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4강-오직 영으로(고전2;9-12)이근호 141109

아빠와 함께 2014. 11. 14. 08:31

오직 영으로(고린도전서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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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영으로

2014년 11월 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2:9-12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처음부터 과연 우리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었는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관점을 갖고 계십니다. 로마서 8:9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런 관점을 갖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일단 본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자기가 자신을 긍정하는 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과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참된 사람으로 보시는 그 관점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을 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딱 두 종류로 나뉘어집니다. 한 부류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이요,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은 부류입니다. 그런데 영이라는 개념은 이미 성령받지 않더라도 인간들이 상상해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 절대 존재인 신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어쨌든 최고의 자리는 신의 자리라는 겁니다. 최고의 자리를 저 높은 곳에 설정해 놓은 이상, 인간들은 그 자리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근질근질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과 과과 영의 단계나 체제를 고안해 놓습니다. 제일 낮은 단계인 육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납득하는 대목부터 시작해서 설득력을 갖추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정신적이고 양심적이고 도덕적 존재로 탈바꿈을 강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마릅니다. 영의 세계까지 마저 정복해야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본인들이 각자 미흡함을 채워놓고 위해 남겨놓은 미답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지라고 믿고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들의 아이디어 자체가 ‘육’입니다. 영이라고 설정해놓은 그 영역도 실은 육의 확장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다’를 통해서 확인될 수 바는, ‘인간이 마음으로도 능히 생각할 수 있다’는 구조를 비켜나 있는 영역이 곧 성령의 영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란 인간이 스스로 내부적으로 정립하거나 장착할 수 있는 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날마다 성도에게는 변동이 생겨나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고정된 존재물로 보는 것을 허용해 주지를 않습니다. 이는 ‘시선의 바뀜’, 혹은 ‘관점의 바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중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대가 날마다 거부당한다는 것은 어디로부터 어디로 이동 중이라는 사실임을 간파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컨테이너에 갇혀 지나는 꼴입니다. 코앞에 있는 좁은 세상관만 추스르고 정돈하며 사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가 원하는 쪽이 아닌 데로 변모되어 갑니다. 이는 “내 뜻대로 마옵소서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서”라는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체험되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서 성도는 다른 이유와 목적에 휘둘려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하실 일입니다. 참된 인간을 찾고자 한다면 창조주 앞으로 이끌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창조주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시기에 그 창조주께서 인정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잠시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꽂힌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 곧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됨을 드러낼까요? 갈라디아서 4:29에 보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육은 진짜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야 들통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핍박한 이유는,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핍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야말고 진정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하는 참된 복과 참된 저주를 가려는 방식입니다.

창세기 27:38에 보면,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서 애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즉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사적 의사에 의해서 마음대로 복과 저주를 주는 줄로 알았기에 복을 줄 수 있는 아버지에서 또 여분의 축복이 나올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과 저주는 상호 관계적으로 엮여져 있습니다. 복이 복답게 되기 위해서 철저한 저주가 요구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주가 저주답게 되기 위해서는 복이 철저한 복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장갑이 왼쪽이 있다는 것이 필히 오른쪽의 존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관계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저주를 필히 주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천국에서 복을 누리는 그 정도만큼, 성도가 아닌 자들, 즉 성령을 받지 못하여 ‘그리스도 인’이 아닌 자들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에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핑계대기를, 동생 야곱이 자신을 속여서 아버지의 복을 뺏아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삭의 심정은 이러합니다. “네도 거짓말을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정작 중요한 것이 오직 그것 뿐이다는 사실에 충실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참된 복은 십자가 피로 인한 용서 뿐이기에 성도는 죽을 때까지 그의 육됨을 십자가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낱낱이 들춰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게 하지 마시고 도리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어떤 장애에도 구애받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고전 2장 9-12(오직 영으로)1411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 9-12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2:9-12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이 성도입니까, 라는 질문에 답변은 간단하게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거기서 성경은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을 가지고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사람들은 서로 같이 생기면 다 사람인데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들의 이런 관점을 저지하고, 그걸 제켜버리고 하나님께서 보는 관점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그냥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이냐, 이걸 둘로 나눠요.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사람이라고 여기는 그 사람들 사이에는 외형적인 차이점은 전혀 없습니다. 하루 네 끼를 먹는다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좋은 집에 산다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없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한 사람은 추가적인 요소가 있어요. 그게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영을 받았다고 하는 그 의미가 따로 주어져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미 구약 때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영이라는 존재를 나름대로 인정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 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된다는 거지요. 그게 뭐냐? 그냥 성령이 아니고 그리스도 영으로서의 성령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과 그냥 성령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냥 성령이라 해버리면 육과 대립되는 다른 영역에 있는 신적인 기운, 그런 쪽으로 설명이 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 성령께서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영이 아니고 오히려 꽂혀버린 성령이 우리를 누구에게로 데려가지요.



