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고전 2장 3-5(성령의 능력)1410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 3-5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2:3-5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가 말할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자신 있게 전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가 하면, 행여 내 말과 내 지혜가 그들에게 전달되어서 사도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그들이 구원받는 것처럼 될까봐서 염려스러워 그렇게 한 거지요. 사람이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할 때, 뜻을 전달할 때 말로 하잖아요. 그렇게 말로 하게 되면 구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말로 안하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데, 라고 물으신다면 말이 아니고 본문에서 성령의 나타남으로 구원이 된다고 언급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 모든 설교가 다 헛된 것인가? 예, 헛된 겁니다. 그러면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 온 것도 다 헛된 짓인가? 헛된 짓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하는 일이 헛된 일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상당히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이 교회 오고 성경보고 하는 그 의도를 간파하는데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지금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죽어서라도 편히 쉬고 천국이라는 곳에 가고 싶어 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의도 자체가 인간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어떤 의지를 나타내는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것에 대한 그 원래 뜻에 대한 도발이고 도전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것은 인간구원을 위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가 알고 계시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구원에 관해서 너희들이 하는 것은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구원의 의지도 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 해달라고 해서 주께서 “아이고, 예쁘구나. 구원해주마.” 애초부터 그런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구원을 요구하는 그것은 타고난 거예요. 왜냐? 사는 것이 힘들잖아요. 사는 게 괴로우니까 빨리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사는 것이 힘들다, 거기서 벗어난다, 하는 것은 네 사정이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네가 힘드니 건져줄게.”라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고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과는 관계없이 다른 목적 때문에, 다른 의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책을 기록한 겁니다.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요한복음 5장 39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지금까지 한 설교를 요약해보면 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혹은 사도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 나라는 것이 있어요. 성경은 나의구원을 위해서,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한 책이다,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고 좋은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그런 의도, 그런 의도를 충족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성경은 너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책이다.” 하는 거지요.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위해서 있는 책이라는 말은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이라는 것은 일단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고 그 주인공이 된 내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베푸심을 통해서 어떻게 계속해서 주인공으로, 주인공으로, 주인공으로, 하나의 주체자로서 천국까지 버티는가, 그 생각과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주인공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그런 것은 하나님이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은 예수님밖에 없고 세상에 우리가 만들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주인공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겁니다. 예수님이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졌는데 사람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는 그만 사람이 자기주위로 바뀌어버린 거예요. 화장실 갈 때 생각 다르고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고 일단 만들어놓으니까 만드신 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만드신 본인부터 출발점으로 해서 이 만들어진 내가 어떻게 잘나볼까, 어떻게 편하게 살아볼까, 이런 식으로 소위 신이고 고상하게 느껴지는 모든 개념들을 동원시키는 거예요.
교회고 성당이니 절이고 전부 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다니고 자기 잘되기 위해서 신을 섬기고 부처를 섬기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 보면서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하고 “교회 나왔습니다. 말씀 듣고자 합니다. 구원해 주세요.” 구원 어디 맡겨놨습니까? 거기에 대한 주의 말씀은 한마디 밖에 없어요. “육은 육이고, 그게 육인데 육은 그만해라,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내가 일하는 것은 영으로 일할 것이니까 육은 아예 기대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의지에 대해서 동조하거나 박수치지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구원의지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배후에 수상한 존재가 있음이 간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지 말라고 추방을 시켜 놓았는데 추방시켜놓은 그 추방의 취지를 송두리째 빼버리고 “추방시켜도 나는 생명나무 기어 올라가겠습니다.”라는 그 강력한, 주님의 그 추방의지에 반대되는 그러한 의지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것은 인간을 앞장세워서 “해봐라. 해 봐라. 믿어보면 구원 받는다. 네가 열심히 교회 다니면 천국 간다. 목사 말 듣고 열심히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착한 일 했다고 상 받고 천당 가는 거야.”
