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1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7-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까? 아까 첫째시간 마지막에 단절이라는 이야기 했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제에서 끝났어요. 다만 예수님이 오신 것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복음을 이 땅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것을 출애굽기 15장에서는 내 백성을 전쟁을 해서 전리품으로 만들고, 전리품 안에, 그걸 성소라고 이렇게 규정하겠다고. 시간 없어서 못 찾겠어요.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17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는, 어디에 거하시는가, 주님이 홀로 전쟁해서 나온 전리품, 포로. 포로 안에 거하시는 것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그 안에 거하면서 자기 안의 모든 벽돌들은, 주님의 일방적인 본인의 공로로만 얻어진 결과물 속에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시라. 만군의 하나님은 전쟁하는 하나님이에요. 이렇게 되면 구원이 단절인데, 그 단절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그 문제가 남죠.
그게 뭐냐, 잉태치 않은 자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잉태치 않은 자. 잉태치 않은 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삭의 아내 리브가. 그리고 야곱의 아내들 중에서 원래 본처가 누구냐 하면 언니 레아가 본처가 아니고, 둘째 라헬이 본처에요. 언니는 세일할 때, 원 플러스 원(1+1) 해가지고, 세일로 팔린 거예요. 진짜 본처를 얻기 위해서 덤으로 얻어걸린 것이 레아라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뭐만 사랑하느냐 하면, 내가 사랑해서 낳은 그 자식만 사랑합니다. 다른 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거기서 누가 화가 났느냐 하면, 열 자식들이 화가 나서, 그 열 형제가 규합해서 누구를 팔아먹느냐 하면, 아버지의 진짜 엑기스 같은,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독생자를 애굽에다가, 처음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맏이가 말려서, 죽은 것이나 팔린 것이나, 팔아먹고 난 뒤에 아버지한테는 “아이고, 아버지! 애석하게도 짐승에게 잡아먹혀서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 피 보세요.” 아버지께서 유독 요셉에게만 입히는 이 채색 옷에 짐승의 피가 묻어 있지 않습니까? 국립과학연구소에 맡겨 조사해보세요. 그게 없으니까 요셉의 피인 줄 알았죠. 그걸 통해서 야곱은 자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좋아하는 자식은 이삭일까요? 야곱일까요? 이삭이 두 아들 중에서 누굴 좋아했습니까? 에서를 좋아했죠. 그러나 축복은 누구한테 갔습니까? 야곱에게 갔죠. 그리고 또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했습니까? 제물로 바쳐야 되죠.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원하는 것은 결국 단절이에요. 단절. 나의 육적인 사랑의 단절. 나의 모든 사랑이 천국에서는 이게 나의 버림받는 이유가 되고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1에서 시작해서,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어떤 누구를 만나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것이 하늘나라에 살만한 여건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으로 태어났잖아요. 육으로 태어났으니까 나오는 모든 속성은 뭐 밖에 안 나와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어야 돼요.
그래서 제가 늘 평소에 강의하면서, “제발 막살아주세요.” 라고 부탁한 것이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에서 육을 가지고, 감히 영을 추구하지 마세요. 그거는 육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전능하다는 그 예수를 자기 행복을 위해서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한 것이지, 그거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지, 백날 경건해봐야 반대급부를 노리는 하나의 수작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그렇다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잖아요. 하늘나라는 영이잖아요. 그럼 영으로 어떻게 가느냐, 이것은 제 질문이 아니고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까? 할 때에 이렇게 하면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전제를 깔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고 했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니고데모는 그 거듭난다는 그 단어의 의미에 딱 그걸 매치했어요. 성령이라는 것은 빼버리고 다시 태어나면 된다 이 말입니까? 그럼 엄마 품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면 됩니까? 이렇게 했어요. 그럼 엄마 품속이 뭐에요? 육이잖아요. 다시 말해서 “니가 사람으로 태어났어? 천사로 태어났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끝났네!” 이런 뜻이라 말이죠. 사람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 하늘나라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의 확정된 뜻이에요.