그 데려가는 그분을 거기에 지정해 준 겁니다. 그리스도 영이라고. 그리스도로 데려가는 성령만이 진짜 성령이고 다른 것은 성령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초대교회부터 이미 가짜 성령들이 유포가 되었어요.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성령, 성령, 성령운동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운동, 심지어 복음, 예수, 성령, 다 유행했어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너희들이 말한 성령은 성령이 아니고, 너희들이 말한 복음이 복음이 아니고, 너희들이 말한 예수가 예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용어가 같으면 같은 제품인줄 알지만 그냥 병만 봐가지고는 이게 진짜 활명수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아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잖아요. 정말 성령이 꽂혔으면 그 꽂힌 사람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도록, 즉 성령을 소유하지 않도록 만들어요. 성령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스도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에요. 그냥 사람이지, 그냥 국민이고 시민이지 하늘나라 국민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사람의 욕심은 신의 영역까지 넘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좋은 것은 자기가 다 챙겨 넣으려고 해요. 챙겨 넣는 그 대상중의 하나가 성령도 있는 겁니다. “성령, 좋은 것?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챙길게.” 성령을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진짜 성령은 그거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객이 바뀌어야 된다는 거지요. 워치만 니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삼분설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이 되려면 일단 육에서 혼으로 거듭나야 되고 그 다음에 혼에서 영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이중중생설’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그가 말하는 육과 혼과 영, 그 전체가 육입니다. 그 사람이 말한 전체가 육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이 말하는 육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신체, 이것을 육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혼은 뭐냐 하면, 혼은 바로 정신적인 요소를 영혼, 또는 혼이라고 하는 겁니다. 심지어 동물들과 같은 속성을 가지는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그 사람이 말하는 영이라는 것은 뭐냐? 이 육과 혼 말고, 일반인들 말고 성도만 갖는 그 무엇을 영이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방금 제가 설교 처음부터 한 이야기와 유사한 것처럼 되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영과 혼과 육, 삼분설로 나누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장착하려고 하는 거예요. 장착. 채택해서 자기 안에 성령을 정립하겠다는, 자기 소유화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오는 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육과는 다른 그 무엇, 혼과는 다른 그 무엇, 다른 그 무엇을 그 사람은 영이라고 소개한 거예요. 그러나 따져보세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영이라는 것은 육과 혼의 대립개념이기 때문에 육과 하나의 짝을 이뤄버리는 겁니다. 짝을 이뤄버리면, 현재 있는 것 말고 다른 것이 되어버리면 있는 것과 다른 것은 한통속이 되고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이 말 자체가 어려운데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하도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할 수 없어요. 나한테 없는 그 무엇이 되면 나한테 일단 그 무엇이 있고 그 없는 무엇은 나의 있는데서 나오는 확장된 발상이 되는 겁니다. 확장된 발상. 대립이라 하는 것은 뭔가 있고 난 뒤에 이것 아닌 그 무엇이 될 때 대립이 되거든요. 장갑이 왼손 짝이 있으면 분명이 짝이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지금 눈에 안보이지만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했을 때 왼쪽과 오른쪽 장갑이 짝을 이루잖아요. 그처럼 인간들은 자기 내부에 무엇이 있고 무엇은 없다는 것을 계산해 놓고 육과 혼은 있는데 영은 없으니까 그리고 영은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을 믿고 영을 추가하게 되면 온전한 내가 된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데 나는 그 전체가, 그런 아이디어전체가 육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육과 혼이 뭔가를 파악하게 되면 그 모자라는 부분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어 챙기면 온전한 내가 된다는 것, 온전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영이 아닙니다. 그 전체가 육이에요. 사람이 두 번 거듭나는 것은 젊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엄마에서 태어날 때 한 번 거듭 태어나고 성형외과에서 한 번 더 태어나면 거듭난 거지요. 오늘 본문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그 다음에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다는 이 말은 그냥 시각과 청각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말,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하는 이 사람의 마음의 외부적 표현을 가지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다는 말을 한 거예요.



