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핍박이 없으면 성도의 삶이 아니다(위협받는 예레미야-이근호2010.12.29)

아빠와 함께 2013. 2. 6. 08:47

본문 : 예레미야 26:8 -9
제목 : 위협받는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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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10/수요예배101229.MP3, Hit:139
 이근호 10-12-29 21:03 
위협 받는 예레미야

2010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6:8-9

(렘 26:8, 개역)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렘 26:9, 개역)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이 그 당시 분위기에서는 ‘죽을 죄’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유다 사회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파된 계시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계시의 내용과 예레미야가 전한 내용이 일치 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둘이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레미야가 전한 내용이 이미 유다 나라에 퍼뜨려 놓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를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레미야가 전한 내용이 참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그 전에 유다 나라의 대세를 차지하는 내용이 참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정리정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정돈되지 아니하면 유다 나라 내에 혼선이 여기될 것이 뻔합니다.

만약에 예레미야가 기존의 사상과 다른 말을 하면서도 ‘여호와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고 “제 의견에는 이런 뜻인 줄 아옵나이다”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으면 “죽으리라”라는 험한 말은 듣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예레미야의 의견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한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적인 의견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본인의 공명심에 도취되어서 외쳐보는 예언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의 말씀을 담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니 예레미야에 대한 핍박이나 위협은 곧 참 하나님에 대한 위협과 핍박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의 발생을 염두에 두고 그 당시 성직자들은 예레미야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약간의 여지도 일체 허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레미야의 권위를 조금이라고 인정해주면 이는 곧 기존 성직자들이 사이비가 되는 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백성들은 난무하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거짓된 계시를 참된 계시로 알고, 반대로 참된 계시를 거짓된 계시로 알게 되니 너무 안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달에만 눈독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나라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현 유다 나라 백성들이 마땅히 당해도 싸다는 증거가 됩니다. 백성들의 죄는 한결같습니다. 참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고 그것을 정당한 축복이라고 아부해줄 그런 성직자들만 참된 선지자로 섬길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 있는 죄를 범해왔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선포 내용에 대해서 달갑지 않는 것은 백성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입을 통해 유다 나라의 멸망을 선포하려 하신 걸까요?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의 실체를 이 어두운 인간 세상 속에서 나타내는데 주력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즉 이 더러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참 모습은 과연 어떤 모양새이겠느냐를 정립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망할 유다 나라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핍박받는 모양새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멸망을 주저없이 선포하는 모양새입니다. 바로 기능을 하시는 분만이 오직 참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다른 분은 아닙니다.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마태복음 5:11-12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핍박받은 전의 선지자’가 나오고, ‘나를 인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의 선지자란 당연히 예레미야가 포함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분명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받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타락한 자기 백성들과 만나게 해서 그 와중에서 참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양새로 오실 것인가를 정립하는데 주안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핍박하는 세력으로 행세를 해야만 하고 예레미야는 ‘핍박받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되 이 두 진영의 만남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여호와의 이름’을 제조해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핍박하는 자가 핍박받는 자 역할까지 할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죽어라고 밀어야 하고 다른 한쪽은 그 힘에 넘어져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들은 모두 ‘여호와 이름’을 규정하기 위한 하나님 뜻 안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이로서 예수님 빼놓고서는 그 누구도 온전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자는 아닙니다.

