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토기장이의 권한

아빠와 함께 2013. 3. 15. 06:09

본문 : 이사야 64장 8-12절
제목 : 토기장이의 권한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이근호 08-12-17 21:01 
토기장이의 권한

2008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이사야 64:8-12

(사 64:8, 개역)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 64:9, 개역)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사 64:10, 개역)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사 64:11, 개역)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사 64:12, 개역)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양심과 지식과 이성을 총동원해서 메모하듯이 하면 그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무섭게 돌아가는 육중한 톱니바퀴 속으로 끌어들어간 식재료처럼 여지없이 파쇄되고 해체되어 버립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대면할 대상이 아니라 아예 우리를 덮쳐서 붕괴해버리는 위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권한조차 없이 말씀에 의해서 작용되는 그 자체가 곧 ‘말씀 지킴’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일에 불안과 초조와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성전이 불타고 맙니다. 원래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짓기를 허락하신 전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 제사를 흠향하시고 친히 영광을 대동해서 백성들 앞에 등장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성전 중심으로 자기 백성을 돌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곳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고 죄마저 사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있어 성전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아무리 나라가 고달프고 어렵다 할지라도 성전이 함께 있는 한 곧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축복이 여전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즉 인간과 하나님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 그만큼 든든하게 여긴 것입니다. 성전이 있는 한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곳이 성전이기에 성전만큼은 기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 성전이 불 타 버린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난감했습니다.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전이 불 타서 없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통하는 유일한 창구가 날아가 버린 사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은 단절되어 버립니다. 다른 소통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에 휩싸여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고 성전을 없앤 뜻을 알게 해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의 관심사가 결코 세상적인 것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 사업이 망하고 가정에 우환이 들끓는다고 이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만 있다는 더는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으로 이 사람은 하소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계시던 성전마저 불 타서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신앙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아버지로서의 기능은 바로 토기장이의 기능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토기장이요 자신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토기라는 겁니다. 이러한 관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신약에 와서 밝혀집니다.

로마서 9:20-24에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진노의 그릇과 자비의 그릇의 차이를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릇 주제에 감히 자신이 이러이러한 그릇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인간은 말씀에 휘말려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선택권마저 다 파쇄되고 뭉개져버립니다. 그저 말씀 자체의 능력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진노의 그릇됨에 대해서 인간은 감히 거부하거나 피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반면 자비의 그릇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비의 그릇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는 대목이 이 점을 말해줍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는 말은 결코 자비의 그릇에 해당되는 사람이 자체적인 자질이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시는 말입니다. 오죽 못났으면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끝까지 참으시고 관용하시겠습니까. 저 혼자 잘났으면 결코 하나님의 참으시고 관용하심을 필요로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비의 그릇에 해당되는 자는 자체적인 능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자임을 자각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자각과 체험을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전에 불을 질려버리시는 겁니다. 절망, 구원의 근거의 말살이요 자진 철거입니다. 구원이 될 수 있기 위한 뭔가 디딜 바탕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만약의 진노의 그릇이라면 그런 바탕이 없어져도 무관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의 그릇에 해당되는 사람은 구원의 바탕 자체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애통하며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절망적인 상황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다는 점까지도 압니다. 사람이란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말씀에 섞게 됩니다.

즉 말씀 안에서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완전한 절망이야말로 자신이 자동적으로 구원될 자격자가 됨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참다운 절망 속에 있을 때만 자비가 제대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절망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때, 분명히 ‘아버지’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버림받음에 성도도 동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경과해야 합니다. 완전히 버림받아 마땅함을 수용할 때만 비로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첫 사랑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는 찬송가 338장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늘 이 마음으로 살면, 범사에 감사 못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극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만 느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