눈에 무슨 두뇌가 있고 귀에 무슨 신경조직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눈으로 혹은 귀로, 이 말을 종합해서 한 것이 세 번째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삼분설은 생각을 하고 짐작을 하거든요. 뭔가 기대를 하는 거예요. 천국은 가야 되겠고, 하나님은 만나고 싶고, 사람 사는 이것은 장난이 아니고, 너무나 혹독하고 가혹한 인생을 사니까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던 것에 대해서 어떤 보상체제로서 죽어서는 좀 편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갖기 마련이거든요.



우리 어머니가 여기 계시지만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아내가 음식을 해 드리면 “내가 참 복이 많은 노인이다. 내가 옛날에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죽기 살기로 섬겼더니 나이 들어서 이런 복을 받는구나.” 그렇게 하시거든요. 그것이 보상체제잖아요. 보상의식이라는 말이지요. 어머니 자신이 과거에 부모한테 잘 해줄 때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던 거지요. ‘이때 잘해주면 늙어서 아마 복 받을 걸.’ 그런데 옆에 사는 아들이 뭘 해주니까 이 아들의 공로가 아니고 자신의 과거의 공로가 아들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지금 획득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적금 들고 연금 들어놓은 것 나중에 빼먹는 거예요.



15440446, 15440446, 이 순재 보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2년 거치 갱신할 수 있습니다.” 이건 빨리 이야기해버리고, 잘 안 듣는 것은.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이 보험 드는 것과 똑같아요. 그게 육입니다. 그게 육이에요. 교회에서 말하는 영은 몽땅 육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면 안돼요. 처음부터 다시 갑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을 봐야 돼요. 인간의 시선 말고. 여러분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조각 알지요? 거기 보면 턱 괴고 앉아서 뭘 생각하는지 ‘내 옷은 누가 가져갔을까?’ 그런 것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턱 괴고 앉아 있는 유명한 로댕의 조각이 있어요.



그 조각의 피부를 보세요. 돌이지요. 피부세포가 아니고 죽어 있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 인간을 인간이라고 우기려면 창조주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누구냐, 무엇이냐, 인생이 무엇이냐, 백날 해 봐야 제가 보기에는 딱딱한 육의 조각에 지나지 않아요. 창조주부터 시작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창조주가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되어 있어요. 창조주는 움직이는 분이에요. 뭔가 활동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면 제 논리가 이렇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는 출발하면 안 된다. 어디서 출발해야 되느냐? 하나님부터 출발해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움직인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누구냐 한다면 결국 나라는 것은 지금도 변화되고 움직이는 존재지요. 논리상 그게 합당하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정된 나로부터 내가 누구냐를 찾으니까 그 고정된 내가 누구냐를 규정하는 것부터가 반칙이 되는 겁니다. 질문 자체부터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스스로 해 버린 거예요. “내가 누구입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이 질문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자격이에요. 우리는 그런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께서 나를 어떻게 쥐어뜯습니까? 어떻게 움직입니까?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어디에 부려먹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되는데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스스로 고정된 자아를 설정해놓고 그 다음에 복음이고 성령이고 좋은 것은 다 끌어당기니까 그게 고정된 내 안에 담길 요소에요? 담길 요소가 아닌데. 담길 요소가 아닌데도 억지로 하다 보니까 육과 혼과 영이라는 삼분설이 튀어나온 거예요. 무조건 좋은 것을 끌어 모으면 나중에 주님 앞에 심판받을 때 들이대면 “오, 영도 있었네. 언제 영을 구했지? 합격!” 이렇게 되는 겁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성령은 우리 속에 담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성령을 그리스도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봤던 그 시선을 이제는 너에게도 그 시선으로 교체를 시켜주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보는 것이거든요. 내가 바라볼 때 납득이 되는 것을 바라봅니다. 나의 시선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는데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내 시선에 부합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내 시선, 내 안목에 합치되는 것. 중요한 것은 줄도 긋고 적어야 돼요. 우상이란 뭐냐? 내 관점에 납득이 되고 내 기대에 부응이 될 때 그게 우상이에요. 이게 고정된 나를 전제로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하나님도 어떤 다른 목적 때문에 우리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움직이게 하면 뭐가 흔들리느냐 하면, 내 시선이 고정되지 못하고 흔들려야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의 시선이 뭔가 흔들리거든 지금 뭔가 이동 중이라고 보면 돼요. 인생을 살면서 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될 때 뭔가 지금 주께서 나라는 이것을 꼭 집어서, 컨테이너 안에 우리가 갇혀 있으니까 그 안에서 내가 이렇게 있다고 안심하고 있는데 그 컨테이너 안에서 우리가 이동해버리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이고 가면서 우리의 세상 보는 시선, 남을 보는 그 시선이 나의 고정성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보는 그 시선으로 교체 중에 있습니다. 바꿔치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그리스도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 영을 유대인들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거기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아는 구약은 그런 게 없었는데 예수쟁이들은 희한하다. 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서른세 살 먹은 나사렛 예수의 영으로 확정 시켜 놓느냐?”고 그들은 그렇게 대들고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도 그랬었지요. 스데반집사 죽일 때 주동인물입니다. 스데반 집사 죽을 때 돌은 직접 던지지 않았지만 배후에서 조종했던 사람이에요. 저 스데반 집사는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사람이 사울이에요.



