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5강-하나님의 진노(1;18-20)이근호121028

아빠와 함께 2013. 2. 7. 11:02

하나님의 진노 (롬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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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2-10-28 13:25 
하나님의 진노

2012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8-20

(롬 1:18, 개역)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9, 개역)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개역)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회로망에 들어서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가능치 못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노선에 편입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그 모습은 ‘하나님의 진노’를 앞장 세워서 감행된다는 것이 사도가 전하는 바입니다.

이 대 자연은 온통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가짜 하나님만 날조해서 믿느냐는 겁니다. 참된 하나님께서 ‘진노’를 앞장 세우시는 이유는, 구원이라는 것이 ‘행함에서 행함’이라는 회로로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실 내용이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음 사건이 담겨 있기에 그러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진짜 하나님의 진노를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홀로 받아내십니다. 사도가 사도가 되기 이전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 여호와 하나님을 거론한 것입니다. 이 거론된 하나님상은 곧 인간의 의를 인정해주는 신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진노 받을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받을 대상이다’를 내용으로 삼아 주변에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그런 회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앞장세우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의를 전할 길이 없는 겁니다. 사도가 보기에 세상은 온통 진노의 하나님께서 진노를 일으킨 흔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의 일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요한복음 3:9에 보면,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정작 직접 예수님을 대면한 이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땅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의 내막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시한 예는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하늘을 향하여 처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누가 봐도 그것은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믿음으로 믿음에’이라는 노선으로 해석하십니다. 곧 “이와 같이 인자도 이 땅에서 들려야 하리라”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고 부활하시는 일의 의미를 모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행함으로 행함으로’ 나아가는 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진노를 앞장세우시고 일하시는 진짜 하나님의 취지를 알지 못하니, 그러니 인간들은 기껏 날조된 하나님만을 섬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는 자기 안에 ‘자기 의’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의’를 알고부터는 그것을 똥과 오줌 같은 더러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평생토록 신에게 잘 보여서 원하는 복을 따보겠다는 저축해놓은 자신의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찬란한 역사를 똥, 오줌으로 해석하게 만든 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라는 노선에 합류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취지는, 실제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사건들을 꾸준히 발생시키고 오신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행함으로’ 자기 의를 이루는 노선에 있다보니 그런 일을 보면서도 진노를 앞장세우시는 참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악마를 실제로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악마가 등장하는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 당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금식하시는 예수님’의 특이사항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홀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겠다고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름과 같이 말씀할 때,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는 특이현상을 접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느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행함에서 행함으로’, ‘자기 의’를 키우려는 자들에게는 도저히 납득되지 못하는 행동과 말씀을 하십니다.

진노를 앞장 세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은 참된 면목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 부부는, 용서와 속죄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것을 건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건드려주므로서 인간은 처음부터 흙에서부터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실제 상황을 알게 됩니다. 그 전까지 인간은 ‘태어나 버린 몸’은 알지만, “어디서부터 태어났는가”는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를 모르니 자꾸만 이와 태어난 것을 긍정해주는 가짜 하나님만 신봉하기에 이르른 겁니다.

모조리 가짜 신이지요. 따라서 참된 하나님은 인간들이 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지으면서 움직이십니다. 인간은 자신을 긍정하다보니 도저히 ‘진노를 앞장세우시는’ 그 하나님의 조치를 알 길이 없는 겁니다. 도리어 배척하기에 이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살았다고 여긴 자들은 신을 마치 죽은 존재로 다룹니다.

신을 공동묘지나 신의 말씀인 성경을 그런 음침한 곳에서 던져놓고서는 가끔 방문하는 식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도리어 인간이 죽은 존재입니다. 흙에서 와서 당연히 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하늘의 형상’을 입는 특별 조치는 십자가 피에 근거한 축복에 해당됩니다.

