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18-단지 1709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25. 19:40
2017-09-22 22:08:38조회 : 25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8 - 단지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8 - 단지

07,09,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6페이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해서 성경구절 하나를 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전체가 어떻게 하나의 줄로 연결이 되는지, 그것이 정리가 되면 마음이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뭔가 미진한 것이 있으면 마음이 찜찜하고 말이죠. 

자유로운가? 찜찜한가? 

성경의 몇몇 구절은 자기의 말을 옹호해주는데, 그런데 옹호해주지 않는 구절이 나오면 답답해진다는 겁니다. "내가 너무 일방적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면,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역시 찜찜하다는 겁니다. 자기는 성경대로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성경구절에 의하면 그게 아닌 것이 되니까, 살아가는 것이 당당하지를 못하고 주춤거리게 된다는 말이죠. 

진리의 말씀에 올인을 할 수 있어야 마음이 편한데, 그것이 아니라면 평생동안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해야한다는 겁니다. 그게 자유로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불안 불안하다는 말이죠. 자기도 아는데, 자기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 믿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으니, 임시방편으로서 자기만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자기가 그동안 잘못 살아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하나님 앞에서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이 과연 통할까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도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말이죠. 

양심, 그 악마성 !!

성경은 말씀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무엇을 믿는고 하니, 자기 양심을 믿는 사람이 있는데, 즉 "양심에 비추어서 나는 진실했다" 라는 겁니다. 진실은 진리가 아닌데, 그러니 양심대로 살았다는 것이 구원의 토대가 될 수 없는데, 오히려 성경은 그게 악마적인지를 지적하고 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는고 하니, 자기의 그런 살아가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겁니다. 남들과 비교하게 되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비양심적인 것이 되는데, 자기는 쓰레기 봉투에 다 넣어서 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양심적인데, 살아가는 보람이 마구 생긴다는 겁니다. 

자기는 살아가면서 그동안 그게 착한지 악한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남들과 비교를 해보니까 나름 자기는 착한 부류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만 걸리고 만다는 겁니다. 양심이 아닌 상식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주동한 사람들이 누구인고 하니,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말이죠.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어제 낮에 한 설교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예수님께서 귀신 잔챙이들은 잘 쫓아내는데, 그런데 귀신의 오야봉에게는 그만 당해서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어버리느냐는 겁니다. 그 오야봉에게도 "마귀야 물러가라!" 라고 해서 쫓아내야 하는데, 그런 왕 마귀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죽으려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누군가가 죽여서 죽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할 수가 없는데, 교인들은 평소에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니 제대로 성경을 볼 여유가 없고, 그래서 교회에 와서 목사가 하는 이야기만 듣다가 보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라고 하면, "아니 그런 내용이 성경에 다 있었습니까? 금시초문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거북스러워하는 구절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목사가 "여러분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만 중도탈락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라고 하면, 겁을 집어먹고 "예,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전혀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양은 자기 갈 길을 가는데, 그런데 목자가 자기 양을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양을 부르는데,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권세로 부른다는 말이죠. 권세로 그렇게 모가지를 잡으면, 그 어떤 세력도 목자로부터 양을 빼앗지 못한다는 겁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평소에 목사들이 "여러분이 목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만 중도탈락입니다" 라고 공갈을 쳐서 그동안 벌벌 떨었는데,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농땡이를 치면 그만 탈락이구나"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소형 녹음기가 있는데, 이것을 꽉 쥐듯이 주님께서 꽉 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귀신들이 천 마리가 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것이 눈에 보이는 목사들인데 말이죠. 그러면 주님이 자기를 쥐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구원을 빼앗아간다는 사기꾼들의 말에 속아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그들을 따라 간다는 겁니다. 겁이 나서 말이죠. 

물론 그렇게 가더라도 주님이 꽉 쥐고 있으니 상관이 없는데, 그것은 나중에 안다는 겁니다. 돈이라는 돈은 교회에 몽땅 다 털리고 난 다음에 말이죠. 장로도 되지를 못하고 그 교회에서 쫓겨난 다음에 "아하, 구원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졸음운전을 해도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는데, 여러분이나 저도 그런 경험이 다들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그런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졸음운전을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고가 나지 않는 타이밍을 주셨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생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은데, 자기가 돈을 좀 모았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사업도 타이밍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자기가 좋은 아이디어로 사업을 구상해서 열심히 해도, IMF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자기가 하던 일은 그냥 날아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 주님이 돈을 벌게 해주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잠언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아무리 말씀을 좀 보시라고 해도 보지 않으니 모르는데 말이죠. 그저 교회에 와서 자기가 기도하고 헌금한 대로 복을 받기 원하니까, 마귀들이 목사들을 앞장 세워서 돈을 다 털어 간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이만큼 살아온 것도 역시 주님의 은혜인데,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상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감추어진 것' 중심으로 !!

