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목자는 생명의 증거자이어야한다(벌받는 목자-이근호2010.12.15.)

아빠와 함께 2013. 2. 6. 09:04

본문 : 예레미야 25장34-38절
제목 : 벌받는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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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이근호 10-12-15 21:06 
벌 받은 목자

2010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34-38

(렘 25:34, 개역)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떼의 인도자들아 재에 굴라 이는 너희 도륙을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의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

(렘 25:35, 개역) 『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떼의 인도자들은 도피할 수 없으리로다』

(렘 25:36, 개역) 『목자들의 부르짖음과 양떼의 인도자들의 애곡하는 소리여 나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으로 황폐케 함이로다』

(렘 25:37, 개역)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연고로다』

(렘 25:38, 개역) 『그가 사자 같이 그 소혈에서 나오셨도다 그 잔멸하는 자의 진노와 그 극렬한 분으로 인하여 그들의 땅이 황량하였도다』

유다 나라에 목자와 인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울 때는 하나님만이 참된 목자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도자이나 목자들이 이 점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하나님도 목자요 자신도 목자니 그 때부터 자신들은 하나님과 동업에 나서려고 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잘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괜찮은 훌륭한 목자라고 간주해주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목자가 자신의 몫을 생각하는 그 순간, 벌써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위배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되게 하신 것은 망하라고 되게 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이 목자임’의 의미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하늘에서 폭설이 한참 내리고 있는데 그 눈을 맞으면서 어느 목자가 말하기를, “하나님, 이 많은 눈송이 가운데 내가 애쓰고 힘써서 나의 충실한 목자됨 때문에 주어지는 눈송이는 어느 눈송이입니까?‘ 묻는 순간 그 목자는 망해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덮치듯이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그 가운데서 자기 것을 따로 골라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목자나 인도자들이 망하는 것은 현지 사정에서는 무척이나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신약의 안목에서 보면 당연히 치러야 될 절차에 해당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 나라나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안 좋은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나 생명이나 사랑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유다 나라 자체에서는 흔하고 흔한 현실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참으로 귀하고 귀한 것입니다. 이 귀함을 유다 당사자들은 알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천체 물리학자들이 우주를 살피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이, 생명이란 흔하고 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하고 특이한 기적에 속하는 현상인 것을 절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드로메다 별까지 우주선을 타고 가면서 우주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지구처럼 그렇게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요건이 완비된 행성이 찾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이 좁은 지구에 엄청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생명이라는 것이 흔하고 흔한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검은 우주에서 보면, 참으로 특이한 행성이 지구인 것입니다. 이처럼 어두움의 안목에서 볼 때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강렬하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 어두움을 하나님께서는 조성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 자리에 유다 나라가 참여되어야 합니다. 즉 죽음의 자리에 가봐야, 저주를 받아봐야 사랑과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8:17-18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만의 고난을 소용없습니다. 고난받는 목자와 더불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제대로 고난의 의미를 지니고 계신 목자와 더불어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바로 이 절차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소위 바르게 산 것처럼 보이는 요시야 왕을 비롯해서 신앙인들을 고난의 현실 속으로 밀어넣는 겁니다.

진정 생명의 말씀의 본질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짓는 작업은 고난 속에서는 실시가 됩니다. 즉 다같이 어두움 속에 있고, 다같이 고난 속에 있더라도 그 고난 속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귀한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다른 백성들을 구분시킨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다들 있는데서 충분히 십계명을 알려주셔도 될 일을, 왜 모세와 여타의 백성들과 구분지어서 40일간 격리시키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 격리의 기간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ㅍ 품고 있는 우상적 기질을 폭로시키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모세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이 그들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십계명 앞에서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로 들통나는 겁니다. 곧 십계명이 순수라면 백성들은 더러움입니다. 순수가 더러움을 심판하는 가운데서 생명이란, 사랑이라, 구원이란 참으로 귀한 것이고 드문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쉬운 예로 방금 성령을 받는 어떤 불교 승려가 교회 강단에 초대되어 자신의 현 심정을 토로한다면 그 사람은 그동안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오로지 생명의 귀함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듣는 교인들은 그 사람 모습에서 생명의 고귀함만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간증이 끝나고 오랫동안 그동안 당회장 노릇한 목사가 올라와서 교회 현황을 강조한다면 그 목사의 얼굴에서는 생명의 고귀함이 사라지고 도리어 생명의 귀함을 훼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어두움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칭 빛의 세계 속에서 지내왔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원리입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꾼 비유에 결론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다는 겁니다.

