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노아의 세아들(창9;20-29) 1608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6. 07:45
2016-08-03 20:45:55조회 : 92         
   노아의 세아들 160803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노아의 세아들(창세기 9:20-29)

음성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L5PdD1s5T0, Hit:6

 이근호 16-08-03 20:47 
엠프가 고장나서 동영상 음성이 나오지 않아 동영상을 올리지 못합니다.

 이근호 16-08-03 21:28 
노아의 세 아들

2016년 8월 3일                            본문 말씀: 창세기 9:20-29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9: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9: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9: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 가족은 동일한 자아성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물로서의 심판이라는 환경이라는 동일한 환경 속을 거쳐 왔다가 하더라도 인간의 최종적 자아성 확보에 절대적 토대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구원을 묘사하는데 있는 대자연의 변화로만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대자연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혈육적으로 뭉쳐진 인간 내부에서 보다 세밀해질 필요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슨 근거로 물로서 세상을 심판했느냐는 이유가 최종 밝혀지는데 있는 인간의 가족 단위를 경유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개인적 입장에서 볼 때 다소 억울한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방주를 다른 식구와 함께 동승해서 하나님의 거센 물심판을 이겨낸 함에게 있어 다시는 ‘저주’라는 운명은 자기 자신에게 들이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의 피로서 모든 죄를 용서받은 후, 다시는 지옥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는 자가 마지막에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면, 그제야 도대체 ‘십자가 피’가 담고 있는 의미의 전부는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구원, 즉 탈출이란 탈출의 의지를 가진 자의 사도나 결심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정작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주님의 주되심의 결과로서 벌어지는 사태입니다. 즉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의사와는 완전히 상관없이 주님의 고유 권리행사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님의 일방적 권리행사에 대해서 구원된 자는 토달지 않는 현상을 나타내고, 반대로 구원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지옥행의 불합리를 주님에 대해서 따지게 되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즉 왜 지옥가서 비참한 삶을 사는 운명의 당사자는 본인들인데 왜 자기 자신들의 의사를 사전에 물어보지 않는 횡포를 부리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불신자들의 오해가 나타납니다. 구원이 되는 상태, 즉 천국의 삶은 인간들이 넘볼 권리가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 구성은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의논해서 조성하시는 겁니다. 곧 주님이 지니고 계신 자비와 공의로심이라는 두 속성의 발휘가 곧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납니다.

피조물들은 주님의 이러한 속성 표현에 동원되기 위해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따라서 노아 홍수라는 물의 심판으로 그 속성을 다 드러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심판 이후에 본성이 인간쪽으로 본격적으로 다가서고 확장됩니다. 모든 것을 용납해줄 것이 방주를 준비해두셨지만 막상 방주에서 나오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벌칙조항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창세기 9:4-5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심판 이후에도 인간은 얼마든지 심판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기준 찾기’입니다. 심판의 궁극적 기준은 어떤 식으로 작용을 펼칠까요? 먼저 출애굽기 33:22-23에 보면,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모든 심판 기준은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신다는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님의 이 얼굴성과 관련 있습니다. 먼저 저주받은 함과 그 아들인 가나안의 경우를 봅시다. 그들은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에는 눈이 달려있고 그들은 시각을 작동하여 시선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 눈에 노아의 하체를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노골적으로 수치부분을 바라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분이 되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얼굴은 수치를 폭로하는 우위에 서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원하는 구원, 구출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양을 잡은 경우처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일한 짐승 앞에서 자신들의 고유 가치나 성격이나 본질이나 능력이나 개성은 완전히 묵살되게 됩니다. 오로지 ‘흠없는 어린양’의 효과를 공유하는 조건 속에서 구원받은 겁니다. 개별적인 안목은 개별적인 판단과 평가를 낳게 되고, 거기에 따라 수치 여부가 판가름됩니다.

그러나 신약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십자가 앞에서 수치스러운 존재로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나름대로의 행함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32-33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얼굴의 시선으로 구성한 안목으로 엉터리 메시아상을 유지하고 있는 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시내산 위에서의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비해서 신약에서는 인간쪽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외면합니다.