그렇다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복음 때문에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으로 돌아간다" 라는 것이 너무나 상투적이라서 달리 표현하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복음 때문에 돌아가기는 가는데, "이 세상은 감추어진 것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복음으로 돌아간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복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개신교나 천주교에서는 그것을 '교회'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교회를 위하는 것이 곧 복음을 위하는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눈에 보이니 말이죠. 여기에 이렇게 강대상이 있고 의자가 있고,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면 그게 복음을 섬기는 것으로, 그렇게 사람들이 원한다는 말이죠. 물론 목사도 원하지만, 사실은 교인들이 더 원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감추어진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꾸려고 하다가보니 어떻게 합니까? 그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라는 이름으로 송아지 형상으로 된 우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복음인가? 기적인가? 

그러니 이제는 교회 자체를 우상으로, 그렇게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 되고 말았는데, 즉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겠으니, 보이는 식으로 좀 나타나 달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식으로 나타나게 하면서, 사람들은 여기에 어떤 용어를 붙이는고 하니, 그것이 두 글자인데, 즉 '기적' 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주차장이 없는데 마침 옆에 빈터가 매물로 나와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빈터를 교회에서 구입하면 기적이고, 그렇게 않으면 기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서, 그것을 기적으로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미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여호와여,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민족이오니,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지금 자기들을 압박하고 있는 로마에서 자기 유대민족을 해방시켜줄 사람을 찾는다는 말이죠. 유대인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인데, 즉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주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주여, 목사님 월급을 제때 드리게 하소서 !!

지지리도 가난한 교회, 목사 월급이 50만원도 제대로 나오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지금도 그런 교회가 많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교회의 교인들이 새벽마다 기도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최소한의 교회운영이라도 되는 기적을 베풀어주시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복음 때문에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자기 교회가 잘 되면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겠다는 겁니다. 자기 교회를 그렇게 해주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으로, 그렇게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말이죠. 

성경은 구약부터 그렇게 해왔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한 번 추적해보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을 추적해보니,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안에 시한폭탄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마귀가 옹아리를 틀고 있었다는 말이죠. 

죄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고 !!

그러니 자기가 문제인데, 그것을 오늘 교재 56페이지에서 로마서 5장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죠.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죄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담 때문이라는 겁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도바울은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있어서 전혀 남에게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아마 그도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재물이 늘어나고 복을 주신다고 여겼지 싶은데 말이죠. 그렇게 자꾸 섬기면 어느 정도로 격상을 하는고 하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를 않고, 심지어 고난과 핍박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그런 경지에 이르는데 말이죠. 그들의 논리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어떤 주장을 했고, 또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떤 주장을 했습니까? 그들은 유대교에서 나오는 전통적인 경전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얻겠다 !!

예수님 당시에 그들이 어떻게 구약성경을 해석했는지, 거기에 관한 책이 서점에도 나와있는데 말이죠. 그것을 보면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얻겠다" 라고 하는 것인데, 이 심보는 만고의 진리이지 싶은데 말이죠. 

"공부해서 남 주나?" 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를 해서 남에게 주겠다는 사람은 없는데, 노력을 했으면 당연히 노력한 그 당사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데, 이게 틀렸다고 하면 말도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을 이미 우리는 선입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선입관으로 그들이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데, "하나님, 우리가 이 정도로 착하니,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소서. 그렇게 해서 옛날의 다윗시대처럼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대로, 즉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 것이 현실화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유대나라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 말이죠. 

절대 개인 !!

다시 말해서, "이미 목표는 정해졌는데, 그러니 이제 우리의 노력여하에 달렸다. 그런데 그런 성과를 얻으려고 하면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게 바로 거룩함이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거룩함을 얻으면, 정작 우리가 원하는 으뜸이 되는 나라는 주께서는 약속된 대로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최고의 절대적인 개인적 국가가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 개인' 이라는 것인데, 상당히 어려운 단어인데 말이죠. 남들에게 돋보이는, 으뜸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이런 욕망에 우리 내부에 누구나 다 들어있는데,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마치 멀미가 나올 것처럼 우리 속에서 울렁울렁하는데, 무슨 울릉도도 아니고 말이죠(ㅋㅋ). 

그래서 사람은 500억을 벌어도 만족해하지를 않는데, 1,000억이 눈앞에 보이는데 왜 500억에 만족하느냐는 겁니다. 1,000억이 나름대로의 으뜸인데, 그렇다면 1,000억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는 조 단위로 울라간다는 말이죠.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면 좋은 아이템이라고 하면서 한 방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그러니 도박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도박을 할 때 그것을 '올인' 이라고 하는데, 자기 앞에 걸린 판돈을 모두 다 건다는 말이죠. 그렇게들 사업을 하는데, 거기에 자기 돈만이 아니라 일가친척의 돈도 다 집어넣는데, 그렇게 되면 그만 사기를 당해서 한 방에 왕창 날아가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보증을 써서 망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빚 보증이 아니라 투자를 했다는 말이죠. 

짝패 !!

그러니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데, 그러면 그 욕심을 누가 자제할 수 있습니까? 그 욕심을 자기가 만들었으면 어떻게 자기가 해보겠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욕심은 숨어있는데, 숨어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만 숨어있는 것이 아닌데, 악마도 같이 숨어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악마가 같이 숨어있는데, 이것을 '짝패'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일종의 음양인데,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어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천국이 있으면 지옥이 있는데, 그렇게 모든 것은 짝패라는 말이죠. 악마는 나타나지 않는데, 다만 예수님이 나타날 때 악마도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은 악마를 버리지 않고 성도를 위해서 활용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가 되어서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돌아서면 또 자고하고 자만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는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 헌금을 해서 30배나 더 받았다" 라고 말이죠.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주님이 배후에서 마귀에게 시켰다는 겁니다. 