구약의 성신,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지 어떤 지상의 인간, 사적인 개인의 영은 아니라는 다짐을 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봤지요. 그런데 다메섹에 내려가면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아,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사람들 체포하고 죽이고 한 그 모든 것은 놀랍게도……, 참 이것은 놀라운 정도가 아니고 충격입니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고 예수님이 시킨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내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을 잡아 죽인 것이, 살인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그 뻔뻔함, 여러분은 그것을 가질 용기 있습니까?



그 뻔뻔함을 장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로운 표어입니다. 뻔뻔함을 장착합시다. 이 뻔뻔함을 장착 안하면 교회에 돌아다니는 일곱 귀신이 다 들어옵니다. 뻔뻔한 자에게는 귀신이 안 들어와요. 뻔뻔하지 않으려고 하고 경건하고자 할 때 있는 귀신은 다 들어옵니다. 저희끼리 비좁다고 자리다툼하고 난리에요. 나의 우수함과 나의 절대성을 성경의 용어들을 빗대어서 정당화하고자 하는 그 노력을 한 것,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 한 것이 그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지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식으로 교회 목사 말이나 듣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그 뻔뻔함이 없었던 겁니다.



사도바울은 왜 뻔뻔했느냐? 뻔뻔할 정도로 뻔뻔했느냐? 누가 자기를 당기고 있거든요. 옛날에는 고정된 자기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가함으로서 자기 자신이 우상인 것을 몰랐습니다. 나한테 유리하면 채택하고 나한테 불리하면 뱉어내면 된다고, 그러면 남는 것은 괜찮은 자아상만 남아서 이것 하나님께 드리면 천국 쉽게 들어간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결국은 예수님과 대적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죄 자체인 것을, 그게 바로 육인 것을, 그 경건과 영적생활 자체가, 성령생활 자체가 육인 것을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시선 바뀌고서 알게 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운동이란 사물의 이동이 아니고 상태의 이동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사물의 이동이 아니고 상태의 이동. 나만 홀로 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아우라 같은 것이 나를 둘러싸서 나를 이동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이동시키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나를 하나님 일에 동력으로,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이빌라인데 출입구만큼은 현대적이라서 디지털잠금장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밀번호 눌러야 열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달 전부터 버튼 누르면 삐삐삐, 삐삐삐삐, 자꾸 소리가 나는 거예요. 문은 닫히고 열리고 잘 되는데. 자꾸 소리가 나서 ‘야, 이걸 어떻게 해?’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그러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아내가 말하기를 소리가 안 난다는 거예요. 왜 소리가 안 나냐고 하니까 밧데리를 갈아 넣으니까 소리가 안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은 뭐냐?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 하는 그 자체가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주의 일에 밧데리로 우리의 한평생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문의 잠금장치가 고장 난 그것이 주의 뜻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한테 소모된다는 이 영광을 생각 못하고 나 하나 괜찮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꾸 주님을, 건전한 것을 자꾸 끌어당겨서 내가 내부적으로 정립을 하려고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도리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서 움직이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 장착을 시키려고 하는데 우리는 시선이 주님 시선이 아니고 내 시선이기 때문에 나 유리하라고, 나 좋으라고 주님을 그동안 사용한 겁니다.