그것은 그들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의 형태를 예수님의 행하심 속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함의 독자적 판단에 앞에서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조롱거리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얼굴은 노아의 하체였습니다. 셈과 야벳은 그 아비의 하체에 자기 시선을 두지 않고 뒷걸음쳐서 담요로 그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수치스러운 존재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얼굴로 말하지 말고 등돌려서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됨을 십자가 앞에서 부정되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 빛’으로 구원되기에 자기 행함을 부정하는 자로 그 빛 앞에서 서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면 구원되느냐가 아니라 일방적인 주님의 속성 발휘에 의해서 복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예수님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서 나온 안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늘 살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8-04 10:50 
50강-창 9장 20-29절(노아의 세아들)1608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9장 20-29절입니다. 구약성경 11페이지입니다.



창 9:20-29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우리가 알기에 분명히 방주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있던 비가 오기 전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홍수라는 그 맹렬한 심판을 통과 한 것,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되었다, 그렇게 확정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그렇게 구원이 되었으면 방주에서 나온 사람은 더 이상 저주 받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심판에서 벗어났으니, 드디어 심판의 위세에서 벗어났으니, 죄에 대해 용서를 받았으니 더 이상 저주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로, 합리성 있는 이야기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노아홍수는 창세기 8장이고 오늘 본문은 창세기 9장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들어와서 더 이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용서로만 일관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창세기 9장 5절과 6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을 죽인다고 되어 있어요.



이제 심판을 한번 넘어왔으니까 그 때부터는 어떤 것을 해도 겁주거나 그리고 심판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텐데, 좋은 것이 좋은 것인데, 짐승을 피 채 먹는다든지 사람의 피를 흘린다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나는 처벌하겠다는 식으로, 목숨을 빼앗겠다는 식으로 주께서 나오시니까, 그러면 노아심판의 그 효과가 미미해지는 거예요. 심판 이전에도 살해하면 사람 죽일 것인데, 심판을 했으면 사람을 죽여도 용서가 되어야 될 텐데, 사람을 죽이면 본격적으로 “살인했지?” 하고 강한 처벌이 주어진다면 노아홍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노아홍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처벌이나 법 조항이 더 강화가 되었다면, 차라리 홍수 이전에 맘대로 살고, 신나게 살고, 물에 한 번 잠기는 그 때가 오히려 더 속 시원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요. 이미 심판에서 벗어났으면 저주 이야기는 두 번 다시 입에서 끄집어내지 않아야 되고 저주받는 현상은 없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 9장 25절에 보면,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 저주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주받은 함은 분명히 방주에 노아와 함께 동승한 여덟 식구 속에 포함된 자식입니다. 그러면 방주 안에 저주가 잠복되어 있다는 말이 되거든요. 방주 안, 그러니까 물 심판이 있는 그 가운데서도 저주가 그 안에 스며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물 심판이 다른 것은 다 싹쓸이를 해도 방주 안에 들어 있고 거기에 내재되어 있던 저주의 씨앗, 저주의 원천, 그것은 제대로 노아홍수로서 처리가 안됐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방주에 있을 때에 자신이 저주의 운반자, 또는 나는 물 심판에서는 구원되었지만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는 아마 저주받을 걸, 그런 생각을 추호도 안했을 겁니다.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다 같이 살았어. 큰일 날 뻔 했어. 이제 안심 푹 놓고 마음껏 무지개은혜의 혜택을, 그 은혜를 누리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그 근거를 자기가 끄집어낼 수 있는 역량이 못돼요. 왜냐하면 환경이 괜찮은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목사지요. 그러면 엄마인 노아의 부인은 자동적으로 사모가 되지요. 그 자식들이 적어도 아버지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타의지만 유아세례 받고, 자의든 타의든 교회 다녔으니 ‘내가 이 세상 지옥 가는 성공 자가 되리라.’ 하는 생각은 추호도 안할 거예요.



환경 자체가 안심을 푹 놓게, 넉넉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게 되면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야, 한 번 구원되었다고 안심할 입장이 못 되는구나.’ 하고 우리 맘속에 불안감이 생겨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 기준도 “노아방주를 타라.” “타면요?” “구원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면 타기만 하면 구원되니 더는 더 이상 저주가 없겠지요.” 이번에 방주 타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줄곧 저주 같은 것은 일체 모든 것이 면제가 된다는 생각에 방주를 안심 놓고 탔다는 말이지요.



