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4강-나타난 의(1;17)이근호121021

아빠와 함께 2013. 2. 7. 11:00

나타난 의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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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2-10-21 13:20 
나타난 의

2012년 10월 21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7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의 글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와 거리가 먼 내용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말씀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이는 결코 교회를 키워보겠다는 의도가 없이 글을 쓴다는 말입니다. 교회 규모보다 진리가 사도에게는 우선됩니다. 따라서 진리를 거절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천국에 초대되지 못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도의 편지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러합니다. 복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결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지 못한 다는 겁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의’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런 능력을 입을 자들도 기적적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무엇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대신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만들어내는 의 말입니다. 이런 의를 만들어내는 최고의 전문가는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 힘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는 인간 대 인간의 사회 내에서는 인정받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는 영 딴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받지를 않습니다. 인간들 자기네들 끼리 되게 경건하고 거룩하고 고상해보여도 그저 인간들이 자아내는 종교 이벤트나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다 소용없는 짓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면서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신에 대한 아이디어는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친히 만들어서 그 나라를 통해서만 유일한 하나님과 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출 20:3) 그만큼 인간들은 각종 각가지 신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신을 신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걷어치우시는 이유는, 인간은 직접적으로 신을 찾을 존재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았다는 율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던 그 이스라엘 나라가 도리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주도적인 작업에 의해서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참 하나님과 마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바리새인도 나름대로 믿는 생활을 한다고 우겼지만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가 등장하면서 그것마저도 행함에 속하는 요소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예수님 십자가에는 모든 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죄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위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본색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을 제대로 본색이 드러난 경우가 창세기 4장의 경우입니다. 형은 농사를 지었고 동생은 양을 키웠습니다. 여기까지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라는 형식으로 신과 결부지을 때, 형은 동생을 죽이고 맙니다.

이는 가인이라는 존재가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권세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이냐를 규명할 때는 인간의 행동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실존도 같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악의 사주와 죄의 힘 안에서 인간들은 평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모습으로 등장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평범하고 조용하는 자기 업무만 하면서 사는 자들도 실은 악의 힘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십자가를 통해서 발각됩니다. 지금도 훈련소에서 신병훈련받는 자들이나 지금 이 시간도 정비소에서 차 고쳐주고 있는 사람도 악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아주 점잖은 사람마저 하나님마저 살해할 살인자로서 그동안 살아오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한 것도 당연히 신심적 활동에 속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행함으로 행함의 세계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성품은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에서 행함입니다. 둘 째는 행함에서 믿음입니다. 셋째는 행함에서 행함입니다. 네 째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믿음에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경우는, 처음 믿을 때는 아무런 의도나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가, 믿었다고 여긴 후로는 이 믿음을 키우기 위해 자기 행함을 가동시킨 경우를 말합니다. 둘 째는 ‘행함에서 믿음’은 처음부터 목적이 있고 노림수가 있습니다. 즉 믿을 만한 것을 골라잡아 믿기 위해 가시적인 믿음의 성과를 장만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종교적 행함이 어떤 기적을 유발시킬 것인가를 놓고 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가족이 구원받았다든지 하는 각종 간증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은 자신이 믿고 싶고, 갖고 싶어하는 것을 갖기 위해 ‘믿음’이나 ‘행함’이라는 표현을 동원시키게 됩니다.

‘행함에서 행함’이란 위의 두 가지 경우를 합쳐서 말하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가능성의 성과를 얻을 때까지 계속 행함을 가동시킨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 ‘믿음으로 믿음’에 해당되는 경우는 요셉과 요나의 경우를 통해서 알려집니다.

시편 105:17-19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람입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벌칙을 스스로 자기에게 가합니다.

