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성령없는 현실 1806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5. 16:00
2018-06-24 22:25:20조회 : 74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7 - 성령 없는 현실이름 : 구득영 (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7 - 성령 없는 현실

08,06,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0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 중간에 보면 그 유명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나오는데, 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말이죠.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사도행전을 할 예정인데, 특히 이 1장 8절을 함에 있어서 듣는 사람들이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라고 하는 것이 과연 진짜냐는 겁니다. 그래서 가상을 해보는데, 성령이 임했다는 것과 임하지 않은 경우를 말이죠. 

성령이 임한 현실, 임하지 않은 현실 !!

그래서 다음의 딱 두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성령이 임한 현실'과 '임하지 않은 현실' 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죠. 성령이 임했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 있느냐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정상회담을 하려고 왔던 싱가폴과 그렇지 않은 싱가폴이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있는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는 겁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왔던 싱가폴에 왔다는 것은 현실인데,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말이죠. 

성령이 있고 없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에 트럼프나 김정은 대신에 성령을 넣게 되면, 즉 "성령이 임한 현실과 임하지 않은 현실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라고 했을 때, 달리 표현을 하자면, "우리 집에 성령이 왔을 때와 오지 않았을 때, 과연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차이점이 없는데, 왜냐하면 성령이 임했다는 것을 현실이 아닌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을 현실에서 지워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성령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현실을 현실로 간주한다는 말이죠. 

성령이 왔다고 어디 뉴스시간에 나오던가요? 그런 일은 전혀 없는데, 그런데 정말로 성령이 왔다고 하면 그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서인가는 살고 있어야만 하는데, 서울이든 대구이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래서 성령이 왔다고 하면, 그것을 마치 사월초파일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 날이 알다시피 '부처님 오신날' 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날을 부처님이 오셨다가 간 날로 여긴다는 겁니다(ㅋㅋ). 그렇지요? 결국 부처님은 없는데, 절만 입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면, 그러면 부활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교회만 장사가 될 뿐이라는 말이죠.

성령의 없으면,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왔을 때와 오지 않았을 때의 차이점, 즉 아로나민골드를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의 차이점,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왔다고 하면 행함이 없이 구원을 받는데, 만약에 오지 않았다고 하면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 노력여하에 따른, 그런 기준이 적용된다는 겁니다. 물론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지만 말이죠. 

아무튼 어떤 기준 자체는 "열심히 해봐라. 혹시 아나? 니가 착해서 천당에 갈지"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령이 없을 때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율법시대라고 하는데, 그렇게 성령이 없을 때는 법대로 해야만, 즉 법을 지켜야 하는데,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99개를 지켰더라도 단 하나를 놓치면 그만 탈락이라는 말이죠. 그것도 옛날에 지키면 안 되고 항상 지금 다 지켜야 하는데, 그러니 언제나 항상 100프로라는 겁니다. 그러면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 의로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지 않았으면 그 기준이 계속해서 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과연 성령이 있는 교회입니까? 없는 교회입니까? 교회의 가르침이 말이죠. 정말 성령의 오심 이후의 가르침인지, 아니면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의 가르침이냐는 겁니다. 성령이 왔다고 여기는 교회였습니까? 성령이 오나마나한 교회였습니까?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

성령이 오게 되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성령이 오지 않게 되면, 자기가 알아서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열심을 따라서, 성실함을 따라서 보너스도 받고 천국도 간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누가 믿습니까? 자기가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성령이 없이 믿는 것인데, 그럴 경우에는 예수를 믿어도 자기가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마음을 단디 먹고,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얼마나 믿어야 합니까? 한 시간이나 하루인가요? 그게 아니라 주님이 재림을 할 때까지 믿어야 하는데, 주님이 자기 목숨을 거두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유지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가족도 몰라본다는 말이죠. 예수님도 알아보지를 못하는데, 두뇌의 시냅스가 다 끊어져서 완전히 맛이 갔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존재가 아닌 우발적 !!

