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20강-죽음 1710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14. 08:16
2017-10-13 23:18:56조회 : 8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0 - 죽음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0 - 죽음

07,10,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죽음이라는 블랙홀, 이 블랙홀은 생각과 세상원리의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죽음에 갇혀있는 인간 !!

여기에 '죽음'이 나오는데, '죽음의 블랙홀' 이라고 말이죠. 오늘은 이 죽음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인간은 가봤자 마지막에는 죽음인데, 자기가 미국에 살던 브라질에 살던, 꼴 보기가 싫은 사람이 있어서 도망을 쳐서 살던, 남극이나 북극에 살던, 그 어디에 살던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데, 그러니 인간의 가는 길을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정해져있다는 것은 갇혀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은 죽음에 갇혀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죽음이 그렇게 포위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다' 라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살고자 하는 의지와 죽이려고 하는 힘이 늘 투쟁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바로 이 죽음의 힘을 의식해서, "이 죽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을까?" 라고 해서, 여기서 종교가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죠.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불교가 있었는데, 이 불교가 인도의 힌두교의 영향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힌두교와는 상관이 없고, 우리나라의 샤먼, 즉 무당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종교는 처음에 생길 때의 교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 나라의 민중들이 받아드릴 당시의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일단 그렇게 해서 받아들이면 그게 그 나라의 종교가 된다는 겁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

히브리서 2장의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해서 종교를 받아들였다고 보면 되는데 말이죠. 여기서 "죽기를 무서워했다" 라는 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면, 불행이 무섭다는 것인데, 어떤 일을 했을 때도 그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무섭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 앞에 있는 죽음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렇게 무엇인가가 무섭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관한 문제이고, 이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죄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섭다는 겁니다.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벌벌 떠는데, 그때는 경찰이 지나가기만 해도 괜히 겁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죄의식은 무엇과 연결이 되는고 하니, 처벌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즉 자기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처벌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처벌이 없어도 죄의식 자체가 처벌이 된다는 말이죠. 무섭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처벌로 간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처벌의 끝이 어디인고 하니, 결국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데, 이것을 불행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데 그것을 불행한 사태로 보는데, 그것은 평소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죽음에 시달리고 있는지, 즉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나 강렬하다는 겁니다. 

종교는, 처벌에 대한 해결책 !!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기반에 있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끄집어내어서 해결하려는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종교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는고 하니, 이 처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처벌에 대해서 "내가 나를 처벌한다" 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불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신이 나를 처벌한다" 라고 하는데, 물론 불교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을 믿는데, '나' 라는 것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니 말이죠. 그렇게 신이 처벌을 하기 때문에, 무서움을 해결하려고 하면, 신에게 "나를 처벌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아부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는데, 우리나라의 단군을 비롯한 모든 제천의식은 신에게 아부를 하는 것인데, 단군 자체도 무당이고 말이죠. 춤을 추든지, 재롱을 피우든지, 돈을 바치든지, 정성을 바치든지, 자기의 각오를 바치든지, "앞으로 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아부를 해서 신의 처벌을 모면하도록 해야한다는 겁니다. 

아부법과 처벌법 !!

그렇게 하려면 신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하는 '아부법'이 있을 것이고, 물론 이것은 제가 방금 지어낸 용어인데 말이죠(ㅋㅋ). 그리고 처벌법이 있는데, 그렇다면 아부법과 처벌법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요? 법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든 무엇이든 전부가 다 법으로 되어있는데, 즉 계명인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계율' 이라고 하고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 '팔정도(八正道)'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율법적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바른 생각 바른 행동, 그렇게 해서 죽 나열이 되는데, 그러면 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르지 않은 행동과의 경계선이 처지게 된다는 말이죠. 즉 이 선을 넘으면 바르지 않는 행동, 이 선을 넘지 않으면 바른 행동,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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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정도(八正道) - 열반에 이를 수 있는 8가지의 바른길(正道)을 말한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뗏목에 비유하여 팔도선(八道船), 또는 팔벌(八筏)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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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불교에서는 바른 행동과 바르지 않은 행동을 구별짓기 위해서 계율을 만들고, 그 계율에 의해서 한국불교가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불교신자들이 고스란히 지금 어디로 갔는고 하니, 통일교, 안산홍, 신천지, 구원파 등등, 그렇게 기독교 계통으로 다 갔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의 정통 장로교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9장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라고 하는데, 즉 이미 그렇게 결정을 다 해놓았다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말이죠. 그러니까 그동안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쳤던 종교가, 성경말씀에 비추어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겁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인간은 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무서움, 처벌,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종교라는 영역에 스스로 가담해서, 계율과 계명을 통해서 신에게 아부할 것은 아부하고, 드릴 것은 드리고, 순종할 것은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해서 바른 존재가 되고자 했다는 말이죠. 

아, 회심곡(回心曲) !!

추석이나 설에 TV를 보면, 유명한 국악인이 나와서 판소리를 하는데, 그 중에서 저와 나이가 똑같은 이상해의 부인인 김영임이 나와서 부르는 '회심곡' 이라는 것이 있는데, 모두들 알지요? 거기에 보면 천국과 지옥에 나온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어릴 때부터 그것을 들었는데, 물론 그때는 다른 사람이 불렀지만 말이죠. 

그 곡을 전부 다 들으려고 하면 30분은 족히 걸리지 싶은데, 엄청나게 길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염라대왕에게 가서 자기가 신에게 얼마나 아부를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아부의 정도에 따라서 지옥에도 등급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한 사람은 극락에 가있고 말이죠. 