모든 자가 죽었으매 의인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흘린 피로 조치를 해주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됩니다. 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우리 성도는 발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의 노선’에서 ‘믿음의 노선’으로 들어온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 것이 남아있지 않는 자들이 곧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전히 모든 공로를 예수님에게만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0-29 18:27 
5강-롬1장 18-20(하나님의 진노)121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18-2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3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지난시간에 ‘사도바울이 행함으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의인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사람의 행함으로는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믿음으로 믿음에, 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되는 사람, 그렇게 되도록 사람을 조립할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활동을 개시한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유아 실에 벌이 나타났어요. 다섯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걸 하나님의 의라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기겁을 하지요. 에프 킬라 뿌리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원칙이 아닌데 왜 사람 사는 곳에 벌이 기어드느냐? 너는 네 동네로 가거라. 이쪽 동네는 사람 사는 동네다. 사는 것이 서로 다르다.’ 하면서 추방을 하지요.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것은 새로운 회로망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행함에서 행함으로’라는 그 회로망 속에서는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옥 갑니다. 그래서 새로운 회로망을 주는데 거기는 행함으로 끼어들 수가 없어요. 믿음이라는 라디오회로, 컴퓨터 회로, TV회로, 그 회로망에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믿음이나 기도나 또는 자기를 학대하면서 때리고 낮춘다고 해서 그 회로망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일단 거기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자체적인 회로망이 가동되어서 뭘 해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원칙들이 거기에 돌아다닙니다.
 
 

코카콜라나 간장공장에서 간장을 컨베이어 벨트에 놓으면 자동적으로 이동해서 완제품으로 나오듯이, 자동차 공장에서 부품 조립하듯이 주님께서 행함은 다 쏙쏙 빼버리고 거기에 믿음으로만 장착을 해서 마지막 천국 가는 작품을 보고 하는 말이 ‘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렀구나.’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이 천국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네가 여기에 합격했구나. 네 잘남과 의로움과 종교적인 수고로움, 이런 것은 말끔하게 소제가 되어 없어졌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자연의 질병’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자체가 신도 아니면서 신인 척 하면서 인간이 신이라고 우기니까 그때부터 일어난 현상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를 위한, 자기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따로 구축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 속의 모든 세포는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는데 암세포는 남의 동네와 와서 자기 동네 만드는 겁니다. 방사선을 쬐이든지 수술을 해서 무슨 조치를 해야 되거든요. 그 안에 보면 소복하게 자기 행함이 들어 있어요. 나는 교회 나왔다, 헌금했다, 전도했다, 교회 세웠다, 나는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만큼 노력해서 대학에 합격했다, 나는 이만큼 직장생활 잘했다, 전부 다 자기꼼수가 있어서 꼭 말벌 집 같아요. 119구조대를 불러서 뭘 하든지 해야 돼요.
 
 

벌집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세상에, 하나님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누구를 위한 하나님이냐 하면 나를 위한 하나님을 거기에 딱 모셔놓았어요. 사사기에 나오는 사람들 보면 하나님을 부르지만 전부 다 자기욕망과 야심과 자기비전과 희망을 충족시키는 미신적인 하나님을 그 벌집 안에 모셔놔요. 그러니까 그 안에 성당도 들어 있고 절도 있고 심지어 그 안에 교회도 들어 있고 교단도 들어 있고.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을 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지금 활동을 개시했습니다.’라는 말을 한 사도바울도 사실은 옛날에 그렇게 살았었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살았어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그렇게 살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의 아집이었고 오직 자신의 의로움, 내 행함으로 축적된 내 의를 옹호해줄 허위적 신, 가짜 신, 날조 된 신을 섬겼던 겁니다. 그렇게 했던 그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행함으로 행함’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그 회로망, 그런 노선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노선을 소개하면서 비로소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와요.
 
