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롬1장 14-16(구원의 능력)1210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14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3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4-16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사도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본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여기 아무데도 포함되지 있지 않습니다. 헬라인, 로마인, 유대인 모든 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포함되어 있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런 경우에 사도바울이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다, 는 말은 너희들도 그냥 ‘나는 유대인이다, 헬라인이다, 나는 야만인이다, 나는 지혜롭다, 나는 어리석다.’ 그런데 머물지 말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것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겁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유대인이나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 이런 입장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굳힐 때에,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굳히려고 할 때는 헬라인 틀을 못 벗어나고, 유대인 틀을 못 벗어나고, 야만인 틀을 못 벗어나고, 지혜자라고 우기는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 하는 그 틀을 깨뜨리는 능력, 그 능력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 되겠습니다. 천국의 사람,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나다, 라고 우기면서 살아가는 그 틀이 깨져야 돼요.
깨져야 되는데 그것이 안 깨지니까 문제가 되잖아요. 우리의 모든 능력은 나는 나 되기 위한 능력만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집에 들어오기까지 피곤하게 하는 모든 것은 ‘나, 지혜로워.’ 또는 ‘나, 헬라인이야.’ ‘나는 유대인이야.’ 자기의 자기됨을 구축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 거기에 집중을 시킬 때 나는 나다운 나가 되거든요. 문제는 ‘나는 나다워야 돼.’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 틀을 깨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돼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것. 천국은 복음의 능력이 임해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다움을 자꾸 유지해버리면 그것은 자기 능력이지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자기 능력을 가지고 죽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랑하는 나라에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저주를 받은 자리가 되고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지금 다급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걱정이 되는 겁니다. 왜 너희는 ‘나는 헬라인, 나는 유대인’ 하는 자기 틀에 갇혀 있느냐, 참 답답해 죽겠다는 거지요. 사실은 본인도 그렇게 살아 왔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빚진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빚졌다는 이야기를 왜 하는가? 빚졌다는 말이 상식선에서 우리가 생각해도 복음하고, 빚졌다는 것과 천국하고 별 연관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너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매일같이 지고 있다, 그것을 임 재범씨가 이야기했어요. 노래 가사에 보면 나옵니다.
빚졌다는 말은 내가 아쉬워서 돈을 빌려놓고 갚을 길이 없어서 계속해서 ‘갚아야 되는데, 갚아야 되는데 내가 빚져서 미안합니다.’ 할 경우에나 빚졌다는 말을 하거든요. 내가 돈이 필요하지 않는데 ‘돈 빌려 쓰세요.’ 이래서 빚진 것은 갚을 마음도 안 나고 미안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내가 아쉬울 때 돈을 빌려줬는데 내가 갚을 길이 없어서 안타까울 때 ‘아이고, 내가 빚졌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복음 이야기하면서 왜 모든 사람에게 빚졌다는 용어를 사용하느냐는 말이지요.
그 이유를 밝혀내야 되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 두부공장을 한다 해 봅시다. 두부공장을 하는데 중국산 콩을 쓰는지 어쩐지 맛이 없다고 소비자 불평이 들어왔어요. 그럴 때 그 두부공장 사장이 하는 말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국산 콩을 써야 하는데 중국산 콩을 써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점에 대해서 빚을 졌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에 어떤 점에서만 빚을 진 것이냐 하면, 자기 공장 두부를 애용해 온 소비자에게만 빚을 졌지요. 두부 안 좋아하는 사람들, 두부 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빚을 안 졌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졌다는 말은 사울이라는 사람의 옛날 직업이 두부공장 사장이 아니고 뭔가 전체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어떤 헛소리를 했던 직업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기가 했던 모든 인생살이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내 말을 들으시면 복 받습니다.’라는 사기를 쳐 왔다는 것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들통 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내가 전한 이 소식 들었으면 여러분들은 구원받고 천국 백성 됩니다.’라고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데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전에 내가 날린 멘트가 다 거짓말이었고 사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직업은 어떤 직업이었느냐 하면 보편성, 모든 인간의 직업과 개성과 상관없이 남녀노소 관계없이 보편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어요.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만들 때에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다 효용이 있는 약을 만들기를 원하지만 인간이 완벽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에게는 위장약과 같이 복용하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술과 같이 음용하면 안 된다든지 그런 것이 많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보편성이 떨어지는 거예요. 생리적으로 안 맞으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전에 외쳤던 자신의 모든 발언들은 모든 인간의 조건과 개성과 상관없이 보편성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자기는 그것이 거짓말인줄도 몰랐지요. 자기는 옳은 소리 한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아, 내가 다 사기를 쳤구나. 내가 다 거짓말을 했구나. 아이고,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는 천국을 못 가는데 그래 가지고 천국을 간다고 내가 외쳤습니다. 내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그것이 옳다고 여겼는데 만나고 나니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몽땅 천국가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천국 가는 사람조차 지옥가게 만드는 헛소리들을 그동안 해 왔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심령 적으로 빚진 자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투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했던 그 거짓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로마서의 내용에 나옵니다. 그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교회 출석해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는 겁니다. 전도하면 복 받는다는 겁니다. 선교회비 내면 그것이 선교라는 거예요. 그것이 전부 사기였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는 응답받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헌금하면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하셔서 복을 준다는 겁니다. 전부다 거짓말이었고 사기였습니다.
