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914b야4장1절(싸움)-이 근호
첫 번째 시간에 중요한 것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말씀을 해석을 할 때는 지킬 생각하지 마시고 현 지금 내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말씀이 있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는 거예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저는 싸운 적 없습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건 잘못된 게 지금 안 싸우는 상황 속이기 때문에 안 싸운 것이지 새로운 상황이 들이닥치면 필히 죽기 살기로 싸움하게 되어있어요.
여기2절에 봅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되어 있잖아요. 여기 살인이라는 말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는 살인하고는 전혀 동떨어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런데 살인하고 싶은 사람이 살인 취미가 되어서 살인하는 건 아니거든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말이죠.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니가 살인하더라도 니가 유별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겁니다. 평생 나는 살인 안하고 살고 싶다는 것은 니 희망사항이지만 내가 살인하게 되면 살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바로 존재자에 대한 존재 없는 존재자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이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런 겁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건물에 있다 하면 줄 서서 난리 나요. 줄 서서 난리 나가지고 얼굴 보려고 전부 다 스마트폰해가지고 완전히 방탄소년단 온 것처럼 찍을 거예요. 그러면 자릿세 받을 거고 그러면 돈 있는 사람은 볼 거고 돈 없는 사람은 받지도 못하고 그럴 겁니다.
주님께서 임재 할 때 어디에 임재 하느냐 하면, 어디에 임재할지 궁금하지요? 주님이 임재 하는 자리는요, 말씀이 있는 곳에 주님이 오셔요. 말씀부터 먼저 던지고 그 던진 말씀에 주께서 오시는 겁니다. 어릴 때 했던 애들 초등학교 때 했던 놀이 있지요. 앞에 1번, 2번 그어놓고 3번, 4번, 5번, 제일 밑에 7번 그어놓고 돌 던져놓고 디디고 가잖아요. 먼저 돌을 던져놓고 그 2번 던진 돌에다가 밟고 오잖아요. 말씀을 던져놓고 오시는 거예요.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는 원칙을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실 때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현장성에 대한 이 말씀이 그대로 살아난다는 현장성을 원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게 되어있어요. 주님이 말씀으로 타일을 깔 때 그 타일에 나타나는 모자이크처럼 한 무늬가 우리의 성도의 모습으로 무늬가 비쳐지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주님 앞에서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나는 몰라요. 말씀으로 이렇게 구조가 되어있는 말씀이 엮여져서 나오는 그 모양새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두 가지일까요? 세 가지일까요? 한가지일까요? 성도는 한 가지이지요. 다 한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전부 다 공통의 재료가 거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도는 어떤 모습인가, 말씀대로 생겨먹은 사람들 이게 성도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말씀 완성에 작품. 그 말씀 완성을 3자로 하면, 다 이루었다. 십자가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말씀이 이렇게 구성되게 되면 옛날에 있던 나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거기에서 흔적이 지워지겠지요.
그 지워지는 것이 고린도후서12장1절,2절에 나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 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 앞에 뭐를 내놓느냐 하면, 나는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모르거니와 되어있지요.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분석하지 마세요. 몰라도 돼요. 주님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내가 굳이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내가 안들 주님이 친히 만든 작품에 내가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무슨 기여가 되겠어요? 착한 일 하나 한다고 해서 내가 더 훌륭하게 되어지는 거 아니거든요. 행함의 가치의 누락입니다. 그냥 믿는 것이지 행함의 가치가 누락되는 거예요. 내 행함은 어떤 것도 거기에 현재 내 목숨에 현재 이 존재에 있어서의 어떤 보탬도 거기에 줄 수 없습니다.
무익하나마 부득불 뭐만 하면 된다? 나는 자랑하노라.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삼층천에 가고 난 뒤에 자기가 자랑할 게 있는데 뭐냐 하면 뭘 자랑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나를 셋째 하늘로 오게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셋째 하늘로. 내가 갔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사도바울이 셋째하늘만 자랑하겠어요? 주께서 사도바울이 고난 받는 것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죠. 어딜 가나 주님은 어디 계신가, 말씀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그곳에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 있느냐, 성도는 바로 성도 안에 주님이 계신 거죠. 성도 자체가 주님의 작품이니까.
