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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냐 믿음이냐(롬3;27-31)2013.2.3 오전설교-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2. 5. 21:11

행위냐 믿음이냐 (롬 3: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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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2-03 13:31 
행위냐 믿음이냐

2013년 2월 3일                               본문 말씀: 로마서 3:27-31

(롬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사람이
(롬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9, 개역)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30, 개역)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느니라”에 절망합니다. 더구나 자랑할 거리가 인간에게는 아예 없다는 말에 기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남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자랑질 것을 목표로 해서 인생을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 인간은 남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싫어지게 한 겁니까? 그것은 바로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런 조치를 단행한 겁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의로움을 자랑거리로 삼으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해댑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과 자신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에 대해서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긴장합니다.

바로 이런 노력들이 다 자기 의로움으로 누적이 되고 타인에 대해서 자랑거리로 쌓이게 됩니다. 수정과 개선과 보정들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인생을 보다 질 나은 곳으로 전환시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의로움은 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의입니다. 도리어 자기 행함을 자랑하기 위한 자랑질에 불과합니다.

분명 이 성경책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책입니다. 구원이란 곧 구출을 말합니다. 탈출입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던 세계말고 전혀 질적으로 다른 세계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원리상,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그런 원리를 받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기존 세계에는 다른 세계의 존재를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내세를 외쳐도 그것은 기존 세계에서 통하는 원리를 그대로 지속시키는 그런 세계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이사 가는 것이지 결코 탈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탈출이란 필히 ‘탈출 불가능한 집단’이 같이 거론되는 가운데 알려지게 됩니다. 홍해에서의 애굽 군대들의 몰살사건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이사는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탈출이란 가야될 나라 쪽에서 일방적으로 성사시켜야 가능한 일입니다.

탈출 이전에는 아무도 갈려고 하지 않는 나라요,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한 나라요 갈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의 원칙과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 삶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잠자는 상태 유지’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잠을 잡니다.

잠을 자고 있는 그 순간에는 노숙자건 청와대에 사는 대통령이건, 인간 연예인이건 평범한 주부이건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이 이유는 모두 다 자기에게 가하는 본인의 힘을 놔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냥 중력에 온 몸을 맡긴 상태가 잠자는 상태입니다. 반면에 등산이란 숨이 턱밑에 까지 차 올라서 “헉 헉”거리면서 기어이 몸을 움직여주어야 합니다.

비로 그 과정은 힘들지만 목표가 눈에 들어오게 되면 온갖 어려움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서 자기 몸을 움직이게 해서 기어이 그 도달점을 두 발을 딛게 합니다. 이 등산하는 식의 삶이 곧 행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실제로 등산한 자기 외에는 달리 자랑할 게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구원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봐서 ‘예수 믿는 것’도 행함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힘을 지속적으로 가하고 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인이 궁극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설령 실수도 하고 미처 무지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도 능력껏 사과하고 보상해주면 그 반성하는 자세 또한 자신의 의로움의 근거로서 누적되게 됩니다.

즉 이래나 저래나 자신은 무조적으로 착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이 자기 잘못을 모른다 할지라도 시간만 허용된다면 언제가는 자기 반성이 되는 경우가 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때까지 “내가 악하다”는 판정을 유보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분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믿은 것도 내가 믿고 행하는 것도 내가 행하고, 그리고 모든 행위와 행함은 먼저 믿고 따지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과정이 선행되기에 그 선행된 것도 실은 ‘행함’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행동이든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는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서만 비로소 갈라져 나옵니다. 즉 구원될 수도 없는 자가 구원이 된 능력은 인간의 행함의 차원에서 성사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의롭지 않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앞에 두고서 나올 고백입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행함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발견한 자들입니다. 이런 율법은 기능은 인간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인간을 지배한 악한 권세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함에 의지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용서 못할 죄가 있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이 인간이 행함 여부를 두고서 판정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5:16-17에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이란 어떻게 사는 걸까요? 빌립보서 2:13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환자가 수면내시경하고 깨어나면 모든 일은 의사가 알아서 자기를 관리해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안에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믿지 말게 하옵소서. 세상 일이란 그저 꿈일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