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11. 24) 45-1
마가복음 1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님의 명령을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인간들의 마음을 아시고 늘 비켜 가십니다. 즉 예수님 말씀(명령)은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법테두리 바깥 영역이 있다는 것을 폭로시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기대했던 마음으로는 주님에 의해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지시와 명령에 대해서는 의미 포착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것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어요. 왜 그런가? 자아와 주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주체 둘 다 ‘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첩’이란 표현을 씁니다. 자아와 주체가 겹친다는 거예요.
“나는 40년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며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자아’지요. 이 ‘자아’는 또 다른 ‘나’가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왔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할 때의 그 ‘나’는 ‘자아’입니다. ‘주체’가 아닙니다.
‘자아’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는 율법적입니다. 따라서 법이 주어지면 항상 그 법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숙제를 내는 것과 같아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숙제를 내는 선생님과 숙제를 내지 않는 선생님은 달라요. 한 번도 숙제를 안 내주는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숙제를 내는 순간 ‘숙제를 주신 선생님’이 됩니다.
숙제를 주신 선생님에게는, 내가 이 숙제를 완성했을 때 선생님과 내가 어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질지 고대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고 싶은 이유가 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숙제를 내가 완수하면 그 이후 하나님은 내가 쥘 수 있어요. 시킨 대로 했으니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면 이것은 법입니다. 법을 주실 때 내가 그 법을 지키면 이제 그 하나님은 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가 있어요. 왜? 숙제 다 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 왔으니까 이제 큰소리 칠 수가 있어요. 이걸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나를 ‘주체’와 ‘자아’ 둘로 나눴는데, 나누지 않으면 그냥 ‘내가 율법을 지켰다’ 이렇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이 출생하면서 갖게 되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나 타인을 상대할 때는 법이 매개가 되어 관계를 형성합니다. 법이 매개가 된다는 말은, 법을 지켰다, 혹은 안 지켰다는 사실이 기억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십일조를 받치라.’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일조를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9%와 11%의 차이를 알아요. 자기가 십일조를 내면서 내가 9%를 냈는지, 11%를 냈는지 본인이 알지요. 이 체험이 누적된 것이 ‘나’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으니까, 어느 선을 넘으면 간음이 되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빠, 손만 잡고 잘게.” 이건 간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10개월 후에 아기가 태어났다면 이건 분명히 선을 넘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선’을 기억합니다. 내가 선을 안 넘은 것은 몇 개이고, 넘은 것이 몇 개인가를 본인이 정산을 합니다.
이것이 누적된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왜 이렇게 당당한가 하면, 기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당당한 거예요. 뉴스에서 친구 딸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노합니다. 왜냐? 자기는 그런 선을 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내가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그 정도 악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음주 운전으로 경찰에 잡힌 사람이 “나는 술을 조금 마셨지만 음주운전에 걸릴 정도는 아니야.”고 큰소리치는 사람을 보면서 “저런 인간은 당장 감옥에 가둬야 돼.” 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법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 법이 나를 형성하니까 나를 쪼개보면 그 속에는 법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셔서 인간이 기대하는 법을 주실까요, 다른 법을 주실까요? 기대하지 않은 다른 법을 주셨지요. 인간들이 지킬 수 없는 다른 법을 제시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앞에 두고 “너희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지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해야지요.
지금 어른이 되어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뒤늦게 어른을 왜 부릅니까? 어린 아이 때 부르면 천국 갈 수 있는데. 그래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제가 무리한 논리를 전개합니까?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면, 천국 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린 아이를 찾아가서 불러서 데려가면 되잖아요.
니고데모가 오죽 답답했으면 예수님 말씀에 반문을 했겠습니까? “어떻게 늙은 이 몸이 어린 아이가 될 수 있습니까?” 정말 궁금했기에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었어요.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십계명은 왜 줬습니까? 아담을 창조한 직후 창세기 3장에서 말씀을 하셔야지 한참 후 요한복음 3장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거론하느냔 말이지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간들이 생각합니다. 이것을 지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그 매개가 뭡니까? 율법이죠. 그래서 주님이 법을 주십니다. 로마서에서는 법을 주신 이유를 죄인 만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맛있는 과일인줄 알고 먹었는데 그것이 시한폭탄이었어요.
인간은 저주를 유발하는 법들을 자랑인양 여기고 한껏 모아놓은 거예요. 인간들은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나의 역사는 개인사지요. 인간들이 하는 일이 내 인생사를 펼쳐놓는 것, 이것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자식 잘 키웠다.’ 이런 것.
인간은 법을 원하고, 주님은 법을 주셔서 인간을 저주한다면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아야 돼요. 그럼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법을 주시면서 저주 받을 인간에게서 생명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흙이 된 인간이 여자의 후손을 만남으로 생명으로 전환됩니다.
