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었던 비밀
2014년 11월 2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2:6-9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에 입각해서 쓰여졌습니다. 인간들로서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야지만 비밀이 비밀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쪽에서 비밀이라고 아무리 우겨셔도 인간이 알아채버리면 그것은 전혀 비밀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끝까지 비밀은 비밀로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비밀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공개된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10:7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심판의 날에는 심판의 원칙에 준해서 감행이 되는데 이는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의 내용과 일치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비밀이 공개되는 시점은 곧 심판이 감행되는 시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아무런 대비책도 취할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당하는 셈이 됩니다.
즉 심판이란 하나님의 원칙에 입각해서 시행되고, 그 시행된 원칙은 선지자나 사도의 입을 통해 ‘비밀’이라는 형식으로도 꼬깃꼬깃 감추어진 형편이고, 그렇다면 인간들은 자신을 심판에서 면제되기 위해 사전에 조치 취할 기회라는 것은 전혀 잡을 수가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어 있습니다.
비밀이 비밀다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고 정당해야 하려면 어떤 상황이 초래되어야 할까요? 사실 하나님의 의로움과 공정하심과 선하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늘 실수하고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입장을 참조하는 경로를 사용하지 않은 채 직접 하나님과 마주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성경을 가지고 시도하는 모든 시도들이 실은 숨겨진 비밀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인 탐욕과 욕심에 입각해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에, 비밀의 공개와 더불어 같이 공개시키십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 죽음 사건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기존의 둘러쳐져 있는 삶의 환경 속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상이나 희망 같은 그곳에서 구입하고 편집해서 자아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미 있던 것들을 조립해서 자기의 취향에 맞추어 끌어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세상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이미 ‘세상의 관원’들에게 의해서 조정되고 조종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즉 세상 권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수단 속으로 모든 사람들을 종속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누구도 세상 권세의 위세에 눌리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노리신 점은 세상 권세의 질적인 성향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누군가를 노리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꼭 죽어서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고 어느 인간도 여기에 대해서 대항할 처지는 아니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영광과 영화됨을 포기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인간에게 영광을 안겨다 주실 바로 ‘영광의 주’를 세상 권세 자리에 앉은 관원들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살해당했습니다.
죽음이란 곧 끝을 의미합니다. 사라져버려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예수님이 마련하신 그 십자가 죽음에 합세하려는 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벌리는 모든 노고와 노력은 오로지 자신에 의한 자기 관리 차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관리 대상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곧 본인입니다.
그런데 그 본인이 죽음을 통해서 사라져 없어진다면 구태여 자기에게 가해졌던 그동안의 모든 노력도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려고 나설 사람들은 아예 없습니다. 이 말은 곧 그동안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다루되 그 취지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살리려는 시도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 앞에서 조용하게 돌아가시게 되니 그 어느 누구도 그 죽음 앞에서 뒤돌아 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인간은 끝까지 자기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대해왔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영원히 하나님의 비밀이 되어 인간들의 지혜로부터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자기 조치로 구원될 수가 없다면 천국에는 누가 가게 되는 겁니까? 누가복음 4:26-27에 보면,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많은 과부’, ‘많은 문둥병자’들이 현지에 있음을 익히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한 과부, 한 문둥병자에게만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비밀에 부합되는 공평함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공로에 입각한 무상의 구원의 취지에 부합되려면 그 어떤 인간도 이 무상의 구원을 요구할 처지에 있지 않아야 하신다는 겁니다.
