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없음 (삼상 14장1-6절) 대전- 39강
이근호
2018년 6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4:1-6
(삼상 14: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삼상 14: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삼상 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삼상 14: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삼상 14: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 전쟁 중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전쟁을 하는데 전쟁을 왜 하느냐 하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가치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전쟁은 무산이다. 전부 평탄하게 만들어 버려요. 너 잘났다 내 잘났다가 전부 상실되는 만약에 한국에 전쟁이 없고 평화롭다면 비온 뒤의 우후죽순 같이 잘났다 하겠지요. 만약이 북한이 쳐들어와 해 폭탄 터뜨려 버리면 남자들은 군복 입어야 되고 여지들은 병기 공장에서 일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이 없을 때 남하고 견주던 것이 무의미하게 되지요. 그런데 조용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여기니까 갑자기 뭐가 부각되냐 하면 나는 너보다 잘났다가 부각되는 겁니다.
아무 일 없으니까 마치 자기 덕으로 자기가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 가치를 높여 버리면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예민해지기 시작해요. 조금만 자기를 건드리면 와락 화를 내게 되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하는 일이 평화로운 때는 별 지장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애쓰고 행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을 환경이 제공해 주는 겁니다. 열심을 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환경. 평화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공동의 적을 맞닥드려야 되요. 평화 시에는 나 말고 나에게 대들면 전부 나의 사적인 적이 되지만 전쟁 시에는 너와 나의 다툼을 잠시 미뤄야 되고 접어야 되요.
공동의 막강한 적들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전쟁을 일으키신다는 것은 결국 뭐를 의미하냐 하면 너와 나중 누가 의로우냐 잘났느냐 누가 훌륭했는가? 누가 실수가 없었는가? 누가 옳게 행동 했는가? 의 비교 자체가 전부 무산 되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공동의 적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네가 나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적을 공동적으로 바라보면서 결합되는 행동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 중이라고 이야기 했고 전쟁에서의 적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알려 줍니다. 세상 신.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다라고 해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 우리 공동의 적이라면 영적 존재를 공동의 적이라고 인식하는 그 집단이야말로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교회하자고 뭉쳐봤자 옆에 교회와 라이벌이 되어 버려요. 교회 집안싸움에서 교회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가치를 무신 시키지 않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세상 신을 적으로 삼을 때는 달리 이야기 하게 되면 세상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겁니다. 세상 신이니까 세상 신은 그냥 혼자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뭔가 지배하고 통치해야 될 대상 들이 있을 거에요.
세상 신이 그냥 혼자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구체적으로 다스리고 자기 손 아귀로 줬다 폈다하는 업적을 발휘하고 있는 신이 세상 신이다는 말이죠. 세상 신은 현장감을 가지고 있어요. 현장감이란 것은 현재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느껴지고 지는 것, 사도 바울은 세상을 제배하는 세상 신과 싸우자는 말은 세상은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 배후에 악마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으니까 그 통치하에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갇혀있는 거지요. 갇혀있고 닫혀 있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현장감을 반드시 드러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선이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로 보다가 갑자기 세상 신이 공동의 적이 되어 버리면 너와 나를 볼 필요가 없지요.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원리 같은 것이 있는 데 우연히 만나는 이웃이나 식구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모르는 식구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들을 보면 얼마나 세상 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좋은 재료가 됩니까? 그렇지요? 주변에 안 믿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 그들의 목적이나 삶의 태도나 삶의 의미가 세상 신이 배후에 작용하는 중이에요. 식구 붙들고 싸울 필요 없어요. 식구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거든요.