다시 말해서, 성령이 왔다고 했을 때, 성령이 임한 현실과 임하지 않은 현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기록이라는 말이죠. 그 차이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우발적인데, 즉 우발적인 사건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한 특징이 바로 우발적이라는 것인데, 우발적이라는 것은 바람과 같아서 우리 인간이 그것을 붙잡을 수도 없고 기념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이 '사건'의 반대말을 '존재' 라고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있음', 혹은 '여기 있음' 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여기 있는 것들의 집합을 의미하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어른거리는 식구들, 바로 그런 식구들의 집합을 가족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런 가족 중의 하나를 그만 일찍 잃어버리게 되면, 즉 자기 자식을 그만 교통사고로 잃게 되었다고 하면, 그게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아침에 일어나도 자기 아들이 아들 방에 있는 줄로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야야, 밥 먹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막상 문을 열게 되면 아무도 없고, 그러면 "아하, 그 아이가 작년에 죽었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마음이 아들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는데, 왜냐하면 자기 현실에 있어야할 것들이 집합이 되어야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그만 빠지게 되니, 자기 현실을 다시금 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재조정을 한다는 것이 기존의 자기 기억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너무너무 힘이 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줄곧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빌립 집사와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그런데 사도행전은 존재가 아니라 우발적인데, 그래서 빌립 집사가 갑자기 하나님의 지시로 어디로 갑니까? 사막으로 간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막에 전원주택을 지어서 살려는 게 아니란 말이죠. 사막에 가니 역시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어디선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달려온다는 겁니다. 

(행 8: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행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런데 거기에 에디오피아의 고위관리인 내시가 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시는 자기 길을 가면 되고 빌립은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둘이 그만 아다리가 되어서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발적이라는 말이죠. 둘이 만나서 회사를 하나 동업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장사를 하면 존재가 되는데, 즉 있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 같이 잘 살자"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잠시 마주치고 낫서, 즉 만나고 나서 왔던 길로 다시 가게 되는데, 즉 다시 자기 존재로 흩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의 존재의 집합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말이죠. 

성령이 임하기 이전까지는 존재의 집합인데, 즉 있음의 집합인데, 그런데 거기에 사건이 더해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한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사건 안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여기 존재에서는 파악되지 아니하는 새로운 존재가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또한 그분의 부활세계라는 겁니다. 즉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매개로 해서, 즉 성령을 연결고리로 해서, 성령이 임하지 않은 세계에는 인간들밖에 없는데, 그런데 성령이 임한 세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계를 자신의 원하는 대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한 교회, 성령이 임하지 않은 교회 !!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다시 묻겠는데, "성령이 임한 교회와 임하지 않은 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성령이 임한 교회는 구원자체가 사건인데, 사건이라는 것은 우발적이고 자기가 노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전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주님이 그렇게 자기를 다루었다는 말이죠. 믿지도 않았는데 믿음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지 않은 교회의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전부가 다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자기가 믿고 있다고, 그런 믿음이 있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진짜 믿음이야. 이것은 정통신학이고, 이단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니, 자기가 알고 있던 그 모든 것을 다 폐기처분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행했던 것, 교회를 섬겼던 그 모든 것은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왜 쓰레기만도 못한고 하니, 쓰레기는 그래도 방해를 하지 않는데, 인간의 행함은 우발적인 것을 방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믿게 했는데도, 그런데도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믿었다고 계속해서 우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내가 믿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게 원인이 되는데, 그렇게 자기가 믿은 것이 원인이 되었으니, 그 다음에는 반드시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령이 임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이런 이러한 믿음을 제공하게 되면, 이러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그 결과를 노리고 열심히 힘을 다 해서 한 번 해보세요"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령이 임한 교회는 그 원인이 우발적인데, 그러니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예상 밖의 일인데, 그러니 그 결과에 대해서 전혀 예상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바울을 결국 어디로 몰아넣는고 하니,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말이죠. 

어느 누구든지 일찍 죽고 싶어하는 인간은 없는데, 그것은 전혀 예상 밖의 결과라는 겁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고 하면 천수를 다 누리고 살았을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9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사도바울이 로마를 구경하고 싶어서 갔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로마에 보내면서 로마 황제로 하여금 황금마치를 보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폭풍으로 인해서 죽는 줄 알았고, 그리고 뱀, 그것도 준비된 뱀, 그 뱀이 아이온 세대에서 나온 사건으로서, 지상과 접촉되니 때가 되매 독사가 나타났고, 때가 되매 물었다는 겁니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아이온 세대 !!

여기에 '아이온 세대' 라고 하는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말이 나오는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임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 시간이 흐르는데, 어디서부터 어디로 흐릅니까?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흐르는데,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가역' 이라고 하지 않고 '불가역'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즉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유리컵을 깼으면 다시 붙이지 못하고 계란을 익혔으면 다시 생계란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열역학 제2의 법칙인데, 모든 것은 이렇게 뭔가 질서가 잡힌 것에서 무질서로 나가는 것처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그렇게 불확실성으로 계속해서 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늙는다' 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가 어떠합니까? 좋았던 시절에서 점점 더 좋지 않은 시절로 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던 그 기억에 기준해서 앞으로 더 몸이 좋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예상하고 있는 것인데, 성령이 없는 현실에서 우리 인간은 이런 식으로 예상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늙는다는 것이 자기의 일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주님이 그렇게 
필히 만드신 것인데, 주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늙지 않아도 늙어야 한다고 하면, 그 늙음에 대해서 우리가 비난을 하거나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이미 관여를 하게 되면, '나' 라는 존재는, 자기가 한 평생 살아가는 시간전체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 되는고 하니, 주님이 유발시킨 사건의 다발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누구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까? '나' 라는 존재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존재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죠. 