그럼 엘리야는 왜 갔고, 모세는 천국에 왜 가있고, 아브라함은 천국에 왜 가있느냐? 그들은 죽었거든요. 늙어죽어야 됩니까? 늙어죽어야 육이에요. 다른 죽음을 죽어야 돼요. 다른 죽음. 늙어서 죽는 죽음 말고, 살아서 죽는 죽음 있잖아요. 살아서. 살아서 이미 죽었다고 통보받는, 그 통보가 있어야 돼요. 그럼 자살할까요? 약 먹을까요? 제가 캘거리 보니까 죽을 데도 마땅치 않아요. 아! 있다. 로키산맥. 거기에 올라가면 되겠어요. 그럼 자살할까요? 죽을까요? 죽으면 천당 갑니까?
하나님이 받는 죽음이어야지 우리가 죽는 죽음은, 자살하는 죽음은, 백번해도 못가요. 육에서 육으로 간 죽음이기 때문에 의미 없어요. 왜? 우리 인간의 이름이 흙이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따라서 육이면서도, 영에서 영으로 오신 분이 스스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아서, 인간이 되셔서, 그래서 죽음 안에서 함께 죽는 자만이, 그 사람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고,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거는 뭐냐 하면“저 구원해주세요.” 라는 말은 일체 나올 필요가 없고, “복음을 저한테 적용시켜주세요.” 라는 말만 적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적용된다는 것은, 그 복음이 구원될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해서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단절이 뭐냐, 잉태치 못한 자인데, 이걸 설명합니다. 사라 임신 못하죠. 리브가 임신 못하죠. 라헬도 임신 못했습니다. 뒤늦게 나온 애 이름이 요셉이니까. 그럼 야곱의 아들들이 왜 그렇게 많으냐하면, 육으로 난 애들과, 영으로 난, 그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속으로 난 자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4장 한 번 봅시다.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삭을 뭐로 표현합니까? 이삭이라고 하지 않고 이삭에게 의미를 두죠. 니 보기에는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아니야. 약속이 먼저 있고,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하는 자다. 그러면 이삭의 일대기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여주죠.없던 자인데 생겼고, 임신하지 못한 자인데,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잉태가 되었고, 그 잉태가 된 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희생물이 되는 모습이고, 희생제물인데 어린양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았죠.
그러니까 이 일대기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거예요. 약속으로 왔고, 사람들은 그 분이 약속인줄 몰랐고. 그 분이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그 모습을 이삭이 보여주는 거예요.그러니까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두, 그 사람에 존재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이 그 사람 속에 내용물이 되어 있는 존재를 가지고 약속의 자녀, 약속의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세리가 되었든,창기가 되었든, 강도가 되었든.
그 사람들의 모습들은 세리고, 창기고, 강도인데, 탁 깨보면 뭐가 들어있는가? 약속이 들어있는 거예요. 창세이전부터, 창조되기 이전부터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언약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어제 초콜릿 드셨죠? 초콜릿 안에 뭐가 들어있던가요? 뭐 땅콩 들어있고 아몬드 들어있죠. 니 눈에는 초콜릿으로 보이냐? 아몬드 들어있다. 한때는 킨더 서프라이즈가 금지조치 당했죠. 애들이 초콜릿을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장난감을 노리고 마구 구매를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저는 그 킨더 서프라이즈보다 더 적절한 과자이야기가 뭐냐 하면, 한국에서 나오는 고래밥이 있어요. 고래밥이 뭐냐 하면, 밀가루로 만든 과자인데, 고래도 있고, 토끼도 있고, 별모양도 있고, 상어도 있고, 여러 모양이 있지만, 먹어보면 그냥 과자에요. 모양만 그 모양이지 실제로는 뭐냐 하면, 밀가루로 만든 과자잖아요. 니가 보기에는 창녀로 보이고, 니가 보기에는 세리로 보이고, 니가 보기에는 강도로 보여? 내가 보기에는 약속의 자녀인데?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한 거예요.