완전히 천상천하유아독존인데, 그래서 "은혜를 받고 나서 왜 그랬을까?" 라고 하면서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데, 그러면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을 주시는데, 즉 "너를 빼앗을 권세는 없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어떤 때는 로마서 8장의 말씀도 주시고 말이죠.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음매, 기살어!"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구원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이 얼마나 센지, 그것이 마귀보다 더 세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의 앞잡이인데, 그런데 그게 못난 앞잡이라는 말이죠. 

로마서 5장이 너무 어려워서 먼저 마태복음을 보겠는데, 21장 44절입니다.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 그런데 이게 설교시간에 잘 들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자체가 너무나 부정적이라는 것인데, 돌이 날아와서 사람을 친다는 말이죠. 이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그 우상을 보고 감탄을 했다는 겁니다. 

저 미소를 나도 본받아야지 !!

경주의 석굴암에 가면 미륵본존불이 있는데, 그 인상이 얼마나 자애로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을 준다는 겁니다. 높이가 6미터 정도 되는데, 그 불상의 인상을 보면서 서양인들도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래, 이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바로 저런 모습이야. 나도 본받아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바로 인간 인격의 최종적인 완성태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백제의 반가사유상도 역시 그러한데, 그 미소가 얼마나 오묘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말로서 표현하기가 힘든데, 어떻게 보면 평온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고 말이죠. 손을 턱에 고이고 묘한 표정을 앉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불교가 그런 우상들을 계속해서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최종적 경지에 도달했을 때는, 저런 인격과 인품이 뿜어져 나와야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미 목적과 목표가 있는데, 저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을 하면서 마음을 낮추어야하고,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갓바위에 오르면서 !!

하지만 그러한 자기 부정도 이미 긍정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까짓 것 갓바위에 오르는 고생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등산과는 전혀 거리가 먼 70이 넘은 할머니들도 갓바위에 올라간다는 겁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말이죠.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데, 젊은 사람에게도 만만치 않은 높이인데 말이죠. 

갓바위로 올라가는 코스가 두 군데인데, 여기 말고 경산의 와촌 쪽으로 해서 올라가면 계단도 있고 해서 조금은 편하게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올라가면 절에서 주는 향기가 나는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죠. 다들 먹어보셨지요? 

(녹취 구 - 목사님, 제가 마산에 있을 때 그 동네 목사님들과 와촌으로 올라가서 그 반대쪽으로 내려왔는데, 거기가 우리교회가 있는 쪽이죠? 방금 제 아내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그때 엄청 힘들었다고 하네요. 지금 같으면 올라가지 못한답니다(ㅋㅋ). 사실 그때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기도원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 대부분이 앉아서 조용히 불경을 읽고 있었어요. 놀러간 목사들은 떠들고 말이죠.) 

그러면 할머니들이 평소에 그렇게 아프다고 하다가, 어떻게 갓바위까지 올라가는고 하니, 어디서 그런 초원적인 힘이 나오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야말로 목적이 이끄는 삶인데 말이죠(ㅋㅋ). 모든 종교에 목적이 있는데, 그러면 자기가 살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결국에는 자기가 살아남아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죠. 

미륵본존불을 '깨트리시는' 예수님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을 그만 깨트려버린다는 겁니다. 즉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우상을 날아온 돌 하나가 그만 깨버리는데, 그리고 나서 그 자리에서 태산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 태산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 나라가 좋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어져 있는데, 그런데 감추어지지 않은 나라는 어떻습니까? 근사하고 멋있다는 겁니다. 마치 경주 석굴암의 미륵본존불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깨부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천국이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자기의 목적을 깨는 숨겨진 목적이 바로 하늘나라라는 말이죠.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닌데, 하늘나라를 만드신 분이 오히려 "다들, 꿈 깨라!" 라고 하시면서 그 하늘나라를 그만 깨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시면 천국에 갑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하늘나라에 간다" 라고 생각을 했을 때,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자기가 끄집어낸 방법론과 하늘나라를 연결시킨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이 기존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자기가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면,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과 천국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교회에서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데, 그러면 그 방법이 가능해야 합니까? 불가능해야 합니까? 반드시 가능해주어야 그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만약에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가능한 이야기를 해주는 곳으로 옮긴다는 말이죠. 

천국에 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자기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면, 그것은 있으나마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그림 속의 떡인데, 그러면 자기는 희망을 끊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매우 부정적 사고방식인데, 허탈, 혹은 허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천국은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으면, 그러면 그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라는 구조인데, 그런데 이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공격하는 돌 !!

