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십자가
2014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2:1-2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이란 소위 살아있는 인간들 세계에서 통용하기 위한 의사전달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말의 가치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작렬하는 영역에서는 그 말의 능력마저 부정당합니다. 즉 말 솜씨, 말 재주로 달라붙은 능력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말하는 자의 재주가 발휘되게 마련이고 이는 곧,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는 자를 살린다든지 전도해서 구원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능력을 부정해버립니다. 도리어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있음’을 보이는 그 힘에 의해서 떠밀려 죽어버린 그 ‘죽음’의 힘만 인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그 죽음 앞에서 ‘영원한 죄인’으로 고정되어버립니다. 인간들이 떠밀었던 그 분이 도로 사셔서 소위 ‘산 자들의 집합’이라는 이 세상에 찾아들면, 인간들이 그동안 자기가 자기를 살리려 한 시도가 다 거짓된 것임이 들통 나 버립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을 매개로 해서 자신을 구원과 영생의 나라로 가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시도는 모두 하나님에게 퇴출당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정당한 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내치므로서 인간 세계의 바닥을 노출시키게 됩니다. 이 세상은 원래부터 죽음을 내장재로 사용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2:17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일체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삶의 주거환경인 에덴동산 한 가운데 벌써 ‘죽음에 관한 요소’가 잠복하여 숨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을 내치면서 항상 다음과 같은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가는 것은 다 내 덕이다. 내가 나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살릴 수 없다. 내 행함과 내 노력과 나의 열심과 나의 노동이 여태껏 나를 내었다”고 말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을 살리는 중보자 노릇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줄곧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내가 중보자로 나서서, 그 매개적 활동으로 이미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아내겠다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주님의 중보자 기능은 천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런 보편적 행위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원인으로 작용되었음을 십자가 의의와 그 부활로 증명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최종 힘을 실어주면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모든 시도와 행함이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현상에 불과함을 알려줍니다. 2절에서 ‘∼외에는’는 표현은 그동안 예수님을 세상에 떠밀게 만든 모든 것들은 십자가 앞에서 삭제나 배제 대상이 된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구원코자 하는 모든 시도가 다 허사임을 말해줍니다. 그 근거는 바로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 욕구가 일어나는 그 지점을 폭격하고 늘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본질이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며 누구의 기능을 ‘보충하기 위해 대리물’로 등장된 존재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인간들 손에 의해 살해당하므로서 비로소 인간에게 의미가 발생합니다. 죽어야만 하는 자들이 살아야만 하시는 그 분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로서 구원에 관한 문제는 벌써 인간의 세계에 해당되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원인도 이유도 모르는 채 허송세월하다가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인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 사건임이 성도에게 알려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지어 죄 속에 있음을 아시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자기 아드님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이 또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이라는 동일한 사건은 하나님 입장과 사람들의 입장에 그 안에서 같이 만나게 됩니다. ‘죽으셨던 분’으로서 찾아오심은 죄를 용서했음을 통보해주시는 차원에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죽음이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려는 택한 자들을 다시 십자가 죽음 안으로 기어이 잡아당기는 능력을 성령님은 발휘하게 됩니다.
이는 곧 성령님은 결코 모든 움직임이 인간의 행함으로 귀속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방치하지 않고 정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이스라엘은 아이성이라는 작은 성 공략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승리는 전번 여리고성 함락처럼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패배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그 요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보니 아간이라는 자가 여리고성 전쟁의 전리품을 비자금으로 숨겨두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에서 자신의 공로와 의미를 따로 챙겨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로 칠 것을 명령했던 아간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아이성을 함락되었습니다. 바로 이와같이 일방적으로 사람에 의해서 죽었던 분의 죽음 능력에 대해서 소위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능력은 그 능력과 섞이거나 마주해서 처리할 수가 없는 그런 성질의 능력입니다.
아간이 삭제당하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바로 희생물의 피로서 구체화 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곧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그 능력만이 손상되지 않고 남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 행함에 대한 삭제 능력이 계속 발휘되는 현장이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성도는 마지막에 자기 자신마저 삭제 당하게 됩니다.