'나' 라는 종교 !!

그 이전까지는 누구의 증인이었는고 하니, 모든 사랑은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행함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행함을 하는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기특함, 자기 대견함, 자기 훌륭함,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가치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데, 자기가 봐도 자기는 너무나 착하고 훌륭하다는 말이죠. 정말로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찬미, 그래서 자기에 대한 유일한 교주가 바로 자기 자신인데, 그리고 그 교주의 유일하고도 충실한 신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가 자기를 믿는 셈이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때가 되매 독사가 나타났고, 때가 되매 물었고, 때가 되매 독이 퍼지지 않았고, 때가 되매 추장은 화들짝 놀랐고, 때가 되매 보블리오라는 유력한 자의 부친을 살렸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신의 아들인 줄 착각했고, 때가 되매 사도바울은 그 추장에게 복음을 전했고, 때가 되매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냥 죽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죽었다고 하지 말고 아까 우리가 생각한 의미대로 사라졌다고 하자는 겁니다. 

왜 사라짐인고 하니, 사건은 죽음이 아니라 사라짐과 관련이 있는데, 있다가도 없어진 것이란 말이죠. 어제 시편 78편을 이야기했는데, 39절입니다. 

(시 78:39)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사라짐, 안개 !!

여기에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라고 하는데, 즉 사라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인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육체이고 바람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야고보서 4장에서는 '안개' 라고 했는데, 그러니 무엇에서 출발하지 말라는 겁니까? 존재에서 출발하지 말라는 것이죠. 

욥기에 보면 인간의 태어남도 사건이고, 죽는 것은 사건이고, 그리고 깨어있는 모든 세월도 다 있다가 없어지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문제는 그 사건을 누가 유발시켰는지를 몰랐는데,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의미가 있는 사건임을 알게 되는데, 즉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필요했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건화를 시킨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어느 시점에서 믿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의 행함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사건의 일부로서, 그런 현상으로서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탈락이 되고 맙니까? 그만 죽음이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누가 부추기는 자가 있는데, 즉 "니가 그렇게 하면 죽는다. 그것은 바로 실패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히브리서 2장 15절에 의하면 그게 바로 악마인데, 그러면 그 죽는다는 것이 사라지게 되면 누구의 협박과 공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까? 악마가 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

얼마 전에 저와 상담을 한 분이 있는데, 자기 아버지를 모시려고 했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요양원에 보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요양원에 가서 얼마 계시지도 못하고 그만 돌아가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 같아서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때 아버지의 연세가 74세였으니, 요즘은 그 정도는 청춘이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분을 보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왜 죽은 것이 살아있는 것보다 못하다고 여기십니까?" 라고 했는데, 제대를 했으면 오히려 좋지 않느냐는 겁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살아있으면 더 고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 하나의 사건으로서 때가 되매 딸로 하여금 요양원에 보내도록 하셨는데, 모든 것이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 사건에는 인간의 존재가 침투할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원인을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내 때문에 누가 죽었다"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왜 마귀에게 자꾸만 시달리는고 하니,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인데, 혹은 부모 탓이고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결국 주님의 탓이 되는 것이고, 주님에 대한 반발이고 반항이란 겁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말이죠. 모든 것은 여기 교재에도 나오듯이 '때가 되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라진 사람을 보고 "그분이 어디에 갔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실례인데, 이미 천국에 가있다는 겁니다. 

엘리야의 경우에, 엘리야가 죽었다고 여기고 그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 그의 제자들이 무려 3일 동안이나 온 천지를 헤매고 돌아다녔는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자기 스승의 시체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이미 엘리야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불 수레를 타고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진짜 뉴스, 가짜 뉴스 !!