지금 로마서 5장이 너무나 어려워서 마태복음 21장 44절을 먼저 하고 있는데, 여기서 "돌이 떨어진다" 라는 것은, 사람들이 천국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에서 그만 돌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돌은 "우리 같이 있자" 라고 하면서 떨어진 돌이 아니고, 거기에는 어떤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것이 공격용 돌인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침노' 라고 하는데 말이죠. 세례요한이 이 땅에 와서 좋은 소리를 했습니까? 나쁜 소리를 했습니까? "회개하라!" 라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인데, 그것을 예수님은 "세례요한 때부터 이 세상은 침략을 받는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외계인에게 공격을 당한다는 말이죠.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런데 하늘나라가 그만 사람들을 공격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돌이 맞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위에서도 돌이 내려오지만, 인간 돌에 부딪치는 방법으로 깨지고, 그렇게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하면 위에서 돌이 날아온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 돌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다 깨트리고 만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폭파'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여기 43절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늘나라는 반드시 빼앗기는 절차가 들어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 열매를 맺는 백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숨겨지고 감추어졌다는 말이죠.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이방인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들이 기대한 천국에 간 것이 결코 아니란 겁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는, 유대인들이 포기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몫으로 넘어왔다는 말이죠.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보실 때 이미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라는 것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방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나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이 자기들 잘난 척을 하려고 일방적으로 나눈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들인데 어디 건방지게 나누고 말고 해?" 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의 교만성을 질타하는데, 그런데 그게 결코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있는 민족과 없는 민족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다 준 것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셨기에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되면, "나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주세요"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니가 과연 인간인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잖아?" 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이죠. 

나는 인간이다. 그러니 말씀을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나는 인간이다. 그러니 말씀을 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서,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렇게 저주를 받으려고 말씀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괜찮지만 더욱 더 복을 받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뭔가 더 챙기기 위해서 말씀을 달라고 하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자기 뜻대로 말씀을 줘버리니까, 우리는 "아하, 주님은 나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구나. 스스로 말씀을 던지시고 그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왜 깨트립니까?

아무튼 그렇게 돌이 와서 깨트리게 되면, 우리는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이 드러나는데, 주님에 의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 잘못이라서 깨트립니까?" 라는 소리는, 그게 주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나는 인간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완전히 무효화를 시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에 가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무효화를 시킨 그분이 우리에게 뭔가 새롭게 주입을 시켜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엉터리 천국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만 얻어터졌으니, 진짜 천국을 아시는 분이 진짜 천국의 속성을 우리에게 담아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주신 것으로 인해서 진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기 가능성으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그야말로 잘못이라는 말이죠.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저기 플랜카드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뭐라고 적어놓았는고 하니까, "이 플랜카드를 사진으로 찍어서 식당에 오시는 분에게 10퍼센트 할인을 해드립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진도 없이 그냥 들어가서 10퍼센트 할인해달라고 하면 식당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냥 해주는 식당도 있기는 있는데,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니 말이죠. 

어찌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님이 혼인잔치를 벌리는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바쁘다고 하면서 오지 않으니 길에 있는 사람들은 데리고 오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길에 있다고 해서 아무니 다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혼인예복을 말이죠. 그러면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미리 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것이 참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똑바로 해!"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인데 말이죠. 즉 주님만 아시는 것을 감추어놓고, 그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에게 "너희가 최선을 다 했는가?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준 다음에, 그것이 있는 사람은 데리고 가고 없는 사람은 탈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구원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이지,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준비해서 넣어준 것이 없으면 탈락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이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닙니까?" 라고 하면, 주님은 "그것을 이제 알았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의 양심대로, 그리고 자기가 열심히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는 말이죠.

성경은 참으로 희한한 책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을 만들어놓고 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에덴동산을 만들어놓고 '추방' 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추방을 시켜놓고 찾아가서 건지시기 때문에, 추방된 입장에서는 "나를 좀 건져주세요" 라고 하는 고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천국은 하나님과 인간들이 즐겁게 노는 동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이는, 받은 면류관도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그런 나라가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은 숨어있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저의 성질 같으면 오늘 강의제목을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하고 싶은데 말이죠. 아무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구원받을 권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구원의 모든 권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에게만 있는데,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주님이 저를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을 전혀 믿지를 않는데, 모든 것을 다 주님에게 맡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안 믿음'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 믿음을 믿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다 하셨다는 말이죠.

이런 사람은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는데,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 것처럼 말이죠. 인생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데, 그게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한 것인데, 그것을 신약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인데,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의 광야에서의 방식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인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주의 영'이 동행을 한다는 말이죠. 구약은 눈에 보이는데, 그런데 신약은 주의 영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굉장히 난감하다는 겁니다. 눈에 보인다든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동행을 다음과 같이 파악해야 하는데,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성령께서는 고맙게도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내가 이 세상을 이겼노라" 라고 하시면서 승리를 반복케 하는 작업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나게 되어있는데, 우리에게는 항상 "이것만큼은 놓지 않으리라"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자기 의' 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죠. 즉 "제가 이만큼 수고했는데, 주님이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게 '절대적 자아' 라는 것인데, 그게 항상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것으로 줄 곧 가면서 그만 지옥에 가는데, 그런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절대적 자아, 즉 "내가 최고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이게 곧 행복이야" 라고 하는 악마적 본성, 그게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노출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노출을 시켜서 십자가를 그 앞에 마주치게 하신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데, 26절입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여기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결코 증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그런 자들의 특징이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은 성령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삼위일체를 무엇을 증거하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해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으면 삼위일체가 아닌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삼위일체는 복음이 아니고 인간들이 만든 것인데, 물론 제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없지만 말이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주(主)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존재에서 기능인으로 !!

