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창 10장 1-6절(함의 자손)1608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0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2페이지입니다.
창 10:1-6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하나님께서 노아의 자손을 이렇게 번식을 시킵니다. 그러나 노아와 노아자손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번식시켰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들이 악바리로 살아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이 더 강렬했을 것입니다. 본인들이 살아가면서, 본인들이 어떤 역할이나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하나님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고 그저 평범하게 ‘살 때까지 열심히 살아보겠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되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인간들은 살아왔고 또 그들이 그 땅에서 번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책에, 창세기 10장 같은데 말고 우리가 흔히 아는 경험한 것, 태어났다, 일했다, 열심히 살았다, 밥 먹고 살았다, 늙어죽었다, 그런 이야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는 동의가 돼요. 그런데 성경, 거룩한 책이라는 것이 별로 필요치 않는 식으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인생, 그거 내가 알아. 태어났다. 부모에게 자랐다. 취직했다. 열심히 살았다. 점점 더 늙는다. 그래서 죽었다. 그게 인생이고 그게 곧 우리가 알고 납득이 되는 진리다. 그거 외에 뭐가 있어? 그거 외에는 없어.’ 그런 당당한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그들은 열심히 사는 때까지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어떤데 분류되는 마음가짐인지를 그들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 10장을 펼치게 되면, 모든 인간이 태어났다, 자랐다, 일했다, 늙었다, 죽었다, 동일해 보이지만 각자 처해있는데 따라서 무늬가 달라요. 노아의 아들들이라고 나오는데, 노아라는 자리를 다른 말로 바꿔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들” 이렇게만 해도 ‘아하, 인간은 다 같은 인간이 아니구나.’
지난 시간에 했듯이, 노아의 아들들이 세 명이 있었는데 그 세 명이 가는 길이 다르구나. 함과 가나안,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니까 노아 입장에서는 손자가 되겠지요. 함쪽은 저주받는 쪽으로 가게 되어있고 그리고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쪽으로 노선이 정해지는 겁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관점에서 내려다 볼 때 비로소 그것이 파악이 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것이 파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게 필요한 거예요. 성경이라는 것은 내가 내 열심가지고 나를 파악하려고, 내가 누군지, 사는 의미가 뭔지 아무리 애써도 가장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나는 태어났다. 밥 먹고 살아야 된다. 열심히 일했다. 이제 늙는구나. 곧 죽는구나.’ 이게 전부거든요. 이것이 딱 굳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만 우리는 안다고 하고 그 외에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사람이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나머지를 모르게 되면, 그 알고 싶은 것을 알았다고 하는 그것도 영 진리가 될 가능성이 없어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봤다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다 떨어뜨린 거잖아요. 내가 제쳐놓은 그것이, 내가 지금 안다고 하는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나는 저건 몰라도 돼. 이것만 알면 돼.’라고 결정하는 순간부터 따로 빼냈던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지식인가를 나중에 깨닫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 제시하는 것이 성경이 아니고 내가 필요 없다고 제쳐놓은 것도 포함시켜서, 전체의 안목에서 ‘너는 이런 위치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기본이냐? 기본보다 더 내려가요. 기본보다 더 내려가면 근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근본은 무엇이냐? 인간의 근본은 대 자연이지요.
하늘과 땅, 별, 해, 달. 특히 사람들은 땅 위에 살면서 땅은 누가 만들었는지를 생각을 할줄 모릅니다. ‘땅이 있네. 시냇물 흐르네. 저 옆에 집짓고 살면 되겠네.’ 사람들은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근본까지를 생각을 안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 이 땅은 누가 만들었고, 하늘은 누가 만들었고, 별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다보니 내가 기본이라고 우기는 이것도 잘못된 생각으로 가득 찬 채 기본이라는 것을 껴안고 삽니다.