그러면 이게 현실입니까? 신화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이게 진짜 뉴스입니까? 가짜 뉴스입니까? 그게 가짜 뉴스라고 하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런데 그게 진짜 뉴스라고 하면 우리가 죽는 것에 대해서 겁을 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마음자세를 분명히 해야만 하는데, 둘 중에 하나라는 말이죠. 자기가 진짜 현실 속에 있는지, 아니면 남들이 이야기하는 존재들의 집합, 그것으로 끝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부르시기 이전까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거지 나사로가 왜 그렇게 당당했는고 하니, 거지 나사로의 눈에는 부자가 굉장히 안타까웠는데, 그래서 "돈이 전부가 아닌데,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살지?"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부자는 천지도 모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다" 라고 하면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그만 휘말려 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바울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바울의 이름은 임시적 이름이고, 사도바울은 천국에서 주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주의 이름'으로 !!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았던 인생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의 인생이라고 여기지 말고, 그것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중인으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들의 교회이고, 진짜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임한 현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날마다 자기를 삭제하는 것인데, 즉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자기 인생을 제거하는 작업이라는 겁니다. 모두들 자식을 키운다고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을, 자기 존재를 증거하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이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런데 베드로가 반석답게 살았습니까? 살지 못했습니까? 이름은 반석이고, 그런데 정작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그러면 여기에 누가 개입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기어이 베드로를 반석답게, 교회의 기초답게 살도록 조치를 취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베드로의 인생은 하나의 사건인데, 반석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베드로의 이름인데, 그런데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셨습니까? 주님이 지어주셨는데, 그래서 이것을 '주님의 이름'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이름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말이죠. 본질은 주님의 이름이고, 나타나는 것은 베드로, 김 아무개, 박 아무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의 존재에서 파생된 사건들의 다발성, 무한한 사건들, 그것은 바로 단일존재, 즉 예수님이라는 유니크, 그 단일존재에서 파생된 무수한 사건들이 어디로 다시 회수가 되는고 하니, 처음에 사건이 출발했던 그 단일존재로, 사건의 그 원천지로 회수가 된다는 겁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와 같은데, 빨아 당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주님이 주신 자기 이름이라고 여겼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름을 가진 베드로의 행위가 반석이라는 이름이 합치가 된다는 겁니까? 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합치가 되지 않는데, 그러면 베드로가 자기 존재를 포기하기 못한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조차도 베드로에게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예수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 자기를 사라지게 하고 찢어지게 하고 파괴시키는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 기억에 의해서 자기 존재에 대한 보상, 찬양, 영광, 즉 남들에게 자랑거리를 생산하는 본부와 같은 육적인 모습을, 그것을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계속해서 발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찬양을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해도, 그것은 주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영광성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제가 또 다시 묻겠는데, "성령이 임한 교회와 임하지 않은 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찬양을 해도, 그것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진짜 교회이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교회이고, 그래서 이런 교회가 커져야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마귀가 물러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자기 교회 존재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가리우는 우상적인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목사의 자격이 전혀 없는데, 아무리 목회를 해도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운다는 말이죠. 

여기서 잠시 교재 7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나쁜 죄를 모두 다 지어도, 인간은 궁극적인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몰라 !!

왜 인간은 죄를 모릅니까? 그것은 바로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자기가 지은 그 죄에 대해서 참회, 혹은 회개라는 것을 통해서 죄를 지은 것을 자체적으로 지워버리는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발생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이상, 아직도 여전히 남은 죄가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선악구조인데, 즉 악한 것을 더 많은 양의 선으로 상쇄를 시킬 수 있다고 하는 아이디어, 그게 바로 악마적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지각을 하면 헌금을 좀 더 해서 그것을 상쇄시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또한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새벽기도에도 나오고 교회봉사를 한다고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한 일이 무엇인고 하니, 죄를 몽땅 다 알고 싶어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 죄에 대해서 의로 처리가 가능하다고 여겼기에 말이죠. 즉 자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 의로 처리할 수 있는, 씻어낼 수 있는 자질을 자기들은 자기가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악구조라는 말이죠. 

젊었을 때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있을 때 교회에 다니면 된다는 겁니다. 요즘은 100살까지 산다고 하니, 60부터 다녀도 40년은 다닐 수 있다는 겁니다. 30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쁜 짓을 했다고 하면, 그래도 40년에서 30년을 빼면 10년이 남는다는 말이죠(ㅋㅋ). 5년 동안 십일조를 하지 않았으면, 그것을 계산해서 나중에 목돈으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에 자기 행함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죄를 짓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주님의 사건으로 일거에 씻게 함으로서 모든 공로와 영광을 누가 다 가지고 가는고 하니. 우리에게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가지고 가신다는 겁니다. 

참으로 야박한 분이 바로 주님인데,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피로 다 씻어주시고,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달려가서 뭐라고 합니까? "제가 지은 죄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정도의 책임감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니가 그때 그렇게 죄를 지은 것은 너의 뜻이 아니고 내 뜻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죄를 짓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악마적 본성, 즉 "모든 영광은 나에게로!" 라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모든 사랑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님에게로 물길을 돌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한꺼번에 죄사함을 얻은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누가 발작을 하듯이 달려들어서 반대를 하겠습니까? 그동안 계속해서 인간을 주물러왔던 악마가 그렇게 하는데, 그런데 교재 91페이지에 보면 그것을 악마라고 하지 않고 '우상성'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바로 악마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이 임하면 사건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육적인 존재를 유지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건과 존재의 다툼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정작 반석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서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악마와 우상성 !!

