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3 20:42:48 | 조회 : 67 | |||||||||||||
음식물의 변화 160713 |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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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6-07-13 21: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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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강-창 9장 1-3절(음식물의 변화)1607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9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9:1-3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에 주어진 모든 환경이 복음을 구성하기 위한 환경이다, 그런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구성하기 위한 환경이지 나를 구성하기 위한 환경은 아닙니다. 나 자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주어진 환경은 아닙니다. 세상 되어가는 모든 질서와 법칙이 복음을 위해서 있지 나의 욕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을 위한 환경으로 인하여 나만 챙기고, 나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늘 부대끼게 되어 있어요. 어울리지 않고 안 맞는 코드입니다. 세상은 내가 살기에 전혀 맞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살기 위한 세상이 아니고 환경이 아니기에. 그래서 우리는 억지를 부립니다.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살아야겠다고 우긴다면 창세기 9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6-8장까지 보게 되면 집단죽음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단죽음사태가 일어났어요. 개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죽는 겁니다. 노아도 예외가 아니지요. 방주 안에 갇혔다는 것은 노아도 홍수심판 한가운데서 둥실거리면서 돌아다닌 거예요. 노아라고 해서 빼준다든지 예외로 쳐주지를 않았습니다.
너도 심판 한가운데서 실컷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왜 살려주는가? 목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무슨 목격자. 다 죽였다는 겁니다. 노아가정을 살려서 하나님께서 다 죽이는 하나님이심을 보입니다. 집단죽음의 의미는 뭐냐? 개개인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 홍수가 있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경쟁관계였습니다.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보자, 이렇게 시합하고 경쟁하듯이 살았습니다.
인간과 인간끼리의 경쟁이지만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그 경쟁에 뛰어들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호응해주지 않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에 하나님께서 편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내가 어떻게 사느냐’의 세상이 아니고 복음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끌고 가시는 거예요. 복음적 환경을 위함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도바울이 언급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고. 집단죽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만들어내고 끄집어냅니다. 쉽게 말해서 죽음 없는 생명은 없다는 것이지요. “죽음 없는 생명은 없으니 장렬하게 죽어다오. 그것이 생명가진 자의 자세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 것 나를 위해서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이지요.
복음을 위해서 죽음에 합세할 때 바로 그 자가 노아입니다. 이미 먼저 전체심판을 체험한 자의 자세, 이 세상은 나를 살리기 위한 세상이 아님을 진즉부터 알았어요. 왜냐하면, 방주에서 이미 심판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 세상은 다른 이유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노아는 알지요. 우리는 잘 모르지만 노아는 방금 막 방주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운행하는 그 원리원칙은 나의 생존과 무관하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원리를 위하여 자신이 지금 생존했고 방주 안에서 뛰쳐나가고 싶어도 그 안에 갇혀서 못나오다가 물이 걷히고 난 뒤에 땅이 말랐을 그 때에 나온 겁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사명이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읽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일반인들 말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성도의 어떤 특징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사명에 의해서 이리저리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자꾸 내어놓고, 더불어 사는 것, 그런 모양새. 누가 기근에 들었다 하면 아낌없이 넘치게 헌금해서 같은 형제를 살려주는 것, 그것은 지역이 머나 가까우나 관계없이 묶어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성령입니다. 성령의 은사,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뭔가 부지런히 다니고 있어요. 여행을 다닌다는 뜻이 아니고 한 자리에 있더라도 어쨌든지 생존을 위한 삶의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뭘 보이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다. 너희 보기에는 우리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우리 눈에 보기에는 예수님이 움직이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도행전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의 모습과 안 맞아도 보통 안 맞는 것이 아니에요. 엄청나게 안맞아요 .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주여, 오늘도 무슨 일을 준비해서 저에게 숙제로 주시겠습니까? 뭘 시키시겠습니까?” 이렇게 나오고 오늘날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어떻게 밥 먹고 살까?’ 이렇게 생존에 급급하고. 오늘날 가짜 성도들은 개인중심이고 사도행전이나 창세기 9장에 나오는 이 분들은 복음 중심으로, 복음의 힘으로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오늘날 교인들은 내가 우선이고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나 좋으라고 복음 믿고, 무슨 보험하나 들어놓은 것처럼 자기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복음을 소지하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복음에 소유 당했는데 복음의 능력, 주님의 능력에 소속이 되어서 살았는데 사람들은 뭘 하나 주머니에 갖고 다니듯이 복음을 필요할 때 써먹으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개인주의와 예수님중심주의가 이렇게 차이나는 겁니다. 예수님중심주의가 아니라면, 그게 되지를 못한다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를 전혀 이해를 못해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가 전부 다,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활동하는 중심이고 그 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사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분에 관한 이야기에요.