요즘 말로 ‘십자가 믿으면 용서 받는다.’ “그렇다면 일단 피는 믿으면 더 이상 두 번 다시 우리의 잘잘못에 대해서 저주이야기를 안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딴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십자가 믿어도, 십자가 기준은 그 때고 새로운 기준이 도입 되었단다. 이 기준에 의해서 너는 저주 받는다는 이런 두 말하기 없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믿고자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뭐냐 하면, 십자가 의미도 모르고, 방주의 의미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해, 하는 그 짓거리중의 하나가 십자가 믿고, 방주 올라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이 그런 점까지 고려하지 않고 먼저 구원을 생각하게 되면, 내 구원부터 먼저 성급하게 뛰어드는 거예요. “저 구원받고 싶어요. 저 천국가고 싶어요.” 이렇게 하니까 성경에서 방주 다음에 저주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이거 뭐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후다닥 넘어가는 거예요.



징검다리가 있으면 순서가 있어야 되는데 노아의 저주받는 이야기를 쏙 빼고, 바로 아브라함의 좋게 들리는 그 이야기로 바로 성급하게 뛰어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라 하는 것은 징검다리 하나 빼게 되면 뒤의 것을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순차적으로 의미가 확대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어떻게 방주 이후에 또 이렇게 저주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방주로 모든 저주라는 저주는 깔끔하게 해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우리에게 처음부터 방주가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방주란 것이 개인구원용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의 낌새를 눈치 채야 돼요. 예수 믿으면 나에게 행복이 오고, 예수 믿으면 내가 천국가고, 내가 잘된다는 쪽으로 십자가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이렉트로 연결시키는 그것은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방주는 무엇이며 방주 이후에 왜 또 저주이야기가 나오는가? 그것은 어떤 교정, 뭔가 달라져야 되는 뭐 자체가 달라져야 되는가? 하나님, 심판, 방주, 이 모든 것이 개인적인 나를 향하여, 나 위주로 하나님께서 일을 펼쳤다는 그 생각자체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해줘야 됩니다. 모든 세상 돌아가는 만사가 내 유리한대로, 내가 원했던 대로, 내가 기대한대로 돌아가야 된다는 터무니없는 억지가 어디 있겠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욕심 위주로 살다보니 이 성경책을 펼쳐도 나 좋으라고 주신 것이겠지, 일방적으로 먼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봐요. 그러니까 복음을 이야기해도 곡해해서 듣고,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들을 때는 곡해해서 듣고 있고, 제대로 복음 이야기하면 삐지고.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나 위주로, 내 구원위주로, 내가 천당 가는 위주로 성경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좋으냐, 나 예수가 좋으냐?” 둘 중에 하나 골라잡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네가 좋으냐, 아니면 나 예수가 좋으냐?” 둘 다를 택하지 말라는 거예요. 둘 중 하나만 하라는 겁니다.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를 미워해야 된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 사랑한다는 말을, 입을 떼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거짓말은 없다는 거예요. 예수사랑하면 반드시 그 예수님 사랑의 가장 마지막 훼방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유발하고 그런 쪽으로 몰아세웠다는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 돼요.



내가 밉도록, 남들은 다 자기를 사랑하는데, 그게 보편적 현상인데 나는 왜 나 자신이 밉지,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에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라고 되어 있으니까. 자기 사랑하는 입장에서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자기를 미워해봐야, 그것은 백날 해봐야 끈질긴 위선에 불과한 겁니다.



위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데요. 성경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지 우리 잘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그리스도중심에 대한 줄거리를 틈만 나면 훼방하고, 원망하고, 따지는 식으로 대들기만 하지 주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참 잘하셨습니다.” 이런 말로……, 오늘 앰프가 나갔잖아요. 앰프가 나가서 방송 해도 영상만 나가지 소리가 안 나가요. 참 잘하신 거예요. 이거 음성 안 나가도 하늘나라 천국 갈 숫자가 더 늘거나 주는 일은 없습니다. 전혀 상관없어요.