그러니 그 회심곡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죽고 난 뒤의 정보를 미리 알았으니 살아생전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서 복을 받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그냥 가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인데, 조선의 민중들 심성 속에 그것이 빈틈이 없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 마음 그대로, 교회로 !!

그래서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교회에 나오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상급만 이야기하면 전부가 아멘을 연발한다는 말이죠. 상급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예수님만을 믿었지, 지금까지 교회에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구원을 받더라도, 팬티바람의 부끄러운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과거에 당신이 하늘나라의 확장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교회에 충성하고 목사를 섬기면, 거기에 대한 상급의 마일리지가 쌓인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늘나라에서 이왕이면 더 좋은 자리에, 동서보다도, 시어머니보다 더 좋고 놓은 자리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교회가 그러한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해주는데, 그러니 그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도시고 시골이고 간에, 그리고 교수든 백수든 간에 팍팍 꽂히는데,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무엇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그것을 왜 마다하겠느냐는 것이죠. 

자기도 모르는 자기에게 숨어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해주는데, "하면 된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자기도 천국에 갈 수 있고, 그리고 거기서도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왜 거부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막 적금을 탄 것을 덜렁 교회의 주차장을 넓히는데 내놓는다는 것이죠. 아내와 의논도 하지 않고 말이죠. 

제 주위에도 그렇게 해서 1억을 바친 사람이 있는데, 이단에서 속아서 그런 짓을 하니 얼마나 기가 찬지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그 사람은 이단인 줄을 전혀 모르는데, 아무튼 자기의 가능성을 인정해준다고 하면, 돈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그 귀한 돈이 말이죠.

자아와 주체 !!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담의 자손, 즉 범죄한 자손인데, 이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비정상' 이라고 했는데, 그런 비정상적인 아담에게서 나온 자아가 생각하는 '나' 라는 것과,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즉 창세 전에 예수님이 익히 아는 '나' 라는 것, 그것을 지난 수요일 설교시간에 '주체' 라고 했는데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니 앞의 것은 '자아' 라고 할 수 있고, 뒤의 것은 '주체'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자아가 있는 줄을 몰랐는데, 왜냐하면 아담의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자아, 즉 '나' 라는 것은 육신의 범위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담 안에, 즉 "육신의 범위 안에 있다" 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의 두려움 안에 있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리고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 안에 있다는 것은, "무조건 나는 살고 보자" 라는, 그런 식의 정신상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 전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체는 무엇인고 하니, 그 '나'는 아담에게서 나온 '나'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생뚱맞은데, 그런데 첫 번째 '나'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품고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의 예정된 자를 위해서, 즉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 자들,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의 '소속'을 알려줘 !!

그렇다면 아담은 살고 싶어서 환장을 했고, 반면에 주님은 죽어도 괜찮다고 하셨고, 그러니 거기에는 다리가 끊어져있는데, 완전히 단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연결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어떤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속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자리를 말이죠. 성령께서 찾아오지 않으면 살고자 하는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나 인데, 그러니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외에는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라는 겁니다. 

요즘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이 취직이 되지 않아서 그야말로 난리인데,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서 채 한 평도 되지 않은 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생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도 비싼 곳은 월세가 50만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미 학교는 다 졸업을 했고,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취직은 되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하루종일 알바를 하다가 밤늦게 그 좁은 고시원에 오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과연 예수님이 생각이 날까요? 여러분도 다 그런 생활을 경험했지 싶은데 말이죠. 그 넓은 서울시내를 돌아다녀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된 집이 있습니까? 아무리 집이 많더라도, 그런 집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 집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지, 예수님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가용을 타고 친정에 가네 ♬

그러니 "일단은 살고 보자" 라는 것인데, 다른 생각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빨리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서 결혼도 하고, 그렇게 해서 예쁜 마누라와 함께 고향이 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가용을 타고 친정에 가네 ♬" 라는 노래도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 듣는 척을 하는데, 모두들 알지요? (ㅋㅋ) 물론 요즘은 백수도 다 자가용이 있지만 말이죠.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지리시간에 통계를 보니까, 그때 미국에는 3명당 자동차가 한 대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는데 말이죠. 그때 우리 반에는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집이 단 한 군데도 없었는데, 그런데 미국에는 한 집에 차가 몇 대씩이나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때부터 저는 미군부대의 미국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그야말로 하늘나라에 사는 천사들처럼 보였는데, 그들이 먹는 초코렛, 씹는 껌조차도 그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아무튼 우리 인간은 사고방식은 "내 힘으로 내가 살고 보자" 라는 것인데,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살리려고 하는 그 '나'는 아담 안의 '나', 즉 '자아' 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허구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게 전도서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인데, 그 안에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1장 14절에서 18절을 보겠습니다.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

여기에 14절을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겁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근심의 창고라는 말이죠. 우리의 자아가 그렇다는 겁니다. 

이 자아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담의 육신에서 나왔는데, 그래서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의 육신이 붕괴하는 동영상이 나오는데 말이죠. 맥도 풀리고, 피부도 처지고, 이빨도 나가고,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전 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니 성경말씀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만다는 겁니다. 제대로 서서 걷고 싶어도 그게 안 되는데, 여러분은 됩니까? 저는 안 된다는 말이죠(ㅋㅋ). 여기 앞에 가면 허리가 90도로 꺾인 할머니가 계시는데, 그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세월의 무게, 혹은 자아의 무게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죠. 