동시에 그 누구도 ‘여호와의 이름’을 자처할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의 내용이 밉고 싫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보고 망한다고 예언하는 자를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분은 이런 인간의 형편을 바탕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9: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지붕 뚫고 들어오신 중풍병자를 낫게 하신 그 대목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행사하시지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멸망을 기정사실화 시키시는 겁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라면 이런 하나님, 이런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의 계획에 찬미하게 됩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은 멸망해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자인하게 되는데 이것을 알게 하신 것마저 하나님의 축복이요 사랑이요 용서의 능력이 임한 증거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의 이익만 생각하면서 엉뚱한 신을 찾을 때, 도리어 핍박받는 예수님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실 자체가 축복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0-12-30 13:01 
092강-렘26장8-9(위협받는 예레미야)-jer1012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8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9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6:8-9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들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나올 겁니다. 8절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해 놓고 9절에 보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빙자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그것이 그 당시 ‘반드시 죽으리라’에 해당되는 사항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좀 납득이 안 되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예언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다고 해서 그것이 죽일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저, 제사장님’ 혹은 ‘선지자님,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죽을 사항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견이죠. 사견은 자기이름으로 하거든요.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이러면 죽을 일이 아니에요.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게 하나님 뜻입니다.’ 이러면 그것은 죽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연구 좀 더 해봐. 그럴싸하네.’ 이렇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라고 이야기해 버리면 이것은 죽어야 될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사도요한에게 먼저 주어졌어요.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대해서 탐색을 하려면 먼저 사도요한이 어떤 입장에 있으며 하나님은 사도요한에게 어떤 식으로 계시를 주었는가, 예수님과 사도요한과의 관계를 먼저 봐야 돼요.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서 아무도 주위에서 알아주는 이도 없이 외로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꼭 누구 꼴이 되느냐, 밧모 섬의 외로운 요한 짝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충분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내용이 우선적으로 사도요한과 더불어서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자기 종 요한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오늘 본문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당시에 예레미야 말고 선지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선지자들이 볼 때 예레미야가 ‘제 뜻은 이렇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기분 나쁘다 하는 정도에 그치겠는데 예레미야가 기존의 제사장, 이론, 신학적인 체계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할 때 죽을 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내용이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하나님이 졸지에 두 분이 되는 거지요. 그 둘이 서로 내용이 같으면 예레미야가 죽을 필요가 없는데 예레미야가 전하는 그 예언과 기존의 선지학교 출신 선지자들이 갖고 있던 그 예언의 내용과 서로 맞는 것이 없는 거예요.


맞는 것이 없으니까 저쪽이 만약 진리라면 자기들이 죽어야 되고 만약에 자기들이 옳다면 예레미야를 죽여야 되는데 이 세상에 자기가 잘못되었다고 누가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예레미야야, 네가 좀 죽어줘야겠다. 왜냐하면 네가 외쳤다는 그 여호와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네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거짓을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서 고하는구나. 너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만약 그 당시에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는 어느 편을 들겠습니까? 예레미야 편을 들겠습니까, 예레미야보고 ‘너 죽는다.’라고 이야기했던 기존의 선지자들 편을 들겠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서 나오는 내용이 서로 완전히 대립이 될 때는 굉장히 혼돈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혼돈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되고 질서를 유지해야 될 책임, 그 당시 거짓선지자, 권력 잡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명감으로 충만해서 그들이 하는 일이 되는 거지요.


그 당시 많은 백성들은 예레미야 쪽을 선택하지를 않아요.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 빈칸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빈칸에 들어갈 내용은 여러분들이 어떻게 짐작했으면 좋겠습니까?


듣는 자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입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자기 뜻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 내용이 무엇이겠느냐 그 말입니다. 만약 어느 교회가 수요예배에 특별강사를 모셨다, 그 강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제가 이 교회 오기 전에 어제 밤에 꿈을 꿨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계시를 주셨습니다.’ 하면 교인들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떠서 ‘그 내용이 뭔가’ 할 거예요.


‘저를 초청한 이 교회의 운명에 대해서 제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장로들부터 애들까지 고개 쳐들고 ‘그 내용이 뭘까’하고 궁금할 게 아니냐 말이지요. 그 내용을 빈칸으로 해두고 여러분이 그 빈칸을 채워보자는 겁니다.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어젯밤에 꿈에 본 그 계시의 내용은 아마 이 교회가 이 도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고 헌금도 제일 많이 내고 모든 교인들이 복을 받아서 다 번창하는 것입니다.’라는 소리이기를 은근히 기대하겠지요.


