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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언약(창9;8-17) 1607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4. 07:42
2016-07-27 20:39:12조회 : 109         
   무지개 언약 16072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무지개 언약(창세기 9:8-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eZC9AlwNag, Hit:9

 이근호 16-07-27 21:16 
무지개 언약

2016년 7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9:8-17

(9: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9: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9: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9: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9: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세상에 언약을 선포하므로서 이 자연세계는 언약에 묶이게 되어버렸습니다. 언약에 묶이게 되면 이는 곧 시스템이요 장치가 됩니다.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며 구조가 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인의 가치나 의미는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즉 “신이시여, 나에게 이런 혜택을 내려주옵소서!”라는 기도에 응답할 의무는 하나님께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을 목표로 상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약달성을 위하여 활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선포하시는 단계가 이미 전면적인 물 심판 후이기에 이 무지개 언약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세계는 ‘이미’ 심판 받아 마땅함이라는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심판 이후’의 의미를 품고 있는 바가 곧 ‘무지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개 언약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시는 바에 의해서 세워진 언약이기에 인간들의 그 어떤 행위나 태도와 상관없이 전면적인 심판을 행사하시지는 않습니다. 즉 악한 나라라고 해서 무지개가 아예 없다든지 착한 나라이기에 무지개를 곱빼기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개인적인 욕망과 희망은 무지개 언약 체계에서는 거부당합니다. 인간들은 임의로 자기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무지개를 철거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무지개 언약’의 내용 변경을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괄적으로 언약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운영하는 대자연 속에서 인간들이 개인적인 여망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언약을 모른다는 말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여전히 주어집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인간이라도 그 사람이 여태껏 살아온 모든 날들이 다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에 준해서 제공된 은혜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성도가 남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의 섬긴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성도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개인의 역량에 따라 개인 소유의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란 무지개 언약 안에서 새롭게 의미가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심판 이후의 관점’이요 둘 때는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주어지는 의미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화’입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이미 자신의 마음을 대자연 속에 나타내시고 계신 겁니다. 대자연이란 곧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대자연 속에 무지개가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별이 저토록 빛나는 이유를 아십니까? 도대체 인간이 아는게 뭐가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욥에서 물었던 질의이기도 합니다. 고난받는다고 불평하지만 욥이 도대체 세상을 알고 불평하는 지를 하나님께서 따지시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체계보다 자신의 욕구에 더 민감하기에 본인은 자신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지만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삽니다.

나만 잘되면 행복이다 는 겁니다. 하지만 행복한 가운데 지옥가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진정 대자연과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체제의 원칙과 맞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겁니다. 하늘의 무지개가 ‘심판 이후성’과 ‘전체성’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냈다면 그와 동일한 본질을 지상에서도 나타냅니다.

그것이 바로 ‘피흘림’에 대한 법입니다. 즉 짐승의 피를 먹지말고 사람의 피를 내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피를 낸 자는 반드시 그 피값으로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피흘림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화’를 꿰하시는 겁니다.

지상에서 피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이가 바로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에스겔입니다. 에스겔 1:26에 보면,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심판을 마감하시고 난 뒤의 여유를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무지개 형상으로 그 업무의 완결성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장차 이 지상에서 오실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품고 있는 마음입니다. 심판 이후의 심판주의 기능과 그리고 모든 개인적 요구를 거절하시고 오직 주님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시는 그런 원리에서 천국을 완성시키시는 뜻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인간들로부터 피흘리심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사적인 욕망 추구에서 비롯됩니다. 즉 ‘내가 잘 되어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은 심판받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의로운 존재임을 증명하겠다는 겁니다. 이는 ‘언약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일괄적인 물심판을 인간들은 잊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인간들이 놓치고 있고 잊고자 하는 ‘심판 기억’과 ‘심판 이력(履歷)’를 반복적으로 되새겨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창 8:21)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로 도(道)를 닦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맞서는 태도로 돌변합니다. 자신의 사정을 무시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노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곧 미움이요 미움은 곧 살인죄가 됩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지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에 대해서 적의(敵意)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로 생긴 사건이 바로 십자가 죽음 사건입니다. 그 죽으신 분이 무지개 언약 취지로 그동안 모든 인류를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진정 언약 안에서 사는 자는 뒷짐지고 어슬렁거리듯이 살아온 나이만큼 지옥같은 세상을 관람하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희생의 피와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죽은 자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7-28 19:04 