“나를 바다에 빠뜨려라”해 놓고서는 요나 2:3에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마태복음 16:24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당장 죽어도 마땅한 죄인으로 인정하면서 십자가를 지라는 겁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믿음에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행함, 즉 예수님의 생애를 경유하는 인생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생애 안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용서하심과 피흘리심에만 주목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는 자신의 믿음에 주목하지 말고,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존재함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0-22 17:02 
4강-롬1장 17(나타난 의)1210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1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3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뭔가 사람들을 유인할 만한, 납득될만한, 사람들이 흔히 시장 통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문장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로마서보다 더 어려운 편지를 봤습니까? 내용이 어려워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어렵게 해서 몇 명이나 건지겠습니까? 오늘날 목사들은 재주도 좋아요.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 남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지 이것이 지금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이것을 지금 뉴스시간에 이야기하면 5천만 국민 가운데 누가 알아들을 수가 있겠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억지로 풀이를 한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안 나타났으면 믿음에서 l믿음으로 이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믿음으로 해서 믿음에 이르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달리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여호와를 믿고 뭘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의 나라인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뭘 자꾸 믿어요. 신을 믿든 뭘 믿는데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경우에 국한에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끼리 종교적인 경건과 거룩, 여기에 어떤 작업을 걸고 교육시키고 세뇌를 시켜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꾀이겠다는 것이 아니고 나가라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해서 오직 의인되는 그 믿음은 인간의 타고난 재주에서 나오는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경우에만 생겨나는 그 믿음이 그 사람을 의인되게 만드는 믿음이고 그 사람만이 천국에 소복이 모인다는 이야기거든요. 항상 성경 본문 볼 때에 ‘내가 어떻게 실력을 발휘하면 됩니까, 내가 어떻게 능력을 발휘하면 됩니까?’ 항상 내 쪽에서 출발하던 출발점이 졸지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그 출발점을 나타난 하나님의 의부터 출발을 해 줘야 믿음이지 너부터 끄집어내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에요.
 
 

우리가 버스 탈 때 운전기사를 믿고, 비행기 탈 때는 파일럿을 믿고, 대통령을 믿고, 자식 믿고, 남편 믿고, 아내 믿고, 목사를 믿고,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믿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은 말짱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의하면 그것은 행함이라는 범주에 속한 항목들로서 포함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몽땅 그 믿음이라고 한 그 믿음이 행함으로 처리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행함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천국에 필요한 하나님의 의에는 이르지 못한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말입니다. ‘나가라!’ 부르심을 입은 자, 로마서 1장 7절……,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때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외에는 나가주세요, 그 말이에요. 불러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온 사람들은 나가주세요, 그 말입니다. 사실은 교회 앞에 뭘 붙여야 돼요. ‘나가주세요.’ 이 집 좀 비워주세요, ‘이 집을 채우라.’가 아니라 나가주세요!
 
 

천국에 결국 못갈 사람들 오지 마세요, 이래야 이것이 교회입니다. 대학교 때 보면 간식거리 살 때 사다리 타는 게임 있잖아요. 걸린 사람 돈 내서 사오게 하는 것인데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사다리를 백날 타도 항상 지옥에 도달 됩니다. 어떤 사다리를 타도. ‘나는 법과대학에 가겠다, 나는 의대를 가겠다, 나는 신과대학 가겠다.’ 어떤 사다리를 타도 나중에는 전부 다 지옥에서 만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인간에서 출발해서 인간으로 나오는 것은 결국 인간은 저주받아야 될 존재거든요.
 
 

로마서 1장 7절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만 혜택이 주어진다는 이 내용만 장난이 아니고 농담이 아니듯이 사실은 성경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인간이 인간다운 행동을 최초로 보여주는 사건이 나와요.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살인사건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 인간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힘에 둘러싸여 있는가를, 인간이 뭐냐고 단독으로 끄집어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아우라, 인간을 포위하고 있는, 인간이 지금 누구 지시를 받고 살며 어떤 힘에 의해서 눌려서 살고 있으며 누구의 사주를 받고 살아가는가를, 인간 단독적으로 말고 인간과 환경을 같이 보여줘서 인간의 진솔한 면을 보여주는 일은 살인사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여서 나타난 현장은 살인사건이었으며 거기서 나타난 것은 피, 땅에 피를 흘린 것이었습니다. 그것 말고 인간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그 이야기부터 나온 거예요. 형이 동생을 죽여서 살해했다. 그런데 형이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 아니고 형에게 죄가 덮어졌다. 그게 인간이다. 그게 인간이라면 우리 속에 동일하게 살해충동, 살인본능, 남을 못 죽이면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식으로, 남 못 죽여서 환장해서 자살할 정도로 사람은 뭔가 살인을 통해서 자신의 본색이 말끔하게 다 노출되는 식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그렇게 놓여 있습니다.
 
