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롬1장 8-12(신령한 은사)1210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3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8-12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도바울이 ‘감사함’을 이야기하는데 사도바울의 관심사가 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사한지, 아니 요새 세상에 무슨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인데 뭘 로 감사하는지 그 내용을 들여다보니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것 때문에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몸이 아파도 감사하겠네요? 감사하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생활이 어려워도 감사하겠네요? 감사하지요. 왜 감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의 복음을 믿는 믿음, 여러 곳에서 그것을 믿는다고 하니까,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니까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도대체 자기 자신이 잘된 것에 관심을 두고 그것이 잘될 때 감사한 것이잖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이렇습니다. 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서 감사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좋은 일이 일어나서 감사한 거예요.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우리는 힘든 인생이지만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는 거지요.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때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감사한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것을 나만 믿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믿게 되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일에서만 고마워하고 즐거워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꺾었다는 것, 그것을 꺾었다는 것. 나는 나에게 좋은 일 생기면 그것을 즐거워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는데 그것을 꺾어버리고 이미 벌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복음 때문에 후대에 살고 있는 내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모든 노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기적이 개입되어 있는데 그 기적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지요. 저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는데 본문에서는 “신령한 은사”라고 했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선물이라는 뜻이거든요. ‘신령한 선물을 받았기에 여러분은 인간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 세계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2절에 “피차 안위함”으로 ‘로마에 있는 당신들이나 나나 피차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뭔가를 가지고 감사하고 교제하고 즐거워합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과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에게 주신 신령한 선물과 이미 내가 받았던 신령한 선물이 같은 선물인 것을 확인하면서 화들짝 놀란다는 이야기입니다. 놀라버렸다는 이야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것이 비상식적이고 왜 놀랄 일인가, 그것은 오늘날 교회 모습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올 때에 어떤 마음으로 오느냐, 오늘도 내가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을 행하면 은혜를 주십니까, 라고 은혜 받기 위해서 와요. 오늘도 내가 무엇을 행하면 그 행한 것으로써 하늘에서 준비된 복을 저에게 줍니까, 라고 기대하는 거예요. 그것을 받으면 내가 옆 사람보다 더 클 수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가 발생되기 때문에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참된 복음을 외치는 교회에서는 뭐냐, 왜 우리는 행해도 은혜가 안 오느냐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은혜라든지, 선물이라든지, 은사라든지, 축복이라든지, 생명이나 구원, 천국, 이 모든 것은 행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에게 줄기차게 줍니까,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복음을 외치는 교회입니다. 빨리 말하니까 못 들었다, 너무 빠르다, 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존 교회는 올 때부터 ‘내가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내가 원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나는 은혜에 갈급한 사람인데 내가 무엇을 행하면 은혜가 옵니까? 예배 참석하면 됩니까? 헌금하면 됩니까? 무엇을 행하면 은혜가 옵니까?’라는 것은 가짜, 사기꾼들의 교회고 진짜 교회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자꾸 은혜를 주십니까? 대체 이 은혜는 누구를 위한 은혜란 말입니까? 은혜가 누구를 통해서 주어지기에 나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은혜를 주십니까? 이것은 나의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복음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복음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이룬 것이 흐르고 넘쳐서, 주체 못할 정도로 넘쳐서 구제품이 너무 넘쳐서 그냥 내 갈길 가던 나에게 주어진 겁니다. 유대인들이 갖다 버린 그 사과를 이방인들이 주워 먹었는데 왜 그리 달고 맛있는지. 