자아는 없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나'로부터 시작하는데, 불교도 그렇고, 물론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나' 라는 것이 허무하다고 하는데, 즉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꾸만 '나'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허무하고 허무한 것인데 말이죠. 

물론 불교에서도 "자아는 없다" 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자아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죠. 무슨 바보도 아니고, 자기가 없다고 하면 그런 주둥이도 나불거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ㅋㅋ). "나는 마음도 없다" 라고 하면서, 마음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사기도 그런 사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진리는 외부로부터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즉 성령으로부터 말이죠. 그러면 성령이 오지 않는 기독교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라는 겁니다. 매일같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상급을 받고,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고, 그리고 도를 닦고, 무엇을 더 알았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알아도 자기만 더 비좁아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알아서 자기 속에 방을 만들어서 차곡차곡 집어넣으니, 그렇게 많이 아는 '나'를, 그런 '나'를 과연 부인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말이죠. 그렇게 귀한 것들이 많이 들어있는데 어떻게 자기 부인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귀를 이기고, 그것을 가지고 불행을 벗어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처벌을 덜 받고, 하나님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이 알아놓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몽땅 다 버리고 나면, "그러면 나는 무슨 수로 구원을 받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수로 받기는, 이미 구원 !!

그렇다면 무슨 수로 구원을 받습니까? 무슨 수로 받기는, 이미 구원을 되었는데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을 물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무슨 수로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하는 질문 자체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구원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자식이 되어서 부모에게 하면 안 되는 소리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을래" 라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자식은 부모의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작품이 나자빠져서 "나는 내가 알아서 할거야" 라고 하면, 부모로서 사는 보람이 없다는 겁니다. 회심곡을 불러주지는 못할지언정,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섭섭한 것 중에서 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엄마,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웠지?" 라는 겁니다. 물론 과거에는 엄마가 자식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 거짓말을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자식이 엄마를 의심하는 경우인데, 자기 출생의 비밀을 품고서 말이죠. 요즘은 TV를 틀면 드라마가 주로 그런 내용이잖아요? 그래서 어떤 아이는 실제로 부모 몰래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유전자 검사를 하면 결국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이 나오는데, 아무리 열심히 정밀하게 검사를 해도 예수님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창조주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다른 가짜 창조주를 자기가 찾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만들어진 자와 만드신 분의 의견충돌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책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만드신 분의 내용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얼마나 반발하고 대들었는지, 그 내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죠. 자식들이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창조주에게 함부로 대하는데,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나는 내 마음대로 살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만들어진 것의 자연현상으로서의 나름대로의 견해, 그렇게 두 개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성경말씀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 아냐 !!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의 책인데, 충돌이 없으면 고난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 아닌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 라고 하는데, 그 '나' 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인데, 그러니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아내면 엉터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인간이 신을 인정하기에, 없는 신 !!

인간들이 이미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없는데,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맞다는 겁니다. 이미 만들어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자의 의견이기 때문에 말이죠. 만들어진 자의 의견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불교도 인정하는데, 불교도 부처가 신이니 말이죠. 

그렇게 인간들이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신은 없는 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신에게 아부를 해서 처벌을 면하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종교라는 말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이 신을 생각하고, 철학자들이 신을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있지도 않은 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없는 신에게서 무엇이 나옵니까? 없는 용서, 없는 구원, 없는 천국, 없는 십자가, 없는 언약, 없는 구속사, 없는 인간들, 그렇게 전부가 다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끄집어내어도 전부가 다 없는데, 왜냐하면 없는 신에게서 출발했으니 말이죠. 

그러면 왜 신에게서 출발합니까? 그렇게 하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왜 존재하지? 아하, 신이 먼저 존재하고, 그 신이 나를 창조했으니 내가 존재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 여기에 믿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진짜 신은 아무도 몰라 !!

그런데 말입니다(ㅋㅋ), 진짜로 우리를 만드신 분은 어떻게 인간에 세계에 오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이런 것들을 꿈꾸고 있을 때, 진짜 신은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느냐는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셨다고 한다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아무도 그를 알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고 말이죠. 진짜 신을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용서, 구원, 율법, 언약, 천국 등등, 이 모든 것은, 만들어진 자의 의견과 만드신 분의 의견이 충돌하는 바로 그 현장, 거기에서부터 용서, 구원, 율법, 언약, 천국 등등, 그 모든 진리가 새롭게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신은 없다" 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인간이 이해하기 때문에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골로새서 2장을 보겠는데, 2절입니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이전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겁니까? 몰랐다는 겁니까? 몰랐지요. 아니, 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그분이 왜 죽었습니까?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던 하나님의 비밀과 맞지 않다고 해서, 즉 공통점이 없다고 해서 죽였다는 말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다고 했는데, 그러니 모세의 기적과 같은 것들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하늘에서 맛나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모세에게 준 그 맛나를 말이죠. 다른 민족들은 그게 없으니,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다는 겁니다. 