그렇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하시는데, 그게 사건인데, 그것을 교재 75페이지에서는 악마라고 했지만, 여기 91페이지에서는 우상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우상이라고 하면 반드시 구약을 생각해주어야 하는데, 구약에서 우상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겁니다. 

애굽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계속해서 섬겼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애굽의 바로 왕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애굽의 신들을 치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내렸다는 말이죠. 그것을 출애굽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곧 인간들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은 현실구성에 있어서 피동적인 입장이고 무능한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어진 대로 살아갈 뿐인데, 그런데 나중에 뒤돌아 서서 "나는 열심히 살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때가 되매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야곱의 소유욕 !!

여기서 창세기 9장을 보겠는데, 이게 야곱이 외삼촌 집에 와서 결혼을 하는 대목인데, 그런데 야곱은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라헬을 사랑했는데, 언니 레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외삼촌 동네에서 아가씨들을 다 모은 것이 아닌데, 자기 눈에 띄는 후보감은 둘밖에 없는데, 레아와 라헬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라헬이 그 지역의 최고미녀였을까요? 아니라는 말이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데, 못난 언니에 비해서 동생이 예쁘다는 겁니다. 여자들이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때, 자기보다도 못난 친구를 골라서 데리고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죠. 물론 그래도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말이죠(ㅋㅋ). 

아무튼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7년을 자기 집에서 일을 해주어야 주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우상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신앙이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7년이 결단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할 수만 있다고 하면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첫날밤에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가 쪽두리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야곱이 항의를 했는데, 그러자 외삼촌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마을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가면 안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레아를 아내로 맞아야만 한다고 하는데, 완전히 사기라는 말이죠. 미리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되는데, 막상 결혼을 하려고 하니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7년을 더 봉사하면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고 하는데, 그러자 야곱은 어쩔 수 없이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7년을 더 일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라헬을 사랑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창 29: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창 29: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창 29:29)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창 29: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삽니까? 예수님을 삽니까? 그게 아닌데, 자기가 노리고 있는 것, 집념을 바치고 싶은 것, 즉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그게 바로 소유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한이 맺혀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죽는 것도 억울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자기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사람은 절대로 죽기 싫어하는데, 기어이 살아야 하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그런 사랑의 대상이 되는데, 그래서 "내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의 경우에는, 라헬에게서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는 그 이상 자식을 낳지 않는데, 자기가 사랑했던 라헬이 없는 이상 더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치고 싶어하는 대상을 향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의 우상성이 바깥으로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육이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 즉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그렇게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런 육적인 본성, 즉 자기에게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데,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그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도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목회의 우상성 !!

예를 들어서, 목사가 교회를 세웠다고 하면, 그 교회는 자기 소유이고 집착의 대상인데, 그래서 기도를 해도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키워달라고, 그렇게 자기가 주의 종인 것을 대외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이 정도로 잘 나가는 주의 사자다. 그러니 나에게 와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나오는데, 이런 자기 영광, 그것을 과연 목사가 포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에게서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맞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게 바로 십자가를 가리는 사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악마의 우상성 !!

이러한 저의 주장에 의하면, 악마라는 것은 천사이니 영적존재인데,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악마가 나타날 때는 우상성으로 나타나는데,
그 우상성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 집착, 소유욕, 사랑,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
이런 것으로 구체화가 된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자식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그리고 국가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과거 월드컵에서 남미의 어느 나라의 수비수가 자책골을 넣어서 지고 말았는데, 그래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그만 권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남미처럼 가난한 국가에서는 축가가 그야말로 우상인데, 사람이 가난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축구의 우상성 !!

그런 가난한 현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게 바로 축구라는 말이죠. 축구라는 것이 우리나라 말로 '바보' 라는 의미가 있는데,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축구를 하는 것을 보고 바보들이 하는 짓이라고 하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죠(ㅋㅋ). 이번 월드컵에서도 모로코의 어느 선수가 그런 사고를 쳤는데, 그래서 돌아오면 죽인다고 난리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상성인데, "차라리 내 목숨을 가지고 가지, 그것은 건들지 말라" 라는 겁니다. 그런 우상성을 건드리면 거기서 복수가 나오는데, 모든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가 바로 이것인데, 춘향전의 테마가 무엇입니까? "내 여자를 건드린 놈은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사또를 완전히 작살을 내고 만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사는가?" 라고 하신다면, "복수하기 위해서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복수를 하지 않으면 숨을 거둘 수가 없는데, 달리 말하면 "한이 맺혀서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그렇게 기도를 합니까? 복수하기 위해서인데, 한이 맺혔다는 말이죠. 

