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하나님의 계획(창8;20-22) 1607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8. 07:46
2016-07-06 20:39:26조회 : 55         
   하나님의 계획 160706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하나님의 계획(창세기 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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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7-06 21:17 
                  하나님의 계획

2016년 7월 6일                         본문 말씀: 창세기 8: 20-22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신 계획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환경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시는 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단정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유보됩니다. 즉 죄와 벌이 균형이 맞지 않는 환경을 제공받게 됩니다.

악인들이 설쳐도 인간들의 뜻대로 그때그때마다 처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노아 홍수 이후의 세상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나오면서부터 인간들 생존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방주 안에서 쏟아져나온 것이 인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도 함께 나왔는데 그 속성이 바로 노아가 ‘정결한 짐승과 새’를 잡아 제사로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를 흠향하셨는데 그 효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벌에 대한 유보책’입니다. 이 약정에 노아가 유일하게 관여합니다. 즉 노아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이들은 노아가 대표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영향력 안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노아 후손들은 운명적으로 어려서부터 악한 자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인간들의 자기 이해나 세상 이해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악하다고 수긍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존재성에 대해서 권한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태어나면서 갖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시도가 원활치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억울해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어려서부터 악한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의 약정, 곧 노아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몰이해로 인하여 현 세상의 돌아가는 사정은 마치 인간들의 생존을 위하여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노아 홍수로서 마감된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실시됨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이사야 54:9에 보면,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로서 심판한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리 악해도 또다시 물의 넘침으로 심판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기준과 취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처음 홍수 심판 때는, 땅에 사는 짐승과 인간들의 생존을 겨냥해서 심판하셨습니다. 즉 땅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만드신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얻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정결함 것의 희생’이었습니다. 즉 땅은 단순히 인간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 더 이상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드러내기 위한 환경으로 연속적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한 겁니다.

노아 심판 이후의 인간의 생존이나 자연환경은, 새롭게 등장한 심판의 기준을 알려주는 증거물 노릇을 하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악한데 어떻게 해서 거기에 합당한 징벌은 오지 않으냐를 통해서 이제는 ‘생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중요하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땅의 세계는 새롭게 등장한 심판의 기준에 의해서 ‘생존’과 ‘생명’으로 나뉘어집니다.

그 등장한 심판의 기준으로 인하여 생존이 아니라 생명을 얻을 영원한 구원의 단체가 등장합니다. 이사야 54:9에서,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기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조건으로 물이 땅에 넘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시간이 지나가면서 더 세밀화해집니다.