뭐 잉태가 돼버리면 아버지 엄마 닮은 사람만 안에 내용이 되어 있어요. 그 안에 아버지 엄마의 DNA가 그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잉태치 못하고 약속이 된 자가 오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세포를 갖고 있든지 관계없이, 그 사람은 약속된 곳으로 합치해야 될 운명을 지닌, 그 사람의 미래는 하늘나라 되는 사람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그 약속,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사람. 약속이 들어있는 사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 로마서 8장에 니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영이, 그 성령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살고자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살고자 하는 그것이 뭘 가리느냐, 결국 우리가 영생 얻는다는 사실을 모독하는 것이 돼요. 논리가 이상하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돼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그것도 모나리자의 미소를 띠면서.살며시 웃으면서. 여유롭게. “나 죽어야 돼요. 나 성경말씀 하나도 못 지켰습니다. 빼는 것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어느 구절도 못 지킵니다.” 이게 보기에 고래로 보입니까? 고래밥이에요? 아니에요. 약속의 사람이에요. 내가 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약속이 나의 인생을 이미 결정짓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리 지옥을 보고 싶어도 이제 지옥은 다 보고 어쩔 수 없이 천국 가게 되었습니다. 흑흑흑. 이러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좋아서. 슬퍼하는 흉내를 내면서 평생을 보내야 되는 겁니다. “야, 운송계약 건 끝났어! 끝났어!나 부도났어! 부도났어!” 흑흑흑~하하하~ 부도나게 하신 것이 바로 약속이 너의 부도보다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그런 존재야. 남들은 부도나면 자살하지만, 너는 부도나면 축복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 정도로 약속이 육적인 모든 본능을 이기고 있는 거야. 그걸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잉태치 못한 거예요. “너그 아버지 누구냐?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친구>라는 영화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니나 가라 하와이!” 이런 것 있잖아요.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말해도 못 알아듣는데?” “이게?” 시계 풀면서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 뭐 많이 맞죠. “우리 아버지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그 분인데?”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인데요?” “같이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됐는데요?” 이게 바로 여기 갈라디아서 4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곧 뭐다? ☐다.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다. 너의 어머니는 이 땅에서 찾지 마라. 아버지를 장례해야 된다고?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 니는 다른 사람과 달라. 니 속에 약속이 작렬하고 있고, 약속이 가동되고 있고, 약속이라는 엔진이 거기서 발동하고 있습니다. 자, 약속은 뭐라고요? 약속은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통보하는 쪽에서, 성령께서 오시죠.
따라서 인간의 모든 구원론은 다 헛것이고, 소용없고, 이제는 더 이상 그 자비 앞에, 그 넘치는 자비와 사랑 앞에,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보탤 것이 없어요. 헌금, 기도, 전도, 봉사, 교회충성, 목사 섬김,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필요 없으면 안 하면 되겠네? 예? 안 하면 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안 하는데 되게 바빠요.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 설명이 뭐냐, 지금 요한일서 4장, 5장 넘어가고 있어요. 진도 안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진도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곳, 자 이곳이라는 것은 장소개념이잖아요. 이곳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곳에? 지금 내가 서있다. 이곳에 누가 서 있느냐? 여러분 보기에 제가 서 있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누가 있느냐? 이곳은 바로 성령님이 지정한 곳에, 성령과 사귐이 있기 때문에, 성령과 사귀는 자는 그곳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럼 나는 뭐냐? 하나의 형식이 되고, 내용은 뭐가 됩니까? 성령님이 되죠.
성령님이 되니까, 성령님이 날마다 뭘 내리겠어요?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나름대로의 뭘 가지면 안 되느냐, 목적이나 목표를 절대로 가지면 안 되는 겁니다. 모든 스트레스는 여기서 나와요. 사람이 사는 스트레스가 뭡니까? ‘반드시 이거는 하고 말리라!’ 하는 그것이 자기를 망칩니다. 자기를 파멸시켜요. ‘이걸 해가지고 남한테 꿇리지 않고 과시해야지!’ 이게 자기에게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입니다. 자살. 자기에 대한 자기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사법고시 번 떨어지고 7번 떨어졌을 때에, 그렇게 판사가 된 아들을 보고 싶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난 뒤에 8번째 합격했습니다. 합격증하고 소주하고 마른오징어 들고 어디로 가느냐? 아버지 무덤에 가서 엉엉 울죠. “아버지여! 아버지! 제 성공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요?” 자식도 아니에요. 자슥. “이 자슥 성공한 것을 좀 보세요?” 지금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남들 보기에는 본인만 엎드려서 울고 있죠? 그러나 그 자식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죽은 아버지가 들어있죠. 육의 아버지죠. 그게 모든 인간입니다. 프로이드는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버지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게 뭐냐,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 약속의 이름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죽었어도 자기 행동을 절제하고 조정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보시면 나를 이쁘다 할까? 나쁘다 할까?’ 