그러면 왜 앰프가 나가게 했던가? 그 이유가 궁금해요? 알려드리겠습니다. 구원이란 말이 개인구원은 없고 구원이란 말을 하려면 반드시 이스라엘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등장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희생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 이스라엘은 40만 다수지요. 다수고 각 집안마다의 어린양이지만 그 어린양은 동일하게 흠없는 어린양으로 그 개념이 통일이 되는 거예요.



저쪽은 어린 염소 잡는다든지, 이쪽은 어린 송아지를 잡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한결같이 어린양이에요. 그러면 어린양과 많은 사람의 대응은 뭐냐 하면, 너희들의 개성이나 특징이나 역사 같은 것은 일체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일단 개성 없는 동질의, 모든 것을 동질의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구원의 기준이 각자의 노력과 역량과 경쟁의 성과, 이런 것은 절대로 구원의 기준에 절대로 개입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뭐가 있는가? 모든 인간에게 얼굴이 있고, 얼굴에는 눈이 달려있고, 눈은 뭔가 주시하게 되어 있거든요. 출애굽기 33장 23절에서 모세가 그걸 대표로 보여주는데, 하나님께서는 얼굴 없는 자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얼굴이 없다는 말은 볼게 없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얼굴이 있고, 눈이 있고,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왜 못 봐? 글쎄 얼굴이 있고 눈으로 보게 되면, 그것은 탈출이라는 것에 훼방이 돼요. 왜냐하면, “개인적인 내가 봤다.”가 되고 내가 봤다는 그것이 하나의 역량이 되니까. 이쯤 하면 이게 무슨 취지로 하는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안 되겠지요? 출애굽기 33장 22절에서 2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아이고, 마이크가 안 되니 이렇게 목이 아픈 것을…….



자, 모세가 시내산 올라갔을 때, 하나님과 모세가 독대해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한테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이 있다는 말은 두 눈동자가 있다는 말이고 모세가 뭘 본다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자기 얼굴을 들어서 그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십자가는 보는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여호와의 영광은 나중에 지상에 오게 되면 십자가의 비참한 영광인데, 그것을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 독생자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너무나 그 모습이 처참하고, 너무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우리의 기대, 제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좌절케 하기 때문에 제자들이나 주님한테 은근히 희망을 걸었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얼굴 돌리게 만들 사태가 십자가에 죽는 사태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2절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사람들이 얼굴을 들고 그 두 눈을 가지고 예수님이 행여 메시아인가 보고 싶더라도 인간 쪽에서 그 얼굴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능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기능으로서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주님과 가까이 하고자 할 그 때, 베드로가 주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 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할 그 때의 예수님양상은 멀쩡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여전히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멀쩡했던 그 순간에는 베드로는 자기 얼굴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님이 활동을 탐색하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될 때 베드로는 자진해서 예수님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시선을 피한다는 말은 ‘당신과 나와 상관없다.’ 쉽게 말해서 내가 원하는 메시아는 당신이 아니오, 라는 뜻이에요.



그런 베드로의 얼굴과 사람들의 얼굴에 대해서 출애굽기 33장과 연관을 시켜보게 되면, 인간 쪽에서 얼굴을 돌리는 것을 출애굽기 33장에서는, 내 얼굴을 너희들이 보고자 해도 봐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일치시킵니다. 시내 산에서는 너무 영광스러워서 하나님의 얼굴을 못 보지만, 그 시내 산의 영광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너무 흉측해서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그 시선에서 탈출, 다시 말해서 구원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9장에 홍수와 방주이야기에서 정말 어려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 대목이에요. 구원대목입니다. 구원대목이 쉬운 것은 출애굽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은 확실하게 홍해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이 쪽 동네, 애굽동네에서 살다가 홍해를 경계선으로 해서 홍해 건너온 자는 탈출 성공한 자요, 홍해를 건너오지 못한 자는 탈출 못한 자요, 뚜렷하게 탈출 된 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지형적으로 구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는 이처럼 구원, 또는 탈출의 모티브가 다 들어 있거든요. 그러면 방주는 어디서부터 어디로 구원되었느냐 하는 거지요. 온 천지가 물 천지가 되었는데 어느 장소는 안전지대라는 그것이 없어요. 온천지가 다 잠겼어요. 그러면 기껏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뭐냐? 방주바깥에서 방주 안으로 탈출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탈출이 되었으면 탈출을 온전히 해야 되는데 방주 안에서 나왔던 그 여덟 명 가운데서 또다시 저주가 나왔다면, 그러면 구원의 관한 탈출의 모티브, 주제가 그 내용이 점점 더 확장되고 팽창되는 이유가 뭐냐는 말입니다.



