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1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6-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24절 보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라는 것을 한 번 빼봅시다. 성령이라는 것을 빼고 읽으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안다. 앞에 뭐가 빠졌습니까? 성령이 빠졌죠.
그렇다면 성령을 빼고 이야기하니까, 주님 저기 계시고 우리는 여기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우리가 성심성의껏 지킴으로써 우리는 주 안에 거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무슨 관계냐 하면 너와 나의 관계입니다.너와 나의 관계. 너, 예수님. 그 다음에 나, 우리. self. 주체. 너(예수님)에게서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나는 계명을 받아서 지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게 되느냐, 나는 주님의 나라, 너(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주님 안에 거하면 이것으로 우리는 스스로 구원에 충족되는 공식같이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거부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구원이 되는 공식을 주님께서는 제시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보니까 나에게 문제가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상대할 때에, 평소에 우리는 예수님만 상대한 것이 아니고, 이건 너에 해당되는, 나 외에 사람들, 나 외에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하죠. 너,그것, 이렇게 하죠. 2인칭, 3인칭.
평소에 우리는 나 말고 너라고 지칭되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 내가 여기 있으면 부모, 학교선생님, 또는 교회 목사님,또는 집안 어른, 회사 사장님, 이웃주민들, 아줌마, 국가 대통령... 전부 모든 것이, 나는 여기 있으면 그 주위에 자동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너라는 것과 교류가 있겠죠. 나는 그 사람 어떻게 본다. 나는 그 영화배우 누굴 어떻게 본다. 있다면,뭐 그 교류를 어디다가 적용시키느냐 하면, 예수님도 나 외에 사람이니까, 예수님 대할 때에 평소에 내가 남 대하듯이,그렇게 동일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한계를.
마치 절에 다니는 사람이 부처섬길 때에,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 섬기듯이, 부처님한테도 그렇게 섬기는 것을 우리가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뭐 그리고 예수님 섬길 때도 성심성의껏, 평소에 내가 섬기는 대로 그렇게 섬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한테 자연스럽고. “여러분, 하나님 섬기세요.” 그리고 목사님들도 “하나님 섬기세요.” 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세요? 섬김? 그 섬김이 뭐지? 아, 내가 평소에 우리 조상 섬기고,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섬기듯이, 예수님도 그렇게 섬기면 되는구나. 그럼 뭐 어려운 것이 없네.’ 라고 그렇게 우리가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있겠죠.
그런데 거기에 대한 보상이 뭐냐 하면 주 안에 거한다고 하니까, ‘야, 평소에 우리가 남한테 잘해주듯이 예수님한테 잘해주게 되면 나한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주 안에, 천국에 영원히 거하는 혜택이 주어졌구나.’ 이거는 굉장히, 간단하게 교회 다니고 하는 문제하고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24절에서 여기다가 사도요한은,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뭘 집어넣었습니까? 갑자기 여기다가 뭘 집어넣어요? 성령을 집어넣죠.
자, 성령을 집어넣으면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령을 고려하지 않고 주님을 정성껏 섬긴다는 것은, 이거는 백퍼센트 지옥 가는 공식이 되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 없이 우리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한다면 주 안에 거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수가 없다. 그런 뜻이에요. 인간이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니가 예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완전히 다른 예수라는 겁니다.
왜? 주님은 성령을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령을 보냈는데, 받는 사람이 성령을 고려하지 않고, 하던 대로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섬기겠다는 것은, 그건 주님의 만남과 성사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요한일서에서 뭐가 중요해졌어요? 성령이 오시는 이유, 개입해야 될 그 필요성, 성령이 없이는 구원이 안 된다는 이 당혹감과 절대 절명의 위기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요한일서를 사람들이 의견내서 쓴다면 성령을 뺄 겁니다. 근데 요한일서는 하나님에게서 온 편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성령을 집어넣었으니까, 이제는 성령마저 누군지를 알지 아니하면 구원은 묘연한 겁니다. 이제 없는 겁니다. 필수요건이 되었어요. 차라리 인간보다도, 나보다도, 성령이 구원을 주도하는 처지와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럼 성령이 뭔지를 먼저 아셔야 되겠죠. 성령은 지난 시간에, 어렵다는 지난 시간에 제가 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죠. 여기 선까지가 기다림인데, 메시아가 와버리면 더 이상 기다림은 없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이 결정 되는데, 메시아가 오고 난 후에도 결정 되지 않았어요. 메시아가 오고 난 뒤에 계속 일이 진행됩니다. 마지막 재림할 때까지. 여기 이미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이미 지나가버린 거예요.