그게 교육이 되고 그걸 가지고 아이덴티티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주체성이에요. 쌓이고 쌓인, 훈계 받은 그 훈계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그것이 나의 자아가 되고 그렇습니다. 참 그건 비극이에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라는 것이 증명됐잖아요. 죽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나를 배후조종하는 세력이 들 때, 그 아버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엄마가 그렇게 사랑해줬는데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럼 그 남자가 찾는 여자의 이미지는 누굴 닮았겠어요? ‘내 엄마 같은 여자 없을까?’ 결핍된 사랑을 마저 채워줄,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누가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요? 윤복희죠. 뭐.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한 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누가 나를( ) 채워줄까? 여기 빈칸이 있죠. 빈칸. 이 빈칸이 있다는 것이 그동안 두려움과 공포를 잊은 겁니다. 이 빈칸이 결핍인데, 결핍의 장소가 있다는 것은 뭐가 없다?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 이 결핍.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
나중에 실패하게 되면 스스로 뭘 끊느냐, 자아를 담은 이 그릇. 자아는 이미지요, 그릇은 육체입니다. 자아가 괴로우면,너무 괴로우면 그릇을 깨트리겠죠. 이걸 두 글자로 자살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이유도 모르는 채 자살합니다. 이 캘거리를 보세요. 온도 18도, 습도 20도, 누가 와도 최적의 컨디션을 줄 수 있는 환경이잖아요. 천국 바로 밑에 999단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여기서 자살 없습니까? 이렇게 좋은 환경이라고 자살 안 할까요?
자살은 누적된 자기의 결핍을 자기가 못내 못 견뎌서, 자기가 마저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없을 때, 그 괴로움을 못 견뎌서 죽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처음부터 우리는 없던 자였는데, 주님이 주님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낸, 주님 자신의 노리개 감이고, 주님의 장난감이에요. 그걸 기뻐하심을 무슨 자?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고 해요. 기뻐하심을 입은 자. 우리가 어떻게 굴러도 “에구, 이쁜 것! 에구, 이쁜 것!” 이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게 사귐이에요. 그게. 아니 도둑질 한 것도 예쁘다. 미치겠어! 정말! 창녀 짓 한 것도 예쁘대요. 창녀 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예쁜 게 아니고, 어떤 짓을 해도 예쁜 이유가, 내가, 그 장소에 누가 있어요? 주님의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창녀 짓을 하는 겁니다. 가다가다 이제 진짜 막 가는 것 같은데, 여러분 지금 강의가 막 가는 기분이 안 들어요? 지금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내쏟고 있습니까? 죄를 유발시키는 발언을 제가 지금 공개적으로, 그것도 유튜브에 올라간다고요. 우리끼리가 아니고. “잘 한다~ 목사가 돼가지고? 이 캘거리에 와서 난데없이 죄를 유포하는 유포자. 지카바이러스도 아니고 죄를 유포하느냐?”
한 번 생각해보세요. 죄가 뭔지를? 뭐가 유포된다는 것을? 죄는 배고파서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 없어서 죄 짓는 겁니다. 기쁨이 없어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내 소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1에서 와서 다시 1로 돌아가는 모든 것이 뭐다? 그게 이미 가만히 있어도 죄가 된다는 이 말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있는 사람은, 그것은 죄를 더욱더 죄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기쁨이, 이런 죄에서 죄 값을 치렀던 약속의 위대함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 기분 좋게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더욱더 증거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죄를 더 늘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죄는 뭐냐 하면, 육신의 죄가 아니고, 성령의 법에서 나온 죄기 때문에, 그 끝은 이미 해결된, 십자가로 연결된 죄입니다. 그래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옛날 같으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면, 옛날에는 이런 핑계대고 넘어갔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지키지 우리는 못 지킵니다.” 하고 넘어갔던 것을,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것도, 이것도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의 리스트에 포함이 되는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니까, 이런 지킬 수 없는 죄까지 다 지불을 해줬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따라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나는 죄졌습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는가 하시는데, “세상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제가 그만 알아버렸습니다. 이런 죄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게 미쳤나?” 그럼 다른 사람이, “당신이 그 따위로 이야기하면 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없게?” 이렇게 되면, “맞습니다. 그게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내가 주의 종으로서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을 오늘날 목사님들이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제가 설교합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죕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아이구, 목사님 설교 준비하느라고 그렇게 애쓰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도 죕니까?” “죕니다.” “그럼 목사님 지옥 가지 않겠나?” “지옥 가죠. 근데 지옥 간다는 육을 가지고, 약속이 안을 절개해가지고, 지옥 가는 육에다가 약속을 담아버리니까, 세상에 나 같은 무가치한 인간도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게 복음이죠.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게 기쁨이잖아요. 이게 사랑의 나눔이잖아요.