이것이 왜 거짓말인가? 교회 부흥되는 것이 주의 뜻이라는 이런 것이 다 거짓말이거든요. 왜 그것이 거짓말이었는가, 그 내막을 로마서에 쫙 펼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팔공산을 잘 모르는 외지 사람들에게 팔공산을 그려보라고 하면 팔공산이 보통 산이니까 뾰족하게 그릴 겁니다. 그런데 팔공산에 한두 번 다녀온 대구에 사는 애한테 팔공산 그려보라고 하면 봉우리를 두 개를 그려요. 왜, 동봉이 있고 서봉이 있으니까. 갓 바위까지 가본 애는 그 뒤쪽에 갓 바위까지 그리겠지요.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 세상 사람들 세계를 보는 것은 살면 살수록, 경험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용이 짙어지고 상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산을 그냥 뾰족하게 그리면 ‘그것은 팔공산이 아니야. 팔공산은 봉우리가 두 개 있는 거야.’라고 자기의 경험에 입각해서 ‘너는 아직 미진해. 나는 모자라. 내가 더 똑똑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똑똑한 사람은 지혜로운 자고 팔공산을 그냥 뾰족하게 그리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는 어떤 계급이 있고 어떤 등급이 있어서 똑똑한 사람은 위쪽에, 어리석은 사람은 아래쪽에서 있고 부자들을 위쪽에 있고 가난한 자는 아래쪽에 있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 내에서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가 그것을 도용하고 이용합니다. 경쟁을 유발시키지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래야 납득이 되니까. ‘야, 하나님도 계급을 좋아하시는구나. 하나님도 부자를 좋아하시는구나. 하나님도 열심 내는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이것은 내가 교회 오기 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꼭 같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설교 다시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도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래야 복 받고 이래야 구원받는다고 이야기를 많이 퍼뜨렸어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것이 전부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은 예수님만나고 난 뒤에 뭘 발견했기에 자기가 안다고 여겼던 것이 다 거짓말이었습니까? 사도바울이 자기가 그런 이야기할 때 누구하나 자기에게 반발한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면 누구나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이 짐승이야 아니야? 사람이야 아니야?” “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 둘이 서로 통하는 것이 있겠네.”
그렇게 사람이라면 서로 통하는 상식선에서 이야기를 다 한 겁니다. ‘하나님계시고 말씀 주시고 그 말씀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이것은 상식선에서 다 아는 거예요. 이것은 구태여 교회 안 나와도 ……, 제가 전에 절에 가는 사람들 만나게 되면 뭔가 열심히 보고 외우고 뭔가를 해요.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부 다 옳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욕심을 버려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 부모를 섬겨야 내세까지 좋은데 간다.’ 전부 다 옳은 소리인 거예요. 중국집에 가끔 보면 절에서 붙이라고 준 문장들이 걸려 있어요. 범어사, 무슨 절에서 준 달력도 있고 부적인 듯 부적도 아닌 듯도 하면서 무슨 글자들이 쓰인 것이 걸려 있거든요.
마음을 다스리는 글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 데서 생기느니라.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며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하는 데서 생기느니라.
두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입을 조심하여
실없는 말을 하지 말고
착한 말, 바른 말
부드럽고 고운 말을 할 것이며
몸을 조심하여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
어른을 공경하고
덕 있는 이를 받들며
지혜로운 이를 따르고
모르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라.