(요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의 조상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떡을 먹어봤어? 그런 이야기를 너희 조상들에게 들어봤어? 우리의 조상들은 그런 떡을 먹어봤는데, 그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야. 그러니 우리는 너희들과는 격이 전혀 다르지.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가지만, 너희들은 지옥에 가잖아. 그렇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유대사회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은 알아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 모세가 바로 자기들의 조상인데, 모세가 레위지파에 속하니까 말이죠. 레위지파는 야곱에 속하고,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겁니다. 자기들은 '한 패밀리' 라는 말이죠. 그러니 보통 자부심이 아닌데, 자기들은 유일하게 하나님을 안다고 여겼고, 하나님의 기적을, 그 혜택을 받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몰라 !!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재앙이 10가지이었는데, 1번에서 4번은 빼고, 5에서 10번까지는 그들은 그 재앙에서 면제가 되었다는 것이죠. 앞에는 애굽인들과 같이 당했는데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대우를 해주시는 것인데, 즉 "우리 민족만이 택한 백성이다" 라는 겁니다. 성경을 보고 여기에 대해서 이의가 있으면 제기하라는 것인데, 그런데 분명히 있으니 시비를 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데,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분명히 우상을 섬긴다. 내가 두고 보겠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섬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 너희들은 우상을 섬겨.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유대인들을 비롯한 모든 족속은 아담의 후손인데, 그래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게 무엇이 주어집니까? 저주가 주어지는데, 그렇다면 축복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모두 다 끝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복이 왕창 다 온다는 말이죠. 

오직 하나를 가리켜 '자손' !!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라고 할 때는, 아브라함의 복의 기준이 아니라, 그 자손인데, 그 자손은 몇 명인가요? 한 명인가요? 다수인가요? 한 명인데,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다수가 아닌 한 명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수라고 우길까 싶어서, 그 앞에 "다수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복의 기준인데, 그런데 창세기 12장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브라함이 복의 기준이라는 말이죠. 창세기 22장은 이삭이 복의 기준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27장은 야곱이 복의 기준이고 말이죠.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은 아무리 봐도 이스라엘이 복의 기준이라는 겁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렇게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까? "너희 민족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라고,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말씀들을 그들에게 하셨느냐는 말이죠. 

자아와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성경말씀 !!

어제 저에게 어떤 메일이 왔는데, 무슨 내용인고 하니,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성경의 내용보다도 목사님의 주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그게 바로 성경말씀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데 설교를 듣기 이전까지는 자기의 목사와 설교를 하는 목사의 생각과 같다고 여겼는데, 같은 신자라고 여기니 말이죠. 그런데 설교를 듣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의견차이가 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그 단단한 자아와 의견충돌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자기가 옳든 말든, 거기에 상관없이 뭔가 흔들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아하, 저런 의견도 있을 수가 있네" 라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순간 자아는 가만히 있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서 저항을 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누가 옳은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이 땅에서 수모를 당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단단한 자아 깨부수기 !!

물론 이런 것도 하나의 예가 되겠지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유대사회에 왔을 때,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아가 너무나 단단했다는 겁니다. 그들이 과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좋아서 반겼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을 때는 좋다고 하면서 따라왔는데, 자기들의 배가 불렀으니 말이죠.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을 때,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언제 발생이 됩니까? 예수님의 몸이 분해될 때 비로소 생기는 현상인데, 그렇지 않으면 살과 피가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러면 몸이 분해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죽고 난 뒤에 나오는 생산물이 살과 피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라고 하시는 것은,
"지금 너희들이 보고 있는 나는, 너희들에게 떠밀려서 죽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예, 바로 저입니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라는 자들은 생명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꽝' 이라는 겁니다. 


예, 바로 저입니다 !!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자아 굳히기'에 대해서, 즉 "자아가 구원이 되어야 구원이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안산홍이든 신천지든, "내가 구원이 되어야 그게 구원이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자식을 키우는 것도, "내 자식을 내가 키웠다" 라고 하고, 돈을 벌어도 "돈을 내가 벌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천국에 가는 것도 "내가 알아서 내 방식으로 가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자아를 건지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간들의 일관성이 있는 버릇과 성질과 행위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거기에 그만 십자가를 들이대신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말이죠. 

무슨 의미입니까? "너는 따로 있어. 그러니 너를 포기해" 라는 것인데, 즉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을 받는 방법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밖에 없는데, 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목적인데, 그것을 잃어버리면 자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말이죠. 

자존감과 자살 !!

사람이 자살을 왜 합니까? 자기가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수준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물 속에 뛰어드는 것이 낫고, 번개탄을 피우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죠. 

자살을 하는 사람이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강한데, 물론 그들은 그것을 '자존감' 이라고 우기는데, 그 말이나 그 말이나 같다는 겁니다. 스님들을 보세요.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모르는데, 얼마나 강하면 여자라도 머리를 다 밀어버리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신부와 수녀들을 보세요. 얼마나 지독하면 평생을 유니폼을 입고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말이죠. 사실은 결혼을 못한 것인데, 정말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면 유니폼이고 뭐고 간에 다 벗어버린다는 겁니다. 신부는 자기 혼자 놀고 싶어서 그런 것이고 말이죠. 

창세 전의 비밀은 아무도 몰라 !!

그러니 모든 것이 자아 중심인데, 주체 중심이 아니고 말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인데, 그런데 이것은 창세 전의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들판의 코스모스도 없고 하늘의 새도 없을 때의 일인데, 해도 달도 별도 없을 때라는 말이죠. 창조된 것은 전혀 없을 때, 그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일인데, 그 내용을 우리가 무슨 수로 컨닝을 해서 알아내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이 시키는 대로 할뿐인데, 그런데 그 아담이 이미 마귀에 빠져서 죽기를 무서워하고 있으니, 우리도 아담의 자손으로서 그 성질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그냥 아담처럼 무서워서 벌벌 떨 뿐이라는 겁니다. 매일같이 말이죠. 