 

죽음이죠, 살인이라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인간을 말한다는 것은 엄청난 반칙입니다. 그것은 사기에 해당되지요. 지난 금요일 저녁 7시에 결혼식이 있었어요. 평일에 그것도 밤에 하는 결혼식에는 처음 가 봤네요. 전혀 안 믿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하면 욕을 하고 반발이 나올 것이 빤한 데 주례는 해야 되겠고, 그래서 마지막에 집어넣은 이야기가 이겁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결혼식이라는 파티는 오늘로 끝났으니 이제 결혼생활에 들어가는데 마지막에 제가 집어넣은 것은 “결혼도 전부 다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용감하게는 못하고……, 그곳 분위기도 있어서 배려도 해야 되니까. ‘결혼, 결국 사라진다는 것.’ 사라지니까 결혼 생활 통해서 사랑 하나 배우라, 사랑이 죽음도 이기고 사랑이 천국을 가게 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실습장소로서 결혼생활을 하라고 주례를 했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느 장소이건 간에 죽음을 배제하고서는 아무것도 될 것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타난 의’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이 ‘자, 이게 나타난 의야.’라고 코앞에 내놓은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언급하는 이유는 창세기 4장의 환경이 살인이라는 것으로 조성되어 있듯이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뭔가 살인, 죽음, 이런 분위기 안에서 무심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논산 훈련소에서 신병훈련 받고 있는 사람들, 이 시간에는 초코파이 먹으로 교회 갔을 시간이지만, 평일에 훈련받고 있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훈련받고 있는 자기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지금도 정비소에서 정비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어떤 의미가 있겠어요?
 
 

아무 의미 없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기가 평소에 하던 일을 그냥 하는 거예요. 아벨은 양을 쳤을 뿐이고 가인은 그냥 농사를 지었을 뿐입니다. 농사짓고 양을 칠 때는 둘 다 정상적인 사람이었어요. 스스로 봐도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가인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아벨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라는 하나님과 관련된, 신과 관련된 일이 벌어지니까 그 때 그만 가인이 자기 동생을 들에 나가서 죽이잖아요.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농사짓는 것과 양치는 것은 각자 할 일 하면 되는 것이니까 이것은 신당동떡볶이처럼 원조싸움 할 일도 아니잖아요. 그냥 각자 자기 직업인데 자기 직업이라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인간의 진솔한 본능이라 하는 것은 신 앞에서 자기가 인정받지 못할 때,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표면화 될 때 인간은 비로소 감추어진 신에 대한 복수심, 신에 대한 분노를 자제할 수 없도록 폭발시키는 겁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려놓고 살인해 버리는 그 가인의 모습, 그게 성경에 왜 기록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늘 성경 본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종교적인 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고 헛수고였다는 겁니다. 자기의 껍데기를 마치 잘난 것처럼 위장하는 위장술의 일종이 뭐냐, 교회 다니기, 하나님 믿기, 예수 믿기, 성경말씀대로 살기, 전부 다 그런 거예요.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할 때 자꾸 놓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반드시 그 배경에 이스라엘 역사가 깔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든 것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지 이스라엘을 배제하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저 여기 왔습니다. 저를 알아주세요.’ 이런 식으로 구원받는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만들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 20:3)
 
 