그래야 ‘∼만’이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유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구원코자 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 불교 신자, 곧 나는 나의 행함으로 믿음, 행함으로 말씀을 행한다 는 그런 주관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죄임을 폭로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 죽음의 능력만입니다. 이 작용이 늘 속에서 터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고 행하는 것 모두가 우리가 이미 죽은 자임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강-고전 2장 1-2(현재의 십자가)1410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보통 안다는 것은 말을 통해서 알게 되어 있지요. 누가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을 전달받아서 아는 것인데 그 말을 네가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말을 들을 때 그 말을 빼고 그 다음에 그 의미만 챙겨서 받아들여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누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게 될 때에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 하게 되면 “그 의미는?” “그 의미는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되면 안 되지요. 그 말은 빠지고 의미만 챙겨야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구원받는 성도 자신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구원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에 얽매이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장 1절에 보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여기서 ‘지혜’를 빼버리면 “말로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그것은 말이 아니다? 그러면 말이 아니고 뭐냐, 그것은 하나의 의미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말로서 전도하잖아요. 말로서 전도하게 되면, 말을 해서 전도하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가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말했지?” “예, 말했습니다.” “사실은 말이 아니야. 의미야.” “방금 말 해놓고 무슨 의미라고 우겨대십니까?” “아니야, 이것은 말이 아니고 의미야.”
그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누구한테 전도할 때 말로 하지 말고 의미를 전달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과 더불어서 의미가 전달되면 왜 안 됩니까?”라고 물으면 성도라는 것이 인간의 말로서, 인간의 진리와 지혜체제로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이 말로서 누구한테 명령을 해서, 그걸 모방해서, 시키는 대로 해서, 그래서 성도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성도라는 것이 말로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다른데서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등장한 게 되는데 그 다른 곳이 어디냐 하는 겁니다.
그 다른 곳을 2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죽었다는 겁니다. 죽은 자와 살아 있는 네가 소통이 될 경우에만 네가 성도라고 확정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산자가 죽은 자와 소통될 수 있습니까? 이게 연결 됩니까? 전화로 죽은 자와 통화하려면 010 찍고 몇 번 눌러야 됩니까? 이게 연결이 됩니까? 연결이 안 되지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이런 말 대신에 “네가 구원받으려면 어느 교회에서 어느 목사의 말을 들으라.” 하면 우리는 그 교회에 가서 그 목사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교회 이 근호 목사한테 오면 구원 됩니까? 이게 왜 구원이 안 되느냐하면, 제가 말을 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말없는 쪽에서 어떤 힘이 너희를 살린다는 겁니다. 말이 없는 쪽에서 우리를 구원시키고 우리를 성도 만든다면 말이 없는 쪽이 어느 쪽이냐고 여러분은 묻고 싶지요. 그 쪽이 어디냐 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 쪽에서 나오는 힘이 너희를 성도되게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안 된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지금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누굴 찾아가라든지 아니면 나를 찾아오면 내가 구원해주마,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정말 성도 맞나?” “성도 맞습니다.” “곧 죽어도 성도야?” “성도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말아야 돼.”라는 조로 결론을 맺는 거예요. 사도도 잊어버리고 어느 목사도 잊어버리고 오직 나에게 구원의 능력을 주신 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뿐이라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야 성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교류해서 천국을 가든지 영생을 얻든지 그런 식으로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말을 주고받고 지혜를 주고받는 겁니다. 그것을 끊어라, 그것을 멈추라는 거예요.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죽은 분이 우리를 살리는데 왜 자꾸 산 사람을 찾아가느냐,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얼른 들어보면 사도의 말이 맞아요. 사도의 말이 맞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상식으로 맞는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게 문제가 되잖아요.