교회 간의 싸움, 지역 간의 싸움, 국가 간의 싸움,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월드컵도 따지고 보면 복수극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열광하는 유럽의 응원단을 두고 '훌리건' 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과격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여기에 비하면 붉은 악마는 악마도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요즘 유럽에서는 종교가 이미 기독교가 아니고 축구인데, 바꾸어진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는 말이죠. 교회당은 텅텅 비어있지만, 축구장에는 무려 7만 명이나 모인다는 겁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도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싶은데, 월드컵 축구경기가 저녁 9시부터 해서 새벽 5시에 끝난다는 말이죠. 

우상성과 아버지 이미지 !!

이 우상성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아버지의 이미지인데, 즉 인간은 자기가 기댈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이 있어도 말이죠. 자살직전까지 가더라도 "그래, 너무 걱정하지마. 내 품에 안겨라" 라고 하는, 그러한 아버지 이미지, 그게 대체가 된 것이 예수님 이미지이고 하나님 이미지이고 삼위일체 이미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 없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성령이 없는 이 세상의 현실이고 말이죠. 자기 존재의 복수를 대신해서 해주고, 자기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쌓이고 쌓여있는 보복심,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지 않으면 병이 나서 미칠 지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필리핀에 가서 도박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술을 마시는 것을 대신해서, 도박을 하는 것을 대신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믿음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뭔가 맺힌 것을 풀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인생에서 낙오자가 된 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와서 위로해주고 다독거려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과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데, 자기는 무조건 위로를 받아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는데, 남의 자식들은 바다에 빠져서 죽든 말든 자기 자식은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그것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면 되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예수라는 겁니까? 즉 자기 자신을 위한 예수라는 말이죠. 그래서 종교가 아버지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러한 아버지 이미지를 신앙이라고 하는데, 물론 신앙이 아닌데 말이죠. 자기 존재가 살아있는데, 그게 무슨 신앙이겠느냐는 것이죠. 어디까지나 자기 존재의 우상성이라는 겁니다. 

우상성과 윤리성 !!

이것을 '윤리' 라고 하는데, 그러니 윤리라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죄를 밝혀내어서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죄야 기다려라. 나의 착함으로, 예수님을 믿는 착함, 성경공부를 하는 착함, 그런 착함으로 그 죄를 다 상쇄를 시키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윤리성은 무엇이 되는고 하니, 자기 우상성을 지키기 위해서, 우상이라고 하면 부정적이니까 아버지 이미지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약하고 약한 자기 영혼이 그야말로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그런 최후의 보루로서의 대자대비한, 자기를 포근하게 앉아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받고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는 시편 23편의 말씀을 액자로 만들어서 집에 걸어놓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인데, 최후의 보루이고 그야말로 가장 고귀한 자기 자신이 다치지 않고 돌봄을 받을 때, 그러면 자기도 얼마든지 하나님에게 십일조와 봉사를 해드리겠다고 나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받은 것이 있기에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긍정인데, 즉 자기를 더욱 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윤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키우는 것인데,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이 존재했으면 전부가 다 예상이 되는 것인데,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이죠.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러면 사람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기도하는 그 행함으로 자기가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무엇을 얻는다는 겁니까? 자기가 살아갈 의미와 이유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인상을 가진 그 무엇인데, 그게 삼위일체 하나님이든, 그 무엇으로 이름을 붙여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자기를 지켜주고 다치지 않게 해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교회에서 정신적으로는 이렇게 되지만, 사회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사회는 윤리를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는데, 그러면 강의처음으로 돌아가서,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회는 어떤 사회라고 했습니까? 인간들만이 모인 집합이라고 했는데, 그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윤리를 이야기하는데, 그 윤리라는 것은 안전, 즉 보호하는 것이란 말이죠. 물론 정신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교회이고 말이죠. 

사회 안전망 !!

그러면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깡패나 사채업자들로부터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회 안전망이 형성되는데, 그러니 사회의 모든 법은 그 기초와 기본이 사회 안전망 구축이라는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의 보호이고, 그리고 대내적으로 치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군대와 경찰이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군인과 경찰이 하나였는데, 경찰은 법에 의해서 되는 것인데, 법은 지킬만한 시민들을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지킬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법에 의해서 격리조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교도소이고 교도행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정망을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범죄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말이죠. 범죄란 자기 것을 건드리는 것인데, 그게 기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폭력, 욕설, 명예훼손과 같은 것들이 범죄가 되는데, 그게 19세기의 법이었는데, 신체적인 보호, 즉 안전망이라는 겁니다.

