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8 - 사귐의 효과
18,12,1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1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요나의 이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꼭 집어서 말하면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일어난다" 라는 것인데, 이 말은 "너희가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나서 핵심 - '너희가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은 하나님의 뜻인데, 즉 계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거기에 보면 요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이 요나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교재에 나오듯이 "너희가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라는 겁니다.
우리가 요나 선지자가 가는 길을 보게 되면, 그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처음에 배를 탔을 때는 요나나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풍랑이 일어나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이동을 시켰다는 말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배를 타고 자기 볼 일을 보러 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분리가 일어나는데, 요나와 같이 배를 탔던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죠.
이 분리가 바로 거룩인데, 거룩은 곧 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분리를 거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착함으로 본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착함과 그만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착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아닌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속한 세계와 그들이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인데, 즉 분리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서로 속한 세계가 달라요 !!
그것이 신약인데, 구약에서는 그것을 요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니 요나는 분리된 자라는 겁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거기서 요나가 느낀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인데, 그런데 같이 배를 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자기 동네로 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반드시 무엇을 경유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심판을 경유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즉 살아있는 우리 인간이 곧 바로 구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한 심판을 거쳐서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죠.
구원은, 심판을 경유해야 !!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심판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지만 심판을 거치지 않는 구원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은 일반 종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불교가 되고 무속종교가 되고 마는데, 하늘의 별자리를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그게 우상이란 겁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경험했다는 것은, 요나는 거기서 자기 자신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를 사람들과 비교하면 산 사람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비교하게 되면 진작에 죽어야 하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그것을 경유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구원이 거기서 발생하니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가 한국이 아니고 지옥에 있다고 여기면, 그러면 온 천지가 불바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같이 형벌을 받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데, 반면에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건지겠다고 했을 때, 그러면 지옥에 있는 자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그것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그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서 계속해서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소경 둘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데 뭐라고 합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데, 즉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자로 간주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마 20: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당신의 가족이 되게 해주세요 !!
과부가 헌금을 하는데, 겨우 동전 두 개를 했다는 말이죠.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가진 것이 없는데, 과부에게는 그게 그 당시 가진 것의 전부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주님 앞에 저는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그런 고백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과부는 내세울 것이 자기 몸밖에 없는데, 그래서 자기 전 재산을 헌금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재산을 모두 드렸다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을 주님께 드리오니, 이것을 좀 받아주세요. 제가 드리는 돈이 아니고, 제가 바치는 정성이나 착함이 아니고, 저 자신을 알아서 좀 처리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가족으로 받아달라는 것인데, 주님과 한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12장에 나오는데, 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에 조그만 다니면 누구나 다 아는 구절이라는 말이죠. 헌신예배의 단골메뉴인데, 물론 반대로 왜곡해서 설교를 하지만 말이죠.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니 이것은 자기가 가진 소유의 일부를 바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자기 몸을, 즉 "주님, 알아서 하세요" 라고, 그렇게 전부를 다 내놓는 것이란 말이죠. 그것이 바로 지옥을 염두에 두고, 즉 "이 땅이 지옥이다" 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지옥에서 할 것은 다 해보았는데, 그렇게 아무리 해봐도 자기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오늘밤에 저를 기억해주소서" 라고 하는, 그게 모두 같은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시는데, 더 이상 무엇을 더 원하느냐는 겁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목사의 역할, ① ② ③ ④ ⑤ ⑥ !!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설교를 쉽게 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니 목회자들이 300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말이죠. 물론 설교를 쉽게 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 다음에 문제인데, 설교를 쉽게 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되게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주님이 목사로 세운 것이 그런 교회를 되게 하기 위해서 세웠느냐는 말이죠. 결코 교회 만들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주님에 목사로 세운 것에는 조건이 있는데, 즉 목사로서 해야할 일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첫째 주님이 보내신 자를, 즉 성도인데, 둘째로 그런 성도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러면 셋째로 어떤 자들만 말씀을 알아듣는고 하니,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데, 넷째로 이들을 말씀으로 변화를 시켜서, 그리고 다섯째로 이들을 천국입성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섯째로, 이게 중요한데, 여기서 가르치는 자, 즉 목사인데, 목사도 함께 그 말씀에 영향을 입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가르치고, 남들은 배우고,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가르치는 자도 같이 변화되는 모습이 있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같이 천국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목사의 역할이란 말이죠.
이것을 하나씩 따져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예정된 자인데, 그러니 이미 교회운영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데, 창세 전에 예정이 되지 않는 자들은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치매에 걸린 사람들 중에 어떤 경우가 있는고 하니, 동네에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라는 쓰레기는 모두 다 모으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집안은 도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엉망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교회에 온갖 쓰레기를 다 모은다면, 그것이 과연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교회는 쓰레기 하치장이 아니기에 !!