육에서 영이 되는 방법은,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언약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노아의 특징은 뿌리가 없습니다. 만약 노아의 뿌리가 멀쩡하다면 내가 토대가 되어 나를 구원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노아는 자신이 근거가 되어 의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방주 밖에 있는 사람과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차이점이 없어요.
홍수가 그친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과 새를 잡아 번제를 드렸지요. 정결한 그 제물은 노아와 동승해서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노아의 토대가 노아의 행함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과 동승했다는 것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럼 노아의 뿌리가 뭔가? 정결한 짐승이 노아와 그 식구를 살려낸 겁니다. 이것이 노아 언약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고 하셨어요. 노아도 어려서부터 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착하냐, 안 착하냐는 것은 언약적으로 의미 없는 말입니다. 다만 노아는 언약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무당집이 된 이유는, 교회 온 사람들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식으로 설교를 하고 모든 행정을 추진합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질문을 하면, 목사는 그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노골적으로 복을 기원하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는 주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속으로 복을 기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다 같은 부류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신앙이란 자기 증거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미국의 유명한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 됩니다.’라는 것이에요. ‘자기를 부인하세요. 회개하세요. 주를 위해 충성하세요.’ 이런 고상한 것들을 다 거론하는데 결론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 증인 되면 구원 받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 증인 되는 것으로 끝입니다. 아프든지 가난하든지 관계없어요. 예수님 증인으로 마감됩니다. ‘내가 주님 원하는 것을 하면 주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런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위한 것이지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취지가 뭔가 하면, ‘모든 인간은 지옥 가야 돼.’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요.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아니에요. 주님께서 이방인들은 이렇다고 지적하신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말씀하신 겁니다. ‘상황 종료’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죠. 내 결심과 노력이 내 운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 상황이 종료된 것이 다가와야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습니다. 수능시험이 11월 23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11월 24일) 아침 8시에 수능시험 친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문제지 받고 시험 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정답이 발표되었기에 그 후에 시험을 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내가 정답을 기억하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됩니다.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어느 창고에 쌓입니까? 나에게 쌓이잖아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지옥 보낼 수 있습니까? 나는 이미 정답을 아는데.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왜 알아야 됩니까? 천국에 합격하려고. 이렇게 되면 상황 종료가 아닙니다.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 자아는 살았어요, 죽었어요? 죽은 거예요. 나는 이미 죽은 거예요. 내가 죽었으면 산 나는 어디 있는데? 주님의 몸에서 나온 주체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이것 때문에 제가 ‘자아’와 ‘주체’를 나눈 겁니다.
성도는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야 마귀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죽였으며 죽은 나를 누구 살렸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겁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자아 안에는 기억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기억에는 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상황이 종료되었기에 법으로 가득 차 있는 나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셔서 저주 아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는 것도 내 안에 들어오면 법으로 바뀌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고요. 그럼 포기해야 될 나를 절대 포기 못해요. 포기 안 되는 나를 기어이 포기하도록 밀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붉은 색 당구공이 있는데 다른 공이 와서 치면 붉은 색 공은 다른 곳으로 가고 그 공을 친 다른 공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주체가 자아를 밀칩니다. 그런데 그 주체는 자아에서 나온 것이 아니죠.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이죠. 정결한 짐승에서 출발한 새로운 나(주체)가 법을 알고 기억하는 나(자아)를 밀쳐낼 때 밀려난 나를 볼 수 있어요. 이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이며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지요.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상황 종료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내 안에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주체가 나타나면 나는 죽은 자이지만 산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9-10절 말씀처럼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수요일 창세기 설교하면서 계속 언급한 ‘중첩’이란 것입니다. 겹쳐진 거예요.
언약 받은 사람은 기존의 육과 영이 함께 있어서
육에서 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에 있기 때문에 육이 바깥으로 계속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형을 만나 일곱 번 절을 하지요. 용어도 달라졌어요. ‘형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여’라고 불렀어요.
형은 어차피 지옥 갈 사람이기에 ‘주’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야곱은 이런 마음으로 형을 대하는 겁니다. “형은 하나님 만나봤어? 못 만났지. 만나면 죽어. 우리의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의 장자가 되기 위해 싸워 이기고 지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아야 해.”
그 하나님이 신약에 오면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으로 상황 종료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미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여도 죽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유령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뿌리를 알지요. 그래서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이방인들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며 자기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너희는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성도의 특징은 관심사가 달라요. 왜 감사와 찬송이 없는가 하면, 자아를 꾸준히 기억하기 때문에 감사와 고마움이 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자기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 어떻게 살았습니까? 열심히 살았지요. 열심히 살았기에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십니까?’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에는 이런 불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 모를까요?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말썽을 일으키면 정말 화가 납니다. “하나님, 왜 자꾸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저는 나름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원망과 불평이 생기지요.