예레미야 33:20-21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의 자손’을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낮과 밤의 약정을 스스로 어기거나 취소시킬 수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항상 분류로서 나타납니다. 자연을 통해서도 이 분류성을 표현합니다. 영원히 천국갈 자와 지옥갈 자를 분류하게 됩니다. 노아 심판을 통해서 알다시피,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기에 마땅이 지옥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이란 실은 인간에게는 터무니없는 장소입니다. 어려서부터 악한 자가 어떻게 죄를 용납하지 않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라는 분류 기준 중심으로 ‘죄에 대한 유보책’이 작동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천국은 실은 인간이 살기 위함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위한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 원칙이 담아내는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수렴 과정을 통해서 ‘심판 안’에 속하는 자와 ‘심판 밖’에 속하는 자가 새롭게 등장하는 분류 기준에 의해서 규정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악한 것으로 단정 짓는 것은 그 시대에 등장된 분류 기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 기준은 연속적으로 노아 방주에 나왔던 그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신약 때와서 그 기준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 그 종결을 맞이하게 됩니다. 즉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이 ‘심판 밖’ 곧 ‘예수 안’, 혹은 ‘천국 안’으로 분류된 사람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면서 취할 태도는 잘, 잘못 모든 것이 다 “예수님 하셨다”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대자연의 달과 해와 별과 바다와 땅,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등장된 분류 기준을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이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 안에 있는 자를 지옥가는 자들이 성도 본인도 자신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7-07 16:18 
46강-창 8장 20-22절(하나님의 계획)1607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8장 20-22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8:20-22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리기를, 노아홍수가 있었는데 방주로 심판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니고 심판이 본격화되었다, 본격적으로 심판이 시작된 겁니다. 이 땅이 꺼질 때까지, 이 땅을 다 불에 태울 때까지. 예수님도, 타작마당을 언급하면서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고 알곡은 천국창고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땅이 이렇게 불바다가 되는 이유는 지옥 자체가 불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판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소멸하시는 불이에요. 따라서 소멸하는 불의 속성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곳,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천국은 예외적이고 의외입니다. 천국은 인간에 대해서 불의 심판을 거두시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보고 예수님이 받았던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공유하는 곳, 그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내가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천국에는 대체 누가 살기에 불 심판이 나에게는 면제되는가,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내가 들어올 만 해서 들어왔다는 생각을 절대로 가지면 안 됩니다. 나 잘나서 들어온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천국설교를 할 때는 반드시 우리 잘남이 다 삭제가 되고 우리의 멋있는 행함이 다 제거가 돼야 돼요. 그래야 우리사이와 하나님 사이에 천국에 들어갈 만한 조건이 예수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말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덕분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 그러한 특수한 나라, 특이한 나라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심판이 본격화되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릴 때부터 악하면 태어날 때부터 악하겠지요. 어릴 때부터 악한데 내가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다는 그 정의롭고 바른, 공정한 원칙을 하나님께서 적용을 안 하겠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악한데도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까지는 계속 봐주다가 마지막 때가 되면 그 조건은 이제 끝이 나고 사람이 지은 행함대로 저주를 하는 겁니다.



이 심판의 연속성이라는 것이 결국 뭐냐? 내가 악한대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많이 봐주고 계시구나, 라는 관계성을 간파를 해야 되고 그것을 알고 있어야 돼요. 쉽게 말해서, 나는 뭘 해도 악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봐주고 계시는 입장에서 나는 지금 생존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두고 사람들은 자기 자력으로 해석할 수 없어요. 어느 인간도, 내가 태어나서 뭘 해도 그것이 악하다고, 그것을 수긍하는 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성경을 천독만독을 해도 성경해석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돼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악하게 태어났다. 그런데 악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유황불 안 받고, 물에 잠겨서 빠지지 않는 것은 지금 많이 봐주고 있는 거예요. 착해서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고 악함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물심판의 유보인데 그 물심판의 유보를 하는 이유가 뭐냐? 뭔가를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20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노아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죄를 지었지만 유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는 단독자가 되지요. 우리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해서 알려면 기본적으로 노아가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뭔가를 체결했다는 것, 약속, 언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내가 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났다는 그 사실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많이 봐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마태복음 5장에서는,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사랑대목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악하지만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악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려내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시비를 걸 때 우리가 화가 나잖아요. 화가 나는데 사실 화를 낼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내고, 시비를 걸고, 에너지를 써서 욕을 하고, 주먹질하고 달려들 때 그 사람의 육체를 움직이는 그 에너지, 그 에너지를 위해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 밥을 먹인 적이 있습니까, 돈을 준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 사람이 생존해서 날 향해서 떠들 때 그렇게 생존하게 하는 힘, 떠드는 힘은 누가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 거지요. 내가 키운 강아지가 나에게 달려들면 패주고 싶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달려들 때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내가 생활비를 보태준 것도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키웠거든요. 하나님이 그렇게 키운 그 사람이 나에게 욕을 했을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제가 어제 가락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사람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억울해 하는가? 남 죽은 것은 억울해하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가 아프고 자기가 고통스럽고 자기가 죽는데 대해서 억울해 한다는 그 말은, 본인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악한 자를 봐줘서 키워왔는데 거기에 무슨 억울할 것이 있습니까? 분통을 터뜨리면서 대들 수 있는 권한이 어디서 생겨요? 생길 구석, 여지가 없거든요.