그런데 ‘어제 밤에 제가 꿈에 예수님 만나고 드디어 이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교회는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이 교회 다니면 지옥 갑니다.’라고 했을 때 그 교회 당회장부터 애들까지 ‘할렐루야, 우리는 그 말씀 기다렸습니다.’라고 나설 수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야기하지만 당신은 우리 손에 죽어!’ 그 말을 하는 거예요. 결국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그들이 듣고 싶은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예레미야가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예레미야는 지금 목전에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그랬다 치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이 예레미야가 진짜 선지자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으면 진짜 하나님께서 이 내용을 선지자에게 이야기했다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민중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나타나기 전까지 기존의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 왕들이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을 것이 아니냐 그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나타나도 마찬가지지만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사님을 주시고 장로님을 주시고 하나님의 선지생도에게 신학교를 나오게 해주시고 게다가 유학까지 갔다 온 목자를 보내주시고 우리가 목사를 홀대하면 벌을 받게 되어있고……’ 이런 것을 철썩 같이 믿었을 것이 아니냐 그 말이지요.


그리고 ‘그동안 우리 당회장 목사님과 그 동안 모신 강사목사님들이 축복, 축복 한 것은 다 살아계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것이기에 우리에게 그대로 복이 오리라.’ 믿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다시 의심을 품는 거예요. 그들이, 기존의 선지자 당회장 목사들이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고 곧이곧대로 믿어서 그런 말들을 곧이들었는가, 아니면 그들이 전하는 내용이 민중들이 교회 올 때 뭔가 은근히 기대하는 바를 채워주었기에 기존의 거짓선지자들을 진짜 선지자로 간주했느냐 그 말입니다.


어느 쪽이겠어요? 거짓선지자가 예레미야가 예언하니까 ‘너 죽었어.’ 하고 달려든 그 관계나 그 당시에 거짓선지자들이 백성들을 다룰 때 속으로 ‘여러분, 이런 것 좋아하지요? 축복 좋아하지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 드릴게요.’ 하면서 멱살 안 잡는 그 태도나 똑같은 겁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아이고, 그 당시 백성들도 바보야, 바보. 어떻게 예레미야가 오기 전에 거짓선지자에게 속아 넘어가나.’ 하지만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백성들이 선지자를 길들인 겁니다. 길을 들였어요. ‘당신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 이야기하란 말이야. 축복만 이야기하란 말이야. 저주는 말하지 말란 말이야. 저주를 말한다면 나는 당신을 목사로 간주 안 할 거야.’라는 분위기가 이미 백성들과 대중들에게 형성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 목사들이나 선지자들은 거기에 숟가락 하나 놓았을 뿐이에요. 양쪽이 서로 짝짜꿍 한 거예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습니다. 구색으로 여호와 이름을 부른 거예요. 요새 말로 하면 구색으로 성령, 예수, 삼위일체, 이런 것은 다 구색 갖추느라고 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냐 아니냐, 부처냐 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을 누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느냐, 그것이 오늘날 교회나 그 당시 유다나라의 사상을, 정신을 결정한 거예요.


그들의 사상은 뭐냐, ‘여호와의 이름 = 내가 원하는 것 주시는 분.’ 그러니까 여호와는 날 위해주시는 분,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챙겨주시는 분, 내가 기도하면 정성보고 다 응답해 주시는 분, 그런 신들을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겨 왔던 것입니다. 거기에 예레미야가 들어와서 초를 친 거예요.


여기서 백성들의 격분을 누가 대표해서 해주느냐, 바로 그 당시의 백성들과 한패가 된 거짓선지자들이 대표가 되어서 ‘예레미야, 너 죽을래?’라고 나온 거예요. ‘목사님, 그 당시 제사장만 나쁘고 또 선지자만 나쁜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벌이 제사장에게나 선지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유다나라 전체에게 다 주어진다는 것은 이미 전부가 다 한통속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두자로 요약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권력과 돈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하나로 모이지요. 돈이 권력이고 권력이 돈이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거짓선지자의 이 따위 사고방식을 그대로 예수님한테 시험한 겁니다.