그렇게 예수님이 주가 되는데, 바로 그 주와 우리 사이에 성령께서 오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은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기능'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존재에서 기능으로 만든다" 라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기능인이 되는데, 자기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노숙자든 재벌이든 간에 말이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의 나이, 학력, 직업, 교회의 직분, 그런 것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데, 성령을 받았으면 누구든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의 목사님은 기름부음을 받는 자입니다" 라고 하면 이단인데, 왜냐하면 그 목사가 그런 말을 하는 뉘앙스가 무엇인고 하니, 목사가 그런 말을 하니 교인이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데, 그것은 "나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라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목사도 있고, 대부분은 교회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희들의 잘못은 내가 지적할 수 있지만, 나의 잘못은 하나님이 지적하신다. 그러니 쫄다구가 감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에게 시비를 걸지마" 라고 나오는데, 쉽게 말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권력이 되는데, 그래서 '카리스마' 라는 용어를 사용해가면서 교인들을 정신적으로 세뇌를 시킨다는 말이죠. 

지금 주일 낮 시간에 고린도후서 11장을 설교하고 있는데, 아마 다음 주가 되면 거기에 관한 설교를 하지 싶은데, 지금은 설교시간이 50분밖에 되지 않아서 다른 부분까지 하지는 못하고, 더 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우리의 오야붕이 되어주세요 !!

아무튼 마귀와의 관계는 권력관계인데, "제발 눈에 보이는 사람이 우리의 대장이 되어 주세요" 라고 교인들이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목사를 교주로 만드는 것은 목사의 잘못이 아니라 교인들이 그것을 원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워낙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목사로 대체하려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죠.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 라고 하는데, 

그게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인데 말이죠. 

그 섬김이 무엇인고 하니, 쓴 잔을 마시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겁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주님 중심이지, 목사나 장로 중심이 아닌데, 그러니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기 중심도 아닌데, 어디까지나 주님 중심이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 중심이 되어버리면, '나' 라는 존재 중심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어제 설교시간이 2시간이었으면 이런 말도 다 했지 싶은데 말이죠.

나의 구원이 소중합니까? 피가 소중합니까?

"목사님, 존재와 기능이 무엇입니까? 너무 어렵게 말고 좀 쉽게 말해주세요" 라고 한다면, 저는 "자기 구원이 소중합니까? 피가 소중합니까?" 라고 다시 묻고 싶은데, 이 질문 한 방으로 모두 다 끝났다는 겁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이 소중해지면 그것은 존재가 되고, 반면에 피가 소중하다고 하면, '나' 라는 존재는 이미 기능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피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데, 즉 피가 있어서 구원이 나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 라는 것이 있고 피가 그 '나'를 구원하게 되면 계속해서 존재가 되고 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지금 로마서 5장을 하기 이전에 계속해서 뜸을 들이고 있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돌맹이가 와서 다 부셔버린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돌에 걸리는 인간들은 모두 다 자빠진다는 말이죠. 이게 저주의 보편성인데, 즉 모든 것을 악마의 세계로 획일화를 시키고 일반화를 시키고 말았다는 겁니다.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원래 고린도 교회가 어떠했는고 하니, "우리 중에서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어리석은 우리를 택하셔서 지혜가 있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라고 하는데,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구원을 받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즉 '나' 라는 존재가 아니라, 진짜 존재를 자기를 대신하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에 계신다는 겁니다. 즉 대표적인 절대 존재가 이미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그 존재의 지체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지체가 된다는 말과 기능이 된다는 말이 같은 뜻인데, 왜냐하면 그 머리에서 나오는 일하심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뭐라고 합니까? "니가 돈이 없다고 너무 꿀리지 마라. 직업이 없다고 너무 꿀리지 말라. 병이 들었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지 마라. 너는 자랑스러운 예수님의 일군이다. 천사도 부러워해" 라고 하는데, 그게 고린도전서에 계속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저는 성경을 그렇게 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그래서 "사기를 당해도 고소하지 마라.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존재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피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피를 가리는 것은 다 제거하는 쪽으로 성령께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피를 교회가 가리면 교회도 부수어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구원을 받지 교회로 받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결국 그것을 누가 막는고 하니, 자꾸만 '나' 라는 존재가 막는데, 자꾸만 자기 존재를 멋있게 포장해서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귀가 뒤따라온다는 말이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이 정도로 해놓고 로마서 5장을 보겠는데, '존재에서 기능으로' 라는 것이 과연 그러한지, 그게 철학적인 정리에 불과한지, 아니면 복음인지를 보자는 겁니다.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나' 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내가 잘못 생각했을 때 죄는 나와 함께 있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집과 학교에서 그렇게 배워왔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똑바로 살아. 니가 잘못하면 죄가 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평생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행동을 바르게 하면 죄지 짓지 않게 되고, 행동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을 때는, 그게 죄가 되어서 벌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떤 압박감과 부담감을, 그런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평생 안고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니가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그것을 계속해서 따지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나' 라는 존재가 아니라 아담의 기능인데, 존재는 아담으로 충분한데, 아담 외에 다른 존재는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즉 아담의 새끼를 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흑인, 백인, 황인,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말이죠.

