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1 - 열매와 실적
19,01,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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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부활, 재림, 이 모든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바로 유일하게 소용이 있는 십자가가 사건화가 되어서, 그것이 아이온(세대)에서 반복적으로 실시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것을 전도서 9장 1절을 통해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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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 두 개의 세계 !!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부활, 재림과 같은 것은 성경이 다 나오는 것인데,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고 하니, 다른 책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실려있지만, 성경은 인간들이 할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천지를 창조하는 것이나 마지막 심판도,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주 간단한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접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거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천국에서 만납시다" 라고 해도, 그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다" 라는 것은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런데 성경을 덮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줄곧 살아온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 앞에 등장하는데, 그 현실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라는 인식이 굉장히 강렬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들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얼굴을 이 세상으로 돌리게 되면, 이쪽 세계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계인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현실'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그냥 가만히 있는데 누가 돈을 주고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한 시간에 8,300원을 하는 최저임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반면에 성경의 세계에서는 자기를 부정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쪽은 자기가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굶어죽는다는 것이죠.
* 하나의 몸, 두 개의 자아 !!
그러면 자아가 어떻게 됩니까? 몸은 분명히 하나인데, 그런데 두 가지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 속에서의 자아와, 성경 속에서의 자아가, 그게 동일한 자아가 아니라, 다른 자아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아가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성경 속의 세계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까, 현실이 자기를 품고 있다는 말이죠. 대구의 인구조사를 하면 자기도 숫자 '1'로서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볼 때는, 성경 속의 세계 따로, 그리고 자기도 따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현실 속에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라고 하는 자기 위치가 밝혀진다는 겁니다. 즉 "현실 속에서 내가 이렇게 해야 산다" 라고 하는 원칙, 그것은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는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자기가 해야하는 일까지 대신해서 누군가가 해야한다는 겁니다. 즉 희생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남을 이용해서 사는 것으로, 즉 남을 등처먹고 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부모가 이제 은퇴해서 생활비가 없어서 자식이 보태줄 때, 그러면 그것은 자식이 부모를 대신해서 일하는 것이고, 또한 자식이 돈이 없어서 부모가 생활비를 대주면, 그것은 부모가 대신해서 일을 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지요?
아무튼 여기서는 자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이라는 고된 일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게 힘들기 때문에 하기 싫다고 하면, 그러면 누군가가 자기의 그 힘든 것까지 같이 해주고, 그러면 거기서 자기는 그냥 그것을 얻어먹는, 그런 구조가 곧 현실 속에 놓여있는 구조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노력하든 남이 노력하든 간에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한다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현실은 고생을 요구하는데, 그 고생 속에는 자기가 남에게 희생을 당하든지, 아니면 남이 자기를 위해서 희생을 해주든지 하게 된다는 겁니다.
* 과연 무엇을 얻으려고 그런 고생을 하는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희생을 해서 이 현실 세계 속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합니까? 고생을 해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그리고 가끔은 오락도 하고 여행도 즐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자아가 편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인데, 현실 속에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은 안중근 의사 정도는 되어야지, 보통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모든 것이 다 자기가 중심이고, 그래서 그것들이 다 자기 좋아라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어릴 때부터 양육을 받아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기 안에 이미 습성화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나' 좋아라고 있는 그 자아를 가지고 성경을 본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과연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맞느냐는 겁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은 인간의 일을 거부한다고 했는데, 창조, 심판, 부활, 재림, 그것은 전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성경에 담아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성경을 믿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현실은, 자아긍정이 그 목표이고 목적 !!
그런데 우리가 속한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아예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된다는 겁니다. 즉 '자아긍정' 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목표와 목적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목표는 최종점이고, 목적은 그 최종점을 향해서 가는 과정이고 그 방향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먼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는 겁니다. 영어로 '골(GOAL)'은 목표이고, '에임(AIM)'은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목표와 목적은 자기를 긍정하기 위함인데,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중에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현실 속에서, 우리 인간은 노동해서 살기 때문에, 자기가 편하려고 하면 남을 이용해야만 하고, 그게 아니면 자기가 고생을 바가지로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협상과 타협으로, 그런 요령으로 버티는 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다녀도, 과장이 되면 부하직원을 잘 부려서, 그 직원이 한 일을, 그 성과를 가지고 자기도 뜯어먹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고생은 니가 해라. 효과는 내가 보겠다" 라는 것인데,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자기는 편하고, 남들은 고생하고, 그게 부부든 무엇이든 다 그렇다는 말이죠.