그 말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수의 신들을 창안할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신들이 신들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사다리 타기라는 말이지요. 올라가 봐야 거기서 염라대왕 만나고 올라가 봐야 이상한 신이나 만난다는 말이지요. 지옥을 만나요. 진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계시를 해 줘야 하는데 먼저 계시를 해 준 민족이 따로 있어요. 대한민국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그래서 구약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진짜 하나님은 이미 자기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 외에 다른 쪽으로는 하나님께 올수 없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이스라엘이 자기가 믿는 여호와한테 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놓치면 안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부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택하신 백성이고 거룩한 민족이고 언약의 백성들이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그렇게 명칭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자부를 했습니다. 멸망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예언했습니다. ‘너희들은 멸망한다. 너희들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믿게 되어 있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야.’라고 예고를 했건만 신명기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헛소리로 들은 거예요.
 
 

‘설마, 자기가 만든 자기 백성을 자진해서 뭉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닐걸?’ 라고 스스로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 믿는 나라 망했습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서 감지를 해야 돼요. 뭐가 잘못된 겁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끝나면 안돼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로움.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로움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름대로 챙긴답시고 열심히 챙겨봤습니다. 십일조 하라고 해서 십일조를 했고 안식일 지키라고 해서 안식일 지켰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지탱한다는 투톱이 이거잖아요.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것은 주일 지키는 것과 십일조, 이것으로 돈 모으는 두 가지 말고 뭐가 있습니까? 그걸 이미 바리새인들이 열심히 했다 이 말이지요. 그 바리새인중이 가장 완벽한 최고의 바리새인……,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해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의를 바리새인들이 행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 누구냐,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갈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 지키려고 한 모든 것, 교회 와서 목사 말 듣고 열심히 지키는 것, 그것은 전혀 하나님께서 원한 바도 아니고,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을 뿐이고, 자기가 자기행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어떤 자부심을 느끼는 종류지 전혀 하나님이 원하는 바는 아닌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정성 다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자기 맘대로 지어낸 노력과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것으로 신에게 바친다고 나름대로 다 바치는 거예요. 행함도 바치고, 헌금도 바치고,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고, 교회 부흥에도 애쓰고, 목사도 섬기고, 다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그동안 계속해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고 예수님께 분노하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는 자질과 능력과 경력(스펙)만 쌓아온 거예요.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나를 천국에 안 보내주면 섭섭하지.’ 하는 오기와 자기 의와 자존심만 계속해서 교회에서 쌓아온 거예요. 대표자로 그것을 사울이라는 사람이 했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공격할 때 주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하는 모든 짓은 나를 죽이고 또 죽이는 짓밖에 안 된다. 너는 나름대로 그동안 여호와 믿고 말씀대로 살았다, 하는 그 모든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나를 더 괴롭게 하는 짓들이 쌓이는 것 밖에 안’ 돼요. 안 해도 구원받는데 왜 하느냐, 그 말입니다.
 
 

교회 충성, 봉사, 헌금 안 해도 구원받는데 주일성수, 십일조 안 해도 구원 받는데 구태여 그것을 하고자 하는 그 의도가 뭐냐, 그 말입니다. 그게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전에 제가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 제발 이혼해도 교회 나오시라고. 어제 이혼한 것 하고 오늘 교회 나오는 것 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왜 자랑거리가 있을 경우에만 교회 나오느냐, 그 말입니다. 왜 남한테 기죽지 않을 것이 있을 경우에만 나오느냐, 그 말입니다. 평소에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게 바로 가인이에요. ‘하나님! 아벨이 낫습니까, 내가 낫습니까?’ 결국 최초로 보여준 인간의 행위는 살인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칼 쥐고 남을 죽이지 않더라도 ‘남을 미워하면 그 자체로 살인죄다.’(마 5:21-22, 요일 3:15) 네가 보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는 것과 차원이 달라요. 우리는 꼭 흉기를 들고 설쳐야 그것이 살인이고 그냥 남 미워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기어이 우기는 것이 우리의 고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만고만한 우리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고 나온 하나의 속임수이며 사기이고 정말 우리가 봐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거예요. 길가는 여자를 보고 음란을 품었다, ‘휴, 간음을 할 뻔했다.’ 간음을 할 뻔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간음을 한 거예요.
 