장독, 그리고 육(肉) !!

옛날에는 집집마다 다들 장독이 있었는데, 우리 집도 할아버지가 계실 때 장독이 거의 20개 정도가 있었지 싶은데, 하도 식구가 많아서 말이죠. 그때는 어머니가 엄청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간장이나 된장과 고추장과 같은 것을 일일이 다 담그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 제가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로마서 5장을 보았는데, 그때 딱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장독'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이 장독에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짐승이 들어갔고, 그리고는 장독의 뚜껑을 닫았다는 말이죠. 제가 신학교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는 겁니다. 

이 뚜껑을 죄라고 본다면, 죄가 눌리고 있어서 죄가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짐승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치는데, 그렇게 새끼를 치는 것을 사도바울은 한 글자로 표현하는데, '육(肉)' 이라고 말이죠. 물론 그게 앞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육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라고 하고, 과학에서는 '호모사피엔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원래는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것이 '지혜로운 종' 이라는 의미인데, 그게 크로마뇽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현대인', 혹은 '현세인' 이라고 하는데, 즉 원시시대 이후라는 말이죠.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그러니 우리는 처음부터 인간이었고 인간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런 인간이 새끼를 치고 번식을 하는데, 그런데 교회에 가면 그것을 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복이 아닌 독인데, 왜냐하면 갇혀있다는 말이죠. 

죄의 뚜껑아래에서 아무리 번식을 해봐야, 그것이 바로 '육' 이라는 것인데, 이게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육이라고 해야하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걸어간다면 "사람이 가네" 라고 하지 말고, "육이 가네"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나와 똑같은 육이 가네" 라고 말이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는데, 아마 꽃이 들었으면 기분이 굉장히 나빴지 싶은데 말이죠. 결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지가 않은데, 그런데 왜 그런 노래를 부르고 또한 사람들이 좋아하는고 하니, 그것은 성경말씀을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시편에서는 인간을 구더기라고 하는데, 혹은 지렁이라고도 하고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서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라고 하는데, 야곱이 자기 택한 백성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한 욕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이죠. 

(사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그러니 이 세상은 인간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바로 이 세대의 사고방식인데, 그래서 어떤 험한 일이 벌어지면 인간들끼리 지혜를 모으면 된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수소폭탄실험을 하면 인간들끼리 지혜를 모아서, 즉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지혜를 모아서 대화를 잘하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종교는 악마가 만들었기에 !!

하지만 북한은 나라가 아닌데, 그야말로 종교집단이란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는데, 물론 제가 비중이 있는 정치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죠. 문선명의 통일교나 박태선의 전도관, 그리고 이만희의 신천지, 그게 바로 북한이라는 겁니다.

종교집단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여호와 증인과 대회가 되던가요? 안 되는데, 물론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마을과도 대화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증인의 경우에, 그들은 그 모든 뜻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헌혈을 하지 않고 군대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은 신의 뜻이라는 겁니다. 

요즘 무자비하게 설치고 있는 IS의 경우에, 그들을 보고 "왜 테러를 합니까? 사람의 목숨을 왜 그렇게 가볍게 여깁니까?" 라고 하면, 그게 먹혀들어 가겠느냐는 말이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무지한데, 이 종교는 악마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북한은 나름대로의 신의 계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신이 보이는 신이라는 겁니다. 사실은 북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국가가 다 그러한데, 국가는 느부갓네살의 후예들이라는 말이죠. 다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데, 그만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 정신병을 자제하려고 하면 눈에 보이는 영웅이 나타나서 자기를 감싸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거기서 안도감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상의 모든 국가는 계속해서 지도자가 바뀐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악마의 나라이니 말이죠. 

어거스틴의 '두 왕국' !!

루터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은 악마의 나라다" 라고 말이죠. 칼빈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어거스틴은 왕국이 두 개가 있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가 로마가 망할 때였는데, 로마만 쳐다보고 있다가, 그런데 그 로마가 망하게 되니, 그게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 로마는 기독교 국가였는데, 그런데 그게 하늘나라가 아님을, 하늘나라는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을 로마라는 기독교 국가가 망하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실은 망하기 이전부터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망할 때 그런 주장을 하면 도피가 되니 조금은 수상하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참 복잡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설교시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육' 이라고 해야하는데, 아주 간단히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은 '육' 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데, 무슨 세포조직 정도로 여긴다는 겁니다. 

영이란, 예수님의 질서 !!