조각가가 자기 조각품을 만들어 놓고 내몰라라 하지 않지요. 아~ 다음에 작품 구상을 저 모습을 이렇게 바꿔볼까, 매일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나를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주님이 나를 더 생각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나를 더 사랑하는 겁니다.
자기애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자기 연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쌍히 여기시고 더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만들어준 말씀이 귀해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되게 했던 모든 말씀이 다 이루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귀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까 첫째시간에 했던 거 이야기 해봅시다. 지배의 반대말을 제가 은혜라 했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지배의 반대말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에요. 사랑. 노래가 이런 노래가 있어요. 그 사람 나에게만 보여요. 하는 가사가 있어요. 이은미가 불렀던 <애인 있어요.> 노래가 있어요. 그 사람 나만 알고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그 사람 내 눈에만 보여요. 존재자 없는 존재지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에요. 지금 이은미란 가수가 그 사람 내 눈에만 보인다는 말은 남자한테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가? 자기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나 된 거죠. 이걸 살짝이 그 사람에다가 예수님을 대비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대비해 보면, 우리가 남한테 전도하고 싶고 뭔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주님께서 허락한 사람에게만 전해야 돼요. 개 같은 인간한테는 복음을 전하면 안돼요.
그러면 목사님! 개 같은 인간과 아닌 인간과 어떻게 구분합니까? 다 개입니다. 고민할 필요 없어요. 다 개라고 보세요. 명절날 개들 다 모입니다. 일가친척 왕왕 짖거든요. 문재인 이야기하고 다 개인데, 혹시 그 중에 개아닌 사람이 있거든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을 받은 거예요. 개는 개에요. 원래 인간은 처음부터 날 때부터 귀신 들려서 전부 다 개 같은 존재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옛날에도 우리가 성령오기 전에도 우리가 동일한 개였습니다. 최 개, 김 개, 박 개, 전부 다 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랑을, 성령의 사랑을 요한일서에 보면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 하거든요. 사랑의 영이 오니까 성령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사랑을 아니까 다른 말로 성령을 받았으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요, 라고 되어있어요.
제가 설교를 여러 번 했는데 전에 이걸 강조한 이유가 있어요. 자꾸 앞에 것을 빼고 이야기해서 내가 답답해서 하는 겁니다. 여기 요한일서4장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이미 존재한다는 거예요. 사랑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니까요. 사랑은 여기 이미 있어요. 있는데, 못 알아봐서 문제지요. 사랑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이걸 왜 자꾸 빼는 것 때문에 제가 불만이 많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없던 존재란 말이죠. 사랑도 아니면서 예수님 믿겠다. 그건 수작부리는 거예요. 그래도 사랑으로 믿었잖아요. 아니요, 사랑으로 믿었으면 주객이 바뀌어져야 되지요. 말을 똑바로 해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그것이 믿음이지 “나는 예수 믿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러면 앞뒤가 둘이 서로 안 맞는 것을 강제로 엮인 게 돼요. 정말 믿음이 있으면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스스럼없이 나와야 되지요.
그럼 내가 사랑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사랑했다면 동시에 뭐냐, 요한일서4장18절에 보면, 사랑 안에는 뭐가 없느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뭐를 내쫓는가, 두려움을 내쫓는 거예요. 내쫓는다는 말은 우리에서 두려움이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야기 논리가 어렵지요. 제가 왜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자꾸 공부하고 돌아서면 자기 관찰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탐색하고 자기 관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두려움이 나온다는 말은 쫓겨나온 거예요.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그럼 내어 쫓겨나온다는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만한 가능성과 요소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마귀를 보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뭘 모릅니까? 우리가 깜짝 놀라고 벌벌 떠는 일들 유발해요. 유발하면서 이 원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내가 성도라 하면서 왜 벌벌 떨지. 보니까 뭐를 잊어버렸어요? 내 몸이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물이라는 것을 또 잊어버린 거예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게 필요한 말씀으로 내가 소유하려는 옛날 버릇이 또 튀어나온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자기 잘못을 알지요. ‘내가 잘못이구나!’ 아는 순간 우리에게는 뭐냐 하면 전에 예상 못한 고마움과 감사와 자유가 확 밀려옵니다.
