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언약과 피(창9;4-7) 1607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22. 18:09
2016-07-20 20:44:42조회 : 62         
   언약의 피 160720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언약의 피(창세기 9:4-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P5Uj2r4MtA, Hit:6

 이근호 16-07-20 21:36 
언약과 피

2016년 7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9:4-7

(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9: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시를 내리시는 이 시점에서 인간은 이미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로 낙인찍혀 있는 입장입니다.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바가 이미 악’합니다. 따라서 노아 방주에서 나온 인간들은 선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단독적으로 버틸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승한 정결한 짐승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방주 안에서 심판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날 때부터 죄인인 자를 하나님께서 땅 위에 번창케 하시는 이유는 다른 요소를 번창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른 요소’란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 인간의 모델로 삼으셨던 그 내용을 ‘인간의 번창’ 위에 담아내실려는 겁니다.

그 형상을 위해서 심판받아 마땅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립니다. 그 지시 내용은 바로 ‘생명은 피에 있으니 피채 먹지말라’입니다. 원래 음식이란 먹는 이를 위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곧 음식을 먹는 자가 음식에 대해서 주인님이 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인간이 생명의 주인공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피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피, 곧 생명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바로 이 취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악한’ 인간을 땅 위에 번창케 하시는 겁니다. 죄인에 대한 긍휼이 어떻게 ‘피는 곧 생명이다’과 관련성 있는 지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인간보다 피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피의 실체를 드러내는 들러리로서 땅 위에 번창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누락된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오로지 피, 곧 생명과 관련되면서 나타납니다.

이로서 피와 인간의 관계는 실체와 상징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실체로 여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본인이 자신에게 전부입니다. 그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를 믿든지 간에 그 결말은 항상 자기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피’라는 물질과 ‘생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즉 고기를 먹되 피를 절대로 먹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생명은 피’에 있다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른 것처럼 곡해하게 됩니다. 마치 십일조하면서 의와 신과 인이 어떻게 십일조 돈에 결합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33)

인간들의 이러한 무지는 본인들이 스스로 실체라 여기고 주인공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천하에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자신을 최종적 가치로 다루게 됩니다. 세상이 날아가도 자신은 건재하기를 원합니다. 세상 만사 돌아가는 것이 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물질적인 물컹한 피라는 액체에 어떻게 영원한 생명이 담기는지 그 내막과 방식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기에, 아무리 피를 먹지 않더라도 제대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제시한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 방식’에 인간이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행위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피’와 관련있습니다. 생명피 라는 물질이 제대로 연합될 경우에만 온전하게 달성된 사항입니다. 그 어느 인간도 ‘피’라는 물질성과 ‘생명’이라는 추상개념이 지속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관계성을 해명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을 상징으로 보지 않고 실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따로 있다는 말은 인간은 곧 상징에 불과하다는 말이 됩니다. 실체가 상징으로 관련지으면서 그 중간에 ‘시간성’이 삭제됩니다. 즉 시간은 모두 예수님을 위한 시간이다 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실체가 아니고 상징인 주제에 인간이 자기 역사, 자기 인생, 자기 과거사에 연연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울고 불고 할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상징에게 있어 형식은 무의미합니다. 오로지 실체와는 관계가 중요할 뿐입니다.

성도에게 있는 자기 인생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시간’만 흘러가고 거기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서로를 인사하고 격려했습니다. “주께서 어서 오십니다” 이 말은 각자의 시간들은 의미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위한 역사와 시간만 의미있다는 겁니다.