 

고아원에 쌀 한가마니 갖다 주고 ‘내가 입 다물어야지. 착한일 한티 안내야지.’ 그게 입 다문다고 됩니까? 성경에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잘라내든지 깁스를 하든지 해야 돼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역량 것 할 수 있는 차원에 따라서 조작을 합니까? 구제하고 섬기고 하나님 찬양하는 이것은 이미 멸망 받은 이스라엘, 우리 선배들이 다 한 짓이에요. 예배당 세워서 예배하고 제사하고 절기 만들어서 지키고, 이런 것은 선배들이 다 했다는 말이지요. 다 했는데도 망했잖아요.
 
 

한 번 해 보라는 말이지요. 해 보면 너에게서 나온 어떤 짓거리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바탕이 썩었기에. 근본자체가 썩었기에 밖에 들어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겁니다. 주보 뒤에 마가복음 7장 21절 말씀을 적어 놓았어요. “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7:20-23)

이 리스트에 도대체 몇 가지가 나오는 겁니까?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이 말은 내가 더럽다, 안 더럽다고 내가 측정하기 이 전에 우리는 죄가 우리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우리는 죄가 만들기 때문에 평생을 살면서 계속해서 죄가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느냐하면, 계속해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고 영광되지 못한다는 것을 까발리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다니다가 교회에 나왔다, 그분이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의 능력을 받게 되면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 집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아, 내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구나, 영광이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이것을 계속해서 증명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그런 것을 썼습니다. 우리는 죽지 말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된다고 했어요. 절대로 자살하지 말고 어떤 경우라도 살아남아야 우리가 죽음의 위력, 죄의 위력을 체험할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죽으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그 모습 보면서 ‘아, 궁극적으로 우리는 나만 사랑하고 나 외에 누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 됩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냐, 나냐?’ 둘 중에 고르라고 하면 우리는 나를 선택하지 예수를 선택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전부다 거짓입니다. 예수 사랑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에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 말은 몇 가지 요소가 따라붙는 거예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음으로 행함에 이르는 것도 가짜고 행함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도 가짜고 행함에서 행함으로 이르는 것도 가짜라는 거예요.
 
 

너무 빨리해서 못 들었으면 다시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믿음으로 행함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도 인정하지 않고, 행함에서 행함으로 이르는 것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만 인정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생적으로 우리 속에는 없다는 겁니다. 없으니까 자생적으로 우리 속에서는 나오는 것은 뭐냐, 믿음으로 행함에 이르는 것과 행함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과 행함으로 행함에 이르는 것, 기껏 이것밖에 나오지를 않아요.
 
 

세 가지를 들었는데 그 세 가지의 적절한 예를 들겠습니다. 처음에 믿음으로 행함에 이르는 것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나와서 십자가 이야기를 듣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아, 내가 평생 잘못 살았구나. 나는 나만 돛대고 나만 최고인줄 알고 살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사랑을 보여주시니 그동안 나는 하나님 없이 살았구나. 내가 죽어 마땅하고 지옥가야 마땅해. 이제 앞으로 천국가야지. 이제부터 예수 잘 믿을 거야.’라고 시작할 때 이것은 어떤 노림수가 노림수가 없이 순수하게 믿음으로 했어요.
 
 

믿음으로 시작을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어? 야, 이게 믿음으로 했는데 믿음에는 어떤 가시적인 효과가 성과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왕 믿는 거 가만 보니까 교인 숫자가 얼마 되지를 않아요. 그러면 노인정에 가서 돈 봉투 좀 넣어줘서 교인들 모으고, 자기 믿음 시험해 본다고 해서 감기 걸린 조카 위해 기도해놓고 전화해서 “병 나았지?” 하는 거예요. 내가 잘 믿는 믿음인지 아닌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만 한 확증을 받고 싶은 것. 그것을 위해서는 나쁜 일은 줄이고 성경말씀대로 착한 일만 골라서 해가지고 그 착한 일이 쌓여서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운과 기적이 되어서 나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보상, 상급이 주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겠다는 심보, 그것이 믿음으로 시작해서 행함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거, 자기 자존심이에요.
 