그 자유라는 게 뭐냐 하면 뭘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젠 누구 시선이나 어떤 것도 상관없이 막살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럴만한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새삼 아는 겁니다. 제발 바라기는 10초 이상 가기를 바랍니다.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이거야.” 옛날에 감사하려고 해도 억지로 감사가 됩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라 해서 기뻐해도 안 되고. 영혼도 도대체 내 쪽에서 실시해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 말씀대로 믿고 싶어도 잡생각이 들어서 믿지도 않고. 두려워하지 말라 해도 두려움이 생기고.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가지고 어느 날 한 순간에 탁오니까 ‘내가 도대체 무엇에 지금 벌벌 떨고 있는 거야. 내가 미쳤어. 내가 내 자신을 또 착각했구나!’ 라는 걸 아는 그 순간, 어디를 고치면 내가 괜찮습니까. 고칠 생각을 했던 이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라는 거예요. 내가 고쳐서 달라지겠다는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나는 나대로 살면 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러한 나를 사랑하신 분이 있거든요. 내 눈에는 그 사람만 보여요. 그러면 그 사람만 상대하면 돼요. 사람은 인간하고 상대할 필요 없어요. 자식이든 가족이든 상대할 필요 없어요. 나는 그 사람만 상대하면 돼요. 집에 가거든 애인 있어요. 노래 한 번 들어보세요.
<애인 있어요.>
아직도 넌 혼잔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건가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나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알겠죠 나 혼자 아닌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자,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10초 유지된다고 치고 요 순간에 놓치면 안돼요. 빨리해야 돼. 빨리하고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나 봅시다.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야고보서4장에 보게 되면 너희 안에 정욕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느긋한 마음으로 수술대에 누워가지고 경상도 말로 ‘째소! 마음껏 째서 온갖 더러운 걸 다 벗겨내도 저는 꼭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칼질 하시는 주님 앞에 몸을 편안하게 맡기면 돼요.
째보니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정욕이 들었고 3절에 나오지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지금 4번째 합니다. 성경해석 어떻게 한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래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지적질을 하시는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돼요.
오늘 끝날 때까지 몇 번 더할지 모르겠지만, 몇 번 더 해야 돼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할 때에 우리는 바로 이 사람이 저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라고 하면 돼요. 뭘 해도 괜찮으니까. 아니, 정욕이 없어요? 있잖아요. 욕심이 없어요? 있잖아요.
남들은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타인인데, 그게 아니고 주님은 제대로 된 타인이에요. 내가 오인한 나를 제대로 칼질하셔가지고 쫙 절개하셔가지고 이거 들어있다고 완전히 해부학시간이에요. “이거, 이거 정욕 들었다. 그런데 이 정욕이 어떻게 잘못된 줄 모르지? 알려줄까? 이 정욕으로 기도하니까 니가 기도 응답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정욕으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하면 4절에 나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세상과 벗된 그것을 간음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 의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구약에서 나왔어요. 조금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간음. 간음이란 요소는 십계명에 나오지요. 십계명이 위에서 보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개지요. 열 개가 하나로 묶여있어요. 어디에 묶여 있느냐 하면 제1계명에 묶여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러면 여기서 탐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죽 이것이 하지 마라, 마라 하면서 하게 되면, 아까 성경 말씀에 다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뭐 하지 마라라는 말은 그럴 수 있는 잠재력과 능력을 상황만 맞게 되면 바로 튀어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일이 많았고요. 특히 사사기에 보면 이웃나라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탐심 때문에 그래요. 그 탐심을 간음이라 합니다. 이웃나라 종교의 간음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디를 묶느냐,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그러한 가능성, 그러한 잠재성을 갖고 있는 것이 현재 너희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 할 때, 다른 신 안 섬기고 나를 섬기면 되는 게 아니고 다른 신을 섬긴 나라는 것을 먼저 구축해야 비로소 그 다음에 여호와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여기서 연결이 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에 전부 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들이 있는데 다른 신이 뭐냐 하면 십계명을 옹호하는 쪽을, “사람이 살다보면 그런 수가 있지.” 하는 전부가 우리 속에 있는 십계명에 위반되는 것을 오히려 격려해주는 그러한 신들이에요. 그런 신들이 죽 나오거든요.