9절을 다시 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할 때에 여기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는 “너희들끼리는 사람이지만 나의 안목으로 보면 그걸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냥 죄인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둘로 나누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인과 또 하나는 지옥 갈사람 둘로 나눕니다. 이 시선으로 세상을 보시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 빼놓고 다 지옥 갈 사람이에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이네.” 그렇게 볼 수 있는 그런 시선을 가져야 그것이 바로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관점이 바뀌어야 자유를 획득할 수가 있어요.



빈 놀이터에서 애들이 마음껏 놀잖아요. 왜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못 놉니까? 세상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관점을 가지고 보니까 모든 것이 두렵고 겁나고 공포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비록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도 괜찮았어요. 자기를 따르는 한 제자가 주님보고 한 말이 “예수님, 제 아버지 장례를 치러야 되는데요?” 주님께서는 관점을 바꿉니다. “네 아버지 죽은 것은 죽은 자보고 장례를 치르라고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보고 장례를 치르라고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관점, 그 자유의 관점, 주님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 관점, 그 자유함, 시선 바뀌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둘로 봐버릴 때 인간 쪽에서 이 성령의 세계에 들어가는 그것은 이제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국이 있는데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 9절 끝에 보면,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거든요. 생각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세계가 생각이 나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순간 그 세계에 필요한 시선으로 바뀐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영을 생각하는 사람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할뿐더러 그런 낯선 천국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곳을 천국이라고 여기고 그쪽으로 가도록 시도하겠지요.



“하나님, 내가 이만큼 점잖으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만큼 착하면 됩니까? 더 착해야 돼요?” 맨 날 이쪽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오늘도 주께서 나를 어떻게 다룰까?’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오늘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벌이실까?’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인생의 장애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장애물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그것을 장애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본인이 장애물로 여긴다는 자체가 본인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기 때문에, 정신적 영적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게 되면 관점이 바뀌고 시선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남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단이라고 하겠지요. 이단.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단인 듯, 이단 아닌 듯, 이단 같은 나. 자, 이제 본격적으로 갑니다. 성령께서 일 하실 때 우리가 쓰인다고 하는데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는가? 성경 갈라디아서에 보면 굉장히 더 이상 지지부진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라 간단하게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내가 뭘 장착해야 성령의 사람이 됩니까?”라는 이것은 천국 갈 수 없는 관점입니다. 이래서는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뭔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이 핍박이 주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바깥에서 주님에 의해서 벌어지는 활동이지요.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어떤 세력과 그리고 이미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주님께서 자기백성 사수하고자 우리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을 느끼게 만드는데 그 느끼는 것이 핍박이라는 이름으로 사도바울이 설명을 해요.



다시 한 번 29절을 보면,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제도 그러하리라. 성령께서는 어떻게 활동한다고요? 성령은 그리스도 영입니다. 그리스도 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핍박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께 속했느냐?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받은 핍박을 너희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영을 받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참된 인간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이다.” 이 논리를 지금 사도바울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핍박받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성도와 다른 사람의 차이점이 없다고요. 불이 뜨거우면 다 뜨겁고 이빨 아프면 다 아파요. 우리가 세상 살 때에 초연해서 살고 초월해서 산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도든 성도 아니든 힘든 이야기고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팔공산 톨 게이트에서 누굴 기다린 적이 있어요. ‘그래, 성도기 때문에 초연하게 살아야 해.’ 이렇게 했는데 팔공산 톨 게이트에서 전투기가 날아가는데 얼마나 시끄러운지 그게 초연이 안돼요. “아이고, 시끄러워라.” 그렇게 되지.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하고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뿐이지 아픈 것을 느끼는 것, 자존심이 상하는 것, 똑같습니다. 성령 빼놓고 둘의 차이점을 대라면 차이점이 전혀 없어요. 핍박을 좋아한다? 아닙니다. 핍박을 받아야 성령의 사람이라고 여기고 핍박을 받는다면 저는 단호히 말합니다. 그게 바로 육의 사람이라고. 네가 조작하지 마, 조작하면 안돼요. 그것은 모방이고, 흉내고, 연출이고, 연기지 절대로 성령은 그렇게 연출시키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식대로 살아가게 되면 그 핍박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픔 그런 게 아니고 다른 관점이에요.