죽은 시체를 파낼까요? 예수님 시체가 있어야 파내지요. 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면 깨워서 “주님이여, 한 말씀 해주세요. 그 말씀 믿어서 영생 얻겠습니다.” 이렇게 하겠는데 주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지요. 돌아가신 사람을 어디서, 어느 장소에서 붙드는데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와 교류가 안 됩니다. 산 자는 절대로 죽은 자와 교류될 수 없어요.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과 회담을 하든지 의논을 하든지 하하, 호호, 까불든지 놀든지 산사람은 그냥 산 사람끼리만 놀 뿐이에요. 죽은 사람과는 어떤 흥정이나 거래가 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사도의 이 말씀은 인간의 모든 구원의 자리, 구원의 욕구를 파괴시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구원하고자 하는 그 지점을 공격해서 전부 다 완전히 파괴시키는 거예요. 인간은 죽은 자와 교류할 수 없고 산사람과만 교류하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을 또 다시 유발시키는, 십자가 비극을 또 다시 반복해서 일으키고 또 일으키는 현장일 뿐이라는 겁니다. “목사님, 뭘 해서 구원받습니까?”라고 자신의 구원의지를 정당화시키고 “남은 몰라도 나는 구원 받아야 돼. 나는 천국가야 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저는 구원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이여, 제가 구원받을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세요.”라고 하는 그 모든 현장을, 살아 있는 자가 저희끼리 쑥덕쑥덕 하면서 “이렇게 구원 받습니다.” 하는 그 현장을 죽은 자의 능력이 와서 “어디서 헛짓들이야!” 하고 그 구원의지를 다 파괴시켜 버리는 겁니다.
구원은 산자의 재주나 기술, 이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가 소위 살았다고 여기는 산자의 세계 속에 영향을 미쳐서, 그래서 구원을 해주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쪽에 관여를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산 사람이 인간들, 살아 있는 사람끼리 쑥덕쑥덕 하면서 “구원은 이게 구원이야.” 기껏 해봐야 그것밖에 안되는데 그것은 인간들의 말과 지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실패로 끝날 뿐이에요. 실제로 구원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죽은 자가 우리 인간세계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죽음의 힘이 실렸다는 말이 여러분은 납득이 됩니까? 죽었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은퇴했다는 것,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거예요. 사라진,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돌아가신 분이 이 땅에 영향을 주고 이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것이 과연 이게 사실입니까? 이게 실제에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살아 있는 그 자체가 무능한 자들이에요.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죽음의 힘이 실렸다는 것, 이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은 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힘이 실려 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디 간다니까 베드로가 낌새를 보니 예수님이 아무래도 죽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따라간다고 “예수님,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제 목숨 바치고 주님 가신 곳에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럴 때 우리들 생각은 이래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살아 있던 자가 자기의 숨이 다 끊어지면 그 사람은 죽음의 세계로 간다, 라고 하는 그것이 죽음의 세계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죽음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것 말고 다른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죽음의 세계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냐 하면,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나온 상상의 세계가 죽음의 세계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죽음의 세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적용될 때 나오는 세계가 죽음의 세계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으면서 상상하는 세계, 그것은 조작된 것이고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님의 죽음의 세계란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창세기 2장에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 세계가 죽음의 세계에요.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그 죽음의 세계를 본인의 생각, 본인의 지혜로 그 죽음의 세계를 다 알 수가 없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한 그 죽음의 세계.
쉽게 말씀드려서, 제가 쉽게 말한다고 해서 믿지 마세요. 쉬운 게 아닙니다. 하여튼 쉽게 말씀드려서 천지창조 할 때 이미 선악과를 심어서 죽음을 바닥에 깔았어요. 바닥재를 일단 죽음으로 깔아놓은 거예요. 깔아놓고 그 깔아놓았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 하와야! 너희는 죽음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라는 암시를 준 거예요. 그래서 그 바닥재에서 올라온 나무가 무슨 나무냐, 선악과나무라는 말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악과나무만 죽음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도 죽음에서 올라왔어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는 그 순간 졸지에 생명나무도 못 따먹는 나무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뒤에서 벌써 내통하고 있었어요. 한통속이라, 한통속,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도 따먹고 저것도 따먹으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선악과 따먹으니까 “어디를 넘봐.” 해서 생명나무 길을 차단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바닥재가 있었거든요. 그 바닥재 위에 인간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사실은 죽음이란 것도 몰라야 되고 모르는 채 그냥 에덴동산에서 살아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한계를 벗어났어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서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여기는 한계에서 이젠 죽음과 엮인 그 넓은 범위의 세계로 와버리니 인간은 아무런 이유도 모르는 채, 아무 원인도 모르는 채 점점 더 늙고 돌아가시고 있는 중입니다. 나중에 늙어서 한 80되고 90되어 보세요. 정신없습니다. “한 참 자고 일어나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오늘도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도대체 정신이 없다는 거예요.