저에게 "아니, 쓰레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다그친다고 하면, 교회에서 돈 문제를 이야기하면 모두 다 쓰레기라는 겁니다. 자기 지분이 어떻게 저떻고 하면 다 쓰레기라는 말이죠. 성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는 쓰레기 하치장이 아닌데, 하나님이 예정한 자가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의 행위를 거부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하나님의 예정은 변함이 없는데, 그것은 인간이 그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변동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함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미리 말씀을 드리면, 이 6가지 논리에 의하면, 무엇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까? 먼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성령으로, 주님이 성령으로 말씀을 썼는데, 그러니 성령이 있는 사람만 말씀을 알아듣고, 그게 아니라면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아야 하고, 그 변화에 의해서 천국이 입성이 되는데, 그런 변화에 있어서 같이 은사를 나누면서, 즉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함께 말씀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가르친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말씀에 함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교회라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정도, 사업도, 건강도, 명예도, 역사도, 전통도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결코 천국보다 더 귀하지 않다는 겁니다. 교회는 가정이 잘 되게 위해서, 사업이 잘 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닌데, 물론 교회 자체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어느 40대 부부 이야기 !!
그러니 목사 300명이 모여서 그렇게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가리우는 짓이라는 겁니다. 어떤 40대 부부가 자기 과거를 이야기하는데, 남자는 건설업을 하다가 그만 사기를 당해서 망했고, 그리고 여자는 셋째 아이를 낳아가 그만 의료사고가 나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러니 그야말로 힘든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때 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중요한 말을 했는데, 즉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기에 나는 여기 시골까지 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듣는 순간 귀가 솔깃했는데, 즉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기에" 라고 하는,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말이죠. "무조건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아내는 아이를 잃어도 말이죠.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 촌구석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아무튼 살아야만 했다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 인간의 진솔한 모습인데, 그런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전도서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왜 허무를 알아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당신, 지금까지 막 살았어 !!
그 40대 부부가 뭐라고 했습니까?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기에, 그래서 아이 둘을 데리고서 모든 노력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것인데, 물론 복음은 모르는데,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것, 그것을 두고 "막 살았다" 라고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묻고 싶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 부부를 보고 "당신, 지금까지 막 살았어!" 라고,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무조건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무슨 짓이든 다 했다" 라는 것인데, 그게 막 사는 것이란 말이죠. 비단 이것이 그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밑바탕에는 막 사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욕심' 이라고 하는데, 모든 힘과 역량을 자기가 살고 싶어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처음에 이야기한 것인데, 즉 "심판을 경유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는데, 그런데 그게 욕심이고 죄였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결국 그것이 지옥에 가게 했다면, 그러니 인생이 왜 허무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야만 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허무를 아는 변화 !!
우리가 요나 이야기를 왜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고 하니, 하나님이 예정해서 보내준 사람에게 '요나' 라는 말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성령으로 말씀을 썼는데, 그것이 요나의 기적이라는 겁니다. 즉 죽음을 통해서 구원으로 돌아오는 그 변화가, 택한 백성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해서 적용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변화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물론 그러한데, 변화가 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여기에 조금의 걱정거리가 들어왔다고 여길 지도 모르겠는데, 즉 "내가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가?" 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되면 기존의 성화론과 같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 변화는 자기가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전혀 아닌데, 즉 주체가 자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 변화는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주제, 즉 '허무'와도 관련이 있는데, 그 허무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허무를 아는 변화인데, 즉 무엇을 하더라도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그런 변화라는 겁니다.
주님의 관리 !!
그렇다면 허무를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함에 대해서 관리해주신다는 점, 그것이 우리 변화의 유일한 동기가 된다는 것이죠. 행함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관리해주신다는 말이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그러면 허무는 왜 있는고 하니, 그것은 주님의 느낌을 알고 그것을 공유하기 위해서 허무를 주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여기 교재에도 나오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약하게 만드신 것인데, 즉 관리에 들어가신다는 겁니다.
(마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닮고 싶지만,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고고하고 높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육신에 구멍이 나있는데, 즉 육신이 약하다는 겁니다. 마음이 육신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육신이 약하면 전부가 다 약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약함은, 단순한 약함이 아니라 천국에서는 거부의 요건이 된다는 겁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예수님 !!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제자 3명과 예수님이 나란히 기도를 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그야말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게 기도를 하셨는데, 물론 제자들도 처음에는 따라붙었지 싶은데, "주여,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다가 그만 지쳐서 슬그머니 잠이 오는데,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요? (ㅋㅋ). 비몽사몽간에 기도하다가 잠이 들곤 한다는 겁니다.
육신 자체가 약해서 그러한데, 여기서 주님은 무엇이 화가 나시는고 하니, 자기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화가 난다는 겁니다. 잠을 자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마음은 그야말로 천사인데, 입만 열면 하나님께 영광이고, 그런 큰 소리는 누구인들 치지 못하겠느냐는 겁니다.