결국 오늘 마지막 강의 핵심은 장소에요. 장소. 요한일서 4장, 5장의 내용의 핵심은 장소입니다. 그럼 그 장소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를 4장 4절을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아하, 이게 참 무서운 말이에요. 여기 하나님 안이라고 표현했고,거기에 대적되는, 대비되는 개념이 무슨 개념입니까? 세상에 있는 이. 그럼 세상은 자체적으로 뭐다? 하나님의 적이죠.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세상 안에 살고 있죠. 그럼 세상 안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뭐다?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또 다른 세상과 단절된, 또 하나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안에 이미 성령께서 형성해놓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데, 십자가 안은 조금 있다가 설명해드리고요. 어쨌든 지금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안이 어디 있다? 세상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안, 천국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세상 안에 있는 거죠. 이런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늘만 쳐다봐요. 하늘만. 세상 안, 이미 성령 안에 있는데. 항상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14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다?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성령 안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주님이 있고 사귐이 있으면 내가 갑이 아니고 을이 되는 기쁨. 내가 그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는 그 기쁨. 내가 알아서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은 목적과 목표가 없다는 거예요.
목표라 하는 것은 모든 지향성의 마지막 지점을 목표라 하고, 그걸 바라보는 경향을 목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 나름대로 뭐가 있습니까? 목적과 목표가 있죠. 달성됩니까? 못 되죠. 결핍되죠. 실패하면 자살.성공하면 새로운 목표를 또 세우죠. 그게 기업 활동이잖아요. 자본시장의 활동이잖아요. 회사에서 그래프 그리잖아요. 제가 시카고에서 어떤 집에 가보니까 벽에다 딱 이 한마디 써놨어요. 이 한 마디. ‘아! 저렇게 일하는구나.’ 이게 내가 아는 영어예요. 몇 개 되지 않는 아는 영어 중에 이게 하나 포함되었어요. “Well” 글자가 얼마나 큰지. 여러분, 이거 해석할 줄 알죠? 잘 해라! 이 말이죠.
그럼 언제까지 한 것이 잘 한 것입니까? 이게 나와 있을까요? 안 나와 있을까요? 끝도 없어요. 잘! 이케요? 아니! 요케요?더더더더! 따박따박 월급 받아쳐먹듯이 더더더더 계속해서. 나올 것 없어? 나가세요. 수고했어요. 나가세요. 그 다음에 더더더더! 그게 뭐냐 하면 에임aim 목표, 골, 골인할 때 골. 목적, 마귀의 노예들입니다. 자기 육의 노예들이에요. 욕망의 노예들입니다. 기쁨요? 그거는 마약과 술로 잠시 대체될 수 있는 기쁨일 뿐이에요. 노래방? 목사님하고 노래방가야 되는데? 나는 노래방에 가기 싫어요. 왜? 어두워서. 갇혀서. 차라리 노래 부를 것 같으면 로키산맥 알프스에 가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처럼 라라라라랄라~♬하고. 마리아처럼 하고 싶다고. 마리아도 춤추다가 갑자기 뎅뎅뎅~♬ 잘츠부르크 성당에서 종소리 들리니까 후딱 모자 쓰고 내려가죠. 마리아도 또 종교에 매여 있네.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맬 수 없습니다. 이미 합격된 자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뭐냐, 4장, 5장이 그래서 어려운데, 이겁니다. 봐라! 옛날에 니가 저렇게 살았단다. 어디 안에서? 세상 안에서. 니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잖아. 하나님께 속한 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은, 니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저는 요새 이걸 두 글자로 표현 합니다. 웰well은 지웁시다. 웰well은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 잘하는 것 없습니다. 잘 순종하는 것 없습니다. 순종은 자비를 모독하는 거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뭐냐 하면, 이게 드론 같은 인생. 드론 알죠? 붕 떠서 날아다니는 것. 이 세상을 독수리처럼 위에 붕 떠서 바라보는 것. 꼬라지하고는? 이것이 아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자유니라. 육에 있으면서도 다른 장소,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니가 육에서 하는 그 죄를 바로 옛날에 니가 한, 이미 합격되기 전에, 수능치기 전에, 수학정석보고, 정철종합영어보고, 학원 다니며 밤샘했던 그 모습, 그 실패를 즐겨라. 저는 저렇게 실패했고, 나는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실패할거리만 계속 행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패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실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 실패했습니다. 지금 근무 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전부 다 이것 때문에 실패했어요. 