이렇게 뒤에서 자꾸 부추기는 세력이 있어요. 수상한 세력. 열심히 하면 복 받고 게으르면 지옥가고, 착하면 천당하고 악하면 지옥가고, 이렇게 하면서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선악적인 사고 체계를 긍정하면서 천국 가서도 그것을 유지하면서 기어이 천국의 영생, 생명나무를 따먹겠다고 부추기는 그 세력이 뭐냐 이 말이지요. 인간세계는 플러스마이너스가 있어요. 인간의 모든 법체계나 형벌체제가 플러스와 마이너스입니다. 플러스 쪽, 선이 많으면 복 받고 나쁜 쪽이 마이너스가 되면 저주받는다는 이런 의도가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분명히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해요? 따먹지 않은 상태, 따먹지 않았던 그 전 상태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다시 “나는 선악과가 뭔지 몰라요. 그게 뭐지?” 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예수 믿는 것은 선한일이고 예수 안 믿고 부처 믿는 것은 악한 일이라는 그 의식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의식자체가 그것도 선악에서 나왔기에 그것도 땡, 탈락, 무효가 되는 겁니다. 마이너스 백점, 탈락이에요.
무슨 수로 돌아갑니까? 모든 것이 선악으로 체계화되어 있는데. “주여! 법만 주옵소서. 시켜주시고 명령만 하시면 제가 그 명령을 지킴으로서 플러스 백점이 되고 못 지키면 마이너스 백점.” 그래서 그 플러스와 마이너스, 그런 인식감각을 가지고 주의 모든 명령을 받아들일 사전의 만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선과 악 자체가 우리 마음 바닥에서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거기서 주님을 영접한다? 이것은 될 수가 없는 이야기지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가락교회 가니 집사님이 이런 운을 뗐어요. “목사님, 아담이 선악을 알기 전에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아주 예리한 질문을 하신 거예요. 선악을 알기 전에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성경 창세기에 보게 되면 선악을 안게 선악을 안게 아니고 자기의 자의식이 생긴 겁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의식이 생긴 겁니다. 그 전까지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둘이 하나가 되었어요. 인구가 총 2명밖에 없었으니까.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이름도 그때는 하와가 아니에요. 그냥 여자였고 그냥 남자에요.
남자 여자가 있는데 그 둘이 있었지만 그 둘이 두 사람이 아니고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이었습니다. 자의식이 없었어요. 자의식이 없었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단독적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라고 그 여자와 나를 분리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자는 말하기를 “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전부다 딱딱 끊어진 거예요. 다 개인적으로.
그때부터 나오는 구원도 개인구원이 되고 말았어요. 개인구원. 나는 어떻게 나를 구원해서 천국갈 수 있느냐? 다시 말해서 지금의 있는 나가 천국 갈 때 까지 그 나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희망을 품고 고생 많은 나를 하나님 믿고 고생 안하는 나로 천국 가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은 뭐냐 하면, 나나나나나나, ‘나’ ‘나’들만 전부 다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거기 가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주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냐 하면, 자기 나라가 되어버려요.
그것은 전체가 선악과 판입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고 그야말로 깡패의 세계지요.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상대를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는 그런 세계가 계속돼요. 그러면 천국에 가서도 경찰, 삐옹삐옹, 하면서 달리는 폴리스가 있어야 하고 또 소방관도 있어야 하고 거기가 난리가 납니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인간의 자의식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곳입니다. 인간의 자의식속에는 바로 선과 악의식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식이 서로 대조되고 대립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생기는 것은 뭐냐? 공포심이에요. 공포심.
어떤 공포심이냐 하면, 내가 일을 그르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고 규정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한발자국 떼고 뭘 할 때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퍼부어질 것이니까 나의 대처방법은 보다 교회 가서 착한 사람이 되어서 그 착함이 플러스알파의 작용을 해서 착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저주를 받으니까 저주받을 짓을 하더라도 착한 짓을 더 많이 하게 되면 그 많은 복이 저주를 상쇄시켜서 나로 하여금 약간은 연금 받는 식으로, 남는 장사 하는 식으로 천국에 가서 살지 않겠느냐는 그런 계산이 성립되는 겁니다.
여러분, 착하지 마세요. 여러분, 착하면 안 됩니다. 착하면 착한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십년 이십년, 목사 장로 백날 되어도 지옥 갑니다.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책을 내보세요. 대책 내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중보자입니다. 희생물의 등장입니다. 여러분 입에서 다시는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다시는 하지 마세요. 다시는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그 순간 여러분은 중보자를 빼먹는 순간입니다.