따라서 이것은 성령께서 보편적으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부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시켰기 때문에 한 사람 두 사람 더 얻고자 함이 아니라 만남의 반가움,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따로 있듯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복음이라는 언어에 감이 오고, 복음이라는 언어에 동조가 되고, 희열을 느끼는 사람끼리의 만남과 만남으로 연속되는 겁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온 것을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성경에서 기본이 뭐냐? 인간을 찾아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은 애초에 없고요, 찾아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찾아내시는 하나님이에요. 누가 찾아내요? 인간이? 아닙니다.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십니다. 반드시 여기에는 탈락과정이 동반됩니다. “너 아니거든! 너는 아니야!”라고 제키는 작업도 병행하십니다.
“너 아니고 쟤 말이야. 너 아니고 저 사람.” 찾아내는 거예요. 그 찾아내는 방식은 오직 복음 중심주의밖에 없습니다. 나 천당 가기 위해서 복음을 믿는 그거, 너 아니거든, 그런 너는 탈락이고 복음의 사명 받아서 움직이기 위해서 찾아냄을 당하는 사람,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 양들에게만 사도행전도, 사도바울의 편지들도 이해가 되듯이 그들의 긴 그림자가 신약에 나오는 성도의 긴 그림자와 같은 노선 상에 있는 사람이 오늘 본문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입니다.
여러분의 원형을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의 원형으로 삼읍시다. 물론 예수님이 원형이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 몸을 원형으로 삼고 노아를 그 원형에서 길게 나온 긴 그림자라고 생각합시다. 대 낮에 전봇대의 긴 그림자, 해를 등지고 서 있으면 긴 그림자가 나오잖아요. 그 긴 그림자 중에 맨 처음 그림자쯤 되는 사람이 노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신약성도를 기준삼아서 노아를 신약성도보다 더 못한 초창기 그림자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5절에 보면,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라고 되어 있어요. 시장에서 나오는 것들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먹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한 마디로 해서, 먹을 수 있거든 다 먹으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 창세기 9장 2절에 보면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붙인 이유가 뭐냐? 3절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식물이라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음식물을 말해요. 산 동물이 먹을 물체, 너의 음식물, 양식이 된다고 했어요.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면, 전에는 먹지 말아야 될 고기종류를 이제는 하나님께서 약간 허락을 해줘서 고기까지 먹도록 조치한 거예요. 이 말은 먹는 음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고 계신 거예요. 뭘 먹는지, 뭘 먹지 말아야 되는지를 인간 본인이 입맛에 당기는 대로 자기 맘대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약 때고 구약 때는 그것까지 이미 법으로 규정을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채소만 먹게 되어 있어요. 채소만 먹다가 이제는 고기까지 먹는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법으로 음식물까지 세세하게 규정을 해 준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내가 고기까지 주니 너는 마음껏 먹고 네 자손들 퍼트리라는 목적으로 음식물을 준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간 좋으라고 음식을 준 게 아니고 음식 자체를 위해서, 하나님이 제시한 음식의 본질을 위해서 노아는 존재해야 되는 겁니다. 노아가 먹고 살기위해서 음식을 고기까지 추가해서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추가된 음식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는 채소뿐만 아니고 고기까지 반드시 먹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물론 신약에 오면 입맛 당기는 대로 다 먹어도 되지요. 이제는 먹는 음식가지고 탓할 수 있는 수준은 신약에 오면 초월이 되고 그런 수준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층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노아는 신약에 오기까지의 초창기의 긴 그림자에 불과하거든요.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이 개고기를 먹든지, 번데기를 먹든지 뭐든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신분적인 성도가 될 때, 뭐든지 이제는 먹는 것은 탓하지 않는다는 그 본질, 어떻게 해서 그 본질을 얻게 되었고 그 본질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처음 자리가 노아의 자리입니다.