인간들에게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구원을 완료시켜놓고, 완료되었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겁니다.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은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전혀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을. 구원이 끝나고 그 이후의 시점에서 도로 이곳에 오셔가지고, 우리한테 통보하는 기능을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섬겨야지, 주님한테 순종해야지, 이 모든 것이 결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보해주죠.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순종해도 안 되고, 계명 지켜도 안 되고, 기도해도 안 되고, 헌금해도 구원이 안 되고, 교회 다녀도 안 되고, 안 다녀도 안 되고, 십일조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고. 어차피 구원은 우리 행위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방인들이 성령세례 받을 때, 그 자체가 의인이 돼버린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워낙 교회에서 모르기 때문에, 그다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죠.
그러면 이 성령은 누가 보내주는가 보니까, 성령은 예수님이 보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일 다 끝나고, 마무리 짓고, 도로 오신 거예요. 제가 글을 한 번 써보겠습니다. 주님은 죽으실 때 십자가에서 약하게 죽었다는 것을 제가 어디에선가 했죠. 무능하게 가셔서 유능하게 다시 오셨다. 이것이 성령의 오심의 취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다고요? 사람들한테 밀려서 무능하게 죽었죠.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아무도 없었어요. 죽었단다. 끝. 그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에.
그런데 난리가 난 것은 뭐냐 하면, 사도가 설치고 난리가 났죠. 사도가 설치게 된 것이 오순절 날 그들이 뭘 받았습니까?뭐 교과서 받았습니까? 새로 참고서 공부했습니까? 아니었죠. 뭐 하나님의 선택 책대로 공부해서 한 게 아니죠. 그냥 뭐가 왔습니까? 그냥 성령이 와버렸죠. 난리도 아니에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할 소리 다한 이유가 뭡니까? 거기 보니까 뭘 받았다? 성령이 충만한 거예요. 충만해서, 설교해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님 잘했죠?” 뭐 이런 식으로. “잘했어! 잘했어!” 죽음은 비극의 마지막이잖아요. 그렇게 비극이어도 본인은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랑에서 나옵니다. 기쁨은 기쁨인데 무슨 기쁨이냐 하면 사랑의 기쁨이에요. 그러면 성령이 오면 뭘 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이고 신학에 정통한다? 아니디요, 아니디요. 갑자기 북한 말을 쓰는데. 아니지요, 아니지요. 기쁨이 있어요. 기쁨이 있단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기뻐요. 어떤 기쁨? ‘에이, 안 해도 되는구나!’ 하는 기쁨. ‘괜히 마음으로 쫄았잖아?’ 쫄았다는 말은 이상하지만. ‘에이, 괜히 쫄았네!’
아니, 성령이 와서 구원받았는데, 이미 구원을 확정지은 분이, “어이! 구원받았어!” 심판관이, 재판관이 해버렸다니까요.재판관이.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서 두 사람이 엎드려서 기도하죠. 한 사람은 기도하는데 분간도 안 돼. 바리새인은 자랑질 하는지, 기도하는지, 분간도 안 돼요. 11절,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자, 강의 다시 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 내가 남들한테 평소에 하던 대로, 하나님을 상대로 생각해서 열심히 섬기는 거죠. 그렇게 섬기면 남들이 다 칭찬하니까. “아이구, 정성도 지극하여라. 아이구, 착하기도 하여라. 아이구, 세상에! 간도 떼 준다고 하고. 그리고 돈도 주고. 아이구, 저렇게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복 받아도 아마 30배 복 받을 거라.” 라고 하는 그러한 기준들이 그 시대에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추면 맞출수록 점점 더 의인이 되어가는, 또 의인 소리를 듣는, 그런 보람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별 직업 없었어요. 그냥 성경만 들으면서, 요새 말로 하면 말씀폐인, 그냥 말씀만 들어보면서 실천에 옮겨서 남한테 지도자급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게 보람이었습니다. 기도할 때도 떠벌리면서 기도하고, 시장가에서 구제해놓고 떠벌리면서, 금식할 때도 흉악한 모습을 해가지고, 천하에 모든 질고를 혼자 다 지고 가는 어린양처럼 모습을 해가지고, 폼 하나는 멋들어지죠. 폼 하나는. 그래서 저는 개량한복 입는 사람들이 좀 수상해요. 환경운동, 개량한복, 왜 옷이 한결같이, 유니폼이 꼭 중이 입는 옷 같으냐 이 말이죠. 삼보일배 할 것 같아. 그렇게 하면 삼보일배 하는 것 같아. 그 사람들이.