* 그러면 성경은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까? 인간을 통해서 현실을 보고, 인간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것만 이야기했지, 성경자체가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분석하는지, 그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현실을 어떻게 봅니까? 성경은 인간을 부정한다고 했는데, "해와 달과 별을 만들 때, 니가 거기에 있는가?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무지성을, 즉 인간이 얼마나 자기만 생각하는지,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살해를 해놓고, 그리고 너희들이 부활한 적이 있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아무 것도 없지? 봐라, 성경에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라고 하는데, 그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은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인데, 성경이 인간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디서 만들어졌는고 하니, 그게 현실 속에서 조성이 되었다고, 성경은 그렇게 본다는 말이죠. 즉 현실 속의 인간을 볼 때, 성경은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그런 원천이 이 현실 속에 있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자기를 긍정하면서 본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데, 즉 성경을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자기가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기 위해서 본다고 하면, 그것을 어떻게 성경을 제대로 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자기 구원, 자기 천국, 그런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성경을 보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한 가지만 집어넣으면 되는데, 이 현실을 세상 주관하는 신, 즉 '세상 신'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두 글자로 '악마' 라는 겁니다. 바로 그 악마가 현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베소서 2장 2절을 보겠습니다.
(엡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여기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라고 나오는데, 이게 악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인간이 이미 악마가 만들어놓은 그 가운데서 움직였다는 말이죠. 악마 따로, 인간 따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가 권세를 잡고 있는 그 가운데서, 인간들은 거기에 충실하게 순종하면서, 그렇게 악마의 사람으로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 결과가 바로 불순종의 아들들로, 즉 불순종을 야기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바로 불순종의 아들들로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말을 듣지 않고 나쁜 짓을 해서 불순종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곧 불순종의 사람으로 태어났고, 또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목표, 자기 목적이란 것이 어떻게 긍정될 수 있느냐는 것이죠.
* 베네딕트 수도원의 지침서 !!
제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베네딕트 수도원의 지침서를 읽어드리겠는데,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말이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헐벗은 사람을 도와주기, 아픈 사람을 방문하기, 죽은 사람을 묻어주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으로 품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기, 모든 사람을 공경하기" 라고 되어있는데, 쉽게 말해서 깍쟁이처럼 살지 마라는 겁니다.
여기에 죽은 사람을 묻어준다는 것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페스트를 연상시킬 수 있는데, 각 거리마다 시체가 늘려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성경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류에 대해서 '공동선(GOOD)'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하는 일에 대해서 먼저 나서서 참여하는 것, 이게 베네딕트 수도원의 지침서라는 말이죠. 그래서 신부들이 제주도 강정마을에 가서 해군기지 건설반대데모도 하고 하는데, 그렇게 정치적 이슈에 참여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생각을 해보는데, 만약에 버스에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기사를 협박한다면, 거기에 마침 신부나 수녀가 타고 있었다면, 그 강도를 말리겠습니까? 물론 겁나서 나서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런 것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길에서 누군가가 담배꽁초를 버려도, 신부나 수녀가 그것을 봐도 누구처럼 말리지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말리지 않는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정치적으로 민주화운동은 거창하게 벌리면서도, 오히려 정작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그들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 조직 내에 비리가 있어도, 손을 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쉬쉬하면서 덮기에 바쁘다는 말이죠.
* 가난한 자들을 오히려 이용하는 그들 !!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주어야 자기들이 하는 일이 선한 일이라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는 건더기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길 잃은 개나 고양이기를 잘 키워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후원금을 보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후원금을 받으면서도 개나 고양이를 돌보지 않고 그만 안락사를 시켰다고 하면, 물론 그런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귀찮은 일에 대해서, 그것을 처리해주면 그 대가로서 돈을 부친다는 겁니다. 그게 약간은 범죄적인 일이 되어도 말이죠. 즉 사회의 뒤치다꺼리를 한다는 겁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일종의 손 세탁인데 말이죠. 사회에 그런 나쁜 구석들이 있어주어야,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이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벌려놓은 일을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대가로서, 그래서 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정말 좋은 일을 하십니다. 사회적으로 공동선을 유지하는 일에 일조를 하기 때문에 후원을 해드리겠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긍정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사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바르게 살면, 곧 좋은 세상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아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 세상에 있는 악한 것을 누가 만들었다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아닌, 악마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성경은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악하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닌, 아예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부정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당신은 잘했어? 못했어" 라고 하는, 그런 평가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집안사정으로 배우지 못해서 글자로 모르는 80이 넘은 할머니들이 모여서 한글공부를 하는데, 젊은 선생이 와서 "할매, 그것도 몰라요?" 라고 하면서 윽박지르면 되겠느냐는 겁니다. "아니 세상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할머니들은 잘 하시네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전혀 글자를 모르니 너무 답답해서 나이가 들어서라도 한글이라도 알려고 배우려고 하는데, 그렇게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려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의미하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말이죠. 아무튼 무의미한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세 글자로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과거완료인데, 즉 죽은 자가 태어났다는 것이죠.