일단 환경 상 방주 바깥에는 물이 넘실거리고 방주 안에는 물이 일체 들어오지 않았다. 역청을 발랐으니 물이 들어오지 않지요. 환경 상 구원이 된 환경 같아요. 그러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구원된 환경이 자동적으로 인간의 마음조차 구원받은 마음으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은 아니올시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을 깊이 있게, 더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겁니다.



여덟 식구 구원되었다. 맞지요. 그 다음 질문은, 어디서? 물에서. 물에서 여덟 식구 구원된 것 맞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최종심사, 천국에 들어갈 때는 물에서만 나오면 다 천국에 넣어주느냐 그 말이지요. 노아방주 기준으로 완전히 끝났느냐 그 말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흔히 말합니다. 십자가기준으로 끝났다. 십자가기준으로 끝났다는 말은 포괄적으로 맞는 말 같은데 그러면 십자가가 있으면 다 구원받는가,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 75억의 인구가 십자가 이후의 인구잖아요. 이슬람이든 힌두교든 십자가 이후의 인구라면, 십자가 사건은 터졌고 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어떤 종교를 가지든 다 구원이 되는 겁니까?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 점을 해결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선택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버렸다.



따라서 그 버려진 자도 선택된 자다. 버려진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버려진 자를 건져냄으로 말미암아 그 버려졌던 그 분이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버려졌기 때문에, 그분을 다시 되살린다는 말은 그 안에 담겨진 모든 인류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는다. 그런 논리가 되니까 “그것은 만인구원설이잖아.”라고 이야기할 때 칼 바르트는, 내가 만인구원설이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꼬리를 감추는데, 당신이 만인구원설이 아니라면 택한 자만 구원된다면, 당신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그 선택설 안에서 일괄적으로 모든 선택은 이미 끝나버렸다는 말이지요.



끝나버렸는데 예수님 선택해놓고 그 다음에 또 개인을 찾아가서 선택하고, 그게 당신 논리의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예요. 칼바르트는 끝까지 자기논리의 모순점을 찾아내지를 못했어요. 그러면 주께서 물에서 구원시켜 놓고 왜 또 저주이야기를 하는가? 미리 그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려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구원과 저주는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들 인간 중에서 누가 구원받고, 누가 저주받는 그것이 취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 성경말씀의 완성의 기능 안에는 그 주님이라는 분의 속성가운데서는 저주할 자는 저주하고 축복할 자는 축복할 권한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어요. 그 권한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누구로부터 반발이나 항의를 받을 일체의 의무가 없을 정도로, 본인이 결정한대로 저주받을 자들이 어떤 특별한 이유 있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저주를 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 가야 되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그것은 사랑을 받아야 돼요.



그만한 독점적 권한이 우리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게 최종기준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요, 그러면 인간은 시다발이냐, 로봇이냐, 그렇게 나와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냐. 인간부터 가치를 챙기면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부터 가치를 시작하게 되면 인간은 그런 주님을 찬미하는 취지 때문에 가치 있는 거예요. 따라서 어떻게 행동해서 구원받는 것은 없고 축복받는 자와 저주받은 자와의 특징은, 저주받는 자는 시작을 자기부터 한 거예요.