 

이 말은 뭐냐, 진노를 알면 전체가 보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안다는 것은 이 이 세상 전체를 다 알았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은 하나의 벌집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은 때려 부숴야 해요. 우리는 부숴야 할 것을 평생토록 세월아, 세월아, 하면 부서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던 거예요. 심지어 교회 가서 신의 축복과 신의 도우심까지 협조를 구하면서 부숴 져야할 것이 안 부숴 지고 그것을 그대로 쥐고 있으면서 ‘이것은 손대지 마세요. 내가 이것 구축하는데 얼마나 공들였고 노력했고 애썼는지 모릅니다. 평생 동안 이것 구축하는데 신에게 기도했고 평생 봉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랑하는 포장지로 둘둘 말아놓았어요.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느 날 하나님의 의를 알고 난 뒤에는 자기 의를 버렸습니다. 그냥 한 구석에 치워놓는 식이 아니고 ‘지금 당장은 너를 옹호 못하니까 언젠가 나중에 다시 볼게.’ 그것이 아니라 빌립보서에 보면 똥이고 오줌이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더러워서 못 보는 거예요. 내 안에 저런 더러움을 내가 생산했다니 그동안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 믿으면서 똥통이 다 된 거예요. 자기는 그동안 대우주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했다 하는데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행함을 옹호해주고 나를 독려해주고 나를 칭찬해줄, 내가 날조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자기를 확대하고 확장시키는 요량으로 하나님을 다 깔아놓은 거예요.
 
 

사람들이 별을 보면서 이런 소리 하지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그러면 내 별은 어디 있는데? 부동산에 등기 다 해놓았어요. 등기소에 자기 별 다 등기했어요. 성경 시편에 보면 모든 별은 주님의 것입니다. 저별은 주님의 별이에요. 별을 바라보는 나도 주님의 나인데 이것은 나는 나의 것이라고 선점하고 있으니까 눈에 띄는 것은 전부 다 자기 것이래요. 내가 꽃이라 불러줌으로써 비로소 나에게는 그 꽃이 의미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김춘수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어요.
 
 

내가 꽃이라고 불러주니 나에게 아름답게 다가와서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거예요. 부인이 얼마 전에 죽었지요. 온 천지에 하나님의 진노가 발휘하시는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세상은 존재한다. 누가 존재하게 했는가? 존재자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 존재자가 누구인가? 신이다.’ 이런 것은 말을 달리하면 ‘내가 여기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게 된 것은 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나를 존재케 한 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사랑할 것이다.’
 
 

이것은 다 자기가 자기를 옹호하는 이론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에요. 언제 과학자가 실험할 때 임상 쥐를 사용하면서 그 쥐의 심정을 알아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암세포를 흰 쥐에 주사해서 비틀거리는 것을 관찰해서 ‘약을 넣은 것과 안 넣은 것이 차이가 난다.’ 이렇게 했을 때 대체 그 쥐는 누구를 위한 쥐란 말입니까? 그 쥐를 위한 현실은 삭제해버리고 쥐나 코끼리나 이 모든 것은 오직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세계밖에 없기 때문에 그 안에 신도, 하나님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도, 인간을 위해서 봉사해야 될 것으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교회도 다 조작해서 만들어놓은 거예요.
 
 