마귀가 감사할 수 있는가?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마귀가 감사할 수 있는가?" 라고 말이죠. 마귀에게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감사가 없는 자가 바로 마귀라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가 나오는 것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이기고 감사가 나온다는 말이죠.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덕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인데, 즉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산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 마음은 그야말로 잘 하고 싶은데, 일년 365일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고 싶은데, 하지만 육신이 그런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고, 주님의 관리라는 말이죠. 엄청난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인데, 창세 전에 예정된 혜택인데,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우리 자신에게 맡긴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 맡기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기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기에" 라는 겁니다.
그대 40대 부부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우리도 다급할 때, 특히 병원 수술대에 올라가 있을 때, "살고 싶었고, 또 살아야만 했기에" 라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의사 선생님, 힘내세요. 아멘!", 그렇게 외치지 않느냐는 겁니다. 물론 마음 속으로 말이죠.
허무를 인식하지 않으면, 성도가 아냐 !!
하지만 성도의 경우에는, 자기가 사는 것이 결국은 자기의 오기가 아닌데, 그런 큰 소리는 누구든지 칠 수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는 것, 그게 허무를 인식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뜻은 우리가 허무를 인식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허무의 바탕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자기 육신이 약하다는 것인데, 즉 자기 원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행함을, 즉 변화의 과정을 밟을 때, 이것이 세 번째인데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가 행했던 것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을 느끼도록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관리해주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자기 교회를 위해서 모인 300명의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들이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소리를 들으면 엄청 화를 내지 싶은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그것을 두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니 말이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은데, "그래야 당신에게서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게 저의 솔직한 심정이라는 겁니다.
감사가 아닌 교회가 잘 되게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면, 그러면 얼굴에는 언제나 짜증이 가득해질 수밖에 없는데, 자기 가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죠. 즉 '고맙습니다' 라는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100을 집어넣었는데 그 결과가 20이 나왔다고 하면, 감사가 아닌 짜증과 분노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어떤 분은 "나는 남편에게 잘 해준다고 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애를 먹입니다. 그래서 짜증이 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부부가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기에" 라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감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허무가 아닌 감사가 !!
그러면 왜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허무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남편을 붙잡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고 하는 바로 그것, 그 노력이 주님과 매치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데, 즉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허무한 존재의 육신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거기서 나온 생각도 역시 허무하다는 것을 인식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감사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저를 보고 "목사님은 왜 자꾸만 아무 것도 아니고 합니까?" 라고 하면서 화를 내지 말고(ㅋㅋ), 그게 고마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악마가 인간을 다룰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악마는 감사가 없다고 했는데 말이죠. 악마는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라. 노력해라" 라고 하면서 힘들게 다그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고마움과 감사함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계속해서 지연이 된다는 겁니다.
9 9 8 8 2 3 !!
요즘 '998823' 이라는 숫자가 유행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들어보셨지요?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일이나 3일 정도 아프다가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하지만 그것은 욕심인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허무가 빠지고 없다는 겁니다.
심판을 경유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데, 그런데 심판도 없이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구원을 받으려면 감사가 먼저 있어야만 하고, 감사가 나오려면 자기 육신이 약하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주여, 저는 천국에 가는 것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죠.
그러니까 목사에게서, 즉 마귀의 종에서 감사가 나오는 주의 종으로 바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려고 하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목사 자신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에서 오는 어떤 보람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남들을 가르치는 것은 마음인데, 그러니 육신은 그것과 동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 자신도 가르치면서 거기에 빠지지 말고, 자기도 같이 말씀에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공로만 높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죽도록 고생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막 살았다" 라고 하자는 것이죠.
거듭난 사람, 거듭나지 않은 사람 !!
그렇게 된다고 하면, 여기 1번부터 6번까지 다 지우겠는데, 여기서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과 해당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겠는데 말이죠. 처음으로 돌아가서, 거룩은 분리라고 했는데, 착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분리된 생활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면, 첫 번째는 거듭난 사람이고, 두 번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별로 어렵지 않지요? 이게 요한복음 3장 6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는 겁니다. 그러니 육은 결코 거듭날 수 없다는 말이죠. 반면에 영으로 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다시 말해서, 천국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닌데, 즉 행위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는데, 그러면 성령이 온 것은 오지 않은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고 하니까,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교제를 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 도를 닦고 있다는 말이죠.
말씀대로 살자 ??
청교도들이 그 대표적인데, 그들은 "말씀대로 살자" 라고 하는데, 즉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 특징이 성화론인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새로운 행함이 있는데, 그 행함대로 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성화론을 주장하게 될 때,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가면 갈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위대해진다는 겁니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허공에 사닥다리를 걸어보라는 말이죠. 넘어진다는 겁니다. 사닥다리가 그 역할을 하려고 하면 어디에 걸려야 하는데, 그래야 기어올라갈 수 있는데, 그런데 정작 걸 곳이 없다는 말이죠.
"이 정도면 착하다고 하겠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일이 하나 터지게 되면 와장창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성질 한 번 내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 명예와 위신이 말이죠. 그러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홀로 서겠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악마가 우리에게 집어넣은 것에 대한 후유증이라는 말이죠.