악마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착해야 천국 간다는 인식을 자꾸 심어주는 것은 악마의 노림수가 따로 있기에 그렇습니다. 악마는 무엇을 노리는가 하면, 중보자, 이 땅에서 너 대신 희생하신 분을, 그에 대한 관심을 없애고 지워버리는 거기에 악마는 모든 것을 쏟고 있습니다. “무쏘의 뿔로 스스로 가거라.” 이게 석가모니가 죽을 때 한 소리거든요. 무쏘의 뿔로. 무쏘라는 차 알지요? “혼자의 뿔로 스스로 가거라. 스스로 서라. 너는 대단한 존재이며 너의 가치는 누구한테도 빼앗기지 마라.” 마귀가 자꾸 그런 소리를 할 때 우리는 그 말이 그렇게도 듣기가 좋아요.
왜? 평생 살아온 것이 마귀가 그런 소리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나다. 무시하지 마라. 정 무시한다면 나는 자살할거야. 내가 내 목숨을 담보로, 내가 무시 안 당하는 인생으로 한 번 버텨볼 거야.”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무슨 중보자의 그림자가 덮였습니까? 예수님이 왜 필요합니까? 사람들이 내뱉는 모든 말들 속에는 선악적 요소가 들어있어서 그게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키는 방법으로 외부를 향하여 쏟아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게 말이라는 거예요. 그 말 한마디 한마디의 내면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두려움과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자체적으로 어떻게 커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명과 핑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내가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끝없는, 끝없는 핑계와 변명이 나와요. “주여! 제가 이렇게 기도를 오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애가 아프기 때문에 제가 기도합니다. 주여, 들어주옵소서.” 그 애, 내 기도, 모두가 각자 떨어져 있는 단독자입니다. 거기에 무슨 중보자 의식이 있습니까?
아담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아담은 뭐냐 하면, 하나의 배치물이었습니다. 선악과나무, 생명나무, 그리고 아담과 하와, 그리고 거기에 투입된 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연관되어 있는 물체 같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서열지은 겁니다. 쉽게 말하면 에덴동산의 취지를 위해서 요새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쓰인 존재에 불과한데 결코 단독자들이 아니에요. 개인적인 가치를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마귀가 와서 건드려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 부터는 “나는 나다.” 라는 의식을 갖고부터는 “아담아!”하고 부르니까 “주여,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 “선악과나무는?” “여자가 따먹으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뱀이 따먹으라고 했습니다.” 전부 다 각자 자기변명과 핑계, 그게 바로 말이 된 거예요. WORD, 말, 요새 어디 갔다 왔다고 부쩍 영어를 쓰는데 그게 말이 된 거예요. 말 뒤에는 뭐냐, “날 건드리지 마세요. 제발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 무섭습니다.” 하는 그 공포가 깔려있는 것이 말이에요.
ENDLESS STORY, 끝없는 말, 평생을 두고 하는 그 인간의 끝없는 말. 그 말과 말이 만나면서 그것이 본인의 세상관, 인생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치고 들어가면 이렇게 변명하고 저렇게 지적하면 이렇게 변명하지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마음속에는 남이 뭐라고 하게 되면 나는 이런 식으로 변명할거야, 변명거리로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초조하고 불안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합니다. “그 입 다물라.”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말들을 쏟아내는 그 말들을 다 헛된 짓거리고 헛된 변명에 불과함을 지적해내는 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목사님, 저 예수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안 믿었으면 그런 소리를 내 앞에서 해야만 하는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지요. 얼마나 예수님이 안 믿어지면 그런 소리를 해대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한 번 시험을 해 보세요. 두 가지 시험을 해 봐야 하는데 첫 번째 시험은, 여러분이 새벽기도를……, 우리교회는 새벽기도가 없지만, 이것도 기쁜 소식이지요. 우리교회는 새벽기도회가 없습니다. 새벽기도고 뭐고 간에 기도를 할 때 기도한 말을 녹음해놓고 녹취를 해 보세요.