교회가 인간을 버린 겁니다. 어떤 강의를 하게 되면 ‘성경 말씀이 그렇습니까?’라고 물으면 되는 것을 가지고 어느 교회, 어느 교인, 이런 식으로 교회가 왜 튀어나옵니까? 어떤 교인은 이렇게 안 한다, 어떤 교회는 이렇게 안한다, 어떤 목사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이,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 하더냐, 그것을 봐야지 왜 어느 교회를 말합니까? 그 교회가 가짜라면 그 가짜 버스타고 지옥에 갈 예요? 악마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에는 악마, 마귀라는 말이 자주 나와요. 우리는 아무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 앞에 악마, 사탄이 나타나는데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났을 때 예수님이 특이 현상을 보입니다. 그게 뭐냐,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과 마귀가 일대일로 대면했을 때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금식했겠는가를 묻는 겁니다. 특이현상이거든요. 다이어트하려고 했습니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고 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찮은 우리를 건지는 것은 오직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니고 성경공부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 자신의 피만이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만 그것을 보고 있었던 거예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만 보고 있었던, 예수님만 알고 있었던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그 사실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오게 되면 그 하나님의 깊은 것, 가장 깊은 것, 더 깊은 것은 없는 깊은 것, 날라리 같은 간증들 다 제켜버리고 가장 깊은 것, 가장 하나님만이 아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그것이 뭐냐, 십자가 피라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죽겠느냐 그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네가 하는 모든 짓들이 오죽 헛짓이었으면, 교회 다니면서 하는 모든 짓들, 전도한다면서 돌아다니는 모든 짓들이 얼마나 헛짓이었으면 전도해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느냐 그 말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사람들은 해답을 몰라요. 해답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지연만 시켜요. 꼭 나로 호 같아요. 올라간다고 하다가 연기해버리고 올라간다고 해놓고 연기해버리고. 자꾸 뭔가 해답은 모르고 지연만 시키니까 우리는 특이현상은 자꾸 배제해버리고 이렇게 행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행함의 회로,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실적 얻기, 종교적인 실적이나 축복 따내기, 복 받기, 남한테 칭찬받기, 우리의 소망 이루기, 이런 것들만 서로 컨닝하면서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정작 하나님의 의의 활동을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차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차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느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분노요 진노인데 그것을 왜 찾지 못하느냐?’ 이렇게 외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왜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행함에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회로와 그 노선을 우리에게 그렇게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뭐냐, 로마서는 이야기합니다. 행함이 아닌 것. 내가 행하지 않았는데 다른 분이 행해서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그것, 그 회로, 그 노선이 바로 믿음의 노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행함과 결부되고 믿음은 선물과 은혜와 결부된다는 방정식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 때까지 애를 못 낳는 것,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애를 못 낳게 하는 것, 그것이 전체를 믿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특이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 9절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제가 이 대목을 보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어요. 왜,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라고 주님 앞에서 놀라 자빠졌는데 어떻게 한국교회는 납득이 되는 이야기만 하느냐는 말이지요, 알아듣는 이야기만 그렇게 하느냐 그 말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 복 받습니다, 정성 드리면 복 받습니다, 왜 알아듣는 이야기만 하느냐는 말이지요. 정작, 진짜로,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던 그 당사자는 주님 앞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고 부자청년은 요새 말로 하면 ‘내가 진짜 예수 두 번 다시 만나면 개다.’ 할 정도로 예수님이 싫어서 등 돌리고 가버렸어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던 수많은 제자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고 난 뒤에는 ‘내가 당신과 상종 못하겠다.’ 하고 다 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너희들도 가지 그러냐? 가! 가라니까! 가란 말이야.”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제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다른 데는 영생이 없다는 뜻이에요.

 

다른 데는 영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평생 산 것이 영생과 무관한 삶을 살았는데 그 짓을 또 해야 됩니까,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 당시도 교회가 많았어요. 하나님, 신을 믿는 단체와 전당과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한 겁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 만나고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땅에서 일어난 일을 해석을 못하는구나. 땅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면서 무슨 하늘의 일을 알겠느냐?”하고 지적하시면서 땅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모세가 놋 뱀을 드는 겁니다.
 
 

모세가 놋 뱀을 들었다, 분석에 들어갑니다. 모세라는 인물이 있고 놋 뱀이 있다. 모세가 팔이 있으니까 중력을 반대해서 힘차게 높이 들었다. 그것 외에 다른 요소가 없지요? 자유의 여신상도 횃불 하나 들고 있던데 그게 뭔데요, 그게. 그게 무슨 특이현상입니까? 그게 ‘믿음으로 믿음에’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놋 뱀 드는 행함인데. 놋 뱀 드는 행함이잖아요. 이게 무슨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회로가 되겠어요, 그냥 놋 뱀 드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보고 그것 하라고 하면 전부 다 놋 뱀 하나씩 만들어서 들고 다니면서 ‘나 구원 받았다.’ 그런 짓 할 거라는 말이지요.
 