욥기서 1장부터 보면 욥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과 사단의 이야기부터 나와요. 1장 빼고 나머지는 욥의 현장감을 갖고 있어요. 욥이 고난 받고 친구들이 등장했고 아내가 남편에게 불평했고 이런 이야기가 죽 나와서 1장 빼놓고 이야기 하게 되면 그래 고난 받으면 구원 받는 거야! 이란 식으로 또 자기 개인 적인 자기 잘남과 현재 자기 모습의 정당성, 이런 것을 뽑아내는데 1장을 딱 보면 인간에게 어떻게 챙길 수 있는 여지를 안줘요, 왜냐하면 1장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 사단의 게임에 말려 든 거에요. 일방적으로 인간하고 의논한 적도 없이.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우리 사는 것, 우리의 원대로 되는 게 아니고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뜻대로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뭔가 내기하고 게임 즐기고 있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예수님과 악마의 게임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다뤄지고 있는 겁니다. 1장을 빼놓으면 인간들끼리 잡는 거에요. 난 의로와! 넌 의롭지 않아 하며 싸우는 겁니다. 1장을 보면 그런 싸움이 주님 보시기에 가당치도 않은, 삐지고 토라지고 이 참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나서는 결국 이것은 세상 신이 인간에게 그동안 세뇌시킨 사는 데 원리가 되게 했어요. 네 잘남은 네가 챙겨야지! 챙길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 잘남과 네가 사는 행복은 네가 챙겨야지 아무나 안 챙겨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적 자체를 인간으로 하여금 나를 위한 세상이라고 그 안에 동결시켜 버렸어요. 세상에서 난 손해 보기 싫다. 지금 세상 신에게 붙잡혀 사는 인간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하다 보니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울고불고 하는 이유들을 그 근거들을 한번 추려 보세요. 무엇 때문에 울었고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십자가 생각하면서 울고 웃었어요? 아니지요. 자존심이 아니에요? 나를 위한 나의 싸움이 아니 였습니까? 그거잖아요. 그것을 유일한 현장성으로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실감나는 현장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에요. 그 전쟁의 이야기가 지금 사무엘상 14장에서 시작됩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었어요. 대립하고 있는데 사울은 숫자가 몇 명 되지 않아요. 여호수아 같은 경우엘 보면 이방 민족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숫자를 넉넉하게 주고 싸우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방 신들이 하는 원리와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의 원리가 가르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은 자기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 싸울 때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무기 될 만한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 가?
무기 될 만한 것으로 싸우는데 무기로 싸울 때는 목적이 있어요. 뭐냐하면 자기 보호입니다. 나를 안전하게 하게 보호하는 거에요. 물론 식구들을 보호하고 자존심을 보호하고 있지만 결국은 로마서 10장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 의로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했다. 난 도저히 이런 상황을 못 참겠다. 그런 굴욕을 당해가며 살고 싶은 마음 없다. 난 싸워야겠다. 무엇을 위하여? 난 정당했노라! 난 옳았노라! 이런 대우 받을 존재가 아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나에게 함부로 대드냐 이런 거지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공격 할 때 글들의 신은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신이에요.
자기를 위해서 필요했던 신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뜻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했던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과 모든 인간과의 싸움이에요.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이스라엘은 적을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고 져야 하는 겁니다. 본인 스스로.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적을 이기려 할 때 그 적은 너희 눈에는 이방 민족으로 보이냐? 내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승리 할 때 나는 잘 났다가 되잖아요. 그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바가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요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나와요. 야곱이 에서를 상대로 싸우려 했는데 나중에 저녁 지나 새벽에 보니까 자기가 밤새도록 누구와 싸웠습니까? 자기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그 하나님과 싸웠어요. 그러면 축복을 주신다는 그 하나님의 원수가 누굽니까? 축복 받았다고 우기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야곱 언약이에요.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그러한 의식의 끝은 하나님을 죽이는 거에요. 하나님과 대판 싸우는 겁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나에게 대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고 여는 거에요.
왜 하나님은 나의 편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차마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 망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본 거에요. 인생을 사는 데 모든 망신거리를 주면서 살도록 하시는 것은 절대로 좋으신 하나님이 내린 조처는 아닐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분명이 이야기 하지만 자기가 아직도 쓰레기인 것을 모르면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쓰레기는 가치가 없는 거에요. 에스겔 30장에서는 네가 바짝 마른 뼈이다. 그냥 뼈도 아닌 희망 없는 바짝 마른 뼈다는 말이죠.
바짝 마른 뼈는 계속해서 바짝 말라 있어야 되요. 갑자기 거기에 화장하고 메이크업하면 안 됩니다. 이왕 바짝 마른 뼈이지만 이쁘기는 하다 이러면 안되요.