* 인간은 전혀 무의미하기에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까지도 도착을 해야하는데 말이죠. 즉 "나는 나 중심이다. 나는 내가 편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 그것을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전혀 없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능력조차도 자기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게 결론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뒤집어서 어떻게 하십니까?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그러한 권세보다도 오히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거기에서 끄집어내신다는 것이죠.
여기서 에베소서 2장 5절과 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이미 과거완료 !!
여기 6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하는데, 과거완료라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았을 때, 죽어가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주님을 보았는데, 그게 진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하늘이 보이지를 않는데, 그래서 아예 놀러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도바울은 삼층천까지 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면 하늘과 뚫어져서 직접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현실이 가로막는다는 것이죠. 그런 현실 속에서는 우리는 자기를 긍정해야한다고, 악마로부터 그렇게 이미 학습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자기가 잘못되면 다 불행이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런 인식이 우리 속에는 꽉 차있는데, 성경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자기 인생이 그야말로 비참하다고 하면, 그런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탄식과 절망에 빠질만한 속성을, 그것을 우리가 우리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성경도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도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도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학습을 받아왔는데, 그래서 그 중요한 자기 자신이 성경을 보고 예수님도 믿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말이죠. 당연한 논리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 교회는 없어 !!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천국, 그리고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세상,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은혜' 라고 하는데, 이런 은혜에 세계에 갈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이런 은혜의 세계에 합치가 되느냐는 말이죠.
전혀 되지 않는데, 그런 상황에서 교회를 만들면 그게 누구의 교회가 됩니까? 자기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 행복, 자기 잘남, 자기 헌신, 자기 희생을 뽐내기 위한, 그런 교회가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무슨 교회냐는 겁니다. 교회는 없다는 말이죠.
* 마릴린 몬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마릴린 몬로의 인형을 파는 가게에 가면 말릴린 몬로의 인형은 많은데, 그런데 그 가게에서 마릴린 몬로를 찾으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냥 마릴린 몬로 인형을 팔고 있는 뚱뚱한 주인 아줌마만 있다는 말이죠. 모두가 다 인형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러한데, 물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예수 인형을 들고, 천주교는 더 노골적인데, 드러내놓고 마리아 상을 들고, 그렇게 자기를 긍정하는 모임을 가진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나 성당이 그런 집회소라는 말이죠. 거기서 아무리 성경말씀을 인용해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두 명, 세 명이 모이는데, 왜 모입니까?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자기를 위로해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살던 그 버릇이 달리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닌데, 교회당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과거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그 성질이, 이제는 성경말씀을 배척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하지만, 제대로 복음을 전하면 도망치고 만다는 것이죠.
* 자아교체 !!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천국에 오려면 자아를 교체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교체' 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자아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와서 이 자이를 바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마지막 장벽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 '나' 라는 자아로 인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 전에 이야기한 베네딕트 수도원에 가서 아무리 수도사의 생활을 해도, 그 자아로 인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악마는 끝까지 우리의 자아에 대해서 동조하고 긍정을 해주는데, "니가 잘 되어야 만사가 잘 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자기가 잘못되면 다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악마에게 철저하게 세뇌교육을 받았는데, 그것이 곧 악마에게 훈련을 받고 사육을 당한 우리 인간의 '자아성' 이라는 말이죠.
에베소서 2장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 물론 우리가 성경을 보면 기억이 나는데, 하지만 평소에 길을 걸어갈 때도 기억이 과연 나느냐는 겁니다. 친구를 만나도 기억이 나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동창생들의 모임에 가서 1박2일로 수다를 떨 때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라는 말씀이 과연 기억이 나느냐는 겁니다.
그저 자기 자랑을 하기에 바쁜데, 자기 자식이 어떻고 며느리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죠. 심지어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교체' 라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닌데, 그 방식까지도 주님이 알아서 해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 방식이 전도서 9장에 나오는데, 1절입니다.
(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 내가 좀 살펴보았는데 !!