그 대표적인 것이 다른 신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당입니다. 무당의 특징은 이론적 무당 말고 굿하는 무당, 신기 있는 무당들의 특징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변신이 가능해요. 어린애는 어린애에게, 노인은 노인에게, 변신이 가능하다는 말은 전부 다 동일한 귀신한테 다 묶여있다는 말이죠. 같은 마귀한테 다 묶여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귀신이 이 무당이 굿을 할 때, 목적이 뭡니까? 어떤 상태가 되기를 기대해서 굿하는 무당을 부른 겁니까? 무엇을 기대하는 거예요? 옛날에 병들기 전에 집안의 꼴이 괜찮게 되었을 때 그걸 뭐로 보느냐, 자기의 정상적인 자기의 본 모습이라고 해주겠지요. 무당은 그걸 맞춰서 그 상태 되기를 해주는 겁니다.
집안에 만약에 애가 병이 났다. 병원에가 봐도 못 낫는다. 그러면 굿을 하잖아요. 그러면 그 애가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굿을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아프기 전의 그 상태지요. 그 상태만 되면 그 무당은 돈 버는 거예요. 무당이 돌려주는 건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인간 본래의 죄악 된 모습이, 자기사랑이니까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라는 고 자리까지 다시 딱 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애가 병들었는데 그것은 안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병 들은 게 왜 안 괜찮지요? 왜 어떤 근거에 의해서 병 든 것은 나쁘다고 보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남들이 다 안 아프니까. 어떤 만약에 포로 잡혔는데 남들이 전부 다 같이 건빵 2개가지고 아침을 때운다면 건빵2개 주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지요.
그런데 같은 포로인데 건빵2개주는데 지는 한 개 주면 어떻습니까?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원숭이하고 똑같아요. 아침에 4개주고 저녁에 3개 주다가 아침에 3개주고 저녁에 4개 주니까 막 화내는 거예요. 다시 아침에 4개주고 저녁에 3개 주니까 좋아하는 거예요. 합해봐야 7개인데. 똑같이 7개잖아요. 똑같은데 서로 비교하는 거예요.
결국은 무당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살아가는 이것 말고 다른 어떤 현실은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땅의 세계가 전부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당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고 오늘날 교회에서도 교회 참석한 모든 사고방식이 죽여주옵소서. 하는 게 아니고 이 하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 옛날처럼 원상복귀해달라고 교회 오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예요.
그냥 원상복귀 된 사람은 그냥 시간 때우러 왔다 하고 갑자기 김 집사가 그만 같이 무심코 다니다가 갑자기 통곡하고 쭈여! 하는 것 보니까 무슨 일이 있어. 원상복귀해달라고. 갑자기 봉투해가지고 감사헌금하고 뭔가 옛날에 무당 찾던 그 마음,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 헌금 행위 모든 행위가 무당 짓이에요. 마귀가 시킨 짓이라니까요. 귀신은 아주 가까운 친숙한데 있어요. 그 존재 없는 존재자는 아주 가까운데 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친한 친구처럼. 대화도 잘 되고.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변화들이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파생된 결과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러면 다른 신이 있는 인간은 인간들이 아무리 해봐야 다른 신의 굴레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지요. 그러면 이쪽에서 다른 신에 속했던 쪽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건너뛸 수 있는 능력은 이쪽의 신이 용납을, 허락을 안 하지요. 백날 노력해도 그건 안 됩니다. 그럴 때마다 여기 누가 개입하느냐, 선지자가 개입해요.
선지자의 희생이 개입합니다. 이게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개입해요. 이걸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육과 영 사이에는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들어가는 겁니다. 이 공식이지요. 행해서 자기 욕심을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심 버린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일단 선악과 따먹고 창세기3장에서 일단 신이에요.
혹시 여러분, 부산강의에서 하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여자는 뭐냐 거기서 여자는 신이라 했거든요. 남자는 자기가 신이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의 특징이라면, 여자의 특징은 신이면서도 아닌척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눈물 흘리는 신이라 했거든요. 눈물 흘리는 신.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고 누구나 신이에요. 그러나 여자는 소극적 신이에요. 누구한테 기대가지고 빼먹을 생각하지요. 남자는 허세덩어리 신. 그러니 남자가 등신이지요. 내놓을 거 다 내놓고 다 빼앗겨놓고 그래도 나는 신이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술 먹으면서. 술 먹는 이유가 신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먹어요. 허세하기 위해서. 허풍과 허세.
