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복합인생 1811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7. 09:42
2018-11-26 13:56:22조회 : 81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7 - 복합인생이름 : 구득영 (IP:183.102.166.44)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7 - 복합인생

                                                             18,11,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1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을 때, 그것이 허무의 절정이고, 그것은 바로 무(無)이고 죽음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무와 죽음을 극복해서 구원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소멸을 의미하는데, 그동안 자기가 애쓰고 수고한 그 모든 것이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다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가 이룬 그 성과를 바라보면서,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허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허무란 있을 수 없는데, 그런데 죽는 순간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아무리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즉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해도, 누군가가 자기를 그만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즉 "너는 더 이상 오래 살 가치가 없다" 라는 것이죠.

사명이 인간의 의미를 제공한다 !!

예를 들어서, 엘리야의 경우에는 일을 다 마치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것은 엘리야가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받은 사명이 훌륭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사명을 주신 분이 훌륭하다는 것이죠.

인간은 서서히 밑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죽는데, 그것도 늙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에는, 물론 엘리사도 그렇지만, 그 엘리야를 가치 있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사명이란 말이죠.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엘리야를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선지 생도들이 엘리야가 보이지 않으니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시체를 찾아다녔는데, 하지만 찾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명이 인간의 의미를 제공한다" 라고, 혹은 사명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새롭게 제공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중요한 것은 사명이라는 말이죠.

만약 자기가 평생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하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교회놀이도 이제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재미가 있으려면 교회가 점점 더 커져야 하는데, 그러면서 낯선 사람들이 와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재미가 있다는 말이죠. 기존의 있는 사람들은 자꾸 보면 식상해진다는 겁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허무를 느끼는데, 즉 "한 평생을 살았는데, 이게 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 허무를 느끼는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가치가 있다. 의미가 있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귀찮게 여기니까, 그렇게 되면 눈치도 보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의미와 가치가 훼손이 된다는 말이죠.

그럴 때 허무를 느끼게 되는데, 그런데 이것은 평소에 무엇이 누락되었다는 겁니까? 사명이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게 사명감인지, 아니면 남들이 알아주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그것이 자기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남들에게 별로 눈이 띄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구분이 되는데,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았구나" 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명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 잘난 맛에 교회 의자를 닦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만약에 사명이라고 하면, 자기가 따로 의미와 가치를 챙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는데, 그러니 사명이 끊어지면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뭔가 알아서 실적을 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사명이 끊어진 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혼자서 교회놀이를 실컷 하다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명이 인간의 허무를 극복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사명 안에는 그 누군가가 들어있기에 !!

제가 이렇게 '사명' 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그 사명 안에는 그 누군가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누군가가 계속해서 명령을 하고 지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사명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사명이라는 겁니다.

어제 낮에 설교한 에베소서 1장 1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자기를 뭐라고 소개를 합니까? '사도(使道)'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죽어도 사명은 없어지지 않는다" 라는 당당함인데, 즉 자기가 지금 자기 좋아라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좋아라고 사는 삶이 아니다 !!

다시 말해서, "내가 좋아라고 사는 삶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사도가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할 때는,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두가 자기 좋아라고 아등바등 살아간다" 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자기 가정, 자기 나라, 자기 교회도 다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명이 아니라 자기 좋아라고 살게 되면 그야말로 불안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깨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한 밤중에 전화가 오면 반가운가요? 그게 아니라 겁이 덜컥 난다는 겁니다. 혹시 자기 가족이나 주위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싶어서 말이죠.

그것이 깨지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것이 헛수고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좋아라고 사는 삶이 아니다" 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은 자기 좋아라고 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114페이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을 때, 그것이 허무의 절정이고, 그것은 바로 무(無)이고 죽음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무와 죽음을 극복해서 구원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을 때, 그것을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버렸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저를 버리지 않았지요? 그동안 아버지와 연결되어서 살아왔습니다" 라고 하는 지난날을 묘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복합인생 !!