피라는 물질성이 ‘생명’과 관련되는 것은 실체되시는 예수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작업입니다. 피를 흘리므로서 새언약을 완수하셔서 생명을 맺게 하시는 근원이 되십니다. 따라서 ‘피채 고기를 먹지 말라’는 지시는 이미 그 지시 속에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의 기능과 관련성이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예수님의 핏소리를 찾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자만이 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바로 이 핏소리와 관련된 상징이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창세기 4:10에서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벨의 죽음에 주안점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피’라는 물질과 ‘소리’라는 추상개념을 결합시키는 용도로 아벨을 상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과 동생을 그냥 각자 실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즉 누구를 위한 인생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통해서 핏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오늘날 성도에게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핏소리를 들으십니다. 언약된 피소리입니다. 십자가의 이 피가 지옥가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성도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받은 자만 이 사실이 유일한 실체임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주님을 위한 상징이요 증인인 것을 영광스러운 유산이라고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7-21 13:00 
48강-창 9장 4-7절(언약의 피)1607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9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9:4-7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노아홍수가 끝나고 난 뒤에 사람이 번창하고 번식하는 것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소관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번식이 안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번창하게 하십니다. 인간은 이미 심판 속에서 기어 나왔기 때문에 인간에게 의미를 둔다든지 인간에게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제대로 하라는 것은 없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를 걸기 때문에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계속 번식시키고 확장시키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습니다. 인간의 계획은 악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시고 완성을 보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형성과 유지에서 인간이 제시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다가가겠습니다, 하는 것은 다 거절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방식은 오직 단독적이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관계에 있어야만 교류가 된다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거예요. 그 정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내가 인간과 관계할 때는 이 방식으로만 관계한다. 피는 먹지 말라.” 이 방식으로만 교류되는 겁니다.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만일 피를 먹는 자는 내가 죽여 없앤다.” 그렇게 단정 짓고 나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번창 하도록 하고 충만케 하는 그 이유가 인간들이 흔히 기대하는 것처럼, ‘인간이 복을 받아서 많아지면 외롭지 않고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취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이 번창되는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 취지가 번창하는 거지요. 인간자체가 번창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번창하면서,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에게 실려서 같이 세상끝가지 번창하고 편만해 가는 겁니다. 인간 좋으라고 그런 규정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이것이 인간의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 때에 형상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겼느냐 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범죄 해서 심판받고 있는 인간과 하나님 쪽, 그 틈새사이에서 피 먹지 말라는 지시와 더불어서 형상이 만개되고 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것과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 때의 그 형상 안에 담긴 내용과 합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필히 범죄 해야 하고, 물 심판을 받았고, 노아는 필히 방주를 타고 살아야 했고 그 노아의 후손은 번창해야 되고. 이것은 결코 인간을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을 위한다는 계획이 아예 없어요.



인간 말고, 흙에서 인간되게 했던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것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형상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피 먹지 말라는 지시와 관련지어서 형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렵게 들리는데 어렵게 들리는 이유가 있어요. 일방적으로 이미 심판받은 입장에서는 “심판에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자기구원을 언급할 수 있는 처지가 못돼요.



이미 심판이 확정된 상태, 심판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는 콩 내놔라, 팥 내놔라, 요구할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심판 받아야 될 입장에서는 심판 받으면 되지, “이 심판은 부당합니다. 나 혼자라도 구원받아야 되는데.”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이 포괄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감 못 잡고 있어요. ‘남은 심판받아라. 나는 안 받을 거야.’라는 식으로 특별관리 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심판받아요. 노아마저도 방주 없이는 단독으로 홍수를 막아 내보세요. 못하지요. 어떻게 살겠습니까?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것이 악하다는 말은, 이미 악하다는 뜻이에요. 악한 자는 그냥 수그리고 앉아 있어야지 어쩌겠어요? 악한 자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봐야 그것이 선한 것이 안 되거든요. 선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 번창시키고 노아를 통해서 이 땅에 충만하게 하는 것은 다른 목적 때문에 그래요.



