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롬1장 1-4(복음이 나타나다)1209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4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2절에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 하나 만드는데 꼭 이렇게 약속을 해야 됩니까? 멋있는 사람 하나 나서서 ‘날 믿어라’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약속까지 꼭 이렇게 거론을 해서 ‘옛날부터 약속하신대로 그분이 오셨다.’ 라는 말을 사도가 중요하게 던져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누가복음 했는데 그 끝부분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 봐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해서 꾸준하게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약속을 안 하고 그냥 오셔도 우리가 믿을 용의가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약속 없이 그냥 오병이어 기적 일으키고 죽었다가 살아나면 ‘야, 우리도 살 수 있겠다.’ 싶어서 희망품고 믿을 수 있는데 왜 약속이라는 것을 구태여 언급을 해야 되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비 약속, 약속 아닌 비 약속 요소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언급하신 겁니다. 약속 아닌 것은 하나님 것 아닌 줄 알아라, 그런 뜻이에요. 약속 아닌 것. 그러면 약속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중요시 하고 거기에 신경 쓰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느냐하면, 그런 것은 대부분이죠. 약속 아닌 것이 어떤 것이 있느냐하면, 우리교회, 기독교라는 것, 우리 가정, 우리 교단, 우리나라대한민국, 이런 것은 선지자와 그 시편의 약속에 없는 거예요. 성경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지묘동 우리교회 만들라는 것이 어디에 약속되어 있습니까? 없습니다. 창세기에 경주 이 씨 몇 대손 무슨 파에서 나와서 목사 되어라, 이런 것이 성경에 약속 안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훌륭한 목사가 돼라, 이런 것이 약속이 안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약속이 안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거예요. 내 가정, 내 국가, 내 교회, 내 기독교라는 종교, 기독교라는 종교는 아예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종교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2천년 역사에 조작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기독교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용이 없어요. 나는 불교 안 믿고 천주교 믿었습니다, 라고 누가 이야기하면 ‘잘했습니다.’ 절에 가서 지옥가나 교회 가서 지옥가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약속이 아닌 것을 왜 그렇게 중요시하고 거기에 목숨을 거냐 그 말입니다. 약속이 안 된 건데.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은 심지어 어디까지 이야기하느냐하면, 우리가 여호와를 믿고 구원 받겠다 하는 것조차 약속이 된 바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호와를 믿고 구원되겠다는 그런 약속은 없다는 거예요. 율법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 내용도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고 오해한 것이에요. 우리 이스라엘나라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니 우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된다, 라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아브라함자손이냐, 너희들이 천국에서 쫓겨난다. 너희들이 쫓겨나고 이 백부장 같은 이방인이 오히려 천국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던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으로 사람들이 머리 맞대서 연구하기를 ‘이것은 분명히 약속된 것이다. 우리는 약속된 이것을 믿으면 앞으로 좋은 일을 볼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는 그것,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한 것도 없는데 왜 너희들은 약속되었다고 그렇게 우기고 그 약속된 것을 받아들이면 이구동성으로 저희끼리 단합하고 결집해서 왜 그것을 사람들에게 유포하고 전염시키느냐는 말이지요, 유대교라는 종교의 이름, 또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약속된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이것은 어린애가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약속된 바라고 느낄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나 사도바울의 편지에도 그것은 약속된 바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착각한 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 창조 속에 인간도 들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는 사랑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인간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죄 속에 허덕이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하늘에서 구세주를 보냈는데 그 예수를 믿는 인간들은 구원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약속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해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2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된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아까 운을 던졌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약속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면 약속된 것이 뭐냐,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어떤 오해가 개입되었느냐하면,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는데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창조했기에 나는 여기 있다. 