성경에는 이 육에 대한 짝패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영'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귀신을 생각하고, 수증기가 올라가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질서를 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귀의 질서가 육이고 말이죠. 그런데 둘 다 눈에 보일 수 있는데, 육은 보이고 영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질서가 나타난 것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소자가 눈에 보이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는데, 그런데 보이기 때문에 믿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게 주님의 전략인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이죠. 보이는 하나님을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눈에 보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제자들은 그야말로 혼란 속에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보이는 주님과, 즉 자기들과 똑같이 생긴 인간과 하나님과는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전혀 없었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지금은 너희들이 모르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그때는 알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보이는 주님을 믿지 못한 것은 주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육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영으로 존재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영은 어린아이, 즉 소자라는 겁니다. 

이 '육' 이라는 것은 뚜껑이 덮여있는데, 단지 안에 아담을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는데, 그 안에서 새끼를 치든 말든 말이죠. 그래서 그 새끼가 지금은 70억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그러니 그 단지가 제법 큰데, 무려 70억이나 들어가니 말이죠. 그러니 큰 단지, '옹기' 라고 할까요? 그렇게 옹기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죄는 인격 !!

그런데 죄가 와서, 이 죄는 인격인데, 그래서 마귀라고 번역해도 괜찮은데 말이죠. 우리가 흔히 "죄를 지었다" 라고 할 때의 죄가 아닌데, 이 죄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인격이라는 겁니다. 그 죄가 와서, 즉 마귀가 와서 뚜껑을 닫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서 새끼를 치는데,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을 구축하는데, 그게 문화고 문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문명 속에서 종교가 나오는데 말이죠. 예술, 과학, 정치, 종교, 이 4가지가 나름대로의 생존을 위한 진리체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 성경말씀이 오는 순간, 이 존재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70억이 되던 그 얼마나 되던 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었던 아담만이 존재이고, 그 나머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아담이 머리가 되고 거기서 새끼를 친 것이니, 그래서 아담이 가지고 있던 기능을 계속해서 발휘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의 기능은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기능이 작용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은 각자 어떻게 살아가는고 하니,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날마다 구분을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양심대로 산다"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나쁜 짓이니까 하면 안 돼.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그런데 이것은 말씀에 의하면 착한 짓이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날마다 그 기준을 정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기준이 변한다는 것인데, 50대가 다르고 60대가 다르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합리화를 시키니 말이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간다는 겁니다. 

'양심' 이라는 기준으로 인해서 !!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기준을 정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이 이미 악마가 아담에게 먹으라고 준 기준이기 때문에, 그래서 악마의 스트레스에 그만 휘둘리고 만다는 겁니다. 자기가 정한 기준 때문에, 자기가 힘들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정한 '양심' 이라는 기준으로 인해서 너무나도 힘이 든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인데, "내가 이번에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아마 이번 화요일 정도에는 벌을 받지 싶다" 라고 한다면, 그런데 벌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내 자식에게 벌을 내리지 싶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딸에게 전화가 오는데, 뭐라고 합니까? "엄마, 우리 그이가 보증을 잘못 써서 그만 다 날렸어. 망했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엄마는 "다 내 탓이다" 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는데, 그게 바로 악마의 수법이라는 말이죠. (그때 막 목사님에게 전화가 걸려옴. ㅋㅋ)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그 여인이 허기가 지는데, 즉 갈증, 목마름이라는 겁니다. 마귀가 어줍잖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목사를 앞장세워서 교회에 다니는 내내 목마름, 그것을 '주눅든다'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양심이라는 그 거대한 콘크리트에 깔려서 꼼짝도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나는 경건해야 돼. 거룩한 삶을 살아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자식들이 저주를 받는데, 그러면 안 되지. 나 하나 희생해서 자식들이 복을 받도록 해야지" 라고 하면서 벌벌 떨게 만든다는 겁니다. 

단지 안에 갇혀서 !!

이제 생각이 났는데, 옹기가 아니라 '단지' 라는 겁니다. 단지, 이게 오늘 강의제목인데 말이죠. 그렇게 단지 안에 갇혀서 지금도 기도하고 헌금하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 싶어서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벌벌 떤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는 사람은 그 특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단지에 갇힌 사람은 그게 아니라, "제가 최선을 다했으니 좀 봐주세요" 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을 때리려고 하면 차라리 저를 때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벌벌 떨면서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피가 꽃보다 아름다워 !!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는 사수하고 방어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게 악마의 특징이고 악마에 속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성령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마귀에게 속는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마귀에게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속는데, 그런데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고맙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 같은 저주받은 인간을 인간을 천국에 넣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이미 천국백성으로 삼아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피의 기능인데, 즉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돈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피가 그 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피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아는고 하니까, 악마가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할 수만 있으면 이 복음의 광채를, 그 자유함을 가리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눅이 들게 만든다는 겁니다. "여기 성경말씀이 보이지 않아? 너는 이 말씀을 지키지 못했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단지 안에 단지 !! 

그래서 주님께서는 또 하나의 단지를 만드는데, 즉 단지 안에 단지를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악마에게 속한 단지 속에다가 또 다른 단지를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또 다른 단지가 있고 불신자는 없는데, 그래서 악마에게 실컷 당하다가 지옥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의 그 단지는 무엇인고 하니,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는 것인데, 이게 예수님의 단지인데 말이죠. 기존의 이 단지에서는 죄가 왕 노릇을 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죄를 죄가 되게 끄집어서 내놓고 어떻게 하십니까?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루터가 이런 소리를 했는데, "실컷 죄를 지어라. 그리고 피에 감사하라" 라고 말이죠. 주님께서는 마귀를 통해서 실컷 죄를 짓게 만들어놓고,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하십니까? 주님 자신의 의로 인해서 감사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가 없이는 의가 나오지 않는데, 죄와 의, 그게 서로 짝패라는 말이죠.