 

‘내가 새벽기도 연속으로 했더니 교회 부흥되었잖아.’ 이것은 교회 부흥이라는 그 성과가 있으니까 나는 믿는 사람 맞다는 거예요. 내가 쉬지 않고 기도했더니 교회 안 나오는 남편이 교회 나왔으니까 이것도 내 중보기도의 효과라는 겁니다. 딸이 시집도 안가고 취직도 안하고 있어서 골치 아플 때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그동안 안했던 십일조도 하면서 스펙을 쌓았더니 하나님이 딸이 좋은 남자 만나게 해주니 다 주의 은혜고 역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군요. 이렇게 살아계시는 것도 모르고 그동안 기도에 소홀한 것을 용서해주옵소서. 주여, 믿지 못하고 감사헌금 줄인 것을 용서해 달라.’ 이런 식으로 하고 싶은 것, 그것이 믿음으로 행함에 나간 거예요. 그거 가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 받고, 이것이 사기입니다. 그런 것이 없어요. 하늘나라 상급에 차등이 없어요. 하늘나라 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다 주어지는 상이고 행함으로 주어지는 상급의 차등이 없어요. 그런 보너스 믿고 괜히 경쟁에 나서지 마세요. 그것은 사기꾼한데 말려든 겁니다. 믿음에서 행함은 목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순수했습니다. 뭔가 목적이나 노림수가 없었는데 두 번째로 행함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것은 초반부터 노림수를 가지고 행동에 나서는 거예요. ‘내가 교회 와서 열심히 봉사하게 되면 안 믿는 남편이 혹시나 개과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해서 개차반 같은 남편이 못하는 몫까지 대신해서 내가 천사가 되어서 이 몸 바치겠습니다.’ 하는 노림수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해서 어떤 성과가 있으면 그 성과를 믿게 되는 거예요. 둘 다 비슷하기는 한데 처음경우는 순수한 면이 있다가 나중에 버렸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거래와 흥정에 나서는 거예요. ‘이만큼 해줄 테니 하나님도 양심 있으면 나한테 이만큼 받고 내가 아쉬운 것을 이만큼 채워주시면 하나님 앞에 내가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뭔가 이런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행함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거예요. 공부를 못하는 애를 나중에 판사 시키려면 철없는 애 대신 내 몸 하나 바쳐서 애가 잘된다는 식, 자기가 무슨 논개도 아니고. 이것은 자기 행함의 업적을 자기가 챙기겠다는 것인데 결국 마지막에 그것을 믿겠다는 거예요. 그 안을 뜯어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수고했고, 노력했고, 고생했고, 충성 바쳤고, 찬양했고,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자기의 노력을 자기가 믿는 것,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가 예수 잘 믿는다는 그것을 자기가 믿는 거예요. 세 번째, 행함에서 행함에 이른다는 것은 앞의 두 경우를 총괄적으로 합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믿은 적이 없어요. 왜, 믿음은 은혜로 와야 되는데 은혜가 아니라 행함부터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행함이고 다 행함이에요. 처음 것과 두 번째 것을 더하기 하면 세 번째가 나와요. ‘행함에서 행함으로.’ 아까 것들은 사도바울이 다 해 봤던 것이거든요. 여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이 말은 완전히 행함이라는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일체 행함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그것을 성경의 예로 들겠습니다. 하나는 요셉, 또 다른 하나는 요나를 들겠습니다. 요셉은 시편 105편에 보면 이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105편 17-20) 여기에 보면 요셉이 요셉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요셉을 요셉 되게 하는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창세전에 있던 계획이 요셉으로 하여금 옥에 갇히게 만들고 수갑 채이게 만들고 발목에 쇠사슬 채이게 만들고 혼이 나고 몸이 상하도록 이끄신 겁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 찾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동방박사는 그냥 별 따라 왔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시작이 인간의 행함이 시작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함이 시작이 될 때 그 관계, 그 파이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은 항상 내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천당 가려고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 오지 않았습니다.’ 항상 출발점을 주님의 말씀 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고백이 바로 말씀에 입각한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기인생은 자기작품이 아니고 말씀이 만든 작품이 요셉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두 번째 예를 들겠습니다. 요나의 예입니다. 요나서 1장과 2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에게서 숨겠다고 배 밑에 숨어 있을 때에 배가 풍랑에 흔들리면서 선장을 비롯한 승객들이 요나를 깨웁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어, 라고 깨울 때에 요나가 내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그 뒤에 나오는 요나의 말이 멋집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주세요.’ 이것은 선장과 승객들이 요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자진해서 자기의 처벌방법을 제시한 겁니다.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거예요.
 