‘나는 태어났다. 이만큼 살았다. 또 죽겠지. 사는 데까지는 살아보자.’ 이게 인간에게 기본적인 요소잖아요. 그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할 줄을 모르니까. 그런데 근본과 연결이 안 되어 있다 보니 그것을 두고 뿌리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 1편,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교인들 성경 외우기 대회 할 때 노인 분들 참석하게 해서 잘 외우면 상으로 휴지나 비누를 주는데 그 때 주로 시편 1편을 외우게 하잖아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시편 1편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요. 심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네 숨겨져 있는 부분, 겉에 드러나지 않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그 나무의 뿌리가 어디에 박혀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것은, 시냇가에 심겨졌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거예요. 현대인들은 전혀 이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공부했다, 취직했다, 직장 다닌다, 밥 먹고 살았다, 늙는다, 끝. 그게 무슨 뿌리입니까? 그것은 뿌리가 아니에요.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뿌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는 것이 다 그렇지, 하는 기본이지요.
저는 그런데 안 가봤습니다만, 나이트클럽에 가면 맥주 두병에 한주 하나가 기본이랍니다. 그냥 들은 풍월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눈에 보이는 그 기본에서 스톱하고 그 밑에 뭐가 있는지를 몰라요. 이 땅은 누가 만들었는데, 하늘의 비는 누가 내리시는데, 전혀 관심 없이 직장 다니고 있습니다. 드라마보고 뉴스보고. “9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런 이야기가 뉴스에 안 나오거든요. “박상영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 것이 나오지요.
박상영 선수 금메달 따기까지 그의 엄마가 절에 가서 얼마나 기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성경은 그 인간 이전에 있었던 땅이라는 것, 하늘이라는 것, 그 공간, 주께서 사람을 만들기 이전에,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조성된 그 공간까지 성경은 언급합니다. 그게 근본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근본이라 할 때는 단어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땅.
이 말은, 인간을 위해서 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성질, 하나님의 속성을 위해서 인간은 기여해야 되고, 봉사해야 되고, 섬겨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일반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땅? 그거 뭔데? 철광석이 좀 들어 있나?’ 이 정도밖에 안돼요. 지구는 맨틀로 되어 있고 외핵이 있고 내핵이 있고, 그것뿐이에요. 하늘에는 별이 있겠지. 그래서 어쩌라고. 거기에서, 하늘과 땅과 별 이런 것과 자기를 연결을 시키지를 못합니다.
시편 4절을 봅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바람에 나는 겨는 뿌리가 없으니까 그냥 표면에서 표면으로 유동하는 것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시편 1편에서 하는 말이 이겁니다. 네가 네 인생을 그냥 지표면에서 바람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그냥 아무 뿌리 없이 유랑하는 식으로 인생 살면 안 되고 네 인생의 뿌리는 말씀, 하나님의 법, 율법에 뿌리를 둬야 된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에 뿌리를 둬야 된다는 겁니다.
5절에,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참 현대인은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살아요. 쉽게 쉽게. 학교에서 이런 시편 1편 안 가르쳐줍니다. 뿌리를 잘라내고 그 위의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지요. 사는 요령, 그 사는 요령이라는 것은 비트켄슈타인이라는 철학자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이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합니다.
그냥 허망한 게임이에요. 져도 의미 없고 이겨도 의미 없는, 그런데도 이기면 기분 좋은, 그냥 남들과 벌리는 하나의 컴퓨터게임 같은 거예요. 현대인도 그걸 알아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아요. 컴퓨터 게임같이 허망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중에 인생이 뭐가 되는가? 인생이 농담이 되는 겁니다. 농담이 되니까, 기분 나쁘다고 한잔 하고, 슬프다고 한잔 하고.
술 먹는 이유가 뭔데요? ‘인생 뭐 있어?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술도 먹으면서 그 때 그 때의 기분, 희열만 챙기고 집구석에 들어가서 잠만 자는 거예요. 이게 농담 같은 인생이잖아요. 인생 자체가 진지하지를 않아요. 진지할 것이 있어야 진지하지요. 아무것도 아닌 게임인데요.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인생에 두 가지가 있다. 나는 나로 인해서 사는 인생이 있다.