왜 하나님은 창조했는가, 창조는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나는 만들어졌으니 사랑받는 대상이 된다. 사랑받는 대상이라면 뭔가 하나님께 보답을 해야 되는데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주면 하나님께서 믿어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천국에서 합류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도중에 뭔가 빠졌지요? 뭐가 중요한 것이 빠졌지요. 빠진 것이 감이 안 옵니까? 골로새서 1장에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할 때 우리 구원하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직접 관여해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과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했다는 것이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이 창조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이 자체가 긍정이 되어버려요. 긍정이 되어버리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나님께서 지옥 보낸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모순이 되는 겁니다. 만들어놓고 지옥 보내고, 무슨 이런 잔인한 하나님이 다 있어요? 이것은 여호와증인이 주장하는 겁니다. 여호와증인은 지옥이 없다는 거예요. 왜, 만들 때는 무슨 맘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자기백성을 가지고 지옥 보내면 하나님이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조폭도 아니고 문제 있다는 거예요. 모든 천지창조, 그 안에 포함된 우리자신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예수님이 그냥 우리 구원하라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내가 당신 믿어줄 테니 당신이 나한테 뭐해 줄 거요, 이렇게 통박 굴리고 거래하고 흥정하라고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아주 냉혹하게 이야기해서 ‘우리행복이라는 것은 성경에 약속된 바가 없습니다.’ 우리 행복, 우리 축복이라는 것이 약속된 바가 없어요. 천국은 어떤 사람만 가느냐 하면……, 어제 미리 당겨서 집안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연세 많으신 어머님께 예배시간에 물었어요. ‘어머니! 지옥가고 싶습니까, 천국가고 싶습니까?’ 어머니가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천국가고 싶지.’ 아, 이게 바로 종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이라는 거예요. 성령 받으면 이렇게 돼요. ‘천국은 저한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죄인인데 무슨 천국을 갑니까? 넘볼 것을 넘봐야지. 넘볼 무엇도 없는데 왜 그걸 넘봐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그것도 눈치 못 채고 얼른 ‘아이고, 천국 가야지!’ 누가 넣어주는데? 목사인 아들이 빽쓴다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제가 중보기도 한다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하나님께 빽쓴다고 하나님께서 받아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오셨다는 그 말은 이 세상에 비 약속이 흐르고 넘치는 거예요.
비약속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한가위 같아요.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한가위만 같아라, 하잖아요. 죄가 아주 넉넉해요. 모든 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여기에 배치를 딱 해버리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을 배치를 해놓았는데 약속을 배치하니 그 배치된 약속 안에 뭐가 있느냐하면, 인간과 신 사이에 거부와 거절의 장치가 장만되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것, 너 같은 인간은 오지 말라는 그 장치가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이 모세를 통해서 준 율법의 정신입니다.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축복받겠다는 그 강한 의지는 인정해주겠는데 그런 강한 의지와 종교적인 의욕이 결코 천국을 돌파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음을, ‘나는 천국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내 뱉으면서 그것이 바로 저주로 갈 수밖에 없는 근거로서 완전히 깔려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나 지옥갈래, 이래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나 지옥 가기 싫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천국에 꼭 넣어주세요, 아빠 엄마를 천국 넣어주세요, 라는 간절함이 오히려 저주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서 모든 것이 충분하게 파도처럼 넘치고 있는 세상이 이 세상이라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그 거절과 거부의 장치를 쏙 빼고 읽으니까 건성 건성으로 넘어가요. 고객만 만족하면 장사는 되기 마련이지요. 그것 때문에 그렇겠지요. 예수님께서 약속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은 비약속이기에 그렇다, 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그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비록 우리가 비 약속 속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약속이 오면, ‘그렇지, 저것은 약속이구나. 우리는 비 약속이네.’ 우리는 눈치 채서 ‘우리는 비 약속이구나. 약속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하고 예수 믿어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지.’ 우리가 이렇게 대견하게 마음을 낮춰 잡고 믿음으로 나아오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아이디어가 퍼뜩 우리 머리에 떠오를 거예요.