공동의 적 앞에서 악마를 이기는 재료가 되는 것은 일체 내가 가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기도나 헌신이나 순종이나 선교한 것이라든지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먼저 십자가 앞에서 무기랍시고 자랑할 만한 것들 그것은 가까운 쓰레기통에 다 집어 넣어버려야 되요. 기도해서 자식 잘 키운 것, 기도해서 가족 다 전도한 것, 쓰레기통에 다 집어 넣어버려야 되요.
지금 주님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잘남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잘남의 전쟁 앞에 누가 적이 되겠어요? 바로 주님이 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예수님의 12제자들 다 도망갔지요. 도망갔다는 말은 그동안, 3년 동안 누구의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까? 주님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전쟁하려고 자기편으로 열심히 예수님을 끌어당긴 겁니다. 그런데 막상 최후의 전쟁에선 다 도망쳤잖아요. 남아 있는 군사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대접했던 세 마리아도 엄마까지라도 예수님을 전혀 이해 못했어요.
오늘 본문의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대치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지금 겁먹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 수가 너무 많으니까 약간이라면 용기를 더 해서 의기충천으로 버틸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숫자가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는 거에요. 이미 전쟁하기 전부터 패배 한거나 다름없는 거에요. 이렇게 이스라엘이 기죽어 있고 기눌려 있다는 자체가 주의 일에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의외로 나는 주의 일을 못해!라는 것이 주의 일에 본격적인 시작이 되는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나댈 때가 오히려 주의 일이 아니에요. 여기사 주의 일과 나의 일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되요.
흔히 교회에서 기도하고 봉사할 때 주의 일과 나의 일을 구분 못해서 거기다 나의 일을 해놓고 겸손 붙이면 주의 일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됐습니다를 붙이면 주의 일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려면 우리 자신이 할 때마다 뭘 느끼냐 하면 내가 점점 더 쓰레기임을 분명해 짐을 느낄 때 일하고 있으면서도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망나니짓을 하고 있음을 점점 더 느끼는 것. 그것이 주님의 주도하게 쫄다구로 일하고 있는 거에요. 우린 공동의 적 앞에 있다 했어요. 너와 나의 싸움이 아닌.
만약에 주의 일을 빙자해서 나의 일을 해버리면 누가 적이냐 하면 나는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데 나가 하는 긴긴 세월의 가치를 한 번에 작살 낼 때 갑자기 어떻게 합니까? 화가 일어나고 분노가 일어나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를 했잖아요. 어디가 아픈가가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 화나는 가가 문제라고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아파도 전신병자이고 아프지 않아도 정신병자에요. 더 중요한 정신병자인 것은 감추고 허리 아프고 감기 걸렸다고. 그건 감기 걸린 정신병자이고 감기 안 걸린 정신병자에요. 정신병자란 뭐냐하면 남에게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정신병자에요.
생각해 보세요. 정신병자라 하면 쓰레기가 같은 쓰레기를 보고 비교하는 거에요. 쓰레기장이 있잖아요. 쓰레기장이 있는데 6월 26일 아침에 눈뜨고 보니까 옆에 누가 있거든요. 라면 봉지 쓰레기가 있어요. 자기는 젓가락 쓰레기 이면서 라면 봉지를 보고 자기는 아직 쓸모 있다고 자랑 질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같이 어디에 있는 겁니까? 같은 쓰레기 더미에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젓가락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하면 쓰레기끼리 바른 교회를 하자는 겁니다. 쓰레기는 쓰레기다울 때가 가장 주의 일이 되요. 쓰레기가 자기의 경험대로 쓰레기가 아니 사람 되는 것은 세상 신이 평생을 통해 우리에게 집어 넣어준 의식이에요.
장래는 네 하기 나름이라고 장래에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낮 설교에서도 그랬잖아요.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고, 인간은 바뀌지 않아요. 그러면 블레셋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블레셋이 더 의기양양 한 것은 악마가 블레셋에게 그런 의식을 준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악마가 심어준 블레셋의 의기양양에 이스라엘이 지금 그 앞에서 기죽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블레셋이 상대적으로 기가 살아있는 이우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자기 안전입니다. 인간의 모든 본능은 어디에서 나오는 가? 본인의 것을 본인이 지키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화라는 게 분노라는 게 왜 생길 까요? 내 것 건들지 마라는 거에요. 자기 것 건들지 마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자기 것이 있을까요? 자기의 안정망, 그동안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신경써서 한 거에요. 남자 같으면 가다가 자기 차를 건드리면 화나고 여자 같으면 적금으로 산 옷이라든지 여동생이 와서 자기 선본다고 물어보지도 않고 가져가면 화나지요. 자기의 것을 털끝만큼만 건드려도 화가 나고 이건 물질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과거에 명예나 평소에 감추고 싶었던 과거 내력, 그리고 스스로도 고쳐지지 않는 성격을 누가 험담하게 되면 화가 나요. 그래서 인간은 화 날 요건으로 채워져 있다고 보면 되요.