정작 구원받았다는 그 백성에게 버려진 그 복음이 이방인, 율법도 없고 율법 행하지도 못하고 그런 능력도 찾을 수 없는 우리에게, 맨 날 죄만 짓는 우리에게 죄 없다 하시고 의인이라고 지목하시고 의인들만 모이는 그 천국에 넣어주시니까 도대체 이 조화는 어떤 일이 이 세상에 벌어졌기에 아무것도 안 해도 이렇게 천국에 가게 되었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신령한 은사……, 은사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선물이라 합시다, 용어 하나 사용하는 것조차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조심해서 써야한다는 이것이 참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은사라는 것이 부르짖어야 얻는 것처럼 이해되어 있으니까 제가 은사라는 말을 쓸 수가 없어요. 가만있어도 주는 것이 은사지 부르짖어서 주는 이것은 노임입니다, 노임. 품삯이지 그것은 은사가 아니잖아요. 기도원에 가서 소나무 뽑아야 은사 줄 것 같으면 그 소나무를 뽑는다고 애썼던 그것은 일당이죠, 일당. 일당 받고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거저 가는 것이지 임금을 주고받으면서 노동을 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거든요. 천국에 대해서 뭘 알기를 하나 성경에 나오는 개념 하나를 제대로 알기를 하나 그저 지성이면 감천일 것이다, 하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서 엉터리 예수 증거 해서 축복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으로 사기나 치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노인들에게 건강식품도 아닌 것을 팔아서 폭리를 취하는 그 사람들 참 나쁜 사람들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들을 상대로 해서. 그것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성령도 안 받고 복음도 모르면서 사람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커미션 챙기는 이것은 영적 사기꾼이잖아요. 바로 이 로마서를 썼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영적사기꾼이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여러분에게 사기를 많이 쳤습니다. 이제는 신령한 은사를 받고서 내가 옛날에 했던 모든 일들이 다 영적인 사기였습니다.’ 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깜짝 놀라버린 거예요. ‘어, 나만 받은 것이 아니네. 그걸 어떻게 믿어? 행해서 복 받지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서 복을 받아? 이것은 말도 안 돼. 그런 것을 어떻게 믿어?’ 자기가 놀라버린 겁니다.
어떤 교회에서 십자가복음을 전했답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그쪽에 있는 부목사가 화가 나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혼을 내 줘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아, 바로 그것다!’ 하는 거예요. 그 복음을 모르는 부목사가 얼마나 복음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복음을 모르는 부목사가 복음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 뭐냐 하면, 혼내주라고 한 대목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십자가복음을 받은 사람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아는 사람은 혼나야 됩니다. 실컷 혼나봐야 내가 진짜 믿는 자인지 아니면 가짜 믿는 자인지 그것이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것이 왜 있는 거예요? 그냥 예수 믿고 곱게 살아가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일부러 환난, 곤고, 핍박, 기근(가난) 이런 것들, 이 모든 것을 합쳐서 보면 “도살할 양” 같다고 했습니다. 도살당하는 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요. 혼나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으로 인하여 집중 혼남을 당하는 대상이 되고 왕따의 대상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끊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날마다 우리가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복음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혼을 내고 나를 나무라고 비난하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 나도 전에는 그런 마음가짐이었었습니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복음을 혼냈습니다, 그런데 웬 신령한 은사를 받고 부터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안 끊어진다는 거예요. 이빨로 잡아 당겨도 이것이 안 끊어진다는 겁니다. 왜 그리 질긴지 찾아보니까 거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어버렸다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이냐 아니냐, 복음을 믿느냐 아니냐가 검증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살았던 모든 생애가 아버지께 버림받은 생애입니다. 지금 제직회가 아니지만 옳으면 가(可)하시고 ……, 이제 퀴즈를 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버지께 버림받은 일생이다.’ 맞으면 아니면 왼쪽.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그것도 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인생이었다.’ 맞으면 ○, 틀리면 × 하세요. 우리가 신령한 은사를 받을 때 그냥 포장지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택배 받을 때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황금색 보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황금색 보자기는 그 안에 황금 들어 있는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안에 사과상자 들어 있어요. 신령한 은사라는 말, 그런 멘트는 누구나 날릴 수 있습니다. 진짜 황금 보자기에 쌓인 것, 진짜 복음은 뭐냐, 예수님의 일생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인생이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령한 은사가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인생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인생이 되는 겁니다. 