저는 모든 사람들을 다 환자로 보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환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환자라고 할 때는, 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환자라는 겁니다. 그런 환자의 증세가 '홀로 서기' 라는 말이죠.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특히 요즘 그런 것이 유행하는데 말이죠. 혼 술, 혼 밥, 모든 것이 혼자라는 겁니다. "나이가 35살인데, 시집을 가야지?" 라고 하면, "엄마, 내가 알아서 할 게" 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혼자라는 말이죠. 이제는 부모도 필요가 없는데, 모두가 혼자 산다는 겁니다.
홀로 서기 !!
옛날에는 10대 후반부나 20대에 반항을 했는데, 이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벌써 반항을 한다는 말이죠. 즉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홀로 서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 인터넷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알아?" 라고 하면, 그래서 엄마가 "나는 그런 것은 몰라" 라고 하면, "이제는 엄마하고 놀지 않을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인터넷을 보면서 공부를 하는데, 그러니 이제는 부모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이죠. 배울 것이 없으면 존경할 것이 없고, 그렇게 존경할 것이 없으면 사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배울 것이 없으면 물어봐야 잔소리만 돌아오고 하는데, 그러니 더 이상 대화가 안 된다는 겁니다.
나이 60을 넘긴 변호사와 여자아이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TV로 본 적이 있는데,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60대가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지" 라고 하면, 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책을 보면 눈이 아픕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60대는 꼰대, 혹은 강요하는 자라는, 그런 인식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홀로 서기를 해서 바르게 산다고 하면, 그러면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가면 갈수록 자기가 점점 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가 점점 위대해져서, 정작 자기 자신은 허무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감사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에게 공을 들이면서 자기 관리에 나서니, 그래서 감사보다도 원망이 앞선다는 말이죠. 자기는 천사처럼 되고 싶은데, 하나님이 즉각 즉각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서 서서히 악마의 본색이 등장하게 되는데, 성화론을 통해서, 또한 청교도를 통해서 말이죠.
우리나리가 승리하게 하소서 !!
중세가 끝나고 15세기 경에 유럽에는 전쟁이 참 많았는데, 우리나라의 전쟁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다 기독교 국가인데, 그러면 기도할 때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다들 자기 나라 편을 드는데, 그면 그 기도하는 자세가 과연 어떤 자세이겠냐는 겁니다. 술을 먹고 개판을 치면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정숙하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평소에는 개판을 치더라도, 기도시간만큼은 정숙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그만 자기 공로가 되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그 정도의 정성을 드려서 기도를 했으니, 반드시 자기 나라가 승리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두 나라가 합쳐졌는데,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기도내용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내 나라' 라고 하다가, 그것은 없어지고 그만 '큰 나라'가 되고 말았는데, 과거의 원수에서 이제는 형제가 되니 다른 욕심을 내면서, 이웃의 또 다른 나라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이죠. 지금도 유럽축구를 보면 기도를 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러니 다 일방적이고, 전혀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사귐의 효과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거듭난 사람은 교제를 한다고 했는데, 이 교제를 쉬운 말로 하면 '사귐' 인데 말이죠. 누구와 사귀는 것인데, 나쁜 관계가 아니고,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나누면서 사귄다는 겁니다.
이 사귐이 바로 사람을 살 맛나게 해주는데, 이게 소유와는 반대라는 말이죠. 소유는 자기가 가진 그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야말로 조마조마, 그리고 아등바등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귐은 그런 소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말이죠.
나이가 들면 손자와 손녀들이 생기는데, 그게 없을 때는 어디에 관심이 있는고 하니, 자기 부동산에 관심을 두는데, 즉 "내가 이것을 지켜야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9988 때까지 말이죠. 그런데 손자가 생기고 손녀가 생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야야, 내가 무엇을 해줄까?" 라고 하면서 그 소유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손자와 손녀를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는, 그 비싼 장난감들을 다 사준다는 겁니다. 그 짠돌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말이죠. 물론 너무 비싼 것은 제외시키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갑자기 소유에서 무소유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사귐의 효과인데, 이게 오늘 강의제목이 되지 싶은데 말이죠.
아가서 -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
사람이 혼자 도를 닦으면 힘이 들지만, 그런데 거듭나게 되면, 즉 사귀게 되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이게 이번 겨울수련회에서 할 아가서의 핵심인데, 즉 '사랑' 이라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로서 사귀는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것인데, 그런 조건 하에서 사귄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땡 잡은 것인데, 보험도 이런 보험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와 사귈 때, "너는 창세 전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니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일체 묻지 않고 사랑해주겠다" 라는 것인데, 즉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겠다" 라는 것인데, 이미 시작부터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남편은 없는데, 물론 연애를 할 때는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 여자에게 다가서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한다는 말이죠.