인간의 모든 범죄는 어디서 생기는가? 억울함에서 생겨요. 층간소음 해결한다고 올라가서 사람 죽일 때 위층 사람들이 층간소음 낼 때 에너지 보태준 적이 있습니까, 양식을 팔아준 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 사람이 쿵쾅거린다고 수고비준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침에 눈떠서 잘 때까지, 꿈속에서까지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씩씩거리느냐는 말이지요.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인데 5천만이 다 억울해요.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갓 태어난 아이들, 이제 6, 7개월 된 애들도 억울해 해요. 젖 안준다고 응애, 응애! 뭐가 억울한데? 왜 그렇게 우는데? 젖 맡겨놓았나? 주의 약속, 노아와 맺은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됩니다. 의인으로가 아니라 악인으로 태어나야 됩니다. 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서 계속 이 땅에 등장해야 돼요.



그래야 노아 단독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악함에도 불구하고 봐주는 그 근거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정결한 짐승이 희생되었기에 김정은이든 IS든 밥 먹고 힘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정은이는 몸무게가 130킬로라는데 그렇게 뚱뚱해져서 설치고, 핵폭탄 만들고,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봐주는데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봐주시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어려운 질문을 여기서 해야 돼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잖아요. 새 땅과 새 하늘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으로 인류역사를 끝내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으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것으로 끝내면 되잖아요. 심판을 한 번 경험했고, 심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살아났으면, “그래, 이제 아무 문제도 없고 죄도 없다. 깨끗하게 내가 청소 다 해놓았으니 너희는 마음 놓고 살아라.” 이렇게 왜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을 기점으로 해서 세상을 유토피아로, 진짜 천국으로 단정 짓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일을 종결시키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연속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연속성이란 이런 겁니다. 가로수가 연이어 심겨져 있지요. 그걸 연속성이라고 해요. 간격이 동일하기에 한 줄로 정렬이 되어 있습니다. 숫자에 실수가 있는데 1, 2, 3, 죽 나갑니다. 자연수에는 1과 2사이에는 다른 숫자는 없어요. 이것도 연속성입니다.



그리고 보도블록을 보면 마디의 이음새가 같은 패턴으로 이어져 있지요. 인간의 자아도 연속성으로 되어 있어요. 인간의 기억이 연결되어 있어요. 주님께서는 무엇을 연속시키는가 하면, 방주에 탔던 그 정결한 짐승을 연속시켜서 그 어린양에 해당되는 자가 누구냐가 나올 때까지 계속 연속시키는 겁니다. 연속시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 때를 히브리서에서 마지막 때라고 하는데, 그 아들이 올 때가지 절대로 주님은 자기의 연속성을 포기하거나 중단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냐? 또 나무는 뭐고 이 세상 해와 달은 뭐냐? 파도는 무엇이며 바다는 무엇이고 산은 무엇이고 토지는 무엇인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연속성을 위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이 땅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했는가? 이 질문이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물로 한 번 혼냈다면 다시 물로 혼내도 되잖아요.



내가 다시는 사람을 물로 멸망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그 말은 물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 돼요. 그 대목이 이사야 54장에도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왜 물로 심판하지 않느냐 하는 그 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쌍둥입니다. 쌍둥이라는 개념은 같다는 겁니다. 비슷하겠지요. 대체로 같다. 쌍둥이의 같은 점을 찾아보면 아빠가 같아요. 엄마가 같고, 사는 집이 같고, 먹는 음식이 같고, 환경이 같습니다. 그 쌍둥이가 거의 동시에 같이 태어났는데 그 끝은 어떻게 되는가? 달라도 너무 달라요. 한 사람은 저주받아 지옥가고 야곱은 천국 갑니다.



왜 하나님은 같은 것을 통해서 다른 것을 끄집어내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분류되는 그 틈새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원리를 그 틈새에서 뽑아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물로 심판한 땅을 다시 물로 심판하지 않는가 하면, 심판의 대상이 없어요. 하나님은 뭘 연속시키는가? 땅을 통해서, 죄 지었는데도 봐준다는 새로운 언약, 노아언약을 시작하면서 그 노아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갈라짐을 연속시키는 겁니다.