제가 한국교회 예를 들었지요. 한국교회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은혜 달라고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짜 교회에요.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오는 것은 가짜교회고 ‘하나님께서 버려도 당연하구나. 그런데 어떻게 신령한 은사를 주셨는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신령한 은사내용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번쩍번쩍 하는 영광으로,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황금보자기 척 폈는데 피가 확 쏟아졌어요. 엄마야, 하고 놀라 자빠졌어요. 이게 웬 피냐, 그 말이지요. 보자기속에 인삼이나 홍삼 같은 것이나 들어있는 줄 알았더니 다 아니고 물컹, 하고 피가 들어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게 웬 피냐, 그 말이지요? ‘피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참, 하나님도 장난꾸러기죠. 우리를 놀래키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은혜는 주지 않고 우리 대신 버림받은 어떤 청년, 버림받은 어떤 아저씨, 그 아저씨의 일생을 우리한테 은사로 줘버리는 겁니다. 그 은사가 오기 전에는 신의 말씀, 십계명부터 해서 고상한 티, 착한 티, 성실한 티는 다 내면서 하자 없는 완벽한 윤리와 도덕으로 거듭나고 또 거듭나는, 그야말로 도 닦고 참선하듯이 마음의 찌꺼기와 먼지를 닦아내듯이 털고 또 털어내서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거울 같은 깨끗한 마음씨를 담아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수준으로 왔는데 거기에 던져준 것은 뭐냐, 피를 준 거예요. 검붉은 피를 준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십자가는 우리가 공부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 분석해 봐야, 십, 자, 가, 세 글자 밖에 더 됩니까? 언어분석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왜 내가 꼭 이 피를 받아야 될 사람인가? 왜 주님께서는 이 피 묻는 것을, 이것이 진정 너를 살리는 선물이라고 이것을 왜 나에게 주시는가?’ 그것이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부르심을 입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전에는 우리는 무엇이었는가, 그 전에 나는 나의 소유에요.
나는 내 것이 되는 거예요. 나는 내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 확신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미래의 이미지를 상상하기 마련이에요. 그것이 미래고 꿈이고 기대치고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항상 그 미래의 그림을 그릴 때는 나를 그 미래의 주인공, 중심으로 놓고 거기에 후광으로 장식해 놓고 그것을 내다보면서 오늘의 어려움, 인생의 오늘을 사는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겁니다.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것을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자기 육체가 아프면 견디지만 사람이 자아가 아프면 자살한다 했습니다. 육체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면서 희망을 갖지만 자아가 아플 때는 자살 외에 어떤 다른 대안이 없어요. 왜 그런가, 육체가 아프면서 기어이 견딜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지금은 비록 아프지만 언젠가는 건강한 나, 건강한 자아를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의 주사 맞는 아픔도 그리고 돈 들어가는 아픔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가 망가져 버리면, 자아자체가 망가져버리면 망가진 자아를 대체할 자아는 없기에 더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요. 이 말은 끝까지 괴로운 인생이지만 끝까지 괴롭더라도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 그러면 괴로운 나를 내가 위로해주고 내가 보살펴 주는데 그 위로해주고 보살펴주는 나는 미래의 나에요. 그런데 그 미래의 나가 희망이 없어버리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그 보살펴주는 자아도 이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이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느니 차리라 끝장을 내는 것이 너도 좋고 나도 좋으니 죽자, 그래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자살 예비자입니다.
그 자살 예비자들이 따로 모여서 주일 11시에 교회와도 교회당이 자살예비자들의 집회에 불과한 거예요. 자살하기 전에 어떤 희망, 은사를 주옵소서, 이러면서 빌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그런다니까요. 몰라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미 사울이라는 사람, 사도바울이 과거에 다 해 봤던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내부에서 솟아나는 공포라 합니다. 자기 내부의 불안과 공포가 묵시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부에 있는 불안감이 종교를 찾게 되어 있고 신과 예수와 삼위일체를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어떻게든 지연시켜 보려고, 어떤 희망, 신이 주신 어떤 희망을 내 소유로 만들어서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번에 주일날 교회 가서 은혜 받았으니까 그것으로 한 주일 버텨라. 참아, 참아, 이겨내야 되는 거야!’ 자기가 스스로를 격려해요. 그렇게 하지만 그 과정을 분석해보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전부 다 ‘나는 나의 것’이 되는 거예요.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냥 시간만 지연될 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은혜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복음 아는 목사가 “뭘 행해도 은혜 못 받습니다.”