 

요나가 스스로 ‘나 같은 인간은 바다에 빠져 죽어야 됩니다.’ 이 말에서 뭐가 느껴집니까? ‘내 인생은 내가 가꾸어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하고 흥정해서 내가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쏙쏙 뽑아먹는 식의 종교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 식의 신앙은 신앙도 아니고 그것은 노림수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요나가 2장에서 하나님이 나를 바다에 빠트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요나 자기가 스스로 바다에 빠트리라고 해놓고는 다른 소리 하느냐?’ 하는데 딴 소리가 아니고 요나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바다 속에 빠트렸습니다.’
 
 

그러니까 내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의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일에 나를 하나의 종으로 마구 부리고 있습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의 것이 되었다가 태어나서도 주의 것이 되었다가 죽고 난 뒤에도 주의 것이니까 주의 것이 된 사람만 천국에 소복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좀 나가 주세요. 죽어서 좋은데 가려는 사람은 그 나라 못갑니다.
 
 

주님이 무슨 장사를 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돈 받고 축복하는 그런 하나님이 없어요. 예배참석 했다고 해서 축복하는 그런 하나님이 없습니다. 지금 교회 부흥되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교회 부흥되어도 쓰레기장인데 지옥가려고 전세버스 탈 일 있습니까? 말씀이 나를 지금도 이끌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모든 것은 내 자존심, 내 명예와 위신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차원에 속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 남자와 이 여자와 만나서 결혼하게 하고 자식을 낳게 하는 겁니다. 다른 차원에 속한 겁니다. 우리가 교회 올 때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어야 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뿐입니다. 누가 돈 많이 벌었나, 누가 잘났나, 누가 건강한가, 누가 인물 좋은가, 누구자식이 잘 되었나, 그런 것을 비교하고 누가 더 살기 편한가를 내기하고 시합하지만 말씀 앞에서는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타난 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부정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춰져 있어요. 십자가 앞에서는 강도니, 창기니, 살인자니, 이런 요건을 내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십자가 피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직업 같은 차이나 차별 같은 것,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차이 같은 것이 아예 없습니다. 장로냐, 집사냐, 목사냐, 그런 차별이 없어요. 사람은 차이 안 나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차이지려고 하는데 그런 데에 목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뭐 길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가?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행함, 예수님의 생애가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 잘 들으세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 안을 경유하게 됩니다.
 
 

경유한다는 말을 아시지요?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통과하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선물로 우리가 믿게 되면 그때부터 내 인생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생애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 생애 속을 통과하게 됩니다. 통과하게 되면 거기서 자기 의나 자기 행함이나 하는 것은 전혀 그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요나와 요셉의 구약의 이 경우가 이제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의 생애 안으로 전체적으로 일률적으로 하나가 돼버려요. 요나는 배 타고 도망간다고 까불다가 그렇게 되었고 요셉은 꿈꿨다고 까불다가 옥에 갇혔고, 그렇게 각자의 인생이 있지만 신약에 오면 이것이 하나로 통합이 되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성도라면 예수님의 생애를 경유하고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과하는 그 모습을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하나씩 갖고 왔습니까? 다 십자가 지고 왔습니까? 십자가 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더 이상 살 가치도 없다.’는 그런 고백이에요. ‘나 같은 인간이 왜 더 살아야 돼? 살면 살수록 죄만 짓지.’라는 입장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십자가진 것도 자기자랑 되면 곤란합니다. 십자가 목걸이가 달랑달랑, 차에도 달랑달랑.
 