연세가 많아지면 다들 그렇게 되거든요. <올드보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유도 모르는 채 15년 동안 군만두 먹은 사람이 나옵니다. 이유도 모른 채로 갇혀서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었어요. 문 밑으로 매일 군만두만 들어오는데 왜 갇혔는지를 몰라요. 인간은 꼭 그 올드보이 같아요. 분명히 인간은 늙어 죽는데, 젊을 때의 그 모습은 가을 되면 늙고 다음 가을되면 또 늙어 가는데 왜 늙는지 왜 죽는지 이유도 몰라요. 이유도 모르는 채 같은 얼굴을 가진 인간들끼리 옹기종기 모여가지고 “우리 한 번 천국 가보세.” “너는 가봤나?” “너는 가봤나?” “아마 천국은 이곳보다는 좋은 곳일 거야.” 이렇게 천국은 상상의 세계,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종교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고생하지만 다른데 가서는 편하게 잘 살게 될 거야.” 누구마음대로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끼리 백날 연구해봐야 해답 안 나옵니다. 죽은 자로부터 소식이 들려와야 하는데 죽은 자로부터 소식이 오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느꼈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배제돼야 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가 듣기에는……, 2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죽음이라 하는 것은 원래 힘이 없는 것이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죽음이 도리어 우리를 영생을 얻게 하는 것뿐만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말라. 그러니까 정말 저와 여러분이 성도가 맞습니까? 성도 맞으면 이제부터 주께서 죽음의 힘이 살아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배제당하고 삭제당하는 경험을 평생 동안 가질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배제당해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여기 볼펜이 있는데 이 볼펜을 내가 던진다? 우리가 아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의 의지가 두뇌에 작용해서 볼펜을 공중으로 던진다고 이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삭제돼야 됩니다. 어떻게 삭제되는가? 이 죽으신 예수님께서 이 볼펜을 던지게 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 심장 뛰는 것, 살아 있는 것, 오늘 아침에도 뭘 먹고 점심에는 묵은지 처리한다고 요리하고 있는데 그 점심때 먹는 모든 것,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죽음의 힘으로 묵은지를 먹게 될 거예요.
발걸음을 세시는 것도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에서 나온 그 분의 능력으로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 발걸음을 걷고 있는 겁니다. 뭐가 삭제됐어요? 내가 합니다, 내가 한다,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삭제당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에게 주어진 아주 특이한 점이에요. 이게 다른 사람에게서는 있을 수가 없는 아주 특이한 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파괴하고 공격하기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이렇게 답변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음을 유발한 그 주변의 일들이 있어요.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여기 이 십자가죽음에 두 방향에서 양쪽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렸기에 돌아가셨고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돌아가셨고 또 이쪽에서는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들의 질서유지책에 방해되기 때문에 인간들이 나서서, 유대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사건이 우리에게 덮쳤다는 말은 이 양쪽의 이야기가 배제되지 않고 양쪽 다 같이, 두 가지 원인이 같이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어떤 현상으로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내 것을 고집하고 모든 것을 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원인을 날마다 생산하는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그것만 있으면 안돼요. 그것만 있으면 지옥 갑니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줬던 그것과 마주치는 자리가 십자가 자리이며 십자가 그 자리가 주께서 나의 이 몸을 주의 십자가 사건이 터져 나오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차용해서 활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나는 내 것으로 인하여 내 인생 살겠다는 그 모든 것을 배제하시는데, 그것을 삭제시키는데 삭제시키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너의 그러한 행동과 태도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구원자가 맥없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원했던 그 사태가 날마다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그렇다면 나는 죄인이기에 가망 없네요.” 하는 거기서 십자가의 다른 면, 바로 그런 죄 인줄 이미 익히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께서 올 수 없는 자를 오게 하셨기에 자기 아들을 우리 대신 내어주셔서 어떤 죄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최종 확정시키는 방식, 그것조차 십자가사건, 십자가 죽으심이 되는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십자가 외에는 알 필요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애에게 밥을 차려주고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밥 먹어.” 할 때 애가 숟가락 들고 밥을 먹습니다. 밥을 보고서 아이가 자동적으로 밥을 먹었느냐, 아니면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엄마의 명령에 의해서 밥을 먹었느냐, 하는 그 두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밥을 보니까 밥 자체가 하는 말이 “나를 먹어야 해. 나를 먹어야 해.” 해서 밥을 먹는다면 엄마가 밥을 먹으라고 한 명령자체가 필요치 않지요.