정작 구원된 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를 안 찾아오시고 안 구원해주셔도 되는데 왜 오셨습니까…” 모든 인간들은 죽음에 쫓기면서 오늘도 살고 잇습니다. 기도나 행동의 모든 뒷면에서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후달림에 의해 가해지는 증거가 서려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보면서, 자꾸만 ‘원상복귀’만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형편에서 예수님께서 성도가 비교할 대상을 따로 제공합니다. 그들은 바로 십자가 달린 강도와 세리와 창기와 고난 받는 욥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원대로 살게 된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 뜻은 항상 누락되는 식으로 이끌려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영광의 인물들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담겨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본인들이 회복시키려는 그 영광말고 예수님께서 취득하신 그 영광 속으로 그들을 퍼담아 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곧 이 마지막 때에 마지막임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비밀’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위장하는 위장 수법이 십자가 피 앞에서 모두 녹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고전 2장 6-9(감추었던 비밀)1411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 6-9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2:6-9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비밀을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면서 그 비밀은 “감추었던 비밀”이라고 되어있거든요. 감추었던 비밀이라면 계속 감추지 무엇 때문에 공개를 하시는 겁니까? 비밀 자체가 갖고 있던 내용이 이제는 모든 것이 종결될 시기에 와 있기에 공개가 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숨겨 놓은 원리원칙에 준해서 세상을 끝장내겠다는 그런 이야기죠.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의 기준은 그동안 은밀하게 숨겨왔던 내용이고 그 내용에 의해서 마지막 날에는 지체하지 않고 세상을 심판해서 끝장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큰 반칙을 저지른 셈이 되지요. 어떤 반칙이냐 하면, 이런 식으로 심판한다는 것을 미리 공개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대비를 잘한 사람은 심판에서 면제를 해주고 대비를 못한 사람은 심판해야 그것이 공평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끝장내고 심판하는 기준을 공개하지 않고 감추어놓았다는 거예요.
감추어놓고 마지막 날 심판과 동시에 이것을 터뜨려가지고 “내가 이런 기준에 의해서 그동안 너희들을 다스려 왔는데 너희는 몰랐었지? 몰랐던 것은 할 수 없고 나는 이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끝장내겠다.” 이렇게 돼 버리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챙길 수 있는 어떤 기회 자체가 허용이 안 된 셈이 되잖아요. 시험문제가 여기서 출제된다고 미리 알려주고 그래서 ‘아, 시험 대비를 해야겠다.’ 하고 대비를 해서 공부를 미리 해놓고 그 다음에 성적이 나빠서 탈락한다면 그것은 이해가 되는데 시험문제도 공개하지 않고 마지막 심판 날에 “사실은 내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끌어왔거든. 너희는 몰랐지?” “몰랐습니다.” “몰라도 할 수 없고 이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겠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심판의 정당성이 보장이 안 되잖아요. 보장이 안 된다고요. 주님께서 우리한테 큰 반칙을 저지르는 겁니다. 전혀 이 심판의 공평함과 정당성이 누락이 되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이겁니다. 7절에 보면 지혜가 있는데 이 지혜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따라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뭐냐? 지혜인데 이 지혜는 감추었던 지혜다. 그게 바로 비밀로 감추었던 지혜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말하기를 감추려면 계속 감추지 왜 이제 와서 공개해서 공개하자마자 심판이냐는 말이지요. 감췄으면 계속 감추고 있지 왜 이제 와서 공개를 해서 “이것은 몰랐지?” 하나님 본인이 감춘 것을 우리가 알 리가 있습니까? 모르지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몰랐지?” “몰랐습니다.” “몰랐으니까 심판받아라.” 이게 무슨 정당한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자체가 우리에게 납득이 되지를 않아요. 성경 자체가 인간이 어떻게 실용적으로 이용해볼까,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오류인 거예요. ‘자,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두꺼운 책을 주셨다. 이 책에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바르게 살 수 있고, 나중에 죽어서 천국갈 수 있는 비밀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공부하고 이것을 파악하게 되면 천국 간다.’라는 생각 그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거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것은 본인이 성경 보면서 본인의 욕심과 욕망이 앞선 거예요.
방금 제가 언급한 거요. 방금 한 것 또 잊어버렸습니까? 방금한 것 다시 할게요.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하니까 염려되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성경에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는 비밀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공부하게 되면 우리에게 행복이 주어지고, 나중에 천국이 주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주어진다, 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성경을 보고 열심히 지키세.’라는 생각 자체가 이게 비밀에 근처도 안간 생각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원상복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원상회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쉽게 말해서 자기 생각 외에는 없어요. 사람이 성경 봤다고, 하나님 말씀 안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지킨다? 개가 웃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은 것은 인정하겠는데 말씀을 지키겠습니까, 아니면 못 지키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어느 인간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아니에요. 자기 기대와 자기 의도가 우선이에요.