저주받고 축복받고, 이 모든 것은 나 하기 나름이라고 시작한 것이 바로 모든 저주받은 사람의 일관된 태도고, 축복 받은 사람은, “이렇게 하면 복 받지요?”라는 것을 애초에 자기 쪽에서 거두어버렸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은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에게 멱살 쥐고 흔들 필요 없어요. “너 뭐해서 축복받았어?” 라고 시비를 걸게 되면 복 받은 사람은 이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에게 저주하신 분이 나에게 축복했어.” 라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멱살을 쥐고 흔들더라도 그렇게 하신 분을 만나서 쥐고 흔들라는 말이지요. 이미 어떤 무상으로 택배, 선물을 받은 우리를 보고 멱살 쥐고 흔들지 말고. “아이고, 집사님은 왜 그렇게 은혜를 받았습니까?” “왜 나보고 그런 시비를 걸어요? 은혜 주신 분을 보고 시비를 걸어야지.”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까?” “왜 그걸 저보고 묻습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그러니까 저주받는 거예요. 당신이 구원을 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런 이야기를 내 뱉느냐는 말이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에게는 자기만의 얼굴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노아의 얼굴은 노아의 얼굴이 아니고, 술 취한 얼굴이 노아의 얼굴이 아니고 벌거벗은 하체가 노아의 얼굴이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누구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장 숨겨진 근원적인 치부를 노아는 자기 하체를 통해서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기준과 축복의 기준을 앞당겨서 그 현장에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의 얼굴은 찡그리는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통째로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서 장차 저주할 자는 저주하고 구원할 자는 구원하는 권한을 가진 자의 고유의 얼굴, 그 얼굴을 모든 제자들과 모든 인간들은 사전에 알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어도 등은 보되 얼굴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 본성, 주님이 갖고 있는 그 본성, 누구는 축복하고 누구는 저주한다는 그 본성에 대해서는 오직 인간 쪽에서는 결과적으로 수용할 입장이지 미리 탐색하고 조사해서 미리 내 것으로 정보를 캐낼 권리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등 돌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누구 앞에 나서더라도 얼굴 내밀지 말고 등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등이란 얼굴이 없는 쪽이에요. “나는 얼굴 없이 구원받았어. 본 것 없이.” 보게 되면 따지게 되잖아요. 따지게 되면 생각하고. 생각하게 되면 어느 것이 나에게 유리하냐, 어느 것이 나에게 친밀하냐, 그것을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친밀도에 따라서 행동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친밀도에 따라서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뭔가 보고 있다는 뜻이고, 보고 있다는 것은 그 본만큼은 나의 환경이 되고, 나의 권력이 되고, 나의 생존의 여건이 되면 그것은 나의 고유의 것이고, 그것은 나의 것이 되고, 그 나의 것을 스스로 내가 미워할 능력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비밀은 뭐냐? 모든 인간을 말소하는 기능이에요. 인간은 보게 되고 보게 되면 자기가 유리한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가 봤다는 것이고, 보고 들었다는 것은 얼굴이 있다는 것이고, 인간의 낯짝은 주님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볼 수 있도록 왔는데 그 때는 인간 쪽에서 너무 싫어버린바 되어서 인간 쪽에서 거부했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그 복음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9장 32절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십자가자체가 인간을 깨부수려는 거예요. 33절에,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주여, 제 낯짝을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깨어지게 하시고 긁어주시고 문드러지게 하옵소서. 제가 믿어서 구원받지 않게 해주시고 저는 등 돌리고 있었는데 주께서 툭툭, 어깨 쳐서 구원되게 해주시옵소서.” 그거예요.



보지 않았다는 것은, 내 행함은 없다는 겁니다. 내 행함에 의해서 구원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인간의 근원자체에서의 탈출,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바로 그러한 새로운 내용을 가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다 벌거벗게 만들었습니다. 술 취해서 벌겋게 흉하게 달아오른 그 얼굴을 본 것이 아니고 하체를 봤어요. 누가요? 저주받을 함과 가나안이 하체를 보고 얼레리꼴레리,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축복받은 자는 뒷걸음쳤어요. 뒷걸음치면서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뒷걸음쳤습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런 관계가 될 때 그 숨겨진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가 여기 노아와 그리고 샘의 관계로 지상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는 숨겨진 하나님의 뜻의 상징이 되고, 모형이 되고,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그 긴 그림자속의 하나가 되어서, 남들은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는 주님 앞에 얼굴 없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판단과 저희들의 명석함이,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이익을 계산한 그 모든 것이 도리어 우리에 대한 구원과 주님에 대한 찬양을 훼방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사오니 이제부터는 얼굴 없는 사람으로 등 돌리면서 주님의 은혜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