그러니 예수님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지 말고, 즉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진심으로 공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그것이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사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복합적으로 보아야, 오늘 강의제목은 '복합인생'이 좋겠는데. 즉 주님과 같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도 자기 인생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남들이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말이죠. 남들은 핀잔을 주는 것이 취미이기 때문에, 그들은 뭐라고 해도 괜찮은데,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거기에 휘둘린다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남들이 주는, 즉 악마가 주는 핀잔에 말이죠. "혹시 내 좋아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식으로 말이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즉 성령이 내주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바로 복합인생이라는 것인데, 즉 "포장지 따로, 내용물 따로" 라는 겁니다. 우리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데, 포장지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포장지가 뜯기고 나면,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만든 새로운 자아가 빛을 발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싸우는 '창세 전'과 '창세 후'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창세 전'과 '창세 후'가 싸운다고 했는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내용을 어디에 실었는고 하니, 창세 후 창세기 3장에서, 즉 범죄함으로서 악마에게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창세 전의 내용을 심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합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복합인생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악마에게 놀아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바울이 당당하게 "나는 사도다" 라고 하는 것은, "니가 세상에 대해서 알아?" 라는 겁니다. 즉 "너 자신도 모르지? 복합인생이란 것을 전혀 모르잖아. 그렇지?" 라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복합인생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꾸만 자기 행함만이 나오게 되는데,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자기를 살려낼 수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설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함은 "내가 잘했나? 못했나?"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꾸만 돌아보아야 하는데, 거기에 가동되는 것이 미완료인데, 즉 "내가 오늘까지는 착했는데 내일 오후 2시에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생각, 즉 자꾸만 선과 악을 가지고 가채점에 나선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점수를 매기는데, 모든 인간들이 말이죠.

그래서 자기의 가치와 의미를 자기가 가꾸겠다는 것인데, 마치 텃밭에서 배추나 고추나 가지를 가꾸듯이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은 엘리야가 아닌데, 엘리야가 "이 정도에서 불수레를 타고 올라갈까?"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하는 모든 일은, 엘리야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마치 베드로처럼, 주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인생자체가 복합인생인데, 여기서 '복합'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요? 한 건물에 아파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가도 있고 오피스텔도 있고, 심지어 영화관도 있다는 말이죠.
 
복합인생과 박멸 !!

그렇게 예수님이 저주를 받는 것이 곧 허무의 절정이었고, 그것이 무(無)였고, 그것이 죽음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기 인생이 복합인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 인생이 가치가 있다고 여겨도 죽는 순간이 되면, 그것을 강제로 모두 박탈을 당한다는 겁니다. 어제 설교시간에 그것을 '박멸' 이라고 했는데, 전부가 다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마지막에 없어진다고 하면, 그러면 그 이전에 있었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죽어가는 주제에 말이죠. 자존심이 세어서 자살을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자살하는 순간에 자기 자존심을 챙길 수 있습니까?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예수님이 버림을 받는 것이 허무의 절정인 것처럼,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은 이처럼 허무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공부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고, 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고, 또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고, 이러나 저러나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남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사명' 인데, 즉 자기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신 분이 가치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뜯기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을 가지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데, 우리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나옵니까? 성령을 받지 않으면 복합인생이 될 수 없는데, 그래서 자기 행함을 동원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자기들의 행함으로 예수님을 따라붙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 왕의 술사들이 모세가 하는 일을 흉내를 내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따라오려거든 따라와" 라는 것인데, 즉 따라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과 인간 사이, 또는 천국과 이 세상 사이, 그것이 뭔가 인간 쪽에서 풀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이죠.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여기서 교재 11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그 어떤 인간도 무와 죽음을 극복해서 구원으로 빠져나갈 자는 없습니다. 통로가 막혔음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분명해진 것입니다. 막혔기 때문에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막혔기 때문에 통로가 될 수 있어 !!

여기에 "막혔기 때문에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벽으로 막았다고 하면, 그래서 A와 B가 서로 다른 세계라고 하면, A는 주님의 세계이고 B는 인간세계인데, 그러면 이 B에서 A로 갈 때, 막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하는 모든 시도를 막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인데, 그러니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십자가를 아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쉽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쉬운 겁니까? 기적입니까?

예를 들어서, 이렇게 만리장성이 있는데 마술사가 그것을 뚫었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은 속임수라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속임수가 아닌데, 하나님이 십자가로 막았다고 한다면, 정말로 막았다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 쪽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즉 복음이 말이죠.

그렇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설령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해도, 주님의 일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관건이 아니고, 주님의 막아놓으신 그 취지만 살아난다면, 그것으로 주님의 일은 완료가 된다는 말이죠.
 
그럴 리가 없어 !!

만약에 인간 쪽에서 행함이란 것을 가지고 뚫을 수만 있다면, 굳이 막았다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목회를 한다고 하는 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도대체 지옥이 왜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왜 만들어놓았느냐는 말이죠.

분명히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러니 인간 쪽에서 보면 지옥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말하는 그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냥 봐주는 것이죠,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지나가 주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끝까지 지옥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야 끝까지 사랑이라는 말이죠.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풀어낸다는 것이죠. 그러니 당연히 지옥은 없어야 하는데, 그래야 앞뒤 논리가 맞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인데, 물론 그들은 노골적이지만, 그런데 한국교회는 자기들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고방식은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지옥 이야기를 교회에서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잠재적인 여호와 증인인데, 또한 불교신자이고 말이죠. "그럴 리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을, 그런 것을 만들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사야서 66장을 보겠는데, 제일 마지막 구절인 24절입니다.