‘너도 넘어질 거야.’라고 생각해서 돈과 권력,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슬쩍 건드려 본 겁니다. ‘배고프지, 인기 원하잖아, 부귀영화 원하지.’ 마귀가 건드려 본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모든 백성들이 마귀 손에 넘어갔습니다. 백성들이 진심으로 호소해서 예수님이 자기편으로 삼는다? 예수님 계획에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진심이 뭔데요? 마귀 마음인데요. 내 마음이 마귀마음이고 우리 마음이 다 마귀마음인데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가서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이다? 제자들도 안 따랐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누가 따라요. 예수를 믿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그리고 이 땅에 먼저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거 예요.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10년 교회 나오고 100년 교회 나와도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안 달라져야 돼요. 달라지면 안돼요. 인간의 본성이 안 달라져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예레미야처럼 핍박을 받는 분으로의 메시아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다시 말해서 그 당시 거짓선지자들은 백성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은 우리 신이 이방신에게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신학체계에 있을 수 없다. 여호와가 남에게 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여호와와 함께 있는 우리도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확고한 신학체계였습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전달, 전달되어 왔었어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똑같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이제 너희들은 망한다.’고 되어 있어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의 내용 속에 유다나라는 망한다, 그 것이 포함된 새로운 여호와의 이름이 마지막 때 예수님 때 제대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복을 받을까, 아닐까 그것을 걱정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여호와의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을 어떤 인간들을 택해서 그것을 잘 표현하고 묘사하느냐에 관심이 중점적으로 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장차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자기백성들에게 핍박받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진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주시다, 이거 하나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것 하나 정립하기 위해서 미리 거짓선지자를 쫙 깔아놓으신 거예요.


그 작전이 얼마나 멋집니까? 마귀를 이용해서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것, 마귀 들린 가룟유다를 통해서 십자가의 작업을, 그 업무를 성사시켜 내시는 하나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자신이 이 지상에서 어떤 모양새를 갖출 때 비로소 진짜 하나님 맞다, 고 할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 일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개입하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의 참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그것을 만들어내시는데 하나님은 온 힘을 다 쏟아 부으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뭐냐,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에다 자기 소원을 곁들여서 덕지덕지 붙여서 만들어 낸 조잡하기 짝이 없는, 자기이기주의를 편드는, 이기주의를 정당화시키고 그것을 옳다고 간주하는, 자기 모습을 닮은 우상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입니다.


온 천지가 우상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답게 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이것을 확인해 봐야 됩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을 누가 받느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레미야가 핍박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것은 아시잖아요. 예레미야라는 것은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있기 때문에 미리 앞당겨 오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가야 될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성령이 왔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뒤에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가야만 하는 게 성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앞서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우리는 뒤따라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 그런 차이가 있을 뿐 예수이름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같아요. 같다면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핍박 받고 고난 받는 예레미야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망한다고 한 겁니다.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이 어떤 분이라 하는 것을 정립하는데 1차적인 관심이 있다. 둘째, 그것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핍박받는 사람이(선지자) 등장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그 선지자가 이 세상은 망해도 싸다는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 내용, 핍박받는 선지자가 있어야 되고 그 선지자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희망도 주지 않고 멸망해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이 두 가지 내용을 보태면 이것이 장차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예수님이 해야 될 사명과 일치되는 겁니다. 이 생각이 옳은지 어떤지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찾아보면 되겠지요.


마태복음 5장 10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어렵기도 하고 매우 중요한데 11절, 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0절, 11절,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핍박받았느니라.’라고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받았거든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이 바로 전에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것과 동일한 핍박이다. 그래서 양쪽 다 하늘나라 상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은 가라, 그 말이죠. 하늘의 꿈을 꾸는 그 하나님은 가라, 그 말이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짜 유일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먼지 나는 길을 걸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신 그 하나님 외에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 땅 사람들이 접촉하고 알아야 되고 믿어야 되고 모든 신들을 다 패퇴시키고 모든 신들을 다 거짓이라고 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의 하나님은 하늘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선지자처럼 핍박받으시는 그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이게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첫째, 하나님이 사람으로 온다는 것이 납득 안돼요. 하나님은 저 하늘의 붙박이별처럼 하늘에서 반짝여야지 이 지저분한 지상에 오신다는 것이 이해 안 됩니다. 오실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서 가면 만나는데, 예배당 잘 지어서 하나님 모시고 만나면 되는데 구태여 오실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만약에 예배당 잘 지어서 하나님 섬기면, 핍박이라는 것, 그것도 하나님 이름으로 핍박이 성립이 안돼요. 그런데 하나님 섬긴다고 예배드린다고 왔는데 채찍을 휘두르면서 ‘이런 짓들 다 치워라. 이 예배당 이것이 부동산이지 뭐야.’하고 치울 때 누가 핍박하겠습니까? 그 교회에서 돈 제일 많이 낸 장로가 제일 핍박할 겁니다.