그런데 그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죠. 주님께서는 장차 올 심판을 미리 앞서서 순회재판을 하는 거예요. 순회재판. “피고는 들어라! 너는 의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의인이냐? 너는 지옥가거라! 너는 죄인이냐? 너는 천국가거라!”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서를 내려줬습니다. 이걸 한국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사자성어로 수시모집이라고 합니다. 수시모집. 심판이전에 이미 심판 뒤의 결과가 확정된 사람, 신분. 수시모집이에요.미리 대학에 합격했어요.
성령은 바로 이걸 통보하러 오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뭐가 생긴다? 기쁨이죠. 그 기쁨을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사랑의 사귐. 니하고 먼저 사귄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아버지하고 나하고 유일하게 사귄 사귐 속에서, 니 인생이 지불해야 될 돈과 값을,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사귀어서, 니가 지불해야 될 모든 돈을 내가 다 지불했음을 성령을 통해서 통보해주니까,지갑에서 십일조 내려고 하는데, 지불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받지를 않아요.
“누가 지불했습니까?” “내가 지불했잖아.” 그 모든 죄 값을 대신 다 지불해서,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화목제물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주님 앞에 더 보탤 행위가 남지를 않았어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사귐이라고 하고, 그 사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고, 그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기쁨이 생기겠죠. 사랑의 기쁨. 그것이 바로 구약 시편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선취한 겁니다.
잠시 시편 한 번 찾아봅시다. 누가 빽 써가지고 성경 좀 찾아보라고 하는데 빽에 굴복했습니다. 시편 149편 4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고 기뻐하죠. 누가복음에서도 광야나 들판 같은데서 목자가 밤에 양치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자. 하나님께서는 “니를 보기만 해도 왜 그렇게 기쁘냐?” 이거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승낙하신 자들 가운데 뭐다? “평화로다.”
이것은 천사들의 찬양이 곧, 우리의 신분을 보고 찬송한 천사들의 감상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보고. 우리는 몇 되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아!” 이렇게 보고 계신 거예요. 뭐가 왔기 때문에? 사랑이 왔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가져다 줬어요?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의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우리가 주님 섬긴다는 것은 성령 빼고 섬기는 방법밖에는 우리가 배운 것이 없어요. 정성을 다하고 순종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는 순종이 무의하다고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이미 넘치는 자비 앞에서는 나의 순종이 빛을 잃어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순종은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척 하면서 내심 30배 60배 100배를 노리는, 일종의 투자에요. 돈 놓고 돈 먹기, 뭐 애들은 가라!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돈 타라! 돈 타면 돈 먹는다. 이 말이 아닙니까? 애들 앞에서 뱀 장사하는 것처럼.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이 임한 순간 우리는 뭐냐 하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무엇의 대상?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시편 149편 4절에 의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한 선취하는 겁니다.
시편 68편 3절을 봅시다. 집사님. 이런 것 좋아하세요? 성경 찾아보는 것? 누가 이야기 했더라? 집사님 한 번 읽어보세요.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시카고 강의에 참석했던 어떤 분은, 예수님 복음을 알고 너무 기뻐가지고, 심지어 한의원 마트 앞에서 아무도 봐주지도 않는데, 기타반주에 노래에 맞춰서 약간의 율동,비슷한 춤까지 췄다는 거예요. 얼마나 우사스러운 행동입니까? 그런데 고마운 것은 아내를 위해서, 믿음도 개뿔도 없는 남편이 앞에서 기타 쳐주고 2년 동안같이 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샌디에이고에서 와가지고 그 분들이 참석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귀는 그 사랑 말고, 값을 다 치렀고, “너는 죄인 되어도 괜찮아.” 죄인 되어도 하등에 관계없이, 그냥 그대로, 죄인이 되던, 뭐가 되던 관계없이 그대로, 창기, 세리, 간통을 하다 잡히던 관계없이, 도둑이 되던, 그냥 그대로 나의 기쁨의 대상으로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겁니다. 끝났음을 어떻게 압니까? 끝났으니까 내가 왔잖아요? 누가? 예수님의 영이 왔잖아요. 값을 대신 다 지불하신 그 분이 오셨잖아요. 그 분이.