(사 66:24)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자들의 시체를 볼 것이라" 라고 하는데, 패역한 자들, 즉 주님에게 대드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패역한 자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는데, 그러면 이들이 주님에게 패역한 이유, 즉 주님에게 대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말이 안 되잖아요 !!

그것은 바로 주님이 제시한 것이, 도저히 자기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즉 인간 쪽에서 전혀 풀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강의 제목이 자꾸만 바뀌려고 하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라고 말이죠(ㅋㅋ). 그런데 말이 안 되는 요소가 있어주어야 복음인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부부싸움을 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지옥 이야기를 꺼내면 아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 김장이 짜니 어쩌니 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그런데 거기서 지옥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평소에 지옥문제를 얼마나 철거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는 것을 가지고는 아무리 십자가를 풀려고 해도, 전혀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지금 주님은 지옥 문제를 가지고 우리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아, 나는 행복하다" 라고 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 통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니 교회는 다 엉터리인데, 왜냐하면 그게 사람들을 좋게 하는 동네라는 겁니다. 말이 되지 않는 요소가 장착되지를 아니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그것을 빼버리는데, 물론 인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으니, 그것이 악마가 하는 짓인데 말이죠. 즉 악마는 십자가를 말이 되는 식으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에게 유포를 시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하나님' 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해서 십자가에 대신 달리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그 희생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니 막혀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우회해서 간다는 말이죠. 십자가로 막아놓으니까, 그것을 피해서 다른 길로 해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다른 길이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것이죠.

포석정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던졌다가 철회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게 '포석정' 이라는 겁니다. 설교가 너무 길어질까 싶어서 피했는데 말이죠. 이 포석정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폐쇄적인데, 마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처럼 말이죠. 물이 빙글빙글 돌면서 자기에게로 오는데, 그렇게 자기 폐쇄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 포석정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자기 생각과 행동이 말이죠. 그러면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잘라주어야 하는데,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따로 뽑아내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물고'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마치 자기 배에 누군가가 창으로 찌르는 것과도 같은데, "망해라, 이놈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망해라, 이놈아 !!

그야말로 성실하고 착하고, 어떤 사람 앞에서라도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그런 인간에게 누군가가 창으로 찔러주어야만 하는데, "지옥에나 가라, 이놈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사람 좋고, 인간성 좋고, 예의 바르고, 무례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대접을 받기보다는 대접할 줄 아는, 그런 인간의 옆구리를 그만 창으로 찔러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순환고리가 날아가는고 하니, 이 포석정 순환고리가 무엇입니까? 자기 가치와 자기 의미를 증명해주는데, 그런데 그런 자의 옆구리를 찌르게 되면, 그의 모든 잘남과 우수함이 파괴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지옥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우리를 찔러주신다는 것이죠. 십자가에서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안에는 지옥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찔러주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미리 지옥에나 가라" 라는 것인데, 즉 "너희는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였었어" 라는 겁니다. 평생을 나쁜 짓만 하면서 산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평생을 착하게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그야말로 쇼크라는 것이죠. 적어도 교회를 60년 정도 다닌 자들에게는 말이죠.

목사나 장로들에게 신학교 교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보라는 겁니다. 지옥에 가려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된 자들은 없는데,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명을 받아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뭔가 자기를 천국에 보내려고 하는, 즉 자기 마음대로 십자가를 해석한 결과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모양새, 바로 그러한 상태라는 겁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것을 장담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이야기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게 될 때, 그것은 바로 평소에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태도로 인해서, 복음이 전혀 왜곡되고 있다는 겁니다. 복음이 아닌 유사복음으로 다른 사람은 훈육하는 것인데, 전도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만 다른 소리를 내러버렸다는 말이죠.

과연 사도도 그러했는가?

그렇게 되면서 서로 윈윈인데, 자기도 목회를 하면서 밥 먹고 살아서 좋고, 상대방도 죽어서 천국에 가사 좋고 말이죠.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과연 사도가 그렇게 전도를 했느냐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사도가 그렇게 전도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목사님은 누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이 나주어야 하는데 말이죠. 여기에 대한 해답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말이 안 되는 것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고, 그리고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이 계속해서 자기와 동거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말이 안 되는 것과 계속해서 동거를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먼저 말이 안 되는 것이 들어와야 하고, 그리고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한데,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과 동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5년 전에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알아서 살고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계속해서 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말이 안 되었는데, 이제는 말이 되네" 라고 나온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말을 하고 하니, 이제는 죽어도 소원이 없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흔히 남자들이 가을을 탄다고 하는데,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가을이 되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남자들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저도 가을을 타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제도 주일학교 설교를 하면서 틀린 곳에 한 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애굽 왕 바로느고를 틀렸고, 그리고 앗수르를 바벨론으로 잘못 말했다는 겁니다. 가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늙어서 그런가요? (ㅋㅋ)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고은의 시에 '가을편지' 라고 있는데, 다들 아시지 싶은데, 노래의 가사로도 나왔는데 말이죠. 거기에 보면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가을을 타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사랑을 나눈다고 하면, 그것은 단발성 사랑인데, 그리고 남자는 그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자는 단발성인데, 하지만 여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남자는 하룻밤의 추억으로 기분 좋게 마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자도 그러하냐는 겁니다.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여자도 그것을 과연 하룻밤의 즐거움으로 끝낼 수 있느냐는 말이죠.