여기에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라고 하는데, 그러니 솔로몬이 자아를 교체하기 위해서 공부도 제법 많이 한 것 같다는 겁니다. 자기가 왕이니 알아야 백성들을 또한 가르치고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솔로몬이 그렇게 열심히 모두 다 살피고 해보았는데, 그러면 그 결론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까,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나오는 의인과 지혜자는 아까 말한 수도원의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죠.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그것을 미리 당겨서 알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천국을 가는지, 지옥을 가는지, 그것이 어떻게 예정이 되어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말이죠. 자기 개인의 목표를 예정론에 집어넣어서, 그렇게 같이 어울러서 이해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어떻게 나옵니까? 그것을 십자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십자가를 믿어서 천국에 가야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즉 자기의 개인적인 포부를 집어넣어서 이해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이해방식이라는 것이죠.
* 사랑이 오면 !!
이번에 아가서를 가지고 수련회를 하면서, 물론 강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사랑이란 그 사랑 앞에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란 말이죠. 여기서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사랑이 오면 자기를 잃어버리는데, 하지만 자기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사랑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가 그러한데, 자기를 잃어버리면 해탈이 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고, 사랑이 오게 되면 그 사랑 앞에 얼쩡거리는 자기가 그만 귀찮아진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자기를 귀찮아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좀 비켜라. 내가 사랑하는 분을 좀 보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디서 건방지게 똥폼을 잡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전도서는 구약에 있는데, 그래서 여기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사랑을 받을지 받지 않을 지는 모르는데, 그것은 미래에 가봐야 알 수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언뜻 들으면, 그런 말은 하나마나한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 나의 미래는 없어 !!
9장 1절에서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손'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자기의 미래가 아니고, 하나님의 손의 미래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보면 알겠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의 미래는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그런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기가 신경을 쓸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오직 그 사랑만 남는데,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를 받아주든지 떠나든지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일임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만 해"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흥정이고 거래라는 겁니다.
* 미래와 예수 안 !!
전도서 9장 1절에서 말하는 '미래' 라는 것이, 그게 신약의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나오는데, 그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전도서의 하나님의 손이, 신약의 예수 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제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따로 미래에 염려하고 걱정할 것도 주님께서 다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없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예수 안에 나를 없앴다" 라는 것은 "나를 죽였다" 라는 의미인데, 주님은 죽은 자의 의견은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사라지는 순간, 그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걱정과 근심거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 또한 자기의 목표와 목적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주님 앞에서 다 없어진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예수 안' 이라는 겁니다.
* 세우고 지우고, 세우고 지우고 !!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우리는 매일 계획을 세우고, 주님은 그 계획을 지워버리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지 않게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계획을 세워주어야, 그 계획을 지우는 과정 속에서, 자기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게 한다는 겁니다.
청도에 계신 분이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서 오후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실시간으로 예배중계가 되니까 이런 일도 일어나는데 말이죠.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하나님, 인터넷이 잘 되게 해서 예배를 드리게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아가 가지고 있던 약간의 건전해 보이던 기대마저도, 그것은 짜증과 분노를 일으킴으로서, 자기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악마의 습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너의 그런 목표와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지?" 라고 하는 말씀, 그 말씀을 다시 한번 회상하고 회복하는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 십자가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살면 !!
그렇다고 하면, 신약에 와서 "예수 안에 있다" 라고 하는,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인지 한번 답변을 해보라는 말이죠. "1번,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고, "2번, 십자가 안에 살면 구원이다" 라고 한다면,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겁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1번도 틀렸다고 할 수 없는데, 그러나 2번과 같이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저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저것을 주세요" 라고, 그렇게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십자가를 객체로 여기게 되면, 그러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십자가 안에, 즉 사랑 안에 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의미가 없는 존재, 즉 무의미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 여러분, 그것은 아닙니다 !!
제가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면서, 교인들과 서로 대화를 하든 하지 않든 주고 받으면서, 항상 신경을 쓰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교인들이 자기를 무의미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이것을 배우면 나는 더욱 똑똑하게 되겠지" 라는 것인데, 그런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그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는 내용을 계속해서 담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게 위해서,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하는 것, 그런 것은 이제 그만 포기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설교를 하고 또 강의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십자가 마을에는 그런 분이 없는 줄로 아는데, 자아가 점점 더 두껍게 장벽이 되어서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 강력한 자아의 버팀 !!
제가 표정들을 보면 대충 느낌이 오는데, 가끔 눈빛으로 레이저를 저에게 쏘아대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ㅋㅋ). "더 이상 쳐들어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벽이 얇아져야 하는데, 점점 두꺼워진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나옵니까? 그것은 자기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또 성경공부를 했는데, 당신이 그 따위 소리를 해? 당신이 많이 아는지 내가 많이 아는지, 우리 한번 해보자"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강력한 자아의 버팀이라는 겁니다.
*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방법 !!