그런데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오늘 본문대로 이야기하면 성경에 보면 마귀를 세상 신이라고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친숙한 신은 세상에서 원하는 하나님은 마귀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있는 인간과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신은 악마에요. 그래서 모든 교인들이 믿는 신은 뭐냐, 악마를 믿고 있어요. 악마가 아닌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에게 무시당한 그분이, 무시당한 메시아만이 하나님이에요.
앞에 무시당함. 성경대로 하면 핍박받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이 상상한 것은 인간이 상상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서 통하느냐 하면 악마와 통해요. 마귀와 통합니다. 그래서 모든 목사들이 기도나 설교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나님부터 출발해요. “여러분이 하나님 다 알잖아요.”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 알지요. 그 마귀로부터 만든 인간이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있는 심성이니까 하나님을 모를 리가 있겠어요. 중도 넘어지면 아이구 하나님! 하고 있는데. 중들도. 스님들도. 아이고~ 하나님! 하는데. 하나님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지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왜 죽였습니까? 사울이란 사람이 그 예수 믿는 사람을 왜 잡아 죽였습니까? 누구한테 충성하려하는 거예요? 이름이 뭡니까? 여호와에요.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 거예요.
성령이 우리한테 왔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나온 모든 것이 의는 없나니 죄밖에 없다는 로마서3장8절의 말씀, 그게 말씀이지요.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아까 처음에 말씀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모든 것은 말씀에 위배돼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 내세우면 돼요. 뭐든지 이 주스 먹는 것도 말씀대로 먹는 거예요.
자, 주스 먹는 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는가 논문 써봐라. 논문 간단하지요. 이걸 먹고 싶을 때 이미 나는 이걸 먹고 마시고 싶다는 나의 죄가 나오지요. 그 죄와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관련시키면 딩동댕~~정답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이미 피 흘림을 전제로 하고 있잖아요. 피 흘림을.
언젠가 간증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정말 간증이 옳다면 그 간증대로 당신 때문에 세상 천지에 달과 해와 별이 변해야 된다. 심지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져야 된다. 그렇다면 간증해봐라. 간증하는 순간 뭔가 해가 달라지고 해가 중천에 떠있나? 없지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증을 안 받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도 안 받는 거예요.
세상이 달라지고 천지가 달라지는 것은 누구 때문에 그런가 하면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계약이에요. 창세전에 계약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움직이면 새로운 현실 판이 만들어지기로 그렇게 약조가 되어있어요.
우리가 만든 현실 이것은 현실 하지 말고 세상이라 하지요. 우리가 택한 세상은 우리 정당화 때문에 있는 세상이고, 원래 진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만든 피조세계입니다. 방금 한 이야기는 그것은 지적으로 여러분들이 숱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거기에 새로운 느낌이 없는데. 그럼 그 느낌은 누가 막았어요? 내가 안다는 것이 실재하는 느낌을 내가 막아났어요.
주께서 움직이는데 내가 턱하니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내 안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앞에 깡패도 아닌 게 턱 틀어막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오라. 나를 위하여. 이런 식으로. 나 기도한다. 응답되게 하옵소서. 신도 아닌 게 꼬마 신이 신의 흉내 낸다고. 그래서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다른 말로 하면 니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해도 하나님처럼 못 되는 이유가 니 안에 절개해보니까 뭐가 있습니까? 정욕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묻습니다. 정욕이 셉니까? 내가 셉니까? 정욕이 세지요.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 셉니까? 내가 힘이 세요? 욕심이 힘이 세지요. 그러면 우리는 욕심을 내가 다룰 수 있어요? 없어요? 다루지 못하는 겁니다. 다루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강남에서 잘사는 여자들의 욕심이라는 것은 아무리 낮추고 낮추어도 그 하한선이 어지간한 촌의 할머니의 상한선을 뛰어넘습니다. 잘사는 동네의 하한을 아무리 낮춰도 나 이정도 낮추는 것도 나한테는 힘든 거다. 낮춰봐야 못사는 사람들은 포시럽다는 말을 알아요? 너무 여유롭다. 그런 뜻이지요. 너무 여유롭게 산다. 이런 뜻이거든요.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그 이미 가진 자 앞에서는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자식이 세 명인데 둘이 군에서 죽었다. 한 명 남았으니까 감사한다. 이 말을 아예 군에 안 보내는 집안한테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각자 신이기 때문에. 모두가 신이거든요. 신은 누구하고 비교대상이 안 됩니다. 절대적이어야 돼요. 최고가 되어야 돼요. 신은 소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싸워요. 나는 누구의 소유가 안 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싸웁니다. 그게 부부싸움이라 하는데.