그 안전망이 20세기 이후에 확대가 되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 보험제도라는 말이죠. 리스크를 통계를 내는데, 리스크가 높으면 높을수록 보험료가 올라간다는 겁니다. 다들 보험을 들었지 싶은데, 여기에 사회통계학이 동원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위험군에 있으면 보험료를 많이 내야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자동차보험인데, 마구 달리고 싶은 20대는 보험료가 엄청 비싸고, 30대부터는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운전을 해도 적게 하는 경우에는 보험료가 또 떨어지고 말이죠. 그리고 건강한 사람에는 생명보험도 싼데, 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순재 보험은 보험료가 엄청 비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보험은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드니까 말이죠. 

교회인가? 보험회사인가? 

방금 이야기한 사회 안전망, 보험, 그런 것들을 다 합쳐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게 바로 '현실' 이라는 겁니다. 성령이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인데, 그렇게 돌아간다는 말이죠. 이것을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데, 즉 정신적 보험은 교회에 들면 되고, 육체적 보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순재 보험에 들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천국에 보내주는 보험회사인데,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데, 그래서 바쁘면 일년에 한 번만 나오면 된다는 겁니다. 다른 날에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놓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여기는데, 이것이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의 상투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도 교회라는 업소가 잘 되는 이유를 알았지 싶은데, 인간이 있는 이상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rut이죠. 보험회사이니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바로 우상이라는 겁니다.

이제 교재 9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방금 이야기한 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다 들어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존재가 아닌 지체 !!

유일한 존재는 예수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존재 대 존재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인데, 그것을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는 '지체'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이 지체의 할 일이 곧 제물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존재를 드려서 주님의 사건으로 바뀌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라고 했는데, 이 세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그것은 '나' 라는 존재를 위해서 예수님을 동원시키는 것이란 말이죠.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시 정리를 하면, 마지막에는 '나' 라는 존재로 귀환이 되기 때문에, 그게 우상이라고 아버지 이미지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는 성령이 없기 때문에 무엇으로 연결이 되는고 하니, 그게 바로 윤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윤리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의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죄가 5개 지었다고 하면 6개의 의를 행하면 되는데, 그런 6개의 의 속에는 교회봉사, 헌금, 전도, 성경공부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를 알고 그 죄에 대해서 의로 상쇄시키는 것, 그게 바로 윤리라는 말이죠. 그래서 윤리는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남, 즉 인간 존재의 확장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이 없는 현실인데, 성령이 없는 현실에서는 이게 전부라는 말이죠. 말씀을 지켜서 그 의로움으로 자기 존재를 천국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유일한 존재는 예수님이 되는데, 그러니 자기 존재는 말살이 되고 사건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죠.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인고 하니,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에게 파생된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건으로 들어가면 '나' 라는 존재에 '예수님' 이라는 존재가 겹치게 되는데, 그러면 누가 수단이고 누가 목적인지, 그것이 성령이 임함으로서 결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주님은 살고 자기는 죽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날마다 죽을 거리가 생산되는 육체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날마다 죽을 거리가 자기 육체에서 생산이 된다는 겁니다. 어제 죽었는데 오늘 또 살아있고, 오늘 죽어도 내일이 되면 또 살아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육체가 있는 이상, 이 육체는 자기 잘남을, 즉 자기 윤리성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잘남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어떻게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기 싫어도 죄를 지어야 하는데, 타고난 천성이 그러하니 말이죠. 그 천성을 누가 어떻게 말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야곱을 보고 이야기하기를, "라헬을 사랑하지 말고 우선 언니 레아부터 사랑해라" 라고 한다면, 물론 야곱이 억지로 레아와 결혼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마음은 라헬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말릴 수 있느냐는 말이죠.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장가를 보내면서, "여자가 내가 봐도 생긴 것은 별로지만, 그래도 기독교 집안이고 신앙이 있으니 결혼해라. 신앙이 최우선이다" 라고 한다면, 물론 억지로 결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요즘은 어림도 없는데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그 여인을 결단코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육신의 집착인데, 부모가 말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결혼은 신앙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땡겨서 한다는 말이죠. 흔히 말하는 사랑인데, 좋아서 한다는 겁니다. 물론 나중에 집안을 말아먹든 말든 그것은 그 이후의 문제이고,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그때로 가면 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뭔가 땡기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의 인생이 가장 적합한 인생 !!