비단 이것은 어느 특정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이 있는데, 이것을 일종의 요령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생각하시면 된다는 말이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보라는 겁니다. 오늘 저에게 적용된 그 방법은 감기인데(ㅋㅋ),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라는 말이죠.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러면 무엇이 거기에 방해가 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찬양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지, 헌금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기뻐하시는 그 대상이 이미 결정이 되어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과연 그분이 누구일까요?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 긍정인데, 즉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 틈, 혹은 그 장벽이 복음을 그야말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죠.
만약에 집에 '나를 기뻐하지 않기' 라고 액자를 만들어서 걸어놓으면, 아마 저녁에 남편이 와서 집어던지지 싶은데 말이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왜 기뻐하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평소에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솔로몬이 바로 그것을 알았는데,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왜 그렇게 5번이나 '헛되다' 라는 것을 언급했는고 하니까, 그 출발을 인간으로부터 하게 되면 모든 것이 결국 허무와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인데, 즉 '허무' 라고 하는 최종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영화, '트루만 쇼' !!
미국의 '트루만 쇼' 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세트장 속에서 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인데 말이죠. 마지막에 보면, 그 아이가 어른 트루만이 되어서 풀장을 헤엄쳐서 건너서 문을 열고, 드디어 그 세트장을 벗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 영화가 시사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이 세상에 갇혀있다" 라는 것이죠.
그런 문이 인간에게는 없는데, 모두 다 폐쇄되고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계에 다른 인간이 투입이 되었는데, 즉 예수님이 오셔서 "나는 길이요. 문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하는고 하니,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길이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게 주님이 오셔서 길을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 길을 찾아가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길은 없다는 말이죠. 그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모임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교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없다는 말이죠. 교회는 오직 성령이 임할 때만, 주의 능력이 임할 때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게 교회라는 말이죠.
어떤 가스인지 확인하려고 하면, 분무기로 물을 뿌려서 그 물이 산란되는 것을 보면 그 종류를 알 수 있듯이, 복음을 뿌리게 되면 비로소 그 현장에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를 누가 막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 천국의 열쇠 !!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교회에는 천국의 열쇠가 있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이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열쇠가 있어야만 하는데,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비록 문이 있어도 열쇠가 없는 존재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그 열쇠가 바로 교회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교회에 열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천주교는 그 천국의 열쇠를 확보하기 위해서 교회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교회의 역사를 모아서 "천국의 열쇠는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주교에 등록하지 않으면 천국의 열쇠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으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천국의 열쇠는 교회가 망하는 순간 !!
그런데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천국의 열쇠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슬쩍 언급하고 지나갔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가 망했을 때 있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만든 교회이니, 그것을 주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가만히 두면 주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겨드랑이에 천국의 열쇠를 넣었다고 하면, 평소에 옷을 입고 다닐 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옷을 벗기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교회를 발가벗기게 되면 천국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는 말이죠.
천국의 열쇠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외쳤던 것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천국의 열쇠가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무슨 의미입니까? 즉 십자가라는 겁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곧 십자가라는 말이죠. 그것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것이 바로 천국의 열쇠인데, 그것을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를 들어서, 우리 외손녀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분명히 엄마나 아빠가 데리고 갔지 싶은데, 그 아이를 보고 적당한 유치원을 찾고 등록해서 다니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렇게 천국은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보혜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처음 보혜사는 예수님이고, 두 번째는 성령님이고, 세 번째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돕고 성령님이 돕는데, 그렇게 하게 하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부, 성자, 성령께서 친히 자기 세계로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을 시편테마로 이야기를 하면,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고, 우리는 그의 양떼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목자가 가는 곳에는 양들이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리고 목자의 임무는 자기 양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리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목자와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양들을 노리고 있는 이리들도 있다는 겁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그러면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어떻게 하십니까? '안위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것은, 생활비가 넘친다는 의미가 아니고(ㅋㅋ), 오늘 강의에 의하면, 그 양들이 자아를 잊어버리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겠다는 말이죠.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목적이 나에게 있다" 라는 것을 교체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즉 인생을 자기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는데 있어서, 목자가 되신 주님께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생은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아닌데, 만약에 자기가 산다고 하면 꿈 같은 것이 되고 마는데, 꿈속에서는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마구 날아다니고, 무엇이든지 다 허용이 된다는 말이죠. 그 꿈은 세상 현실을 응축한 것으로, 꿈에는 특징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나'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응축한 것이 꿈이라면, 펼친 것이 앞에 눈을 뜨면 만나게 되는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꿈이나 현실이나 전부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인데,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고, 이러한 현실을 만드신 분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을, 그것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 동서남북, 그 어디를 가도 광야 !!