밥 자체가 어떤 소리를 내고 밥을 먹으라고 막 이야기를 하니까 밥 차려 놓자마자 먹는데 밥 있는 것 따로 그리고 밥 먹는 것이 따로 라면 엄마가 “밥 먹어. 밥 먹으란 말이다. 반찬이 없더라도 밥을 먹어.” 할 때 “에이 씨.” 하고 숟가락 들고 먹는다면 밥 따로, 밥 먹는 것 따로, 가 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자동이라는 것이 없어요. 없고 누가 명령하게 되면 그 명령에 따라서 자기의지를 발동시켜서 밥을 먹는 그런 방식이 이 살아 있는 인간들의 방식입니다.
다시 예를 들면 “여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셔야 구원받습니다.”라고 인간들이 말을 하고 목사가 설교를 하니까 “예, 믿어서 죽어서 천국 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자동적이냐, 아니면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 믿음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지요. 그 다음에 목사님이 또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믿어서 천국에 갔으면 뭔가 고마운 티를 내야지.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사람이 십자가 피로 공짜로 구원 받았으면 십일조나 주일성수 정도는 지켜줘야 사람이지 십자가만 달랑 챙겨놓고 구원받아놓고는 헌금도 안내고 교회도 안 나오고 봉사를 안 하면 그게 인간입니까?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지요. 자, 십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거 믿어 잡수시고 그 다음에 성경에 보면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있으니까, 사랑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성경보라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것도 하세요.”라고 했을 때 교인들이 “예,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그거 불교입니다. 그게 불교에요. 왜 불교인가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한계밖에 몰라요. 뭐든지 시켜야 알아서 하고 시키면 들어서 할 만하면 하는 그것뿐이에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살아 있는 사람 외에 이미 돌아가신 분이 산 사람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렇다면 죽은 분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지요. 아까 말한 대로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이 예수님을 죽인 거잖아요. 그런데 죽은 분이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났으면 그것은 인간이 살려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하고 살로메하고 마리아 셋이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해서 살려냈습니까? 인공호흡하고 심장마사지 하고 다리미같이 생긴 것 두 개 가지고 응급처치해서 살려냈습니까? 아니잖아요. 인간이 기껏 한 것은 뭐냐 하면, 죽이는 것 밖에 못했어요. 죽였는데 사흘 만에 산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능력밖에 있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밖에 있는 분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죽음의 세계를 따로 만들었어요. 그게 진짜 죽음의 세계에요. 그 죽음의 세계에서 힘이 실려서 죽음의 세계가 산 사람의 세계 속에 들어왔다면 들어와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믿음을 발생시켰다면 이 믿음은 우리가 조치할 수가 없는, 빼내고 싶어도 빼낼 수가 없고 취소하고 싶어도 취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믿으라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니까요. 믿으라는 말을 듣고 내가 믿어볼까, 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의 말과 지혜를 끊으라고 했잖아요. 이것은 말과 지혜 이전의 문제라니까요. 오히려 인간의 모든 말과 지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진짜 의미 있는 능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원천적으로 이미 장만되어 있습니다. 그 마련된 힘이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안 믿고 싶어도, 덜 믿고 싶어도 우리에게 믿음을 발생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로마서 8장의 내용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믿음 주실 때 일련의 짜인 스케줄대로 진행시킨다는 것을 작심하시고 믿음을 줬다 이 말이지요. 도중에 우리가 이걸 방향을 틀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자는 말합니다. “주여, 저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너를 구원하는 짓을 했다. 왜, 싫으냐?” “아닙니다. 제가 놀랬잖아요. 어떻게 죽어버린 분이 나를 살리십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을 피해서 일했다.”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면 된다, 하면 된다.”에 의해서 주님이 당했기 때문에 그 ‘할 수 있다.’의 세계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세계이고 지옥가도 할 말이 없는 세계입니다.