계속 자아에 주목하는 겁니다. 자아밖에 기억하는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법적인 매개체가 기억나니까. 그래서 주님이 ‘나귀를 끌고 오너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나귀와 일치시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탔지요. 사람이 무엇을 타면 그 탄 사람을 주목하겠지요. 가마에 대감마님이 탔고, 사람들이 절을 하면 대감마님에게 절을 하는 것이지 가마에게 절하는 것은 아니지요.
나귀 타지 않는 주님과 나귀 탄 주님을 달리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나귀를 타나 안 타나 같은 주님으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알고 있는 법적인 체제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 영광 돌려야지.’ 이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 뜻을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변화를 시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변화에 제자들이 같이 따라와야 합니다. ‘왜 갑자기 나귀를 타시지?’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를 탄다는 것이 제자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나귀를 타겠다고 선언하셨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귀 타신 것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법의 노선에서 이탈 된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기대에서 벗어난 거죠. 주님이 제자들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이탈한 것인데, 이것을 통해 주님은 인간들의 생각과 틀을 벗어난 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죠? 금지시킨 겁니다. 그러면 그 후에 하나님이 나타날 때마다 계속해서 법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익히 아는 법을 거론한 것이 아니고 전혀 예상 못한 추가적인 법이 계속 주어져요. 그래서 금지의 역영이 점점 확산됩니다.
금지가 차츰 확산되면 나중에는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내가 하라고 했잖아.” 또는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이야기해요. 이렇게 되면 계속 금지가 살아 있는 거지요. 법 안에서. 그래서 법이 농축된 것이 금지입니다. ‘하지 말라’고 율법을 준 것은, ‘내가 평소에 하라고 했지.’라는 금지가 ‘하지 마라’에 포함되어 있어요.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왜 했어?’라는 금지가 포함된 채 ‘하라’가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자체가 ‘너는 심판 받아야 마땅해.’라는 것을 의식하고 준 거예요. 그 원리에 의해서 나귀를 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탔다는 것은 새로운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너희들 머리에서는 내가 나귀 탄 것이 나올 리가 없지?’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금지를 요청하는 새로운 지시를 내립니다.
나귀를 타시고 성전에 가시는 것이 끝이 아니고 나중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모든 것이 종결되지요. 여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까 한 것 다시 해 봅시다. ‘내가 너를 죽었다고 했잖아!’라고 선포하는 것이 십자가 지심의 의미입니다.
‘네가 나쁜 짓해서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죽어야 마땅한 나쁜 놈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했지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사단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런 행동을 했지요.
사단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단이 가룟 유다의 등에 올라타서 나무에 목을 매어 죽게 했다면 남들 눈에는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가룟 유다와 함께 있다가 떠난 자가 있습니다. 누구죠? 사단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며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십자가의 영이 찾아오면 죽은 자임이 밝혀지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어요. 보통 인간에게는 죽음이 끝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이란 새로운 공간이 이 현실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살았다고 우기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죽음 안의 세계에 공존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성령 받은 자들입니다.
‘너희는 너의 자아가 살아 있는 것을 자랑하는데,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잖아요.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죽은 자이고,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죽은 자고.’ 이게 뭐냐 하면, 살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벌써 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도 살겠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런데 성도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임을 압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통하려면 유령끼리 대화를 해야 됩니다. 유령과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대화가 안 돼요. 죽음은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 아이들 비눗방울 만들기 놀이 알지요? 공기 중에 후 불어서 생긴 비눗방울 같은 거예요. 공기 중에 비눗방울이 따로 떠 있지요. 막 때문에 안과 밖이 나눠지지요. 바깥이 지옥이라면 안은 천국입니다.
바깥은 저주가 유발되는 곳인데 법이 없으면 저주도 없어요. 안은 이미 법으로부터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완성하심)이 있어요. 주님 안에는 사랑의 법만 있어요. 이 둘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바깥은 ‘자아’고, 안은 ‘주체’입니다. 성경에서는 바깥을 ‘옛 사람’이라고 하고, 안은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겉은 날마다 후패하지만 속은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이런 내용과 ‘나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제자들이 도무지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나귀는 제자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nothing이죠. 무(無)입니다.
그런데 나귀 탈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제자들은 nothing이 돼요. 무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심으로 말미암아 겸손, 낮아지셨는데, 낮아진다는 것은 없는 것과 같아요. 모든 존재는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없다’는 것을 ‘낮아짐’으로 표현했어요.
10분 쉽시다.
(2017. 12. 7. 11:05 녹취 마침)
2017-12-12 10:38:39 | 조회 : 30 | |||||||||||||
광주 강의(2017. 11. 24) 2강 | 이름 : 서경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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