쓸데없는 말의 반복으로 연속되어 있습니다. 30분을 아무리 기도해도 다 쓸데없는 소리에요. 자기 한풀이 외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걸 압축을 시키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신이시여, 나는 나입니다. 나의 가치는 건드리지 마세요. 내 가치에서 빠져있는 것을 마저 보충해주시기 바랍니다. 빠져있는 부분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래서 도로 옛날의 나다운 나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얼른요.” 그거지요. 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예요. 그래서 오후기도 시켜도 안하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안하겠다고. 생중계로 남에게 애먹이면서까지 비난들을 필요는 없다는 계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요겁니다. 제가 한 3초 동안 말을 안했지요. 말을 안했을 그 때 자기가 믿는 자라는 것이 튀어나옵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믿어질 때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구태여 말할 필요 없는 인생, 구태여 조잘조잘 기도 안 해도 될 수 있는 인생, 한을 품지 않아도 되는 인생, 아니 한을 품어도 상관없는 인생, 그것은 바로 중보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생, 중보자가 중보자 됨을 드러내는 배치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고 예수님 계시기에 지금 내가 이런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는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찾아오시게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것은 나 위주에서 본래대로 예수님 위주로 바꾸어놓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성령께서 찾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뭐냐? 죄를 먼저 우리에게 허락을 했고 우리는 그 죄에 쫒기는 생활을 하게 되어 있고 쫒기면서 결국은 그 죄에서 도저히 아무리 쫓겨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놓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멀쩡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으로. 죄인으로 만들면 우리는 단독자로서 나는 나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고 생각하다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게 되면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죄가 시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도 필요 없고 중보자가 필요 없고 “너는 네가 스스로 무쏘의 뿔을 가지고 네 스스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돼.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아.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너는 살 수 없어.”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그러한 자기의 본래모습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내 잘되기 위함이지 결국 예수님 위주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도 알고 본인도 알고 마귀도 알고 있는 사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죽어서 편히 쉬고 천당 가고자 하는 내 사적인 욕심 때문에 교회 나온다는 이 사실을 나도 알고 주님도 알고 마귀도 알고,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놓는 그 작업이 어떤 작업이냐 하면, 그 작업에서 멈추지 않는데 그 작업이 어떤 작업이냐, 주님이 그 죄인에게 덤벼들게 하는 하나의 택지조성이 돼요. 택지조성이라 하는 것은 주택 짓기 전에 먼저 터 작업하잖아요. 터 작업이 뭐냐 하면,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는 그 터 작업을 먼저 잡아요. 터 작업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주님이 달려듭니다. 달려들어서 그 터 작업 속에서 뭘 끄집어내는가? 거기서 비로소 생명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생명을 끄집어내요.
그러면 애초부터 생명은 내가 가지거나 내가 가질 수 있는 권한 밖에 있는 생명이에요. 내가 그 생명을 탐내는 것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탐낼 입장도 못되고 권한도 없으면서 죽어서 영생 얻겠다는 소리, 이것은 분명히 생명나무에서 끊어지게 했던, 단절시켰던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반발이고 그 반발은 뭐냐? 내 배후에서 작용하는 악마가 나보고 그렇게 시킨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악마의 대변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신이시여, 우리를 사랑해주소서.” 이거잖아요. 그게 악마의 소리라니까요.
“신이시여, 우리를 사랑해주소서.” 곧 그 말은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 노래를 알고 있어요. 놀랐어요, 제가. 얼마나 자기의 적성에, 자기에 본성에 딱 들어맞았으면 그 노래가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평소에 자기사랑에 미쳤으면, 지독한 중독, 지독한 자기사랑에 중독되었으면 신마저 나를 사랑해줘야 그게 참된 신이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자기사랑에 빠졌으면.
영생은 없습니다. 물 건너갔습니다. 손 터세요. 육은 육입니다. 육이 감히 어딜 영을 넘봐요. 그것은 주제파악도 안된 존재에요. 주제 넘는 짓입니다. 육은 육으로 자기 자리를 잡으세요. 그 다음에 구원하고 안 하고는, 그 영적일은 주님의 소관이지 우리 소관 아닙니다. 왜 건방지게 주님의 권한에 우리가 손을 댑니까? 어딜 그걸 넘봐요? 성도의 입장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했더니 영생을 얻었다든지 기도를 했더니 어떻게 되었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뒤에서 사주해서 영생을 위장한 가짜 종교고요.
진짜 예수님의 활동은 뭐냐 하면, 저쪽에서 넘어오는 거예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차고 넘어오시는 겁니다. 의존교회 김 명현 목사님이 설교한 것 가운데 요약한 것이 짧게 나와 있어요. 제가 그걸 보고 참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었다는 거예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을 죽은 자로 간주했습니다. 왜냐하면 형들이 조작을 해서 요셉을 빼돌려서 팔아놓고는 요셉을 죽은 자로 간주해서 짐승의 피를 발라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죄송합니다. 우리가 동생을 간수 못해서 동생이 이렇게 짐승한테 잡혔습니다. 보세요. 아버지가 요셉에게 입혀준 그 옷이 맞지요? 이 옷에 짐승의 피가 묻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요셉은 짐승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어쩝니까?”