 

십자가 진 것도 자랑거리가 되면 그것은 곤란해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인디언 여자가 가톨릭성인이 되었다고. 이 세상에 성인 없습니다. 죄인밖에 없어요. 죄인을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한 것뿐이에요. 하나님의 의는 내 인생 따로 주님 인생 따로가 아니라 아예 우리가 어디에 한 몸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인생 속에 들어가 버리면 거기서는 계속해서 용서만 주어집니다. 용서와 긍휼과 배려만 주어지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봐. 내가 다 용서할게.’ 그것만 그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랑을 받고 난 뒤에 배울 것은 뭐냐 하면, ‘왜 내가 하는 짓거리가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요건이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받지도 않은 의를 마치 ‘이것은 내거야.’ 하고 나만의 의를 따로 챙겨놓으려는 그 심보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금요일에 주례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남자는 남편자리가 되어야 되고 여자는 끝났고 이제는 아내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남편과 아내자리는 다른 것이 아니고, 둘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자식입니다. 괴물이 하나 등장해요.
 
 

자식이 하나 나오면 이 자식은 연애할 때는 없었던 것이거든요. 이게 툭 튀어나와서 자기 맘 대로라. 밥숟가락에 김치 얹어서 따라가면서 먹여줘도 안 먹겠다고 하니 이런 괴물, 이런 DNA가 어디서 튀어나온 DNA입니까, 이게. 이걸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성인이 되면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이것이 사는 재미인데 자식은 계속 퍼줘도 그것이 불만이라, 계속 달라는 거예요. 결혼을 해도 끝나지 않아요. ‘집 담보로 돈 좀 대출합시다.’ 이렇게 나오고, 계속해서 이렇게 나오니 자식한테 얼마나 퍼줘야 되고 얼마나 해줘야 됩니까?
 
 

그게 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겁니다. 내가 그때 실천 안 되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할 때는 반드시 ‘나는 당신을 조건보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그것을 생활로 보여줘라. 당신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조건보고 결혼한 적이 없어, 그것을 늘 보여주는 결혼생활이 되라.’고. 실상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실행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주례니까 그렇게 해야지요. 당신이 방귀를 뀌든 이를 갈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그런 조건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하는 노래가 있잖아요. 무조건!
 
 

그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릴 때 ‘네가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내가 다 아니까 네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상관없이 내 이 피가 너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의를 챙겨줄 것이다. 이것으로 너의 행함을 부정해버려라.’ 행함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 그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소리 듣고도 돌아서면 또 자기자랑하고 남하고 비교하기에 나서지요.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신부되는 성도의 관계입니다. 기도도 남보다 많이 하려고 들지 말고 헌금도 남보다 많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경쟁적으로 하지 말고 그저 살아가면서 ‘도대체 왜 주님은 나 같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는가?’
 
 

조건 보지 않는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이 있게, 뿌리 깊게 우리를 위에서 받들고 있는가, 그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그 고백 외에 우리가 무슨 다른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원하지도 않은 의를 자칭 의라고 챙기고 있는 우리들, 잘난 체 하려고 챙기는 그것이 악마의 술책이고 악마가 제시한 사기인 것을 왜 우리는 그동안 몰랐습니까? 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자기를 잘해주기를 원하고 자기를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더러운 심보인 것을 깨닫고 십자가 바라보면서 거저 주시는 그 용서만을 자랑할 수 있고 그것만을 내세우고 증거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