그렇게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강의 처음에 "현실은 어떻다. 저떻다" 라고 하면서 '현실' 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바꾸게 되면, 그게 바로 '광야' 라는 말이죠. 광야 40년 동안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고 하니, 흔히들 '인도하셨다' 라고 하는데, 단순히 인도한 차원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구성원을 다 바꿔치기를 하셨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 달랑 그 두 사람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은 애굽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디입니까? 바로 광야인데, 그렇다면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자기 긍정, 즉 자기의 그 어떤 행함도 긍정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환경, 그것을 광야라고 한다는 겁니다.
만나도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고, 또 물도 바위에서 솟아난 것이고, 그리고 적들이 어디에 출현하는지, 그런 것도 다 누가 알려준 겁니까? 불기둥과 구름기둥, 그리고 모세의 지팡이, 이것들에 의해서 그들은 그냥 광야 길을 따라갈 뿐이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동서남북, 그 어디를 가도 광야이고 사막이란 겁니다. 남쪽이나 북쪽이 아닌, 동쪽이나 서쪽으로 간다고 해서,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어디를 가도, 자기들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곳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 미세먼지를 피해서 !!
그러니 울산에 가도 안 되고 서울에 가도 안 된다는 것이죠. 물론 대구도 안 되고 말이죠. 미세먼지를 피할 곳이 없다는 말이죠. 요즘 젊은 엄마들이 그 미세먼지를 피해서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겨울에 여행을 간다고 하는데, 깨끗한 곳에서 지내다가 미세먼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겨울이 끝나면 돌아오겠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은 제 생각인데, 임산부의 경우에 그 미세먼지가 태아에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 공기가 깨끗한 캐나다 쪽으로 가면 어떻겠느냐는 말이죠. 돈은 별로 들지 않는데, 한 달에 천만원이면 된다는 겁니다(ㅋㅋ). 캐나다도 정유시설이 있는 쪽은 곤란하고, 가능한 한 산업시설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죠.
아무튼 사람들이 너무 별나고 예민한데, 왜 이민을 가고 하는고 하니,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동서남북, 그 어디로 도망을 쳐도 너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냥 꿈속에서, 그 꿈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만나와 일용할 양식 !!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먹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차원인데, 그런 인간으로 교체가 되었는지 보기 위해서 주신다는 말이죠. 자기가 있는데 양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주어진 양식에 담긴 의미를 받아먹을 수 있는 인간이 되라고,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만나'의 새로운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떡을 먹고 배불러서 따라온 자들은, 만나를 먹은 것이 아니라 떡을 먹었다는 겁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것은 떡을 먹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인간으로 교체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취득해서 자기 입으로 넣는다고 하는 자아의 행위는 무의미한데,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인데, 그러니 그동안 누가 방해물이었다는 겁니까? 자기가 떡을 먹고 배를 부르게 하겠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예수님의 존재가치를 누락시키고 저하시키는 장애물이라는 말이죠. 즉 자기 자신이 자기 구원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무의미한데, 그런데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고 하면서 꽉 붙잡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강의를 해도, "당신이 어떤 소리를 해서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는지, 그것을 보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왜 그런 자기 구원이 필요하냐는 말이죠. '나' 라는 것 자체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악마가 제공해준 것인데 말이죠.
누구든지 자기 성공, 자기 미래의 확보, 그런 것들만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긍정이고, 자기 정당성의 확보인데, 그런 것에 완전히 꽂혀있다는 것이죠. 감기에 걸려서 조용조용하게 강의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만 또 흥분이 되는데 말이죠(ㅋㅋ).
* 광야가 곧 천국 !!
광야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겠는데, 여기가 애굽이고, 여기는 홍해고, 그러면 광야가 이렇게 있고, 여기는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요단강이 이렇게 있고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 약속의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광야에 사는 광야민이 따로 있고, 또한 약속의 땅에서 사는 약속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사람으로, 그렇게 일괄 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광야=천국",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면서, 로마서 8장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여기 '자녀이면' 라고 하는 것은 "광야의 자녀이면" 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리고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라고, 고난이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교인들은 고난이 없는 구원을 자꾸만 생각하느냐는 말이죠.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양보와 희생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는, 그런 인생 길을 원한다는 겁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자기 기쁨을 포기하는 모습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지 않고 자꾸만 회피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기쁨과 자기 기쁨을 맞바꾸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18절에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하는데, 여기 고난은 광야의 고난인데, 그리고 그 영광은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러면 인물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성령을 받고 이미 바뀌어져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보혜사가 주가가 되고, 또한 그들은 그 보혜사를 증거하는 주변인이 되는, 그렇게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한 체제로서 이미 이 땅에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천국에 갈 때, 죽기 직전에 골라잡고 할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말하는 고난은, 열악한 환경에서 돈을 번다고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생각이 주변 환경과 서로 맞지 않아서, 뭔가 이질감을 느끼고 장벽을 느끼는, 그래서 어디에 계속해서 부딪치는 것만 같다는 겁니다. 설령 그것이 부부나 부모와 자식사이라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죠.