49강-창 9장 8-17절(무지개언약)16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9장 8-17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언급을 하시고 그 언약에 대한 대상자가 인간뿐만 아니고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짐승들과 모든 생물까지 포함을 시켜놓았습니다. 이 말은, 언약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언약을 모르고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몰라도 사람은 살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악이든 선이든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 살아가는데 평생 살아가면서도 그들은 또 행복하게 살 수가 있어요.



그래서 행복하게 지옥 갑니다. 뭘 모르면? 언약을 모르면. 자기 행복이 의미가 아니거든요. 자기행복은 자기가 기대했던 바고,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를 포함해서 산의 소나무, 거기 있는 들짐승, 모든 살아 있는 생물과의 촘촘한 그 관계망이 언약을 위해서 그렇게 설치된 겁니다. 이것은 하나의 구조지요.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을 위한 장치, 시스템, 그렇게 보면 됩니다. 제가 장치, 시스템, 구조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개인적인 의미는 더 이상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뭘 해줄 것인가, 그런 물음이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물을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언약이 지금 저를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이것만 의미 있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언약중심으로 시스템이 돌아가는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무지개,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야기는 간단해져요. 무지개를 인간 손으로 변경시킬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타난 무지개를 향하여 “훠이!” 한다고 해서 나타난 무지개가 “미안합니다.” 하고 물러가지는 않지요. 이 무지개라는 것은 인간의 손이 터치할 수 없는, 인간의 손에 다루어지지 않는 이 자연의 군주 같은 형상으로서 지배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언약을 가지고 나타낼 때 무지개로 나타내는 이유가 이 언약이 홍수 이전에는 무지개 자체에 의미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홍수 이후에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무지개에 주도적인 의미를 줬다는 말은 그 무지개를 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심판이 한 번 있었다는 것, 그것도 전면적인 심판,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심판에 대한 인류의 이력, 역사, 기억, 그 기억이 무지개 안에 함축되어서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온 뒤에 무지개를 보시거든, 여러분의 사적인 과거, 9살 때 예뻤다는 등의 것들 말고 전체인류의 이력과 기억을 거기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면적으로 물로서 심판하셨구나.’ 그것을 기억하시면 돼요. 이렇게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거역하거나 바꾸거나 마치 없는 것처럼 억지를 부릴 수 있는 형편은 못 됩니다. 무지개에 담긴 내용을 두 가지로 보면 이렇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첫 번째는 뭐냐? 이게 전면적이라는 겁니다. 무지개가 남한에는 있지만 못된 북한에는 무지개가 없다든지, 저 IS테러집단에는 무지개가 안 뜬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요. 미국에는 무지개가 있고 이라크에는 무지개가 없다는 그런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해서 무지개를 곱빼기로 주는 법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적인 행함과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하나님이 지배하는 형상을 띕니다. 이것이 언약의 특징이에요.



언약을 반대하시려거든 사적인 요구를 하나님 앞에 하시는 그것이 “나는 언약이 싫어.”라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사적인 것, 개인적인 요구사항, 이것을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이 언약중심으로 돌아가는 심판 이후의 세상이라는 것을 자꾸 싫어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가짐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뭘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이든 선인이든 관계없이 무지개를 피워준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반발의식으로 ‘나만 잘돼야 해.’ 하는 의식이 강렬합니다.