자식이 되어서 부모가 잔소리 할 때 그 부모의 말을 내가 순종한다? 그런 자식 없습니다. 부모의 말을 지켰을 때 나에게 유리한 것이 뭘까? 이걸 따지게 되어 있지 순수하게 부모의 말을 순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은 각자 개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마음 모르고 부모는 자식 마음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개개인 개별자라 합니다. 너 따로 나 따로 에요. 같이 잠을 자도 꿈이 다르기 마련이에요.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합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이용할 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나한테 얼마나 유리한가를 고려해서 “이것 지키면 무슨 복을 줄 겁니까?” 그것 바라보고 온 거예요.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서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주님 말씀을 지킨 위인이 없습니다. 일단은 우리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갑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좀 편한 것 같아요. 테레사 수녀가 어떠니 주 기철 목사가 어떠니, 그 사람들 전부 다 자기 욕심대로 산 사람들이에요. 이 땅에는 어느 누구도 말씀대로 산 사람이 없습니다. 땅, 땅, 땅! 내가 아주 선언을 할게요.
성경의 특이한 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성도가 되었을 때 성도가 비교해야 될 대상들이 나옵니다. 성도가 비교해야 될 대상들이. 성도는 누구하고 비교해야 되느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거지 나사로와 그리고 탕자, 이런 자와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여, 이 교회에서 열심히 새벽기도 나오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이 가정에 우환이 있고 하는 일이 꼬이고 내 뜻대로 안 됩니까? 몸은 왜 자꾸 아픕니까?”라고 했을 때 주님의 응답이 뭐냐? “네가 거지 나사로하고 비교해 봤나?” 이렇게 합니다. “네가 욥과 비교해 봤어?”
욥은 아무 연고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온 몸에 종기가 나고요, 자식 열 명은 한날에 다 죽고, 가진 재산은 다 날라 갔습니다. 그 욥하고 우리하고 평소에 얼마나 자주 비교해 봤습니까? 비교해 봤습니까? 욥하고 비교하면서 또 하나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뭘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욥은 그렇게 이유 없이 아프고 재산 날리고 자식 다 죽었을 때 욥이 착했습니까? 천만의 말씀. 욥은 이렇게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욥은 거침없이 대들었고 심지어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나를 살게 할 것 같으면 나를 아예 이 땅에 태어나지 말게 해 주셔야 하는데 왜 태어나서 이런 수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책임지세요.” 그러면서 욥이 한탄 가운데 내 뱉은 말 중에 중요한, 비밀과 관련된 것이 거기에 포착이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죽고 난 뒤에 나를 대변할 그 대속자를 직접 만나고 싶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았는지를 대변해 줄 그 대속자, 대변자를 내가 죽어서 만나고 싶습니다.” 이게 뭐냐? 중보자에요. 중보자.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중보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고난을 허락하신 거예요. 이 중보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신이라는 것은 전부 다 조작된 거거든요. 하나님 자체가 조작된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돼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하나님은 안 죽는다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서 돌아가셨어요. 신이 죽을 리가 있습니까, 라고 생각했던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할 때 그 살해한 자들의 마음가짐이 이런 거예요. 인간은 죽지만 신은 죽지 않아야 죽지 않는 쪽에서 죽는 나를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좋은 곳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체제, 그런 시스템, 상호적인 프레임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런 생각은 귀신이 만든 겁니다. ‘신은 좋으신 분이다. 신은 선하신 분이다. 선하신 분 같으면 우리에게 선한 일을 행하실 것이고 그 선한 일이 뭐냐? 그 선한 일은 우리가 고난과 고통가운데 있는데 그것을 불쌍히 여기고 건져줘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하는 그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던 겁니다. 그게 유대인의 생각만입니까? 아니면 오늘날 교회 오는 우리가 은연중에 기대하는 생각입니까? 동일한 생각이에요. 그 동일한 생각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네가 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지, 네가 신을 이용하고 신의 어떤 능력을 빼먹어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고 내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가, 내가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내가 신처럼 군림하는가, 그것을 위해서 신을 이용해 먹은 것이지 결코 진짜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교회 와서 성경에서 금시초문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됩니다. 항상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우리는 나만을 위해서 계속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 좋으라고 세상이 움직인다는 그런 스토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기에 그것은 말씀에 입각해서 완전히 삭제되어야 되거든요.