자기도 비싸서 평소에 전혀 먹지 못하던 랍스타도 사주고 하는데, 물론 요즘도 비싸지만 옛날에는 더 비쌌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때는 자기 소유에서 벗어나는데, "저 여자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거기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등장한다는 겁니다(ㅋㅋ). 그것도 천국이라면 천국인데, 물론 일시적이지만 말이죠.
아무튼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시는데, 잠언서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힘들다" 라고 했는데,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공을 쏟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래서 여자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모든 동물들의 암컷의 생리가 다 그러한데 말이죠. 진짜 자기 인생을 책임져줄 수 있는 남자인지를 확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이리 찔러보고 저리 찔러보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여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TV를 보다가도 김태희가 나오면, "김태희가 이뻐? 내가 이뻐?"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겁니다. 나이가 좀 든 세대는 김태희가 아니고 장미희인데, 장미희보다 예쁜 여자는 없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남자는 "현숙 씨가 더 이뻐!"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자는 그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알맹이와 사귀시는 주님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사귈 때, 우리 자신과 사귀지 않고 우리 알맹이와 사귄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제과점에 가면 알밤처럼 생긴 빵이 있는데, 겉에는 초코렛 색이고 안에는 팥으로 만든 앙코가 가득히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겉을 잘못 만지게 되면 안에 있는 앙코가 다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 몸을 무엇으로 보시는고 하니, 알밤 빵의 겉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리고 안에는 앙코가 들어있는데, 즉 죄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겉모습을 가지고 남들과 평생을 살다보니, 자꾸만 감추기에 급급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감추어야만 자기가 잘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감춘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사귈 때 껍질을 벗기고 싶어하는데, 왜냐하면 껍질은 받지 않는데, 그것은 아담이라는 육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데,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서 썩을 것이니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그 껍데기만 치장을 하는데, 그래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 라고 해도 싫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과 사귈 때는 자기 약점을 들키지 않아야 그게 장점이 되어서, 남들에게 주도권을 가질 수 있고 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남들에게 기가 죽어서 살기는 싫어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안으로 움켜잡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알몸에 롱패딩을 !!
더 쉽게 예를 들어보면, 요즘 유행하는 롱패딩을 알몸에 입었다고, 그런 상황을 생각해보다는 말이죠. 이게 아가서에 나오는데, 즉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당신을 마중하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롱패딩만 입고 운전을 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너무 바빠서 말이죠(ㅋㅋ).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하지만 주님은 그런 롱패딩을 보지 않는데, 그런데 우리는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기에" 라고 하는, 거기에만 신경을 쓴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겉모습인데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알아달라고 하지만, 하지만 주님은 과감하게 벗겨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알몸이, 즉 죄가 드러나는데, 하지만 그게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게 중요한데, 자기가 지은 죄가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그 환경, 그 세상에 우리에게 집어 넣어준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의 책임을 자기가 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은 마귀가 몰아세우는 것이라는 말이죠.
자살하는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고 하니, 자기가 당한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여기는데, 그게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가롯유다의 잘못인데, 이 세상 자체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자기만 유난을 떨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깨끗해야해, 순수해야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인간은 돌아보면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순수고 뭐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다들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기에" 라는 것인데, 자기 잘남으로 살아온 과거들이 다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는데, 9988을 하려고 하면 그 사연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겁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
남자들이 이렇게 앉아있으면, 그게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다 참고 있는 것인데, 울고 싶은 것을 말이죠. 조항조가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 라는 노래에 보면,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볼 날이 ♬"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얼마나 남자들이 참는다고 힘들었는지 모르는데, 왜 참습니까? 여자 때문에 참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픔이 누적되어있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술을 마시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아침에 해장국을 먹고 출근을 하는데, 그러니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싸움인데, 그러니 전쟁터에 있다가 퇴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스트레스가 오죽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도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참는다고 하는데, 하지만 왜 참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고 세상이 그렇게 나쁘게 몰아갔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두고 "나 답지 않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주위의 상황들이 자기를 그렇게 몰아세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자살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다 죽는다는 말이죠.
내가 다시 태어나게 해주겠다 !!
주님께서는 우리와 사귀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니가 지은 죄는 니가 홀로 계획을 잡아서 지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정작 우리는 몰라도 주님은 모두 다 아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니가 지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니가 천국에 가고 말고 하는 것도 니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믿는다고 해서 가는 천국이 아닌데,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다시 태어나게 해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우리가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무엇을 해도 여전히 육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으로는, 주님께서 보시고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는 육이네" 라고 하시는데, 육이 영으로 바뀌는 것은 육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는 말이죠.
성령의 오심과, 예수님 생애의 재현 !!