어렵지요? 이걸 규명해야 돼요. 이걸 규명 안하면, 하나님께서 노아 밥 먹여주려고 이렇게 고기까지 먹게 했다고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무슨 의미가 날라 가버리는가? 집단죽음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렇게 노아에게 고기를 못 먹여서 주께서 안달이 났으면 아예 처음부터 그 홍수 이전부터 고기 팍팍 먹여주지 홍수심판이 뭐 길래 홍수심판 이후여야만 고기가 허락이 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이걸 드러내려면 사람 위해서 음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음식 자체 안에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예수님의 본질을 음식에 집어넣고 그 음식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노아심판은 어떻게 반복되어서 본격화 되는지를 밝혀야 됩니다. 노아심판은 죄 때문이거든요. 죄가 예수님오실 때까지 반복하면서 그 죄의 깊이를 더하고 있느냐를 음식을 가지고 이끌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음식을 가지고 죄의 깊이를 이끌어내겠다고 할 때 제일먼저 뭘 생각해야 되는가? 제일먼저 생각할 것은, 출애굽기 34장 28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영덕대게, 비싸기도 하지만 참 맛있습니다. 영덕대게 먹으렵니까, 아예 안 먹고 사는 것이 낫습니까?
아예 안 먹어도 사는 그것이 좋습니까, 꼭 맛있는 것을 챙겨야 사는 것, 어느 쪽이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이냐 하는 겁니다. 영덕대게는 땅에 났습니다. 노아홍수 이후에 땅에서 난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심지어 물마저 마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이 모델이냐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17장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있었는데 그 때 베드로가 멋도 모르고 펜션 세 채 지어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놓고 베드로에 대해서, 베드로 저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어제 부산에서도 그런 강의를 했는데, 인간이 내뱉는 말은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의 무의식과 욕망이 인간의 혀를 통해서 대신 말해주는 겁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내 속의 다른 세력이 내 혀를 통해서 마구 나오는 거예요. 내가 말을 해놓고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그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이 땅의 본성과 악의 본성, 죄의 본성을 그냥 말로 토해놓을 뿐입니다. 그게 예수님한테 먹히겠습니까? 말 잘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예수 믿습니다, 하는 말을 또박또박 한다고 해서 구원해 주실까요? 그런 것 없습니다. 그것은 집단죽음을 근거로 해요. 노아홍수 이전에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았습니다. 먹고 마셨는데 다 집단죽음 당했어요.
상한 음식 먹어서가 아닙니다. 전혀 그들이 먹은 음식과 상관없이 물에 의해서 죽은 겁니다. 그 말은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은 너의 개인적인 네 중심이기에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을 그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한 용도로서 세상과 관계를 맺고 관여한 거예요. 이제 그 관계가 역전되지요. 내가 살기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음식물 하나하나 속에는 심판 받아야 마땅함의 본질과 내용이 포함된 음식물로 깔려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제 고기까지 확장시켜서 신약시대까지 이끌고 가겠다는 겁니다.
이끌고 가면서 군데군데에, 곧 모세 같은 경우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사는 모델케이스를 걸어둔 거예요. 모세가 그렇게 된 것은 산위에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는 뭐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고기도 필요 없고, 채소도 필요 없고, 겉절이, 삼겹살, 다 필요 없어요.
그거 먹고 사는 것은 생존의 문제지 생명의 문제는 아닙니다. “생존하고자 하느냐? 그러면 너는 이미 집단죽음 안에 포함된 사람이다.”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먹는 문제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창세기 3장부터 있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따먹고 영생할까봐서 일부러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겁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생명나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조건이 안 맞아요.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을 얻으려면 조건이 있어야 되는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선악을 알지 말아야 된다는 조건하에 영생을 먹게 되어있어요. 선악을 알았기에 생명나무실과를 먹지 못한다면 말을 바꿔봅시다.
생명나무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선악을 아는 것에 대해서 상관없는 존재가 될 때에만 생명나무과실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을 아는 자는 선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선악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생명나무과실을 따먹고 그 때는 천국 가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제가 요령하나, 팁 하나 알려드린 거예요. 천국의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는 방법은 선악을 아는 그것에서 스스로 자멸하는 거예요. 선한 사람은 천국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 간다는 그 지식에 의해서 스스로 자멸하고, 자멸한다는 말은 뭐냐? 심판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없애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생명나무를 차단시키고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둬서 그 길을 차단시키는 것이지 생명나무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거든요.
사라지지 않는다면 생명나무는 피조세계에 속하고 그 생명나무의 의미는 결국 완성을 봐야 됩니다. 그 완성, 요한계시록 22장에 생명나무과실이 있어요. 그러면 생명나무가 확대되면서 무슨 조건도 같이 확대가 되느냐 하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도 생명나무를 따먹을 조건을 목적으로 새로운 인간성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 지상에 탄생을 해야 되는 거지요.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 탄생된 여인의 후손이 갖고 있는 이 땅에서의 본질이 뭐냐? “선악을 아느냐? 너는 죽었어. 선악을 알아? 너는 심판받아.”