오는 것을 거절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내 몸 대우 없음에 바라지 말고
일이 지나갔음에
원망하지 마라.
남을 해하면
마침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재화가 따르느니라.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말을 다 해놓은 거예요. 거기에 보면 ‘십자가에 죽으심’ 이런 것은 없어요. 십자가가 거기 왜 나옵니까? 절에 가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나 사무실에 그런 것이 붙어 있어서 보게 되면 ‘항상 마음을 낮추고……’ 항상 마음을 낮춘 데요, ‘마음을 낮추고 욕심내지 말고, 그러면 그것이 나중에 업으로 쌓여서 복으로 돌아온다.’ 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욕심이라. 복을 노리고 마음을 낮추는 그것도 욕심 아닙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눈을 돌려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상점에 가 봅시다.
가서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뭔가 뉘앙스가 양쪽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절에 가나 교회 가나, 더 나아가서 절에도 안가고 교회도 안가나 인간이 양심적으로 살면 복 받는다는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데 이것을 꼭 교회 가야 알아듣습니까? 가정교육 잘 받으면 다 아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교회 갑니까? 이것은 뭔가 추가적인 행운을 더 얻기 위한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거짓입니다. 거짓말 가지고 장사해 먹은 거예요.
사람이 부자 되는 것은 다 그 사람의 노력 때문에 부자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은 골프를 잘 쳐서 자기 집에 차가 세대라는 겁니다. 그걸 보고 제가 그랬어요. 차가 세대라고 해서 인물은 변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기록된 글이 로마서입니다. 이 로마서 안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느냐 그 말이거든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다윗 언약에 의해서, 다윗 혈통으로서 그는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쓸 때부터, 예수님 만나고부터 이미 언약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그 전부터 썼지만. ‘다윗 언약에 의해서, 그것을 최종 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오셨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고 ‘마음 낮추면 복을 받는다.’ 그 이야기하고 이게 서로 의사가 통할 수 있는 내용이냐는 말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여러분이 사랑받고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이해가 되는데 ‘다윗 언약에 의해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다윗 언약이라는 말조차도 어렵고 그 혈통으로 와서 죽었다는 로마서 1장 3절의 말씀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이것을 예수 믿고 난 뒤에 전하면서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이야기를 왜 했느냐, 그 말이거든요.
그것은 천국이라 하는 것은 아무나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상식적으로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 문제에요. 천국에 못 들어가면 못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가느냐, 지옥 불에 들어간다니까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 수는 없고 ‘내가 당신들에게 빚졌습니다. 당신들이 그것을 거부하나 안하나, 내 말을 알아듣나 못 알아듣는가에 관계없이 나는 외쳐야 되겠습니다.’하고 나서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사발에 물을 담아 놓았는데 그것을 건드려서 물이 방에 엎어졌습니다. 물이 엎어지면 그 엎어진 물이 말릴 수 없도록 면적이 넓어지면서 테두리가 생기잖아요. 그리고 그 물이 마구 밀어붙이잖아요. 그 바깥 테두리가 복음이라고 보면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바울님, 설치지 말고 내가 원할 때나 복음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것은 우리 생각인데 사도바울은 그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물이 엎어지면 자동적으로 테두리가 생기면서 그것이 번지고 그 가장자리가 넓혀지는 것처럼 그냥 마구 다가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복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기쁨을 주는 소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을 이루실 분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셨는데 이 땅에서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람을 못 죽여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이 언약 속에 있어야 되는데, 이 언약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다시 말해서 죽음 안에, 그것도 그냥 죽음이 아니고 특수한 죽음 안에 들어와야 천국이 보이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거래하면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매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내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 알았던 상식인데 그런 것이 다 거짓이었고 다 사기였다.’는 겁니다. 왜 그것이 거짓말이냐 하면, 사람이 살고자 해서 능력을 확장하니까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헬라인이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당신보다 어리석다……’ 전부 다 자기개성이 있는 자기영역만을 고집하면서 신이 와서 그것에 복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자기영역, 보편적이 아니고 나만 살고 나만 챙기고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고, 나, 나, 나밖에 모르는 심보로서 하나님과 거래에 나선 겁니다.