그러면 나는 나로 인해서 사는 인생이 전부지 나는 나로 인해서 사는 인생 말고 또 뭐가 있는가?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계셔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그런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복음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성경진리는 어느 쪽인가? 나는 나로 인해서 사는 것을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생의 풍조는 아는데, 남들 다 그렇게 사는 것도 알아요. 지금도 브라질의 리우데자이네루에서 게임하고 있잖아요. 게임에 울고불고 하잖아요. 달리 재미있는 것이 있어야지요. 유럽축구, 프로야구, 올림픽게임, 사는 것이 가볍지요. 정말 가볍기 짝이 없는, 농담 같은, 장난 같은, 한낱 허망한 게임 같은 인생을 살면서 정작 자기의 뿌리가 뽑혔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거예요.
땅이 있고 인간이 거기 있다면 인간은 그냥 뿌리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땅을 주신 그 하나님의 원리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인간과 뭔가 연결고리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땅의 중심부를 찾는 작업과 같은 거예요. 땅의 중심부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시편 1편을 봤지요. 시편 2편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여기 열방과 민족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사는 자들인가? 땅 위에 사는 자에요. 땅위에 번식해서 족속을 이루고 족장을 두고 사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열방과 민족들이 살면 그게 사는 것의 전부라고 여겨요. “이거 말고 뭐가 더 있어? 없어. 이게 전부야.” 그런데 여기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그 맨 것을, 연결된 것을 끊어버리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누구에 대한 공격이냐 하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에 대해서 열방과 민족들이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기름 부은 자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인간의 뿌리를 위해서 노아후손, 이것을 달리 이야기해서 언약의 후손, 노아에게 주신 언약의 후손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내는 땅의 존재하는 이유가 결국은 기름 부은 자의 등장, 메시아의 등장을 결국은 받아내기 위해서, 그 분의 활동이 전개되는 무대로 활용되기 위해서 노아의 언약은 장차 올 예수님의 십자가언약과 매치가 되고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언약을 완성하고 난 뒤에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땅과 더불어서 불로 처분되지요. 다 불로 싸질러버립니다. 왜? 얻을 것 얻었으니까, 땅의 본래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땅은 기다립니다. 메시아오기를. 전에 살폈던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인데 거기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이 죽도록 허용하셨고 그리고 아벨은 과연 주의 뜻대로 형의 뜻대로 맞아죽습니다.
그것을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학적인 눈으로 볼 때 땅은 아무것도 아니고 금속의 쪼가리, 물질덩어리, 그것이 전부라고 보이지요. 그게 아닙니다. 땅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꼭 필요했고 꼭 필요한 작용과 활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언약은 그 중심지가 따로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전 세계의 땅에는 그 중심지가 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땅의 그 중심지가 어디인가? 어떻게 찾아가는가? 어디가 땅의 중심인가? 어디가 땅의 배꼽, 중심에 해당되는가? 거기에 찾아가는 것은 땅 위에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들을 선택하사 태어나게 해서, 그 언약의 사람들로 하여금 땅의 중심지로 찾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땅의 중심지를 찾아가는 민족은 어디 있는가? 그 민족은 셈의 민족입니다.
노아의 후손을 이야기하면서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벳, 그 다음에 함, 셈으로 되어 있어요. 야벳을 중립지로 몰아넣고 함과 셈을 같이 맞대어 놓습니다. 셈에 의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언약의 사람이 창세기 12장에 등장하는데, 그러면 12장의 아브라함의 등장을 위해서 10장이 해야 될 업무는 무엇인가? 무엇이 중심지가 아닌가를 먼저 제시함으로써 그 중심지가 아닌 것에서 번지는 패괴함, 죄악이죠, 패역함, 악함, 그런 것들을 먼저 배치해놓고 그것과 차이 나게 하나님의 중심지를 찾아갈 위인을 하나님이 거기서 뽑아냅니다.
가인의 자손을 먼저 깔아놓고 셋의 자손을 나중에 설치해놓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의 자손의 족보를 먼저 해놓고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과 셋의 자손, 곧 아벨의 자손을 깔아놓았어요. 아닌 것을 먼저 설치해놓고 그 뒤에 진짜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의 자손을 먼저 깔아놓고 이삭의 족보를 이야기하고, 에서의 족보, 에서와 에돔은 같은 겁니다, 에돔의 족보를 먼저 깔아놓고 그 다음에 야곱의 족보를 뒤에 배치를 해놓습니다.