대학당국의 인사책임자가 합격통지서 들고 와가지고, 판사님이 와가지고, “실례합니다. 여기 아무개 계시죠? 축하드립니다. 합격입니다.” 그게 성령이에요. 성령.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는 말은, 두려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성령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기능을 인정한다면, 그 임무를, 그 취지를 안다면, 세상에, 어떤 교회에서 하는 협박과 공갈, “당신 그거하면 이번 주 바이어하고 계약 깨져! 당신 자식 성적 내려가! 지금 당신 목사한테 험담하면 3대를 멸할 줄 알아! 당신 앞으로 잘해줘야 해! 안 그러면 당신 집안 끝났어! 가계의 저주가 흐른다고!” 이런 공갈, 협박에 속아 넘어갈까요? 안속아 넘어갈까요? 안 넘어가죠.
말씀 잘 들으셔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목사님을 세워주신 거예요. 왜? 가짜는 가짜끼리 놀라고. 벌벌 떨거든, 처음부터 이거는 어떤 누구도 방관한 적 없다는 것은, 그런 입장인 것을 깨달으라고 그런 목사님들을 많이 유포하신 거예요. 그 목사님들 참 잘하신 거예요. 제 임무를, 제 역할을, 제 마귀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박수 받아야 해요. 짝! 짝! 짝! 박수 보내요. 그렇게 해서 오천 명 모으면 무슨 의미며, 천명 모으면 무슨 의미입니까?
거기서 벌벌 떨고 있는데. 큰 계약 건 앞두고 벌벌 떨면서 새벽기도 나오는 그 모습들을 보세요. 수능 백일 앞두고, 지금 백일도 안 남았어요. 앞두고 교회마다 기도하는 그 모습들. 노골적으로 백일 내세워서 하면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지만,교회는 은근히 새벽기도 나오라고. “새벽기도 나오세요. 고3이 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한가해? 야! 배짱이 센 아줌마네?” 지금 고3이 있다면서 어떻게 새벽에 잠이 옵니까? 교회 나와야지. 이런 것. 우리는 거기에 얼마나 말려들었고, 속아 넘어 왔었습니까?
그러면 그 기쁨이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기쁨은 성령이 오셔서 해준다는데, 성령이 결국 뭘 하느냐, 사귐. 어떤 사귐? 사랑의 사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행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고백으로 나와요. 어떤 고백입니까? “주님이여, 나로 인하여 주님이 누累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이란 드라마에 보면 이 장면이 나와요. 세자가, 그 나라의 2인자죠. 왕이 있고. “라온아!” 라온(즐겁다는 뜻의 옛말)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말이에요. 저도 드라마에서 처음 배웠어요. “라온아!” “왜, 저를 라온이라고 합니까?그냥 내시인데.” “라온아! 기쁘니까 기쁘지!” 논리적으로 뭐 메시아 이전 이후가 어떻고, 조직체계가 어떻고, 그게 중요한 것보다도, 우리가 아가서를 한 번 찾아봅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조직체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기쁨이 아닐까요?
아가서 2장 6절을 한 번 봅시다. 아가서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구약960페이지에 있습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아가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남성의 집요한 사랑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근데 여자는 도망가요. 도망가서 문을 탁 닫는데, 문이 닫히기 전에 남자가 손부터 탁 내밉니다. “이 약 먹고 감기 나으세요.” 콘택600. 판콜씨. 탁 주면서 나으세요. 이거는 뭐 스토커도 이런 스토커가 없어요. 여자는 도망가고 남자는 끝까지 오면서 만나가지고,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게 주님이 죄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부부관계로 묘사한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거하다’ ‘소속됐다.’ ‘~안에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 있음을 성령이 와서 통보해주니까, ‘아하! 내가 지금 사랑 안에 있구나.’ 새로운 처소가 여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을 부를 때는 이렇게 불러야 돼요. 정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불러야 됩니다. “당신 앞에서 내가, 당신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는 것이 당신한테 짐이 되지 않기를!” 그럼 아내가 하는 말이, “그러니까 일찌감치 집구석에 들어오던가?”