그 경계선을 지금 틀려고 하는 겁니다. 그 경계선을 털어버리는 겁니다. 터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다윗언약을 주신 것은 우리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다윗언약의 혈통이 누구냐, 유대인, 이스라엘입니다. 왜 이스라엘 나라가 생겼느냐 하면 인간의 잊어버렸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 본래의 자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죽어야 될 자리가 본래의 자리에요. 우리는 죽는다고 할 때 그저 남의 장례식이나 한 번 맛보고 오래 살다가 늙어빠져서 죽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언약을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의 언약 속에 와 버리면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산자가 아니고 죽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손에 만져지고 펄떡펄떡 심장이 뛰니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보면 이미 죽었어요. ‘아이고 이 죽은 인간아.’ 지금 주님께서는 죽은 인간을 어떻게 살려내느냐, 그것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오해해서 ‘하나님, 저 살았습니다. 더 풍요하게 넉넉하게 부자 되어서 살게 하옵소서.’ 하는 거예요. 달 보고 빌면서 그저 ‘올해도 가족들 건강하고 신수 좋고 사업 잘되고……’ 살아 있는 나를 더욱 더 살게 하는데 달에게 빌고, 갓 바위에게 빌고, 절에서 빌고, 교회 와서 빌고, 새벽기도회에서 빌고,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또 빌고.
이게 뭐에요, 이게! 이게 사기거든요, 사기! 그래서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랬어요. 사람들이 참된 선지자를 미워하는 이유가 선지자가 사기를 안치니까 미워한 거예요. 거짓말을 안 한다고. 적당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기분 좋게 해주면 사람들은 그 선지자 다 좋아합니다. 그 목사를 다 좋아해요. 그런데 참된 선지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사기를 칠 수가 없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무도 찾지를 않아요. 왜, 죽은 인간은 죽었다고 해줘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죽은 인간이 무슨 복을 바래요?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잃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새로 얻었다, ‘목사님, 애 새로 낳았는데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우리 애 죽었으니까 기도해 주세요.’ 죽은 인간한테는 입었다, 벗었다, 얻었다, 잃었다,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죽은 사람이 옷을 네 벌 입으나 다섯 벌 입으나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이 명품 옷 하나 입혀주려고 복음전합니까? 집 세 채 있는데 한 채 더 주려고 복음 전하는 거예요? 땅 없어서 땅 한 필지 더 얻으려고, 부동산이 없어서 투기하려고 복음 전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 땅에서 쓰레기 주우려고, 환경운동하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셨어요, 죽으려고.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기쁜 소식이라니까요!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람은 이 진실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만 내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들이 들으면, 내가 괜히 들었어, 괜히 들었어, 도망쳐야 돼.’ 이렇게 되는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당신들 이 복음이 부끄럽지? 나는 안 부끄러워.’ 나는 안 부끄럽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가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그 마리아가 처녀였습니다. 처녀가 임신하면 부끄러운 짓이에요. 그런데 마리아가 사실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 안에 기쁜 소식이 들어 있다.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가 네 안에 들어 있다.’(눅 1:30-33)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 소리를 듣고 그것은 자기가 예상 못한, 충격적인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팔공산 봉우리가 하나인가, 두 개인가, 어는 것이 정확한가, 그 문제가 아니라 내가 뭔가를 얻어 챙기겠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짝도 소용없는 사고방식을 그동안 유지해 온 거예요.
진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내가 하나님을 이용해 먹겠다는 그 생각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이용한다는 그것에 내가 아다리가 된 겁니다. 처녀 몸에서 아기가 생겼을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다 합니다. 순이가 집 나가서 임신해 가지고 돌아오면 촌에서 다 손가락질 할 것 아닙니까? ‘순이야, 가방 싸서 집 나가더니 임신이 웬 말이냐? 그 남자가 누구냐?’ 그렇게 물을 것이 아닙니까? 마리아도 마찬가지에요. 마리아가 번쩍번쩍 무슨 영광에 빛이 나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평범한 삶을 그냥 살았어요.