심판을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런 저주를 내립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땅에서는 저주를 실컷 받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는 죽어야 됩니다. 성도도요? 성도도 죽어야지요. 성도도 심판받아야 돼요.
조건이 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받아야 돼요. 혼자 심판받는 것은 소용없고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야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껴안고요. 그러면 혼자 죽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함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주께서 찾아와야 되지요. 주께서 어떻게 찾아옵니까? 양식을 통해서 양식의 조항과 예식의 율법을 통해서 노아 때 찾아오는 겁니다. 모세 때는 모세의 방식으로. 그걸 노아 때는 노아언약, 모세 때는 모세언약, 다윗 때는 다윗언약, 그리고 신약 때는 새 언약,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나름대로 친절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래도 못 알아듣겠다면 참 희한해요. 음식 먹고 죽자 그 말입니다. 아침 먹고 죽고, 점심 먹고 죽고, 저녁 먹고 죽고, 하루 삼시세끼 먹고 죽자 그 말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아담에게, 너는 이 땅에서 생명나무의 가치와 의미를 지상에까지 확대시키는 조건하에 너는 이 땅에서 실컷 고생하면서 그 땅에 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사는데 그 음식은 채소와 관련된 겁니다.
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니까. 고기가 아직 허락되지 않았어요. 창세기 3장 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과 그 후손들이 밭의 채소하나 먹는 것도 수월하게 먹을 수 없고 아픔과 고통을 맛봐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9장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고기를 통해서 그들은 채소만 먹으면서 얻었던 아픔 못지않게 이제는 짐승을 잡으면서, 사냥을 하면서, 날짐승 잡으면서 더 크고 심한 고통과 아픔을 인생은 겪어야 되는 겁니다.
심판의 반복성입니다. 철저하게 심판받아야 돼요.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내가 선악을 안다는 뜻은 내가 선악을 몰라야 된다는 뜻이거든요. 몰라야 되는데 알았다는 그 말입니다. 선악을 몰라야 되는데 알았다는 말은 그 때부터 내 중심으로 돌아온 거예요. 나 사는 중심으로 우주를 생각하는 겁니다. 나 어떻게 구원받지, 이렇게 이기주의적 구원론, 구원중심으로. 그래서 구원파가 문제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구원파만 이단이겠어요? 개혁주의도 이단이에요. 천주교도 이단이고. 전부 다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겁니다. 죽으라는데 왜 살아요? “주께서 양식을 주시기 바랍니다.” 양식 먹고 살겠다는 거예요. 일용할 양식, 광야에서 주신 만나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지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만나먹고 다 죽었습니다. 만나가 비타민종류가 아니고 로열젤리 아니에요. 얼마나 이게 모순이 돼요? 양식을 먹어야 사는 것을 알면서도 양식을 얻기 위해서 내 에너지까지 소비하면서 죽어가고 있으니까 이게 모순 아닙니까?
살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사니까요. 이게 사는 것인지 죽는 것인지 분간도 안돼요. 한푼 두푼 벌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스트레스 받아서 속에는 암세포가 번지고 있으면서도 밥 먹고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기껏 살아봐야 97세. 오늘 손님이 오셨는데 경산의 외숙모님이 오셨어요. 올해 97세입니다. 우리 어머니 올케거든요. 어머니는 정신이 없으셔서 가고 난 뒤에 웬 노인네가 왔다 갔느냐고 해요. 그 분 소원이 우리 어머니 만나는 거예요. 참 정정하세요. 정정하니 뭐합니까? 그 정정함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거든요.
하나님께서 음식물을 식물에서 동물까지 추가할 때는 방향성을 지니는 겁니다. 이 동물을 잡으면서 전보다 더욱더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 동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피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9장 5절에 나옵니다. 피까지 접근하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가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 식물은 백날 해봐야 피 안 나옵니다.