자기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대가 있음 자체가, 그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를 잊어도 더 이상 상관없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된 겁니다. 따라서 사랑이 오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하냐 하면, 나에게 내가 제일 중요한데, 내가 중요하다보니까 나는 항상 내 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두렵고 떨리고 벌벌 떨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부터는,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이 떴기에, 그 다음부터는 나에 대한 신경을 안 쓰다보니까, 그 분만 있으면 나는 기뻐하기 때문에, 뭐가 되겠어요?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사랑 안에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미래의 나의 주관자를 일찍, 지금 만난 겁니다. 정말 누가 들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정말. 지우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있다. 그리고 성경에 보니까 메시아, 그리스도가 온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할 일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구원자도 되고, 동시에 심판주도 되죠. 그럼 구원이 있고, 심판이 있고, 우리의 최종적인 시험날짜가 앞에 있으면, 우리는 그냥 대비하고 준비하면 되겠죠. 이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오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서 내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서, 구원받을 때 유리하게 작용해서, 합격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전에, 매사에 자기 행동과 마음을 조심하고, 절제하고, 관리하고, 이렇게 해서 살아가게 되면, 적어도 지옥은 안 가고 천국에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이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이미 메시아가 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령이 내가 있는 곳에 왔기 때문에, 우리는 뭘 기다리느냐 하면 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내 허락도 없이, 내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합격시킨 분을 어떻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죠.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장 12절. 그래서 여기 있는 우리가 기다리는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하나의 그냥 기다림이라면, 기다리는 목적이 뭐냐, 주님 좋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기 위한 기다림이라면, 성령이 오게 된 우리가 기다리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미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자 되게 하신 그 과잉적인 자비. 그냥 자비가 아니고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알아서 처리해준 그 넘치는 사랑을 이렇게 해주신 그분이 보고 싶은 거예요.
보고 싶을 때, 어떻게 보고 싶겠어요? 그리움으로, 사랑으로 보고 싶죠. 그게 바로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귐이에요. 사귐. 성령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사귈 때, 너는 이미 합격된 자. 합격된 자를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속한자라고 되어 있고, 불합격된 자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 이렇게 되고 맙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이미 죄가 처리되었기 때문에 죄가 없게 되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그 마귀에게 속한, 불합격 된 이유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으로 작용해요. 계명으로.
계명으로 작용해버리면, 그 계명의 내용은 혹독한 계명의 내용이 됩니다. 그 혹독한 계명의 내용의 일부가 뭐냐 하면, 요한일서 3장 16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는 자는,이거는 사랑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누락되고 탈락되겠죠. 그리고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이라고 했으니까.
계명이라는 의미는 뭐냐 하면, 이걸 안 지키면 계명이 위반된 것이 되어서, 거기에 대한 처벌이 따른다는 의미에서 계명이라는 말을 했어요. 계명. 그냥 선물이 아닙니다. 기준이에요. 심판의 기준으로 온 거예요. 따라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는 자는, 온전한 사랑의 계명에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거는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내용이 바로 사랑의 계명으로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앞에 15절에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뭐한 자입니까?살인하는 자잖아요.
그러면 살인하지 않고 영생 얻으려면 어떤 조건이 되어야 됩니까? 스물 네 시간 평생 동안 한번도, 단 한 번도 뭘 하지 않아야 돼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어야 돼요. 누굴 미워한 적이 있으면 형제를 미워한 것이 되어서 살인자이기 때문에, 계명이라는 차원에서 그거는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잘 지키다가, 미워하지 않다가, 그 다음에 어느 날 미워해버리면 그때부터 탈락된 것이 아니고, 요한일서 3장 10절에서 처음부터 너는, 원천이, 원본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기어이 너는 그것을,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이벤트가, 사태가 결국에는 일어나게 되었다고 폭로하는 겁니다.
잘 할 때는 하나님께 속했다가 한 번 삐걱해서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잘해도 단 한 번이라도 형제를 미워한다면, “너는 근본자체가 썩어먹었어!” 하는 판결을 내려버린다 말이죠. 누가? 계명을 주신 분이. “계명을 주신 분이 그 사랑의 계명에 준해서 판결을 내렸다. 니가 한 번 실수했다고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야. 너는 근본이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 그때 니가 티가 났어. 폭로되었어. 탄로 난 거야. 따라서 처음부터 니는 안 되는 인간이야.” 하고 탈락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최선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하나님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이 요한일서에 의하여 모조리 다 마귀에 속한 자입니다. 아무리해도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더 무서운 이야기는 형제를 미워했다, 미워 안 했다 하는 판정을 본인이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때 이빨이 아파서 냉정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것도 안 돼요. 사랑해야지 왜 냉정해요? 환희 웃어야지 왜 냉정했습니까? 냉정했다는 것은, ‘니도 때 맞춰서 집에 좀 오지. 내가 아픈 것도 모르고 집에 찾아와서?’ 이런 식으로 혼자 궁시렁궁시렁 하는 것이 주 앞에 들통 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미 합격 받은 사람, 성령이 온 사람은, ‘과연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할 처지에 있게 하셨구나.’ 왜? 우리는 남들 대할 때, 인간적 사귐 외에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귀는 사귐에 대해서 아는 바다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귐은 전혀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귐이었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합격통지서 받고 난 뒤에, 새삼 그걸 바라보면서, 이 모든 죄 값을 단번에, 이미 값을 치러주신 그분이 보고 싶고 사랑이 그리워지는 겁니다.