그래서 보름달이 뜨면, 그 달을 보고 비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그 비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한 번 들어봅시다. "달님이여, 우리 아들이 백수입니다. 그저 취직이 되게 해주셔서, 자식을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게 해주세요. 그리고 결혼도 잘 하게 해주시고, 명절이 되면 같이 근사한 승용차를 몰고 오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대부분이 그런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명절이 되면 부모가 새벽기도회에서 무엇이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이번에 내려오는데 길이 막하지 않게 해주시고, 아무런 사고도 나지 않고 무사히 잘 내려오도록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종합하면, "죽기 싫습니다" 라는 것인데, 얼마나 죽음이 잡아당기면 죽기 싫다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 되겠느냐는 말이죠.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아까 골로새서 2장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령이 와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깨달았다고 치고,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충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충돌입니까? 자기가 살고 싶어서 십자가를, 자기가 살고 싶어서 구원을, 자기가 살고 싶어서 상급을 언급하는데, 용서와 사죄와 율법도 말이죠. 그런데 이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료가 되었는데, 그러니 합격이 확정된 상태에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더 이상 죽일 게 없다는 겁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무엘상 19장에 보면, 사울왕이 그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러자 다윗의 아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 여자가 사울의 딸인데 말이죠. 남편인 다윗을 피신을 시키고 거기에 허수아비를 두었는데, 그러니 아무리 찔러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허수아비이니까 말이죠. 그것이 바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삼상 19:15)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삼상 19:16)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고린도후서에 보면 우리의 육신을 옷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미 그 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가버렸는데, 그런데 죽음이 뒤에 그 옷을 덮쳐서 "니가 십일조를 했어? 교회에 충성했어? 목사를 섬겼어?" 라고 해도, 아무리 율법과 계명으로 윽박지른다고 해도, "니가 나쁜 짓을 했지? 간음을 했지?" 라고 하면서 아무리 찔러보아도, 우리는 팔짱만 끼고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망아, 니가 짓밟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니가 그동안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고, 겁을 주었고, 그래서 달을 보고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고, 그렇게 나에게 공포감을 조성한 악마야, 사망아, 니가 상대할 대상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겁니다. 없다는 말이죠.

염려, 염려, 염려 !!!

물론 이것은 신약의 골로새서이고,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구약의 잠언서인데, 그런데 구약 때부터 이미 그런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 즉 육신이라는 것은 다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한 창고가 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염려를 하는데, 심지어 꿈속에서도 염려가 결코 떠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온갖 모든 염려가 다 엄습을 하는데, 자기 자신, 자식, 친구, 교회, 국가, 심지어 북한까지도 염려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스님들은 무슨 염려를 할까요? 목탁이 제대로 쳐지지 않는 것을 염려하는데, 그리고 자기가 108번뇌로 인해서 거기에 맞추어 절을 하고 있는데, 지금 107번째인지 108번째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는, 염주를 돌리는데 그게 이제 자기가 나이가 많아서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언제 기름칠을 헤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무엇이든지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이 보상으로 이어지게 때문에, 자기가 악착같이 염주를 돌리면, 자식들이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자기가 주일에 교회에 한 번이라도 더 가주면, 그것으로 인해서 자식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더 넘칠 것이라고 하는,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교회에 나간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처벌 중' !!

그러니 자기와 관련된 것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자애로운데, 봐주어도 너무 봐준다는 겁니다. 자기와 관련된 사람에게는 말이죠. 반면에 그게 아니라면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는데, 호불호가 그야말로 명확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말이죠. 

이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 더욱 더 심해지는데, 자기 몸을 건드리면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만 적이 되고 마는데, 그것을 주님은 '처벌 중' 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은 벌을 받고 있다" 라는 것인데, 창세기 3장에서 말이죠.

그러니 그런 염려와 고민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인데, 이런 처벌은 지옥에서의 처벌의 신호탄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처벌을 받다가 지옥에 가서는 본격적으로 처벌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성령세례 !! 

이렇게 처벌을 받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넓은 길을 우르르 가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하늘에서 피가 뭍은 포크레인이 와서 집게로 집어 올리면,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너는 소속이 여기가 아냐. 너는 이미 창세 전에 사랑을 받기로 된 야곱의 소속이야"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로마서 9장의 그 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전혀 그럴 기회가 없었을 때, 그때 주님께서는 "너는 사랑을 받을 존재야" 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만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러한 지옥대열에서 빼내주셨다는 겁니다. 

세상 다시 보기 !! 

이것을 구약적 용어로 '택함'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는, 바로 그 택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택함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로부터 '다시 보기'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해서 해석을 다시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전에는 자기 중심으로 "내가 살아보겠다" 라고 하다가, 이제는 "예수님이 살려주셨다" 라고 새로운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특별히 한 것이 있어서 살려주신 것이 아닌데, 전혀 행함이 없이, 즉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라고 하시면서 살려주셨다는 겁니다.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뒤돌아보면서, 회상하면서 !!

그러니 살려주셔서 의인이 되게 해주셨는데, 그런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죄를 짓는 것마저도 주님의 울창한 숲이 되는데, 그 모든 걸음걸이와 그 방향이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들이었다는 겁니다. 필요가 없는 것들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이끌어오셨는데, 그래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뒤돌아보면서, 회상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전도서에 나오는 '때' 라는 것인데,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다는 겁니다. 

두 가지 '죽음' !!

그렇다면 이제 '죽음' 이라는 것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어가겠는데 말이죠. 죽음은 살아보려고 하는 자아가 생각하는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의 의미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데, 이 땅에서 말이죠. 쉽게 말해서, 다르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겁니다. 