 

모세가 놋 뱀을 들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그것이 행함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행함에다 어떤 해석을 집어넣어서 그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회로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집어넣어서 사람들이 못 알아먹게 하시는 거예요, 못 알아먹게! 못 알아먹어야 진노의 대상이 맞잖아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땅에서 분명히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해도 네가 하늘과 연결을 못시키는 모양인데 내가 해석 붙여주마. 모세가 놋 뱀을 들은 것은…….” 니고데모 생각은 ‘모세가 작대기 같이 놋 뱀을 들었겠지.’ 하는데 그게 아니고 “…… 인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하늘 쪽으로 향하는 것인데 그 놋 뱀을 들어서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그것이 바로 나, 예수를 언급한 것이다.”
 
 

여러분, 이 해석이 납득이 됩니까? ‘납득이 안 되면 어떡허지~?’ (이게 개그도 아니고) 이것은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모세가 놋 뱀 든 것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결부된다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정말 너희가 믿음으로 믿음의 회로에 들어간다면 네가 아침에 밥 먹은 것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은 회로망, 같은 노선에 속해 있는 모습으로 이해가 되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내가 아침에 숟가락 들고 밥 먹은 것도. 내가 아침에 숟가락 들고 밥 먹는 것을 보고 옆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옆에야 부인밖에 없지만. ‘저 양반은 숟가락질이라는 행함을 하고 있구나. 손에 있는 에너지가 숟가락이라는 금속을 들어서 밥을 퍼서 입에 넣는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가는 회로, 그 노선으로 본다.’ 이 말이지요.
 
 

교회 목사가 교인들에게 그것만 가르쳐요. 헌금 할 때는 다림질해서 깨끗한 돈을 흰 봉투에 넣어서 내는데 윗강단에서 불러주는 것은 특별헌금, 아랫강단에서 몰아서 처리하고 나중에 주보에 이름만 나오는 것은 보통헌금,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 내는 목돈 같은 특별헌금, 그런 것은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행함으로 행함의 회로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오락입니다, 오락! ‘그것은 나도 하겠다.’ 누구나 하지요. 그것은 특이현상이 아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하는 것이고 개도 훈련시키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개도. 개, 부라우니도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것은 뭐냐, 왜 내가 놋 뱀 들었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심지어 내가 예수 믿어도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라는 특이현상을 주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은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살리는 작업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 죽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이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죽은 존재가 돼요. 내가 더 사는 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은 저 공동묘지 속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묘지에 언제 갑니까? 일가친척이 죽어도 공동묘지에 가는 것은 벌초나 하러 가는데 요새는 그나마 관리인이 다 해주고 설 때 한 번, 추석 때 한 번, 제삿날에 한 번, 다 해서 세 번밖에 안가잖아요. 그만큼 잊혀 진 존재다, 그 말입니다. 왜 잊혀야 돼요? 살아 있는 나한테 24시간 충성을 다 해야 되지 그 죽은 조상한테 충성할 것은 뭐가 있어요?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살아 있다는 그것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데 나 말고 또 누가 살아 있겠어요!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마귀를 보지를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함으로 말미암아 그 현장에 마귀가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성경이 어려워요. 예수님께서 움직일 때 거기에 마귀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마귀를 직접 눈으로 못 봐도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 특이현상을 나타낼 때 그 자리에 마귀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했을 때 마귀는 놀리듯이 이야기했습니다. “배고프지?” 무슨 뜻일까요? ‘예수야, 네가 사는 것이 우선이지?’ 그런 뜻이에요.
 