* 계속해서 차이성을 !!
그렇게 광야에서 뒤바뀐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애굽에 살던 사람들과 차이성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식으로 보혜사가 일을 도와준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의 뜻대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그 차이남을 즐기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도 그런 차이남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라고 말이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은 없는데, 성경에서 왜 고난이라는 말을 합니까? 이 고난이라는 것은, 자기가 기존의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으로 봐서 고난이란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계속해서 자아를 인수인계를 하게 되면, 그 자아는 그야말로 사정없이 뭉개지고 만다는 것이죠.
*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
스데반 집사님이 돌을 맞으면서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자기에게 날아오는 그런 짱돌과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니, 그것을 용서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해주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기꺼이 이 세상과 구분되어 사는 존재가 된 것에 대해서,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마음가짐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돈이 있는 자는 돈을 다 쓰지 말라. 또한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혼을 하려고 설치는 자들은 아멘이 저절로 나올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그러면서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간다" 라고 했는데, 즉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주께서 !!
그렇다면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광야라는 장치, 애굽이라는 장치, 그런 약속의 장치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인데, 즉 우리가 하지 못한 것들을 주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아의 특징은, 어느 구석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닌데, 도저히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기 안에 주렁주렁 장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자기 인생 길을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기 안에 가득히 차있는 상태로 주님이 이끄신다는 말이죠.
* 이미 광야에 들어온 천국 !!
이것이 이미 광야에 들어온 천국인데, 그러니 천국인 약속의 땅은 광야에서 이미 신나게 내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중에 가면 좋은 곳이 있겠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광야에 있으면서 천국의 요소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 글자로 '만나' 라고 하는데, 그러니 만나는 일종의 유도체라는 겁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이죠.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 땅을 경작해서 얻는 것이 아닌데, 완제품으로서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신명기 8장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하셨는데, 즉 말씀이라는 것이죠.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사람은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만나로 산다 !!
그것을 오늘 강의방식대로 하면, "사람은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만나로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말씀을 읽는다고 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가 말씀을 읽어서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다운 사람으로 변형을 시켜줄 때, 우리는 비로소 천국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말씀이 자기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차후에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살든 간에 그 말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 바로 그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데, 그게 성도의 '자유함' 이라는 겁니다.
간음의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적용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죄 용서, 즉 자유라는 말이죠. 주님은 그 용서의 의미를 적용시키기 위해서, 그 여인이 자기 앞에 나오도록 기다리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죄인인 그 여인을 용서하심으로서, 이 용서라는 것이 실제적임을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계속해서 놀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냐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 이상은 제가 묻지 않겠는데 말이죠(ㅋㅋ).
우리가 남에게 용서를 받아내도 자기가 뭔가 해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가서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사과를 하든지 해야한다는 겁니다. 뻣뻣하게 나오는 상대방의 그 건방짐을 받아주면서, 물론 속으로는 욕을 하겠지만 말이죠.
정작 우리는 사과를 한 적도 없는데, 그래서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인데, 그리고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그분의 피로 인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말이죠.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러니 자기 아들이 전방에 배치를 받았다는 것은 고민거리도 아닌데, 이제는 18개월만 견디면 된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으면서 따라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피를 믿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말이죠. 즉 만나를 먹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만나가 구원한다는 겁니다.
* 나는 왜 죄인가?
그러니 예수님의 피인데, 그러면 그 피에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나는 왜 죄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고 깨닫는 재미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금 제가 감기에 걸려서 짜증이 좀 나는데, 이것도 죄가 아니냐는 말이죠.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말씀을 더 잘 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역시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갑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심지어 자기가 사라지는 것도 역시나 무의미한데, 그러니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다만 의미가 있는 것은, 그렇게 죽도록 하신 그분만이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그분께서 때가 되매 죽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 내 꿈이 아닌, 주님의 꿈으로 !!