여자는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 이게 단발성에서 정규적인 반복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그것으로 또 만족해합니까? 그렇지가 않은데, 남자와 동거를 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동거가 되려면 조강지처를 밀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하는데,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면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욕심보다는 욕망이 적당하지 싶은데 말이죠. 인간은 그 좋은 것이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계속해서 그게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인간에게 복음이 들어오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안다' 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말이죠. 복음도 모르면서 안다고 하면, "나는 이제 십자가 복음을 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살아야지"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몰라서 말이죠.

천국이란, 말도 안 되는 분과의 동거 !!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요소가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을 요구하는고 하니, 주님과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인 상태에서 동거에 들어가게 되는데, 말이 안 되는 분과 말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죠. 

지금 제가 결단코 지나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하는데, 즉 이 세상 사람들은 행함만 자랑하지만,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게 바로 동거에 들어간 것인데, "나는 이번에 아파트를 넓혔다. 취직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친구가 그것을 듣고 있다가 "너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여기나?" 라고 하면, "물론 그게 말이 안 되지. 내가 복음을 안지가 15년인데, 15년 동안 말이 안 되고 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인생이란 말이죠.

수능 31번 문제 !!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이번에 나온 수능 국어 31번처럼 어려운 문제는 아니고 말이죠. 그게 지구의 중심을, 즉 중력을 묻는 문제였는데, 그러니 어떻게 보면 물리문제라는 것이죠. 어렵기는 어려웠던 것 같은데, 이제 문제에 들어갑니다.

이번에 뉴스에도 크게 나온 사건인데, 옥상에서 중학생 5명이 한 명에게 집단구타를 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한 명이 그만 15층에서 그만 뛰어내려서 죽었다는 말이죠. 죽은 것보다 맞는 것이 너무나 아프다는 것만 생각해서, 옥상의 턱을 넘어서 밑으로 몸을 던졌다는 것이죠. 아마 다들 TV알고 있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면 이 중학생의 잘못된 점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응용문제인데 말이죠. 우리는 뉴스든 어디든 사건이 나오게 되면, 반드시 십자가와 관련을 시켜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답변이 없는데, 문제가 만만치 않다는 말이죠. 그 학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얻어맞을 짓을 했다고 여기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얻어맞는 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학생의 내부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맞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더 때려달라고 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가치와 자기가 맞는 것은 핀트가 맞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뛰어내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맞는 것이 억울하다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그러면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자기가 그 학생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아마 전자담배 때문에 시비를 서로 붙은 것 같은데, 그러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누구를 흉내내는 겁니까? 어른들 흉내를 낸 것인데, 어른이 되고 싶어서 말이죠. 그러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어합니까? 공부를 하고 싶어합니까?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아닌가요?

그런데 이 학생의 경우에는 공부가 아니고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물론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은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맞으면 당연히 억울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자기 가치와 관련을 시켜서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되는 것을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말이 되면, 안 돼 !!

예를 들어서, 자기 돈 3억을 들여서 교회를 지은 장로가 있다고 하면, 그래서 그 교회에서 어른노릇을 하면서, 목사도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장로에게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당연히 화를 내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그런 소리를 듣기에는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로는 무엇을 모르는 겁니까? 자기가 교회에 돈을 내서 지은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장로는 자기가 그렇게 교회를 짓고 한 것이 주의 은혜라고 할 것인데, 만약에 그게 주의 은혜라고 하면 말이 되어야 합니까? 되지 않아야 합니까? 말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말이 안 된다고 하면, 계속해서 동거를 해주어야 계속해서 말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바쳤나? 내가 바쳤지. 그러니 다 나가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동거하지 않고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과 동거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이 되는 변명거리를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자기의 고귀함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갈수록 천국과는 멀어지고 지옥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에 어떤 자들이 가는지,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지옥에는 어떤 자들이 갑니까? 악한 자들이 갑니까? 악한 자들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겁니다. 자기가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아닌지 말이죠. 그들도 나름대로 그렇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납득이 되는 변명으로 일관하게 되는데, 즉 자기의 고귀함을 지키려고 전부가 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무슨 어린놈에게 벤츠를 !!