즉 자기 자신이 스스로 어두움에 속했다고 여기는 자에는 빛과 생명과 구원과 천국의 고귀함을 알지만 그렇지 않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에게는 그런 것들을 훼방하고 자기 욕심을 챙기는 수단으로 변모됩니다. 이사야 53:4-5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 목자의 자리에 동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 개임을 압니다. 제발 고상한 개, 착한 개, 성실한 개라고 우기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고귀한 피와 살을 아무나 함부로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마땅히 멸망해도 무방한 자임을 늘 깨우쳐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0-12-17 12:58 
090-렘 25장34-38(벌 받는 목자)-jer1012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34절에서 3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9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5:34-38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떼의 인도자들아 재에 굴라 이는 너희 도륙을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의 떨어짐같이 될 것이라 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 떼의 인도자들은 도피할 수 없으리로다 목자들의 부르짖음과 양 떼의 인도자들의 애곡하는 소리여 나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으로 황폐케 함이로다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연고로다 그가 사자같이 그 소혈에서 나오셨도다 그 잔멸하는 자의 진노와 그 극렬한 분으로 인하여 그들의 땅이 황량하였도다.”

목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하게 심판을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목자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약속이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진행이 되고 성취가 되고 완성이 되는 입장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누구나 그 소리를 듣게 되면 ‘하나님이 다 하시면 우리는 할 것이 없지 아니한가?’라고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목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목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고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너무나 손쉽게 이야기하죠.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 그러면 우리는 할 것이 없지 아니한가?’ 어느새 우리 입장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도록,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런 현상들이 나오는 것을 유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는 과정 속에 그것이 포함이 되었을 거예요.


기존에 있는 목자들이 크게 당하는데 본인들이 목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 제가 할 몫이 무엇입니까?’라고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짜 목자이신 하나님이 하는 일과 대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서해안에 눈이 온다는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합시다.


하늘에서 눈이 오면 그냥 눈 오는 그것을 반기면 되는데 저 눈이 오는데서 내가 작용해서 오게 된 눈은 몇 킬로그램일까, 몇 리터일까, 라고 하는 그 순간부터 그 눈이 우리의 눈두덩을 치는 그것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그냥 덮쳐서 오는 것인데 덮쳐서 오는 것 가운데서 내가 애썼기 때문에 따로 나한테 주어지는 것은 그 몫이 어느 정도가 되느냐를 예상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던, 자신도 미처 몰랐던 불신앙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목자가 되었으면 이제는 제대로 목자답게 해야지, 라는 생각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그런 목자상이 되는 겁니다. 상당히 간단한 문제지요. 진짜 목자는 목자가 되는 그 순간 뭘 느껴야 되느냐, ‘아, 진짜 목자는 내가 아니고 우리 주님이 목자구나.’라고 알아서 그분을 증거 하는 식으로 살아가면 될 텐데 자기가 목자라고 하면 자꾸 주님과 동업을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은 주님일 하시고 나는 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해서 그 두 가지의 의미 있는 일을 합치면 보다 하나님의 일이 활짝 꽃 피울 것이다, 라는 생각을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성경에서 심사숙고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 왜 모세만 따로 뽑았는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백성들 다 있는데서 그냥 십계명을 주게 되면 어떤 편리한 점이 있느냐, 모세가 왔다 갔다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세 번이나 시내 산을 오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백성 있고 모세도 있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얼굴 쑥 내밀면서 ‘너희들은 모세 말 잘 들어라. 그리고 십계명도 줬다. 잘 지키란 말이야. 못 지키면 너희는 멸망이야.’