‘나만 잘되어야 해, 나만 하나님 잘 믿어서 복을 원 없이 배 터지도록 받아서 남들에게 자랑해야지.’ 이런 심보로 하려거든 무지개를 무시하세요. 결국 이 무지개는 뭐냐? 심판 이후에 인간들이 살아야 될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 기준은 곧 하나님의 언약중심의 기준이기에 이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심판의 기준이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무지개 안에는 개인의 입장을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전체적으로 다룬다는 겁니다. 전체성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개가 물로써 한 심판 이후의 무지개이기 때문에 심판의 끝, 심판이 다 끝나고 난 뒤, 비온 뒤에 무지개가 피듯이 물로 확 쓸고 난 뒤에 주어진 평화, 안도감, 또는 안식의 모습으로 무지개가 피었으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이 아니고 뭐든지 끝난 상태에서 이미 그 끝 이후에서 다시 현 세상을 뒤돌아보는 안목과 관점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겁니다.



이걸 무슨 말로 하면 더 쉬우냐 하면, 일곱 글자, “연극이 끝난 후에.” 조명도 다 꺼져버리고. 그런 경험이 일상 속에 있습니다. 학교 졸업했는데 다시 학교를 방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운동장 느티나무 밑에서 놀던 것, 칠판 닦던 것, 청소하다가 유리창 깨서 물어준 그것, 도시락을 빼먹고 왔는데 엄마가 학교까지 도시락 가져다 준 것. 연극이 끝난 후에, 초등학교 다 졸업한 뒤에 다시 자기가 살았던 그 과거를 돌아보는 거예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하듯이 자기과거를 다시 회상하듯이 돌아보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이 세상을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끝 후의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개인적인, 사적인 욕구와 욕망은 싹 날라 가 버리지요. 만약에 끝 후가 아니고 끝을 내다보면서 끝 이전을 산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좋은 말씀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을 이야기해도 내 것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성에 차지를 않게 되어 있습니다.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무지개에 입각해서 심판을 내릴 때 그 무지개시스템에 대해서 반발할 때 반발하는 요인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 좋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반발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대드는 겁니다. 개척교회 한 20명 되었는데 다 가버리고 자기와 마누라 둘 만 남았다. 도대체 왜 나는 목회에 실패하는가, 이런 식으로요. 물론 노골적으로 신에게 대드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방배동신학교 나와서 장신대 졸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겠다고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인 섬에 자진해서 갔어요. 어부들이 몇 사는 아주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주여, 내 동기들은 큰 교회 부목사로 가서 출세가도를 달리지만 저는 그리스도만 본받겠습니다. 오직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찬송가 가사 대로 “나는 더 낮은 곳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하는데 생활비도 제대로 못 버니까 살기가 힘들어졌고 겨우 고구마로 연명하다가 사모님이 영양실조에 중풍까지 걸렸어요. 그 소리 듣고 여상 나와서 서울에서 취직한 딸이 병수발 든다고 회사도 그만두고 섬에 내려와 있었지요. 하루는 남은 볼일 본다고 서울로 가는 길에 갯벌로 가로질러 가다가 밀물시간에 바다에서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바닷가에서 죽은 딸의 장화가 발견되었어요.



더 낮은 곳에 갔던 그 목사가 그 장화를 교회 강대상에 집어던지면서 “이런 것 보여주려고 주께서 저를 이곳에 보냈습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 아브라함이 자기자식 죽인 것도 모르는 모양이에요. 이게 뭐예요? 낭만이지요. 목회라는 이름의 낭만인 겁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더 낮아지고 낮아지게 되면 뭔가 반대급부가 30배, 60배, 100백로 올 줄 알았는데.



누구하고 비교를 하는가? 무지개하고 비교를 안 해요. 심판 끝 지점과 비교하지 않고 같은 동기들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너는 돈만 챙기는 목사지만 나는 비우고 비우는 목사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렇게 얄팍한 그게 바로 우회로 드러난 자기 의라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대들기는 마찬가지에요. 노골적으로 대드나, 겸손의 모습을 가지고 대드나. 내가 보기에는 이쪽이 더 악마 같아요.