자아가 생각하는 죽음은 마지막 순간에 숨이 끊어지는 것인데, 불이 나던, 교통사고가 나던, 강물에 뛰어들던 간에 말이죠. 그렇게 자기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죽음인데, 기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모든 활동의지가 중지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평소에 자아를 살리는 것은 '활동'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죽음은 이 활동이 그만 정지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자아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죽은 상태에서 말이죠.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데, 그렇게 책임을 지지 못하면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를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계속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죽고 난 다음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고 하면, 그러면 할 일이 없지요? 할 일이 없으면 심심해서 환장한다는 겁니다. 그 동안 자기를 살리는 재미로 살아왔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니 말이죠. 그러면 자기 할 일이 없는데, 그러니 권태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체는 "나는 천국이 있어도 가지 않겠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만약에 천국에 가도 거기에는 자기가 할 일이 전혀 없으니 말이죠. 사실 이것은 니체의 말이 아니라, 성령을 받지 못하면 자들이라고 하면 모두들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0장을 보겠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

여기 20절에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자아의 경우라면, 자기가 설치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보는데,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상태로 들어가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할 것이 모두 사라졌기에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말을 해도, "니가 말한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인데, "너희 속에 성령께서 너희의 주인이 되어서 말씀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다 알아서 말씀을 하시고 또한 이끄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전에는 자기가 사는 쪽으로 모든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고 하면,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는 "나는 이미 죽어도 살았다" 라는 것, 바로 그것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살게 하신다는 말이죠. 

누가 나와 함께 할까 ♬

과거에는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했는데, 그런데 이제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말이죠. 이전에는 나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동행자가 있다는 겁니다. 최성수는 그러한 동행자가 없어서 노래까지 부르는데, "누가 나와 함께 할까 ♬" 라고 말이죠(ㅋㅋ). 

물론 연애를 할 때는 동행이 좋은데, 결혼을 하고 나서 잔소리를 하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동행자고 뭐고 간에 결국은 혼자 사는 것이 편안한데,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돈도 싫고, 사랑도 싫고, 나도 싫다" 라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자기도 귀찮은데, 무겁고 힘들다는 말이죠. 어디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 하지만 주께서 다 아시는데, 그래서 곧 죽여주신다는 겁니다. 

쉬면서 충성하라 !!

그런데 이런 육신의 죽음을 두고 성경에서는 '쉰다' 라고 하는데, 어떻게 여러분은 쉽고 싶어요? 일하고 싶어요? 쉬고 싶은데, 요한계시록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도의 안식을 복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만 살고 제발 좀 죽어라"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하는데,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반가운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꼭 성령을 받지 않은 것들이 사자에게 물려서 순교를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 목숨이 날아가야 순교가 아니고, 자신에 대한 권한이 날아가 버리면, 그것이 바로 순교라는 말이죠.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골프장에서 골프를 쳐도 순교이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도 순교라는 겁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점수가 잘 나오게 하지?" 라고 하는 것도 순교라는 말이죠. 즉 주도권에 주님에게 가있는 것이 곧 순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죠. 

망자(亡者)를 믿어야 !!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데, 왜냐하면 성령 안에 계시는 분이 '망자(亡者)'이기 때문에 말이죠. 이 망자가 무엇입니까? 죽은 분인데, 그렇게 벌써 죽으신 분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죽은 분을 믿는데, 망자를 말이죠. 이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립니까? 그렇게 죽은 분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자기가 죽은 자가 되고, 자기가 살아있으면 예수님이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너무 실감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믿든 않든 간에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취급하고, 분류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런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보게 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펄펄 살아있기에 말이죠.

그러면 운전을 해도 주님이 살아있어서 운전을 하시고, 밥을 지어도 주님이 살아있어서 밥을 하신다는 겁니다. 아침에 운동 삼아서 교회에 왔다갔다하시는 우리 어머니도, 그것도 당연히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은 이게 되지 않는데, 아직 성령세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에스더서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하는데, 그게 한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은 아직도 자아가 자기를 관리해야하는 시점에 있는데, 에스더서의 경우에는 메시야가 아닌데, 창세 이전의 태초의 하나님의 비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일부를 그냥 증거할 뿐이라는 겁니다. 

(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메시야를 보여주는 파편들 !!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메시야는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메시야의 일부를 보여주는데, 그 파편을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다윗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는데, 틀림이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다윗이 무덤에 간 것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미리 보여주었다고 해석을 해버리는데, 참으로 놀랍다는 말이죠. 만약에 제가 다윗이라고 하면, "나는 이제 늙어서 죽는구나" 라고, 그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게 아니라, 미리 성신을 받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죽는 모션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죽는 것을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죽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바로 그 모션, 그 폼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의 관계성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러니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역시 그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만 믿고 편히 사는 것이 천국생활이라고,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가 일찌감치 천국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자아'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이 중요하니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자아는 어디에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자아는 아담에게서 나왔는데, 그리고 아담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죄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 육신에서 나왔는데, 그래서 1장 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것은 욕심을 끊으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들은 이 범주 안에서 뱅뱅 돌고 있다" 라는 겁니다. 다른 누구를 욕할 필요가 없는데,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죽는다는 것이죠. 심지어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역시 욕심이라는 말이죠. 구원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비밀인데, 그러니 인간들은 그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눈치를 차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부활이 아닌, 십자가 !!