이번에 해운대에서 20대가 벤츠를 몰다가 그만 사람을 죽이고 말았는데, 그것도 음주운전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 20대 놈도 문제지만 부모도 문제다. 아무리 자기가 돈이 많아도 그렇지, 무슨 어린놈에게 벤츠를 사주고 하노?"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부모는 "내가 내 돈으로 사주는데, 왜? 당신도 돈이 있으면 사주잖아?"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 우리 인간세계에서 말이 되는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평소에 우리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부모는 경찰서에서 가서는 "음주운전은 순간적으로 실수를 한 것이고, 본성은 착합니다" 라고, 그렇게 말이 되는 핑계를 대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탓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도 평소에 그렇게 말이 되는 것으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과연 엘리야의 모습이고, 또한 사도바울의 모습이냐는 겁니다. "같이 더불어서 살자" 라고, 우리는 평소에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느냐는 말이죠.

오늘도 잘남의 포석정에서 !!

그래서 전도서에서 허무하다고 하니, "왜 인생이 허무하지? 나는 재미나는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포석정이니 재미가 있는데, 아직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 없었으니 말이죠. 잘남의 포석정, 즉 오늘도 잘나고 내일도 잘나고, 그렇게 매일같이 잘남의 포석정을 돌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아직까지 지옥의 창이 들어오지 않으니, 자기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동거가 아닌데, 혼자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재미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사야서 마지막에 그런 대목이 있다는 것은, 이사야서 전체 내용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너희는 망해도 싸다" 라는 겁니다. 아버지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그러니 망해도 당연하다는 말이죠. 이사야서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알몸으로 !!

이사야서 20장에 보면,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아니 선지자가 말만 전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왜 그렇게 벗은 몸으로 지내고 했느냐는 겁니다. 실제로 애굽에 가서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본국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사 20: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사 20: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사 20: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게 바로 사명인데, 자기 지킴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의 가치와 고귀함을 지키지 위해서 알몸으로 살아갑니까? 그게 아닌데, 그것이 사명의 위대함인데 말이죠. 자기는 그 사명을 포장하는 허접한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사명자가 곧 성도라는 겁니다. 

샌드위치맨 !!

그러면 나이가 드신 분들은 다 아는 과거의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모두들 알지 싶은데 말이죠. 대구 동성로에 '샌드위치맨' 이라고, 호빵맨이 아니고 말이죠(ㅋㅋ). 앞뒤에 광고판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인데, 이것은 미국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말은 할 필요가 없고, 그냥 거리를 걸어다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죠. 요즘은 그것을 버스로 하는데, 버스에 아파트 광고를 그림으로 그려서 그냥 하루종일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지자가 바로 앞뒤를 그렇게 사명으로 붙여놓았다는 말이죠. 즉 지옥이란 겁니다. 이사야서 마지막이 지옥으로 끝나듯이 말이죠. 뒤는 지옥인데, 즉 돌아서면 지옥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이사야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닌데, 그래서 복합인생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평화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지옥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말이죠. 어떻게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나를 흉내내겠다고? 얼마든지 해봐라. 하지만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죄를 지었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는 단절된, 폐쇄된, 그것을 아까 포석정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 곳에서 그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도, 그 어떤 찬양과 예배를 드려도, 하지만 주님은 막아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교회가 커도, 거기서 그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것 자체를 막아버린다는 것이죠. 들어오지 못하게 말이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지옥에 가면서도 천국에 간다고 착각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라고 물으면,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간다고, 즉 자기가 예수를 믿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천국에 간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래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복음과의 동거 !!

천국에 가는 것은 이유도 없는데, 그러니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동거에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복음과 동거를 하게 되면, 그러면 구원문제에 대해서만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평소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논리가 확장되고 확대가 된다는 겁니다.

저에게 무슨 드라마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고 유행가 가사를 많이 하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확장을 시킬 줄 모른다는 말이죠. 옥상에서 뛰어내린 그 중학생,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아이만 괜찮으면 되잖아" 라고 나오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평소에 "나만 챙기면 된다" 라고 하는 것에 젖어있어서 그러한데, 포석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만 연결해봐야 하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 믿는 기독교라는 종교, 거기의 신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수호신'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신은 신인데, 자기를 보호해주는 신이라는 겁니다.

그 수호신에 성경에 나오는데, 창세기 31장 19절과 20절입니다.

(창 31:19)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창 31: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수호신, 드라빔 !!