하여튼 우리는 좋은데 가는 거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지만 주님의 약속이 우리와의 대화로서 협상테이블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 약속의 정점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예수님이 약속인 것은 눈치 못 챘고 더욱더 중요한 사실은 아무도 자신이 비약속적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무도 자기를 천국 갈 자격도 없는 죄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마음을 낮추고 겸손에 겸손을 더하고 절제에 온유를 더해서 이 정도 낮추면 주께서 봐주시겠지, 하는 도 닦는 심정으로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또 부인하고 온 몸을 낮추어서 선교에 나서고 테레사 수녀처럼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그렇게 하더라고 기어이 천국티켓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아주 집요한 종교적인 집념, 집착, 그런 것은 발휘될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이야기는 꿈에서도 생각 못한 이야기입니다. 꿈에서조차. 목사가 희생으로 거룩한 목회를 하면서 설마 이것마저 죄가 될 줄이야 나는 생각 안 해, 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십자가 지고 희생의 길을 가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에요. 뭔가 인간이 문제 있습니다. 근원적으로 문제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내가 모든 것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천사의 말을 하고 그 정도로 설교를 멋지게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된 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가 아니므니다.’ 하는 것처럼 그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가 아니면서 우리는 교회 와서 기술들을 배웁니다. 어떤 기술이냐, 성도인척 하는 기술들, 노하우를 목사의 말을 듣고 행함으로서 몸에 익히면서 3, 4십년, 5, 6십년, 계속 교육받으면서 믿는다고 자부하고 삽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일은 우리가 헛짓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익히 다 알고 계신다는 점이에요. 너무나 감사해요. 그런 헛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이 모든 것이 전혀 약속된 일이 아니고 괜히 한 번 몸부림 쳐 보는 거예요. 지옥 가는데 가만있으려니 무섭고 뭔가 불안하니까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교회 와서 뭔가는 열정들을 내 보는 거예요. 간절하게 새벽기도 나와 보는 겁니다. 연속적으로 빠지지 않고. 성경도 읽어보고 큐티도 해보고. 그런데 그것이 하면 할수록 그것이 자신의 의만, 자신이 얼마나 ‘나는 한 고집 합니다.’ 하는 자기고집성만 또렷하게 드러날 뿐이에요. 따라서 교회에서 그렇게 열심내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면 할수록 나오는 것은 이것밖에 안 나와요. ‘어느 놈이 나 건드리기만 해봐라. 나보다 믿음 좋은 놈 나와 봐라.’ 이러한 자기의의 의식밖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훈련을 시켰어요. 그래야 교회에 돈이 나오니까. 우리교회는 광고시간까지도 오지도 않아요. 설교시간 맞춰서 겨우 교회오고. 광고시간 맞춰서 와야 돈 이야기 나올 때 듣는데 설교시간 맞춰서 왔다가 설교만 들으니까요. 좀 일찍 와서 광고시간에 무슨 이야기하는지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향하여만 있는 것인데 광고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거예요. 그 예수그리스도가 있기 위해서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중에 한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레위기 10장 8절에서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어떤 특정 장소가 있다는 거예요. 그 장소는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 민족, 모든 이방민족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장소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회의해서 결정 낸 사항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 거룩한 성소라 하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해서 하나님과 시내산 위에서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서 이 땅에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것을 구멍 팠다고 이야기했는데 블랙홀이지요. 그냥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멍을 판 거예요. 블랙홀이에요. 그 성소라는 장소가 생기기전에 거기에 번지수가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155번지라든지 164번지라든지 그 번지수에는 그런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두 다리 가지고 얼마든지 그 동네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 계시를 받고……, 약속을 받은 거지요, 그 장소에 성전이라는 혹은 성소라는 혹은 성막이라는 특정 공간을 확보한 순간 그 때부터는 ‘들어오지 말라.’