야곱은 그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대성통곡했어요. 야곱에게 있어서 이미 요셉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5장 27절에 보면, 어느 날 야곱에게 무슨 수레가 와요. 그 수레를 보면서 형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이 수레가 바로 요셉이 보낸 수레입니다.”라고 할 때 왜 죽은 자의 수레가 옵니까? 그 요셉의 수레를 보고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알게 돼요.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요셉을 죽은 자로 간주했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수레를 보내지?”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하지요.
우리가 용서 받겠다고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가 일방적으로 우리 권한 바깥에서 넘어오신 거예요. 마치 요셉의 수레처럼. 그게 십자가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가장인 아빠가 죽은 뒤에 5년이 흘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컴퓨터에 보니까 아빠에게서 메일이 와 있어요.” 엄마가 듣고는 “야야, 너까지 미치면 어떻게 하니? 너까지, 응? 왜 이러느냐? 정신 차려라. 아무리 아빠가 죽어서 네가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죽은 자가 편지를 보내니?” 죽은 자가 컴퓨터 합니까? 천당에 피씨 방 있어요? 어떻게 메일을 보냅니까?
아빠가 메일을 통해서 요셉의 수레처럼 아빠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뒤늦게 맞이하고 난 뒤에 정말 예수님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달려듭니다. “예수님이여, 우리 오빠가 죽어가고 있다고 며칠 전에 이미 전갈을 보냈잖아요. 들었으면 얼른 오셔야지요. 평소에 그만큼 우리가 예수님한테 충성봉사 했으면 이정도 봉사는 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분명히 오빠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뒤늦게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오시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사랑하는 오빠가 죽었으니 책임지세요.”라고 주님께 달려들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1:25,26)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 소리를 듣고 뭐라고 했습니까? 그 이야기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거 다 알고 있습니다. 요새 스마트 폰에 이런 앱이 나왔다는 거예요. 3+5=, 하고 스마트폰에 손을 대면 8, 하고 답이 나온답니다. 75곱하기 86같으면 손을 대면 정답이 나오는 앱이 개발되었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산수 시험문제 풀기 쉬워요. 딱 대면 알아서 풀어주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려면 누굴 믿으면 되지요?” 하고 손대면 스마트 앱이 “예수 믿으면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스마트 폰 앱같아요.
알아요.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인지 알아요. 난 알아요. 난 아는데 문제는 그것이 마르다 마리아도 안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평소에도 부활이고 생명인지 안다는 거예요. 아는데, 그것은 아는 것이고 오빠는 살려내라, 오빠는 죽었다 이 이 말이지요. 그것은 그냥 아는 것이고, 그것은 신학공부 잘 하는 것이고 문제는 내 가정의 오빠가 죽었다는 이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말이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자, 무덤으로.” 가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오빠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뭐지? 이거 뭐예요? 뭡니까, 도대체. 마르다 마리아가 그동안 신앙생활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했기에 주님에게 따지는 겁니까? 마르다 마리아는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 한 거예요, 자기중심. 우리가족, 내 식구 잘되는 그런 예수, 그런 하나님을 찾은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 보고 멱살 쥐듯이 달려든 겁니다. 내 가정 책임지라고, 내 인생 보상해 내라고. 나는 이런 수모는 못 당한다고, 주께서 우리 가정에 이런 수모를 안겨줄 줄은 미처 몰랐다고. 예수 잘 믿으면 오래 살줄 알았던 오빠가 난데없는 병에 걸려서 이렇게 돌아가시게 되면 그동안 우리의 예수 믿고자 한 의지가 한꺼번에 다 날아갈 텐데 주께서 이런 상황을 원했습니까, 얼마나 따질 것이 많았겠습니까?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이 성경을 가지고 자기 구원하는 책인 줄 알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자기 구원하는 책이 아니고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처럼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사나 죽으나. 오빠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동안 오빠 살려내라고 닦달했던 그 말들, 그 말들 속에는 오빠 없는 미래가 불안스럽고 공포스럽고, 그래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예수님 보고 살려내라고 따지는 그 말, 말들,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의 부재와 자기의 공포심을 메우려는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것이 일종의 몸부림이고 종교생활 하는 것도 일종의 몸부림이에요. 내 방식으로 내 것 지켜보겠다는 막다른 골목에서 쳐보는 몸부림이에요, 몸부림. 차 밀리는데 여기까지 오시고, 차 밀리는데. 집에서 차라리 생중계나 듣지. 물론 오늘은 자장면이 있어서 오기는 왔지만. 도대체 인생이라는 것, 산다는 것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몸부림치는지, 대체 어디서 누가 나를 쫒아오는지, 쫒아오는 것도 없는데 괜히 두려운 이 공포는 뭐지, 이건 뭐지? 이것이 무엇이냐고 따지지 마세요. 누구십니까, 를 물어야 돼요.