어제 오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늘의 별까지 따르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남이 하는 운전에 대해서도 너무 간섭하지 말고 말이죠(ㅋㅋ).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가운데, 이것은 꿈 같은 자기 인생이 아니고, 그야말로 꿈 같은 주님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앞은 꿈은 개꿈이고, 뒤의 꿈은 제대로 된 꿈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수요일에는 요셉에 대해서 했는데, 형들이 요셉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꿈이 깨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꿈이 상실되는 상태로 인해서, 그들은 예상치도 못한 하나님의 도달점에 이미 도착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꿈이 상실됨으로 말미암아서 거기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이미 천국에 도착한 천국백성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에 가는 경우에는 자기 뜻대로 된다는 말이죠.
* 성도는 죄 짓는 일만 하면 돼 !!
그러니 성도의 할 일은 간단한데, 죄 짓는 일이라는 겁니다. 매사에 짜증을 내고, 주둥이가 툭 튀어나오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그게 곧 우리의 할 일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유발시켜놓고 개입하시는데, 성도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무의미한 내가, 매사를 또 다시 나 자신을 중심으로 여겼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굳히는 것이 바로 악마에 놀아난, 그야말로 건방을 떨었던 강퍅한 마음임을 알고 회개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야말로 실감이 나게 된다는 겁니다.
* 흔들리는 컵과 더불어 !!
앞으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욱 더 아프지 싶은데, 그러니 기대하던 그 수준을 점점 낮추어야 한다는 말이죠. 젊었을 때와 비교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물을 마실 때도, 과거에는 그냥 쉽게 잘 마셨는데,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컵이 마구 흔들려서, 아이처럼 물을 흘린다는 말이죠(ㅋㅋ).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그것을 숨기고 하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흘린 물을 빨리 치우지 않는다고 하면서 며느리를 구박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인데,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는 말이죠. 젊었을 때 잘나간 것이 오히려 착각이라는 겁니다. 결국 인생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두루두루 좋은 일을 하자"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니나 잘 하세요"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두루두루 남들까지 다 살핀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지랖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하라는 것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는 또 깨질 준비를 하고, 그러면 된다는 것이죠.
* 주님은 그 어떤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아 !!
끝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어제 오후설교에 이것을 집어넣었는데 말이죠. 이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주님에게 모든 해답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 묻는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어떤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왜 그렇습니까?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죠.
인간은 순수하게 묻는 법이 없는데,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응답을 받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악마의 습성이기 때문에, 그런 악마에 질문에 주님은 답변해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아서 일이 진행되지 않는데, 주님은 우리의 질문을 개무시하고 미래로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미래는 누구의 미래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미래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손, 즉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미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9장 1절의 '하나님의 손'과, 신약의 '예수 안'이 서로 일치가 된다는 겁니다.
* 성도는 열매이지, 나무가 아니야 !!
미래는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그런 것은 우리의 소관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살아있는 동안 자기가 얼마나 못되먹은 죄인인지, 그것을 혹독하게 경험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는,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는 말이죠.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열매라는 것인데, 우리가 포도나무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건방지게 열매를 맺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누구누구의 열매,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존재이유라는 것이죠.
이 세상 현실에서는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래서 항상 우리는 '실적' 이란 것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평생을 살았는데, 아파트가 겨우 이것밖에 안 되나?" 라고 하는데, 자기가 살아왔다고 여기는 그 실적에 주눅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열매와 실적은 다른데, 그리고 열매는 열매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따먹기 위한 열매이기 때문에, 주님이 만족하시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 베들레햄 들판의 목자들 !!
이번 크리스마스 때 그런 설교를 한 기억이 나는데, 목자의 그 들판을 생각할 때마다 직접 가서 본 그 감동이 밀려오는데 말이죠. 목자들이 베들레햄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났는데, 그때 목자들이 일당을 올려달라고 데모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목자들의 형편을 주님이 아시는데, 천사들도 안다는 말이죠.
목자들은 경제적으로 전혀 넉넉하지 않은데, 하지만 천사들이 그들에게 경제적 보탬을 준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베들레햄에 가서 태어난 아기를 보라" 라는 것인데, 그게 전부라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서 어린양에게 경배하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첫 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란 겁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는 목자들인데, 그들은 목자로서 한 평생을 사는 것이 바로 그들의 존재의미인데, 그렇게 주님이 조치를 해주셨다는 말이죠. 즉 "너희는 예수님의 열매로서 이 땅에서 목자로서 살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보다가 덮으면 또 세상에 나가서 실적을 외치지 싶은데, 그렇게 하든 말든 우리는 기도하고 마치면 된다는 겁니다.
(눅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실적에 후달리면서, 남들에게 자기를 존재가치를 거기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베들레햄의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의 기쁨에 저희들이 참여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주님의 열매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2,3 오후 2시에 마침.
컵이 흔들리고 다리가 흔들려도, 주님만 찬양케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