베게 안에는 칼로 찢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었지요? 작은 스펀지 같은 게 들어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속에는 뭐가들어 있습니까? 나를 지킬 만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했냐하면 배설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생각나는데 변비 약 광고 대사 중에 “하늘이 그레이 색이야!”라며 제발 빠져 나오라고 짜증내는 게 있어요. 이 약을 먹으면 시원하게 빠져 나온다는 거에요. 성도가 쏟아 내야 하는 것이 그레이 색을 빼는 거에요.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내 스스로 나의 가치와 의미를 지킬 만한 것들이 배설물같이 차 있으면 이것은 영적 변비입니다.
공동의 적을 모르고 있어요. 평생 자기의 싸움을 한 거에요. 나만을 위한 싸움. 내 것 지키기 위한 싸움. 그것이 지켜졌을 때 안전하게 자기 가치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거에요.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뒤에서 떠들면 화가 나지요. 이것은 뭐냐하면 자기의 안전성 이건 본능입니다. 본능은 이유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 지키려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한번 건드려 볼 까요? 화나지요. 본능이 자기 지키기에요. 자기 지키는 것과 또 자기 지키는 것과 싸우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다? 어느 편도 안 들어 줘요. 둘 다 세상 신으로 사고방식이 영적 변비로 꽉 차 있는데 누굴 도와줍니까?
사무엘상 14장 6절 봅시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지금 보세요. 숫자가 안 되잖아요. 요나단이 몇 명 몰고 쳐들어갑니까? 자기까지 포함해서 군사가 몇 명입니까? 자기까지 포함해서 두 명이에요. 지금 사울 쪽은 수천 명도 안 되는데 겨우 두 명으로 뭘 하겠다는 거에요? (요나단 +1)이 하나님의 일은 시 공간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개시 할 때 시 공간적인 어떤 조건도 아무런 장애 요소가 안되고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님께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신다? 오직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일 하시지요. 6절에서는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할례 없는 민족으로 애굽에서 구출 된 민족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오면서 할례를 행한거에요. 할례를 행해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너희를 불렀는데 너희와 하나님의 표징이 바로 할례 받은 것으로 되는 거에요. 오늘 날은 성령 세례 받았나로 표시가 되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아느냐? 믿느냐로 표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가치나 안전성에 대해 동조 하시겠어요? 안 하시겠어요? 안 하시지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은 안 보이고 막강한 힘을 가진 블레셋만 보이겠지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지금 기죽고 있는 거에요.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12제자와 더불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요. 풍랑이 일 때 그게 바로 현장감이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은 감각이에요. 현장감이라는 말이에요. 현장감은 우리의 본능을 자극하지요. 아까 말했듯이 본능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습니까? 자기 안정이지요. 자기 안정이니까 본능은 행함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을 어떻게 깨우냐 보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가라앉기 때문에 열심히 물 퍼내는 일을 하겠지요.
물을 왜 퍼냅니까? 물을 퍼내야 자기 육체가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주님은 믿음 없음으로 보시는 거에요.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안 일어났으면 제자들은 믿음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겠지요. 풍랑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관심 없고 본능적으로 이성적인 거 말고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기 보호에요. 이유 달 것도 없어요. 그러면 자기 보호 하는 것이 믿음 입니까? 믿음 없음이지요. 예수님이 깨어 나셔서 믿음 없음으로 일괄적으로 평가를 내리시는데 믿음 없다는 기준이 뭐냐하면 너희는 복음을 위한 존재라는 거에요. 복음을 나타내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라는 거에요.