그 한마디에 삐져서 다 나가버립니다. 은혜 없었는데 이것을 하니까 이것을 행했다는 그 보상과 대가로써 은혜가 주어질 그때 교회 나오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뭘 해도 추가적인 은혜가 되는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할 때는 다 소용없는 거지요. 제가 가락교회 가면서 어떤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은 미국에 있는 목사님인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복음을 전했더니 하나 둘 나가기 시작하더니 그만 다 나가버렸답니다. 뉴저지에 있는 목사님인데 지금 나간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다섯 배 많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 교회도 계산해 봤지요. 계산이 좀 복잡해요. 왜 희망을 안주느냐, 그 말이지요. 나는 내가 앞으로 잘 된다는 희망 때문에 내가 나를 간수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왔는데 이 나를 관리하고자 하는 이 나의 애틋한 마음을 교회는 충족시켜주지 않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뭐라고 합니까? 신령한 은사가 오면 이제 당신의 뜻은 끝! 우리 인생이란 것은 끝이 되면 그동안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라 질질 끌려왔다는 것을 끝 지점에 가서는 압니다. 참 엔간히 다른 데로 새려고 했는데 고삐를 쥐고 질질 끌려온 거예요.
그 끌려온 자리가 뭐냐, 그걸 다윗언약에서는 두 자로 ‘아들’, 천국, 아들의 나라의 그 아들, 아버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아들, 아버지가 친히 만들었던 그 아들, 그 아들의 내막은 다윗언약대로 성취가 되어야 아들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것은 예수님의 일생 전체가 다윗에게 주신 그 약속을 이루어서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로 완성되어서 비로소 아들이 된 겁니다. 그것을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그 다음에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것이 바로 내가 관리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우리보고 오병이어 행하라, 우리보고 물위를 걸어라, 우리보고 산상설교 행하라, 하면 우리는 힘들어서 못합니다. 종교가 짐이에요, 짐, 종교가 짐입니다. 종교가 짐이지만 그 종교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어서, 자기관리와 자기 가꾸기에 달리 대안이 없어서 그 싫은 종교지만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으니까. 종교가, 진리가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옷을 하나 사 입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사 입은 옷 중에서 맞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이번 옷은 딱 맞아요. 희한해요. 그래서 옷을 안 입은 것 같아요. 이 말은 뭐냐, 종교는 옷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도 아니고 옷도 아니에요. 종교는 안 입어도 돼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인데 그 옷은 벌거벗어도 괜찮아요. 옷을 안 입어도 돼요. 주님께서는 우리 자체를 아들이라는 옷으로 바꿔주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라는 옷으로 바꾸는 것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버림받으면 돼요. 아, 이젠 골치 아프다. 버림받았다고 좋아했는데 버림받아버린다면 구원받을까요, 버림받을까요? 헷갈리게 되었지요. 버림받으면 되는데 예수님의 일생이 십자가의 일생이라서 버림받은 일생이에요.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천번 만번 읽어도 거기서 이런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임을 모르면 그것은 읽어도 소용없는 거예요. 백날 읽어도 신나는 것만 눈에 보이지 ‘아, 이런 식으로 버림받는구나.’ 하는 것은 보이지를 않지요. 여기서 제가 줄 수 있는 힌트, 포인트는 이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사이는, 아버지는 버리시는 분이고 아들은 버림받을 수 있는 자가 아들이에요. 어떻게 버림받는가, 아버지를 믿고 버림받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했던 모든 십자가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왔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왔거든요. 비둘기처럼 오신 성령은 기어이 예수로 하여금 그 쓴잔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쓴잔을 먹는 순간 예수님은 죽어요. 예수님이 쓴잔을 마셨다는 말은, 그리고 성령님이 예수님에게만 왔다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과 예수님을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은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버림 안 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쓴잔은 뭐냐, 버림 안 받고 싶어도 버림받도록 독촉하고 밀어 넣는 능력과 은사를 받은 거예요. 자, 천국가면 그냥 죽어서 가면 되는데 왜 버림받는다는 그 절차가 필요한가? 