다른 목적이 뭐냐 하면,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시켜놓고 벌이는 하나님의 추가적인 지시, “피를 먹으면 안 된다. 피를 먹으면 내가 죽인다. 피와 무관한 인간은 살아도 산 인간이 아니야.”라는 그 피와 관련해서 처음 인간을 만들 때의 하나님의 형상의 내막을, 피라는 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구체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 작업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일반으로 악하다고 심판으로 몰아놓고, 몰아넣음에도 불구하고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멸망시키기 않고 계속 이끌고 가는 이유가 목적이 다른데 있었다는 말이지요. 목적은 피와 관련된 하나님의 형상,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그 이유가 상당히 난해하게 되어 있어요.



4절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피라는 것은 헤모글로빈이라고 해서 물질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생명은 물질이 아니고 추상명사입니다. 추상명사와 물질이 어떻게 같게 되겠습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가 레위기 17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는데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피는 눈에 보입니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물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명사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이것은 성립이 안 되지요. 무엇이 어려운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반지를 해줄 때 그냥 “다이아몬드반지를 줄게.”가 아니라 “받아. 이것은 내 사랑이야.”라고 하면서 줍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그 반지를 받을 때는 그 다이아반지와 사랑을 결합시켜서 받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다이아반지만 남지 사랑은 날라 가버려요. 역시 다이아, 현찰이 중요하지 그 때 했던 약속은 바람 따라 세월 따라 날라 가버리지 않습니까? 정작 그 말이 일치된다면 다이아몬드반지가 있는 이상은 그것을 볼 때마다 사랑이 느껴져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다이아를 볼 때마다 이게 시가 얼마짜리냐, 그것만 생각이 나지 그 때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랑은 절대로 물질에 같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물질과 추상명사, 사랑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과는 결합이 되지 않아요. 결합이 되지 않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피에 있으니 피를 먹지 말라.”고 한다면 듣는 인간 입장에서는 그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피를 먹지 않으면서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피를 안 먹는 것이지 생명에 피에 있기에 안 먹는다고 그것을 결합시켜서 안 먹을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결국 이 말씀을 아무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십분의 일은 낼 수가 있어요. 채소나 양이나 땅의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낼 수가 있지만 의와 신과 거룩,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담아서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면서 내가 냈습니다, 하는 자랑질이 따라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 해결할 수 없는 말을 덧붙여서 피 안 먹고 지옥 가는 사람을 만들어놓는가? 피는 피대로 안 먹고 지옥 가는 사람. 뭐 때문에? 생명이라는 것을 놓쳤기에 결국 하늘나라 못가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가? 생명이라는 것과 피의 결합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인간의 능력으로서 같이 결합된 것으로 여겨서 지킬 수가 없는 지시에 불과하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게 대체 뭐냐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할 때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먹지 말라, 피 채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먹는다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음식물을 자기 소유로 삼는 거예요. 자기의 목숨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먹을 것도 먹고 안 먹을 것은 안 먹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피를 하나의 음식물로 간주하게 되면, 먹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음식은 내 생명을 위해서 보조하는 것이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생명은 피에 있으니 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그동안 네가 콩이나 팥, 채소, 노루고기, 이런 것을 내가 먹어서 내 인생을 관리하는 수단이 되는 음식중의 하나로 피라는 것이 개입되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갑시다. 어제 가락교회 설교동영상 두 번째 시간에서 실체와 상징이라는 말을 했어요. 실체에서 상징에서 바뀌는데 상징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을 때는 상징이 되지만 실체가 보이지 않을 때는 자기가 주인공이 돼버려요. ‘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다 나를 위해서다.’ 이렇게 자기가 주인공이 돼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기껏 상징에 불과한데. 쉽게 해서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상징이잖아요. 태극기를 걸어 놨는데 그 태극기가 땅에 툭 떨어졌습니다. 태극기가 툭 땅에 떨어진 동시에 대한민국 5천만이 다 떨어집니까? 아니잖아요. 태극기가 그려진 그 천조각이 떨어질 뿐이지 대한민국은 멀쩡하잖아요. 그것은 상징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태극기가 대한민국을 상징하지만 사실은 물질인 천조각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태극기가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외국 나가서 때 묻은 태극기라도 쳐다볼 때 눈물을 흘리지만 태극기에 목숨걸고 거기에 헌신하지는 않아요. 그것은 왜 그런가? 대한민국의 실체를 알기에 기껏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묘사하는 아이콘 비슷한 상징이라는 것을 아는데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몸, 자기 인생, 자기가 보내온 세월, 이게 실체에요.