다른 관점이 어떤 관점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 핍박, 이것은 반드시 혼자 있을 때는 느끼지를 못해요. 그런데 영적인 핍박이라는 것은 상대가 등장을 합니다. 그 상대가 등장하는 대목이 창세기 27장 38절에 보면, 그 말씀이 이삭이 자기 아들 야곱과 에서, 에서와 야곱을 두고 축복을 하는 그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같으면, 아버지를 아들이 속여서 축복을 가져갔으면 무효로 하든지 이미 저질러진 일은 할 수 없으니까 따로 또 축복을 해 주면 될 것인데 이삭이 하는 말이, “동생이 축복을 다 가져갔다. 너에게는 축복이 없다.”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게 참 이상한 일이지요. 창세기 27장 38절에 보면 에서가 하는 말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라는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의 복은 복을 다 갖든지 아니면 저주를 다 갖든지 둘 중 하나지 저주 반 아울러 복 반,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한쪽이 복을 가져갔으면 자동적으로 남은 저주는 다 가져가야 돼요. 그리고 그 저주가 혹독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이 그만큼 찬란해야 되고 영광스러워야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주는 더욱더 저주스러워야 돼요. 아, 이게 저주와 복이 소유개념이 아니고 관계개념이라는 것이 이거거든요. 한쪽이 더욱더 잘되기 위해서 한쪽은 더욱더 못돼야 되는 그런 관계를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천국 가서 복을 즐길 때 우리가 복을 즐기는 만큼 지옥에서는 지금 화를, 저주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정확해요.



이것은 정말, 이것은 사람의 아이디어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 가혹하고 혹독한 운명을 안겨주시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은 인간 자체적인 행복을 가질 자격이 없고 모든 인간은 피조물이고 피조물은 창조자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주를 드러내셨거든요. 예수님의 속성이 뭐냐 하면, 한쪽은 사랑하고 한쪽은 미워하는 거예요. 미움과 사랑은 받아야 될 사람의 권리가 아니고 미움과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는 분의 주 되심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받아야 될 자를 피조물로 일부러 만들어놓은 거예요. 일부러.



로봇청소기가 하루 종일 청소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 로봇 청소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지옥 가서 저주를 받아야 되느냐 하면, 저주받기 위해서 일부러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거, 이거 멱살 쥘 사람이 있을지 싶습니다만 인간이 인간끼리 협의해서 나올 문제가 아닙니다. 착함이니 이런 것은 요건도 안돼요. 나는 착하다, 선했다는 이런 것이 요건도 되지를 않습니다.