그런데 동물을 먹는 순간 손에 피를 묻히게 돼 있어요. 그 피, 내가 살기 위해서 흘린 그 피가 나를 죽게 하는 피요, 도리어 나를 살게 하는 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음식 안에 그리스도가 담겨 있다고 보면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음식 안에 그리스도가 담겨 있고 음식을 먹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식이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먹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우리가 먹지만 먹어서 된 우리를 도리어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먹는 거예요. 이런 비유에 적합한 것은 통 오리 숯불구이입니다. 저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억지로 끌려가서 먹은 적이 있어요. 요리된 요리를 쫙 쪼개면 그 안에 쌀, 잡곡, 땅콩, 그런 것들이 다 들어 있어요. 삼계탕도 비슷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피와 고통을 먹게 해놓고 피를 먹은 우리를 하나님의 응식, 제사장의 양식, 하나님이 먹는 양식이 되게 하십니다. 그 양식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으로 받으십니다. 그래서 양식, 음식이라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의미고 하나님의 의미는 뭐냐? 너와 내가 상관이 있다, 서로 통하는 사이라는 것으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거예요.
누구든지 내 안에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서로 통하는 사이라는 뜻입니다. 주 안에서, 주께서 지정하신 자리에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너는 나와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결국 모세가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말은,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지상에서 먹는 물,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요.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양식이 되기 때문에.
그걸 지상에서 재현한 것이 제사음식이에요. 뭐든지 먹어라. 다만 뭐든지 먹어도 죄가 안 된다는 것, 죄 문제는 이미 예수님 쪽에서 해결했다는 것이 아까 본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이에요. 개고기든 소고기든 뭐든지 먹어라. 먹는 것 가지고는 안 따지겠다. 천국, 영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에 대해서 선악과에 대해서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음식을 먹으라, 먹지 말라, 여기서는 선악이 나와요. 하지만 신약에서는 선악에 대해서 따지지 않는 거예요. 네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든지 관계하지 않아요. 술 먹고 하는 소리가, 민중은 개나 돼지라고 백날 해도 천국 갈 사람은 갑니다.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민중들은 개나 소 같아서 언론으로 조작하면 시간 가면 다 잊어버린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쨌든지 간에 선악의 행함과 영생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오히려 아직도 내 행함을 주장한다면 우리 중심에 이기주의적구원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를 해버려요. 이런 인간은 집단 죽음이라는 의미, 취지를 삭제시키고 도리어 훼방하고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먹음으로써 거기에 아픔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지요. 이사야 11장 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 이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 30절에 보면,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처음 창조할 때 사자도 풀 먹고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이후에 심판을 반복하기 위해서,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네가 죽어 마땅한 것을. 누구를 포함해서? 너를 대표해서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찢기고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든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천국은 아픔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어요. 로마서 8장 20절에 보면 방금 제가 했던 말이 나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두자로 하면 ‘곡성(哭聲)’입니다. 이 땅은 지옥입니다. 곡성입니다. 이 땅은 이유도 모른 채 무조건 아파야 되고 고통 해야 돼요.
가락교회 강의하러 갔는데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 나오는 젊은 애들이 취직이 안 되어서 고민입니다.” 곡성입니다. 강의시간에 나와요. 취직 왜 하려고 하는데? 취직은 왜 해야 되는데? 살아야 되기에. 왜 살아야 되는데? 노아 홍수가 있는데 왜 살아야 되는데?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였는데?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 계시고 주님 계시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집어넣은 코드가 있어요. 영생의 코드, 생명나무의 코드를 위해서 나는 이 땅에서 취직도 못하고, 아파해야 되고, 고통 해야 돼요.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고마워지고,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의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는 그 세계가 진짜 주께서 영생과 더불어 우리에게 제공하는 세계입니다.
자꾸 이 땅에서 눌러앉아서 이 땅에서 출세하려고 하고, 이 땅에 눌러앉으려고 하지마세요. 노인들의 고통은 하나밖에 없어요. 몸이 안 따라준다는 겁니다. 노인들의 두 번째 고통이 뭐냐? 몸이 내 뜻대로 따라줘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아직도 젊을 때의 고집이 있어서 몸이 내 맘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첫 번째는, 몸이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 두 번째 고통은, 몸이 내 맘대로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 몸은 죽음을 언급하기 위해서 강제로 이만큼 살아오게 하신 거예요. 네 몸은 너를 힘들게 할 것이다. 따라서 힘들게 하는 가운데서 네 잘난 체하지 말고, 너의 정당화하지 말고, 나는 죽어 마땅함을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하신 몸 앞에서, 주께서 죽여주신다는 사실, 주와 양식관계, 주님의 그 십자가를 먹고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이 몸조차도 주께서 받으시는 양식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내포되어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코드, 하나님의 언약의 원칙, 복음 중심으로 환경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자꾸 잊어버립니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님을 갈수록 더 확실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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