누구를 보여주는 흙덩어리로 자기를 절대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애착이고 나르시시즘, 자기의 자기사랑, 자기집착, 자기아집, 나만의 현실이에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실이란 사실적인 공간을 현실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견뎌내야 될 가혹한 의미의 공간이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견뎌내야 될 가혹은 공간이 현실이지 터키 쿠데타가 일어나도 그것은 현실이 아니에요.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지금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만 현실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체 현실을 묘사하지 않아요. 나와 관련되었기에 이것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실체도 아닌 것이 실체인 것처럼, 이 우주가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도, 하나님도, 말씀도 다 나를 위해서 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본인은 하나의 흙덩어리고 펄럭이는 천조각으로 아무것도 아닌데, 다른 것, 실체를 위해서 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뒤의 모든 조치는 노아언약에 의한 자비와 긍휼과 사랑, 선인이든 악인이든 불구하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지금도 김 정은에게 살이 피둥피둥 찌개 해주시고, 신선한 공기 맛보게 하시는 것은 김 정은이나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에요.



이미 우리는 심판 받기로 확정된 것이고, 하나님은 착한 사람 살리고 악한 사람 죽이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는 거예요. 다른 목적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상징으로 만들면서 인간에게 “생명은 피에 있으니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면 실체에서 상징, 또는 실체에서 은유, 실체에서 은유로 가면서 그 중에 빠져나오는 것이 있어요.



누락된 것이 있는데 그게 시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실체가 되면 늘 어릴 때의 청춘을 생각하고, 흘러간 노래를 생각하고 젊을 때 불렀던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하고, 자기시간, 자기인생의 여정을 늘 생각하는 겁니다. 여자의 일생이 어쩌니, 그렇게 하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가 주체고, 자기가 실체기 때문에 모든 시간은 나를 경유해서 흘러간다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상징이 되어버리면 시간이라는 것은 날라 가버려요. 시간은 없어요. 그 때나 지금이나 실체와의 관계성이 중요하지 단독적으로 내가 어떻게 흘러가고,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임금님 행차할 때 궁녀들과 내시들이 졸졸 따라가잖아요. 이 때 궁녀들과 내시들은 절대로 자기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임금님 스케줄이 중요하지 자기스케줄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와 백성의 관계에요. 실체와 상징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고 난 뒤의 예수님의 증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요.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고유시간을 챙기면 안 됩니다. 독자적으로 자기의미를 챙기면 정신병자라고 제가 오늘 올린 글 중에 했어요. 오늘 개봉한 <부산행>이라는 영화 평을 올려놨어요. 독자적으로 자기가치를 챙기는 자는 정신병자에요. 왜? 본인이 실체라고 우기기 때문에.



본인이 실체라고 한다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 안 받고의 기준이 외부에서 날아오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정합니다. 세상에 이런 석가모니가 어디 있어요? 그래놓고 예수 믿는다고요? 교회 다닌다고요? 파계사나 동화사나 절에 가는 사람이에요. 왜? 거기 가도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설교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자기의견을 개진하지 마세요. 그것은 이미 심판받아야 된다고 규정된 입장에서는 그럴 권리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악한 인간에게 무슨 아이디어를 얻겠습니까? 악한 인간과 무슨 동업이 돼요. 말을 안 섞습니다. 아까 한 임금님 행차 다 해 봅시다. 임금님이 행차를 하는데 뒤에 무수리와 궁녀들이 따라갑니다.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지 따라가면서 무슨 죄를 지었다든지 하는 이것은 의미가 없어요. 따라오고 있는지, 그 따라오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무슨 관계,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한 그 관계 안에서 따라오는 것이 중요하지, 9살 때 죄를 짓고, 20살 때 죄를 짓고, 몇 살 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이런 것은 아무 의미 없다니까요.