그러니 성령이 오시면 되는데, 그렇다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 생애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으로 오셨는데, 당연한데 하나님이 오셨으니 말이죠. 본인이 말씀을 만들었기에 본인이 지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의인으로 오셨는데, 그런데 어디에 들어가십니까? 세례요한의 물세례에 들어가시는데, 죄인들만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주님이 같이 잠기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잠기고 다시 올라왔는데, 이때부터 예수님은 무엇인고 하니, 의인이면서도 죄인이 당해야하는 모든 수모를 다 당하시게 된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
이것도 역시나 육신의 약함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기도하실 때 뭐라고 하십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고 하시는데, 즉 예수님의 입에서 '마옵시고'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거기에 해당하는 항목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것은 바로 "아버지여, 이것은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고 하는, 즉 "아버지의 뜻과 다른 요소가 내 안에 내장이 되어있습니다" 라는 의미인데,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죄인의 길을 가야한다는 겁니다.
무조건, 무조건 !!
그러니 예수님이 가야하는 길은,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기에" 라고 하는 것은 육신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우리의 마음은 아무리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육신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고 간에, 제 아무리 공부를 해도 결국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육신의 진면목, 육신의 노골적이고도 생생한 본성, 그게 바로 "무조건 나는 살아야한다" 라는 것인데, 그게 마그마처럼 펄펄 끓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는데, 무조건 무조건이라는 말이죠.
우리 몸에서는 썩소만 나올 뿐 !!
어제 오후예배 전에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목사님은 철학이나 인문학을 비평하면서,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왜 몸과 관련을 시킵니까?" 라고 하는데, 나름 진지하게 질문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칸트나 괴테를 언급하면서, "어떤 사람이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가 훌륭한 생각이라고 여기면 되는데, 왜 당시의 경제적 상황과 견주어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메를로 퐁티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모든 생각은 몸에서 나온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몸의 현상학'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생각은 고칠 수가 있지만, 몸은 생각하는 순간에도 벌써 배가 고프다는 말이죠. 그러니 몸이라는 것은, 먼저 몸이 있고 난 다음에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재 115페이지를 보면, "온유와 자비와 화평의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치통이 심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제 아무리 이웃사랑을 하고 싶어도 두통이 심하면 할 수 없다는 말이죠.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온유와 화평이 나올 수가 없는데,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 '썩소'가 나올 뿐이라는 겁니다. 즉 썩은 미소만 나온다는 말이죠(ㅋㅋ).
주여, 저는 안 됩니다 !!
그래서 우리가 보여줄 신비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여, 대단합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인데,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는 겁니다. 즉 "내 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노골적인 고백, 그것이 주님이 우리와 사귀면서, 그 결과로서 뽑아내어지는 것이란 말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는 찬미든 무엇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늘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는 말이죠. 몸의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게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독감에 걸리면 모든 것이 우울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마치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그렇게 굴곡이 심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이죠.
성도의 인생굴곡, 그 이유는?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왜 성도의 인생이 굴곡이 있는고 하니까, 그런 굴곡이 있어주어야 자기가 세상을 평정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모두들 홀로 신이 되려고 하지만, 그러니 그것은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했을 때,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재현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러니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강제로 거기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병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해야하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무탈함이 은혜인 줄 알아야 !!
얼마 전에 병 문안을 간 적이 있는데, 그분이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제가 그분에게 먼저,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니, 그분이 놀랍게도 거기에 동의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참 기뻤는데,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하는 말이, "저에게도 예수님이 직접 찾아와서 그런 소리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만 좋다가 말았는데(ㅋㅋ),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러면 40에 하나를 감한 매를 맞아보시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말이죠. 조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래서 그런 가운데 감사가 나오기 위해서는, 자기가 이렇게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고, 덤으로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비록 병원에 입원은 했지만, 그래도 무탈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그게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을 듣는 것 못지 않은 주님의 능력이라는 것이죠. 주님과의 사귐이 있고, 자기가 낮아지면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는데, 즉 그런 것이 느껴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는데, 그런데 예상한 처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러면 "아하, 나는 지금 용서받고 있구나" 라고, 그런 것이 확 다가온다는 말이죠. 우리가 운전을 할 때, 물론 조심을 하면서 해야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겁니다. 즉 주님이 운전을 하신다는 것이죠.
날마다 삭제되는 우리의 스토리 !!
그것은 인생의 운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주무시지도 않고 인도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와 사귀면서 무엇을 삭제시키는고 하니, 우리의 스토리, 우리의 역사를 삭제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자기 집에 개를 키운다고 하면, 그런데 그 개가 어느 날 "주인님, 저의 역사는 이렇고 이렇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주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개가 무슨 역사가 필요하지?" 라고 하겠죠. 개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데, 사료를 주면 사표를 먹고 말이죠. 무슨 개의 역사가 필요하냐는 겁니다. 물론 애견협회에서는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개의 역사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설치겠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인데, 주제 넘는 짓이란 겁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언제 우리가 알아서 태어났습니까? 그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태어났는데, 주님 앞에서 개 같은 존재라는 말이죠. 지금 제가 여러분을 보고 욕하는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런 멍멍인 주제에, "나는 살고 싶었고, 또한 살아야만 했기에" 라고 하는 것을 왜 붙들고 있느냐는 것이죠. 주님께서 살려주셨는데 말이죠.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달라지게 하시는데, 바꾸어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정된 자에게 주어진 사귐인데, 즉 사랑이라는 말이죠.