이렇게 일괄적으로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십계명이든 계명이든 줘도 될 문제를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백성을 따로 분리시켜서 모세로 하여금 혼자서, 그것도 뒤따라오는 여호수아도 산중턱에 놔둬버리고 단독으로 베이스캠프를 뒤로 하고 정상에 오르듯이 마지막 시내 산에 올라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가, 그 문제입니다. 왜 따로 격리시키는가 하는 겁니다.


산위에서 추운데 오래 머무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서너 시간 있다가 태극기 꽂고 사진 찍고 내려오면 되는데 하루가 지나도 안 오고 이틀이 지나도 안와요. 40일이 지나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은 채 백성들이 격리가 되니까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은 드디어 애굽에서 그들이 고스란히 가지고 나온 인간의 본성을 슬슬 드러내기 시작한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기다리셨던 거예요. 자기들이 미처 몰랐던 애굽적인 본성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세를 기다렸는데 사실은 그들이 모세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모세가 가져다 준 십계명과 맞닥뜨리게 되어 있어요. 이게 스케줄이었어요. 예를 들어 어느 교회 목사가 갑자기 떠나버렸다. ‘우리 교회는 목사가 없습니다.’ 목사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만 있으면 목사가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산 밑에서 아론 중심으로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섬기고 나름대로 그 신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그 말이죠. 하나님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어요. 생중계 잘 안 되고 있는데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본문에 보면 목자에게 징벌이 주어진다고 한 겁니다. 목자가 징벌 받는 이유는 본인이 목자라는 의식을 갖는 그 순간부터 징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목자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따로 불러서 십계명을 주면서 백성들과 떨어져 나오게 한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주게 되면 지정받은 목자, 지도자가 나오는 족족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목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과 어떻게 일을 잘 동업하느냐, 기분도 맞추고 그 뜻을 맞춰갈 것인가?’라는 그 자체가 바로 벌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 된다는 것,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목자를 세운 겁니다.


목자라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리고 모세도 인간이란 말이지요. 특별한 인간을 따로 뽑아서 분리시키는 그 의의가 뭐냐,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그 뜻이 밝혀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흔한 선입관 중에 하나가 생명이라는 것을 흔하디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천문학이나 천체물리학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주를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 살펴보면 생명이 있는 별이 별로 없어요. 생명 있는 행성도 별로 없어요. 화성에 행여 박테리아가 있는가 싶어서 그걸 찾아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별 희망이 없습니다. 천체 물리학자들이 내린 결론이 뭐냐, 생명이 흔한 것이 아니고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지구인들끼리 6십 몇 억이 모여 사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흔하디흔한 것으로 보지만 우주선을 타고 100년이나 200년씩 걸려서야 도착하는 우주공간에 나가보면 어느 별에도 생명이 있는 별이 없어요. 그렇다면 지구에만 생명이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특이한가, 그 말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천체물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생명은 특이한 것이다.’


생명은 특이한 것이고 반대로 생명이 없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특별한 조치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물리학자들의 주장인데 그것을 우리가 적용해 봅시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유다목자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주신 이 백성들을 관리하고 간수한다.’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유다나라의 특별성에 대해서 본인들이 생명 없는 곳, 죽음의 어두운 외계에 있다가 생명을 바라볼 때는 그 생명이 굉장히 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태어날 때부터 유다 인이고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인이고 시편 달달 외우고 어렸을 때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과연 이스라엘이 생명이라는 그것이 고귀하게 느껴지겠느냐 그 말입니다.


흔하고 흔한 것이 생명이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생명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쉽게 얻을 수 있고 쉽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디서 알고 있느냐, 신약시대에서 최종적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면 신약시대를 거쳐서 다시 구약시대를 바라보게 되면 신약시대의 십자가를 모르는 이 목자들, 지도자들이 얼마나 생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감히 자기가 생명을 지탱하고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목자입네, 하고 설쳐대는 거예요.