하나님을 따라오는 관계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데 그게 뭐냐? 생명 되는 피는 먹지 말라고 이미 그 관계를 확정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원하는 거예요. 이미 심판받아도 합당한 인간을 살려두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심판과 주님 사이의 틈새에서 솟아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 천지창조를 누가 했으며 어떻게 만들었는지의 그분의 구체화가 하나님의 급선무가 되는 겁니다.



2천년 교회역사와 성경해석이 다 틀렸다는 이야기에요. 뭘 하면 구원받겠나, 그런 것이 나온다는 것은 여전히 독자적인 자기구원, 자기가치를 챙기고 있는 악마적인 발상에 불과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이 가면 졸졸 따라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천국 가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따라가지를 않아요. 자기가 돛대에요. 자기가 최고인데 누굴 따라가요. 선과 악도 자기가 다 결정해 버리고, 구원의 기준도 자기가 결정해 버리고, 거기에 따라서 자기의 미래를 확정짓고.



상징은 시간요소를 다 빼세요. 빼면 뭐가 되는가?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에 불과합니다. 잠간입니다. 잠간이라는 것은 그냥 다른데 눈 팔면 곧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은 누가 갖고 있는가? 시간은 실체되시는 분만 갖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상징의 시간은 뭐냐? 실체되시는 분의 시간에 예속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주님의 시간이 되지 나를 위한 내 시간, 청춘을 그리기 위한 내 시간은 없어요.



모든 사진, 모든 것은 퇴색하고 빛이 바랩니다. 우리가 늙어 죽는 것도 주님의 계획의 일부에요. 늙는 것을 너무 서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복음을 알고 난 뒤에 외롭다는 것은 여전히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외롭다는 말은 평소에 안 외로웠을 경우의 그 시기, 그 지난 과거를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성도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지금의 현재라는 것도 내가 생각한 현재가 아니고 낯설게, 늘 새롭게 나타난 의미에요. 나도 예상 못했는데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야 돼요. 똑같이 아침 미역국 먹고 그 다음날 아침에 미역국을 먹어도 어제 미역국을 먹을 때의 의미와 다르게 오늘 먹을 때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실체되시는 예수님의 시간이 새로움을 유발시켜서 그런 거예요.



이 말은, 나의 목적이 없어져 삭제당하고 주님이 하시는 일의 목적이 곧 우리의 미래나 장래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라는 인사를 했어요. “주께서 곧 오십니다.” 이 말은, 각자의 시간은 이미 삭제 당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내 스케줄은 없고 당신 스케줄도 없습니다. 주의 스케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감히 상징이 실체를 잡아먹을 수는 없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돼요. 피를 통해서 나타나는 그 실체가 죄인 된 우리를 상징으로 삼키면 그 과정과 기능을 통해서 십자가지신분이 등장하게 될 겁니다. 그 때가 마지막 때에요. 예를 들면서 창세기 4장 10절에서,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그 때 하시는 말씀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핏소리가 난다는 거예요. 울음소리도 아니고 죽는 소리도 아니에요. 핏소리입니다. 아벨의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벨의 피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아벨의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주께서 가인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벨을 죽여서 피만 뽑아내면 하나님께서는 작업이 끝나는 거예요. 좀 잔인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 속에 담겨 있는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언약의 피,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피로 세운 새언약을 일치감치 아벨속에서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왜 끄집어내요? 끄집어낸 그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의 능력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이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그게 새언약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창조가 되겠지요. 아벨의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핏소리가 의미 있기에 가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둬서 찾아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아, 네 눈에는 아벨을 동생으로 봤지? 그게 잘못이다.” 가인이 아벨을 동생으로 본 것은 가인이 자신을 실체라고 인정했고, 자신도 실체니까 동생 아벨도 나름대로 실체라고 여긴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인도 실체도 아니고 아벨도 실체가 아니고, 다만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은 아벨 속에서 뭘 끄집어내는가에 있습니다. 핏소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가인에게 맞아죽도록 해서 하나님께서 한 타이밍 늦춰서 가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네 동생 왜 죽였느냐?”가 아니라 “동생의 핏소리가 들려온다.” 피는 물질이고 소리라는 것은 추상명사지요. 피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핏소리에요.