하나의 분명한 예를 들면 “추억의 책장을 넘긴다.”는 노래가 있어요. 이선희가 부른 노래. 추억의 책장을 넘긴다. 저는 그걸 생각했어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그 책장에 뭐가 있을까? 없어요. 인간에게 기억은 있지만 과거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기억은 있어요. 그러나 과거라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과거는 매일같이 삭제되거든요. 뭔가 뒤따라오면서 오늘 살면 내일은 가위로 잘라 내는 것 같아요. 자꾸 지워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두뇌 속에는 추억은 있고 아름다운 기억은 있지만 막상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면 그 과거는 없어요. 벌써 잘리고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삭제당하고 지워져버리고 없는 겁니다. 뭔가 쫒기고 있어요.
인간이 하는 행동과 인간이 하는 모든 생각, 그리고 인간이 글로 쓰는 모든 것들, 이런 것들 뒷면에는 공포가 따라 다닙니다. 두려움이 따라다녀요. 새벽기도 하면서 뭔가 한 마디 한 마디 외칠 때 그 한마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 가정이 ……” 할 때 우리의 가정이라는 그 단어를 들춰보면 어떤 두려움에 쫒기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라는 그 단어를 들춰서 뒷면을 보면 거기에 또 두려움에 쫓기고 있습니다. 뭔가에 되게 쫓겨!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계속 쫓겨서 교회 와서 한 풀이하듯이 매달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에 쫓기는지 본인도 몰라요. 미지의 엑스(대문자 X)라고 할 수 있는데 자꾸 공포에 쫓기는 겁니다. 제가 안 가봤습니다만 예상하기는 아침에 화장 짙게 한 마담이 유흥업소에 앉아서 치마폭 여미고 앞에 던지는 것이 뭐냐? 화투장 가지고 오늘의 운세를 떠보는 겁니다. 그 화투 48장, 여러분이 그 화투가 48장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우리교인들은 화투 본적도 없어서 잘 모를 거예요. 화투 48장을 좍 펴보면 1월 송학부터 해서 2월 매화, 죽 나오는데 동양화가 굉장히 화려하지요. 그러나 그 뒷면을 보세요. 칙칙한 색이 나오지요.
우리가 밟아온 인생 모든 과거라는 것들이 그 순간은 아름답지요. 내일만 되며 오늘은 다시 화투장 뒷면처럼 색깔이 칙칙하게 바뀝니다. 죽음의 색깔이 따라온 거예요. “너는 내 비밀을 몰랐기 때문에 너는 혼자서 그동안 촐랑댔다.”는 거예요. “20년 살았느냐? 너는 19년 11개월 동안 촐랑댔어. 마치 5월 난초고 10월 단풍인 것처럼. 12월의 비처럼. 3월의 벚꽃처럼.” 그러나 오늘이 되면 과거는 없어지면서 칙칙한 죽음의 색깔로 다 바뀌는 거예요. 뭔가 화려하면서도 쫓기고 그 쫓기는 공포를 면제해보려고 새로운 작업과 신선한 뭔가를 통해서 부지런히 쫓기듯이 움직이죠.
여자 분들은 쇼핑하면서 새로운 것에 의한 어떤 자극을 찾으면서 남자들은 술과 담배로 도박으로, 그런 식으로 계속 쫓기듯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까지 와서 사랑의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거야, 이끄실 거야, 죽어서 좋은데 가게 하실 거야.”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비교의 대상을 놓친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비교의 대상과 비교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누구와 비교했는가? 내가 되고 싶은, 조작된 자기의 이상과 자기 자신을 비교한 겁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조치에요. 자신의 야망이 교회 와서도 죽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 와서 더 정당화돼요. 주여, 이런 내가 되게 해달라고. 이런 내가 되게 해달라고. “신은 전능하시잖아요. 신은 능력이 있잖아요. 그 능력을 나에게 좀 쓰세요. 이런 내가 되고 싶은데 조금 미흡하니 이것마저 채워주시면 내가 되고 싶은 자아가 될 것입니다.”라고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원상회복에 불과한 거예요. 자기의 미진한 것을 메우려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교회 와서 주의 말씀 들었다고요? 정말 개가 웃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을 의사도 없고 지키지도 않고 들어봤자 ‘음, 말씀이네.’ 하고 곧장 외면해 버릴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주의 말씀은 주의 말씀이고 주의 말씀보다 우선되는 것은 나의 욕구만족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끝! 끝!!