그런데 배에 물이 들어와서 물 퍼내는 그 일은 믿음 없는 행위가 되는 거에요. 믿음 없음이 복음을 위해서 믿음 없는 존재가 되야 된다는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보호하려는 행위는 믿음 없는 행위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12제자를 뽑은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없음을 아는 것으로 구원 받아요. 내가 믿음 없음을 아는 것으로 왜냐하면 믿음을 가져 버리면 이것도 하나의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은 갖는 게 아니에요. 복음을 가져 버리면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된다고요.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경유해서 결국은 나는 복음 알아서 구원됐다는 자기 보호 본능에 충실한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믿음 있는 자의 모델인양 생각하는 데 그건 평생 현장감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 위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구차한 이유와 변명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 구차한 이유와 변명마저 나의 의를 지키려는 본능애서 나온 것이라 그래요. 믿음 아니까 이젠 그만 괴롭히세요라는 것이 정말 믿음 아는 것일까요? 믿음 모르는 거지요. 남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믿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지요. 같은 쓰레기장 안에서 짜장면 묻은 나무젓가락이 왜 라면 껍데기를 보고 시기하고 질투합니까?
월드컵 16강에 일본은 들어가고 한국은 못 들어갔다면 왜 축구 팬들은 시기하고 질투합니까? 떨어지려면 다 떨어져야 하는데 너희는 왜 올라가느냐? 내 애는 서울 대학 떨어 졌는데 옆에 있는 애는 붙었다면 왜 시기 나야 합니까? 이게 전부 자기 보호에서 나오는 거에요. 성경은 간단해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전혀 우리는 현장감 때문에 안 믿어요.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화가 나잖아요. 화나니까 누굴 찾냐 하면 기존 교회의 나보다 더 믿지 않는 사람을 찾아 견주는 거에요. 저거는 믿음도 없어! 왜 그렇게 견주어야 되지요? 쓰레기가 왜 쓰레기와 비교합니까?
차라리 약을 올리며 너는 아직 죄인 안 돼봤어! 그런 것으로 약을 올리세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 보세요.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잖아요. 얼마 전에 종영된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그 드라마를 보면 현대에 직장 생활하며 살아가는 남자들, 망했던 남자들, 일용직하는 남자들과 아침에 축구모임 하는 남자들, 그냥 우리 시대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기 청춘 때 꿈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니까 그 괴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어떤 남자는 머리 깎고 절에 간 사람도 있어요. 술집하는 자기 애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머리 깎고 절에 가니까 절에 가서 니가 나를 잊고 득도하는가 보자! 땡깡 부렸어요.
그들은 하루 일과 보내고 어디로 모이냐 하면 술집으로 술로 달래요. 왜 그럴까요? 술을 먹으면 젊어서 내 모습을 그나마 건질 수 있기 때문에 개기 부리고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 같거든요. 술 힘을 빌려서 잠시 술 취한 동안은 나는 아직 안 죽었어! 라는 티를 내는 거에요. 남자들이 술 먹고 짐에 가서 행패 부리는 짓이 여자를 학대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그 말은 처음 결혼 할 때부터 남편에게 아내란 짓밟기 위한 속마음을 가지고 결혼한 거에요.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감은 뭐냐하면 돈 벌어다 주는 기계이고 돈 벌어다 줘도 욕만 얻어먹게 되기 때문에 그 괴리가 잠시 술 먹고 나는 하늘이고 너는 땅이야! 라는 술 취해있는 만큼은 행복이라는 겁니다.
다 나와! 하는 겁니다. 여자가 화나서 술 쳐 먹었거든 디비 자! 하며 갑자기 현실 모드로 돌아와서 디비 자고 난 뒤에 아내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이니 힘내라고 콩나물 국 먹이고 빨리 돈 벌러 갓! 문제는 결혼도 안하면 그럴 남자도 없다는 것,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 믿음 없음을 유지하세요. 믿음은 우리에겐 없는 겁니다. 우리가 가질 믿음은 아예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믿지 마세요. 믿음이 원래 없는 거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없어야 되요. 믿음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꾸 믿음 소망 사랑을 자기에게 자꾸 억지로 붙이는 겁니다. 뭐로? 행함으로. 점점 더 자기의 본색을 가리고 있어요.