가 성립돼요. 이러한 조건이 안 되면 들어오지 말라, 가 돼버려요.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겁니다. 내 다리 가지고 내 맘대로 왔다 갔다 하는데 네가 뭔데 들어오지 말라고 하느냐,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형성된 그 시내 산꼭대기와 지면 사이가 이게 엎어져버리면 수평적으로 특수한 공간과 그 외의 다른 공간과의 차별화가 성립됩니다. 제사장만 들어가고 우리는 못 들어가, 라는 수평적인 인식은 그것을 곧추세워버리면 뭐냐, 수직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는 마음대로 살 수 있지만 진짜 계시는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못 들어가, 라는 것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준 거예요. 이 레위기 10장에서 특정한 장소인 성소를 만들어놓고 못 들어간다고 하는 이야기는 로마서 1장 2절에 의하면 그것마저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달시키고 연결시키는 약속이 된다는 겁니다. 참고로 로마서 1장 2절을 모른다고 칩시다. 이것을 잘라버렸습니다. 나는 로마서를 몰라, 나는 레위기만 알거야, 라고 나왔을 때에 레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소를 만들라고 했다. 만들지요, 뭐. 만들 때 희망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것을 만들면 이것을 만든 사람에게만, 이것을 만든 민족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구나. 이런 횡재가 어디 있나. 이것이 축복이야.’ 하고 만드는 거예요. 그 다음에 ‘독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고 제사장이 대신해서 들어가서 희생제물 바쳐서 피를 내어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주변에 널려 있는 백성들의 고의로 지은 죄나 고의가 아닌 죄까지 몽땅 다 7월 10일 날 씻어준다.’ 이런 것이 성립이 된다면 그것도 우리한테는 ‘야, 이런 호재가 있나.’ 왜,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 만드는 데는 약간의 돈을, 패물을 내면 되거든요. 그렇게 장소 만들고 제사장 세우는 것이냐 손들고 하고 싶은 사람, ‘아론 너 나와. 신학교 갔다 와.’ 그래서 하고 그 다음에 양 잡는 것, 양 목에 칼질해서 잡고 피 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태우라고 하면 태우고, 못할 것이 뭐가 있어요. 거제도 대교도 만드는데 그거 하나 못 만들겠어요? 컴퓨터도 만들어내는데 그것 하나 못 만들겠습니까? 그 당시에 과학이 이만큼 발달 안했어도 그거 하나 못하겠어요? 그렇게 하고 손 털면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팔짱끼고,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추석날 교회도 빠지고 안 오는데. 몇몇 사람 월급 줘서 ‘당신은 제사하는 일에 종사하고 우리는 십일조, 돈만 낼게.’ 이것이 뭐가 어려워요. 그래놓고 용서 받고 자기는 자기직장 일에 충실하면 되고. 종교라 하는 것은 종교분야 전문가가 하는 것이고. 너는 종교분야 전문가, 나는 이 분야 전문가, 너는 다리 놓는 전문가, 나는 농사짓는 전문가, 분업해서 하는 이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그게 바로 로마서 1장 2절과 연결 안 되어 있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 1장과 끊어진 상태에서 레위기를 봐 버리면 결국 남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십일조 하면 되지 십의 이조는 너무 심합니다. 저도 십일조 하는데 죽겠습니다. 할 만큼 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번 목요일에 제가 U-튜브 녹화하러 가는데 조회 수가 3억까지는 안 올라가요. 그 내용은 십일조를 가지고 할 참입니다. 십일조는 약속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일조인데 우리는 십일조를 내는 자가 아니라 십일조를 받고 있는 자인데 거기다가 십일조를 내 버리면 그것은 십일조를 결국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해놓은 그것은 헛짓이고 온전치 않은 것입니다, 라는 말밖에 더 돼요? 내가 십일조를 보태야 복이 오지 내가 십일조를 안내면 복이 안 온다는 말은 당신이 행한 것은 우리가 못 믿겠다는 뜻이에요. 당신이 행한 것은 온전치 않다는 뜻입니다. 십일조를 이 세상에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십일조를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이 십일조를 하게 되면 반드시 자기 의를 챙기게 되어 있어요. ‘너 안했지, 나는 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떨어진 거예요. 자기 자신이 비약속인 거예요. 비 약속은 필이 약속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이 한가위처럼 넘친다고, 넉넉하다고요. 죄로 넉넉한 거예요, 죄로. 비 약속으로 넉넉한 거예요. 비약속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다른 노선으로 따로 정했어요. 성경 말씀과 예수님노선이라고 따로 정해놓고 그 노선을 눈치 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유대인이든 뭐든 전부다 뭔가 해놓고 자기 자랑 질이나 하는 거예요. 구역예배 때 죽 둘러앉아서 김 권사 자랑 질, 다음에 박 권사 자랑 질, 죽 돌아가면서 자랑 질하는 거예요.