인생이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그것이 가장 적합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내가 잘못 선택했어"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기 솜씨가 아니라 주님의 솜씨라는 말이죠. 다시 태어나도 그 인생을 살아야하고, 그 남편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갑자기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생각이 나는데, "나는 다시 태어나도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라고 말이죠. 인생은 백 번을 태어나도 그 인생을 반복할 뿐인데, 그때 그 선택은 자기가 한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책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역시 동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안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인데, 이 세상은 자기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우리의 남은 여생에 우리가 지어야만 하는 죄가 한 두 개가 아닌데, 그러니 미리 죽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작 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이죠.

이제 교재 9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중요한 것은 바로 누비이불인데, 그 밑에는 허무한 것이 바치고 있고 위에는 주의 이름이 있어서, 친히 성령을 통해서, 혹은 구약의 언약을 통해서 이것을 누벼버리면, 이 바늘이 통과할 때마가 피가 튄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 !!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주의 이름만을 고수한다는 것인데, 우리의 이름을 존재에서 회수해서 우리에게서 지워버리고 주의 이름으로 전환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령이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그것을 지우고 주님의 이름이 오게 하시는 것은 성령의 몫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이 와서 우리를 덮치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무엇이 됩니까? 의인이 되는데,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말이죠. 

다시 로마서 12장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라고 했는데, 이 세대는 윤리적 세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으니 윤리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말이죠. 착함으로 죄를 해소하고 해결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윤리적 세계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하십니까? 이런 모든 죄가 자기 행함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성령을 우리의 이 행함과 예수님의 행함을 대조시키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함의 결정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것이, 산상설교를 하시고 베드로를 물 위를 걷게 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까?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까? 

상한 심령, 썩은 심령 !!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위치는 바로 십자가인데, 그게 바로 새언약, 즉 언약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위와 대조를 시키는데, 그러면 우리는 상한 심령이 되는데, 즉 "하나님은 우리의 제사도 원치 않으시고,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어떤 심령이라구요? 그야말로 썩은 심령인데, 여름에 음식을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썩어서 곰팡이가 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심령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썩은 냄새가 풀풀 나고 곰팡이가 핀 심령을 주님은 원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을 고린도서전서 4장에서는 '쓰레기'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주님의 사건 안에서의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이렇게 주님의 사건에 포착될 때, 주님의 망원경에 의해서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서는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상한 심령이 되는데. 썩은 심령이 말이죠. 왜 썩은 심령입니까? 그 안에서는 그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썩은 심령으로 포착이 되는데, 주님의 사건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보지 않고 그냥 자기를 보기 때문에, 자기는 멀쩡하다는 겁니다. 멀쩡하다는 것은 스스로 의롭다는 것인데, 자기는 착한 인간인데, 물론 죄를 지은 적은 있지만 그것은 이미 자기 착함으로 해결했다는 말이죠. 그런 멀쩡한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더욱 교만하게 되는데, 그러면 결국 자책골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로 하여금 썩은 심령의 티를 내는 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알겠지요? "전에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지만, 이제 성령을 받았으니 니가 알아서 율법을 완성해라" 라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면서 '나' 라는 존재를 주님의 사건 속으로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 몸 속을 훤히 볼 수 있는 엑스레이 촬영장소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성령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도 그렇게 꿀릴 것이 없는데,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상한 심령이 된다는 겁니다. 이미 썩었는데, 그러니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에 그 어떤 질곡이 있어도 거기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사건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곧 성령 안에서 의롭다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그런 상한 심령이 재료가 되어서 나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 인데, 그런 의가 우리의 상한 심령을 통해서 늘 반복적으로 생산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런 사건 안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그렇게 주님 앞에서 갖추어진다는 겁니다. "아하, 내가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태어나야만 했고, 그렇게 죄를 지어야만 했고, 그렇게 인생을 꼴아 박아야만 했고, 무엇을 해도 자기 자랑을 할 것이 없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때가 되매 !!

그래서 여기 교재 91페이지에 나오는 "때가 되매 독사가 나타났고, 때가 되매 물었고, 때가 되매 독이 퍼지지 않았고, 때가 되매 추장은 화들짝 놀랐고, 때가 되매 보블리오라는 유력한 자의 부친을 살렸고" 라는 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때가 되매 현숙 씨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때가 되매 결혼을 했고, 때가 되매 자식을 낳았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은 대단한 일을 하고 우리는 시시한 일을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똑같이 상한 심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도 죽을 때까지 주님을 위한 재료가 된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때가 되매' 이루어지는,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없는 현실과 있는 현실이 그야말로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윤리적이지만, 하지만 성령 안에서 상한 심령인 것을 감사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6,23 오후 4시에 마침.
여보, 당신이 나에게는 최고의 마누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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