돈벌이에 지장이 많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근데 그 여유롭게 실패할 수 있는 사람, 마귀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귀는 성공가지고 협박과 공갈을 칩니다.니가 헌금 안 하고 십일조 안 하면 저주받아! 이럴 때 이렇게 하세요. 그 저주 저한테 좀 주세요. 왜? 그래서 제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좀 알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땅에서 변함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실패자였습니까? 성공자였습니까? 실패자였죠. 세상에, 실패자를 믿는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그저 누굽니까? 스티브잡스를 믿지, 예수는 안 믿어요.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 빌게이츠를 믿지, 예수를 안 믿잖아요? 누가 예수를 좋아합니까? 빌게이츠를 하게 되면. 심지어 바라바라는 강도보다 더 못하게 취급받은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빌라도의 재판에서.
그래서 인간이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은 예수가 갖고 있다는 전능하다는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독자적으로 성공해서, 내 목적과 목표를 하나님의 힘까지 동원시켜가면서 기어이 달성하겠다는 그런 수법에 지나지 않아요. 세상에 이런 마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걸 또 교회에서 긍정하니까, 마귀가 성전인지, 마귀의 전인지, 신전인지, 구분도 안 돼요.
자, 그렇다면 끝에 5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혜택이 어디서 왔느냐? 이런 혜택이 어디서 왔는가? 앞에 있는 것은 다 장소문제니까 다 이야기한 겁니다. 5장 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였고” 아! 이 대목! 생뚱맞게 갑자기 물과 피가 왜 나오느냐는 말이죠. 곤충은 머리와 가슴과 배로 되어 있다. 이게 생물에서 말하는 곤충 분류법이에요.
예수는 뭐로 되어 있는가? 지금 이천년 신학계에서 주장한 바로는, 예수는 인간과 신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게 성경에 안 나옵니다. 뭐가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다. 아다나시우스 교리,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하면서 내민 하나의 시국선언 같은 것이 그거거든요. 삼위일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문장하나 만든 거예요. 삼위일체 자체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자체가 없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런 것은 있는데 삼위일체라는 것은, 위라는 체에 단어를 집어넣는 구절이 없어요. 어디 위가 있고, 어디 체가 있습니까? 삼위일체 할 때 위와 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에요.
성경에서 쓰지 않는 단어를 집어넣었다는 말은, 이거는 누굴 위함이다? 복음을 위함이 아니고, 뭘 위함이다? 구원을 위함이다. 구원을 위함이죠. 생로병사 고생 많은 세상에서 희망이라는 것, 나중에 목적 찾다, 목적 찾다, 정 찾을 수 없으면 천당이나 가자. 이런 인간의 근본적인 구원의 욕구를 이용해서 교회들이 이렇게 지어낸 거예요. 이 요한일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은 절대로 바깥으로 뛰어나갈 수 있다? 없다? 없어요.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분해할 때, 인간과 하나님이 아니라 뭐로 분해했어요? 물과 피와 성령.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단절됨. 단절된 겁니다. 자, 물어봅시다. 세례요한의 기능은 독자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오실 분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까?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세례요한의 기능이죠. 그러면 세례요한의 모든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세례요한의 개인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죠. 세례요한의 물세례 기능은 어디로 이전 통합되느냐 하면, 뒤에 후발자 되신 예수님의 기능 안에 세례요한의 물세례 기능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 물세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물세례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 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학급에서 수학시험을 쳤습니다. 애들이 신났어. “몇 점이고?” “95점.” “니는?” “97점.” “니는?” “99점.” “아이구, 우리 담임선생님 좋아 하겠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우리 점수를 다 알고 있으니까.” “애들아! 수고했어. 시험 치느라? 내가 단팥빵 줄게.” 이 캘거리에 단팥빵 있습니까? 있어요. 세계 어디에 가도 이 빵만큼 제가 좋아하는 빵은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는데, 담임선생님이 회초리를 이만큼 들고 인상 찌그리고 왔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애들 입장에서, “야! 나는 98점.” “나는 100점.” 지금 캘거리 평균이 95점 이상 됐을 때, 그들이 갑자가 뭘 봤습니까? 선생님이 들고 있는 회초리를 봤죠. 그럼 거기서 그 회초리를 봤다는 말은 그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구나.’를 유발하죠. 발생하죠. 