 

“너는 지금 네가 살아 있고 또 살아 있는 네가 더 살아야 된다는 그것만 네 머릿속에 꽉 차 있잖아. 마귀 속에 있는 인간은 다들 그랬어. 한명도 예외가 없었어. 예수 너도 마찬가지잖아. 40일 동안 물도 안마시고 밥도 안 먹고 금식을 했으니 우선 급한 게 뭐야? 네가 살아야지.”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 답변은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 그것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있다면 그 안에서 나는 죽어도 사는 것이다.” 아주 특이현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야기한 그것만 쏙 뽑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대화상대자가 악마라는 사실을 자꾸 놓쳐버리는데 놓치면 안돼요.
 
 

‘밥 먹고 살아야지. 밥 먹고 살아야지.’ 이것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악마가 우리 속에서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그 음성이에요. ‘살아야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악마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신 것은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일은 항상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십니다. 죽은 이삭을 되살리지요. 그 현장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금식했을 때 그 현장에 악마가 있었지 않아요? 바로 굶어죽기 직전의 그 예수님에게 천사가 와서 힘을 주고 양식을 줍니다.
 
 

하나님 됨의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것, 진짜 네가 믿어야 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회로, 누구를 믿어야 되느냐 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자는 어떤 특이현상이 나타나느냐 하면, 우리가 죽어 마땅하고 우리는 흙이기에 흙 이상의 대우를 받을 생각을 말라고 질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 곁에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너는 흙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마치 죽은 조상을 공동묘지에 보내듯이 성경책도 거기에 보내버렸어요. 우리는 평소에 성경책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나를 살리는 일과 관련된 일만 했을 뿐이에요.

 

성경말씀을 하면 천리 밖으로 도망치고 말아요. 다섯 살 애들 밥 먹이는 것과 똑같아요. 숟가락에 밥 퍼서 김치조각 올려놓고 따라다니면서 밥 먹으라고 하잖아요. 도망 다니는 애 잡아서 입 벌려서 밥 퍼 넣어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의미가 그 의미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예수님 혼자만의 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죽어 있다는 겁니다. 자꾸 내가 살아 있다, 하니까 하나님은 죽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죽은 존재입니다. 죽은 존재인데 그 죽은 존재인 이유가 진노 받아야 합당한 존재이기에 죽은 존재거든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기에 진노의대상인 거예요. ‘진노의 대상이라? 내가 전에 술집에 가서 그런가? 내가 길가다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서 진노의 대상인가?’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 마세요. 이것은 조상을 잘못 만나서 그래요. 조상 잘못 만났다고 할 것까지도 없어요. 조상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아담이 벌집을 건드린 겁니다. 오늘 벌집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아담은 자신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만들어진 것만 알았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은 몰랐었어요. 오늘날 우리하고 같아요. 오늘날 우리도 ‘나 여기 있다.’만 알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해서 나 여기 있도록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오늘 새벽에 제가 꿈을 꾸면서 뭘 봤느냐 하면, 남원의 촉석루에서 이 도령과 춘향이가 은은한 달빛 가운데 데이트 하는 꿈을 꿨어요. 촉석루인가 했는데 촉석루가 아닌 것 같아요. 듣기는 들었는데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얼른 새벽에 인터넷 열어서 남원에는 촉석루가 아니라 광한루가 있다는 거예요. 하여튼 일단 그것은 수정하고. 은은한 달빛 속에서 이 도령과 춘향이가 만날 때 그 둘이 자신들이 흙인 것을 알았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거든요.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저주를 모르니까 우리 사랑 아름답게 맺도록 하옵소서, 이런 날조된 하나님만 필요하지 진노 받아야 마땅한 저를 구원 하소서, 라는 진짜 하나님은 이 춘향이와 이 도령에게는 필요치 않은 겁니다. 우리가 기껏 믿는 신이 그것밖에 안돼요. 이 도령과 춘향이, ‘신이시여, 하늘이시여, 우리 사랑 맺게 하옵소서.’ 그런 하나님. 은은한 달빛 아래서 신을 찾지만 그게 만약에 분뇨차가 아침에 오게 되면 그 로맨틱한 분위기 다 깨지잖아요. ‘냄새나는데 저리 가세요. 연애하는 것도 안 보입니까?’ 할거예요.
 