창백한 전도서, 예루살렘의 왕 !!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전도서 이야기는 다 창백합니다" 라고 하는데, 마치 깊고 푸른 밤과도 같은데,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무채색으로 완전히 탈색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무엇을 좀 했다고 여겨지면 그만 헛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즉 "너희는 장래 일도 모른다. 부자가 된 것도 헛되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게 여기 교재에 '예루살렘의 왕'이 나오는데, 즉 "예루살렘 왕은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는 개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전도서 어디에 나오는지 보겠는데, 그게 1장 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그리고 한 군데를 더 찾아보겠는데, 다니엘서 5장 5절입니다.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 손가락이 누구의 손가락인고 하니까, 예루살렘 왕의 손가락이라는 겁니다. 지금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강한 나라이고, 이스라엘은 약한 나라다" 라고 여기는데, 그래서 자기들이 완전히 잠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엇을 건드렸는고 하니까, 약한 나라의 신에게 드리던, 즉 여호와께 드리던 제사의 기구들을 술잔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폭탄주를 만들어서 치킨과 같이 마시셨는데, 그런데 그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벨사살 왕이 기겁을 했는데, 즉 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혔다는 겁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는 말이죠.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현실이 있는데 또 현실이 등장하는 것, 즉 '증강현실(AR)' 이라는 겁니다. 왜 스마트폰을 가지고 어떤 지점에 가면 몬스터가 등장하는, 그런 게임도 엄청 유행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일종의 증강현실게임이라는 말이죠. 즉 현실인데, 현실이 하나 더 붙는다는 겁니다.
------------------------------------------ ※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이미지, 주변 배경, 객체 모두를 가상의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 주는 반면, 증강 현실은 추가되는 정보만 가상으로 만들어 보여줍니다. 즉 증강 현실은 현실 세계의 실제 모습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가상 현실과 다르지요. 예를 들면, 네비게이션 시스템에서 실제 도로 장면(Reality)에 주행 정보를 추가하여 보여주면 증강 현실이 되고, 가상의 지도(Virtual)에 주행 정보를 보여주면 가상 현실이 됩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
현빈이 나온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이라고, 이런 것도 일종의 증강현실 드라마라는 겁니다. 혼자서 칼싸움을 하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는 말이죠. 제가 과거에 대전수련회에서 골로새서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이 세상 자체가 중복이다" 라고 했는데, 즉 현실이 중첩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다니엘서 5장인데, 즉 사람만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러면 거기서는 왕이 권력자인데, 그런 권력자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때는 법으로 하는데, 이 법을 다른 말로 하면 언어인데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은 언어체계로 구성되어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법을 위반하면 인간의 목숨도 달아날 지경인데, 사형제도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반복되는 예수님의 생애 !!
그런데 여기 다니엘서에 보면, 바로 그 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잡혀왔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기존의 나라에 종속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와 사귐이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체험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아까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귐인데, 그런데 누구와의 사귐입니까? 예수님과 사귄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귀면서 예수님이 가신 그 생애를 반복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은 이 세상을 둘로 보셨는데, 인간세계에서는 유다나라가 전부인데, 하지만 그 유다나라에 함께 속해 있는 예수님이 볼 때, 이것은 증강현실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현빈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두 개를 다 보게 되는데,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같이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제안을 하는데, "나에게 잘 보이면 풀어주겠다" 라고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런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천군 천사를 통원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서 내가 죽어야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안목이고, 그런 안목을 성도에게 공급하시는 것이 사귐의 핵심적인 내용이란 말이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라는 드라마를 보면, 현빈이 증강현실을 보기 위해서 눈에다가 렌즈를 끼우는데, 그 렌즈가 바로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되면, 중첩된 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한 쪽에 달린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주여, 천국이 임할 때 저를 생각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이게 강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강도는 주님의 나라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과 강도 사이에는 사귐이 형성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사귐은 제가 캐나다 캘거리 강의에서 했는데, 그때 요한일서를 했는데, 그 내용이 사귐이라는 말이죠.
설교조차도 죄임을 !!
그렇게 주님과 강도가 사귈 때, 그런데 다른 편의 강도를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 300명에게 알기 쉬운 설교를 가르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인데, 오직 예정된 자들만 알아듣기 위해서는,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먼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즉 설교조차도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정말로 성령을 받은 목사라고 하면, 주님 앞에서 알몸에 롱패딩을 입은 것인데, 롱패딩을 벗으면 완전히 알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3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그렇게 알몸으로 좀 살자는 말이죠. 위선적이고도 조작적인 인생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신부로서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겁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것인데, 지나간 인생에서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죠.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니 막 살면 되는데,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실패와 같은 것에 쫓기기 아니하고, 즉 "우리 집안은 망하면 안 되는데, 나는 부끄러움을 당하면 안 되는데"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발 그런 감사가 나오지 않는 인생을 더 이상 살지 말자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9988을 하면 되는데, 물론 99는 좀 심한데 말이죠. 자식들 입장도 고려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런 것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주님과 사귐에 있어서 주님의 우리의 행함에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는 것이죠.