중심지 찾기란, 여기가 중심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은 사탄, 악마에 의해서 죄가 번창하기 때문에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식을 하나님이 땅 위에 펼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지식이 아니고 십자가라는 희생, 피 흘림, 죄를 죄로 몽땅 들추어내는 아픔, 피살됨, 살해당함, 이런 부정적인 것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을 설명하시기로 작정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 가 아니라 예수님의 아픔과 희생과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셨던 그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에 비해서 악함에 속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죄인의 부류에 속한다는 것, 주께서는 계속 우리 쪽을 죄인으로 몰아세움으로서 병행해서, 동반해서 주님의 의를 돋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리정돈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땅이 그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창세기 10장 11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사람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 이름이 나중에 무슨 이름이 되느냐 하면, 지명이름이 돼요. 이것은, 땅의 의미는 그 땅 위에서 노아언약대로 번식하고 확장되어야 될 모든 특정 인간들의 사건과 행동들이 땅 안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기능을 자극해서 유발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과 땅이 만나서 이름이 나온다면 그 이름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흔적으로서 땅에다가 표시를 해둔다고 보시면 쉽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리 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 지명이 ‘여호와이레’가 돼요. 그리고 모세가 지팡이 들어서 전쟁할 때의 광야에서의 이름은 ‘여호와 닛시’, 야곱이 천사를 만나면 ‘마하나임’ 이런 이름 하나하나가 지상에 있었던 사건과 본래 땅에서 발휘되어야 할 기능이 지명을 통해서 결합되면서 땅은 하나님의 언약완성의 훌륭한 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야벳은 중립이니까 빼놓고, 6절에 보면,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왜 제가 가나안에 주목하느냐 하면, 나중에 이 가나안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현대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그 땅입니다. 이 가나안땅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규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가나안땅은 원래 누구 땅이냐 하면, 본래 함의 땅이고 함은 뭘 받기로 작정된 민족이냐 하면, 저주받기로 작정된 후손들입니다.
노아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함의 자손들은 무조건적으로 저주를 받아야 돼요. 저주받는다는 말은 그냥 없앤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주를 확장시킨다는 말입니다.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고 계속 나타나는데 뭐가 나타나는가? 저주받을 수 있는 조건들이 계속 번창한다는 거예요. 그것이 노아언약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한다는 말은, 우리 주변에 마귀족속과 이단들이 설친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예수님의 언약 속에 이미 포함된 과정이고 필수 요건이 되는 거예요. 악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몸만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뿌리가 없어요. 사람들은 자기 몸을 기본으로 봅니다. 기본만 있으면 되지 근본까지는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근본은 인간의 몸을 떠나서 더 큰 곳에 근본이 있어요. 인간의 몸은 그 근본과 결합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 근본이 언약입니다. 땅과 하늘과 별과 달과 사람, 모든 것은 노아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했다는 것이 창세기 10장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덮어버리면, 태어났다, 공부했다, 취직했다, 밥 먹었다, 열심히 살았다, 늙었다, 죽었다, 그걸로 끝나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묻는다면, “당신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까?” 하면 좋다는 거예요. 왜?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그게 바로 함이에요. 중심이 없는, 땅의 중심지를 찾아갈 수 없는, 중심이 뭔지도 모르는, 되는대로 농담처럼,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안 되는 채로 그 농담하듯이, 진지한 것이 하나도 없이 그냥 인생을, 세월을 허비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이번 수련회하면서 7번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신앙생활도 오래하면 권태로워요. 음악도 너무 오래들으면 멍하듯이 신앙생활도 멍해집니다. 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분간도 안돼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나로 인하여 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중보자를 생각도 안하고, 메시아도 생각 안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도 생각지 않고, 예수님 모시는 가마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나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날씨 더우면 덥다고 하면 되고, 추우면 춥다고 하면 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지 인생이 더 뭐가 있나, 그렇게 하는 겁니다. 중보자를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백날 이야기해도 그것도 너무 많이 들어서 멍~ 합니다. 잠 오면 자고, 깨면 까불고, 그 외에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함으로 하여금 점령케 합니다. 가나안 자손들이 그 땅에 살기에 그 땅은 가나안 땅이 돼요.