이게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몰래 떠날 때의 이야기인데, 여기 19절에 보면 '드라빔'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말이죠. 사람들이 왜 수호신을 가지는고 하니, 그것은 정착지 마련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사를 가게 되면, 이사를 간 그곳이 자기의 영원한 정착지가 되기를 소원한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왜 정착지를 원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의 위치를 보장받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자기 위치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데, 그러면 그야말로 정신이 사나워진다는 말이죠. 가게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왜 월세가 싫습니까? 장사가 좀 된다고 여기지면, 주인이 그만 냄새를 맡고 나가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위치가 없어지고 마는데, 즉 정착지가 그만 위협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정착지를 보장받기 위해서 신을 찾는데, 즉 "신이시여, 내가 영원히 기거할 위치를 허락해주옵소서" 라고 하는, 옛날에는 그런 입장에서 수호신을 섬겼다는 겁니다.

'나'를 지켜주는 신 !!

이게 창세기 4장에도 보면 나오는데, 가인이 자기 땅에서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런데 가인은 그만 그 땅에서 추방을 당한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먹혀들지 않는데, 만약에 그곳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무슨 그런 신이 다 있는가?"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겁니다.

가인이 그런 곳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자기들이 거기에 정착하면서 새롭게 융합시킨 신이 있다는 말이죠. 이사를 할 때는 이사 신, 결혼을 할 때는 결혼 신, 그게 전부다 수호신이라는 겁니다. 누구를 수호합니까? '나'를 지켜주는 신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경우에도, 여호와를 생각할 때 항상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전제가 없는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나온다는 말이죠.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란을 가다가, 어느 한 곳에 머물러서, 그곳이 바로 벧엘인데, 거기서 꿈을 꾸는데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야곱이 가만히 있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제시한 것이 있는데, 그 교역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오게 되면, 즉 하나님이 정착지를 허용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들은, 즉 아담의 후손들은 전제가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드시 전제가 있다는 말이죠.

(창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창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그리고 창세기 38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 유다가 나오는데, 그가 자기 마을을 떠나서 외지에 갔을 때 창녀를 찾았는데, 그러자 그의 며느리인 다말이 미리 그것을 알고 창녀로 변장을 해서 동침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약조물로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다가 그것을 주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염소새끼를 주고 그 약조물을 다시 찾으려고 친구를 그 동네로 보내게 되는데, 그런데 확인해보니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유다는 존재하는 않는 자와 성 관계를 맺었다는 겁니다.

(창 38: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창 38:21)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없는 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 곧 '사건' !!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 정착지를 제공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정착지가 없는 신인데, 그렇게 되면 이것은 없는 신이고, 그리고 이러한 신과 관계를 맺게 되면, 이것을 두 글자로 '사건'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사건을 붙잡아서 영원히 자기의 수호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객이 전도되었는데,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라고 하는, 즉 자기가 말이 되는 신, 자기가 설명이 가능한 신으로 그만 변모를 시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십자가의 은혜를 주시면 덥석 붙잡는데,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피가 자기 죄를 용서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 쪽에서 먼저 붙들게 되는데, 자기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동거를 하게 되면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동거를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즉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되고, 또한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전부가 자기를 수호하는, 평소에 전제가 되어있었던, 하나님을 알기 이전의 사고방식이, 즉 지옥에 갈 속성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부정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성도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사는 것도 전혀 말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런 경우에 말이 되는 자기의 정착지를 자기가 사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모든 사랑의 대상은 그만 자기 소유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중에서 누가 지옥에 갔습니까? 부자가 갔는데, 그러면 부자는 무슨 의미입니까? 많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많이 가진 사람입니까? 많이 가진 자인데, 그러면 맞은 편에 있는 거지는 바보라서 거지입니까? 무엇이 없어서 거지입니까? 가진 것이 없어서 거지라는 말이죠.

15억은 저에게 말이 안 됩니다 !!

우리 집사님의 재산이 15억이 된다고 하면, 물론 희망사항인데(ㅋㅋ),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은 자기 인생에 말이 안 되는 것인데, 그러면 재산을 버려야 합니까? 간직해야 합니까? 간직해야 하는데,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는 말이죠. "이런 15억은 저에게 말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에 간 부자의 경우에는, 지금 제가 왜 부자가 지옥에 갔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 부자가 15억이 있다고 하면, 그 부자는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겁니까? "이것은 내가 간직할 만해서 간직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연금을 타는 것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고생을 많이 해서 연금을 타는 겁니까? 그동안 아프지 않고 무탈하게 살아온 그 은혜, 그게 연금이라는 모습으로 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금 자기가 이 정도라도 사는 것은, 그것은 바로 말이 안 되는 것과 동거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티를 내야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인데,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미 천국이라는 말이죠.

이게 부부사이 !!