성령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보다 앞선 분이 계시다.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을 네가 가로막지 말라.”는 것이에요. 몸부림치는 네 인생이 덩치 큰 그 분을 앞에서 가로막지 말라는 겁니다. 덤프트럭 앞을 티코가 가로막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어딜 티코가 덤프트럭을 가로막아요? 미니쿠페같으면 몰라도. 그런 예쁜 차가 있어요. 시시한 티코가 어딜 가로막습니까? 우리는 티코 안에 덤프트럭보고 들어오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들어오기는 들어옵니다. 들어오는 순간 자의식은 찢어집니다. 망사스타킹처럼 완전히 찢어져 버려요.
그게 뭐냐? 그게 주님이 앞서 미리주신 심판입니다. 노아홍수가 일어났을 때 방주에서 노아가 일 년간 지내면서 홍수가 끝났다 싶으니까 까마귀 보내고 비둘기 보내는 대목이 생각나지요? 그 비둘기나 까마귀가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았다.”가 아니에요. 우리는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심판가운데 내가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고 심판 가운데 중보자가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심판의 와중에서도 심판이 있으매 그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그 심판주도 그 심판 가운데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비둘기와 까마귀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모습들이에요. 그 까마귀 비둘기 자체에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역할과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까마귀 비둘기가 그렇다면 오늘날 심판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가 뭡니까?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될 기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의 증인된다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의 성취에요.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너는 이제 중보자의 증인이 될 것이다. 왜, 이 세상은 심판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심판은 창조입니다. 성경전체가 그거예요. 만들어졌으니까 벌써 그 속에 심판이 있습니다. “만들어졌다. 창조되었다. 심판이 있다. 그 가운데 중보자 뽑아낸다.”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 나 위주가 아니고 예수님 위주에요.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겁니다.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들어서, 죄짓게 만들어서 우리가 죄인 되게 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기껏해야 기도와 말만 쏟아내는 식으로 벌벌 떨 때 주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죄를 탕감해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 인생에서 실패 내지는 실패감이라는 자체가 탕감 앞에서 완전히 날라 가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죄 탕감 받았습니까? 여러분에게 실패는 끝났습니다. 실패 끝남 행복 시작입니다. 탕감을 받았어요. 용서를 받은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메일이 왔어요. 3일의 단절, 예수님 죽고 난 뒤에 3일간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이미 죽음의 세계에 건너가 버렸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도록 닭 좆던 개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쫒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헉헉거리면서 쫒아갔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쫓아갔어요. “주님, 목숨 걸고 따라가겠습니다.” “오지 마라.” 끝났습니다. 단절입니다. 단절되었습니다. 끝났습니다.
내 자의식이 할 도리 다 해봤습니다. 교회도 다녀봤고, 기도도 해봤고, 십일조도 해 봤고, 전도도 해봤고, 성경공부도 해봤고, 예배참석도 해봤고, 새벽기도도 해봤고, 다 해봤습니다. 여러분, 우리교회 온 사람들 다 해본 사람들이에요. 거의 대부분 다 해봤습니다. 멋도 모르고 온 사람도 있겠지만 다 해봤어요. 목사님 말도 들어봤고, 교회도 섬겨봤고, 주일성수도 해 봤습니다. 남는 것은 “(숨이 차는 소리) 헉! 헉! 에이 씨!” 그걸로 끝났습니다. 소용없었습니다. 소용없으면 입을 다무세요. 그 때 성령이 주신 믿음을 여러분에게 한 무더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내가 이때를 기다렸다. 모든 구원의 노력과 시도를 다 허사로 끝났음을, 네가 감사하게도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그 죄를 본인이 알아서 탕감해주는 식으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솜씨, 주님만이 이루는 그 솜씨와 공로만 높여주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용서받은 기쁨, 탕감 받은 기쁨, 그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로또 당첨 비교 안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은 주께서 우리 죄를 탕감하는 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것이 비어있기에 비로소 발견될 수 있는 것은 뭐냐? 주님의 용서해주심입니다. “네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 하지만 내가 그것을 내 피로 용서해줄게. 그러니 더 이상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고, 세상에 대해서 쫄지 말고 살아라. 벌벌 떨지 마라.” 남 보기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거 하지 마세요. 유행지난 옷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 그때는 경산에 가서 옷 하나 사 입으면 됩니다.