성경은 비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대한 비밀은 하나님께서는 욕구를 갖고 있는 인간한테 들키지 않는 비밀로 이 성경은 쓰여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 뒤에는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스며있는데 주님의 글자 뒤편에는 뭐냐? 하나하나 들추면 들출수록 “다 이루었다.”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모든 말씀의 표면에 보이는 이 문자, 글자가 있잖아요, 이 글자 뒷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너희들이 이 비밀을 모르기에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네가 비밀에 대해서 무지몽매하기에 그래서 내가 너에게 상의나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내가 대신해서 다 이루었느니라.” 그것이 담겨 있어요.
그게 바로 2장 4, 5절의 말씀이 언급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2장 4절의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하나님의 능력이 발휘하는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성경책 자체의 원천이 어디서 솟아나온 말씀들인가를 소개하는 쪽으로 성령께서는 데려다 줍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다시 말씀드려서 성령의 능력이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말씀은 우리가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고 지키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 성경말씀의 원천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말씀이 돋아나는 그 원천, 그라운드가 따로 있어요. 그 그라운드로, 그 배경으로 성령만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갑니다. 성령만이. 그러면 여기서 나올 수 있는 기쁜 소식은 뭐냐?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게 분명히 기쁜 소식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능력이에요. 인간은 꼼지락꼼지락 뭔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불안하니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더 불안한 상황은 없습니다. 굉장히 불안해요. 뭔가 해야 돼요.
베이트슨이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그에게는 이것이 딜레마인데 뭐냐? 첫 번째, “인간은 노력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두 번째,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노력 없이 얻은 것이다.” 이 두 개가 어떻게 융합이 되느냐? 자기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여러분이 저렇게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노력덕분에 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항상 여러분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내 뜻 말고 다른 뜻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나 뭔가 아무것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어요.
직장 안 나가면 마트에서 물건 살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직장에 나가야 되고 직장에는 놀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짜증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저녁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죽은 듯이 퍼져서 자야 돼요. 온 몸이 피곤해서 쓰러져 잠을 자야 되는 겁니다. 제가 젊었을 때 너무나 감명 깊던 노래, 김 종환이 불렀던 <존재의 이유> 그 노래만 들으면 저는 지금도 눈물이 나요. 특히 가사에서 감동을 주는 것은 이 대목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라는 대목.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 손엔 너의 작은 사진 뿐.”
희망도 없고 어떤 비전도 없고 난 왜 이렇게 피곤해? 죽 쳐져서 아침에 눈 뜨면 배달 나가고 저녁에 배달 끝나면 집에 와서 쓰러져서 엎어져야 되고. 김 종환이 한때 배달했던 사람이거든요. 대체 이래서 언제쯤 우리가 결혼해서 사느냐, 그런 가사입니다. 여자들은 모르지요. 남자들은 진짜 가슴이 찢어집니다. 특히 백수들. 아르바이트 하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그 노래가 절실하게 다가와요.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하루하루를. 더러운데 사표 낼까?” 사표내면 누가 받아줍니까?
모르지요?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지요? 비밀입니다. 그게 바로 비밀이에요. 내 노력하는 대로 안 되고, 내가 노력 안한다고 해서 더 사정이 나아질 것은 없고, 뭔가 쫓기기는 하는데 쫓겨야 될 목표도 희망도 부실하고 변변치가 못하고,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게. 그 비밀, 이 자리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대단한 거 알려주는 것은 아니고요.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요. 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만세전에, 창세전에, 이 세상을 만들기 전에 왜 이렇게 사는 거냐고 김 종환이 묻는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세전에 그렇게 살도록 정해진 것이다.”
비밀은 무엇이냐 하면, 비밀이라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인간에게 노출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계속 비밀로 간주하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불공평하게 봅니다. “하나님이여, 미리 문제를 이야기해야 문제 풀어서 잘 푼 사람은 천국, 못 푼 사람은 지옥, 이래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문제, 심판의 기준도 알려주지 않고 마지막 날에 심판과 동시에 모든 것을 공개해버린다면 우리가 우리 운명에 대해서 내가 자유의지로 선택할 기회마저 박탈시켜 버리면 내 인생을 누가 관리합니까?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지 못하면 나의 주체성을 어디서 찾습니까? 뭔가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해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이라도 허락하셔야 우리가 내가 존재한다는 보람을 갖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들 때에 주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빠져도 괜찮아. 네 인생에서 네가 손 떼고 빠져도 괜찮아.” 그 괜찮음이 바로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이 말씀대로 심판이 진행될 때 그 말씀이 우러나오는 그 그라운드, 원천은……, 인간은 그 원천을 자기에게로 돌렸어요. ‘내가 이 말씀대로 살면 아마 착하다고 복 주겠지.’ 라고 그렇게 이해를 한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설교 처음에 실용적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실용적으로 작용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용적으로 써먹으라고 준 게 아니에요.