세례요한의 세례는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유발시키는 징표,사인이 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입니다. 죄 씻으라가 아니라 너희들이 죄 있음을, 잠복되어 있음을 바깥으로 그것을 드러내라. 심지어 이 돌멩이까지. 그런데 그것을 심사하러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칭 뭡니까? 자칭 죄인이 아니고 자칭 의인으로 왔죠.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이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이때에 너희들은 뭘 보려고, 뭘 심사하려고 나타났더냐?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이 돌멩이가 구원받을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아까 예를 든 담임선생님은 뭘 들고 왔다? 회초리. 실제로는 뭘 들고 왔다? 도끼. 도끼 들고 물에 빠질 사람은 빠져. 물에 빠졌다는 말은, “맞습니다. 우린 죄인 맞습니다.” 하는 사람들은 물에 빠지겠죠.
그런데 빠지라고 겁주고 있는데, 여기 누가 빠지느냐 하면, 난데없이 수영복도 안 입고 예수님이 풍덩 빠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이것들이 말이야!” 세례요한의 모든 엄포는 사실이지만, 세례요한은 자기 기능이 아니고 누구 기능이냐 하면, 세례요한의 뒤에 오실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세상은, 아까 이야기한, 세상 안에 있는 자체는 뭐다? 육이고, 그게 죄가 되고 단절이 되고, 구원이 안 돼요. 단절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세례요한은 폼 잡고 있는데, 예수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데, 아니 자기한테 그런 기능을 먼저 하라고 한 예수님이 물에 뛰어들었으니까, 헐~!! 이 신학체제를 어떻게 구성을 해야 되지? 이 신학체제를? 그것을 요한복음 1장 30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온 자가 나중 된다는, 개념상 절대로 섞일 수 없고 연결될 수 없는 단어 두 개가 나옵니다.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나보다 먼저 된 자다.” 이것을 불교에 갖다 주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심지어 교회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뜻일까요? 세례요한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잖아요.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가 장차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창녀질 하고, 내가 세리질 하고, 내가 도둑질 하게 된 것은,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누구 뜻이었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의, 그 분의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어떤 속성? 어떤 죄도 용서받는다는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과도한 자비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세상 죄의 일부를 내 담당으로 하고 살도록, 평생토록 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주신 겁니다. 그것이 뭐냐, 사귐이에요. 요한일서는 사귐입니다.
그래서 죄 지으면서 흑흑흑큭큭큭~하면서 웃어야 된다 이 말이죠. 처음에 울 때는 ‘나 같은 인간이 왜 이리 되었어?’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이래야만 한다는 것.’ 그래야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 그 관계성 안에서 이미 영생이 된다는 것. 주님께서 에덴동산 막아놓고 넘어 온 것은, 막을 때는 언제고 넘어올 때는 언제냐? 막을 때는 구원 못 받게 하기 위해서, 저주받기 위해서 해놓고, 넘어올 때는 복음을 위해서 저주도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저주가, 죄가 재료가 되어야 주님의 주 되심과 복음이 성립이 되기 때문에, 죄를 얻기 위해서 이 죄 많은 세상에 뛰어들었는데, 그 뛰어든 확실한 증거가 뭐냐, 죄인들만 받아야 될 그 물세례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뛰어들었죠.그래서 여기서 어떤 공식이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은 뭐다? 예수님은 물이다. 그게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니고데모한테 거듭나야 한다, 두 번째 태어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첫 번째 태어난 것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물세례를 말해요. 세례요한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규정되었어요. 뭐로 규정됩니까? 죄인이라는 규정이 된 거예요. 그럼 죄인으로 규정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죄인으로 규정돼도 구원 못 받고, 죄인으로 규정 안 되도 구원 못 받고, 구원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증거기 때문에. 다만 자기 백성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취지, 예수님에게 담긴 취지를 펼쳐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이 일어난 일이 자기를 알리기 위한 절차로써, 카펫으로써 사용하신 겁니다. 둘둘 말면 주님 쪽으로 다 감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에요.