울산서 밤늦게 열 한 시 넘어서 막차 타고 오는데 승객 중에 술 먹은 청년이 있었던 거예요. 내리면서 휴대폰을 떨어뜨리면서 내린 거예요. 그 옆에 있던 어떤 착한 긴 머리 소녀가 일어나서 그 휴대폰을 들고 그 청년을 쫓아가는데 그 청년은 벌써 버스에서 내려서 가고 있어요. “저기요, 휴대폰 가져가야지요.” 해도 술이 너무 취해서 그냥 휘적휘적 가는 거예요. 기사도 알고 차를 세워줘서 그 긴 머리 소녀가 술 취한 총각한테 기어이 휴대폰을 갖다 줬어요. 차가 다시 출발할 때 이런 생각을 제가 했어요. ‘저 휴대폰 찾아준 소녀가 과연 앞으로 행복한 인생이 보장될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이 땅은 착하다고 바르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전 1:2) 착한 것도 헛되며 나쁜 짓도 헛되고. 다른 목적, 다른 이유 때문에 있는 것이지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거 하나 뿐입니까?” 에서가 침통한 마음으로. 끝났지요. 운명 끝났어요. 주의 축복과 저주, 본인에게 할당된 운명이 전부입니다. 참, 성경은 보면 볼수록 가혹하기 짝이 없어요. 속여서라도 복을 빼앗아가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동생이 속여서 복 빼앗아갔다고 징징댈게 아니라 너도 왜 속이지? 너는 왜 동생을 속여서 복을 빼앗아오지 않았느냐? 그 정도로 너는 하나님이 주신 복과 저주의 그 중차대함을 너는 세상 것과 바꿔버렸다.”는 그 말이지요. 기껏 배고파서 팥죽 먹는 것으로 이 중요한 사항을 놓쳐버린 거예요.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과 팔아먹은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창세기 32장 11절에 보면, 야곱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에서의 손에서 건져주옵소서.’ 라는 이 자체를 가지고 저는 핍박이라고 봅니다. 핍박. 핍박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핍박하는 대상자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았어요. 만들어놓고,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의 개입, 오늘 본문대로 하면 성령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 영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못 가진 자가 온갖 수단, 방법, 신학적인 이론을 총동원해서 성령 가진 사람을 핍박하는 현상이 일어나신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핍박이라는 것은 누가 내 돈을 떼어먹는다든지 이런 것이 핍박이 아니에요. 집이 홀라당 불이 나서……, 어제 결혼식에 갔더니 복음알고 참 예수 잘 믿는 사람인데 집이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옷도 자기 옷이 아니고 대충 빌려 입고 온 옷이 되어서 몸에 맞지도 않고 지금 어디 사는가, 마을 회관에 살고 있어요. 복음 알고, 그것도 수십 년 잘 믿었고, 지금도 잘 믿고 있고, 복음 잘 아시는 분인데 누전으로 인해서 집이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물론 자기 집이 아니고 세 들어서 살고 있었지만 보상받을 방법도 없답니다.



그 소리 들으니 여러분 생각이 어때요? ‘아이고, 다행이다.’ 하지요. 그게 다행이라는 말은 또 다시 우리가 육으로 돌아온 겁니다. 지금 집이 있어도 내 집이 아니고, 통장에 돈이 있어도 내 돈 아니고, 건강이 있어도 내 건강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하시는 밧데리에요. 에너지원이라니까요? 물론 에너지원이 한 70억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말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적으로 가진 재산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왜 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거부하고 우리가 다 모르는 이야기를 혼자 알고 있느냐?”라는 식으로 핍박당할 때 그게 그리스도 영을 받은 사람이에요.



하, 이걸 설명할 길이 없네. 설명할 길이 없어. 남자한테 참 좋은데, 산수유인지 뭔지 이걸 설명할 길이 없네. 성령 받은 이게 너무 좋은데, 내가 기도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방언 터져서 얻은 것도 아니고, 교회 오래 다녀서 얻은 것도 아니고, 성경공부 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그냥 주께서 다루시는데 이걸 나보고 어떤 방법으로 얻었느냐고 따지시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어린 대장금에게 임금님이 “얘야! 이 소고기가 어찌하여 한우가 아닌 게냐?” “씹어보고 맛을 보니 한우가 아니라 한우가 아니온데 ‘어찌하여’라고 하오시면……?” 이게 진짜 한우가 아닌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합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사도바울보고 뭐라고 따지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는데, 못했는데 너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 그러니 사도바울은 할 말이 없지요. “네가, 너희들이 핍박,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핍박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 말고 왜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하는 다른 이야기를 했느냐?’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핍박했듯이 이제는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을 똑같이 핍박할 때 그것이 증명이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돌파하세요. 기독교를 돌파하세요. 교회를 돌파하시고. 교회와 종교와 기독교를 부정하지 아니하면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극한의 모든 진선미를 다 거기에 집어넣었어요. 여러분이 유럽에 가보시면 유럽의 최고경지의 예술가들의 작품은 전부 다 교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가 돈이 제일 많기 때문에 돈을 많이 주고 최고의 예술가를 채용해서 만든 것도 있지만 인간이 갖고 있다는 그 기본적이고 이성적인 진선미의 추구는 마지막 신과 접촉되는 거예요. “주여, 이것이 내 안에 내장되어 있던 마지막 신의 모습입니다.” 하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끄집어낸 신의 속성은, 그걸 이콘, 또는 영어로 아이콘이라고 하는데 그 신의 모든 형상은 자기를 존재로 여기고 시작한 모든 거예요. “이 정도로 나는 거룩하고 고상합니다.”라고 해서 나온 거예요.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했어요. 말라기 설교에 보면 나옵니다. 말라기의 제사장들이 화려한 복장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 제사장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화려한 복장을 하고 화려한 성전에 가서 자기 딴엔 화려한 종교적 일을 했다고 쳤는데 거기서 화려한 불꽃에 타죽고 말았어요.