내가 한다, 전도한다, 예배한다, 헌금한다, 기도한다, 이 모든 것은 지옥 가는 사람의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모습이에요. 밥 차려 주면 내가 밥을 먹는다, 이것이 지옥 가는 사람의 아주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딱 이에요 딱! 오늘 설교제목은 ‘딱’이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안 해요. 시키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고, 명령 듣고 하는 거예요. 말 듣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최종의미는 뭐냐, 내가 했다, 내가 지시에 따라서 내가 했다는 그 자기의미인데 그 자기의미 때문에 떠밀려서 돌아가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거든요.
그리스도가 다시 죽음을 가지고 왔다는 말은 “네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은 결코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 다음에 봅시다. 믿는 자가 이런 행동을 해야지, 라고 했을 때 …… 신학교 가면 신학생들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집 공부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에베소서 1장부터 4장까지는 복음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 5장부터는 행함에 관한 것이다. 그 증거가 뭐냐, “그러므로, 가 나왔다.” 이런 식으로 많이 하는데 그거 다 엉터리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지를 않아요. 에베소서 1장부터 4장까지는 복음에 대해서 나오고 그 다음 5장부터는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해야 구색이 맞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믿는 것이 이미 자동적으로 믿게 되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행동이요.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구제하고 전도하고, 이것도 자동적으로 나와야 되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믿는 것 까지는 스톱, 그것은 주의 은혜고 그 나머지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성령이 있으니까 성령의 도움으로 내가 한다? 그것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한테 의미를 주는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손에 장을 지질게요. 성령께서는 오직 주님만 증거 하지, 십자가만 증거 하지 “내가 이것을 했습니다.” 하는 쪽으로 성령은 일을 그런 식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마서 8장에서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했겠습니까? “인간아! 그것도 기도라고. 아이고! 기도하는 것 봐봐. 내가 하는 그것이 기도야.” 성령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공로를 남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일을 안 하십니다. 모든 일은, 심지어 죽음으로 도피하는 인간까지 멱살 쥐고 다시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집어넣는 일을 성령께서 하셔요. 날마다 내가 하는 일을 삭제시키는 일을 하신다니까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십자가가 뭐가 보여야, 믿어져야, 어떤 흔적이나 업적이나 실적들이 있어야 십자가를 믿을게 아니겠습니까?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는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나타나실 때 항상 배제하는 쪽으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호수아 7장에 나와요. 여호수아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리고성 치고 난 뒤에 아이성을 칠 때 실패로 끝나요. 실패로 끝나서 여호수아가 어리둥절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우리가 패배하게 합니까?” 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 속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 있다.”한 거예요.
찾아보니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쟁하고 난 뒤에 전리품 중에서 따로 챙겨서 땅속에 감춰둔 거예요.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수 7:21) 비자금 만든 거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어이 찾아내서 아간을 죽였지요? 배제했지요? 그 다음에 아이성 정복 했습니다. 우리가 영생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어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중보자의 공로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는 우리가 자꾸 뭘, 어떤 찌꺼기를 남기느냐 하면, “내가 했습니다. 이번 전도는 내가 했고 이번 헌금은 돈 아껴서 내가 했습니다.” 하고 자꾸 나오니까 주께서 성도에게서 아간 요소를 자꾸 끄집어내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거든 본인이 성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문제점이 이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매개로 하여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자기 행위를 자기에게 가해서 그래서 자기를 천국으로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이 너무 힘들고 고생스러우니까. 제발 이 세상에서 한 80평생 고생하고 그 다음부터는 쉬고 싶은 거예요. 자기 생각에.