말을 어렵게 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껏 중으로 한 30년 있다가 성령을 받아서 어느 교회에서 간증을 한다, 칩시다. 그 교회 사정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도 없고 집사고 뭐고 아예 아는 것이 없는데 그 사람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저는 지금까지 성령을 안 받아서 이 불교의 진리가 진리인줄 알았더니만 성령을 받고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복음만이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중을 하다가 성령 받아서 그런 말을 내뱉을 때 듣는 사람들이 뭘 느끼는가하면, ‘아, 저분은 복음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을 귀하게 보는구나.’라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는다는 말이지요. 중으로 있다가 방금 성령 받은 사람을 모시고 간증이 끝난 뒤에 담임목사가 등장해서 ‘오늘 말씀 잘 들었지요? 광고하겠습니다. 이번에 교육관 짓는데 작심한 헌금 속히 내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 목사가 누구한테 배워야 되느냐, 방금 성령 받은 그 사람에게 배워야 되는 거예요.


지금 교육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배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처음사랑, 첫사랑, 주님께 처음 받은 그 사랑, 내 예배당이나 교회보다 주께서 주신 생명이 귀하다는 것, 그 생명을 가진 사람만 천국가기에 그 생명을 이야기하고 거기서 공감하는 사람이 진짜 형제요 교회라는 것을 그 느낌으로 외쳐야 되는 겁니다.


담임목사가 교육관 짓는다는 광고를 하게 되면 목사 얼굴에서 뭐가 비치겠습니까? ‘야, 정말 생명을 사랑하는구나.’ 그런 느낌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저 사람은 교회나 키우려고 드는구나, 그런 느낌이 오지요. 그게 바로 벌 받을 목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여러분, 먼저 되셨습니까? 이제 나중 될 절차만 남아 있어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절차만 남아 있는데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중 되면 그게 또 먼저 될 수가 있어요. ‘먼저 된 자는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는 먼저 된다.’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어디서 하신 말씀인가, 포도원비유에서 오전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가운데 ‘천국은 이와 같으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본인이 멸망당한 경험이 없으면 생명을 논하지 마라, 그 말이에요. 자신이 지옥가도 마땅함을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천국은 입에서 떼지도 말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유다나라는 뭘 경험해야 되느냐, ‘아, 우리에게 목자가 있고 지도자가 있어도 천국경험을 하라고 주신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얼마나 지옥이 무서운가, 하나님이 자기 거룩을 근거로 해서 얼마나 무섭게 나오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가 무서운가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목자, 지도자,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여호와 언약을 주셨다.’는 그 사실을 아는 코스를 갔어야 하는 겁니다.


주께서 덮쳐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내용이 아주 쉬운 거예요. ‘목자야, 너희들은 이제 당한다. 너희들의 나라는 황량하게 된다. 목자와 지도자들, 너희들은 다 벌 받아야 돼.’라는 그것이 언뜻 우리가 보게 되면 ‘하여튼 유다나라는 바보야. 그렇게 매 맞고도 정신 못 차려.’ 하는데 그런 해석이 아닙니다.


그렇게 매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가, 라는 해석이 아니라 ‘네가 목자 해봐라. 마찬가지다.’ 그 말이죠. 사람이 자기가 절망에 떨어져봐야 주 예수님이 귀한 것을 비로소 알잖아요. 그런 경험도 없이 그냥 건성으로만 주님 귀하다고 하면 항상 더 귀한 것, 근본적으로 진짜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오게 되면 언제든지 눈 돌리고 갈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지구에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막상 지구에 살 때는 별로 실감이 안 나지만 먼 우주, 안드로메다 같이 먼 곳, 1천 광년이나 1만 광년씩 달려야 도착되는 곳에 가서 다시 온 온주를 다 살펴보면 ‘어, 저 작은 행성이 뭐지? 지구잖아. 저기 바다가 있네. 야, 정말 희한한 행성이구나. 저기 뭔가 움직이잖아. 사람이 있네. 정말 특이하다.’ 하는 겁니다.