죽은 딸이 신고 있던 장화를 던지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꼴 보게 하려고 아무도 가지 않는 이런 곳으로 나를 보냈습니까?” 하면서 주님 앞에 시비 거는 모습이나 돈만 밝히는 그 목사나 둘 다 사적인, 개인적인 괜찮은 자아상을 꿈꾸고 있었던 겁니다. 이 정도 하면 주께서 받을 만한 합당한 성도 맞지요, 라고 자기 이미지 관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가 자기의 미래상을 믿어놓고 그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거짓말로 자기를 속이고 주도 속인 겁니다. 무지개가 떴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무지개를 집어넣고 관계를 맺어야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거미의 그물망처럼 촘촘히 모든 것이 언약을 위해서 이 세상은 기계적으로, 구조적으로 짜여 있기에 그렇습니다.



10절에 보면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약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한 거예요. 살아있다고 꿈틀대는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의미를 위해서 무지개와 촘촘히 거미줄처럼 연결된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 연결된 상태가 눈에 안보이니까 전부 다 각각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천국에 넣어주는지 알고,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이 아닌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면 복음이 아니고 불교입니다. 왜? 각자 개인이 예수를 본받아서 도 닦고 있는 중이니까. 도 닦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고 수녀원이잖아요. 간소하게 도 닦는 것은 금요철야고, 새벽기도고. 진정 복음은 개인적으로 도 닦는 것을 막아야 돼요.



물어야 됩니다. “당신이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유와 목적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답변은 안돼요. 그렇게 되려면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과 연관성을 지어줘야 돼요. 영광을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식이 뭐냐 하면, 무지개언약입니다. 무지개언약이 뭐라고요? 방금 들어놓고도 다 잊으셨지요.



무지개언약이란 개인적인 가치와 의미를 일체 묻지를 않는 것이 무지개언약이고 그 이유가 뭐냐? 심판 이후에 모든 인간에게, 북한이든 나이지리아든 케냐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비오고 난 뒤에는 다 무지개가 피어 있는 거예요. 나이지리아는 나쁜 나라라서 무지개는 없다, 이런 것은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나쁜 나라, 질 낮은 나라, IS같은 테러집단에게도 왜 무지개는 뜨고, 지금도 심장이 뛰고, 그들에게 단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왜 그들이 맘껏 살게 하는가, 그 말이지요.



19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19년째에 86살 먹은 신부를 죽이고. 프랑스에서 열아홉 먹은 그 테러범이 신부를 죽였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홍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이 심판이 없겠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지금 배경, 무대가 땅이라는 무대에요. 땅에서의 심판은 이미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이제는 불이 와서 땅 자체가 날라 가는 심판이 있을 뿐이지 땅에 기대고, 땅을 의지하고, 땅에 희망을 걸고 사는 자에게는 땅의 요소로서는 더 이상 심판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이 없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자기규제입니다. 왜 북한이나 소위 나쁜 나라도 살게 해주는 것인지, 현재 세계인구가 75억인데 그렇게 인구가 불어나게 하고 땅에 충만케 하는가? 하나님의 자기규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증명을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이 참 어렵지요. 다시 말해서 심판 내리고 안 내리고를, 너희의 행동에 따라서 결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것이 악하기에. 그게 8장 21절에 나오잖아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앞뒤가 이상하지요. 악한데 악하기에 심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이미 심판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어떤 취지로 무엇 때문에 심판했는가를 추가적으로 회상하는 의미에서 그들로 하여금 물 홍수심판 이전에 했던 그 행세를 반복시키는 겁니다.



이미 심판 이후의 무지개 안에서 왜 일괄 무지개로 은혜를 베푸는가 하면, 너희가 이런 짓거리를 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의 행위를 따져서 개인적으로 심판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무지개언약이 있는 이상은 본격적으로 죄를, 인간스스로 혼돈과 죄와 무질서를 확산시켜 나가는, 오염에 더러워지고 혼돈되는 세계가 개시가 되는 겁니다.