오늘 낮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목사님은 임시목사로 당회장입니다. 말만 당회장이지 허울뿐이고 수렴청정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 뒤에는 그 교회 설립자, 나이가 72세 되었는데 은퇴할 생각도 안하고 말로만 은퇴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세운 교회고 어린이집이라고 하면 버티고 있고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설교하라고 뒤에서 조종하고 있답니다.


마치 차범근이 차두리 조종하듯이 뒤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 계신 목사님이 오셨어요. 이야기를 잠시 나눴습니다. 설교만 끝나면 시비를 걸어온대요. ‘왜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가.’ 하는 거예요. ‘왜 국가를 부정하느냐, 왜 교회를 부정하느냐.’고 시비 걸어요. 자기가 이 교회를 세웠다는 겁니다.


교회 세우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문제입니다. 핍박이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왜 핍박이 없으면 구원 못 받느냐하면, 예레미야도 그랬고 신약의 성도도 그랬고 진짜 여호와의 이름으로 움직여지는 사람은 그 안에 예수님이 움직이기 때문에 핍박받은 예수님이 재현되게 되어 있어요. 반복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핍박이라는 것이 자기 고생하는 것 때문에 핍박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일 경우에만 그 사람이 바로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참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으로, 바로 예수, ‘나는 이렇게 바쳤는데, 나는 이렇게 기도했는데.’ 이렇게 나, 나, 내가 나와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뭘 해도, 교회를 세우든 돈을 바치든 다 의미 없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 구원한다, 라는 소리 때문에 핍박받을 때 그것을 너무나 서러워 말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그것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받는 복이 아닙니다. ‘이것이 너의 횡재인줄 알아라.’ 그 말입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 ‘너 지금 상 받았다고 자랑하고 있니?’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오히려 나무라는 겁니다. ‘저 핍박받았습니다.’ 하니까 ‘아이고, 상 받았다고 좋아하는 것 좀 봐라.’ 이렇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네가 핍박 안 받으면 대체 어디서 그런 상을 네가 만들어내겠느냐.’


그렇다면 예레미야 당시에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그 망한다는 말을 그토록 싫어했을까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이런 것이 있어요. 지붕 뚫고 들어오는 중풍병자를 낫게 한 그 대목인데요, 9장 6절에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자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진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일단 망해놓고 일을 시작해요. 망해놔야 그것도 죄 때문에 망해줘야 그 다음에 뭐가 뚜렷하게 오롯이 남는가,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네가 알아서 네 죄를 처리한 것이 아니고 네 뒤에 오시는 분, 인자가 와서 너에게 용서하는 사죄의 권세를 행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네가 구원받는다.’라는 것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망한다는 것이 슬픈 소식이 아니에요. ‘아, 우리는 당연히 망해도 싸구나.’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 더 이상 자기 행함을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주여, 우리는 망해도 쌉니다.’ 그 다음에 용서하고 안하고는 오실 분의고유 권한으로 넘겨지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이름의 내용을 담기 위한 줄기찬, 일관된 계획이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행복하게도 고맙게도 말려든 겁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오직 죄 용서하시는 권세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아서 구원된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호와 이름의 실체를 알게 되지요. 죄를 사하는 권세, 그 이름을 위해서 우리 모두의 입을 막아버리고 망해도 싼, 네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매일같이 깨닫게 해서 그 이길 수 없는 죄를 용서로 말미암아 건져내시는 위대한 작업,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신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저희들 사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행함 내세울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의 용서가 임했기에 구원 받았사오니 예수님의 이름만, 그 의미만 두고 두고 찬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