그 화려한 거룩이 주 앞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거룩은 바로 그 죽음에서 나오지요. 뭐냐? 그 피, 그 피가 거룩이었지요. 화려한 모양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사람들로 납득이 되는 그 신성, 거룩의 극치가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이 아니고 육의 확장이고 진정한 거룩은 바로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세울 때 주께서는 십자가 피만 인정하고 그런 것은 다 쓰레기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제가 분명히 처음에 설교하기를 그리스도 영 말고, 그리스도 영 빼놓고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똑같기에 여전히 성령 받고 교회 다녀도 여전히 교회 와서 자기 잘난체, 자랑질 하는 보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찬양도 하고. 저도 찬양도 해봤거든요. 열심히 하면서 테너도 잘 되고, 소프라노도 잘되고, 그렇게 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한테 감격하고 놀래가지고 “어머 귀여워. 너무 귀여워. 내가 이렇게 찬양을 잘하다니!” 꼭 김 지민 같아요. 똑 같아요. 차이점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매일같이 우리를 쓰레기 취급하는데 “아이고, 목사님! 저도 제가 쓰레기인지 압니다.” 아니오. 어제까지 쓰레기인줄 알았는데 내일 되면 쓰레기 밑에 숨어 있는 쓰레기가 또 있을 거예요. 그걸 파 뒤집는 작업, 파헤치는 작업을 평생 동안 하실 거예요. 쓰레기 밑의 쓰레기, 쓰레기 밑의 쓰레기, 쓰레기 밑의 쓰레기, 그걸 말씀을 통해서 다 뒤집습니다. 왜? 성도라 할지라도 똑같기 때문에. 남 좋아하는 돈 좋아하고 남 자식 잘되면 다 부러워하고, 모든 것이 그래요. 오직 성령, 그리스도 영이 그것을 십자가로 가져간다는 그것 외에는 똑같아요.



똑같은데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쓰레기인 것이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파헤쳐진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쓰레기 한 십 센티 정도 파헤치니 삐져서 나간 사람들도 있는데 십 센티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왜 우리가 늙어죽어야 되고 ……, 죽을 때도 그렇게 고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전에 계신 분이 스스로 약속을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천사의 모습을 하고 돌아가시면 그 다음부터 내가 교회 다닌다.” 했다는데 아이고, 참……! 죽을 때 천사의 모습 아닙니다. “왜 저를 죽입니까?” 이렇게 나오지 “더 살고 싶어! 나 돌아갈래!” 이렇게 죽지 천사의 모습 아닙니다.



오히려 시편에 보면 철없는 인간이 고요하고 평안하게 죽어요. 철없는 인간이. 죽을 때도 이래가지고 당당하게 죽어요. 영정사진조차 대범하게. 자꾸 소설을 쓰지 마세요. 똑같아요. 같은데 “나는 쓰레기다.” 쓰레기로 사는데 오직 피 때문에, 용서의 피 때문에, 그리스도 영으로 십자가 바라보라고 한 겁니다. 거기서 용서를 배우고 용서를 받아왔음을 소급해서 들어왔습니다. “주여, 나에게 줄 복이 이것밖에 없습니까?” 성도에게 줄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다른 것은 마음 품지도, 아예 생각도 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에 하나님 속에 있는 그 깊은 심정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니 알아듣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핍박으로 끝나버린 주님의 생애가 본격화되어 이제는 그 핍박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주여! 그리스도에게 가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지 않은지 날마다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