두가 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학생들의 경우에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고3 때는 잠시 보류하고, 다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길은 없어 !!

이것이 바로 'J.C'의 장난질인데, 그 길이 그 길이 아니라는 말이죠. 길이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네비게이션을 보고 있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천국에 가는 길은 없다는 겁니다. 즉 길 자체가 없다는 것이죠.

물리학에서 말하기를, 입자는 똑바로 가지만 파동은 휘어져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게 '골든벨' 48번 문제인데 말이죠(ㅋㅋ). 그것을 물리학에서는 '회절' 이라고 하는데, 마치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볼 중에서 직구도 있지만 커브도 있는데, 그렇게 휘어져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조금만 우회해서 믿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도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고 하니, 즉 길이 있는데, 똑바른 길이 있고, 구불구불한 길도 있고, 또한 우회하는 길이 있다고 하느냐는 말이죠.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은 다치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 쪽에서 자기를 지워버릴 수 없는 죄악 된 본성이 작동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란 말이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

다른 예를 들어보면, 플라톤이 길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도 종교적인 인물이라는 겁니다. 힘든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이데아의 세계, 즉 이상적인 세계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 세상에는 천국의 모형이 있는데, 그것을 설명한 것을 '동굴의 비유' 라고 한다는 겁니다.

동굴에 죄수들을 묶어놓는데, 그러면서 그들은 돌아서서 동굴의 벽을 쳐다본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동굴의 입구에서 가끔 햇빛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간수들이 움직이고 하는 것이 어디에 비춰지는고 하니, 여기 벽면에 비춰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 벽면에는 그림자이고 모형으로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 플라톤은 복음이 들어오기 500년 전의 사람인데, 그때 이미 히브리서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2,000년 교회가 이 플라톤 철학이 복음인 줄 알고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악마의 생각인데 말이죠. 악마의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현재 이 세상이 있고, 길이 있고, 그런 인생이 끝나면 천국에 간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은 망상이지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플라톤도 이야기할 수 있는, 즉 지옥에 가는 인간들도 얼마든지 끄집어낸 수 있는, 인간의 내면화가 된 종교적인 악마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목사들이 복음이 아닌 이 플라톤 철학을 가르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납득을 한다는 겁니다. 

플라톤이나 우리나 다 아담의 자손들인데,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고생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힘든 이 세상을 하루바삐 벗어나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마치 찜질방과도 같은 천국을 소망하고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그게 '기독교' 라는 이름으로 2,000년 동안 만들어졌는데,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데, 교회에 간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생각조차도 악마의 생각임을, 그리고 우리는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생각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오늘 강의의 총복습인데, 플라톤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이냐는 겁니다. 이 세상은 동굴과 같은 곳이고, 그리고 모형이고 그림자인데, 그래서 죽어서 제대로 된 나라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 그런 생각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죠. 

갈 수 없는 길을 제시하신 예수님 !!

그것은 바로, 성도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나는 다치면 안 된다" 라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되려고 하면 예수님의 영이 와야하고, 그렇다면 누구를 증거하겠습니까? 자기가 천국에 가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갈 수 없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길이 없는데 그때그때마다 주님이 길을 우리에게 보이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이죠. 

그런 예수님이 길이라고 하면 성도 자신이 길이 되는데, 놀랍게도 우리 자신이 길이라는 겁니다. 곧은 길도 아니고 구불구불한 길도 아닌데, 우리 자신이 있는 현장이 바로 선교의 현장이란 말이죠. 강도가 그러했고, 세리가 그러했고, 또한 창녀가 그러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 자제가 곧 예수님을 백업한 '메모리칩'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예수님의 정보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육은 거듭날 수 없지만, 하지만 예수님의 영이 치고 들어옴으로서,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여기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고, 그게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나는 살고 싶다, 그런데 !!

그러니 예수님 덕분에 살아가는데, 물론 우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나는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나오겠지만, 죽을 때까지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죄를 누가 이미 처리하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대신 다 처리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 흔적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는가? 무엇을 처리하셨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는 나만 생각하는 놈입니다" 라는 것을 되풀이한다는 겁니다. 

성도는 술찌끼 !!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처리한 그 찌꺼러지, 왜 옛날에 집에서 술을 담글 때, 그때 마지막에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그것을 '술찌끼' 라고 하는데, 배가 고프면 그것도 먹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달고 하니 아이들이 그만 먹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곤 했다는 것이죠(ㅋㅋ). 

그렇게 우리는 찌꺼러지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찌꺼러지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더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9988234, 그렇게 해서 관 속에 들어가게 되면 정말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잠시, 관 뚜껑을 열고 !!

이제 안양강의에서 했던 것을 하고 마치겠는데, 거기에서 대구의 파티마 병원의 장례식장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거기서 입관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때 죽은 자가 관 뚜껑을 열고 잠시 나와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답답하니, 그리고 화장실도 가야한다는 말이죠(ㅋㅋ). 물론 가족들은 그것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고 말이죠. 

그렇게 죽은 자가 나와서 화장실에도 갔다가, 동대구역도 한 번 돌아보는데, 우리가 바로 그런 입장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관 속에 있는 죽은 자인데, 그런 죽은 자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이죠. 마치 유령처럼 말이죠. 

우리는 그래도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문둥병자이니까, 그런 문둥병자임을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길인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주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이 제공해주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수긍이 되는지, 그러니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달려졌는지, 그게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이 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는지, 그것을 가장 귀한 보물로 여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2,23 오후 04시에 마침.

좀비라도 좋사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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