가나안 땅이라서 그것은 저주의 땅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서 그 저주의 땅을 심판하고, 죄가 관영함으로 심판하고 그 심판행위 자체를 통해서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바꿔버립니다. 그게 그 땅 역사의 끝입니까? 아닙니다. 더 나갑니다. 사무엘하 5장 6절에 보면,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하매.”
예루살렘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땅은 원래 가나안 땅이고 여부스종족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다윗이 차지함으로서 그 땅이 뭐가 되는가, 다윗의 성이 되며 그게 시온이 돼버려요. 시온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보좌와 직통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왜? 거기에 영원한 성전이 세워지기 때문에.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전도 불타고 예루살렘도 멸망해버립니다. 그것이 에스겔 16장 2, 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사람이라. 예루살렘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될 그들이 섬기지 않고 그 토착민들, 원주민들의 신인 우상을 섬기니까 하나님이 에스겔을 보냈어요. “그래, 원래 예루살렘 거민은 바로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방민족, 저주받을 민족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너는, 처음에,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기 이전의 저주의 민족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가?”
주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완전히 거기서 이동시켜 버립니다. 바벨론으로 이동시켜 버려요. 이동시켜서 다시 옛날 이스라엘이 살던 그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들어가기 이 전에 저주받을 민족이 들어가서 저주받게 되는 그 땅의 말간 기본 바탕을 그대로 노출시켜 버립니다. 그 노출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더불어 노출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는가? 근본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가 죄인이기에 죽으신 거예요. 날마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농담 같은 인생을 살 뿐이고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되도 않는 주장을 해버리고, 뿌리 없고 근본 없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으로 남 흉내나 내다가 남 망할 때 같이 망하는 그런 인생, 가벼운 인생, 증거 할 것이 전혀 없는, 고립적인 인생을 살 뿐입니다.
이 땅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뭐냐?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성전은 뭐냐? 하나님이 직통하는 땅의 배꼽이고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거기에 세움으로써 영원히 계시는 성전을 이 지상에 세우신다 했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몸이 땅에서 하늘로 이동하면서 십자가가 있는 그곳이 하늘과 땅의 온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게 바로 뿌리고 그게 시편 1편에 나오는 말씀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뿌리가 박혀있는 자는 영원히 시들지 않고 영원히 천국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성경전체 흐르는 맥이요 대 줄거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땅은 노아언약에 속합니다. 노아언약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왜? 땅은 무대이니까. 그리고 그 무대 위에 노아의 저주받은 자손들과 복 받은 자손들이 그 위에 번창하기 시작합니다.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땅은 반짝반짝 그 숨겨 있는 중심지와 관련되어 있는, 중보자와 관련되어 있는 기능들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함의 족속은 저주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성을 드러내고, “죄 있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분이 살아계시다. 어디에? 장차 이 땅에 올 것이다.” 이 ‘땅’에 올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함은 가나안이라는 지역에 자기들이 살아야 되고, 그리고 셈은 그 중심지와 관련되어서, 누구든지 너를 복주는 자는 복을 받는 아브라함과 연계되기 위해서 또 셈은 나름대로 이 땅 위에 번창하게 될 것입니다.
땅위에 얼룩덜룩한 어떤 무늬처럼 서로 색깔을 내고 어떤 형태를 보일 때 그 형태가 바로 언약이 주어졌음으로 언약적형태를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느냐, 아니면 마귀를 증거 하느냐, 인간은 딱 두 종류로 나뉩니다. 그것이 땅위에서 번식하면서, 번창하면서 그러한 무늬가 구체화되고 점점 더 발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함의 자손이 해야 될 역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도 관심 없고 복음은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권태롭고, 그냥 살던 대로 게임처럼, 농담처럼 살아가는 인생들, 하나님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참된 성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정립되게 하여 주시고 그것이 자신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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