자랑 질 아닌 것처럼 하지요, 아닌 것처럼. ‘이번에 애 시험이 어려운데 기도해서 합격되었는데 자랑하는 것은 아니고…….’ 이러면서 자랑할 것 다 하지요. 자랑할 것이 없으면 주일 예배에 참석할 마음이 없어요. 이혼하고 주일 예배 참석하겠습니까? 뒤에서 ‘저런 저……’ 하면서 험담하고 저주받았다고 이야기할 것인데.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눈치 못 채고 오직 자기 자신의 잘난 맛에 인생 승부 거는 비 약속으로 넘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그냥 넘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수많은 수천 성경구절을 여기에 집어넣어요. 큐티를 해왔으니 성경구절 오죽 많이 알겠습니까? 거기에 제자훈련까지 해 놓으니 머릿속에 가득 들어있는 것이 성경구절이에요. 모든 성경구절을 자기 자신의 대단함과 훌륭함과 자기가 마치 약속된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우기면서 내놓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모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서 통과케 하니까 요즘 말로 하면 스데반집사님처럼 그냥 돌로 치는 거예요. 왜 내가 내 잘난 재미로 살아가는 이 소박한 생의 기쁨마저 당신이 빼앗아 가느냐고 돌로 친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1장 1절에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지요. 이제야 밝힙니다. 이제 밝힐게요. 이 사람들은 남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이에요. 그리스도종이라는 사람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종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을 설교에 담아버리면 그것은 자진해서 ‘나는 그리스도 종이 아닙니다.’라고 강대상에서 외치는 것이 돼요. 그리고 거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은 ‘목사님, 제발 저를 기쁘게 하지 마세요. 저의 희망을 불 질러 주세요.’라는 그런 마음으로 교회 나왔어야 돼요. 교회 나올 때부터. 나는 소박한 희망이 있는데 제발 그 소박한 희망마저 이 예배당에 와서 말씀 듣고 완전히 장작 패듯 작살을 내서 나는 희망을 품을 자격도 못 된다는 것을 일깨워달라고 그렇게 교회에 참석해야 돼요. 목사와 나 사이에 어떤 기쁨이 오고가면 안 돼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기쁨이 와야 돼요. 내가 누군지를 평생 몰랐는데, 60평생 70평생 살면서 내가 누군지를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내가 천하에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태생이 죄인역할 하라고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그냥 출산된 거군요, 라는 것을 알 때 그동안 죄인에게 퍼부었던 투자, 죄인의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 쏟아 부었던 모든 조바심과 행동의 윤리와 도덕 같은 것이 얼마나 허접스러운 것이었는지, 자기를 가리는 하나의 가식적인 가면에 불과한 거예요, 그게!
그런데 자기가 뜯어내려 해도 뜯어낼 수 없는 그 가면이 오늘 본문 4절에 의하면 ‘성결의 영’으로, 성령으로 뜯겨지는 겁니다. 이것은 인력으로 되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3절부터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체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살기 위해서 육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몸을 갖고 태어난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네가 살아 있어도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고 이미 죽었기에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 말입니다. 십자가에 비로소 그 해답이, 정답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종교란 무엇인가, 오락이죠. 취미의 일종이죠. 교회가 뭐냐, 친목단체고 계모임이에요. 돈 내서 놀러가기 바쁘고, 노인들 밥해주는 이런 것. 친목단체를 버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오락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오락 그것마저 버리라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이야기죠.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께 비는 그 취미를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버리라고 한다고 해서 버릴 위인도 아니고, 버릴 마음도 없고. 그 말이 아니고 그런 것이 우리의 타고난,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던 타고난 층층의 죄의 일부라 그 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교회 다님이 우리로 하여금 죽게 만들었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도 죽게 만들고. 이왕 다니는 것 남한테 기죽기 싫어서 열심히 믿는 척 하고 기도 많이 하는 척 하고 헌금 많이 하는 이 자존심, 경쟁에서 지기 싫어하는 이 되도 않는 자존심, 그런 것들을 우리는 중지할 수가 없어요. 왜, 그게 내 모습이니까. 남한테 기죽기 싫은 그것이 진실한 내 모습이니까 그 내 모습은 모습대로 교회에서 발휘하되 그것이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알아채면 되는 겁니다.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왜, 원래 우리가 그래야 하니까, 원래 그래야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니까 어떻게 하는가,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어요. 다윗의 혈통으로 와서 거기에 약속과 결합이 되니까 나오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로마서를 하면서 이것을 설명 하겠는데 미리 당겨서 맛보기로 약간만 말씀드리면 법이 있기 전부터 죄가 먼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법을 지키냐 안 지키냐에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차후에 법이 주어진 것은 이래서 네가 죄인 맞잖아, 라고 고발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겁니다. 율법이 주어지면 우리는 내가 몰랐던 죄는 증식이 되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이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죄가 넘치지 않으면, 죄가 증식되지 않으면 은혜를 모르는 거예요.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숨어 있던 죄가 발각되어야 되는 겁니다. 설교는 바로
내가 어떤 희망을 품고 왔다면
그 희망마저 어느 노선에서 나온 죄의 일부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나로 하여금 잠 못 이루게 하느냐, 그 노선을 밝혀내는 거예요.