근데 그 분이 성령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냥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일체 우리의 조건을 일체 묻지도 않고 무조건 사랑했거든요. 그 사랑이 어디에 나왔다고 했습니까? 아가서. 사랑받는 여자는 도망가고 사랑하겠다는 남자는 쫓아오고.이 이야기가 바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아가서입니다. 기어이 먹고 말거야! 치토스! 하는 심정으로. 계속 쫓아오면서 집요한 구애를 해버립니다. 날 사랑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겁니다. “내 사랑을 받아주오!” 내 사랑 받아주오. 결혼해듀오. 결혼업체선전이에요. 선전문구가 결혼해듀오. 주오가 아니라 듀오. 결혼해주세요.
구약은 예언이죠. 그 선취는 뭐냐 하면, 결혼해서 이미 결혼관계에 돌입했다고 성령이 와서 통보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24절에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를 주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의 결실물, 결과물이 우리 자신인 것은 누가 와야 된다? 성령이 오니까, 아, 우리가 이루지 못한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셔놓고 그 이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자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자기 사랑인 것을 우리는 같이 동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3장 끝까지 하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놓고 이제는 우리가 뭘 보자? 요한일서 3장 15절,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걸 볼 때, 어떻습니까?거기서 뭐가 나오죠? 공포나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가 나옵니까? ‘이걸 언제 지켜? 언제 지키지?’ 이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가 나오죠? 기쁨이 나오죠. 어떻게? 주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데, 완벽한, 흠이 없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우리를 그렇게 규정해주신다는 고마움이 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귤만 까먹었는데. 귤만 까먹었는데, “세상에! 자기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니!” 이렇게 평가해주는 거예요.
그게 우리한테는 오히려 낯선 거예요. 논리가 안 맞아요. 논리를 비약해도 너무 비약한 거예요. 이제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누가 귤 먹을까 싶어가지고 혼자서 숨어가지고 혼자 귤 까먹는데, 주님께서 어깨를 치면서, “이 자식!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니! 아이고, 기특하여라!” 이렇게 난데없는 과도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해요? 오백 원! 그 해답은 바로 사무엘상 1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봅시다. 아까 어떤 분이 성경 많이 찾자고 해서 제가 많이 고려하는 중입니다. 그것도 주의 뜻이라고 알고.
사무엘상 1장 5절을 봅시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임신하지 못하게 만들었죠. 사무엘상의 한나 이야기,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교회 일 년만 다녀도 다 아는 이야기. 교회 일주일만 다녀도 아는 이야기는 달란트비유이야기고. 일 년 정도 다녀야 아는 이야기가 한나 이야기에요. 주변에 집사님 중에 같은 이름인 한나라는 이름이 많기 때문에. 사무엘상 1장 5절의 말씀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성태치 못하게,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죠.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형제를 완벽하게 목숨까지 바친 상태로, 의로운 상태로 간주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은 충분히 그런 의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마땅하는 겁니다. 마땅하다.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 이게 말이 됩니까? 임신이 안 된 상태에서는 태어날 수 없는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다.분명히 태어날 때는 잉태해서 태어났는데, 중간에 잉태치 못한 자라는 것을 집어넣어버리면, 여기서 뭔가 우리의 논리로써는 이루어지지 않죠.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원하는 바는 뭐냐, 잉태치 못한 자식이라는 표현자체가, 이게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연결시킬게요. 그 연결이 뭐냐 하면,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인간이 메시아의 말씀을 들어서 구원에 이르는 이 노선에서 절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노선을 하게 되면. 왜냐하면, 이 노선은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육으로 봐요. 육으로 난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에 보면, 같은 사도요한이 지은 책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노선이 바꿔져야 해요. 노선 갈아타기가 돼야 돼요.