부부싸움은 옳고 그름이 아니고 내가 니 소유가 되지 않겠다는 악랄한 버팀이지요. 악랄한 버팀이에요. 쓸데없는 반항기고. 싸우다 보면 이유가 없어요. 자존심 싸움밖에 안돼요.
이 세상 자체가 오늘 본문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그 다음에 뭡니까? 세상과 벗된 것이 뭐다? 하나님의 원수지요. 여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리 살고 있다는 거예요.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그리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 삶에서 우리가 고친다? 못 고친다? 고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해도 현찰 몇 억 들어오면요, 최고지요. 그런 남편 최고 남편입니다. 이건 못 고칩니다. 왜냐하면 우린 나를 몰라요. 나라는 것은 내 몸에서 나라는 것은 껍데기 부분이 나고 알맹이는 욕심이에요. 정욕이 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안 되잖아요. 이게 세상 사람이 똑같아요. 그런데 이 성에 누가 들어왔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십자가가 들어온 거예요.
십자가 들어왔으니까 비로소 내가 몰랐던 나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아! 여기 오늘 좋은 거 주셨는데. 초코렛으로 보이지요. 깨물어 보면 안에 하얀 크림이 들어있어요. 바깥에서 보면 모르지요. 신자, 불신자 똑같아요. 안에 들어가 보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으면 비로소 자기가 바깥에 나는 웃으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거 고백하는데 하나님의 천사까지 동원됩니다. 그 고백하는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에 맞춤된 인간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에 합당한 말씀이 되려면 정말 그런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인간이 나타나야 예수님 말씀에 일관성이 있어요. 그렇다면 주의 말씀도 말씀이고 도저히 성도될 수 없는 나도 그 말씀에 옳소이다. 하는 것도 주님의 솜씨이고 능력이지, 우리 솜씨 능력 아닙니다.
아까 했던 거 마태복음10장 다시 한 번 볼게요. 29절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말씀 보면 우리는 이 말씀 보고 약간 겁을 집어먹어요. 뭐냐 하면 요거 참새한테나 적용시키고 나한테는 좀 적용 안 시켰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허락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그 내용이잖아요.
이게 남의 이야기는 아주 편하게 볼 수 있는데 막상 당사자 나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라면 내가 오늘 죽어야 될 한 마리의 참새라면 아우! 안 돼! 지금 애가 고3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죽으면 공부 안할 거고 낙심해서 재수하면 안 되잖아요. 자식 봐서라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아직 우리 딸이 시집을 안 갔어. 결혼식 때 봐야 돼. 여러 가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내 보기에 좋은 세상 되는 그 희망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도 우리는 튕겨버리는 겁니다. 튕겨버리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또다시 주님 말씀 앞에 뭐로 등장합니까? 의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죄인과 주님 사이에 무슨 다리가 연결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의. 누구 공로? 주님의 공로와 솜씨와 주님의 사랑만 빛나게 되는 겁니다. ‘아~ 이런 저질도 사랑이 되는구나! 천국 가는구나!’ 라고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나오지요. 그 잘난 바리새인 앞에서 주께서 뽑아낸 모델이 청지기가 불의한 청지기에요. 횡령해먹은 사람입니다. 횡령했다고 자살 같은 거 하지마세요. 검찰청 왔다 갔다 했다고 자살하지 마세요. 천국 갈 사람인데 말씀으로 그렇게 횡령하게 하신 거예요. 돈을 보고 탐이 나도록 한 거예요. 사실은 나도 탐나고 너도 탐나는데 하필이면 고 스케줄이 내가 탐나는 스케줄 돼서 내가 탐을 내고 돈을 횡령한 겁니다.