 

세상에, 자기가 데이트 할 때는 쓰레기차도 오면 안 되고 달빛도 은은해야 돼요. 먹구름 끼고 천둥치면 분위기도 안 살고.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되고 자기의 낭만을 위해서 자기의 고상함과 아름다움을 한껏 부풀려 줘야 되는 세상이냐는 말이지요. 이 가을이라는 것이 남자들의 코트 깃 세워서 10월의 마지막 날을 부르면서 데이트 하라고 있는 가을이 아니잖아요. 예? 그런 노래 들으라고 있는 가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하라고 있는 가을이에요.
 
 

가을이 누구를 위한 가을인지를 몰라요. 가을이 오면 낙엽지고 찬바람 불면 낙엽 지고 나무도 차갑게 된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은 창세기 8장의 노아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준 것은 세상사는 것이 너무나 참혹하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일시적으로 질서를 줘서 밥 먹고 살게 하지만 그 밥 먹는 그 목숨이 결코 진짜 생명이 아니고 그것도 죽음의 일부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상 모든 것을 준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세상을 너무 허무하게 보고 염세적으로 본다, 이렇게들 하지만 그것을 한 번 달리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고 그냥 시체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살려내고 있는 것인가, 비로소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습니까?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 대로 탕자가 아버지가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아버지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크게 느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버지와 끊어진 상태, 아버지가 없는 상태로 보내버린 겁니다. 아담의 선악과 내용이 어려운 이유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을 건드릴 때 비로소 아담마저도 하나님의 작업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담이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말을 해놓고도 참 어렵게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렵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뭔가 건드려야 돼요. 내가 죽는, 내가 무가치하게 되는 사태와 계기가 와야 됩니다. 내가 나를 건드려서 ‘나는 내가 전부가 아니고 전부는 따로 있고 나는 그 전부를 위하여 같이 휘말려 움직이고 있는 부속, 일부로서 거기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럴 때 나의 행함은 의미가 없어지지요. 그 의미가 없다는 것, 나의 행함이 의미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회로 안에 담겨 있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불의로 진리를 막는”, 참 이것도 어려워요.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이 복음대로 이야기합니다. 진리와 불의가 둘 다 나타나는 그 현장에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의의 역할은 누가 하느냐, 저와 여러분, 우리가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의한 자. ‘아이고,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그냥 살아도 불의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내 의를 위해서 살아가기에 그 자체가 불의가 되기에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크게 부담 갖지 않고 평소 사시던 대로 사시면 불의한 것 됩니다.
 
 