대체 나는 어릴 적에 누구로부터 트라우마가 있어서, 누구한테 상처받은 것이 있어서 복수하는 식으로 보란 듯이, 누구한테 기죽지 않는다는 식의 야망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비전과 소망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내 죄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하는가를 유감없이 다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죄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약속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아담 때문에 죄인된 거예요. 우리가 아담에 속했기에 죄인된 것처럼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 속해버리면 이유를 막론하고 이 땅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의인되어버립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처럼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인 되어버려요. 그럴 경우에 우리는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삼위일체를 어떻게 보고 예수를 어떻게 보고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약속의 일부로 봐 준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이 나를 약속의 일부로 봐주게 되면
우리는 잘난 사람으로 그 약속의 일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날 때부터 잘난 체 하고 날 때부터 자기의만 챙기는 죄인의 역할로서 약속과 엮여져 버려요.
엮여진 약속의 끝을 살살 쫓아가면 ‘누구십니까? 나를 죄인 되게 하는 이 약속을 보여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게 되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루신 약속의 그물망 속에 나는 나름대로의 죄인의 모습으로 한 가닥 같이 얽혀 있는 겁니다.
이 관계망을 하나님의 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를 의를 내가 가위로 잘라서 꼭 챙겨 넣어야 그것이 의라고 여겼습니다. 내가 있다, 없다, 내가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있다, 없다, 이것은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나타나는 거예요. 복음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죄가 나타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약속에 포함될 경우에 진짜 내 모습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하고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잖아요. 책임지세요.’ 간단한 논리지요. ‘하나님이여, 신이 있다면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힘든 인생 살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십니까?’ 그 말은 ‘내 인생 따로 챙겼는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다치게 하십니까?’ 라는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거의 TV를 안 보는데 우연히 보니까 <천사의 선택>이라는 아침 드라마가 나와요. 은설이라는 여자가 교회에 찾아와서 ‘신이시여, 왜 나의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는 대사를 했어요. 거기서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그 나, 그 나는 약속된 나가 아닌데 비 약속, 약속이 안 된 비약속이거든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인데 비 약속에다 억지를 부리면서 약속된 하나님을 강제로 거기에 엮으려고 그 은설이라는 사람이 아주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드라마니까 그렇다고 칠 수 있지만 그것이 드라마로 그치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드라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사람은 자기를 잊을 수가 없어요. 아마 지옥에 가도 어깨 두드리면서 힘내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걱정하지 마, 음? 힘내! 지옥가도 재미나게 살 수 있는 거야.’ 아마 이렇게 자기에게 힘내라고 격려할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모르는 비약속입니다. 이 비 약속은 약속을 핍박하게 되어 있고 약속에 저항하게 되어 있고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고치지 말고 다 까발려 내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레위기에 나오는 거부와 거절의 장치, 어떤 인간도, 어떤 자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거절과 거부의 장치, 이게 오늘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누구도 천국에 오지 못하게 막아놓은 그것을
4절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게 만든
①그 성령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시게 되면
오지 못할 자이지만 내가 불쌍히 여겨서, 자비를 베푸셔서, 사랑을 해줘서 그냥 네 자격으로는 못 오고
②네가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더 이상 너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없어진 상황 이후에
③내가 네 안에 들어가서너를 나의 지체로서 영원한 천국백성 만들겠다는 것,
이것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바울이 환영받을 것이라고는 저와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지요. 사도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약속은 모르고 자기 의만, 자기 잘난 척만,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자기 구원욕구만 넘치는 비약속이 바다처럼, 태풍만난 시커먼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미 사도바울은 감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내가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든 것 앞에 ‘아, 힘들어주겠네.’ 라고 하면서 ‘하나님나라는 왜 이렇게 힘들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자기 근원부터 살펴서 ‘내가 아담의 죄 가운데 태어난 것도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서는 당연히 죄인 역할을 하라고 죄 가운데 태어났구나.’ 이제는 죄인 자체에 대해서 너무 꾸미지 말고 죄인 자체에 대해서 죄를 적게 지었느니, 적게 지었는지, 이렇게 양적으로 죄를 따지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염치없지만 ‘주여, 오늘밤에 제가 어디 갑니까?’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의 약속만, 주께서 그 다음순서 약속만 외친다면 이미 그 사람 속에 주의 약속이 내장되어 있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로마서 복음을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순교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우리는 순교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고 큽니다. 엉뚱한데 정신 팔려 있습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 축복받은 자랑, 은혜 받은 자랑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죄로서 약속에 편입되어서 구원받은 사실을 남한테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