그런데 그 횡령한 이유가 뭐냐 살고 싶어서. 퇴직하고 난 뒤에 돈 빼내가지고 살고 싶어서 그런 짓한 거예요. 절실하게 절절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이 불의한 청지기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얼마나 하나님 말씀이 과격해요. 급진적이죠. 과격하고. 니가 내 말을 이해하려면 이해해봐. 못 따라와. 니가 니한테 니 자신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고 니 자신을 곱게 보는 한 니는 내 이 말씀은 이해 못할 것이다. 단절을 딱 만들어 놓아 버리지요. 자기 사랑을 못 지키게 하려고.
그래 놓고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건너온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충분하게 우리가 이 세상에 뭐가 되느냐 하면 숙성되어야 해요. 죄로.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 자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제가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열 개진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두 개진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똑같지요. 세상자체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한 태어날 때부터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생일축합니다! 하든 태어날 때부터 돌 사진 찍을 때부터 원수에요. 돌 사진 앞에서 실 놓고 마이크 놓고 이렇게 하잖아요. 돈 놓고. 원수가 원수를 교육하듯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끼리는 안 통합니다. 아무도 그걸 규정할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진짜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피를 입은 당사자가 “니가 나를 핍박했잖아.” 라고 분명히 할 수 있는 그 분이 우리에게 원수가 됩니다.
다시 합니다. 육과 영 사이에 뭐가 들어갑니까? 한 번 해봅시다. 육과 영 사이에, 육에서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아무리해도 영이 될 수 없어요. 그 사이에 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들어가요. 십자가 죽음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요거 여러분들이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면,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을 때 혼자 죽었습니까? 택한 백성 죽음도 같이 껴안고 죽은 거예요. 같이 갔지요. 그러면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었다? 나의 죽음이 들어있지요. 그럼 말씀 해석에서 뭐냐, 나는 왜 죽을까, 그걸 끄집어내는 해석이 OK. 그리 해석하면 됩니다. 논리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씀으로 내가 죽어 마땅함을 아는 것이 제대로 된 성경 말씀이에요.
자, 어느 교회 목사가 설교합니다. 설교내용이 옳으냐, 그르냐 보려면, 여러분! 이 말씀이 다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 그만 살고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하고 설교 끝내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설교하신 사람이에요. 그 교회, 장로교회면 쫓아낼 거예요. 난리날 거예요. 우리는 이만큼 살아도 많이 살은 거예요.
경상도 말 이렇게 있지요. 많이 묵었다. 그만해라. 하는 말이 있지요. <친구>영화에 보면 장 동건이 그런 말하지요. “니가 가라. 하와이. 마니 묵었다. 아이가. 고마 해라.” 하는 것처럼 우리 이만큼 살아도 많이 살은 거예요. 오래 사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타향에서 오래 돌아다니는 것은 노숙자만 하는 짓이지 빨리 저 위로 가야지요.
여러분, 귀찮겠지만 골로새서 찾아봅시다. 골로새서3장1절부터 3절까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지키라는 이야기에요? 이미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입니까? 됐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우리를 다시 살렸다는 말은 지금 상태가 죽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죽고 난 뒤에 다시 삶을 받고 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목을 오늘 또 배회라고 바꾸고 싶다. 오늘 왜 이러나 몰라. 우리는 이 땅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애 한 번 키워볼까. 어슬렁거리고.
(질문: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땅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은 우리보고 말씀대로 못 지켜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거예요. 그 때 말씀이 계시는 곳에 누가 계시다? 주님이 계셔서 우리가 이미 살았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라 해가지고 늘 이렇게 유지되는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다루고 있다는 말은 뭐냐, 필요할 때마다 그 말씀과 더불어서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알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이 해야 될 일이고 우리가 저녁에 밥 짓는 것은 이건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래서 밥 안 짓고 저거 한다고 또 거룩한 건 아니고. 모든 성도는 동일해요. 말씀이 때를 따라서 밥을 짓게 했기 때문에 짓는 겁니다. 그냥.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밥 지으면서도 감사하지요. 밥되고 항상 기도하는 게 있어요. 제 아내가 그렇게 하거든요. 왜냐하면 제 아내 엄마가 우리 장모님이 사모님이니까 옛날 사모님이 이제는 95세인데 그 분이 옛날에 교회 다닐 때는 그 때는 목사가 밥을 주신 것에 감사하세요. 했다 말이지요.