그런데 다만 다른 점은 임신했다는 점입니다. 아기예수를 잉태했다는 겁니다. 부끄럽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뭐라고 찬양했습니까? ‘나는 이 하나님의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옛날의 기준 같으면, 나는 유대인이다, 헬라인이다, 나는 지혜자다, 똑똑하다, 이런 기준 같으면 충분하게 부끄러울 수’가 있습니다. 부끄러울 수가 있어요. 집안에 돈이 없다, 이혼했다, 애가 아프다, 이런 것이 충분히 부끄러울 수가 있습니다만 이혼했기에 부끄럽고 이혼 안했기에 안 부끄럽다는 기준 자체가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런 기준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무슨 능력이다? 바로 복음의 능력이다, 그 말이지요. 기존에 사람들이 사람들을 보고 있던 기준 자체를 깨게 만드는 능력이 주님이 특별하게 주신 복음의 능력이라는 말이지요. 그 복음의 능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해서 그 능력을 보게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하나님 믿는데 멸망했어요. 이것은 뭐냐, 당연히 멸망의 자리가 우리의 본래 자리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도 하고 얼마나 제사를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백날 십일조 하고 백날 뭐 해도 그들은 멸망해 버렸어요. 왜, 처음부터 멸망했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이 왔을 때 어떻게 되는가, 제가 성경 한 대목을 읽어드릴 테니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당되는지를 한 번 보세요. 사도행전 2장 1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또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팔공산 봉우리가 하나냐, 두 개냐, 아니면 갓 바위까지 세 개냐, 그것을 확인하려면 올라가서 직접 조사해보면 알아요. 정확하게 나오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그냥 정확한 거예요. 우리는 정확한 것을 원하고 있지 환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기 보면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도대체 이 환상이라는 것이 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다 늙어서 무슨 꿈을 꿀수 있습니까? 이게 뭐냐, 창세기 1장, 2장, 3장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되었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과거의 일로 밀쳐놓았어요. 나하고는 상관 없다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우리가 밀쳐놓았던, 우리의 잊었던 과거까지 다 소급해서 ‘너희 조상들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미 죽은 존재로서 이 땅에 살게 되었다.’는 이 성경 내용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성경 내용 속에 집어넣어버리면 우리의 희망은 내 사적인 희망이 아니라 성경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때를 희망으로 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망은 이미 이루어진 소망이에요.
창세기에 있었던 그 1장, 2장, 3장의 그 이야기가 우리 보기에는 과거로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된 미래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것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덮쳐진 겁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똑똑하고, 내가 부자 되고, 내가 잘났고, 기죽지 않고, 이것만 신경 쓰다 보니 나와 저 사람과의 차이나는 것, 차이나는 것만 자꾸 따집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기 안에 갇혀져 있어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받아 챙기는 것, 자꾸 하나님의 복을 받아 챙기는 것만 생각한다고요. 그것을 벗어나야 되는데 벗어날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게 되면 그 말씀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숨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야기하고 무슨 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을 지키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지켰습니다. 우리 형편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라고 해놓고 안에 따로 방을 하나 만들어서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숨어버려요. 숨어서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겁니다.
자, 복음의 능력이 뭐냐 하면, 숨겨진 모든 것을 다 발각시키는 능력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쉽게 말해서 ‘안 숨어도 되는데.’ 그겁니다. ‘숨을 필요 없는데. 너는 너 나름대로 본색을 숨겼다고 하지만 나는 네 모습 다 알아. 너 나한테 다 들킨 거야. 교회 와서 말씀대로 살고 바르게 사는 것, 주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 너 좋으라고 한 짓이고 주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지독하게 나를 사랑해서 목사가 시킨 대로 하는 그것을 다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것을 너무 숨기지 마. 그렇게 사나 이렇게 사나 너 결국 죽어. 죽는 것이 본래 네 자리야. 지금 살아온 것도 행운이야.’ 지금까지 살아온 이것만 해도 너한테는 기적이고 행운이라는 말이지요. ‘네가 잘나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내가 살려줘서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역시 내가 남보다 뛰어나고 잘났기 때문에 이만큼 나도 버텨 왔습니다.’ 하는 자기 의, 자기 자랑거리를 붙들고 이것만큼은 안 빼앗기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이만큼 했기에 이만큼 복 받았다는 자기 자존심만큼은 기어이 지키고 싶은 겁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 의’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기 의니까 복음의 능력으로서 그것을 들추어 낼 때는 말릴 수가 없는 거예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감당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죽기 보다는 저쪽에서 도망치게 되지요.
예를 들어서 ‘십자가 복음으로서 당신은 이미 이스라엘로서 멸망하고 죽습니다.’ 이러면 예수님을 살해했던 그 본성, 사람은 자기를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마저 살해했던 그 의지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거기서도 그대로 발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또 다시 예수님 당했던 핍박을 이 세상 살면서 받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받게 되니 비로소 세상이 말씀 그대로 주어지면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구나.’ 쉽게 말해서 지옥과 천국은 죽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 있을 때 분류가 된다는 사실이 드디어 발휘되는 겁니다.