사무엘하 7장 14절, 15절에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나라는 영원하다’고 하지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는 경우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다 아들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들은 하나님의 주신 언약, 약속이라 합시다, 아버지께서 본인만 아시면서 몰래 감추어진 약속을 제시해서 그 약속을 수용하는 자만 아들이 되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결정을 했어요. 저보고 따지지 마세요. 아버지가 결정한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야 아들이지 ‘우리가 아들입니다.’라고 피켓 들고 나서봐야 아들로 인정 안 해준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아들이면 아들 되는 요건이 충족될 때만 아들이에요. 그것은 죄로 징계를 받고, 그렇게 죄의 징계를 마무리 지어야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 징계 받은 아들을 통해서 영원한 아들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우리로서는 상당히 복잡하지요. 나 여기 몸이 있는데 누가 만들었지?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이 저 만들었지요? 저 사랑하지요? 사랑하니까 저 죽어서 천국 보내주세요.’ 얼마나 쉽습니까? 이렇게 간단한 것을 놔두고 어떻게 다윗언약이나 다윗약속이니, 이스라엘만 아들이고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도 아니고 오직 다윗만 아들이고, 그런데 다윗이 아들이 아니고 나중에 다윗의 자손이 아들이고, 이렇게 복잡하게 성경은 엮여져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도 모르는 게, 아버지도 모르는 주제에 아들이라고 덜컥 나서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함입니다. 만들어졌다고 아들이 아니고 안 만들어졌다고 아들이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에 성주군 선남면에 있는 남양공원묘지에 갔었어요. 거기 보니 아주 특이한 구역이 있어요. ‘부활지역’이라는 데가 있어요. 거기에는 십자가가 오롯이 담겨 있어요. 그렇다면 나중에 주께서 구름타고 재림하시면 저쪽 지역에는 부활이 안 되고 이쪽 지역만 솎아내듯이 부활될 때 ‘아! 참, 신나겠다.’ 시비 트지 말고 좋게 생각해서 이 사람들은 죽기 전에 평소에 ‘난 부활되고 싶어요, 부활되고 싶어요.’라는 마음으로 섬겼으니까 부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게 저 혼자 좋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저쪽은 뭐냐, 부활지역 말고 이 경계선 너머 저쪽은 뭐냐 하면, 부활 그런 것 없이 살았다 그 말이지요. 부활 되고 싶지 않다면 다른 기쁨으로 살았다는 말인데 그 다른 기쁨은 뭘까? 다른 기쁨이 뭐냐 하면 안 죽는데서 오는 기쁨이고 이쪽 부활 지역에 있는 사람은 ‘빨리 죽어서 빨리 부활되고 싶어요.’ 하는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고. 따지지 마세요. 그냥 좋게 이야기해서 그래요. 그런 사람 거의 없습니다만 좋게 이야기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 라는 은사, 그게 바로 신령한 은사가 되는 거예요. 신령한 은사를 받아서 ‘빨리 아버지와 합류하고 싶어요. 부활되어서.’ 이 능력이 아무에게서 주어지는 능력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초반에 이야기했듯이 사도바울이 화들 짝 놀라는 겁니다. 나만 그런 은혜를 받은 줄 알았더니 저쪽도 받았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서 죽음에 이르렀고 그 죽은 자를……, 그 다음에 뭐가 와야 되느냐, 성령이 와야 돼요. 예수님이 알아서 툴툴 털고 ‘이제 시간 되었지? 72시간이라고 했지? 71시간 59분, 58초, 59초, 땡! 일어서야지.’ 툴툴 털면서 무덤 문을 열고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잖아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편지와 히브리서에 나와 있어요. 여러분들은 그것까지 신경 안 쓰지만. 예수님이 누워 있다가……, 시계는 차고 있어야 되지요, 시간 맞춰야 되니까, 짠! 하고 일어나는 식으로 부활된 것이 아닙니다. 자진해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일으켜 세운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사이는 그냥 긴 손이 오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은사, 성령이 와서 죽은 예수님을 살려 낸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 11)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로마시민 중에 실제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놀래버린 겁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한 그 사건에 근거해서 뭔가가 나오는데 그 나오는 것이 뭐냐, 그게 성령이었고 성령은 우리가 평생 살면서 전과 몇 범이냐,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이혼을 몇 번 했느냐, 성적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은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그냥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해서 저쪽을 예수님처럼 죽은 가운데서 살려낸다는 사실을, 세상에!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믿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걸 믿는 사람이!