그래서 사랑은 소유가 아닌데, 그립고 그리운 사랑, 그 사람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있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부부사이라는 겁니다. 남편이 너무 잘나고 여자가 못나게 되면, 부부사이라도 갑질을 하게 되는데, "나 정도가 되니까 너와 같이 살아준다. 내 성질대로 하면 벌써 너는 쫓겨났어. 그러니 까불지 마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런 경우에는 지옥에 가는데, 감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있는 것 자체로 감사해야 하는데, 그냥 있음에 감사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소유가 아니니 자기 것이 될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남들에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기 자신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강도라고 한다면, 그런데 옆에 달린 예수님을 쳐다본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자기는 강도인데 말이죠. 그러니 처형을 당할 만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오늘밤에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이게 말이 되는 됩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게 말이죠.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의 경우에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상한심령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무리 다윗이라고 해도, 그게 인간의 힘으로 안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윗은 성령을 받고 비로소 알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부부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잠언서 19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라고 하는데, 아내는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잠언서가 조금은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아내는 귀하게 여기라고 하면서도, 남편에 대해서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ㅋㅋ).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정착지가 곧 지배지 !!

아무튼 이렇게 인간들이 수호신을 통해서 자기 정착치를 마련하게 때, 그 정착지가 "나는 여기에서 영원히 살아야지" 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녹취자 - 라멕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것이 바로 자기 '지배지' 라는 겁니다. 전문용어로 '나와바리'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지배하는 영역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행함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행했던 티를 내는데, 즉 자기가 행했던 그 영역에서는 왕이 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즉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미래전략연구소' 라는, 거기에 양 사장이 요즘 유명한데, 저는 양씨는 다 좋게 보았는데, 우리교회에 양씨 성을 가지신 분이 너무 좋아서 말이죠(ㅋㅋ). 그렇게 인간은 자기 정착지가 자기 지배지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십자가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자기는 그런 사업체도 없고 가정만 꾸리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이 정착지인 동시에, 자기의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지라고 우기고 있지 않은지, 그것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감사함이 없는, 즉 "너는 왜 말을 듣지 않아?" 라고 하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되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강압적으로 통치해서 받기를 원하는, 그리고 그것을 좋은 말로 '가정교육' 이라고 포장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가정교육은 주님의 소관인데, 그러한 만남의 과정 속에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자기를 구원했다고 하는, 그런 감사와 감사가 엮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오뎅꼬지와 관계망 !!

이제 남은 시간에 진짜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여러분이 아는 것부터 먼저 해보겠는데, 신약에서 구원은 개인구원이 아닌데, 물론 성경전체가 그러한데, 집단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집단구원이 되려고 하면, 집단의 구성원과 구성원 사이에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그렇게 형성된 관계망에 율법을 집어넣는데, 이스라엘 속에 말이죠. 그것을 울산강의에서 '오뎅꼬지' 라고 했는데, 즉 꼬챙이에 오뎅을 하나 하나씩 연결하게 되면, 그러면 그 꼬챙이 덕분에 전체가 하나의 오뎅탕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꽂아놓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관건이 무엇인고 하니, '너'와 '나'가 아니라 그 '관계망'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인데, 지난 안양강의에서는, 이것을 '관(管)'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예수님의 피가 흐른다는 겁니다. 이 피가 곧 용서인데, 이 용서는 어떤 경우에 성립하는고 하니, 자기가 죄인이 될 때만 비로소 그 의미를 품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전도는 죄인이 해야 !!

장로님께서 전도를 하실 때, 어떻게 자기가 죄인임을 느끼면서 하십니까? 그렇다면 상대방이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는데, 하지만 천사의 소리를 해도 사랑이 없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랑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만큼 안다. 나는 이만큼 잘났다" 라고 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나는 너보다 우수하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이게 지배지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전도를 한다는 것은 형제찾기인데, 그것은 자기가 죄인인 것처럼 그 사람도 주의 성령의 인해서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은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는 부름이 목적이 아니라, 죄인과 죄인 사이를 연결해준 그리스도의 피가 중요한데, 그 피를 신약에서는 '새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서로 관통이 되어있는 상태, 그래서 안양강의 제목이 '관통' 이었는데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면, 그러면 여기에 방해요소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평소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인간은 그야말로 문어발인데, 굳이 재벌이 되지 않아도 그런 속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자꾸만 자기가 아는 사람, 아는 사람, 그런 식으로 해서 퍼져나가는데, 마치 문어발처럼 말이죠.

7단계만 거치면 모두가 형제 !!

그런데 어떤 수학자가 연구를 해보니, 지금 세계인구가 75억인데, 진화론에 의해서 5만년 동안 늘어났던 인구가 불과 4년 만에 다 늘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죠. 물론 지금 우리나라는 줄어든다고 난리지만, 지구전체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 수학자에 의하면, 아무리 인구가 75억이라고 해도 7단계만 지나면 모두가 다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페이스북인데, 7단계만 지나면 모두가 다 엮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촘촘하게 모든 인간의 관계망이 형성되어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스마트 폰을 보세요. 전화번호부를 보면 그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수 백개가 넘는다는 말이죠. 우리가 도를 닦으려고 산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다들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더 많을 것이고 말이죠.