자기를 감추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선 그것이 안 들키는데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전쟁을 일으키시죠. 전쟁이 일어나면 나와 너 너와 나 사이에서 비교 했던 기준은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무산 되요. 전쟁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선 무산됩니다. 6절에서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두 사람이 있지만 병기 든 자가 달랑 하나이지요? 단 하나만 있어도 충분해요.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이길 수 있는 이유가 할례 받지 않은 민족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언약 밖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요나단은 뭐를 돌파 하냐 하면
요나단도 믿음 없는 세계니까 본능의 세계지요. 본능은 뭐에 충실 한다? 자기 보호이지요. 그래서 벌벌 떨고 있는데 여기서 시 공간을 뚫고 나와 버리면 할례 언약, 다시 말해 할례 있고 없고 로서 전쟁은 결판난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에 즉 인간이 생각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숫자가 누가 더 많으냐 누가 더 쓸만한 무기를 가졌느냐? 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이라는 끈의 유무, 있음과 없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할례 받지 않은 것을 알고 튀어 나오는 순간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현장감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블레셋이 자기들끼리 찔러 죽였어요.
그덧은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3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악한 사람이 최종 승자가 아니고 하나가 올라서면 서로 발목 잡고 당기고 서로 속고 속이죠. 속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속는 절차가 남아 있어요. 자기들끼리 속고 속이는 거에요. 처음부터 승자라는 것이 성립 안 됩니다. 이 세상 인간들끼리는, 그래서 13절 이후에 그러니까 성경을 보라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 세상 사람들끼리 싸우는 방식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끼리 싸우는 방식은 누가 잘났느냐, 누가 옳았느냐, 누가 정당했느냐, 나는 누구에게 욕 얻어 먹을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욕을 얻어먹어 분통 터진다. 이런 싸움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서의 싸움은 그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전부 쓰레기라는 말이죠. 바짝 마른 뼈에요. 모든 인간은 믿음이 없는 거에요. 지금 믿음 없는 자를 구원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같으면 할례 언약을 통해서 요나단이 보고자 한 것은 기존의 현재 현장감 말고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나타나지 않았을 현장. 일으키셨기 때문에 일어난 희한한 현장.
블레셋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언약대로만 움직이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려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본인 자체가 언약에 의해서 쓰레기 같은 목숨이라도 거기에 걸어야 되지요.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도 바울은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오직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홀로 사는 여자가 자식이 육체의 자녀보다 많다는 나처럼 이 세상에서 누굴 이겼다는 소릴 하지 말고 복음이 나를 통해서 계속 승리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여라 말이죠. 그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자기의 안전 위주가 아니고.
복음이 복음답게 펼쳐질 때 사람 대 사람으로 모이는 이 현실 말고 하나님이 개입하고 말씀이 완성되는 새로운 현실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주님이 하는 영적 전쟁터가 오늘 대전 바닥이고 대구이고 서울이고 이 바닥입니다. 주님이 홀로 하시는 전쟁에서 우리는 장애물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장애물인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으로 연결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이미 승자임을 이 세상에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가치 없는, 믿음 없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매일 같이 우리는 포기하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복음을 앞장세우는 것 외에는 다른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어느 강의에서 했나 기억이 안다지만 매일 같이 우리는 자살해야 되요. 다음에 여기가 아디이지 하고 새로 눈떠야 합니다. 자살을 하게 되면 지난 과거가 내 발목을 안 잡아요. 과거가 더불어 나와 죽었기 때문에 지난 과거의 다툼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은 매일 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매일 안 죽었다는 뜻은 매일 안 죽고 싶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긴긴 과거의 역사가 지금의 이쁘장한, 지금의 대단한, 위대한, 훌륭한, 착한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갓이 아까워서라도 지난 과거를 무산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에요.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을 주게 되면 너를 위한 현실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현실인 것을 다시한번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평화로운 시대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대가 아니에요. 평화로울수록 주님 앞에서 생각하고 남들 보다 내가 얼마나 더 휼륭하냐를 나보다 못난 사람을 통해서 자기가 돋보이는 식으로 하기 쉬워요. 그런데 갑자기 북한 핵을 폐기한다 해놓고 터트리도록 폐기해서 대전 바닥에 떨어지게 되면 어제 콩나물 값 깎으려던 아주머니와의 싸움은 의미 없는 거에요. 대전에 폭탄 터지면 층간 싸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다 쓰레기장인데.
이것이 바로 언약의 복음만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필히 그러한 감각을 우리에게 갖게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