참 이야기가 굉장히 이상해요. 하늘에는 무지개언약을 띄웁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무지개와 연결되어 있는 땅의 기준은 무엇이냐? 9장 6절에 나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4, 5절에는,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죽여 버리겠다는 그 말입니다. 인간은 양쪽에 끼어있습니다. 땅에서는 피 흘리면 안 된다는 것. 하늘에는 심판 이후에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그런데 무지개가 떠 있으면서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결국 그 말은 이런 말이에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이 대자연 안에 무지개가 뜨는 이유가 뭘까요?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한 겁니다.



“무지개가 있으면 있는 거지.” 그런 답변 말고요. 무지개가 있는 이유가 뭡니까? 나무가 있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은 아는 바가 없어요. 나무가 있으니 있고, 풀이 있으니까 있고, 코끼리가 있으니까 있는 것이지 그 이유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욥도 몰랐어요. “하늘에 별이 있는 이유를 아느냐?” 모릅니다. 그것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무지개가 있는 이유, 풀이 있는 이유, 참새를 하나님이 키우는 이유도 모르면서 자꾸 다고, 다고,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마치 아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것처럼 자꾸 몸부림치고 발악하면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더 오래 살게 해 달라, 내 딸 살려내라, 내 몸 건강하게 해 달라, 내 사업 펴게 해 달라, 우리 딸 취직하게 해 달라, 장가가게 해 달라, 계속해서 뭔가 요구하는 거예요. 뭘 아는 것처럼.



주께서 한 마디 합니다. “네가 뭘 알아?” 몰라요. 이유도 몰라요.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둘 다 몰라요. 둘 다 몰라서 자기욕심, 자기자랑거리, 자기의만 계속 내놓다가 나중에 끝날 때 되면 “야, 치맥 하자.” 말이 많이 했으니 배고프겠다, 맥주 시키고 치킨 놓고 먹는다 그 말이지요. 맥주하고 치킨하고 먹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맛있다. 맛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진짜 뭣도 몰라요. 언약을 모르니까. 창세기 9장에서 피 채 먹지 말라고 하니까 선짓국 먹지 말아야 되네요. 대구 안지랭이 계곡 근처에 백년이 되었다는 선짓국 집이 있는데 저도 여러 번 먹었는데요. 그것만 안 먹으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심판 이후에 징조를 자연세계에 심어놓았다는 것은, 더 이상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자연이 아니고 하나의 몸통입니다.



살아 있는 몸통이에요. 자연은 살아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형상화된 자연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에스겔 1장에 나오고 요한계시록 10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1장 28절,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에스겔의 직업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란 제물로 제사하는 직업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칠 피를 바치고, 기름 바치고, 제물 바치는, 피를 뿌리고, 기름을 바르고, 제물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직업이 바로 제사장직업이에요.



그런데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에게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면서 에스겔 빼놓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전부 다 멸망당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겠다는 그 약속은 유일하게 인자라고 불리는,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해요,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새롭게 만들어버려요. 그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이냐? 심판까지도 견딜 수 있는, 심판도 극복할 수 있는, 아무리 심판해도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에스겔, 인자중심으로 새롭게 번창시키고 확산시키는 그 임무에 에스겔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점이 어디냐? 하늘에 있는 성전이에요. 땅에 있는 성전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성전, 하늘의 성전은 사람 손으로 짓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들의 뭉치에요. 천사들의 뭉치라서 그 성전의 모양새를 보여주는데 사면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포위되어 있어요. 그 천사들의 형상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바깥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자연은 하나님의 표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그 형상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속마음은 하나님의 무지개로 나타났다. 그 무지개는 어디에 근거했나?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했다. 그 언약의 특징이 뭐냐? 심판 이후까지 이 세상을 끌고 가겠다는 거예요.



어차피 세상은 악하니까 심판받아야 되겠고 심판 이후까지 끌고 가는데 이 세상에 대해서 심판 이후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의미가 바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의미입니다. 왜 이 세상은 악이 있고, 사기꾼이 설치고, 악한이 있고, 테러가 왜 있는가? 심판 이후의 취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심판해도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날 때까지 심판을 미루시고, 세상을 유지하시고 확대시키는 겁니다.