잘 모르시겠지요? 시편 104편 9절에 보면,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이라 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것이라고 여기지요. 그것이 오해입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준비하신 것이 아니고 바다와 땅의 경계는 그 경계자체가 하나님께서 악한데도 봐준다는 은혜의 증거물로서 물이 넘치지 못하게 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땅에서 생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땅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 문제에요. 땅은 노아심판 이전에는 생존의 땅이었다면 노아심판 이후에는 생존의 환경이 아니고 생명의 환경입니다. 생존해도 소용없어요. 살아 있다는 것은 소용없고 생명, 영생을 얻어야 돼요. 생명을 얻으려면, 그 물이 넘치지 않고 다시는 홍수로 범람이 없다는 그 사실을 뭐로 받아들어야 하느냐 하면, 죄 지음에도 불구하고,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봐주기 위한 다른 근거, 물론 정결한 짐승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을 이 땅을 구분 짓는 새로운 경계선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돼요.



그걸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날 때부터 악하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해서 계속 유지가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연속성이에요. 태어나는 사람보고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태어나는 사람보고 “너는 날 때부터 악한데 봐준다.” 그러면 못 알아들어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죄라고 해 봐야 우는 것, 기저귀에 오줌 싼 것, 그런 것 외에는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커가면서, 이 땅은 내가 이왕 사는 것 잘 살기 위해서 있는 땅이 아니고, 내가 점점 악해진다는 것을 겸비해서, 왜 악한데도 불구하고 지금껏 나는 태어나서 살아왔는가의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는 겁니다.



다른데서 찾으면서 가져와야 될 그 재료하나가 뭐냐 하면, 왜 바다는 포항 앞 바다에서만 치고 시내까지 범람하지 않는가, 그것까지 하나님의 분류의 기준 속에 집어넣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렵지요? 이사야 54장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인간이 생존하는 이 땅을 더 이상 홍수로서 범하지 않는 이유는, 필리핀이나 이집트나 그리스나 중국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사야 54장 9절에 의하면, 나의 아들 야곱, 나의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물이 땅에 넘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사야 54장 9절에서.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것 같이.”



“바다야! 땅으로 넘치면 안 돼.”라고 맹세한 그 내용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내가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리라, 라는 맹세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환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목적은 딴 데 있는 거예요. 그 목적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구원하고 자기백성, 자기아들을 삼기 위한 그 목적의 일관성을 위하여 물로 하여금 땅에 넘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세상 보는 세상관, 자연을 보는 우주관이에요. 동양철학은 생존을 가지고 자연을 봐요. 음양(陰陽)의 논리인데 음이란 볕이 들지 않는 것을 음이라고 하고 볕이 드는 것을 양이라고 합니다. 볕들어서 뭐할 건데?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이것은 여전히 생명이 아니고 생존이에요.



왜 밥 먹고 살려고 합니까? 자기는 날 때부터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선하게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방금 우리가 보았던 창세기 8장 21절, 22절하고 달라요. 이미 너희는 악하게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무지몽매해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기껏 생존에 대해서만 이 땅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으레 파도는 모래사장까지만 와야 된다고 억지를 부려요.



넘쳐도 되는데 봐주고 있거든요. 가뭄 들어도 돼요. 기근이 와도 되는데 지금 단비를 주시잖아요. 영천저수지 저수율이 35퍼센트인데 오늘 좀 많이 채워졌을 거예요. 왜 그렇게 채워주십니까? 악하기 때문에. 네가 하는 그 악한 일에 비해서 네가 받은 은혜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과분해요. 과분하다는 말은, 지금껏 살아왔으면 하나님 보고 억울하다고 하지 마세요.