멀리서 보면, 어두움 쪽에서 보면 생명이라는 것이 너무나 기적이고 이것은 감격이고 어떻게 생명체가 없어야 마땅한데 왜 생명이 생겼느냐하는 신기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두움을 가지고 ‘고난’이라 합니다. 목자는 고난 받는 목자가 목자라는 거예요. 그 대목의 성경을 말씀드립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맞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어떤 목자냐, 매 맞는 목자예요. 매 맞는 목자는 분명이 오셔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 맞는 목자를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거예요.


‘왜 목자가 매를 맞지?’ 목자가 매를 맞는 이유를 이사야 53장에서는 ‘양, 너희들 때문에 맞는다.’고 하는 거예요. 매 맞는 목자를 둬야 네가 지금 생각했던 상식선의 생명이 아니고 상식선의 천국, 하늘나라가 아니라 매 맞는 목자의 매 맞는 이유를 아는 그 순간부터 진짜 천국과 진짜 영생과 하늘나라가 너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라는 목자에게 매를 때리지 않으면 어느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인간은 매 맞는다고 정신 차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매 맞아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유다나라가 왜 매를 맞아야 되는가, 그리고 그 유다나라의 목자는 왜 매를 맞고 징벌을 받아야 되는가?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지요. 하지만 그 징벌 속에서 무엇과 합류가 되느냐 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멸망하는 유다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로소 무슨 계시와 연결을 시켜주느냐, 이사야 53장과 연결을 시켜줘요. 이사야 53장의 계시가 먼저 주어졌고 예레미야의 유다나라의 멸망은 나중에 주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일류대학 나오고 공부에 취미가 있어서 공부 꽤나 했던 사람들, 유학 갔다 와서 구약학 신약학 교수 평생 하겠다는 사람들이 신구약 연구하기 위해서 해외에 다 나갑니다. 해외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뭐냐, 이사야 53장은 제 2이사야라고 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아니고 나중에 사람들 가운데 유행하던 말을 이사야의 권위를 싣기 위해서 붙였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제 2 이사야라고 하는 거예요.


소위 보수주의라고 자칭하는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 전부가 이사야의 예언이 아니고 제 2이사야, 제 3이사야로 잘라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이런 예언을 이사야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미리 예언을 했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마리아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예수님을 의심했습니까?


모세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40일 동안 물도 안마시고 밥도 안마시고 산위에 있었겠어요. 소위 신학자나 교수라는 사람들이 믿지를 않아요. 이사야 예언이 먼저 있어줘야 그 다음에 유다나라의 멸망과 딱 아귀가 맞게 되어 있어요. 항상 인간이 당하는 경험보다 뭐가 우선이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우선인 거예요.


왜 그런가,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은 동업을 안 하게 돼요. 목사하고 인간하고 동업을 안 합니다. 왜 목사가 되었느냐? ‘네가 목사니까 한 번 망해봐라.’ 그 말이지요. 목사 한 20년 하고 망해봐야 중 되었다고 방금 성령 받아서 복음만 전하는 사람하고 너하고 누가 더 나은지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누가 더 생명을 사랑합니까, 누가 더 영생을 사랑합니까?


목사가 처음 신학교 들어갈 때는 까불거리면서 생명 사랑한다 하지요. 아골골짝 빈들에도 두 손 들고 가오리다, 하지요. 신학교 졸업할 때쯤만 되어도 벌써 인간이 달라졌어요. 생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좋아해요. 제가『시편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의 교정과 편집을 다 해서 넘겼는데 그 안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가 주려고 하는 것들을 거부했잖아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이런 마음입니다. ‘그것을 예수한테 주려고 하지 말고 나한테 주지.’ 그게 뭐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같은 거예요. 아람나라 나아만 장군이 금과 은을 수레에 싣고 왔다가 도로 가져가니까 ‘나한테 주고 가지.’ 했어요. 주고 갔지요. 줄 때 문둥병까지 주고 갔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예상한 것보다 항상 뭐가 우선인가, 하나님의 예언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정답은 신약성경에 와서 십자가로 밝혀집니다. 그 사실을 구약의 목자들, 지도자들은 모릅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왜 우리는 매를 맞나?’ 특히 요시아왕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착합니까?