이제 정리를 하면 !!
이제 정리를 하면, 주님의 증강현실의 안목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주님께서는 껍데기는 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앙코가 중요한데, 그것은 이미 죽었다는 말이죠.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하는데, 분명히 그렇지요?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세상은 두 개의 현실이라고 했는데, 과거에 우리나라에는 평균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았는데, 특히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이가 죽으면 어른이 그것을 보고 "명줄이 다 되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불교용어인데 말이죠. 그리고 우리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는 것이죠.
명줄이 다 되었다 !!
그런데 여기 로마서 6장 23절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이 둘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일까요? 전자의 경우에는 "참 애석하다. 살려고 해도 운명이 그러한데 어떻게 하겠노?"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까? 사는 게 당연하고 죽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하는, 그런 인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주님과의 사귐이 아닌데, 그런데 로마서 6장 23절에서는 죽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서로 반대의 의미인데, 그게 이게 증강현실이라는 겁니다. 즉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다" 라고, 이게 '인간극장'에 나온 대사인데 말이죠.
이렇게 모든 것이 반대인데,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익숙해져있는고 하니, 전자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즉 "그래, 그 아이가 5살에 죽었다고? 명줄이 다했는데 어떻게 하겠노?" 라고 말이죠. 줄이 있는데, 그게 수명이 다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듣고 사용하는 용어나 문장이 어디서 온 겁니까? 기존의 이 세상에 날아다니던 것들인데, 그래서 우리의 죄가 우리의 죄가 아닌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 살았다고 하는 증거를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미 심판의 세계인데, 즉 지옥이라는 겁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심판을 경유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니 예수님마저도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한다는 말이죠. 하늘에서 낚시대로 우리를 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세계관을 다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따라오지 마라. 니가 있을 처소가 없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두 개의 현실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보고 "지금은 너의 자리가 없다. 내가 가서 다시 자리를 마련해서, 그때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오겠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러니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는 의미인데, 그게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데, 18절과 9절입니다.
(엡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
여기 18절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라고 하는데, 그리고 19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지금도 주님께서 쉬지 않고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들의 눈에만 보이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목회를 하면 안 되는데, 교회는 쓰레기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창세 전에 예정된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그들만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겨우 3명만 남는다고 해도, 그것도 역시 기적이라는 겁니다. 요나는 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3명도 없으면 그만 두면 되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들 300명의 목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평생 배운 것은 목사짓밖에 없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고 싶었고 살아야만 했기에" 라고 하는, 그것 때문에 목사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아무리 근사한 것으로 포장을 해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목사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도, 밑에 있는 육신이라는 것은 몸의 연약함인데, 즉 "나는 살고 싶었고, 나는 살아야만 했다" 라고 겁니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여자들이 우는데, 물론 늦게 죽어도 울지만, 엄앵란은 신성일이 그렇게 평생을 바람을 피우고 속을 썩였어도 운다는 말이죠. 그렇게 울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증강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여보, 기다려. 내가 곧 갈게" 라고 해야하는데, 즉 먼저 제대했다는 말이죠.
악마는 죽음을 가지고 우리를 평생동안 협박하고 공갈을 치면서 괴롭혀왔는데, 그런데 새로운 렌즈를 끼게 되면, 즉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즉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면,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고, 그리고 그게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고 강력한 에너지로 우리는 당겨준다는 겁니다. 그게 사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복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큰 복을 받고도 군지렁거리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햇빛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아플 때는 아프게 하고 나을 때는 낫게 하시고, 이게 전도서 이야기인데 말이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면 얻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알밤 빵의 겉으로서 !!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깔끔한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가신 길을, 그게 굴곡의 길인데, 그 길을 우리로 하여금 걸어가게 하심으로서, 우리는 알밤 빵의 겉으로서, 물론 우리가 지은 죄는 아니지만 어쩔 수없이 들어오게 된 죄를, 그것을 우리가 한아름 품고 있는 그야말로 껍데기와 같은 인생인데, 그것을 주님이 모를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니가 육신이 약하다" 라고 하시는데, 몰라주어도 되는데 알아주니 얼마나 고마우냐는 겁니다. 즉 "니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서, 너를 나의 피로서 구원해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한꺼번에 다 알게 하옵소서. 작은 일에 분노하지 말게 하시고, 살아온 모든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또한 악마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모든 일에 감사와 고마움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2,10 새벽 01시에 마침.
막 살게 하옵소서 !!
-------------------------------------------- 남자라는 이유로 (조항조)
누구나 웃으며 세상을 살면서도 말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서
저 마다 처음에는 사랑을 하면서도 스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 저런 과거가 있겠지만 내 앞에서 미소를 짓내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서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 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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