교회에서 기도회 한다 치면 나오는 것이 다 억울함이에요. 주의 영광이라고 백날 해도 그것은 다 껍데기고 속을 다 보면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이럴 수는 없나이다, 통촉하옵소서, 이런 거거든요. 그동안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 얼마인데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 그러면 이스라엘을 살린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을 좋겠네, 하거든요.



여기서 정리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이사야 54장 9절에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물이 땅에 안 넘친다면서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없는가? 예레미야 33장 20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찐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직설적으로 이렇다고 하는 문장이 아니고, 만약에 뭐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강조를 두 번씩이나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창세기 8장 22절에 보면,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그 다음에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했지요. 낮과 밤이 쉬지 않는다는 이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20절에 보면,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내리는 약정입니다. 약속, 계약입니다.



우리는, 낮과 밤이 반복되게 되면 이것을 어디로 가져가느냐 하면, 창세기 1장으로 가져가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 날이다. 처음부터 낮과 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낮과 밤은 이것이 처음부터 의당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연속성을 위하여 낮과 밤을 근근이 유지시켜주고 있는 거예요. 당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어떤 의도가 있어서 낮과 밤을 교체시키고 있는 겁니다.



심판의 연속성이란 뭐냐? 아까 이야기했는데 또 잊으셨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둘로 분류를 시키는 거예요. 야곱과 에서, 에서는 지옥가고 야곱은 천국 갔잖아요. 그 야곱과 에서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계속 연속적으로 이어나가시는 거예요. 그 전에 우리는 지금 창세기 8장의 노아 때를 보고 있어요. 설교 다시 해 봅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노아야! 살기 어떠냐?” “좋습니다. 아주 깨끗합니다. 공기도 참 좋습니다.” “그래. 그게 바로 천국이다.”



이런 식으로 왜 끝내지 않았느냐는 그 말입니다.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이것이 내가 원했던 심판의 끝이다. 이제 여기서 잘 살아라.”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지난 시간에 했어요. 날계란 이야기 했잖아요. 깨면 뭔가 쏟아져요. 그 내용 안에 정결한 새와 정결한 짐승을 잡는 제사, 제물을 잡아 태우는 그 향기를 흠향하시게 되면 노아와 하나님과의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약정이 체결돼요. 노아언약이 마련된 겁니다.



노아언약은 분류입니다. 분류라는 것은, 아직 지옥이 아니니까 지옥 갈 자와 천국 갈 자를 분류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방주 안에, 날계란 속에 이미 지옥의 씨앗과 천국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걸 방주 밖으로 와르르 쏟아낸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듯이 같이 방주에서 나왔으면서도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잖아요. 이제 심판이 본격화되었다니까요.



제가 본격적이라는 말을 쓰니까, ‘이 땅에서 이제 못살겠네.’ 생존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생명을 주는 문제기 때문에 생존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돼요. 이 땅의 생존은 길어봐야 90세, 100세면 끝나요. 이것은 누구나 예외 없이 끝나는 겁니다. 생명은 방주에서 나왔다고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기준이 쏟아졌는데 그 기준이 뭐냐 하면, 그 정결한, 거룩한 것의 희생이 기준이 되어서 그 기준의 분류에 의해서 그 피의 계약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지옥의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 달이 뜨고 지고, 또 비가 오고, 이런 것은 다 뭐냐? 마지막 때 희생의 짐승과 합치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날 그 심판주가 올 때까지 대 자연은 그 쪽으로 수렴되어야 되고 달려가야 되는 거예요. 달려갈 때 그냥 달려가면 안 되고 그 기준의 연속성, 가로수의 배열처럼 연속적으로 계속 그 기준들이 점점 더 예수님 기준에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피에 관한 겁니다. 피 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 33장의 이야기는 뭐냐? 아까 이스라엘은 없다고 제가 단정을 했는데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레미야 33장에 보면, 이스라엘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 나와요. 이사야에는 단체가 나오는데 그 단체만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예레미야에 가면 새로운 기준이 되어버려요. 새로운 기준이 연속적으로 발달이 됩니다.