그렇게 눈치를 전혀 차리지 못했다고 하는 흔적이 곧 십자가인데, 사도바울이 부활이 아닌 십자가를 자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 그런데 복음은 십자가이지 부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마지막에 보면 언약의 피가 기준이지, 부활이 기준은 아니라는 말이죠. 

(히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다시 말해서, "너는 죽어서 살고 싶나? 살고 싶지 않나? - 예, 죽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면 지옥에 가라" 라고, 혹은 "예, 죽어서 살고 싶습니다. - 그러면 천국에 가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준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히브리서 10장에도 보면,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면 그 형벌이 얼마나 중한지 모른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피'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피입니까? 그 피 앞에서 모든 자아의 한계가 한꺼번에 드러난다는 말이죠.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그런데 부활이 기준이 되어서, 즉 "나는 인간이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런 믿음을 장착하게 된 '나' 라는 육신은 그만 긍정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즉 '나' 라는 자아가 그만 괜찮은 자아로 돌변하고 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죽어서 다시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그것을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인간 자아의 종교속성 범위 안에 그대로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겠다는 것은, 죽기가 싫다고 하는 두려움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의 피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것은, "나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부활 앞에서는 무엇입니까? "나는 죽으면 안 됩니다. 다시 살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종교적 욕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불멸의 욕심, 영생의 욕심, 하지만 그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부활이 언약의 피가 아니라 십자가가 언약의 피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라고 하신 것은, 그것은 십자가이지 결코 부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언약의 완성이 아니라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이니 말이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는데, 바리새인들 중에는 부활을 믿은 자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부활의 논리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기적이나 부활이나 그 논리는 모두 다 죄다" 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제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초적 비밀을, 창세 전의 비밀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런데 비밀이 이 세상에 등장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를 앞세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은 누가 합니까? 성령께서 하시는데, 그래서 성령께서 보혜사로 오신다는 말이죠. 

한결같이,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의 모습을 !!

그러면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오셔서 이 땅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등장하게 되면, 그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 모습이 한결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습이 어떠한고 하니,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의 모습이란 말이죠. 제2, 제3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뭔가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구약이나 신약도 마찬가지인데, 선지자들이 그들과 말이 통했습니까? 심지어 모세의 말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윗의 말도 그렇고, 심지어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순교를 당했다는 말이죠. 

몰라, 몰라, 몰라 !!

에스겔은 옆으로 누워서 살았는데, 그리고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기 허리띠를 물가에 감추고 했는데, 그리고 나중에 가서 보니 그 허리띠가 썩었는데, 그 이유를 전혀 몰랐다는 말이죠. 

그 연장선에서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는데, 물론 그 의미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셔도 그 의미를 모르는데, 심지어 설명을 해주어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자들도 결국은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회고를 하듯이 "아하,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내가 문제가 있어서 몰랐구나"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제대로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그만 자아 중심이 되어서, 내가 살기에 급급해서, 내가 주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엉터리 해석을 했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말이죠. 

그까짓 것, 뭐?

그때부터 제자들은 "그까짓 것, 뭐?" 라고 하면서 살았는데, 죽는 것도 전혀 겁이 나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으니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죽은 자 같지? 나는 산 자야.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없는 자 같지? 나는 풍요한 자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데, 자기 처지에 대해서, 자아 중심으로 하는 해석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해석이 전혀 같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다시, '죽음'에 대해서 !!

이제 죽음에 대해서 조금 더 해보겠는데, 이 세상에서는 죽음을 목숨을 끊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죽음에서 해방시켜주려고 오셨다는 겁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죽음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악마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악마는 쏘는 것, 즉 공포, 두려움, 그런 것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아가 그렇습니까? 과연 육이 그렇습니까? 그것이 전혀 아닌데, 혼자 있으면 여전히 악마로부터 공격대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전에 그런 그림을 그렸는데, 엄마의 자궁을 말이죠. 아담이 엄마라고 하면, 우리는 그 단지 속의 새끼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께서 충분히 활용해서, 이것을 뚫고 온 그 정경을, 우리로 하여금 그 경로를 다시 느긋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하신다는 말이죠. 

마귀는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의 육에 대한 욕심과 같은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여전히 마귀는 필요하다는 겁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훈련을 시키는데,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마귀를 없애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도 없으니 이제는 나는 나 혼자 놀래" 라는 것인데, 예수님과 같이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지독한 자기 변명 !!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이 다루고 있는 마귀도 같이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정죄하는 기능이라는 말이죠. 마귀가 그렇게 해주어야 인간들이 율법의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살인자'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는 비록 살인을 했지만 5cm밖에 찌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금지를 해놓고, 그 금지를 넘어서지 않았으니까 아직 자기는 괜찮다고 하는데, 그런 주장을 마귀가 계속해서 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그런 마음을 계속 심어주는데, 자기는 유혹을 받을 뻔했지만, 그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말이죠. 마음속으로는 간음을 했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꿈속에서만 했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계속해서 자기 변명을 하는데, 지독한 자기 변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계속 자기 변명을 합니까? 그것은 혼자 살고 싶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살리겠다는 것인데, 아무도 자기를 살려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마귀를 시켜서, 우리가 마귀에게 시달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기도는 절망과 함께 !!