자기의 모자람이 없으면 주님의 위대함이 증거되지를 않는데, 자기의 위대함이 증거가 되지 말이죠. 즉 "나는 예수를 잘 믿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시는데, 여기에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이 동원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남을 용서해라. 빛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라. 가난한 자에게 돈을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삶의 터전으로 여겨라. 세상을 벗으로 삼은 것은 악마에게 속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쳐들어오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렇게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이 우리에게 주입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주여, 너무 심합니다. 그래도 돈은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라.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 말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죽으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통해서 죄가 더욱 더 드러나면서 왜 피의 기능인이 되어야 하는지, 즉 왜 '나' 라는 존재가 '나'를 쥐고 있으면 안 되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죠. 

(마 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그것을 로마서 5장 14절에서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아담은 그림자다" 라는 겁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물론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말이죠.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면 아담은 천국에 갔습니까? 지옥에 갔습니까? 아담은 천국에 갔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약속을 주었고, 그 약속으로 인해서 자기 아내의 이름이 '여자'에서 '영생'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면서 누구와 짝이 됩니까? '생명' 이라고 하는 자기 아내와 함께 짝이 되었으니, 그러니 아담은 자기가 흙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 아내를 통해서 일어날 약속의 실현, 그 약속의 구체화에 희망을 걸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가죽옷을 입고 말이죠. 

그 아담의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죄도 없으신 분이 고생을 엄청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 고생 가운데서 죄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결국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는데, 하늘이 열렸다는 겁니다. 즉 부활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즉 철학, 고고학, 언어학, 심리학, 과학 등등, 그런 것이 부활을 시켜줍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자기가 사업을 한 것, 농사를 지은 것, 학생들을 가르친 것, 그게 부활을 시켜주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친절하게 장사를 잘해도, 그렇게 했다고 해서 부활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 라는 존재에서 성령을 받아서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론 몸은 아담에게 속했지만,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겁니다. 겉 사람은 후패해도, 즉 우리 몸은 어디 아프지 않은 곳이 하나 없더라도, 속 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기능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똑같은 케이스로 !!

이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 이야기를 우리에게 왜 할까요? 사도바울은 과거에, 즉 사울 일때는 자기가 절대적 개인으로 살았던 자인데, 자기를 하나님과 바로 연결을 시켜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살겠다고 하던 자인데, 그런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바로 나와 똑같은 케이스로 여러분은 구원이 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제가 받은 성령과 똑같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이 로마서 5장의 말씀도 여러분은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동의가 되지 않으면 자기와 같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이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면 사도는 어디에 갔습니까? 여기에는 사도가 없는데, 이전에는 자기 몸이 아담을 앞장세우다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또한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고 말이죠.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과연 그러한지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말이죠. 과연 옮겨집니까? 산이 어떻게 옮겨지던가요? 전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기능인으로, 기능인으로 !!

제자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언제 알았는고 하니, 자기들이 성령을 받고 보니,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 예수님을 보고 산이 알아서 거기에 맞추어준다는 겁니다. 자기의 믿음을 보고 맞추어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자기 안에 계시는 분 때문인데, 그러면 자기는 그분의 기능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 산은 주님의 뜻대로 옮겨질 수 있고, 또한 무화과나무도 뽑혀서 바다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누가 했다는 겁니까? "나의 믿음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겨자씨보다 더 큰 믿음, 즉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겁니다. 

불의한 재판관 !!

어떤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재판을 받으려고 온 사람과 일대 일로 상대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을 보지 않는데, 인간과 인간으로 ,즉 일대 일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봅니까? 그 사람의 기능을 보는데, 즉 억울한 것을 재판해주는 것이 기능이라는 말이죠. 

따라서 억울한 과부의 경우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 재판을 요구할 수 있는 기능자로서 계속 청구를 하니, 재판관이 뭐라고 합니까? "내일 오소. 근무시간이 끝났습니다" 라고 하다가, 자꾸 귀찮게 하니 "무엇이 억울해?" 라고 하면서 들어주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능인으로 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늘 교류할 수 있는 기능인으로서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죠.

(눅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눅 18: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과부의 기도를 본받아라. 안 된다고 하지 말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 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가르쳤는데,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게 말이죠. 사기를 칠 때는 단골메뉴가 이것인데, "열심히 하면 주님께서 들어주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원했던 바 그런 기도가 있다고 하면,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기능인으로 사용함을 받도록 자유롭게, 선악의 기준에 벗어나서, 왜냐하면 선악의 기준이 아니고 피로서 구원을 받기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혜택을 주셨다는 것을 마음껏 자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다시 보기를 소원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잘났다고 우기다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전혀 잘난 것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9,22 오후 5시에 마침.
언제나 서툰 기능인으로 살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