십일조도 한 적도 없고, 헌금 한 적도 없고, 예배 참석한 적도 없고, 교회 나온 적도 없는데, 선교 헌금 한 푼 준적도 없고요. 목사 넥타이 사준 적도 없고, 없는데 그냥 성령의 은사가 오니까 주께서 버림받은 것을 보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딱 버림받기 좋을만한 그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나는 나의 비전과 희망과 소망, 오직 나는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나만 사랑해서 교회 기어 나왔기 때문에. 남들이 되고 싶은 그것을 되게 해 달라고, 전능하신 능력을 받아서 저 사람 말고 이런 사람, 노숙자 말고 청와대 들어간 저런 사람, 저런 사람 되게 해달라고, 우리 집안이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자기만 사랑해서 나의 자아가 여전히 계속 나의 것으로 남게 해 달라고, 내 것을 남의 것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제발 내 것을 다치지 말게 해 달라는 식으로 자기만 사랑하면서 살아온 그런 인간이 신령한 은사를 보고 예수님 버림받은 것을 보고 ‘사실은 내가 버림 받아야 됩니다.’라고 할 때 그것은 성령의 은사, 신령한 은사를 받아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겁니다. 나의 것으로 시작했다고 그 중간에 신령한 은사가 주입되어 버리니까 구멍이 파여서 나의 것으로 시작했던 그 노선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구미에서 ‘불산’이라는 그 유독가스가 퍼져서 완전히 황폐화 되었지요. 저는 그런 것을 보고 장난기 비슷한 사고실험을 많이 해요. 분명히 그 가운데 교회도 있었고 소위 교인들이 있었을 것인데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의 소가 (유독가스에 노출되어서) 침을 질질 흘리더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리라.’ 하는 사람이 과연 그 가운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과연 인간은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내가 내 것을 관리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는 주 앞에 버림받아도 지당한 놈입니다, 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 되겠습니까?