감사하기 때문에 밥솥의 밥을 보면서 늘 감사하면서 인간인 이상 뭘 느껴요. 이렇게 감사하니까 내 자식 잘되게 해 달라 또 그렇게 했겠지요. 하여튼 간에 시킨 대로 한다고 감사하듯이 그걸 그대로 제 아내가 본보고 밥이 될 때마다 감사히 밥을 해요. 그런데 그걸 누가 본보냐 하면 내가 본본다니까요. 아내가 일 나가고 난 뒤에는 정히 내가 밥을 할 때는 내가 또 감사기도를 하게 돼요. 나쁜 건 아니잖아요. 또 이거 전파되면 안 되는데. 그 생각할 때마다 우리 장모님의 낮아진 마음이, 요새 밥 굶는 사람 없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기도를 할 때마다 밥 굶을 수도 있다는 것. 밥 굶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새록 새록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지요. 그렇다고 밥 먹고 더 세상에 살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주께서 살게 하셨다는 것. 이 밥을 통해서 살게 하셨다는 거예요. 맛있게 먹자. 그러나 더는 욕심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먹여줄 때만 먹이는 거예요. 참새를 허락한 것처럼.
자, 5절에 봅시다.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에요. 원수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 우리가 나쁜 게 아니고 나쁜 짓을 해서 나쁜 게 아니고 세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원수가 된 겁니다. 5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사모라는 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랑한다는 말이거든요. 사랑하는 쪽이 따로 있고 우리는 무슨 대상이다? 그 사랑의 대상이에요. 제목 또 바뀌었다. 사랑의 대상.
우리는 내가 자꾸 사랑한다고 하지 마세요. 어쩜 그건 마귀가 시킨 짓이에요. 우리는 사랑 받고 있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닙니다. 할 재주가 없어요. 사랑하지도 못하는 자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 할 때는 모르지만, 어떤 결과치를 봤을 때는 이걸 날마다 다시 한 번 자꾸 반복이 돼서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걸.
갑자기 무슨 노래가 생각나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내가 귀한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게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나보다 더 귀하지요. 귀한 사랑을 받아 챙기는 하나의 그릇이지요. 그걸 자비의 그릇이라고 로마서9장에 보면. 사랑의 그릇이 있고, 진노의 그릇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요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다음에 오면 사랑이란 사모하지요. 그럼 성령께서 어떤 특정인간을 사모한다는 말은 다른 인간은 사모한다? 사모하지 않는다? 사모하지 않는다. 이 사람 빼놓고는 나머지는 사랑합니까? 사랑 안합니까? 사랑 안하지요. 이걸 미움이라 하자는 말이지요. 사랑 안하면 미움이에요. 중간지대가 없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데 미운 자식이 교회 다닌다고 끼어들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말씀이 용납을 안 합니다. 강하게 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 받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듣는 그것도 주께서 그렇게 작용하게 하신 거예요. 마귀를 통해서. 사랑 못 받게 하시는 거예요. 미움 받게 하시는 겁니다. 에서 같은 경우에.
거짓말하는 게 나빠요? 잘한 거예요? 거짓말이 나쁘지요. 그런데 거짓말 나쁜 짓한 사람은 천국가고 거짓말 하지 않은 에서는 형은 지옥가지요. 왜,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이 짝이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 짝이 뭐냐, 그 짝 역할 하는 것이 바로 에서의 역할, 미움 받는 지옥 갈 사람의 역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8층 내려 가가지고 세상 거리의 사람들 보세요. 특히 담배피우고 가는 사람들 보세요. 주님의 기적입니다. 지 힘으로 담배 못 끊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담배 피웠다고 지옥 가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대부분 사람들 복음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에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이 세상에 악마가 작용하고 주님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싸움과 그 결판은 악마와 주님과의 싸움이고 우리는 그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미움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것은 어떤 누구도 먼저 주님을 사랑한 적 없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주어진 줄 압니다. 하나님 우리가 사랑한 걸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저희를 사랑했음을 놓치지 않게 하옵시고, 그 사랑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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