더 거기에 대해서 가르칠 필요가 없지요? 평소에 하시던 대로 살면 돼요. 문제는 진리가 나타나야 하는데 진리는 예수님만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의한 우리, 죄인인 우리와 의인인 예수님과 만날 때 그 현장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 한 그 문장을 간단하게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우리와 예수님이 만날 때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진노, 사랑하는 아들마저 버리는 아버지의 진노가 유일하게 나타난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K-팝 가수들이 십자가 목걸이 걸고 설칠 때 거기서 십자가가 달랑거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달랑거린다고 보면 돼요. 차 앞에 십자가를 걸어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교회에 십자가 걸어놓는 것은 ‘우리는 진노 받을 자가 맞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이야기했잖아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그거 외에는 영생은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것을 건드렸을 때에 아담은 알았어요. 내가 여기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 항상 나의 원래의 원천인 자리는 뭐냐, 흙이었다는 겁니다. 흙이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은 당연한 거고요. 흙인데 어, 하늘에 속한 천사처럼 영생을 얻는다는 것, 이것은 특별배려입니다. 이것은 축복이에요. 이것은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간다, 이것은 당연한 거예요. 불의한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이 불의한 넓은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싸이 조회 수가 5억을 넘었다, 이것은 당연한 겁니다. ‘놀 때는 노는 여자’(강남스타일) 이런 것이 다 우리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복음 설교하는 U-튜브, 200명도 안 된다, 이것은 특이한 겁니다. 좁은 길을 간다, 이것은 특별히 혜택 받은 겁니다. 특별히 해준 거예요.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한다는 이것은 특별한 거예요. 왜, 세상의 전부를 알았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의 전체를 알았으니까.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해답을 알고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전체를 알고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서 봐주고 있다는 거예요. 흙으로 돌아가는 그 와중에서 ‘너, 흙으로 가지 마. 이제 흙에 속한 형상은 끝났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말씀처럼 특별히 우리를 빼내주는 겁니다. 여러분, 빼내주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여자들은 몰라요. 남자들 논산 훈련소에 가서 ‘이제 죽었다. 전방에 배치되면 죽었다. 집에 가고 싶은데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앞으로 이 짓을 2년 동안 하려니 기가 막힌다.’ 하고 겁내고 있을 때 보안대에서 와서 “어이, 너 ○○집 아들 맞지?” “맞습니다.” “내가 이야기 해 놓았다. 너희 집이 대구 맞지? 영천의 3사로 빼줄게.” 이럴 때, 동기들 다 전방으로 배치되는데 “3사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면서 매주 집에 와라.” 할 때 이것은 2년 동안 휴가 간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제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고 제 동생이 그랬다는 거예요. 저는 아버지가 면회도 안 왔어요. 일체 빽도 안 썼는데……, 아니 썼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 아니니까. 축복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그 피 앞에서 그 피가 전부라는 것, 그 피가 전부고 그 피가 생명이고, 내 믿음과 내 소망과 내 사랑이 절대로 예수님의 피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 내 종교적인 행함, 신앙적인 행함도 예수의 피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을 사도바울은 성령 받아야, 특별히 성령 받아야 이런 행운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실컷, 원 없이 마음 놓고 하나님의 저주를 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도 불의는 진리를 만나야 되는 것처럼 지금 오늘날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의는 저주와 진노의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 속까지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까지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야 돼요. 마음까지 임해서 저주받아야 될 인간이 오늘도 또 살려주시고 또 살려주시는, 그것도 모든 죄를 의로 바꿔주시는, 그러한 혜택을 우리의 모든 일상가운데서 온 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그럴 때 누군가 우리를 푹 쑤시듯이 “너, 교회 나가더니 많이 착해졌네. 술도 끊고 정말 착해졌네.” “이 사람아, 행함으로 행함이 아니야.” “그럼 뭐야? 너 착한데.” “아니야, 착한 것이 아니야. 나도 저주받을 짓밖에 안 해. 하지만 주께서 피로써 용서에서 용서로 매일같이 새롭게 조립해 내시는 거야.” 이렇게 되면 나를 위한 세계가 없다는 것,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지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만을 위한 나의 세계라 하는 것은 허위요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것이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에 나를 만들어서 심어 놓은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은 전부 다 하나님만 의로워지고 예수님만 의인이 되어서 그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만이 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의, 믿음이 우리 속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하면, 평균치 되는 생활만 할 뿐이에요. 이 세상은 기계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도시는 기계’라는 말을 듣고 참 많이 느꼈어요. 왜, 틀에 박힌 인간만 생산하기 때문에. 개성도 없고 그저 남 따라가기 바쁘고 유행 따라가기 바쁘고 특이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끝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세요. 우리 신자들끼리만 알아듣고 아무도 못 알아듣는 말을 하세요. 그래야 특별한 배려,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24시간 눈뜨면 나밖에 모르는데 그것이 바로 참 철없고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고 질병인줄 압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라는 저주와 진노를 통해서 다가왔을 때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죽음인 것을 우리는 자랑삼아 마음껏 남들에게 언급할 수 있는 새로운 저희들의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