진짜 복음 아는 목사가 불산 퍼진 그 동네 목사라면 ‘여러분, 주님 살아계신 것 보셨지요?’ 이렇게 나오고. 사람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속기 쉬우냐 하면, 제가 70년대에 즐겨듣던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요. ‘바람 부는 저 들판 끝에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라는 노래입니다. 한 20년 후에 제가 그 노래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막상 들판 길 가보면 꼭 선택을 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갈림길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하고 저 멀리서 보게 되면 저 들판 끝이 세상 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원래 가사를 썼던 그 사람의 삼포 가는 길이 뭐냐 하면 죽음으로 가는 길, 소설에 나온 거예요. 저 끝에 가면 비로소 내가 죽겠지, 하는 거예요. 그 가사에 보면 ‘사랑도 이제 그만’ 사랑도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라 하는 것은 뭔가 미래의 들판을 자꾸 깔아둬요. 시간을 자꾸 미래에 깔아놓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는 아무리 시간을 지연시키고 미래에 시간을 깔아 두면서 구십 살 살고 백 살 살아도 너는 그 자체가 버림받은 인생이라고 알게 되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여겨라, 이것들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뭘 해도 나는 나만 챙겼던 이 인생이 바로 예수님께서 대신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들도 아닌 것을 아버지의 맞춤 아들 되기 위해서 우리의 실상을 그렇게 평생 동안 끄집어 내 준 거예요. 2012년 10월 7일 날, 오늘도 끄집어내 줍니다. ‘네가 하는 모든 것이 버림받아도 합당한 존재인 것을.’ 그런 것을 뒤늦게 확인시킨다는 것은 이미 성령의 은사가 왔기 때문에 우리의 즐거워하는 것은 나로 인해서 즐겁지 않고 내가 감사하는 것은 내가 출세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감사하노라, 라는 이 놀라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우리는 외칠 수가 있는 겁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탈색이 돼요. 판사, 검사, 변호사 이런 것. 그러나 택배 안에 있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 피가 쏟아지면 검사 피 판사 피 따로 없어요. 전부 다 죄인입니다. 다 같은 죄인이에요. 우리가 세상에 희망을 갖는 것은 항상 내가 부러워하는 것을 누군가 선점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성질이 화가 나고 약이 올라서 참지 못해서 다시 나를 사랑하기로 작심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아직까지 끝이 아니거든요. 시간의 종결,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은 십자가가 끝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 일생의 끝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생에 인류사 전부가 다 농축되어 있어요. 주님 가신 그 길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야 될 그 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날 버리셨나이까.’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버림받는 자로서의 다윗언약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윗 언약을 직접 받았던 그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사람 앞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그전 까지는 내 인생,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책임지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어도 사람 앞에 졌다고 여겼는데 진짜로 성령의 은사를 받고나면, ‘내가 사람 앞에 죄지은 것은 없고 오직 날 때부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드렸던 제사, 그것이 소용없었고 내가 드린 번제, 나야 받았을 것이라고 우기지만 받은 적이 없었고 내가 드리는 속죄제도 주께서는 받은 적이 없’었어요.
왜, 내가 드렸기 때문에, 내가! 내가 행함의 주체가 되어서 내가 드렸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았어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바로 제사했다고, 받지도 않는 것을 드렸다고 되도 않게 우기고 있는 이 썩어빠진 나, 나 전체를 그대로 주께서는 죄인 그 자체,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 그 자체를 주께서는 받아주셔서 성신으로, 주께서 꺾으신 뼈로서 그것을 제물로 사용하여 주께서 은혜로 예루살렘 성을 쌓는다, 고 시편 51편 18절은 마감됩니다. 천국은 그런 은혜로만 오는 겁니다.
여러분, 주의 은혜를 가로막지 맙시다. 주께서 거저주시는 것을 우리 행함으로 가로막지 맙시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행복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겁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은 왼손이 날라 가도 이 두뇌 기억에 왼손 자리가 있어서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이 정도로 오직 자기만 사수하기로 기계장치가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나로부터 우리가 벗어나지를 못해요. 마귀가 장난질 치면 그냥 장난질 치는 대로 놀아날 뿐입니다.
이 몸 이대로 성령의 은사 앞에 그냥 드러냅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익히 아시고……, 네가 누군지 다 알거든요. 속인다고 속을 분이 아니고 다 알기 때문에 이미 그 문제를 해결 했습니다. 해결했기 때문에 뒤늦게 우리 자신의 실체를 평생 사는 동안 밝히시면서 감사할 것과 즐거울 것을 오직 공짜로 주신 예수님의 용서, ‘다 죄용서 받았다, 이놈아!’ 하는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이라는 은사를 받고 놀라워하는 사도바울, 우리가 그 심정에 동참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보고 놀라게 하옵소서.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았을 때는 남한테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살아가는 동력이고 활력이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도 버림받은 인생인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가벼운 마음, 부담 없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