아들이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갔다. 목사님이 심방 와서 기도를 한다. 이럴 때 쓰는 본문이 여호수아 1장 8절인가, 거기 나오는 대목이에요. 여러분의 자녀가 군에 가기 직전이라 치고 목사님이 심방 왔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런 본문을 이야기할 때 여러분이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 대목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후방으로 빠질 것이다. 위험한 곳에 안 갈 것이다. 면회도 자주 갈 수 있고 매주 토요일이면 집에 올 것이다.”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형통한다는 그 말씀, 그걸 군에 가기 직전의 아들이 안다면. 또 이사를 가기 직전이나 막 새집에 입주를 했을 때 목사님이 심방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네가 율법을 다 지키면 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여러분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할 때 우리가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비밀로 감추는 거예요. 그런 짓 할까 싶어서. 그런 식으로 이용해 처먹을까 싶어서 주께서는 그렇게 감추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나는 너를 배제한다는 겁니다. 이 성경말씀에서 손 떼라는 거예요. 그 따위 식으로 해석할 것 같으면 손 떼라는 겁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창세전에 이야기했던 비밀은 마지막 때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때가 우리가 생각하기는 내가 죽는 마지막? 아닙니다. 세상이 불 심판으로 끝나는 그 날? 아니요. 그게 마지막 때라는 것은 여기 8절에 나옵니다. “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 그 분이 영광의 주님이거든요. 영광의 주님을 사람들이 죽였다는 말은 영광을 짓밟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에게 주어질 영광,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그 영광을 우리가 짓밟은 거예요. 우리가! 왜? 우리는 우리의 원상회복 외에는 생각 못하기 때문에. 왜?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마귀의 앞잡이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짓밟은 거예요. 우리에게 줬는데 그 준 것을 우리가 짓밟은 겁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영광만 생각한 거예요. 그것만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 오고, 예배드리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 하고, 전도하라면 전도하고, 선교헌금 하라면 선교헌금 내고, 목사 섬기라고 하면 섬기고, 우리는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시키는 대로 백날 해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게 자기 인생을 망치는 일인데. 교회 와서 인생을 더 망치는 거예요. 밖에 가만있어도 지옥가지만 교회 와서 더 지옥 가는 거예요. 집단적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완전히 교회가 집단적으로 지옥 가는 전세버스 같아요.
여러분이 잊었을까 싶어 또 이야기합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손 떼면 돼요. “인간아! 네 운명과 네 인생에 대해서 제발 손 떼라.” 손을 떼면 돼요. 그러면 존재는 가볍습니다. 내 인생에서 손을 떼게 되면 쫓아오던 일곱 귀신도 재미없어서 유턴합니다. 뒤돌아 가버려요. 내 인생을 위해서 자꾸 하나님과 관여하려고 하니까, 하나님 일에 내 인생을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그 바늘이 들어가는 관을 따라서 일곱 귀신이 같이 따라 들어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 가정이 구원 받을까?’ 그거 손 떼세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사람이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남들은 부부가 교회 나오는데 자기는 부부가 안 나오고 혼자 나오면 나도 내 남편 전도해서 “봐라. 나도 내 남편 전도했다.” 하려는 자존심 같은 것이 있거든요. 따라서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전도를 시키지 않습니다. 중보기도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애초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손을 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분명히 했지요? 절대로 손을 뗀다고 해도 뗄 사람들이 아니에요. 지금 얼굴 보니까 절대로 뗄 사람들이 아닙니다. 절대로 손을 떼지 않아요. 사람은 답답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이 터져 나오는데 그게 기도가 아니고 뭡니까? 기도하게 되어 있고 사람이 뭔가 착한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착한 일을 해 놓고는 돌아서서 그 대가를 호소하고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착한 일을 했는데 이런 보상이 왜 없습니까?”라고 요구하기 마련이에요. 따라서 손을 떼라고 해도 안 떼니까 제가 할 말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냥 막사세요. 도대체 다른 이야기가 될 수가 없어요. 그냥 막 사세요. 막사시면 어떻게 됩니까? 막 사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누가복음 4장 25절을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아, 이게 주님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이거든요. 오묘하지요? 3년 6개월 동안 가뭄 들어서 온 천지에 가뭄 들었을 때에, 특히 가장이 없어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자식을 양육해야 될 과부들이 온 구석구석에 그렇게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많은 과부들에게 하나도 가지 아니하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다는 겁니다.