노선 갈아타기가 돼야 하는데, 이쪽 노선에서 저쪽 노선으로 갈아타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교회백날 다녀봐야 구원 안돼요. 교회 다닌다는 자체가 누구한테 자꾸 의지가 되고, 기대를 하게 되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지켜내는 내 육신에 경건과 육신의 고상함과 육신의 성실함과 순종함에다가, 모든 기대를 거기다가 다 쏟아 부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케요? 저케요? 하는 코미디에 나오거든요.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목사님.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내 구원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저렇게 하면 내 구원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선교 헌금 내면 내 구원에 약간의 보탬이 되겠습니까? 십일조를 내게 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요? 찬양대 봉사하면 그 찬양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아무리 그것을 물어도 주님께서는, “삑(☓) 단절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 모임에 제일 첫날 첫 번째 시간에 한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어요. 구원이 무엇이냐? 라는 것은 없다. 뭐가 있다? 복음이 무엇이냐? 복음이 나타나서, 복음 자체적으로 나오는 그 능력이, 구원이 안 되는 자를 일방적으로 의인되게 하여 구원되게 하는 그 결과물들만 모인 집합체가 뭐냐 하면 천국입니다. 행한 것도 없이 의인된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라 이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우리들의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무슨 나라냐 하면,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라니까요. 누가 시작해서 누가 관리해서 누가 마무리했기 때문에 그 아들이 나라에서는 면류관도 반납을 해야 돼요. “우리가 쓰는 것이 합당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왜 강단에서 못하냐 이 말이죠.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이 궁금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이 고생 많은 세상에서,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이 자기한테 손해라고 여기거든요. 그 손해를 천국 가서는 몽땅 보상받기 위해서, 그걸 노리고 교회 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순전히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그저 나한테. 나는 나 혼자고 사귐이 없어요. 모든 주위 사람들은 내가 이용해먹기 위한 대상이지, 결국은 모든 것은 나한테 귀결되거든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고 노동이라 이 말이죠. 종교노동. 기도라는 종교노동. 그러나 하나님의 천국은 뭐냐, 사귐이죠. 사귐. 그 사귐의 관계를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사랑이고, 그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감정적인 어떤 현상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두 글자로? 기쁨. 기쁘죠.
기쁨인데, 그 기쁨의 내용을 뜯어보니까 뭡니까? 갈 필요도 없고, 가서도 안 되고, 갈 이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고, 가고자 해도 못가는, 그런 나라에 이미 가게 되었다는 통보가 주어졌기 때문에, 너무 고마워서 기뻐하고, “이제 나는 주님과 사귈래?” 라는 사귐이 형성될 때, 그게 주님께서 유발한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안이에요. 안.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안에 또 다른 안을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캘거리든, 한국이든 관계없어요.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이미, 이 세상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특이한 관계로 사귐을 통해서 새로운 안에 들어 있으면, 이 사람은 이 캘거리 안에 들어있는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이 성령 안에 있는 자로서 캘거리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역사 안에서의 묵시죠. 역사 안에서의 묵시세계.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밧모섬에서의 사도요한의 형편이고 처지입니다. 참된 성도 위에서 일곱 교회가 다 싸그리 다 멸망하고 사라져요. 교회는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사라져야 돼요. 그래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있죠.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은 더하기 아니고 빼기에요.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입니다. 여러분들 피부에 사마귀가 날 때, 저는 사마귀가 자주나요. 그래서 저는 약을 한 일주일 바르는데, 바르면 사마귀가 톡하고 빠지죠. 빠지고 난 뒤에 그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완전히 분화구 같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지옥을 지옥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누굴 이용했어요?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분화구처럼, 사마귀 있던 자리에 사마귀가 빠지고 나머지기가 뭐냐 하면, 잉태치 않은 자를 핍박했던, 육에서 육으로 나온 사람들이 거기에, 사마귀 빠져나온 곳에 동그랗게 모여 있잖아요. 그게 바로 안 보이던 지옥이 그렇게 보이고, 안 보이던 마귀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에 속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당장 데려가지 않고, 쏘옥 집어넣었다가, 사마귀 빠지듯이 뽕! 소리가 나요. 뽕! 포도주 뚜껑 따면 어떤 소리가 납니까? 펑! 펑이 아니죠. 뽕! 뽕하고 열죠. 사마귀 빠지고 난 나머지 빈자리 있죠? 숨겨져 있던 마귀의 자손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의 뜻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확장이 아니고 지옥의 확장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도 한 개 배웠어요. 지옥의 확장을 위해서 일합시다.