그렇게 시달리다가 시달리다가 드디어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때 기도가 나온다는 말이죠. 기도가 없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주님이 시키는 기도가 있는데,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도를 자기가 한 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하는 기도 말고, 그때그때 주님이 기도를 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순서만 기다리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해서 기도를 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니가 기도를 할 것인가? 자살을 할 것인가?" 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해서, "자살을 하느니, 차라리 기도하자" 라고 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기도는 절망적이어야 하는데, 그게 제가 기도에 대해서 내린 결론인데 말이죠. 모든 기도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그게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이 시시해 보입니까? 주기도문을 할 때,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 해보라는 말이죠. 그러면 주기도문을 해도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님, 저는 이제 그만 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게 되면, 평소에는 밋밋했던 그 문장 하나하나가 얼마나 가슴에 와서 닿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하면 말이죠. 어디 성경의 분량이 모자라서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으니, 자기가 사는 것이 급급하다가 보니, 그래서 아직 절망에 이르지 않았기에, 아직도 희망이 있고, 자기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가 다 근성이고, 타성이고, 형식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죄 !!

그러면서 기도하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도취하기도 하는데, "역시 나는 기도를 잘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기도를 마치고 나면 교인들이 "집사님, 기도에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는 시큰둥한데, 자기 설교가 그만 외면을 당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그런 경우가 생각보다도 많은데 말이죠. 제가 그런 것을 지적하면,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교회의 교인들은 예배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기도를 시키면 도망치기에 바쁘다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우리는 기도하는 자기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까, 주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도를 마치고 나면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지, 거기에 대한 기대감마저도 든다는 겁니다.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그만 버릇이 되어서, 그래서 "이럴 것 같으면 나의 관리차원에서 할거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자기 체면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절망에 이르게 하면, 우리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인고 하니까, 기도는 자살이라는 말이죠. 기도는 호흡이 아닌데, 그런 소리에 귀를 세우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날마다 자살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은 것이 소원이었는데, 하루 빨리 주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말이죠. 

엄마, 내가 왔다 !!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면서 "엄마, 내가 왔다. 보고 싶었지? 이번에 김 서방이 판사가 되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딸이 봉투를 내놓을 때, 그것도 제법 두터운 봉투를 말이죠. 그러면 그만 죽고 싶다고 하면서 기도하던 그 마음이 그만 사르르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ㅋㅋ). 

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자살이지 더 살고 싶은 것이 전혀 아닌데, 기도의 응답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서 주님과 만나고 싶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딸이 와도, "조금만 더 밖에서 기다려라. 내가 지금 기도 중이다. 물론 봉투를 그대로 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주여, 주님이 딸이 오도록 조치를 하셨군요. 제 인생을 제가 걱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왕 살려주시는 것, 주님의 허락 하에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하는군요"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에, 마음이 변하기 이전에 얼른 봉투부터 빼앗으면 된다는 겁니다. "잘 왔구나. 축하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ㅋㅋ). 

그렇게 하면서 살면 되는데, 기도의 소스는 주님으로부터, 원천은 그렇게 주님에게 받고, 이 세상에 나가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자기 밖에는 모르는데, 욕심이 우리가 사는 보람이란 겁니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욕심도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어서 먹지를 못하듯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죠. 

성경책이 두꺼운 이유는? 

그렇게 우리 자신의 의도와 탐욕과 욕심이 들어가야, 하루라도 악발이로 사는 재미가 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말이죠. 오랜만에 바른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욕심을 다 죽이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겁니다. 음식에 소금이 없으면 맛이 없다는 것은 마태복음에도 나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ㅋㅋ). 

우리는 욕심이라는 소금을 날마다 뿌려서, 욕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재미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그렇게 열심히 믿어도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 고맙게 다가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죄를 지어야 하는데, 그래서 성경책이 이렇게 두껍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하면, 우리는 이 성경책을 보면서 "흥, 이게 무슨 비밀이야?" 라고 하는데, 비자금 통장이 비밀이지 이런 것은 비밀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성경책을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관심이 얼마나 예수님에게 있지 않은지,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천국생활 !!

그래서 주님이 억지로라도 성경을 보게 하고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니,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구원을 받는다는 알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말이죠. 그러니 천국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 되게 생활하는 것, 그게 바로 천국생활이라는 겁니다. 

천국에 가봐야 지금과 특별히 다르지 않는데, 여전히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쓸 면류관을 주님이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데, "니가 그것을 쓸 수 있어?"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주님, 받으소서"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곧 천국생활이라는 겁니다. 물론 성도에게는 성령이 오셔서 미리 그 생활을 하게 하시는데, 성령 안이 곧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남들에게는 어떤 폼으로 보이든 간에 성령 안에 하늘나라라는 말이죠. 

이미 죽은 목숨 !!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때 예수님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즉 죄 속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의견은 무엇인고 하니, 그 죄 속에 죽음이고 저주고 심판이라는 겁니다. 

여기 '죄 속' 이라는 것은, 아담 속이고, 자아 속인데, 그럴 때는 매사가 걱정근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이고 심판이고 저주의 상태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서 너무 오래 살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육이 심판을 이 생활이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길게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좀 당당하게 살자는 겁니다. 

그래서 오전시간에 "남들에게 미안해하지 말자"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남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 일만 미안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미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한꺼번에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어차피 존재자 체가 엉망인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미안해하고 말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모든 관계는 '안녕' 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즉 "잘 있거라, 아우들아! 나는 졸업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는 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전도서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 이미 주님께서 죽음과 동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는 우리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이 시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죽은 자로서, 유령처럼, 귀신처럼, 그 어떤 걱정과 근심에도 얽매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0,13 오후 11시에 마침.
이호준처럼, 손아섭처럼, 도깨비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