그 다음에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실 분은 불의 세례를 받는다고 했죠. 그 불의 세례가 뭐냐 하면, 내가 받을 세례가 남아있다고 해서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물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피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확정하고 성공하고 난 뒤에 성령이 와요. 이미 다 이루었다. 이루시고 나서 그 다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영으로, 부활의 영이라는 말은, 어떤 마귀도, 어떤 율법도, 어떤 죄도, 이미 그걸 빠져나와서 도로 나온 힘이기 때문에, 빠져나온 힘은, 그건 발목을 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바로 뭐다? 성령이고 부활의 힘이에요. 이미 빠져나왔기 때문에, 출입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해도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한, 주님이 탈출했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예수님이 탈출한 그 능력으로 우리를 뒤집어씌워버리면, 그 안에 있으면 우리도 어떤 저주나, 율법이나, 마귀나, 그 어떤 죽음도, 우리의 영생을 더 이상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을 확정짓죠.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요, 피요, 그 다음에 예수님은 성령이다 말이죠. 이 세 개를 그냥 합치면 뭡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예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단절된 것을 잇는데 성공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래서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책입니다. 제가 아까 50분해야 되는데 뭣도 모르고 55분 했거든요. 이번에 5분 깝니다. 주의 뜻은 아닌데. 그리고 그 셋이 뭐냐 하면, 그 셋을 증거 하는,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귐을 통해서, 기쁨을 통해서, 그 사랑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가 2장에서 뭐라고 했죠? 저는 기억도 못하겠다. 이거 말씀하고 모든 말씀을 접겠습니다. 지금 이야기가4장, 5장, 다 한 거예요. 장소문제니까.
아가 2장 6절에 보면,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어떤 시추에이션이죠? 여자는 남자 품 안에 꼭 안겨있는 모습이죠. 이게 사랑의 관계라 이 말이죠. 갑이 되는 남자가 을이 되는 여자를 어떻게 합니까? “지켜줄게! 내가!”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별들의 고향에서 하는 것처럼. “지켜줄게! 내가!” “니 이름이 무엇이냐?” “라온입니다.” “그래? 라온이야! 구름으로 달빛을 그려줄게!”
몬스터 드라마에 도도그룹의 총수 도충이가 회개하고 난 뒤에 기도합니다. “자, 우리 하던 대로 하자! 아버지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 지은 것을 회개하게 해주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하는 장면이 나와요. 몬스터 제일 마지막 회 50회에 나와요. 어제 한 겁니다. 한국에서. 몬스터. 여기는 캘거리라.
그 드라마에서 개인구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런 것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여호수아라는 것은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죄인이 되는 경우, 어느 정도로? “주여 저 같은 것은 구원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는 육입니다. 그냥 방치해도 상관없어요.” 그럴 때, “주님이여, 저의 구원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저에게 찾아오신 것을 저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사귐이고, 이게 복음이고, 요한일서의 주제입니다.
이미 마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마귀의 협박과 공갈, 다른 말로 하면 행함에서 오는 협박과 공갈에 더 이상은 속아 넘어가지 않기! 우리 약속해! 그거는 누가 행함으로 공갈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자책하고, 내가 나에게 벌세우고, 손들게 만들고. 나를 때리지 마소서. 꽃으로도 나를 때리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때리지 마세요. 그냥 사시되, 현재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준비해놓은 그 하늘나라의 지시사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꿈같은 세상을 꿈인 줄 모르고, 현실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씀 보니까 이 현실이 나를 위한, 나의 생존을 위한 현실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깔아놓은 카펫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장소에 살면서 괴로워하면서도, 고생하면서도, 실패와 낭패를 거듭하면서도, 이미 우리의 영생은 전혀 지장 없음을, 날마다 미소와 기쁨으로 고백하는 사랑의 관계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오른손과 왼손이 저희를 꼭 껴안아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