이런 심판마저도 극복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형상에 합당한 형상을 받아서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간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 형상은 뭐냐? 이 땅에서 하늘의 무지개형상의 취지, 심판 이후와 개인의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 취지는 이 땅에서 피,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의 피, 어린양의 피로서 지상에 흔적을, 그 증상을, 사건을 터뜨린 거예요. 그 죽었던 어린양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9장 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사람에다 피를 흘리지 말라는 요소, 하나님의 속마음을 합쳐버리면 그게 진짜 형상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피 흘림을 당하고 그래서 생긴 그 피가 자기 백성을 용서하는 피가 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가 되고 심판 받을 자는, 영원히 지옥 갈 자는 그 피가 기준이 되어서 영원한 지옥을 가는 그 기준점이 이 지상에 하나의 율법으로 제공되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딱 하나에요. 피를 안 흘리면 되잖아요. 사람을 안 죽이면 되지요.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선지 국 안 먹고, 그 다음에 사람을 때릴 때는 멍이나 좀 들게 하고, 피는 안 나오도록, 코피라도 나면 큰일 나니까 피가 안 나오도록 멍석말이 같은 식으로 하면 어떨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 대든다, 안대든다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두고 보게 되면,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추상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지상에 와 버리면 그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이 내 뱉은 그 말을 우리가 듣게 되면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미워하게 되고 미움은 곧 살인죄가 되는 겁니다. 미워하는 이유가 뭐냐? 왜 하나님은 사적인 내 희망을 거절하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분통이 날 지경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이 땅에서 이만큼이 되고자 하는데, 이만큼 발전하고 성장하고자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 소원을 안 들어주는가, 라고 하나님께 대들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이미 너는 심판 받아야 마땅하기에 사적으로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할 권리는 없다. 그래서 네가 갖춰야 할 것은 뭐냐? 언약을 안다면 언약은 이미 심판 이후, 심판이 다 끝나고, 연극이 끝난 후에 이미 구원될 자는 구원되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간다는 그 안목이 네 맘속에 심겨져 버리면 어떻게 일이 되는가 하면, “이것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규제, 하나님의 자기용서, 하나님의 자기긍휼, 자기사랑, 그것을 증거 하라고 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용서로서 앞당겨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군요.”라는 관점이 우리 속에 장착이 되고 탑재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옥 갈 이렇게 일방적으로 긍휼을 입혀 주셨는데 이것은 내가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규제, 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심판을 행사하지 않는 그 무지개 취지에 맞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은 성전에서 무지개형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곧 에스겔 마음속에 그 무지개형상이 내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우리 안에 무지개형상이 한껏 피어나야 해요. 무지개라고 하니 동성연애자들의 퀴어축제를 연상시키는데 무지개가 뭐냐? 내 속에 “연극이 끝난 후에.”라고 하지 말고 “심판이 끝난 후에”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일단은 팔을 뒤로 모아야 합니다. 영감처럼. ‘내가 40살 때 어떻게 살았는가 한번 볼까? 50대에는 이런 짓거리를 했구먼. 60부터는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바가 악하기에 그 악한 것이 70까지 가는구나.’ 오늘 80되신 분이 자리에 계셔서 80까지는 이야기 안하겠습니다만.



뒷짐을 지고, 느긋한 마음으로, 안에 무지개 품고, 자기 나이만큼 어슬렁거리면서, 어슬렁거리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설교제목, 어슬렁어슬렁?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면서 ‘아, 예수님 증거 하라고 엉망진창으로 나를 이렇게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자기절제의 혜택을 입고 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언약속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도 무지개가 피어 있습니다. 어디에요?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요한계시록 10장에도 무지개 형상을 쥐고 나타나십니다.



이제 그 무지개를 본다는 것, 예수님을 보면서 그 무지개를 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이미 무지개가 피어 있다는 겁니다. 심판 이후의 존재로서 우리가 심판받아야 될 세상을 다시 돌아와서 어슬렁거리면서 주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망 때문에 저희들이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존재의 의미를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서로 투쟁하고 다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미 파장된 시장터를 그리는 심정으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이 흘린 피를 고마워하고 그 능력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