이걸 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요? 이 약 올리는 말씀을 우리에게 왜 이야기하지요? 요즘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았으며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그것은 그냥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그 생각뿐으로 자기 멋대로 맘대로 살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죄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에게만 찾아갔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이 말하는 비밀에 의한 공평함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무상으로 주어지지만 그 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자기 욕심대로 죄에 따라 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격자는 없다는 거예요. 그게 공평함이에요. 그렇게 공평한데 그 중에서, 그 공평한 중에서 주께서 분명히 모든 인간을 배제 하면서도 주님께서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 찾아감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모든 것을 몰아가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참된 정당함이고 공평함입니다.
누가복음 4장 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어요.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그 사람들 그냥 다 문둥병자로 그대로 살아가는데 오직 수리아의 나아만만 은혜를 입었다는 이게 무슨 의도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무슨 의도에요? 그 의도 자체가 숨겨진 뜻이 뭡니까?
이 뜻입니다. “주여, 안 오셔도 되는데 왜 저를 이렇게 구원해 주십니까 ……, 주님이 저를 구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만 위해서 살아왔을 뿐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만 위해서 살 겁니다. 주의 말씀 지킨다? 저는 주의 말씀 관심 없습니다. 내 잘되는 것, 나의 행복이 나의 우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무상으로 영생을 주시고 천국에 넣어주십니까? 도대체 그 패 뒤에는 뭐가 있기에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도 천국을 간다는 말입니까?” 하고 그 패를 들춰보니까 그 패 뒤편에는 창세전에 숨겨진 비밀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의 피였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을 건졌어요. 그러면 그 화투패를 다시 뒤집어 봅시다. 다시 뒤집어버리면 예수님의 피는 피대로 묻혀 있으면서 그 위에 있는 그림은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나밖에 모르는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인간이 남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또 매일 매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서, 외투의 옷깃을 세우고 낙엽을 밟으면서, 낭만에 잠기면서, 자기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양쪽 다 대비되어서 보입니다. 한쪽은 죄인 중에 괴수요 한쪽은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중보자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가는 인생, 그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입니다. 이게 성도의 인생이에요.
교회 왔다고 사람 되는 것 아닙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요? 안 다녀도 사람 안 되기는 마찬가지에요. 전혀 구별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 다니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신의 도움을 받겠다, 열성을 낼 뿐인데 그 열성은 자기 인생 원상회복을 위한 사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탐욕일 뿐입니다. 사람은 나이 든다고 ……, 여기 연세 많이 드신 분들이 계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저보다 연세가 많은 줄을 알지만 저는 제 경험상 나이 먹는다고 인간 더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지금껏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넉넉히 압니다.
사람이 연세 많으면 점점 더 자기 아집과, 집착과, 자기 사수와, 자기방어에 좀 더 농도가 짙을 뿐입니다. 이제는 약간의 움직임도 ‘저게 나를 치려고 하는가?’ 하는 식으로 더 예민하게 반응할 뿐이지 결코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는 없어요. 그게 바로 교회 오는 신자들의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그냥 막 사세요. 막 사시고 주께서, 성령께서 허락하시거든 ‘나’라는 밑바탕을 다시 한 번 들춰보게 하실 때는 그 속에서 감추어진, 창세부터 감추어진 비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할 때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지혜라 하는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갖추어진, 이미 갖추어진 어떤 지혜가 일방적으로 세례 받듯이 그냥 스며들어온다는 뜻이에요. 나의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어떤 모델로 살아야 할까, 그 모델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주변에 쫙 깔렸어요. 우리는 그중 하나의 모델을 선택하든지 안 그러면 둘 셋의 모델을 편집해서 선택하든지간에 우리는 보고 듣는 것 속에서 내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지혜의 노예로서 그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만의 것? 나만의 개성? 그런 것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앞선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거예요. 남이 차를 사면 그 차가 사고 싶고, 남이 아파트 사면 그 아파트 사고 싶고, 남이 옷 입으면 그 옷 입고 싶고, 남이 여행하면 따라가고 싶고, 우리는 기존의 것을 가지고 일부를 차용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혜라 하는 것은 곧 내게 스며든 나의 지혜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부분이고 세상은 전부에요. 전체가 부분 속에 스펀지처럼 스며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 지혜를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못 벗어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다음에,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그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관원, 지도자입니다. 권세자에요. 그 권세자가 어떻게 했는가? 8절에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죽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갔어요. 주님이 죽으실 때 자살해서 가신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와서 나를 죽이라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주님께서는 죽음 뒤로 가버렸어요.