이 핏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주님과 아버지의 관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관계하고자 제시했던 그 관계 안에 오직 핏소리만 그것을 구현하는 목적으로 관계를 맺어오신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라 하는 것은 그 때부터 흘러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핏소리가 들릴때까지. 그래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예수님만을 아벨로 상징되는 그 실체되는 존재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제대로 된 핏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가 사도바울에게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보다도 처음부터 인간과 이 세상의 모든 창조는 뭘 중심으로 만들어졌는가? 그것은 예수님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의 죽으심 중심으로, 십자가복음중심으로, 새언약중심으로 이 온천지가 만들어진 겁니다.



오늘 본문 설교 요약하게 되면, 인간은 이미 심판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바가 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여정, 악한 자가 이만큼 나이 들도록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의 혜택,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은 혜택입니다. 60대, 70대, 모든 노인들도 그 노인의 2세 되는 분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오신 거예요.



문제는 그 은혜가 어디를 지향하고 무엇을 드러내느냐 하는 점에서 주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피에 생명이 있으니 너는 피를 먹지 말라는 조로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실체로 보고 그 피를 물질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겠지 싶어서 그냥 피만 안 먹습니다. 그게 지옥 가는 유대인들입니다. 아비가 마귀인 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그런 거지요.



상징에게 있어서 주께 어떤 형식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상징인 자가 성만찬을 하고 세례를 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앞자리든 뒷자리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열시 반이든 열한시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상징인데요. 태극기에 콧물 묻었다고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안한다고 하면 안 되지요. 콧물이 묻었든 피가 묻었든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이듯이, 이 더러운 인간이 평생 살면서 죄만 짓는 인간이라도 실체된 주님께서 우리를 상징으로 간주한다면 주께서는 우리 안에서 핏소리만 끄집어내면 하나님의 계획은 달성되는 겁니다.



“피 언약으로 나와 너는 관련 있고, 너는 내 백성이고 내 아들이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입니다. 마지막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이 진리를 가지고 감추어진 비밀, 천기누설이지요, 감추었던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인간의 지혜로서 알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로서는 어리석게 보일 뿐이지만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게 됩니다.



성령만 받아도 평생 하늘나라 유산 다 받은 겁니다. 세금 한 푼도 안 내고 받았어요. 그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려고 애를 써도 그 성령을 못 받아서, 그 성령을 못 받아서 뭘 로 위장하느냐? 하나님의 주권사상, 하나님중심사상, 그래서 동의한다고. 뭘 동의해요. 하나님중심사상 아닙니다. 주권사상 아니에요. 하나님절대주의, 그거 아닙니다.



그런 것은 철학이고, 유대교고, 그런 것은 개혁주의신학이지요. 하나님절대주의 아니에요. 우리가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절대주의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 피, 언약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언약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 딱 붙어서 딸려간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될 자격도 없는 우리가 제일 먼저 첫 열매로 구원받은 그 열매로 인하여, 그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상징으로서 살아가기에 독자적으로 근심걱정은 하지 맙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죄인 된 우리를 살려준 의미가 다른데 있었던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 버릇을 버리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산다는 이 영광, 이 놀라운 신분, 천하에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