연금 떨어지면 어떻게 살지? 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 나라로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 자신감, 그런 당당함 없이는 우리는 마귀한테 뒤통수만 맞지요. 맨 날 마귀는 그럽니다. “기도 더 해라. 헌금 더 해라. 교회 채워라. 부흥시켜라. 선교회비 내라.” 맨날 이런 마귀 앞잡이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제가 왜 갑자기 흥분하죠? 얼마나 더 여러분이 속아야 됩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속는다고 생각 안 해요. 여러분이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 목사를 위해서? 아니요. 주를 위해서? 아니요. 내 자신을 보상받기 위해서. 내 자신을 보상받기 위해서. 원상복구 해 놓으라는 거예요. 주님보고.
“네가 뭔데?” 그것은 선악과 따먹은 행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십자가외에는,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십자가외에는 떨어져 나가야 될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나는 나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떨어져 나가야 돼요. “십자가 있음에 지금 내가 있습니다.” 하는 고백으로 바꾸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의 탕감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날 내가 이렇게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저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뭘 해도 죄인이라는 사실은 어떤 것에도 협박과 공갈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한테 들키지 마시고 주님한테 먼저 들키시면 되는 겁니다. 간음한 여인이 간통하다가 주님한테 들켰을 때 들키는 그 지점이 바로 여인이 유일하게 자유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우리 죄를 남에게 떠벌일 필요는 없어요. 연애하면서 자기과거 이야기하는 그것은 깨는 겁니다. 그런 짓이 같은 인간끼리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부부의 비밀은 유지합시다. 끝까지 갑시다. 무덤에 갈 때까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대상이 안돼요. 우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모든 것을 털어놓읍시다.
“주여,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주께서 하십니다. “내가 일부러 짓게 했다.” “왜 그랬습니까?” “죄가 너를 구원하기 때문에. 너의 죄가 너를 구원하기 때문에. 일부러 죄짓게 했다. 일부러 선악과 따먹게 했고 일부러 쫓기게 했고, 네가 일찌감치 고아라서 잘못한 것이 아니고 부모를 일찍 돌아가게 한 그것도 내가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 드릴 것은 누가복음 24장입니다. 우리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 말 하고나니 갑자기 걱정이 좀 되네요. 교회 와서는 장로님이 기도를 하는데 전부 다 입을 음, 하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우리가 말하지 말라 한 이유가 누가복음 24장에 나와 있습니다. 24장 25절에 보면,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가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제부터 다른 말을 해야 돼요. 모세와 선지자의 약속과, 약속과, 약속, 그 말이 우리 입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풀 같더라. 이제 풀 같지 않고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았어.”라고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선지자와 모세의 이야기가 우리를 통해서 체험화 되어서 보이는 겁니다. 성경말씀 달달 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여호와의 증인에게 하라고 하고요. 우리는 성경말씀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그것이 바로 말씀이 이야기하는, 성령께서 하시는 이야기에요.
“나는 이렇게 했지만 돌아보니 이것도 내 욕심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가 못났다는데 무슨 마귀가, 일곱 귀신이 달려들 재미가 나겠습니까? 자기가 못났다는데. 나는 지금 죽으면 주와 만나고 있다는데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그런 것이 어딜 나와요? 마귀가 재미없어서 떠나버립니다. 더 이상 쫒기지 마시고 자기 자신에게도 쫒기지 마시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탕감했기에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그 죽음에서 나오는 생명이, 그 생명이 생명나무가 되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고 있는 바로 그 빈 그릇이 우리 자신임을 마음 놓고 자랑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뜻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피 찍어 바르면 내가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주여,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 작업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결과물이었고 결실물이었다는 사실, 탕감 받은 자가 이렇게 편하게 산다는 사실을 앞으로 보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