가버렸을 때 아무도 그 죽음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 평소에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인간이…… 죽음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없어짐’입니다. 없어짐. 내가 없어진다면 나를 꾸미고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도 의미가 없기에 우리는 주님 따라가다가 십자가 앞에서 딱 스톱이 되면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 죽음 너머에서 예수님 십자가 영이 찾아왔으니까 우리는 넘어가지 않더라도 미리 심판의 기준을, 그 비밀을 안 셈이 되었어요.
창세전부터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자만이 죄가 없어지고 의인이 되어서 의인들만 모이는 그 예수님 가신 천국에 합세한다. 이걸 있는 자리에서 성령을 통해서 미리 눈치 챈 거예요. 알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제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요. 제가 꿈 이야기 잘 안하거든요. 개꿈이야기 잘 안하는데 꿈속에서 뭔가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이 있어서 제가 사적인 일이지만 공개하겠습니다.
(1-1=0)이거든요. 이것은 세 살 네 살배기들도 다 알아요. 그리고 (1-2=–1)인 것도 알아요. 제가 꿈속에서 안게 뭐냐 하면 (1-1이 0)이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꿈에서 어떤 굉장히 난처한 일이 벌어져서 나의 가진 것이 몽땅 다 날아갔을 때 그때까지 내가 지식으로 (1-1이 0)이라는 사실을 꿈속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아, 내가 가진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갈 때 이게 영(0)이 되는구나. 이런 것을 가지고(1-1이 0)이구나.’ 초등학교에서부터 알았던 (1-1이 0)이라는 사실을 2014년에 꿈속에서 경험하게 된 거예요.
‘지식이라는 것이 그냥 지식으로 있으면 안 되겠구나. 이게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몽땅 망해야 되는구나. 그렇다면 꿈에서 계속 진도가 나가는데 그 다음에는 1-2가 되어요. 이것은 빚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망한 정도가 아니고 남에게 갚아줄 빚이 그만큼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1-3은 –2)가 되겠지요. 흔히 누구나 아는 이 산수, 수학도 아닙니다, 산수, 이 산수가 우리 몸에 체험되기 전까지는 그냥 우리에게 산수로 남을 뿐이지요. (1-1이 0)이 되고 (1-2가 –1)이 된다는 것은 욥이 보여줬습니다.
이제 우리가 비교할 사람은 십자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죽어서 너희가 산다.” 할 때 우리는 지식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이거 모르는 사람들 없어요. 다 알아요. ‘예수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천국 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죽었지만 주 안에서 살았기에 산 사람으로서 간다.’ 이것은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다 아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어떻게 죄에 거하겠는가?” 로마서 6장에 나오니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생을 통해서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짓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오늘 설교의 마지막입니다. 계속 죄짓게 하시는 겁니다. 죄짓게 해놓고, 죄에 쫓기게 만들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실감나는 우리의 남은 인생 가운데서, 이러한 쫓김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패를, 인생의 패를 들춰서 예수님의 용서가 너의 인생보다 더 세고 더 확실한 진리고 숨겨진 비밀의 화투패로서 너를 사용한 겁니다.
곧 우리 자신의 인생이 주님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존재였던 겁니다. 꼬라지 보면 다 똑같이 보이지만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점은 다 같이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의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짓는 인간으로 평생을 살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그것이 창세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성도만이 간직합니다. 사렙다 과부처럼, 그리고 나아만 장군처럼 오직 찾아와 주신 그 사람은 비밀로 변형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도 이 땅에 부활해서 살아 있는데 살아 있으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는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비밀이었습니다. 심판의 기준이었고 십자가 피로 용서한 자만이 영생 얻는다는 이 단순한 논리가 이제는 논리로 그치지 말고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 자체가 비밀의 화투장으로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