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은 뭐든지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발 밑에 깔리는 그림자는 오로지 자기만의 그림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합니다. 인간의 그림자는,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그림자라고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로 귀결되기에 예수님의 행하신 십자가의 의의를 드러내는 존재가 곧 자신인 것을 아는 반면에,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오로지 자기에게만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향에서 모든 성경 문자를 해석하려드니 그들에게 나오는 것은, "내 몸이 손대지 말라. 내 재산에 손대지 말라, 내 자존심을 훼손하지 말라, 내 교회에 손대지 말라, 내 교단에 손대지 말라, 혹은 내 국가에 손대지 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림자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성경 해석과는 소통되지 못하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은 '십자가 마을'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마을 자체가 언약을 완성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십자가 마을이 십자가 마을 자체를 증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지 않는한 십자가 마을은 예수님과 소통되지 못하는 육적인 단체가 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만 모여야지 '십자가 마을'이름으로 모이고 수련회하고 교제해서는 아니됩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지 않는 단체는 인간들의 친목계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권력단체로 행세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느 인간치고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자존심 챙기고 자기가 속해있는 단체를 사수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는 자가 없기에 성령께서는 늘 사고치셔서 오로지 성도에 한해서는 예수님의 새언약의 그림자로만 머물기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이트는 성경 말씀과 그 이해와 해석을 중심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취지가 됩니다.
라캉에 있어 주체론은 인간의 단독적인 몸에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몸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형성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 비록 몸은 어머니 몸에서 개별자로 출발하지만 그 몸은 외부 상황과 차단된 것이 아니라 늘 교류되는 매개체로서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TV 수상기가 아무리 완벽한 개별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화면이 안나오게 되어 있는 됩니다. 즉 인간의 몸은 외부를 반영하되 외부 뿐만 아니라 본인의 것으로 전환된 외부의 것이 개성있게 나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나다"라고 주장할 수가 없고, "나의 외부는 이런 식이다"고 말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앙성과 주체성이 정립되는 겁니다. 귀하께서 다른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믿고 있는 본인의 예수상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인과 완벽한 일치된 생각을 갖게 된다는 '완전한 소통'이란 인간 세상에서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각자 생각하는 '완벽함'이 따로 있고 각자 생각하는 '실패성'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각자 자신의 인간의 행함보다 오직 예수님의 완전한 행하심, 곧 십자가 죽으심만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화투)패를 죽은 것으로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패를 들고서 어쨌든 저쨌든 예수님 피만이 완전하고 거룩함을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조금의 자기 (화투)패를 곁들일 수는 없고, 오로지 죽어 마땅함을 아울러 증거하는 겁니다. 목사는 자기 설교마저 계시가 될 수 없음을 설교를 통해서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죄로 아는 그런 성도들과 십자가를 같이 쳐다보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소통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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