지옥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복음 믿는 사람이 성장할 때 그 주변에 형성되는 것이 지옥이에요. 복음이 없는 곳에는 지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땅에 귀신과 악마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자마자 “예수여!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하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운집하고 모이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오시기전까지는 점잖은 사람인데, 오시면서 예수님께서 “너그 애비는 사탄이다.” 라고 하셨죠. 악마의 정체가 그렇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복음으로 인하여 지옥이 형성되고, 복음을 위하여 천국이 있다는. 복음을 위하여 주께서 일했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창세기 3장에서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이유가 없어요. 쫓아내도, “그래. 미안하다. 좀만 고생해라.” 이럴 것 같으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화염검을 치고 천사가 막을 필요가 없어요. 스물네 시간 돌아다니면서, 혹시 침범할까 싶어서 돌아다니잖아요. 그건 강력한 의지입니다. 절대로 너 같은 인간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 강력하게 저지한 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 구원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요? 절대 구원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효과로써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된 거죠. 구원위주가 아니고 복음위주입니다. 사람은 개인위주지만, 주님은 복음위주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 중심이죠. 평소에 우리는 우리중심이고. 우리 중심인데, 교회 다녀서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이거는 마귀적인 실시지, 전혀 이거는 관계없습니다. 거기 가봐야 지옥 가는 방법만 실컷 배우지, 복음에 대해서 없는 거예요.
맨날 배우는 것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하면 됩니까? 목사님. 이렇게 하면 내가 구원됩니까?” 맨날, 온종일, 스물네 시간 전부 다, 자기 구원에만 몰두해가지고, 교회에 온 정성과 시간과 돈을 다 바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관심사는 그게 아닌데. 복음인데.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원에 이용만 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채 교회가고. 또 집에서는 경건훈련하고, 성경백독하고, Q.T하고. Q.T 백날하면 뭐합니까? 구원 얻겠다는 시도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거는 유대인처럼 그냥 기다림이에요. ‘이렇게 하면 좋은 점수 받겠지? 이래하면 되겠지?’ 그리고 또 뭐 잘못했다 싶으면 회개하고.
여러분, 이게 회개할 문제입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니” 진짜 이게 회개가 될 문제입니까? 예배 참석 열한시인데 열한시 삼십분에 왔다. 이거는 반성하고 집중하면 다음에 열한시에 도착할 수 있어요. 이거는 가능한 문제입니다. 근데 형제를 미워한 자는 살인한 자다. 제가 두 번 다시는 미워하지 않을 게요. 과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아니 미움이, 사람 골라가면서 미워합니까? 미울 수밖에 없는 인간이 등장할 때는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괜히 준 것도 없는데 미운 사람이 있잖아요.
여러분, 드라마에 탤런트 나오면, ‘저 인간 왜 나오나?’ 하면서 미워지잖아요. 그 사람은 마귀에 속한 사람이에요. 왜 미워해요? 형제를? 그래서 형제는 없는 거예요. 형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 형제라는 것을 누가 평가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이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이걸 지켜야 하나님께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그러한 나름대로 자기 구원에 몰두한 그 방침에 의해서 사랑할 사람만 사랑하고, 이뻐 할 사람만 이뻐 하니까, 형제라는 개념 자체를 누가 선택했어요? 내가 선택했어요. 만만한 것만 형제에요.
선교단체에서 전도할 때도 이쁜 아가씨들한테만 전도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죠? 못생긴 것들은 전도도 안 해요. ‘지옥에나 가라! 니는 사영리 들을 자격도 없어!’ 꼭 이래요. 교회에서 목사가 심방할 때, 꼭 돈 되는 이런 사람들. 돈 되는 사람들. 가가지고 거지꼴 하고 있으면, 에이! 왜냐하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시킨 대로 다 했습니다.” 라는 어떤 성과를, 손에 성과급을 내가 쥐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이걸 당당하게 내밀고 싶은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이 정도까지는 했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거 아니야! 더더더 더 완벽하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렇게 해석되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대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자신을 그대 앞에서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대 때문에. 형제가 없었는데, 형제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자신이 잃어버린 게 되죠. 잃어버린 이것이, 주님이 아벨이 되시고 우리는 가인이 되어서, 아벨이 드러나기 위해서 가인이 이용당한 것처럼. 죄인으로 드러난 이것을 주님이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형제의 형제 됨을 위해서 내 목숨을 잃어버린 자로 규정을 받는, 그러한 것이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되는 것이에요.
조금만 더하겠습니다. 모든 매사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해서 내 형제로 받아줬다” 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우리로 하여금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 결과로 사귐이, 사랑이 기쁨으로 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계명들을 주신 겁니다. “역시 주님이 주가 되셔야 되겠습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구원되는군요.”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