그게 200개라고 치고, 그러면 하나만 걸려도 '200×200'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한 단계만 걸쳐도 4만명이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4만×4만'을 하게 되면, 그렇게 7단계를 가게 되면 전부다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굳이 7단계까지 가지 않아도 75억을 넘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러면 과연 무엇이 주님의 관계망을 훼손하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벌려놓은 이 가지가, 이것이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고 하니, 어제 예배시간에 인간의 사귐을 교역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인간을 대할 때 자기에게 어떤 실익을 주는지, 그런 조건에서 관계에 나선다는 겁니다. 

여기는 나의 왕국 !!

그것이 주님의 관계망을 방해하는데, 그게 바로 '나의 왕국' 이라는 말이죠. 이 왕국은 그 규모가 크든 적든,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숨을 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잠을 자도 꿈속에서도 자기 왕국의 확장에 나선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강의를 마치고 나면 식당에 갈 것인데, 그러면 거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면 "오, 반갑다" 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등을 돌리고 밥을 먹는다는 겁니다. 속으로 "에이, 재수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아닌가요?   

이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6개월 정도 되었지 싶은데 말이죠. 제가 강의를 하기 위해서 광주를 가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버스 앞자리에 우리교회에 있다가 나간 사람이 거기에 앉아있더라는 겁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난감하던지, 휴게소에서도 나가지도 못하고 말이죠(ㅋㅋ).

그러면 저는 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저는 그 사람이 미쳤다고 보는데, 악령이 들렸다고 말이죠. 그러니 저에게는 이익이 없으니 피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닌데, 이것은 논리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아하, 저렇게 해서 지옥에 가는구나 !!

엘리야 당시에 아합 왕이 얼마나 엘리야를 욕했는지 모르는데, 그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공격할 때도 제 정신이 아니고 말이죠. 미안하다고 해놓고는 또 죽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좋은 것이 좋다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 이 세상 자체가 어디까지나 영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게 바로, 주님이 지옥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 된다면 반드시 지옥에 갈 사람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지옥에 갈 사람들을 모집하시는지, 그런 것이 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아하, 저렇게 해서 주님이 지옥에 보내는구나. 사람은 엄청 좋은데, 지옥에 가는구나" 라고 말이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자기 집에 놀러온 손님에게는 그저 된장이라도 퍼주려고 하고, 결코 빈손으로는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더 냉랭하고 깍쟁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만 전하면 그만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김치를 꺼내주다가도 던져버리고 만다는 것이죠(ㅋㅋ).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주어야 이용할 거리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복음을 알아도 복음을 잘 전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이죠.

불교가 된 기독교 !!

그러면 그들이 왜 그렇게 선행을 합니까?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주어야 그게 쌓이게 되고, 그게 업보가 되어서 자식들이 잘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불교인데 말이죠. 자기 가정이 하나의 왕국인데,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잘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불교의 교리가 바로 그러한데, 그러한 착함을 부처님이 보고 있다가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준다는 말이죠.

이런 불교가 오늘날 기독교가 되었는데, 그러니 교회에서 성경을 모두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잘 된 이유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되는 식으로 풀어나간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수호신인데, 복합인생은 너무 어려워서 제목을 수호신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드는데 말이죠(ㅋㅋ). 모든 것이 수호신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엉터리 교회에 갔다고 하면 우리 집안은 망했다. 그런데 우리 자식들이 무탈하고 잘 되는 것은 보니까, 내가 제대로 된 신을 선택했다" 라고 하면서, 복음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즉 "만약에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무슨 사건이 터져도 터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닌 것을 보면 내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묻는 제가 미안한데, 그렇게 해서 우리교회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명이 없으면 인생이 연극이 되는데, 이것이 문제라는 말이죠. 꾸며낸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믿음이 있는 척을 한다는 말이죠. 사랑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꾸며낸다는 말이죠.

어쩔 수 없었어 !!

왜 바깥에서 쾌활한 사람을 보면, 의외로 집안이 엉망이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인생 자체가 연극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힘이 드는데,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과연 자연스러운지, 그것을 본다는 겁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또한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는지를 말이죠.

그런데도 명랑하고 쾌활하다는 것은 일종의 연출인데, 즉 자기를 사수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켜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후회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어쩔 수 없었어" 라고 하라고 했다는 말이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 설명이 되지 않는 인생을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전혀 남들에게 설명이 안 되지만, 하지만 그러한 존재가 된 것에 대해서, 그 자체로서 주님과 동거생활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1,26 오후 2시에 마침.

                                                        마누라가 아닌, 주님과 동거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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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이 헤메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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