발달이 되면 이제는 단체도 없다. 오직 한분만 구원한다. 그 한분이 누구냐? 다윗의 자손이라 하니까 유대인들은 ‘아하, 다윗의 자손인 유대민족은 다 구원받는구나.’ 그래서 예수님당시 이스라엘의 이름이 유대나라에요. 그러나 그것은 예레미야고 더 나아가면 다윗의 자손은 딱 한분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구원하는 거예요.



이 말은, 온 우주가, 해와 달, 별, 바다, 땅,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유일한 경계선이고 예수님이 유일한 기준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계속 추가적인 기준, 다 자세하고 더 깊이 있고 풍부한 내용을 더해가면서 이 우주는 예수님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겁니다. 달려가면서 많은 선지자가 생존을 포기했습니다. 목 베인 사람도 있고, 돌에 맞은 사람도 있고, 톱에 켜인 사람도 있었고 억울하게 죽은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물동이에 빠진 사람도 있고.



하지만 그들에게 생존은 문제꺼리도 안돼요. 왜? 그들은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생존에 연연하는 것은 노아방주로 끝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노아방주로 이미 확인된 입장이에요. 생존에 관한 것이라면 여덟 식구가 끝이에요. 그런데 여덟 식구를 저주받을 식구와 저주 안 받을 식구로 둘로 나눴다는 말은 이제부터 생존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내리시는 기준은 기존의 땅은 의미 없고 오직 영원한 안식처는 예수님이 계시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8장 20절, 21절의 이 대목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죄 지었는데도 봐준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생존의 기준이 아니고, 얼마나 이 땅에서 잘 사는가가 아니라, 땅이 날라 가고 불타버려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기백성을 새로운 기준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 없던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버려요. 누가? 예수님이. 자기가 생명이기 때문에,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정결한 짐승을 잡았잖아요. 그 정결한 짐승을 위하여 노아의 후손들이 계속 생산되어야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십자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예수 십자가를 믿어야 될 자기 백성이 계속 생산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지금 물, 바다는 땅을 넘보지 않고 있고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햇빛과 공기는 북한과 남한 관계없이 골고루 다 내려주시는 겁니다.



악한데도 봐주고 있으니까 그 봐줌의 기준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나왔어요.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 바라보라고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느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생존이 아닌 생명을 얻은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천국가기 위해서 분류된, 십자가라는 새로운 기준점에 의해서 따로 천국가기로 모아진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다 주께서 하셨잖아요.” 이게 공통점입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악하게 태어났지만 평소에 살아가는 태도는요. ‘실수를 줄일걸. 정말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지?’ 자기 잘못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해 있고 그 예민함 때문에 본인이 점점 힘들어져요. 사는 게 힘들어져요. 살면서 무슨 실수를 할지 모르니까. 뻔하잖아요.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몸 자체가 말을 듣지 않고 생각 자체가 욕심이 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욕심을 어떻게 억눌러요? ‘저 옷 사고 싶다.’ 할 때 그 사고 싶은 것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사고 싶은 것은 나쁜 짓이야.’라고 한다는 그 자체가 사고 싶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그 사람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데.’ 함부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해버렸어요. 이제 와서 백날 ‘내 태도가 틀렸고, 그래서 부끄럽고 망신스럽다.’ 가락교회 강의에서, 망신을 당할 때 인간이 된다고 했는데 사람이 망신을 안당하면 사람이 안돼요.



후회를 해도 그 후회가 어떤 해결점이 안돼요. 해결점 알려 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게 바로 약정 안에서 노는 사람이에요. 야곱 안에서 노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잘했던 못했든 주께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단비 주시는 은혜만 은혜가 아니에요. 나로 하여금 그런 행동조차도 주의 은혜가 되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통해서 마지막 기준, 십자가기준을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면서 바르게 살면 천국 갈 줄 알고 그렇게 어리석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정 안에 들어 있고, 모든 것이 예수님 기준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