복음의 능력을 받은 사람, 그래서 환상, 환상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환상이라 하는 것은 이상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보는 그 환상, 그 꿈, 그것은 바로 내가 생각했던 그 세계가 아니고 다른 세계, 성경 안의 세계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에 반해서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5장, 6장 죽 보게 되면 사도바울보고 무진 욕을 해 댑니다. ‘사도바울아, 한 번 따져보자. 네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하는데……’이것이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렇게 죄인밖에 없는데 네 이론대로라면 하나님영광이 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하겠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막 살아야 되겠네.’ 이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네가 막 살자고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막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 더욱더 막 살면 되겠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막사나 막 안사나 주님 앞에서는 우리가 이미 죽은 존재고 그것은 죄 때문에 죽은 존재임이 노출되기 위해서, 들켜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임’을 보여주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왜 좋으냐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기 위해서 산기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도록 태를 제공하는 제공자 입장이에요. ‘알았습니다. 제 태를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터전으로 돈도 안 받을 테니 그냥 사용하세요.’ 그냥 내놓은 것 밖에 안돼요. 그것도 자발 적은 아니고 주의 강제로 차압당하듯이 그렇게 사용 당했지만. 그게 바로 복음이 주는 자유고 기쁨이라는 거예요. 그 말을 제가 이번에 서울강의에서 했습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살기 힘들면 거기에 ‘막’자를 하나 넣어서 ‘그냥 막 사세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주께서 우리를 들통 내겠다고 작심을 한 이상은 들통 내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괜히 대처하겠다고 따로 숨어버리면 그런 수작마저 들통 나게 되어 있어요. 돈 좋아하면 돈 좋아하는 그대로 그냥 사시면 되는 거예요. 돈 안 좋아하는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당연히 돈 좋아하는 그것도 죄가 되고. 아까 제가 보편성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요새 말로 하면 ‘나는 신앙 좋다, 나는 신앙 나쁘다, 나는 기도 잘한다, 나는 기도 못한다.’ 그러한 자기만의 모든 사적인 틀은 복음 앞에서는 다 소용이 없는 겁니다.
내가 이런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보편성이 깨져버려요. 인간들끼리 헬라인과 야만인을 구분한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헬라인, 너는 못 배운 민족, 너는 야만인.’ 야만인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이유가 야만인을 생각해서 붙이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잘났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야만인이라고 붙이잖아요. ‘나는 기도를 잘한다. 어? 너는 기도를 못하네.’ 기도 못하는 쪽을 찾는 이유는 자기를 상대적으로 기도 잘하는 쪽에 분류되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한 분류자체가 진짜 소중하고 귀한 것을 따로 숨겨놓기 위해서 ‘설마 주께서 이것까지 알아냈을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의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생각을 전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주께서는 익히 그것을 다 아시고, 익히 다 아시고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한 겁니다. 네가 숨어도 안 숨어도 그것이 다 의미 없다는 거예요. 따로 이것이 내 것이라고 여기면 그 자체가 이미 의미 없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제공된 하나의 설비입니다. 모든 것은 전부 다 바쳐진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할 것이 뭐냐? 흔히 저에게 하는 질문이 ‘이 근호목사는 예수 믿고 난 뒤의 이야기는 아예 하지를 않더라.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왜 이야기를 안 하는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모든 것은 사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와요. 이 말은 사실은 우리가 설교시간만 아니라면 합창을 해도 괜찮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 너는 더 이상 나를 이길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5-57)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긴 자에 속하게 해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죽음아!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 그 이야기를 하면 돼요. “목사님,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 고백을 하면 됩니다.
난 그동안 안 죽으려고 온갖 진짜……,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만 온갖 발광 다 했어요. 했지만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삶의 부담, 삶의 무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 이것이, 그동안 하나님께 아부를 떨려고 한 것이 행여 사는데 있어 더 살게 해줄까 싶어서 그런 알랑방귀를 뀐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냥 내놓으세요. 그냥 이 몸이 필요하시면 쓰세요, 라고 내놓으시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쓰시든 어떻게 굴리든 마음대로 하시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 믿고 난 뒤의 자유입니다.