그러니까 자기가 너무 가련한 거예요. 그런데 진짜 주님이 소개하는 세계는 뭐냐,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것을 인간이 스스로 취소하거나 회복할 수가 없어요. 한 번 저지른 죄는 인간이 저질렀기 때문에 인간 외부에서 용서를 해줘야 되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자기가 보상하는 해결책은 인간에게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밑에 깔아놓고 그 죽음의 세계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연계되어 있다고 했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생명나무도 못 따먹잖아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니 생명나무가 많다 이 말이지요. 거기서 지금 따먹고 있는 사람들 있거든요. 엘리야, 아브라함, 벌써 제대해서 거기서 따먹으면서 자유형 평형 헤엄치고 있다 이 말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같은 인간인데. 지금 천국 가서 헤엄치고 놀고 있다는 말이지요. 거지 나사로도 아브라함 품에 안겨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무슨 수로 갔지요? 상상해서 갔습니까? 주님께서 뭘 하셨느냐 하면, 이 중보자기능을 삽입하면 돼요. 쉽게 합시다. 여러분이 난방 할 때 밑에 온수배관 깔지요. 그처럼 아브라함 밑에다 피의 배관을 깐 거예요. 그 피 속에는 세상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어린양의 피가 온수 배관을 통해서 온 동네 돌아다니니까 아브라함의 엉덩이가 뜨끈뜨끈 한 거예요.
우리 발밑에 예수님의 피가 온수 보일러를 만들어서 온 통 피가 흐르는 거예요. 피가! 그 피 속에서 용서가 나와서 우리의 지은 죄가 용서가 되니까 구원받는데 그 원리가 뭐냐?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가 서로 내통하면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담이 따먹고 난 뒤에 알았어요. 호작질을 다 해놓고 해결도 안 되는 상태에서 보니까 생명나무는 따먹는 나무가 아니고 못 따먹는 나무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을 책임진 거예요.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은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가지고, 그 아담의 죄를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셔서 그 해결한 덕택에 못 따먹는 생명나무를 하늘나라의 가로수로, 아예 가로수로 만들어버렸어요.
요한계시록 22장 보세요. 온 천지에 전부 다 생명나무에요.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와, 그 이상한 냄새나는 은행나무가 아닙니다. 은행나무가 아니고 생명수, 생명나무가 있다니까요, 생명나무가! 그런데 그 세계는 뭐냐? 인간이 상상 못하는 세계인데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떠밀어서 죽었던 그 죽음의 세계, 죽음의 세계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왜 떠밀었습니까? 잘난 체 한다고 떠밀었잖아요. 잘난 체하고 싶은 이 마음을 가진 인간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 세계가 있더라도 못가는 거예요. 주님이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는 우리를 삭제시켜야지요. 잘난체 하는 것을 삭제시키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입니다. 주의 피의 능력입니다. 피 말고 다른 것은 다 빼라. 심지어 어느 것 까지 삭제하는지 알아요? 우리 자신마저 삭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늙어죽잖아요. 늙어 죽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이 계속 있으면 우리는 자기 행위를 자기 공로와 연관된 의미로 가져와줘요. 이러면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예수님 대신 중보자가 돼버려요. 내가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대책은 내가 나한테 대책 세워서 내가 나한테 그걸 적용시켜서 그래서 나를 구원하는 방식, 그것만 고수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피라는 것은 내가 아는 지혜에 불과한 겁니다. 결국은 나 잘났다, 밖에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밑에 피의 온수보일러 깔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이야기가 설교의 역전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불교신자로 살도록 해 주십니다.