그렇게 착한데 왜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가? 믿음으로 살았던 왕들이 왜 그렇게 하나같이 멸망당하면서 그 끝이 그렇게 안 좋은가? 안 좋은 끝을 우리가 미리 가집시다. 미리 가지면 주께서 주신 생명이라는 것이 그냥 흔하디흔한 생명이 아니고 꼬불쳐놓았다가 ‘이것은 줄 사람만 줘야 돼.’라는 식으로 주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감히 하나님의 아들 독자 예수의 피로 만든 그 생명이 허비가 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거기서 생산된 그 귀한 생명, 피와 살을 줄 사람에게만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주겠어요. 주님과 함께 저주받으면서 개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담겨져야 그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을 비로소 입으로 토해내고 증거 하게 된다 그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인생이 왜 그리 재미가 없습니까?’ 슬슬 목자가 보이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연세가 좀 드신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사는 게 왜 그리 재미가 없느냐고 하는 거예요. 진리가 가까운 것 같아요. 뭘 해도 재미없고 어떤 취미생활을 해도 재미가 없고 뭘 먹어도 맛이 없고 무슨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재미가 하나도 없고 남들이 알아줘도 귀찮고 사는 것 자체가 귀찮아요.


호강? 호강 자체가 귀찮아요. 왜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목숨, 내 생존, 이것이 우리 속에서 떠나가야 돼요. 이것에 대해서 포기하고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장렬하게 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인생길에서 남는 가장 재미있는 것은 뭐냐, 죽는 것이 가장 재미있어요. 장렬하게 죽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에요.


TV드라마가 나오는 중에 얼핏 보는데 대사가 하나 들어와요. 남녀가 둘이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아가씨를 사랑하지 아가씨의 사랑이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니잖아요.’라고 남자가 으스대듯이 이야기를 해요. 그 대사를 딱 듣고 야, 저거다, 했어요.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나왔던 사랑이 도달될 때 그 때부터 우리는 그 예수에게 끌리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저 작가가 요한 1서를 어떻게 알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현재 자기에게 있는 목숨을 위하여 예수를 사랑하고자 하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이고 갓 바위입니다. 그런 사랑은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줄 사람만 줘요. 줄 사람 주기 때문에 그 전에 무슨 작업에 들어가느냐 하면, ‘절대로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라고 내빼시는, 내치시는, 붙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아니하시는 작업이 먼저 있는 겁니다.


주님 붙잡아서 돌이 떡이 되게 해야 되고, 주님 붙잡아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어야 되고, 주님 붙잡아서 주님을 이용해서 내가 천하를 정복하고, 이런 식으로 쫓아가게 되면 주께서 자꾸 내빼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야, 고난이다, 고난이다.’ 결국은 세상에서 재미있는 것이 하나도 없네.


주께서 말씀하지요. ‘내가 나와 함께 죽는 것이 제일 재미있단다.’ 죽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그 말이 뭐냐, ‘네가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 가지고는 절대로 이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뭐냐? ‘그분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 분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미 예수님부터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그 자리에 우리를 끄집어 당겨서 ‘내가 이렇게 저주받는 것은 네가 이런 짓을 해서 저주받을 만하기에 내가 저주 받은 거야.’라고 예수님의 저주에 같이 동참시켜서 예수님이 왜 저주받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생명이라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만 그 사랑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주어짐을 깨닫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육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목자, 참된 목자는 어디서 찾는가? 누가 우리대신 아버지께 저주받느냐, 저주받는 그 분이, 고난 받는 그 분이, 사람에게 버림받는 그 분이 유일한 우리의 목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슬슬 우리 육적인 야망을 위해서 교회 나오고 예수를 붙잡고 있지는 않은지, 개 같은 인간이 어느새 고상한 개, 점잖은 개, 착한 개로 변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여, 다시 한 번 십자가 바라보면서 매 맞고 찔림을 당하시는 그 이유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교회 10-12-23 00:03 
벌받는 목자 동영상은 삭제했습니다. 서버에 차지하는 용량이 많습니다. 음성을 이용해 주세요^^
 우리교회 10-12-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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