삶이 부담이 되게 하지 마세요. 지난 주일에 안 하든가요? 제일 좋은 옷은 벌거벗은 임금님 옷이라고요.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 세리와 창기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인생을 산다는 것,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왜, 감출 필요 없기 때문에. 제가 안양에서 간증을 하나 들었어요. 인덕원에 사시는 김 권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어머니가 일본여자인데 일본 여자가 얼마나 정갈한지, 순결한지에 대한 예를 들어요. 자기 어릴 때인데 아버지가 화가 나서 ……, 사실은 아버지가 잘못했고 엄마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가! 꼴도 보기 싫어.’라고 딱 한 마디 했답니다.
그 말 듣고 어머니가 나가버렸어요. 아버지는 홧김에 한 소리 해놓고 밤이 늦도록 안 들어오니까 걱정이 되는데도 아버지 권위가 있으니까 “답답하면 들어오겠지!” 하는데 새벽 6시가 되어도 들어오지를 않아서 문 밖에 나가봤어요. 나가니까 그 엄마가 어깨에 눈이 소복이 쌓이는데 석고대죄 하듯이, 소녀의 기도처럼 ‘용서하소서.’ 하고 꿇어 앉아있더라는 겁니다. 집을 나간 것이 아니고 문밖에 꿇어앉아서 남편의 용서를 기다리면서 꿇어앉아서 빌고 있었어요. 눈을 다 맞으면서. 대단한 일본여성 아닙니까? 이 명분, 도대체 그 명분이 누굴 위한 명분이라는 말입니까!!
이게 일본 여자에요. 그래서 그대로 돌아가셨어요. 한 고집 하지요? 그런데 그런 고집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춰 놓았어요. 설마 하나님한테마저 그것을 안 들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감추어놓은 거예요. 로마서 10장에서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사는 보람이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만큼 순결하고 착하고 어질고 남은 죽어도 나만은 이 땅에서 아직도 살아야 될 이유가 갖춰져 있다, 그것 하나 챙기는 재미로, 그 힘으로 우리는 석고 대죄하는 심정으로 눈 펄펄 오는데 꿇어앉아서 신의 자비 앞에 시위하고 데모하고 사는 우리 모습입니다.
‘주여! 성령 받았습니다, 십자가 압니다, 언약 압니다.’ 이런 것 갖추어서, 심지어 좋은 것이라는 좋은 것은 다 갖추어서 ‘이래도 내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게 버티는 우리의 모습들, 내가 바로 유대인이요, 남들은 다 야만이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어서 환장한 우리들, 복음의 능력은 그것을 부수십니다. 소매를 걷으시고 ‘슬슬 그것 한번 부숴볼까?’ 그렇게 나오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네가 더 이상 너의 주인의 살지 말고 그냥 내 놓으라.’는 말이지요. 그냥 맡기세요. 마리아에게 임신시키듯이 주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다가 성령을 집어넣어서 이제는 주님에게 필요한 존재, 너에게 필요한 너의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 예수님에게 필요한 너의 존재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그동안 내가 감당 못할, 내 능력으로 살지 않는 나의 능력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미 우리는 값으로 산 주의 것’(고전 6:19-20, 고전 10:31, 롬 14:8)이라고 고린도전서 6장에 하지 않았던가요?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지금 사도바울은 안달이 난 거예요. ‘내가 그동안 멋도 모르고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사기를 쳤는데 야, 이렇게 믿음을 선물로 받는 자만이 구원받는데 내가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그런 거짓과 사기를 쳤을까? 여러분, 내가 정말 미안합니다.’ 하는 식으로 ‘이제 내가 진실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사도바울이 순교 당했습니다. 진실만 말하다가! 전처럼 사기를 쳤으면 오래 살았을 것인데.
사도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외치면서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가 없’지요. 내가 이 복음을 어떻게 알았는데, 이 복음을 주님 만나서 알았는데 주님이 주신 이 축복을 내가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하는 나 자신은 뭐가 됩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행운과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말만 좋아하고 거짓말이라도 우리를 기분 좋게만 하면 좋아하는 저희들, 우리 안에 괴물 들었고, 마귀 들었고, 사망 들었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무겁게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예가 되어서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거기에 길들여진 악한자의 하수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원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오셔서 그럴 필요 없다는 소리를 듣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