어떻게 하느냐? 불교신자가 뭐냐 하면, “나는 나다.” 역시 이 세상에 나를 위로할 자는 나밖에 없다는 그것 그대로 살게 하셔요. 예를 들면 전도하라, 하는 명령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라, 하는 명령이 오게 되면 기도하게 하십니다. 하게 해 놓고 기도 안할 때보다 기도하면 어떤 보람 같은 것을 느끼게 해요. 기도하는 보람, 기도해서 응답받는 그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그게 바로 불교신자거든요. 그래서 평생 동안 우리를 불교신자를 만들어놓아요. 만들어놓고 밑에는 보일러 깔고. 피 깔아서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나 같은 이 저질을, 나밖에 모르는 이 불교신자를 주님의 피로, 주님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았기에 이 순간 나의 모든 것을 삭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고백을 하게 만들어요.
“평생 동안 교회봉사하고 충성하고, 목사로, 전도사로, 집사로, 평신도로 고생고생 했던 그 모든 것을 일거에 죄악된 것으로 삭제시켜 주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만드시는 거예요, 주께서. 그러니까 전도하시고 헌금 하시고 예배참석하세요. 그것이 헌금이 아니고, 전도가 아니고, 예배참석이 아님을 알게 하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헌금하면서 “이것은 헌금이 아니다.” 전도하면서 “전도가 아니다.” 예배참석하면서 “나는 지금 놀고 있다. 지금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있지 찬양하는 게 아니다.” 그걸 하면서 깨닫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철저한 불교신자, 나는 나의 행함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걸 평생 동안 유지하게 만들어서 밑에는 보일러가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안다고 이것이 몇 시간 가겠습니까? 몇 분가겠습니까? 뻔해요. 돌아서면 “나 지난주일 설교에서 예수님 피 믿게 되었어.” 또 자기자랑 할 것이 뻔한데……. 인간은 어떤 본질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본질도 없어요. 제가 미국에서 설교하는데 교인들에게 물었어요. “여러분, 제 설교가운데 어떤 이야기가 제일 기억납니까?” 하니까 망사스타킹이 제일 기억난다는 거예요. 그 많은 예를 들은 것 중에 하필 망사스타킹이 기억난다는 거예요. 찢어진 망사스타킹이거든요. 주의 능력이 오게 되면 내 모든 것이 찢어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어떤 본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어떤 본질도 갖고 있지 않는데 왜 인간이며 지금 내 몸이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걸 가지고 보충해서 만들어서 주님의 대리인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 주께서 십자가 져야 한다는 예정된 일, 주님이 십자가 져야 주가 되시거든요. 십자가에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주님의 의로 부활되어야 할 그 사건을 미리 생각해놓고 그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셔서 인간은 살았다 하지만 곧 없어질 안개로 만드는 겁니다.
“있었네? 없다. 있었네? 없다.” 있는 것이 사라지면서 그 사라진 빈자리에 주님의 피가 들어가는 방법으로 주께서는 이 세상을 그렇게 운영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보충 대리물이에요. 그냥 누구를 보충하는, 누구의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은 있었던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되어 있는 거예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에 의해서 주의 이름을 믿게 된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요 3:13). 믿게 되는 사람만이 영생 얻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이 어두운 세상에. 그런 기적이 있을 것이다. 이미 죽었던 자가 산자를 살리시는 그런 놀라운 능력이 성도의 내부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그래요. 손대지 말라. 읽어라. 하지만 지키지 마세요.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충 대리물이고 우리는 찢어진 망사에 불과합니다. 말씀은 말씀 주신 분에 의해서 지켜가는 것을 우리가 소급해서 차후에 눈으로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자꾸 내 뜻은 삭제가 되고, 돌아서면 내 뜻은 삭제가 되고. 대체 이것이 무슨 현상이냐는 말이지요. 네가 삭제돼야 피 보일러가 보이지요. 네 행함이 부정당해야 사라진 그 빈자리에 내 발걸음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의 피 희생으로 왔다는 것을 알지요.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은혜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우리는 “이것은 자연현상이야. 이번 일은 내가 했어.” 이렇게 하는 것을 성령에 의해서 삭제당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이미 돌아가신 분이 저희들을 구원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지켜야 구원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불교신자의 행태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평생 동안 이 버릴 수 없는 버릇이 있더라도 밑에는 피의 보일러가 돌아가서 날마다 우리의 자랑을 삭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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